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책자와 고현학자 사이의 박태원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지닌 문학사적 성과에 대해서
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거둔 문학사적 성과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
지 경향으로 나뉘어 평가되는 듯하다. 하나는 이 작품의 ‘산책자’의 양
상에 주목하는 경향이다. 최혜실의 선구적인 연구로부터 시작되어 다양
한 후속 연구를 통해 완성된 이 작품의 ‘산책자’의 양상에 대한 해명은
주로 식민지의 수도 경성을 ‘무목적적으로’ 배회하며 글쓰기 자체에 의
미를 부여하는 모더니스트 박태원의 면모에 초점을 맞춘다.1)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작품의 ‘고현학’적 양상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김윤식으
로부터 시작되어 역시 다양한 후속 연구를 통해 완성된 ‘고현학자’로서
의 박태원의 해명은, 주로 식민지 수도 경성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박태
원의 면모에 초점을 맞춘다.2)3)
물론 이 두 가지 경향은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산책자와 고현
학자는 큰 범주에서 모두 ‘모더니즘’으로 포괄되는 성격을 지니며, 따라
서 이 중 어떠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라도 결론에서는 모더니스
트 박태원의 문학사적 위상을 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문제는 이후
박태원의 작품들이 모더니즘이라는 틀로 해명되지 않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박태원 문
학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할 때, 이 작품에 나타나는 산책자와 고현학자
간의 일정한 ‘간극’을 모더니즘으로 손쉽게 환원시키는 것은, 역으로 박
태원 문학의 원형으로서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지니는 풍부한
해석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4)5)
1) 주지하다시피 최혜실은 서구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산책’을 해명하고 있다. 최혜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소설 연구」, 서울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1991.
2) 김윤식은 고현학의 핵심을 소설가적 자의식과 연계시켜 해명하고 있다. 김윤식, 「고
현학의 방법론」, 한국현대문학사상사론, 일지사, 1992.
3) 물론 산책자와 고현학자를 분리해서 논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무리를 내포한다. 그
럼에도 본고가 이와 같은 분리를 사용하는 것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결합되
어 나타나는 이 두 가지 박태원의 문학적 지향이 일제 말기 각기 분리된 형식으로 나
타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다소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와 같이 도식적인 구분을 사용하게 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4) 이와 관련하여 최근 류수연의 연구가 주목된다. 그녀는 고현학과 관찰자 개념을 통
합시켜 논의함으로써, 단순한 ‘산책자’로서의 고현학이라는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제설정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이분법에 대한 일정한 문
제제기 역시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연구는 주목된다. 류수연, 「고현학과 관
찰자의 시선」, 민족문학사연구23, 민족문학사학회, 2003.
5) 이와 관련하여 박태원의 ‘산책자’에 모티브에 대한 박성창의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47
본고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타난 ‘산책자’적 양상과 ‘고현
학자’적 양상이 이후 각기 분기되어 상이한 소설 형식으로 나아간다는
가설에서 시작한다. 즉, 산책자로 표상되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과 고
현학자로 표상되는 관찰자의 시각이 이후 급격한 시대적 변화 과정 속
에서 각기 상이한 형식의 글쓰기로 분화된다는 것이 본고의 기본적인
문제설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일전쟁이후 파시즘의 대두 속에서 박
태원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장르 인식, 즉 한 편으로는 「음우」, 「투도」,
「채가」 등 일련의 사소설적 경향과 다른 한 편으로는 금은탑 등의 통
속적 경향의 의의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존에 각기 일상으
로의 침잠과 통속으로의 후퇴로 평가되어온 이들 작품들을 당대 박태
원의 파시즘 인식 속에서 새롭게 의미화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글쓰기를 위협하는 시대와 사소설 창작
일제 말기 박태원의 사소설 창작의 문제성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인 박태원 연구가 모더니스트로서의 박태원의 면
모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의 사소설 창작은 ‘예술’의 세계에서 ‘생활’
의 층위로 침잠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모더니스트’라
는 선험적인 박태원에 대한 규정이 작동한 결과는 아닐까? 이러한 ‘편
는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중요한 것은 비교문학적 잣대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하
여, 벤야민의 산책자 모티브를 기준으로 박태원의 작품에 나타나는 산책자 모티브가
이러한 기준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 또는 정반대로 그러한 기준에서 얼마만큼 이탈
해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비교의 모델을 서구문학에 두고 한국문학에 나타난
특정한 유형이나 모티브가 그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구문학의 틀로 한국문학을 재단하는 우를 범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성창, 「모더니즘과 도시: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산책자 모
티브 재고」, 구보 박태원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2009.7, 48-49쪽.
