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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공(空)의 하나님―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과 원효의 공 사상 비교/이민희 연세大

Ⅰ. 들어가며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은 궁극적 실재이다.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실재에 대한 기준이자 근원으로, 모든 존재(being), 가치, 의미, 진리의 원 천이면서, 모든 성찰과 관상, 찬미의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이해된다.1)

특 히 무(無)의 신비와 존재의 피조성을 가리키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를 따를 때, 피조물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하나님은 “존재 이 전이며, 존재 너머이고, 존재 이후”인 “무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2)

1)  G. D. Kaufman, “God and Emptiness: An Experimental Essay,” Buddhist-Christian Studies 9  (1989), 175.

2)  무로부터 창조 교리와 무의 하나님에 관한 이해의 관계를 성서적·역사적 근거로 설명하는 다음 글 을 참고하라. 손호현, “무로부터의 창조, 무의 하나님: 2세기 바실레이데스의 영향을 중심으로,”  「신학논단」 117 (2024/9), 69.

한편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 5세기 후반~6세기 초)는3) 이러한 신 개념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하나님을 인간 지성이 파악할 수 없 는 무지(無知)의 광휘(光輝) 속에 거하는 분으로 묘사했다.4)

다시 말해 무 란 우리의 인식, 감각, 상상으로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하는 하나님 면모까 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끝내 ‘어떤 것’으로 진술될 수 없는 하나님, 알거 나 볼 수 있는 사물에 빗대어서는 도무지 드러낼 수 없는 하나님을 의미 한다.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없고 실증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나 분명 신 비적 직관에서는 포착되는 면모까지 포함하는 게 무이자, 존재자들 혹은 존재의 절대적 맥락으로 삼기 위해 끄집어낸 언어가 무이다.

이러한 점 에서 무는 역설적이게도 무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5)

3)  디오니시우스는 6세기 전후 시리아에서 활동했으며, 프로클로스의 신플라톤주의가 철학적 환경을 이루던 당시에 “신학과 미학, 진리와 아름다움”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를 여러 저작으로  남겼다. 하지만 이외에 이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많지 않으며, 다만 사도 바울이 아 테네 아레오바고에서 개종시킨 인물(행 17:34)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중세 이후 디 오니시우스로 알려졌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위(pseudo) 디오니시우스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그가 남긴 저작으로는 『신비신학』 (The Mystical Theology), 『신의 이름들』 (Divine Names), 『천상의  위계』 (The 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위계』 (The Ecclesiastical Hierarchy), 열 편의 서간(The Let ters)이 있다. 그밖에 현재 소실된 『상징신학』 (They Symbolic Theology) 등 저작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연구에서는 디오니시우스라 지칭한다. H. U.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a Theological Aesthetics, Vol 2, Studies in Theological Style: Clerical Styles (New York: Crossroad,  1984), 148-149.

4)  Pseudo-Dionysius/C. Luibheid (tr.), “Divine Nams” I (593D), “The Mystical Theology” I (997B),  “The Letter” V(1073A), Pseu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New York, Mahwah: Paulist Press,  1987), 53, 135, 265. 향후 DN, MT, LR로 병기함.

5)  일찍이 다석 유영모는 경계가 없어 한량없이 큰 무의 하나님을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下 (서울: 문화일보, 1996), 321; 안규식은 있음과 없음의 경 계를 허문 유영모의 신 개념을 비실체론적 신관이라고 정의한 후, 이를 개방성과 무규정성, 생성 과 비시원성의 주요 특징으로 설명한 바 있다. 안규식, “다석 유영모의 없이 계신 하나님 연구,”  「신학사상」 197 (2022/여름), 149.

 

이렇듯 디오니시 우스는 ‘있다/없다’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언어만으로는 하나님을 긍 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신학을 전개했다.

이에 비해 불교를 중심에 둔 동아시아 사상은 ‘공’(空, śūnyatā) 개념 을 통해 궁극을 탐구한다.

궁극적 진리는 제법(諸法, sarva-dharma), 즉 세계와 경험을 구성하는 모든 항목(유·무위 포함) 현상 일체가 공하다는 것 이며,6) 여기서 공은 만물에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음을 가리키고 존재는 연기(緣起)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6)  Wonhyo/A. C. Muller, C. T. Nguyen (eds.) Wŏnhyo’s Philosophy of Mind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2), 8; J. L. Garfield, Empty Words: Buddhist Philosophy and Cross-Cultrual Interpreta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2.

나아가 공 자체도 공하다고 여기며 공의 실체화를 차단하기에, 공은 존재와 비존재의 극단을 모두 떠난 중 도(中道)의 진리로서 이해된다.

달리 말해 공을 절대자(absolute being)로 실체화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궁극적’이라는 표현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성립 방식(무자성(無自性)·연기)을 지시하는 말로 한정된다.

이때 공은 독립적 실체로서가 아닌 제법이 그러하게 성립하는 궁극적 방 식의 이름으로서, 궁극적 실재로 사유될 수 있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元 曉, 617-686)는 이러한 공 사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우주 만물 의 근원을 일심(一心)으로 파악했고, 공의 초월성과 일심의 내재성을 통 합함으로써 실상인 절대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닌 일심의 양면임을 설파 했다.7)

이에 따라 원효에게 공은 그저 ‘없음’인 단순한 허무가 아닌 만물 의 근원으로서 공성(空性)이며, 동시에 본각(本覺)의 자리에서 “무루(無漏) 의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한” 상태, 즉 불공(不空)이다.8)

7)  Wonhyo/R. E. Buswell Jr. (tr.),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Wonhyo’s Exposition of the Vajrasamādhi-Sûtra (Kûmgang Sammaegyŏng No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4,  6.

8)  Wonhyo,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91; Wonhyo, Wŏnhyo’s Philosophy of Mind, 236;  Wonhyo/A. C. Muller (ed.) Wonhyo: Selected Works, Collected Works of Korean Buddhism,  Vol. 1(Seoul: Jogye Ordr of Korean Buddhism, 2012), 217; 임상목 · 이석환, “원효 공사상의 본체 론적 해석,” 「동서철학연구」 96 (2020/6), 178.

공이기에 집착이 끊어지고 불공이기에 자비와 공덕이 원만히 발현되므로, 궁극적 방식인 공성의 자리에서 모든 존재가 살아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이러한 의미 에서 원효의 공과 기독교에서의 무의 하나님은 다른 언어이지만, ‘존재를 초월한 궁극’을 논한다는 점에서 상응하는 측면이 있다.

본 연구는 두 전통이 언어와 존재 바깥에서 궁극적 실재를 찾고 있다 는 점에서 출발한다.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디오니 시우스의 부정신학에서 드러나는 무의 하나님과 원효의 공 사상이 가리 키는 공은 의미론적으로 서로 교차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무의 하나 님’을 곧 ‘공의 하나님’으로 주장하려면 어떠한 철학적 조건들을 갖추어야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상호문화적 유비(類比) 해석학에 입각, 무와 공 두 개념 사이에 유비적 동일성이 조건부로 드러난다고 내세운 다.

즉 개념적 맥락과 의미 체계를 교차 분석하여 그 속에서 공통의 구조 를 도출했을 때만, 무와 공이 유비적으로 상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다.9)

디오니시우스와 원효를 직접 비교한 연구는 드문 편이다.

그러나 보 다 넓은 맥락에서 기독교 신비 전통과 불교 공 사상의 접점을 모색한 시 도는 여럿 있다.

20세기 후반 교토학파의 철학자 게이지 니시타니(西谷啓 治)는 니힐리즘과 불교의 공 사상을 비교하면서 ‘절대적 무’ 개념을 다룬 바 있다.

그는 특히 ‘신 없음’의 허무와 공을 대비시키며, 불교의 공 사상 이 니힐리즘을 극복할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았다.10)

또한 아베 마사오(阿 部正雄)는 케노시스(Kenosis) 개념과 불교의 공 사상을 대화시켜 무아(無 我) 신론의 가능성을 탐색했다.11)

9)  R.A. Mall, “Was heisst ‘aus interkultureller Sicht?’,” Ethik und Politik aus interkulturelle Sicht (Amsterdam-Atlanta, GA, 1996), 4; 조해정, “말(Ram Adhar Mall)의 상호문화적 해석학과 문화적  중첩,” 「범한철학」 74/3 (2014/가을), 520-521.

10)  니시타니는 니힐리즘을 신의 죽음과 같이 절대적 가치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허무와 절망의 상 태인 ‘상대적 무’로 규정했고, 이에 대승불교의 공 사상에 기반한 절대적 무를 제안했다. 여기서  공은 텅 빈 공허함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 없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함을 가리키며,  이때 절대적 무는 니힐리즘의 무의미적 절망을 넘어서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진정 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준다. “[공의 장(場)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세계와 사물 의 원류로, 다시 말해 자아가 본래의 자기 터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K. Nishitani/J.V. Bragt  (tr.), Religion and Nothingness (Berkeley; Los Angeles;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 163; 정재현은 우상파괴(iconoclasm)를 통해 종교를 해방하고 그 진정성을 재구성해야 한 다고 주장하면서, 니시타니의 공과 포이어바흐의 투사(projection)를 핵심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 는 두 개념을 접속시켜 종교 내부의 자기 집착/나르시시즘이 낳는 우상성을 비판하고 자기 비움 을 통한 탈종교화를 종교 갱신의 길로 설명한다. “자신을 무화해서 모든 것에 봉사하는 삶, 이게  종교의 존재이유이니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참된 종교는 종교적 인간이 요구하는 종교를 벗어나 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가 종교적 인간에서 시작함을 깨닫고 이를 넘어서기를 구하 는 데에서 그 가능성을 일구기 때문이다.” 정재현, “우상파괴를 통한 종교 해방: 니시타니의 공 (空)과 포이어바흐의 투사를 잇댐으로써,” 「신학사상」 166 (2014/가을), 137f.

