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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종교개혁과 법(李 國 運(이 국 운)/한동대학교 법학부 )


1.

 

종교개혁은 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종교개혁과 법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때의 종교개혁과 법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지금부터 500년전 유럽의 특정 지역에서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이래 기독교의 총체적 재구성을 선도해 온 일대 종교운동을 일컫는 고유명사이다. 이 종교운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놓을지, 비종교개혁 기독교 진영을 어떻게 이해할지 등 골치 아프고 고통스런 문제들은 있지만,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종교개혁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법은 그렇지 않다. 이때의 법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 등장했던 성숙한 문명치고 나름의 법을 가지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 가운데 도대체 어떤 법을 종교개혁과 관련지어 논의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이 서구의 기독교 문명 속에서 발생한 사건인 까닭에, 일차적으로 서구법의 역사에서 종교개혁이 가져 온 변화를 살펴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곧바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 같은 비서구세계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개혁이 가져 온 서구법의 변화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 역시 실질적으로 서구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직간접적인 유용성을 거론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서구법을 따르게 된 원인을 따져 보아야 한다. 우리는 왜 우리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동아시아의 전통법을 버리고 19세기 말부터 서구법을 따르게 되었는가? 지난 세기 내내 인류사에 밀어닥친 서구법의 세계 정복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 이 논제의 근본에는 종교개혁이 서구법에 가져 온 변화와 서구법의 세계 정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난해하고도 껄끄러운 질문이 존재한다. 이 질문을 통과하지 않은 채로 서구법이라는 고유명사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법이라는 일반명사의 차원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종교개혁이 서구법의 역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 왔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필자가 다른 곳에서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이라고 요약했던 특이한 근본 규범이 서구법에 불변의 전제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서구법은 다른 문명의 법들과 달리 권력과 질서의 요청과 함께 자유와 평등의 요청을 수용해야만 했고, 그 결과 서로 모순적인 이 두 가지 요청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20세기 들어 서구법이 비서구 세계까지 실질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원인은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서구법의 혁신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생각들은 우리가 모더니티(modernity)의 기원 문제를 중심에 놓고 종교개혁과 법이라는 논제를 풀어가야 함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지금껏 서구법의 이념적 전제로 작동하고 있는 모더니티와 종교개혁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2.

 

서구적 자아의 원천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찰스 테일러는 그 첫째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내면성(inwardness)을 들었다. 이는 인간의 존재, 아니 더 나아가 존재 그 자체를,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사유하는 자아의 현존으로부터 정초해 보려는 독특한 시도로서, 멀리 플라톤에서부터 어거스틴과 데카르트, 그리고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의 면면한 전통을 이루어 왔다. 기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기본 발상은 사제들의 위계적 조직 교회를 영적 교회로 등치시키는 로마카톨릭의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서구적 자아의 원천인 내면성의 차원을 단번에 복원시키려는 급진적인 시도로도 평가될만 하다. 오직 믿음, 오직 성서라는 발상은 오로지 신 앞에 홀로 서서 스스로의 존재를 문제 삼는 사유하는 자아의 현존을 전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말해서 내면성의 차원을 복원하는 것만으로 모더니티 그 자체가 정초될 수 있는지는 극히 의문이다. 플라톤의 철인국가론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듯, 내면성의 논리는 존재의 위계질서를 얼마나 터득했는가에 대한 평가와 결부되면서 신분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테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서구의 계몽적 모더니티는 계몽의 이해와 성취를 시간적 차원으로 풀어냄으로서 결과적으로 계몽을 위계질서화 하는 또다른 권위주의, 즉 계몽주의와 연결될 여지가 내포하고 있다. 그 단적인 표현은 계몽주의가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 항상 동원하는 진보에 대한 신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개혁의 기본 발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내면성의 차원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복원이 이루어지는 방향성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사유하는 주체의 어떠함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는 스크립투라의 어떠함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의 스크립투라는 마르틴 루터가 번역하여 요한네스 구텐베르크가 찍어냈던 활판인쇄종이묶음성서(die Bibel)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활판인쇄종이묶음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대상, 즉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해 들어 온 신이 스스로의 몸으로 그 속에 남긴 유일무이한 물질적 자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우리로 하여금 고유명사인 예수와 일반명사인 그리스도를 등치할 수 있게 만든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사유를 통해 내면성의 차원을 끝없이 확장하려는 헬라인들과 표적을 통해 내면성의 차원을 아예 초월해 버리려는 유대인들 모두가 (레비나스식으로 말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동일자중심주의에 빠져 있음을 통박한다. 헬라인은 미련한 것을 한사코 배제하고, 유대인은 거리끼는 것을 기를 쓰고 배제한다. 이 둘 중 어느 하나에도 가담하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사도 바울은 정반대로 방향을 바꾸어 스크립투라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고전 1). 그러면 곧바로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이 드러난다. 하나는 이 스크립투라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바울의 용어로 말하면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스크립투라가 요청하는 것이 오로지 강요되지 않은 진실한 믿음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믿는 이의 자유를 전제하며, 믿는 이의 자유가 없이는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같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크립투라를 통해 시작된 이 새로운 삶의 본질을 아가페, 즉 대가 없이 먼저 하는 사랑이라는 사랑의 새로운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다(고전 13).

