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공 간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시기를 관통하며, 민족운동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교육자, 언론인, 체육인, 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등의 다양한 삶의 자리와 노정을 걸어오며 민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그러한 여운형의 청년시절 근대인으로서의 정체성 형성 과정 에서 개신교와의 만남과 신앙생활은 가장 결정적이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시기로 평가할 수 있을 것1이다.
1 그동안 여운형에 대한 다양한 연구서와 전기, 평전 등이 출간되어왔다. 대부분의 저술들에서 여운형과 기독교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관련 내용이 단편적으로 언급되거나 서술 된 경향이 강하다. 여운형의 기독교적인 배경과 정체성을 언급하거나 소개한 대표적인 연구들을 다음 과 같다. 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 의 지도자 : 여운형』 (서울: 역사공간, 2018); 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이기형, 『여운 형』 (서울: 창작사, 1988);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경성: 총문각, 1946);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 이정식, 최상용, 조영건 외, 『여운형을 말한 다』 (서울: 아름다운책, 2007).
그러나 그의 생애 가운데 기독교인, 개신교 목회자로 투신했던 여운형의 초기 삶을 집중적으로 다룬 연구는 상대 적으로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기독교인 여운형에 대한 연구로는 윤경로 의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2가 있다.
2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월);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2),” 「기 독교사상」 (2020년 9월).
이 논문은 지난 2020년 월간 「기독교 사상」에 두 편으로 나누어 특별기고 형식으로 게재한 것이었다.
이 글은 여운형의 생애 전체 중에서 그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온 면면을 연대기적 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그의 삶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논증 하고 있다.
다만, 그의 생애 전체에서 기독교가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그 의 정체성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주목하였기 때문에 그가 목 회자로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한 심층적인 서술은 제한적이었다.
본 글은 여운형의 기독교 개종과정과 목회자로서의 성장과정, 그리고 그의 목회적 삶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운형에 대한 일반사의 주요 선행연구와 더불어 교회사 사료들을 통해 여운형의 ‘교역자’, ‘목회자’ 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명(究明)하고, 그의 개신교 교역자로서의 삶의 의미와 성격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겠다.
Ⅱ. 여운형의 성장 과정과 기독교적 배경
몽양(夢陽)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 기 10년 전인 1876년에 강화도조약으로 타율적 개항이 이루어졌으며, 그 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 후 청국의 간섭이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으며, 반면에 최초의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 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던 해였다.
말하자면 여운형이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한마디로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되던 역사의 전환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은 전통적 기존 질서에서 새로운 서구적 문명과 가 치를 받아들인 첫 세대에 해당한다.
특히 9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동학농 민전쟁과 청일전쟁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3
여운형은 그의 족숙 여병현(呂炳鉉, 1867-?)의 주선4으로 15세 되던 1900년에 양평에서 상경하여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 다.
여병현은 일찍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영국까지 다녀온 후 1899년경 귀 국하여 배재학당에서 영어 선생을 하던 차에 여운형을 배재학당에 입학시 킨 것5이다.
이는 부친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결정이었다.
(여운형이) 14세 때에 족숙 여병현(呂炳鉉) 씨가 미국에서 돌아와 배재학당 영어교사로 있었다.
그 이의 인도로 배재학당 아펜젤러의 사택을 참관하 고 비로소 미국의 문화가 조선보다 낫다고 느꼈으며 배재에 입학 일을 부 친에게 천했으나 부친은 반대하였다.
몽양은 부친의 반대를 불복하고 입 학을 단행했다.6
그러나 여운형은 1년도 안 되어 중퇴했다.7
보다 민족 주체적 교육을 내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한 것8이다.
3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월), 163-164. 4 정병준, “한말 미국 유학 지식인의 서구 ‘사회과학’ 수용과 현실 인식,” 「이화사학연구」 제44집 (2012), 101. 5 여병현은 1895년 박영효 내각 때 도일 유학생으로 선발된 151명 중 한 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케이오 대학(慶應義塾)에서 유학하다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1899년경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영어 선생으로 근무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서구 문물을 일찍이 접한 개화된 인물이었다. 박찬승, “1890년대 후반 관비유학생의 도일유학,” 『근대교류사와 상호 인식』 (서울: 고려대 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1), 89-103. 6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경성: 총문각, 1946), 12. 7 이만규는 여운형의 배재학당 재학시기 기독교에 큰 감흥을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교육 특 유의 규율생활과 선교사들의 우월의식을 마주하며 다소 부정적으로 느꼈으며, 일요일에 주일예배를 빠지고 남산에 놀러 갔다가 체벌을 받는 등의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이만규는 당시 여운형이 배재학당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몸에 밴 양반기질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성품 때 문이었다고 보았다.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12;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여운형』 (서울: 역사공간, 2018), 13.
8 이 시기 여운형은 자신보다 5살 연상이며, 미국 유학을 다녀와 흥화학교의 교사를 맡고 있던 우사(尤 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으로부터 사사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첫 만남은 스승과 제자의 만남 이었던 것이다. 정병준,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 고아 소년 “존”의 근대로의 여정 1881~1918』 (파주: 돌 베개, 2025), 263.
그곳(배재학당)에서 얼마를 공부하다가 그때 마침 흥화학당이란 새 학교 가 수진방곡(壽進坊谷)에 창설되었음으로 다혈질의 여러 학우들과 함께 나는 그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9
이곳에서 성실히 수학하던 여운형은 1902년 이후 다시 관립 우무학교 (郵遞學校)10에 전학11했다.
당시 우무국 기술관으로 채용되면 급여가 좋았기 에 경제적인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12
9 “흥화학당은 근세 교육사상 대서특필하여도 좋을 곳으로 처음 미국공사로 가있던 충정 민영환 씨가 귀국하여 서양문명을 수입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설립하고, … 그러다가 그때 시국은 대단히 긴장된 바 있어서 이 학교는 오래 가지 못하고, 마침내 어떠한 이유 때문에 학생들과 서생들은 서로 통곡하고 갈 라졌고,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습니다.” 여운형, “나의 청년시대,” 「삼천리」, 1932년 9월. 10
10 우무학교는 관립 체신강습소였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통신국(우무국)이 설립되어 우표 가 발행되고, 서울-인천, 서울-의주 간에 전신사업이 개시되었으며,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맹 가입, 전신국 설치 및 한글전신 부호규정 등이 이루어지면서 이 분야의 전문 기술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우무통신기사를 신속하게 양성할 목적으로 1897년 우무학교를 설립하였다.
11.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12.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월), 165.
바로 이 학교 재학 중에 여운형 은 기독교와의 보다 본질적인 조우를 다시 하게 된다.
Ⅲ. 여운형의 개신교 개종과 교역(敎役) 활동
1. 여운형의 개신교 입교 시기에 대하여
여운형은 1900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이미 개신교의 존재와 실체 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윤경로는 그 가 배재학당을 1년도 안 되어 중퇴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나 선교사들의 ‘우월의식’에 대한 거부감이 주요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13했다.
그러면 그가 기독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변은진은 여운형이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14고 말하며, 윤경로는 1906년 고향 묘곡에 묘곡교회(妙谷敎會)를 설립함15과 동 시에 입교한 것으로 추정16했다.
강덕상은 1907년부터 8년 사이에 승동교 회에서 사경회를 참여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온전히 입신(入信)했다고 보았 다.17
이렇게 여운형의 기독교 입신 계기와 시기는 그 관점이나 기준에 따 라 해석이 다양하다. 여운형의 개신교 개종 과정은 그의 내밀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유추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여운형은 흥화학교를 중퇴하고, 우무학당 입학한 이후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바로 1903년 부인이 사망하였고, 이내 조부 여규신도 별세했다.
2년 후인 1905년에는 모친 경주이씨도 별 세했으며, 이듬해 1906년에는 부친 여정현도 별세했다.18
13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월), 165.
14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여운형 』 (서울: 역사공간, 2018), 15.
15 변은진은 1900년대 초부터 양평 출신 기독교인 차상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곽안련) 등과 가깝게 지낸 것 또한 주요한 개종 요인으로 꼽았다. 1906년 클라크가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펼칠 때 양평 상심리교회, 문호교회, 묘곡교회를 설립했는데, 이때 여운형이 묘곡교회 설립의 중심이 되었다.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여운형』 (서울: 역사공간, 2018), 15; 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59.
16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월), 166.
17.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59-61.
18.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여운형 』 (서울: 역사공간, 2018), 17, 197.
여운형의 가족사 에서 이렇게 3-4년 사이에 친족 4명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이 다.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그가 그동안 이질적 서구 종교로서만 이해해 온 기독교를 인간의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존재와 내세에 대한 새 로운 신앙 원리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평을 찾아 전도한 클라크 선교사와의 깊은 대화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 과정을 통해 개인적 결신의 단계를 넘어 국권이 피탈되고 외세가 밀려오는 위기 의 현실과 전환기에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교육과 신앙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을 것19이다.
19.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 76-80.
그가 1906년 고향 양평 묘골에 묘곡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상실의 경험과 민족적 위기 극복의 대 안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수용이 이루어진 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양평군 묘곡교회(妙谷敎會)가 성립하다. 본리인(本里人) 탁인한(卓仁漢)이 분원교인 박봉래 (朴鳳來), 변석호(卞錫鎬), 성변섭(成炳燮) 등에게서 복음 을 득문(得聞)하고 신주(信主)한 후 상심리(上心里) 교인 차상진(車相晉), 배 운길(裵雲吉), 전도인 이기남(李起南), 이춘경(李春景) 등과 합력하여 여운 형가(呂運亨家)에 전도한 결과 여씨의 문중(門中)이 상계귀도(相繼歸道)20하 니 교회설립 되어 예배당을 건축하며 학교를 설립하고 병력전도(幷力傳 道)하니 교회가 점진(漸進)하더라.21
이기형은 여운형의 개종을 “기독교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당 시의 시대적인 조류 속에서 많은 애국계몽적 민족주의자들처럼 애국적 민 족주의적 사상의 발로로서였고, 한편 신앙으로서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포 용하기도 했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22이라고 평가했다.
이만규는 여 운형의 개종 동기를 “계몽적, 실천적, 건설적 노선 찾기를 위한 수단의 하 나”였으며, “그 애국적 정치사상의 발전”23이었다고 말했다.
20 서로 간에 알음알음 전도하여 새로운 진리에 귀의하다.
21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上』 (京城: 新門內敎會, 1928), 148.
22 이기형, 『여운형』 (서울: 창작사, 1988), 30.
23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경성: 총문각, 1946), 15.
그 외에도 여 운형 개종 동기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겠으나 대략 다 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국권 피탈의 풍전등화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국난 극복의 대 안 이데올로기로 삼은 측면이었다.
