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콜리 곶 전투
1942 년 10 월 말에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가 실패로 끝난 이후 일본군은 제 38사단의 주력을 과달카날에 투입하여 다시 한번 미군의 교두보에 강력한 공세를 가하고자 했다.
이러한 증원병력은 대부분 교두보의 서쪽이자 일본제 17 군 사령부가 있던 코컴보나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 10 월 말에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이 일부 병력을 교두보 동쪽에 상륙시켜 양쪽에서 협격하면 어떻겠느냐고 훈수를 두었다.
이 조언을 들은 제 17 군 사령관 햐쿠다케 중장은 귀가 솔깃하여 제 230 연대 제 2 대대를 중심으로 한 1,500 명의 병력을 교두보 동쪽에 상륙시키기로 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제 2/230 대대로 하여금 교두보 동쪽의 콜리 곶을 장악하게 만든 다음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엉뚱한 계획까지 세웠다.
한편 미해군 측은 통신감청을 통하여 일본군이 교두보 동쪽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려 한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해안감시대원의 보고를 통하여 일본군의 상륙준비가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확인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는 11 월 1 일 새벽에 과달카날에 전문을 보내어 향후 2- 3 일 내로 최소한 1 개 대대 규모의 일본군이 교두보 동쪽에 상륙할 예정이라고 최종적으로 경고했다.
이미 수차례 예비경고를 받았던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11 월 1 일 아침에 서쪽으로 에드슨 대령의 제 5 연대가 코컴보나를 향하여 공세를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허만 하네켄 중령의 제 2/7 대대를 동쪽으로 파견했다.
( 콜리 곶 전투 상황도)
제 2/7 대대는 트럭을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일본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고 전진했다.
11 월 2 일 저녁에 제 2/7 대대는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메타포나 강의 서안에 도달하여 야영했다.
2 일밤 10시에 테테레 마을의 서쪽이며 제 2/7 대대에서 동쪽으로 약 1,500m 정도 떨어진 가바가 샛강 하구에 일본군 경순양함 1 척 , 구축함 3 척 , 그리고 수송선 1 척이 접안하여 약 1,500 명으로 이루어진 일본육군제 2/230 대대를 보급품과 함께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제 230 연대장 니시무라 쇼지 대좌는 제 1/230 대대 및제 3/230 대대를 이끌고 이미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제 3 차 공세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후 잔존병력들을 이끌고 콜리 곶 부근에 후퇴해 있었다. 일본군의 상륙사실을 알게 된 하네켄 중령은 즉시 사단본부에 보고하려고 햇으나 무전이 불통이었다. 3 일 아침에 일본군 정찰대원 8 명이 제 2/7 대대의 방어선에 접근했다가 총격을 받아 4 명은 사살되고 4 명은 도망쳤다.
자신의 대대가 발견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하네켄 중령은 즉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사단과의 통신은 여전히 불가능한 상태였다. 제 2/7 대대의 81mm 박격포가 일본군의 상륙지점을 강타하는 가운데 제 2/7 대대는 일제히 메타포나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섰다.
공격해오는 제 2/7 대대를 발견한 일본군 또한 서쪽으로 진격하여 해병대와 일본군은 중간지점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남쪽의 정글 속에서 일본제 1/230 대대 및제 3/230 대대의 잔존병력 500 명이 박격포와 소총으로 제 2/7 대대의 측면에 사격을 가해왔다. 중과부적으로 위기에 몰린 제 2/7 대대는 재빨리 후퇴했다.
제 2/7 대대는 메타포나 강의 서쪽 4,500m 지점에 있는 날림비우 강의 서안에 연하여 견고한 방어진지를 형성했다.
오후 2시 45분에 겨우 사단본부와 통신이 가능해지자 하네켄 중령은 긴급하게 지원을 요청했다.
잠시 후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 , 경순양함 헬레나 , 구축함 스테렛과 렌즈다운이 달려와서 날림비우 강 동쪽을 포격했고 , 칵터스 항공대도 날림비우 강 동쪽을 격렬하게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비록 무성한 정글 때문에 일본군의 정확한 위치는 잘알수 없었지만 , 이러한 치열한 포격과 폭격은 일본군으로 하여금 병력을 집결하여 제 2/7 대대를 공격하는 일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일본군을 날림비우 강 동쪽에서 포위하여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제 1/7 대대를 주정에 태워 날림비우 강 하구로 급파하여 제 2/7 대대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일본군을 고착견제하는 동안 육군제 164 연대의 제 2 대대및 제 3 대대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후방에서 일본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현장 지휘는 해병제 1 사단의 부사단장 루퍼투스 준장이 맡기로 했다.
