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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47) - 일본군의 제 3차 공세 (5) /blog.naver.com/imkcs0425/60112704352


47.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 ( 5) - 일본군의 패배

해병제 1/7 대대와 육군의 제 3/164 대대는 일본군의 첫날 공격을 무사히 막아내어 1942 년 10 월 25 일 아침 7시가 되자 일본군은 일단 물러갔다.  그러나 1 시간 후인 오전 8시가 되자 일본군의 150mm 곡사포가 사격을 시작하여 오전 11 시까지 3시간 동안 10 분 간격으로 헨더슨 비행장에 사격을 가해왔다. 멀리 북쪽해역에서는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의 일본함대가 남하하고 있었다.  이 일본함대는 다음날 미국함대와 격돌하여 산타크루즈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전투기 활주로는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오전 10시 30 분부터 이착륙이 가능해졌고 , 일본군은 25 일 하루 동안에 7 차례의 공습을 가해왔다.
오후가 되어 활주로가 마르자 전투기들이 날아올라 17 대의 제로기와 5 대의 1 식 육상 공격기를 격추했고 , 대공포가 추가로 5 대를 더 격추했다.
10 월 16 일부터 25 일 사이에 칵터스 항공대는 104 대의 일본기를 격추하면서 자신들은 14 대만 잃는 뛰어난 전과를 달성했다.
이 기간동안 대공포가 추가로 10 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 완성 이후 실로 오랜만에 낮에 수상함정들을 과달카날로 보냈다.
제 8 함대 소속 경순양함 유라와 8척의 구축함들로 이루어진 공격부대가 교두보 포격임무를 맡은 곤도 제독의 제 2 함대에 앞서서 25 일 낮에 과달카날 방면으로 남하했다.
25 일 새벽에 일본육군이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했다고 하다가 다시 번복하는 등 과달카날 섬의 상황이 대단히 혼란스러웠으므로 공격부대의 지휘관인 제 4 구축대장 다카마 다모츠 소장은 신중을 기하여 먼저 구축함 아카즈키 , 이카주치 , 그리고 시라츠유를 먼저 내보냈다.
이 3 척의 구축함은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뛰어들어 우선적으로 미군 함정들을 공격하고 이어서 만일 헨더슨 비행장이 아직 미군 수중에 있다면 비행장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일 상황이 확실해지면 곧 유라와 5척의 구축함이 뒤따라서 남하할 것이었다.

( 세미뇰과 YP- 284 정의 상실 )

