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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들뢰즈 문학비평의 의의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을 중심으로/서동욱.서강大

1. 들어가는 말: 재인식에 대한 비판

2.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비판

3. 본질에 대한 기호 해독: 차이와 반복, 사유의 창조성

4. 기호와 표현의 관계

5. 표현의 문학, 소수 문학의 정치성

6. 결론

 

 

 

1. 들어가는 말: 재인식에 대한 비판

 

들뢰즈 사상을 구성하는 여러 주제 가운데 그의 사상 전반에 걸쳐 중요 성을 가지는 것이 ‘재인식(récognition)에 대한 비판’이다.

재인식이란 무엇 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다시 인지한다 또는 다시 알아본다라는 뜻을 가지 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다시 알아보는가?

기존에 통용되어온 가치 또는 의견을 이론적 개념들을 통한 ‘정당화’의 과정을 통해 알아본다.

그러니 재 인식이란 이미 있어 온 것에 대한 학문적 정당화라 일컬어도 될 것이다.

그 것은 현행적인 것들을 학문적으로 옹호하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수집하는 일이다.

들뢰즈 문학비평 역시 이러한 재인식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재인식 비판이라는 과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비 판의 기원은 들뢰즈가 자신의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오래도록 연구해온 스 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가닿는다. 그러므로 재인식 비판의 성격을 이해하 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를 경유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재인식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데카르트 를 이렇게 표적으로 삼는다.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의 한 구절이다.

 

데카르트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비판은 잘 알려져 있다. 명석 판명함 자 체는 우리에게 대상을 ‘재인식하게’ 할 뿐, 그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주지는 않는다.명석 판명은 본질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단지 본질에 대한 ‘추측’[어림잡기(conjecturer)]만을 허락하는 외관 혹은 외생적[부대적] 특 질들과 관련된다.명석 판명은 왜 사물이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인지를 우 리에게 보여주는 원인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 스피노자의 비판도 다르지 않다.(SPE, 184~185쪽)1)

 

   1) 여러 번 인용하는 문헌은 이와 같이 약호를 제시하며 출전을 명시한다. 인용하는 문헌 의 약호는 참고문헌에서 제시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물들이 어떻게 서로 작용 하고 작용 받는지 명석 판명하게 계산할 수(재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사 물들이 부여받은 어떤 ‘본질’ 때문에 그런 역학이 가능한지는 그저 어림짐 작할 뿐이다.

즉 재인식의 대상인 데카르트의 역학은 완전하게 ‘정당화’되 지는 못한다.

경험(결과)을 명석 판명한 관념을 통해 ‘재인식’하는데 머무는 데카르트 철학에 맞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그런 경험을 ‘발생’하게 하 는 본질, 자연의 힘(원인)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이 논제를 우리는 형이상학자로서 들뢰즈에게 초점을 두고 사변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 비평가로서 들뢰즈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의 방향을 존중하며 예술론의 차원에서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시기 적으로도, 그 정신에 있어서도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병행적인 바로크 미술 은 데카르트적 재인식에 반대하는 사유가 어떤 것인지 잘 예화 해서 보여 준다.

데카르트가 명석 판명함을 기준으로 경험 가운데 재인식하고 있는 대상 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물, 즉 ‘연장’(extension)이다. 데카르트에게는 이런 연장이 경험의 배후에 자리 잡은 실체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선 데카르 트의 이 연장은 근본이 아니라 결과물에 불과하다.

의식되지 않는 미세한 지각들, 즉 ‘어둡고’(obscur) ‘혼잡한’(confus) 것들이 중첩되면서(주름 잡히 면서) 최종적인 결과물로서,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지는 대상, 연장이 생성되는 것이다. 바로크 미술이 이 인식론적・존재론적 과정을 반복한다. 들뢰즈가 라이프니츠를 다루고 있는 책인 󰡔주름󰡕의 인상 깊은 한 구절을 읽어보자.

 

이것이 바로크의 공헌이다: 그림을 기다리는 백악(⽩堊)이나 석고로 된 흰 바탕 대신, 틴토레토, 카라바지오의 작품은 적갈색의 어두운 바탕을 사용하는데, 그 위에 그들은 가장 넓은 그림자를 위치시키고 그림자를 향해 색조를 엷어지게 하면서 직접 붓질을 해나간다. 그림은 지위가 변하고, 사 물들은 배경에서 솟아오르며, 색들은 어두운[obscur] 본성을 보여주는 공 통의 바탕으로부터 터져 나오고, 형태들은 윤곽에 의해서보다는 겹침에 의 해 정의된다.2)

 

사물은,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처럼 애초에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 니다. 그것은 무수한 붓질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요소들이 중첩되면서 결과 로서 생산된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가 말한 어둡고 혼잡한 것들이 최종 적으로 데카르트가 말한 명석 판명한 것에 도달한다.3)

 

     2) 질 들뢰즈, 이찬웅 옮김,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문학과지성사, 2004(Le pli. Leibniz et le baroque, Paris: Éd. de Minuit, 1988), 63~64쪽.

     3)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서동욱, 「감성의 수동적 종합으로서 회화: 바로크의 마니에리 슴에서 베이컨까지」,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문학과지성사, 2014, 326~334쪽 참조. 들뢰즈 문학비평의 의의 497  

 

들뢰즈 철학은 이렇게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가면서 상식, 그리고 기존의 과학이 지닌 고정 관념을 넘어서 버린다. 데카르트식의 재인식에 기반한 과학이 경험 가운데 출현한 사물들 사이의 인과 관계를 규명하는 데 그쳤 다면, 이런 재인식을 넘어서려는 철학에게 저 인과성은 근본적인 인과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다. 바로 자연의 힘, 어둡고 혼잡한 것으로 표현된 자연 의 힘으로부터 사물들이 결과하는 인과성에 비하면 말이다.

 

2.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비판

 

들뢰즈의 문학 비평 역시 상식적인 것을 다시 알아보는 일, 즉 재인식을 비판하고서 생경한 자연, 그리고 근본적인 본질로 나아간다. 이 자연이란 기존의 어떤 개념에도 매개되지 않은 미지의 것, 해독해 내야 하는 기호, ‘징후학’(symptomatologie)의 대상이다.

들뢰즈의 이 징후학에 중요한 가 르침을 준 이는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년 출간 이래 1976년 까지 증보)을 통해 자신이 배운 바를 정리한 프루스트이다.

