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월남작가의 수기(手記)를 중심으로/정주아.강원대

목차
1. 월남작가의 글쓰기와 ‘증언의 장’
2. (무)소속자의 발화와 언어적 점이지대
3. 증언의 불가능성과 언어의 공백
4. 증인의 자리와 시선의 이동
5. 결론-증언의 형식, 증인의 시선, 그리고 자유


1. 월남작가의 글쓰기와 ‘증언의 장’
이 글은 당초 두 편의 수기, 오영진의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
언(1952)과 박남수의 적치 6년의 북한문단(1952)을 읽으면서 생겨난
회의로부터 시작되었다. 월남민인 두 작가가 펴낸 이 수기는 북한의 정
치 체제 및 문화계 동정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수기는 비단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의 북한의 정치문화사를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출판물로부터 동시대 남한의 정치문화사를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반공주의 사상의 보급이라는 정책에 충실히 부합하는

이 수기들은, 당대 남한 사회를 점유한 매카시즘의 광기와 그 속에서
살아간 ‘적지(敵地) 출신 주민’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수기(手記)
는 자전적 체험의 기록인 이상, 그 기록된 내용의 진실성이나 기록자의
진정성 등을 담보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여기에, 오영진이 그러
했듯이, 법적 용어를 차용하여 증언(證言)이라는 의미를 덧붙인다면, 사
적 체험의 진실성(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공적인 담론장(場)의 시선까
지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배가된다. 그러나 이 수기가 집필되고 유통
되기까지 배후 요인의 간섭을 고려한다면, 이 ‘증언에의 의지’로 충만
한 글들은 어디까지 ‘그들의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을까.
1950년을 전후하여, 구체적으로는 단독정부의 성립 이후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한국문단에서 특수하게 부각되는 현상이 바로 이러한
‘수기류’의 범람이다.1 한국전쟁기 문학장의 성격을 반공텍스트의 분석
을 통해 해명해내고 있는 한 연구자는, 수기류 범람 현상의 원인과 의
미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체험기, 수난기, 피난기,
종군기 등은 당대 공산주의 담론을 ‘증언’과 ‘고백’이라는 환멸의 언어
로 대중에게 보급시켰으며, 나아가 이러한 글쓰기는 좌우익을 막론하
고 문인들에게 “고해성사의 장”을 열어주어 결과적으로 당대의 지배적
이념 담론 형성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2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사태를 적확하게 제시한 서술이지만, 다음 논의와의 연결을 위
해 전후맥락을 좀 더 부연해보기로 하자. 이들 수기는 해방 후 적치(赤
治) 기간의 북한 체류기, 한국전쟁 종군기, 서울 수복 이전 ‘잔류파’의 생


1 예컨대 한국전쟁기 문학담론 연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는 한국전쟁기 문학․수
기․제도 자료집(영인북, 2010)의 목차를 참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총 18권으로 구성
된 이 자료집은 사병문고, 전시(戰時) 한국문학선, 전선시첩, 승리를 향하여-
전우위문문집 등 전시 종군문학선을 포함하여 혈화(血火)의 전선, 고난의 90일
등 개인의 종군기나 적치의 체험을 토대로 한 단행본을 망라한다.
2 서동수, 「반공텍스트 혹은 고백의 정치학」, 한국전쟁기 문학담론과 반공프로젝트,
소명출판, 2012, 38~46쪽 참조. 직접 인용한 구문은 41쪽.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11


존기 등 다양한 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나, 관제 선전 문학의 성격을 띤
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이들 종군기, 생존기, 체험기 등의 각종
수기류가 어떤 배경에서 산출되었으며 어떤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
인가에 대해, 다음처럼 명료하게 그 대답을 알려주는 발언도 없다.
끝으로 筆者는 共黨의 南侵禍亂中 自身이 犯하였던 過誤를 부끄럽게 생각하
며, 또한 이것을 敎訓으로 삼아 當局의 實典을 감사하면서 今後 一路 打共戰線
에 全力을 바칠 것을 맹서한다.3
적치 서울에 잔류하는 동안 문학동맹 인사들과 접촉했던 양주동은
수복 당시 자신의 체험에 대해 기록한 말미에 위와 같은 문장을 덧붙였
다. ‘나는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이후부터 타공전선에 전력을 바칠 것
을 맹세한다.’ 실상 이 문장은 덧붙임이 아니라 이 체험기의 요체에 해
당한다. 자기변호와 더불어 반공주의자임을 대외적으로 표명하는 이
문장을 적기 위해 그는 몇 장에 걸쳐 체험기 아닌 체험기, 사실상의 반
성문을 써낸 것이다. 이 글쓰기의 목적은 물론 이념적인 결백성, 체제
에의 충성도를 입증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화자의 발화가 독자를 향
하는 것이 의사소통 이론에 등장하는 원론적 소통방식이라면, 그의 발
화는 일반 독자를 상정하되 실상은 관제 통치 권력의 눈과 귀를 향한
채 이루어진다. 이는 당대의 사상 통제가 만들어낸 내부 검열 기제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사례라 보아도 좋겠다.4 사상 통제는 한편으로


3 양주동, 「共亂의 敎訓」, 赤禍三朔九人集, 국제보도연맹, 1951, 17쪽.
양주동은 1949년 4월에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에서 문화 영역을 담당한 문화실의 책임
자였다. 그의 잔류 체험기는 ‘책임자이므로 / 책임자임에도’라는 차원이 모두 고려되
어 읽혀야 한다. 요컨대 개인의 차원에서 당대 국가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피해
나갈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4 해방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 체제의 강화가 당대 문학텍스트에 끼친 영향 관계를 테마
로 한 논문집으로는 한국 현대문학의 정치적 내면화(상허학회, 2007)를 참조. 특히
12 상허학보 48집, 2016


는 ‘내부자’를 선별하고 결속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전’이자 ‘선전력(宣傳力)’으로5 적과의 싸움을 치른다는 측면에서 수
행된다. 적과의 대치 상황을 전제하는 한 이러한 논리는 언제나 유효
하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집단의 생존을 담보로 잡고 있는 것이기 때
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때 수기란, 집단 생존의 논리 앞에 위기에 처한
‘부역혐의자’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이념적 방어막으로 기능한다.
기실, 1950년대 전후 문학장에 생존을 위해 ‘고해성사’를 하도록 강
요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논문의 출발점이 된 두 편의 텍스트가 1952년에 나란히 간행된 것은 우
연이 아니다. 이 두 편의 수기는 1951년 3월, 대북 사상전을 염두에 두
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문교부 산하에 조직된 국민사상지도원의 기획
아래 출판된 것이다. 이 조직의 수장이었던 백낙준이나 실무자인 장준
하는 월남한 서북 계열 민족주의자라는 점에서, 문화예술 분야에 넓은
인맥을 보유했던 오영진과 같은 그룹에 속해있다.6 이렇듯 월남작가군
의 글쓰기는 대북 정치의 최전선, 즉 정치적 장 속에서 조금도 자유로
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정치적․문화제도적인 상황
을 고려하여 월남작가 집단의 문학사적 평가 문제를 수행하고자 할 때
생겨난다. 언뜻 보면, 사상 통제의 서슬 퍼런 위협 하에서 생존을 담보


본 논문에서는 오영진과 김이석의 작품에 드러난 국가 반공주의의 영향력을 분석한
남원진, 「역사를 문학으로 번역하기 그리고 반공 내셔널리즘」(같은 책, 37~70쪽), 보
수우익언론에 의한 냉전적 반공주의의 전유 양상 및 국가주의적 반공담론의 작동 구
조에 대한 일반론에 대해서는 이봉범 「검열의 내면화와 그 정치적 발현」(같은 책, 141
~173쪽); 「반공주의와 검열 그리고 문학」(상허학보 15, 상허학회, 2005, 49~98쪽)을
참조하였다.
5 김광섭, 「현대전과 사상전」, 전선문학-「문학」전시판, 1950, 6쪽; 김종문, 「전쟁과
선전」, 같은 책, 10쪽.
6 이승만 정권하 국민사상지도원의 역할 및 기관지인 사상, 이들이 구상한 ‘운동’으로
서의 사상의 보급 기획에 대한 논의는 공임순, 「사상‘운동’과 사상의 생활윤리화」(서
강인문논총 35,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2012, 33~81쪽) 참조.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13


로 글쓰기를 수행한 월남작가들은 체제의 희생양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월남작가들은 당대 관제 문학을 제도로서 성립시
키고 대북 사상전에 적극 협력하여 국가주의 반공이념이 전형화되고
보급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즉, 이들이 곧 제도의 주인이자 제도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목적문학의 도구로 자신을 내놓
은 월남작가들은, 인간적으로 동정할 수는 있으되 적어도 글쓰기에 있
어서는 비윤리적인 집단이라 보아야 하는가? 해방 이후에서 한국전쟁
기에 이르는 이데올로기적 침윤의 시공간, 그 중 특히 국가주의 반공이
념의 보급과 강화라는 국면에 관여한 관제 글쓰기에 어떻게 접근할 것
인가라는 문제는 이처럼 까다롭다. 반공문학의 담론과 제도로서의 문
학장이라는 사태에 그 글쓰기를 수행한 ‘작가’를 개입시키려고 시도한
다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수기류’가 새삼 문제적인 이유는, 이 글들이 글쓰기의 자발
성과 비자발성이 미묘하게 겹쳐진 월남작가의 존재 방식을 노골적으
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전유의 장 속에 포섭될 운명인 것
을 알면서도 일인칭의 자전적인 체험을 담은 글쓰기를 써내야 한다는
것, 이는 가령 사소설(私小說)이라는 의장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허구적인
장치도 없이 글쓰기와 정치가 만나는 영역에서 나타나는 욕망과 환멸
을 외설적으로 드러내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관제 문학의 장
에서 하필 자전적인 체험의 진정성을 그 본질로 삼는 유형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장면에서야말로, 이들 월남작가 집단의 글쓰기
윤리와 작가로서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끌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에서는 남한 사회에서 월남작가 집단이 처했던 특수한 존재방
식을 ‘정치적 난민’이라 명명하고, 그로부터 그들이 당면했던 언어적
조건의 특수성들을 끌어내고 있다. 월남작가의 존재 방식과 언어적 조
건을 연결함으로써(2절), 우선 이들의 주체적 글쓰기가 불가능했던 이


