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반공주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주류 한국 개신교에 뿌리 깊게 자리매김하며, 한국 개신교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는 배타적 관계로만 포착될 수는 없다.
특히 1920년대 사회주의가 한국 사회에 전개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사회주의에 대하여 다양한 입장을 가졌고, 이 가운데는 이념적 비판의 입장, 비판적 수용을 통해 “사회적 기독교”(social Christianity)를 추구하는 입장, 사회주의를 기독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 등 그 스펙트럼 이 넓었다.1)
이러한 다양한 관계는 1920년대에 활발하게 나타났고, 사회 주의의 반기독교 운동과 기독교의 반공주의가 격화되는 1930년대에 급 격히 위축되었다.
기존의 연구들 가운데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다양한 관계에 주목하는 시도들은 주목할 만하며 한국 개신교의 이념적 편향을 지양하는 데 기여 했다.2)
1) “사회적 기독교”(social Christianity)는 1920년대 미국에서 주로 사용했던 용어로서, 영국과 유럽에 서 기원한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미국에서 발전한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 보수적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서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던 입장을 포괄한다. 이 가운데 기독교사회 주의가 진보적인 입장이라면, 복음주의는 보수적인 입장을, 사회복음주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 다. 이에 관하여, Robert T. Handy, Undermined Establishment: Church-State Relations in Ameri ca, 1880-1920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105-6; Paul T. Phillips, A King dom on Earth: Anglo-American Social Christianity, 1880-1940 (University Park,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6), xiii-xx. 이러한 신학사조들이 1920년대에 한국 개신교에 유입되면서 사회적 기독교의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었다.
2) 대표적인 연구로, 김흥수 편,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김권정,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 『한국기독교와역사』 5 (1996), 78-116; 장규식, “1920년대 개조론의 확산과 기독교사회주의의 수용·정착,” 『역사문제연구』 21 (2009), 111-36.
선행 연구들은 대체로 시기별로, 인물별로 기독교의 사회주의 인 식이 어떻게 달랐는지에 주목하면서, 이와 관련한 이념적 배경이나 사회 적 상황을 분석하였다. 이 연구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에 사 회주의의 수용과 전개 과정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상호관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고찰하되, 양자의 관계를 매개한 사회적 상황과 이에 대응한 내적인 논리를 균형 있게 살피고자 한다.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전 개되는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피고, 사회주의 세력의 전략적 입장의 변화 에 따른 기독교 인식과 대응논리의 변화와 더불어 기독교 내부의 다양한 신학과 상황에 따른 사회주의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도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접합이 민족주의를 매개로 이루어진 측면에 주 목하여, 민족 공동체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차원에서 사회 주의와 기독교가 민족주의에 대응하며 상호 연결되고 대립하는 과정을 규명하고자 한다.
1920년대 민족주의는 상호대립적인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매개하는 이념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과 독 립은 절대적 과제였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넓은 스펙트럼 안에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 세력들을 수렴할 수 있었다.3)
1920년대에 국내에 유입된 사회주의는 “식민지반봉건”(植民地半封建)의 한국 사회의 여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시기상조이고, 선행적으로 부 르주와 민족 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는 가운 데 민족주의와 접합하였다.4)
기독교는 구한말 독립협회와 국권 회복 운 동을 계승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실력 양성을 추구하는 문화 민족 운동과 연결되어 기독교 사회 문화 운동을 통한 민족의 회복을 추구하면 서 민족주의와 접합하였다.5)
3) 민족운동은 항일독립운동을 포함하여, 간접적으로 독립을 지향하는 운동, 예를 들어, 문화적, 경제 적 실력양성운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민족운동 스펙트럼 안에는 부르주와 민족운동(민족주의 우파), 비타협적 민족운동(민족주의 좌파)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운동, 아나키 스트운동까지 포괄될 수 있다. 이에 관하여, 박찬승, 『민족주의의 시대: 일제하의 한국 민족주의』 (서울: 경인문화사, 2007), 3-4 참조.
4) “식민지반봉건(植民地半封建)” 사회의 개념에 관하여는 박경식,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서울: 청아출판사, 1986); 노치준, “일제하 한국 YMCA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 연구,” 김흥수 편, 『일제 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 62-3 참조.
5) 장규식, 『일제하 한국 기독교민족주의 연구』(서울: 혜안, 2001), 377-90; 김권정, 『한국기독교 민족 운동론과 민족운동』(서울: 국학자료원, 2015), 41-80.
그러나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좌우 합작을 이끌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약화,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 른 사회주의 세력의 급진 좌경화, 일제의 분할 통치와 탄압으로 민족 협 동 전선이 붕괴되면서, 민족주의 분열과 좌우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한국 개신교는 교 리적, 이념적으로 경직되면서, 일제강점기는 물론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족 공동체의 이념갈등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연구가 다루는 192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관 한 고찰은 한국 개신교의 성격과 특징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하고, 사회주 의와 기독교 관계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신학적 입장을 균형 있게 이해함 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이념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교회 의 역할을 성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Ⅱ. 1920년대 사회주의 등장과 국내 전개 과정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에 사회주의가 유입되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러시아와 중국에서 한인들을 중심으로 결성 된 사회주의 조직과 운동이 국내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6)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민족주 의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볼셰비키의 입장에서는 반제국주 의 혁명을 위한 “동맹 세력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나라를 빼앗긴 한 국 민족주의자들만큼” 일제에 맞서 싸울 혁명가들이 없었고, 한국 민족 주의자들은 볼셰비키만큼 항일 독립운동에 강력한 지원을 할 수 있는 세 력을 찾기 어려웠다.7)
따라서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자들의 접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사회주의는 삼일운동 이후 민족 해방 운 동의 강력한 대안으로 국내에 유입되면서 “이민족의 압제에 시달려 온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비춰졌고, “오랜 세월 누적된 사회 문제 와 계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다가왔다.8)
6)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의 이념에서 비롯된 급진적인 사회주의 사상이고,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보다 역사가 앞서고, 개념과 운동의 폭이 넓다. 한국에 유입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였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공상적 사회주의” 혹은 “기독교 사회주의”와 같이 공산주의 이념과 구별되는 사회 주의를 특별히 언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였음을 미 리 밝힌다.
7)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옮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파주: 돌베개, 2015), 69-70.
8) 서대숙/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서울: 화다, 1985), 127.
1. 해외 사회주의 조직과 활동
해외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의 효시는 이동휘의 주도로 1918년 6 월 26일에 하바롭스크에 설립된 “한인사회당”이었다.9)
이동휘는 강화도 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던 중 1904년경에 기독교로 입신을 하였고, 이후 대한자강회와 서우학회 등을 중심으로 교육과 신앙을 통한 애국 계몽운 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고, 105인 사건 이후 간 도로 망명하여 전도 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5년경에는 일제 의 감시와 추격을 피해 러시아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후 볼셰비키 지 도자들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사회주의로 전향하였다. 1917년 블라디보 스톡의 신한촌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하였고, 1918년에 볼셰 비키로부터 항일 운동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고 하바롭스크에서 김립, 박 애, 박진순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10)
이와 다른 한인 사회주의 조직으로, 1919년 1월에 결성된 이르쿠츠 크공산당 한인지부가 있었다. 최고려, 한명세, 오하묵과 같은 이르쿠츠 크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민족 운동 차원이 아닌 “소비에트연방 내의 공산주의 운동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이동휘 그룹과 구 별되었고, 양측은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세력 경쟁을 벌 였다. 삼일운동 이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이동휘가 국무총리 로 취임하면서 한인사회당 활동은 약화되었고,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코 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19년 9월에 “전로한인공산당”을 발족하며 세력 을 확대하였다.
이에 맞서 이동휘는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 정부라고 주 장하면서 임시정부를 통해 한국인들 사이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겠다고 코 민테른을 설득하였고, 실제로 임시정부 조직을 활용하여 볼셰비키의 지 원을 받아 항일 군사 행동을 추진했다.11)
이와 함께 이동휘는 1920년 5 월에 상하이에서 기존의 한인사회당과 공산주의 그룹을 통합하여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고,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12)
9) 김준엽·김창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서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120; 다른 자료들에 따르면 한인사회당의 설립일은 1918년 6월 28일이다. 이에 관하여,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74 참조.
10) 한규무, “이동휘와 기독교사회주의,” 김흥수 편,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 174-81.
11)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77-87.
12) “고려공산당” 창당에 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여운형은 창당이 1920년 5월이라고 증언하였지 만, 서대숙은 창당일은 1921년 1월 10일이라 주장하였고, 또 다른 자료는 1921년 10월을 창당일 로 기술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 Ibid., 95 참조.
이동휘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에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소련의 임시정부 지원금을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유용한 문제는 양 진영 안 에서 커다란 분열을 일으켰다.