48
견’을 버린다면 이들 작품을 통해 일제 말기 박태원의 글쓰기에 대한
인식을 추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박태원의 사소설 연작은 스토리상으로는 지극히 사적인
일상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에 그친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소설가 구
보씨의 일일」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글쓰기의 욕망과 이를 불가능하게
하는 당대 시대적 압력을 알레고리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섯 시간 전에 우리가 사랑으로 자러나려 갈 때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건넌방이 이것은 참말 뜻밖의 일로, 명색이 서재랍시고 책장 둘을 나란히
붙여서 세워 놓은 바람벽 위를, 도리에서 직 밑까지 그대로 빗물은 줄줄이
흘러 나리고 있었다. 이름이 책장이지, 그냥 대여섯층 선반이 놓였을 뿐으
로 뒤는 그대로 터진 터이라, 무어 책 몇 권 뽑아서 새삼스러이 볼 것도 없
는 노릇이었다.6)
「음우」는 스토리상으로는 단순히 비로 인한 집의 침수를 그린 소품
에 불과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집의 침수의 시작이 바로 “서재”에
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서술자(=박태원)의 글쓰기는 불가능
해진다. 따라서 그가 “붓을 들어도 도무지 쓸 것이 없는 근래의 나”7)라
고 고백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작품의 결말에서
그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결말과 동일하게 “‘나는 이제 좋은 작
품을 하나 쓰리라’”8)라고 독백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가 구보씨
의 일일」에서의 이 발화가 산책자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우」에서 박태원의 독백 역시 더 이상 산책자로 표상되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할 따름이다.
6) 박태원, 「음우」, 조광, 1940.10, 410쪽.
7) 위의 작품, 423쪽.
8) 위의 작품, 424쪽.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49
그렇다면 무엇이 산책을 불가능하게 하는가? 「음우」에 이어 발표된
‘자화상’ 연작의 두 번째 작품인 「투도」는 제목 그대로 도둑을 당한 이
야기이다. 그런데 도둑이 훔쳐 가는 것은 정작 ‘지갑’이 아니라 ‘양복’
일 따름이다. 아내의 말처럼 “그 녀석이 필시 양복에만 걸신이 들린”9)
셈이다. 문제는 ‘양복’이 지니는 상징성이다. 모던한 산책을 위해서는
양복이 필수적인 바, 도둑이 금전이 아닌 양복을 훔쳐간 것은 곧 글쓰
기의 자의식의 원천이었던 산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투도」는
글쓰기 자체가 불가능해진 박태원의 문학적 상황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소설 연작을 미메시스적 독법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이다. 「음우」에서의 ‘서재’나 「투도」
에서의 ‘양복’을 지시적인 의미로 한정할 수는 없다. 이들 기호는 1940
년 이후 파시즘의 급격한 대두에 따른 글쓰기의 자율성의 위기인식을
표상한다. 「음우」에서 서재의 침수를 일으키는 ‘장마’나 「투도」에서의
도둑이 사건 이후에도 박태원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게 한
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글
쓰기의 자의식의 근원으로 작동했던 산책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일종의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형상화 한 것이 바로 이들 사소설 연작인 것이다.