11)  마사오는 케노시스, 자기 비움을 일회적 사건이 아닌 신의 역동적 본질로 재해석하면서, 이는 고 정된 실체 없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불교의 공 사상과 깊이 상통한다고 봤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의 유일신적 특성, 즉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을 극복함으로써, 또한 불교와 절대적 무를  궁극의 본질적 기반으로 인식함으로써, 케노틱 하나님 개념을 통해 기독교와 불교 간 공통 토대 를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양의 인격신과 동양의 비인격적 절대자 개념을 통합하려 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A. Masao/C. Ives(ed.), “Kenotic God and Dynamic Śūnyatā,” Divine Emptiness and Historical Fullness: a Buddhist-Jewish-Christian Conversation with Masao Abe(Valley Forge,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5), 39.

서구 신학계에서도 간헐적으로 동양의 사상에 주목한 사례가 있다.

예컨대 영성학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선불교에서의 공 체험을 기독교 관상 전통과 대화시키면서 “어둠의 구름” 전통을 재해석했다.12)

최근에는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가 디오니시우스부터 이어지는 부정신학의 어둠과 불교의 공을 창 조 신학의 맥락에서 비교한 바 있다.

켈러는 부정신학의 하나님 개념에 서 “비어 있음”과 “가능성”의 연결고리를 찾고 이를 통해 불교의 공 개념 과의 대화를 시도했다.13)

이와 같은 선행연구에 이어서 본 연구는 개념의 유사성을 모색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말의 상호문화 해석학을 매개로 서로 다른 언어와 맥락에서 전개된 두 사상을 엄밀한 철학적 틀 속에 비 교하고자 한다.

이로써 각 전통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뿐만이 아니라 신 앙 언어 자체에 대한 통찰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주요 방법론은 말이 제안한 상호문화적 유비 해석학이다.

말 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상을 비교하는 세 가지 모델을 구분하고 비판 했다.

첫째는 동일성의 모델로서, 이 입장은 보편 이성 아래 모든 문화권 의 철학은 동일하거나 완전히 소통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피상 적 보편주의로 이어져 한쪽 전통의 개념을 다른 쪽에 함부로 대입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둘째는 차이의 모델로서, 문화 간 이해는 원천적으 로 불가능하며 각 전통은 고유하고 상호 불가통(不可通)하다고 보는 관점 이다.

이는 비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말은 둘 다 “극단적 허구”라 고 비판하며 제3의 대안으로서 유비의 모델을 제시했다.14)

12)  T. Merton.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 (New York: New Directions Publishing, 1968).

13)  C. Keller, Cloud of the Impossible: Negative Theology and Planetary Entanglemen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5), 67, 110f; 국내에서도 기독교와 불교 간 대화를 시도한 연구들 이 많다. 최근 신은희는 여러 개념을 비교·대조함으로써 두 사상에 가교를 놓았다. 신은희, “참회 의 신학: ‘메모리아’와 ‘포살’에 관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신학사상」 206 (2024/가을), “고독한  죽음의 인식론에 관한 기독교와 초기불교의 대화: ‘절망의 고독사’와 ‘수행적 죽음’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202 (2023/가을), “무아의 신학: 기독교의 카르투시오와 초기불교의 명상적 대화,” 「신 학사상」 200 (2023/봄): 263-290; 임형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기독교적 수사학과 지 눌(知訥)의 선불교 수사학을 진리(수사학의 목표), 역설(방법), 믿음(효과)의 기준으로 비교·대조 했다. 임형권, “말씀(logos)의 수사학과 공(空)의 수사학: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수사학과 지 눌의 선불교 수사학의 비교,” 「신학사상」 195 (2021/겨울).

14)  R. A. Mall, “Was heisst ‘aus interkultureller Sicht?’,” 3; 조해정, “말의 상호문화적 해석학과 문화 적 중첩,” 527.

유비 해석학이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부분적 유사성을 인식하 고, 그 유사성에 근거하여 의미의 가교를 놓는 방법이다.

이때 중요한 전 제는 타문화의 개념은 동일하지도 완전히 이질적이지도 않다는 중용 의 식이다.15)

이때 해석은 “비동일성의 의식, 차이의 의식, 완전한 차이의 부정, 완전한 동일의 부정”의 네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16)

말은 이러한 유비적 접근을 통해 사상들 간 존재하는 “중첩된 구조들”(overlapping structures)에 주목하길 제안했다.17)

다른 전통임에도 일부 문제의식이나 개념 틀이 겹칠 수 있으므로 부분 교집합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는 “양 자 택일”(either/or) 대신 “양자 모두”(both/and)의 태도를 지향한다는 점 에서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18)

15)  Y. Jiehou, “Four Dimensions of Intercultural Philosophy,” What is Intercultural Philosophy? (Washington D.C.: The Council for Research in Values and Philosophy, 2014), 158.

16)  E. George, “Interculturality: Some Philosophical Musings,” What is Intercultural Philosophy?,  59. 17)  R. A. Mall, “Was heisst ‘aus interkultureller Sicht?’,” 3, 4; 조해정, “말의 상호문화적 해석학과 문 화적 중첩,” 520-521.

18)  E. George, “Interculturality,” 61.

본 연구는 이러한 유비 해석학을 원용하고 앞서 제시한 조건부 동일성의 가설을 따른다.

구체적으로, 디오니시우스의 무의 하나님과 원효의 공 개념을 동일시하 지는 않되, 문화적 중첩에 따라 나타나는 유사한 구조와 기능에 대해 논 증한다.

효과적으로 논증하기 위해, 인식론적(궁극적 실재 개념과 인식 방법론), 존재론적(존재론적 이해와 수행 체계), 언어 및 논리적 측면을 교차적으로 살펴본다.

첫째, 인식론적 측면에서는 궁극적 실재에 접근하거나 이를 인식하는 방식을 서로 비교한다, 디오니시우스의 경우 알지 못함의 지 (知)가 핵심이라면, 원효에게는 본각의 지혜를 통해 다다르는 반야(般若) 의 지혜가 중요하며, 둘 다 이분법적 앎을 넘어서는 직관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째, 존재론적 측면이다.

이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이 규정되는 방식을 비교하는 것으로서, 디오니시우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 론적 위상이, 원효에게는 진여(眞如)의 공성이 이에 해당한다.

동시에 인 간의 존재론적 변용(變容)에 대한 진술도 함께 다룬다.

셋째, 언어 및 논 리의 측면이다.

이는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사유와 표현 방식을 비교 하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긍정 언어 사용과 이에 대한 부정(폐기)이 라는 변증법적 논리를 구사한다.

한편 원효는 ‘공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그것은 공이 아니다’라는 식의 이중 부정 혹은 언표 자체의 왜곡을 통해 공의 의미를 전한다.

이러한 비교 기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본 연구는 각 측면 에 따라 디오니시우스와 원효 사상의 내용을 대비하면서도, 동일성도 차 이도 아닌 유비의 지점을 추출 해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앞서 제기한 문 제, 무의 하나님과 공의 교차적 의미를 다층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Ⅱ.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

1. 인식론–‘긍정-부정-초부정’

디오니시우스는 크게는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모든 긍정과 부정을 넘어서 초부정의 단계까지 나아간다. 먼저 긍정의 길(카타파시스, κατάφασις)은 하나님에 관해 긍정적으로 진술함으로써 하나 님을 찬미하고 경탄하는 방식이다. 『신적 이름들』에서 디오니시우스는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 이름, 이를테면 선, 존재, 생명, 지혜, 능력 등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진술한다.19)

이러한 명칭은 모두 피조계에 드러난 19)  “Divine Nams”의 제4장에서 제8장까지 각 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514 神學思想 211집 · 2025 겨울 하나님 속성을 긍정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예컨대 그는 하나님을 만물의 원인으로서 선이라고 부르고 만물에 존재를 부여하는 근원으로서 존재라 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그에게 신학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작업”이기에 온갖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 풍부한 언어로 하나님에게 이름 을 올리는 것은 합당하다.20)

동시에 경험 세계의 모든 개념을 총동원해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신학 언어를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든다.

디오니시우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부정의 길(아포파시스, ἀπόφασις) 로 더 나아가길 요구한다.

긍정 이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나타낸 바 를 토대로 한 불완전한 진술일 뿐이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지 못하기 때문이다.21)

긍정 이름의 의미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적절히 드러 내려면, 하나님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곧 다시 부정해야 한다.

예컨대 하나님을 선이라고 불렀다면 곧바로 ‘하나님은 선이 아니다’라고 진술해 야 한다.

여기서 부정은 하나님에게 결함이 있다는 진술이 아니라, 하나 님은 피조물이 이해하는 바의 선을 넘어서는 분임을 강조하는 수사법이 다.

이처럼 부정신학의 논리는 모든 긍정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 을 드러낸다는 역설에 기반한다.

이러한 식으로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 에게 귀속된 온갖 긍정을 하나하나 부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비유에 의한 표현에서 본래 위치로 돌려놓는 다. 디오니시우스는 더 나아가 하나님은 “어떤 존재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니라고 진술한다.22)

 

    20)  MT III(1032D–1033C), 138f; A. Louth, The Origins of the Christian Mystical Tradition-From Plato to Deny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161.

   21)  P. Rorem, Pseudo-Dionysius: A Commentary on the Texts and an Introduction to Their Influ ence, 2nd ed. (New York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11f.

   22)  MT V(1048A), 141.