자금 유용으로 1921년 1월에 임시정부 안 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고 려공산당 내부에서도 여운형과 김만겸을 중심으로 이동휘 세력을 비판하 며 분열이 일어났다.
이동휘계의 상하이파 공산주의 운동을 “민족주의와 기회주의자들의 결합”이라고 비판해왔던 이르쿠츠크파 역시 공세를 가 하여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 파의 계속된 대립에 따라,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에 분당의 해산을 명 령하였고, 한 나라에 하나의 공산당을 표방하며 블라디보스톡 극동총국 안에 “코르뷰로”, 곧 고려국(高麗局)을 설치하였다.13)
13) Ibid., 93-114.
이로써 국내에 공산 당 조직 설립이 본격화하였다.
2. 국내 사회주의의 전개와 민족주의 관계
삼일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의 상황 속에서 1921년부터 사회주의 가 국내에 유입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공산당 창당 움직임은 코르뷰로가 설치된 이후인 1923년부터 시작되었다.
1923년 6월에 코르 뷰로 국내부가 서울에 설치되었고, 7월에는 김찬, 김재봉, 조봉암, 박헌영 등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사상연구회”가 조직되었고, 11월에 “화 요회”로 개칭하였다.
한편 김약수를 필두로 사회주의에 경도된 도쿄 지 역 한인 유학생들은 1923년 1월에 “북성회”(이후 일월회로 개칭)를 조직하 였고, 이후 국내에서 “북풍회”를 결성하였다.
또 다른 세력으로 1921년에 민족주의 청년 단체로 창립된 서울청년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서울파를 형성하였다.
경쟁적인 세 단체들 가운데 이르쿠츠 크파가 장악한 화요회가 초기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다.
1925년 4월 17일에 화요회가 주도하고 북풍회가 참여하는 형태로 제1차 조선공산당이 출 범하였고, 화요회의 김재봉이 책임 비서로 임명되었다.
창당과 함께 곧 바로 고려공산청년회도 조직되었다.
서울파는 시기상조의 이유로 공산당 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의 기반이었던 “조 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14)
그러나 1925년 11월에 신의주의 한 음식점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으로 일경에 공 산당 조직이 발각되면서 제1차 조선공산당은 본격적인 활동 개시 이전에 와해되었다.15)
제2차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에 조직되었고, 지도부 대부분이 화 요회로 구성되었다.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비밀스럽게 조직 구성을 하 였는데, 각 공장과 학교와 관청 내에 7인 이하의 세포 조직을 구성하였 다.
그리고 서울과 각 군과 도에 지역 조직을 두었고, 각 지부의 대표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무엇보다도 국내외 파벌과 분열을 종 식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지만, 화요회, 북풍회, 서울파 간의 파벌 투쟁이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조선공산당 내부의 분열조차 해결하지 못했 다.
제2차 조선공산당의 주된 아젠다는 “민족 협동 전선”을 표방하며 민 족주의를 매개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로 삼일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민중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사회주의 운 동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사회주의자들의 대부 분이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민족 운동의 전위로 활동하 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김단야의 주장에서 잘 나타났다.16)
14) Ibid., 141-7, 158-62.
15) 김준엽·김창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2』, 350-62.
16) 요시노후지조(吉野蘇藏),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과 그 검거의 전모,” 지중세(池中世) 편역, 『조선사상 범 검거실화집』(서울, 1946), 24-6;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76-7에서 재인용.
이에 앞서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강달영은 1926년 3월에 비타협적 민족주의 자 7인(권동진, 이종린, 안재홍, 박동완, 유억겸, 오상준, 신석우)과 만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의 협동을 제안하였다.
이념을 뛰어넘는 대중운동 조 직을 구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총집결시켜서 민족 해방을 추구하고자 하 였다.17)
그러나 일제당국은 사전에 거사계획을 파악하여, 대대적인 검거 를 통해 제2차 조선공산당을 와해시켰다.
이로 인해 주도권을 행사하던 화요회계가 붕괴되면서 국내 공산주의 운동이 위축되었다.
이후 서울파와 일월회가 주도하여 1926년 12월에 제3차 조선공산당 이 조직되었으나 이들 사이에 파벌 다툼이 재현되었다.
서울파는 일월회가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공부하면서 한국 사회 현상을 실제 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거만하고 추상적인 이론가들이라고 비난하였 고, 일월회는 서울파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사 회주의 운동을 지도할 자격이 없는 그룹이라 비난하였다.
일월회는 “이 념 투쟁을 통해 기회주의자와 이단분자를 제거함으로써 당을 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ML파”를 형성하였 다.
서울파는 이에 대항하여 1927년 12월에 별도의 조직을 결성하여 공 산당 내 파벌투쟁이 절정에 달하였다.
결국 1928년 2월과 4월에 양측이 일경에 대거 검거됨으로써 조직이 와해되었다. 제4차 조선공산당은 옥중 에서 조직되었으나 당의 내부 분열과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의 활동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1928년 7월에 중앙집행위원회가 총사퇴하였다.
이 러한 상황에 대하여 코민테른은 파벌이 “당과 민족 혁명을 마비시켰고, 한국의 모든 혁명 조직을 일본 경찰에 제물로 바쳤다”고 맹비난하였다.18)
17) 김인식, “신간회의 창립과 민족단일당의 이론,”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편, 『안재홍과 신간회 의 민족운동』(서울: 선인, 2013), 82-100.
18)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80-88.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 구성에 난항을 겪고 대중적 지지기 반이 취약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적으로 중도적 위치에 있었던 비타 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을 추구하며 지지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합전선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은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권을 강조 하였고, 1928년 “2월 테제”와 “12월 테제”에서 민족 해방 운동은 프롤레 타리아가 주도하고 통제하는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이후 ML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하고 민족 연합 전선을 비 판하면서 1930년 “9월 테제”는 모든 민족주의 세력을 개량주의로 배격하 고 급진적인 정치적, 경제적 투쟁으로 사회주의 운동 방향을 선회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19)
19) Ibid., 209-229.
Ⅲ. 사회주의와 기독교 관계
1. 사회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논리
사회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타협적 태도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초기부터 잘 드러난다. 해외에서 조직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창당 선언에서 “무산 대중을 종교의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과학적 문화 운동을 실행”하기 위 해 종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신자의 신앙심을 모욕하는 행위는 피해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다.20)
20) 이반송·김정명/ 한대희 편역, 『식민지시대 사회운동』(서울: 한울림, 1986), 106-12.
한편 이르쿠츠크파는 종교 단 체를 종교적 성격을 갖는 “정치 단체”로 규정하고, 특히 기독교를 “외국 자본을 유입”하고 점차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비판하면 서 강력한 사상 투쟁을 강조하였다.
상하이파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 고, 이동휘와 여운형을 비롯한 기독교인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민족 운동에서 차지하는 역량을 고려하여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프롤 레타리아 혁명 노선이 강경하였던 이르쿠츠크파는 기독교를 특정하여 식민주의 세력으로 비판하였으나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의식하며 사상 투쟁의 차원을 부각하였다.
비판의 강도에서는 차이점이 있으나, 반종교 이념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면서도 민족 해방을 위한 협력 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유사하였다.21)
국내에서도 청년 지식층을 중심으로 반기독교 운동의 움직임이 있었 고, 특히 1922년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이 이에 영향을 끼쳤다. 중국 지식 인들은 기독교가 비과학적이며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인식하며 반제국주 의 민족 운동의 차원에서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2년에 북경에서 열린 “제11차 만국기독교학생동맹대회”(WSCF)는 사회주의 단 체가 중심이 된 대대적인 반기독교 운동을 촉발시켰다.
국내의 사회주의 자들은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대중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고자 하였다. 반기독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 은 1923년이었다.
그해 3월에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서울파)가 중심이 되어 반제국주의 차원에서 “종교의 존재를 부인할 것”을 결의하였다.22)
1924년 4월에 창립대회를 가진 조선 청년총동맹은
“종교는 원리상 부인하나 실제에서는 적극적으로 배척하 지 말고 다만 종교가 민중을 마취시켜 계급적 각성을 방해하는 폐해”
를 청년들에게 이해시키는 사상 투쟁에 주력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다소 유 연한 입장을 취하였다.23)
이는 반제국주의 혁명 운동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전선을 모색하면서 민족 운동에서 기독교와 종교 세력이 갖 는 역량에 대한 코민테른의 전략적 고려가 반영된 것이었다.24)
21) 이준식, “일제침략기 기독교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 『역사와 현실』 10 (1993), 24-6.
22) 이강, “조선청년운동의 사적 고찰 (중),” 『현대평론』 1 (1927/9), 18-20; 이준식, “일제침략기 기독 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 27.
23) 이강, “조선청년운동의 사적 고찰 (하),” 『현대평론』 2 (1928/1), 10-11.
24) 강원돈, “기독교와 사회주의운동,” 31-2; 김권정,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관한 연구,” 『숭실사학』 10 (1997), 206.
