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신성과 인성)과 사역으로 정리되는 기독론은
초기 에큐메니칼 공의회1) 이후‘인격’에 강조점이 주어져 왔던 반면,
‘사역’에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왕’과‘제사장’으
로 대표되던 기독론의 직무론은 칼뱅에 이르러서야‘선지자(예언자)’가
추가되면서 그 범위가 약간 확장되다가2) 20세기의 신약학자 쿨만에 이
르러서는 급기야‘사역’에만 강조점을 둔 기독론 연구물이 나오기에 이
른다.3) 1959년 출간된『신약의 기독론』에서 쿨만은 네 가지로 사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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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부와 성자의‘동일본질’(Homoousios)로서 신성에 대해서는, 제1차 에큐메니칼 공
의회(제1차 니케아신조, 325년, 그리스어)와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제1차 콘스탄
티노플신조, 381년, 그리스어)의 신조를 참조하기 바란다. Cf. 이장식 편역,『 기독교
신조사 I』(서울: 컨콜디아사, 1993), 11-14.
2) 최정자,“ 칼뱅에 의한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에 관한 연구,”「제4차 한국조
직신학자 전국대회」(2009년 4월 25일 토, 호서대학교 천안캠퍼스 종합정보관 503호),
1-14(발표문), 15-16(논평문).
만 세분된 기독론을 전개한다. 즉, 지상 사역(선지자, 종), 미래적 종말론
적 사역(메시아, 인자), 현재 사역(주, 구주), 선재에서 완성된 사역(로고
스, 아들) 등이다.4) 목차에서 보듯이 이 책에는 인격을 다루는 장이 별
도로 없고 모든 장은 사역만을 다룬다. 왜 이런 시도를 하는지 쿨만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5) 이를 칼뱅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3직무
론과 비교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하여진 사역의 모습은 그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인격’에서‘사역’으로 강조점이 전환되면서 발생하
는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과 통일성 가운데서 기독론을 상
정하기가 좀 애매하다는 것이다.6) 예수 그리스도의‘인격’이 강조될 때
21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3) 쿨만, 김근수 옮김,『 신약의 기독론』(서울: 나단, 1987), 22.“ 기독론은 본성(위격)들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의 교리다.”
4) 앞의 책, 21.“ 첫 번째로는 주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선지자, 종]을 지칭하는 것들에
관해(제1부), 두 번째로는 주로 그의 미래적 종말론적 사역[메시아, 인자]과 관계되는
것들에 관해(제2부), 다음으로는 주로 그의 현재 사역[주, 구주]을 설명하는 것들에
관해(제3부), 끝으로는 주로 그의 선재에서 완성된 사역[로고스, 아들]을 설명하는 것
들에 관해(제4부) 말하기로 하겠다.”[ ]는 쿨만이 말하는 것을 논자가 편의상 한눈
에 보이도록 넣은 것이다.
5) 앞의 책, 15.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르치심과 생활 가운데서 무언가‘새로운
사역’을 수행하셨고, 그 새로운 사역으로부터 첫 기독교인들이 그의 인격과 사역을 설
명하려는 시도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 가능성(심지어는 개연성)으로써
까지 고려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그리스도 체험이 관련된
종교 형태들과의 모든 명백한 유추들 속에는 들어 있지 않은 특별한 특징들을 보여
준다는 점이 마땅히 감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인용된 문장에서 보듯이, 쿨만은‘인
격’을 강조하다가‘사역’을 소홀히 다루게 된 정황 가운데 다시금 신약학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자신의 통합적인 연구 입장을 밝힌다. 강조한 것은 논자이다.
6)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대해 다음의 김재진 교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Cf. 김재진,“ 한 분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연
속성,”「신학논단」21(1993), 357-399. 이 논문에서 김재진 교수는“<한 분 하나님>
의 자기계시 형식의 변형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규정
질 수 있는 전제가 될 수도 있다”(397)는 근거 위에“<한 분 하나님>의 자기계시 형
식의 변형은 바로 구약과 신약을 삼위일체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라고 할 수
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과의 동일본질(Homoousios),7) 그리고
성자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과의 동일본질(Homoousios)8)이 논의의 핵
심이었다. 이렇게 인격 논의를 통해, 성부와 성자 간의 신성의 유일성
(Einzigkeit), 성자의 인격으로서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손상시키지 않
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사역’에 관한 논의에서도 지켜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사역’을 말할 때는 la wnm[,9) Emmanouhvl,
10) 즉 하나님의 현재화(Vergegenwärtigung),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 논의의 핵심이 된다. 사실 하나님의 유일성11)과 하나님의 현재화는
따로 떼어 내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이 둘이 동시에 거론될 때 가장
이상적이지만 실상 어떤 하나를 강조하다 보면 또 다른 하나는 소홀하
게 다뤄지게 되는 것이 신학의 현실이다. 이렇게‘인격’과‘사역’의 분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17
있을 것이다”(398)고 주장하면서 결론적으로“신- 구약 성서의 연속성 혹은 옛 계약
과 새 계약의 연속성은 <한 분 하나님>의 자기계시 형식의 변형 속에 있다”(399)고
말한다.
7) 동일본질(Homoousios)은‘같은 본질’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같은
본질>이시며 […]”(제1차 니케아신조). Cf. 이장식 편역,『 기독교 신조사I』(서울: 컨
콜디아사, 1993), 11.
8) 동일본질(Homoousios)은‘같은 본질’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제4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칼케
돈신조[451년]). Cf. 이장식 편역,『 기독교 신조사I』(서울: 컨콜디아사, 1993), 20.
9) 이사야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
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 논문에서 인용하는
한글성경은‘개역개정판’을 사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역한글판 사용도 병행하는
데, 이럴 때는 개역한글판이라고 명기할 것이다. 강조한 것은 논자이다.
10) 마태복음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강조한
것은 논자이다.)
