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52) -산타크루즈 해전 (5) /blog.naver.com/imkcs0425/60113695753


52. 산타크루즈 해전 (5) - 호넷의 최후

1942 년 10 월 26 일 아침에 일본군의 공습으로 폭탄 4 발과 어뢰 2 발 , 그리고 2 번의 자살공격을 당하여 우현으로 8 도 기울고 , 광범위한 화재가 발생한 호넷은 엔터프라이즈가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동안 살아남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호넷의 화재는 대단히 위협적이었으나 승무원들은 호네트 옆에 갖다붙인 구축함 모리스와 러셀의 소화호스를 끌어다가 최선을 다하여 화재와 싸워 오전 11 시 경에 마침내 화재를 진압했고 , 어뢰에 맞은 구멍도 신속하게 틀어막아서 함선의 기울기도 8 도에서 더 이상 기울지는 않았다.
그동안 호넷의 기관실 승무원들은 파편으로 가득한 캄캄한 통로를 목숨을 걸고 힘겹게 통과하여 기관실에 도착했다.  캄캄하고 후덥지근한 기관실에서 승무원들은 욕설을 내뱉었다가 다시 기도하기를 번갈아 해 가면서 필사적으로 수리에 매달려 마침내 기적적으로 호넷의 기관 일부를 다시 구동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출력이 약하여 프로펠러를 돌릴 수는 없었지만 기관의 구동과 함께 발전기의 구동이 가능해지면서 함내의 조명을 비롯하여 전기에 의존하는 호넷의 많은 필수적인 기능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전 11 시 5분에 중순양함 노댐턴이 호넷을 예인하기 위하여 접근했다.
4 분 후인 11 시 9 분에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러 가던 일본군 제 2 차 공격대의 99식 함상 폭격기 1 대가 대열에서 이탈하여 호넷에다가 폭격을 가했으나 빗나갔다.
11 시 23 분부터 노댐턴은 호넷을 견인하기 시작했으나 , 노댐턴의 45mm 짜리 케이블은 너무 약하여 곧 끊어지고 말았다.
할수 없이 호넷의 후방 엘리베이터 부근의 창고 깊은 곳에 처박혀 있던 51mm 짜리 케이블을 찾아내어 오후 1 시 30 분부터 3 노트의 속력으로 다시 예인을 시작했다.

( 중순양함 노댐턴이 호넷을 예인하고 있는 모습 )

호넷의 함장 메이슨 대령은 필수인원 이외에는 모두 하선하도록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부상자를 포함한 875 명의 수병들이 오후 2시 40 분까지 구축함 러셀과 휴이로 옮겨탔다.
호넷의 기관이 구동되면서 전기가 들어오고 3 노트로 시작된 예인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하자 호넷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모두의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이 그러한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제 2 함대 사령관 곤도 제독은 자신의 우세한 수상함대 세력을 사용하여 야전을 기도했다.
그는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자신의 전진부대에 통합시킨 후 남쪽으로 미국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 트럭으로 철수 중이던 나구모 제독의 항공모함 중에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즈이가쿠는 수상함대의 상공을 지키기 위하여 즉시 남쪽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편 , 쇼가쿠의 피격 이후 나구모 제독으로부터 항공작전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준요 함상의 가쿠다 가쿠지 제독은 호넷의 숨통을 반드시 끊어놓겠다고 결심했다.
가쿠다 제독은 산호해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고도 되살아나 1 개월 후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에게 끔찍한 피해를 안겨 준 요크타운의 전철을 다시는 밟을 생각이 없었다.
가쿠다 제독은 오후 1 시에 준요의 함재기와 피격된 쇼가쿠의 함재기를 합쳐 제로기 8 대 , 97식 함상 공격기 7 대로 이루어진 제 4 차 공격대를 출격시켰고 , 15분 후에는 즈이가쿠에서 제로기 2 대 , 99식 함상폭격기 2 대 , 97식 함상공격기 6 대로 이루어진 제 5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제 5차 공격대의 97식 함상공격기들은 어뢰 대신 장착에 시간이 적게 걸리는 800kg 짜리 대형폭탄을 장비했다.
오후 3시 33 분에는 준요에서 제로기 6 대 , 99 식 함상폭격기 4 대로 이루어진 마지막 공격대인 제 6 차 공격대가 출격했다. 제 4 차 공격대는 오후 3시 15분에 호넷 상공에 도달했다.
깜짝 놀란 노댐턴이 즉시 예인 케이블을 끊고 대공전투에 돌입했으며 , 다른 호위함들도 호넷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일본기들은 다시 1 발의 어뢰를 호넷의 우현에 명중시켜 사실상 호넷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새로 피격된 수선 하의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8 도를 유지하던 호넷의 기울기가 순식간에 14 도로 심해지자 , 함장 메이슨 대령은 눈물을 머금고 퇴함 명령을 내렸다.
즉시 구축함들이 달려와 호넷의 잔존 인원들을 옮겨싣기 시작했고 , 메이슨 대령은 3시 50 분에 마지막으로 호넷을 떠났다.
호넷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111 명의 전사자와 108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 함의 좌현 비행갑판에서 퇴함을 위해 접근하는 구축함을 기다리고 있는 호넷의 승무원들)

