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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43)/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3회

이글을 보면 정조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까지 공무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과장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정무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이외에도 시간을 쪼개 자신이 관리하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고 더러 왕가의 친척들에게도 편지를 적기도 하였다.


정조는 정무에 진력하면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나는 수응(경연에서 배움)하느라 바쁘고 간간히 윤음綸音(신하.백성에게 고하는 문서 작성) 짖느라 며칠째 밤을 새고 닭 울음을 듣고 있으니 고생스럽다.” 하여
< 1798년 12월 1일>
  윤음을 반포하기 위해 밤까지 지새우며 골머리를 썩이는 대목은 이를 말한다
.
정조임금의 일상모습과 정무에 종사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역사기록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한편, 어찰첩에 흔하게 등장하는 사연의 하나가 정조의 독서벽이다.
그는 독서에 골몰하여 창밖의 일은 전혀 모르지만
“ 다만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은 백성의 일이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편지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거나 아예 소식조차 전하지 못했다고 했다
<1797년 10월24일>

그리고 공부와 관련해서 정조는 “ 『춘추春秋』는 인명이 잡다하여 나와 이해하기 어렵고 그 때문에 이리 저리 튀는 벼룩마냥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겠다고 농담처럼 말할 정도로 학문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799년 12월 11월 2일

다른 한편, 어찰첩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이 진행되지 않거나 정국을 어지럽히는 상소나 사안을 접하면 쉽게 화를 내고 거친 언사를 서슴없이 하는 정조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이 지났다. 나의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나 껄껄 웃을 일이다.
보고 난 뒤에는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만 줄인다.”
< 1799년 11월 24일 아침>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4회

정국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화가 치밀어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밤잠까지 설쳐 가며 심환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요즘 말로 정조는 다혈질적인 소유자였던 것 같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리지 않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

“ 황인기와 김희수가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라고도 했다
< 1800년 윤 4월 19일>

임금이 사용할 언어가 아니 잖는가?


정조는 측근 인물인 서영보를 평하면서
“이 사람은 그저  염량세태만 볼 뿐이다. 참으로 호로자식이라고 하겠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근래의 꼴은 본색을 점점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 라고
<1798년 8월 16일>

비난할 정도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욕설에 가까운 언사를 퍼부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조는 시사時事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조는
“나는 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의 속하니 이 때문에 안화(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어 너무 답답하다”라고 했다
<1798년 7월8일>

정치가 돠어가는 꼴에 화가나고 그 때문에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는다고 했다.
그리고 정조는 심환지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시사(時事)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운 증상까지 얻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자신의 감정과 속내를 가감없이 보여 주었던 것이다

어찰첩은 정조의 인간미를 알 수 있는 대목도 나온다

정조는 심한지의 부인이 병환이 낮아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부인은 쾌차하였는가 삼아를 보내니 약으로 쓰도록 하라
<1797년 11월 3일>

편지를 보내 부인의 안부와 함께 쾌유를 빌고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정조는
”부채를 보낸다. 이 전복과 꿀은 맛이 좋기에 경과 나누어 맛보고자 한다. 편지와 함께 약관 보낸다.
< 1799년 5월 2일> 거나

“지금 같은 무대에는 50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본다. 요즘은 잘 지내는가?
나는 오늘 간소한 음식을 준비하여 정성껏 경축하였다.
인편을 통해 찬합 하나를  나누어 주니 받아서 맛보길 바란다.” 고
<1799년 5월 5일> 보냈다

이렇듯 심환지에게 인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5회

‘어찰첩’에는 물목이 자주 등장하는데 정조가 심환지에게 각종 물품을  하사한 것들이다. 심한지의 마음을 꼭 잡으려는 의도도 없지 않겠으나 정조의 다정다감한 인간적 면모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늦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심환지의 아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심환지는 과거 시험에 낙방한 아들 심능종(1775~ 1827) 때문에 상심하고 있었다.