그러므로 우리 는 이 프루스트론을 출발점에 두고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프루스 트를 배경으로 한 징후학 또는 기호 해독이 들뢰즈가 스피노자로부터 발견 한, 그리고 들뢰즈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 개념 ‘표현’(expression)을 배경으로는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역시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 의 종류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류에서 보듯 기호와 표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그런데 표현은 존재론적 개념일 뿐 아니라 언어적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호 해독이라는 프로그램을 거치지 않 고, 표현 개념 자체가 문학 언어의 기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궁금증 은 우리를 들뢰즈의 󰡔카프카󰡕(1975)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궁극적으로 우리는, 현대문학의 가장 빛나는 전위적인 시도인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문학이 들뢰즈의 수많은 문학 연구에서 왜 가 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론와 카프카론 은 ‘재인식’ 극복, 클리셰 비판이라는 들뢰즈 비판의 기본을 실천하면서, 차이와 반복, 오이디푸스화한 욕망에 대한 비판 등 들뢰즈 사상의 핵심 개 념들을 창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들뢰즈 프루스트론의 성격은 이중적이라는 점부터 말해 두어야겠다.

들뢰즈의 비평적 사유는 그 사유의 모델 자체를 프루스트의 기호 해독으로부터 배운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체가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이 암중모색을 통해 여러 가지 기호(징후)를 창조적으로 해독하는 길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호’라는 단 어는 󰡔찾기󰡕[󰡔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PS, 24쪽).)

동시에 기호 해독이라는 이 창조적 사유 모 델을 프루스트에게서 발견하는 작업은 클리셰로부터 벗어나 프루스트를  새롭게 창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론은 들뢰즈의 비평 론이며 동시에 비평의 실천물이다.

프루스트는 징후학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잃어버린 시간 을 찾아서󰡕에서의 다음 인용은 들뢰즈 프루스트론의 논의 전체를 인도하는 결정적인 문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포크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마들렌의 맛 같은 것 속에 감싸여 있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들’ 혹은 내가 머릿속에서 그 의미를 찾 아내려고 애쓰던 형상(figure)들의 도움으로 씌어진 진리들이다. 내 머릿속 에서는 종탑, 무성한 잡초 등의 형상이, 복잡하게 잔뜩 엉킨 판독할 수 없 는 글씨를 조판(組版)하고 있었다. 이 형상들의 첫째 가는 특성은 ‘내가 그 것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그대로 나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이 그 형상들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표식임에 틀림 없다고 나는 느꼈다. 발부리에 부딪힌 안뜰의 두 포석을 ‘내가 의도적으로 찾아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각과 ‘마주치게’ 된 ‘우연하고도 필연적 인’ 방식이야말로 감각이 소생시킨 과거의 진실, 감각이 벗겨 낸 이미지들 의 진실을 확인해 준다 …. 이 미지의 기호들(내 주의력이 수심을 재는 잠 수부처럼 찾고 부딪히고 윤곽을 그려 보려는, 부조(浮彫)된 것 같은 ‘기호 들’)로 된 내적인 책을 읽는 데에는 그 누구도 어떤 모범을 제시해서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이 독해는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협력조차 제공 할 수 없는 창조 행위였다 …. 순수 지성이 만들어 낸 관념들은 논리적 진 리, 가능한 진리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 관념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다. ‘우리 지성에 의해 씌어진 문자(caractères tracés par nous)가 아니라’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caractères figurés)로 된 책이 우리의 유일한 책 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들이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관념들이 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4)

 

   4) Marcel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Paris: Gallimard(Pléiade), 1954, t. Ⅲ, pp. 878~880. 

 

여기에는 들뢰즈의 기호론 또는 징후학의 핵심적인 생각들이 등장한다. 여러 번 나타나는 ‘형상’(figure)이라는 단어는 해독되어야 할 미지의 기호, 징후를 가리킨다.

이 기호라는 것은 사유를 자극해서 사유가 필연적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 호이다.”(PS, 145쪽)

이런 기호를 프루스트는 위에서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라 부른다.

들뢰즈는 기호의 강제에 따라 시작되는 사유가 가져오는 새로움에 대해 󰡔차이와 반복󰡕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사유에서 ‘본유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또 매번 사유를 언제나 현존했던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제와 강요를 통해 시작하는 어떤 것 으로 취급하는 바로 그런 와해와 더불어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이에 비 하면 재인[재인식]을 위해 벌이는 자발적인 싸움들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가?여기서 싸움은 오로지 … 통용되는 가치들(명예, 부, 권력 등)을 차지 하거나 주무르기 위해 벌어지고 있을 따름이다.(DR, 306쪽)

 

 

기호 해독은 기존에 있었던 어떤 것과도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 이다.

반면 재인식은 기호 해독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기존의 것들을 다시 알아보는 일이다.

기존의 것들에는 앞서 예로 들었던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개념들 같은 유의 것들뿐 아니라 바로 “통용되는 가치들(명예, 부, 권력 등)” 역시 속한다.

그렇다면 문학에서의 재인식이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그리고 이 러한 재인식의 극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문학에서 재인식이란 ‘객관주 의’와 ‘주관주의’로 나타난다. 한 마디로 이것들은 기호에 대한 잘못된 접 근에서 결과하는 잘못된 인식인 동시에 잘못된 인식에 기반하는 작품 경향 이다. ‘징후학’이 견지하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은 이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우 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할 기호들을 방출(放出, émettre)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PS, 23쪽)

여 기서 중요한 것은 물질, 대상, 존재가 기호를 창출하지만, 마치 기원으로 회귀하듯 기호 해독을 통해 기호의 이 방출자들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기호의 방출자는 기호의 ‘의미’가 아닌 까닭이다.

재인식은 해석을 통해 기호를 잘못된 지점에 귀속시킨다. 그러면 재인식의 관점에선 기호가 어떻게 해석되는가?

 

각각의 기호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다시 말해, 한 대상을 ‘지칭하기 도 하며’ 또 그 대상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상적인 것 이란 쾌락과 지금 당장의 즐김과 ‘실제적’이라는 면모를 지닌다.이런 대 상의 길로 빠져 버리면 이미 ‘진실’의 측면은 희생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는 사물들을 재인식(再認識, reconnaître)하기는 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들 을 인식 (connaître)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기호가 의미하는 것을 기호가 지칭하는 존재나 대상과 혼동한다.(PS, 54~55쪽)

 

기본적으로 기호의 의미는, 실물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가 보 여주듯, 그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기호를 통해 그것이 지칭하는 객체적 기원을 다시 알아보는 재인식의 수행에 불과 하다.

기호 해독이 도달하는 의미는 객체와는 다른 데 있는 것이다.

기호의 의미를 지칭 대상에서 찾는 것이 ‘객관주의’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뭔가 를 지각할 때 자연스레 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객관주의’는 어떤 종류의 기호건 닥치는 대로 피해를 입힌다.왜냐하면 객관주의는 어떤 한 경향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경향들을 하나의 복합체로 결합하기 때문이다.한 기호를 그것을 방출하는 대상과 결부시키 고 기호가 베푸는 특혜를 대상의 덕으로 돌리는 것은 지각이나 표상이 처 음에 취하는 자연스러운 방향이다.(PS, 57쪽)

 

 

그런데 기호와 마주쳤을 때 그것의 지칭 대상을 의미로 간주하는 경향은 기호의 진정한 의미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는 방해 요소이다.