14 상허학보 48집, 2016


유를 되짚어 보고(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주체성을 찾는다
면 어떤 지점에서 가능할 것인지를 논의한다(4절). 하필, 시대적 증인으
로서의 월남작가의 글쓰기가 갖는 윤리성․주체성의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난민’으로서의 존재방식을 연결시키려는 이유는 비교적 명
료하다. 하나는 이들이 어쨌든 이북과 이남을 관통하여 이동한, 당시
로서는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야가 가장 넓었던 존재들이었다는 점이
다. 즉, 증인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집단이었다. 다른 하나는, 먼
저 제시한 이유와 연결되는 것으로, 이들이 증인으로서는 최적의 자격
을 갖춘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인으로서의 역할 수행이 불가능
했다는 점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성립시키는 각 조건들, 그러니까 증
언자로서의 자격 얻기, 증언의 수행, 증언의 불능 등을 설명하는 것, 나
아가 이 실패(불능)와 ‘작가’라는 존재를 연결시키는 대목으로부터 언어
적 존재로서의 월남작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보았
기 때문이다. 우선 다음 절에서는 월남작가의 ‘정치적 난민’으로서의 존
재방식과 그들이 당면했던 언어적 조건부터 짚어보기로 한다.


2. (무)소속자의 발화와 언어적 점이지대
수기류를 써낸 작가들의 생애나 작품을 검토하는 경우 연구자들이
흔히 부딪치게 되는 난관이 있다. 가령 시인 구상과 소설가 최태응이
써놓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자.
내가 내디딘 서울은/ 꿀꿀이죽처럼 질퍽하고/ 역했다.
모두가 미친 듯이 자유를/ 구가했지만/ 나는 거대한 기중기에게 뒷덜미를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15


/ 잡힌 느낌이었다.
자금성으로 달리던 풋꿈이 깨지자/ 나는 우익지(右翼紙)의 기자가 되어/
마치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휘하의/ 의용병으로 자처했다.7
형도 아시다시피 월남5년 공산대역(共産大逆)질이란 모조리 쫓아다니며 한
제가 아닙니까. 군 정보국이란 나의 생리와는 얼도당토않은 데를 들어가 대북
지하신문 <봉화>, <북한특보> 등 제작을 비롯해 첩자문서 연락, 귀순공작, CIC
정보수, 국방부 기관지 주간 등 세칭 국방부 파요 권력기관의 졸도(卒徒)로 붙
어먹는다는 인간성의 손가락을 받으면서도 환향(還鄕)이라는 이것 때문에 오
직 적개심에 불탔던 것입니다.8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기울이기로는 되려 어느 공무원보다 못지않았으되
수입이라고는 바랄 수도 없는 오로지 반공과 멸공이면 그만일 단체일을 위해
서 그는 태반의 세월을 이름도 말도 없이 동분서주한 것이다.9
주지하듯 시인 구상은 북한의 원산문학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
(1946)으로 인해 필화사건을 겪고 월남했다.10 그는 연합신문 기자를
비롯하여 육군 정보국 촉탁위원, 종군작가단 부단장 등 관변 조직에 몸
담으면서, 각종 반공칼럼 및 에세이를 써냈다. 이후 1984년 그는 자신


7 구상,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984), 구상문학총서 1-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홍성사, 2008, 28쪽. 월남 직후 중국유학이 좌절된 이후 우익 언론지와 정보 단체에 관
여하게 되던 시기에 관한 회상이다.
8 구상, 「정화여난(政禍餘難)-설창수 형께 부치는 글발」(1953), 구상문학총서 7-민주
고발, 홍성사, 2008, 116쪽.
9 최태응, 「무엇을 할 것인가」(1956), 최태응 문학전집 2, 태학사, 1996, 404쪽.
10 1946년 12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원산문학동맹’의 단체명으로 출판된 시집인 응
향에 대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가 그 반동성을 비판하고 나선 사
건으로 해방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알려져 있다.
16 상허학보 48집, 2016


의 삶을 주제로 삼은 연작시에서, ‘우익지의 기자’로 독재 정권의 ‘의용
병’ 노릇을 했던 자신을 조소한다. 이런 회의는 굳이 시간이 가면서 생
겨난 것은 아닌 듯하다. 이미 한국전쟁기에 발표된 사회평론집 민주
고발(1953)에 실린 한 글에서, 그는 자신이 ‘월남 5년 동안에 공산대역
질’을 하느라 자신의 생리와 맞지도 않는 군 정보국 등을 전전했음을
하소연하듯 적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최태응 역시 구상과 유사한 언
급을 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반공과 멸공이면 그만일 단체일’을 위해
태반의 세월을 흘려보낸 일을 자조적으로 회상하고 있다.
비단 구상뿐만 아니라 월남작가들은 1950년대 반공 담론의 강화에
일조한 집단들이다. 한국전쟁기 문총구국대, 종군작가단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당시 발행된 전시판(戰時版) 잡지나 단행본에 종군기, 북한 체
제에 대한 증언 등을 수록했다. 물론 이러한 단체 활동 및 집필 방향은
국방부 정훈국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그만큼 이들이 써낸 글들은 전
후방을 아울러 ‘반공주의’를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앞
선 사례들에서 살폈듯, ‘반공주의자’를 자처했던 행적과는 달리, 이들
은 당대 자신이 관여했던 단체라든가 당시 써냈던 글에서 자신을 종종
분리시키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는 맞는 일이 아니었다’며, 마치
자의가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식의 태도는 월남작가 연구를 곤혹스럽
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로써 이들이 써낸 체제 관련 증언과 고백의 위
상은 물론 글쓰기의 동기 자체가 모두 모호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정치적 협조를 강요한 당대 국가주의의 폭력성
으로부터 설명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또 다른
의문에 마주치게 된다. 어울리지 않는 일에 참여했다 말하고 그런 일
에 동원된 자신을 조소하는 태도로 바라보면서도, 이들이 ‘너무 열심히’
적극적으로 선전문학의 장을 만들고 글을 써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
니까, 월남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전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17


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당시 문인들이 작품 창
작과 함께 체험담(수기류-인용자)의 발표에도 많은 시간과 양 그리고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이다. 왜 문인들은 이처럼 비문학적 영역에 많은
공을 들여야 했을까?”11 이 질문을 던진 연구자는, 그 이유를 ‘반공이 아
니면 죽음이라는 현실’에서 찾는다. ‘반공의 철저성’이 고백의 양에 비
례하기에 직접적으로 체험을 토로하는 수기류의 창작에 절박하게 몰
두했다는 것이다.12 문학작품이나 수기류뿐만 아니라 월남작가들이 시
사만평, 인터뷰 등을 통해 북한 체제를 성토하고 반공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드시 선전문학에 복무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반공’은 이들의 삶과 글쓰기를 지배하는 이데올
로기적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반공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체제적
억압은 중요한 외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있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사태, 즉 ‘너무 열심
히’ 선전문학의 장을 만드는 데 복무한다는 사안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
는다. 이들의 글쓰기에는 아무래도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라거나 수동
적 협력이라는 측면만으로 해석하는 경우 이해하기 힘든 적극성이 수
반되어 있다.
이렇듯 선전문학에 참여하고 있는 월남작가들의 적극성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당대 남한이라는 공간에서 월남민들의 존재론적 위상
이 안고 있었던 모순과 관련되어 있다. 월남민들이 법적으로 대한민국
의 국민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960년~1962년 사이에 이북의 원적지
와는 별도로 가호적이 발급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월남 이후부터


11 서동수, 앞의 글, 44~45쪽.
12 위의 글, 45쪽.
서동수는 남한에서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반공주의자임을 천명했던 조건을 감
안했을 때, 당시 문인들이 써낸 ‘고백이나 고해성사로서의 글쓰기’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43쪽).
18 상허학보 48집, 2016


