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월항쟁, 그 문학적 불모성과 풍요
2. 1960년대 문학과 ‘자유’의 자기부정성
3. 이청준과 6․3, ‘허기’의 정치성
4. 방영웅과 ?창작과비평?, 반(反)개발의 전략
5. ‘창비’와 ‘문지’의 공통지평― 1960년대라는 동시대성
❚ 국문초록
196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4․19세대’라는 담론이 번성했던 데 비
해 4월항쟁에 대한 직접 발언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껏 이 불균형을 메
우기 위해 구사된 전략은 ‘소시민문학’론이 표명했듯, 4․19 세대의 작가
들이 개인과 개인주의를 문학적으로 형상하는 데 진력한바 그것이 한국
에서 근대적 시민의 형성과 일치한다는 것이거나, 혹은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의 논의가 보여주듯 ‘민족’․‘민중’의 발견에 이르는 도정이
곧 4월항쟁의 정신이 실현되는 과정으로서 4․19 세대의 개인주의는 그
과정에서 부정적 매개로 현현했다는 것이었다. 각각 ?문학과지성?과 ?창
작과비평?으로 연결되는 이 두 가지 설명방법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를, 또한 4월항쟁의 개인․자유와 민중․민주주의를 분리시키는 효과를
발휘해 왔다고 생각된다.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에서는
이러한 분리를 넘어 4월항쟁의 자장 속에서 ?산문시대?에서 ?창작과비
평?까지에 이르는 문학적 흐름을 해명함으로써 1960~70년대의 문학사
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보고자 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
년대를 매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 이청준과 방영웅이
라는 두 작가를 통해 1960년대 후반 문학사에 있어 개발독재정권의 근대
화론에 대한 대결의식이 ‘4․19 세대’의 문학을 이끈 주조음임을 밝히고
자 했다.
이청준은 「퇴원」과 「조율사」,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등을 통해 상징
성을 획득한 ‘허기’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조국근대화론이 선전한 성장-
발전의 논리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방영웅은 ?분례기?에서 보이는 거의
몰역사적인 무명성(無名性) 혹은 불결성의 세계를 통해 빈곤이 순치될 수
없는 현실이자 개념임을 웅변하였다. 이 각각은 서로 다른 전략을 통해
‘반정치성을 통한 정치성’, ‘몰역사성을 통한 역사성’이라는 목표를 지향
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5․16과 이후의 개발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거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으되, 저항을 현실화하고 다중화하며 미래와
결부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이후 독자적 문법과 시제를 획득한 저항
의 양식은 황석영․신경림 등 새로운 문학 실천에 의해 가능해졌으며, 이
른바 ‘창비’와 ‘문지’ 사이의 분리 또한 이를 중심으로 현실화된다. 그러나
1960년대 당시라면 ?산문시대?에서 ?창작과비평?에 이르는 젊은 세대의
반(反)문협 문학실천은 4월항쟁의 ‘자유’를 문학적 주제로 삼는 태도를 함
께하고 있었고, 이청준과 방영웅으로 대표되듯 ‘문지’와 ‘창비’ 사이 예비
적 분기에 있어서도 반근대화론이라는 공통지평은 널리 공유되고 있었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71
다. 1970년대 문학의 변형과 성장이란 이러한 1960년대의 공동 유산에
기초해 자라난 가능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산문시대?,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4월항쟁, 5․16 쿠데타,
개발독재, 김승옥, 이청준, 방영웅, ?분례기?, 단식, 비체, 개인, 소
시민, 시민, 민중
1. 4월항쟁, 그 문학적 불모성과 풍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4월항쟁을 직접 형상한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적
다. 김동리의 ?이곳에 던져지다?(1960)나 강신재의 ?오늘과 내일?(1967)
같은 기성 작가의 소설이라면 차라리 찾아볼 수 있겠으나, ‘4․19 세대’
로서 4월항쟁을 직접 겨냥한, 게다가 장편이라는 서사양식으로 문제 삼
은 예는 전무하다 해도 좋을 정도다. 4․19 세대의 대표자 중 하나인 박
태순이 고심참담 「무너진 극장」(1968)을 상재했으나 그 성취는 예외적 단
편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 대학 4년생이었던 김만옥이 ?계단과 날개?
(1988)라는 장편을 완성했으나 그것은 이미 근 30년이 흐른 후의 일이었
다. 최인훈의 ?광장?이 상징하듯, 또한 김승옥의 「건」이며 김원일의 「어
둠의 혼」 등이 보여주듯, 4월항쟁으로 열린 문학공간은, 또한 4․19 세
대의 문학적 성취는 차라리 한국전쟁에 집중되어 있다. “실존의 밑바닥
깊숙이” 분단의 상처를 갖고 있음에도1) 그 트라우마를 언어화해 낼 수
없었던 이 세대가 전쟁을 주제화한 것은 충분히 이해함직한 일이나, 이에
1) 김현, 「60년대 문학의 배경과 성과」, ?김현문학전집?7, 문학과지성사, 1992, 241쪽.
272 한국문학연구 39집
비춰볼 때 ‘4․19 문학의 불모성’2)이란 더더구나 불가해하게 보인다.
일찍이 김현이 열거했던 대로 ‘4․19 세대’란 “황동규, 이성부, 정현종,
이승훈, 최하림, 김지하 (…) 김승옥, 이청준, 서정인, 박태순, 박상륭, 홍
성원, 김원일, 김용성, 이제하, 이문구 (…) 백낙청, 김병익, 김치수, 김주
연, 염무웅, 임중빈, 이광훈, 조동일”3) 등의 이름으로 이해되어 왔으되,
특히 ?산문시대?와 ?68문학?을 거쳐 ?문학과지성?으로 수렴된 문학적
노선에 의해 준 독점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나는 거의 언제나 4․19 세
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4)라는 유명한 진술이 상징하듯 ?산문시대?, ?68문학?, ?문
학과지성? 동인 사이에 4월항쟁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문학적 의식은 집
요할 정도로 강렬하다. 4월항쟁과 그 이후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
하지 않으면서도 ‘4․19 세대’라는 자기이해를 고집하는 불균형이 존재
했다는 뜻인데, 이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개인의식’이라
는 설명방법이 주로 동원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4월항쟁을 통해 비로
소 개인의식의 발아가 가능해졌으되 4․19 세대가 담당했던 문학적 임무
란 곧 개인의 선언에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각성과 상상력의 개
발”5)이라든가 “개인이 독립된 하나의 세계로서 제대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6)을 강조한 김병익․김주연 등의 소론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터인데,
?문학과지성? 바깥에서도 4월항쟁 이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종종
“개인의 자유다 뭐다 하는 것을 논의할 수 있”게 된 현상과 동일시된다.7)
2) 「(좌담) 4월항쟁 혁명과 한국문학」, 유종호․염무웅 편, ?한국문학의 쟁점?, 전예
원, 1977, 164쪽. 본래 ?사상계? 1970년 4월호에 실린 좌담으로서 구중서․김윤
식․김현․임중빈이 참석했다.
3) 김현, 앞의 글, 같은 쪽.
4) 김현, 「책머리에」, ?김현문학전집?7, 문학과지성사, 1992, 13쪽.
5) 김병익, 「60년대 문학의 가능성」, 김병익 외, ?현대 한국문학의 이론?, 민음사,
1972, 269쪽.
6) 김주연, 「70년대 작가의 시점」, ?변동사회와 작가?, 문학과지성사, 1979, 45쪽.
7) 「(좌담) 4월항쟁 혁명과 한국문학」 , 165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73
이렇게 보자면 1960~70년대의 한국문학사는 ‘개인’의 1960년대와
‘민중’의 1970년대로, ?산문시대?에서 ?문학과지성?에 이르는 계보와
?창작과비평?의 계보로, 또한 이 두 연대가 ‘평행’의 관계를 형성하느냐
‘발전’의 구도를 이루느냐에 대한 인식의 분할로 이어지기 쉽다. 개인의
식의 섬세한 묘파, 그리고 스스로의 소시민성에 대한 해부와 비판의 정신
이 ‘60년대 작가들’을 옹호하는 토대로 작용한다면, 그 “사회성의 부재,
민족성의 부재, 역사성의 부재”는 ‘60년대 문학’을 부정케 하는 근거가 된
다.8) 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동적 존재인 ‘소시민’ 대신 윤리적이자
정치적인 주체로서 ‘시민’을 제안했던 백낙청의 「시민문학론」 이후 민족
문학론의 내력이 부정의 이론화에 해당될 것이며, 1970년을 전후해 작가
로서의 비약을 보인 김지하․신경림․황석영 등의 이름은 ‘60년대 문학’
을 막간극으로 평가케 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할 것이다. 긍․부정의
어느 편이든 간에 ‘개인’과 ‘소시민’의 1960년대와 ‘민족’과 ‘민중’의 1970
년대라는 시기 분할은 적잖은 설득력을 발휘해 왔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1979~80년의 극적인 정치적 변화 이전까지 위의 두 흐름이 지식대중․
문학대중을 양분하고 있었다는, 그러면서도 분리의 선을 뛰어넘는 공통
의 호소력 또한 갖고 있었다는 ‘평행’ 및 ‘공존’의 구도 또한 실감의 차원에
서 용인되어 왔다. ‘문지’와 ‘창비’를 함께 호명하는 습관이 이 구도를 증명
한다 해도 좋겠는데, 그렇다면 ‘1960년대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시각은 오늘날의 이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거칠게 이분화할 때, ‘문지’적 시선에 의하면 4월항쟁은 개인의식의 현
실화라는 정신적인 유산을 남긴 것이 되고, ‘창비’적 시선에 의하면 항쟁
의 의식은 근 10년간의 모색 후 비로소 현실적 대응능력을 갖추기에 이른
것이 된다. 전자의 시선 속에서 4월항쟁의 문학사는 간접화․상징화되
고, 후자의 시선 하에서라면 1960년대 내내 단절되고 지연된다. ‘4․19
) 최일수, 「현대문학과 민족의식」, ?현실의 문학?, 형설출판사, 1976, 11쪽.