11) 기독교의 일신론적 사고, 즉 유일신론적 사고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 김균진
교수의 논문이 유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종속론, 일신론의 또 다른 형태인 양태론,
칼 바르트의 양태론, 칼 라너의 삼중적 자기전달을 소개하면서 유일신론적 사고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며, 이어서 그것이 어떤 문제를 낳는지를 고찰하고 비판한다.
Cf. 김균진,“ 기독교의 일신론적 사고와 그 문제점,”「신학논단」20 (1992), 73-94.
리에서 파생되는 문제는‘예수’와‘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현
대신학의 기독론 추세에서 파생되는 난점과도 상통하는데, 이러한 신학
의 현실은 기독론을 더 모호하게 만들고 따라서 신론, 삼위일체론과의
연관 속에서 통합적으로 기독론을 사유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런 흐름 가운데서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현재화를 동시적
으로 고찰하고자 시도한 신약학의 연구가 등장하였다. 바로 독일의 신
약학자 아델하이트 룩- 슈레더가 저술한 Der Name Gottes und der
Name Jesu: eine neutestamentliche Studie (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신약성서적 연구』)12)이다. 이 책은 구약성서에 나오는‘하나님의
이름’13)과의 관계 속에서 신약성서에 나오는‘예수의 이름’14)을 연구한
것이다. 이 연구의 초점은 유일성과 현재화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이 예수의 이름으로 대체가 가능한가에 있다. 신약학에서 행한 기독론
21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12) Adelheid Ruck-Schröder, Der Name Gottes und der Name Jesu: eine
neutestamentliche Studie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 1999).
13) 하나님의 이름 또는 야훼의 이름의 발음, 기원, 의미 등에 대해 잘 연구된 논문으로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장영일,“ ‘야훼’(Yahweh) 이름의 기원과 의미,”「장신논단」
제12집(1996), 104-136.
14) 국내에서‘예수의 이름’에 대한 학술적인 논문과 저서를 지은 분으로 안석모 교수와
성종현 교수를 꼽을 수 있다. 안석모 교수는 논문의 제8장에서‘예수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힘과 의미가 성서 속에서 충분하게 증언되고
있다고 말한다. Cf. 안석모,“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신학논단」37 (2004),
436. 그리고 성종현 교수는 다음 책의 제1장에서‘하나님의 성호와 예수의 이름’을
다루고 있다. Cf. 성종현,『 신약성서의 중심 주제들』(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8). 성종현,“ 예수-그 이름 속에 담긴 복음,”「기독교사상」1989년 12월호. 성종
현,“ 신·구약성서와 유대문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호와 예수의 이름에 대한 고찰,”
「장신논단」제8집(1992), 102-125. ‘예수의 이름’에 대한 성서적이고 신앙적인 측
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분으로 이명범 목사를 들 수 있다. 이명범,『 예수 이름』(서
울: 도서출판 레마, 1987). 이 외에 미출판된 글과 강연이 다수있다. 그리고 논자의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강응섭,『 예수 이름을 강조하는 신학에 관한 고찰』(서울: 도
서출판 레마, 2001). 강응섭, “라깡, objet a, 예수 이름,”「라깡과 현대정신분석」
8/1(2006), 191-213. 강응섭, “예수 이름과 양성일치 기독론,”「한국조직신학논총」
29(2011), 41-65.
연구의 산물로 평가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 예수의 이름’은 공교롭
게도 신약학자 쿨만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사역 항목에는 포함되지 않
는다. 쿨만은‘예수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사역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
았던 것 같다. 하지만 룩- 슈레더는‘예수의 이름’에서 초대교회 기독론
의 핵심을 발견한다. 결론적인 주장을 미리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예
수의 이름’이라는 계시 속에 하나님의 유일성과 현재화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조직신학의 기독론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베를린
의 신약학자 룩- 슈레더에 따른 기독론 이해를 검토해 보고, 오늘날의
기독론이 나아갈 바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과 현재화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런 논의를 위해 우선 성서에서의 이름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름에 대해 논의했던 설교학자 루
돌프 보렌을 룩- 슈레더와의 논의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논의
를 통해‘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하나님의 유일성과 현재화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통전적 관점에 대해서 다시금 고찰
하고자 한다.
I. 성서에서의 이름 논의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에흐예 아셰르 에흐예(hyha rva
hyha)”,15) 즉‘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개역한글판)라고 자신의 이름
을 드러낸 이후, 십계명에는‘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항목이 포함되었다. 구약성서를 보면 하나님
의 이름을 일컫는 것(부르는 것)에 관한 내용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19
15) 프랑스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Je suis qui je serai,” suis는 동사의 현재형이고 serai
는 동사의 미래형이다. 그러니까 <미래에 있을 나는 현재에 있는 나이다> 또는 <나
는 미래에 있을 현재에 존재하는 나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수 있다.16) 그런데 포로기 이후 유대교 전통에서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실존과 출현을 드
러내기 위해 부르고 외치던 것이었는데,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이
방신들의 이름과 섞이면서 망령되이 사용되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것을 주저하게 되고“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
을 터부시하게 되었다.”17) 구약성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출애굽기 3장
14절 이하의 맥락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hyha rva hyha’ 또
는 ‘hyha’18)에서 hwhy(야훼, 여호와, 사성문자, das Tetragramm, JHWH,
YHWH)19)로 대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20) 이에 더하여 hwhy는 ynda
22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16)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에 대한 예배론적 이해
에 대해서 다음의 책을 참조할 수 있다. 특히 찬송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과 예
수의 이름에 대한 풍성한 분석을 눈여겨 볼 수 있다. Cf. 윤혜진,『 하나님의 이름, 예
배 그리고 음악』(서울: 예일신학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12).
17) Adelheid Ruck-Schröder, 앞의 책, 2.
18) 구약성서에 많이 나오는‘나는 여호와다’는 구문은 대부분 히브리어 음역이‘아니
아도나이’‘아니 야훼’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는‘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나는 스
스로 있는 자, 개역개정)‘ 에흐예’(스스로 있는 자, 개역개정) 그리고 호세아1장9절
에는‘에흐예’(하나님, 개역개정)로 나온다.