 

하나님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존재-비존재의 대립마저 초월한다는 디오니시우스의 강 조이다. 언어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수록 점차 그 한계가 드러나다가  마침내 침묵에 이르듯, 계속되는 부정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닌 지를 자각함으로써, 그리고 그 부정마저 초월함으로써 끝내 하나님이 누 구인지에 접근할 수 있다.23)

하나님에 관한 최고 앎은 하나님이 모든 긍 정 이름을 넘어설 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정 진술까지도 초월한다는 깨달 음에서 온다. 하나님은 만물의 완전하고 유일한 원인으로서 모든 긍정을 넘어서고 또한 그의 탁월하게 단순하고 절대적인 본성으로 인해 모든 한 계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24)

그렇다면 하나님 은 말해진 것을 넘어서 부정된 것까지 초월하므로 이름이 없는 분이라고 도 할 수 있다.25)

이처럼 디오니시우스의 깨달음은 삼중 구조, 긍정-부정-초부정 단 계를 띤다. 긍정 단계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가장 높은 것에서 시작해 점 차 낮은 것으로 내려오고, 부정 단계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가장 낮은 것 으로부터 가장 높은 것까지 다시 올라간다.26)

이러한 상승 끝에는 더는 어떤 긍정도 부정도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침묵과 무지의 경지가 펼쳐 진다. 언어와 사유의 모든 명제를 뛰어넘어 “말문이 막히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게 되는 이 단계는 사실상 부정신학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27)

긍정과 부정의 폭풍 뒤에 찾아오는 침묵, 말해질 수 있는 것도 부정될 수 있는 것도 더는 없는 지점에서 정신은 비 로소 하나님과 만난다.28)

 

    23)  MT III(1032D-1033C), 138f; A. Louth, The Origins of the Christian Mystical Tradition, 159f.

   24)  MT V(1048B), 141.

   25)  DN I.7(596C), 56; P. Rorem, Pseudo-Dionysius, 137.

   26)  Ibid.

   27)  MT III(1033B-1033C), 139; P. Rorem, Pseudo-Dionysius, 204.

   28)  MT I.3(1000B–1001A), 136f; A. Louth, The Origins of the Christian Mystical Tradition, 168. 

 

말하는 것과 그 말을 부정하는 것 둘 다를 초월 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직접 마주할 때, 모든 분별과 개념 작용을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신학 방법론에는 디오니시우스의 신 개념이 그대로 나타난 다.

그의 이해에서 하나님은 언어와 개념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으 며, 필연적으로 인식 범위 바깥에 있는 분이다. 지식의 대상이 아니므로, 알 수 없음 자체로서 이해되는 절대적이고 신비로운 분이다.29)

예컨대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을 넘어설 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교리 자체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분임을 드러낸다.30) 디오니시우스는 이러 한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서에서 모세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리고 감각과 지성을 벗어나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곧 밝은 빛을 뛰어넘은 “참으로 신비한 무지의 어둠”으로 상징한다. “그리하여 [모세는] 참으로 신비한 무지의 어둠 속에 뛰어든다. 그리 고 거기에서 마음에 품었던 모든 지식을 내려놓고 만질 수도 보일 수 도 없는 분께 완전히 둘러싸여, 더 이상 자신도 타인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는 모든 앎의 활동을 쉬는 가운데 지극히 알 수 없는 하나님과 최고로 합일하고, 아무것도 알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넘어 서 알게 된다.”31)

 

무지의 어둠 속에서 “자신도 타인도 아닌 존재”가 될 때, 감각과 지 성은 정지하고 어떤 인지도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 때, 완전한 타자인 하 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디오니시우스에게 어둠이란 빛 부재 의 결과가 아닌 빛을 초월한 어둠이며, 무지란 지식 부재의 결과가 아닌 지식을 초월한 무지이다.32)

 

    29)  Ibid., 167.

    30)  Ibid., 161.

    31)  MT I.3(1001A), 137.

   32)  LR I(1065A), 263; P. Rorem, Pseudo-Dionysius, 8.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만나는 어둠은 무의미한 캄캄함이라기보다,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밝은 지식까지 초월할 때 마주하는 신비한 어둠이다.

초월적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함 으로써 마음을 넘어 앎에 이르는”

하나님 인식이 역설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곧 부정신학이 가리키는 바, 모든 긍정 인식이 소멸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체험이다.

요컨대 디오니시우스의 신 개념에서 하나님은 무한히 초월적이다.

모든 존재와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에 비유될 정도로 규정 불가능하 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는 공허한 무라기보다 인간 이해의 빛을 압도 하는 “찬란한 어둠”이며 이 어둠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과 직접 마 주한다.33)

 

    33)  MT I.1(997B), 135.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 있음으로써만 (즉 무지 를 통해서만) 참되게 알 수 있다고 역설했고, 이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지식의 한계를 극적으로 부각한다.

 

2. 존재론–‘발출-회귀’와 신화(神化, deification)

 

디오니시우스는 일자(一者)로부터 만물이 흘러나오고 다시금 일자로 돌아간다는 신플라톤주의(특히 프로클로스) 세계관을 가져와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전개한다.34)

그에 따르면, 만물은 근본 원인으로서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와 존재하게 됐으며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가도록 창조되었 다.35) 『신적 이름들』 서두에 명시된 이러한 ‘발출-회귀’ 운동은 신적 실재 와 피조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주요 개념이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 님 이름은 사실상 하나님의 “자비로운 발출”에 따른 것이다.36) 하나님이 자기 완전성을 세계에 나누었기에 우리는 그 풍성한 발현을 따라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하향적 발출 은 긍정신학의 토대가 된다. 한편, 피조계는 하나님을 다시 갈망하며 하 34)  폰 발타사르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가 “신플라톤주의적 환경을 기독교화한 것은 그 자신의 신 학적 작업의 부수적 효과”이다. von Balthasar, H. U., The Glory of the Lord, 144-210. 35)  DN IV.10(708A), 79; P. Rorem, Pseudo-Dionysius, 148. 36)  DN II.11(649B), 66. 518 神學思想 211집 · 2025 겨울 나님에게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이 상향적 회귀 운동은 부정의 길과 맞 물린다. 디오니시우스는 긍정-발출로 하나님이 만물 안에 나타났다면, 이제 부정-회귀의 과정을 통해 만물이 하나님에게 돌아간다고 보았 다.37) 요컨대 긍정–발출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다채로운 다원성의 영역 을, 부정–회귀는 그 다원성을 거두고 다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단일성 의 회복을 지향한다.38) 발출-회귀 과정의 정점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신비적 합일이다. 모든 감각과 지성을 넘어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주관적 경험이 아닌 존재 전체가 변화되어 신적 실재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디오니시우스에 게 합일은 신적 사랑에 의해 매개되는 황홀경(ecstasy)에 들어가는 일이 기도 하다. 하나님이 선한 사랑으로 만물을 이끌면, 그 사랑에 응답하고 자 인간은 열정적 사랑(에로스)으로 황홀경에 들어간다.39) 여기서 황홀은 정신을 잃는 혼미함이라기보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탈자(脫自), 곧 자기 를 벗어던지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혼자서 더는 자기가 아니게 되고 온전히 하나님에게 속하는” 경지이다.40) 이렇듯 자 기를 벗어나 하나님 안에 오롯이 놓이는 것, 그것이 합일의 본질이다. 여 기서 정신의 변용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합일의 상태에서 의식과 의지 는 자기 바깥으로 이끌린 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의 활동 (energeia)에 참여한다.41) 합일에 이른 정신은 이미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며, 미리 하나님 나라의 삶에 참여하는 존재로 탈바꿈된다. 디오니 시우스는 이러한 상태를 신화라고 부르면서 부정신학의 궁극적 여정임을 시사한다.42) 37)  P. Rorem, Pseudo-Dionysius, 164f. 38)  Ibid., 135ff. 39)  DN IV.12(709C), 81; A. Louth, The Origins of the Christian Mystical Tradition, 170. 40)  DN VII(868A), 106. 41)  Pseudo-Dynisius, “Celestial Hierarchy,” III.2(165B), Pseu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154. 42)  DN VIII(893A), 112. 이민희 | 공(空)의 하나님 ‐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과 원효의 공 사상 비교 519 다시 말해 부정신학은 인식의 해탈을 통해 존재의 해탈에 이르게 하 는 수행 체계로서의 성격을 띤다.

디오니시우스는 그의 저작 전반에서 정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을 여러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그 길은 인식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과 합일되는 여정이다.

이 과정 역시 ‘정화 조명-완성 혹은 합일’이라는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정화는 하 나님을 향한 여정의 시작 조건이다. 목적은 정신적 실재를 올바르게 이 해하고 인식하는 것, 즉 상대적 무지로부터, 지적 오해와 무지로부터 깨 끗해지는 것이다.43)

이어서 조명의 단계에서 정신은 진리의 빛으로 점차 채워지고, “관상적 이해”에 이르러 성서와 성사(聖事) 같은 “감각적 상징 들”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식과 미덕을 갖추게 된다.44)

그러나 합일의 문턱에 이르려면 이 조명마저도 넘어서야 한다. 지성에 비친 빛 너머의 깊은 어둠 속에 침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합일/완성의 최종 단 계이다.45)

이 단계는 오롯이 하나님에 의해 가능하다. 디오니시우스는 일찍이 스승 히에로테우스가 이 상태를 경험한 바 있다고 언급했다.46) 디오니시우스는 이 과정에 대해, 특히 『천상의 위계』와 『교회의 위계』 에서 성사 및 성서 봉독, 전례와 기도, 묵상뿐만이 아니라 교회 직제까지 를 수행적 요소로 연결하고, 각 요소가 부정신학의 여정에서 맡은 역할 및 그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예컨대 시내 산에 오르는 모세는 전례를 집전하는 주교의 모습을 암시한다.47)

이는 디오니시우스에게 교회의 직 제가 부정신학의 상승을 상징했음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부제들은 정 화하는 직무를, 사제들은 조명하는 직무를, 주교는 완성시키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48)

 

     43)  P. Rorem, Pseudo-Dionysius, 59.