이러한 가운데 반기독교 운동이 고조된 것은 1925년 4월에 조선공산 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된 시점이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가 장악한 화요회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 투쟁 노선과 반종교적 태도에 있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는 “신흥청년동맹”은 1925년 5월 17일에 열린 제3회 정기총회에서 “종교는 대중의 마취제이므로 이를 철저히 배척하되 제일착으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자”는 반기독교 결의안을 채택 하였다.25)
1925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사회주의 세력의 반기독교 운동이 대중 투쟁의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는 반선교 사 운동이었다.
특히 1925년 6월 목포 정명여학교 사건에서 비롯된 선교사 배척 운동은 사회주의 세력의 반기독교 운동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평소 학생을 구타하고 폭언을 일삼은 비행 교사에 대한 파면과 부당하게 퇴학당한 학생의 복학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동맹 휴학으로 시 작되었는데, 학생들에 대한 선교사의 과격한 언행이 선교사 배척 운동으 로 비화되었다.26)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맹현리(Henry D. McCallie)는 “우 리 돈으로 설립한 학교는 우리 마음대로 할 터이니 공부하기 싫거든 다 가거라”고 말하면서 학생의 머리를 밀치고 막대기로 때리며 쫓아내었고, 기숙사에 들어가 “짐승같은 새끼들아 어서 가라”로 말하면서 주먹으로 위 협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27)
이에 학부모들은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여 학교 당국과 교섭하여 문제를 일으킨 비위 교사는 사 임하고, 퇴학당한 학생들은 복학하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는 듯하였 으나, 지역의 사회주의 단체들이 선교사의 폭행 문제를 성토하는 연설회 를 개최하며 선교사 배척 운동으로 확대시켰다.28)
25) “신흥청년총회: 일곱까지 결의,” 「동아일보」 1925.5.19.
26) 정명여학교 사건에 관하여, “정명여학교 맹휴, 선생의 폭행으로,” 「동아일보」 1925.6.12; “兩便態 度强硬, 목포정명교 맹휴사건,” 「동아일보」 1925.6.14.
27) “구타축출, 교실에 殺風景: 서양인 목사는 학생을 구타, 교장은 기숙생에 퇴거명령,” 「동아일보」 1925.6.18.; “기숙사에서 방출된 학생, 路頭에 涕泣彷徨,” 「동아일보」 1925.6.19.
28) “목포정명해결, 나머지문제는 비행선교사의 성토,” 「동아일보」 1925.6.24.
특히 전국적으로 선교사 비행 실태를 조사하는 “전조선 선교사 비행 조사 응징 위원회”를 조직 하여 대대적인 반선교사 운동을 추진하였다.29)
당시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반선교사 운동은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세력이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과 반기독교 운동을 결합시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대중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30)
이와 함께 1925년 10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서울에서 진행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맞서 한양청년동맹이 대대적으로 추진한 반기독 교대회와 강연은 반기독교 운동의 절정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의 대중 동 원력과 영향력에 위협을 느끼고 종교에 대한 사회주의의 이념투쟁을 철 저하게 실행하기 위하여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다.31)
그러나 경찰의 금지로 반기독교 대회와 강연회는 무산되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일 학교 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32)
사회주의 세력은 “왜 경찰은 3천 명이나 되는 주일학교 개회는 허락하면서 그를 반대하는 회합은 금지하 느냐”라며 반발하였다.
그러면서 “종교는 현대의 경찰과 동일한 처지와 입장”에 있으며, “현 제도의 사회를 옹호키위하야는 경찰과 종교가 동일 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33)
그들이 보기에 “사회주의적 색채 를 띤 집회나 강연은 절대의 금물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문화 운동자들 의 혹은 종교적 집회나 강연회는 당국이 얼마든지 성원한다”는 것은 문 화민족주의 세력과 기독교가 일제와 유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34)
29) 이준식, “일제침략기 기독교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 32.
30) 강명숙, “1920년대 중국 반기독교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8 (1998), 166-9.
31) 강원돈, “기독교와 사회주의운동,” 33-4.
32) “반기독교운동금지,” 「동아일보」 1927.10.27.
33) “時言: 주일학교대회 漢靑의 반기독교운동,” 『개벽』 63 (1925), 40. 34) “문화운동자의 대두,” 『개벽』 64 (1925), 54-5.
이러한 비판은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의 민족주의 세력과 기독교에 대한 공세를 예표(豫表)하는 것이었다. 「개벽」 1925년 11월호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을 집중 조명 하였다.
배성룡은 현대의 종교 조직은 “자본주의를 변호하고 구가(歐歌)하는 고정적 제도”가 되었고, 종교는 인간의 해방을 방해하는 “약자 정복 의 사자(使者)”, “자본주의 사회의 옹호단”, “제국주의 척후대”라고 비판 하였다.
따라서 반종교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와 조직 전체”를 대 상으로 하는 사회 개혁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35)
박헌영은 교회사를 개관하며, 기독교는 “영토확장의 제국주의의 수족”이 되고 “자본주의적 국가 옹호의 무기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미국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의 자본가에게서 선교비를 얻어가지고 철두철미 자국 자본가를 위하 여 길을 개척하려고 그 민족적 세력 부식(勢力扶植)을 위하여 … 악마적 침 략을 발휘하고 있다”
고 비판하였다.36)
한위건은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는 “무산대중으로 하여금 현사회의 모순에 대한 의식을 몽롱(朦朧)케하여 간 접 직접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영속을 도모”하고 “자본계급의 착취 잔학(搾取殘虐)을 합리화”하는 “자본주의의 주구(走狗)”라고 비판하였다.37)
그 정점에 달하였던 반기독교 운동은 1925년 말과 1926년 초에 사회 주의 세력이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약화되었다.38)
1926년 7월의 “조선공산당선언”은 “일본제국주의에 대립한 조선의 모든 역량을 집합하여 민족혁명유일전선을 작성”할 것을 역설하였다.39)
이러한 연장 선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은 현 단계의 조선 혁명을 “부르주와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민족단일정당론”을 내세웠다.40)
35) 배성룡, “반종교운동의 의의,” 『개벽』 63 (1925), 57-63.
36) 박헌영,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개벽』 63 (1925), 64-70.
37) 한위건, “등한시할 수가 없다,” 『개벽』 63 (1925), 73.
38) 1925년말과 1926년 초에 전국에서 일어난 “반종교, 반기독교 논의”와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의 충돌과 관련하여, 이준식, “일제침략기 기독교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 30-31의 〈표 1〉과 〈표2〉 참조.
39) “자료발굴: 소련에서 최초로 발견된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 7 (1926)에 실린 「조선공산당선언」,” 『역사비평』 19 (1992), 353.
40) 김인식, “신간회의 창립과 민족단일당의 이론,” 83-4.
같은 맥락에서 1926년 11월 “정우회선언”은 민족단일당을 건설하여 합법적 공간에서 정 치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의 정치 의식을 고취하고, 교육과 훈련을 통 한 조직화를 추구하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를 주장하였다.
민족주의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적 성격을 인식하는 동시에 과정에 있어서 동맹자적 성격을 인정하여, 개량주의로 타락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 휴할 것”을 주장하였다.41)
이와 함께 민족주의 세력 안에서도 사회주의와 연합 전선의 상황이 마련되었다.
무엇보다도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비호(庇護) 아래 추진한 자치론의 전개는 이를 반대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민 족주의 좌파)의 “좌익 민족전선”의 결성을 촉발시켰고, 여기에 사회주의 세력이 합류함에 따라 좌우합작이 실현되었다.
“좌익 민족전선”은 “일체 의 기회주의와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절대 독립을 주장”하면서, 대중을 자치 운동과 같은 타락한 민족 운동으로부터 분리시켜서 결집을 공고히 하고, “일제에 대한 지속적인 정치적 투쟁”을 목표로 하는 비타협적 민족 주의 세력의 연대였다.42)
민족주의 세력 역시 민족 운동의 차원에서 사 회주의와 연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민족주의 좌파를 대변하던 조 선일보는 1926년 7월 사설에서 “민족적 대동단결”을 촉구하였다. 비록 “조선 민족 내부에 있어서도 계급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 다”고 인정하면서도 “제1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경향이 연 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43)
41) 김영진, “정우회선언의 방법과 내용,” 『사림』 58 (2016), 77-105.
42)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좌파이지만, “최우측”인 개량주의적 민족주의(민족주의 우 파)와 “최좌측”인 공산주의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있었던 “중도적 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 하다. 좌익민족전선과 민족주의 좌파의 중도적 성격에 관하여, 김인식, “신간회의 창립과 민족단 일당의 이론,” 76, 103-5 참조.
43) 「조선일보」, 1926.7. 11., 사설.