가호적 발급 이전까지 월남민들은 사실상 ‘전쟁 난민’으로서 남한에 임
시로 체류하는 집단으로 존재했던 셈이다. 아울러, 이들을 정치적인 ‘난
민’으로 몰아간 원인은 비단 호적법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
려 당대 월남민의 위상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선언한 영토
개념의 행정적 구현 과정을 들여다보는 경우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건국헌법조항에
따르자면, 군사분계선 이북의 영토는 괴뢰 집단이 불법으로 점거한 땅
이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이북오도청’을 설립하고, 이북5도
의 도지사 및 이하 주요 공직자를 임명한다. ‘이북오도청’은 당초 민간
단체로 출발하여 월남민의 관리 업무를 담당하다가 1962년 법제화되
어 ‘미수복’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게 된다. 즉 실제로 한반도의 이남에
한정된 영토를 대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국가가, 한반도 이북까지
를 포함한 민족 단위로 국민을 편성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형국인 것이
다. 호적법과 이북오도청의 법제화는 공통적으로 실제적 통치 공간과
관념적 통치 공간이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발생하는 공간성의 왜곡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로써 우리는 실제 통치와 관념 통치가 서로 분리
되어 모순성을 내포한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 월남민들의 처지에 근본
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과연 월남민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인가. ‘두 개의 국경’, 즉 휴전선
이북까지를 자국 영토로 포함하고 휴전선 이남의 국민을 통제해야 하
는 분단국 정부가 안고 있는 딜레마에 의해, 월남민들은 ‘이중소속자’
라는 운명을 떠안게 된다. 그들은 미수복 영토의 주민이며, 군사분계
선 이남의 국민이다. ‘국경 밖의 이방인’이자 동시에 ‘국경 안의 국민’이
라는 이중적 존재 방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무소속의 방식으로 내
부에 소속되어 있는 모순성을 내재한 존재들, (무)소속의 상태라 부를
만한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이때 ‘국경 밖의 이방인’이라는 위상이 곧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19


‘적지(敵地)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국민’으
로서 이들의 지위는 언제든 내부의 적으로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 요
컨대 월남민은 전란으로 인해 거주지를 떠난 전재 난민이라는 집단 정
체성 외에도, 표면적으로 정착을 인정받았으나 정치 논리에 따라 사실
상 정착이 보류된 상태인 ‘정치적 난민’으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13
반공주의, 즉 ‘멸공’을 향한 맹목적 의지는 비단 대한민국 정부만의
지향점이 아니었다. 헌법이 정한 ‘통치령(領)’의 관념과 실제 통치 영토
가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하는 존재론적 모순을 떠안은 월남민들
에게도, 반공주의는 두 공간의 충돌을 해결할 유일한 출구였다. 분단
상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들은 영원히 정치적 난민의 처지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치적 역량을 끌어 모아 한반도
의 통일을 이끌어내는 것, 이로써 관념상의 영토와 현실적 영토가 서로
분리되어 생겨나는 모순된 공간을 탈출하는 것만이 정치적 난민 상태
를 끝내는 해결책이다. 이는 종군작가의 도구적 역할에 대한 조소와는
별도로, 종군작가 집단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전쟁담론의 생산에 나
섰던 월남작가 집단의 이중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월남작가들에게 반공주의는, 남한에 머무는 이상 ‘내부의 적’으로 취급
받게 되어있는 구조적인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다. 이 경우 반
공주의는 일차적으로는 신변의 안위를 보존하려는 호신책이자 동시에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민족주의 담론의 대의로도 연결된다. 이에 월남


13 이상 ‘정치적 난민’으로서의 월남민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내용들(호적법 및 이북오
도청에 관한 법적 전거, ‘두 개의 국경’ 상태에서 유래된 이중소속의 모순, 이중소속자
로서 떠안게 된 내부 배제의 가능성과 사실상의 정착 보류 상태 등) 일체는, 이후에 서
술될 월남민과 언어적 조건에 대한 논의를 위해 불가피하게 필자의 두 편의 논문에서
발췌․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각 논문의 제목 및 게재 지면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국경과 이동의 딜레마」, 한국현대문학연구 37, 한국현대문학회, 2012; 「‘정치적 난민’
의 공간 감각, 월남작가와 월경의 체험」, 한국근대문학연구 31, 한국근대문학회, 2015.
20 상허학보 48집, 2016


문인들은 관제 문인이라는 자의식을 되씹으면서도 반공담론의 생산에
‘너무 열심히’ 헌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 대부분이 이
북에 가족을 두고 월남한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반공주의’나
‘민족통일’이라는 담론이 약화되고 대오가 해체되는 상황이 더 문제가
된다. 반공주의는 이들에게 있어 적극적인 자기구제의 방편이다. 이것
이 월남작가들을 반공주의 담론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자리로 나아가도
록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월남작가들을 정치적 난민이라는 존재로 이해한다든가, 반공
주의 담론의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전유의 맥락을 살핀다고 해서, 한국
전쟁기의 역사적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이들은 관제 반공
주의가 만든 증언의 장에 참여했고, 글쓰기의 결과물들은 반공주의 이
념을 확대․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어쩌면 국가적 강요에 의해
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반공주의를 주장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말
하는 순간에, 오히려 이들 월남작가들로부터 국가폭력에의 희생양이라
든가 수동적인 협력자였다는 변명마저 빼앗은 셈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들의 자발적 의지를 상정하는 경우, 도리어 공고한 반공주
의 담론의 장에 틈새가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익지’, ‘의용병’,
‘권력기관의 졸도(卒徒)’, ‘반공이나 멸공이면 그만일 단체일’ 등의 발언
들은, 국가가 기획한 획일적인 증언의 틀을 조소하는 것과 반공주의를
향한 자발적인 글쓰기의 의지가 별도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실마리
이다. 개인적으로 반공주의를 신봉한다 하더라도, 그 글을 관제 문학의
틀에 기입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의지는 무기력하게 소거되고 만다는
상황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참여했던 ‘증언의 장’과 그 속에서
수행된 ‘증언’에 대해서는, 그 발언 내용의 진실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
니라 발화의 자유문제를 먼저 물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론적 불안정성
을 해결할 출구로서 반공주의가 있지만, 반공주의 이념의 구현을 위해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21


현실에 마련된 공론장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 월남작가들은 공론
장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주인이 아니다. 작가들이 도구적 글쓰기
에의 헌신을 자조하며 되씹고 있는 현상의 본질은, 증언 행위 자체에
대한 회의에 있다기보다, 그 발화가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형식’으
로 기계적으로 발화되었음에 있다. 요컨대, 증언자로서의 단독성이 사
라진 채 단순한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본래 증언
의 의지와 열정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것을 일단 보류해야 증인으로서
증언의 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증언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증언의 장에 안착할 수 없었다는 점에
서, 이들의 언어적 조건은 (무)소속자라는 그들의 모순된 존재 방식과
겹쳐진다. 표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되, 정착이 보류된 채 사상
적 순결성을 감시 받는 존재였다는 저간의 사정과 유사한 것이다. 휴
전선 이북의 ‘적’을 의식할 때에만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다. 그
러나 대한민국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이들 ‘이방인’들의 위상은 불분명
해진다. 때문에 월남작가들이 써낸 반공주의 수기들은, ‘적’은 분명하
지만 ‘우리’는 없다는 상황을 공통적인 난제로 안고 있다. 적이 있는 것
은 분명하나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우리’의 정체, 발화의 주인이 누구
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공’이라는 대의를 공유할지는 몰라도, 이를 주
장하는 단독자로서의 작가들이 정착할 안정된 진영, 즉 ‘증언의 자리’
가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남작가들이 마주친 언어적 딜레마, 다시 말해 증언을 하고자 하지
만 그 의지를 소거해야 증언의 장에 편입될 수 있었다거나, ‘우리’라는
집단을 전제하고 ‘적’을 성토하지만 정작 ‘우리’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곤경은 무엇보다 한반도라는 이념적 공간이
만들어낸 언어적 환경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공간의 이동은 응당 언어
적 조건의 변화를 만든다. 서로 상반된 이데올로기가 다투는 공간임에


22 상허학보 48집, 2016


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공간의 이동에서 이념적 착종과 억압이 생겨나
고 그와 동시에 언어에도 통제와 구속이 따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월
남작가들이 편입된 남한의 언어적 환경을 일컬어 ‘언어적 점이지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개념을 인용하여 만들어
낸 은유만은 아니다. 그것은 국민이자 이방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방인도 국민도 아닌 (무)소속의 존재들이 놓여 있었던 언어적인 조건,
즉 이념적 공간에서 언어를 발화하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해석적
인 억압의 구조를 가리킨다. 남한 사회에 머무르는 이상, 이들은 언제
나 서로 대치 중인 남북의 두 공간이 겹쳐져 만들어진 ‘언어적 점이지
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하의 두 장에서는 박남수와 오영진의 수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이들이 체험한 언어적 점이지대의 성격을 ‘증언의
장’과 ‘언어의 공백’이라는 주제를 통해 구체화해보기로 한다.