19)‘사성문자’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두 연구자에 의한 이중주, 구약학자인 라콕과 철
학자이자 해석학자인 리꾀르의 변주를 참고하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라콕과 리꾀르의 주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Cf. 라콕, 앙드레 & 리꾀르, 폴/
김창주 옮김,『 성서의 새로운 이해』(서울: 살림, 2006), 393-424(라콕), 425-466(리
꾀르). 또한 프랑스에서 발간된 신의 이름과 신약성서의 신의 이름에 관한 두 권의
책도 유용할 것이다. Cf. D. Fontaine, Le nom dans le Nouveau Testament (Paris:
L’Harmattan, 2007). G, Gertoux, Un historique du nom divin (Paris: L’Harmattan,
1999).
20) 개역개정판 성경전서의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hyha rva hyha)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
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hyha)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과
15절(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
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hwhy)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
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아도나이, 주)로 치환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역본인 70
인역에서는 hwhy를 ynda에 준하는 Kuvrio"(Kyrios, 키리오스, 주)로 번역
하였고,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수에게‘주’를 부여하였다. 다시 정리해
보면, 하나님이 직접 발설하신 자신의 이름인‘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는 구약성서에서‘야훼’로 대치될 뿐 아니라‘아도나이,’‘키리오스’로
도 표기되고, 신약성서에서는‘키리오스’를‘예수’에 덧붙여서‘주 예
수’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hwhy를 Kuvrio"로 치환하는 문제와
Kuvrio"를 Ihsouo"에게 부여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어려움은 신약성서에도 반영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
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는 예를 보게 된다.21)
문자적으로‘예수의 이름’은 신약성서의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
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등에 16회22) 가량 등장한다.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등장하는 문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
련하여‘마태복음’1장에서는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전달되는‘이름 예
수’가 등장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에는 이 땅에서의 사역과 더불어 하
나님 우편으로 가신 다음의 사역까지도 포함하는‘내 이름’이 등장하기
도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70인역본에 표기된‘주’를‘예수’와 연결시
킴으로 유대교 관원으로부터 이‘호칭’을‘금지’하는 사건도 있었다(행
3-5장). 이상에서 보듯이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이름과 관련된 구절은
적다고 할 수는 없다. 구약성서의‘하나님의 이름’이 신약성서에서‘예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21
나의 칭호니라.”), 이 두 구절에는 hyha rva hyha, hyha, hwhy가 순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1)“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행4:17),“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
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행 5:28).
22) 문맥에 따라‘예수의 이름’이라고 표기되지 않고 단지‘이름’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막 6:14; 행 4:18, 430; 5:40; 8:16; 9:27, 29; 19:5, 13, 17; 21:13; 26:9; 고
전 5:4; 빌 2:10; 골 3:17; 살후 1:12. 그리고‘이름’앞뒤에 수식어가 붙는 경우도 있
다. 가령 내 이름(마 10:22 등에 31회). 이런 경우를 포함하면‘예수의 이름’에 연관
된 신약성서의 호칭 표현은 더 많아진다.
수의 이름’으로 치환되는 듯 보이는 대표적인 예가 빌립보서 2장 9절23)
과 사도행전 4장 12절24)이다. 우리는 이 두 본문을 읽으면서 구약성서
의 이름과 신약성서의 이름이 교환 가능한 것인지 즉각적으로 질문하
게 된다. 그러나 답변은 그렇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성경 구절
은 적지 않다.25)
룩- 슈레더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름 논의를 독일의 설교학자
보렌(Rudolf Bohren)에서부터 시작한다. 보렌의 주장에 따르면“설교는
22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23)“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4)“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
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5)“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
(시66: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
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
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
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
39),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눅 1:49),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1:5),“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
을 받으리라”(롬10:13),“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
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15:9),“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
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6:1),“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
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2:1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
하지 아니하느냐?”(약 2: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
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요III 7),“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
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계13:6),“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계 16:9).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야훼와 예수의 이름 가운데서 발견하는 것”26)
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룩- 슈레더는“두 이름이 동시에 그리
스도를 설교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갖고 있다면 예수의 이름과 야훼의
이름이 어느 정도의 선에서 일치하느냐?”27)라고 질문한다. 룩- 슈레더
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보렌이『설교학원론』에서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여러 겹의 주장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보렌은“야훼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서 성취를
발견한다”(Otto Weber, Grundlagen der Dogmatik I, 1959, 제2판, p.
462)28)고 오토 베버의 글을 인용하면서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이
연속이고 성취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미스코테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의 단절을 주장한다. 즉,“ 야훼는
번역이 불가능한 이름이며, 개념화할 수 없는 개념이다”(K. H. Miskotte,
Over de zin van het Oude Testament, 1963, p. 130.)29)라고 주장
한 미스코테의 글을 인용하고는“야훼가 번역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번역 불가능하다”30)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보렌이 학문적인 면에서 베버보다는 미스코테를 더 의지한다고 볼 수
도 있겠지만, 보렌은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간의 연속과 단절에
있어서 모호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렌은 결국“설교자는
야훼를 야훼로서, 예수를 예수로서 주장함으로써 […]”31) 등을 말함으로
써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이 단절된다고 말하고 있다. 두 이름간의
단절은 다른 곳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렌은“원래 우리는 야훼의
하나님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23
26) 루돌프 보렌,『 설교학원론』(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116.
27) Adelheid Ruck-Schröder, 앞의 책, 5.
28) 루돌프 보렌, 앞의 책, 127. 괄호 속에 서지를 넣은 것은 보렌이다.
29) 앞의 책, 118. 괄호 속에 서지를 넣은 것은 보렌이다.
30) 앞의 책, 118.
31) 앞의 책, 121.