사회주의의 민족 협동 전선과 민족주의의 좌익 민족 전선은 1927년 2월 15일에 신간회의 창립으로 실현되었다. 기독교 세력은 신간회의 창 립과 발전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민족 협동 전선에서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신간회에 참여한 기독교 세력의 핵심은 이상재, 안재홍, 유억겸, 박희도, 이동욱, 백관수 등 YMCA와 흥업구락부를 중심 으로 하는 기호지역 기독교 인사들이었다.
서북지역 수양동우회계로 신간회에 참여했던 조만식과 조병옥은 YMCA가 연결 통로가 되었다.44)
특 히 조선일보 주필이자 YMCA와 흥업구락부 일원이었던 안재홍이 이상재 를 비롯한 기호지역 기독교 인사들의 신간회 참여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YMCA가 기독교 세력과 신간회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 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세력은 평양, 함흥, 광주, 전주 등에서 YMCA 를 중심으로 신간회 지회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신간회의 전 국적 확장에 기여했다.45)
민족 협동 전선의 흐름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 과 태도 역시 변화되었다.
반기독교 운동은 약화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사과를 훔친 소년의 뺨에 초산으로 “도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행위가 알 려져 1926년 7월에 전국적인 비난 여론을 일으킨 미국 안식교 선교사 허 시모(C. W. Heysmer) 사건이 사회주의 세력의 대대적인 반선교사 운동으 로 비화되지 않았던 데에서 감지되었다.46)
이와 함께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독교 세력과 협력의 가능성을 인정하였 다.
기독교 자체는 “민족 해방의 관념”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개 인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관념을 지닌 자도 있다”고 보았다.
특히 1926 년 말에 경성청년연합회는 종교 단체와 협동 전선을 취하자는 건의문을 조선청년총동맹에 제출하기도 하였다.47)
44) 김권정,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론과 민족운동』, 142-6.
45) Ibid., 147, 150-53.
46) 이준식, “일제침략기 기독교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 39-40.
47) 이강, “조선청년운동의 사적 고찰 (하),” 『현대평론』 2 (1928/1), 21.
그러나 신간회 해소 이후 1930년대 초반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 속에서 이전의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은 적 대적인 반기독교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 반기독교 운동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념적 비판을 넘어서 적극적인 반종교 투쟁을 통한 “종교 의 박멸”을 추구하였고, 민족 개량주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 민 족 운동을 일제의 지배와 자본주의의 착취를 합리화하는 개량주의 운동 으로 비판하였다는 특징이 있다.48)
특히 1930년대 기독교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기독교 농촌 운동에 대하여 “농촌 개량이 니 빈민구제이니 … 하는 것은 모두 민족 부르주아들의 발호에서 비롯되 는 것으로 농민의 궁핍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49)
48) 김권정,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 221-6.
49) 김무신,“ 打倒 기독교사회주의자,” 『비판』 21 (1933/22), 36.
결 국 기독교 세력은 민족 개량주의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고, 일제의 지 배 체제를 강화할 것이라는 비난이었다.
2. 기독교의 사회주의 이해와 대응 논리
사회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과 대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동휘와 같이 기독교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한 인물, 최문식과 김창준과 같이 기독교를 사회주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했던 인물, 이대위와 유재기와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의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기독교적 대안을 모색한 인물, 신흥우와 같이 사회주의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사회복음주 의의 영향 아래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과 사회 개조를 추구한 인물, 배민수와 같이 사회주의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정신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인물, 박형룡과 같이 기독교 정통주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신학적으로 논박했던 인물들로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
192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계로 한정하여 볼 때, 이러한 다양한 시 각과 입장은 사회주의 세력의 반기독교 운동과 일제강점기 사회적 현실 에 대응하는 기독교 그룹의 사회적/신학적 신념과 실천논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에 대응한 기독교 그룹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분광하 는 복잡한 변수들이 있지만, 사회주의 이해, 민족주의 관계, 신학적 입장 에 따라 아래의 표와 같이 대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성향에 따른 사회주의 수용 관계 : 생략(첨부논문파일참조)
1)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정통주의와 복음주의의 접근 비정치화 강조
1920년대 주류 개신교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유물사관 에 입각한 무신론과 반기독교 운동에 맞서 기독교 신앙과 문화적 가치를 변호하기 위한 신학적 비판의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입장을 잘 대변하 는 박형룡은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변증신학적 방법론으로 사회주의의 비 판을 논박하였다. 그는 무신론에 맞서 유일신론을, 유물사관에 맞서 인 간의 영적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신”(神)이라는 “종교적 표상”은 “지상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서, “인간이 인간 자신의 생활을 통제함에 지(至)하야 종교는 소멸된다” 고 주장하는 것은 “유물사관의 편견(偏見)”과 “억설”(臆說)이라고 박형룡 은 비판하였다.
그는 종교와 신(神)관념은 권력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다양한 근원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맑스주의가 몽상(夢想)하는 차 대(次代)의 공산사회에 권력 관계가 소멸된들 타원인(他原因)이 의연자존 (依然自存)한 이상에 신(神)이 소멸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였 다.50)
50) 박형룡, “次代에 종교가 消滅될가?,” 『신학지남』 10 (1928/3), 7-8.
또한 천국이 “개인으로 하여금 내세(來世)희망에 심취하여 불완전 한 현세의 사회적 고통을 선(善)히 감인(堪忍)하게 하는 것”이므로, “현실 생활에 만족하는 완전한 사회”에 이르면 소멸될 것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박형룡은 경제적 고통을 제거한다고 해도 여러 가지 고통이 남아있는 한 사람은 천국을 사모할 것이며 모든 고통을 다 제거할지라도 “사망이 잔 존(殘存)하야 현실 향락에 영구성(永久性)이 결핍(缺乏)”되는 한 인간은 여 전히 천국을 사모할 것이라고 반박하였다.51)
박형룡은 사회주의 세력의 반종교 운동에 대하여, 사회주의의 오해 와 한계를 논박하면서, 기독교와 자본주의 제도의 우월함을 변증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철저한 종교 박멸”을 부르짖는 이유는 “종교를 사회현제도(社會現制度)의 … 유력한 후원(後援)으로 인정하는 연고(緣故)” 라고 분석하였다.
그는 무신론과 종교 박멸은 사회주의자들의 근본 신념 이며 반종교 운동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계급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혁 명의 일환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인식을 지적하였다.52)
51) Ibid., 8-9.
52) 박형룡, “종교박멸은 웨,” 『신학지남』 10 (1928/4), 15.
박형룡은 사회주 의가 “민중 억압의 이기(利器)라고 매도(罵倒)하는 대표적 종교”는 “신교 (新敎) 특히 칼뱅파”라고 주장하면서, “칼뱅주의를 근세(近世) 자본주의의 양친(養親)이며 사환(使喚)으로 인정(認定)”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사회에 노동열(勞動熱)을 고취하야 경제적 생산을 풍부케 함이 과연 죄악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인간의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 의 의식(衣食)만을 시구(是求)하는 철두철미(徹頭徹尾) 이기주의”에 붙들린 공산주의가 “빈부의 차별”과 “동가포서가기(東家飽西家飢)의 폐해(弊害)를 미연(未然)에 방지한다”는 주장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칼뱅주의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무엇이 우월 한지 신중히 비교하여 선택하라고 강변하였다.
무성의한 노동으로 경제적 생산력을 감살(減殺)하고 문화의 진전을 방해(防害)하는 공산주의는 기주요목적(基主要目的)이 되는 생산품의 만인공락(萬人共樂)도 실현할 능력이 업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수(一 手)로 노동 타일수(他一手)로 애타(愛他)의 정신을 교수(敎授)하는 칼뱅주의는 임의 사회의 경제력과 문화를 향상(向上)식히고 또 만인공락 (萬人共樂)의 행복을 지래(持來)할 희망이 확유(確有)하니 식자(識者)는 양자를 신중히 비교하여 최선(最善)을 선택하라.53)
결론적으로 박형룡은 사회주의의 기독교 박멸의 논거를 비판하면서 기독교는 “차세계(此世界)에 유필불가결(有必不可缺)의 기관으로 상당한 지 위와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역설하였다.54)
배민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복음주의의 지상천국건설의 신념으로 사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유없는 독재주의”로 서 “팔구십 퍼센트 대중은 극소수의 극렬분자들이 주창(主唱)하는 맹목적 만용(蠻勇) 또는 전횡(專橫)으로 말미암아 굴종(屈從)하지 아니할 수 없는” 불의한 제도요, 거짓된 환상이었다.55)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뜻과 복음의 정신을 사회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핵심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웃 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체가 하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하나가 전체 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민주주의와 상호부조의 협동생활”이었다.56)
53) Ibid., 19.
54) Ibid., 22.
55) 배민수, 『그 나라와 한국농촌』(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8), 114-5.
56) Ibid., 28-33, 115.
배민수가 복음의 사회적 실천을 각성하게 된 계기는 숭실전문 재학 시절 만난 기독교 민족주의자 조만식의 영향이 컸다.