따라서 박태원이 장마가 끝나고 도둑이 든 이후에도 여전히 소설을 쓰
지 못한 채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독백만을 반복하며, 끊임없는 외부의
침입에 대한 신경증적 징후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왜냐
하면 ‘장마’와 ‘도둑’은 점차 확대되어 일상까지 규율하는 파시즘의 알
레고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태원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글쓰기를 위협하는 파시즘
을 인식하게 되는가? 과거 그의 산책은 카페와 백화점으로 표상되는 모
9) 박태원, 「투도」, 조광, 1941.1, 488쪽.
50
던한 문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한 편으로는 식민지 수도 경성의
근대성의 탐색이라는 성과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식민지 ‘중
심부’ 외부의 시스템에 대한 인식의 부재라는 한계를 내재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소설 연작의 배경이 경성 ‘외곽’이라는 점이 주
목된다.
사소설 연작의 주된 배경인 박태원의 이사한 집은 할멈의 발화처럼
“문 밖”10)으로 설정된다. 나아가 「채가」에서 내가 찾아가게 되는 ‘전주’
의 집 역시 ‘신당정’으로 설정된다. 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경
성 중심부를 배경으로 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박태원이 이들 경
성 외곽을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는 「채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즉, 경
성 중심부가 식민지 파시즘의 ‘명랑한 전망’이 유통되는 공간인 반면,
이들 경성 외곽은 브로커와 사채업자, 암시장 등이 공공연하게 유통되
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경제범죄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윤해동의 지적
처럼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파시즘의 경제 신체제를 교란하는 반체
제적 성격을 지니기도 하며11), 후지타 쇼조의 지적처럼 파시즘 하의 지
하경제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구현되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
이다.12) 박태원은 산책의 공간을 경성 외곽으로 변경함으로써 이와 같
10) 박태원, 「투도」, 496쪽.
11)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2003. 그의 논의에 의하면 일제 말기 경제
사범의 급증은 단지 범법행위가 아닌, 식민지인들의 ‘삶’을 위한 신체제에 대한 적극
적인 ‘균열화’의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본다면 박태원의 자화상 연작 역시 신체제 외
부의 구체적인 식민지인들의 삶에 대한 ‘고현학’적 탐색의 일환으로 평가될 수 있다.
12) 후지타 쇼조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일본 시민사회의 가능성을 전쟁 중의 암시
장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교환소’(암시장-인용자)의 아이디어 그 자체가 국가권력으
로부터 인민생활이 독립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더구나 친인척에 의존하는 방법과
도 반대의 방법으로 사회관계를 자주적으로 구성하려한다. (…중략…) 여기에는 분명
히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관념이 성립해가는 방향이 잠복하고 있었다. 독립적 연
대-권력에서 독립한 연대, 그러한 연대 주체의 상호 독립이라는 이중의 독립을 가진다
-가 확고한 존재가 되는 방향성이 있다.”, 후지타 쇼조, 최종길 옮김, 전향의 사상사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51
은 식민지 회색지대를 인식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파시즘이 전일적으
로 관철되는 식민지 중심부를 벗어나 최소한의 글쓰기를 유지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이 역시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상당 부분 그
자율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를 전후한 박태원의 사소설 연
작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나타난 산책자-글쓰기의 자율성이 불
가능함을, 그리고 그 배경에는 파시즘의 대두가 놓여져 있었음을 적절
히 인식한 결과이다.13) 이들 작품이 중요한 것은 박태원이 서구적 모더
니즘의 산책자 개념을 넘어, 식민지 주변부의 현실 속에서 글쓰기의 불
가능성을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성 밖의 고현
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박태원의 식민 현실에 대한 천착이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14)
적 연구, 논형, 2007, 247쪽.
13) 이와 관련하여 방민호는 다음과 같이 논한바 있다. “1940년경을 전후로 하여 작가들
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사소설’ 경향은 1930년대 중후반에 형성된 한국적인 ‘사소
설’ 형식을 천황제 파시즘, 신체제라는 정치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창작방법으로 적
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여러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사소설’들은
많은 경우 파놉티콘과 같은 폐쇄된 현실에 대한 은밀한 저항과 ‘탈주’의 욕망을 함축
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박
태원의 「채가」다.”, 방민호, 「일제말기 문학인들의 대일 협력 유형과 의미」, 한국현대
문학연구22, 2007.8, 259쪽.
