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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80) - 미군의 상황 /blog.naver.com/imkcs0425/60115995833


80. 미군의 상황

1942 년 12 월에 과달카날의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교두보의 영역은 11 월 말에 새로 확보한 크루즈 곶과 남쪽 66 번 고지 사이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상륙 초기에 점령한 지역 그대로였다. 상륙 당시 점령했던 툴라기 , 가부투 , 타남보고 섬은 미군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가끔씩 이들 섬에 포격이나 폭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지상군 공격은 오로지 헨더슨 비행장만을 노렸다.  툴라기 항은 전투함들과 수송함들에게 좋은 정박지를 제공했다. 과달카날 섬 대안의 플로리다 섬에는 상주병력이 없었으며 과달카날에서 정찰대가 정기적으로 상륙하여 일본군이 활동하는지 감시했다.
상륙 초기의 암담하던 보급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호전되어 갔으나 , 실제로 보급이 만족하게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942 년 12 월에 들어와서였다.  처음에는 제해권의 문제로 정상적인 보급이 거의 불가능했고 , 8 월말의 동부솔로몬 해전 이후에는 수송함을 이용한 보급이 가능해졌으나 빠듯한 수송함의 숫자 때문에 충분한 보급이 어려웠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각서 덕분에 11 월에 들어서면서 수송함 부족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보급상황은 별로 호전되지 않았고 , 하마터면 보급이 단절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이런 위기의 원인은 후방기지인 누메아(New Caledonia, Numea)의 상황 때문이었다. 원래 미군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를 남태평양해역군의 모항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므로 가용한 해군건설대대들과 자원들의 대부분을 투입하여 오클랜드 항의 시설을 확장하고 정비했다.
그런데 , 갑자기 남태평양해역군의 모항을 오클랜드에서 보다 전선에 가까운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로 바꾼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오클랜드 항의 건설공사에 투입되었던 해군건설대대들이 급히 누메아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152 명의 선발대가 누메아 항에 도착한 것은 과달카날 상륙을 불과 2 달 앞둔 1942 년 6 월 10 일이었으며 실제로 누메아 항의 기능을 확장시키는 공사는 거의 과달카날 상륙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누메아 항의 자연적인 조건은 매우 우수하였으나 항구시설은 빈약했다. 누메아 항에는 부두가 2개 뿐이었는데 누메아에서 산출되는 니켈을 선적하던 니켈부두는 240m 길이로 대형수송함 1 척 이 접안할 수 있었고 7 톤짜리 기중기 3 개가 있었으나 배에서 내린 화물들을 쌓아놓을 공간이 거의 없었다.
대부두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또다른 부두는 520m 길이에 충분한 넓이의 야적장을 갖추고 있었으나 , 기중기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건설대대는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거듭해야만 했다.  이들은 누메아에 상륙하자마자 부유잔교를 만들고 , 야적장과 창고를 짓고 , 도로를 닦고 , 밀려드는 인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숙소와 사무실을 만들고 , 이들이 마실 식수공급체계를 건설하고 , 전기시설을 설치해야만 했다.
누메아에는 숙련된 항구노동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해군건설대대원들은 자신들의 장비와 자재들을 스스로 하역해야만 했고 , 틈나는대로 하역작업을 도와야만 했다.  사실 누메아에서는 다른 일이 없는 인원들은 모두 하역작업에 투입되었다. 또한 해군 , 해병대 , 육군 , 뉴질랜드 군이 각자 자신들의 보급품을 별도로 관리하는 바람에 혼란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1 월부터 루스벨트 대통령 덕분에 확보하게 된 신형수송함들이 대량의 보급품을 싣고 속속 도착하자 누메아 항의 기능은 거의 정지하기 직전 상황까지 몰렸다. 한때는 누메아 항 바깥에 18 만톤의 각종 보급품과 장비들 , 그리고 수많은 병력을 가득 실은 수송함들이 91 척이나 하역을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들 중 83 척은 누메아 항에서 환적하여 에스피리투산토나 과달카날같은 다른 기지로 떠나야 하는 수송함들이었다.  누메아의 상황이 이러니 과달카날에 대한 보급상황이 크게 호전될 리가 없었다. 

( 심각한 적체에 시달리고 있는 누메아 항의 풍경.
하역된 화물들이 빈 공간이라면 아무데나 무질서하게 쌓여 있다.)