274 한국문학연구 39집
세대’ 스스로 주장하고 후배 세대에 의해 추인받은 이같은 설명방법이 나
름의 근거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
서는 1960~70년대 문학사와 4월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사이의 관련을
보다 직접적으로 만들려는, 즉 텍스트와 그 평가의 맥락에 잠재되어 있는
4월항쟁이라는 숨은 동기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를 해 보고자 한
다. 이 논문의 전제라고 할 앞선 논고에서 4월항쟁과 대학생 신화, 4월항
쟁과 5․16 사이 관련에 대한 당대의 반응을 살펴본 바 있거니와, 5․16
을 극소수의 망동(妄動), 4․19에 대한 폭력적인 압살로만 보기에는 당대
의 반응이 훨씬 착잡하다는 것이 일차적인 결론이었다. 5․16 쿠데타는
감행된 당시 광범한 묵인 심지어는 공감을 이끌어 냈으며, 후일 개발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대표적 이름이 된 김지하라든가 천상병이 보여주듯 그
묵인과 공감의 범위는 결코 좁지 않았다. ‘빵’과 ‘성장’․‘번영’을 향한 질
주, 그 ‘속도’에 조급해 하는 방향성에는 ‘민족’의 이름이 개입돼 있어 더욱
문제적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삼 세계적 유행어가 된 ‘민
족’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경직성을 뚫고 근 10년간의 지체를 넘어서,
4월항쟁 후 한국의 향방을 가늠하는 데 핵심적인 언어가 되기 시작했으
며, 서구의 경제․정치제도와 다른 독자적 모색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
대도 불러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이 주창했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
호가 일말의 설득력을 발휘했던 것은 이 국면에서였으며, ‘젊은 가부장’
에 의한 ‘선의의 독재’, 그 지도하에 ‘숏 커트’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명제는 1960년대 내내 반신반의 속에서나마 기대봄 직한 준거로 작용했
다. 1964년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노출된 굴욕적인 태도, 1965년 및
1968년 선거 국면에서의 부정 등이 적잖은 공분을 자아냈고, 이미 6․3
국면을 통해 대학생과 지식인 중 상당수는 박정희의 개발독재정권에 대
해 부정적 판단을 굳혔으나, 대다수 대중은 연 평균 성장률 8%를 상회하
는 번영 속에서 ‘선의의 독재’를 신뢰하거나 적어도 묵인하고자 했던 것으
로 보인다.9)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75
따라서 4월항쟁이 5․16에 의해 폭력적으로 압살되었다는 서사는 사
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적어도 유신 이전, 1960년대의 국면에서라면 4월
항쟁은 항쟁을 주도했던 주체들 자신에 의해 외면되고 배반당한 자취가
역력했다. 4월항쟁이 그 자체로서 지속될 가능성, 그러니까 항쟁 직후 1
년 같은 혼란과 저성장과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아마 그 결과로서 느릿느
릿 위태위태 전진해 갈 가능성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고난 끝에 통일과 제 3 체제로서의 번영을 이룰 수 있
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쿠바나 베트남이 걸었던 길이 한반도에서 열렸을
지도 모른다. 혹은 남미의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 지금껏 저성장과 정치적
혼란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4월항쟁이 그 자체로 계속 이
어질 수 있었다면 말이다. 5․16 쿠데타는 그 가능성을 좌절시켰으되,
그것은 적잖은 대중의 초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5․16은 4월항쟁의
배반이자 계승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약속했던 ‘국민소득 1만불’과
‘전 국민 마이카 시대’라는 미래는 박정희 사후 10여년 뒤, 그의 후계자에
의해 달성되었다. 지금은 모두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미래가 뜻밖에
고립과 불안과 공포를 짝패로 도래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시절이다. 그
러나 과연 내가,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가능성이 ‘4월항쟁이 그 자체로
서 지속될 가능성’이었는가? 한국문학사에서 이 질문을 다룬 최대치는
「무너진 극장」이다. 작가 박태순이 하필 항쟁 국면에서 가장 문제적이었
던 25일 밤 시가지 파괴의 장면을 담아낸 것, 파괴의 관성에 도취해 버린
주인공과 그가 휩쓸렸던 군중의 폭주를 제시하고 “이것들은 어쩔 수 없
어.”라고 말하는 군인의 형상까지 묘사해 낸 것은 이 두려운 자문(自問)에
정면으로 맞선 후 얻은 소중한 수확이었다고 생각된다. 박태순은 답한다.
4월항쟁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그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스스로 책임지고 시인할 수 있는 미래였을 것이며,
9) 권보드래, 「4․19와 5․16, 자유와 빵의 토포스」, ?상허학보?30호, 2010.
276 한국문학연구 39집
궁극에는, 불운할 경우 십수 년이나 수십 년 간의 혼란과 무질서와 저성
장을 통과한 후 “그 날의 흥분을 얼마든지 과대평가해 보는 것처럼 유쾌
한 일은 없”10)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 대답은 제도적 완비와 경제적 번
영이 꼭 지켜야 할 상수(常數)인지에 대한 회의까지 한켠에 품고 있을 때
야 긍정될 수 있는 답변일 수밖에 없다.
2. 1960년대 문학과 ‘자유’의 자기부정성
2-1. 유예된 시기, ‘자유’의 문학화
4월항쟁이 쿠데타에 의해 압살되기 이전, 벌써 그 주체들에 의해 배반
당하고 있었다고 볼 때, 이후, 항쟁의 경험을 간직하고 ‘4․19 세대’로 자
처하며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그 길은 어떤 것일 수 있었을까? 대중적 독
서의 수준에서 보자면 1960년대는 ‘교양’에 대한 욕구와 ‘순정’에 대한 욕
구가 동시 폭발한 시기로 보인다. 개인주의적 자기계발에의 욕구가 만연
한 가운데11) ?마음의 샘터?(1959)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의문을 “어
떻게 하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까”로 환치시키면서 공자에서 러
셀과 처칠에 이르는 다양한 ‘동서교양 명언’을 소개함으로써 30만부 판매
를 달성했고12)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1966)은 해방―분단―전쟁이
라는 가까운 역사를 “하나같이 아름다운” 과거라는 환상으로 윤색함으로
10) 박태순, 「무너진 극장」, ?무너진 극장?, 책세상, 2007, 314~15쪽.
11) 천정환, 「처세, 교양, 실존—1960년대의 ‘자기계발’과 문학문화」, ?민족문학사연
구?40호, 2009.
12) 서울 중앙방송국 아침 프로로 높은 인기를 얻은 후 책자 형태로 출간된 ?마음의
샘터?가 기록한 높은 판매부수에 대한 문제 제기는 1960년대 중반에도 이루어지
고 있다. ?마음의 샘터?와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 모두 방송에 토대를 둔
출판물이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77
써 대대적인 화제작이 되었다.13) 일본 소설 ?빙점?의 인기가 보여주듯
비현실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오인misrecognition’의 서사도 널리 환영
받았다. 아내가 부정하다고 오인하고, 공들여 키워 온 양녀가 친딸을 살
해한 유괴범의 자식이라고 오인하고, 애인이 등 돌렸다고 오인하고― 주
인공들이 각각 수 년, 수십 년 동안 품고 있던 고통스런 감정은 망상에서
비롯된 데 불과하며, 그 망상에 순결한 젊은 여성이 희생되건만 누구에게
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빙점?의 설정이란, 식민지시기와 한국전쟁의 경
험을 ‘지나간 악몽’으로 망각하고 싶어하는 한편, 그 역사에 이어져 있는
당대의 문제를 ‘순결한 여성의 희생’으로 제의화하고자 하는 1960년대의
무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14) 식민 말기를 정면으로 다룬 ?청춘극장?
(김래성, 1955/ 완결시점을 뜻한다)이나 ?현해탄은 알고 있다?(한운사, 1960)가
높은 인기를 누리고15) 한국전쟁이 서사의 중요한 초점이 되었던 1950년
대와는 판이한 양상인 셈이다.
살균과 순정화에의, 바꿔말하면 망각에의 충동과 평형이나 안정에 대
한 욕망은 좋은 짝패다. ?속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에서 보이듯 망각에
의 충동에는 남루한 현실이 위태위태 걸려 있고, 전혜린 신드롬에서 보이
듯 ‘교양’은 때로 세속적 욕망과의 대립구도를 형성하지만,16) 그러나 요
동치는 역사를 잊고 오랜만의 안정 국면을 수호하려는 경향은 1960년대
에 의심할 바 없는 주조였다. 이 시기,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신승(辛勝)한 후 잇따른 선거를 통해 지지기반을
안정화해 갔고, 차관상환 압박과 인플레이션이라는 곤경 속에서도 경제
13) 박계형,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대문출판사, 1966, 7쪽.
14) 이 ‘오인’의 서사가 1910년대 번안소설의 서사와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둔다.
15) 영화로는 각각 1967년, 1961년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엄격한 분절이란 쉽게 기약하기 어려운 작업이고, 이 글의
서술에서 보이듯 때로 연대의 자의적 배치를 감행해야 고집 부려 볼 수 있는 과
제인데, 방송-소설-영화의 차이 등 구체적 문제는 별고를 기대한다.
16) 천정환, 앞의 글, 112~16면 참조.
278 한국문학연구 39집
는 외형적 성장을 거듭했다. 제 1차 산업이 일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
할 정도의 불균형을 보였고 1960년 대비 실질임금은 오히려 10% 가량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17) 경제 지표의 상승은 “일부 국민 특히 대도시의
졸부나 특권층의 살림”이 “비대성장하는 기적”18)의 환각 속에서 비춰짐
으로써 정치․사회적 의식의 둔화를 초래했다. 이청준이 「조율사」(1972,
실제 집필은 1969)에서 적고 있듯 “갑자기 등산 붐이 일어나고 해수욕장이
붐비고 고궁과 교외 놀이터가 인파로 들어차”는가 하면 “극장들은 007시
리즈와 그 아류들이 손님을 끌었고” “단속을 받지 않은 사창가가 번창 일
로에 있었다.”19) 1960년대, 특히 중․후반은 명백히, ‘빈곤’에서 탈피한
‘번영’의 환상이 지배한 시기로 보인다. 이 환상이 부정적 반면을 발견하
는 한편 다원성과 자율성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가고, 따라서 폭압성과 경
직성으로 역주행하는 국가와 충돌하게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
다.20) 개발독재정권 또한 4월항쟁을 명분 삼는 정신적 태도를 아직은 완
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안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는 점점 “억압과 규제의 그릇”까
지 받아들일 수 있는 꼴로 바뀌어 간다.21) ‘빵’에의 탐식이 고조될수록 4
월항쟁의 ‘자유’는 쉽게 외면당할 수 있는 이름이 된 것이다. 1970년대의
술회를 참조해 보자: “4․19의 환희는 인간으로의 각성을 가져다주었고
이로 인한 60년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곧 5․16으로 대변되는 물
질적 근대화 지상의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폐허의 땅은 아스팔트로 바뀌
었고, 고속도로․고가도로가 놓이는가 하면, 곳곳에 공장이 설립되었고,
17) 이갑섭, 「8.3% 성장률의 허실」, ?사상계? 1968. 1, 116․18쪽 및 121~22쪽. 연
평균 물가상승률은 11%로 보고되고 있다(이제민, 「양적 외형성장과 대중 경제
생활의 침체」, ?사상계? 1968. 1, 145쪽).
18) 부완혁,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고 떳떳이 살자」, ?사상계? 1968. 1, 14쪽.
19) 이청준, 「조율사」,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외)?, 중앙일보사, 1987, 299쪽.
20)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역사비평사, 2007, 223쪽 참조.
21) 이청준, 「마기의 죽음」, ?이청준전집?2, 문학과지성사, 2010, 29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79
저녁마다 TV에서는 화장품과 자가용 선전 광고가 명멸한다.” 유신 체제
로 상징되는 폭압성이 노골화되기 전이었으나 ‘자유’는 지레 포기되고 잊
혀지고 부차화되고 있었다. 부정되지는 않았을지언정 어정쩡하게 유예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산문시대?-?사계?-?68문학?의 계보로 대표되는바
4월항쟁 이후 젊은 세대의 문학은 이 유예된 시기의 산물이다. ?창작과
비평?을 주도한 백낙청은 후일 민족․민중의 새로운 문학정신에 비길 때
‘60년대 문학’론이란 “일시적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절하했지만22) ?산
문시대?류의 의식, 낙오되고 실종된 ‘자유’에 불안해하는 의식은 1960년
대가 허용한 의식의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민족문학론의 입장에서 1960년대를 구성할 때 ‘4․19 세대’보다
앞서 호명하곤 하는 김수영의 경우23)는 ‘자유’를 한결 전투적인 언어로
구사했다. 김승옥의 위악적인 개인이 미처 ‘자유’를 발설하기 전에 자포
자기하는 반면 김수영의 시적 주체는 ‘자유’를 잣대로 한 전진운동을 끈덕
지게 계속하고, 이청준의 사변적 자아가 ‘자유’를 정신화하는 반면 김수
영의 페르소나들은 ‘자유’를 생활의 문제로 삼는다. 그럼에도 ‘자유’를 주
제화해 냈다는 점에서라면 ?산문시대? 주변의 작가들과 김수영 사이에서
는 공통점이 더 도드라진다. 주지하다시피 김수영의 문학적 재출발점은
4월항쟁이었고, 사회적 의제가 개발과 민족주의로 이동한 후에도 ‘자유’
에 천착했다는 것이 그 문학적 생명의 핵심이었으되, 1960년대 문학의
임계점이 바로 ‘자유’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문학은 이 한순간
그 얼굴을 드러낸 바 있는, 자유의 여신을 찾는 일로써 비롯되었다.”24)는
지적대로, 1950년대에 개화했고 4월항쟁으로 정치적 존재증명을 통과했
22) 백낙청, 「2000년대의 한국문학을 위한 단상」, ?통일시대의 한국문학?, 창작과비
평사, 2006, 186쪽.