     44)  Ibid., 59, 93.

      45)  Ibid., 113f.

     46)  DN II.9(648A-648B), 65; P. Rorem, Pseudo-Dionysius, 143, 146f.

     47)  Ibid., 190.

     48)  Pseudo-Dynisius, “Eccesiastical Hierarchy,” IV.7(508C), Pseu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238; P. Rorem, Pseudo-Dionysius, 59.

 

그러나 모세의 움직임 자체를 수행자의 모습으로도해석할 수 있다.

모세는 백성을 뒤로하고 거룩한 산에 가까이 접근하는 동안 점점 시끄러운 소리와 감각적 빛을 벗어나 홀로 어둠 속에 들어간 다. 이러한 모습은 수행자가 세속을 등지고 독방에 들어가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모습과도 상응한다.

정화를 통해 세속 군중을 떠나고, 말씀과 성사의 빛을 지나서 묵상에 들며, 마침내 감각적·지성적 활동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디오니시우스의 정 화-조명-완성/합일의 구조에는 전례 가운데 일어나는 신비와 개인기도 속 관상 둘 다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3. 언어 해체로서 침묵

 

디오니시우스는 언어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한 동시에 그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중 운동 속에서 부정신학을 전개한다.

그는 먼저 성서에 계시된 범주 및 개념을 망라해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그렇게 쌓 아 올린 언어의 탑을 스스로 허무는 해체 작업을 수행하고, 마침내 침묵 에 도달한다.49)

 

    49)  D. Turner, The Darkness of God: Negativity in Christian Mysticism (Cambridge; New York: Cam bridge University Press, 1995), 44f.

 

이를 언어의 실패나 소진으로 보기보다 침묵 가운데 하 나님의 광휘를 드러내려는 자기 부정의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디 오니시우스는 부정 언어조차 이미지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선이 아니다’라는 진술은 여전히 선의 이미지나 개념을 매개하 기 때문에 그 부정마저 끝내 넘어서야 할 대상이 된다.

이처럼 그는 긍정 과 부정 양쪽 모두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뒤에 둘 다를 버리는 초언어적 지점을 지향한다.

이 지점이 바로 침묵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무언(無言) 이 아닌, 언어의 자기 해체를 통과해 도달하는 거룩한 침묵, 즉 언어가 드러낼 수 없었던 신비가 직접 나타나는 자리에 대한 경외이다.

공허함  대신 모든 말을 다 한 끝에 찾아오는 충만함에서 “형언할 수 없음에 대하 여 슬기로운 침묵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50) 이때 말과 의미의 이중 성, 기표와 기의의 간극은 사라지고, 정신은 말씀 자체인 하나님과 직접 합일된다.

요컨대 최고 언어는 말 없는 언어, 즉 침묵인 셈이며, 침묵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찬미할 수 있다.

그의 언어관에 따르면, 긍정 언어와 부정 언어는 같은 출발점에서 나 와 상호보완한다.

앞뒤가 모순되어 보이는 대담한 병치의 진술들은 독자 를 신비의 세계로 이끌며, 그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또한 개념의 사슬이 끊어지는 지점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혼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다. 상상력이나 의견이나 이성 이나 지각을 가진 분도 아니고, 말로 표현되거나 생각되어질 수도 없 다. 수나 질서도 크기도 작음도 아니며, 동등이나 부등, 유사나 비유 사의 범주에 놓을 수도 없다. 어떠한 장소에 있지 않고, 어떠한 시간 에도 매이지 않는다. 힘이 있다 할 수도, 없다 할 수도 없다.빛이라 할 수도 없고 생명이라 할 수도 없다.그분은 하나도 아니고, 하나됨 도 아니며, 신성(deity)도 아니고 선함도 아니다. 우리의 이해 방식으 로 볼 때 성자도 아니고 성부도 아니다. 나아가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존재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렇듯 그분을 가리킬 이름도, 인식도 없으며, 어둠도 빛도 아 니고, 오류도 진리도 아니다. 결코 그분을 정의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51)

 

   50)  DN I.3(589B), 50.

   51)  MT V(1045D-1048B), 141. 

 

가장 역설적인 것은, 침묵을 신학의 목표로 강조했던 디오니시우스 가 정작 침묵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많은 글을 남겼다는 사실이 다.

그의 신학은 후대에 『무지의 구름』 저자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c. 1260–1328), 그리고 니콜라스 쿠자누스(Nicolaus Cu sanus, 1401–1464)의 사상에서 새로운 형태로 계승된다.

Ⅲ. 원효의 공 사상

1. 인식론-일심과 삼공(三空)

원효는 그의 만년 저작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에서52) 불교 교 학의 두 흐름인 이제설(二諦說)과 삼성설(三性說)을 모두 수용해 이 둘을 일심으로 융합했다.53)

그리고 존재 일체의 실상인 동시에 만물을 포섭하 는 절대 마음으로서 일심에 입각할 때 모든 대립이 해소된다고 주장했 다. 나아가 삼공을 사유해 이러한 일심의 절대성을 드러내고자 했는데, 원효에게서 삼공은 보살(菩薩) 수행 계위인 십지(十地)를 기준으로54)진공(眞空)을 깨닫기 전인 초지(初地) 이전과 초지 이후로 나뉜다.

52)  『금강삼매경론』은 신라 승려 원효가 불교 경전인 『금강삼매경』을 주해한 저작이다. 『금강삼매경』  자체의 성립 연대, 저자,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7 세기 무렵 중국에서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집필한 시기 역시 확정할  수는 없으나, 『금강삼매경』에 대한 가장 이른 주해서로 평가되는 점을 고려하면 경전의 출현 직 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강삼매경론』에는 원효의 다른 저작들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 (大乘起信論別記), 『이장의』 (二障義))이 인용된  한편, 그의 다른 저작들에서 『금강삼매경론』이 직접 인용된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 을 종합할 때,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만년(51세 이후)에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효/은정 희 · 송진현 역주,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서울: 일지사 2000), 13.

53)  “염정(染淨)의 모든 법은 그 자성이 둘이 없으며, 진망(眞妄)의 두 문은 다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 에 ‘일’이라고 했고, 이 둘이 없는 곳은 모든 법 중의 실체로서 허공과 같지 아니하여 자성이 스스 로 영묘하게 이해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심’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심에서 직관할 수 있는 진 여를 궁극적 실재로 이해한다. 원효,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21.

54)  부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의 수행 단계 가운데 보살의 지위에서 수행하는 열 단계의 수행을 일 컫는다. 그 중 첫 단계인 초지를 극희지(極喜地) 혹은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초지를 수행하 게 되는 순간부터 깨달음이 열리기 시작해 기쁨이 넘치게 된다. 수행을 시작한 이는 차례로 범부 (凡夫), 삼현(三賢), 보살의 지위를 거쳐 궁극에는 부처의 지위에 이른다. 범부에서의 수행은 십신(十信), 삼현에서의 수행은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逈)을 포함한 삼십심이라고 하 며, 보살의 지위에 이를 때는 십지라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원효,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113; 김영미, “원효 수행 관법에 대한 연구,” 「한국불교학」 100 (2021/11), 75; 한 국학중앙연구원, “염주,” “화엄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 cle/E0064775, 2025. 8. 19.

먼저 십지 이전 단계에서는 초지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세 가지 공을 닦아야 하 며, 이를 전삼공(前三空)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세 공은 아공 (我空), 법공(法空), 평등공(平等空)으로서, 각각 보살 수행의 십주, 십행, 십회향 단계에서 증득된다.

반면 십지 도달 이후에는 이미 증득한 깨달 음을 심화·전환하는 후삼공(後三空)이 전개되고, 여기에는 공상역공(空相 亦空), 공공역공(空空亦空), 소공역공(所空亦空)이 해당한다.

요컨대 원효는 초지를 전후로 하여 총 여섯 단계의 공관(空觀)을 제시한 셈이다.

전삼공을 살펴보면, 아공은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없음을 증득하여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경지이다.55)

나아가 존재 일체에 실체적 자아가 없음을 통찰함으로써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 등 능소(能所)의 이원 분별 (가름)을 떠나기 시작한다. 법공은 법(현상) 자체도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56)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겨나며 고정된 자성을 지 니지 않음을 알아차려, 존재에 대한 집착을 더욱 소멸시킨다.

평등공은 자기 중생과 타인의 중생, 나와 남의 현상을 모두 공하게 보아 자타 구별 이 사라진 평등무차별의 경지이다.57)

이로써 초지 직전 단계에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관조하고 생사와 열반의 구별까지 초월하는 지평에 이 른다.

곧 분별심이 완전히 사라진 지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토대가 마 련된다.

이렇게 초지에 들어선 보살은 비로소 공상(空相)의 경지에 이른다.

원 효는 여기서 공한 모습 ‘또한 공하다’(亦空)라고 선언한다.58)

55)  김영미, “원효의 공(空)사상: 금강삼매경론의 수공법(修空法),” 「한국불교학」 97 (2021/2), 231.

56)  Ibid.

57)  Ibid.

58)  Wonhyo,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173.

이는 초지에 들어선 후삼공에서 초기 단계에 체득되는 공성이다.

원효에 따르면, 깨 달음의 참된 경지 자체도 집착할 만하지 않다.

그러므로 진여가 나타난 것인 공상조차도 공하다고 간파해 공에 대한 집착을 멸하는 것이다. 이 로써 깨달음에 따른 최초 변용이 일어나며, 원효는 이를 속제중도(俗諦中 道)의 경지로 설명한다.59)

다시 말해 진리를 깨쳤으되 그 진리를 속제의 세계로 융화하고 현상 일체를 평등한 중도로 보는 경지이다.

