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 ( 2) - 마타니카우 방면의 전투
일본제 4 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조공을 지휘하던 스미요시 소장은 1942 년 10 월 20 일부터 본격적으로 마타니카우 방어선에 대한 위력정찰을 실시했다. 20 일 아침에 전차 2 대의 지원을 받은 일본군의 강행정찰대가 윌리엄 맥켈비 중령의 제 3/7 대대 방어선의 전방에 출현했다.
그러나 , 곧 해병대의 37mm 대전차포가 전차 1 대를 격파하자 일본군은 물러가 버렸다. 이후 일본군은 하루종일 가끔씩 포격만 가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미군의 M3 37mm 대전차포 M-3 Antitank Gun 37mm Towed.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66743240 )
이튿날인 21 일 저녁이 되자 일본군의 포격이 강해지면서 보병의 지원을 받는 전차 9 대가 마타니카우 강 하구의 모래사장을 지키는 I/3/1 중대의 전면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날도 역시 해병대의 37mm 대전차포가 선두의 전차를 격파하자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다시 철수해 버렸다.
이날 I 중대에서는 일본군의 야포 및 박격포 사격으로 인하여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2 일에는 하루종일 간간이 포격만 이어졌을 뿐 일본군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일본군 주공을 이끌고 정글 속을 행군하던 마루야마 중장은 공격개시를 23 일로 연기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22 일 밤에 마루야마 중장은 다시 공격을 24 일로 연기한다는 무전을 보냈으나 열악한 통신상황으로 인하여 이 사실은 스미요시 소장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미요시 소장은 주공의 공격이 23 일 밤이라고 생각하고 23 일 오후 6시부터 조공의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마타니카우 방어선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보유한 모든 화포가 불을 뿜는 가운데 97식 中전차 9 대를 앞세운 일본군이 마타니카우 강 하구의 모래사장을 건너 제 3/1 대대의 방어선을 향하여 돌격해 왔다.
( 일본육군의 97식 中 전차 치하.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39810497 )
일본군 전차는 선두에서 돌격해 오다가 37mm 대전차포의 사격을 받아 차례차례 파괴되었다.
일본군 전차 중 단 1 대만이 유일하게 해병대의 방어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 이 일본군 전차가 개인호에 도달하자 용감한 해병대원이 전차의 무한궤도에 수류탄을 끼워넣고는 달아나 버렸다.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무한궤도가 끊어지자 일본군 전차는 그 자리에 멈추었고 , 곧 75mm 대전차자주포 ( 하프트랙 ) 가 달려와서 이 일본군 전차를 끝장내었다.
( 마타니카우 강 하구에서 미군에 의하여 파괴된 일본군 전차의 잔해들
The wreckage of the Japanese 1st Independent Tank Company at the mouth of the Matanikau )
전차의 뒤를 따르던 보병들은 대부분 제 11 연대의 곡사포들과 대대 소속 박격포에 의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 3/1 대대와 제 3/7 대대의 81mm 박격포들은 마타니카우강 서안에서 200m 너머까지를 집중적으로 포격했고 , 제 11 연대는 총 10개 포대 40 문의 75mm 및 105mm 곡사포를 동원하여 포인트 곶과 마타니카우 강 사이의 도로를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집결 도중에 엄청난 포격을 얻어맞은 일본군 보병들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수백명의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타니카우 강 하구의 모래사장을 건너 몇 번이고 돌격을 거듭했으나 그때마다 해병대의 집중포격을 받아 처절한 피해를 내면서 실패했다.
보병과 함께 돌격하던 일본군 전차 3 대도 이때 포격을 받아 추가로 격파되었다. 드디어 오후 10 시가 되자 일본군의 돌격기세가 약해지기 시작하여 자정이 되자 드디어 돌격이 멈추었다.
( 마타니카우 방면 전투 상황도)
24 일이 되자 그때서야 스미요시 소장은 주력의 공격이 어제가 아닌 오늘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지리렬한 부하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한번 공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스미요시 소장은 24 일의 공격을 자신이 직접 이끌겠다고 했으나 당시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24 일 오후가 되자 열이 40 도 이상 오르고 , 헛소리를 하다가 혼절하는 등 도저히 작전을 지휘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날 공격은 오카 대좌가 지휘했다.