메이슨 대령이 함을 떠난지 5분 후인 3시 55분에 제 5차 공격대가 도착하여 800kg 짜리 대형폭탄 1 발을 명중시켰고 , 5시 2 분에는 마지막으로 제 6 차 공격대가 다시 250kg 짜리 폭탄 1 발을 이미 텅 비어있던 호넷의 격납 갑판에 명중시켰다.
제 17기동부대의 호위함정들은 호넷을 남겨두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호넷의 상태를 보고받은 헐지 제독은 일본인들이 호넷을 도쿄 만에 끌고가서 구경거리로 삼지 못하도록 격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구축함 무스틴이 1,600m 거리에서 어뢰 8 발을 발사했으나 3 발만 명중했다. 호넷은 가라앉기를 거부했고 , 오후 7시 20 분에 다시 구축함 앤더슨이 달려와서 8 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6 발을 명중시켰으나 호넷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호넷 상공에 일본군 정찰기가 나타났다. 일본군의 정찰기가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아니라 일본군의 전함이나 순양함에서 운용하는 수상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구축함 무스틴과 앤더슨은 강력한 일본의 수상함대가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 호넷을 격침하는 임무와 함의 안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결국 호넷의 격침을 포기한 무스틴과 앤더슨은 대신 호넷의 함수에서 함미에 걸쳐 430 발의 5 인치 포탄을 발사하여 호넷에 다시 광범위한 화재를 일으키고는 오후 8시 20 분에 전속력으로 철수했다.
40 분 후인 오후 9시에 아베 제독의 전위 부대가 함수에서 함미까지 불길에 휩싸인 호넷을 수평선상에서 발견했다. 호넷에 접근한 아베 제독은 세찬 불길 때문에 도저히 호넷을 견인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축함 아키구모와 마키구모에 호넷을 격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산소어뢰 4 발이 최종적으로 호넷을 격침했다. 개전 초기 연전연승의 분위기에 들떠 있던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를 대낮에 공습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호넷은 1942 년 10 월 27 일 오전 1 시 35분에 일본해군의 승무원들이 만족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산타크루즈 제도 근해에서 침몰했다.
호넷의 침몰 직후 일본제 2 함대 사령관 곤도 제독은 추격을 포기하고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포함한 전 일본함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산타크루즈 해전이 끝났다.
산타크루즈 해전은 전술적으로 명백한 일본해군의 승리였다.
일본해군은 항공모함 호넷과 구축함 포터를 격침하고 ,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구축함 스미스를 중파했으며 전함 사우스다코타와 대공경순양함 산후앙을 소파했다.
반면 , 일본해군은 격침된 함정은 없었으며 , 항공모함 쇼가쿠와 중순양함 치쿠마가 대파되었고 , 경항공모함 즈이호가 중파되었다. 일본해군은 기본 세력에서 우세했을 뿐 아니라 미드웨이의 전훈을 잘 살려서 비교적 선전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작전 계획 단계에서부터 나구모 제독의 제 3 함대에게 헨더슨 비행장 폭격 임무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나구모 제독이 오로지 미국항공모함 기동부대와의 전투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배려했다.
나구모 제독 또한 미군함대와의 조우가 예상되자 24 대의 정찰기를 투입하여 2 단 수색으로 꼼꼼하게 정찰을 실시함으로써 적시에 미국함대를 찾아내어 공격할 수 있었다.
항공모함 전면에 수상함대를 내보내어 미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도 실제로 호넷의 제 3 차 공격대를 끌어들임으로서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함대로서는 엔터프라이즈의 항공통제 실패가 가장 큰 패인이라고 볼수 있었다.
