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58) -제 2 기습대대의 활약 /blog.naver.com/imkcs0425/60114182887


58. 제 2기습대대의 활약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1942 년 11 월 10 일에 크루즈 곶을 지키던 제 1/2 대대 및 제 2/2 대대와 육군제 1/164 대대에다가 콜리 곶 전투에 참가했다가 이쪽 방면으로 돌려진 제 2/164 대대를 합쳐 4 개 대대의 병력으로 코컴보나를 향하여 다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진격은 처음에는 별로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 다음날인 11 일 아침이 되자 강력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사실 이 코컴보나 진격은 하마터면 큰 재앙이 될 뻔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코컴보나를 단순히 도쿄급행의 종착지로만 알고 있었으나 , 사실 코컴보나에는 라바울에서 이동해 온제 17 군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고 , 부근에는 약 5,000 명의 전투가능한 병력들이 집결해 있었다.
제 17 군 사령관 햐쿠다케 중장은 자신의 사령부를 위협하는 미군병력을 격멸하기 위하여 제 228 연대장을 맡고 있다가 이제는 제 38 사단의 보병단장이 된 이토 세이토 소장에게 제 228 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
미군병력이 코컴보나 동쪽의 일본군 주방어선에 고착되어 있는 동안 남쪽으로 우회한 제 228 연대가 측면과 후방에서 포위공격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미군은 운이 좋았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11 월 11 일 아침에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로부터 조만간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 및 공격이 예상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다. 게다가 코컴보나 전면에서 미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코컴보나를 공격하던 미군에게 신속하게 교두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 미군은 남쪽에서 우회기동 중인 일본군의 존재를 전혀 몰랐지만 딱 적당한 순간에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힘들게 정글을 우회한 다음 고속으로 북상한 이토 소장의 부대가 해안에 도달했을 때 미군은 이미 빠져나간 후였다. 제 2해병연대와 제 164 연대는 다시 마타니카우 강을 건넌 후 10 월 31 일에 설치한 다리를 불살랐다.  이로써 미군의 교두보는 다시 10 월 말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미군은 다시 코컴보나 점령에 실패하고 교두보도 10 일 만에 원상태로 돌아왔으나 , 11 월 2 일에 155mm 롱톰 평사포 6 문이 교두보 내에 상륙하면서 다행히 코컴보나를 점령하지 않고도 일본군의 96 식 150mm 곡사포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제 2기습대대는 과달카날 상륙의 양동작전으로 1942 년 8 월 17 일에 실시된 메이킨 기습작전에 투입되었던 부대였다. 1942 년 11 월 4 일에 아올라 부대의 일부로서 고속수송함 맨리와 맥킨을 타고 상륙한 제 2 기습대대의 C 중대 및 E 중대는 상륙 직후 반데그리프트 장군으로부터 콜리 곶 부근에서 미군과 교전 중인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 이어서 B 중대 , F 중대 및 D 중대의 일부가 잇달아 상륙하자 제 2 기습대대는 아올라 지역을 떠나 서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 제 2기습대대의 작전상황도 )

11 월 7 일에 세력 미상의 일본군이 집결해 있는 코일로투마리아 마을의 남쪽으로 우회한 제 2기습대대는 8 일에는 레코에서 소규모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후 다음날인 11 월 9 일에 테테레 마을의 남쪽에 자리한 원주민 마을인 비누에 대대본부를 차리고 사방으로 중대 규모의 강행정찰대를 내보냈다.
11 월 11 일에 제 2 기습대대의 E 중대가 제 2/7 대대의 정찰대와 만나서 테테레 마을 부근에서 포위망에 갇혔던 일본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C 중대가 일단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전반적으로 큰 충돌은 없었다.
일본군은 코컴보나로 가기 위하여 교전을 극력 회피하면서 남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후 제 2기습대대는 16 일까지 비누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중대 규모의 강행정찰대를 내보내어 일본군의 흔적을 찾았다.
이 기간 중 F 중대는 14 일에 제 2 기습대대의 본부가 있는 비누 마을을 감시하던 일본군의 전진초소를 습격하여 15 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콜리 곶에 상륙했던 일본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탈출해 버렸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11 월 17 일에 제 2 기습대대장 칼슨 중령은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호출을 받고 교두보 내의 사단본부에 출두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제 2기습대대에게 아래와 같은 4 가지의 임무를 맡겼다.
1. 오스텐 산과 코컴보나를 연결하는 통로를 확인하고 조사하라.
2. 교두보 남쪽에서 일본군의 집결상황을 확인하라.
3. 일본군의 야포를 찾아내어 파괴하라.
4. 오스텐 산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는지 확인하라.