오카 대좌는 미군 방어선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신 마타니카우 강의 상류를 건너 마타니카우 방어선과 교두보 사이의 빈틈을 통하여 침투하려 했으나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이미 23 일에 하네켄 중령의 제 2/7 대대를 이 방면에 투입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 7 연대본부도 제 2/7 대대를 따라 마타니카우 방면으로 이동했다.
( 오카 부대의 공격상황도 )
제 2/7 대대의 방어선은 야트막한 고지 2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F 중대가 동쪽 고지 , G 중대가 고지 사이에 포진했고 , E 중대는 서쪽 고지의 동쪽 경사면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E 중대와 제 3/7 대대의 방어선 사이에는 약 360m 가량의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 가운데에는 박격포를 위한 관측소가 자리했다. 오카 대좌는 제 2/7 대대와 제 3/7 대대 사이의 틈을 발견하고는 24 일 밤에 방어선 내부를 정찰하라는 임무를 주어 1 개 중대를 투입했다. 일본군들은 박격포 관측소를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방어선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방어선 내부에는 예비병력이 거의 없었지만 갑자기 신중해진 정찰대 지휘관은 후방 지휘소를 기습하거나 해병대의 방어선을 배후에서 공격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는 대신 들어왔던 통로를 따라 새벽이 되기 전에 빠져나갔다. 또다른 일본군의 정찰대 소수병력은 제 2/7 대대의 동쪽 방면으로 침투하여 후방 통신선을 절단하고는 빠져나갔다.
오카 부대는 25 일 밤이 되자 제 2/7 대대의 방어선에 공격을 가했다. 오카 부대의 공격은 주로 동쪽에 위치한 F 중대의 정면에 집중되었다. F 중대는 25 일 저녁 9시 30 분부터 11 시 사이에 최소한 완편 1 개 대대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의 공격을 3 번이나 물리쳤다. 일본군은 마침내 F 중대의 정면에서 물러났다.
F 중대가 이제 드디어 일본군을 막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일본군이 최대 규모의 공격을 가해 왔다. F 중대는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26 일 새벽 3 시에 끝내 일본군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약 150 명의 일본군이 3 개의 기관총호를 포함한 G 중대의 방어선을 차지했다.
일본군이 G 중대의 방어선을 차지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제 2/7 대대의 부대대장 오델 코놀리 소령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본부중대와 지원중대의 모든 병력들을 끌어모아 C/1/5 중대의 1 개 소대와 함께 반격을 가했다. 해병대는 어느 보직이든 기본적으로 소총수로서 충분한 훈련을 받았고 , 코놀리 소령은 이 점을 믿었다. 코놀리 소령의 판단은 정확했다.
통신병 및 취사병같은 비전투병력을 중심으로 한 코놀리 부대는 수류탄을 던질 수 있는 거리까지 일본군 방어선에 몰래 다가가서 완전한 기습에 성공했다.
일본군 기관총 3 정중 2정이 최초의 수류탄 투척으로 파괴되었다.
재 2/7 대대의 박격포와 제 11 연대의 곡사포들이 방어선 배후에 포격을 가하여 일본군 증원군의 접근을 막는 동안 코놀리 부대는 엄청난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하여 당황하는 일본군들을 방어선에서 몰아내었다. 이것으로 오카 부대의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 교두보의 서쪽을 공격하려던 일본군의 조공은 제 5 연대의 주방어선은 고사하고 전진 방어선인 마타니카우 방어선도 뚫지 못하고 좌절되고 날았다.
다만 스미요시 부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반데그리프트 소장이 제 2/7 대대를 추가로 마타니카우 방어선에 투입함으로써 일본군 주공과 맞부딪히게 된제 7 연대의 방어선에는 제 1/7 대대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 스미요시 장군의 조공은 해병대의 주의를 끌고 방어병력을 흡수하여 일본군 주공의 공격을 지원한다는 목표의 일부를 달성한 셈이었다.
10 월 20 일부터 24 일까지 지속된 마타니카우 방면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14 대의 전차를 모두 상실하고 , 합계 600 명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해병대는 마타니카우 강 하구에서 벌어진 23 일까지의 전투에서 25 명의 전사자와 14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 이어진 오카 부대와의 전투에서 추가로 30 명이 더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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