조만식의 지도아래 배민수, 최문식, 유재기, 김성원 등 숭실전문 학생YMCA 회원들이 농촌 순회 계몽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29년 6월에 기독교농 촌연구회가 결성되었다.
기독교농촌연구회는 1928년에 개최된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의 “사회적 기독교”와 기독교 농촌 운동에 대한 방향제시 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곧이어 1929년 5월에 발표된 기독신우회 선언 은 한국 교회가 “전통과 의식”에 붙들리고 “개인주의에 치우쳐 민족의 당 면한 사회문제”에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반성하고, 이에 대한 대안 으로 사회복음을 표방하며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포괄하는 하나님 나라 의 실현을 주장하였다.57)
배민수는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적 신앙과 부 르주아적 성격”을 비판하였고, 복음의 사회적 실현에 대하여 무관심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분위기에 실망하여 193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 났다.58)
그가 유학한 맥코믹신학교는 이전의 보수적 전통과는 달리 1920 년대 이후 중도적 신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회복 음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지상 천국 건설의 신학적 체계를 잡았고, 1933 년에 귀국하여 장로교총회 농촌부 총무를 맡아 농촌 운동을 전개하였 다.59)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배민수가 추구한 사회복음주의는 자유주 의의 함의(含意)보다는 복음주의의 성격이 강한 입장이었다.60)
57) “기독신우회선언,” 「기독신보」 1929.6.12; 최영근, “국제선교협의회 예루살렘대회(1928)와 한국 기독교의 반응: 선교신학의 균열과 사회복음이해,”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4 (2014), 182.
58) 최재건, “배민수 목사의 미국에서의 활동,” 『신학논단』 51 (2008), 115-8.
59) 배민수,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God (서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2), 339.
60) 사회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 양면적 특징이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야 한다. 사회복음주의 안에서 자유주의 유산을 반영하는 워싱톤 글래든, 세일러 매튜스, 라이만 애보트가 있고, 복음주의 전통을 강조하는 라우센부쉬, 조시아 스트롱, 조지 헤론이 있다. 자유주 의 성향의 진보적 사회복음주의는 사회의 도덕적 개선과 사회정의 실현에 우선성이 있고, 복음주 의적 성향의 온건한 사회복음주의는 복음주의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대속, 원죄, 구원, 영적인 관계라는 개념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에 관하여, Matthew Bowman, “Sin, Spirituality, and Primitivism: The Theologies of American Social Gospel, 1885-1917,” Religion and American Culture 17, no. 1 (Winter 2007), 99-101.
배민수는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라고 지칭하였지만, 이는 보수적 복음주의와는 구별되는 사회복음주의를 함의한 “사회복음주의적 복음주의”로 이해해 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배민수의 농촌 운동은 “정신적 운동”으로서 복 음주의적 성격이 강하였고, 농촌 복음화와 복음주의 지도자 양성을 강조 하였다.
조선 인구의 8할이 농민이라면 전조선은 농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 다. … 농촌이 교화되면 조선 전체가 교화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는 전조선을 교화케 하기 위하여 이 농촌 운동을 제창한 것이다. … 이상의 정신을 관철키 위하여는 복음주의에 정예(精銳)인 남녀지도자 를 양성하여야 할 것이니 … 저들로 하여금 복음을 확지(確知)하여 차 (此)를 실제화하게 하며 완전한 신앙 생활을 위한 모범을 건설케 하 되 … 8할 이상의 전국농민을 획득(獲得)하자는 것이다.61)
정신적 운동과 함께 배민수는 “물질 운동”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따라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내어놓음으로써 공적인 토지소유를 실현하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상호부조의 협동생활을 이룸으로써 모든 사람이 표준적 물질 생활을 누리는 모범 농촌 건설을 추구하였다. 그러 나 “물질 운동”은 그의 “정신적 복음 운동”과 구분되지 않았고, 복음의 정신으로 시작되어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배민수는 이를 가리켜 “정신적 물질 운동”이라 하였다.62)
그의 “정신적 물질 운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교회와 기독교 농 촌 운동을 공격하며, 농촌 사회에 침투하여 농민들을 계급투쟁으로 이끄 는 사회주의 세력에 맞서 반공주의를 드러냈다.
둘째, 기독교농촌연구회 그룹의 주요 이념인 기독교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념적 비판이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셋째, 진보적 인 사회복음주의가 경제적 운동에 치중하는 것과 구별하여, 정신적 가치 를 앞세우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넷째로, 현실문제에 무관심 하고 복음의 사회적 실천을 경시하는 보수적 복음주의를 극복하며 사회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였다.63)
61) 배민수, “복음주의와 기독교농촌운동(2),” 『농촌통신』 2 (1935); 방기중 편, 『복음주의와 기독교 농촌운동』(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35-8. 62) 배민수, “기독교농촌운동의 지도론 (1),” 『종교시보』 5 (1936/1). 63) 방기중, “일제하 배민수의 기독교 농촌운동론: 장로교 농촌운동의 정치사상적 접근,” 『동방학지』 99 (1998), 201-5.
이러한 신학적 실천은 “농촌 운동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길”이라는 기독교 민족주의와 결 합되어 있었고, 복음의 실천으로 농촌과 민족 공동체의 처참한 현실을 구제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복음주의 성향의 사회복음주의와도 부합되었다.64)
이러한 관점에서 배민수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고, 혁명 을 앞세워 폭력을 부추기는 사회주의를 기독교가 맞서 싸워야 할 악의 세력으로 인식하였다.65)
신앙적으로나 기독교 농촌 운동에 있어서 사회 주의는 커다란 위협과 장애였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주의에 대한 이념적 투쟁을 외친 사람은 장로교 농촌부 간사 박학전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욕하고 구주를 짓밟는 낭(狼)의 무리가 어대로 드러오는지 무슨짓을 하는 지 모르고 방심한다는 것은 괴현상(怪現象)”이라고 우려하면서, “반종교 운동자 무신론당(無神論黨)을 향해 의분과 투쟁을 선언”하였고, “싸우자 무신론자들로!”라고 부르짖으며 기독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66)
이 후 배민수의 반공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악착한 독 재와 차별대우로서 전 인류를 노예화시켰다”고 비판하면서, “공산주의는 독재성을 떠날 수 없고, 역사 이래 모든 독재자들의 악질을 종합적으로 발표하여 최고봉을 그려놓았다”고 보았다.67)
이러한 배민수의 반공주의 는 미국에서 유학과 목회활동을 하면서 강화하게 된 “기독교와 민주주의 와 미국을 일체화”하는 친미주의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았다.68)
64) 배민수,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God, 301-2.
65) 배민수, “협동,” 『농촌통신』 5 (1935); 방기중, “일제하 배민수의 기독교 농촌운동론,” 216-7.
66) 박학전, “복음을 들고 나가자, 싸우자,” 『농촌통신』 4 (1935).
67) 배민수, 『그 나라와 한국농촌』, 109-10, 114-5.
68) 방기중, “일제하 배민수의 기독교 농촌운동론,” 218.
2)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 사회복음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의 접근
주류 개신교의 입장과는 달리, 사회주의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 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 기독교”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취하였고, 교리적이기보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사회적 상황 속에서 재해석하고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의 배경으로는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사회복음주의나 기독 교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적 기독교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고, 교권적 위 치보다는 YMCA와 같은 기독교 기관에서 활동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 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을 자극하였던 중요한 요인은 민족주의였다. 이들은 안창호계의 수양동우회나 이승만계의 흥업구락부의 단체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민족주의 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민족 공 동체에 대한 기독교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사회 현실에 무관심한 주류 개신교에 대한 사회주의의 비판을 수용하며 사회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특히 자본주의 폐해 비판과 사회 개조에 있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념적, 신학적 비판보다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도전에 대응한 기독교 적 대안에 집중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신흥우는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의 반기독교 운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사회복음주의 입장에서 보수적인 주류 개신교를 개혁하고, 기 독교의 사회 문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의 반기독교 운동은 “교회에 대한 반대”이지 “그리스도의 인격과 정신에 대한 반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자본계급 에 의해” 이용당하고 “우익정당과 손을 잡으며”, “유산자들이 교회의 실 권”을 장악하여 왔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 비판은 정당한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반기독교 운동을 “절요(切要)한 반성제”로 활용하여, 교회 가 “민중을 위한”, “무산계급의 앞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교회로 거듭나 야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뜻”이라 역설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지 않는다면, 인류애의 차원 에서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언젠가 일치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였고, 교 회 안에도 “교회의 민중화를 위해 고심하는 동무가 적지 않다”고 공감을 표하였다.69)
69) 신흥우, “사실은즉 우리도 고려중에 잇슴니다,” 『개벽』 63 (1925), 71-2; 신흥우, “반기독교운동에 대하야,” 『청년』 5 (1925/11), 3-4.