야훼에 대하여 말함으로써만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써만 이름에 의한 말로서의 설교는 야훼의 이름에 의한 말씀이라고 하
는 사실이 타당하게 되는 것이다”32)라고 말함으로써 야훼의 이름만으
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두 이름을 연결하는 보렌의 심오한
해석론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명확하게 두 이름을 연결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단절에 무게를 더 실어 주는 것같이 보인다. 이런
논의에서 논자는 보렌이 두 이름간의 모호한 이음 또는 단절을 주장한
다고 이해하게 된다.
룩- 슈레더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름 논의를 조직신학자 링크
(Christian Link)를 끌어들이면서 이어 간다. 마태복음 21장 9절33)과 요
한복음 1장 14절34)을 근거로 링크는“예수 그리스도는 야훼의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그 야훼의 실제
적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었다”35)고 말한다. 링크는, 보렌이 인용한 베
버처럼,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간의 연속을 말한다. 이렇게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사이에서 주장되는 단절과 연속의 관점에 대해
룩- 슈레더가 취하는 입장은 연속 쪽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하나님
의 이름(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간에 유일성과 현재화가 공유되
는가라는 질문을 추가적으로 던지면서 논의를 진전시킨다.
룩- 슈레더는 위에서 언급한 Der Name Gottes und der Name Jesu:
eine neutestamentliche Studie(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신약성
서적 연구』)에서‘예수의 이름’이 등장하는‘신약성서’의 모든 본문을
주석한다. 그가 이 연구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신약성서’에서
22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32) 앞의 책, 114.
33)“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
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3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
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5) Adelheid Ruck-Schröder, 앞의 책, 6.
의‘예수의 이름’은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의‘유일성’(Einzigartigkeit)
을 드러낸 것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하나님의
통일성과 더불어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두 축이
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아타나시우스 신조인데,
이 신조에 명시된 ‘Unity in Trinity, Trinity in Unity’36)는 토마스 아퀴
나스,37) 바르트38) 등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경험을 강조하는‘아래에서
위로의 신학’은, 계시를 강조하는‘위에서 아래로의 신학’이‘계시→삼
위일체’를 거론하는 것과는 달리,‘ 피조물→삼위일체론’을 다룬다. 이
런 구도를 비판하면서 칼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삼위일체론의
흔적’이론을 적용시켜 본 결과 나타나는 폐단, 즉“피조물 안에서의
삼위일체의 자취”(vestigium trinitatis in creatura)39) 대신“삼위일체 안
에서의 피조물의 자취”(vestigium creaturae in trinitate)40)를 제시한다.
경험적 실천은 실용적일 때 유용하다. 이런 구도에서는 실천이 이론
을 검증하게 된다. 그러나 실천은 삼위일체를 검증하지 못한다. 몰트만
은“문자적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
을지라도 아무런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삼위일체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25
36)“이 정통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곧 삼위로서 일체이시고, 일체 가운데 삼위이신 유
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나오는 이 글은 다음에서 전
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장식 편역,『 기독교 신조사I』(서울: 컨콜디아사, 1993), 15.
지원용 편역,『 신앙고백서(루터교 신앙고백집)』(서울: 컨콜디아사, 1991), 15.
37) 토마스 아퀴나스, 정의채 옮김,『 신학대전4권(Ia. 31.1)』(왜관: 바오로딸, 1997), 45.
38) 칼 바르트, 박순경 옮김,『 교회교의학I/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450-484.
39) 앞의 책, 449.
40) 앞의 책, 450. Cf. 칼 바르트, 앞의 책, 448-449. “[…] 즉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계시
에 놓여 있다는 또 오직 계시에만 놓여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지시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며, 이 삼위일체론이 곧 어떤 다른 생소한 신에 관한, 신들 중의, 즉 이 시
대의 인간신들 중의 한 신에 관한 교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 삼위일체론이 한 신
화여서는 안 된다면, 그러한 지시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지시의 의미에서
우리는 vestigia(자취들)에 관한 교의를 부정한다. 우리는 이 교의를 계시의 이름으로
또 계시의 능력으로 격퇴시킨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는 없다.”
론이 우리의 모든 개념을 넘어선다고 생각될 경우 그것은 한층 더 무
의미하게 된다”41)고 말하면서 계시와 경험에 따른 삼위일체 연구의 고
충을 말한다. 삼위일체론은 경험과 실천 중심의 구도에서 다루어질 때
이성의 한도 내로 추락하게 되고,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어질 때는 실천
적 의미를 담지 못하게 된다. 이런 비판은 삼위일체론을 다룰 때 피하
기 어려운 가장 난감한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신학사를 훑으면서 몰트
만은 서양신학을‘군주론적 일신론’으로 규정하고, 이런 왜곡된 신학의
여파로 개체와 보편이라는 양극화된 현실, 즉 자율과 차이에 강조점을
두는 현실이 도래하였다고 상세하게 논하고 있다.42) 또한 그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세)적 삼위일체론을 묶어‘희망의 신학’을 말하면
서, 상호 소통되는 현실에서 아들을 통한 삼위일체론의 세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43) 몰트만은‘현대신학의 정황’에서 삼위일체론을 재도입하여
‘군주론적 일신론’과는 다른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구성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삼위일체 연구 흐름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이라는 계시를 하나님의 유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
고자 한 베를린의 신약학자 룩- 슈레더의 연구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
을까?
II.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의 유일성
Der Name Gottes und der Name Jesu: eine neutestamentliche
Studie(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신약성서적 연구』)는‘하나님의
이름’과‘예수의 이름’간의 유일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학적인 입장
22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41)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8.
42) 몰트만, 앞의 책, 전반에서 다루고 있다.
43) 몰트만, 앞의 책, 121. 1) 그리스도의 파송- 내어줌- 부활에서의 순서, 아버지→성령
→아들 2) 그리스도의 주권- 성령파송에서의 순서, 아버지→아들→성령 3) 종말론적
완성- 영광의 면에서의 순서, 성령→아들→아버지.
