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타사파롱가 해전 (5) - 참패
노댐턴이 어뢰에 명중되기 4 분 전인 1942 년 11 월 30 일 오후 11 시 24 분에 다나카 제독은 제 2 수뢰전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구축함 오야시오와 구로시오는 다카나미에게 다가가서 생존자를 구출하여 12 월 1 일 오전 1 시 30 분에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만신창이가 된 다카나미는 12 월 1 일 오전 1 시 37 분에 침몰했다.
승리를 거둔 제 2 수뢰전대는 12 월 1 일 정오 경에 쇼틀랜드에 도착했다. 12 월 1 일 0시를 넘기자 상처입은 미네아폴리스에 승좌하고 있던 라이트 제독은 지휘권을 호놀룰루에 승좌하고 있던 티즈데일 소장에게 넘겼다. 티즈데일 소장은 호놀룰루를 이끌고 사보 섬 주위를 경계하면서 일본함대의 재접근을 감시했다. 그동안 미네아폴리스의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기관장 알튼 파커 소령은 고육지책으로 보일러에 해수를 넣고 끓여서 기관을 재가동시키는데 성공했다. 용감한 기관승무원들은 사방의 격실 뿐만이 아니라 머리 위의 격실도 물로 꽉 차서 사실상 고립되어 있는 위험한 4 번 보일러실을 지키면서 동력을 공급했다. 침수가 심하여 미네아폴리스의 건현은 해수로부터 불과 1 - 2m 정도 높을 뿐이었다.
보수관 허버트 챈들러 소령과 드윗 맥카이버 소령은 일단 화재를 진압하자 위험할 정도로 줄어든 부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연료를 방출하고 , 탄약같이 무거운 물건들을 모두 내버렸다.
12 월 1 일 새벽 2시가 되자 마침내 미네아폴리스는 3 노트의 속력으로 30km 떨어진 툴라기 항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4 시 45분에 툴라기 항으로부터 어뢰정들과 함께 예인선 보보링크가 마중을 나와서 미네아폴리스를 툴라기 항구 안쪽의 잘안 보이는 해안에 접안시키고 위장했다. 이곳에서 미네아폴리스의 승무원들은 너덜거리는 함수를 떼어내어 버렸다.
( 함수가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의 미네아폴리스.Damaged USS Minneapolis after the Battle of Tassafaronga 1942 년 12 월 1 일 아침에 툴라기 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미네아폴리스의 승무원들은 함수를 떼어낸 자리를 통나무로 막고 밤낮없이 수리에 매달린 끝에 12 월 12 일에 에스피리투산토로 출발할 수 있었다.
( 함수가 떨어져 나간 자리를 통나무로 막아놓은 미네아폴리스)
미네아폴리스는 에스피리투산토에서 태평양을 건널 수 있도록 임시 함수를 붙인 후 진주만을 거쳐 미본토의 마렛 섬 조선소에서 완전히 수리를 받았다. 미네아폴리스가 다시 일선에 복귀한 것은 1943 년 9 월 9 일이 되어서였다.
( 임시 함수를 붙인 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의 상태는 미네아폴리스보다 더 심했다. 뉴올리언스는 어뢰의 탄두와 함께 탄약고의 폭발로 인하여 함체 길이의 1/5에 해당하는 함수 36m 가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함수와 제 2 번 포탑에 있던 승무원들은 최초 폭발시 모두 사망했다.
중앙보수실에 있던 보수관 헤이터 소령은 폭발로 인하여 발생한 유독가스가 실내에 차오르자 즉시 부하들에게 방독면을 착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방독면의 숫자가 모자랐으므로 헤이터 소령과 리처드 헤인즈 대위 , 그리고 앤드류 포먼 소위는 자신의 방독면을 부하들에게 양보하고는 재빨리 대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다리까지 도착하는데 성공했으나 이미 너무 많은 유독가스를 마셔서 사다리를 올라갈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이 3 명의 장교는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부하들의 목숨을 구했다. 보수관이 사망하자 보수작업은 기관장이 담당하게 되었다. 상황은 엄중했다. 침수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뉴올리언스의 흘수는 정상의 2 배가 넘는 12m 에 달했고 , 불과 2 노트의 속력에도 수압으로 인하여 전방 보일러실의 격벽이 무너졌다.
그러나 , 뉴올리언스의 승무원들은 불굴의 의지로 화재를 진압하고 침수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아직도 후방 보일러실과 기관실은 작동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뉴올리언스는 5노트의 속력으로 항해하여 12 월 1 일 아침 6시 10 분에 툴라기 항에 도착했다.
( 툴라기 항에 도착한 뉴올리언스의 모습 Damaged USS New Orleans)
뉴올리언스는 툴라기에서 12 월 12 일까지 수리한 후 미네아폴리스와 함께 툴라기를 떠났다.
뉴올리언스는 호주로 가서 12 월 25 일에 시드니 항에 입항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임시 함수를 붙인 뉴올리언스는 3 월 7 일에 시드니를 떠나 미본토의 브레머튼 해군조선소에 가서 완전히 수리를 마치고 1943 년 8 월 31 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펜사콜라는 침수는 조금 덜했지만 무서운 화재와 싸워야만 했다. 어뢰에 맞으면서 시작된 화재는 9 분 후에 기관총탄들이 유폭하면서 맹렬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함장 로우 대령은 보수관 줄리안 벤터 대위와 함께 직접 화재현장에서 승무원들을 지휘하여 화재와 싸웠다.
