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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64) -과달카날 해전 (5)/blog.naver.com/imkcs0425/60114710385


64. 과달카날 해전 (5) - 일본순양함대의 헨더슨 비행장 포격

아베 제독의 함대가 미국함대와 정면으로 격돌하던 13 일 새벽에 제 2 함대 사령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이끄는 중순양함 중심의 함대는 과달카날에서 북쪽으로 400km 떨어진 온통 자바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42 년 11 월 13 일 오전 6시 30 분에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곤도 제독에게 즉시 아베 제독의 잔류 부대와 합류한 다음 남하하여 히에이를 구하고 , 14 일 저녁에 기리시마의 14 인치 함포로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따라 곤도 제독은 과달카날에서 북상해 온 아베 함대의 전함 기리시마와 경순양함 나가라 , 그리고 구축함 4 척과 합류하여 긴급 공격부대를 형성한 다음 남하하기 시작했다.
곤도 제독의 긴급공격부대는 전함 기리시마 , 중순양함 2척 ( 아타고 , 다카오), 경순양함 2척 ( 센다이 , 나가라), 그리고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격부대의 후방에서는 전함 공고와 하루나 , 중순양함 도네 그리고 구축함 4 척의 호위를 받는 항공모함 준요가 따라오면서 14 일 해가 질 때까지 긴급공격부대의 상공을 엄호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또한 쇼틀랜드 부근에서 대기 중이던 미카와 제독의 중순양함 함대인 제 7전대에게 명령을 내려 곤도 제독의 공격부대보다 하루 앞선 13 일 저녁에 헨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과달카날로 향하다가 아베 제독의 함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쇼틀랜드로 회항했던 다나카 제독의 수송선 11 척과 구축함 11 척도 다시 과달카날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다나카 선단의 과달카날 도착 예정 시간은 14 일 저녁이었다.  11 월 13 일 아침에 해가 밝았을 때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 16 기동부대는 과달카날 남동쪽 550km 해상에 있었다.
11 월 12 일에 미군 정찰기가 과달카날 서쪽 240km 해상에서 일본항공모함 2척을 발견했기 때문에 헐지 제독은 엔터프라이즈가 과달카날 에 지나치게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사실 당시 일본항공모함은 준요 1 척이었지만 어쨌든 일본항공모함의 출현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헐지 제독으로서는 광대한 태평양 전역에서 유일하게 사용가능한 정규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를 지나친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헐지 제독의 용기와 과단성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으나 결코 무모하지는 않았다.
제 16기동부대를 지휘하던 킨케이드 제독은 13 일 날이 밝자 10 대의 돈틀레스를 서북쪽으로 320km 까지 정찰을 보내었으나 훨씬 북쪽에 있던 일본항공모함과 접촉하지 못했다.
그러자 킨케이드 제독은 엔터프라이즈의 일부 함재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하기로 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전방 엘리베이터가 사용불능이라 어차피 정수의 함재기를 제대로 운용하기가 어려웠다.  엔터프라이즈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전방 엘리베이터 부근에 적의 폭탄을 맞아 엘리베이터가 망가졌다.
원래 엘리베이터는 기관과 함께 항공모함 수리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대표적인 장비였다.
누메아에서 급히 출항할 때 수리함 베스털이 마지막까지 옆에 붙어 수리를 했었고 , 급기야는 엘리베이터를 담당하는 기술자들이 엔터프라이즈에 아예 옮겨타고 계속 수리를 했으나 13 일 아침까지 완전하게 수리하지 못했다.
베스털에서 파견나온 기술자들은 13 일 아침에 킨케이드 제독에게 전방 엘리베이터가 어떻게든 가동은 가능하지만 가벼운 충격에도 멈추어 버릴 수 있다고 보고했다.  만일 비행갑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전방 엘리베이터가 내려온 상태로 멈추어 버리면 졸지에 엔터프라이즈는 항공기의 이착함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 엔터프라이즈는 전방 엘리베이터를 완전히 올린 상태에서 고정시킬 수 밖에 없었다.
