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곰리 제독의 해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를 앞두고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높아가던 1942 년 10 월 18 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대장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중장을 전격적으로 해임하고 , 후임에 헐지 중장을 임명했다. 갑작스런 곰리 제독의 해임을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는 9 월 25 일부터 시작된 니미츠 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 시찰 여행이었다.
( 로버트 곰리 제독 Robert L. Ghormley )
1942 년 9 월 20 일에 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대장이 전선을 시찰하면서 진주만을 방문했다. 니미츠 제독이 직접 아놀드 장군을 맞이했는데 이 자리에는 막 남태평양에서 돌아온 에몬스 장군도 동행했다. 에몬스 장군은 아놀드 장군에게 남태평양해역군이 과달카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여 니미츠 제독을 놀라게 했다.
( 헨리 아놀드 장군GENERAL HENRY H. ARNOLD
.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66079961)
당시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었는데 투입되는 속도보다 소모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거기에 비하면 미국 측의 역량은 이제 막 투입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따라서 과달카날의 해병대가 조금만 더 버텨준다면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니미츠 제독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에몬스 장군의 말을 들은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과 과달카날의 상황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육군항공대의 아놀드 장군도 이 시찰여행에 참가하기로 했고 , 니미츠 제독은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맥아더 대장에게도 초청장을 보내어 누메아에서 회담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 니미츠 제독과의 회담을 위하여 산호해를 건널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맥아더 장군은 대신 자신의 참모장인 서덜랜드 소장과 제 5 항공대 사령관 케니 중장을 누메아에 파견했다.
니미츠 일행을 태운 코로나도 비행정은 1942 년 9 월 25 일에 진주만을 출발했다.
도중에 비행정의 베어링이 타 버리는 바람에 칸톤 섬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니미츠 제독은 그곳에서 남태평양 해역군 항공사령관으로 있다가 킹 제독의 부름을 받고 미해군의 항공국장이 되어 워싱턴으로 부임해 가던 맥케인 소장을 만났다. 맥케인 제독은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기간인 9 월 12 일 밤을 과달카날에서 보냈다.
니미츠 제독이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더냐고 묻자 맥케인 제독은 지속적인 일본군의 공습을 막아낼 더 많은 항공기와 조종사들만 있으면 충분히 방어가능하다고 대답했다.
( 존 맥케인 제독 John S. McCain Sr.(존 메케인 3세의 할아버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blog.naver.com/mirejet/110074068146 )
9 월 28 일에 누메아에 도착한 니미츠 제독은 오후 4 시 30 분부터 8 시까지 곰리 제독 , 아놀드 장군 ,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대리인 서덜랜드 소장과 케니 중장이 참가한 가운데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아놀드 장군은 북아프리카 진공을 앞두고 유럽 전선에서 항공기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데도 남태평양 해역군에는 아직도 많은 육군항공기들이 예비기체로 비축된 채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놀드 장군은 따라서 남태평양해역군의 예비기체들이 모두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는 남태평양해역군에 더 이상 육군항공기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니미츠 제독을 언짢게 만들었다.
과달카날을 둘러싼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및 대응 방침에 대한 곰리 제독의 설명을 듣고 난 니미츠 제독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했는데 대답을 들어본 니미츠 제독은 곰리 제독이 철저한 패배주의에 빠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곰리 제독은 병력이 모자란다고 하면서도 있는 병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은 1942 년 6 월 11 일에 미육군에게 피지 방어 임무를 넘겨줌으로써 자유로운 상태에 있던 제 3 뉴질랜드 사단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곰리 제독은 이 병력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무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만일 제 3 뉴질랜드 사단을 누메아로 불러들이면 누메아를 방어하던 미육군 아메리칼 사단을 통째로 빼내어 과달카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누메아를 비롯한 뉴헤브리디스 제도에 주둔 중인 22,000 명이 넘는 병력 중에서 1 개 연대 정도는 얼마든지 빼서 과달카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부나- 고나를 지키고 , 과달카날을 되찾기 위하여 2 개 전선에서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고 있는 일본군이 동시에 뉴 헤브리디스 제도를 대규모로 침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에스피리투산토라는 훌륭한 중계기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육군항공기들을 과달카날에 투입하지 않는 이유도 알수 없었고 , 곰리 제독이 일본군의 도쿄급행을 저지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9 월 29 일 오후에 에스피리투산토에 도착한 니미츠 제독은 이곳의 분위기는 누메아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스피리투산토에서는 어떻게 하면 과달카날의 해병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인가하는 명제를 중심으로 모든일들이 실질적이고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패배주의는 아직까지는 누메아의 사령부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아 니미츠 제독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9 월 30 일에 B- 17 을 타고 과달카날에 도착한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의 해병대원들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을 중심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과달카날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을 보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
신념에 찬 병사들의 모습에서 과달카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한 니미츠 제독은 기분이 좋아져서 그날 저녁에는 항상 신중한 성격상 좀처럼 하지 않는 과음까지 했다. 기분이 좋은 상태로 늦은 밤까지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니미츠 제독은 다음날 과달카날을 떠나면서 자신은 과달카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 과달카날을 방어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반데그리프트 장군에게 약속했다.