이어서 후삼공의 두 번째 단계 공공역공은 ‘공한 것도 다시 공하다’라 는 것으로, 앞서 공상역공 단계를 더욱 심화한 것이다.

공상역공 단계에 서 진을 녹여 속으로 삼았다면 (진리를 중생계로 융합했다면), 이제 반대로 속의 차별 세계 역시 공함을 알아차림으로써 속을 진으로 환원한다.

즉 공상역공으로 드러난 속제중도 자체가 다시 진여의 지혜 작용으로 보이 는 진제중도(眞諦中道)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60)

원효는 이를 마치 “순 수한 금을 녹여 장신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했다.61)

이 단계에 서는 상대적 차별 현상이 공의 이치 안에서 그대로 진리의 작용이 된다.

달리 말해 절대와 상대, 진여와 생멸(生滅)이 둘이 아님을 심층적으로 깨 달아 현상계를 진여의 눈으로 자유롭게 운용하는 지혜에 이른다.

그래서 원효는 공공역공을 인연에 따라 전개되는 차별 현상계의 공성인 의타성 (依他性, 의존성)에 상응하는 단계로 보았다.62)

소공역공은 후삼공의 최종 단계로, 앞의 의타성과 원성실성(圓成實性, 분별과 망념, 집착을 초월한 궁극적 진리, 완전한 진여)이 완전하게 무이(無二) 로 융합된 경지를 가리킨다.63)

59)  Ibid.,174.

60)  Ibid.

61)  Ibid., 173.

62)  Ibid., 174.

63)  Ibid.

쉽게 말해 공해진 대상 자체도 공하다는 깨달음으로, 공 사상의 모든 이분법적 구조가 해체된 절대 평등의 지위 이다.

원효는 이 단계를 일제(一諦)로 표현했는데, 속제중도와 진제중도라는 두 진리가 하나로 융합되어 일법계(一法界)가 드러나기 때문이다.64)

바로 이것이 일심의 완전한 체현이며, 일심의 경지에서는 진 또는 속 어 느 한쪽의 극단이나 중간에 치우치지 않는 무이중도(無二中道)가 실현된 다.65)

이처럼 일심에 이른 보살은 모든 법을 있는 그대로 자유자재로 작 용시키면서도 어떠한 분별이나 집착도 지니지 않게 된다.

곧 지혜와 자 비, 절대와 상대가 하나로 회통한 무분별지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원효가 설정한 삼공의 전후 여섯 단계는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그 핵심은 단계적인 공 이해와 초월을 통해 일심의 절대 평등을 깨닫는 데 있다.

전삼공 단계에서는 차례로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타파하고, 나 아가 자타 평등의 지혜를 함양함으로써 깨달음에 근접한다.

이어 초지에 도달하여 후삼공을 거치는 동안 이미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다시금 언 어·사유로부터 철저히 분해하여(공상역공), 그 깨달음마저 공하다는 통찰 을 얻고(공공역공), 마침내 절대와 상대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경지(소공역 공)에 이른다.

이러한 사유 구조에서 무분별지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원 효에 따르면, 망념을 여읜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오직 무분별지를 증 득한 자만이 상응할 수 있다.66)

이 상태에서는 “이(理)와 지(智)가 평등하 여 능소의 상이 없는 무상의 부동법”이 마음에 나타나고,67) 분별을 떠나 며, 주객의 경계가 사라진다.

여기서 부동은 더 이상 심리가 요동치지 않 는 평등한 정혜(定慧,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지혜로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것)의 경지를 일컫는다.68)

64)  Ibid.

65)  Ibid., 47.

66)  Ibid., 11; 김영미, “원효의 공사상,” 228.

67)  김영미, “원효의 공(空)사상,” 244.

68)  Wonhyo,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269, 291.

이렇듯 원효의 공사상에서 무분별지는 깨달음의 요 체이자, 모든 대립과 차별을 넘어 일심에 도달하게 하는 지혜의 작용으 로 이해할 수 있다.

원효는 삼공 사유를 통해 깨달음 전후의 수행 단계를 공 사상의 심화과정으로 재구성했고, 공을 공허나 허무가 아닌 궁극적 진리로 체계화했 다.

이러한 접근은 다양한 교리가 일으키는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것에 분별이 없어져 평등해지길 바라는 일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존재와 진리가 하나의 마음 안에서 통섭된다는 관점으로 귀결하는 원효 의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2. 존재론적 이해와 수행—수공법(修空法)과 무이

원효의 공 사상 역시 인식론적 통찰에 뿌리를 두면서도 철저히 수행 적 전개를 통해 존재론적으로 완성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대승기신론』의 마음과 깨달음에 대한 논의를 인식 론적 담론에서 수행적 담론으로 옮김으로써, 중생의 마음에 내재한 본각 을 수행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회복하는 실천적 구원론을 펼쳤다.69)

다시 말해 원효는 일심과 본각의 교리를 철학 개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명확 한 수행 단계로 구체화함으로써, 깨달음을 미래의 이상 대신 현재의 실 천 문제로 다루었다.

원효가 제시하는 수공법 핵심은 깨달음 이전에 공을 수행해 번뇌를 제거하고, 깨달음 이후에는 공을 활용해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다.

원효 는 초지에 들어서기 전 보살이 수행해야 할 구체적 실천으로 오공(五空) 을 설파한다.70)

69)  Ibid.,15; 김영미, “원효의 공사상,” 227.

70)  Wonhyo,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172.

 

오공이란 다섯 가지 측면에서 공함을 깨우치는 수행이 다.

욕계·색계·무색계의 삼유(三有), 즉 윤회의 세계 자체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유전(流轉)할 뿐 본성이 고정되지 않으므로, 과거나 미래의 속성을 갖지 않으며 찰나의 순간조차 머무르지 않는다는 내용의 삼유가 공(三有假空),71) 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천상의 육도(六道, 윤회하는 중생들이 업에 따라 태어나는 여섯 가지 세계, 삶의 방식) 윤회가 그림자와 같아 공하다는 육도영공(六道影空),72) 온갖 생멸과 변화 현상의 모습이 한 찰나 도 고정되지 않으므로 공하다는 법상공(法相空),73) 모든 이름과 개념은 단 지 가명일 뿐이며 실체에 대응하지 않기에 언어로 표현되는 분별 또한 공하다는 명상공(名相空),74) 마음과 의식의 의미가 공하므로 분별 내용이 본래 허망하고 공하다는 심식공(心識空)을 알게 되는 것이다.75)

오공을 수행하면 공상에 집착하지 않는 초지에 이르고, 비로소 삼공 이 시작되는 진공에 들어선다.

진공은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린 상태라기 보다 항상이 유지되고 불변하여 결코 공적이지 않은 불공(不空)의 경지이 다.76)

동시에 불공 표현은 진공의 경지에 드러난 참마음이 완전하게 원 만하게 두루 갖춰졌음을 나타낸다.

곧 진공은 공이면서도 공덕 일체를 갖춘 불공의 공이며, 오직 무분별지를 얻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경지이 다.

깨달음 이후에도 수행은 지속되지만, 그 양상은 크게 변용한다.

원효 에 따르면, 초지 이후의 보살은 삼공의 후반 세 단계를 다시 닦아 세 번 의 변화, 즉 공상역공-공공역공-소공역공의 과정을 겪고 마침내 일심을 통달한다.

깨달음 후의 수행은 더 이상 무명을 끊기 위한 관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 과정이다.

이를테면, 공상역공 단계에서 보살은 진리를 깨쳤음에도 공에 머무르지 않고 속세로 들어가 중생을 교 화할 수 있다.77)

71)  Ibid.

72)  Ibid., 173.

73)  Ibid., 122.

74)  Ibid., 122, 266

75)  Ibid., 173, 279

76)  Ibid., 173.

77)  Ibid., 208; 김영미, “원효의 공사상,” 243.

속세의 온갖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진리의 구현으로 바라보고 자유자재한 지혜를 발휘한다.

이어서 공공역공에서는 차별성 에서 벗어나 다시 진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소공역공 단계에서는 진제와 속제가 무차별하게 융합되어 삼라만상의 현상이 곧 진리가 구현된 작용 임을 깨닫고, 존재 일체를 일심의 현존으로 바라본다.

원효에 따르면, 소 공역공의 상태는 “지혜 스스로의 작용이며, 그 작용의 성품은 공”하며, 이 경지에서는 윤회로부터의 해탈은 물론 공으로부터도 벗어난 무이의 경지를 누린다.78)

요컨대 원효에게 공이란 초지 이전에는 존재를 공하게 보는 지혜를 닦고, 이후에는 공한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 이다.

공은 좌관(坐觀) 속의 적멸(寂滅)만이 아닌 일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작용이었다.79)

78)  Wonhyo, Cultivating Original Enlightenment, 236.

79)  Ibid.

원효는 이러한 수행의 변용을 통해 공 사상을 삶의 구체 적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생동하는 지혜로 만들었다.

공을 닦는 법에 서 나아가 공을 쓰는 법까지 통달한 그의 사상은 공 사상의 인식론적·존 재론적 이해와 수행적 실천이 하나로 수렴됨을 보여준다.

3. 언어와 그 너머—언어·개념의 해체와 무차별 평등

공 사상에서 궁극적 진리는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무분별지의 경지 로 나타난다.

전삼공 이후 진입하는 초지는 이미 “취함이 없는 경지”로 서, 그곳에서는 “상 일체가 사라져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다.”80)

분별 망념을 떠난 경지는 언어나 논 리로 진리를 파악할 수 없는 상태, 경험적으로는 깨달은 것이 분명하지 만 말과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 (心行處滅)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81)

80)  Ibid., 122f, 238f.

