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헨더슨 비행장의 위기
1942 년 10 월 14 일 새벽에 실시한 전함의 포격으로 헨더슨 비행장에 치명타를 먹인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의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키기 위하여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전함이 떠나자 날이 밝을 때까지 일본군의 항공기들이 간간히 날아와서 야간폭격을 가했고 , 과달카날의 일본군들은 150mm 곡사포로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여 활주로에 추가로 손상을 입히고 , 수리를 방해했다.
1942년 헨더슨 비행장 모습
임시로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되어 작전 중이던 몇 대의 B - 17 중폭격기가 14 일 오전에 간신히 이륙하여 에스피리투산토로 돌아갔다. 정오가 되자 26 대의 1 식 육상공격기가 제로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등장하여 헨더슨 비행장에 폭격을 가했다.
이어서 다시 150mm 곡사포의 포격이 지속되자 오후 3 시경부터 헨더슨 비행장은 완전히 기능을 정지 하고 말았다. 해병대에게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해군건설대대가 헨더슨 비행장 동쪽에 전투기 활주로를 이미 건설해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길이가 짧아서 대형기는 사용이 불가능했고 , 마스덴 매트가 깔려있지 않아서 비가 많이 내리면 역시 사용불가였지만 대신 활주로가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공중에서는 여간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일본군은 전투기 활주로의 존재는 모르고 오로지 헨더슨 비행장에만 공격력을 집중시켰다. 정오의 폭격때에는 와일드캣들이 연료보급 중이라 1 대도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폭격을 마친 일본기들은 헨더슨 비행장이 완전히 사용불능이라 미군 전투기들이 전혀 이륙하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1 시간 후에 도착한 18 대의 1 식 육상 공격기들과 호위하는 제로기들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전투기 활주로에서 이륙한 와일드캣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1 식 육상공격기 9 대와 제로기 3 대가 격추당했다.
14 일 오후에 정찰하던 돈틀레스 1 대가 과달카날 북방 110km 해상에서 남하 중인 일본수송선 6 척을 발견했다. 일본제 2 사단의 마지막 제파를 수송하던 이 수송선들은 구축함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 상공에는 제로기 몇 대가 항공엄호를 담당하고 있었다. 칵터스 항공대에서는 모자라는 항공유를 쥐어짜서 돈틀레스 4 대와 함께 45kg 짜리 폭탄을 장비한 육군제 67 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 - 39 및 P - 400 전투기 7 대를 발진시켰다.
돈틀레스와 육군전투기들은 해가 지기 전에 일본수송선단을 발견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 구축함 사미다레에 가벼운 피해를 입히는데 그쳐 수송선단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이제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일본군은 일시적이나마 주간에도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14 일 밤이 되자 이번에는 일본제 8 함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 제독이 중순양함 죠카이와 기누가사를 이끌고 아이언바텀사운드에 진입하여 15 일 새벽 2 시부터 헨더슨 비행장에 752 발의 8 인치 포탄을 쏟 아부었다.
전날 실시된 전함의 포격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날의 포격은 겨우 살아남은 헨더슨 비행장 의 항공기들을 거의 전멸시키고 , 그나마 약간 남아있던 항공유의 재고를 사실상 모두 태워 없애버렸다. 그동안 일본군 수송선단은 과달카날의 타사파롱가 해안에 도착하여 하역을 시작했다.
10 월 15 일 날이 밝자 해병대는 기가 막힌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일본군 수송선 6 척이 교두보에서 불과 15km 떨어진 타사파롱가 해안에서 보란듯이 병력과 물자를 양륙하고 있었다. 쌍안경을 통해 보이는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도쿄만에서 하역하듯 아주 편안하고 여유있게 보였다. 수송선단의 상공에는 제로기 몇 대가 날아다니고 있었고 , 선단 주변에는 호위를 맡은 구축함들이 초계 를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분통이 터진 칵터스 항공대장 로이 가이거 준장은 즉시 항공기를 내보내어 공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곧 부하들로부터 당장 이륙 가능한 항공기는 돈틀레스 4 대 뿐이며 , 그나마 항공유가 완전히 떨어져서 이륙시킬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가이거 장군은 소리를 꽥 질렀다.
" 그렇다면 , 맙소사 , 좀 찾아봐 !" (" Then, by God, find some!")
