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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60) -과달카날 해전 (1) /blog.naver.com/imkcs0425/60114361331


60. 과달카날 해전 (1) - 일본함대의 남하

야마모토 제독은 야간을 틈탄 구축함 수송만으로는 과달카날의 미군을 제압할만한 전력을 상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량의 구축함을 활용하면 병력은 수송가능할지 모르나 ,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막대한 양의 보급품들과 특히 중포를 비롯한 중화기들을 수송하려면 반드시 수송선이 필요했다.  제 4 차 공세를 위하여 제 17 군은 제 38사단의 주력 1 만명과 함께 약 50 문의 중포를 상륙시킬 예정이었다.
또한 8 만발의 포탄과 3 만명의 1 개월 치 식량을 비롯한 1 만톤의 보급품도 동시에 상륙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막대한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의 수송을 위하여 제 8 함대는 총톤수 7 만 8000 톤에 달하는 수송선 11 척을 확보했다. 이 수송선들은 다나카 라이조 제독이 이끄는 구축함 11 척의 호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또한 제 8 함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제독이 이끄는 중순양함 2척 ( 죠카이 , 기누가사), 경순양함 1 척 ( 이스즈), 구축함 2척이 외곽에서 호위했다. 수송선단의 상륙예정일은 13 일 자정이었으며 , 수송선단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전함을 동원하여 11 월 12 일 야간에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예정이었다.
전함의 포격에 이어서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이끄는 중순양함 2척 ( 스즈야 , 마야), 경순양함 1 척 ( 덴류 ), 구축함 4 척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계획이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헨더슨 비행장 포격임무를 곤도 노부다케 중장의 제 2 함대에게 맡겼고 , 곤도 중장은 제 11 전대의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비행장 포격 임무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연합함대의 참모들 중 일부는 12 일의 헨더슨 비행장 포격임무에 히에이와 기리시마만 보낼 것이 아니라 공고와 하루나 , 그리고 나가토와 무츠까지 한꺼번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 경순양함 나가라 , 그리고 구축함 11 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임무를 띠고 트럭을 출발하여 고속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의 전술적 지휘는 전함 히에이에 승좌한 제 11 전대사령관 아베 히로아키 중장이 담당했다.


( 제 11 전대 사령관 아베 히로아키 중장.阿部弘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623)

이러한 일본함대의 움직임은 곧 미군정찰기들에게 발각되었다. 12 일 아침에 말라이타 섬 북쪽을 정찰하던 B- 17 중폭격기가 과달카날 북쪽 540km 해상에서 고속으로 남진하는 아베 제독의 함대를 발견하고 전함 2척 , 순양함 1 척 , 구축함 6 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가 남하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정보를 접한 터너 제독은 고민했다.
일본함대의 목적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이 틀림없었으며 , 전함에 의한 비행장 포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지난 10 월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일본함대는 반드시 저지해야만 했으나 미군의 전함은 너무 멀리 있었다.
당시 미군이 보유한 신형전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는 11 일에 누메아를 출항한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시간 내로 과달카날에 달려올 수가 없는 처지였다.
헨더슨 비행장이 다시 전함의 포격을 받는 상황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기 때문에 터너 제독은 전함 중심의 일본함대를 요격하는 어렵고 위험천만한 임무를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의 순양함 부대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터너 제독은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의 함대를 합친 다음 남하하는 일본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은 둘다 해군사관학교를 1911 년에 졸업한 동기생이었으나 캘러헌 제독의 소장 승진이 2 주 빨랐기 때문에 터너 제독은 통합된 함대의 지휘를 캘러헌 제독에게 맡겼다.
그러나 캘러헌 제독은 1942 년 6 월부터 10 월까지 곰리 제독의 참모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해상에서 4 개월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 말은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는 한번도 해상에 나와본 경험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곰리 제독의 참모장직을 맡기 전의 마지막 보직이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의 함장이었으므로 사실상 캘러헌 제독은 해상에서 함대를 지휘해 본 경험 자체가 전무했다.

( 대니얼 캘러헌 제독.Daniel Callaghan 사진은 샌프란시스코 함장 시절 )

거기에 비하면 스코트 제독은 1942 년 6 월의 소장 승진 이후 줄곧 해상에서 함대를 지휘하면서 계속 전투에 참가해 왔으며 , 1 달 전에는 에스퍼란스 해전에서 일본함대와 야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캘러헌 제독은 갑작스런 곰리 제독의 해임에 따라 실세 자리인 남태평양 해역군의 참모장 직위에서 하루아침에 밀려나서 해상근무를 하던 처지라 터너 제독으로서는 차마 캘러헌 제독에게 진급이 늦었던 스코트 제독의 지휘를 받으라는 명령을 내리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 노만 스코트 제독 )Norman Scott