에서 이름에 대하여 갖는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이‘야훼’로 표
기된‘구약성서’와‘예수의 이름,’‘주’(Kyrios)‘그리스도’(Christus)로
표기되는‘신약성서’본문을 어떻게 연결하여야 하는가에 있다. 구약학
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해 꾸준하게 연구를 해 왔다. 반면에 예수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과 동등하게 두고 연구를 해 온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인 것 같다. 우리가 다루는 룩- 슈레더가 바로 이런 작업에 뛰어들었
는데, 그가 하고자 한 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면서 유일성을 공유하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예수’는 나사렛의 사람, 그리스도, 주, 예수의 이름
등 다양한 겹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에서 제2격에 해
당하는‘예수’는 위협을 받게 되고,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었다. 제2격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삼위일체론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예수의 이름’을 하나님의 유일성으로 이
해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자체가 더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런 시점에서 제2격을 회복하여 삼위일체론의 한 요소로 다시 복귀시
키고, 유일성- 관계성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일은‘현대신학’에서 귀
중한 주제를 회복하는 기회라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룩- 슈레더는
‘빌립보서’1장 9절과‘사도행전’4장 12절에 등장하는‘예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의 유일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면서 두 이
름간의 경쟁성을 거론한다.44) 두 이름 사이의 경쟁 관계란‘하나님의 이
름’과‘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간의‘경쟁’(konkurrenz, 경합, 각
축) 관계를 지칭한다.‘ 사도행전’4장12절은10절과의 관계에서 볼 때,
‘다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구원
을 줄 수 있는 분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하나님의 이름’과의 관계에서 유일성을 획득하는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27
44)“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
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것이 아닌가라고 룩- 슈레더는 질문하고 있다.45)
앞서 보았듯이 보렌은 네덜란드 신학자 미스코테(Miskotte)의 주장
을 인용하면서 야훼라는 이름은 번역이 불가능하고 교환도 불가능하고
개념화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야훼와 예수 사이에도 동일한
적용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한 언급이 없다. 단지“야훼가 번
역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번역 불가능하다”고
만 말한다. 그는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
묵한다. 이 관계에 대해 단절이면서도 연속이라고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보렌의 애매한 입장을 직시한 룩- 슈레더는 이 관계에 대해 일관
된 주장을 하기 위해 더 깊이 고민한다. 룩- 슈레더는 보렌의 출애굽기
20장 2절 이하 해석에서‘번역불가능주의’와‘교환불가능주의’를 야훼
이름과 이방신 이름에 대한 것으로 보는 점에서는 같은 견해지만,‘ 야
훼의 이름’과‘예수의 이름’간의 번역불가능성과 교환불가능성에 대해
서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즉 두 이름의 일치를 말한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일치인지를 더 정밀하게 논의하는 것이다.46) 보렌이 해석학적
22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45) 경쟁 관계로 이끈 배경에 대하여 룩- 슈레더는 다음(Adelheid Ruck- Schröder, 앞의
책, 1- 2.)과 같이 서술한다. (a)신약은‘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이 허공을 지나
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한 공표라는 것, 고대사
상과 구약성서 이해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것, 이런 데에 동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자신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b) 신약성서는 구약성
서에서 중심이 되는 신학적 공언, 즉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공표하셨다는 것
을 전제로 하였다. (c)‘ 하나님의 이름’(das Tetragramm: 4글자 JHWH(YHWH))은
이미 구약성서에서와 초기 유대 전통에서 매우 큰 경외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하나님의 출현과 실존을 드러내는‘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외치는 것이 인간의 근
심과 고통으로 연결되어 결과적으로‘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터부시하
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미 구약성서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4글자”(das
Tetragramm: 4글자 JHWH[YHWH[)로 대치되었었다. 이런 현상들은 지속적인 연
결성이 결여되어 있는 신구약 중간시대의 문헌들인 필로(Philo)나 쿰란(Qumran),
그리고 랍비의 문서들에서조차도 계속 사용되었다. 그‘하나님의 이름’은 모두 4글자
로 대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치환 단어인 ynda(아도나이)에도 적용되었다.
‘ ’에 넣은 것은 논자이다.
측면에서 두 이름 간의 경쟁 관계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은 것처럼
룩- 슈레더 또한 마찬가지다. 두 이름간의‘경쟁 관계’가 풀렸다면 그
또한 많은 질문을 제기하면서 연구에 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47) 일치
의 문제는 다르게 말해 유일성의 문제이다. 베드로의 설교(행 4:12 전후
문맥)는 오순절 설교(행 2:14)와 빌립의 전도(행 8:12)가 함축하는 형식
과 일맥상통한다. 즉“하나님 나라의 공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
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권능이 그것이다.”48) 또한 사도행전 4장 12
절의‘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다’는‘기독론의 강화’(하나님의 이름과
의 관계)인 동시에‘예수의 이름’과“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떼어내
지 않을 경우에만 유효”49)하다는‘유일성’을 보여 준다. 여기서 굳이
‘다른 이에게는’을 덧붙인 이유에 대하여 룩- 슈레더는“하나님의 이름
과 연결되어 있는 예수의 이름에서 구원의 근거를 찾을 수 있”50)기 때
문이라고“다른 어떤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덧붙여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예수의 이름은 하
나님의 이름을 대신 차지하지 않는다”51)고 말하면서 두 이름의 연결에
서 유일성을 논하고 두 이름이 분리되면 유일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좀 더 나아가서‘사도행전’주석을 통해 룩- 슈레더는 이름 경
쟁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는‘하나님의 이름’에 덧붙여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29
46) Adelheid Ruck-Schröder, 앞의 책, 5.
47) 앞의 책, 9.“ 예수의 이름이o[noma의 어디까지 관계가 있는가, 어디까지 그 이름의
역할을 하게 되는가? 그 이름의 의미가 어떤 관계로 인간 예수와 연결되는가? 하나
의 특정한 기독교적 존칭에 대한 언어적 유사성을 결론지을 수 있는가? 예수의 이
름이 하나님 권위의 어디까지라고 자격을 논할 수 있는가? 예수의 이름이 계시의
수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나? 명백하게 어디에서 구약성서적, 초기 유대적 이름의
전통이 적용되었는가? 교회의 동질성 추구에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
는가? 그 이름이 종말론적 전개에 특별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48) 앞의 책, 263.