사도 바울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대변한다.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이 메시지를 삶의 모든 국면에 전면적으로 실현하려는 시도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독특성을 메시지 자체의 독특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오히려 마르틴 루터 이후 약 250년가량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회 내부는 물론 서구 사회 그 자체에서 모두 주류이자 다수가 될 수 있었던 특이한 역사적 경험에서 종교개혁의 독특성을 찾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이와 같은 특이한 역사적 경험은 서구의 문명 속에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속속들이 전면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바로 이 과정에서 일상에 대한 긍정(affirmation of ordinary life)이라는 서구적 자아의 또 다른 원천이 형성되었다. 서구법의 혁신은 바로 이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핵심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이라는 근본 규범이 서구법에 불변의 전제로 작용하게 되는 현상이 있었다.

 

3.

 

그러나 이상과 같은 설명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차원에서 개연성을 가질 뿐이다. 종교개혁의 초기 역사는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법이나 정치 같은 사회적 차원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애써 회피하고 말 그대로 영적 차원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이 강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영적 자유로 규정하면서 교회의 영적 본질을 한껏 드높이려는 마르틴 루터의 시도는 이러한 지향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서구법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입론은 흔히 영적 실체와 사회적 실체라는 개념적 구분에 따라 교회와 국가를 원리적으로 분리한 뒤, 양자의 권위에 대하여 이중적인 복종을 강조하는 태도와 연결되곤 했다. 예컨대 로마서 13장에 대한 서구 프로테스탄트들의 전통적인 해석, 즉 교회에서는 영적 권위에 복종하고 국가에서는 법적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로 놓는 태도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래지 않아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로마카톨릭 교회와 그 통치자들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종교개혁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핵심 질문은 진리를 거부하고 고의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통치자들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가 어떠한 근거로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곤혹스런 상황에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을 이은 제2세대 종교개혁자들은 불의한 통치자에 대하여 맞서거나 심지어 그를 교체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를 다양한 방향에서 찾았고, 대체로 신앙의 자유에서 일차적인 근거를 공통적으로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자유는 사도 바울의 입론에서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자는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는 당연히 저항해야 하고, 나아가 극단적인 경우에는 폭군방벌도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칼뱅주의 법이론의 발생사에 관한 법사상사학자 존 위티의 기념비적인 연구에 따르면, 종교개혁으로부터 나온 서구법의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되었다. 칼뱅주의가 동원한 가장 근본적인 법적 개념은 권리로서, 이로부터 예컨대 신앙의 자유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법적 권리로 개념화한 뒤, 그것을 보장할 법적 의무가 통치권력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법적 논리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새로운 정치사회세력으로 대두하면서, 신앙의 자유에서 시작된 법적 권리의 목록은 다른 자유들, 예컨대 재산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자유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길어졌고, 이는 통치권력에게 부과되는 법적 의무의 목록 또한 길어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말하듯이, 칼뱅주의는 세계형성적(world-formative) 기독교, 즉 사회의 적극적 재구성을 목표하는 기독교의 전형이다. 적어도 제2세대 종교개혁자들 이후 칼뱅주의는 서구법의 혁신, 즉 사회적 삶 전체를 법적 권리의무관계로 재편하는 방식으로 서구 사회의 적극적 재구성을 도모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처럼 종교개혁에서 발원한 자유의 권리화는 일단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내부에서부터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촉발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성원 자격은 단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의례적 자격 정도가 아니라 제도적 교회의 의사결정과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이 되었고, 이로부터 대의 정부(representative government), 삼권분립, 법의 지배(rule of law)처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일반화된 정치제도들이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로부터 형성되었다.