14) ‘성 밖의 고현학’이라는 용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는 다른 식민지 주변부에
대한 박태원의 탐색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다소 거친 용어이지만 산책자-고
현학자의 변모를 설명하는데 일정 부분 유용하다는 면에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자세
한 논의는 졸고, 「시대와의 불화, 세계와의 긴장-일제 말기 한국 사소설의 문학사적
의미」, 작가세계, 2008 여름호를 참조.
52
3. ‘백백교’라는 ‘징후’와 천황제 파시즘 비판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태원은 산책의 불가능성을 통해 글쓰기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시대적 상황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성과가 그의 문
학의 원형을 이루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산책자적 면모를 발전
시킨 결과라면, 다른 한 편으로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고
현학자로서의 면모를 발전시킨 결과로서 금은탑을 창작한다.
금은탑은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절대적으로 미비한 작품이다.
그러나 최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제기되고 있
는데 그 중 류수연의 연구가 주목된다. 류수연은 고현학이 지니고 있는
관찰자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이 관찰자적 성격이 이 작품의 탐정소설
적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5) 이러한 관점은 금은탑
이 박태원의 고현학의 변화를 내포한 작품일 것이라는 가설을 가능하
게 한다.
기실 박태원의 고현학은 그 자체로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소
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나타나는 고현학은 일차적으로는 모던한 문
물을 기록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모
던한 문물’이라는 관찰되는 ‘대상’이 관찰하는 ‘주체’에게 새로운 인식
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박태원이 카페와 백화점을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경성역의 빈한한 식민지인들의 모습과 여급모집 광고 문구를 묻는 아
낙네의 모습을 기록한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이러한 균열, 식민지
근대성이 지니는 특수성이야말로 박태원의 고현학이 서구의 모더니즘,
혹은 일본의 사소설적 흐름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태원의 고현학을 고정된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
은, 어쩌면 박태원 문학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효과를 낳
15) 류수연, 「통속성의 확대와 탐정소설과의 역학관계-박태원의 장편소설 금은탑에 대
한 연구」, 구보학보1집, 2006.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53
을 수도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가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 속
에서 식민지 근대성의 핵심을 형상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떻게 고현
학을 발전시켰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이때 금은탑은 일제 말기 박
태원의 변화된 고현학적 방법론을 해명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금은탑은 ‘백백교’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백
백교는 백도교의 후신단체로서 1923년 설립된 이후, 전성기인 1924년
에는 교도가 69,316명에 이를 만큼 강력한 교세를 지녔다. 이들이 문제
가 된 것은 교주 전용해를 중심으로 한 간부들이 교도들에 대해 폭행,
강간, 재산강탈은 물론 300여건이 넘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 1937년 1월
16일 폭로되면서이다.16) 실제 박태원의 금은탑 역시 백백교의 실상을
그대로 소설화 한 측면이 강하다.17) 바꾸어 말하자면 고현학적 탐색의
대상이 모던한 문물에서 백백교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백백교의
어떠한 측면이 박태원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형상화를 추동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백백교가 당시 대중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
었던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지현은 다음과 같이 일제 말기 백백
교를 비롯한 ‘신종교’의 폭발적인 팽창의 사회적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재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
는 시기이며, 이 시기에는 선천을 특징짓는 모든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가
일시에 터져 나오고, 개인이나 집단, 민족의 원한이 解免을 시도하는 시기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온갖 재난과 어려움인 三災八難이 찾아오고 ‘심판
의 날’이 오면 권력계급과 부를 차지한 계급이 멸망하고 약자들이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그들의 주장 내지 ‘예언’은 허무맹랑
한 소리로 들릴 수 있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三災중 하나인 兵
亂災의 징조로 여겨져 이들의 後天開闢說에 힘을 실어줬다.18)
16) 문지현, 「전시체제기(1937-45) 일제의 신종교 정책과 신종교단체 검거사건 연구」, 이
화여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9, 33쪽.