객관주의를 이루는 것은 단지 이런 지칭 대상 친화적인 경향만이 아니다.

객관성은 대 상에서뿐 아니라 대화에서도 성립하지 않는가? 대화를 오로지 객관적 의미 가 오가는 영역으로 간주한다면 말이다.

아래 인용은 객관주의에 대한 결 정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찾기󰡕의 주인공은 객관주의 문학의 결점을 잘 알고 있다. … 프루스트의 혐오는 유명하다. 그는, 진실의 발견은 어떤 ‘한담’(閑談) 또는 대화라는 모 종의 방법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생트뵈브(Sainte-Beuve)를 혐오한 다. 이 대화의 방법이란, 어떤 특정인을 가깝게 사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들이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이야기들에서 얻는 가 장 자의적인 정보들로부터 어떤 진실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 기호들을 지시 가능한 대상들과의 관련 아래 해석하며(관찰과 묘사),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랍시고 증언과 의사소통이라는 사이비 기재(잡담과 앙케트)를 내 놓고, 의미(sens)를 분명하고 명시적이며 공식화된 의미(signification, 거창 한 주제들)와 혼동하는 문학은 본래 실망스럽기 마련이다.(PS, 61~63쪽)

 

객관주의는 지칭 대상의 객관성과 대화에서 오가는 말의 의미의 객관성 에서 성립한다.

객관주의는 기호의 의미를 ‘관찰과 묘사’에서 발견하며, ‘증 언・의사소통・앙케트’에 사용된 기호의 액면 그대로의 의미를 그대로 믿어 버린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대표적 사물 ‘마들렌’이 알려주듯 사물은 객관 적으로 관찰되고 묘사된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마들렌의 의미는 특 정한 모양, 그리고 설탕 맛이나 버터 맛처럼 그 과자에 객관적으로 귀속되 는 성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자를 통해 사유가 창조적으로, 즉 이전 에 자발적으로 기억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기억해낸 ‘콩브레’에 있다.

또 한 증언이나 대화나 고백이 진실로 인도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믿음이다. 말은 늘 ‘명시적 의미’(signification)와는 다른, 객관화할 수 없는 ‘의미’(sens)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기호의 진정한 의미를 대상 쪽이 아니라 주체 쪽에서 찾아야 할까?

‘주관주의’ 역시 객관주의만큼이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주관주의를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는 고작해야 연상의 사슬 정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주체는 [객 관적인] 통일성 대신에 이 연상의 사슬로 세계를 에워싼다. 그러므로 주체 쪽으로 관심을 돌려 봐야 대상을 관찰하는 것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다. ‘해석하기’는 대상 못지않게 주체도 분해한다.(PS, 252쪽)

 

주관주의는 기호의 의미를 주관의 사적인 ‘연상’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 은 그야말로 철학이나 예술이 지녀야 하는 어떤 보편성도 없는 폐쇄된 사 적인 세계 안에서 기호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나 ‘자동기 술법’ 같은 문학의 기법이 종종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는 까닭은, 그 기법들 을 잘못 이해한 작가가 주관적인 생경한 풍경을 문학적 성취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관주의는 당연하게도 기호의 의미가 지녀야 하는 보편성 을 얻는 데 실패한다.

 

3. 본질에 대한 기호 해독: 차이와 반복, 사유의 창조성

 

그렇다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잘못을 피해 기호에 대한 해독은 어디 에 도달하는가?

기호 해독은 바로 ‘본질’에 대한 해독이다. 지칭된 대상을 넘어서서, 정식화된 명료한 진실을 넘어서서, 그리고 유사성이나 인접성에 의한 소생(résurrection)과 주관적 연상의 사슬 또한 넘 어서서 본질들이 있다. … 이 본질들은 대상의 속성들을 넘어서 있는 만큼 이나 주관성의 상태 역시 넘어서 있다. 기호와 의미의 진정한 통일을 구성 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기호가 자신을 방출하는 대상으로 환원 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기호를 구성한다. 또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에게 로 의미가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의미를 구성한다.(PS, 68쪽) 기호 안에 감싸여 있는 것은 바로 본질이다. 기호는 대상이 아니라 본질 을 가리키고 있으며, 기호의 의미는 주관의 연상 속에 있지 않고, 주관적인 것과 상관없는 본질이다. 기호로부터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 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본질이란 무엇인가? 들뢰즈가 프루스트에게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예술의 기호’를 보자. 예술작품을 이 해한다는 것은 기호로서의 예술과 맞닥뜨려 예술작품 안에 내재하는 본질 을 해독한다는 뜻이다. 그 본질이란 바로 ‘차이’와 ‘반복’이다. 본질 자체는 (예컨대 문체의 고리들 속에 대상들을 가두어 버리는 식으 로) 본질 자신이 육화되는 장소인 질료들을 개체화시키며 또 규정한다. 뱅 퇴이유의 불그스름한 칠중주와 하얀 소나타 혹은 바그너 작품의 엄청난 다양성 등이 모두 그 예이다. … 다시 말해 본질이란 본래 차이이다.(PS, 82쪽) 작품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차이이다. 차이가 본질로서 자 리 잡고 있으니 작품은 차이의 분화로 인해 다양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성 을 가지지 않는 작품이란 없다. 다양하지 않을 것 같다는 선입견을 줄 수도 있는 미니멀리즘 예술, 가령 필립 글래스의 「포토그래퍼」(1982) 같은 작품 을 보라. 이 작품은 동일하다라고 오해할 수 있는 선율의 점진적인 전개로 이루어지는데, 이 전개는 결국 다양성의 구현이다. 그리고 차이가 없다면 다 양성도 없다. 레몽 루셀이 보여주는 ‘유사동음이의어’(quasi-homonyme) 역 504 서강인문논총 73집 시 이러한 ‘차이’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말 한다. 레몽 루셀의 작품에서 우리는 어떤 구두적(口頭的) 계열들 앞에 서게 된 다. 여기서 전조의 역할은 어떤 동음이의어나 유사 동음이의어(billardpillard)로 돌아간다. … 두 계열들 사이의 차이는 어떤 낯선 이야기들을 통해 메워질 것이고, 이에 따라 어떤 외적 유사성의 효과와 외적 동일성의 효과가 생겨나게 된다.(DR, 273~274쪽) 루셀의 창작 원리는 바로 ‘차이’로부터 ‘의미의 구성’이라 일컬을 수 있 다. 루셀은 그의 유명한 창작론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1935) 에서, ‘billard’(당구대)와 ‘pillard’(약탈자)라는 ‘유사동음이의어’, 즉 거의 동 일하게 발음되는 서로 다른 뜻의 단어로부터,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두 문장을 만들어 낸다. 다른 모든 단어는 같은데, ‘billard’와 ‘pillard’라는 유 사동음이의어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는 아래 문장들이 탄생한다. ‘billard’와 ‘pillard’의 경우 내가 얻어낸 두 문장은 이것이다. ①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billard... 오래된 당구대 쿠션에 초크로 쓴 글씨들 ②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pillard... 늙은 약탈자가 이끄는 무리들에 관한 백인의 편지들 첫 번째 문장에서 ‘lettres’는 ‘글씨들’, ‘blanc’은 ‘초크’, ‘bandes’는 ‘당 구대의 쿠션’을 뜻했다. 두 번째 문장에서 ‘lettres’는 편지들, ‘blanc’은 ‘백인’, ‘bandes’는 ‘전사 부족들’을 의미했다.5)