( 제 2기습대대장 에반스 칼슨 중령 Evans Carlson) leader of "Carlson's Raiders

이 새로운 임무를 위하여 제 2 기습대대가 주둔 중인 비누 마을에는 원주민 일꾼들이 대량의 보급품을 운반해 왔고 , 정찰역으로서 호주 사람인 마더와 말라이타 출신의 타바수이같은 원주민들도 도착했다.
테나루 전투에서 용명을 떨친 유명한 보자 상사도 이때쯤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여 제 2기습대대를 위하여 원주민 정찰대원으로 활약했다. 비누 마을에서 충분히 쉬면서 원기를 회복한 제 2기습대대는 11 월 24 일에 새로운 임무를 위하여 비누 마을을 떠나 서진하여 그날 저녁에 테나루 강 상류에 대대본부를 차렸다.
다음날인 25 일에 뉴헤브리디즈에 있던 기습대대의 A 중대가 합류했다. 11 월 28 일에 첫 수확이 있었다. 제 2기습대대의 정찰대가 룽가 강과 테나루 강 사이에서 일본군 야포 진지를 발견했다. 비록 야포 자체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다량의 75mm 포탄을 발견하여 파괴했다.
그날 제 2기습대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스텐 산의 동쪽 기슭에다가 새로 대대본부를 차렸다. 29 일에는 기습대대의 정찰대가 룽가 강 부근에서 대규모의 일본군 야영지를 발견했다.
비록 병력은 없었으나 , 여러 문의 75mm 산포와 37mm 대전차포를 다량의 포탄과 함께 발견하여 모두 파괴했다. 다음날인 11 월 30 일에는 기습대대의 병사들이 아주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 F 중대는 어제 발견된 야영지 주변을 샅샅이 정찰했다.
그 과정에서 분대 규모의 정찰대 하나가 야영 중이던 일본군을 발견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약 100 명에 달했으나 , 전원 자동화기로 무장한 분대 규모의 정찰대는 과감하게 기습을 가했다.  소총들을 모두 세워 총 상태로 해놓고 완전 무방비 상태로 기습을 당한 일본군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허둥거리다가 대부분 사살되었다.
정찰대가 확인한 일본군의 시체만 75 구나 되었다. 정찰대의 피해는 전무했다. 12 월 1 일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헨더슨 비행장을 출발한 C- 47 수송기가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들을 투하했다.  투하된 보급품의 75% 가 회수되었다.
동시에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제 2기습대대장 칼슨 중령에게 교두보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4 번 임무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하던 칼슨 중령은 오스텐 산 남쪽의 통로를 확인하는 4 번 임무의 완수를 위하여 며칠 간만 더 작전을 연장하도록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12 월 2 일에 기습대대는 오스텐 산 남쪽의 통로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쪽 방면으로 집중적으로 정찰대를 내보냈다. 기습대대원들은 몇 문의 야포를 더 발견하여 파괴하고 , 소규모의 일본군들과 조우하여 사살했으나 통로를 확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2 일 오후에 작전을 중지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 2기습대대는 교두보를 향하여 북상하기 시작했다.
12 월 3 일에 교두보 남쪽에서 제 2기습대대는 1 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정찰대와 조우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 2기습대대는 일본군들을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일본군 25 명이 사살되었고 , 제 2기습대대에서는 1 명이 전사하고 , 3 명이 부상을 입었다.
12 월 4 일 아침에 교두보 바로 남쪽에서 제 2 기습대대의 선두에 섰던 B 중대가 분대 규모의 일본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즉시 포위공격한 B 중대는 일본군 7 명을 사살했으나 3 명의 전사자와 2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그날 오후에 제 2 기습대대는 교두보로 복귀했다.
제 2기습대대는 아올라 상륙 이후 1 달간 교두보의 동쪽과 남쪽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면서 일본군의 활동상황을 확인하고, 수많은 야포와 포탄 및 보급품들을 파괴했으며 , 합계 488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제 2기습대대의 전사자는 16 명 , 부상자는 원주민 정찰대원 1 명을 포함하여 18 명이었다.