“만약 300명 안에만 들더라도 답안을 냈으면 경이 심하게 늦기 전에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를 보도록 조치하려 했으나, 그리 되지 못했다고 한다.”
<1799년 10월1일>고 했다

또한 어찰첩에는 정조의 건강 상태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어찰의 곳곳에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정조는 과거부터 병마에 시달렸다 .<정조실록에 보이는 몇 대목을 보자

(1)상上에게 부스럼 병이 있었다 대신 각신과 약원의 세 제조를 소견하였다
(2)전교하기를
“머리에 난 부스럼과 얼굴에 생긴 종기가 어제부터 더욱 심해졌다.
씻거나 약을 붙이는 것도 해롭기만 하고 약물도 효험이  없어서 기氣가 더 막히고 쌓여서  화가 더 위로 치밀어 오른다,
얼굴은 모든 양기가 모인 곳이고 머리도 뭇 양기가 연결되어 있는 곳인데 처음에는 소양 부위에서 심하게 화끈거리더니 독맥부위로 뻗어 나갔다가 왼쪽으로는
귀....................중략.....

성질이 냉한 약재를 많이 쓸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오직 화를 발산시키고 열어주는 처방을 써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경락의 침을 맞는 것이 합당한지  그 여부를 여러 의원들에게 물어서 아뢰어라”

하였는데 약원이 아뢰기를 “삼복에는 침을 놓지 말라는 경계 의서에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잠시 경락을 소통시키는 것에 대해 불과하므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하여 마침내 새 부위에 침을 맞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6회

(3)내의원 제조를 불러보고 상이 이르기를
“ 머리의 부스러움은 하찮은 일이다마는 5월 20일 후부터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며칠 전부터 두통이 점점 심하고 진독이 뻗친 데다가 이질 증세까지 있다.” 고 하였다

도제조 홍낙임이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하고 창늠산(倉廩散)을 의논하여 정할 것을 청하고 제조 정창순이 숙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조는 사망하기 7년 전부터 머리에 난 부스럼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 때로는 밤잠을 설치며 두통을 앓는 것 같은 고생을 하였다.

정조는 치료를 위해 부스럼에 약을 붙이거나 자신의 요구에 따라 침을 놓아 병증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증세는 만년에 다시 위협하였다.

다른 글과 정조 ‘어찰첩’에도 정조의 병과 관련된 대목이 적지 않게 나온 대목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그 몇 대목이다.

1)“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째 고통스럽다 <1797년 1월 5일 >

2)6월14일에 적신(賊臣) 김조순은 정리소의 당상관으로 여러 벼슬아치와 함께 정리소(整理所)에 나갔다.
이 날의 상께서 절후(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  때문에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을 연기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이어 천신에게 입시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영춘헌 동쪽에 있는 여경헌에서 임금을 접견하였다.

천신이 문후를 마치자 상上께서 옷깃을 풀어 헤치고 부스럼이 난 곳을 보여주었다.

가슴과 젖꼭지 사이에 사이 부위에 좁쌀 같은 강낭콩 같은 크고 작은 부스럼이 십여 낱알이 있었는데, 모두 고름이 가득 차 있었다. 상께서 고약을 걷어내고 보여주는데 안색이 매우 괴로워 보였다.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데, 금년에는 요 몇 해보다 무엇 때문에 심한지 알지 못하겠구나.
한 번이라도  마찰하기만 하면 쑤시고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할 지경으로 옷을 입고 진찬례(進饌禮) 할 수 없음을 부득이하게 잠시 진찬의 시기를 미루었고 소일 할 것이 없어서 함께 수작을 하고자 하여 부른 것이다.“라고 하셨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7회

곧 다시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기대어 쉬면서 앉아 계시면서 모시는 사람에게 명하여 담배를 내오게 하시고는
” 금일 매우 조용하니 함께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교를 하였다.