3. 증언의 불가능성과 언어의 공백
박남수(1918~1994)는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赤治6年의 北韓文壇
이라는 수기를 출판했다.14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박남수가 아
닌 ‘현수(玄秀)’라는 가명으로 이 수기를 냈다. 이 수기가 발굴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당대 증언의 장과 그 속에서 월남작가가 당면했던 언어적
조건을 보여주는 사례로 유용하다. 이 수기는 1952년 발간된 이래, 1992
14 오영진의 소군정하의 북한과 현수의 적치 6년의 북한문단은 모두 1952년 한국전
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국민사상지도원에 의해 발행되었다. 이후 소군정하의 북한
은 1983년 중앙문화사에서, 적치6년의 북한문단은 1999년 보고사에서 재판되었다.
본 논문의 인용과 면수는 재판본을 따른다.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23
년 한 문학잡지에서 수기의 일부 내용이 발췌되면서 편집자에 의해 필
자가 박남수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다.15 그러나 그 이후에
도 필자의 정체를 둘러싸고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혼란이 계
속되었다.16 이는 무엇보다도 박남수 자신이 철저히 침묵했기 때문이
다. 수기의 서문을 쓴 인물이 1952년 당시 박남수와 함께 잡지 문학예
술을 주재했던 오영진이었다는 점에서, 박남수가 필자라는 사실은 거
의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국전쟁기에 발간된
수기의 필자 찾기 소동이 갖는 의미는 ‘과연 현수가 박남수인가’라는 진
위 여부를 밝히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적치 6년의 북한문단은, 필
자가 박남수라 말하는 이는 존재하지만 정작 저자인 박남수는 자신의
책이라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는 이상한 출판물이다. 자기 체험을 바
탕으로 증언을 기록한 집필 당사자는 침묵하는 가운데, 남들이 그의 저
서임이 틀림없다고 증언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 심지어 이런 혼란은
수기의 필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행방불명되었다거나 고인이 아닌 상태
에서 지속되었다.
적치6년의 북한문단의 저자 현수는 북한의 정치와 문학의 유착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시인들에게 행사용 시를 써내라고 강요하는 체제
의 야만성, “지옥과 같은 공산정권에 진절머리”를 내고 월남하는 사람
들, “‘정치보위국’의 보이지 않는 감시”하에 “글 쓰는 자유만이 아니라
글을 쓰지 않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작가들의 처지를 폭로한다.17 그의
15 「제76차 문학사상 자료발굴 / 북한시인 김조규」, 문학사상, 1992.
16 다음과 같은 일화는 이 익명의 수기를 둘러싼 혼란을 말해준다. 적치6년의 북한문
단을 자신의 논문과 엮어 재출간한 편저자인 우대식은, 1995년 학위논문을 준비하면
서 자료를 발견했으며 김조규 시인의 동생인 김태규에 의해 이 책의 저자가 박남수라
는 확인을 받았다고 적었다. 박남수 시인이 미국에서 별세한 것이 1994년이므로 저자
로부터 직접 확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인이 작고한 후인1998년에, 박남수의 문단
동료와 제자들은 이 자료를 포함하여 박남수 전집을 엮고 저자의 약력에도 포함시
켰다.
24 상허학보 48집, 2016
수기는 당대 전형적인 반공수기에 해당한다. 이렇듯 적극적인 증언은
월남민에게 있어서는 체제 내에서의 생존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과도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라는 이명(異名)이 사용되어야 했
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오영진이 밝혀놓은 서문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이북에서도 공산당의 선전기관인 「문예총」의 맹원으로 그의 소위 「과
업시」도 쓰고 가급 평범하려는 하나의 지식인으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무의
식의 생활을 살아왔다. 그는 그들이 강요하는대로 약간의 집필로 문책을 메꾸
면서도 자기의 주변을 청명히 구획했고 냉철한 이성으로 생활을 관조했던 것
이다.18
오영진은 이 수기의 저자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맹원으로 어
쩔 수 없이 ‘과업시’를 써내야만 했던 인물임을 밝혔다. 앞서 인용에서
저자인 현수는 당국으로부터 창작 지침을 내려 받아 “「과업시」, 「행사
시」, 「뼈다귀시」”를 써내는 북한 문단의 풍토를 냉소하고 있는데, 실상
그 냉소의 대상에는 시인 박남수 자신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다.19 해방 직후에 월남한 작가 집단에 비해서, 한국전쟁 이후인 1․4
후퇴기에 월남한 작가군은 ‘적치하’에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전자의 집
단에 비해 이념적 순도를 의심 받게 된다. 실제로 북한에서 ‘과업시’를
창작했던 박남수는 소위 ‘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힌 인물이었고, 이에 수
17 현수, 적치 6년의 북한문단, 보고사, 1999, 68~69쪽.
18 오영진, 「序」, 위의 책, 33쪽.
19 실제로 박남수가 북한에서 2편의 노래 가사와 11편의 시, 총 13편의 ‘과업시(작품)’를
써낸 사실이 한 연구자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장만호, 「박남수론 : 한 문인의 이력
과 ‘순수’의 이면-수기와 전집 미수록 시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32, 한국시학
회, 2011).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25
기를 출판하면서 신변상의 문제가 공론화된다는 점을 꺼렸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밝혀야 하는 지면에서는 언제나 ‘해방 직전에는 문
단과의 관계를 끊고 살았으며 은행일로 생업을 유지했다. 그리고 월남
이후 다시 창작에 몰두했다’고 말하고 있다.20
박남수의 침묵을 통해, 1950년대 전후 증언의 장과 증인의 성격을
생각해보자. 책 한 권에 이르는 수기는 온전히 그의 수작업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다. 책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과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 대한 온전한 기록은 없는 셈이다. 말하자면, ‘나’는 없고 ‘나’가
놓일 자리를 침묵이 대신하는 셈이다. 증인의 자리에 앉았으되 그로서
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인에게 ‘적치 6년’간은 한
편으로는 침묵해야만 하는 시간이면서, 이와 동시에 “내가 해야 할 하
나의 임무”로서 공산주의를 고발하는 ‘증언의 시간’이라는 모순적인 위
상을 갖는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을 대체할 이명(異名)의 존재인 현수를
내세운다. 증인의 자리에 앉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앉힌다. 증
언의 장에서도 진짜 증언은 발설되지 않는다. 이른바 증언이 넘쳐나는
가운데, 증언의 공백이 생겨나는 것이다.
김이석과 구상이 얽힌 응향 사건의 전말 또한 박남수의 수기처럼
뒤늦게 퍼즐이 맞추어진 경우에 해당한다. 해방 이후 월남에 이르기까
지 김이석의 행적은 그리 분명하지는 않으며 몇몇 단편적인 일화가 전
해질 뿐이다.21 해방 이후에 평양에 남았던 그는 1․4후퇴기에 월남했
20 최연홍, 「미국으로 날아간 <새>」(박남수와의 대담), 박남수 전집 2, 한양대 출판부,
1998, 111쪽.
“해방이 되었다. 그는 식산은행(해방 후 산업은행)에 일하고 있었고, 3․8선이 그어진
후에도 은행 관계의 일로 서울에 와 해방 후의 혼란한 서울을 보았다. 그에게 고향(평
양)을 떠나기는 어려웠다. 그는 지금도 평양의 사투리, 억양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김
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비당원으로 계속 은행에서 일했다.”
21 해방 이전 평양 광성중학 졸업생 중심의 동인지 단층(1937)을 발간하고, 동아일보
에 단편 「부어」(1938)로 입선하면서 문인의 꿈을 키웠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
26 상허학보 48집, 2016
다. 당시 김이석의 문단 내 입지에 대해서, 박남수는 ‘북의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강압으로 최소한도의 집필밖에 하지 않
던 그룹’이자 ‘그 재능을 인정하고 북한문단이 경계와 함께 흡수공작을
계속’하고 있던 ‘무소속파’에 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22 박남수의 기
록에는 ‘문예총’ 기관지인 문학예술을 편집하던 안함광이 ‘무소속파’
였던 김이석에게 작품 창작을 강요했다는 일화가 전하고,23 원응서는
김이석이 ‘문예총’의 강요에 못 이겨 「소」라는 희곡을 창작했으나 반동
적이라하여 상연이 금지된 적이 있다고 회고한다.24 이상의 정황은 김
이석이 북한문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월남하게 되는 맥락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1964년 김이석이 별세한 이후, 시인
구상은 그의 재북 시절 일화를 하나 더 털어놓는다. 이는 구상이 월남
하는 계기가 되었던 시집 응향의 필화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元山 현장에 온 검열원들은 당시 北韓 文壇의 巨物들로서 崔明翊, 金史良, 宋
影, 그리고 1․4후퇴에 월남하여 나의 친구가 되었다가 작고한 金利錫씨(그가
별세하기 전까지 나는 이 사실을 發說하지 않았다) 이렇게 4명이었는데 그 첫
모임에서는 宋影이 殺氣등등한 어조로 <北韓文藝總>이 시집 <凝香>을 斷罪하
게 된 소위 보고연설이 있었다.25
실이다. 김이석의 연보는 변혜원, 「김이석 소설연구」(숙명여대 석사논문, 1985)를 기
초로, 최근 출판된 김이석 소설 선집(이태동 편, 현대문학, 2012)을 종합한 것이다.
22 현수, 앞의 책, 105쪽.
박남수는 당시 북한문단을 ‘쏘련파’, ‘구카프파’, ‘월북파’, ‘무소속파’로 나누고, 소련파가
가장 큰 세력이고 북한문단 초창기에는 구카프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고 보았다.
23 위의 책, 112~113쪽.
24 원응서, 「늘 웃던 얼굴-김이석 형을 보내며」, 동아일보, 1964.9.22.
25 구상, 「시집 응향 필화사건 전말기」(1974), 구상문학선, 성바오로출판사, 1975, 405쪽.
이 글은 본래 1974년 7월 심상에 실렸던 것을 구상문학선을 엮으며 재수록한 것이
다. 2002년에 발간된 구상전집에도 일부 표현이나 문장을 다듬어서 실은 것을 볼 수
있다.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27
주지하듯 응향 사건이란, 1946년 12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원
산문학동맹’의 단체명으로 출판된 시집인 응향에 대해 ‘북조선문학
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가 그 반동성을 비판하고 나선 사건으로
해방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알려져 있다.26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 자리매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집 응향은 원본이 전하
지 않는다. 이에 시집의 내용이라든가 필화 사건 개요에 관한 재구는
당사자들의 증언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앞서 인용문에서 구상
은 원산에 파견된 검열관의 이름을 나열하며 김이석에 대해서는 “나의
친구가 되었던” 사람이라 적고, 그가 검열관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별