가이거 장군의 지휘소에서 호통을 듣고 쫓겨난 참모들의 머리에 갑자기 숨겨둔 항공유 생각이 떠올랐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에 항공유 공급이 불안정하자 칵터스 항공대의 항공요원들은 항공유를 하역하거나 수송하는 과정에서 드럼통 1 - 2 개씩을 고의로 교두보 내의 늪에 빠뜨리거나 덤불 속에 숨겨 놓고는 해군측에 수령증을 써줄 때 손실로 처리해서 장부에는 안 잡히는 항공유를 비상용으로 확보해 두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항공유를 비축 (?) 하는 일을 중단했고 , 이후 바쁜 일정 속에 모두들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때 비축해 둔 항공유를 활용할 때였다. 곧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교두보 내의 늪과 덤불 속을 샅샅이 뒤졌고 , 얼마 지나지 않아 약 400 개의 드럼통들을 찾아내어 활주로로 굴려왔다.
여기에 더하여 정비병들은 파괴된 B - 17 2 대를 비롯하여 망가진 항공기들의 연료를 모조리 뽑아내어 항공유를 확보했고 , 가이거 장군의 긴급요청을 받은 에스피리투산토에서도 C - 47 수송기에 항공유를 실어 보냈다.
1 대당 항공유를 가득 채운 드럼통 12 개씩을 실은 육군항공대와 해병대의 C - 47 수송기들이 증원 항공기들과 함께 오전부터 임시로 복구한 헨더슨 비행장의 활주로에 착륙하기 시작했다.
드럼통 1 개 분량의 항공유는 와일드캣 1 대가 대략 1 시간 동안 작전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 더글러스 C - 47 스카이트레인 수송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blog.naver.com/mirejet/110083006891)
이들과는 별도로 수상기모함 맥팔레인이 항공유를 가득 싣고 에스피리투산토를 출발했다.
맥팔레인은 다음날인 16 일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일본기의 공습을 받아 대파되었으나 간신히 침몰을 면하고 플로리다 섬의 후미진 해안에 피신했다. 힘들게 확보한 항공유로 급유를 마친 돈틀레스 4 대가 활주로에 나섰다.
그러나 1 번기는 이륙 도중 활주로에 패인 구멍에 걸리면서 망가지고 말았고 , 윌리엄 패터슨 중위가 조종하는 제 2 번기는 겨우 이륙에 성공했다. 패터슨 중위는 곧 타사파롱가 해안으로 날아가서 양륙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 수송선 사사고마루에 폭탄을 명중시켜 화재를 일으켰다. 2 번기의 이륙 직후 항공관제관은 활주로가 복구될 때까지 3 번기와 4 번기의 이륙을 중단시켰다.
활주로가 복구되자 3 번기와 4 번기도 이륙하여 타사파롱가 해안의 일본군 함정을 폭격했으나 지근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폭격을 마친 3 대의 돈틀레스가 돌아오자 가이거 장군은 적당한 숫자의 항공기가 모일 때까지 공습을 일단 중지시켰다. 그동안 정비병들은 망가진 항공기의 부품을 빼내어 덜 망가진 항공기의 부품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항공기 몇 대를 재생해 내었고 , 에스피리투산토에서도 항공유와 함께 증원항공기가 도착했다.
오전 10 시가 되자 12 대의 돈틀레스가 출격준비를 마쳤고 , 그러자 가이거 장군은 폭격재개를 명령했다. 450kg 짜리 와 225kg 짜리 폭탄을 달고 출격한 돈틀레스들은 수송선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수송선의 갑판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패터슨 중위의 폭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했던 사사고마루가 이때 격침되었다. 잠시 후에는 폭탄을 장비한 육군항공대의 P - 39 및 P - 400 전투기들이 폭격을 가하여 아즈마산마루와 규슈마루에 화재를 일으켰다.
다음 차례는 에스피리투산토를 출격한 B - 17 중폭격기들과 돈틀레스들이었으며 , 이런 식으로 하루종일 폭격이 이어졌다. 칵터스 항공대는 그야말로 공중에 뜰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하여 양륙중인 일본군 수송선에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했다. 심지어는 가이거 장군의 전용기인 카탈리나 정찰기 블루구스도 날개 밑에 항공어뢰 2 발을 달고 공습에 가담했다.