23) 신동엽의 경우도 함께 거론될 수 있겠으나 그 촌락공동체적 상상력은 다른 맥락
에 놓인 것으로, 1960년대 말 예컨대 김정한이나 이문구 등의 작업을 통해 환기
할 수 있는 갈래라고 생각된다.
24) 김윤식, 「60년대 문학의 특질」, ?운명과 형식?, 솔, 1992, 160쪽.
280 한국문학연구 39집
으나 이후 소외되고 주변화된 ‘자유’는 문학 속에서 그 거처를 발견했다.
4월항쟁 이후 1960년대를 지배한 것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였으나 당대
적 맥락에서는 ‘자유’야말로 항쟁을 낳고 항쟁을 통해 주장된 사상이었고,
이 점에서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4․19 계승이라고 느
끼는 사람이 있”25)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공공연히 자유주의
를 경멸하는 정권26) 하에서 문학의 ‘자유’는 저항의 회로를 내장할 수 있
었다.
김영찬은 이 장면을 가리켜 “상실된 ‘자유’를 찾아 헤매던 1960년대의
모더니즘은 결국 문학과 내면 속에서 그 자유의 공간을 발견했다. 이를
일러 우리는 문화적 자유주의의 성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7)라고 쓴
바 있다. 이렇게 보자면 김현의 유명한 고백,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라는 발화가 문학=자유라는 확신의 수사적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평했던 김윤식의 설명28) 또한 신빙성을 얻게 된다. “글쓰
기란 무엇인가. ‘자유’ 그것이다.”29)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이 ‘자유’가
원자론적이자 폐쇄적인 것이었고30) 혹은 양식상의 실험만을 허용하는
갇힌 인식의 산물이었으며 “한마디로 4․19를 살아 생동하는 삶에서 강
제로 끌어내어 형식주의 속에 환원시키는 일”31)이었다는 의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될 것이다. 과연 1960년대의 새로운 문학을 주도한 작가와
비평가들은 ‘자유’를 문학화하고 나아가 양식화하고 있었는가. 1960년대
의 ‘개인’과 ‘소시민’은 정치를 사갈시하고 혹은 두려워할 뿐이었는가. 그
25) 염무웅 대담, 「1960년대와 한국문학」, 233쪽.
26) 황병주,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근대화담론을 중심으로」, 한양대 박사논문,
2008, 292쪽.
27) 김영찬, ?근대의 불안과 모더니즘?, 소명출판, 2006, 243쪽.
28) 김윤식,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문학사상사, 2005, 373쪽.
29) 같은 곳.
30) 김영찬, 위의 글, 같은 곳.
31) 윤지관, 「세상의 길―4․19 세대 문학론의 심층」, 최원식․임규찬 엮음, ?4월
혁명과 한국문학?, 창작과비평사, 2002, 257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81
들 사이에 편차는 없었는가. ‘자유’를 생활에, 정치에 접속시키고자 했던
김수영과 그들은 어떻게 변별되는가.32) 여기서는 ‘자유’를 통해 ?산문시
대?-?사계?-?68문학?을 설명하는 한편 김승옥과 이청준을 대비시킴으
로써 그 내부에 존재했던 이질성을 변별해 내고, 나아가 이청준의 정치적
기획을 조명함으로써 ‘4․19 세대’의 문학이 1970년대의 민중적 전환과
맺고 있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를 해명해 보고자 한다. “‘책’이 남아
있었다. 나에게 (…) 나는 성난 군중들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할 처지였
다.”33)고 썼던, ‘무지’가 “스스로를 향락”하는 장면에 “견딜 수 없는 증오”
를 느낀다고34) 썼던― 그러니까, 정신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자였던 이
청준이지만, 그는 개발독재정권에 맞서는 전략을 일관되게 모색한 작가
였으며, 그런 점에서 1970년대의 민중적 전환에 닿아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2-2. ‘소시민의식’― 남성적 입사, 폭력에의 예감
?산문시대?는 그 매체의 형식 자체로 1950년대에 성립, 1960년대까
지도 지배력을 행사한 문단권력에 저항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서정주․
조연현․김동리 등이 주도한 추천제라는 등단양식 및 그 산물로서의 ‘문
하(門下)’에의 귀속이라는 길을 택하는 대신, 신춘문예 같은 공모(公募) 형
식으로 등단하고 동인지라는 매체로써 스스로를 드러냈다. 기성의 인정
을 지향하는 대신 신진끼리의 자발적 결사를 목표하는, 새로운 매체 전략
32) 이 맥락에서의 발언이 적지 않거니와 한 가지 예만 들어둔다: “나는 자유당 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
해 보면 그 당시에(…) ‘혼란’이 지금만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
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
멘트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전집?2, 민음사, 2003, 403쪽).
33) 이청준, 「마기의 죽음」, 33쪽.
34) 이청준, 「공범」, ?이청준 전집?1, 문학과지성사, 2010, 271쪽.
282 한국문학연구 39집
을 선택했던 것이다.35) “어쩐지 추천제 자체에서 비밀의 음침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싫은 느낌”이었다는 김승옥의 회상36)은 4월항쟁으
로 그 존재를 뚜렷이 한 대학생-청년들이 문화적으로도 독자적 존재를
모색해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적절히 시사해 주고 있다. 새로운 매체전
략에 걸맞게 ?산문시대?의 문학은 사유와 감성에서도 혁신적이고, ‘동인’
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상당한 정도로 일관된 독특한 주제의식을 드러
낸다.37) 여성을 대상으로 정점화되는 위악과 폭력성은 그 중 두드러진
양상이다. 김승옥의 「乾」과 「생명연습」과 「환상수첩」, 김현의 「잃어버린
처용의 노래」, 강호무의 「癌素質」 등, ?산문시대?에 실린 소설 중 상당수
는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을 공공연한 화제로 삼고 있다. ‘선의의 독재’론
이 이어지고 젊은 가부장의 이미지가 적잖은 대중적 지지 속에서 승승장
구하던 시절이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나 ?빙점?에서 여성들은
어떤 사건이나 부조리도 한결같은 정결성으로 버텨내고 마침내 짧은 생
애 끝에 희생될 때도 그 숭고성을 잃지 않지만, ?산문시대?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런 정신적 보상 없이 폭력적으로 희생된다. 또한 앞의 여성들
이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확고하게 보호받는 반면 ?산문시대?의 여성들은
애착의 관계에 놓인 남성 주체로부터 배신당하고 능욕당한다. 「야행」 같
은 인상적인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38) 특히 김승옥의 주인공들은 여성의
순결성을 두려워하고, 사랑의 가능성 앞에 소스라치며, 기껏해야 “당신은
과거의 나 자신”39)이라는 우울한 제스처를 남길 뿐이다. 「생명연습」에서
35) 1950년대의 추천제 및 신춘문예제도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이봉범, 「1950년대
의 등단제도 연구」, ?한국문학연구?36집, 2009 참조.
36) 김승옥, ?뜬세상에 살기에?, 지식산업사, 1977, 193쪽.
37) 후일 ?창작과비평?을 주도한 비평가 중 한 사람인 염무웅이 ?산문시대?와 ?68문
학?에 참가한 이색적 장면은 따로 기억해 둘 만하다. ‘4․19세대’가 주도한 문화
적 가능성이 ?산문시대?를 거쳐 초기 ?창작과비평?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통합
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38) 김미란, 「국가재건의 시대와 대도시를 배회하는 여성산책자」, ?여성문학연구?
12호, 2004.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83
사랑하던 여인을 유린하고서야 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던 한교수의
사연처럼, 혹은 「환상수첩」에서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위악성을 가
장하기 위해 애인을 친구 손에 넘기는 정우의 치기처럼, 이들은 근대-성
장-발전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을 대가로 지불한다.
이에 대해서는 김승옥 소설에서의 주체 정립이 부친 살해를 통해 이루
어지는 대신 “‘어머니’와 ‘어머니’의 인접 이미지로서의 ‘누이’를 부정하고
훼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한 연구가 제출되어
있거니와40) 이 훼손이 흔히 ‘패거리’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욱
문제적이다. 근대-성장-발전의 서사가 남성적 세계에의 입사initiation
와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김현을 참조해 보자: “나는 바쁘다는 것
에 현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타인들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제외된
나 자신이 나는 황홀했다 (…) 거의 뛰다시피 했다. 책을 빨리 읽었다 (…)
열심히 싸움을 했다.” 근대-성장-발전의 리듬을 삶에서 체현하던 ‘내’가
그 ‘바쁜 생’을 함께 하는 패거리들과 집단강간을 계획하고, 그러나 막상
강간 직전 “이것이 바쁜 생인가.”라는 회의에 떨어진다는 서사는 이 남성
적 입사의 시도와 좌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41) 초등학생 또래에
불과한 사촌누이에게도 “음핵을 만지자(…) 홍조를 띠우며 빙그레
웃”(23)는 모습을 덧씌우는, 모든 여성을 성적 대상이자 그 자체 성적 음
란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무참한 획일주의 역시 눈에 띈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나 ?빙점?의 독자들이 무죄한 주체로 스스로를 위치시
킬 수 있었다면, ?산문시대?는 타락과 범죄의식의 서사로 가득 차 있다.
하기야, 성과 폭력에 의해 존재 증명을 통과한다는 남성적 입사의 서
사가 비단 ?산문시대?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1950년대에도 서기원․장
39) 김승옥, 「무진기행」,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40) 장세진, 「‘아비 부정’, 혹은 1960년대 미적 주체의 모험」, 상허학회, ?1960년대
소설의 근대성과 주체?, 깊은샘, 2004, 102쪽.
41) 김현, 「잃어버린 처용의 노래」, ?산문시대?1, 25~26쪽.
284 한국문학연구 39집
용학․손창섭 등이 직․간접으로 그 메커니즘을 보여준 바 있으며, 1970
년대라면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여자?가 보여주듯, 또한 이들 소설에
기반한 영화의 인기가 보여주듯 남성적 공범의식과 여성의 희생은 시대
의 아이콘이 되다시피 했다. 이른바 ‘호스테스물’의 범람과 ?선데이서
울?류의 관음증이 보여주듯, 누구도 순결하지 않다는 난폭한 의식은
1970년대의 특징이다. 그 의식을 스스로 과장하면서 폭력적 유린의 과정
을 거친 후 찾아드는 한켠의 죄의식, 한켠으로는 비로소 생성되는 남성적
유대와 남성적 성장의 서사— 이것이 1970년대의 대중서사를 특징짓는
공통의 화소(話素)라고 한다면, ?산문시대?는1960~70년대를 거치면서
확실해진 이 남성적 폭력의 징후를 앞서 서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
적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남성 주체들과 달리 ?산문시대?의 주인공들
은 남성적 폭력을 시도할 뿐 최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한다. 이미 여성들
은 희생된 다음이고 신문에는 자살 보도 기사가 떠돌지만(「잃어버린 처용의
노래」「환상수첩」) 그렇게까지 입사와 성공을 위해 안간힘썼던 남성 주인공
들 역시 타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산문시대?를 대표한 김승옥의 주인공들은 흔히 폭력에 동
참하고도 살아남는 데 실패한다. 김승옥 소설의 날렵한 위악이란 지방과
서울 사이, 여성과 남성 사이, 순애(純愛)와 성(性) 사이를 메꾸기 위한 방
편이자 생존의 과장된 전략에 불과하다. ‘없는 자’이자 ‘지방 출신’이라는
의식에 차 있던 ?산문시대? 주변의 작가들42)에게 서울-남성-성의 지배
적인 지위란 끝끝내 이물스러운 것이다. 물론 김승옥은 스스로 ‘사디리아
시스’43)를 자처한다. 이는 그가 남성적 폭력의 공범자로서 스스로를 위
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며, 그런 만큼 여성의 희생이 ?머무르고
42) 김건우, 「4․19 세대 작가들의 초기 소설에 나타나는 ‘낙오자’ 모티프의 의미」, ?근대문학연구?16호, 2007, 169~73쪽. 실제로 이 논문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작가는 김승옥 외에 서정인․박태순이다.