49) 앞의 책, 263.
50) 앞의 책, 263.
51) 앞의 책, 263.
진‘예수의 이름’을 말하면서‘유일성’의 근거를 전자의 이름에 둔다.
그리고‘하나님의 이름’에 덧붙여진‘예수의 이름’은 가능하지만‘하나
님의 이름’을 대체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예수의 이름’만으로 유일성을 주장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는‘빌립보서’를 주석하면서 답변을 제시한다.‘ 빌립보서’의 찬
양시(Philipperhymnus)에 사용되는‘칭호 주(kuvrio", 2:11)’를
‘YHWH’가 아니라“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에 연관시키
면서 예수와 하나님 간의“친밀함”(Nähe)52)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 룩- 슈레더는‘마태복음’에서 3개의
‘삼위일체 구조’(eine Triadische Struktur)를 발견한다. 전(前) - 삼위일
체구조로서 첫 번째 구조는 1장 18-23절의‘성령- 예수의 이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구조는 12장 18-21절의‘하나님- 하나님의 종
인 예수 그리스도- 성령’, 세 번째 구조는 28장 16-20절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이다. 이 구도는“‘하나님의 유일성’(有一性,
Einzigkeit Gottes)은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성령에 의한 예수
와 하나님 사이의‘독점적 관계’(exklusives Verhältnis)를 생성하고 전
권(全權)의 근거를 만드는 예수와 하나님으로 연결되는 기능적 배열을
연상시킨다”53)는 견해를 얻는다. 그녀는 이름이 주어지는 과정을‘마태
복음’과 마찬가지로‘빌립보서’에서도‘계보’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계
보의 끝에 등장하는 이름은‘연결,’‘친밀함’이지, 계보 처음에 등장하
는 인물과의‘일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치가 아니면 유일성이 부정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해 룩- 슈레더는‘삼위일체구조’가
보여 주듯이‘유일성’은 그것 나름으로,‘ 밀접한 관계’는 또한 그것 나
름으로 각각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설명은‘히브리서’1장 4절과 2장 12절을 주석하면서 부연된
23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52) 앞의 책, 264.
53) 앞의 책, 262-263.
다. 이 문맥에 따르면 예수는 ‘YHWH’ 그 자체는 아니지만‘다른 이
름’인‘예수의 이름’을‘위임’받은 자다. 여기서‘위임’(Träger)은 그 속
에 들어가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일종의 형식이다.‘ 위임’에 대한 견해
는‘요한복음’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정도의 수
준을 넘어선다. 요한복음 분석을 통해 룩- 슈레더가 얻은 것은 참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한없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위임’받는 자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위임’받은 자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즉 그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예수는 그 이름 자체인 것이다.”54)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룩- 슈레더의‘요한복음’에 대한
애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이름 공표에 관한 본문은
사도들의 설교나 전도에 관계된 수준이었다. 즉, 인간의 경험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요한복음’은 경험적인 요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
라, 계시적인 측면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대하
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도에서 접근한다.
‘아들 이외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 1:18)는 요한의 기
본테제 또한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출 32:13-15; 34:6). 하나
님의 이름을 묘사하는“은혜와 진리”가 인간화되어, 다시 말해 육신
화된 로고스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동시에“은혜와 진리”를 위임받은
자(요 1:14)로서의 시작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요한의 이름에 관한 개
념은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계시론적 기능을 갖고 있다. 어느 누구
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육신화된 로고스를 의미하는 아들
의 이름은 은혜와 진리의 매개자로서 아버지의 이름과 더불어 아버
지 자체를 명시한다(요 17:26). 이러한 현상에 부합하는 인간의 태도
를 요한은“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요 1:12)으로 또는“예수의 이
름으로 구한다”(요 14:13)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31
54) 앞의 책, 264.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예수의 아버지로서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55)
이제까지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위 단락을 이해해 보자.‘ 마태복
음’첫 부분 주석에서‘예수의 이름’은‘전(前) - 삼위일체구조’의 한 요
소이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유일성 범주( ‘단수 이름으로’)에서 서술되
었다. 그리고 이 이름은 덧붙여지고 위임된 이름으로 풀이되었다. 그러
나‘요한복음’에서는‘구약성서’에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인 바 있는
‘은혜와 진리’(출 34:6, 인자와 진실), 바로 이것을‘위임받고-매개하
고-그 자체’가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을 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예수
의 이름’으로 표현된다고‘요한의 신학’을 승격시킨다. 이런 면에서 야
훼의 이름의 유일성이 곧 예수의 이름의 유일성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III.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의 현재화
‘현대신학’의 결실 중 하나는‘역사의 예수에게로 가까이’가게 된
데 있다.56) 이런 흐름은 여러 겹으로 덧씌워진 성서의 예수에 대한 비
판에서 비롯된다. ‘나사렛의 목수 예수=그리스도’, ‘예수= 주(키리오
스)’,‘ 예수=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약성서의 이해는 지난2천 년의
기독교 신학에서 구약성서의 야훼, 하나님 이해와 결합되어 삼위일체
신학으로 정리되었다.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오늘날 북미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예수세미나’에서는
23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55) 앞의 책, 265.
56) 문상희 교수는‘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를 남겼다. 그
는“우리들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예수다. 우리는 예수 그
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가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인 것이다”라고 결
론 내리고 있다. Cf. 문상희,“ 역사적 예수의 문제,”「신학논단」2 (1954), 23.