곧 9 대의 아벤저와 6 대의 와일드캣이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이 공격대는 일본함정을 찾아 해상을 수색하다가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하기로 했다. 아벤저들을 이끌던 코핀 대위는 오전 10시 20 분에 과달카날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사보 섬 북쪽 16km 해상에서 북쪽으로 느릿느릿 도망가 는 히에이를 발견했다.
아벤저들은 곧 좌우로 갈라져서 히에이에게 뇌격을 가했다.  히에이는 사용가능한 2 문의 14 인치 주포로부터 3식탄을 발사해가며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3 발의 어뢰가 명중했는데 이중 1 발이 히에이의 조타기계실을 침수시키는 바람에 히에이는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수 밖에 없게 되었 다.
다음에는 에스피리투산토에서 날아온 B- 17 중폭격기의 차례였다. 14 대의 B- 17 이 56 발의 폭탄을 떨어뜨려 1 발을 명중시켰다. 칵터스 항공대에서도 추가로 공격대를 내보내어 폭탄 2 발을 더 명중시켰다. 이때 제로기들이 히에이 상공에 도달하여 미군기 3 대를 격추했으나 , 히에이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한 엔터프라이즈의 아벤저 조종사들은 칵터스 항공대의 해병대 및 육군 조종사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정비병들이 아벤저에 달려들어 급유하고 어뢰를 장착하는 동안 조종사들은 맛있는 엔터프라이즈에서의 식사에 비하면 도저히 못 먹을 수준인 호주산 쇠고기 통조림과 스팸으로 이루어진 맛없는 식사를 억지로 위장에 쑤셔 넣고는 다시 출격하여 오후 1 시 30 분에 히에이를 공격 했다.
이번에는 3 발의 어뢰가 명중했으나 , 2 발은 불발이었다. 유일하게 폭발한 어뢰 1 발이 히에이의 기관실에 명중하여 이제 히에이는 완전히 추진력을 상실하고 표류하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가라앉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히에이의 상태를 보고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히에이를 살려서 트럭섬으로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14 일 오전 8시 15분에 구축함 유키카제로 옮겨탄 아베 제독은 이 명령에 따르려 했으나 곧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전 10시 20 분에 야마모토 제독에게 보고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현장 지휘관인 아베 제독의 판단을 존중하여 히에이를 트럭 섬으로 살려서 가져 오라는 명령을 취소했다.
아베 제독은 대신 히에이를 과달카날 해안에 좌초시키라고 명령했으나 함장 니시다 대좌가 재고를 요청하자 명령을 철회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아벤저와 에스피리투산토를 출격한 B- 17의 폭격을 받은 후 12시 35 분에 아베 제독은 다시 히에이를 포기하고 승무원들을 퇴함시키라고 명령했으나 니시다 함장은 다시 거부했다.
오후 1 시 30 분에 아벤저의 2 차 공격을 받은 직후 아베 제독은 3 번째로 히에이의 승무원들을 퇴함시키라고 명령했다. 니시다 함장은 다시 거부했으나 이번에는 아베 제독도 강경했다.
끝까지 버티던 니시다 함장은 부하들로부터 히에이의 기관실이 침수되어 추진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13 일 오후 6시에 일본구축함 3척이 사보 섬 북서쪽 8 km 지점을 떠돌던 히에이에 다가가서 생존자들을 옮겨 실었다. 곧 배수밸브가 열리고 히에이는 우현으로 15도 기울어진 채 함미부터 침몰하기 시작했다. 오후 6시 15분에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히에이를 자침시키지 말고 승무원만 퇴함시킨 후 그대로 해상에 띄워놓고 철수하라는 긴급전문이 도착했으나 이미 늦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히에이를 사용하여 칵터스 항공대의 공격력을 흡수함으로써 다음날 예상되는 다나카 선단에 대한 공격력을 분산시키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13 일 하루동안 미군항공기들이 히에이에 신경쓰는 동안 미카와 제독의 순양함부대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무사히 과달카날에 도착할 수 있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1942 년 11 월 13 일 밤에 히에이는 완전하게 침몰했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침몰한 최초의 일본전함이었다. 히에이의 승무원들 중 약 450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일본전함 히에이(比叡)  IJN cruiser HIEI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390351)

트럭에 돌아간 아베 제독과 히에이의 니시다 함장은 비공개로 열린 특별조사위원회에서 헨더슨 비행장 포격 실패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두 사람은 빛나는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으나 야마모토 제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아베 제독과 니시다 함장은 강제로 예편되었으나 , 다행히 연금만은 인정받았다.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난 정찰기들은 그날 하루동안 과달카날 주변에서 분주한 일본함정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B- 24 중폭격기 1 대는 온통 자바 부근에서 곤도 제독의 순양함 부대를 발견했다. 이 B - 24 중폭격기는 항공모함 준요에서 떠오른 제로기 2 대의 추격을 받았으나 무사히 탈출했다.