43) ?산문시대?5호에 실었던 소설의 제목으로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남자’로 설
명되어 있다.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85
싶었던 순간들?처럼 청결하게 표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성
은 그렇듯 신화적으로 순결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그렇듯 고요하게 희
생될 수도 없는 존재다. 여성의 순결성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만 그 가능
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승옥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완전
히 순정해야 한다고 믿으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자신 앞에 절망한다. ‘환
상적 기준’은 내내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의 원천이다. 짤막한 소화
(笑話)처럼 제시되어 있지만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말미에 소개되어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서, “잃어버린 한 여자를 잊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긍정될 수 있는 답변이 단 두 개, 즉 “뭐 사
랑 같은 건… 글쎄… 주어본 적이 없으니까….”라는 무뢰한의 답변과 “나
는 한평생을 젊은 날 잃어버린 한 여자 생각만으로 살아왔는데”라는 순정
파의 답변뿐이라는 설정44)은 김승옥 스스로의 위치 설정에 적절하게 대
응되고 있다.
완전한 속물이나 순정한 패배자, 둘 중 하나를 꿈꾸지만, 그러나 김승
옥을 비롯한 새 세대 지식인의 근거는 “속물도 되지 않고 패배자도 되지
않으려는, 그 사이의 중간지대”에 놓인다.45) 최근 ‘낙오자 의식’이라 명
명된 이 새로운 지식인의 표지는 김주연이나 김치수가 지칭한 ‘소시민 의
식’에 가까운 것으로서, “자신의 소시민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자각”한46)
자의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삶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안
다, 그렇지만’의 이 자리는 백낙청의 지적마따나 “일시적 도피의 길이요
시민의식 파산의 길이며 새로운 노예화의 길”47)이기 너무나 쉽지 않은
가? 실상 김승옥 초기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 좁은 지대에서의 생존에 성
공하지 못한다. ‘4․19 세대’를 문학적으로 구별시켜 주는 또 하나의 지
44) 김승옥,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산문시대?4, 402쪽.
45) 김건우, 앞의 글, 174쪽.
46) 김치수, 「60년대 한국소설의 성과」, ?형성?1969. 봄.
47) 백낙청, 「시민문학론」,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창작과비평사, 1978, 68쪽.
286 한국문학연구 39집
표, ‘자살’이라는 모티프가 등장하는 곳이 이곳이다. ?광장? 이래 1960년
대를 관통한 문학적 주제인 ‘자유’는 김승옥과 같은 경향에 있어서는 ‘자
살’이라는 가능성으로, 혹은 「서울 1964년 이후」나 「무진기행」 이후의
막다른 길로 현상되곤 한다. 강호무의 발언대로라면 이렇다: “나에게 주
어진 피투성이의 자유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누릴까. 극히 반항적인 마음
이 되어 자살하라고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그 자유라는 것 이외의 어떤 자
유를 어떤 방법으로 누릴까?”48) 결국 ‘자유’는 자기파괴의 자유로만 남는
다. 4월항쟁은 젊은 세대에, 대학생-청년층에 사회적 존재를 부여했고
‘없는 자’이자 ‘지방 출신’으로서의 자의식이 역설적 지반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지만, 항쟁이 증명했던 ‘자유’의 사회적 가능성이 갑작스레 닫혀
버린 후, ‘자유’의 논리적 결론은 자살이 되고 만다. 적어도, 대학생-청년
이라는 정체성 안에 머무르려는, 패배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려는
?산문시대? 주변의 주인공들에 있어서는 그렇다.
3. 이청준과 6․3, ‘허기’의 정치성
3-1. 근대화의 항체로서의 ‘허기’
‘허기’가 이청준 소설, 특히 초기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1969)에서 드러나듯 이청준의 허기
에는 분명한 역사성이 존재한다. 식민말기의 허기, 한국전쟁기의 허기,
6․3 상황에서의 허기라는 세 개의 고비가 그것이다. 「쓰여지지 않은 자
서전」의 주인공은 어렸을 적 식량난에 허덕이는 식민 말기의 농촌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하루 종일 연을 날리면서 연에서 “허기의 얼굴”을 익
48) 강호무, 「蕃地植物」, ?산문시대?2, 173~74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87
혔고49) 이후 한국전쟁 때 출정 장정 환송회를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릴 때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 큰소리로 군가를 불러대다 허기의 얼굴에 다시
맞닥뜨렸으며(83~84) 성년이 된 후에는 1964년 6․3이라는 국면에서 단
식투쟁에 참여함으로써 허기를 다시 만난다. 남다른 점은 두 가지, 하나
는 허기가 허기만으로 경험되지 않고 이윽고 그 통증과 긴장감을 “이상한
쾌감으로 즐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식민 말기와 전쟁기의
허기를 상기시킨 직접적 계기가 6․3 당시의 경험이었다는 사실이다.
6․3은 4월항쟁을 통해 ‘4월의 젊은 사자’로 태어난 대학생이 비로소
독자적인 문화와 독자적 저항양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사
건이다. 한일회담에서의 굴욕적 태도가 항의의 초점이 되었던 당시, 애
국가와 군가를 불렀던 4월항쟁 때와는 달리 6․3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노가바’를 익혔고 풍물과 노래패를 동원했다. 선언문을 작성하는 수준을
넘어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기획하는 것 같은 문화적 퍼포먼스를
시위에 결합시켰고, 마침내 단식투쟁이라는 초유의 저항양식을 발명해
냈다.50)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시위문화의 갖가지 형식, 화형식이
며 모의재판이 창안된 것이 이 때이며 단식투쟁의 최다 인원이 기록된 것
도 아마 이 때일 것이다. 1964년 5월 30일부터 시작된 서울 문리대 단식
에는 2백여 명이 참여했으며, 1965년 6월 한일협정 조인을 앞두고는 서
울 법대생들이 2백시간 단식농성을 벌였다.51) 단식투쟁에 관해 오랜 연
륜을 보여준다 해도 좋을 아일랜드나 인도의 경우가 보여주듯, 단식은 자
기 신체에 대한 보살핌을 포기함으로써 저항을 실천한다는 독특한 발상
의 산물이다. 이는 대안을 조직하는 적극적 저항이 내․외적 이유로 불가
능한 상황에서, 자기 신체를 포기함으로써 신체를 통해 관철되는 국가의
49) 이청준,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장락, 1994, 24쪽.
50) 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1991, 191․195쪽과 염무웅 대
담, 「1960년대와 한국문학」, ?작가연구?3호, 204쪽 참조.
51) 6․3 동지회, ?6․3 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08쪽 및 135쪽.
288 한국문학연구 39집
힘을 거부한다는 극단적 사고를 실험한다.52) 지식인적인 저항방식이라
불러야 할 단식투쟁―고은은 일찍이 이 방법의 ‘지식인적 성격’에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이 창안되었다는 사실은 6․3 시위 주변의 상황을 단적
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되는데, 한때 밤 시간 도심 청소년들의 가세가 있었
고 4월에는 일부 중․고등학생의 참여가, 5월에는 일부 시민의 합류가
있었지만, 6․3은 ‘대학생들의’ 사건에 가까웠다. 대학생의 참여가 전면
적이고 치열했던 데 비해 다른 세대나 계층의 호응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후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6․3 시위 와중에 창안
된 시위문화는 전 지역․계층․세대로 번져가게 되지만, 6․3은 비교적
고립된 상태에서 저항문화를 형성․실험한 계기였던 것이다. 이청준은
바로 이 사건을 통한 허기를 “모든 허기의 경험을 완성하는 것 같은 가장
지독한 것”으로서 진술한다(107).
5․16 쿠데타로 “삶에서 어떤 정신세계가 열렸다가 갑자기 닫혀버린
것”53)을 경험한 세대가, 스스로 열어젖힌 사회적 공간에서 새로운 저항
양식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1960년대의 개발독재에 대한 대응의 모색이
었다는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와 ‘단식’을 키워드로 한 양식이 개
발독재의 ‘물질’과 ‘번영’에 대응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앞선 글, 「4․19
와 5․16, 자유와 빵의 토포스」에서 논의했다시피 5․16 쿠데타가 수리
되고 나아가 정권으로까지 묵인된 까닭은 ‘자유보다 빵’이라는 위상학의
52) 아일랜드의 경우 단식투쟁은 1917년 토마스 애쉬, 1920년 테렌스 맥스위니,
1940년 토니 다씨와 잭 맥닐라, 숀 맥코이 등 사망자만도 여럿을 기록하고 있는
극한의 투쟁양식이다. 감금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몇 가지 되지 않는 투쟁방법의
하나로서, 단식투쟁은 씻기를 거부하는 투쟁no-wash struggle과 더불어 자기 신
체를 관통하는 일체의 생정치를 거부함으로써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J.M.
Herman, Empire's Bodies: Images of suffering of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y India and Ireland,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2004, pp.372~
73.
53) 이청준․권오룡 대담, 「시대의 고통에서 영혼의 비상까지」, 권오룡 엮음, ?이청
준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9, 25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89
도입 때문이었다. “‘자유’를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급진적 경제발전(이것
도 희망에 불과하지만)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5․16 직전의 질문이 보여주
듯, 혹은 ‘빵 없는 자유’, ‘굶주릴 수 있는 자유’ 등의 수사가 보여주듯
1960년대 초에는 자유와 빵을 대립시키고 ‘자유고 뭐고 간에 우선 잘 먹
고 잘 살아야겠다.’며 조바심 내는 정서가 만연해 있었다.54) 4월항쟁으
로 경험하고 획득한 ‘자유’가 그만큼 불안하게 느껴졌던 탓이겠다. 자유
와 빵 사이 대립이 가짜 대립일 수 있다는 사실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
서야 비로소 널리 동의를 얻기 시작하는데, 그 이전, 단식투쟁이란 자유
에 대한 빵의 우위를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출현한 방략이 아닐까 짐작된
다. “어느 하나를 버려야만 한다면 빵을 버리는 수밖에 없겠다”55)는 사고
가 현현된 결과였으리라는 뜻이다. 이청준이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에
서 묘사하고 있는 단식농성은 아마 1964년 6월의 서울 문리대생 단식이
리라고 짐작되는데, 이청준은 이 ‘단식’ 속에서 식민말기-한국전쟁기
-1960년대로 이어지는 ‘허기’의 계보를 상상하고 거기서 ‘빵보다 자유’라
는 입장의 가능성을 발견한 듯하다.
따지고 보면 등단작 「퇴원」(1965)에서부터 이청준은 ‘허기’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퇴원」에서 유명한 것은 작가 이청준의 원(原) 장면으로
거론되곤 하는 ‘어머니․누이의 옷에 대한 탐닉과 아버지에 의한 감금’ 장
면이지만, 그 전후에는 “―이틀을 굶겨 놔도 배고픈 줄을 모르는 놈입니
다. 저 놈은.― ”56)이라는 아버지의 발화가 직․간접으로 세 번이나 등장
하고 있다. 가정교사로 동급생을 고용하면서도 아버지는 “안될 겝니다.”