둘째, 가정적으로 아내와 조부, 어머니 와 아버지의 별세를 겪으며 느낀 고통과 생사에 대한 고민을 기독교 신앙 으로 극복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동학에 대한 깊은 이해 와 가정적 배경으로 동학의 인간평등사상과 기독교의 신앙이 대동소이한 측면이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24이다.
이렇게 당대의 많은 선각자들(김구, 안창호, 이동휘, 이상재, 이승만 등)이 이와 유사한 동기와 목적으로 여운형과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를 선택했다.
2. 여운형과 승동교회
1) 여운형의 전도사 활동 미국 북장로회 무어(S. F. Moore, 1860-1906) 선교사가 설립한 곤당골 교회(1893)는 홍문동교회, 동현(구리개)교회를 거쳐, 승동교회로 이어졌 다.25
1905년 8월 1일에 동현교회는 승동으로 옮긴 이후부터 지명을 따라 승동(承洞)교회26로 부르게 되었다.
1904년 12월 구리개에서 이전해 올 때 보다 12평이나 더 크게 지었음에도 한 달도 못 되어 늘어난 교인을 감당 못해 공간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를 즈음하여 승동교회에 면려청 년회가 시작되었다.27
당시 승동교회의 부교역자로 활동한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선교사는 꾸준히 청년회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승 동교회의 청년부 활동은 당시 인근 수송동의 우무학당에 재학 중이던 여 운형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28
24 여운형의 조부 여규신(呂圭信)은 일찍이 동학에 심취하였으며, 여운형은 가장 존경했던 조부로부터 동학사상으로부터 긍정적 영향을 받았다.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 월), 163;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 74.
25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레이놀즈가 1903년 초부터 1905년 4월까지 동현(구리개)교회를 담임하고, 미 국 북장로회 소속의 클라크가 동역한 일은 연합사역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일환, “승동교회 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61호 (2024. 9.), 153.
26 1907년부터 1908년 말 사이에는 ‘承洞’과 ‘勝洞’을 번갈아 사용하다가 그 후부터 승동(勝洞)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7 한국교회사학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68), 52.
28 당시 우무학교가 있었던 수송동에서 승동교회까지는 직선거리로 400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승동교회의 ‘승동’ 시대가 시작된 1905년은 국가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피탈되는 암울한 시대였다.
여운형이 재학하던 우무학교도 일제의 우체·통신 업무 위탁에 반대하는 청원운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국 권피탈과 공권력의 붕괴를 바라본 여운형은 큰 상실감과 좌절을 겪었다. '
그리고 이러한 전환기를 계기로 여운형은 새로운 희망과 활로를 제공해 주는 대안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여운형은 기독교를 자 신의 신앙으로 수용하고, 마침내 고향에 묘곡교회와 광동학교29를 설립 (1906년)했던 것이다.
당시 여운형의 자택에서 시작한 사숙(私塾)의 소식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서도 전해졌다.
지사가 학교를 세웠다. 양근 서시면 묘곡 사는 여승현, 여운형 제씨가 발 기하여 해리(該里)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여운형 씨가 명예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은 40여 명에 달했다.30
이 시기 여운형은 주일에는 서울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클라크 선 교사의 설교를 들었으며, 주간에는 광동학교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31
그리고 1907년부터 클라크 목사가 담임목회32를 하는 승 동교회에서 조사(助事, Helper), 즉 전도사의 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여운 형이 승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한 시기는 1907년부터 1913년 사이의 기 간(5년)으로 추정된다.33
이 시기 동안에 잠시 강릉에 내려가 1910년 봄부 터 1911년 가을 무렵까지 교사로 일하기도 했지만34, 그의 소속은 여전히 승동교회 전도사였다.35
29 기독광동학교(基督光東學校)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몽양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 학교에서 여운형 은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성경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예배를 드렸다.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동대 문 밖에 세워진 첫 근대학교였다. 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15.
30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7일.
31 이기형, 『여운형』 (서울: 창작사, 1988), 29.
32 1906년에 승동교회의 담임자 무어 선교사가 별세했다.
33 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21.
34 강릉읍의 초당의숙(草堂義塾, 현재의 선교장 자리)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국권을 강탈당한 후 그전까 지 사용하던 단군기원(檀君起源)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서기(西紀) 연도를 사용했으나 이마 저 불가하다고 하며 일본 연호 ‘메이지(明治)’를 쓰도록 강요한 일제가 퇴거 명령을 내리자, 결국 강릉 을 떠나 다시 승동교회로 돌아왔다. 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기독교사상」 (2020년 8월), 174; 여운형, “나의 청년시대,” 「삼천리」 (1932년 9월).
35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여운형』 (서울: 역사공간, 2018), 19; 『승동교회 110년사』에서는 여운형의 직책을 ‘조사’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1908년 가을–1910년 봄, 1911년 여 름-1913년 겨울까지 1, 2차로 나뉘어 시무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승동교회 110년사 편찬위원회, 『승 동교회 110년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승동교회, 2004), 351.
여운형이 승동교회 조사로 있는 동안 이동녕(李東寧), 노백린(盧伯離) 등이 승동교회에 출석했다.36
이들은 박성춘 장로, 신채호와 함께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꿈꾸는 이들이었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교회의 분위기를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한 가지 특 기할 일은 훗날 승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오건영(吳建永)이 독립운동을 위 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다가 안동교회의 박승봉 장로에게 붙잡혀 집사 (執事)로 섬기다가 여운형, 이여한, 이재형 등과 함께 평양신학교로 가게 되었던 일이다.
이들은 훗날 승동교회의 교역자로 봉사하게 되었다.37
여운형이 승동교회 전도사직을 시작하던 1907년 승동교회에서는 클 라크 선교사38가 1905년 설립한 ‘승동긔독소학교’가 운영 중이었고, 그 해 에 ‘캐리마블 기념 여소학교’가 막 개설되어 여자 교육도 시작되었다.39
1907년에 여학교는 22명, 남학교는 30명을 넘어서는 인원이 수강했다.40
36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연구』 (서울: 일조각, 1992), 87. 37 승동교회 110년사 편찬위원회, 『승동교회 110년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승동교회, 2004), 162.
38 여운홍은 “곽 목사는 우리 형제의 은인”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클라크는 여운형 형제에게 신앙적으 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21.
39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上』 (京城: 新門內敎會, 1928), 176;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 Presbyterian Church, U.S.A. : 1884-1934, Seoul, Chosen : Publshed by the Chose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934, 113.
40 곽안전, “내가 아는 승동교회 (3),” 「승동공보」, 제1권 제5호, (1972), 1.
이 시기 승동교회의 남학교와 여학교는 서울 시내 여러 기독교 사립학교 들과 함께 기도회와 대운동회 등의 연합 활동을 실시하며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거 2월 28일 주일은 만국학생 기도일인 고로 경성 종로 기독청년회관 내 에서 경성 각 학교 학생을 4대에 분배하여 각기 예정된 시간에 모여 연합기도회를 열었는데, 당일 상오 10시에는 공성, 삼흥, 관진, 장훈, 봉명, 창동, 보흥 훈도 8학교 학생 550인 중에 원입인 148인이요, 하오 1시에 는 흥인, 배재, 고아진, 배영, 청풍 5학교 학생 250인 중에 원입인이 12 인이요, 동 4시에는 청년학원 공옥, 숭교의숙, 한남, 소의, 영신, 승동, 수하동 8학교 학생 210인 중에 조석 기도하기로 작정한 자가 8인이요, 동 7시에는 배재, 오성, 중앙, 경신, 외국어학교 5학교 학생 310인 중 원 입인이 40인이라러라.41
본월 9일에 경성 내 장로회와 남북 양 감리회 중 남녀 소학교 연합대운동 회를 남부 장충단에서 설행(設行)하였는데, 당일에 참회(參會)한 학교는 남학교 중 동대문안, 배재소학교, 연동 경신학교, 승동 기독소학교, 새문 안 영신소학교, 상동 공옥소학교, 종교 광진학교, 서강 의법학교와 여학 교 중 연동 정신여소학교, 승동 기독여소학교, 새문안 영신여소학교 등이 더라.42
이렇게 여운형은 승동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교회에 설치한 학교 교육 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경험은 훗날 상해에서 한인 자녀 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상해한인기독소학교(上海韓人基督小學校)”43 설 립의 중요한 선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41 “만국학생기도회,” 「죠션그리스도인회보」 (1911년 3월 15일).
42 “소학교 연합 대운동,”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912. 5월 30일).
43 이 학교는 후에 ‘인성학교(仁成學校)’가 되어 상해지역 한인 자녀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으며, 1975년까지 지속, 운영되었다. “1917년 추(秋, 가을)에 지(至)하여 재호한인신도(在滬韓人信徒)들이 소학생(小學生)을 교육할 만한 기관(機関)이 무(無)함을 민민(悶々, 안타깝게)히 녁여 예배회 직원인 선우혁, 한진교(韓鎮教), 김철(金澈), 제인(諸人)이 회의하고 가급적으로 면려함이 가(可)하다 하야 미조계(美租界) 조풍로재복리(兆豊路載福里)에 일간방옥(一間房屋)을 세득(貰得)하여 상해한인기독 소학교(上海韓人基督小學校)라 명칭(名稱)하고 남녀 학생을 모집하여 개학의 초(初)에는 단(但) 4개 (四個) 소학생(小學生)이엿을뿐이나 그후(其後)로 점차 증가하여 상해 한인 교육(上海韓人教育)의 효 시(嚆矢)가 되엿더라.” “상해선인교회사(上海鮮人敎會史 十),” 「기독신보」 (1922년 8월 30일), 1면.
이러한 명칭은 그가 승동교회에서 활동할 때의 “승동기독소학교”에서 연원(淵源)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 운 이해일 것이다.
아울러 승동교회 전도사 재직 중에 경험한 타교파와의 협력과 연대, 에큐메니컬 활동은 이후 교파와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민족 과 세계인류의 공공선의 차원에서 포괄적인 선교와 사회운동을 유연하게 펼칠 수 있는 역량이 함양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승동교회에서는 지역 사회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거리 책 방’을 개설44했고, 1905년경부터 시작된 면려청년회 운동은 평균 집회 참 석 인원이 50명 정도에 이르렀다.45
44 C. A Clark, “Seoul Central Church,” KMF, Vol. II, (September 1906), No. 11, 213.
45 홍치모, 『승동교회백년사』 (서울: 승동교회, 1996), 117; 김일환,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 151.
이렇게 여운형은 승동교회에서 교육운 동, 문화운동, 청년운동의 역동적인 현장과 가능성을 경험해 나갔다.
이러 한 여운형의 경험은 단순한 사회운동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에게 깊고 내 밀한 신앙적인 체험의 계기까지 제공해 주었다.