 

   5) 레몽 루셀, 송진석 옮김,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 󰡔아프리카의 인상󰡕, 문 학동네, 2019, 357~358쪽.

 

루셀은 첫 번째 문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을 기획한다. 서로 다른 의미의 이 두 문장이 분기(分岐)하며 출현토록 하는 근 본 원리의 지위에 놓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유사동음이의어이다. 이것은 한 문장에서는 billard로, 다른 한 문장에서는 pillard로 나타나며 완전히 다 른 두 가지 의미를 만들어낸다. 결국 분기의 근본 원리는 ‘차이’, billard와 pillard 두 가지 의미를, 또는 유사하게 보이는 단어들의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차이이다.6)

 

   6) 루셀의 이러한 문학론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서동욱, 󰡔차이와 반복의 사상󰡕, 서강 대학교출판부, 2023, 163~164쪽 참조. 

 

저러한 본질로서의 ‘차이’는 또한 본질로서의 ‘반복’이기도 하다. 루셀이 보여준 동음이의어로서 차이는 반복의 원리이기도 하다. 동음이의어 때문 에 첫 번째 구절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billard’는 두 번째 구절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pillard’로 반 복된다. 반복은 동일성을 지닌 것(정확히 같은 형태의 구절)이 다시 출현하 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럴 경우엔 동일성이 근본 개념이고 반복을 식별할 차이는 아예 존립하지 못할 것이다. 한 마디로 동일성은 반복을 불가능하 게 한다. 차이로서의 반복은 언제나 ‘변장’(déguisement)과 ‘자리바 꿈’(déplacement)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차이와 반복의 관계를 󰡔프루스 트와 기호들󰡕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반복은 하나의 근원적인 차이에 단계들(degrés)을 구성해 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다양성도 역시 근본적인 반복의 층위들(niveaux)을 이룬다. … 사실 차이와 반복은 뗄 수 없고 서로 상관적인 본질의 두 힘(puissance) 이다.(PS, 83쪽) 차이가 있으면 반복이 있다. 그리고 반복이 다양성을 만든다. 다양성이 삶과 예술이 실현된 모습이라면, 반복은 삶과 예술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 의 조건일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차이와 반복󰡕에는 이런 흥미로운 문장들이 있다. “반복이 새로운 무언가가 실제적으로 산출되기 위한 역사 적 조건이다. 루터와 바울 사이의 유사성, 1789년의 혁명과 로마 공화정 사이의 유사성 등은 역사가의 반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혁 명가들은 어떤 반복을 통해 행동을 시작한다.”(DR, 212쪽) 루터와 바울 사 이에, 로마 공화정의 탄생과 프랑스 혁명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인과 율의 부재로 표현할 수 있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반복의 조건 이다. 사건들 사이의 인과율이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변장과 자리바꿈이 반복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바울은 루터로 변장하고, 루터의 자리로 바 꿔서 생을 반복한다.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 각각의 인 물은 자신이 낼 소리의 높이나 색깔 아마 가사까지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가사가 붙든 지 곡조는 늘 같고, 음고(音高)와 음색이 아무리 달라져 도 후렴(tra-la-la)은 늘 같아진다.(DR, 199쪽) 그리고 이는 사변적 반성 속에 드러나는 반복이 아니라 실천의 조건으로 서 반복이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 공화정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반 복으로서 실천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사건의 반복뿐 아니라, 프루스트에서 주된 주제인 사랑의 반복 역시 같은 형식을 지닌다. “사랑의 반복은 계열적 반복이다. 질베르트에 대한, 게르망트 부인 에 대한, 알베르틴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은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그 계 열 안에서 각각의 항(項)은 미세한 차이를 지닌다.”(PS, 109쪽) 각각의 사랑 사이에는 인과율의 부재, 즉 ‘차이’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전 사랑은 다음 사랑이 실천되기 위한 무의식적 조건이 된다. 들뢰즈 문학비평의 의의 507 여기서 우리는 사유와 본질의 관계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유의 창조성’은 들뢰즈 사상의 핵심에 위치하는 개념이다. 기호 해독을 통해 본 질에 도달하는 사유는 창조적인 것일 수 있을까? 들뢰즈는 말한다. “사유하 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우선적으로 사유 속에서 사유 활 동을 창조하는 것이다.”(PS, 166쪽) 사유 속에서 사유 활동을 창조하는 일 을 사유의 근본으로서 이해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사유가 본질에 관한 사유, 즉 차이와 반복에 대한 사유일 때 그것은 여전히 창조적 이라는 찬사를 가져갈 수 있을까? 본질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고정된 본 질이고, 사유란 이 본질에 대해 이차적인 것이라면, 사유에 대해 창조적이 라는 덕목을 남겨두기 어려울 것이다. 사유란 사유 이전에 이미 있어 온 본 질의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들뢰즈가 말하는 본질의 의미를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유의 창조 성과 관련된 핵심적인 문장을 읽어보자. 사유 활동은 단 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 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 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 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PS, 145쪽) 사유란 기호 해독, 즉 기호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펼치는 하나의 실 천이다. 우리가 살펴본 차이와 반복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본질이 아니 라 기호를 해석하는 행위로부터 유래하는 창조적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차이와 반복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기호 해독 속에서 사유가 실천 하는 방식, 살아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508 서강인문논총 73집

 

4. 기호와 표현의 관계

 

들뢰즈 사상 전반의 배경에 있는 주도적인 철학자는 누구인가?