3)나는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상승하여 등이 뜸을 뜨는 것 같이 뜨겁고 눈은 횟불같이 시뻘겋고 숨은 가쁘게 쉴 뿐이다. 시력은 현기증이 심하여 역시 책상에서 힘을 쏟을 수가 없다.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참지 못하게 한다.

4)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와 얼굴이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른다
눈곱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잦아든다.
대저 태양의 잡다한 증세가 모두 소양의 여러 경락으로 귀결되어 이근耳根과 치흔의 핵이 번갈아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 1800년 4월 17일>

5)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 나는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졌는데 그동안 차가운 약재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체면을 차리려고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를  써주었다.
올 한 해 동안 황련을 1근 가까이 먹었는데 마치 냉수 마시듯 하였으니 어찌 대단히 이상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 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니 이만 줄인다
<1800년 6월 15일>

이런 사연을 보면 정조임금의 병인은 1~2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은  곽란으로 며칠 동안 고생하고 있으며

(2)에선 정조가 직접 김조선에게 가슴과 젖꼭지 사이에 크고 작은 부스럼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고름이 가득 찬 부스럼 때문에 스치기만 해도 고통스럽고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정조는 공식 일정을 중지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증세가 수년 전부터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3)에서는 눈이 시뻘겋고 등은 뜸을 뜨는 것 같이 아프고 숨이 가쁜 증세를 보여준다.

(4)에서는 눈곱이 생기며 머리가 붓고 목과 피가 마른다고 하였다.

(5)에서는 화기가 끓어올라 스스로 조제하여 약을 몇 칩이나 달여 먹는데도 차도가 없고 열 때문에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증세를 언급하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8회


(1), (4), (5)는 모두 정조가 심환지에 자신의 병세를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한 것이고.

(2)의 경우는 자신이 측근으로 알려진 김조순에게 일러준 것이다.

(3)은 정조임금이  외사촌인 홍취영(1759년~?)에[게 일러진 내용이다.

이처럼 정조는 자신의 측근과 인척에게 도루 자신의 병세를 알려주고 있거니와 이들에 인간적으로 가까웠을 뿐 아니라 모두 신임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병세를 직접 보여주거나 알려주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조가 6월 초에 등창이 나서 20여 일 만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정조의 증세는 복합적이었고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년 동안에 정조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정조의 사망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병적일 정도로 일에 집착을 보이는 그의 성격,항상 뒤따라 다니는 격무와 과로 여기에 사소한 일에도 화를 삭이지 못하는 성격, 잦은 병치레 등이 그 수명을 단축시킨 것으로 아닌가 하는 판단이 된다. 당시 정조의 죽음 직후에 의혹이 없지는 않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에서
정조의 사인과 관련하여 독살설을 언급한 바 있다.

비록 다산은 풍문에 기대어 정조의 독살을 간접적으로 제기하였지만 내심 그것을  믿지 않았을까?

다산이 ‘해랑행(海浪行)’과 ‘기고금도장씨여자사 그리고 ’염우부‘ 등을 통해 정조의 독살을 강하게 우의(寓意)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8회


(1), (4), (5)는 모두 정조가 심환지에 자신의 병세를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한 것이고.

(2)의 경우는 자신이 측근으로 알려진 김조순에게 일러준 것이다.

(3)은 정조임금이  외사촌인 홍취영(1759년~?)에[게 일러진 내용이다.

이처럼 정조는 자신의 측근과 인척에게 도루 자신의 병세를 알려주고 있거니와 이들에 인간적으로 가까웠을 뿐 아니라 모두 신임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병세를 직접 보여주거나 알려주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조가 6월 초에 등창이 나서 20여 일 만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정조의 증세는 복합적이었고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년 동안에 정조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정조의 사망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병적일 정도로 일에 집착을 보이는 그의 성격,항상 뒤따라 다니는 격무와 과로 여기에 사소한 일에도 화를 삭이지 못하는 성격, 잦은 병치레 등이 그 수명을 단축시킨 것으로 아닌가 하는 판단이 된다. 당시 정조의 죽음 직후에 의혹이 없지는 않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에서
정조의 사인과 관련하여 독살설을 언급한 바 있다.