일본구축함 3척이 과달카날을 향하여 남하 중일 때 과달카날에서는 제 1 차 대전형 구축함을 개조한 기뢰부설함 트레버와 제인이 어뢰정들을 위한 보급품들을 가득 싣고 툴라기 항에 도착했다. 갑판 위까지 어뢰와 탄약 , 그리고 휘발유를 가득 싣고 , 함미에는 툴라기로 파견되는 어뢰정을 1 척씩 예인한 트레버와 제인이 툴라기 항에 도착하자 곧 양륙작업이 시작되었다.
25 일 오전 10 시에 갑자기 북서쪽으로부터 일본구축함 3척이 출현했다.
선임장교인 트레버의 함장 애그뉴 소령은 즉시 판단을 내려 양륙을 중지하고 10시 4 분부터 남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10시 18 분에 16,000m 거리에서 트레버와 제인을 발견한 일본구축함들은 즉시 고속으로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기관병들의 노력 덕분에 트레버와 제인은 29 노트라는 놀라운 속력으로 달아나고 있었으나 , 일본구축함들은 35노트의 속력으로 추격하고 있었다.
10시 30 분에 거리가 8,000m 까지 줄어들자 일본구축함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트레버와 제인은 일본구축함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하여 서쪽으로 변침하면서 함포로 반격을 가했으나 이들이 장비한 3 인치 함포의 사정거리는 7,200m 에 지나지 않았다.
10시 35분에 트레버와 제인은 일본구축함들의 표적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남북으로 갈라져서 나란히 도망쳤다. 일본군의 포격은 주로 남쪽의 제인에게 집중되었다.
제인은 29 노트의 속력으로 지그재그 항진을 하면서 불과 1 - 2m 차이로 수많은 포탄을 피해갔으나 10시 38 분에 일본군의 포탄 1 발이 후방 포탑에 명중하여 3 명이 전사했다.
10시 40 분에 활주로가 마르면서 이륙에 성공한 칵터스 항공대의 항공기 1 대가 일본구축함들을 폭격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이로써 헨더슨 비행장이 아직도 미군 수중 있음을 확인한 일본구축함들은 제인에 대한 추격을 포기하고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급선회했다.
일본구축함들이 남쪽으로 선회했을 때 룽가 정박지에서는 잡용정 YP- 284 정과 예인선 세미뇰이 한참 양륙 중이었다.
칵터스 해군 ( Cactus Navy) 라고 불리면서 툴라기 섬과 과달카날 섬 사이를 다니면서 연락선 역할을 하던 이들 함정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툴라기로 부터 병력 , 무기 , 탄약 , 휘발유를 과달카날 섬에 양륙하고 있었다.  YP- 284 정의 정장 칼 라스무센 대위는 다가오는 일본구축함들을 보고 즉시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으나 이미 늦었다.
10시 50 분에 포탄 1 발이 명중되어 화재가 발생했고 , 몇분 후에 기관실이 명중탄을 맞아서 동력이 끊어지고 급속히 침수가 발생하면서 YP- 284 정은 순식간에 침몰했다.
승무원들은 앞다투어 바다에 뛰어들어 전원 살아남았으나 , 승객이었던 제 10해병연대 I 포대 소속의 해병 3 명이 사망했다.
YP- 284 정과 동시에 공격을 받았던 예인선 세미뇰도 수많은 명중탄을 맞았으나 , 일본군의 포탄이 전부 선체를 그냥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치명적인 손상은 면했다.
그러나 , 누출된 휘발유에 불이 붙으면서 11 시 20 분에 침몰했다.
비교적 탈출할 시간이 충분했던 세미뇰에서는 1 명을 제외한 전원이 생명을 건졌다.
일본구축함들이 과달카날 섬의 북해안에 접근하자 룽가 곶 부근에 배치되어 있던 제 3해병방어대대 소속의 5 인치 해안포 2 문이 사격을 개시하여 10시 55분에 구축함 아카즈키를 명중시켰다.  이에 일본구축함들은 11 시 4 분까지 9 분간 해안포 2 문과 포격전을 벌였다.
일본구축함들은 곧 추가로 2 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았고 , 게다가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접근하자 일본구축함들은 연막을 뿌리면서 고속으로 북상하여 도망쳤다.
칵터스 항공대의 항공기들이 기세등등하게 쫓아갔으나 연막을 뿌리면서 고속으로 교묘하게 달아나는 일본구축함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 칵터스 항공대는 포기하지 않고 과달카날 북방 해상을 이잡듯이 정찰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경순양함 유라와 8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공격부대 전체가 전속력으로 남하하여 한꺼번에 과달카날로 몰려와서 과감하게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했더라면 아마도 25 일 하루동안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 뒤늦게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러 남하하던 유라와 5척의 구축함들은 이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5 일 12시 55분에 칵터스 항공대의 정찰기가 유라와 구축함들을 발견했다.
곧 달려온 돈틀레스 폭격기들이 유라와 구축함 아키즈키에게 각 1 발씩의 명중탄을 기록했는데 특히 유라는 후방 기관실에 명중하여 침수가 일어나면서 속력이 떨어졌다.
공격부대는 포격임무를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으나 , 칵터스 항공대가 그냥 돌아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오후 5시에 6 대의 B- 17 과 6 대의 돈틀레스가 일본함대를 공격했다.
돈틀레스가 유라에게 폭탄 1 발을 명중시켜 유라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하여 유라의 함수부터 함미까지 모두 불길에 휩싸이자 곧 함을 포기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구축함 하루사메와 유다치가 어뢰를 발사하여 유라를 처분했다.
유라의 격침은 역시 주간에는 과달카날 근해의 주인이 미군이라는 걸 다시 한번 증명해 주었다.


(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유라.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252523 )