의심할 나위 없이 스피노자이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기호 해독이라는 사유의 모델 을 프루스트에게서 발견할 때 프루스트의 배후에 있는 철학자는 누구인가? 프루스트를 독점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고전 철학자는 없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는 맥락에 따라서 플라톤, 라이프 니츠, 스피노자와 연결된다.(PS, 23, 72, 168쪽 참조) 그런데 들뢰즈의 기호 해독 개념이 스피노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사유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당연 히 우리는 들뢰즈의 프루스트 비평의 핵심에 자리하는 기호 해독을 스피노 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 스피노자론의 개성 가운데 하나는 이 합리론 계보에 속하는 근대 철학자를 ‘경험주의자’로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영감은 근 본적으로 경험주의적이다.”(SPE, 179쪽)

그리고 이 경험주의적 스피노자를 특징짓는 개념이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스피노자에게서 1종의 인식이며, 따라서 부적합 관념이고, 보다 일반적인 철학 개념을 통해 부르자면 비진 리의 원천이다.

이런 위상을 지닌 기호가 기호 해독의 프로그램 속에서 뭔 가 긍정적인 지위를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합리론자에게 이성은 근본적으로 진리 상관적이다.

반면 경험론자에게 모든 경험적 환경은 이와 반대되는 국면을 증언하고, 경험론자는 ‘가끔’ 진 리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경험론자의 최초의 환경은 비진리로서 ‘기호’이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스피노자의 개성은, 경험론적 환경으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합리론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부적 합 관념인 기호에 대한 해독으로부터 출발해 진리인 적합 관념에 도달하는 것이다.(SPE, 179쪽 참조)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들뢰즈가 스 피노자에게 귀속시키는 ‘존재의 일의성’(univocité) 논제를 이해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일의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속성과 피조물 들의 본질들에 내포된 것으로서의 속성의 동일성을 표현한다.”(SPE, 200쪽)

한 마디로 ‘일의성’은 실체(신)와 유한한 개별자들(피조물들)이 같은 술어를 통해, 즉 동일한 속성을 통해 언급된다는 데서 성립한다.

“스피노자에게 속 성들은 표현적 가치를 갖는 참된 ‘동사들’(verbes)이다.”(SPE, 45쪽) 표현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속성들은 존재론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동사들이라는 점에서 또한 언어적인 것이다.

신의 존재 의미는 피조물의 존재 의미와 다 르다는, 즉 탁월하다는 측면에서 다르다는 존재의 ‘다의성’(équivocité)과 반대로, 일의성의 철학은 신과 피조물의 존재가 같은 술어를 통해 동일하 게 언급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경험 가운데 먼저 기호들로서 나타날 수 있는 유한한 존재자들은 자신 안에 신의 본질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유한한 존 재자들, 즉 피조물들은 신의 본질을 함축하지만, 자신 안에 함축된 바가 신 의 본질이라는 것을 펼쳐 보여주지는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험 중의 유한한 존재자들은 진리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없는 ‘기호들’이라는 지위를 가진다.

요컨대 기호들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이 경우에 ‘함축하다’라는 말 은 더 이상 ‘설명하다’나 ‘표현하다’의 상관어가 아니다.’”(SPE, 176쪽)

스피 노자에게서 기호가 지니는 지위에 대해 이보다 간단하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기호가, 오류라는 경험적 환경을 채우고 있을지라도, 자 연의 산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기호는, 자연을 서술하는 속성을 자신 안에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험적 조건의 영향을 받아 이 기호는 자신의 진정한 원인인 자연의 본질을 처음부터 ‘펼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기호에 대한 해독으로부터 진정한 인식, 본질에 대한 인식 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경험적 조건으로부터 출발해 합리적 인식에 이르는 ‘발생적’ 과정이 필요하다.

위상학적 분류만을 하자면 1종의 기호는 2종의 진정한 인식과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이 발생적 학습의 과정을 들뢰즈는 ‘배움’(apprentissage)이라 일컫는다.

‘수 련’(형성, formation)이나 ‘도야’(Bildung)라는 말로 바꾸어 써도 좋은 이 개 념은 프루스트적 학습 과정을 서술하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한 장의 이 름이기도 하다.(PS, 22쪽 참조)

또한 ‘수련’은 들뢰즈의 경험주의적 스피노 자를 이해하기 위한 열쇳말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수련의 문제의 중요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SPE, 355쪽; 번역 수정)

앞서 설명한 존재의 ‘일의성’은, 이와 상관적인 두 개념 ‘내재성’ (immanence)과 ‘긍정성’(affirmation)을 함축한다.

한 마디로 일의성・내재 성・긍정성 이 세 개념이 들뢰즈의 존재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존재론에서 의 ‘표현’ 사상을 성격 짓는다.

‘내재성’은 자연적 존재에 대해 부가적인 차 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보았듯 자연(신)의 본질이 유한한 개별자들의 본질이므로, 개별자들을 규정하기 위해 플라톤의 이데 아 같은 자연 외재적인 원리, 즉 자연에 대해 초월적인 원리가 들어설 여지 가 없다.

또한 신의 본질과 개별자들의 본질은 결코 ‘부정성’을 통해 기술 되지도 않는다.

신적 본질의 결여라는 부정성을 통해 개별자들이 기술되거 나 개별자들이 지닌 속성의 부정을 통해 신이 기술되는 일은 없다.

부정이 아니라 오로지 긍정을 통해 신과 개별자들의 본질이 기술된다.

‘표현’ 개념 은 이러한 일의성・내재성・긍정성을 통해 신(실체)과 속성들과 개별자들(양 태)이 맺는 관계를 보여준다.

실체의 삼항관계에서, 신은 속성들 속에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속성들 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무제한적 질들을 표현한다.

양태의 삼항관계에 서, 신이 자기 자신을 재-표현하거나, 속성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 신을 표현한다.

즉 속성들은 양태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양태들 은 (모든 속성들을 통해서 하나의 동일한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의 변양들로서) 변양들을 표현한다.(SPE, 412쪽)

핵심은, ‘표현’은 모든 항들의 내재적 관계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신은 실체이지만 그 자신의 속성들과 구별되는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속성들을 통해 표현된 것 외에 별도의 실체란 실존하지 않는다.

즉 속성들은 실체의 ‘실존’을 표현한다. 속성들이라는 개념의 말뜻에서 읽어낼 수 있듯, 그 자 체로 실존하는 속성들이란 없다.

속성들은 개별자들의 존재 속에서 실존한 다.

실존하는 것은 신(실체)이거나 개별자들(양태)이며, 양자는 모두 속성들 을 통해 실존한다.

실체와 양태 각각의 실존이 위계적일 수 없다면, 서로 다르지 않다면, 양태는 실체의 변양(modification)으로서 존재한다.