비록 다산은 풍문에 기대어 정조의 독살을 간접적으로 제기하였지만 내심 그것을  믿지 않았을까?

다산이 ‘해랑행(海浪行)’과 ‘기고금도장씨여자사 그리고 ’염우부‘ 등을 통해 정조의 독살을 강하게 우의(寓意)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79회

내의원 수장이었던 심환지가 자신의 먼 친척 사람인 심인을 어의御醫로 발탁하여 왕의 진료를 맡게 한 사실,  본디  정조와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대립적 관계에 있다는 점 왕의 죽음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점 등 때문에 정조의 죽음에 의문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것이 독살설로 이어졌다.

실제로  영남 남인과 기호의 남인 벽파 그리고 노론 벽파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정조의 죽음에 의혹을 품을 개연성이 충분하였다고 본다.

정조의 사망 이후에 전개된 정치적 파란과 실제로 정조가 이룩해 놓은 개혁 정치의 성과를 모조리 훼손시킨 점을 감안한다면, 정지의 독살설은 공감을 얻을 소지가 충분하다 .

하지만 정조의 오른팔 채제공 사망 이후 정조의 최측근(정권장악)벽파계가 있었고, 반면에 남인(정약용등)을 위시한 다른 정파들은 정조의 건강과 관련한 정보를 전혀 접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정조의 죽음과 관련한 풍문은 풍문에 그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랫동안 지병이 있었으며 逆賊 내의원으로 몰렸던 심인의 연훈방 처방 역시 정조가 직접 요구한 처방이었다.

더욱이 정조 자신 이 조제와 처방을 지시할 정도로 어학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정조의 사망 당시 혜경궁 홍씨도 옆에서 정주의 병환과 죽음을 직접 지켜보았다.

이런 등등의 증거와 정황을 봤을 때 정조 독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추정은 된다.

이 ’어찰첩‘은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어찰첩의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궁중 외부에서 이르는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는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 ~~~

이 어찰첩을 통해서 보면 정조와 심환지는 매우 가깝고 인간적인 신뢰와 믿음을 구축한 사이였다.

하지만 임금과 신하라는 공적인 관계를 보면 둘의 정치적인 입장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심환지는 정치적 입장과 개인적인 입장에 서로 맞물리면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동반자로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80회

정조는 심환지를 비중 있는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정조는 자신이 구상하고 운영하는 탕평 정치의 틀 안에서 자신의 반대파인 벽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심환지 의견과 벽파의 정치적 입장을 도외시 하지는 않았다.

물론 정조는 여러 정파의 의견에서도 귀를 기울였다.
심환지는 정조의 정치적 입장과 반대편에 선 인물이지만 정조는 전국의 운영과 자신이 원하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벽파의 우두머리 심환지와 같은 노련한 반대파의 정치력을 필요로 한 것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

심환지 또한 정부의 국정 운영에 꾸준히 협조를 하였다.
심환지의 손자 심의요가 남긴 조부의 행장은 양자와 관계가 어떠했음을 알 수 있다.


양자는 군신의 관계로서 신뢰에 기반한 국정 운영의 파트너였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정조는 국왕이었기 때문에 심환지만 관리한 것은 아니었다 .

그는 국왕이라는 위치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각 정파와 자신이 사적으로 구축한 정보망을 통해 널리 정보를 수집하였다.