25 일에 남쪽 방어선에서는 방어구역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해병제 1/7 대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룽가 강에서 피투성이 능선에 이르는 1,300m 길이를 방어했고 , 그 동쪽은 육군제 3/164 보병대대가 담당했다.
제 1/7 대대의 중대장들은 이동 중인 자신의 부하들 중 일부가 육군의 개런드 소총을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제 164 보병연대장 무어 대령이나 해병제 1 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묵인했다.
과달카날은 전쟁터였고 개런드 소총은 소총수의 화력을 단번에 증가시켜 주는 놀라운 신무기였다. 해병대원들이 들고 있는 개런드 소총이 해병대가 아니라 미육군의 재산이라는 사실은 전쟁터인 이곳 과달카날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전사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어 후송되어야 할 육군병사의 개런드 소총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고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 - 해병대원- 들이 사용하는 것이 옳았다.
다만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1942 년 12 월에 해병제 1 사단이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할 때 개런드 소총의 수송함 내 반입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해병대원들이 무단으로 ' 임대하여 ' 사용하던 개런드 소총들을 원래 주인인 육군제 164 연대에게 거의 다 돌려주고 과달카날을 떠났다.
제 3/164 대대는 피투성이 능선의 동쪽 지역을 방어했다.  I 중대가 서쪽 , K 중대가 중앙 , L 중대가 동쪽을 방어했다.
각 중대의 90m 후방에는 60mm 박격포들이 자리를 잡았고 , 60mm 박격포의 90m 후방에는 대대의 81mm 박격포들이 자리잡았다.
4 문의 37mm 대전차포들이 L 중대와 인접한 제 2/164 대대 사이에 난 오솔길을 겨냥했다.
25 일 하루동안 해병대원들과 육군병사들은 진지를 보강하고 , 사계청소를 실시했으며 무기들을 정비했다.  일부 병력들은 밤새 후방으로 침투한 일본군들을 색출하여 모두 사살했다.
미군 방어선 전방의 정글 속에서는 마루야마 중장이 두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동쪽으로부터 미군이 역습을 가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다.
마루야마 중장은 이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믿고 우익대를 공격에 참가시키지 않고 밤새도록 공격대의 동쪽 측면을 방어했다.
따라서 공격은 서쪽에 제 16 연대 , 동쪽에서 제 29 연대의 2개 연대로만 실시하게 되었다.
25 일 해가 떨어지자 일본군들은 다시 기관총의 엄호사격 하에 수류탄을 던지면서 총검돌격을 실시했다.  가장 강력한 공격은 동쪽의 L/3/164 중대와 제 2/164 대대와의 경계 지점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실시한 공격이었다.  일본군은 이 오솔길에 기관총중대 2개와 보병 1 개 중대를 투입하여 대단한 기세로 돌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 제 164 보병연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치열한 기관총과 소총 사격 , 박격포와 곡사포의 집중 포격에 더하여 37mm 대전차포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산탄을 사용한 37mm 대전차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미리 조준을 맞추어 놓은 4 문의 37mm 대전차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자 돌격해오던 수십명의 일본군들이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단번에 휩쓸려 나갔다.
일본군의 주공을 바로 정면에서 받은 L/3/164 중대에는 곧 사단예비대에서 파견된 해병 1 개 중대가 증원되었고 , 인접한 제 3/164 대대의 G 중대에서도 1 개 소대를 따로 증원해 주었다.
결국 일본군은 이 오솔길에서만 약 250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공격에 실패했다.
일본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밤새도록 약 30 명에서 200 명 단위로 돌격을 거듭했다.
그러나 , 이미 병력을 보강받은 해병대와 육군 병사들은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아가며 일본군의 돌격을 거듭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대를 지휘했던 나스 유미오 소장이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했고 , 제 16 연대장 히로야스 도시로 대좌도 전사했다.
제 29 연대장 후루미야 대좌는 전날 전투에서 이미 전사한 상태였다.
26 일 아침이 되자 마침내 기진맥진한 일본군은 1,500 구에 달하는 시체를 남겨둔 채 철수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는 완전히 실패했다.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일본육군이 실시한 최대 규모의 지상공세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지상공세이기도 했다.
제 3 차 공세 이후로 일본군은 과달카날 전투가 종식될 때까지 교두보에 대한 지상공세를 실시하지 못했다.  공격 실패 이후 교두보 남쪽의 정글 속에서 3 일간 머물면서 병력들을 추스린 일본군은 29 일부터 서쪽의 코컴보나와 동쪽의 콜리 곶을 향하여 정글 속을 지나 후퇴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식량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정글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제 3 차 공세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미군들은 제 1/7 대대와 제 3/164 대대의 정면에서만 1,500 구가 넘는 일본군 시체를 발견했고 , 방어선 남쪽의 정글 속에서 미군의 포격에 희생된 일본군 시체를 1,000 구 가까이 발견했다.
일본군 중 직접적인 전투의 결과로 전사한 인원만 3,568 명에 달했다.
조공에 참가했던 제 4 연대는 11 월이 되자 전투가능한 인원이 2개 중대도 안 되는 403 명에 불과했다.
미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및 실종 30 명 , 부상 52 명을 기록한 육군을 포함하여 사상자 약 300 명 정도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었다.  주공을 남쪽으로 결정한 순간부터 일본군의 패배는 사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주공의 공격방향을 은폐하는데 성공하여 가장 방어가 약한 제 1/7 대대 정면에 돌격할 수 있었으나 대신 정글을 행군하느라고 야포와 박격포를 모두 도중에 내버리고 올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1 개 연대 방어선을 1 개 대대가 지키고 있었다고 해도 오로지 기관총만이 화력지원을 해줄수 있는 상황에서 보병돌격으로 충분한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미리 준비된 진지에서 기다리는 미군방어선을 뚫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해병제 1/7 대대와 육군제 3/164 대대는 이번 전투를 통하여 뛰어난 전투력과 불굴의 용기를 충분히 증명했다.
특히 해병제 1/7 대대를 지원한 육군제 3/164 대대의 선전은 지금까지 육군의 전투력을 자신보다 한수 아래로 낮추어보던 해병대원들의 시각을 크게 바꾸었고 , 해병대와 육군 사이에 진정한 전우애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과달카날 섬에서 일본과 미국의 대규모 지상군이 격돌하는 동안 해상에서도 일본연합함대와 태평양함대의 대규모 항모기동부대들이 정면 으로 충돌했다.
산호해 해전 , 미드웨이 해전 , 동부솔로몬 해전에 이은 사상 4 번째의 함대항공전인 산타크루즈 해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