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일본군의 처지
대본영 육군부는 1942 년 11 월 9 일에 남태평양 방면의 지휘구조를 개편했다. 즉 아다치 하타조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 18 군을 신설하여 동부 뉴기니 방면의 작전을 맡김으로써 과달카날에 있던 제 17 군 사령관 햐쿠다케 하루요시 중장은 과달카날 방면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 제 17 군과 제 18 군을 총괄하는 제 8 방면군을 창설하여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마무라 장군은 11 월 22 일에 라바울에 부임했다.
( 일본제 8 방면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8497 )
과달카날에 있던 제 17 군의 주력은 룽가 교두보의 서쪽인 크루즈 곶과 에스퍼란스 곶 사이에 집중되어 있었고 , 교두보 동쪽에는 지리멸렬한 상태인 소수의 패잔병들 밖에 없었다. 제 17 군의 방어선은 크루즈 곶 서쪽의 해안을 출발하여 미군 방어선을 따라 남쪽으로 4,100m 정도 뻗은 다음 동쪽으로 꺾여서 약 2,700m 를 달려 오스텐 산에 이르렀다.
오스텐산 위치
오스텐 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약 2,700m 길이의 방어선은 제 38 사단의 보병단장인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약 1,000 여명의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 아나가키 다케요시 소좌가 지휘하는 제 2/228 대대가 오스텐 산을 방어하고 있었고 , 오카 아키노스케 대좌가 제 124 연대의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잡다한 패잔병들을 끌어모아 오스텐 산과 마타니카우 강 사이를 방어했다.
수메우라 마사이치 대좌가 지휘하는 제 1/228 대대 및제 3/228 대대가 마타니카우 강 서쪽에서 방어선이 북쪽으로 꺾이는 곳까지 방어했다. 크루즈 곶에서 66 번 고지에 이르는 방어선은 주로 마루야마 중장의 제 2 사단이 방어했는데 해안선 부근의 북쪽 방 어선은 제 38 사단의 나머지 병력들이 제 2 사단의 지휘 하에 방어했다.
제 2 사단의 나머지 병력들은 코컴보나 부근에 집결해 있었다. 일본군의 병력은 11 월 중에 최고조에 달하여 약 30,000 명을 헤아렸으나 , 이후 점차 줄어들어 12 월 평균으로는 약 25,000 명 수준을 유지했다. 12 월 초순에 미군은 일본군의 숫자를 최소 9,100 명에서 최대 16,000 명 정도로 낮게 추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군 방어선의 현황도 잘 몰라서 예를 들어 오스텐 산 같은 곳에는 정찰을 위한 소수의 병력 밖에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사들은 모두 체력이 저하되어 있었으며 , 많은 병사들이 전혀 전투를 할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 특이하게도 일선에 배치된 병사들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보급상황이 날로 열악해져 감에 따라 정량의 1/3 이상을 먹을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으며 , 일본군 내부에서 식량을 훔치는 행위가 빈발했다.
가끔씩 운좋게 에스퍼란스 해안에서 미군의 항공기나 어뢰정들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드럼통을 회수하기도 했으나 전반적인 식량사정이 워낙 안 좋다보니 식량이 전방까지 전달되기 전에 후방의 굶주린 병사들이 모두 먹어버렸다.
따라서 일선에 배치된 병사들은 야자 , 풀 , 식물뿌리 , 고사리 , 죽순 , 야생감자 등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 먹으면서 버텨야 했고 , 급기야 1943 년 1 월 말이 되자 오스텐 산에서는 식인행위까지 벌어졌다. 일본군의 문제는 식량부족만이 아니었다.
말라리아가 미군의 전투력을 많이 깎아먹은 수준이라면 일본군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재앙이었다.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사실상 모두 말라리아에 걸렸다. 일본군의 말라리아 대비태세는 미군보다도 훨씬 허술했으며 , 모기장도 거의 없었고 , 야전병원시설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이 상대적으로 건조한 고지대에서 야영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일본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습기찬 정글 속에서 행군하고 야영하면서 모기들에게 노출되었다. 일본측의 기록에 따르면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된 일본 지상군의 숫자는 제 17 군 33,600 명과 해군육전대 3,100 명이었다.
이들 중 21,500 명이 사망했는데 , 사망자 중에서 9,000 명 정도가 굶주림에 더하여 말라리아 및 이질과 같은 질병 으로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식량 뿐만아니라 탄약도 부족하여 적정량의 1/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군은 체력 저하와 탄약 부족으로 인하여 전선 어디서든 본격적인 공세를 가할 능력은 사실상 전무했으며 , 방어만 가능한 상태였다.
한떄 위세를 떨쳤던 일본군의 150mm 곡사포도 탄약 부족으로 포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미군의 교두보에 155mm 롱톰 평사포가 상륙한 이후에는 교두보를 향하여 포격을 가하는 행위는 곧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포 위치가 노출되기 때문) 그러나 대본영은 아직도 과달카날을 포기하지 않고 , 헨더슨 비행장에서 북서쪽으로 330km 떨어진 뉴조지아 섬의 문다 지역에 11 월부터 새로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교묘한 은폐술 덕분에 미군은 12 월 3 일이 되어서야 공사 중인 문다 비행장을 발견했다. 집요한 미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12 월 말에 기어이 문다 비행장을 완성했지만 이미 늦었다. 칵터스 항공대는 매일같이 문다 비행장을 폭격하여 도저히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고 , 중폭격기들은 이제 쇼틀랜드와 부겐빌의 일본군 비행장들까지 폭격하여 감히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1942 년 12 월에 들어서자 미군에게 있어서 이제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 최종 승리로 향한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굶주리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미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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