 
다음검색
   
활약

출처: 네이버 블로그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60114182887

58. 제 2기습대대의 활약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1942 년 11 월 10 일에 크루즈 곶을 지키던 제 1/2 대대 및 제 2/2 대대와 육군제 1/164 대대에다가 콜리 곶 전투에 참가했다가 이쪽 방면으로 돌려진 제 2/164 대대를 합쳐 4 개 대대의 병력으로 코컴보나를 향하여 다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진격은 처음에는 별로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 다음날인 11 일 아침이 되자 강력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사실 이 코컴보나 진격은 하마터면 큰 재앙이 될 뻔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코컴보나를 단순히 도쿄급행의 종착지로만 알고 있었으나 , 사실 코컴보나에는 라바울에서 이동해 온제 17 군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고 , 부근에는 약 5,000 명의 전투가능한 병력들이 집결해 있었다.
제 17 군 사령관 햐쿠다케 중장은 자신의 사령부를 위협하는 미군병력을 격멸하기 위하여 제 228 연대장을 맡고 있다가 이제는 제 38 사단의 보병단장이 된 이토 세이토 소장에게 제 228 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
미군병력이 코컴보나 동쪽의 일본군 주방어선에 고착되어 있는 동안 남쪽으로 우회한 제 228 연대가 측면과 후방에서 포위공격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미군은 운이 좋았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11 월 11 일 아침에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로부터 조만간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 및 공격이 예상된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다. 게다가 코컴보나 전면에서 미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코컴보나를 공격하던 미군에게 신속하게 교두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 미군은 남쪽에서 우회기동 중인 일본군의 존재를 전혀 몰랐지만 딱 적당한 순간에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힘들게 정글을 우회한 다음 고속으로 북상한 이토 소장의 부대가 해안에 도달했을 때 미군은 이미 빠져나간 후였다. 제 2해병연대와 제 164 연대는 다시 마타니카우 강을 건넌 후 10 월 31 일에 설치한 다리를 불살랐다.  이로써 미군의 교두보는 다시 10 월 말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미군은 다시 코컴보나 점령에 실패하고 교두보도 10 일 만에 원상태로 돌아왔으나 , 11 월 2 일에 155mm 롱톰 평사포 6 문이 교두보 내에 상륙하면서 다행히 코컴보나를 점령하지 않고도 일본군의 96 식 150mm 곡사포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제 2기습대대는 과달카날 상륙의 양동작전으로 1942 년 8 월 17 일에 실시된 메이킨 기습작전에 투입되었던 부대였다. 1942 년 11 월 4 일에 아올라 부대의 일부로서 고속수송함 맨리와 맥킨을 타고 상륙한 제 2 기습대대의 C 중대 및 E 중대는 상륙 직후 반데그리프트 장군으로부터 콜리 곶 부근에서 미군과 교전 중인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 이어서 B 중대 , F 중대 및 D 중대의 일부가 잇달아 상륙하자 제 2 기습대대는 아올라 지역을 떠나 서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 제 2기습대대의 작전상황도 )

11 월 7 일에 세력 미상의 일본군이 집결해 있는 코일로투마리아 마을의 남쪽으로 우회한 제 2기습대대는 8 일에는 레코에서 소규모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후 다음날인 11 월 9 일에 테테레 마을의 남쪽에 자리한 원주민 마을인 비누에 대대본부를 차리고 사방으로 중대 규모의 강행정찰대를 내보냈다.
11 월 11 일에 제 2 기습대대의 E 중대가 제 2/7 대대의 정찰대와 만나서 테테레 마을 부근에서 포위망에 갇혔던 일본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C 중대가 일단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전반적으로 큰 충돌은 없었다.
일본군은 코컴보나로 가기 위하여 교전을 극력 회피하면서 남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후 제 2기습대대는 16 일까지 비누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중대 규모의 강행정찰대를 내보내어 일본군의 흔적을 찾았다.
이 기간 중 F 중대는 14 일에 제 2 기습대대의 본부가 있는 비누 마을을 감시하던 일본군의 전진초소를 습격하여 15 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콜리 곶에 상륙했던 일본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탈출해 버렸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11 월 17 일에 제 2 기습대대장 칼슨 중령은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호출을 받고 교두보 내의 사단본부에 출두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제 2기습대대에게 아래와 같은 4 가지의 임무를 맡겼다.
1. 오스텐 산과 코컴보나를 연결하는 통로를 확인하고 조사하라.
2. 교두보 남쪽에서 일본군의 집결상황을 확인하라.
3. 일본군의 야포를 찾아내어 파괴하라.
4. 오스텐 산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는지 확인하라.