과달카날 상륙 이래 줄곧 툴라기 지역을 담당했던 루퍼투스 준장은 툴라기 지역이 평온을 유지함에 따라 과달카날의 교두보로 건너왔다. 육군의 제 2/164 대대와 제 3/164 대대는 아메리칼 사단의 부사단장인 에드먼드 세브리 준장이 지휘했다.
세브리 준장은 11 월 초에 아메리칼 사단의 후속연대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하여 과달카날에 도착했다. 선발연대인 제 164 연대는 일찌감치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었다.
세브리 준장의 도착으로 해병제 2사단은 장성이 지휘하는 야전부대 2개를 휘하에 거느리게 되면서 마치 작은 군단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이러한 상황변화를 감안하여 11 월 4 일에 교두보의 방어체계를 단순하게 다시 개편하여 룽가 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육군의 세브리 준장이 , 동쪽은 해병대의 루퍼투스 준장이 담당하도록 했다.
세브리 준장은 과달카날에 도착하자마자 지형도 익히고 정글전투의 경험도 쌓을 겸해서 루퍼투스 준장의 휘하에서 제 164 연대의 2개 대대를 지휘했다. 11 월 4 일 아침에 루퍼투스 준장은 제 7해병연대장 심스 대령 및제 1/7 대대와 함께 상륙주정을 타고 날림비우 강의 하구로 향했다.
제 164 연대의 제 2 대대 및제 3 대대는 오전 6시에 일루 강의 상류지역에서 강을 건너 정글 속을 행군하기 시작했다. 제 3/164 대대에는 방금 상륙한 제 8해병연대의 B 중대가 증강되어 있었다.
한편 , 육군제 1/147 대대와 함께 아올라 지역에 상륙했던 제 2기습대대는 즉시 아올라 지역을 떠나 콜리 곶을 향하여 서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 2기습대대는 미군의 포위망을 탈출하여 달아나는 일본군들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 1/7 대대가 날림비우 강 하구에 도착하여 제 2/7 대대와 합류하는 동안 제 164 연대의 2개 대대는 늪지와 빽빽한 쿠나이 풀로 이루어진 지형을 뚫고 힘겹게 전진하여 4 일 저녁에 날림비우 강 상류에 도달했다.
제 2/164 대대가 북쪽으로 1,800m 정도를 더 전진했으나 , 소수의 일본군 정찰대와 조우했을 뿐 해병대와 접촉하는데 실패했다. 한편 , 일본제 17 군 사령관 햐쿠다케 중장은 4 일 저녁이 되자 콜리 곶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자신의 계획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제 230 연대의 남쪽에서 강력한 미군부대가 이동하는 것이 발견되자 햐쿠다케 중장은 즉시 제 230 연대장 쇼지대좌에게 동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 일본군은 신속하게 상륙할 때 쌓아놓은 보급품들이 있는 가바가 샛강 방면으로 철수했다.
쇼지 대좌는 충분한 보급품이 있는 가바가 샛강 하구에서 잠시 쉬면서 체력을 추스린 다음 남쪽으로 내려가 미군의 교두보를 남쪽으로 빙 돌면서 정글을 통과하여 제 17 군 사령부가 있는 코컴보나까지 철수할 예정이었다.
11 월 5 일 아침에 제 164 연대는 해안에서 약 3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지점에서 날림비우 강을 건너 강의 동안을 따라 북상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산발적이었으나 지형이 험하여 행군속도는 지지부진했다. 그리하여 , 제 164 연대의 선두가 해안에 도달한 것은 6 일 저녁이었고 , 제 3/164 대대는 7 일 아침에야 도착했으며 제 164 연대본부와 C 중대 및 대전차중대 , 그리고 제 8해병연대의 B 중대는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7 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해안에 도달했다.
그동안 해병제 7 연대는 6 일 오전에 날림비우 강의 하구를 건너서 제 164 연대와 합류한 다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일본군의 추가 상륙을 경계하면서 7 일 밤을 볼리나부아 마을의 동쪽에서 야영했다.
7 일 저녁에 미군 정찰대가 메타포나 강에서 동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가바가 샛강 하구에서 일본군을 발견했다. 미군은 8 일 아침부터 메타포나 강을 건너 진격하기 시작했다.
풀러 중령의 제 1/7 대대가 선두에 서고 하네켄 중령의 제 2/7 대대와 육군 2/164 대대가 뒤따랐다. 제 3/164 대대는 예비대였다.