세하기 전까지는 발설하지 않았다’고 부연한다. 그의 말은 아마도 사실
인 듯하다. 필자가 검토한 범위 내에서, 응향 사건에 대한 기록 및 연구
의 기초 자료는 북문예총 기관지인 문화전선(1947.2)에 수록된 회의
결정서와27 응향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에 기대고 있다. 회의 결정서에
는 검열관을 파견한다는 대책이 쓰여 있을 뿐 누구를 보낼 것인지에 대
한 언급은 없다. 그러므로 사건의 구체적 진행 상황에 대한 정보는 증
언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구상 이외에 응향 사건을 증
언한 인물은 1․4후퇴 때에 월남한 시인 강홍운으로, 그 역시 김이석의
이름은 기입하지 않았다.28
26 응향 사건의 원인 및 의의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원인으로는 북로
당 중심의 권력 구도 강화, 출범 이후 사상성 및 투쟁력 강화라는 과제를 안게 된 북문
예총의 내부 사정, 같은 시기 레닌그라드 작가회의에서 문화적 사상투쟁의 견본으로
등장한 주다노비즘의 유입 등을 들 수 있다. 응향 사건은 ‘순수문학’ 논쟁을 일으키면
서 남북한 문단의 정치적 대립구도를 뚜렷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강호정, 「해방기
응향사건 연구-자기비판과 검열의 문제를 중심으로」, 배달말 50, 배달말학회,
2012, 93~117쪽; 박민규, 「응향 사건의 배경과 여파」, 한민족문화연구 44, 한민족문
화학회, 2013, 285~318쪽; 오창은, 「해방기 북조선 시문학 형성과 미학의 정치성」, 어
문논집 48, 중앙어문학회, 2011, 7~36쪽).
27 회의 결과는 「시집 응향에 관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위임원회의 결정서」
에 실렸고, 이 글은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 3(1947.4)에 재수록 되었다.
28 상허학보 48집, 2016
이들 월남작가들이 존재했던 ‘증언의 장’ 속에 박남수나 김이석과 같
은 사례가 얼마나 더 존재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시 말해 영
원히 침묵으로 묻혀 버린 진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이미 발언된 증언
의 배후에 이제 채워질 가망이 없는 언어의 공백이 얼마나 더 많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야흐로 증언의 시대라 부를 만한 1950년대 전후는,
과거의 체험을 고백하고 현재의 체험을 중계하는 떠들썩한 시대였지
만 그 표면에 떠오른 말은 전형적인 증언의 틀에 맞춰진 것들이었다.
월남작가라는 존재들, 정치적 난민인 이들은 어찌 보면 당대 한반도
에서 가장 넓은 시야를 지닌 존재들이었다. 북의 체제와 남의 체제를
동시에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수기의 전형성은, 남한
사회가 이들에게 부여한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이
었는지를 보여준다. 두 체제를 함께 포괄하는 시선의 자리를 당국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렇듯 시선을 제한 당했다는 점에서 이들
은 증언을 강요받은 증인들이다. 만일 제3자적 입장에서 양 체제를 포
괄하는 발언이 가능했다면 이들은 구태여 자신의 이름을 지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반공주의를 주창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당대
‘증언의 장’에 있는 그대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언어적 조건
에 대해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
다’는 발언을 적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29 월남작가에게는 발언 가
28 “논고와 판결문을 겸한 보고서와 결정서를 안고 그들은 드디어 元山에 왔다. 崔〇翊,
宋〇, 金〇良 등 북한 문단에 있어서는 거물급들이었다.” 이 글은 1980년 한 문학잡지
에 기고된 것으로, 구상의 증언보다 이후에 작성되었다. 강홍운, 「심판대 위에 서 있던
詩들」, 문학사상, 1980(창녕문인협회 편, 강홍운 문학전집, 경남, 2002, 260쪽에서
재인용).
29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b, 2008, 14쪽.
인용한 예시는 ‘말하는 동물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박을 위
해 제시된 것으로, 랑시에르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29
능한 언어가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다. 진심으로 국가와 당국의 충성스
러운 ‘노예’가 되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언어를 가지고는 온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는 데에 이들 ‘정치적 난민’의 아이
러니가 있다.
나아가 박남수와 김이석이 선택한 익명성의 보존 방식은, 월남작가
들이 속했던 언어적 점이지대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는 ‘현수’라는 이명(異名)을 내세우고 해방 이후의 행적에 대해 침묵했
고, 동료인 오영진은 ‘박남수’가 아닌 ‘현수’의 이력을 서문에 덧붙였다.
김이석은 해방 후의 행적에 대해 침묵했고, 동료인 구상은 응향 사건
의 관계자를 나열하는 가운데 그의 이름을 삭제했다. 이들의 비밀은, 당
국을 포함한 문단 동료들의 침묵 속에서만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밀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호의일 수도 있고, 공개를 유보하겠다는 조
건부의 침묵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쪽이든 이들은 ‘공개된 비밀’
의 억압성 속에 끌려 다녔다. 낙인찍힌 자의 존재 방식과 언어적 조건이
만나 만들어진, 적어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극복 불가능한 언어
적 자장의 구속력은 곧 언어적 점이지대의 속성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4. 증인의 자리와 시선의 이동
앞장에서 살핀 김이석과 박남수는 1․4후퇴 때 월남한 작가들이며,
이에 ‘부역자’라는 낙인을 짊어진 채 남한 사회에 편입된 작가들이다.
하여 이러한 반문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언어적 조건이 그처럼
는 것 등 느낌의 경계를 설정하는 선험적인 형식의 체계에서부터 미학의 정치성을 읽
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30 상허학보 48집, 2016
엄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해방 후 행적이 굴레로 작용했기 때
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해방 후 월남하여 누구보다 활발하게 선전문학
에 임하고 반공주의자임을 표명했던 작가들의 경우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박남수의 수기에 비한다면, 오영진의 수기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1952)은 한국전쟁기에 나온 수기 중 정치적으로 가장 자
유로운 논평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수기는 해방 직
후부터 월남 직전까지의 체험, 해방 직후 이남과 이북 정치권의 어수선
한 분위기, 평양에 진주한 소련 군정과 친소련파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
에 초점을 맞추었다. 해방 직후 고당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남건국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어 소련 군정과 마찰을 빚었던 사정이나, 오영진의 부
친이기도 한 오윤선을 비롯하여 김동원 등 평양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어떤 정치적 대응을 보였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오영진은 평양예술문
화협회의 핵심적 구성원이자30 고당이 조직한 조선민주당의 간부로서
월남 이후에도 문단 활동과 더불어 정치계에도 몸담았다. 조선민주당
30 평양예술문화협회는 최명익을 대표로 유항림(김영혁), 김사량 등 평양 출신이거나 이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문인들을 망라한 단체이다. 이후 평양프롤레타리아 예술동
맹과 대립각을 세우다 해산된다. 평양예술문화협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치성을 띤
단체라는 견해와, 정치적인 색채가 없었던 단순한 문인 단체였다는 상반된 견해가 공
존한다. 전자는 실질적으로 이 단체의 결성 배후에 조만식, 오영진 등 평안남도 건국
준비위원회 세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고(김윤식, 해방공간의 문
학사론, 서울대 출판부, 1989, 36쪽), 후자는 오영진이나 박남수 등 실제 이 단체에 관
련되었던 작가들이 강조하고 있는 사실이다. 예컨대 박남수는 ‘주장주의를 막론하고
문학 예술에 뜻을 두고 이미 그 역량이 인정된 자이면 누구든지 이 꽃밭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피울 수 있다는 점’이 이 단체의 특징이었다고 설명한다(현수, 앞의 책, 38
쪽). 실상 평양예술문인협회의 성격은 이 두 견해를 종합한 데에서 도출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유추는 조만식의 비서로서 평양예술문인협회 조직을 주도했던 오영진
의 위상을 통해 도출된다. 정치적으로는 조만식 계열의 평남 건준의 세력권하에서 발
언권 및 문단적 지위를 보장받되, 다만 조직이라든가 창작의 경향에 대해서는 자율성
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31
계열 인사로서 한국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
할을 했던 만큼, 그가 반공주의를 표방한 국민사상지도원의 발행 하에
수기를 낸 것은 별로 어색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수기의 기술 내용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유연한 것이어서, 그는 본래 자신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었다는 고백이나,31 해방 직후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과
청년들이 ‘부의 국유화, 균등한 재분배를 주장하는 것이 문화인의 양심
이고 할 일’이라 생각하여 ‘이는 좌익노선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며
이 노선을 따르는 것이 양심적인 문화인의 자격을 향수하는’ 길이라 여
겨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정 등을 적어 놓기도 했다.32
그는 해방 직후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오고, 다시 평양으로 갔다가
1947년 말에 월남했다. 때문에 이 수기에서는 남과 북을 오가는 그의
행적을 통해 당대 이남과 이북의 상황이 어떻게 달랐는지가 입체적으
로 조망된다. 해방 직후 이남 사회가 좌익화하는 경향에 대해 그 원인
을 분석하고, 이북 주민들이 소련군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사실 등을
써냈다는 점에서 그는, 앞서 박남수가 해내지 못했던 증언의 시야와 발
언권을 확보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증언 중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단연 이북 사회에 자체적으로 내재했던 사회주의적 경향을 소련군의
진주 아래 들어선 볼셰비즘과 분리하는 대목일 것이다. 그는 이북 지
식인들이 사회주의로 기울게 되고, 주민들이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관서지방이 역사적으로 봉건적 인습과 전통을 탈각
한 지방임을 강조하며, 본래가 ‘민족사회주의 또는 기독사회주의 색채’