‘역사의 예수’를 더 연구함으로,‘ 신앙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시금
정리하고 있다.57)‘역사의 예수’를 비평적으로 연구한 결과‘신앙의 그
리스도’로부터 독립한‘역사적 예수’연구의 장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
정에서‘예수’와‘그리스도’는 각각 서로 다른 양축으로 이해되었다.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 나사렛 예수가 했던 일들을‘보고- 듣고- 경
험한’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신앙의 그리스도’로 예수를 고백
하였다. 즉, ‘역사의 예수’는‘신앙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재조명된
것이다. 나사렛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은 나사렛의 예수를
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 그러니까 신앙의 그리스도로 고백되
기‘이전’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로 고백된‘이후’의 예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보그(Marcus Borg)는‘이전과 이후’의 경계를
부활 사건, 부활절로 본다.58)
복음서의 단편들은 예수의 사역을 단막적인 사건별로 담고 있다. 일
부의 서신서보다 뒤늦게 문서화되기는 했지만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활
동한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적극적으로 고백되지는 않는다. 복음
서는 예수를 구약성서의 하나님이라고 단언하기보다는 구약성서의 인
물들과의 연속성을 보이려고 두 개의 계보(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
장)를 보여준다. 또한 복음서는 예수를 성부와 성령과 어우르면서 전
(前) - 삼위일체적인 표현(앞서 언급했듯이 룩- 슈레더가 제시한 마태복
음 1장, 12장, 28장)을 소극적으로 보여준다. 복음서의 기자는 한편으로
는 역사의 예수 그 자체를 드러내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33
57) 이를 간단하게 표현해 보면, 1) 동일성: 예수 = 하나님 2) 차이성: 예수의‘인성- 신
성’의 분리 관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구분, 역사의 예수 ⊃ 하나님(R.
Bultmann), 신앙의 그리스도 ⊃ 하나님(오강남) 3) 예수 세미나: 역사의 예수 ⊂ ⊃ 신
앙의 그리스도(J. D. Crossan, M. Borg), 역사의 예수 ⊃ 신앙의 그리스도(R. Funk).
Cf. 김진호,『 예수 르네상스-역사적 예수연구의 새로운 지평』(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김진호『, 예수 역사학』(서울: 다산글방, 2000).
58) 마커스 보그 & 톰 라이트 공저, 김준우 옮김,『 예수의 의미』(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29.
예수와 구약성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삼위일체
라고 말하지만) 신학적인 개념을 담은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면서 표현
하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 그것을 서술하고 있다. 즉,‘ 성령-예수의 이
름- 함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의 종인 예수 그리스도- 성
령’,‘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등에 복음서 저자가 담으려고 했
던 예수는 누구였을까, 역사적 예수였을까, 신앙의 그리스도였을까, 구
약성서의 성부와 동일한 예수였을까, 말씀이 육화된 예수였을까?
복음서는 예수를 신학화하려는 의도보다‘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담
으려고 했던 것 같다. 역사의 예수의 문제는 과거의 예수의 문제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그 당시, 그때’의 예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서신서
들은 좀 다른 것 같다. 바울을 비롯한 복음서 이외의 신약성서 저자들
은‘자신들이 활동하던 그 당시, 그때’의 예수에 주목한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를 과거화시키지 않고 현재화시킨다. 그러니까 신약성서에는
예수에 대한 두 겹의 이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의 예
수가 활동하던 시기의 예수의 행하심이고(과거화), 또 하나는 예수의
승천 이후 여전히 행하시는 예수이다(현재화). 후자를 단순히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는 것은 서신서의 의미를 축소시킨다고 볼 수 있
다. 서신서들의 저자들에게는 예수의 승천 이후 여전히 행하시는 예수
가 중요했다. 이렇게 예수의 현재화가 요구되는 정황에서 저자들이 사
용한‘예수의 이름’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복합적
인 정황에서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
도’라는 어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울은 거의 대부분‘주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를‘성부’와의 관
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 다메섹에서 만난 그 예수
를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동등하게 표현하고자 애쓴다. 서신서의 맨 앞
부분에서 바울은 항상 예수를 유대인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표
현하고 있다.‘ 주’라는 용어는 칠십인역에서‘야훼’의 치환어(置換語)였
기에, 칠십인역을 읽고 있는 독자는 바울이 그‘주’를 예수에게 부여할
23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때, 예수가 곧 야훼와 동등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즉 그 독자는
‘주가 예수이다’는 계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마태복
음’의 계보와‘요한복음’의 로고스론은‘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
해 맨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구약성서의‘야훼의 이
름’에서 신약성서의‘예수의 이름’으로의‘점진적 계시’가 있음을 말한
다. 이런 면에서‘에흐예 아셰르 에흐예(hyha rva hyha) →에흐예(hyha)
→야훼(hwhy) →아도나이(ynda) →주(Kuvrio") →로고스→역사의 예수
→신앙의 그리스도→예수의 이름’이라는 계시의 점진적 구도는 하나
님의 현재화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구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예수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맥은 이 땅에 더 이상 존
재하지 않는 예수의‘실존’과‘현존’의 문제가 제기되는 곳이다.‘ 예수
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은 공생에 기간 동안 유대 땅에서 행하신 예수
의 과거성을‘현재화해야 하는 자리’, 그리고 그 현재성이 요청되는 자
리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초대교회가‘예수의 이름으로,’‘예수의 이
름을 힘입어’등과 같은‘이름으로서의 예수’표현을 즐겨 사용한 것은
부활절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이름의 사용이 예수의 인격, 권능, 그리고
지배가‘현존’(Präsenz)함을 나타내는 축약형이거나 또는 다른 표현이
다”59)라고 결론 내리는 룩- 슈레더는 이름 사용이 부활절 이후 이 땅에
서 부재하는 예수의 현존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다.60) 다시 말해, 이름 사용(Die Namenswendung)은 역사의 예수의 빈
공간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를 현재화하기 위해 부활
사건을 경험한 초대교회가 고안하고 공감하고 즐겨 사용한 신학적 산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35
59) Adelheid Ruck-Schröder, 앞의 책, 267. “Die Namenswendung ist Kurzform oder
Umschreibung der Präsenz von Jesu Person, Kraft und Herrschaft.”(강조는 저자)
60) Cf. 안석모,“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신학논단」37 (2004), 436. 안석모 교
수는 논문의 제8장에서‘예수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힘(권능)과 의미가 성서 속에서 충분하게 증언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참고문헌(성서구절과 이 이외의 연구논문 및 저서)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서신서들에서 예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사역을 하는 이유는 역사의 예수가 부재하기 때문이고, 신앙의 그리스
도로 내재화된 역사의 예수를 현재화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 기자들이 사용하는 이름 표현 방식
이다. 지금까지 아주 쉽게 간과해 온 것이지만 다시금 잘 들여다보면
이름 표현 방식은‘전치사구 형태’를 띤다. 룩- 슈레더는 이를‘전치사
구적 이름-표현 방법’(Die Präpositionalen o[noma-Wendungen)이라
고 부른다. 다시 말해 신약성서는“~ 이름‘으로’”라는 전치사구로 표현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句)’라는 것은2개 이상의 단어가 모여서 하나
의 품사(형용사, 부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치사구는‘전치사+ 명사/
대명사’로 구성되어 형용사의 기능과 부사의 기능을 한다. 명사를 수식
하는 품사를 형용사라고 하고, 동사를 수식하는 품사를 부사라고 하는
데, 신약성서에 나타나는‘이름으로’를 문맥에 따라 읽어 보면 형용사
의 기능을 하는지, 부사의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
원문에는 이름에 관련된 전치사가가 대략 네 가지 정도 나온다.