서구의 정치사에서 17세기는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내부에서부터 비롯된 이와 같은 사회적 삶의 변혁이 전사회적 범위로 확대되었던 시기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권은 폭군방벌론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는 프로테스탄트 혁명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발발했던 청교도 혁명으로서 급진적 칼뱅주의자들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혁명을 통해 통치권력을 장악한 뒤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전사회적으로 일반화시켜 자신들의 당위를 사회구성원 전체의 당위로 부과했고, 그 실현을 위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가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순간부터 예상치 못한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정치권력은 그 속성상 다른 종파의 프로테스탄트들이나 비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은 물론이려니와, 비기독교인들과 인본주의자들을 포함한 다른 종교인들을 모두 포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분리주의로서 정치와 종교의 일치체제를 끝까지 고집하다가, 그러한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에는 과감히 정치권력을 포기하고 종교운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청교도 혁명의 급진파들이 이후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급진적 분리주의자들이 되는 과정은 전형적인 예이다.

둘째는 국교주의로서 정치와 종교의 구분을 세속 세계와 영적 세계의 구분에 대응시킨 뒤, 프로테스탄티즘을 영적 세계를 관할하는 국가 종교로 제도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루터교파나 영국 성공회가 채택했던 노선이다.

셋째는 관계주의로서 정치와 종교의 구분을 종교적 교리와 세속 헌법에 공히 규정한 뒤, 프로테스탄티즘을 교회를 넘어서 사회 전체를 개혁하기 위한 이념적 동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칼뱅의 후예들이 국교주의를 포기한 뒤, 급진적 분리주의자들의 영향 속에서 형성했던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론적인 평가이지만, 이 셋 가운데 가장 우세하게 된 것은 단연 관계주의 모델이다. 급진적 분리주의자들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력과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국교주의자들도 프로테스탄티즘이 국교의 지위를 잃은 뒤에는 자연스럽게 관계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관계주의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똘레랑스의 범위, 즉 정치공동체 안팎에서 다른 종파의 프로테스탄트들이나 비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 나아가 비기독교인들과 인본주의자들을 포함한 다른 종교인들의 존재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17세기 내내 프로테스탄트 정치이론가들을 괴롭혔던 이 문제에 대하여 서구사회가 도달했던 실질적인 해결책은 똘레랑스의 실현을 시민 혁명에 의하여 탄생한 민주공화국에 맡기는 것이었다. 명예혁명의 이론가였던 존 로크의 관용론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대표적인 입론이다.