를 지녔기에 ‘볼쉐비즘’과 사회주의의 차이를 철저히 알지 못했고 그다
지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31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중앙문화사, 1983, 4쪽.
32 위의 책, 40쪽.
32 상허학보 48집, 2016
그러므로 이곳 주민들은 오히려 해방 덕분으로 또 다시 봉건적이고 자본주
의적인 사회가 재래되지 않을까? 문벌 좋은 양반이 들고치는 세도정치가 온
고려를 지배하는 이상없는 나라가 출현되지나 않을가 하고 근심하였다. 빛나
는 고려는 건립하고 인민의 생활을 풍부히 하고 특권계급의 재형성을 미연에
방지할려면 각 중요부분에 있어 강력한 사회주의적인 시책과 중점적인 국가
관리가 요청됨을 무언중에 느끼고 있었다.33
이북(관서)은 본래 반봉건적인 전통을 지닌 지역이기에 본래 사회주
의에 대해 큰 경계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소련식
볼셰비즘과는 달리 전래의 지역색(local color)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
장이다. 이 발언이 1952년 한국전쟁 수행 중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환기되어야 한다. 월남민 집단에 속해 있으되, 스스로 서북 계열
민족주의운동의 일원이며 고당 조만식 계열의 민족주의자 집단의 구
성원이라는 자신감이 아니면 내놓을 수 없는 분석 결과인 것이다.34
33 위의 책, 74쪽.
34 한국전쟁 전후 남한에서 정치․문화 영역의 교량 역할을 담당했던 오영진의 활동상
을 주목한 논문으로는 이봉범, 「냉전과 월남지식인, 냉전문화기획자 오영진」(민족
문학사연구 61, 민족문학사학회, 2016)이 있다. 저자는 전후 반공 이념 강화에 일조한
오영진의 활동을, 냉전 구도 하에서 미국의 대한문화정책(미국정부, 미공보원, 아시
아재단 등을 경유)과의 관련성 하에서 확장시켜 살피고 있다. 한국전쟁기 오영진의
활동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폭넓은 기술을 보여준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오
영진을 냉전구도를 이용한 문화정책의 입안자로서, 남한 사회 속에서 월남작가로서
의 구조적 제한을 벗어난 인물로 평가한다. 이 성과는, 1952년 국민사상지도원을 통해
발간된 오영진의 수기가 당시 월남작가라든가 잔류파 문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정치
적 입지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는 당대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서
북 계열 엘리트들과 그 지지 세력으로서의 미국과의 관계는 비단 냉전 시대가 아니라
해방 이전까지 훨씬 소급될 수 있는 것이며(김상태, 「근현대 평안도 출신 사회지도층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2;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 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1998 겨울), 이에 오영진․장준하 그룹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생산의 조
건 및 내용들은 다만 남한의 체제 강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아니라, 냉전구도를 이용한
한국전쟁의 승리와 민족통일이라는 시나리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33
독일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의 수기를 연구한 한 학자는, 본래 ‘증인’
이란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증인은 때
로는 ‘서로 경합하는 두 당사자들 간의 재판이나 소송에서 제삼자의 위
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때로는 ‘어떤 일을 끝까지 겪어낸 사람, 어
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고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이다.35 이 개념상의 구분은 월남작
가들의 수기를 새롭게 읽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제3
자적 시점에의 욕망’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말이다. 북에서 남으로 한반
도를 관통하여 내려왔을 때, 이 경계 넘기의 체험은 이북과 이남을 견
주어 볼 수 있는 시선의 우위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이들은
‘북한 체제를 경험한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간이 다름 아닌 두 이데올로기의 경합이 빚어낸 혼돈에서 왔
다는 사실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1950년대 전후를 전후하여 열렸던 ‘증언의 장’은 이들에게
어떤 ‘증언의 자리’를 열어주었던가. 소련군과 공산당의 만행에 의해
파괴된 삶, ‘자유의 땅’을 찾아 목숨을 걸고 삼엄한 감시를 통과하는 모
험, 공산군이 점령한 수도 서울의 참상 등의 증언이 넘쳐난다. 즉, 체제
는 ‘체험자의 직접성’을, 그 직접성이 담고 있는 강렬한 파토스를 전시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기 이승만 정권과 장준하를 비롯한 서북 계열 인사
들의 공조 및 결별이라는 역사적 전개 속에서 설명되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이에
오영진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입안자로서 남한 사회에 편입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
시에 여전히 남한의 국가 체제 외부에 서 있는 ―언어적 점이지대에 존재하는 ―인
물이라 할 수 있겠다.
35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문서고와 증인, 새물결, 2012, 22쪽.
이러한 의미구분은 라틴어에 ‘증인’의 뜻을 가진 두 가지 단어, ‘제삼자의 위치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증인(testis)’과 ‘사건을 겪어낸 자’를 가리키는 ‘증인(superstes)’이 따로
존재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의 논의는 무차별적인 반윤리적 학살 앞에서
의 법의 무능이라는 문제, 살아남은 자가 없기에 온전한 증인도 없다는 모순의 문제
등으로 이어진다.
34 상허학보 48집, 2016
하고 싶어 한다. ‘적치6년’ 간의 북한 문단의 사정에 대해 비교적 객관
적 정보들을 많이 담은 수기를 써낸 박남수가, ‘현수’라는 이명으로 수
기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증인〓체험자’라는 관습화된 도식을 두려
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오영진의 수기가 갖는 이채로움을 깨
닫게 된다. 그의 수기는 이북과 이남의 정세를 견주어서 포괄하는 자리,
즉 ‘제3자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작성되었다.
체험자의 직접성에서 벗어나 관찰자의 자리로 증인의 위치와 시선
을 이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논의하기에 앞서, 시인 구상의 사
례를 먼저 살피기로 하자. 그의 사례는 이러한 이동이 월남작가에게 얼
마나 절실한 일이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앞서 시인 자신이 ‘월남5년
공산대역(共産大逆)질이란 모조리 했다’고 회상하는 구절을 보았지만,
1947년 2월 월남한 이래 시인 구상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1950년
대 한국사회를 김종문은 “정치인과 군인은 연금술사로서 등장”했으며,
“정치인의 만능시대, 군인의 만능시대”였다고 간략하게 정리한다.36 그
렇다면 과연 이 시기 종군작가들은 무엇을 했던가. 육군종군작가단에
참여했던 최독견은 활동상황을 다음과 같이 꼼꼼하게 기록해두었다.
일선종군 총회수 220회, 종군정일(廷日)수 924회, 종군보고강연 8회, 문학․
음악의 밤 14회, 문인극공연 대구 2회(부산․서울 3회), 지방순회강연 2회, 시
국강연(정전반대) 1회, 육군의 밤 방송 6회, 벽시(壁詩)운동 및 시화전 2회, 부
대가 및 군가작곡작사 수십편.37
훗날 육군종군작가단에 참여하긴 했지만, 최태응은 자전적인 인물
을 주인공으로 세운 한 작품에서 “그는 문학하는 사람, 소설을 만드는
36 김종문, 「한국자유문학자협회」, 양명문, 해방문학20년, 정음사, 1966, 149~150쪽.
37 최독견, 「육군종군작가단」, 위의 책, 94쪽.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35
일로 일생을 보내려는 사람이었고 그 이상의 민족적 과업이 있다 해도
가장 문학과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념”38때문
이라고 월남 동기를 밝히고 있다. 최태응의 시선에서 본다면, 앞서 제
시된 종군작가단의 활동 내역이란, 정작 그가 회피하여 도망쳤던 글쓰
기의 공포가 현실화된 것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종군작가
단 활동은 월남문인들과 한국전쟁 발발 후 도강을 미처 하지 못한 소위
‘잔류파’ 문인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왜 이들 두 집단이 종군작가
단 활동에 앞장을 섰는지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일차적으로 종군작
가단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념적 순도를 증명하여 생존의 교두보를 마
련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학적 재능을 어
디까지 정치적 선전물이자 이념적 교화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정치적 자장 안에서 문인이 어디까지 정치 선전극의 도구로 자신을 ‘내
어줄 수 있는가’를 시험 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른바 ‘글쓰기의 영도’
라 이를 만한, 정치 도구로 전락한 글쓰기의 한복판에 나아가야 하는 두
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브래지어를 차고 여장을 한 것보다/ 정보수가 된 나의 꼴
이 더 우습다.
내가 작성하는 모략선전문들을/ 순정의 혈서 쓰듯 했다.
그때 내가 가장 미워한 것은/ 감미로운 서정이요, / 자연에의 흥취와 그 귀
의였다.
나와 길이 어긋나지만/ 말로나 헤밍웨이를/ 사범으로 여겼다.
시와 그 진실이 일치하는 삶!
그리고 나는 총알 같은 운명을/ 희구하고 있었다.39
38 최태응, 「사과(沙果)」(1947), 최태응전집 1, 태학사, 1996, 312쪽.
39 구상,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구상문학총서 1-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홍성
36 상허학보 48집, 2016
시인 구상은 해방과 한국전쟁이 열어 놓은 글쓰기의 최저 지대, 그
자리를 만들고 이끌어나간 인물이다. 훗날 그는 ‘정보수’가 된 자신이
우습다고 회고하지만, 그 당시 자신을 이끈 것은 “시와 진실의 일치”였
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이 말은 시와 현실의 일치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관제 문학에의 투신은 그로서는 개인적인 신념을 실천할 방편
이기도 했다. 즉 그는 반공주의자로서의 신념에 따라, 기꺼이 지정된
증언의 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례에 해당한다. 이로써 그는 관제
문학의 선봉이자 당대 반공문학 진영의 대표격으로 부상했고, 육군종
군작가단을 이끈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40 그가 훈장을 수상한 것
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그가 이것을 어떤 ‘자
격’으로 생각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1952년 소위 ‘부산정치파동’
에 관련하여 「민주고발」이라는 칼럼을 연재했다가,41 어떤 강연장에서