 

5. 표현의 문학, 소수 문학의 정치성

 

들뢰즈의 프루스트론이 드러내듯 기호 해독이 긍정적인 것일 수 있다면, 기호가 궁극적으로 표현의 질서(자연의 질서) 속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 다. 기호는 경험적 무질서를 구성하지만, 궁극적으로 진리에 가닿는다. 경 험적 혼란을 대표할 수 있는 말이 ‘정념’이고 기호가 그 해석자를 결국 표 현의 질서로 인도한다면, 기호는 ‘정념적 표현’(expression passionnelle)이 라는 말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험주의적 면모를 강조해 말하자면 “󰡔에티카󰡕는 정념적 표현의 형식을 통해 진행되며, 기호에 의해 진행된다.”7)

 

     7) Gilles Deleuze, “Spinoza et les trois ‘Éthiques’,” Critique et clinique, Paris: Éd. de Minuit, 1993, p. 180.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경험적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이 경험적 환경에 던져진 한 인간이 기호 해독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일은 문학의 필연적인 주제일 수밖에 없다.

경험적 환경이 실망스럽게도 진리로 나가는 길을 지체하게 만들고, 그래서 프루스 트가 보여준 것처럼 아주 긴 지체의 이야기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존재의 근본이 표현적이고 따라서 이 존재를 기술하는 언어 역시 표현 적이라면, 기호 해독이라는 우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언어의 표현적 본성 자체에 뿌리를 두는 문학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카프카이다.

카프카가 들뢰즈를 통해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은 “형태 자체를 붕괴시 키는 ‘표현 기계’”이다.(K, 51쪽)

스피노자에 바탕을 둔 존재론적 일의성의 근본은 실체와 양태에 대해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말하자 면, 언어를 주관하는 초월적 원리가 없으며, 개별자들에 대한 자연적 기술 이 곧 신에 대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적 일의성은 단지 존재론에 국 한된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언어론의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당연하 게도 언어는 존재와 상관없는, 덧없이 말의 부피만을 키워가는 수사(修辭) 의 장이 아니며, 존재의 진실은 언어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에게 유일한 언어는 일의성의 언어이다.”(SPE, 410쪽)

이 일의성의 언어를 자신 안의 보석처럼 간직하는 문학이 가능할까?

“일의적 표현들로 이루어 진 철학의 자연적 언어”8)와 친화적인, 초월적 기재가 개입하지 않는 문학 말이다.

 

     8)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1999, 159쪽.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1975년에 펴낸 󰡔카프카󰡕는 1972년에 나온 두 사람의 중요한 정치 철학적 성취물인 󰡔안티 오이디푸스󰡕가 가진 문제의식 의 연장선에 있다.

구체적으로, 억압적으로 작동하는 ‘부성적(父性的) 시니 피앙’이 제거된 언어는 어떻게 가능하며 그 효력은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 을 안내자로 삼아 카프카론은 펼쳐진다.

또한 ‘소수 인민’(minorité)이라는들뢰즈 정치 철학의 핵심 개념이 카프카의 문학 속에서 구체적인 색깔을 가지게 된다. 정치적 변혁의 추동력인 소수 인민은 ‘소수 문학’(littérature mineure)이 라는 형태로 작품 속에서 모습을 내보인다. 소수 문학이란 무엇인가?

“소수 문학이란 소수 언어의 문학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저 언어 속에서 소수가 수행하는 문학을 가리킨다.”(K, 29쪽)

예를 들자면 소수 문학은 영어로 글 을 쓰는 미국의 비주류 흑인들의 문학, 독일어로 글을 쓰지만 독일의 주류 적 언어 및 문화와 상관없는 체코의 유대인, 카프카의 문학 같은 것이다.

“메이저와 마이너는 서로 다른 언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동일한 언어의 서 로 다른 쓰임새를 특징짓는다.

독일어로 작품을 쓴 체코계 유대인 작가 카프카는 독일어를 마이너로 사용함으로써 결정적인 언어학적 걸작을 만들 었다.”9)

메이저 언어는 이렇게 기술된다.

“메이저 언어란 매우 동질적인 구 조를 지닌(표준화된) 언어이며, 불변적인 것, 상수 또는 보편적인 것에 집 중된 언어이다.”10)

 

    9) Gilles Deleuze & Carmelo Bene, Superpositions, Paris: Éd. de Minuit, 1979, p. 101.

   10) Gilles Deleuze & Carmelo Bene, Superpositions, p. 99. 

 

한 언어 공동체 안에서 메이저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그 언어의 주도적인 쓰임새이다.

이 주도적인 쓰임새는 존칭법・의 미・가치 등을 함축하며, 그것들은 문법과 사전을 통해 정체성과 권력을 획 득한다.

메이저 언어는 규범적이며, 바로 이 규범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언어의 마이너 쓰임새를 구현하는 소수 문학은 언어의 메이저 쓰임새에 거 스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성’을 자신의 본성으로 획득한다.

한 공동체 의 주도적 가치를 언어의 메이저 쓰임새가 양육하고 있다면, 마이너 쓰임 새는 그 주도적 가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이의 제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소수 문학이란 없다. 소수 문학은, 탈정치 화된 전위성 내지 낯섦을 통해 예술이 문화의 놀이터 정도로 축소될 위험 성을 본성상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존재론적으로 일의적인 표현 언어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언어의 마이너 쓰임새를 구현하는 소수 문학인가?

들뢰즈가 카프카를 통해 비판의 표적으로 삼으려 한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카프카에 대한 많은 해석 가운데 가장 나쁜 세 가지 주제가 있다.

법의 초월성, 죄의식의 내면성, 언표 행위의 주체성이 그것이다.”(K, 82~83쪽)

이 세 가지는 들뢰즈 카프카론의 철학적 밑그림이 라 해도 좋을 󰡔안티 오이디푸스󰡕가 정신분석에 대해 비판적으로 부각했던 대표적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일단 이 주제들을 요약해 보자. 단적으로 말 해 정신분석에서 언어의 본질은 ‘은유’이며, 그것은 ‘금지’의 법이라는, 초 월적 심급으로 작동하는 ‘부성적 시니피앙’의 개입으로 생겨난다.

금지된 대상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대리자가 바로 은유로서의 언어(상징적 질서)이다.

또한 욕망은 금지된 대상을 향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죄의식의 대상으로서 발견한다. 동시에 상징적 질서 안에서 발화행위가 이루어지는 지점으로서의 주체성, 그리고 발화된 것으로서의 주체성이 출현한다.

카프카 문학의 어떤 측면은 바로 위와 같이 서술된 언어적 질서를 파괴 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카프카 문학은 “전제적 시니피앙에 맞서는 혁명적 분열(schize révolutionnaire)”을 엿보게 해준다고 표현해도 좋겠다.11)

 

     11) Gilles Deleuze, Pourparlers: 1972­1990, Paris: Éd. de Minuit, 1990, p. 38. 

 

특 히 카프카의 ‘동물 소설들’이 그렇다.