라고 경고한다. ‘나’는 훈육이 불가능한 존재다. 어머니와 누이들의 속옷
을 어루만지며 잠들기를 즐기는 습관을 들킨 탓에 이틀이나 광 속에 감금
54) 윤형섭, 「복지국가와 병영국가―자유와 빵은 영원히 평행되어야 하는 것」, ?사
상계?1963. 9, 51쪽.
55) 위의 글, 57쪽.
56) 이청준, 「퇴원」, ?이청준전집?1, 18쪽.
290 한국문학연구 39집
되었지만 고분고분해질 줄 몰랐던, 고립과 허기에 투항하지 않는 특성이
‘내’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월항쟁 후 아버지가 “부정 관리
로 붉은 벽돌집으로”(19) 가 버린 후, ‘나’는 허기의 능력을 둘러싼 분열증
에 시달린다. 한 끼라도 거르면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증세에 시달리고,
이 “세 끼의 식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입원까지 권고받는 것이다. 아버지
의 훈육이 남긴 낙인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죄의식과 더불어 비로소 되
살아난다. 먹고 싶다는 의사가 없는데도 먹어야 하는, 허기의 능력을 상
실한 ‘나’의 상황은 바늘 없는 시계나 자아망실의 증상에 비유된다.
‘나’와 한 병실에는 ‘나’의 분열증을 표상하듯 다른 두 명의 환자가 등장
한다. 벽 쪽으로 돌아누운 채 죽은 듯 지내던 사내는 실제로 조용히 죽음
을 맞이하고, 장막 이상으로 시달리는 청년은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지
만 “먹을 수가 없”(32)는 증상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생명을 거부한 가
사(假死) 상태와 허기의 고통 사이— 마치 4월항쟁 이후 삶의 두 가지 전
제를 확인하듯,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요히 허기를 감내하지 못하
는 데 자책을 느끼는 한편 먹을 수 없는데도 먹고 싶어하는 절박한 욕망
을 긍정하지 못한다는 데 대해서도 가책을 받는다. 허기냐 포식이냐— 이
사이에서 「퇴원」의 ‘내’가 택하는 길은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배낭
진 무장군인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가운데 “태극기가 낙엽처럼 흔들리”는
광경을 보고 “이상한 흥분기”를 느끼는데(33~34), 월남 파병군 행진을 목
격한 후 다시 사회적 질서 속에 복귀할 것을 결심한다는 이 설정에서 ‘허
기’가 존립할 자리는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월남 파병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우호적이었던 만큼57) 「퇴원」이 유독 반전(反戰)의 단
초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퇴원」의 흥분은 어쩌면 근대-발
57) ?사상계? 1965년 11월호는 ‘자유수호의 결의’라는 표제 하에 이미 파월된 비전투
부대 ‘비둘기부대’와 파월 예정인 전투부대 ‘맹호부대’의 훈련 장면을 권두화보로
싣고 있다. 이듬해 증파가 결정되었을 때도 논점은 국방태세에 대한 우려였다(「증
파에 반대」, ?동아일보? 1966. 3. 3; 「소용돌이치는 국군증파」, ?동아일보?
1966. 3. 4 등).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91
전-성장의 논리에 ‘나’ 또한 참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흥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년 후,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과 「조율사」에 이르면
‘허기’와 ‘단식’은 이청준에 있어 분명한 이념적 지위와 방법론적 문제의
식을 획득한다.
3-2. ‘선택할 수 없는 세대’의 자유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의 주인공, ?내외?라는 잡지사에 근무하다 ?새
여성?을 발간하는 회사로 옮긴 이준에게서 1966년 사상계사에 입사했다
1967년 여원사로 옮긴 이청준의 이력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조율사」에도 잡지사에 근무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거니와, 이
들이 근무하는 잡지는 막 “7만부를 자랑하던 (…) 발행부수가 몇 차례의
반감기를 거쳐 드디어는 2천부가 되”는, 총 4백면이던 부피가 2백으로, 1
백으로, 마침내 50으로 떨어지는(「자서전」 62~63) 초유의 추락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걸쳐 “천에서 만으
로 만에서 이만, 삼만, 사만으로 자꾸 올라가”58) 마침내 판매부수 7만을
기록하고 1958년 이후 매호 4백면 발행 체제를 안정화시키고 있던 ?사상
계?는 1966년 11월, 3백면이었던 지면을 줄여 2백면으로 축소한 이래
1967년 4월호에 이르면 1백면으로까지 분량이 줄어든다.59) 8월호 편집
후기에서는 새로운 각오로 재출발해 가을부터 3백면 부피로 재간할 것이
라 공지하지만, 오히려 지면은 50면으로 줄어든 채 연말까지 이어진다.
11월호는 체코 작가의 단편 번역 「권력자의 장례식」으로 채워지다시피
58) 함석헌, 「생각하는 갈대」, ?사상계? 1961. 11, 40쪽.
59) 자발적 호응이 감소한 탓도 있었지만 외압 탓이 컸다. ?사상계?1963년 4월호와
5월호는 정보기관 압력으로 전국 서점에서 무더기 반품 사태를 빚었으며, 1965
년에는 세무 사찰로 1천 3백여만원 추징금 강요하고 거래사까지 세무사찰을 당
했다(박태순, 「민주․민족이념을 추구하다 쓰러진 ?사상계?」, ?역사비평? 39호,
1997).
292 한국문학연구 39집
했을 정도이다. 이 해에는 신인문학상조차 시상하지 못했다. 1967년 2월
부터 12월까지는 시판을 중지한 채 정기구독자에게만 우송하는 “동면상
태”에 들어갔으니, 실제로는 발행중지에 들어갔던 셈이다. 1968년 1월에
이르러서야 발행인을 부완혁으로 바꿔 3백면 규모로 재발간하는 데 성공
하지만 이전과 같은 전성(全盛)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청준이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에서 쓰고 있는, 발행부수가 4만에서 2천
으로까지 줄어든 시기는 실제로 작가가 사상계사에서 근무한 1966~67
년의 상황이다. 「조율사」에 나오는, 1967년 6․8 총선에서의 부정 때문
에 대학생 시위가 일었을 때 대학교수 50인에게 설문을 돌렸지만 그 중
열두 장만이 회수되었다는 일화(328)도 실제 경험을 기술한 것으로 짐작
된다. 이 해 6월 ?사상계?는 ‘6․8 사태와 교수설문’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응답자는 「조율사」의 숫자와 거의 비슷한 총 13인이다.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과 「조율사」에서 이렇듯 ?사상계? 경험을 구
체적으로 옮겨놓은 이청준은 ‘?사상계? 세대’라 부를 수 있는 앞 세대 지
식인에 대한 입장 역시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 이들 작품의 화자가 보기
에 근무하는 잡지사의 필진들은 “확고한 의지와 (…) 불굴의 힘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지사들이다(63).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역사를 선택
해 온 이들이며 “막히면 떠나버릴” 망명지가 있었던 세대이다(「조율사」
372). 반면 화자의 삶은 언제나 선택하기보다 선택당해 왔다는 감각으로
특징지워진다.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의 주인공 이준이 쓴 소설은 바로
이 감각을 삽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이
오자 자리를 피함으로써 ‘선택당해’ 버리는 쪽을 택했다는 결말— 식민 말
기를, 해방을, 전쟁을, 아직 성년에 이르지 않은 나이로 늘 선택‘당해’ 왔
다고 생각하는 ‘4․19 세대’에게는 그런 좌표에 대한 분노 또한 생생한 것
이다. 「병신과 머저리」에서의 유명한 형-제 구도, 즉 “분명한 환부를 갖
고 있는” 형과 “뚜렷한 환부 없는” 동생 사이의 관계 역시 그 투영일 터인
데,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 역시 적잖은 분량과 인물을 여기 할애하고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93
있다. 시인 윤일과 음악가 정은숙 사이의 관계, 그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고 최후로 서로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대한 환멸을 견디
지 못해 감행한 은숙의 자살은 ‘늘 선택당해 온’ 반복적 체험이 맺은 서사
적 종결이다. 주인공이 내외사를 그만둔 후 입사한 새여성사의 속물적이
고 획일적인 환경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도 결국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다. 사직의사를 밝히고 얻은 유예기간 중, 준이 아직 고민하는
사이 이미 새 직원이 채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거야말로 너무 가련
하지 않아? 애초에 주어지지도 않은 선택을 가지고 고심을 하고 있다면
말야 (…) 어쨌든 마지막 선택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248). 과
연 이들에게 ‘선택’이란 늘 ‘가짜 선택’이다. 주어진 가능성 중에서 무언가
를 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가장 일반적인 표상은 이 세대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일말의 정당성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스스로 창조에
투신하는 적극적 자유의 이념 역시 설득되기 힘든 것이다. 이청준이 보여
주는 ‘4․19 세대’는 ‘무릇 선택이라는 행위의 무용성’에 대한 깊은 체험
적 확신을 갖고 있다.
이청준의 세대 인식에 동의한다면 ‘굶을 수 있는 자유’를 택하고 허기
에서 쾌감을 느끼는 병리적 반응을 체질화하고 “육신에 대한 가장 심한
모욕”인 단식을 통해 재생을 기약하는 것(「조율사」 405)은 차라리 당연하
다. 그에게 남아 있는 자유는 배반할 자유뿐이다. 그것이 1960년대, 아직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는 개발독재에 대한 유일한 항체인 것이다. 이청준
은 「조율사」를 통해 ?사상계? 필진을 ‘민권 청부업자’라고 표현하면서 “온
통 자기들의 말을 이 민권 청부업자들에게 떠맡겨 버리고 난 시민들은 이
청부업자들의 울타리 뒤에서 편히 잠들고 있었”(352)다고 진단하고, 심지
어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이제 ‘배반’이라고 선언한
다. 그리하여 시민들에게 “이젠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 결국 그들 자신들이 늘 정신을 가다듬고 깨어 앉아 있어야
하리라는 것을 인식시켜”(353) 줄 것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앞
294 한국문학연구 39집
선 세대의 지식인은 결국 배반 앞에서 머뭇거리고, 오히려 민중과 자신들
을 분리시켜 온 내력을 탓하며, “그 선량하고 가엾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354). 이청준의 주인공은 결국 ‘배반의 꿈’을
자기화하고 예술화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줄」(1966)이나 「매잡이」
(1968)가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이나 「조율사」와 공존하는 것은 이런 까
닭이라고 짐작된다. 생활을 등짐으로써 예술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장인의
세계, 그것은 곧 개발의 환상보다 허기를 통한 저항을 선택함으로써 문학
-예술의 영토에서 ‘자유’를 실천해 나갈 작가의 자리와 통한다. 또한 그것
은 「과녁」이나 「공범」이 보여주듯 속중(俗衆)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는
심리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들’은 무지하다. ‘그들’이 꼭 하위계급이거나
저학력자일 필요는 없고, 「과녁」에서 보듯 주관적으로는 성심을 다하는
엘리트 검사 역시 ‘그들’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여하튼 ‘그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때에야 용납할 수 있는 존재다. “무지라는 것은 자기 비애를
느끼고 움츠러들었을 때 연민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가 무서운 파괴
력으로 자기 향락을 주장”할 때 그것은 ‘죄악’이자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60)
4. 방영웅과 ?창작과비평?, 반(反)개발의 전략
4-1. 문학적 자기인식과 ?분례기?의 문제성
1960년대 문학의 새로운 정신이 ?산문시대?-?사계?-?68문학?의 계보
로 대표된다고 할 때, 1966년 첫 호를 발간한 ?창작과비평?의 사회적이
고 문화적인 위상은 창간 당시로선 명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창작
60) 이청준, 「공범」, 271~72쪽. 초출은 1967년이다.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95
과비평? 첫 호에는 이호철의 「어느 이발소에서」와 더불어 김승옥의 연재
장편 「다산성」이 실렸으며, 백낙청의 권두논문 외 유종호의 평론과 조가
경․김우창․이정식의 서평이 게재되었다. 백낙청은 후일 1960년대 문
학이 아니라 “70년대 초에 본격화된 민족문학론과 민족문학운동”에 의해
문학사적 변화가 시동되었다고 평가하면서 김지하의 「오적」(1970)과 황
석영의 「객지」(1971)를 그 시발점에 위치시킨 바 있는데, 또는 신경림과
황석영의 변모로 표시되는 이 ‘민족문학운동’의 첫 단계는 각각 ?창작과
비평? 18호(1970. 가을) 및 20호(1971. 봄)에 와서야 현실화된 것이다.61)
?창작과비평?이 시대를 이끄는 지(知)의 집합소가 되고 거기 변별되는 매
체로서 ?문학과지성?이 창간된 것도 모두 1970년대의 정황이다. 1960년
대 후반 당시로서는 ?창작과비평?은 “기존의 보수적인 문협 체제에 반대
하는 비판적 문인들의 연합체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62) 20호에 이르기
까지 소설을 발표한 면면만 보더라도 김승옥을 비롯해 서기원․이청준․
최인훈 등 1970년대 이후의 ?창작과비평?과는 개성을 달리하는 작가들
이 여럿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비’라는 고유명사를 획득하
면서 1970년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이 되기까지 ?창작과비평?의 초창기
는 ‘1960년대적인’ 혹은 ‘4․19세대적인’ 요소들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
다. 1960년대의 ‘소시민 문학’에 대한 ‘창비적’ 부정이 현실화되기에는 아
직 사회적인, 이론적인, 창작적인 기반이 모두 부족했다. ?창작과비
평?이 “외래지향적 취향 같은 것을 청산”하고 “토착화 과정”을 본격화한
것은 1970년대 초였으며63) ‘김수영 붐’을 확산시켰는가 하면 모더니즘
취향도 보였던 창작과 비평의 편폭이 “토착적인 어떤 터”로 수렴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다.64)
61) 「오적」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수록되었다.