81)  언어도단은 말이나 언어로는 표현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의 경지를, 심행처멸은 분별하는  마음의 모든 작용이 멈춰 생각조차 미칠 수 없는 경지를 뜻하며, 둘 다 궁극적 진리의 차원을 가 리킨다. Ibid., 94, 123.

원효는 일심과 진공의 진리를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가 개념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늘 상기시킨다.

예 컨대 공상역공은 자칫 공에 머무는 또 다른 집착이 될 것을 경계하는 역 설이다.

이는 언어로 지칭된 공 개념 자체를 다시 공으로 해체함으로써 어떠한 관념적 집착도 남기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언어 와 개념을 소거해 나가면 마지막 소공역공에는 오로지 무차별의 평등만 이 남는다.

원효는 언어 이전의 절대 평등을 자신의 사상 전반에 일관되게 녹여 냈다.

그의 화쟁(和諍) 사상이 그 대표적 예로, 이는 서로 다르게 보이는 모든 가르침이 근원적으로는 조화로운 한 진리를 가리킨다는 사유이다.

공 사상에 있어서도 원효는 이제설과 삼성설, 진제와 속제 등의 대립 관 점을 모두 긍정하면서 모두 부정하는 방식으로 통합했다.

그는 “무엇도 깨뜨리지 않으면서 깨뜨리지 않은 것이 없고, 무엇도 세우지 않으면서 세우지 않은 것이 없다”(無破而無不破 無立而無不立)라고 하여, 상대적 진리 를 모두 수용하되 궁극에서는 아무 집착도 두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82)

논리적 모순 같으나, 이야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참모습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분별지는 직관적 지혜로만 체득될 수 있을 뿐, 언표된 교의는 모두 방편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원효는 『금강삼매 경론』의 서문에서 “이 경[『금강삼매경』]이 말은 교묘하여 하늘의 환중(環 中)과 묘합하고, 의미는 심오하여 땅의 방외(方外)를 넘어선다”라고 평가 했다.83)

여기서 환중은 『장자』 (莊子)에서 유래한 비유로 한가운데가 텅 빈 바퀴의 중심을 의미하고, 방외는 모든 구획을 초월한 바깥을 가리킨 다.84)

82)  Ibid., 47f.

83)  Ibid., 48.

84)  Ibid.

이는 무분별의 궁극적 진리는 모든 언어적 테두리를 초월하며 이 로써 역설적으로 중도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묘법임을 시사한다.

한편, 원효에게 언어와 개념의 해체를 통해 도달한 궁극적 진리는 평등의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평등공을 증득할 때 이미 자타 경계가 소멸 하고, 깨달음 이후 초지에서는 더 심오한 차원에서 유무, 시비 등의 모든 이분법적 대립까지 초월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공역공의 깨달음에 이르 면 차별 현상이 전부 공해져서 자타·주객 분별은 전부 사라진다.

“일심의 법에 따르면 둘이 되는 바가 없으므로, 한 생각이 일어나자 곧 하나의 수 행, 하나의 깨달음”

을 이루는 일미일상(一味一相)의 경지에 이른다.85)

이 러한 평등관은 윤리적으로는 자비의 보편성으로 이어진다.86)

85)  Ibid., 49.

86)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가르침이 모두 일미를 말함”이라 하여, 결국 모든 법이 지향하는 바는 일 심 평등의 일법계를 강조했다. Ibid., 68, 246.

모든 존재 가 한마음의 현존이라면, 어느 하나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 없고, 어느 하나 업신여길 것이 없다.

원효가 깨달음 직후 곧장 중생을 교화하는 길 을 택한 것도, 그가 본 평등의 진리가 필연적으로 무차별한 자비의 실천 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원효의 공사상은 언어와 논리의 한계를 철저히 인식하면서도 그 너머의 절대 평등을 설파한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언어를 사용해 교리를 해석했지만, 동시에 언어의 집착을 부수고 참된 진리는 분별이 없는 평등임을 일깨웠다. 그 결과, 공 사상의 정점에서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대자유의 경지가 펼쳐진다.

어느 것도 집착하지 않고 어느 것도 배격하지 않는 무분별지가 그것이다. 원효에게 공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라기보다 직접 체득되어야 하는 무차별의 실상이었다.

또한 실 상을 깨달은 이는 곧 일심의 자비를 한량없이 구현하게 된다.

이처럼 언 표적 집착을 벗어난 원효의 무분별지의 무차별 사상은 모든 존재를 평등 하게 수용하는 지혜와 자비의 정신으로 귀결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Ⅳ. 상호문화적 교차 해석

1. 인식론 비교

이제 무의 하나님과 공 개념을 비교해 보자. 우선 디오니시우스는 하 나님을 존재와 지식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로 진술한다.

감각적·지성적 범주를 모두 넘어서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자도 아니기에 일견 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자연 만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존재를 넘어 서는” 하나님은 만물의 근본 원인이지만 정작 만물과 동질적이지는 않 다.87)

만물이 그로부터 발출하나 그러한 유출의 다양성 가운데서도 본연 의 일자성을 잃지 않고 충만하다.88)

이러한 면모는 언어로는 규정될 수 없는 초월적 신비로서의 신 개념을 제시하며, 부정신학에서 하나님은 모 든 긍정 이름을 벗어난 무명의 신으로 이해된다. 한편 원효에게 공이야 말로 궁극적 진리이다.

그에게 공은 허무가 아닌 만물의 근원인 일심의 본질적 속성이고, 현상 일체의 실상인 진여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현 상 일체를 조건 지어진 공으로 파악함으로써, 만물을 포함하되 특정한 존재에 한정하지 않는 공 개념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 신학의 무의 하나님과 불교 철학의 공은 표면상 이질적 어휘 이지만, 완전한 차이도 완전한 동일성도 아닌 상호문화적 중첩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말의 상호문화 해석학에 따르면, 이러한 중첩은 타전통과의 유비적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다.89)

87)  DN II.10(649A), 66.

88)  DN II.11(649B), 66; P. Rorem, Pseudo-Dionysius, 144

89)  조해정, “말의 상호문화적 해석학과 문화적 중첩,” 519.

두 전통 모두 언어와 개념을 넘어서는 궁극적 실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의 하나님과 공 사이 를 유비적으로, 조건부 등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인식 구조의 유사성도 따져볼 수 있다. 디오니시우스의 신학 은 삼중 구조를 지닌다.

우선 성서와 전통에 따라 하나님께 온갖 긍정 이 름을 부여하는 긍정신학, 이어서 그 모든 이름을 차례로 부정하는 부정 신학이 펼쳐진다.

나아가 부정은 단순히 부정에 머무르지 않고 부정마저 부정함으로써 언어와 사유의 작용을 완전히 멈춘 침묵의 신비에 도달한 다.

즉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긍정도 진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이 를 차례로 지워나가되, 부정 자체도 하나의 규정으로 간주해 끝내 이 부 정조차 초월한다.

성서에 계시된 가장 높은 개념에서 시작해 가장 낮은 비유까지 긍정한 다음, 다시 가장 거친 이미지부터 최상의 개념까지 점 차 부정하고, 결국 무지의 구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삼중 구조 는 원효가 해석한 삼공 구조와 유비적으로 상응하는 면이 있다.

원효는 깨달음의 깊이에 따라 전삼공과 후삼공을 설파한다.

이 구조에서는 초지 의 깨달음 이전 분별 세계가 공에 의해 소거되고 평등공 이후에는 공에 대한 집착까지 소거돼 절대 평등의 공성에 이른다.

두 사유 모두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이며 분별없는 경지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이르는 과정 을 삼중 도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밟아야 할 인식·실천의 궤적을 체계화하고 있다.

물론 내용의 차이는 분명하다. 부정신학의 삼중 구조는 유일신 신앙 과 계시 전통이라는 맥락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계, 특히 정신의 합 일을 지향하는 반면, 원효의 삼공은 연기론과 식론(識論)의 불교 맥락에 서 법성의 깨달음과 중생의 번뇌 소멸을 목표로 한다.

그럼에도

‘모든 명 제를 부정하여 결국 무한자와의 합일에 이름’과

‘모든 상을 공하여 결국 일심의 평등에 돌아감’

이라는 도식은 구조적 동형성을 보여준다.

말의 용 어로, 기독교와 불교의 두 사유는 “유적 개념의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두 종류의 문화들이지만, 맥락적인 문화 전통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그리고 상위 개념을 통해서 유사성으로 드러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90)

90)  조해정, “말의 상호문화적 해석학과 문화적 중첩,” 521.

2. 존재론적 이해와 수행의 비교

발출-회귀에 의한 합일과 수공법 및 일심 회귀를 비교한다.

디오니 시우스의 신학에서 우주는 일자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간다

여기서 신적 발출은 선현현(善顯現)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즉 하나님이 넘치는 풍요로 자기의 선과 존재를 밖으로 흘러나오게 함으 로써 만물이 창조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신성의 통일성은 손상되지 않으며, 다양한 피조물도 그 근원인 하나님을 향해 귀환하도록 지향되어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 우주론적 순환 구조를 빛에 비유한다.

최고선 인 하나님으로부터 비쳐 나온 빛이 만물을 비추고 다시 빛의 근원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조계는 본래 “은밀한 어둠”인 하나님 께로 회귀하여 일치를 이루는 것이 존재 목적이며, 정신 역시 그 신적 어 둠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화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한편 원효의 존재론은 일심론에 입각해 전개된다. 원효는 만물을 일심의 현존으로 본 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개별 마음이 한 찰나에 일어날 때 모든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삼라만상이 본래 둘이 아니게 되며, 이것이 곧 일심의 경지이다.91)

91)  김영미, “원효의 공사상,” 232.