헐지 제독은 이런 혼란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1942 년 11 월 말에 누메아 항의 양륙 및 선적 작업을 미육군에게 일임했다.  대량의 보급품들을 다루어 본 경험이 풍부한 미육군이 누메아 항의 양륙 및 선적 작업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 것 만으로도 상황은 빠르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또한 1942 년 12 월 1 일부터 어뢰정 , 차량상륙정 ( LCM) 및 P- 38 전투기 등을 들어올릴 수 있는 75 톤짜리 해상기중기가 가동을 시작하고 , 해군건설대대가 건설한 여러 개의 부유잔교를 이용한 하역작업도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누메아 항의 적체는 빠르게 해소되기 시작했다.
누메아 항에 양륙된 화물은 1942 년 11 월의 34,327 톤에서 12 월에는 126,216 톤으로 급증했으며 , 같은 기간 과달카날에 양륙된 장비 및 보급품도 11 월의 5,259 톤에서 12 월에는 7,271 톤으로 증가했다. 해군건설대대가 건설하던 여러 부두들이 1943 년 전반기에 속속 완공되면서 누메아 항은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과달카날에서의 하역작업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달카날에는 부두가 없었기 때문에 수송함들은 룽가 정박지에 닻을 내리고 상륙주정에 보급품을 실어서 해안으로 보냈다.  그러면 해안에서 보급품을 내리고 , 다시 트럭에 실어 내륙의 보급품 집적소로 운반했는데 트럭은 항상 모자랐다.
하역을 전담할 지원병력도 부족했으므로 대부분의 전투병들이 원주민 노동자와 함께 하역작업에 동원되어야 했는데 전투병들에게 이런 하역작업은 힘들기만 하고 재미도 없으면서 귀중한 휴식시간을 잡아먹는 고된 노동에 지나지 않았다.

( 해안에 도착한 상륙주정으로부터 보급품을 하역하고 있는 과달카날의 미군병사들)

과달카날의 열악한 도로사정도 보급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해병제 1 사단이 상륙할 당시 과달카날에는 차량이 다닐만한 도로가 거의 없었다. 전쟁 전에는 북해안을 따라 나있는 정부도로라고 불리던 도로가 차량통행이 가능한 유일한 도로였다.
일본군이 상륙하여 헨더슨 비행장 지역까지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닦았다.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한 뒤 해병제 1 사단의 공병대원들이 정부도로 및 헨더슨 비행장과 연결된 도로를 확장하고 , 마타니카우 강에 트럭이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건설했다.

( 마타니카우 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 공병대원들)

또한 정부도로에서 갈라져서 남쪽의 방어진지에 이르는 지프가 통행가능한 도로를 닦았다. 미육군제 57공병연대가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들을 더욱 연장하여 66 번 고지까지 연결했다.
지프에 실려 66 번고지에 도달한 보급품들은 인력으로 72 번 고지와 73 번 고지로 운반되었다. 이런 도로들은 비가 심하게 오고나면 통행불능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 비가 오고나서 통행불가상태가 되어버린 도로)

미군이 전진하면 공병대가 뒤따라가면서 도로를 닦고 중간에 전진 보급품 집적소를 만들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까지 미군은 자주 보급품 부족현상에 직면했으며 , 심지어는 식수도 없이 장시간의 전투를 치른 적도 있었다. 말라리아도 미군의 전투능력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말라리아는 남태평양 지역에서 미군 전투력의 손실을 가져온 가장 큰 단일요인으로서 ,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5 배에 달하는 병력이 말라리아로 인하여 최소한 일시적으로 전투임무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본군은 물론 미군도 과달카날 전투 당시에는 말라리아 대비책이 부실해서 , 과달카날에 말라리아 전담 요원이 배치된 것은 1942 년 11 월 중순이 되어서였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는 항상 부족했고 , 예방약인 아타브린은 큰 기대를 모았으나 말라리아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타브린이 발기부전이나 불임 , 또는 치아나 피부의 영구착색같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잘못된 인식이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서 많은 병사들이 아타브린 복용을 꺼렸다.
남태평양 지역은 많은 강수량으로 인하여 수많은 늪지와 웅덩이들이 산재했고 , 덥고 습한 기후 속에서 이런 늪지와 웅덩이는 모기들의 이상적인 서식처가 되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까지도 미군 지휘관들은 병사들 부근에서 모기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한 말라리아 대책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1942 년 11 월 1 일부터 1943 년 2 월 13 일까지 과달카날에 상륙했던 미육군 병사들은 연간 단위로 환산했을 때 평균 1,000 명당 420 명이 말라리아로 인하여 입원했다.  결국 과달카날 전투와 부나- 고나 전투에서 말라리아로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이후 적극적인 말라리아 대책을 세웠다.
과달카날의 미군들은 기지 및 그 주변의 웅덩이와 늪지들을 철저하게 메우고 , 충분한 수량의 분무기를 투입하여 대량의 살충제를 뿌린 1943 년 8 월 이후에야 말라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