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제 14 군단
1942 년 12 월 9 일 , 아메리칼 사단장 알렉산더 패치 소장이 반데그리프트 장군으로부터 과달카날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동시에 터너 제독은 과달카날 방어임무에서 해제되어 과달카날에 대한 병력 및 보급품 수송 임무만 전담하게 되었다. 패치 소장은 이제 과달카날과 툴라기의 육군 및 해병대 , 칵터스 항공대 , 툴라기의 수상기 기지와 해군기지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가지고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헐지 제독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게 됨으로써 과달카날의 지휘체계가 마침내 정리되었다.
패치 소장이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 과달카날의 모든 일본군을 제거하라."
(" eliminate all Japanese forces" on Guadalcanal.)
( 과달카날의 지상군 지휘관들.
가운데 선글래스를 쓴 사람이 아메리칼 사단장인 패치 소장 , 사진 오른쪽이 해병제 1 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 , 사진 왼쪽은 제 8해병연대장 리처드 홀 제츠케 대령 )
해병제 1 사단이 철수하기 직전에 과달카날의 미군 병력은 약 40,000 명에 달했다.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은 약 25,000 명 정도였으나 , 미군은 일본군의 정확한 숫자를 잘 모르고 있었다. 패치 소장은 대규모 공세로 나가기 위해서는 임시로 과달카날에 배속된 각종 전투부대들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완편된 3 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Alexander Patch 소장
하지만 해병제 1 사단이 빠지고 나서 12 월 중에 3 개 사단을 맞추려면 제 37 보병사단이 과달카날로 와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했다. 제 37 사단은 과달카날에 투입된 사단들을 제외하고 남태평양 해역군이 보유하고 있던 유일한 미군정규사단으로 피지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1942 년 연말에 패치 장군이 사용가능한 지상군 전투부대는 아메리칼 사단 , 해병제 2 사단의 2 개 연대 ( 제 2 해병연대 및제 8 해병연대 ), 제 147 보병연대 , 그리고 몇 개의 해병방어대대였다. 이 정도 병력으로는 현재의 교두보를 방어하는데는 충분했지만 대규모 공세를 펴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결국 패치 소장은 12 월 중에는 속속 상륙하는 아메리칼 사단의 나머지 병력들을 받아들이면서 오스텐 산에 대한 국지적 공세를 실시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대규모 공세를 위해서는 하와이에 주둔하던 제 25 보병사단이 상륙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2 월에 들어서자 주로 아메리칼 사단 소속의 나머지 병력들이 상륙했다. 12 월 8 일에는 제 132 연대전투단이 상륙했다. 12 월 12 일에는 해병제 2사단의 신호중대와 제 18해군건설대대가 상륙했고 , 다음날인 13 일에는 아메리칼 사단의 제 3/182 대대와 제 2해병공병대대의 C 중대가 상륙했다. 14 일에는 아메리칼 사단의 기동전투정찰대대 , 제 1/132 대대 , 제 247 야전포병대대 A 포대 , 제 39 헌병중대의 분견대가 상륙했다.
아메리칼 사단의 마지막 주요 전투부대인 제 221 야포대대는 1943 년 1 월에 상륙했다.
( 제 132 연대전투단의 상륙 광경. 1942 년 12 월 8 일에 찍은 사진이다.)
남태평양해역군 육군사령관인 하몬 장군은 하와이에 있는 제 25 보병사단을 하루 빨리 과달카날에 상륙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하몬 장군은 헐지 제독을 재촉하여 수송함들을 하와이로 보냈는데 , 그는 제 25 사단을 하와이에서 바로 과달카날로 보내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전투 적재를 실시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수송함의 용적이 다소 빠듯했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은 일반 적재로 누메아까지 간 다음 거기서 전투 적재로 환적하여 과달카날에 상륙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 누메아 항의 적체가 심각했으므로 그랬다가는 제 25 사단은 2 월 초가 되어야 과달카날에 상륙할 수 있었다. 하몬 장군은 결단을 내려서 모자라는 수송함의 용적에 맞추어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들을 억지로 구겨넣어 제 25 사단을 전투적재 상태로 하와이에서 바로 과달카날로 투입했다.
1942 년 12 월 17 일에 제 35 연대전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했고 , 1943 년 1 월 1 일에 제 27 연대전투단이 , 1 월 4 일에 제 161 연대전투단이 상륙했다. 제 161 연대전투단이 상륙하던 1 월 4 일에 뉴질랜드를 떠난 해병제 2사단의 본부와 제 6해병연대도 상륙하여 해병제 2사단도 거의 정수를 맞추었다. 이제 패치 소장은 배속부대들을 제외하고도 3 개 사단을 갖추게 되었다.
과달카날의 병력 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군단을 창설할 필요성이 생겼으므로 , 1943 년 1 월 2 일에 과달카날에서 제 14 군단이 창설되었다. 아메리칼 사단장이었던 패치 소장이 군단장에 취임했으며 , 부사단장이었던 세브리 준장이 패치 소장의 뒤를 이어 아메 리칼 사단장이 되었다.
