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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43) - 일본군의 제 3차 공세 (1) /blog.naver.com/imkcs0425/60112259902


43.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 (1) - 공격준비

일본군은 1942 년 9 월부터 코컴보나에서 정글 속에 길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 일본제 2사단장 마루야마 마사오 중장은 공병대를 투입하여 본격적으로 정글 속으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이 정글 속의 길은 마루야마 산길이라고 불렀다. 마루야마 산길은 코컴보나에서 바로 남쪽으로 뻗은 다음 동쪽으로 방향으로 바꾸어서 마타니카우 강과 룽가 강의 상류를 건넌 다음 오스텐산 부근에서 북쪽으로 꺾어서 피투성이 능선까지 이어졌다.
이 길은 공병대원들이 무성한 정글 속에서 주로 정글도로 가지를 쳐 내면서 만든 오솔길이라 공중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마루야마 산길을 통한 일본군 주력의 행군은 몹시 힘들었다.
지형이 울퉁불퉁한 정글 속의 오솔길이란 맨몸으로 걸어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게다가 군장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게이며 , 열대의 무더위에서는 완전군장 상태로 평탄한 길을 걷는 것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고역이다.
그런데 정글 속의 오솔길을 일본군들은 12 일 분의 식량과 탄약을 포함한 개인군장 이외에도 산포를 분해한 부품 1 개나 포탄 1 발 , 또는 박격포나 기관총 등을 추가로 짊어진 채 행군해야만 했다.  험준한 계곡을 올라갈 때는 무거운 포의 부품을 로프로 끌어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자연히 전진속도는 그야말로 달팽이 걸음이었다. 선두의 병력이 하루의 행군을 마치고 야영준비를 시작할 때 후방에서는 아직 출발도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항공정찰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불을 피울 수도 없었으므로 식사는 약간의 찐쌀과 함께 절인 야채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리 정예병사라도 이 정도 상황이 되면 버티기 어렵다.
결국 일본군들은 행군하면서 정글 속에다가 산포의 부품이나 박격포 , 포탄들을 몰래 버리기 시작했고 따라서 막상 공격이 실시되었을 때 지원화기라고는 기관총 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군은 10 월 19 일까지 룽가 강을 건너지도 못했고 , 결국 마루야마 중장은 공격 개시를 22 일로 연기했다.
그동안 일본항공기들은 과달카날에 항공유와 폭탄을 보급하려는 미해군의 보급선단을 계속 공격했다.  일본군의 연이은 포격으로 칵터스 항공대의 항공유와 폭탄 재고량이 바닥을 보이자 미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공유와 폭탄 보급을 시도했다. 매일같이 C- 47 수송기가 항공유를 싣고 헨더슨 비행장에 도착했으며 , 잠수함 앰버잭이 항공유 14 톤과 폭탄 10 톤을 싣고 왔다.
미해군은 칵터스 항공대의 항공유 및 폭탄 부족 사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하여 바지선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송함 알치바와 벨라트릭스 , 어뢰정모함 제임스타운 , 예인선 비레오 , 그리고 구축함 메레딧과 니콜라스는 각각 항공유 220 톤과 폭탄 500 톤씩이 실려 있는 바지선을 1 척씩 예인하면서 에스피리투산토를 출항했다.
이 떠다니는 화약고나 다름없는 수송선단은 과달카날에 10 월 16 일에 도착할 예정으로 느릿느릿 항해하다가 10 월 15 일 아침에 과달카날 동방 120km 해상에서 일본군 정찰기에 발견되고 말았다. 구축함 메레딧과 예인선 비레오를 제외한 함정들은 모두 에스피리투산토로 돌아갔다.
15 일 오전 10 시 50 분에 2 대의 일본기가 메레딧과 비레오를 노리고 폭격을 가했으나 빗나갔다.
그러자 메레딧과 비레오도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정오 경에 빨리 철수할 수 있도록 비레오의 승무원을 모두 메레딧으로 옮기고 비레오와 바지선들을 처분한 다음 최대속력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따라 12시 15분에 메레딧이 비레오의 승무원을 모두 옮겨 싣고 비레오에 어뢰를 발사하려는 순간 일본항공모함 즈이가쿠를 출격한 급강하폭격기 , 뇌격기 및 제로기 27 대가 메레딧을 공격했다.
수많은 폭탄과 어뢰에 명중당한 메레딧은 엄청난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미처 구조요청을 타전할 시간도 없었다.