신흥우가 언급한 교회의 민중화는 사회 개조 운동과 관련있 었다. 그는 국제 YMCA를 통해 사회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 312 神學思想 181집 · 2018 여름 기독교의 사회 개조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국제 YMCA의 지원으로 1925년부터 YMCA 농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28년 예루살렘 국 제선교협의회 이후 “한국 기독교의 실제화, 민중화”를 주창하며 “사회적 기독교” 실현에 앞장섰고, 이러한 노력은 흥업구락부를 결성하여 실력 양성론에 입각한 문화 민족 운동을 추구하였던 행보와 다르지 않았다.
신흥우는 사회주의의 도전에 대응하여 기독교적 대안으로서 사회 개조를 추구하는 사회복음주의적 기독교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대위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 며 1920년대 기독교 사회 개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는 본래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러들로(John Macolm Forbes Ludlow), 모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 킹슬리(Charles Kingsley) 등이 중심이 되어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사회적으로 실현함으 로써,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시작한 기독교 사회 개혁 운동 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자대학을 설립하고, 자본계급의 착 취에 대항하여 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모리스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 주의는 사회주의의 원리로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기 독교의 원리로 재구성하는 것이며, “비기독교적 사회주의자를 기독교화 하고, 비사회적인 기독교인들을 사회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70)
모리스 에 따르면 “기독교는 사회주의의 유일한 기반이며 참된 사회주의는 건강 한 기독교의 필연적 결과”였다.71)
70) Bernard Murchland, The Dream of Christian Socialism: An Essay on Its European Origins (Wash ington and London: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 1982), 4-5.
71) Torben Christensen, Origin and History of Christian Socialism, 1848-54 (Copenhagen: Universi tetsforlaget I Aarhus, 1962), 136.
기독교 사회주의가 의미하는 사회주의 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공산주의와는 전혀 달랐고, 오히려 “공상적 사회주의”와 가까운 것이었다.72)
72) “공상적 사회주의”는 생시몽(Saint-Simon)과 뷔세(Buchez)와 같은 19세기 초반의 초기 사회주의 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초기 형태이다. 지배계급의 억 압과 착취에 맞서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의 삶을 개선하고,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기독교적 도덕률을 공동의 목적으로 삼아 모든 사람이 형제처럼 여기고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종광,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한국정치학회보』 26 (1993/2), 97-106 참조.
모리스의 제자 웨스트코트 (Brooke Foss Westcott)가 설명한 바와 같이 기독교 사회주의가 표방하는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와 정반대의 용어”로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경쟁 체제가 아닌 공공의 복지를 위해 협동과 섬김을 실천하는 운동이었다.73)
이대위는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1921년에 귀국하 여 YMCA 학생부 초대 간사를 맡았고, 사회주의의 도전에 대응하여 기 독청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독교가 “사회 혁명에 대본 영(大本營)이 되며 사회진화(社會進化)에 선지자가 되려면” 스스로 변혁되 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74)
그가 사회주의의 비판을 수용한 이유는 타 락하고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지적하고, 사회 개조에 무력한 한국 교회를 반성하고 개혁하려는 동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와 사회주의가 사회를 개조하려는 목적에 있어서 동일하고, 자유와 평등 과 박애를 실현하려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동일하다고 이해하면서, 기 독교와 사회주의의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 회주의의 관계를 이렇게 논하였다.
오인(吾人)이 동경(憧憬)하는 무삼 신세계를 조성(造成)코저 함에는 기 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相同)하다고 사유(思唯)한다. 하고(何故)요 하면 피양자(彼兩者)는 현사회정서(現社會程序)의 제반폐해(諸般弊害)를 각(覺)할 뿐만 아니라 차(此)를 개조(改造)하기로 목적하는 자인 때문 이다.75)
73) Murchland, The Dream of Christian Socialism, 14-21.
74) 이대위, “나의 이상하는 바 민족적 교회,” 『청년』 3 (1923/6), 15.
75) 이대위, “사회주의와 기독교사상,” 『청년』 3 (1923/5), 9.
물론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결정적 차이를 간과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의 무신론과 반종교주의를 비판하였고, 또한 자본주의의 착 취와 계급제도의 억압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의 유물사관 과 폭력혁명론을 비판하였다.
이대위는 사회주의가 이러한 한계와 오해 를 스스로 극복한다면 사회 개조를 위해 기독교와 연대와 협력이 가능하 다고 인식하였다.76)
이같은 견해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주 의를 기독교의 틀로 바라본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청년」에 등장 하는 기독교를 “약자를 위한 종교”요 예수를 “사회주의자”로 바라보는 논 설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77)
이대위가 바라보는 “사회주의의 이상” 은 이 땅에 실현되는 지상천국이요, 모든 사람들이 “쟁투와 시기등이 없 이 누구나 다 천국의 행락생활(幸樂生活)을 하는 것”이었다.78)
이를 위해 이대위는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섬김에 기초한 영국 기독교 사회주의 모 델의 조합 운동을 대안적 경제 운동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대위는 1920년대 중반 미국 유학 후,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 참여하며 인격개조 를 강조하였고, 장로교총회의 기독교청년면려회를 중심으로 “정신사업” 에 집중된 기독교 사회 개조 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에 서 멀어졌다.79)
76) 이대위,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귀착점이 엇더한가,” 『청년』 3 (1923/9), 10-12.
77) 유경상, “사회주의자 예수,” 『청년』 3 (1923/7), 32; L.생, “기독교인과 비평,” 『청년』 6 (1926/8), 14.
78) 이대위, “민중화할 금일과 합작운동의 현실,” 『청년』 4 (1924/4), 8-9.
79) 김권정, “1920-30년대 이대위의 기독교사회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7 (2008), 121-3.
이대위가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하였지만,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 하였다면, 기독교 농촌 운동을 통해 “예수촌건설”을 추구하며 기독교 사 회주의를 실천했던 인물로 유재기를 들 수 있다.
한국 개신교에 기독교 사회주의가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된 계기는 1925년에 일본의 가가와 도요 히코(賀川豊彦)의 신학이 한국에 소개되면서부터였고, 그의 기독교 사회 주의는 유재기를 비롯하여 민족 공동체의 현실과 사회주의 도전 앞에 기 독교의 사회적 실천을 고민하는 기독 청년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가가와는 고베신학교 재학 중 빈민촌에 들어가 빈민 사역을 하면서 산업 화와 도시화에 따른 빈곤의 사회적 문제를 직시하였고, 인간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케하는 복음을 기독교의 본질 로 이해하며 기독교 사회주의에 공명하였다. 그는 미국 유학 후 일본에 서 노동조합, 농민조합, 빈민 운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를 적 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가가와는 사회악을 분석하고 자본주의 폐해를 지 적함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유용성을 인정하였지만, 기독교의 평화주의 와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폭력 혁명을 반대하였다. 그 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유물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을 노예화하는 제도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적, 정신적 원리를 실천하여 인간다운 사회, 곧 하나님 나라의 지상건설을 추구하였고, 이러한 점에 서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가가와의 모델이 되었다.80)
특히 가가와는 생명과 노동과 인격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인간을 노예와 상품으로 전락 시키는 자본주의에 맞서 개개인이 상호 복지를 위해 상호부조(相互扶助) 하는 “애(愛)의 사회주의”를 지향하였다.81)
유재기는 1924년에 일본대학 사회학과에서 유학하면서 가가와의 글 을 처음 접하였고, 가가와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한국농촌의 처참한 현실 을 실제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던 유재기에게 그의 삶과 실천을 지 도하는 이념이 되었다.82)
80) Richard H. Drummond,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1), 228-35; Robert Schlidgen, Toyohiko Kagawa: Apostle of Love and Social Justice (Berkeley, CA: Centenary Books, 1988), 88-114.
81) 장규식, “1920년대 개조론의 확산과 기독교사회주의의 수용·정착,” 119-20.
82) 김권정, “1920-30년대 유재기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회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0 (2009), 174-6.
그는 일본대학을 중퇴하고 숭실전문 농과강습 소에 입학하였고, 조만식과 배민수, 최문식 등 기독교 농촌 운동의 동지 들과 만나 농촌전도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1929년 6월에 기독교농촌연 구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재기는 기독교농촌연구 회의 이념과 실천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 궁극적 목적으로 “예수촌 건설” 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한국농촌이 “문맹, 기아, 질병, 음주, 도박, 사 기, 미신, 불평등의 죄악”이 가득한 “영적, 육적인 지옥”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자들이 한손에는 주의 말씀(복음)을 들고 한손 에는 쟁기를 들고 농민을 구원코자 …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어 예수촌 건설을 위하여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예수촌 건설의 신념으로 유재 기는 “예수의 주의대로 살아 육적으로는 배고픔이 업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며 … 신(神)을 위하여 일천팔백만의 농민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다는 신념”
을 강조하였다.83)
83) 유재기, “예수촌건설의 삼대리론(三大理論),” 『농민생활』 3 (1931/9), 32-3.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각 지역에서 교 회와 그리스도인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협동조합 및 농우회 조직을 제시 하였다.