정조는 노론과 남인 시파와 벽파 등 각 정파의 정보를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구상대로 정파를 이끌어갔다 ,

심지어 정조는 이러한 정보를 활용하여 자신으로 정치 구상에 반대하거나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던 세력을 견제하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정조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정조가 벽파에 의리까지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간 것은 심환지와 같은 벽파계의 지속적인 요구가 있었고, 정조와 심환지는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서찰을 통해   정조의 정국 운영 방식, 18세기~19세기 전국에 등장한 노론 벽파계의 동향과 특성 그리고 당대 정치사의 이면과 정조임금 시대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조가 보낸 어찰의 수신자이자 정조 만년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심환지는 정조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자료상에 보인 그는 누구보다 정조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심환지의 손자 심의요가 남긴 조부의 행장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던가를 집작할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81회


《정조가 세상을 떠나니 부군이 애통해하며 살고자 하지 않았다. 국상에 상복을 벗은 뒤 집으로 돌아와서 집안 사람들과 함께 서로 향하여 곡을 하였다.
그때 흘러내리는 눈물이 물결처럼 얼굴을 덮어 흐르니 보는 사람이 감동하여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국상의 곡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슬픔이 이르면 무시로 사실(私室)에서 곡음(哭泣)하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곡을 그치라고 권할 수도 없었다 》

신하된 도리로서 주군의 사망에 슬퍼하는 하는 것으로만 보기에는 애통의 정도가 심한 것으로 느껴진다.


’어찰첩‘ 발견이후 여전히 정조의 독살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어찰첩의 내용이 정조의 독살설을 배제하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정조가 정적  심환지에게 왜 마음을 뻬앗기고 연애편지와 같은 달달한 편지를 보내며 관계를 유지했을까? 하는 의심은 든다

정조에게는 아버지 사조세자의 복권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정조의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 심환지가 사도세자의 복권을 추진한다면 그 어떤 정파도 반대를 못할 것이다.

심환지는 정조의 아런 움직임에 동조를  했기 때문에 그에게 마음을 뻬앗겼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심환지는 정저의 환심을 사고  관직을 받으며 노론의 우두머리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정조 사망이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 정순왕후와 영의정 심환지는 정조의 개혁 모든 개혁 성과물을 모조리 원상 복귀시키고 장용영 폐지. 규장각 축소., 정약용 같은 개혁인물을  숙청하면서 다시 노론의 조선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

심환지는 정조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오히려 유배를 가야 할 책임이 책임이 있는 인물이지만 오히려 정순왕후는 그를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정권운영을 그에 맡겼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382회

원래 임금의 어찰을 받으면 그 수신인은 정독 후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정조는 여러번 편지에서 실명을 쓰지 않았고 그리고 ’서찰을 태우거나 찢거버리거나 물에 씻어 버리라‘고  주문했다.

임금의 어찰은 극비를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국가기록원을 세워 봉인제도가 생겼다.

정조의 경우도 국사를 논한 것이기에 역사에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심환지가 자신의 묘까지 이것을 가지고 간 것을 보면 그가 역사속에서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 흥미롭다

시대가 이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도  지혜아니겠는가?

우리는 둘이 밀담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첫째는 생전 그리고 400년동안 그 비밀은 유지된 의리다.
둘째  아주 사적으로 심환지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어느 때인가는 선비로 충절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했고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군신으로 충성을 보여주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심환지의 답장은 남아 있지 않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은 정치의 극비 사항만을 논하기 위해 편지를 사용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서같은 쪽지도 보낸 다. 그것을 보면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는 데 심하게 꾸짖는 내용도 있어 정조에게 보는 어진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역사의 주인공은 어디에 ?

역사는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따라서 그 역사를 오늘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당시 심환지는 받은 편지를 없에라는 왕명을 어겻다.

그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려주려고 했는 지도 모른다.

정적과 내통하는 왕의 진면목을 후대에 교훈으로 알리고 싶어했는 지도 모른다.

이를 보면 정조의 이런 행위는 통 큰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는 현재 한국의 정당이나 현 정권의 지도자들도 배워야 할 점도 있다.

명분만 찾고 서로 격식만 따지는 식의 기 싸움이 아닌 나라를 위한 일에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만나야 한다.  공식 비공식이 있을 수 없다.

하루에도 몇통의 편지를 쓴 정조의 심정으로 국정을 살펴야 할 것이다.

민생을 살피는 잠행과 현장 방문도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