17) 이에 대해서는 전봉관, 경성기담, 살림출판사, 2006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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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대중들에게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광범위한 ‘불안’이 유포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문제는 이 불안을 타개할 ‘전망’의 제시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30년대 초중반까지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녔던
사회주의적 전망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급격히 그 영향력을 상실했
으며, 급진적 민족주의 진영 역시 일종의 문화적 민족주의로 그 급진성
을 한정하면서 대중들의 불안을 타개할 전망의 제시에 실패했다. 이때
식민지 대중들에게 친숙한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과 종교 특유의 호소
력은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 금은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백교가 교도를 강제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교도 스스로 일견 비
합리적으로 보이는 교단에 입교한다는 점이다. 작품 내에서 거의 유일
하게 백백교 입교의 내적 논리를 밝히고 있는 최건영의 조부 최주사의
발화는 위의 문지영의 분석과 일치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백백교의 메커니즘과 파시즘의 메커니즘이
상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백교의 운영
메커니즘은 대중들의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시키며, 이를 통해 비합리적
인 절대자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특성으로 한다. 이는 파시즘의 운영
메커니즘과 동일한 것이다. 굳이 라이히의 논의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파시즘이 대중들의 불안과 공포를 대문자 아버지에 대한 자발적인 복
종을 통해 해소/재생산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증식시킨다는 점은 널리 알
려져 있다. 물론 서구의 정신분석학적 문제설정을 일제 말기 파시즘의
메커니즘에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다.19) 그러나 대중들의 불안과
18) 문지현, 앞의 논문, 15-16쪽.
19) 로버트 팩스턴의 경우 일본 파시즘을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파시즘과 구별하기도 한다. “제국 정권은 파시즘
특유의 대중 동원 기술을 사용했지만, 지도자들과 경쟁을 벌이는 공식 정당이나 자생
적 대중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1932-1945년의 일본 제국은 파시즘 체제라기보다는
국가가 지원하는 상당 수준의 대중 동원을 가미한 팽창주의적 군부 독재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로버트 팩스턴, 손명희 ․ 최희영 옮김, 파시즘, 교양인, 2005,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55
공포를 해소하는 유용한 기제로 파시즘이 스스로를 증식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로부터 박태원의 고현학적 대상이 백백교로 이동한 이유를 추정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태원의 고현학은 곤 와지로의 그것과는 다르게
“(...) 모더니즘의 실험의 연장 속에 놓이면서도, 현실에 대한 박태원의
지극한 관심”20)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면 1930년대 초중반 경성
중심부의 모던한 문물에 대한 관찰이 일제 말기 파시즘에 대한 관찰로
이동한 것은 박태원의 고현학적 관찰이 점차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현
실적인 층위로 이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태원은 물론 대
다수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파시즘이란 근대 일반 보다 훨씬 난해한 현
실의 운영원리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고현학적 탐색의 결과가 백백교
라는 파시즘적 ‘징후’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백백교라는 대중들의 심성(망딸리떼)을 표상하
는 ‘징후’에 대한 박태원의 인식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와 마찬
가지로 조선의 식민지적 성격을 읽어내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
이다. 박태원은 백백교 사건을 통해 단순히 파시즘 일반이 지니는 메커
니즘을 읽어내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식민지
449쪽. 마루야마 마사오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부재한 일본 파시즘의 특성의 원인
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찌하여 일본에서는 국민의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즉 민
간에서 일어난 파시즘 운동이 헤게모니를 잡지 못했는가, 어찌하여 파시즘 혁명이 없
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 문제를 자
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파시즘의 진행 과정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요소의 강도는 그 나라에서의 민주주의
의 강도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않은 곳에서는
전형적인 파시즘 운동의 아래로부터의 성장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루야
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사, 1997, 121쪽. 마루야마 마
사오의 분석은 일본 파시즘이 지니는 특수한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특히 ‘천황’과 ‘적자’로 구성된 일본 파시즘의 특성은 식민지에서의 파시즘이 지니는
‘균열’을 해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20) 류수연, 「고현학과 관찰자의 시선」,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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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파시즘에 대한 ‘균열’의 가능성을 읽어낸다는 점에 박태원의 고
현학이 지니는 진정한 성과가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백백교 사건이 일제에 의해 강력한 탄압의 대상이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백교를 비롯하여 일제 말기 대부분의 유
사 종교 사건은 보안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의 혐의로 처리되었다. 이는
이들이 내세운 교리가 표면적이나마 반전, 반제국주의를 표방했기 때문
이다. 특히 사회주의적 전망을 접할 수 없었던 세대 및 계층에게 이들
의 교리는 “당면 전쟁국면에서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에 대한 희망
을 실을 수 있는 매개체”21)로 ‘전유’되어 유통되기도 하였다.