62) 염무웅․김윤태 대담, 앞의 글.
63) 「‘창비’ 10년—회고와 반성」, 백낙청 회화록 간행위원회 엮음, ?백낙청 회화록?1,
창작과비평사, 2007, 131쪽. 백낙청의 발언이다.
64) 위의 글, 130면. 이호철의 발언으로, 그는 이 시기를 1969년 말부터 1972년까지
296 한국문학연구 39집
그 이전, 그러니까 1966년 창간 때부터 1969년 중반까지에 해당할 터
인데, ?창작과비평?을 이끌었던 논자들부터 충분히 자기의식을 정련하
지 못했을 무렵, ?창작과비평?의 자기의식을 촉진했던 매개로 주목되는
것은 뜻밖에 ?분례기?라는 장편이다. 지금은 별로 기억되지 않는 소설이
지만, 1967~68년 분재될 당시 ?분례기?는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
다. 어떤 전사(前史)도 없었던 방영웅이라는 신인의 장편소설을 집중 분재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창작과비평?에서 ?분례기?를 특별히 대접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미 「정든 땅 언덕 위」(1966)를 첫 작품으로 하는 박
태순의 외촌동 연작이 시작되고 김정한의 복귀작 「모래톱 이야기」(1966)
가 파문을 일으킨 후였으나 방영웅의 ?분례기?처럼 예외적인 후대 속에
서 등장한 텍스트는 없었다. 백낙청은 1968년 여름의 편집후기에서 ?분
례기?를 “?창작과비평? 2년 반의 가장 뜻깊은 수확”65)으로 들고 있으며
?분례기?에 대해 순수문학적 작품이라는 둥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둥 시
비가 있었으나 “이런 너절하다면 너절하다고 할 이야기를 이처럼 열심히
써 낸 것”이야말로 소설의 성취이며 “그런 삶을 멸시하지도 미화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인내와 관용과 용기의 소산이며 삶에 대한
드문 신뢰와 애착의 표현”이 새로운 문학의 징표가 되리라고 주장한다.
「시민문학론」(1969)에 이르면 이 어조는 “소시민적 자기중심주의에서 완
전하게는 아니라도 놀랄 만큼 벗어나 있다는 것”(69) 정도로 약화되어 “방
영웅의 작품세계는 (…) 하근찬이나 오유권의 세계보다 김승옥의 그것에
가까운 일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지만, 1970년대까지도 염무웅이
?삼대?나 ?임꺽정?에 맞먹는 자리에 ?분례기?를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이 소설에 대한 초기의 열광은 자못 강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되고 이삼 년” 후66)라고 하나 시대적 배경마저 불분명한 농촌
라고 가늠하고 있다.
65) 백낙청, 「편집후기」, ?창작과비평? 1968. 여름, 368쪽.
66) 방영웅, ?분례기?, 홍익출판사, 1968, 16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97
의 몰역사적 소묘, ‘빈곤’마저 ‘불결’에 밀려 후경화되는 이 소설에 ?창작
과비평? 편집진이 이토록 열광한 이유는 무엇인가? 선우휘의 말마따나
?분례기?는 “가장 낡고 복고적인 요소가 많은 그런 작품”으로 비치기 십
상이다.67) 해방되고 몇 년 후라는 초두의 스치는 서술을 제외한다면, 기
생 요릿집 조선관이나 상업학교 졸업생들의 형자 같은 세부를 꼼꼼히 살
펴보더라도 이 소설을 어느 시대에 특정하기란 힘들다. 1930~60년대의
어느 시대라도 후보가 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빈곤의 정치학’이 범
람했던 1960년대, ?창작과비평? 편집진을 열광시킨 것은 역설적으로
?분례기?의 몰역사성과 불결성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 제목이 표상
하듯 ?분례기?란 변소간 똥더미 위에서 태어난 ‘똥예’라는 여인의 일대기
이며, “이쁘구 돈 잘 버는 신랑헌티 시집을 보내줄 테니께 너는 정조만 잘
지키면 되는 거여”라는, ‘소박한 교환’으로서의 정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
는 속에서도 ‘똥 한 덩이’ 같은 인생을 벗어날 수 없었던 무명(無名) 그 자
체로서의 삶에 바치는 조사(弔詞)이다. 나자마자 똥 위에 던져졌던 주인공
똥예는 구역질나는 이물(異物)abject이어야 마땅한 ‘똥’에서 자기 분신을
본 듯한 애정과 연민을 느낀다. “똥은 말라서 검다. 똥예는 또 다른 자신
을 발견한 듯 몹시 반갑다. 바짝 그 앞에 다가앉아 한참 동안 똥을 쳐다본
다. 똥예는 코를 대본다. 냄새가 없다. 아무 준비, 생명도 없다. 마른 풀
들만 우거진 속에 외로이 앉아 있는 똥아. 이 곳은 산속에서 제일 초라하
고 빈궁한 곳이다. 겨울 속에 잠간 봄을 탄 나무며 풀들은 발랄하게 약동
하지 않는가. 똥예는 제 똥이 불쌍하고 가엾다. 가엾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20).
똥예는 그저 ‘가난한 시골 처녀’가 아니다. 가난과 피로야 똥예 주변의
대다수가 겪는 것이지만, “김도 매야 하고 쇠죽도 쒀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애새끼한테 젖도 물려야 하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것”(445)이라
67) 선우휘․백낙청, 「(대담) 작가와 평론가의 대결」, ?백낙청 회화록?1, 창작과비
평사, 2009.
298 한국문학연구 39집
는 노동의 생애와 달리 똥예의 집을 지배하는 것은 완벽하게 무대책한 삶
이다. 아버지 석서방은 판돈 한번 제대로 걸지 못하면서도 평생을 노름판
에서 소일하고, 어머니 석서방댁은 남편에 대한 반발로 어떤 노동에도 손
을 대지 않는다. 자기 자신 “아무 일도 하지 않”을뿐더러(39) 종종 “새끼들
을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 그냥 누워 있게”까지 한다(37). 지붕 이고 김장
담그는 일 같은 주기적 노동도 이 집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다른 집들
은 해마다 새로 해일어 지붕이 두툼하고 깨끗하나” 똥예네 집만은 썩어가
는 지붕에서 비가 줄줄 새고(42), 다들 봄철 맞아 김장김치에 진력나 할
때도 똥예네는 시어빠진 김치조각을 구걸하는 식이다. 노동에의 의욕이
삭제된 이 가구에서 삶은 비인간적인 이물성을 띤다. 유일하게 똥예네와
비슷한 처지인 백치 내림 철봉이네서 보이듯, 새끼 낳아 키우는 동물적인
삶조차 부정될 때가 종종 있다. 철봉의 형수인 벙어리는 출산 후 “어린애
의 배를 발로 쿡 눌러 죽이려” 했고(44) 잔뜩 차오른 젖을 자식에게 물리
는 대신 서방에게 먹인다. “아이는 거의 죽어 가”지만 남편은 보얗게 젖살
이 오른 채 젖을 빨 때마다 김치 한 줄기로 구미(口味)까지 채우는 것이다.
이 ‘짐승의 우리’(46)에서 똥예는 태어나고 살아간다.
‘짐승’의 삶에 던져졌으면서도 똥예는 죽이나마 쑤고 나무 해다 때는
노동을 홀로 감당한다. 노동이 존중되는 세계가 아니기에 그것은 노동 미
달의 노역이지만, 그래도 “이쁘고 돈 잘 버는” 신랑감 꿈을 꿀 정도로 똥
예는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를 갖고 있다. 정조의 교환 가치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유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성적 무능력자로 알려져
있던 한동네 중년에게 강간당한 후 똥예는 이웃 마을 도박꾼에게 시집을
가는데, 애초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도, 남편에 대해 불만이 일
때마다 “한번 당하구 나면 서방도 맘대로 고르지 못한다”(293)는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마침내 남편이 도박 밑천을 내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야만
적인 폭력을 행사했을 때도, 똥예가 정신줄을 놓게까지 만든 건 폭력 자
체라기보다 그런 결론이 마땅하다는 희미한 의식이다. 똥예의 친구 봉순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299
은 결혼날짜를 앞두고 어느 떠돌이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 날로 목을 매달
았었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 매달린 그 시신을 보고 똥예는 역시 정조
를 잃은 처지인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으며 실제로 낭떠러
지를 찾아 갔던 바 있다. 강간이라는 사건에 대한 분노나 절망이 절박했
던 건 아닌데도, 오히려 자신을 강간한 용팔을 “불러보고” 싶은 그리움을
느끼기까지 했는데도(56), ‘숫색시’여야 한다는 정조 관념은 그것대로 똥
예를 내리누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똥예의 정조 관념이란 거의 부조리해 보인다. 생활화되고 육체
화되지 않은 채 일종의 강박이자 주술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
다. 똥예는 강간이라는 사건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용팔에 대해서는 “따
라 나와서 찔끔찔끔 울 정도로”(311)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결혼
후에도 강간당했다는 의식을 거의 떠올리지 않지만, 다른 한편 봉순을 따
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목맨 봉순의 시신 아래서 혼례복을 입고 춤추는
꿈을 연거푸 꾸며(347) 결국 목맨 시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환각 속에서 미
쳐버린다(423~24). 미친 후에도 강간당했다는 기억을 잊지 않는 똥예는
(439)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봉순의 묘소 위에 시원스레 똥을 눈다(461).