블루구스의 조종사 잭 크램 소령은 뇌격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몇 대의 제로기들한테 추격을 받았으나 때마침 와일드캣들이 달려와 주는 바람에 무사히 전투기 활주로에 착륙할 수 있었다. 헨더슨 비행장과 타사파롱가 해안은 그야말로 지척이었으므로 칵터스 항공대의 조종사들은 16 일 하루 동안 많게는 7 - 8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출격했다.
오전 11 시까지는 사사고마루 , 규슈마루 , 아즈마산마루가 화염에 휩싸였고 결국 3 척 모두 침몰했다. 수송선단 상공을 지키던 일본군 제로기 30 대의 공격을 받아 칵터스 항공대는 돈틀레스 3 대와 전투기 4 대를 상실했다. 그러나 칵터스 항공대도 반격을 가하여 제로기 5 대를 격추했고 , 헨더슨 비행장의 대공포들도 전투기들과 합세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던 일본군의 1 식 육상공격기 12 대를 격추했다.
칵터스 항공대의 폭격이 격화되자 16 일 오후 3 시 50 분에 햐쿠다케 중장은 살아남은 수송선인 난카이 마루 , 사도마루 , 사카이마루와 구축함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수송선 3 척도 크고작은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양륙을 마쳤으나 중화기의 손실은 심각했다.
수송선단에는 제 3 차 공세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상륙하는 병력인 제 38 야전고사포대대 , 제 4 및제 7 야전중포대대 , 제 6 독립속사포대대 , 독립박격포연대의 1 개 중대 , 제 230 연대의 2 개대대와 연대본부 및 보급부대 , 그리고 보충병을 합하여 모두 4,500 명의 병력과 이들이 보유한 중화기 및 막대한 양의 탄약과 식량 등이 실려 있었다.
이들 중 병력은 거의 전원이 안전하게 상륙했으며 , 탄약과 식량 등의 각종 보급품들도 80% 정도 양륙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 중화기류의 양륙은 산포 38문과 중포 2 문에 그쳤다. 양륙 과정에서 중포를 대량으로 상실하게 되자 일본군은 공격계획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계획은 대규모의 화력을 동원하여 해병대의 방어선을 두드리면서 2 만 병력이 한덩어리가 되어 교두보의 서쪽 방어선을 돌파하여 비행장을 점령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 그만큼 변수가 별로 없는 견실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 이러한 작전계획의 핵심인 중포를 대부분 상실하게 되자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부대를 양분하여 주력은 험악한 정글을 돌파하여 교두보의 남쪽을 공격하고 , 그동안 조공은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서쪽 방어선을 두드림으로써 주공의 공격을 지원한다는 복잡하고 , 그만큼 변수가 많은 작전으로 변경해야만 했다.
게다가 주력이 정글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공격날짜도 애당초 계획한 10 월 18 일에서 21 일로 연기되었다. 17 일 새벽에는 일본군의 중순양함 마야와 묘고가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서 헨더슨 비행장에 8 인치 포탄 1,500 발을 쏟아부었다.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연 사흘째 밤마다 일본군의 함포 사격을 받았으나 첫날의 포격에 단련된 병사들은 3 일째의 포격은 의연하게 참고 견딜만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17 일 아침이 되자 미군도 반격에 나섰다. 미군은 자신들의 실수에서 적의 약점을 찾아내었다. 과달카날 상륙 첫날 , 해병대는 해안에 보급품들을 무질서하게 쌓아놓은 채로 밤을 지샜다. 그 결과 다음날 일본군의 공습이 닥쳤을 때 해안에는 탄약들이 분산되지도 않고 함께 쌓여 있는 등위 험천만한 상태였다.
다행히 일본군이 해안의 보급품을 공격하는데 관심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일본군이 마음먹고 해안의 보급품들을 집중적으로 노렸다면 해병대는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품들을 상당량 상실했을 것이고 , 어쩌면 지금쯤은 모두들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미군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 타사파롱가 해안에 아직도 쌓여있을 일본군의 보급품을 노렸다. 10 월 17 일 새벽에 제 12 구축함전대장 로버트 토빈 대령의 지휘 하에 미구축함 애런워드와 맥칼라가 타사파롱가 해안에 접근했다.