이러한 존재론 아래 제시된 수공법은 중생들이 모 든 집착과 분별을 비워 일심을 깨닫게끔 이끄는 수행 체계이다. 결과적 으로 일심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점에서, 원효의 깨달음 체험은 디오니시 우스가 말한 바

“더 이상 자신도 타인도 아닌 존재가 되어…지극히 알 수 없는 하나님과 최고로 합일하고, 아무것도 알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넘어 서는”

신비의 경지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유한한 자아가 소멸되고 무한한 절대와 직접 접촉하며, 이로써 이분법적 구조를 넘어서 직관적 깨달음에 다다른다.

다만 디오니시우스에게 그 절대는 하나님이 고 원효에게 그것은 공성이라는 본질 차이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유비해석학에서 보면 발출-회귀 구조와 일심론적 우주관은 ‘새로운 지식 획 득을 위한 추론의 제공’이라는 상위 개념에서 중첩되는 유비성을 지닌 다.92)

92) 이미 주어진 사실을 반복하거나 논리적 형식을 적용하는 대신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이 마주할  때 생겨나는 차이와 중첩의 긴장 속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를 열어내는 해석학적 실천 을 가리킨다. 말은 인도 논리학과 서양 논리학을 예로 들어, 귀납과 연역이라는 상이한 방법론에 도 불구하고 두 전통 모두 새로운 앎을 산출하려는 추론 체계라는 점에서 중첩된다고 보았다. 다 시 말해 문화적 차이의 벽을 허물지 않으면서도 그 차이를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는 앎의 가능성을 생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정화–조명–합일의 수행 체계와 삼공 수행의 측면에서도 따져볼 수 있다.

원효에 따르면, 초지 이후에 보살은 곧장 열반에 머무르지 않 고, 중생계로 들어와 삼공의 수행을 지속함으로써 세 번의 변용을 완성 해야 일심을 원만히 통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초지는 시작에 불과하며 그 후로도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완전한 불과(佛果)에 이르러야 한다.

이 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의 심화에 비견될 수 있 다. 즉 첫 합일 체험 이후에도 끊임없는 정화와 조명의 반복을 통해 더욱 깊은 일치로 들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예컨대 에로스를 지닌 정신은 합일을 향해 심화된 사랑의 여정으로 끝없이 나아가야 한다.93)

원효의 보살 역시 자비의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심화시켜야 한다.

특히 공은 자 비의 공이이므로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94)

93)  MT I.3(1000D-1001A), 137.

94)  김영미, “원효의 공사상,” 220f, 249.

이러한 맥락 에서 수행적 변용의 유비를 논하면, 두 전통에서는 합일/깨달음의 체험 이 존재의 근본적 변혁을 초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마음의 변용은 존재론적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디오니시우스의 경우는 인간이 창조주와 구별되던 상태에서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존재론적 경 계가 허물어지는 신화의 변화이며, 원효의 경우는 분별심을 지닌 중생이 무분별지의 불성을 드러냄으로써 마음 자체가 본체와 상응하게 되는 무 이의 변화이다.

둘 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 상태로 이행한다는 점에서 유 비적이며, 궁극적으로 구원/해탈이라는 목적으로 수렴한다.

반면 차이도 있다.

합일은 언제까지나 인격적 하나님과의 관계적 합 일일 뿐 인간 본질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신성과 연 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깨달음은 본래적 자기 본성(불성, 법성)을 완전히 자각함으로써 무명에 기반한 허망한 자아가 실질적으로 사라지는 변화로 이해된다.

요컨대 합일 이후에도 하나님-피조계의 구분을 암묵 적으로 전제하는 디오니시우스와, 깨달음 이후 일체가 공임을 자각하여 자아 자체의 허구성을 없앤 원효 사이에는 존재론적 여백이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차이에도, 정신/마음의 변용을 통한 존재론적 초월이라는 큰 그림에서는 두 사유를 상호보완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 신비 전통은 깨달음 이후 중생 세계로 회향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의 이상을 통해 윤리적 함의를 숙고할 수 있고, 반대로 불교 전통은 하나님 과의 개별적 관계 속에서 합일을 서술하는 기독교의 문법에서 깨달음의 인격적 체험을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을 것이다.

3. 언어와 그 너머의 비교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은 언어 자체의 해체를 수반한다.

그는 하 나님에 대한 모든 언어를 차례로 부정함으로써, 언표될 수 없음 자체를 밝히고자 했고, 이에 따라 개념 대신 침묵이 남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러한 언어 해체의 태도는 개념 해체에 상응한다.

현상 일체는 연기에 의 한 것이므로 공하며, 마음이 만드는 모든 개념은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예컨대 원효는 유(존재)와 공(비존재)이라는 대립 개념도 사실상 집 착된 관념일 뿐 결국 동일한 진여로 회수됨을 강조한다.95)

95)  김영미, “원효의 공사상,” 229f.

이러한 수행 을 통해 무분별지에 다다른 이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고 모든 개념 을 초월한 자리에서 연민과 자비를 실천한다.

이상에서 볼 때 디오니시 우스의 침묵의 신비와 원효의 평등한 공 체험은 모두 언어적·개념적 분 별의 소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전통 모두 언어를 중요하게 여기 면서도 언어의 한계를 철저히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해의 접점을 이룬다.

디오니시우스는 성서에 계시된 수많은 하나님 이름을 해석하고 사용한 동시에 모든 이름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지향했다.

원효는 불교 교리 체 계를 섭렵하고 통합하면서도 일심의 자리에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방 편적 언어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디오니시우스에게 최후의 진리는 “은밀 한 침묵” 속 말씀으로, 원효에게 최후의 진리는 무분별지로 나타났다.

디오니시우스와 원효 사상의 언어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부정의 종착점과 평등의 궁극성은 각각 기독교와 불교에서 진리를 가리키는 독 특한 표지이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의 경우 “말할 수 없음” 뒤에 여전히 말하는 주체와 대상(하나님)의 신비로운 합일을 상정하지만, 원효는 “무 분별”을 통해 애초에 말하는 주체와 대상의 실체가 공함을 드러낼 뿐이 다.

이러한 차이는 불교 해탈과 인격적인 기독교 구원의 차이와 연관되 나,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될 여지도 다소 있다. 기독교 신비신학은 불교 의 평등공의 지혜를 참조함으로써 합일의 체험이 존재론적 평등의 깨달 음과 통한다는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고, 불교는 기독교의 침묵 전통을 통해 말 너머의 성스러움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96)

96)  실제로 켈러는 부정신학과 불교 공 사상 모두에서 “관계 자체의 심연”을 읽어내면서, 두 전통의  만남을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C. Keller, Cloud of the Impossible, 84.

한쪽의 침묵 은 공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채 단순한 논리적 담론으로 전락할 위 험을 경계하게 한다.

반대로 다른 쪽의 평등한 지혜는 신비가 자칫 무분 별하게 남용되는 것을 막고, 침묵의 자리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침묵은 평등의 깊이를 더해주고, 평등은 침묵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 준다.

4. 종합 논의—등치 가능성, 차이의 보존

물론 두 전통의 실질적 차이도 잊지 말아야 한다.

디오니시우스와 원 효의 사유는 각자의 종교 체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기독교 신 비신학은 삼위일체, 성육신, 은총 등 일련의 교리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불교 공 사상 역시 윤회, 업, 해탈 등의 교설과 더불어 의미를 지닌다. 따 라서 ‘무=공’의 논의는 이러한 배경 교리를 고려하지 않고 진행될 때 심 각한 맥락 단절을 일으킬 수 있다.

가령 하나님을 말하면서 윤회나 업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불교 철학자에게 공허하게 들릴 수 있고, 공을 논하 면서 창조주의 인격성 개념을 배제하는 것은 신학자에게 근본적 결핍으 로 보일 수 있다.

요컨대 차이를 정리하면,

첫째, 기독교의 무는 인격적 무, 불교의 공은 비인격적 공이다.

전자는 관계적 의미를, 후자는 비인칭 적 진리를 강조한다.

둘째, 무의 개념은 세계의 창조자에 대한 신앙에서 출발하고, 공의 개념은 세계의 무자성에 대한 지혜에서 출발한다.

전자 는 하나님-피조계 구도를, 후자는 절대계-현상계 구도를 전제한다.

셋 째, 무의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은 기도와 은총의 신비에 있고, 공의 진리 를 추구하는 길은 참선과 반조(返照)와 같은 수련에 있다.

전자는 인격적 체험을, 후자는 통찰을 비교적 앞세운다.

무의 하나님은 사랑과 의지를 지닌 인격적 하나님의 초월성을, 공은 지혜와 자비로 드러나는 일법계의 공성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두 사상은 분명히 구별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과 공은 궁극적 실재를 가리킨다 는 점에서, 조건부 등치 가능성을 논할 수 있다.

또한 사랑의 본질이 자 기 비움(케노시스)에 있고 자비의 근원이 무아에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하나님과 자비의 공에는 상응하는 면모가 있다.

조건부 등치는 어디까지 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비교의 목적은 두 사상을 동일시하려는 데 있지 않고, 두 사상을 나란히 세움으로써 각자 진리를 더욱 풍부하게 조 명하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차이를 보존하는 것은 상호보 완을 위한 조건이 된다.

‘무=공’ 등치 논의는 두 사상이 공유하는 언어의 해체와 수행에 의한 변용, 그리고 궁극에 대한 탐구라는 구조적 동형성 속에서 빛을 주고받을 수 있다.

Ⅴ. 나가며

본 연구에 제기될 만한 몇 가지 비판에 대해 간략하게 논하면서 마무 리하고자 한다.