2) 여운형의 신앙 체험과 목회자의 소명
1907년은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정점에 달했던 해이기도 했다.
1907년 2월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연합하여,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를 초청해 승동교회에서 “경기도사경회”를 가졌다.
당시 길선주의 집회는 여 운형이 전도사로 시무하는 승동교회에서 열렸기에 그도 이 행사에 참석했 을 것이다.
당시 길선주가 승동교회에서 전한 메시지와 집회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해(1907년) 서울은 선교사들이나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두 새로운 마음 으로 생활하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 한국인 장로 (길선주)가 와서 이 대도시의 교회들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것은 정화 체 험의 시작이었다. … 죄로 인한 고뇌와 슬픔, 고백할 때의 극심한 고통, 삶에서 나타나는 깊고 놀라운 능력의 현상들이 동일하게 나타났다.”46
46 Jones & Noble,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n : an account of the revival in the Korean church es in 1907, New York : Board of Foreign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8, 22-23. 180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41집
이 집회는 여운형에게도 인상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수년 전에 겪었던 아내와 조부, 부모와의 사별 경험에 따른 상실감, 국권 피탈과 풍전등화의 민족 상황에 따른 혼란, 양반으로서의 허위의식을 내 려놓으며 겪었던 갈등과 새로운 정체성 등, 그동안의 모든 힘겨운 기억들 이 정화되고 극복되는 충전과 전환의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회심 과 종교적 체험은 그를 보다 적극적인 전도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 어 주었다.
이러한 여운형의 경험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당시 대부분 의 교회와 신자들이 공통으로 경험한 영적 각성과 성령의 역사였으며, 이 러한 영적 흐름 속에서 교인들은 적극 전도에 나섰다.47
승동교회는 승동으로 이전한 이후부터 양반들의 핵심 거주지인 북촌 전도를 모색했는데, 별도의 전도인(권서)들을 임명해 전도사업에 집중토록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08년 8월 안동교회(安洞敎會)가 설립되었 다.
그리고 같은 해 이여한이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다.48
이렇게 승동교회 가 완고한 양반 거주지인 북촌을 선교대상지로 선택하고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운형과 같은 양반 출신 전도사의 활동 이 있었을 것이다.
또 여운형은 승동교회 전도사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중퇴한 학교인 배 재학당에서 성서입문 수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영성 과 신앙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 구국계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동교 회에 자주 방문했으며, 상동청년회와도 교류했다.49
47 곽안전, “내가 아는 승동교회(4),” 「승동공보」, 제1권 제6호 (1972), 1.
48 김일환은 “1907년 이후 승동교회가 전개한 양반들을 대상으로 한 북촌지역 전도와 초대 장로로 백정 출신 영수 박성춘 대신에 이여한을 먼저 장립한 일은 곤당골교회 시기부터 이어져 온 백정교회의 이 미지를 어느 정도 벗어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환,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 150.
49 이기형, 『여운형』 (서울: 창작사, 1988), 29.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 사는 여운형에게 목회자로서의 롤모델이 되었다.
여운형은 전덕기의 설교 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항상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갇힌 자에게 해방 을, 억압받는 자에게는 자유를, 계급사회를 평등하게”라는 메시지를 가슴 에 새겼다.50
이러한 전덕기 목사의 목회자로서의 모습과 정신, 실천은 여 운형이 교역자(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평생을 민족과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되 었다.
이러한 동기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신학교 지망을 결심하기에 이 르렀다.
‘나는 목사가 되어 빛을 잃고 희망에 주린 동포에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드리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겠다.’51
50 전덕기는 여운형과 동향인 양평 출신으로 젊은 시절 숯을 파는 상인이었다.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경 성: 총문각, 1946), 15.
51.이기형, 『여운형』 (서울: 창작사, 1988), 30.
52 한국교회사학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68), 56-57.
3. 여운형과 평양신학교
동년(1912) 11월 29일 제3회 경기충청노회가 경성 안동예배당에 개최하니 회원은 목사 12인, 장로 11인 합 23인이요, 회장에 한석진, 부회장 박정 찬, 서기에 김일선이 피선되니라 작년부터 충청북도 전도하기 위하여 부 활주일에 각 교회에서 특별연보할 것과 안동교회(安洞敎會)에 목사 한석 진, 남문외교회(南門外敎會)에 목사 박정찬을 위임(委任)하고 신학생(神學 生) 이여한, 김영환, 김종상, 차재명, 차상진, 최영택, 배진성, 여운형, 정 윤수, 김백원, 김홍식 등의 취학을 허하니라.52
시찰구역 중 경성 각 교회를 합하여 1구(區)로 경성내(京城內)라 칭하고 신 학생(神學生) 이명혁, 이여한, 김홍식, 김영한, 김정현, 김승구, 차상진, 차재명, 함 열, 최영택, 장 붕, 정윤수 여운형, 배진성, 신홍균, 권영식, 이재형, 김용진, 오건영 등의 취학을 허하니라.53
위의 기사는 여운형의 평양신학교 입학을 노회와 시찰구역에서 인준 한 것을 보도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의 기록이다. 위의 내용을 보 았을 때 여운형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전도자로서 전도 운동에 열 중하던 중, 마침내 교역자로서의 소명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원래부터 언변이 뛰어났던 여운형은 주일에 가끔 설교를 하기도 했으 며,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유대와 로마의 관계”로 비교하면서 “정치 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해방된 기독교국 조선”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신자 들을 감동케 했다.
이러한 여운형의 설교에 감화되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서울에서 4,000여 명의 신자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운형의 영적 인 감화력은 이를 지켜보던 클라크나 언더우드, 게일 등 선교사들도 인정 하는 바였다.54
1912년 교역자의 길에 뜻을 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여운형은 1년 중 9개월은 교회에서 사역하고, 3개월은 평양에서의 신학 수학에 집중했 다.
그렇게 5년의 과정55을 이수하면 졸업장을 받고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 었다.
그러한 학제로 인해 여운형은 승동교회에서 조사로 근무하면서 3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신학교에 재학할 수 있었다.
1903년 개교 당시 평양신학교에서의 과목은 “신학일반 및 소요리문답, 구원론, 유대사기, 목 회학, 마태복음 및 고대사, 모세오경, 산수 등”56이었는데, 이후 성경 이외 에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 과목들이 추가되었다.
53 한국교회사학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57.
54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여운형 』 (서울: 역사공간, 2018), 23.
55 전준봉, “한국장로교 신학교의 신학과 교육 :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개혁논총」, 제29권, (2014. 3.), 235.
56 장로회신학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장로회신학대학교100년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2002), 83-85.
여운형이 신학교 입 학 당시 수강했을 과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학년 : 삼복음합, 창세기, 소요리 문답, 신도요론(神學), 구약사기, 구약 지, 구약총론, 강도법, 음악, 국어.
2학년 : 사도행전, 출애굽기, 신도개요, 신도요론(인죄학), 교회사기, 신 약지지, 신약총론, 도덕학, 심리학, 강도법, 음악, 국어.
3학년 : 고린도인서, 에베소인서, 이사야서, 성례, 신도요론(구학), 교회 사기(중세대), 교회정치, 강도법, 음악, 국어.
4학년 : 요한복음, 로마인서, 시편, 예레미야서, 교회사기(개혁 전 개혁 사), 목사지법, 말세학, 권징조례, 예배모범, 신도, 음악, 국어.
5학년 : 히브리서, 묵시록, 다니엘서, 교회사기(종교개혁 후), 전도회사기, 성신지사(聖神之事), 목사지법, 교수법, 음악, 국어.57
여운형이 위의 교과 과정 대로 수학했다면, 그는 주로 대부분 성서신 학 관련 과목들과 일부 교양과목을 병행해 이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 나 그는 위의 과정을 이수하던 중 2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포기하고 중국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신학 코스를 온전히 이수하지 않고 포 기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여운형이 재학하던 평양신학교의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학 풍, 성서와 교리 중심의 학과목들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으로 보 인다.
초기 평양신학교의 학풍은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 한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칼빈주의였으며, 신앙적으로는 청교도주의적 신 앙과 경건주의 신앙을 지향”58하고 있었다.
57 총신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총신대학교100년사』 (서울: 총신대학교, 2003), 228-229.
58 전준봉, “한국장로교 신학교의 신학과 교육 :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239.
동양사상과 동학, 서양 학문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수용 태도를 지녔던 여운형의 입장에서 평양신학교의 보수적이고 성경중심적인 교육방침과 커리큘럼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 을 확률이 높다.
아울러 초기 내한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의 운영방침에 있어 신학 지식보다는 목회를 위한 기술과 영적인 면에 더 치중함으로써 실제적인 교육의 내용과 질이 여운형이 기대했던 것과 크게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1906년 당시 이 학교의 평균 나이가 38세였는데, 학생 들 간의 나이와 수학능력의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수준별 학습은 어려 웠고 모두가 합반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신학에 대한 기초지식 이나 교양교육이 부족한 가운데 진행되는 평준화된 교육 정책 속에서 여 운형의 눈높이에 충족되는 신학교육을 기대하는 것은 이미 무리가 있었 다.59
평양신학교의 교수이기도 했던 미국 남장로회의 레이놀즈(W. D. Reynolds)는 초기 신학교 운영 원칙에 있어서 한국의 교역자 양성에서 비 교적 낮은 단계의 ‘신학교육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3) 적어도 선교사업 초기 단계엔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지 말 것. 그 (교역자)가 함께 살고 일해야 할 사람들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릴 우 려가 있는 훈련은 시키지 말아야 할 것. 그들(교역자들)과 본토인들 사이 에 사고(思考)와 생활의 간격이 생김으로 인해 종종 선교사들은 곤혹스러 워짐. 아직 (교역자와 신자들 간의) 간격이 생기지 않은 곳에서 간격을 벌 이지 말아야 함.60
59 전준봉, “한국장로교 신학교의 신학과 교육 :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233.
60 W. D. Reynolds, “The Native Ministry,” The Korean Repository Vol.3 No.5, May, 1896, 200-201.
이러한 초기 한국 장로교회 신학교육과 교역자 양성의 구조적, 근본적 문제에 대해 1917년 종교개혁 400주년을 기념해 YMCA의 「청춘」에 “금일 조선 야소교의 결점”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이광수는 당시 한국 개신 교 신학교육의 수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 했다.
