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크루즈 곶 전투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를 물리친 직후부터 교두보를 서쪽으로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1942 년 10 월 29 일에 터너 제독으로부터 4,000 명의 병력을 가진 제 8해병연대를 11 월 4 일에 교두보 내에 상륙시키겠다는 보장을 받아낸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서쪽을 향한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증원군의 규모가 대대 수준에서 연대 규모로 커짐에 따라 공세에 투입할 병력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 목표도 애초의 크루즈 곶에서 더 나아가 코컴보나를 점령하기로 했다.
만일 교두보를 코컴보나까지 확장하면 귀찮은 일본군의 150mm 곡사포를 헨더슨 비행장에서 사정거리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었고 , 또한 일본군이 가장 빈번하게 애용하는 도쿄급행의 좋은 종착역 하나를 빼앗아 버리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공격의 주력은 에드슨 대령의 제 5 연대와 제 2 연대의 제 1 대대 및제 2 대대였으며 , 저격 -정찰팀과 제 3/7 대대로 이루어진 활링 그룹이 남쪽에서 주력의 공격을 엄호할 예정이었다.
포병연대인 제 11 연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하고 , 그 외에도 칵터스 항공대와 해군함정들이 추가로 화력지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작전계획은 단순했다.
제 11 연대와 칵터스 항공대 , 그리고 해군함정들이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고 나면 제 5 연대의 제 1 대대와 제 2 대대가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1,300m 폭의 전선을 형성하여 나란히 서진할 계획이었다.
활링 부대는 남쪽에서 제 5 연대와 나란히 전진하면서 주력의 남쪽 측면을 방어할 것이었고 , 제 3/5 대대와 제 2 연대의 2개 대대는 예비대였다. 공격시간은 1942 년 11 월 1 일 오전 7시로 정했다.
( 크루즈 곶 전투상황도)
10 월 31 일 저녁이 되자 제 1 공병대대의 A 중대 , C 중대 및 D 중대가 마타니카우 강의 하구에서 900m 정도 상류로 올라간 곳에 각 중대마다 하나씩 3개의 다리를 건설했고 , 1 일 새벽이 되자 제 2/5 대대의 E 중대가 고무보트를 타고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가서 다리의 서쪽 출구를 방어했다.
( 공병대가 마타니카우 강에 건설한 다리 )
1942 년 11 월 1 일 오전 6시 30 분부터 제 11 연대의 75mm 곡사포에 더하여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 , 경순양함 헬레나와 구축함 스테렛의 함포들이 크루즈 곶 부근에 집중적으로 공격준비사격을 가하였다.
공중에서는 칵터스 항공대의 돈틀레스들과 P- 39 전투기들 , 그리고 에스피리투산토에서 날아온 B - 17 중폭격기들이 코컴보나 부근의 일본군 기지를 폭격하고 , 기총소사를 가했다.
그동안 마타니카우 강의 서안에 집결을 마친 제 1/5 대대 및제 2/5 대대와 활링 부대는 오전 7시가 되자 공병대가 만든 다리를 건너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다.
제 1/5 대대가 북쪽에서 해안선을 따라 전진했고 , 제 2/5 대대는 내륙의 고지대를 따라 전진했으며 , 활링 부대는 남쪽에서 북쪽의 주력과 보조를 맞추면서 전진했다.
남쪽을 전진하던 활링대대와 제 2/5 대대는 적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북쪽에서 해안선을 따라 전진하던 제 1/5 대대는 크루즈 곶의 뿌리 부근에서 강력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제 1/5 대대는 A 중대가 해안 쪽 , C 중대가 내륙 쪽으로 진격했는데 C 중대는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일본군으로부터 강력한 소총과 기관총 사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즉시 제 1/5 대대의 예비대인 B 중대가 달려왔으나 이미 큰 피해를 입은 C 중대는 결국 후퇴해야만 했다. 제 5 연대장 에드슨 대령은 연대 예비대인 제 3/5 대대를 파견했다.
제 3/5 대대는 제 1/5 대대와 해안 사이에 전개하여 제 1/5 대대와 함께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해가 질 때까지 일본군을 진지에서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다음날인 11 월 2 일이 되자 에드슨 대령은 남쪽에서 진격하던 제 2/5 대대에게 북상하여 일본군 기지 공격에 가담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2/5 대대는 북상하여 일본군 진지의 서쪽에 전개했다. 이로써 일본군 진지는 동쪽 , 남쪽 , 서쪽에서 완전히 포위당했다.
제 5 연대는 제 11 연대의 75mm 곡사포들과 해군함정들의 함포 지원을 받아가며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날 하루동안 미해군 구축함 커닝햄과 쇼는 포위된 일본군 진지에 803 발의 5 인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일본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하루 종일 지속된 전투에서 제 3/5 대대가 일부 전진했을 뿐제 5 연대는 해가 질 때까지 일본군 진지를 일소하는데 다시 실패했다. 그러나 , 일본군의 상황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마지막 공격은 11 월 3 일 아침 8시에 실시되었다.
치열한 공격준비사격 후에 실시된 공격에서 제 2/5 대대가 마침내 서쪽에서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 이어서 제 3/5 대대가 동쪽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마침내 포위망 속의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약 350 명이었으나 , 이들 중 장교가 28 명이나 되고 , 지휘관이 연대장급인 대좌였다.
실제로 제 5 연대가 노획한 일본군 무기 중에는 구경 70mm 짜리 92식 보병포 1 문과 기관총 37정을 비롯하여 산탄 사용시 보병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94 식 37mm 대전차포가 12 문이나 포함되어 있어 , 병력 규모에 비해서는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3 일 간의 격전 끝에 크루즈 곶에서 저항하던 일본군을 섬멸함에 따라 이제 코컴보나로 향한 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 이때 동쪽에 진출했던 제 2/7 대대로부터 긴급구조요청이 들어왔다. 11 월 2 일과 3 일 사이의 야간에 일본군의 도쿄급행이 교두보 동쪽 콜리 곶에 1,500 여명의 일본군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일본군과 격돌했던 제 2/7 대대가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지원을 요청해 온 것이었다.
제 8해병연대는 다음날인 4 일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므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즉시 제 2/7 대대에 증원군을 파견하는 한편 교두보 내의 병력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코컴보나 공격을 일시 중지하고 제 5 연대를 교두보 내로 불러들여야만 했다.
대신 제 2해병연대의 제 1 대대 및제 2 대대와 육군 제 1/164 대대가 크루즈 곶 서쪽에 새로운 전진 방어선을 형성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일단 콜리 곶의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다시 코컴보나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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