박태원이 굳이 백백교를 고현학의 대상으로 설정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소설 연작을 통해 글쓰기를 위협하는 파
시즘의 대두를 인식하는 한 편, 금은탑을 통해 파시즘의 메커니즘과
이에 대한 균열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이다. 물론 시대적 한계로 인해
이와 같은 발화는 텍스트의 표층에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그
러나 만약 박태원이 단지 일반적인 파시즘의 메커니즘을 형상화하는
것에 멈추었다면, 텍스트의 구조상 굳이 주인공 학수를 죽음으로 몰아
넣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아버지로 표상되는 질서에 편입시킴으로써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를 해소시키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서사 전략일
것이다. 그럼에도 박태원이 주인공 학수의 자살로 텍스트를 끝맺는 점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2) 이 시기 박태원의 작품이 일종의 알레고리적
21) 변은진, 「2차대전기 조선민중의 세대별 전쟁인식 비교」, 역사와 현실51, 한국역사
연구회, 2004, 81쪽. 변은진의 연구는 당시 유사종교 관련자들의 진술에 토대하고 있
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22) 금은탑의 인물 중 실제 백백교 사건의 인물과 가장 큰 차이를 지니는 인물이 바로
김학수이다. 대부분의 다른 인물들은 실제 백백교 사건과 거의 유사하게 등장하는 반
면, 김학수의 경우 유독 박태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병렬의
실증에 따르면 김학수의 모델인 “김종기는 백백교 교주인 전용해의 아들로 당시 충신
학교에 재학중인 15세의 소년이었으며, 교주의 자살 시체가 발견된 후, 전용해의 시신
확인 절차 과정에 동행하면서 그의 신원이 밝혀진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계모 밑에서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57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러한 결말은 일본 파시즘의
정점에 놓인 아버지에 대한 귀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독해될 수 있다.
실제 이 작품에서 백백교 사건과 구별되는 점은 교주의 아들의 형상화
이다. 실제 백백교 사건에서 교주의 아들은 특별한 위상을 지니지 못한
다. 그럼에도 박태원은 굳이 교주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아버
지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당시 일본 파시즘의 특수한 성격이 놓여져 있
다. 즉, 일본 파시즘의 경우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
의 국가구조의 근본적인 특질이 언제나 가족의 연장체로서, 즉 구체적
으로는 가장으로서의, 국민의 ‘총본가(總本家)’로서의 황실과 그 ‘적자’
에 의해 구성된 가족국가로 표상된다는 것”23)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천황’을 정점으로 한 ‘가족’이라는 표상이 일본 파시즘의 기본
적인 구조로 기능한다.
