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은 이 시를 쓰고
일주일 후에 타계했다.
이상을 유별나게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인 3월 17일 부터 이상을 추모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사흘 간 폭음하다 만취 상태로 집에 들어와 심장마비로 갔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이종구 교수의 문학산책 /
박인환, 세월이 가면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 목마와 숙녀 - 중에서(1956.3) 박인환]
명동의 영원한 '댄디보이'가 가을 속으로 떠난지도 70여년이 지났다. 늦가을은 박인희의 노래로 옛시인을 불러내어 가슴을 적신다. 명동의 '은성'은 최불암의 모친이신 이명숙 여사께서 운영하던 주점이었다. 후덕한 인심으로 소문났던 은성은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운집했던 사랑방이자 아지트였다. 이곳 선술집에서 1950년대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시인인 박인환의 명시인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다. 박인환의 집은 당시 지금의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에 있었기에 은성에 발걸음이 잦았을 것이다. 박인환은 1956년 이른 봄, 작고 일주일 전에 은성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즉흥시를 써 내려 갔고 동석했던 극작가 이진섭이 누런 종이 위에 악보를 그려 넣자 옆에 있던 나애심이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대폿집의 즉흥시가 불후의 가을 명곡이 되었다.
해방 전후 한국의 명시과 명가를 보면 주점과 막걸리집과 선술집과 대폿집과 목로주점에서 탄생한 명작들이 차고 넘친다. 이들 주점은 용어의 태생만 다를 뿐 알고 보면 모두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 한 술집 별칭이다. 은성 주점은 지금도 명동에 옛터를 알려 주는 표석이 남아 있다. 명동 유네스코 회관 맞은편 맥도날드 편의점 앞에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라고 쓰여진 푯돌이 있다. 앞길을 따라 10여미터 내려가면 개양빌딩이 있는데 이 건물의 지하가 옛날 은성 주점 자리이다. 명동예술극장 바로 옆 건물이다.
"세월이 가면"은 음유시인 가수 박인희가 노래를 부르면서 시대를 넘나드는 가을의 애창 가요가 되었다. 박인환은 이 시를 쓰고 일주일 후인 1956년 3월 20일, 3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리고 첫사랑이 잠들어 있는 망우리 묘지에 쓸쓸하게 묻혔다. 영결식 때 모윤숙이 시를 읊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송할 때 문인들은 오열하며 슬퍼했다. 관 위에 생전에 그가 애음하던 조니 워커를 붓고 카멜 담배를 얹고 흙을 덮었다. 박인환은 1950년대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은성은 1953년 문을 열고 1973년 명동 개발로 문을 닫았다. 서울시는 2004년 옛 은성 자리에 서울문화재 기념표시석을 세워 낭만의 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인 은성을 추억했다. 은성 주인이던 이명숙 여사도 1986년에 작고했다. 은성을 드나들며 불꽃같은 삶을 갈구했던 여류 수필가 전혜린도 1965년 연시에 31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박인환이 광복 직후 종로 3가 낙원동에서 운영했던 문인과 예술가들의 문화 살롱(서점)이었던 '마리서사(1945~1948)'에서 만나 부부의 연분을 맺었던 부인 이정숙 여사도 2014년 향년 88세로 작고했다. 시인과 함께 한 세월은 8년이 채 못되었다. 시인이 떠나고 서른에 청상이 되어 58년의 세월을 고독하게 살았으리라. 은성도 가고 사람들도 갔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지듯 사람들은 목마를 타고 가을 속으로 하나 둘 모두 바삐 떠났다.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모든 것이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그 눈동자 입술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서늘한 가슴 속에 남아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명동 샹송인 "세월이 가면"이 늦가을 바람에 낙엽 속으로 마구 날린다. 명동백작인 이봉구 옆으로 길다랗게 위치한 각각의 목로 테이블에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김수영 오상순 천상병 임만섭 조병화 이진섭 조지훈 등이 삼삼오오 진을 치고 앉아서 왁자지껄하게 시와 문학을 낚고 읊으며 막걸리를 주발들이로 연신 들이키며 시대를 애증하고 있다. 사람들 속으로 바쁘게 오가는 은성의 주인인 이영숙도 보인다. 나애심이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박수를 치자 은성이 후끈 달아오른다. 창밖에는 낙엽이 구르는 거리 위로 처량한 목마의 방울소리가 겨울을 제촉한다.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며 거리를 할키고 이곳 저곳에서 밝아오는 가로등이 명동거리를 쓸쓸하게 품는다.
소슬한 늦가을 바람은 낙엽을 부르고 시를 부르고 추억을 부르고 잊혀진 옛사람들을 노래로 불러내어 눈물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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