뎅기열에 걸린 루퍼투스 준장이 이날 아침에 교두보로 후송되는 바람에 전투는 세브리 준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세브리 준장은 일본군을 3 면에서 포위하기로 했다.
제 1/7 대대가 정면에서 일본군을 압박하는 동안 제 2/7 대대가 남쪽으로 우회하여 일본군의 동쪽으로 진출했고 , 제 2/164 대대가 남쪽에서 제 1/7 대대와 제 2/7 대대 사이의 간격을 메꾼다는 계획이었다.
남쪽으로 우회한 제 2/7 대대와 제 2/164 대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 서쪽으로부터 일본군의 진지를 직접 공격한 제 1/7 대대는 강력한 저항을 받아 4 명이 전사하고 , 대대장 풀러 중령을 포함한 31 명이 부상을 입었다. 풀러 중령은 일본군의 박격포탄이 근처에 떨어지는 바람에 여러 곳에 파편을 맞았다.
그는 후송을 거부하고 밤새 대대를 지휘했으나 , 결국 9 일 아침에 제 7 연대의 부연대장인 프리스비 중령의 명령에 따라 존 웨버 소령에게 대대장직을 넘기고 후송되었다.
제 1/7 대대의 희생 덕분에 제 2/7 대대와 제 2/164 대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일본군의 남쪽으로 우회하여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8 일 오후에 세브리 준장은 반데그리프트 소장으로부터 예비대인 제 3/164 대대와 제 8 해병연대의 B 중대를 교두보로 돌려보내라는 뜻밖의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에 대한 포위망의 완성으로 콜리 곶의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생각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제 3/164 대대를 코컴보나 공격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로써 세브리 준장은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예비대가 전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11 월 9 일 오전 11 시에 서쪽의 제 1/7 대대가 포위된 일본군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했고 , 50 분 후에 동쪽의 제 2/7 대대도 공격을 시작했다. 남쪽의 제 2/164 대대는 남쪽에서 포위망을 유지하는데 주력했다.
이날의 공세는 동쪽의 제 2/7 대대가 주도했는데 하루종일 치열한 격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포위망 속에는 일본제 230 연대가 통째로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병력은 미군의 예상보다 훨씬 많아서 약 2,000 명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쪽 방면의 지도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7 해병연대장 심스 대령은 오폭을 염려하여 날림비우 강까지 진출한 제 1/10 대대의 화력지원을 거부했다.
따라서 미군병사들은 제 1/10 대대가 보유한 75 mm 곡사포들의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지 못한 채 81mm 및 60mm 박격포의 화력지원에만 의존하여 일본군을 공격해야만 했다.
11 월 10 일의 전투도 격전의 연속이었다.
해병대 2개 대대와 1 개 육군대대는 일본군 1 개 연대를 압박하여 포위망을 좁혀갔으나 전진할수록 저항도 더 강해졌다. 결국 저녁이 되자 다시 전선은 고착되고 말았다.
한편 , 일본제 230 연대장 쇼지 대좌는 10 일 저녁이 되자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전멸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포위망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쇼지 대좌는 가바가 샛강의 작은 흐름들과 중간의 마른 지대가 교대로 존재하여 지형이 복잡한 남쪽을 통하여 탈출하기로 했다.
남쪽을 담당한 제 2/164 대대만으로 완전한 포위망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병력이 부족했다.
일본군들은 제 2/164 대대의 포위망 사이에 존재하는 빈틈들을 통하여 10 일 저녁 10시부터 11 일 새벽 5시 사이에 대부분 빠져 나갔다. 부족한 병력으로 복잡한 지형을 방어하던 제 2/164 대대는 일본군의 대규모 탈출을 거의 저지하지 못했다.
일본군의 탈출을 저지하려면 대규모의 예비대 투입이 꼭 필요했으나 세브리 준장에게는 예비대가 전혀 없었다. 11 일 날이 밝자 미군은 최종 공격을 실시하여 포위망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일본군들을 정오 경에 완전히 섬멸했다.
11 일 오후에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에 대비하여 교두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미군 3개 대대는 다시 메타포나 강을 건너 교두보 내로 철수했다. 콜리 곶 전투에서 일본군은 약 450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미군의 피해는 제 1/7 대대가 전사 및 실종 16 명 , 부상 39 명 , 제 2/7 대대가 전사 21 명 , 부상 61 명 , 그리고 육군이 전사 3 명 , 부상 20 명으로 모두 합쳐서 전사 및 실종 40 명 , 부상 120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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