문제는 식민지 조선의 경우 ‘천황’의 ‘적자’로 편입될 수 없다는 것
이다. 물론 제국은 ‘내선일체’라는 동화 이데올로기를 통해 식민지인 역
시 천황제 파시즘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선전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
에 끊임없는 ‘차별화’정책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예
컨대 완벽한 내선일체를 통한 제국-식민지 간의 차별의 무화를 기획했
던 현영섭은 1938년 7월 8일 미나미 총독과의 대담에서 진정한 내선일
체를 위해 “조선어 사용 전폐”를 주장한다.24)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란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신문 보도와 재판기록에 따르면 김종기는 아버지 전용
해가 백백교 교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백백교의 교리나 살인, 강간, 금품갈취 등 교
도들의 행동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병렬, 「박태원의 금은탑
연구」, 숭실어문15, 숭실어문학회, 1999, 340쪽.
23)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책, 78쪽.
24) “(...) 玄永燮씨(綠旗연맹)로부터 세계를 통일한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인 근
거를 가지고 잇스나 한번도 실현된 일은 업다. 이러한 세계적인 이상을 생각할 때 내
선일체의 문제는 극히 적다. 그러나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하야는 무의식
적 융합인 旣완전한 내선 일원화에서부터 되지 안으면 안될 것인즉 종래에 체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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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내선일체’를 이룩하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흔적을 완전히 지
우고 (일본인과-인용자) 동등한 권리를 획득한 조선인의 모습”25)을 획
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나미 총독은 “국어를 보급하는 것
은 가한 일이며(‘나’의 오식으로 보임-인용자) 이 국어 보급 운동도 조
선어 폐지 운동으로 오해를 밧는 일이 종종 잇슨즉 그것은 불가한 말이
다고 전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엿다.” 결국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본 파
시즘은 식민지인을 제국의 ‘적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조선인
이 파시즘의 주체로 설정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실제의 백백교 사건과는 달리 금은탑에서 교주의 아들
이 자살로 생을 끝내는 부분은 다시 독해될 여지가 있다. 백백교를 당
대 파시즘의 알레고리로 인식할 때, 주인공 학수는 처음부터 파시즘의
메커니즘으로 편입될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천황제 파시즘에 의해
‘적자’로 ‘호명’될 수 없는 식민지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의 전
면에 부각되는 백백교에 대한 박태원의 인식은 방법론적인 한계에 부
딪히면서 결국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금
은탑은 백백교라는 파격적인 진실을 다루면서도, 이 희대의 사기극에
수많은 민중들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시대현실을 담
아내지 못했다.”26)는 평가는 재고의 여지를 지닌다. 오히려 백백교를
통해 파시즘의 메커니즘을 형상화하면서, 나아가 주인공 학수의 자살을
통해 천황제 파시즘이 제시한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형상화했다는 점
안은 神道를 통하야 또는 조선어 사용 전폐에 의하지 안으면 안될 줄 안다고 述해서
조선어 폐지를 주장하니 南총독은 이에 대하야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한 일이다.
가급적으로 국어를 보급하는 것은 가한 일이며(‘나’의 오식으로 보임-인용자)이 국어
보급 운동도 조선어 폐지 운동으로 오해를 밧는 일이 종종 잇슨즉 그것은 불가한 말
이다고 전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엿다.”, 「機密室-우리 社會의 諸內幕」, 삼천리,
1938.8, 22쪽.
25) 이승엽, 「조선인 내선일체론자의 전향과 동화의 논리」, 윤해동 외 엮음, 근대를 다
시 읽는다1권, 역사비평사, 2006, 231쪽.
26) 류수연, 「통속성의 확대와 탐정소설과의 역학관계」, 116쪽.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59
에서 이 작품은 새롭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백백교가 식민지
대중에게 ‘전유’되어 인식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박태원의
고현학이 당대 파시즘에 대한 심도깊은 탐색으로 발전한 성과로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27)
4.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우리 문학사는 박태원의 산책자적 면모와 고현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나치게 좁게 이해해왔다. 더욱이 서구 모더니즘적 의미의 산책자, 일
본의 곤 와지로적 의미의 고현학자와는 다른, 박태원 고유의 산책자와
고현학자적 면모는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태원 문학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서구나 일본의 그것과는 다른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서 그가 수행한 산책과 고현학 때문이다.