종교적·역사적 배경이 판이한 두 인물을 직접 견주는 것 에 대해, 각 전통의 신학·교학적 정합성을 경시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의 이론을 원용했듯, 중첩과 차이의 긴장 가 운데 비교를 진행함으로써 맥락 단절을 방지하고자 했음을 강조한다.

즉 철학의 보편 주제인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는 맥락에서만 무와 공을 비교 하고, 그 외의 지점에서는 각자 고유 맥락을 존중했다.

물론 이러한 선별 적 비교 작업이 완전무결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동일성 중심의 몰역 사적 비교와는 거리를 두고자 했다.

둘째로 인격성의 간극에 대한 지적이다. 이에 대해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이 갖는 특수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디오니시우스의 신 개념 에서 하나님은 통상의 인격 개념마저 넘어서는 완전한 타자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디오니시우스의 신격은 인격적 하나님을 포함하는 동시에 넘어 서 있다. 한편 불교의 신론은 우주 창조자로서 인격신을 세우지 않는 비 (非)신론 혹은 탈(脫)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 개념 자체를 부정 하지는 않는다.

신들은 중생과 같이 윤회 안에서 조건 또는 업의 과보로 화생(化生, opapātika, 부모 없는 자발적 출생, 응신적 재생)하는 존재이며, 하 늘 영역에 태어나지만 여전히 조건에 예속돼 있다.97)

97)  R. E. Buswell Jr., D. S. Lopez Jr.,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2014), 940; S. Cohen, The Problem of God in Buddhism (Cambridge: Cambridge Uni versity, 2025), 4.

즉 불교에서 신은 연기에 의존하여 성립하는 존재이자 윤회의 한 유정(有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에게 고유한 자성은 인정되지 않고, 그 위상은 세속적 층위 에 머문다.

이러한 연기의 원리가 곧 모든 고정된 실체의 부정을 가리키 는 궁극에 대한 통찰로 확장될 때, 신 역시 존재에 한정된 유한한 범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로서 무의 하나님은 불교의 신 개념보다는 연기와 무자성을 포괄하 는 비인격적·범주 초월적 원리로서 곧 공의 지평과 더 가깝게 상응한다 고 볼 수 있다.

인격성에 관한 논의를 이어가자면,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만물을 자기 안에 포괄하는 초월적 실재로 이해된 다.

반면 원효에게서 일법계는 공으로 규정되지만, 그러한 공을 토대로 모든 법을 자유자재하게 융통하는 원리로서 일심이 작동한다.

이처럼 두 사유 사이에는 인격성의 유무라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부정 신학의 관점에서 인격성은 하나님을 규정하기 위한 한정적이고 상대적인 언어적 범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인격성의 차이는 두 사유를 대립 시키기보다는, 각 전통이 궁극적 실재를 어떻게 언어화하고 사유하는지 를 드러내는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비교는 신의 인격 적 속성을 넘어, 궁극적 실재를 언어와 개념의 제한 속에서 사유하는 방 식 자체가 지닌 보편적 한계를 성찰하게 한다.

끝으로, 기독교와 불교는 세계관, 인간관, 구원관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가 종국에는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의 유비적 모델을 견지하여 혼합주의 를 경계했다고 답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유비적 비교 방법은 전통 간 차이를 보존함으로써 상호보완적 이해를 시도하며, 한쪽 전통을 다른 쪽 에 함부로 환원하지 않는 덕에 혼합주의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특히 기독교 신 개념은 불교의 공 사상과 나란히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비움과 자비 개념을 새롭게 숙고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사랑 에 대한 이해 지평을 확장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이따금 기독교는 타자 혹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표방하면서 신앙의 절대성 으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배타적 불관용으로 나타나는 자기중심성으로 무 의식적으로 회귀”할 위험성을 드러낸다.98)

이러한 배타성은 자기보존 본 능이 낳는 종교적 자기집착/나르시시즘과, 신앙을 “자각적 이성”으로 오 해할 때 작동하는 무의식적 반작용 때문에 발생한다. 달리 말해 “통상의 믿음”은 자기 안의 대상 지향적 행위로 머물며 우상화·자기도취로 퇴행 하고, 그렇게 절대화된 진리가 곧 “신앙의 절대성”으로 팽창해 타자에 대 한 불관용으로 표출되는 것이다.99)

진리의 절대성을 자기 비움을 통해 극복하고 타종교 및 타문화와 건설적으로 대화하려면 다름 아닌 유비적 비교 방법이 필요하다.100)

98)  정재현, “우상파괴를 통한 종교 해방,” 136.

99)  Ibid.; K. Nishitani, Religion and Nothingness, 26f.

100)  김은규는 구약의 우상숭배 금지 계명을 당시 정치적·제국주의적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그는  “우상숭배 금지와 철거가 제국주의에 맞선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때, 무조건 다른 종교 들에 대해서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우는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밝힌다. 즉 구약의 계명은 풍요와  물질 숭배를 단호히 거부하여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처방이었지, 모든 이방 종교 자체 를 영구히 배척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통찰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신앙 이 고대 근동의 높은 사상들을 대화 속에 받아들였음을 상기시키며, 오늘날 기독교가 종교 다원  사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와 상생을 모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상숭배 금지의 본래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기독교는 배타성을 넘어 불교 등 다른 종교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 다. 김은규, “기독교와 불교, 그 상생(相生)의 길,” 「신학사상」 127 (2004/겨울), 237.

앞서 디오니시우스와 원효가 보여주었듯, 언 어의 자기 철회 혹은 자기 부정의 과정도 동반돼야 한다.

신 개념·교리 언어를 최종 언어로 행사하지 않고, 언어 이후의 침묵과 재비유의 공간 을 남기는 훈련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 연구가 기여 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연구를 마무리하며, 공의 하나님은 존재를 넘어서는 초월(무)과 비실 체적 관계성(공성)의 유비적 중첩을 통해 하나님을 가리키는 신학적 명명 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자나 추상적 원리로 환원하지 않고, 존재를 가능케 하면서도 초과하는 근원으로 지시한다.

즉 하나 님은 “존재 이전이며, 존재 너머이고, 존재 이후”이므로, 무는 허무가 아 니라 존재를 여는 신적 초월의 표지로 역할 한다. 또한 공의 하나님을 명 명하는 신학 언어는 자제와 침묵, 수행·체험의 변용을 규범으로 삼는다.

이때 인격성은 공의 부분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관계적·실천적 현현, 자비와 사랑 속에서 유비적으로 정당화된다.

요컨대 공의 하나님은 초월 과 언어의 절제, 그리고 수행의 축을 따라 서술되는 신학적 진술이다. 본 연구가 하나의 시론(試論)임을 인정한다.

‘무=공’이라는 등치 명제 를 다룸에 있어 한계와 빈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에 따르면, 문화 간 대화는 일치도 단절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서 유비에 기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가능하다.

본 연구가 그 어디쯤의 지점을 모색한 하 나의 사례로서,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공명을 일으키는 계 기가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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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과 원효의 공(空) 사상을 비교한 다.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을 언어와 지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실재, ‘무(無)의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긍정–부정–초(超)부정’의 삼중 구 조를 통해 무지(無知)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의 합일해야 함을 강조한 다.

한편 원효는 일심(一心) 사상과 삼공(三空) 수행론을 통해 모든 존재의 무자성(無自性)과 절대적 평등을 강조하고, 깨달음 이후에도 자비를 실천 함으로써 공을 구현할 것을 역설한다.

두 전통은 각각 기독교 신학과 불 교 철학의 맥락에 속하지만, 언어와 존재를 넘어서 궁극적 실재를 탐구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본 연구는 람 아다르 말(Ram Adhar Mall)이 제시한 상호문화적 유비 해석학을 이론적 틀로 삼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 속 무의 하나님과 원효의 공 사이의 조건부 등치 가능성을 논한다.

이를 통해 완전한 일치나 완전한 차이가 아닌, 문화적 중첩 속에서 두 사상이 부분적으로 겹치는 구조를 밝히고, 상호보완적 이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주제어 디오니시우스, 부정신학, 신비신학, 원효, 공(空).

Abstract

The God of Emptiness — A Comparative Study of Dionysius’ Apophatic Theology and Wonhyo’s Philosophy of Emptiness

Minhee Lee (Ph.D. Candidate, Philosophy of Religion United Graduate School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T his study undertakes a comparative examination of Dionysius’ apophatic theology and Wonhyo’s philosophy of emptiness(空) from an intercultural perspective. Dionysius conceives of God as a transcendent reality beyond the reach of human language and intellect, and through the triple structure of ‘affirmation–negation–hyper-negation’, he ultimately emphasizes union with God in the darkness of unknowing(無知). In contrast, Wonhyo, through his doctrine of One Mind(一心) and the praxis of the ‘threefold emptiness’(三空), reveals the non-self-nature(無自性) and absolute equality of all beings, while further proposing that emptiness should be actualized as compassionate practice even after enlightenment. Although rooted respectively in the contexts of Christian theology and Buddhist philosophy, both traditions share a structural analogy in that they seek ultimate reality beyond language and being. Drawing on Ram Adhar Mall’s hermeneutics of intercultural analogy as its theoretical framework, this study argues for the conditional equivalence between the God of nothingness and the emptiness. In doing so, it discloses overlapping structures within cultural interstices rather than asserting identity or incomparability, and, by preserving the difference between the personal God and the impersonal emptiness, explores the possibility of complementary understanding.

Key Word Dionysius, Apophatic(Negative) theology, Mystical theology, Wonhyo, Emptiness

논문접수일: 2025년 8월 20일 논문수정일: 2025년 9월 7일 논문게재확정일: 2025년 12월 20일

神學思想 211집 · 2025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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