목사, 전도사 같은 교역자는 최저 계급의 민중과 접하는 동시에, 최고 계 급의 민중과도 접하며, 접할 뿐 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로 보아 지도하는 자요. 그러자고 하면 상당한 학식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요. 신구약 성 경만 2, 3차 맹독(盲讀)하고, 백 페이지 가량 되는 설교학이나 배워 가지 고는 부족할 것이 분명하오. 적어도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수종의 신학서 를 열람하고, 고래로 저명한 철학설이며, 종교 문학을 열람하고, 그 중에 도 현대 철학의 대강과 과학의 정신을 이해하여서, 현대문명의 정신과, 현대 사조의 본류와 현대문명과 종교와의 관계를 이해해야 할 것이오. 심 리, 윤리, 수사학 지식의 필요함은 물론이려니와, 이만 하고야 전도도 하 고, 지도도 할 것이외다. 그런데 현금의 교역자는 어떠한가요.61
여운형은 이러한 이광수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동의하거나 공감하 고, 유사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욕구와 기대를 충족하며, 다양한 학문적 자극과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중국 으로 그의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둘째로 선교사들의 기계적인 정교분리론과 친일적 행보, 백인 우월적 태도 등에 염증을 느꼈다.
여운형은 훗날 「신문조서」 (訊問調書)에서 “왜 장 로교 신학교를 그만두고 중국 학교로 갔는가?”라는 질문에 “장로교 신학 교 보다 금릉대학의 수준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에 “신 학교의 미국인 태도가 포악하여 이에 불만을 품고 중국으로 간 것은 아닌 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 그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서양인의 횡포가 심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금릉대학에 가서 스스 로 신학을 연구하고자 했다.”
라고 답했다.
“선교사들의 횡포는 무엇을 말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원래 조선인을 위한 선교인데도 자기들 편한 대 로 선교를 하는 등 방법이 부합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62라고 답했다.
61 이광수, “금일 조선 야소교의 결점,” 「청춘」 (1917년 11월호).
62 「여운형조서」 Ⅲ, 392; 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99-100쪽에서 재인용; 이정 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 103.
1910년 이후 한국의 일부 내한선교사들은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였으나, 미국 교회의 선교본부를 비롯한 현지의 대부분의 내한선교사들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 들이고, 일제에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아래는 이러한 선교사들 의 양극화된 일제강점에 대한 태도와 현실 인식을 드러내 준다.
첫 번째는 한일강제병합 직전 언더우드의 YMCA 강연의 내용 일부(일제강점에 대한 비 판)이며,
두 번째 인용문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아더 브라운의 일본 관료에게 보낸 편지(일제강점에 대한 긍정)이다.
“지금(今) 제군들(諸君)이 내(我)가 가르친 도(道)를 믿고 있는 상태(狀態)가 옛날(昔日)보다 배가(倍加)되어, 소위(所謂)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情 神)을 갖고 신앙(信仰)을 키워 나가면, 그(其) 결과(結果)는 언젠가(他日) 반 드시 큰 성효(成效)를 낼 것이라는 점(點)은 의심(疑)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것은, 제군이 일층(一層) 용기(勇氣)를 떨쳐(振) 우리 교 회(我敎會)를 성대 하게 하며, 내가 신애(信愛)하는 곳 한국이 순연(純然)한 독립국(独立国)이라는 것을 늘(常ニ) 유의(留意)하고 결코 한 시(時)도 망각 (忘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63
선교사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아마 다음과 같은 네 가 지 경우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저항,
둘째는 무관심,
셋째 는 협력, 그리고 마지막은 충성심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네 번째의 충성 심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 니다.
예수는 일본보다도 훨씬 고약한 정부에 복종했고, 제자들에게도 충 성스럽게 복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로마서 8장의 바울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64
63 경시총감 와카바야시[若林賚藏], “‘언더우드의 행동’ 보고서,” 「통감부 문서」, 1909년 9월 17일.
64 Letter From Auther J. Brown to Masanao Hanihara (Februry 16, 1912) in the Presbyterian Library : New York; 강위조, 『한국 기독교사와 정치』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5), 76쪽에서 재인용.
이렇듯 다수의 내한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항일운동과 정치적 행보에 냉소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볼 때 여운형은 매우 깊은 실망을 느꼈을 것이 다.
그런 중에도 언더우드가 여운형의 중국 유학에 있어 추천서를 작성해 준 배경에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울분과 독립 의지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한국 개신교계의 민족운동 구심점으로서의 기능 상실에 대한 실망이었을 것이다.
여운형은 1911년 일제로부터 날조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존경하는 전덕기 목사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1914년 3월 23일)하고, 연이어 상동청년학원이 강제 폐교(1914년) 되자, 그동안 기독교를 통한 신 앙운동과 민족운동에 품었던 일말의 희망이 좌절로 변하고 말았다.65
아울 러 일본의 개신교 교파 중 하나인 조합교회가 조선에 진출하여 1912-13년 사이에 급격히 그 세를 확장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 은 조합교회 측에서는 조선인 목사나 전도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여 기에 굴복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이에 반대하던 여운형 등은 조합교회 측을 “한·일 양 민족의 동화에 힘써 그들의 왕을 섬기는 사교(邪敎)”라고 공박했으며, 조선 기독교계 내부의 적대관계는 깊어져 갔다.
이렇게 일제 강점 이후 기독교 본연의 모습이 변질되어 가자 여운형은 국내에서 기독 교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더 이상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 었고, 결국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된 것66이다.
65 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100.
66 변은진,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여운형 』 (서울: 역사공간, 2018), 25.
4. 여운형의 중국 유학 시기 목회 활동
이렇게 평양신학교의 신학 수업을 중단하고 중국 유학을 타진하는 여 운형에 대해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가 기독교 교역자로서의 정체성이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는 점을 인지했던 것 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중국 유학을 위해 언더우드에게 추천서를 부탁했 을 때에, 그가 중국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겠다고 말하자 언더우드는
“당신 같은 사람이 끝까지 신학을 연구할 것 같지는 않소. 조선의 우수한 청년들 은 모두 정치적 지향성이 강하오. 나는 이와 같은 말을 김규식에게도 했는 데, 당신도 분명 정치운동을 할 것”67
이라며, 추천서를 써 주었다고 한다.68
정병준은 여운형이 1915년 1월 9일 총독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을 때 에 “나이 29세, 여행지 지나(중국) 남경, 여행목적 신학연구”69이었으나, 당 시 남경에 있었던 금릉신학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신학과가 없는 남경 금 릉대학에 입학했다는 점을 들어 여운형은 애초에 신학을 공부할 생각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운형의 다른 진술에서는 금릉대학에도 신학과 정이 있있었음을 알 수 있기에 그가 완전히 신학공부에 뜻이 없었다거나 부정적이었다고 확정적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남경 금릉대학의 학제는 그 학교 소정의 모든 학과를 다 마쳐야 졸업장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신학 같은 학과도 마쳐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 생각이 졸업증서를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입학은 영 문과에 하고 영문학과 철학을 힘써 공부하였습니다.70
67 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108; 이만규, 『여운형선생투쟁사』 (서울: 민주문화 사, 1947), 19.
68 여운홍의 기억은 이렇다고 한다. “그대는 신학을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정치운동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재작년에 김규식도 중국으로 갔다.” 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22
69 外務省 外交史料館, 분류기호 3.8.5.8. 「外國旅券下付(附与)返納表進達一件」 228冊; 外務省 記錄(戰前) 3.8.5. (no) 旅081 (大正 4年 1月~3月); 정병준, 『김규식과 그의 시대 1』, 370쪽에서 재인용.
70 여운형, “나의 상해시대,” 「삼천리」, 1932년 10월.
그는 비록 신학을 전공하거나 이수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남경에 도착 한 이후 그리고 상해로 이주한 후에도 여전히 교역자로서의 정체성을 유 지하며, 목회 활동을 병행했다.
그가 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았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이국 땅에서의 조선인들을 위한 신앙 적, 목회적 관심은 높았으며, 지속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여운형과 남경한인교회
정병준은 여운형이 “동제사(同濟社)의 예비교육을 받고, 남경 금릉대학 에서 수학한 후, 1917년 상해로 이주한 후에야 상해 한인 교민사회에서 활 동을 시작”71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여운형의 공적 활동은 남경에서의 2 년 정도의 유학생활 동안에는 크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클라크 선교사로부터 “연 200원의 보조”72를 받고 있었으 며, 목사가 되는 진로에 대한 고민과 의지가 유효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 인다.
71 정병준,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파주: 돌베개, 2025), 100.
72 “피의자 신문조서(제5회, 1929년 8월 5일),” 몽양여운형선생전집발간위원회, 『몽양 여운형전집 1』 (파 주: 한울, 1991), 205.
당시 남경에서 가깝게 지냈다고 알려진 친구 이수영의 1933년 기고 “여운형론(呂運亨論)”에서 여운형의 기독교적 정체성과 유학 초기의 번민과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여운형! 그는 너무도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알리워 졌다。 청년학관을 다니 고나서 야소교의 전도사로 있다가 남경에 가서 금릉대학을 다니던 그때 까지는 여씨는 그저 범상한 일개의 불평객에 지나지 못했다. 풍옥상(馮玉 祥)의 군영(軍營)에서 바람벽에 붙은 표어 “망국지인 불여취지가구(亡國之 人 不如聚之家狗, 망한 나라 사람들은 모여든 개들만도 못하다)”란 문구를 보 고 돌아서서 훌쩍훌쩍 우는 그런 ‘센치멘탈’한 성격의 낭인이었다. 그는 신학과에 다니면서 “나는 목사가 되어 빛을 잃고 희망에 주린 동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드리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겠다” 이것이 그의 이상의 전폭은 아닐지라도 육할 이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십년 후의 열혈청년으로 가슴에 피어 오르는 울분을 자제하는 길이 없어 홀로 남경교외에서 기울어지는 태양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남경가이일방(南京 街二日方) 모(暮) テ(남경 거리에 해가 지면서)”라는 ‘방랑가’도 불러 보았다. 그리고 최남선의 ‘세계일주가’도 불러보았다. 그러다가 아! 벌써 황혼이로 구나 하고 돌아서 올 때 보면 어느덧 십여 리를 걸어나왔다. 캄캄한 밤 혼 자 터벅터벅 돌아올 때에 새삼스럽게 느끼어지는 것이 고독이다. 고독은 불평객 낭인의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 불우객 “쎈티멘탈”한 낭인에게도 오직 한가지의 위안이 있었다. (二行略) 어떤 타산 하(打算下)에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위하여 “푸로그람”이 있어 노력하 는 것이 아니고 그저 막연하게 “우리에게도”하는 그 상념뿐이다. 마치 야 소교(耶蘇敎)의 목사나 전도인이 “야소(耶蘇)만 믿으면 천당에 갈 수 있소 내가 잘 해서 가는 것이 아니요, 사람은 누구나 죄 없는 사람이 없어 십자 가에 못 박힌 야소의 공으로 천당에 가는 것이오. 야소교만 믿으면 되오” 하는 그러한 관념가이었다. 그러다가 간혹 만나는 친구는 역시 그러한 낭 인 불평객이니 그들은 만나면 금방으로 무슨 수나 생길듯이 호언장담하 고 거기에서 스스로 위안을 얻는 그런 낭인의 한 사람이었다。경기도 양평 출생의 여씨는 강원도 강릉에 가서 교원 생활을 하다가 시국의 초이(超移) 를 보고 비분감개(悲憤感慨)하여 홀연히 고국을 등지고 남경에 왔으나 또 한 별수없는 일개의 방랑아이었다.73
이렇게 여운형은 남경 유학 초기까지도 목회자적 정체성과 목적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로서, 금릉대학 재학 중 남경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남경한인교회’를 세우는 주역74이 되었다.