이러한 이념과 실천 방법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농촌 사회에 적 용하여, 사랑과 협동의 삶을 통해 농촌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참 상을 극복하고, 영적인 구원을 추구하여 마침내 이상사회와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구현이었다.
유재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개인주의적 이윤추구가 사회를 죄악으로 빠뜨렸다는 인식에서 사회주의와 공명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크스 주의의 유물론과 폭력혁명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르침을 실생 활에 구현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강조점을 두었 다.
이러한 면모는 1930년대 중반 장로교 농촌부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으 로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 서 드러났다.
그는 이윤제에 근거하는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는 기독교 적 해결책으로서 협동조합을 제안하였다.
협동조합은 “이윤제라는 수단 과 방법을 제거”하고 “애(愛)의 생활을 실현”하여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생활을 선하게 경영”하는 방안으로서, 억압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기반하는 불의한 사회를 개조하여 애(愛)의 사회를 건설하는 기독 교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근본적으로 현실 경제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제다(諸多)의 폐 해(弊害)는 이윤을 전제로 하는 제도로부터 발생되는 것이므로 자영(自營)의 능률(能率)에 따라서 애(愛)의 사회를 꾸미려는 노력전부(勞力 全部)가 협동조합의 목적이다.84)
유재기의 사회주의 관계는 1930년대 장로교 농촌부에서 함께 활동 한 배민수, 박학전의 복음주의적 반공주의 태도와 구별되었고, 기독교농 촌연구회 출신으로 사회주의 이념과 실천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최문식과 도 구별되었다.85)
84) 유재기, “산업조합이야기(1),” 「기독신보」 1935.1.1.
85) 장규식, “1920년대 개조론의 확산과 기독교사회주의의 수용·정착,” 130-31; 김권정, “1920-30년대 유재기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회사상,” 184-6.
3) 사회주의 수용의 입장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입장은 민족의 해방을 추구하며 민중 이 주체가 되는 급진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기독교를 사회주의의 관점 으로 해석하거나 기독교의 정신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인물들에게서 나타났다.
보수적 신학과 점진적 민족 운동을 벗어나 진보 적 신학과 급진적 민족 운동을 추구하였고, 계급적 차원에서는 부르주아 운동을 탈피하여 프롤레타리아와 민중 운동을 지향했다.
김창준은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른 감리교 목사로서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과 미 국 게렛신학교 및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유학 후 1933년에 감리교신학 교 교수로 임용되었다.86)
86) 조이제, “김창준 목사의 천국운동과 해방운동,” 『세계의 신학』 27 (1995), 123-7.
그는 1920년대-30년대까지는 기독교 사회주 의의 관점에서, 구령 운동에 우선순위를 두면서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을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기독교의 최고의 이상은 “구령 사업”과 “사회 사업”을 통해 “마음속의 죄악”과 “사회의 죄악”을 제거하여 “완전 한 천국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87)
87) 김창준, “금주운동과 조선기독교인,” 「기독신보」 1932.2. 3.
예수 운동은 사회 운동이나 정치 운동이 아니고 “기독교 운동의 근본 정신은 구령 운동”이었다.88)
따라서 김 창준은 무신론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으며, 사람 을 불안에서 구원할 수 없고,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할 수 없다고 강조하 였다.
그러면서 당시 교회가 “자기의 근본 사업인 구령 운동보다 맑스주 의자와 같이 경우 개선 운동에 치중함”을 우려하면서, “하나님 중심, 신 앙중심, 속죄구령 제일주의로 하지 않고 맑스의 유물주의적 경향으로 흐 르는 교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겟다”고 역설하였다.89)
그럼에도 불구 하고, 김창준은 구령사업이 목적이라면 사회사업은 보조물로서 양자의 병행을 강조하였고, 기독교는 “절대의 개인주의인 동시에 절대의 사회주 의”라고 주장하였다.90)
또한 사회적 책무를 등한시하는 “교회주의”를 비 판하고, “교회와 사회의 담을 헐고” “사회 전체를 상대로 하여 구령 운동 과 사회 운동을 겸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정치적 공 정, 민족적 공정, 성적 도덕, 아동학대 등에 관하여 모든 사회적 죄악을 파멸하는” 기독교 사회 운동을 강조하였다.91)
그러나 김창준은 해방 이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상황 속에서 1946년 10월 2일에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인민 항쟁을 계기로 1947년에 좌익 운 동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에 참여하고, 1948년에는 월북을 감행하였다.
1920년대에 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김창준이 해방 후 사회주의적 기 독교로 전향한 계기는 “경제적 공평이 없는 곳에 정치적 평등과 세계 평 화는 없다”는 깨달음이었다.92)
88) 김창준, “맑스주의와 기독교,” 『신학세계』 17 (1932/4), 56.
89) Ibid., 58.
90) 김창준, “교회조직의 이상,” 『신학세계』 18 (1933/5), 28.
91) 김창준, “조선의 천국운동은 어떠케 할까?,” 『신학세계』 18 (1933/6), 12.
92) 「독립신보」 1947.1.30.
그는 민족 문제를 계급 차별의 문제로 인 식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고서야 정치적 자유와 평등도 가능하 다고 하는 사회주의적 민족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시각 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실천은 “착취당하는형제에게 해방을 주며” 노농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93)
이러한 사회주의적 민족 의식과 기독교 이해는 그의 사회주의 전향의 이 념적,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해방 후 사회주의로 전향한 김창준과 달리 최문식은 1920년대에 사 회주의적 기독교 인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최문식은 1923년에 미국 북장 로회가 설립한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계성학교는 이 지역 삼일 운동의 중심이었을 만큼 민족 의식이 강했다. 최문식은 계성학교 시절에 일제식민지 자본주의의 횡포로 민족적, 계급적 갈등이 심화되는 현실을 타파할 대안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94)
그가 사상의 또 다른 축인 기독교 신앙을 심화하며 사회적 실천과 연결시켰던 계기는 1925년에 숭실전문에 입학하여 조만식과 기독교농촌연구회 멤버 들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배민수, 유재기와 마찬가지로, 최문식은 조만 식의 기독교 민족주의에 감화를 받았고, 특히 기독교 농촌 운동을 민족 운동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이들과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최문식은 유재기와 마찬가지로 가가와 도요히코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 다. 그런데 조만식의 “복음주의”와 가가와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공감하 였던 최문식이 사회주의 의식을 기독교적으로 심화시킨 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95)
93) 「독립신보」 1947.2.5.
94) 김권정, “일제하 최문식의 사회운동과 기독교사회주의,” 『숭실사학』 26 (2011), 148-50.
95) 정태식에 따르면 대구 계성학교 출신으로 사회주의와 연결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특히 이재복, 권태희 등은 계성학교 졸업 후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해방 후 사회주의활동을 했 다는 점에서 최문식의 행보와 유사하다. 이들보다 앞선 계성학교 출신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로 김 단야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정태식, “기독교사회주의의 한국적 수용에 대한 일고찰: 최문식 목 사의 사상과 실천을 중심으로,” 『퇴계학과 유교문화』 39 (2006), 427-9.
배민수와 유재기의 회고에 따르면, 최문식 은 1926년에 일본에 다녀와서 공공연하게 사회주의를 표명하고, 예수의 정신을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실현하겠다는 말을 하여 갈등을 빚었다는 점에서 그가 이미 1920년대에 사회주의를 기독교적으로 수용했다는 점 과 기독교농촌연구회 그룹 안에 이념의 편차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96)
최문식은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선호하였고, 기독교 사회주의를 통해 자신의 사회주의 의식을 기독교적으 로 소화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와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고 차별성을 강조했던 반면, 최문식은 사회주의 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한 신간회 평양지회에 적극 참여 하였고, 1930년에 사회주의가 주도하는 청년단체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에 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대구로 내려와 기독청년들 을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 운동을 하였고, 1933년에는 대구의 노동자 소 비조합 결성과정에서 “기독교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건”의 주모자로 옥고 를 치르기도 하였다.97)
1920년대 최문식의 사회주의 의식을 명확히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가 1939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며 『신학지남』에 발표 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논문은 그의 사회주의적 기독교 인식의 일단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논문 서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일생을 통 하여 연구하고 고찰할 중심 문제”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비록 축약되고 부분적인 논문이지만 그가 이제까지 형성하고 앞으로 추구할 신학적 지 향과 핵심사상을 여기서 가늠해 볼 수 있다.98)
96) 배민수,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God, 310; 주태익, 『이 목숨 다 바쳐서: 한국의 그룬트비 히 虛心 劉載奇傳』(서울: 선경출판사, 1977), 106-110.
97) 정태식, “기독교사회주의의 한국적 수용에 대한 일고찰,” 418-9.