니미츠 제독이 생각한 지원은 단지 병력 , 항공기 , 조종사 , 보급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패배주의에 빠진 지휘관을 적극적인 지휘관으로 교체하여 분위기를 쇄신하는 일이 어쩌면 과달카날의 해병대에게 가장 큰 지원이 될 수도 있었다. 에스피리투산토를 거쳐 누메아로 돌아온 니미츠 제독은 곰리 제독에게 최대한 빠른 시간 내로 누메아에서 1 개 보병연대를 빼내어 과달카날로 파견하고 일본군의 도쿄급행을 저지하라고 엄격하게 명령하고는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이후 과달카날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니미츠 제독은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피해를 입고 진주만에서 수리 중이던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지은 다음 10 월 16 일에 남태평양으로 파견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호위함 중에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태평양에 들어오자마자 9 월 6 일에 피지 근해에서 암초와 충돌하여 역시 진주만에서 수리를 받고 있던 신형전함 사우스다코타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하와이에 있던 B - 17 중폭격기 50 대도 남태평양으로 파견했고 , 1941 년 10 월 1 일에 하와이에서 창설되어 줄곧 하와이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제 25 보병사단에게도 남태평양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제 25 사단은 1942 년 11 월 2 일에 하와이 방어임무에서 해제되어 3 주간 집중적인 정글전투훈련 및 상륙훈련을 받은 후 11 월 25 일부터 하와이를 떠나 12 월 17 일부터 과달카날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니미츠 제독은 시찰여행에 동행했던 자신의 참모들과 10 월 15 일 오후에 회의를 가진 뒤 패배주의에 빠진 곰리 제독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후임을 누구로 할 것이냐였다.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사람은 켈리 터너 소장이었다.
터너 제독은 별명이 ' 무시무시한 터너 (Terrible Turner)' 일 정도이니 패배주의 따위와는 거리가 먼 강인하고 유능한 지휘관임에는 틀림없었다. 문제는 터너 제독에게는 불과 2 달 전에 당한 사보 섬 해전 참패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장인 곰리 제독의 후임으로 소장인 터너 제독을 그대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중장이었던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의 후임으로 소장을 임명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과달카날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터너 제독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임명해야 했다. 그러나 , 사보 섬 해전 참패의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해군성 차원에서 정식 조사를 예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식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현장의 전술 지휘관이었던 터너 제독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버린다면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조사결과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물론 니미츠 제독이나 킹 제독은 터너 제독에게 사보 섬 해전 참패의 책임을 묻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벌에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것과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당사자를 중장으로 승진시켜 버리는 식의 노골적인 실력행사를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서 이건 니미츠 제독 뿐 아니라 킹 제독에게도 정치적으로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터너 제독은 해병대가 한시 바삐 과달카날의 좁은 교두보에서 벗어나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공격 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헨더슨 비행장의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반데그리프트 장군 및 니미츠 제독 자신의 방침과 정반대의 의견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터너 제독을 제외하고 나자 남은 사람이 헐지 제독 밖에 없었다. 그런데 헐지 제독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사령관으로 꼭 필요할 뿐 아니라 그의 적극적인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장에서 지휘하는 일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인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으로서는 제대로 능력 발휘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결국 이날 회의는 후임 사령관을 결정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 그날 저녁에 니미츠 제독은 결단을 내려 헐지 제독을 남태양해역군 사령관으로 결정했다. 그는 곧 킹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공격성이 부족한 곰리 제독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후임 사령관으로 충분히 공격적인 헐지 제독을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니미츠 제독의 요청을 승인하는 킹 제독의 전문이 다음날인 16 일에 도착하자 , 니미츠 제독은 즉시 헐지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당장 누메아로 가라고 명령했다.
( 윌리엄 헐지 제독William Frederick Halsey, Jr.) .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blog.naver.com/mirejet/110051213763 )
진주만 기습 이후 계속 해상에서 근무한 헐지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 직전인 1942 년 5 월 말에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한 악성 피부염으로 그만 입원해야만 했다. 이후 헐지 제독은 미본토로 건너가 이 기회에 지병이던 치질 수술도 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건강을 추스렸다.
충분히 건강을 회복한 헐지 제독은 8 월 31 일에 새러토가가 피격될 당시 가벼운 부상을 입고 일선에서 물러난 플레처 제독의 후임으로 항공모함기동부대의 사령관이 되기 위하여 남태평양으로 돌아왔다. 플레처 제독이 떠난 이후 항공모함기동부대는 토머스 킨케이드 소장이 임시로 지휘하고 있었다.
헐지 제독은 항공모함기동부대를 맡기 전에 과달카날의 상황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아두려고 과달카날로 향하던 도중 예정된 과달카날 시찰을 취소하고 즉시 누메아로 직행하라는 니미츠 제독의 명령을 받았다. 헐지 제독은 영문도 모른 채 즉시 누메아로 발길을 돌렸다. 헐지 제독이 탄 비행정이 누메아 항에 착수하자 봉인된 니미츠 제독의 명령서가 전달되었고 , 그때서야 헐지 제독은 자신이 곰리 제독의 후임으로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헐지 제독이 중간에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빠져 나가버리자 임시로 항모기동부대부대를 지휘하던 킨케이드 제독은 항공모함기동부대 사령관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적극적인 성격이면서 미해군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던 매력적인 품성을 지닌 헐지 제독이 소극적인 곰리 제독의 후임으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은 남태평양해역군의 모든 장병들을 열광시켰다.
헐지 제독의 취임 소식이 전해지자 남태평양해역군의 모든 함정에서는 승무원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고 , 과달카날에서는 말라리아로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까지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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