물론 시민 혁명 그 자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민주공화국 프로젝트의 출범과정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치사상과 법이론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보자면, 앞서 언급한 17세기말 존 로크가 실질적 해결책, 즉 교회가 아니라 국가에게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서 시민들 사이의 똘레랑스를 법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은 서구 사회의 프로테스탄티즘 내부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변화는 법의 세계에서 종교적 함의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순수하게 세속적이면서 국가적인 규범체계로 법 자체를 재구조화하는 과정을 촉발시켰다. 대체로 18세기 중반 이후 경쟁적으로 가속화된 일반 법전의 편찬운동은 그 이전 유럽 각지의 대학에서 수백 년 동안에 계속되었던 로마법대전의 체계적 재구성 결과를 각 국가별로 육법전서(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에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그 역사적 효시를 이룬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를 담은 프랑스 민법전의 출현(1804)이었다.

 

4.

 

서구법의 국가법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법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 변화를 감수해야만 했다.

첫째, 법질서의 궁극적인 원천으로서 기독교적 원리를 명시화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노골화 되었으며, 그 이면에는 모든 종류의 신앙을 과학의 세계에서 추방하려는 실증주의(positivism)가 작용하고 있었다. 서구법의 국가법화 과정에서 법전화의 진척과 법실증주의의 대두는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중심에는 법질서의 정점에 신이나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sovereignty)을 놓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둘째, 전통적인 교회법은 국가의 위임 또는 양해가 있는 경우에만 작동되는 특수하고 국지적인 법으로 급속히 전락했다. 여전히 교회법으로 일컬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제도적 교회 내부의 질서만을 일컫는 특수한 용어가 되었다. 교리상 초국가적이고 위계적인 단일 조직 교회를 유지해 온 로마카톨릭은 서구법의 국가법화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적 기반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그러한 조직적 기반이 없었던 각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회를 영적 실체로 보아 법의 세계에서 몰아내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오로지 국가적 차원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서구의 법사상은 신 또는 보편적 이성을 특정한 법질서와 연결하는 지점에 보통법(common law 또는 ius commune)을 배치하는 전통을 공유해왔다. 그러나 대체로 19세기 중반부터 이러한 전통은 급속하게 단절되었으며, 그 자리는 각 국가의 최고통치권력, 즉 주권자의 결단으로 대체되었다. 신 또는 보편적 이성은 궁극적 결단을 내리는 주권자의 존재와 위상을 정당화하는 맥락에서 잠시 스쳐가듯 언급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서구법의 국가법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아야 할까? 각 국가의 주권자의 결단에 의하여 대체되어 버릴 구시대의 종교적 법체계와 법사상을 옹호함에 있어서 로마카톨릭은 의외로 일정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서구법의 국가법화 과정을 촉발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는 프로테스탄티즘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일까?

철학자답게 비록 서구법의 국가법화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고 있지 않지만, 이 점에 관해서도 찰스 테일러는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내면성과 일상에 대한 긍정이라는 서구적 자아의 두 원천이 형성되는데 종교개혁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서구법의 국가법화에 이 두 원천이 작용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는가? 서구법의 국가법화 과정에서 추가된 서구적 자아의 또 다른 원천은 없었는가?

찰스 테일러는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 활동한 장 자크 루소에 주목하면서 그의 철학이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서구적 자아가 자연적 물질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현저하게 변화했다고 평가한다. 자아의 물질성에 대한 강조는 사실 그 앞 세대인 존 로크의 철학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루소에 의하여 대중적 주목과 동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주 거론되고 있듯이, 루소는 문명의 오염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이 요구하는 바에 청종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자연스럽고도 온당한 방향이라고 거듭하여 주장했으며, 바로 이 주장이야말로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시민적 계몽의 요체였다. 찰스 테일러는 바로 이 과정에서 오늘날까지 서구적 자아의 다른 두 원천을 담아내는 미학적 형식을 제공하고 있는 세 번째 원천이 형성되었다고 단언한다. 자연의 소리(the voice of nature)가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소리는 일찍이 찰스 테일러가 헤겔 철학을 주석하면서 제시했던 표현(expression)의 논리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존재의 의미, 삶의 가치, 세계의 확실성을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주어지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자신이라는 최초의 자연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 즉 그 최초의 자연의 소리를 청종하고, 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찰스 테일러는 이와 같은 표현의 논리가 형성된 이후 오늘날까지 서구 문명 그 자체가 주체의 자기실현이라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음을 주로 윤리의 미학화 현상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범위에 논의를 한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단적으로 말해서, 서구법의 국가법화는 서구 문명에서 주체의 정치경제적 자기 표현이 주권국가의 경계선을 따라 속지주의적으로 재구성된 국가법이라는 형식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 후일 위르겐 하버마스가 자세하게 논증하고자 시도했듯이, 법은 사회적 규범으로서 사실적 효력과 규범적 타당성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체계의 요구와 생활세계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또는 민주공화국의 핵심 기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현의 논리의 관점에서 사회적 규범으로서 법의 독특성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체가 국가법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자기자신를 표현하고 또 실현하려고 한다는 점 그 자체이다. 법이나 국가는 주체에 의하여 선택되며, 그 선택의 정당성은 주권자의 결단으로 신화화된다.