분명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박태원 문학의 원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작품에 나타나는 산책자와 고현학자의 면모가 이후 박
태원 문학에 발전된 형식으로 계속해서 발현되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
말기 박태원은 이 두 가지 자신의 문학적 원형을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발전시켜 파시즘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보여준다. 산책자로 표상되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은 「음우」, 「투도」, 「채가」 등 사소설 연작을 통해
글쓰기를 위협하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발현된다. 고현학자
27) 이와 관련하여 금은탑에서 백백교 교주의 죽음이 확정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이 흥미롭다. 작품에서 백백교 교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는 발견되지만, 박태원은
이를 교주의 죽음으로 확인하지는 않은 채 유보시킨다. 오히려 박태원은 교주가 다시
세를 모은다는 ‘소문’을 삽입하고 있는데, 이는 파시즘에 의해 억압된 정치적 무의식
의 ‘귀환’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박태원 문학에서의 ‘진실’이 공적
발화가 아니라 ‘소문’에 의해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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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표상되는 식민지 근대에 대한 탐색은 금은탑을 통해 파시즘의 메
커니즘과 천황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발현된
다.
박태원의 산책자적 면모와 고현학자적 면모는 이와 같이 식민 현실
과 결합되어 다양한 형식으로 발현된다. 해방 이후 약산과 의열단 등
을 비롯한 일련의 역사서술과 월북 이후 갑오농민전쟁으로 대표되는
창작경향을 단순히 정치적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외삽적인 결과
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어떠한 형식으
로든 자신의 문학적 자의식을 투영시키려는 박태원의 내적 고뇌를 충
분히 고려할 때, 비로소 그가 추구한 현실과의 결합 속에서 발전하는
산책자와 고현학자의 전모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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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박태원 문학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나타내는 산책자적 경향과, 현실에 대
한 심층적 탐구를 나타내는 고현학자적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 말기 산책
자적 경향은 「음우」, 「투도」, 「채가」 등 일련의 사소설 연작을 통해 변형되며, 고
현학자적 경향은 금은탑등의 작품을 통해 굴절된다. 전자의 경우 경성 외곽의
식민지 주변부에 대한 탐색을 통해 파시즘 체제 하의 글쓰기의 자율성의 불가능성
의 형상화로 전개된다. 후자의 경우 ‘백백교’로 표상되는 일제말기 대중의 불안의
심성구조에 대한 탐색을 통해 파시즘의 메커니즘에 균열을 가하는 작업으로 전개
된다. 이러한 성과는 박태원의 산책자 의식과 고현학이 단순히 서구와 일본의 그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재구성된 것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주제어 : 박태원, 사소설, 금은탑, 백백교, 파시즘, 산책자, 고현학, 불안의 심
성구조
일제 말기 박태원의 파시즘 인식과 대응 -사소설 연작과 금은탑을 중심으로 63
■ Abstract
Park Tae-won's recognition of fascism in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Jang, Sung-kyu
Park Tae-won's novels could be divided into 2 types. one is flaneur-type
novels which exposed self-consciousness about writing, and another is
modernology-type novels which investigated reality in depth. In the last
years of Japanese Imperialism, flaneur-type novels were altered into
Ich-roman(私小說, Shishousetsu) such as dreary rain, the theft, encumbered
house, and modernology-type novels were altered into novels such as
Geum-eun-tap. The former exposed impossiblity of autonomous writings,
exlporing around outskirts of Kei-sei(京成) as colonial periphery. And the
latter tried to cause a crack in fascist mechannism, revealing the mentalité
of anxiety which the public in the last years of Japanese Imperialism had.
This means that his methodology of novel was not just imitation of western
or Japanese literary theories, but was devised based on colonial
distinctiveness.
key words : Park Tae-won, ich-roman, Geum-eun-tap,
Baekbaekgyo (백백교), fascism, flaneur, modernology,
mentalit‰ of anx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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