73 이수영, “여운형론,” 「전선」 (1933년 3월); 여운홍, 『몽양여운형』 (서울: 청하각, 1967), 281-282쪽에서 재인용.
74.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112.
(남경에는) 조선인의 교회는 그림자(影子)도 없더니, 1914년 겨울 10월에 조선 신자 서병호(徐丙浩)의 소개로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수선입학 (首先入學)하니, 이 학교는 중화에 선교하는 서국 각 교파가 연합 설립한 바라. 이 당시 학생이 500-600명에 달하였으니 조선인이 유학하기는 처 음이더라. 고로 교원 직원들이 모두 주목하는 바 되어 품행과 신앙으로 일반 시선 중에 표준이 되고자 하여 무릇 예배 모임이 있으면 때와 장소 를 불구하고 열심히 참석하니 이로 인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특애(特愛) 를 받았더라.75
당시 조선경성청년회에셔 다년간 총무로 근무하며 우리에게 극(極)한 동 정을 표하던 미국인 길례태(吉禮泰, P. L. Gillette, 1872-1938) 가족이 남 경으로 반이(搬移, 짐을 날라 이사(移徙)함. 세간을 운반(運搬)하여 짐을 옮 김.)하여, 청년회 사무에 착수한 바 우리의 고독한 학생에게 일단의 위자 (慰藉, 위로와 도움)가 되더라. 1915년 봄에 이르러 현창운(玄彰運), 여운형(呂運亨), 김현식(金◯軾), 김 순애 제인(諸人)이 역내(亦来) 입학한 후로 길(질레트) 씨와 회의하고 길 씨 사택에셔 선인 예배회가 시작되었다. 봄 3월에 주일학교를 설(設)하고 직 원을 조직하니 교장은 서병호(徐丙浩), 부교장은 길례태(질레트), 서기 겸 회계는 여운형(呂運亨), 감독은 나양제(羅良鍗)로 정하여 중국인 어린이들 에게 전도하기를 목적하였으나 별로 성적이 좋지 않았더라. 겨울 10월 성탄절에 남경 시가에 조선인으로 구주 셩탄이라 대서(大書) 한 등광리(燈光裡)에서 30여 명 한국교도(韓国教徒)가 오락(娛樂) 함은 조 선의 정채(精彩, 생기 넘치는 활발[活潑]한 기상[氣像])가 과연 그리스도를 인 하야 광휘(光輝)를 방(放)하더라.76
75 “ 上海鮮人敎會史 (十) : 附 南京教會史,” 「기독신보」 (1922년 8월 30일), 1면.
76 “ 上海鮮人敎會史 (十一) : 附 南京教會史,” 「기독신보」 (1922년 9월 6일), 1면.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 서울의 YMCA에서 활동하던 질레트(P. L. Gillette, 吉禮泰 1872-1938)가 남경으로 부임하고 때마침 한국인 유학생들 이 점증하고 있던 터라 1915년 봄에 여운형을 비롯한 4인의 한국인 청년 이 질레트와 상의해 남경에서의 첫 한인교회를 시작했던 것이다.77
77 선우훈은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생으로 여운형, 서병호, 신국권(申國權), 조동호(趙東祜), 김갑수(金甲洙), 김현식 등 12명이 있었는데, 질레트의 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고 회고했다. 선우훈, 『민족의 수난 : 105인 사건 진상』 (서울: 명성출판사, 2008), 128.
「기독신 보」에 의하면 이듬해 1916년부터 17년까지 약 20여 명이 모였으며, 금릉 대학의 “공학사(工學士) 스모을” 씨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렸고, 금릉대학 학장인 미국인 보웬(A. J. Bowen, 包文, 미감리회 선교사) 박사가 예배를 인도했다.78
이 시기 남경에서의 유학 시절에 대해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 다.
내가 금릉대학을 다니던 28, 29, 30살의 3년간은 가장 유쾌한 시일이었 으니, 이렇게 이 나라 청년들과 어울려 노는 한편 주야로 필사적으로 공 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게 여겼던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롭 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3년이 지나도 나는 졸업증서를 받 지 못했습니다.79
남경에서의 여운형은 유학생 신분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주로 학업 에 매진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위의 “남경선인교회(南京鮮人敎會)”의 역사 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소수의 유학생들을 규합해 남경에서의 첫 한인교 회 설립이라는 역사적 역할 또한 감당했다.
이후로도 남경한인교회는 꾸 준히 발전하여 금릉대학과 남경신학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으며, 여운형이 1917년 상해로 떠난 이후에도 상해 한인교회와 긴밀히 관계를 유지하며, 상해한인교회의 김병조 목사의 목양 하에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고, 1921년에 이르러서는 신자 수가 50여명에 이르렀다.80
78 “ 上海鮮人敎會史 (十一) : 附 南京教會史,” 「기독신보」 (1922년 9월 6일), 1면. 윤은자, “20세기 초 남경 의 한인 유학생과 단체(1915-1925),” 「중국근현대사연구」 39 (2008년 9월.), 42; 윤은자, “20세기 초 남 경 한인교회와 한인사회 : 「기독신보」를 중심으로,” 「사총」 (2024년 1월), 169.
79 여운형, “나의 상해시대,” 「삼천리」 (1932년 10월).
80 “ 上海鮮人敎會史 (十一) : 附 南京教會史,” 「기독신보」 (1922년 9월 6일), 1면.
2) 여운형과 상해한인교회
⑴ 상해한인교회의 시작과 여운형의 합류
금릉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여운형은 곧 상해로 이주했다.
그때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협화서국81에 취직하여 금릉대학에서의 학비를 상환 하고, 상해에 정착하거나 미국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한인들의 어려운 행 정, 교통 업무 등을 교섭하는 일종의 알선 업무를 담당했다.82
당시 상해에 서 활동 중이던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費啓鴻, 1845-1923) 선 교사는 상해YMCA에서 예배드릴 때부터 한인 기독교인 중 몇 명을 최소 한 1916년부터 미화서관(美華書館, The Methodist Publishing House in China) 의 서적 판매원이라는 유급 직원으로 채용하여 경제적으로도 지원하였으 며83 이때 여운형도 피치의 도움 속에 관련 단체들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84
81 협화서관(協和書局, The Shanghai Mission Bookstore 또는 협화서국)은 상하이에 있던 양대 미션계 출 판사인 북장로회의 ‘미화서관’과 남북감리회의 ‘화미서국(華美書局)’이 1915년 함께 조직한 서적판매 대리점(Mission Book Company)으로서, 본부는 ‘미화서관’의 북경로 18호 건물 안에 두었다. 이 기관 은 주로 기독교 서적, 문서, 찬송가 등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과 의 접촉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북경로 18호에 함께 위치하여 한국인들이 이곳의 예배당(로 리기념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등 한인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王月琴, “上海华美书 局及其在近代上海出版印刷文化中的作用,” 「都市 文化研究—城市精神:一种生态世界观」 第14辑 (2016. 8), 289-290; 이혜원, “북경로 18호의 공간적 의미와 개신교 선교사와의 관계,”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2호, (2020), 75쪽에서 재인용.
82 여운형, “나의 상해시대,” 「삼천리」 (1932년 10월).
83 有吉明(上海總領事), “上海在留 排日鮮人 動靜 및 人名簿 提出에 관한 件,”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 在上海地方 1, 政機密 제72호, 1916년 9월 18일; 이혜원, “북경로 18호의 공간적 의미와 개신교 선교사 와의 관계,”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2호 (2020), 70쪽에서 재인용.
84 여운형이 1928년 일제에 체포된 이후 조사받는 과정에서 협화서국에서의 근무내용에 대해 다수 밝히 고 있다. 1차 조서: 상해에서는 미국인이 경영하고 있는 협화서국의 위탁판매부 주 임으로서 1917년 까지 동 서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상해로 온] 목적이 되고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2차 조 서: 1917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예수교의 서적판매업 협화서국에 고 용되어 그곳에서 2년간 근무하였 다; 5차 조서: 1917년 7월 동 대학 수업 후 곧 상해에 와서 미국인 핏치(Fitch) 경영의 북경로18호 협화 서국의 위탁 판매부 주임이 되었다.; 7차 조서: 각 협회가 연합하여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협화서국이 라 하고 있다. 영어 명칭은 Mission Book Company라고 한다. 상점 앞에 는 이 영어명과 협화서국 두 가지 간판이 걸려 있다. 『몽양여운형전집 1』, 396-551; “피의자신문조서(제1회), 1928년 7월 8일”; “피 의자신문조서(제2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928년 8월 1일”; “피의자신문조서(제5회), 경성지방법 원 검사국, 1928년 8월 5일”; “피의자신문조서(제7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928년 8월 8일.”
이 시기 여운형은 상해에서의 한인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이러한 상해 교민의 상황을 1918년 한국의 「기독신 보」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상해에서) 조선사람들의 거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냐 하면 고(故) 민영익 (閔泳翊) 씨로부터 그 외에는 국사범들의 피신하는 땅이었는데 이를 쫓아 조선 사람들이 많이 발자취를 머물렀더니라. 현금에 와서는 조선 사람이 300여 명이 취집하여 거류하는데 그네들이 다 무엇하는 자들이냐 하면 상업, 공업, 학업 이상의 세 가지에 주의하고 와서 거류하는 청년들인데,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 보기를 시작하기는 1913년에 경성인 최재학 씨가 와서 있는 동안에 비롯하였더라. 그 후로 점점 진행하여 온 지 오늘에 근 100명씩 모여서 예배 보기는 하되, 목자 없는 양이 되어 영혼상 목마르고 배고픈 정상이 없지 못하였노라.85
위 여운형의 기고를 통해 상해에 1910년대 중반 이후에 조선인들이 다 수 유입된 것을 알 수 있으며, 1913년에 서울 사람 최재학 씨가 있는 동안 에 상해선인교회(上海鮮人敎會)가 시작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같은 「기독 신보」에서 다룬 “上海鮮人敎會史” 연재에서 이 당시 상해한인교회의 설립 과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연재에서는 상해한인교회의 시작을 다음 과 같이 진술했다.