반정부인사로 지목을 당하고 이에 강연을 제지당하자 울분을 터뜨린다.
“그래 북한에서 공산당결정서를 받고 필화를 입었더니 이제 찾아온 내 조
국이 이것이었나” 하는 이런 망령된 생각과 “공산당에게다 어머니를 굶어 죽
이고 형님을 옥사시키고 이제 나의 운명 말로가 이렇게 벌어지나”하는 참으로
어린애 같은 설움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 형에게 향한 저의 숨김없는 고백이어
야 하겠습니다.42
사, 2008, 36쪽. 연합신문에 근무하다가 1949년 육군 정보국의 요청으로 ‘문총’ 파견
원의 자격으로 HID 촉탁이 된 일을 가리킨다.
40 1953년 1월, 육군창설 9주년을 맞아 최독견, 김팔봉, 구상, 박영준 등이 ‘금성화랑무공
훈장’을 받았다(최독견, 「육군종군작가단」, 양명문, 앞의 책, 93쪽).
41 그는 자전 시집 및 에세이에서 응향 필화사건에 이어, 1959년에 이적 행위로 재판을
받은 일이 1953년 출판한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에서 시작된 사실상의 필화라 주장
하고 있다(구상, 「에토스적 시와 삶」(1980), 구상문학총서 1-모과옹두리에도 사연
이, 홍성사, 2008, 190쪽).
42 구상, 「정화여난(政禍餘難)-설창수 형께 부치는 글발」(1953), 구상문학총서 7-민주
고발, 홍성사, 2008, 114쪽.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37
언론정치에 앞장섰던 그의 충정이 당대 정권과 현실적으로 어떤 관
계를 맺고 있었는지 지금 이 문맥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당
시 시국을 향한 자신의 발언이 막히는 순간에, 그 분노가 반공주의를
위한 투신 혹은 헌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돌출되고 있는 국면이 중요하
다. 그러니까 지금 이 대목에서 그는, 적어도 자신이 남한 사회의 부패
에 대해 발언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거부당한 사실
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식 속에서는 ‘반정부
인사’라는 낙인의 기원이 자연스레 월남민이라는 자신의 태생적 조건
으로 소급되고 있다.
구상은 ‘반공투사’의 자격을 담보로 당대 시국에 관여하는 발언권을
얻으려 했다. 응향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탄압을 받고 월남한 문
인에서, 이제 남한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로서 이제 자신의 ‘조국’이라
할 대한민국의 부조리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
고 어쩔 수 없이 월남민이라는 태생적 조건과 부딪친 지점에서 실패한
다. 그는 이북과 이남을 포괄하는 시선의 자리를 열망하다가, 그 정향
이 좌절되는 지점에서 환멸에 빠진다. 그러나 비록 실패와 환멸로 나
타났을지언정,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둘러싼 구상의 환멸은 앞서
살폈던 오영진의 성취, 그러니까 ‘증언의 직접성’을 떠나 ‘제3자적 관찰
자의 자리’로 이동하여 남북을 포괄하는 시야를 보여주었던 오영진의
성취를 능가하는 부분이 있다. 오영진의 수기는 그 자신이 ‘관서(평안
도)사람’이자 ‘조만식의 사람’이라는, 해방 이전 과거의 시공간에 자리
를 잡은 채(positioning) 발화된다. 즉, ‘나’가 확장된 ‘우리’는 ‘평안도인’,
‘이북사람’이라는 함의를 띤다. 부득이 현재의 시공간을 포함하여 ‘우
리’를 발화하는 경우, 그 ‘우리’는 소련군과 소련군에게 협조하는 공산
당 간부라는 ‘적’의 존재를 통해 상대적으로 유추될 뿐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 월남작가들이 써낸 반공주의 수기의 한계로서, ‘적’은 분명하
38 상허학보 48집, 2016
지만 ‘우리’는 없다는 서사상의 맹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
영진은 해방 이후 현재적 시점에서 무엇이 ‘우리’인가에 대해 무엇도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반면 구상은 현재의 시공간에서 ‘우리’ 즉 ‘조국’
을 구성하기 위해 애쓴다. 자신이 놓인 증언자로서의 입지와 그 시야
를, 응향의 반공주의 월남시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현재 그가 서 있
는 시공간까지 연장하기 위해, 이로써 남북을 포괄하는 초월적 시점의
자리에서 발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대체 이북과 이남의 공간을 한 번에 조망하는 ‘제3자적 자리’에서 증
언을 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는 감정의 직접성에서 유래하는 파
토스가 아니라 이성적 분석이 가능한 거리두기를 향한 욕망, 즉, 초월
적 위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
다. 그렇다면 재차 물어야 할 것이다. ‘사태의 직접성’ 속에서 ‘초월적
위치’로 부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초월적 시선은 곧 시야
의 확보이자 사유의 가능성을, 그러므로 집단에 함몰되지 않는 단독자
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때문에 그것이 현실적(실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학장의 글쓰기는 비록 다시 현실로 곤두박질
치게 될 운명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초월적 시선’의 확보를 위해 몸부
림치는 것이다. 박남수와 같이― ‘순수’라는 개념이 과연 가능할 것인
가는 논외로 치고― 순수문학을 지향한 작가도, 구상과 같이 정치와
문학의 일체를 꿈꾸었던 작가도 이 ‘제3자적 위치’에서 증언할 권리를
향한 열망은 같은 것이었다. 월남민이기 이전에 이들은 하나의 단독자
로서 말하기를 원하는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제3자적 위치’에서의 증
언이란 결국 언어적 점이지대의 탈출이자 단독자로서의 자유를 뜻한
다. 주어진 증인의 자리와 자격을 바꾸는 일, 만약 정치적 난민으로서
월남작가들의 주체적 글쓰기의 흔적을 찾는다면 아마 이러한 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39
5. 결론-증언의 형식, 증인의 시선, 그리고 자유
이상 본문에서 논의한 내용을 세 가지 질문으로 바꾸어 본다면 아마
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월남작가들은 왜 스스로 관제 문학
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나? 그러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
가? 이렇듯 관제 문학에서 주인이 되려는 시도는 어떻게 작가 윤리와
연결되는가? 이상의 질문들은, 월남작가들이 시대의 증인을 자처했으
되, 증인의 자리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으로서
의 시야를 확보하려 고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가 된다.
‘표현의 자유’는 흔히 작가 집단의 월남 동기로 회자되곤 한다. 그러
나 월남작가들이 이남에서 마주한 언어적 조건은, 이 말이 정치적인 측
면에서 얼마나 공허한 바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월남작가들은 다시
금 도구적 글쓰기의 장에 포섭된다. 1950년대 전후에 열린 반공 수기
류라는 ‘증언의 장’은 기꺼이 증언을 수행하고 싶어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갖는다. 이는 국가와 동일한 이념
을 정향하고 있었어도, 국민으로 소속될 수 없었던 월남작가 집단의 사
정에 기인한다. 조국에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소속이 없는 정치적 난민으로서의 존재론적 모순은 이들을
기꺼이 관제 문학의 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표방한 당대 관제문학과 동일한 의지를 가지고
‘멸공’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제도적 증언의 장에 편입되려면 개개인의
자발적인 증언의 의지나 정치적 열정은 배제되어야만 했다는 지점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싶어
도, 그 열정을 ‘나’를 통해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가 월남
작가들을 체제의 우월성을 증언하는 증인의 자리에 소환할 때 그 주문
은 언제나 ‘어떤 일을 겪어낸 사람’, ‘사건의 당사자’라는 데 고정되어
40 상허학보 48집, 2016
있다. 이는 말하자면 ‘역할의 강요’라 부를 만한 상황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전제를 지닌 1인칭 글쓰기의 형
식 안에 있으면서도, 글의 외부에서 제어되는 글쓰기의 규범을 벗어나
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이름을 지운 익명의 증인이 되
거나, 오로지 ‘과거만을’ 향한 증언 혹은 ‘적을 향한 비난만을 담은’ 증
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월남작가 및 그들의 수기는, 비단 이념전의 희생양이라
든가 반공담론의 매체라는 의미를 넘어, 통치 이념이 강요하는 글쓰기
에 포섭된 작가와 글쓰기 행위의 자유라는 주제, 즉 진정한 ‘표현의 자
유’ 문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표현의 자유’란 ‘자유 남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도리어 남북을 막론하고,
시점을 제한한 발화만을 강요하는 제도적 글쓰기와 길항하는 작가의
자유의지 속에서만 다다를 수 있는 이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
서는 ‘사건의 당사자’라는 직접적인 체험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나, ‘사태
의 목격자’라는 제3자적인 증인의 입지를 획득하려 했던 시도들을 강
조하였다. 비록 반공으로 귀결되는 증언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라 하더라도, 그 부자유한 증언의 자리에 어떤 유형의 증인으로 설 것
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모습이란 어쩌면 증언보다 중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월남작가군이 당대 한반도에 있어서는 비교적 넓
은 시야를 확보한 집단이었다는 점을 중요시했다. 분명 이들은 공간의
이동을 통해 북의 체제와 남의 체제를 모두 목격한 집단이며, 해방 이
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간이, 다름 아닌 두 이데올로기의 경합이
빚어낸 혼돈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겠기 때문이다. 제3자적
인 증인이 되겠다는 욕망이란, 이남과 이북을 같은 수준에 놓고 평가하
는 제3자적 시선의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단독자로서 발화하겠다는, 제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41
도와 길항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연결된다. 이에 본론의 후반에서는
‘과거를 향해서만’ 초월적 시선을 견지할 수 있었던 오영진의 사례와
비록 필화 사건으로 번졌으되 이북과 이남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에 대
해 발화할 자격을 얻으려 시도했던 구상의 사례를 다루었다.
물론 이상의 논제들은 여러 한계와 비약의 소지를 안고 있다. 하나
는 월남작가의 수기는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이런 태도들이 그들의 문
학적 성과에 있어서도 연장이 가능하겠는가라는 회의가 생겨난다. 예
컨대, 본문에서 다룬 ‘제3자적 증인의 욕망’을 문학적으로 실현한 작품
으로 최인훈의 광장만한 소설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기’라는
비문학적 장르에 ‘증인’, ‘시점 / 시각’과 같은 개념을 어찌 보면 무리하
다 싶게라도 적용해본 것은, 현실의 허구화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는커
녕 ‘정치인과 군인이 만능’이었던 시대에, ‘내부의 이방인’으로서의 제