핵심적인 구절들을 읽어보자. “카프 카가 자기 방에 처박혀 하는 일은 동물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소설의 본질 적 목적이기도 하다.”(K, 63쪽) “그는 원숭이, 또는 곤충, 또는 개 또는 쥐 가 되기 위해 인간이기를 그만둔다. 동물이 된다. 비인간이 된다. 진실로 목소리, 음향 때문에 동물이 되는 것이다.”(K, 15쪽) 카프카의 소설들에는 시니피앙에 매개되지 않은 음향들이 가득하다. 예 를 들어 「변신」에서 벌레가 된 자의 목소리는 시니피앙에 의한 분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자기의 대답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대답 소리는 틀 림없이 자기 목소리였는데, 거기엔 저음 같기도 한 어떤 억제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찍찍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찍찍거리는 소리는 하고 있 는 말을 다만 처음 순간에만 명료하게 할 뿐, 그 여운은 분명치 않아서 상 대방이 똑바로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12)

그리고 「어느 개의 연구」에 나오는 음악가 개 역시 시니피앙 없는, 즉 이야기도 노래도 아닌 음악을 연주한다. “당시 나는 개라는 족속에게만 주 어졌던 창조적인 음악성에 대하여 미처 아는 것이 없었다. … 그들은 이야 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13)

 

    12)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옮김, 「변신」, 󰡔단편전집: 변신󰡕, 솔, 1997, 112쪽.

    13)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옮김, 「어느 개의 연구」, 󰡔단편전집: 변신󰡕, 솔, 1997, 579쪽. 

    

 

동물들의 이 음악은 시니피앙에 매개된 기존의 언어를 파괴하는 소리이다. “동물 되기 에서 모든 형태는 붕괴되고,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그리고 또한 의미 작용 도 비형태적 질료, 탈영토화된 흐름, 무의미한 기호들에 자리를 내주며 와 해된다.”(K, 24쪽)

부성적 시니피앙이라는 초월적 법, 이 법을 ‘누빔점’ 삼 아 짜인 은유로서의 언어를 카프카의 동물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와해시킨다.

“카프카의 관심을 끈 것은 순수한 음성적 질료이다.”(K, 11쪽)

들뢰즈는 카프카의 동물 변신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풍뎅이처럼 말하 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 정치 그 자체인, 세계의 탈영토화를 작동시킨 다.”(K, 85쪽)

동물의 소리는 부성적 시니피앙 또는 전제적 시니피앙이 직 조한 의미의 영토를 탈영토화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알반 베르크(Alban Berg)의 오페라들이 가지는 의의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페라는 언제나, ‘소리’가,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한 서사에 대해 가지는 하나의 중요한 입장을 나타낸다.

그것이 오페라 의 정체성이다.

인쇄된 예술, 예를 들면 소설은 언어가 어떻게 시니피앙에 매개되지 않은 채 힘을 발휘하는지 직접 보여주기 어렵다.

이런 사정을 염 두에 둘 때 소리 자체가 언제나 언어에 대한 입장일 수 밖에 없는 오페라 는, 언어가 소리로 출현해, 형태를 지닌 시니피앙의 질서를 와해시킬 수 있 다는 것 역시 직접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페라는 순수한 음성적 질료에 관 심을 가지고 있는 카프카의 동물 소설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그의 진정한 조력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알반 베르크의 「보 체크」(1924)와 「룰루」(19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체크」에서 마리가 죽을 때의 비명, 또는 룰루의 비명, 또는 증폭된 시(si)음(音) 등이 있다.

우 리는 어떤 면에선, 카프카에 근접한 음악적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K, 45 쪽)

베르크의 무조음악과 12음 기법 각각을 대표하는 오페라 「보체크」와 「룰 루」에는 여주인공들(마리, 룰루)이 죽임을 당할 때 내지르는 비명(소리)이 있다.

이것은 언어이고, 음악과 오페라의 서사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 지만, 언어적 형태가 부재하는 것, 노래로서의 질서를 가지지 않는 것, 시 니피앙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 표현 개념의 근본 특성은 ‘내재성’이라는 것이었다.

이 내재성의 핵심은 다음 문장으로 일컬을 수 있다.

“표현된 것은 그것의 표현 바깥에서 실존하지 않[는다].”(SPE, 43쪽) 마치 스피노자의 실체가 그 것을 표현하는 속성들 바깥에 실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카프카의 동물들 의 음성 역시 마찬가지다. 음성에서, 표현된 것과 그것을 가시적으로 만들 어 주는 표현은 일의적이며, 전자는 후자 속에서만 실존한다.

이런 표현적 관계에는 은유로서의 언어의 법칙을 주관하는 초월적 시니피앙, 초월적 법 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따라서 법 대신, 표현적 발화를 하는 욕망만이 있 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법이 있다고 믿는 곳에 사실은 욕망이 있으 며, 오로지 욕망만이 있다.”(K, 90쪽) 또는 욕망이 곧 법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욕망과 법은 같은 것이다.”(K, 109쪽)

금지라는 부성적 시니피앙은 초월적 법으로서, 욕망이 자신을 죄지은 욕망이라는 모습으로 대면하 게끔 한다.

표현적 언어에는 이런 초월적 법이 없기에 욕망은 금지와 죄의 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그 자신이 곧 법이 된다.

이는 진정 문학이 가져 오는 정치적 성취로서, 욕망의 해방, 죄의식이라는 내면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가?

“욕망 안에는 아무 것도 심판할 것이 없다.”(K, 93쪽)

이런 욕망으로부터 유래하는 표현의 언어가 발화되기 위해선, 발화 지점 에 주체성이 형성될 이유가 없다.

라캉은 주체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 다.

“대타자의 영역에서 시니피앙이 나타나는 한에서 주체는 태어난다.”14)

발화와 욕망의 주체는 부성적 시니피앙의 상관자로서만 출현한다는 것이 다.

반면 카프카에겐 저 초월적 법이 없으므로 주체가 출현하지 않는다. “카프카에게서 발화는 그것의 원인으로서 언표 행위(énonciation)의 주체 와도, 결과로서의 언표(énoncé)의 주체와도 관련되지 않는다. … 주체는 없다.”(K, 32~33쪽)

요컨대 “모든 위치들은 언표가 그로부터 파생되는, 어 떤 기원적인 ‘나’의 다양한 형태들이 아니다.”15)

오로지 다수적인 익명적 욕망의 다수적인 익명적 발화만이 있을 뿐이다.16)

 

   14) Jacques Lacan, Le séminaire Ⅺ, Paris: Éd. de Seuil, 1973, p. 181.

   15) Gilles Deleuze, Foucault, Paris: Éd. de Minuit, 1986, p. 17.