주후 1914년 추(가을) 9월에 중국청년회 총무 ‘락우드’(미국인) 씨가 우리 교회의 예배할 처소가 무(無)함을 문(聞)하고 민연(悶然)히 사(思, 생각)하 야 매 수요일 밤마다 청년회 사무실에 우리 교우를 인도하야 영문사경회 하니 출석한 교인은 최재학, 임학준, 이기용, 변(卞)지명, 문석진, 홍슌겸 (謙), 이흥석 제인이더라. 동(겨울) 10월에 주일예배회를 발기하니 명칭은 우호한인예배회(寓滬韓 人礼拝會)86라 하고 공조계 서화덕로 미국항해청년회관(미 해군 YMCA) 1방 을 차득(借得)하야 일요일마다 회집 예배하기로 하고 위원 4인을 선거하 니 최재학, 임학준, 이흥석, 김종상 제인인바 김종상(金鍾商)은 특히 예배 인도원으로 피임하다.87
85 여운형, “상해에 재(在)한 조선인의 상황,” 「기독신보」 (1918년 9월 25일). 3면.
86 ‘우호(寓滬)’라는 지명은 상하이(上海)에 거주한다는 뜻으로, 상하이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 중 하나 이다.
87 “ 上海鮮人敎會史,” 「기독신보」 (1922년 6월 28일), 1면. 195 홍승표 | 개신교 교역자(敎役者)로서의 여운형 - 그의 선교와 교회 활동을 중심으로
위 여운형의 진술에서는 1913년에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기독 신보」의 “상해선인교회사”에서는 1914년이라는 교회 설립 연원의 오차가 확인된다.
어찌 되었든 1910년대 이후로 유입된 상해지역의 한인들을 위 한 구심점 역할을 상해한인교회가 크게 감당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 다.
1914년 미해군 YMCA 회관에서 예배를 드리던 상해한인교회는 1915 년 8월부터는 ‘사천로(四川路) 중국청년회’로 옮겨 1919년 봄까지 약 4년간 예배를 드렸다.88
여운형이 전도사로 활동하게 되는 1917년 당시 상해한인 교회는 사천로 중국청년회 자리였다.
이곳에서 여운형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費啓鴻, 1845-1923) 선교사와 그의 아들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費吾生, 1883-1979) 선교사 두 사람과 협력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필드 피치는 세례와 성만찬, 예배인도와 설교 등을 맡았으며89, 애쉬모어 피치는 여운형이 펼치는 민족운동을 교인들과 교류하며 협력하 였다.
애쉬모어 피치가 협력했던 대표적인 일이 찰스 크레인(Charles Crane)의 상해 방문시 크레인과 여운형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었다.90
처음 상해한인교회는 영어성경공부를 통해 시작했다.
그러나 김종상 전도사의 부임시기 부터 이 성경공부는 폐지되었는데, 여운형이 새롭게 전도사로 부임하면서 영어성경공부가 재개되었다.
당시 협화서국의 실무 자로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 몽가이(夢加伊)가 주일예배 전에 이 성경공부를 지도했다.91
88 이혜원, “북경로 18호의 공간적 의미와 개신교 선교사와의 관계,”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2호 (2020), 58. 89 「기독신보」 (1922년 7월 12일), 1면; “여운형씨 보고,”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7회 회록」 (1918), 16.
90 정병준, “3·1운동의 기폭제: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 및 청원서,” 「역사비평」 (2017년 5월), 229. “
91 上海鮮人敎會史,” 「기독신보」 (1922년 7월 12일), 1면.
여운형은 당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던 상해에서 한국인 기독청년들이 영어와 국제지식을 습득하도록 교육하기 위해 영어 성경공부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유입되는 한국인의 수가 급증하자 장소 의 협소함이 문제가 되어 여운형은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중국인장로교회 예배당 임차 문제를 처리하기도 했다.
1919년 봄 3월에 이르러 본국(한반도)에 독립운동이 기(起)한지라 상해에 는 임시정부를 설(設)하게 되엿고 본국 교회에는 소란(騷亂)이 대기(大起) 한지라. 자(茲)에 각계 인사들이 혹은 광복(光復)을 지(志)하며 혹은 핍박 을 피하야 상해에 운집할새 교인이 태반(太半)이나 되는지라. 청년회관 일간방실(一間房室)에 용신(容身) 예배키 불능(不能)하리라 하야 비계홍(費 啓鴻, G. F. Fitch, 1845-1923) 목사의 동정(同情)으로 씨(氏)의 관리하는 예배당을 차용하니 즉(即) 영조계(英租界) 북경로(北京路) 18호인데 중국장 로교인예배당(中國長老教人禮拜堂)이라. 시간의 상치(相値, 두 일이 공교롭 게 마주치거나 겹침)와 도로의 복잡으로 인하야 단(單)히 일요일 오후 1차식(一次式) 회집예배(會集體拜)할 뿐이엿고 성경공부회(聖經工夫會)와 일요일 석찬양회(夕讃揚會)와 수요일 석기도회(夕祈禱會)는 모두 회집치 못하 엿더라.92
92 “ 上海鮮人敎會史 第三章,” 「기독신보」 (1922년 7월 19일), 1면.
⑵ 상해에서의 여운형 전도사의 역할과 의미
여운형이 상해에 이주하기 전부터 상해한인교회 모임은 목사안수를 받은 교역자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차였다.
상해한인교회는 1916년에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전도목사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93를 보낸 바 있으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학교에 수학했고 승동교회 전도사 경력을 지닌 여운형이 상해에 이주하자 교회의 요청으로 자연스럽게 전도사직을 맡게 되 었던 것이다.
1917년 봄, 여운형은 자신에게 맡겨진 전도사직을 수행94하 며, 협화서국의 다양한 행정 업무와 더불어 상해를 찾은 수많은 한국인들의 여러 민원들을 해결해 주는 활동을 병행했다.
93 “전도국보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5회 회의록」 (1916), 35.
94 “1917년 춘(봄) 1월에 남여 교우 30여인이 사천로(四川路, 쓰촨루)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 회집하야 임원을 선거하니 여운형(呂運亨)은 전도인(傳道人)으로 임학준은 서기로 한진교(韓鎭教)는 회계로 피임하다.” “上海鮮人敎會史,” 「기독신보」 (1922년 7월 12일), 1면; 쑨커즈(孫科志), 『상해한인사회사 1910~1945』 (파주: 한울, 2012), 192.
이러한 여운형의 다양한 방면의 활동들은 상해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 목회의 연장선상이었다. 1918년에도 여운형은 다시금 상해한인교회의 전도사로 피선95되었다.
과중한 업무와 역할부담으로 인해 전문적인 교역자의 역할이 필요함을 절 감한 여운형은 한국교회에 목회자의 파송을 요청하는 기고를 통해 상해한 인교회의 존재가 지닌 신앙적, 사회적, 민족사적인 가치와 의미를 역설하 며, 다음과 같이 상해한인교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했다.
(저는) 2년 전부터는 거류하여 오는 터인데 작년 총회에 전도목사 한 분을 파송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더니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유감이 더니 금번에는 그 일을 전위(全委)하여 건너와서 선천 총회 석상에 구두 로 (상해한인교회의) 가련한 정황을 진술한 결과로 목사 한 분을 파송하는 결의를 받고 돌아가겠으니 상해 우리 청년의 행복이요, 조선교회의 영광 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나니다.96
상해는 어느 곳 보다도 긴요한 땅이라. 따 라서 청년들을 가히 주의하여 양성시키는 대로 효력이 다대할만 한 희망 이 있는 터인 즉 기도하시는 시간 중에 상해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한 말 씀씩만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 여쭈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상해 청년 신도 교회로써 장래에 조선 교회에 다소간 유익을 끼칠 것은 정한 이로소 이다. 지식이나 금전이나 이러한 등속(等)屬은 물론이고 다만 신앙상 건 강만 얻을 것 같으면 가히 유망하다 할 것이외다.97
95 “1918년 춘(봄) 1월에 다시 임원을 개선하니 여운형을 전도인으로, 선우혁(鮮于爀-앞의 이름과 한자 가 다름)은 서기로, 한진교(韓鎮教)는 회계로 당선하다.” “上海鮮人敎會史,” 「기독신보」 (1922년 7월 12 일), 1면.
96 그러나 그후로도 오랫동안 한국교회로부터의 공식적인 목사 파송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1934년에 공 식 파송(김성배 목사)이 이뤄진다. 장성산, “상해교회의 김목사 환영,” 「기독신보」 (1934년 12월 12일), 7면.
97 여운형, “상해에 재(在)한 조선인의 상황,” 「기독신보」 (1918년 9월 25일). 3면.
1918년 이 기고에서는 목회자 여운형의 면모가 강하게 부각된다.
한국 교회가 상해한인교회에 대한 보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길 요청하면서도, 금전이나 물질적 후원에 앞서 이곳 상해의 기독교 신자들과 청년들 이 “신앙상 건강을 얻는 것”만으로도 “가히 희망이 있다”는 목회적 표현으 로 글을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운형의 진술은 당시 전도자, 목회자, 교역자로서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낸 대목이라 하겠다.
이러한 교회적인 필요와 요청에 따라 그는 상해한인교회에 목사의 파 송과 한국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18년 평북 선천에서 열린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7회 총회에 애쉬모어 피치(G. A. Fitch) 선교사와 함께 상 해한인교회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때의 여운형 전도사의 보고 내용 이다. 오
래전부터 우리 조선 사람이 상해로 들어가기를 시작하여 지금은 320여 인이 되었는데, 그 중 신자 몇 사람이 청년회 방을 빌려 예배하다가 그 후 선우혁 씨와 교제(敎弟, 여운형 자신)가 들어가 인도하는 중 70-80명씩 모 여 예배하며 상업과 유학차 점점 이주자가 많은데, 지금 가정을 이룬 집 도 30여 호이며, 월급 생활하는 사람이 40여 명, 소학교 학생 13명이요, 피취 목사가 사랑으로 도와 주고 강도(講道)를 늘 하여 주는데,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우리 교우가 본인을 대표로 보내어 출가한 딸이 본가에 와서 달라는 것 같이 간절 청원하오니 특별 애고(愛顧, 사랑하여 돌보아 줌) 하시 옵소서.98
이러한 여운형의 요청에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상해한인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상해교회를 위해 여러 후원 결의99가 이뤄졌음 에도100, 결국 재정상의 곤란과 적임자의 부재로 인해 최종적으로 시행되지 는 못했다.101
98 “여운형씨 보고,”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7회 회의록」 (1918), 16.
99 “전도부보고,”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7회 회의록」 (1918), 26.