똥예는 그러므로, 한번도 분명한 자기인식에 도달해 본 적 없는 존재다.
똥예가 강박적 정조 관념을 모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미쳐 버린 후, 광증
이라는 형식을 빌어서일 뿐이다. 똥예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럴 법한
사회적 처지나 상황적 인식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똥예의 시어머니 노랑
녀는 한 집에서 남편과 샛서방을 다 두고 살다시피 하나 도덕적 추문에
시달리지 않고, 도살장에서 일하는 전간증 환자 콩조지는 ‘미친 년’ 옥화
를 강간해 임신케 하지만 사건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는다. ?분례기?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가치판단이 멋대로 이접(離接)돼 있는 세계, 단기성과
비일관성이 차라리 당연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피(彼)와 아(我), 가해와
피해,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가 미분화되어 있는, 자아의 경계 자체가 흐
릿한 것이 ?분례기?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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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불결의 육체성, ?분례기?의 반(反)개발
?분례기?에 대한 초기의 열광에서 벗어난 직후, 백낙청은 ?분례기?가
“시골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 하근찬이나 오유권의 세계보다 김승옥
의 그것에 가까운 일면이 있다”68)고 지적한 바 있다. 방영웅 소설은 한결
같이 사회적 좌표를 부차화하고 있다는, 그런 점에서 “하근찬의 사회의
식” 류와 거리가 있다는 의미일 텐데, 사실 태연스레 누이를 팔고 이자 대
신 몸을 거래하며 임신한 제 여자를 폭행해 유산케 하되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군상(群像)이나(「살아가는 이야기」) 자기를 술집 작부로 만들어 놓은 남
자를 그리워하며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도둑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옥
동자들인지도” 모른다고 망상하는 인물들(「첫눈」)은 일껏 제기한 문제를
모두 취소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 위에 작가는 “그렇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69)라는 독특한 수용의 자세를 언명하고 있기마
저 하다. 그런 만큼 방영웅이 즐겨 등장시킨 하층민 여성들이 “분노와 원
망 대신 체념과 원시적 욕망”에 익숙해 있고 “빈곤을 사회적인 각도에서
포착”하지 못한 채 “세상을 아주 숙맥의 눈으로 바라보는 미분화된 의식”
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다이나믹한 동력학이 결여”70)되어 있
다는 비판을 가하기란 어렵지 않다. 서정적 면모와 그로테스크한 면모가
뒤얽혀 있으며 결과적으로 불균형한 파탄을 보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음
직하다.71)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1970년대 이후 스스로 취소하고 있
는 1960년대 후반 백낙청이나 염무웅의 직관이 옳았다. 신경림이나 김지
하나 황석영 같은 지렛대를 발견했을 때 ?분례기?의 그로테스크한 불결
성과 몰역사성은 ‘미달’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1960년대 후반 ?창작과비
68) 백낙청, 「시민문학론」,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창작과비평사, 1978, 69쪽.
69) 방영웅,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창작과비평사, 1974, 110쪽.
70) 김주연, 「70년대 작가의 시점」, ?변동사회와 작가?, 문학과지성사, 1979, 36~7쪽.
71) 박영준, ?장편소설의 주류와 속류―1960년대 한국 장편소설에 대하여?, 고대 출
판부, 2008, 248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301
평?이 아직 문학적 자기인식을 분명히 하지 못했을 무렵, 즉 갓 찾아낸
사회과학적 비판의 가능성이 육체적 실감을 수반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분례기?는 거의 필연적인 단계였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분
례기?는 방영웅이라는 한 자연인의 짧은 작가적 생애에서도 예외적인 작
품이고 1970년대에 지식의 향방을 바꿔놓은 ?창작과비평?이라는 매체에
서도 예외적인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발견되어야만 했던 텍스트다.
개발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선 자체는 6․3 즈음의 국면에서 뚜렷
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직 안 미쳤으면 대한
민국 사람이 아니지. 미친놈 아니면 살아있질 못해요.”라는 발언72)이나
환각 속에서 1963년 ‘리바이어던’의 출현을 목격한다는 서사73)는 이미
1963․4년경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소수의 이의 제기에 지나지 않았던
이 입장은 점차 설득력을 높여가면서 문학적 언어 또한 모색하기에 이르
렀으며, 서정인․남정현․윤정규 등의 이름 하에 기억할 만한 성취를 남
기기도 했다. 이들은 현실을 직접 상대하기보다 추상화시켜 버리는 취향
을 내비쳤고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하기보다 알레고리적으로 폭발시키는
결말을 선호하곤 했지만, 「분지」(1965)가 불러일으킨 파문이나 「강」(1968)
에 대한 폭넓은 호응을 생각한다면 ‘소시민’의 분열증적 저항은 그것대로
전진할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74) 그렇다 해도 그것이 ‘소시민’이라
는 지반을, 패배하지도 않고 속물화되기도 않겠다는 의식을 완전히 벗어
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박태순이나 이문구는 도시 빈민층이나 일용직
72) 백인빈, 「반짝이는 것과 빗소리」, ?청맥?1호, 1964. 8, 117쪽.
73) 송인항, 「레바이아탄―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청맥?5호, 1965. 1, 197쪽. 군
대라는 조직체의 폭력적 생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정인의 「후송」과 상통하는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을 연상케 하는 어지러운 서술 기법을 보이면서도 “나는
1840년생이었다. 미술대학생이었다. 그것은 1863년이었다.”라는 진술을 반복적
으로 제시하고 있다. ‘1863년’은 당연히 1963년으로 읽힌다.
74) 백낙청, 「시민문학론」, 68~69쪽 참조. 백낙청은 예컨대 서정인에 대해 “「미로」
(1967)에서 이미 강렬하게 노출됐었고 「강」에서는 시적 정취와 아름답게 조화
되었던 작가의 풍자적 시선”을 높이 사는 호의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302 한국문학연구 39집
노동자의 삶을 앞서 다루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주변적 생애를 살면서도
늘 극약을 지니고 다니고 “죽음을 아는 자만이 (…) 천박해, 더러워, 혹은
하찮고 업신여기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존재증명’에의 요청에 시달리는
세계75)이다. 삶의 기반과 저항의 방도는 함께 비약을 거쳐야만 했다. 그
러기 위해서라면 ‘소시민’적 저항이나 자의식은 먼저 완전히 부정될 필요
가 있었는데, ?분례기?는 거기 적절한 매개를 제공했던 것이다.
똥예는 어떤 상승 운동도 부정되는 사물로서의 배치를 산다. 똥예가
사는 곳은 고통이나 수난조차 극적일 수 없는, 삶의 자의식적 배치와 언
어적 현현이 있을 수 없는 장소이다. “산속에서 제일 초라하고 빈궁한
곳”, 그곳에서나마 풀이나 나무들은 생명을 갖고 잠깐 빛날 수 있지만, 유
기(有機)에서 비롯되었으되 무기물화해 버린 배설물은 어떤 가치도 주장
할 수 없다. 그것은 죽음과 이웃하고 있는 비체abject로서의 존재이며 묵
살당하고 금기시되는 것이 당연한 외재적 존재이다. 똥예의 처지 또한 다
르지 않다. ?분례기?에서 가장 실감나는 직업의 장소는 도살장인데, 도
살장에 끌려와 죽는 짐승의 처지는 몇 번이나 똥예의 그것에 유비된다.
피비린내와 배설물 냄새와 고기 삶는 고소한 냄새가 뒤섞여 있는 카오스
의 장― 짐승들은 거기 삶의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방금 끌려온 황소도
오줌을 질질 깔기며 시원하게 똥을 싼다. 빨간 똥구멍이 이쁘게 벌어지며
검은 것이 칠드럭 땅에 떨어질 순간 그것은 넓적한 개떡처럼 변하며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다 (…) 여기 와서 죽게 되는 소와 돼지는 대개 도수장
주위에 똥을 남긴다”(78). 이렇듯 반복되는 ‘똥’에 대한 진술은 ?분례
기?의 핵심을 구성한다. 강간당하는 날, 시집가는 길 도중에, 매 맞고 미
쳐 집으로 돌아온 후, 똥예는 고비고비 “커다란 늙은 호박 같은”(231) 똥을
눈다. 비체의 이물성과 불결성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양. 똥예는 불결성 그 자체다. 모처럼 얼굴을 씻어내도 “흰 눈에 검은
75) 이문구, 「몽금포타령」, ?창작과비평? 15호, 1969, 6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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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배어 나”(230)오고 오랜만에 머리를 감아도 “구정물이 머리꼬리로 흘
러내”(170)리는 똥예는 썩어 무너져 가는 초가지붕 아래서 자라나고 취할
때마다 오줌을 싸는 시조모와 더불어 살면서 점점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빈곤이 개발-근대화의 기대 속에서 순치되던 시절이다. 그러나 똥예는
개발을 갈망하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존재가 아니며 근대화된 세계를
환영할 만큼 ‘합리적이고 위생적인’ 존재가 아니다. 똥예의 불결성은 개
발 담론으로 순치될 수 없는 노골적인 육체성을 발휘한다. 자포자기와 악
다구니가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똥예의 세계는 개발-성장에 적절한
환경이 아니고, 피(彼)와 아(我)조차 가르지 못하는 그의 의식은 ‘민족’으
로 돌파하기엔 힘겨운 장애다. 무명성(無名性)을 당연시하는 감각 역시 전
체로의 헌신을 설득할 대상이 되기엔 부적절하다. “너절하다면 너절하다
고 할” 삶, 불결성의 그로테스크한 육체 그 자체에 ?분례기?의 정치적 불
온성이 자리했다는 뜻이다. 이청준이 정신주의의 고양으로 ‘개발’을 돌파
하고자 했다면, 방영웅은 상승-초월 욕망 자체의 차단으로 ‘개발’을 봉쇄
하고자 한다. 상승과 하강의 가능성 사이에 찢겨 있던 ‘소시민’을 부정하
는 데 ?분례기?가 유용했던 것 또한 이 맥락에서는 당연하다. 빈곤은 순
치될 수 없는 실존성으로, 계량화할 수 없는 육체성으로 확인될 필요가
있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빈곤은 사회적 기반이 될 수 있었고 「오적」과
「객지」의 이념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잘 이용되기
만 한다면” 저항의 도화선이 되고 공동의 투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객지」의 기대76)는 ?분례기? 위에서, ?분례기?를 잇는 한편 등지는 자
리에서 싹틀 수 있었다.