12 월 1 일 오전 1 시 30 분에 3 번 주포탑에서 8 인치 포탄 150 발이 폭발하면서 펜사콜라는 일대 위기를 맞았으나 , 재빠른 탄약고 침수로 연쇄폭발을 막아서 겨우 침몰을 면했다. 화재와 싸우면서 툴라기 항으로 향한 펜사콜라는 새벽 4 시경에 툴라기 항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화재는 지속되고 있었다. 펜사콜라의 승무원들은 구축함 퍼킨스의 도움을 받아가며 12 시간 이상 화재와 싸운 끝에 1 일 정오경에야 겨우 진압했다. 125 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고 , 68 명이 부상을 입었다.
펜사콜라는 툴라기 항에서 1 주일간 응급수리를 한 다음 12 월 6 일에 에스피리투산토에 도착하여 수리함 베스탈로부터 1943 년 1 월 7 일까 지 수리를 받았다.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난 펜사콜라는 사모아를 거쳐 1 월 27 일에 진주만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수리를 받고 11 월 9 일에 일선에 복귀했다.
( 어뢰에 맞아 구멍이 뻥 뚫린 펜사콜라의 좌현. Damaged USS Pensacola
1942 년 12 월 1 일에 찍은 사진이다.)
노댐턴은 살아남지 못했다. 맹렬한 화재 때문에 승무원들이 침수구역 주변에서 더 이상의 침수를 방지하는 보강작업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함체가 24 도까지 기울어진 1 일 오전 1 시 15분에 함장 키츠 대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함장 키츠 대령이 직접 지휘하는 구조팀을 제외한 승무원들은 질서정연하게 퇴함하기 시작했고 , 1 시 50 분에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플레처와 드레이튼이 이들을 수용했다. 키츠 대령과 구조팀은 기울기가 35도까지 심해진 오전 2시 40 분에야 배를 탈출했는데 구명정은 이미 모두 배를 떠났기 때문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키츠 대령이 탈출한지 24 분 후인 1 일 오전 3시 4 분에 노댐턴은 함미부터 침몰했다. 플레처와 드레이튼은 밤새 해상을 수색하여 승무원 773 명을 구조했다. 노댐턴의 사망자는 58 명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로써 타사파롱가 해전이 끝났다. 타사파롱가 해전은 미해군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 날카롭게 찔린듯이 아픈 패배 " ( sharp defeat)였다.
제 67기동부대는 중순양함 4 척 , 경순양함 1 척 ,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함대를 가지고도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지고 그 중의 6척이 수송임무를 위하여 무장의 일부를 포기한 상태의 일본제 2 수뢰전대와 대결하여 참패를 당했다.
제 2 수뢰전대는 구축함 1 척을 상실한 댓가로 미해군의 강력한 중순양함 4 척에 무시무시한 타격을 입혀 1 척을 격침하고 , 나머지 3척을 대파하여 9개월에서 1 년 정도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타사파롱가 해전의 승패를 가른 것은 일본이 보유한 산소어뢰의 위력이었다.
제 2 수뢰전대는 47 발의 산소어뢰를 발사하여 순양함 4 척에 6 발을 명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했다. 문제는 타사파롱가 해전이 끝난 다음에도 미해군이 일본어뢰의 위력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패전의 책임과 관련하여 일본어뢰를 회피하기 위한 어떠한 기동도 계획하거나 실시하지 않은 라이트 제독은 아무런 비난을 듣지않고 , 엉뚱하게 콜 중령이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잘알수 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헐지 제독은 제 67기동부대의 전투보고서에 첨언하여 선두의 구축함열을 지휘했던 콜 중령이 너무 일찍 어뢰를 발사했으며 순양함열을 지키지 않고 그대로 이탈했다는 점을 비판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도 2 달 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타사파롱가 해전의 참패에 대한 대책으로 " 훈련 , 훈련 , 그리고 더 많은 훈련 " (training, training, and more training)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어뢰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타사파롱가 해전을 지휘했던 다나카 제독은 미해군 내에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해군은 그에게 이름과 비슷한 형용사를 사용하여 " 집요한 다나카 " ( Tenacious Tanaka) 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실제로 다나카 제독이 훈련시킨 제 2 수뢰전대의 함장 및 승무원들은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대단한 실력을 보여 주었으며 , 이 전투에서 다나카 제독은 거의 실수를 하지 않았다. 미국중순양함의 주포인 8 인치 함포가 위력은 강하지만 연사속도가 느려서 야간에 고속으로 기동하는 일본구축함을 상대하는 데에는 거의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발견한 것이 그나마 미해군이 얻은 교훈이었다.
따라서 이후로 야전에서 일본구축함을 상대하는 일은 구경은 다소 작지만 대단히 빠른 연사속도를 지닌 6 인치 주포 15문을 장착한 경순양함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 실제로 미해군이 야전에서 일본해군을 압도하게 되는 시기는 SG 레이더가 모든 구축함에 다 장착되고 , 알레이 버크 중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효과적인 구축함의 야전전술을 확립한 1943 년 후반기부터였다.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드러난 가장 긍정적인 면은 미해군 보수능력의 극적인 발전이었다. 사실 노댐턴을 제외하고도 일본어뢰에 맞은 중순양함 3척의 피해상황은 사보 섬 해전 당시 격침되었던 중순양함들의 피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 사보 섬 해전에서 교훈을 얻어 보수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은 결과 4 개월 후에 벌어진 타사파롱가 해전에서는 4 척의 중순양함이 사보섬 해전과 비슷한 피해를 입고도 1 척만 상실하고 나머지 3 척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 67기동부대는 제 2 수뢰전대의 목적인 보급품 수송을 저지함으로써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피해가 너무나 컸다. 오히려 미해군은 타사파롱가 해전의 결과로 위축되어 이후 과달카날 근해에서 강력한 수상함대를 이용하여 일본구축함들의 도쿄급행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 도쿄급행을 저지하는 임무는 툴라기에 기지를 둔 어뢰정들과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활동하는 야간형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인 블랙캣들이 담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