100 “ 추 (가을) 9월에 본국 선천(宜川)에셔 장로교총회가 개함을 문(聞)하고 여운형(呂運亭)을 파견하야 본교회의 정황을 보고(報告) 선교사(宣教師) 1인을 청원하니 총회에셔 탐납(探納)하야 목사를 파견하 기로 가결하고 월봉은 각 교회이 특별의연 하기로 의정(議定) 되얏스며 여운형(呂運享)이 총회에 왕 반(徃返)할 시간은 장덕상(張徳上) 씨(氏)가 상해에 재(在)하야 전도의 임을 대하얏더라.” “上海鮮人 敎會史,” 「기독신보」 (1922년 7월 12일), 1면.
101 “9. 작년 선천 총회시에 상해로 전도목사 파송하려던 일은 재정 곤란과 목사로 갈 사람이 없음으로 지금까지 파송치 못하였사오며…,” “전도부보고,”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8회 회의록」 (1919), 31.
이러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상해한인교회에 대한 소극 적인 태도와 미온적인 반응은 아마도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한인교회 와의 접촉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화된 결과102로 보인다.
여운형은 3·1운 동 이후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김병조(金秉祚, 1877-1948) 목사103가 상해로 망명해 온 이후 그가 상해한인교회의 임시 담임목사를 맡는 것이 결정될 때까지 교회의 주도적인 리더십으로 활약했으며, 김병조 목사의 부임 이후에도 담임목사의 목회를 적극 도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조력 했다.
상해한인교회가 한국으로부터 정식 파송된 목회자를 맞이한 것은 교회 설립일로부터 20년이 지난 1934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상해교회는 설립한 지 20년이요, 장로회에 전도목사 파송 청원을 시작한 지도 20년인바 그동안 해외에 와서 있던 목사로 여러분이 임시임시 인도 하는 중, 4-5년 전부터 본국에 있는 목사파송을 총회에 간접(間接)하여 인선 허락까지도 여러 차 되었으나,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지난 9월 총회 작정대로 김성배 목사104께서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20년간 우리 상해교회의 간원(懇願)을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이뤄주심인바 일반 교우의 기쁘고 감사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105
102 당시 국내교회는 조선총독부의 통제와 경찰국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일제가 ‘독립운동 의 근거지’로 인식하고 있던 상해한인교회에 공식적인 지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밀리에 지원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형석, “상해거류 한인기독교도들의 민족운동,” 『사학논총 : 용암 차문섭 교수 화갑기념』 (서울: 신서원, 1989), 578.
103 김병조(金秉祚, 1877-1948)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서 평안도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망명하여 4월 13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는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고 그해 8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여운형 보다 나이가 9살 많았으며, 평양신학교에는 여운형 보다 1년 늦게 입학 했다. 따라서 신학교 재학시절 이들은 이미 동문수학한 관계였기에 상해한인교회에 김병조 목사가 부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04 김성배 목사는 1934년 당시 신학연구차 산동 등현신학원에 유학 와 있다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의 선택과 상해한인교회의 간청에 의해 1934년 10월 13일 상해에 도착했다.
105 장성산, “상해교회의 김목사 환영,” 「기독신보」 (1934년 12월 12일), 7면.
전도사 여운형의 활동은 1918년 11월 27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찰스 크래인 환영회에서 그를 만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전달하면서부터 그 시한이 다했다.
“상해선인교회사”에 서도 여운형이 크레인을 만난 사건이 일제로부터의 간섭과 감시가 심화되 어 더이상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어 심경열(沈經悦) 전도사가 그 직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독립운동과 교회 관계 시년(是年) 동(冬, 겨울) 11월에 가주대란(歌洲大亂) 이 고종(告終)하고 세계대변혁의 조짐(兆朕)이 생할 시에 읍리(巴里, 프랑스 파리)에셔는 평화회(平和會)가 개하며 각국 민족은 시기(時機)를 제(際)하 야 하사(何事, 무언가)를 경영(經營)코져 준비에 급급(汲々)하더라. 미국인 ‘크레인’은 해국(該國) 정계(政界)의 요인이라 원동(遠東)의 형세를 시찰코 져 중국에 내(來)하거널 운형(運亨-여운형) 등이 차인(이 사람)을 방문하고 평화회에 대표를 파견할 사(事)와 조선독립 요구의 사(事)를 토의한 후 각 서(覺書) 일동(一同)을 제송(製送)하야 평화회와 미국대통령의게 전하게 하 얏더니 사건이 발로(發露) 됨을 인하야 일인(日人)의 교섭(交涉)이 생(生)한 지라 여운형(呂運亭), 선우혁(鮮于爀), 김철(金澈), 장덕수(張德秀) 등이 부 득기(不得己) 은력(隱力, 숨어 활동)하게 되여 12월브터는 심경열(沈經悦)이 전도의 임(任)을 대행(代行)하니라.106
106 “ 上海鮮人敎會史,” 「기독신보」 (1922년 7월 12일), 1면.
여운형은 1918년 크레인과의 면담 다음 날인 11월 28일 정식으로 신 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1월 29일 ‘재중국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의 명 의로 크레인에게 편지를 작성하여 독립청원서와 함께 윌슨 대통령에게 전 달토록 요청했다.
이렇게 3·1운동 직전 구체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착수하 기 시작한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의 긴급하고 역동적인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1918년 연말부터 공개적인 목회 사역은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 서 그가 맡았던 전도사 직은 심경열이 맡게 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 여운 형은 상해한인교회에서 교역자로서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한 것 같지 않 다.
그러나 상해한인교회를 자신의 주요한 독립운동의 배경과 기반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이며, 1920년에 이르러서 교회의 ‘교인 대표’로서 이 름을 올리고 있다.107
107 “ 上海鮮人敎會史 第三章,” 「기독신보」 (1922년 7월 26일), 1면. 108 “위원 4인을 선거하니 최재학, 임학준, 이흥석, 김종상 제인인바 김종상(金鍾商)은 특히 예배 인도원 으로 피임하다.” (“상해선인교회사,” 1922년 6월 28일.) “1917년 춘(봄) 1월에 남여 교우 30여인이 사천로(四川路, 쓰촨루)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 회집하야 임원을 선거하니 여운형(呂運亨)은 전도인(傳道人)으로 임학준은 서기로 한진교(韓鎭教)는 회계로 피임하다.” (“상해선인교회사,” 1922년 7월 12일.) “지금(只今)은 교역자들이 다수 회집하얏슨 즉 목사 중 1인을 선거하야 교회를 인도케 함이 가(可)하 다 하야 19일에 임시로 유호(留滬, 상해에 머뭄)하는 목사, 장로와 상해에셔 유래(由來)로 교회를 대 표하는 남녀 각 12인이 회집 기도한 후 임시로 담임목사 1인은 투표로 공선(公選)하니 김병조(金秉 祚) 목사가 피선하다.” (“상해선인교회사 제3장,” 1922년 7월 19일.) “교회사무는 복잡하고 직원의 수는 대소(大少)함으로 상의회(常議会)를 치(置)하고 의원(議員)은 현 직원 외에 김인전(金仁全) 정인과(鄭仁果), 손정도(孫貞道), 이원익(李元益), 장붕(張鵬), 조상변(趙尙 變) 제인(諸人)이 피선하야 교회의 대사(大事)를 공의(共議)하다. 신년(新年) 임으로 신임목사(新任 牧師)를 갱선(更選)하기로 의결하고 주일(主日)에 일반 교인의 투표하니 김병조(金秉祚) 목사가 최다 수로 잉임(仍任)되다.” (“상해선인교회사 제3장 (續),” 1922년 7월 26일.) “1921년 1월 제1예배일에 남녀 교우 일반 세례인이 신년 담임목사를 경히 투표하여 김병조 목사가 최 다수 잉임되다. 교인이 일가월증하야 주일회집이 145인에 불하(不下)하고 종차(從此)로 교무의 호번 (浩繁)함을 인하여 집사 4인을 선거하니, 선우혁 한진교, 김태연, 김순애 4인이 피임시무(被任視務)하 고 종차(從此)로 상의회는 폐지하다.” (“상해선인교회사 제3장 (續),” 1922년 8월 2일.) “집사 중 선우혁(鮮于爀)이 남경(南京)에 유학(遊學)함으로 교회 중이 다시 집사를 투표하야 그(其) 의 제(弟, 동생) 훈이 피선하다.” (“상해선인교회사 (七),” 1922년 8월 9일.)
여운형의 기독교 교역자로서의 삶은 이렇게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투신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전도사(교 역자, 목회자)로서의 경험과 정체성은 그가 이후로 보여준 독립운동가, 민 족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구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체성 형 성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상해한인교회가 지닌 주목할만 한 특징은, 여운형이 전도사로 시무하기 이전부터 꾸준하게 상해한인교회의 지도력 선출 방식 이 엄정한 민주적 절차108를 거쳤다는 점이다.
교인들은 1년에 한 번씩 투표 로 교회의 담임교역자와 교회 임원들을 선출하였고, 그렇게 선출된 교역 자와 임원들은 회중으로부터 교회를 이끌어갈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여운형은 이러한 탈권위주의적인 민주적 절차에 따른 지도력을 교회 활동 을 통해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체득했을 것이며, 이러한 교회 조직의 경험 은 그의 평생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반영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그가 서울에서 교역자로 활동할 때 부터 경험해 온 교파 간 연대와 에큐메니즘을 상해한인교회에서도 여실히 경험하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여운형 자신은 장로교회에 교파적 배경을 두고 있었지만, 상해한 인교회의 정체성은 특정 교파에 구애받지 않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연합 정신109을 구현하고 있었으며, 상해한인교회의 장정(章程)에서도 그러한 에 큐메니컬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09 상제(上帝)의 진리를 보전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완전케 하기를 위하야 상해에 거류하는 목사일동과 남경교회의 제직 일동이 회합하야 장정을 정정하야 자금(自今)으로 시행함을 일반 교우의게 포고함. 제1조 교회의 조직은 상해에 재류하는 한인 남여 신도로 함. 제2조 본교회 교인은 본교회에셔 수세(受洗)한 자와 타교회에셔 이명한 자로 하고 혹 가족이나 개인 으로나 아직 이명치 아니한 자는 6개월 이내로 이명케 하고 약무(若無?)한 자는 본교회 교인으로 간 주하되 본인의 승낙을 요함. 제3조 교회 목사 집사는 일반교인의 투표로 선정함(혹 본국 전도국에 청빙할 수도 유함). 제4조 교회를 완전케 하기 위하야 치리회원을 선정할 일. 제5조 혹 타교회로셔 이명한 치리회원이 유하야 교회가 치리 회원으로 정코져 하면 투표 선임을 할 수도 유함. 제6조 치리회원이 무할 시는 임시 치리을 위하야 장감 양파의 증경(曾經) 치리하는 직임을 대(帯)하 엿던 자 3인 이상 위원을 일반 교인이 표선하여 치리회를 대행함. 제7조 본 교회 교인의 권징에 관한 규례는 본국 장감 양교회의 치리를 준거하야 치리회에 함서 집행 함. 제8조 본 교회의 권징은 여좌함. (1) 계명을 범한 자, (2) 잡기하는 자, (3) 아편(鴉片) 장사 하는 것과 아편을 먹는 자, (4) 취주망행(醉酒妄行)하는 자, (5) 기인편재(欺人騙財)와 구타하는 자, (6) 이단으 로 간주(看做)하는 타 교파에 자의로 이명한 자, (7) 혹 이명하지 아니함으로 치리키 불능한 자는 원속 교회에(장유회, 당회, 연회, 노회) 통지할 일. “상해조선인야소교회(上海朝鮮人耶蘇敎會) 임시장정(臨時章程),” 「기독신보」 (1922년 4월 26일), 5 면. 제9조 본 장정은 본교회와 연락되는 지방에 일체 시행함(소주, 남경, 천진). 제10조 본 장정은 형편에 의하야 수시 증감할 수도 유함.