또다른 B- 24 중폭격기 1 대는 과달카날로 접근 중인 다나카 제독의 수송선단을 발견했고 , 잠시 후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 대가 과달카날로 빠르게 접근하는 미카와 제독의 중순양함 부대를 발견했다. 헐지 제독은 13 일 오후에 과달카날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 16 기동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전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 , 그리고 구축함 4 척으로 이루어지는 제 64 기동부대를 편성해 두라고 명령하고 이어서 후퇴하는 캘러헌 함대의 잔존함정들을 호위하기 위하여 과달카날 방면으로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6시 30 분 , 헐지 제독은 킨케이드 제독에게 오후에 편성했던 제 64 기동부대를 과달카날로 파견하여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하여 접근 중인 순양함 중심의 일본함대를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을 들은 킨케이드 제독은 당황했다.
그는 제 16기동부대가 과달카날에서 560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지금 제 64 기동부대가 출발하면 아무리 빨라도 14 일 아침 8시가 되어야 과달카날에 도착한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착오가 생긴 이유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의 착각 때문이었다. 제 16기동부대가 꾸준히 북상했다면 충분히 과달카날에 접근했겠지만 바람이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함재기의 이함을 위하여 엔터프 라이즈는 자주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려야만 했다.
이 시기에 이 해역에서 남동풍이 부는 건 당연한 현상인데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가 이런 간단한 사항을 그만 깜빡한 것이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의 실수 때문에 이제 미카와 제독의 순양함대로부터 헨더슨 비행장을 보호할 세력이라고는 툴라기의 어뢰정 몇척 밖에 없게 되었다.
미카와 제독의 순양함대는 자정이 막 지난 14 일 새벽에 아이언바텀사운드에 진입했다.
전날 있었던 미국함대의 과감한 공격에 영향을 받은 미카와 제독은 신중을 기하여 중순양함 4 척 중에 2척만 동원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고 , 나머지 2척의 중순양함과 구축함들은 외곽에서 기습적인 미국함정의 출현에 대비했다.
미카와 제독의 명령을 받은 니시무라 쇼지 제독은 중순양함 2척 ( 스즈야 , 마야), 경순양함 1 척 ( 덴류 ), 구축함 4 척을 이끌고 교두보에 접근하 여 37 분간 약 500 발의 8 인치 포탄을 헨더슨 비행장에 쏟아부었다. 이 포격으로 전투기 2 대가 파괴되고 , 전투기 15 대가 피해를 입었다.
완전히 무시할만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 일본전함의 포격시 예상되는 피해에 비해서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가벼운 피해였다.
무엇보다도 헨더슨 비행장은 날이 밝았을 때 정상적인 작전이 가능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툴라기에서 용감한 어뢰정 2척이 출동하여 일본순양함들에게 어뢰공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 어뢰정의 출현으로 위기감을 느낀 니시무라 제독은 오전 2시 4 분에 포격을 중지하고 서둘러 후퇴했다.
이때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아직 13 일 오전이었다. 캘러헌 함대의 희생으로 이제 헨더슨 비행장이 안전해졌다고 믿고 있던 워싱턴은 다시 헨더슨 비행장이 포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이어서 몇 시간 후에 일본군을 가득 실은 수송선단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과달카날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항상 자신만 만하던 루스벨트조차 과달카날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긴장감이 높아졌다.
당시 해군차관이었던 포레스탈은 그날 워싱턴의 분위기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을 제외하고는 제 2 차 대전에서 가장 긴장된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