   16) 들뢰즈는 카프카에 접근한 것과 같은 관점에서, 즉 주체 없는 익명적 발화라는 관점에 서 프루스트 역시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화자와 주인공을 각각 언표 행 위(énonciation)의 주체와 언표(énoncé)의 주체라는 두 가지 주체로 구별해야 할 필연 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별을 할 경우 󰡔찾기󰡕는 주체성의 체계(둘로 나눠진, 분리된 주체의 체계)와 결부될 터인데, 사실 이것은 󰡔찾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체계이기 때문이다.”(PS, 276쪽) 이 문장은 󰡔프루스트와 기호들󰡕 2부 결론에서 가 져온 것인데, 이 결론은 원래 1973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광기의 현존과 기능」이라는 논문으로 별도 발표되었던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1972) 출간 이후 들뢰즈는 이 1973년의 프루스트 논문, 1975년의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두 작가에 대 한 성찰을 공통적으로 ‘익명적 발화’ 문제에 집중하며 진행하고 있다. 그것은 󰡔안티 오 이디푸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심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가타리는 󰡔안티 오이 디푸스󰡕 출간 이후 이 책을 다루는 좌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전개시키지 못한 것은, 언표 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의 단절을 넘어서려는 언표 행 위의 집단동작주들이라는 개념이다.”(Gilles Deleuze, Pourparlers: 1972­1990, p. 35) 󰡔안티 오이디푸스󰡕가 발화의 주체를 전제하지 않는, 다수적인 익명적 발화를 나타내는 ‘언표 행위의 집단동작주들’(agents collectifs)이라는 개념을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타리의 저 진술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다수적인 익명적 발화라는 주제가 이 후 프루스트와 카프카에 대한 거의 동시적인 논의를 통해 집중적으로 심화된다는 것을 예고해 준다. 다수적인 익명적 발화란 단지 발화의 집단성을 가리켜 보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적으로 인격화되지 않은 익명적 다수성으로서의 욕망, 즉 해방 된 욕망을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안티 오이디푸스󰡕 이후 들뢰즈 욕망 이론과 정 치사상의 매우 핵심적인 한 국면을 이룬다. 

 

6. 결론

 

들뢰즈의 ‘문학비평’(critique)은 프루스트와 카프카라는 현대의 가장 중 요한 작가들을 중심에 두고 짜였다.

현대문학의 핵심에 놓인 이 작가들에 대해 비평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들뢰즈는 현대문학에서 비평이 가져야만 하는 위상에 대해 주장한다.

늘 이 비평의 출발점은 이미 통용되는 법칙과 가치, 즉 클리셰를 다시 알아보는 일, 즉 재인식에 대한 ‘비판’(critique)이 다. 예컨대 이런 의혹들과 더불어서 말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소통을 가치 있는 행위로 권장한다고 해서, 객관화할 수 있는 소통의 말에는 우리를 진 실로 이끄는 의미가 자리 잡고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객관주의 비판)

세상 에 가족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욕망도 아버지・어머니라는 주형(鑄型)에 부 어져 불가피한 정체(부성적 법에 대한 죄의식을 수반하는 욕망)를 얻었다 고 믿어야 하는가?(오이디푸스 비판)

‘나’라고 말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 다고 해서, 발화의 기원이 되는 주체성이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주체 개념 비판)

한 마디로, 겨우 우리를 클리셰 속에 잡아두기 위해서 또는 클리셰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문학은 우리 앞에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당연히 그렇 지 않을 텐데도, 문학은 놀랄 만큼 자주 클리셰로 가려진다.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부족한 비평가가, 불행하게도 클리셰를 자신이 따라야 할 ‘이론’으 로 편안하게 추종할 때 그렇다.

그리하여 독자와 작품 모두가 죽어 버린다.

진정한 비평은 문학을 보이지 않게 하는 클리셰의 먼지 낀 유리창을 깨트 려버리고, 우리 자신을 임의적으로 제한하는 개념들을 제거한다.

그렇다면 작품을 창조하는 마지막 심급 또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조하는 심급은 바 로 비평일 것이다.

비평이 예술을 완성하고 마감하는 마지막 말이다.

물론 이 비평의 담지자는 독자와 구별되는 어떤 자나 어떤 기구가 아니라 독자 자신이어야 한다.

독자의 자유가 비평을 창조하고 작품을 완성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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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이 논문은 들뢰즈의 문학비평이 성취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내고자 한다. 문 학에 대한 연구는 들뢰즈 사상에서 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줄곧 문학비평을 자신의 사상을 가시화하는 주요한 길로 받아 들여온 까닭이다. 들뢰즈의 문학비평은 ‘재인식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단적으로 재인식은, 이미 있어 온 견해와 가치를 정당화하는 일이다. 달리 말해 ‘클리셰’를 정당화하는 일이다. 이러한 재인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들뢰즈의 문학비평은, 숨겨진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본질적인 것은, 차이와 반복, 오이디푸스화하지 않은 욕망 등으로 드러난 다. 이를, 들뢰즈의 대표적인 문학 연구인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이 어떻게 보여주는 지 이 논문은 규명할 것이다. 아울러 이 논문은, 프루스트와 카프카라는 독자적인 작가 들의 각기 이질적인 문학적인 성취들을 들뢰즈 사상을 배경으로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 해할 수 있는지 보일 것이다.

주제어 : 들뢰즈, 프루스트, 카프카, 기호, 표현, 문학비평 

 

 

Abstract

The Significance of Deleuze’s Literary Criticism: A study centered on Proust and Kafka

Dongwook Seo(Seogang Univ.)

This paper aims to reveal what Deleuze’s literary criticism achieves. The study of literature has always occupied an important place in Deleuze’s thought. This is because literature is the main way to visualize Deleuze’s thought. In other words, Deleuze’s literary criticism realizes the core of what his thought seeks to achieve. This is the significance of Deleuze’s literary criticism. Deleuze’s literary criticism begins with the ‘critique of recognition.’ Recognition is the act of justifying existing opinions and values. In other words, it is the act of justifying ‘cliches.’ Through this critique of recognition, Deleuze’s literary criticism seeks to reach the hidden essentials. These essentials are difference, repetition, and unsuppressed desire, etc. This paper will examine how Proust and Kafka, the main subjects of Deleuze's literary studies, demonstrate these points. In addition, this paper will show how Proust and Kafka can be understood in a unified manner within Deleuze's thought.

Key words : Deleuze, Proust, Kafka, Sign, Expression, Literary Criticism

 

 

접수일자 : 2025년 7월 11일 심사완료 : 2025년 8월 12일 게재확정 : 2025년 8월 12일

 서강인문논총 73집

들뢰즈 문학비평의 의의 -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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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i.org/10.37981/hjhrisu.2025.8.73.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