그와 동시에 헨더슨 비행장을 출격한 정찰기가 미군의 예상대로 타사파롱가 해안에 일본군의 보급품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애론워드와 맥칼라는 즉시 5 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하여 2,000 발의 5 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상공의 정찰기가 탄착관측을 담당했고 , 잠시 후에는 헨더슨 비행장을 출격한 항공기들이 폭격을 시작 했다. 여기에 전날 산타이사벨 섬을 공습했던 호넷의 함재기까지 날아와서 폭격에 가세했다. 곧 해안 여기저기에 쌓아두었던 탄약이 연속적으로 유폭을 일으켰고 , 식량을 비롯한 귀중한 보급품들이 불타는 연기가 하루종일 타사파롱가 해안을 메웠다. 일본군 보급품의 피해는 엄청났다.
힘들게 양륙한 탄약의 80% 와 식량의 절반이 망연자실하여 바라보는 햐쿠다케 장군의 눈 앞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중포의 대량 상실에 이어 탄약의 대부분과 식량의 절반을 추가로 상실한 일본군은 이제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게 되었다. 만일 제 3 차 공세가 실패하는 날이면 모두들 굶주림으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탄약의 부족으로 인하여 제 3 차 공세 이후로는 150mm 곡사포도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 이렇게 중요한 제 3 차 공세계획은 필연적으로 부실한 계획이 될수 밖에 없었다. 원래 단일 축선을 따라 공격하려던 계획을 갑자기 2 개의 부대가 실시하는 작전으로 변경해야 했고 , 게다가 주력부대가 정글 속으로 장거리 행군을 실시해야 하는 등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요소들을 감안하여 작전을 짜야만 했다.
이러한 복잡한 작전계획을 정확한 정보도 부족한 채로 급히 만들어내어야 했으니 제대로 된 작전계획 이 나오기가 어려웠다. 어쩄든 일본군은 급조된 작전계획에 따라 부대 병력을 배치하고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공격은 제 2 사단장 마루야마 중장이 지휘하는 主功과 제 17 군의 포병대장 스미요시 소장이 지휘하는 助功으로 나뉘어 실시하게 되었다.
스미요시 소장이 지휘하는 조공은 최초에 계획했던 공격축선을 따라 교두보의 서쪽 방어선을 공격하기로 했다. 조공의 주력은 2,900 명의 병력을 가진 제 4 연대였다. 주공이 정글 속을 행군하는 이유로 전차와의 동행이 불가능했기 떄문에 마에다 대위가 지휘하는 제 1 독 립전차중대는 조공을 지원하게 되었다.
약 100 명으로 이루어진 제 1 독립전차 중대는 95 식 경전차 2 대와 47mm 전차포를 장착한 개량형 97 식중 ( 中 ) 전차 12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851 명으로 이루어져 150mm 곡사포 15 문 , 100mm 평사포 3 문 , 100mm 곡사포 4 문 , 75mm 야 포 7 문 , 75mm 산포 3문을 보유한 제 17 군 포병대가 조공의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 일본육군의 97 식 중전차 치하.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39810497 )
제 2 사단장 마루야마 마사오 중장이 지휘하는 주공은 약 5,600 명의 병력을 가진 9 개 보병대대를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공은 다시 우익대 , 좌익대 및 예비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 35 보병여단장 가와구치 기요다케 소장이 지휘하는 우익대는 제 1/230 대대 , 제 3/230 대대 , 제 1/124 대대를 주축으로 제 3 경참호박격포대대의 절반 , 제 6 및제 7 독립속사포대대 , 제 20 독립산포연대 , 공병대 및 의무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2 사단의 보병단장 나스 유미오 소장이 지휘하는 좌익대는 제 29 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제 3 경참호박 격포대대의 나머지 , 제 10 독립산포대대 , 1 개 독립속사포대대 , 공병대 및 의무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16 연대장 히로야스 도시로 대좌의 예비대는 제 16 연대를 주축으로 공병대 및 의무대로 이루어져 있 었다.
일본군 공병대가 코컴보나에서 정글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 이어서 일본군의 주공이 정글로 들어섰다. 이때 미군에서는 중대한 지휘관의 변동이 발생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이 남태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을 전격적으로 해임하고 , 후임으로 헐지 제독을 임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