미본토에 만들어져 있던 제 8 군단본부가 제 14 군단본부로 대체되면서 제 8 군단 참모장이었던 로버트 스프라긴 준장이 1942 년 12 월 말에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제 14 군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 군단 참모들은 대부분 아메리칼 사단의 참모들이 겸임했다.
1943 년 2 월 1 일 현재 제 14 군단본부는 불과 장교 11 명과 사병 2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 14 군단본부는 인원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지원부대나 포병화력도 부족하여 해병방어대대와 육군해안포대의 155mm 롱톰평사포들이 군단포병세력의 전부였다.
1943 년 1 월 7 일 현재 제 14 군단의 병력은 합계 50,078 명이었다. 아메리칼 사단이 16,196 명 , 제 25 보병사단이 12,629 명 , 해병제 2 사단이 14,733 명이었고 , 항공요원이 1,607 명 , 해군이 4,913 명이었다. 패치 소장은 원래 3 개 사단에 포함되지 않았던 배속부대들도 모두 사단에 배속시켰다.
예를 들어 아메리칼 사단은 제 147 보병연대를 배속받아 4 개의 보병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 해병방어대대들은 모두 해병제 2사단에 배속되었다. 과달카날의 항공력도 크게 증강되었으며 , 헨더슨 비행장의 시설도 좋아지고 또한 추가로 활주로들이 건설되었다.
헨더슨 비행장의 주활주로는 1,830m 까지 연장되어 중폭격기도 충분히 이착륙이 가능했고 , 마스덴 매트를 깔아서 전천 후로 사용이 가능해졌다. 주활주로 동쪽의 전투기용 보조활주로는 12 월 들어서 다시 지면을 고르기는 했으나 , 아직 마스덴 매트는 깔려있지 않았다.
헨더슨 비행장은 주로 해군과 해병대 항공기들이 사용했다. 쿠쿰 지역에도 산호로 포장한 활주로를 건설했다. 쿠쿰 비행장은 1943 년 1 월 1 일부터 작전을 시작했는데 주로 육군항공대의 전투기들과 뉴질랜드 공군이 사용했다.
12 월 5 일에 아올라 지역에 상륙했던 제 14 해군건설대대는 콜리 곶 부근에 활주로를 닦기 시작하여 12 월 23 일에 일단 전투기용 활주로로 완성하고 , 이후 확장을 통하여 길이 1,980m, 폭 45m 의 중폭격기용 활주로로 완성했다. 카니 비행장으로 불린 콜리 곶의 비행장에서 중폭격기들이 작전을 시작한 것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이후인 1943 년 4 월 1 일부였다.
활주로만 확장된 것이 아니라 비행장의 시설도 좋아졌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항공유 저장탱크였다. 처음에는 수송함이 항공유를 드럼통에 싣고 오면 상륙주정에 실어 상륙시킨 다음 병사들이 트럭으로 운반하여 활주로 부근의 집적소에 쌓아 두었다. 이런 방식은 인력이 많이 들었으며 , 대량의 항공기를 운용할 수 없었다.
남태평양해역군 항공사령관으로 재직하다가 1942 년 9 월에 해군본부의 항공국장으로 옮겨간 맥케인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킹 제독에게 헨더슨 비행장에 최소한 100 만 갤런 ( 3,790m ³) 용량의 항공유 저장탱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 6 해군건설대대가 1942 년 10 월 말에 우선 급한대로 250 배럴 ( 40m ³) 용량의 항공유 저장탱크 3 개를 설치했다.
이제 병사들은 항공유가 가득찬 드럼통을 항공유 저장탱크의 선반에 굴려서 올려놓은 다음 뚜껑을 열어 저장탱크와 연결된 도관에 항공유를 쏟아붓기만 하면 되었다. 항공기에 급유할 때에는 저장탱크에서 유조차에 직접 보급했다. 이후 각 비행장마다 훨씬 큰 용량의 항공유 저장탱크들이 속속 설치되었고 , 나중에는 양륙해안에서 각 항공유 저장탱크 까지 15cm 직경의 파이프로 연결했다.
1943 년 5 월까지 완성된 과달카날의 항공유 저장탱크의 용량은 130 만 갤런 ( 4,930m ³) 에 달했으며 , 차량용 휘발유 저장 탱크의 용량도 50 만 갤런 ( 1,900m ³) 에 달했다. 헨더슨 비행장의 대공방어 무기들은 12.7mm 수냉식 기관총과 20mm 기관포 및 37mm 대공포 , 그리고 , 90mm 대공포로 이뤄져 있었다.
90mm 대공포는 주로 고공폭격을 하는 일본군의 1 식 육상공격기들을 상대했고 , 나머지 대공화기들은 저공으로 공격하 는 급강하폭격기나 기총소사를 가하는 전투기들을 상대했다. 레이더는 장거리 경계용의 SCR- 270 레이더와 사격통제용의 SCR- 268 레이더가 있었다. SCR- 270 레이더는 성능이 비교적 양호하여 큰 도움이 되었으나 , SCR- 268 레이더는 아직 초기단계라 정확한 사격통제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일본기들은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하여 높은 산으로 가로막힌 과달카날 섬의 동남쪽이나 남쪽을 통하여 헨더슨 비행 장에 접근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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