요컨대, 서구법의 국가법화는 서구 사회의 각 주체들이 자연의 소리와 표현의 논리에 따라 자기자신을 실현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그 결과로서 각 주권국가들이 프랑스 대법전, 독일 대법전, 오스트리아 대법전 등을 앞 다투어 제정했던, 대단히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19세기 내내 유럽의 주권국가들을 요동치게 만든 이와 같은 흐름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비서구세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한 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시 한 번, 그리고 냉전 종식을 전후하여 또 다시 한 번, 이렇게 크게 보아 세 차례 이상 진행되었던 주권국가체제의 세계화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과정에 프로테스탄티즘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일까? 앞에서 강조했듯이 프로테스탄티즘은 단지 내면성의 차원을 복원하려는 철학 운동이 아니다. 내면성의 논리는 존재의 위계질서를 계몽적 위계질서로 전환시킬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며, 이를 방지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대책은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는 스크립투라에 방점을 두어 일상의 긍정을 정초하는 독특한 맥락성에서 나온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모든 차별을 무화시키는 고결함의 동등성과 강요되지 않는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자유와 먼저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부터 정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법의 국가법화로 구체화된 주체의 정치경제적 자기표현은 단지 형식의 측면에서만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종교개혁이 만들어냈고,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확립해 낸 자기표현의 형식을, 아니 그 형식만을, 주권국가의 형태로 구체화된 각 주체들이 자신들의 선호에 따라 마음껏 활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장 자크 루소 이후 지난 2백여 년 동안 바로 이와 같은 문명적 형식 속에서 문명의 침전물이 켜켜이 형성되어 왔다. 그 결과 차별을 주장하는 차이까지도 고결함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진실을 도외시하는 믿음조차 믿음의 자유와 사랑받을 권리를 요구하는 오늘날 서구 사회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찰스 테일러가 주목하는 윤리의 미학화 현상은 삶의 모든 국면을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으로 환원시켜온 이와 같은 흐름의 한 가지 반영일 뿐이다.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은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 나아가 심지어는 프로테스탄티즘 그 자체에까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침전물을 남기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 신자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을 종교적 취향의 자기표현으로 이해하고, 지도자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을 종교적 성취를 통한 자아실현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직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비슷한 관찰의 결과는 법의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구법은 국가법화의 단계를 거쳐, 과학화와 관료화를 경험했으며, 최근에는 어떠한 목적이든 그 달성, 즉 그 표현과 실현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이기를 자처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프로테스탄티즘도 법도 일종의 영혼 없는 도구주의화를 경험하고 있다고나 할까?

 

5.

 

종교개혁은 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종교개혁과 법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글은 이러한 논제를 종교개혁이 서구법에 가져 온 변화와 서구법의 세계 정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계하여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이제 논의를 정리해 보자.