(USS Meredith (DD-434) , a Gleaves-classdestroyer)

비레오는 멀쩡했으나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표류하기 시작하여 메레딧의 구명뗏목 중 겨우 1 척만 비레오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행운의 구명뗏목에 탔던 메레딧의 승무원들은 불행하게도 비레오의 장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 따라서 해상의 동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구조요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비레오와 함께 바람에 떠밀려 표류했다.
다행히 이들은 나중에 전원 무사히 구조되었다.  해상에 남겨진 메레딧과 비레오의 승무원들은 이후 3 일간 처절한 고통을 겪었다.  주로 화상을 입은 부상자들만 고무로 만든 구명뗏목 위에 올라갈 수 있었고 ,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뗏목 주변에 달라붙어서 상어의 공격을 견뎌내야만 했다.
뗏목 위의 부상자가 사망하여 자리가 생겨야 이들 중 1 명이 그나마 안전한 뗏목 위로 올라갈수 있었다. 중상을 입었던 메레딧의 함장 해리 허바드 소령도 이런 식으로 구명뗏목 위에서 사망했다.  뗏목 위라고 꼭 안전한 것만도 아니었다.
한번은 커다란 상어 1 마리가 구명뗏목 위로 튀어 올라와서 부상자의 허벅지를 덥썩 물었다.
지칠대로 지친 동료들이 상어의 꼬리를 잡아당겨 겨우 떼어놓자 상어는 한입 가득 허벅지살을 물고는 유유히 바다로 되돌아갔다.  3 일후 구축함 그레이슨과 그윈에 의하여 구출된 메레딧과 비레오의 승무원은 비레오에 올라타는데 성공한 인원들을 합쳐 88 명이었다.
메레딧에서 185 명 , 비레오에서 51 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비레오와 2척의 바지선은 아무런 손상없이 회수되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메레딧이 일본항공기들의 폭탄과 어뢰들을 대부분 흡수하는 바람에 다른 함정들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송함 벨라트릭스가 99식 급강하폭격기 2 대의 폭격을 받아 지근탄으로 약간의 침수가 발생했을 뿐 알치바 , 제임스타운 , 그리고 니콜라스는 모두 무사히 에스피리투산토로 돌아왔다.  이번의 보급실패로 바지선을 이용한 수송은 무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바지선 수송선단과는 별도로 구축함을 개조한 수상기모함 맥팔랜드와 역시 구축함을 개조한 기뢰부설함인 수타드와 호비가 맥팔랜드의 함장인 존 알더만 소령의 지휘 하에 어뢰 12 발과 대량의 37mm 탄약 및 항공기용 조명탄 , 그리고 110 톤의 항공유를 싣고 10 월 16 일 오후 1 시 20 분에 룽가 정박지에 도착하여 하역을 시작했다.
잠시 후 후송이 결정된 전투신경증 환자를 비롯한 걸을 수 있는 환자 160 명이 승선했다. 16 일 오후 5시 20 분 , 9 대의 99 식 급강하폭격기들이 수송선단을 노리고 공습을 가해왔다.  이때 맥팔랜드는 마지막으로 하역하는 화물인 항공유들을 배 옆에 대어놓은 바지선으로 옮기고 있었다.
합장 앨더만 소령은 즉시 하역을 중단하고 맥팔랜드을 바지선으로부터 떼어놓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바지선은 직격탄을 맞아 폭발했다.
맥팔랜드는 아슬아슬하게 바지선의 폭발 영향을 벗어났으나 곧 폭탄 1 발이 함미에 명중하여 기관을 손상시키고 , 키를 날려 버리면서 함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던 전투신경증 환자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서 폭격에 대응하고 손상부위를 처치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쁜 수병들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구명조끼를 빼앗으려고 하면서 혼란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 이런 북새통 속에서도 맥팔랜드의 대공포 사수들은 일본기 1 대를 격추하고 , 1 대를 손상시켰고 , 손상관리반은 손상부위를 재빨리 처리하여 침몰만은 면했다. 키가 날아가 버린 맥팔랜드는 폭격으로 손상을 입어 출력이 저하된 왼쪽 기관과 다행히 피해를 모면한 오른쪽 기관의 회전수를 교묘하게 조절하여 5노트의 속력으로 툴라기 항에 접근했다.
잠시 후 잡용정 YP- 239 호가 다가와서 맥팔랜드을 툴라기 항으로 예인했다.  맥팔랜드의 인명피해는 탑승했던 환자들을 포함하여 전사 27 명 , 부상 28 명이었다. 이후 맥팔랜드는 툴라기 항에서 일본군의 눈을 피하여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배를 수리하고 , 한편으로는 새로 전개한 고속정들의 모함 노릇을 하다가 11 월 26 일에야 툴라기 항을 떠나 에스피리투산토로 향했다.

( USS McFarland. USS McFarland (DD-237))

과달카날에서는 마루야마 중장의 주공이 정글 속을 행군하는 동안 스미요시 소장의 조공은 해병대의 마타니카우 강 방어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함으로써 1942 년 10 월 20 일부터 마타니카우 강 부근에서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