약을 안고 ‘작가’라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곤경에 대해 변별
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6년에 발행된
해방문학 20년에서 「월남문인」편을 기록한 월남작가 양명문의 기록
에는, 월남작가군을 ‘해방 직후 월남문인’, ‘1․4후퇴기 월남문인’으로
나눌 뿐, 현재 ‘전후세대 월남문인’으로 불리는 최인훈, 이호철, 선우휘
등에 대한 기록은 없다.43 그러니 월남문인을 전전세대와 전후세대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 아님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양명문
의 감각에 있어서 ‘월남작가’란, 해방 및 한국전쟁기를 통과하는 동안
에 만들어진 ‘공통감각’ 내지 ‘형제애’가 집단을 변별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을 해명하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 ‘월남작가’의 수기가,
당대 시공간이 이들에게 강요했던 ‘증인’의 역할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텍스트가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43 양명문, 「월남문인」, 해방문학20년, 정음사, 1966, 86쪽.
42 상허학보 48집, 2016
아울러 이 글의 논의는 자의든 타의든 월경을 감행한 이들 작가 집
단이, 무엇보다도 체제 속에 놓인 개인으로서 집단주의와 길항하는 단
독성의 문제를 고민하는 존재들이었다는 최소한의 전제에 바탕을 두
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증인의 유형과 증언의 시점’이라는 관점을
통해 입증하려 든다. 무슨 근거로 월남작가를 이렇듯 신뢰할 수 있겠
는가를 묻는다면 그 답은 곤궁해질 수밖에 없다. 실상 어떤 방식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월남작가들이 당대 반공주의 담론의 확산에 기여했
고 보수우익언론의 선봉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기 때문
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문학제도
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작업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제도 속에서 소외되
기 쉬운 작가적 윤리와 자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
실이다. 하여, 월남작가들의 정치적 성향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차치한 채로 굳이 작가 윤리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는 말의 진
정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글쓰기의 자유를 향한 작가의 실천과 좌절 속
에서 확인될 필요가 있다.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43
:: 참고문헌
1. 기본 자료
강홍운, 창녕문인협회 편, 강홍운 문학전집, 경남, 2002.
구상, 구상문학선, 성바오로출판사, 1975.
구상, 구상문학총서 1-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홍성사, 2008.
구상, 구상문학총서 7-민주고발, 홍성사, 2008.
김이석, 이태동 편, 김이석 소설 선집, 현대문학, 2012.
박남수, 박남수 전집 1․2, 한양대 출판부, 1998.
양명문, 해방문학20년, 정음사, 1966.
오영진, 소군정하의 북한, 중앙문화사, 1983.
최태응, 최태응 문학전집 1~3, 태학사, 1996.
현수, 적치 6년의 북한문단, 보고사, 1999.
관서시인집, 문학, 赤禍三朔九人集, 전선문학-「문학」전시판, 문학사상
2. 논문
강호정, 「해방기 응향 사건 연구-자기비판과 검열의 문제를 중심으로」, 배달말 50, 배
달말학회, 2012.
공임순, 「사상‘운동’과 사상의 생활윤리화」, 서강인문논총 35,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2012.
남상권, 「전후 피난지 체험소설 연구-김이석 소설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8, 상허학회,
2002.
남원진, 「역사를 문학으로 번역하기 그리고 반공 내셔널리즘」, 상허학회 편, 한국 현대문학
의 정치적 내면화, 깊은샘, 2007.
박민규, 「응향 사건의 배경과 여파」, 한민족문화연구 44, 한민족문화학회, 2013.
변혜원, 「김이석 소설연구」, 숙명여대 석사논문, 1985.
오창은, 「해방기 북조선 시문학 형성과 미학의 정치성」, 중앙어문학회, 어문논집48, 2011.
오창은, 「냉전과 월남지식인, 냉전문화기획자 오영진-한국전쟁 전후 오영진의 문화활동」,
민족문학사연구 61, 민족문학사학회, 2016.
이봉범, 「검열의 내면화와 그 정치적 발현」, 상허학회 편, 한국 현대문학의 정치적 내면화,
44 상허학보 48집, 2016
깊은샘, 2007.
장만호, 「박남수론: 한 문인의 이력과 ‘순수’의 이면-수기와 전집 미수록 시를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32, 한국시학회, 2011.
3. 단행본
김건우, 사상계와 1950년대 문학, 소명출판, 2003.
류동규, 전후 월남작가와 자아정체성 서사, 역락, 2009.
서동수, 한국전쟁기 문학담론과 반공프로젝트, 소명출판, 2012.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역, 감성의 분할, b, 2008.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문서고와 증인, 새물결, 2012.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45
:: 국문초록
이 논문은 해방 및 한국전쟁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월남작가들이 펴
낸 수기를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언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살핀
다. 수기는 본래 자전적 체험의 진정성을 담보로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장르적 특징을 갖고 있지만, 남북의 이념적 대립 하에 출판된 월남작가
의 수기는 반공주의 담론을 강화하려는 관제 문학의 도구적인 성격을
띤다. 이로써 월남작가의 수기는 허구성에 바탕을 둔 문학류와는 별도
로, 작가로서 월남작가군의 글쓰기 윤리를 물을 때 문제적인 대상이 된
다. 이 논문의 출발점은 반공시국 하에서 월남작가군이 보여주는 이율
배반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관제 문학 생산
의 장에서 이용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정작 해당 제도 속
에서 반공수기를 써내는 데에는 대단히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하 본문의 논점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월남작가들은 왜 관제문학의 장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였는가?
둘째, 그러나 왜 그들은 자발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되지 못했
는가?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제 문학의 장에서 이들에게 작가윤
리의 진정성을 묻는다면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 이상의
논점에 대한 해명을 위해, 본 논문에서는 ‘정치적 난민’으로서의 월남
작가군이 감당해야 했던 이념적 언어공간의 특수성, 수기 문학이 생산
되었던 증언(고백)의 장의 성격과 그 속에서 생겨난 언어적 공백, 그리
고 마지막으로, 어떤 사태의 직접 체험자가 아닌 관찰자로서의 ‘증인’이
되려는 욕망과 그 관찰자적 시점에의 지향이 갖는 윤리적 가치를 논의
하였다.
46 상허학보 48집, 2016
핵심어: 월남작가, 월남민, 난민, 증인, 증언, 수기(手記), 오영진, 구상, 박남수, 시점, 자유
난민의 언어적 조건과 ‘증인’의 시선 47
:: Summary
The Linguistic Condition of the Refugees
and the Eyes of a Witness
Study on the Memoirs of Writers from North Korea
Joung, Ju-a
This paper discusses the cases of two memoirs which were written by writers who
came from North Korea. They published their memoirs after coming to the South.
Especially this paper focuses on the linguistic restrictions in the spatial condition of
South Korea. In a one instance, Poet Park, Nam-su wrote a memoir criticizing the literary
circles in the North. However, Park only used a pen name and did not reveal that
he had written it. That led to a long-time confusion about who the real writer was. His
memoirs recorded many reports about their experiences under the Communist Party,
but it didn’t reveal facts what he want to conceal. This paper calls that concealment as
a concept of ‘linguistic vacuum’. Reviewing the cases, this paper focuses on the fact that
his political involvement in the Communist Party was already recognized by politicians
as well as peers in the South. This differentiates this paper from the existing studies,
which focus in a black and white way of thinking whether his participation was voluntary
or not. As his service to the North Korean government was already known in literary
circles in the South, the fact was an open secret. Since a secret is only valid when it
is not publicized, the writers’ past action of serving the North was essentially no longer
a secret, even though they wanted to keep it hidden and his peers did not make his pasts
widely known. He could not help but still feel psychological pressure because his secret
48 상허학보 48집, 2016
became widely known, despite the assumption that his peers would protect him from
fierce anticommunist policies at that time. In the point that many individuals already
know the secret and that the secret is owned by others, the secret has a contradictory
position. This paper demonstrates that the writers who came from the North were under
political pressure that, thus, affected their works. Namely, the pressure fundamentally
restricted them when choosing language and projecting society in their
works.
Key words :Writers from North Korea, Refugees, Witness, Record, Memoir, Oh,
Yeong-jin, Ku Sang, Park, Nam-su, viewpoint, free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