( 제 2기습대대장 에반스 칼슨 중령 Evans Carlson) leader of "Carlson's Raiders

이 새로운 임무를 위하여 제 2 기습대대가 주둔 중인 비누 마을에는 원주민 일꾼들이 대량의 보급품을 운반해 왔고 , 정찰역으로서 호주 사람인 마더와 말라이타 출신의 타바수이같은 원주민들도 도착했다.
테나루 전투에서 용명을 떨친 유명한 보자 상사도 이때쯤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여 제 2기습대대를 위하여 원주민 정찰대원으로 활약했다. 비누 마을에서 충분히 쉬면서 원기를 회복한 제 2기습대대는 11 월 24 일에 새로운 임무를 위하여 비누 마을을 떠나 서진하여 그날 저녁에 테나루 강 상류에 대대본부를 차렸다.
다음날인 25 일에 뉴헤브리디즈에 있던 기습대대의 A 중대가 합류했다. 11 월 28 일에 첫 수확이 있었다. 제 2기습대대의 정찰대가 룽가 강과 테나루 강 사이에서 일본군 야포 진지를 발견했다. 비록 야포 자체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다량의 75mm 포탄을 발견하여 파괴했다.
그날 제 2기습대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스텐 산의 동쪽 기슭에다가 새로 대대본부를 차렸다. 29 일에는 기습대대의 정찰대가 룽가 강 부근에서 대규모의 일본군 야영지를 발견했다.
비록 병력은 없었으나 , 여러 문의 75mm 산포와 37mm 대전차포를 다량의 포탄과 함께 발견하여 모두 파괴했다. 다음날인 11 월 30 일에는 기습대대의 병사들이 아주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 F 중대는 어제 발견된 야영지 주변을 샅샅이 정찰했다.
그 과정에서 분대 규모의 정찰대 하나가 야영 중이던 일본군을 발견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약 100 명에 달했으나 , 전원 자동화기로 무장한 분대 규모의 정찰대는 과감하게 기습을 가했다.  소총들을 모두 세워 총 상태로 해놓고 완전 무방비 상태로 기습을 당한 일본군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허둥거리다가 대부분 사살되었다.
정찰대가 확인한 일본군의 시체만 75 구나 되었다. 정찰대의 피해는 전무했다. 12 월 1 일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헨더슨 비행장을 출발한 C- 47 수송기가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들을 투하했다.  투하된 보급품의 75% 가 회수되었다.
동시에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제 2기습대대장 칼슨 중령에게 교두보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4 번 임무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하던 칼슨 중령은 오스텐 산 남쪽의 통로를 확인하는 4 번 임무의 완수를 위하여 며칠 간만 더 작전을 연장하도록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12 월 2 일에 기습대대는 오스텐 산 남쪽의 통로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쪽 방면으로 집중적으로 정찰대를 내보냈다. 기습대대원들은 몇 문의 야포를 더 발견하여 파괴하고 , 소규모의 일본군들과 조우하여 사살했으나 통로를 확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2 일 오후에 작전을 중지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 2기습대대는 교두보를 향하여 북상하기 시작했다.
12 월 3 일에 교두보 남쪽에서 제 2기습대대는 1 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정찰대와 조우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 2기습대대는 일본군들을 포위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일본군 25 명이 사살되었고 , 제 2기습대대에서는 1 명이 전사하고 , 3 명이 부상을 입었다.
12 월 4 일 아침에 교두보 바로 남쪽에서 제 2 기습대대의 선두에 섰던 B 중대가 분대 규모의 일본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즉시 포위공격한 B 중대는 일본군 7 명을 사살했으나 3 명의 전사자와 2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그날 오후에 제 2 기습대대는 교두보로 복귀했다.
제 2기습대대는 아올라 상륙 이후 1 달간 교두보의 동쪽과 남쪽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면서 일본군의 활동상황을 확인하고, 수많은 야포와 포탄 및 보급품들을 파괴했으며 , 합계 488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제 2기습대대의 전사자는 16 명 , 부상자는 원주민 정찰대원 1 명을 포함하여 18 명이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