터너 제독은 남은 보급품을 최고속도로 양륙한 다음 12 일 저녁이 되자 수송선단을 철수시켰다. 구축함 쇼와 맥칼라 , 피해를 입은 구축함 뷰캐넌 , 그리고 기뢰부설함 수타드와 호비가 병력수송함 4 척과 11 일에 도착했던 화물수송함 중전날 이미 떠난 자일린을 제외한 2 척을 호위했다.
이때 터너 제독도 기함인 병력수송함 맥콜리에 타고 과달카날을 떠나 11 월 15 일에 에스피리투산토에 무사히 도착했다. 전함을 2척이나 포함한 강력한 일본함대를 저지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은 캘러헌 제독은 휘하 함정들을 불러모았다.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의 함대를 합친 미국함대의 세력은 중순양함 2척 ( 샌프란시스코 , 포틀랜드), 경순양함 3척 ( 애틀란타 , 헬레나 , 쥬노), 그리고 구축함 8척이었다.
캘러헌 제독의 함대와 스코트 제독의 함대는 이제까지 한번도 합동작전을 실시한 경험이 없었으므로 , 캘러헌 제독은 지휘통제가 가장 용이한 단종진을 편성했다.
선두부터 차례로 구축함 4 척 ( 쿠싱 , 라피 , 스테렛 , 오배넌 ), 순양함 5척 ( 애틀란타 , 샌프란시스코 , 포틀랜드 , 헬레나 , 쥬노), 그리고 후위에 구축함 4 척 ( 애런워드 , 바튼 , 몬센 , 플레처 ) 의 순서였다.
구축함열과 순양함열 사이의 간격은 약 720m, 순양함 사이의 간격은 약 630m, 구축함 사이의 간격은 약 450m 였다. 레이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캘러헌 제독은 신형 SG 레이더를 장비한 경순양함 헬레나와 쥬노 , 그리고 구축함 플레처를 전열의 후방인 8 번째와 9 번째 , 그리고 맨 마지막 위치에 배치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캘러헌 제독의 기함인 샌프란시스코와 스코트 제독의 기함인 애틀란타는 모두 구형의 SC 레이더를 장비하고 있었다.  레이더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제독들이 기함을 신형 SG 레이더가 장비된 헬레나와 쥬노로 옮긴 후 순양함열의 가장 앞쪽에 위치했어야만 했으며 , 함대의 선두는 당연히 신형 SG 레이더를 장비한 구축함인 플레처가 맡아야 했다.
또한 일본함대가 북서쪽에서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후위의 구축함은 필요가 없었다.  구축함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어뢰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구축함 8척을 모두 전방에 배치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아베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2척 ( 히에이 , 기리시마), 경순양함 1 척 ( 나가라), 그리고 구축함 11 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는 11 월 9 일에 트럭을 떠나 남하했다.  아베 제독의 함대는 12 일 오후 3시 30 분에 과달카날 북방 110km 해상에서 쇼틀랜드를 출발한 구축함 3 척과 만나서 정신공격대를 이루었다.
새로 합류한 제 27 구축대의 구축함 3 척 (시구레 , 시라츠유 , 유구레 ) 는 다시 아베 제독의 함대와 헤어져 과달카날 섬과 러셀 제도 사이를 경계했기 때문에 실제로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담당한 제 11 전대의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의 포탄용 승강기에는 삼식탄과 고폭탄이 꽉 들어차 있었는데 , 이 사실은 아베 제독이 미국수상함대와의 전투를 예상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아베 제독은 물론 과달카날에 순양함 중심의 미함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미해군이 그런 약체 함대를 가지고 전함을 2척이나 보유한 자신의 함대에 , 그것도 야간에 감히 정면으로 도전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함 히에이의 전방에는 경순양함 나가라가 항진 중이었으며 , 전함들의 옆에는 좌우로 각각 3척씩 6척의 구축함이 전함을 보호했다.
나가라의 전방에는 우측에 구축함 3척 , 좌측에 구축함 2척이 앞서 나가면서 함대의 진로를 정찰했다. 일본함정들은 포격시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무염화약을 장비하고 있었다.
남하하던 일본함대는 12 일 자정 경에 사보 섬 북방에서 지독한 스콜에 진입했다.
아베 제독은 잠시 북쪽으로 반전하여 스콜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찬 스콜 속에서 변침을 실시하는 도중 원래 함대의 우현 전방을 정찰해야 할 구축함 3척 ( 아사구모 , 무라사메 , 사미다레 ) 이 전함의 좌현 뒷쪽으로 처져 버렸다.
따라서 , 일본함대의 오른쪽 전방은 사실상 비어 있었는데 아베 제독은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 과달카날 해전 상황도.
접촉 당시 양측 함대의 배열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