그의 교회에서의 이 러한 교파주의를 넘어선 연대와 협력, 에큐메니컬 활동은 이후에 이념적 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한국 독립운동의 진영과 계파 간 이질성과 배타 성 속에서 이러한 차이들을 극복하고 융합하는 역할로 승화되었다.
여운형은 이렇게 중국에서의 새로운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상해한인교회라는 신앙적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와 에큐메니즘에 기반한 목회를 경험하고, 이후에 보다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기에, 교 회에서의 목회 경력은 그의 평생의 조직력과 추진력, 그리고 리더십의 토 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해한인교회에서의 경험과 정체성은 그가 평생 보여준 유연하고 탄력적이며, 관용적이고 포괄적인 융합적 인 품과 성격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Ⅳ. 결론
나는 열렬한 기독 신자로 기독교는 세계에 담을 쌓으라고 가르치지 않는 다.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복지를 주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세계의 모든 것에 유쾌한 천지를 개척할 임무와 책임을 갖고 일체의 것으로부터 자유 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우리 선조는 살육과 검극(劍戟)으로 오늘을 만들었으나 이제 우리는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신이 창조 한 자유와 평등이란 균등해야 하며 조선인이므로 행복하고 일본인이므로 불행하다는 논리는 없는 것이다. … 현재 조선인은 한 민족으로서 자유를 요구하고 독립을 희망한다. 이는 조선국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이 일본제국으로서 엄염한 독립을 희망하는 것도 당연하다.110
정병준은 1919년 도쿄제국호텔에서의 연설111, 즉 조선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 신(神)의 섭리, 한국인의 각성”이라는 여운형의 논리는 “기독교 전도사였던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일단을 반영”112하는 것이라고 평가하 였다.
110 「 列席記者某氏筆記一節」, 『所謂朝憲紊亂問題』에 수록.; “1919년 11월 27일, 제국호텔에서의 여운형 연 설 요지 (당일 열석한 모기자의 필기),” 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428.
111.“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 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오, 한민족의 각성이다. …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이요,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평 화와 행복을 우리 인생에 주려 한다. 과거의 약탈 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신의 뜻이 다.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 나가 평화적 천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의 선조는 칼과 총으로 서로를 죽였으나 이후로 우리는 서로 붙들고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경 제국호텔 연설(요지),” 이정식·최상용·조영건 외, 『여운형을 말한다』 (서울: 아름다운책, 2007), 2009.
112.정병준,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파주: 돌베개, 2025), 67
연설 후에 이루어진 답변에서도 여운형은 평소 신념대로 “나는 목사 (성직자)이기 때문에 운동이라 해도 음모라든가 난폭한 부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113라고 못 박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생존권을 주장하는 목사” 로 설정하여 정치적 공방과 논쟁으로부터 비켜 나가고자 했다.114
여운형은 윌슨 대통령에게 쓴 청원서에서도 “천지창조 이래로 인류발 생 이래의 대참극 대쟁투인 세계의 대전쟁은 드디어(隨) 그치니(止하니) 악 마가 섬멸되고 사악이 세계에서 제구(除驅)”115라며 기독교 전도사로서의 문 체와 면모를 선명히 드러내 보였다. 1929년 여름 상해에서 체포되어 서울 로 압송된 후 검사 신문을 받을 때,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나는 한편 기독교를 신앙해서 신(神)이란 관념이 아모래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 아서 사실인즉 번민하고 있소. 나는 유물론이 유일한 것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소.”116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에서 기독교적 토대와 정체성이 지속하고 있음을 증언하기도 했다.
아울러 정병준은 여운형에 대해 “호방하고 적극적이며 포용력이 강한 교회 전도사 출신”117이라는 표현으로 인간 여운형을 규정했다.
113 「 東京日日」 (1919년 11월 28일).
114.강덕상, 『여운형 평전 1』 (서울: 역사비평사, 2007), 421.
115.정병준,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파주: 돌베개, 2025), 79.
116.윤경로,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2),” 「기독교사상」 (2020년 9월), 192;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 58.
117.정병준,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1919~1921』 (파주: 돌베개, 2025), 101.
그러한 여 운형의 인간적, 목회자적 풍모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나 자신을 드 러내기 보다 뒤에서 준비하고 자신보다 역량 있는 사람을 앞세우고, 매사 에 주저함이나 사심이 없다”고 평한다.
필자는 “여운형과 기독교”, “전도사 여운형”이라는 삶의 노정을 쫓아 가면서 결국 당대 한국의 개신교는 여운형을 어떻게 서술했는가에 주목했 다.
1929년 여운형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왔을 때, 「기독 신보」는 여운형의 간단한 약력을 소개하며 그의 전도사로서의 이력에 대 해 잊지 않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여운형을 전도사, 목 회자, 교역자로서 기억하고 인정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본래 양평군(楊平郡) 출생으로 배재학당을 수학한 후 기독교 사 역자로 활동하다가 해외로 가서 독립운동에 힘을 쓰고 3·1운동에 일본 정 계에 초빙으로 동경 가서 조선독립에 대한 웅변을 토하야 조야를 놀나게 하고 그 후 남경(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을 졸업하고 상해로 가서 중국, 서양인, 실업가 기타 인물과 뜻잇는 외교를 하엿는데, 원래 주연(酒煙)은 엄금이요, 인격잇고 언변 조화, 호감을 밧엇고 3·1운동 시에는 상해가정 부(上海假政府) 외교차장으로 최근에는 중국국민당 요인과 친교하여 중국 혁명에 활동하고 특히 비율빈(比律賓, 필리핀) 독립운동에 열심 원조한 일 이 잇슬뿐이오. 조선치안유지법 기타에 죄명과 증거가 확실치 못하다 하 야 장차 여운형 처치 문제가 곤란(困難)하다더라.118
한규무는 1930년대 이후 여운형의 행적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언행 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우며, 이는 해방이후에도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 다.119
118“눈물겨운 고토(古土)를 차저 : 여운형 입경, 여운형 처치 문제,” 「기독신보」 (1929년 7월 24일), 2면.
119.한규무, “여운형과 기독교사회주의,” 「몽양 여운형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몽양기념관 개관 14주년 기 념 제18회 몽양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몽양기념관, (2025), 48.
그러나 앞선 논고를 통해 여운형의 인생 전반부에서 그는 교회를 통 해 민족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했으며, 그의 근대적 정체성의 대부 분이 기독교에 근거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가 투신한 독립운동과 상 해임시정부, 사회운동 과정 속에서 교회의 제도와 조직의 한계 또한 절감 했을 것이며, 이로인해 그의 인생 후반부는 사회주의와 제휴된 민족운동 으로 전환된 측면이 있다.
혹자는 여운형의 이러한 행적이 기독교에서 사 회주의로의 전향이며, 사상적 단절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온전히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해체하는 것이 가 능한 것일까.
그의 인생 후반기에서 종교적 삶이나 언설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생애의 토대와 근본에는 개신교 신 앙의 체험과 목회자, 전도자로서의 삶의 경험이 기초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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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논문은 몽양 여운형의 청년 시절 개신교 신앙 수용 과정과 목회자 (교역자)로서의 활동을 추적하여, 그의 종교적 정체성이 훗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고자 했다. 여운형은 가족의 연이은 상실 과 국권 피탈이라는 시대적 위기 속에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고향에 교회 를 세웠다. 이후 승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며 영적 각성을 경험했으며, 개 신교 교역자의 길을 걷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평양 신학교의 보수적인 학풍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교육 수준, 선교사들의 정 교분리 원칙 및 친일적 태도 등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 유학을 결정했다. 중국 남경 유학 시절 최초의 한인교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하였으며, 상해 로 이주한 후에는 상해한인교회 전도사로도 활약했다. 특히 상해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에큐메니컬 정신과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교회 운영을 실천 했다. 여운형이 전도사로서 체득한 민주적 지도력과 포괄적인 연대 정신 은 향후 그가 전개한 민족 해방 운동과 특유의 포용적이고 융합적인 정치 적 리더십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토대가 되었다.
주제어 몽양 여운형, 승동교회, 평양장로회신학교, 남경한인교회, 상해한인교회, 신한청년단, 상해임시정부
Abstract
Yeo Woon-hyung as a Protestant Minister — Focusing on His Mission and Church Activities
Seung Pyo Hong(Ph.D. Lecturer Yonsei University)
This paper traces Mongyang Yeo Woon-hyung’s adoption of the Protestant faith during his youth and his activities as a Minister(Church Worker), with the aim of shedding light on how his religious identity influenced his later involvement in the independence and social movements. Amid the crises of his time—marked by the successive loss of family members and the loss of national sovereignty—Yeo Woon-hyung embraced Christianity and established a church in his hometown. Later, while serving as a Minister at Seungdong Church, he experienced a spiritual awakening and enrolled in Pyongyang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to pursue a career as a Protestant minister. However, feeling constrained by the seminary’s conservative academic atmosphere, its subpar educational standards, and the missionaries’ principle of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s well as their pro-Japanese attitudes, he decided to study abroad in China. While studying in Nanjing, China, he took the lead in establishing the first Korean church there, and after moving to Shanghai, he served as a Minister at the Shanghai Korean Church. In Shanghai, in particular, he practiced an ecumenical spirit that transcended denominational boundaries and managed the church according to democratic procedures. The democratic leadership and spirit of inclusive solidarity that Yeo Woon-hyung acquired as a Minister became the fundamental foundation for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he later led and for his distinctive, inclusive, and integrative political leadership.
Keywords Mongyang Yeo Woon-hyung, Seungdong Church, Pyongyang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Nanjing Korean Church, Shanghai Korean Church, New Korean Youth Group,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접수일: 2026년 05월 09일, 심사완료일: 2026년 6월 8일, 게재확정일: 2026년 6월 13일 207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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