우선 서구법의 근본적 혁신을 이룬 모더니티, 즉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의 근본규범화가 종교개혁에 크게 빚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찰스 테일러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서구적 자아의 두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성과 일상에 대한 긍정의 결합은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종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루어졌으며, 그로 인해 17세기의 대변혁에 의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법의 체계적인 모습(예컨대 자유의 법적 권리화)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기에 이르러 정치와 법의 영역에서 초월적 차원을 소거하려는 노력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종교개혁과 법의 연결 고리는 서구법의 권리 체계 속에 단지 역사적 유산으로 남겨졌을 뿐이고, 곧이어 주체의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이 최선의 삶의 모습으로 강조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주권국가를 단위로 한 서구법의 국가법화가 거스를 수없는 대세가 되었다. 법은 국가법이 되었고, 종교개혁을 포함한 일체의 초월적 의미체계는 법의 세계에서 소거되었으며, 동전의 양면처럼 종교의 세계에서도 법의 자리가 말소되는 현상이 함께 벌어졌다. 그리하여 주체의 종교적 취향을 표현하는 통로로서 종교를 이해하고, 주체의 정치적 욕망을 표현하는 통로로서 법을 이해하는 오늘날의 사회적 현상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리는 한국 사회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특히 프로테스탄트 법률가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서, 이들의 내면에 깊은 분열, 깊디깊은 심연과도 같은 분열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사회에서 정상적이라고 전제되고 있는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개혁자들이나 그 다음 세대의 신앙인 반면, 한국 사회에서 정상적이라고 전제되고 있는 법은 서구법의 국가법화 이후 식민 지배를 통하여 강요되었던 관료적 도구주의의 법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신앙적, 지적 거인이 이와 같은 근본적인 분열을 감내하고 또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사회의 많은 프로테스탄트 법률가들이 삶의 방책으로서 이원론을 선택하여 신앙의 세계에서는 법에 관하여 침묵하고 법의 세계에서는 신앙에 관하여 침묵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을 이 두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난과 비판에 앞서서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깊은 동병상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이와 같은 관조와 이해와 공감은 분열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대응 또는 관여를 위한 준비작업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개혁은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전면적으로 실현하려는 기독교의 줄기찬 시도가 낳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과 법의 연결고리가 서구법의 국가법화 과정에서 끊어졌건 그렇지 않건, 더 중요한 문제는 모든 차별을 무화시키는 고결함의 동등성과 강요되지 않는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자유와 먼저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다시 법의 토대로서 정초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이 모든 것이 비롯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법의 토대로 다시 맞아들이는 작업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찰스 테일러가 자연의 소리에서 비롯된 표현의 논리가 서구의 현대 문명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면에 여전히 유대-기독교적 유산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그가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자아의 물질성에 대한 이해과 주체의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에 대한 긍정이 문명적 태도로까지 고양되었으면서도, 현재의 서구 문명이 여전히 보편적 인권이나 박애주의를 매우 긍정적인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구 역사에서 유사한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던 스토아 시대의 로마 문명과 현격하게 다른 점으로서, 찰스 테일러는 도대체 이러한 규범적 소여(所與, the given)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자문한다. 그의 답변이자 주장은 서구의 문명이 비록 형식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유산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대-기독교적 유산에 확실히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심장부에서 서구적 자아의 원천을 파헤치는 찰스 테일러의 이와 같은 고백은, 서구 문명의 가장자리 혹은 그 바깥에서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법의 토대로 삼아보려는 노력에 귀중한 위안거리를 제공한다. 비록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취가 없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서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회 내부는 물론 사회 그 자체에서 모두 주류이자 다수가 될 수 있었던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이한 역사적 경험이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만들어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프로테스탄트들, 즉 사회 그 자체는 물론 기독교회 내부에서도 모두 비주류이자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비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신약성서의 혁명적 메시지를 삶의 모든 국면에 전면적으로 실현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역사적 자취를 남기게 마련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금 신앙의 세계에서는 법에 관하여 침묵하고 법의 세계에서는 신앙에 관하여 침묵할 뿐인 한국 사회의 프로테스탄트 법률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