항공기를 이용한 함대 방어 전술은 이제 막 개발되는 중이었으며 이때까지는 상당한 경험과 숙련도를 갖춘 항공통제관만이 제대로 된 항공통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미함대의 항공통제기술은 이후 1943 년 전반기를 거치면서 안정성과 효율성을 확보하여 제대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 미해군에게 고무적인 일은 해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기와 조종사의 손실은 오히려 일본해군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군은 92 대 , 미군은 74 대의 항공기를 상실했으며 , 조종사는 일본해군이 70 명 , 미해군은 33 명을 상실함으로써 일본해군의 손실이 미해군의 2 배를 넘었다.
이 사실은 드디어 일본군 조종사와 미군 조종사의 기량 차이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증거로서 일본군 조종사 자원의 고갈이 시작되는 동시에 미드웨이 해전 이후 새로 실전에 투입된 미해군 조종사들의 전반적인 실력이 몰라볼 정도로 크게 상승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막대한 조종사의 손실을 견디지 못한 일본해군이 이후 1944 년 6 월의 필리핀해 해전까지 함대항공전을 회피함에 따라 산타크루즈 해전은 패자인 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승자인 일본해군의 항모기동부대를 링 바깥으로 쫓아내 버리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해군 조종사의 기량 향상과 더불어 한층 막강해진 미해군의 대공화력도 일본군 항공기와 조종사의 대량 손실에 크게 기여했다. 뛰어난 레이더 관제기술은 대공원형진의 전투효율을 크게 높였으며 , 전함 사우스다코타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 새로 장비된 신형의 보포스 40mm 대공포는 대공전투에서 놀라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미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보다 확실히 떨어지는 분야라고는 장거리 정찰능력과 뇌격능력 뿐이었다.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장교들은 정찰능력의 강화를 위하여 항공모함 기동부대 내에 수상기 모함을 포함시켜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찰능력 문제는 1943 년 후반기부터 신조 항공모함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기동부대에서 가용한 함재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자연히 해결되었다. 나머지 한가지 문제인 뇌격능력은 결국 종전시까지 일본해군을 넘어서지 못했다.
항공어뢰 분야에서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개량을 거듭한 미해군의 항공어뢰가 일본해군의 항공어뢰와 거의 동등한 수준까지 이르렀으나 , 잠수함용 어뢰나 특히 수상함용 어뢰 분야에서는 종전시까지 일본해군과의 격차가 엄연히 존재했다.
수상함용 어뢰 분야는 태평양전쟁의 시작부터 종전시까지 일본해군이 독보적인 우위를 지킨 거의 유일한 분야였다. 산타크루즈 해전의 결과 미해군은 누메아에서 긴급수리에 들어간 엔터프라이즈가 1942 년 11 월 11 일에 다시 해상에 나올 때까지 태평양해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항모가 0척인 상황에 처했다.
일본해군 또한 손상을 입은 쇼가쿠와 즈이호 및 기관고장을 일으킨 히요 , 그리고 자체의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은 즈이가쿠가 모두 일본본토로 철수함에 따라 남태평양에서 사용가능한 항공모함이 준요 1 척으로 줄어들었다.
1942 년 11 월 11 일에 엔터프라이즈가 긴급수리를 마치고 해상에 나왔을 때 과달카날의 상황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고 , 수리를 마친 새러토가가 12 월 5 일에 누메아에 도착할 때까지 드넓은 태평양에서 항공모함이라고는 오직 엔터프라이즈 1 척 뿐이었다.
누군가가 격납갑판에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의 당시 심정을 간결하게 표현한 문구를 페인트로 커다랗게 써 놓았다.
" Enterprise vs.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