똥예는 ‘희생’된 것일까? 똥예를 강간했던 용팔은 도살장 앞에 세워진
수혼탑(獸魂塔)을 볼 때마다 지나칠 만큼 흐뭇해하곤 한다. “그것은 장황한
비문도 왜 세운다는 이유도 언제 세웠다는 날짜도 ‘이놈아 너희들을 왜
76) 황석영, 「객지」, ?객지?, 창작과비평사, 1975,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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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먹는지 아니?’ 소나 돼지에 대한 저들의 변명도 없다 (…) ‘수혼탑’이
란 글자 외엔 더 못 쓰지 않았던가”(463). ‘수혼탑’ 석 자만 쓰인 조악한 건
축물이지만 그 탑은 용팔에게 삶의 철리(哲理)를 전해주는 듯 보인다. “때
려잡을 때는 때려잡아야 허구 세워줄 때는 세워줘야 허는 법여”(152). 다
시 「살아가는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빌자면, “그렇다. 우리들은 그렇
게 살아가는 것이다.” 너와 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누
군가 때려잡고 누군가 마지막 배설물을 남기곤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우주의 원시적 리듬에 가깝다. 이 리듬 속에서 살기에 똥예는 자신을 겁
탈한 용팔에게 애착 섞인 감정을 느끼고, 용팔은 사라져 가는 똥예의 뒷
모습에 “똥예야 잘 가라.”는 한마디를 “똥예에게 세워주는 (…) 수혼탑” 삼
아 남긴다(463). 아마 이 리듬의 폭력성이란 설명되고 비판되고 극복되어
야 할 종류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순결한 여성의 희생’을 미적 대상으로
삼아버렸던 1960년대 대중소설 속에서, 또한 ‘여성에 대한 폭력적 유린’
을 통해 남성적 입사를 꾀했던 ?산문시대? 주변의 경향 속에서, ?분례
기?가 ‘수혼탑’으로서 소설의 위치를 가늠하려 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
다. 똥독 속 쥐를 죽어라 내리누르다가 문득 질식할 듯한 압박을 느꼈던
똥예의 생애, “숨이 콱 막혀 온다 (…) 똥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다”(269)라는 외마디 진술을 남긴 똥예의 삶이란 ‘똥’처럼 비루하고 불결
하며, 언어화될 수 없고 해석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몇 마디 새기려 했던
흔적과 더불어 ‘탑’을 통해 애도의 대상이 된다. 개발-성장에 미달하는 생
존 자체의 요구 앞에서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수혼탑
하나는 남을 것이다. 피아(彼我)가 분별되지 않는 미분화의 세계에서나마
애도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305
5. ‘창비’와 ‘문지’의 공통지평― 1960년대라는 동시대성
?분례기?가 비체의 이물성과 불결성을 통해 개발-근대화의 논리에 저
항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석영의 「객지」 같은 소설이 나온 후 ?분례
기?의 위치가 부정되거나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다만 ?분례기?의 미분화된 우주나 그에 대한 ?창작과비평? 편집
진의 열광은 그 자체로 1960년대 후반을 증언하는 바 있다. 4월항쟁이
유예되고 배반당하고 있었으나 최종적인 부정은 미뤄지고 있었던 1960
년대, 개발독재정권에 대한 이의는 아직 조직화되거나 미래를 지향하지
못했다. 대다수 대중이 개발독재에 투항하고 있던 당시 저항은 대학생-
청년층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 사이의 심태(心態)에 머무르고 있었고, 김수
영의 근본주의적 자유 감각이나 서정인․남정현․윤정규 등의 환멸의 알
레고리가 있었지만 문학 역시 대안적 경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청준의 정신주의, 방영웅의 원시주의는 이 시절의 후반부를 지탱하고 있
는 중요한 유산이다. 5․16이 4월항쟁을 계승했다는 서사에 동의하지 않
고 4월항쟁에 기반해 개발독재를 부정한다는 맥락에서, 이청준은 개발과
번영과 근대화를 약속하는 정권에 맞서 ‘허기’의 능력을 실험했으며, 방
영웅은 개발로 순치될 수 없는 ‘불결’의 육체성을 고스란히 전시함으로써
조국근대화의 선전술을 타격했다. 이청준의 경우 4월항쟁을 기억하는 면
모가 직접적인 반면 방영웅의 경우는 모호할 따름이라거나, 이청준이 지
식인적 전략을 구사한 반면 방영웅은 반(反) 지식인적 입지에서 출발했다
는 의견이 가능하겠지만, 이들은 ?산문시대?류의 문학이 그 문제성을 다
한 후 1960년대 후반이라는 혼란한 시기를 함께 버틴 중요한 축이었다.
‘문지’와 ‘창비’라는 1970년대식 명명에 이르면 그 거리는 훨씬 멀어지는
듯 보이지만, 1960년대 후반, 저항은 공통의 연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
이다.
「오적」과 「객지」가 등장한 1970년대, 일찍이 논란을 빚었던 ‘시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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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대신 ‘민족’과 ‘민중’이 새로운 주체로 선언된 후라면 4월항쟁에서
비롯된 공통의 연대는 해체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이청준은 예술적 비의
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고, 「뺑소니사고」(1974)에서 보이듯 ‘단식’과 ‘허
기’에 대해서도 불신을 보이기 시작한다. ‘14년 전’, 그러니까 「뺑소니사
고」가 발표될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4월항쟁이 있었던 1960년, 명망 높
은 야권 인사가 단식 끝에 사망했고 그것이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되,
실제로는 약간의 음식을 섭취하는 기만술이 개재해 있었다는 것이 소설
의 개략인데, 과장을 무릅쓰자면 이 서사는 4월항쟁에 대한 회의를 표백
한 내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밥 굶는 것,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부정한 것 사악한 것 몰아내고 깨끗한 우리 영혼 되찾으려는 싸움입니다
(…) 밥 굶는 것 우리 영혼의 자유 위한 싸움입니다.”77)라고 말했던 숭고
한 지도자, 밥을 굶음으로써 자유를 얻으면 자유를 지킬 신념과 용기도
동시에 얻게 된다고 설파했던 위대한 지도자 역시 ‘부정한 빵’을 먹었다.
그것은 음료수 한 잔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가 단식으로 인해 사
망한 것은 여전히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한 조각 ‘부정한 빵’은 단식과 허
기의 모든 가치를 회의케 한다. 빵을, 육체를, 먹고자 하는 욕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정신은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다수의 삶이 자유에 기반
할 수 있을까?
?당신들의 천국?(1976)이라는 기념비적 저작에 이르면 이청준의 세계
에 있어 ‘단식’과 ‘허기’는 그 문제적 지위를 상실한다. 자유에의 발의와 압
제적 지배 사이, 4월항쟁과 5․16 사이는 훨씬 가깝게 연결된다. 이것을
이청준이 비로소 4월항쟁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획득한 장면이라고 불러
도 좋을 것이다. 1969년 발표한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에서 이청준이
‘쓰지 못했던’ 것은 사실상 1960년 4월과 1961년 5월의 사건 사이 관계에
대한 진술이었다. ‘따로 따로’ 말하는 신문관의 요구 앞에 이준은 말을 잃
77) 이청준, 「뺑소니 사고」, ?가면의 꿈?, 일지사, 1975, b244쪽.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307
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4월항쟁이 자기 서사를 갖지 못했다는 사
실, “4월 혁명에 대한 서사를 ‘기술할 수 없음’이라는 무기력함과 무능력
함, 혹은 강박관념”78)에서 핵심은 4월과 5월을 따로 기술하라는 요구이
며, 그 요구에 응대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4․19 세대’의 산물은 아니지
만 드물게 4월항쟁에서 시작해 5․16 쿠데타 이후로 끝을 맺고 있는 강
신재의 장편 ?오늘과 내일?의 경우, 주인공은 다만 1960년 4월에 느꼈던
현기증을 이듬해 5월에 더 짙게 느낄 뿐이다. 이웃의 몇은 죽었고, 국회
의원 집안이 몰락했고, 경찰인 큰형과 정치깡패인 작은형은 감옥에 가거
나 국토개발단에 동원되었으며, 내로라하던 인사 여럿은 혁명재판에 의
해 며칠 만에 사형당했다. 이것이 4월항쟁에서 5․16 쿠데타 직후까지
벌어진 일이다. 주인공 영택은 휘청이며 생각한다: “사회 전체의 수확만
을 수확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깡패의 두목은 그러므로 잡혀서 멸망하며 기쁨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
다….”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독백 속에서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소
멸뿐이다. “이치가 그렇다면 나는 안심할 수가 있다. 이치가 그렇다 해야
지만 나는 그 많은 학우들의 죽음도 수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윤미의
소멸도 만택형의 처지도….”79)
1960년의 4월항쟁은 무엇을 남겼는가? 널리 유행했던 ‘자유보다 빵’이
라는 수사를 참조하면 1960년대는 ‘자유’가 ‘빵’에 의해 배반당했다는 서
사로 읽히기 쉽다. 5․16 쿠데타 세력이 조성한 개발과 번영에 대한 기대
는 적잖은 대중을 획득했고 나아가 그들이 스스로 주장했던 자유와 민주
주의를 외면하게까지 했다. 산업화의 속도 속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선거의 불공정성도 정치-경제의 독점적 유착도 다수의 저항
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4월항쟁은 어떤 유산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
78) 권명아, 「죽음과의 입맞춤: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사회? 2010
봄, 287쪽.
79) 강신재, ?오늘과 내일?, 을유문화사, 1967, 257쪽.
308 한국문학연구 39집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절 문학은 항쟁을 기억하고 개발독재에
항의하는 예외적인 장소 중 하나였다. 김수영은 혼란을 불가피한 본질로
무릅쓰더라도 자유가 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산문시대? 주변의
작가들은 남성적 폭력성으로 표상되는 개발독재 주변에서 낙오자로서의
위치를 감수했으며, 이청준은 ‘허기’로 방영웅은 ‘불결’로 각각 정권의 근
대화 전략에 맞섰다. ‘자유’ 대 ‘빵’의 토폴로지를 넘어서기보다 거기 지배
당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문학은 4월항쟁 이후 사회적으로 부정당하고
있던 ‘자유’를 유예시키고 보존할 수 있는 장이었다. ‘민족’과 ‘민중’의
1970년대는 그런 계승․유예․보존에 기반해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창작과비평? 대 ?문학과지성?로서 1970년대 지식과 문화의 장을 이분
(二分)시키는 관행은 그 자체 마땅한 근거가 있는 것이겠지만, 그 공통 기
반으로서 1960년대 문학의 정치성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성찰과
연대가 함께 필요한 시절이기에 더욱 그렇다.
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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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문학혁명, 근대화론과의 대결▪권보드래 311
❚ Abstract
Revolution in 1960s' Literature
: April Uprising and the Literary Strategy of
Counter-Development
Kwon, Boduerae
Whereas the list of ‘writers of April 19th generation’ is impressively
long, the number of literary works that are openly connected to the
historical occurrence of April uprising practically approaches zero. The
strategy to settle such an asymmetry has been formed from two
directions: First, the critics who support the value of ‘April uprising
generation’ assert the new horizon of individualism and its literary
refinement through 1960s. Second, the scholars who criticize the passive
and negative aspect of ‘April uprising generation’ tend to underestimate
the ‘1960s literature’ and glorify the ‘1970s literature’ after Hwang
Sǒk-yǒng or Shin Kyǒng-rim. Those two tendencies are told to converge
to so-called ‘Munji[文知: Literature and Intellect]’ ecole and ‘Changbi[創批:
Creation and Criticism]’ ecole respectively, and to function for two oppositional
positions in 1970s intellectual society.
However, I argue that April uprising was the shared basis for both
‘Munji’ and ‘Changbi’ and they were searching for the literary possibility
to defy the developmental dictatorship together. Since April uprising and
May 16 coup-d'état which resulted in a developmental dictatorship regime
were interwoven at the level of people's unconscious desire and
312 한국문학연구 39집
developmental dictatorship were recording high pitch of development
and modernization, the endeavors to remember April uprising as it was
and to express the dissent toward the developmental dictatorship were
relatively isolated and localized. The writers and critics who later became
the members of ‘Munji’ and ‘Changbi’ shared such a condition of
isolation and localization, and explored the unique routes of protest. Yi
Chǒng-jun experimented the elevation of the spiritual over the material
through the literary motif of ‘hunger’, and Bang Yǒng-ung exhibited the
powerlessness of developmental uniformity through the abject life of
‘filthiness’ in the rural area. They were the offsprings of April uprising
alike, and ‘Munji’ and ‘Changbi’ are rooted in this common heritage.
Keyword April uprising, ‘April 19th generation’, May 16 coup-d'état,
developmental dictatorship, ‘Munji[文知: Literature and Intellect]’,
‘Changbi[創批 : Creation and Criticism]’, ‘Sanmin-shidae[散文時代
: The Era of Prose]’, citizen, petit bourgeois, people, Yi Chǒng-jun
Bang Yǒng- ung, ‘hunger’, ‘filth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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