98) 최문식,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논고,” 『신학지남』 21 (1939/3), 8; 연규홍, “최문식,” 「한국기독 교와 역사」 2 (1992), 86-9.
그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교훈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라 고 역설하였다.
예수의 전도 목표가 이것이며 그 교훈의 종합명제가 이것이며 … 이 런 의미에서 예수의 복음이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이 라고 할 수 있으며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의 선전자이며 ‘하느님의 나라’ 운동자이며 또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희생자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99)
그는 하나님 나라를 크게 세 부분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분명히 어떠한 인간 집단을 지칭하는 것”;
둘째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받을 축복과 특권 등을 표시하는 것”;
셋째는 “순수한 말세론으로서 종말에만 속한 것”.
앞의 둘을 현세적 천국, 마지막을 종말론적 천국으로 본다면, 최문식은 지상 천국 건설에 강조점을 두었다.
종말론적 천국조차도 “하 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하 나님 나라의 실천적, 현세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의 신학 적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민중적 성격에 있었다: 하나님 나라가 지칭하는 특정한 인간집단은 “지극히 작은 자”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 는 자”이며(주체와 대상); 하나님 나라는 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축복과 특 권”을 약속하고(목적과 방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보듯이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선한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범위와 한계); “숨 은 보화 비유”에서 보듯,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추구해야 만 누릴 수 있는 삶임을 강조하였다(실천방법).100)
이러한 신학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최문식은 해방 후에 여운형이 중 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당 등 좌익진영에서 활동하면서 1946년 10월 인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0월 항쟁의 주동자로 미군정에 의해 3년 형을 언도받았고, 한국 전쟁 발발(勃發) 이후 석방되 었으나, 전향 발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북한 당국에 의해 고초를 겪다가 전란에 행방불명되었다.101)
99) 최문식,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논고,” 13.
100) Ibid.
101) 연규홍, “최문식,” 90.
최문식의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는 양쪽으로 부터 의혹과 비난을 초래한 이질적 구성체였으나,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 의 민중적, 혁명적 이해와 실천 속에서 공존하였다. 손정도 역시 기독교의 기반 위에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손정도에 게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매개하였던 논리는 민족주의였다. 그는 임시정 부를 떠나 1926년 이후 길림에서 목회를 하면서, 만주지역 동포들을 중 심으로 이상촌 건설을 위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활동하 였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는 임시정부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고, 민족 운동 을 위해 사회주의와 연대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1930년대 신 간회 해소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는 상 황에서 만주지역에서 민족 운동 세력의 힘을 모아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자 하였다.102)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농민호조사 발기문 연설에서는 “기독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이렇게 주창하였다.
기독(基督)의 사회주의(社會主義)가 압흐로 실현되여야 함니다.
우리가 시하(時下)를 쫏차 기독(基督)의 정신을 발휘(發揮)하나니 조선 내지(內 地)나 만주나 기독교적 신농촌(新農村)이 조직(組織)되여야 하겟고 압 흐로는 네게 잇는 소유(所有)를 다 이 농촌에 드리노켓느냐 하는 문답 으로 그 이가 교인되고 못됨이 나타나게 될것시다.103)
“자본가의 금전”에 맞서 “무산농민”(無産農民)이 자립하기 어려운 상 황에서 “빈자(貧者)끼리 협동호조(協同互助)하는 것으로 생산의 자본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농민호조사의 발기목적이었고, 여기에서 손정도 의 사회주의 성격이 드러났다.104)
102) 이덕주, “일제하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안창호와 손정도의 협력과 ‘공유가치’를 중심으 로,” 『신학과 세계』 63 (2008), 96-102.
103) “손정도 목회수첩”(미간행자료), Ibid., 110에서 재인용. 104) “농민호조사 발기문,” 「기독신보」 1927.6.8.
그의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주의를 거부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와는 결이 다른 사회주의 기독교를 함 의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압제와 폐해에 저항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의 인식과 방식을 택하면서도, 신념과 목적에는 그리스도의 가르 침과 정신을 두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사회주의를 수용하거 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민족 운동의 차원에서 기독교 의 정신과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대부분 은 교조적인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이었 다.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여운형도 있었다. 이들은 이동휘나 박헌영과 같이 기독교를 떠나 사회주의로 전향한 인물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Ⅳ. 나가는 말
이 논문은 1920년대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의 다양한 스펙트럼 을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현실이라는 외적인 상황 가운데 민족주의에 대 응하는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내적 논리를 통해 분석하였다.
사회주의 세 력은 1920년대 초반에 종교에 대한 이념적 비판을 가하며 반기독교 운동 을 전개하였고, 이는 주류 개신교의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비 판적 대응을 가져왔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세력과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면서 민족 운동의 주요 기반인 기독교 세력에 대하여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고 이에 따라 초기의 이념적 비판이 약화되었다.
이와 함께 기독교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사회적 기독교를 추구하며 사회 개조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 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협력과 연대가 모색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 반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 협동 전선을 비판하고 급진적 혁명을 추 구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개량주의 운동으로 공격하는 동시에 반기독교 운동을 재개하였을 때 기독교의 반공주의 역시 강화되었다.
이러한 차원 에서 민족주의는 192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계를 매개하는 중요한 여름 변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과 대응은 신학적 입장과 민족주의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보수적 신학의 성향이 강할수록 사회주 의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고, 기독교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하는 중도적 신학이나 기독교의 민중적,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 의 입장을 취할수록 사회주의 수용도가 높았다.
주류 개신교의 정통주의 신학은 민족주의와 연결관계가 약하였고, 사회주의의 반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과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신학적 비판의 입장을 취 하였다.
사회주의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적 기독교”로 사회 개조를 추구하였던 입장은 실력 양성을 통해 민족 공동체 회복을 추구하는 문화민족주의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신학적으로는 사회복 음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 한 입장은 민족 해방을 추구하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급진적 민족 운동 을 표방하고,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거나 기독교 의 가치를 사회주의를 통해 실천하고자 하였다.
사회주의에 대응하는 다 양한 신학적 입장은 민족 공동체의 현실에 대응하는 인식과 실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고,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 실천을 매개한 민족주 의 이념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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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이 논문은 1920년대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의 다양한 스펙트럼 을 일제강점기 사회 현실이라는 외적인 상황 가운데 민족주의에 대응하 는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내적 논리를 통해 분석하였다. 상호 대립적인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1920년대 중반에 민족 공동체의 회복과 독립을 위 한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는 민족 협동 전선의 맥락에서 민족주의의 매개 를 통해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나, 1920년 후반 이후 민족 운동 세력 이 분열하고 사회주의 이념이 교조화되면서 좌우대립이 심화될 때 사회 주의의 반기독교 운동과 기독교의 반공주의가 격화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과 대응은 신학적 입장과 민족주의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정통주 의와 보수적 신학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신학적 비판의 성격을 띠었고, 민족주의와 관련성은 적었다. 사회주 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은 사회복음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에 기 반하여 사회 개조 운동을 전개하였고, 실력 양성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회복을 추구하는 문화 민족 운동과 연결되었다.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입 장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기독교의 가치를 사 회주의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급진적 민족 운동과 연결되었다. 이로 보건대, 192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계를 매개하고 사회적 실천과 기독교 신앙을 매개하는 주요 변수는 민족주의 였다. 192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다양한 관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한국 사회에서 이념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교회의 역할 을 성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주제어 한국 기독교, 사회주의, 민족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민족주의
Abstract
A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Socialism and Protestantism in the 1920s Korean Society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Young-Keun Choi( Assistant Professor, Church History Hannam University)
This paper analyzes a wide spectrum in the Korean Protestant approach to Socialism in the 1920s under Japanese rule.. Nationalism in an important factor in this spectrum. While Socialism and Protestantism were in competitionthey did come to seek common ground for the independence of the nation, pursuing a united front mediated by nationalism in the mid 1920s. However, both competing forces became more hostile in the late 1920s after the collapse of the national united front as nationalism leaned toward conservatism and communism radicalized. Theological tendencies and nationalist positions informed the ways in which the different Protestant groups understood and responded to socialism. The theologically conservative approach was aloof from nationalism and criticized socialism endangering the Christian faith and Korean cultural values. Accepting the Socialist criticism, the theological moderates from Social Gospel and Christian Socialism, most of whom affiliated with cultural nationalism, saw social Christianity as a way for the church to take the responsibility for the Korean society. The progressive group integrated socialism into Protestantism and pursued a radical nationalism for the sake of the Proletariat reinterpreting Christian teachings and practices from the perspective of socialism
Keyword: Korean Protestantism, Socialism, Nationalism, Christian Socialism, Protestant Nationalism
논문접수일: 2018년 4월 18일, 논문수정일: 2018년 5월 1일, 논문게재확정일: 2018년 6월 10일
神學思想 181집 · 2018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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