1. ejn tw'/ o[nomativ, 2. eij" to; o[noma, 3. ejpi; tw'/ o[nomati, 4. dia;
to; o[noma.
네 가지 전치사구는 문맥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글로 번역된 성경에는 이 전치사구를 대부분‘~ 이름으로’라
고 일괄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전치사구의 의미를 충분하게 살린
번역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원문에 따라서 그 의미를 다시금 생
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빌립은 설교를 통해
‘역사의 예수’를 전파하는데, 이때 그들은‘역사의 예수’를‘주 이름으
로’또는‘예수의 이름으로’와 같이 전치사구로 표현한다. 이들이 왜 전
치사구를 사용했는지, 전치사구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전치사구의 신학적 의미를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치사구의 신
23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학적인 의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전치사구는 어떤 것의 현
재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앞서 길게 서술했듯이, 신앙의 그리스도
에 담긴 역사의 예수의 현재화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는 것이다.‘ 전치사구가 과거의 것을 현재화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 전치사구 표현은 부활절 이후의‘신앙의 그리스도’의 차원으로 이
어지는 것이며, 신앙의 그리스도에 내재화된 역사의 예수를 드러내는
것이고, 결국‘부재하지만 함께 계시는’예수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보그(Marcus Borg)의 의견과도 상통한다.“ 예수는 더 이상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전치사구적 사용의 축약된 형태로
(이름으로) 부르거나 이름의 의미를 주제로 삼거나 이름과 연관된 하나
님의 예수에 대한 사역에 관한 진술들을 논의한다.”61)
전치사구는 초대교회가 하려고 했던 신학적 작업의 결과를 담고 있
다. 초대교회가 신앙의 대상으로 의지했던 역사의 예수는 신앙의 그리
스도라는 틀을 거치면서 이름으로서의 예수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는 역사의 예수를 현재화하는 교회의 방식이었다. 교회의 삶은 예수
의 이름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이었다. 전치사구로 표현된 이름은 결국
과거화된 채 머물고 있던 역사적 예수를 현재화시킬 뿐 아니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현재화를 의미하며, 또한‘주’라는 것을 공유하는 예
수와 하나님의 동시적 임재, 현재화를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룩- 슈
레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epj i; tw'/ o[nomati);
행하는 자는, 예수 자체를 현재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 하나님을 현재화한다.”62)
‘구약성서’와‘신약성서’의 단절과 연속에 관한 연구는‘구약성서’
의 성취로서‘신약성서’라는 대전제를 충실하게 따를 때 정상적인 궤도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37
61) Adelheid Ruck-Schröder, 앞의 책, 268.
62) 앞의 책, 268.
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야훼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을 비교
하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유일성의 측면에서든, 현재화의
측면에서든, 성서를 통일적으로 보도록 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매우 뜻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내려오는 신성과 인성,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등 기독론 교리를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는 데
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지금까지 논자는‘예수의 이름’이라는 표현이 유일성과 통일성,63) 일
치와 구별 등과 함께 현재화로서의 삼위일체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현
재화의 문제는 이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
의 어떤 것이 현재에서 작용하고 적용된다고 할 때, 개연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그때 그 사건이 지금 여기서도 나타나야 되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되묻는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와 컨텍
스트의 간극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간극이 크면 클수록 종교성과는 거
리가 멀어지고, 이 간극이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신비주의가 되는 경향
이다. 합리성, 비합리성, 탈합리성 등의 형태로 기독교가 지녀온 현재성
은 끊임없이 과거로의 현재화냐, 현재화된 과거냐 등으로 그 모습을 드
러내어 왔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고민을 했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이름 논의에 담겨 있다. 초대교회는 구약성서의‘하나님의 이름
(야훼의 이름)’을‘예수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초대교회는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신학화한 이름(야훼의 이름)을 신약성서와 기독교에서 신
23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63) 앞의 책, 265.“ 기독론은 하나님의 통일성의 해석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탄
생 계보- 이름’이 예수로 위임되는 것이 유태인의 이해로는 신학적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신약은 하나님의 한분으로서의 일치와 통일성에 관한 성서적
확신을 객관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다.”
학화한 이름(예수의 이름)으로 대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논
한 대로 논자는 이 두 이름 논의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현재화가 한편으로는 단절되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속되고 있
음을 보이고자 했다.
‘예수의 이름’의 유일성의 문제는‘야훼의 이름’과의 연속성 속에서
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는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될 수 있다. 특히 유일성, 통일성, 현재화의 부분에 있어서 그러
하다. 초기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이끌어
냈듯이, ‘야훼의 이름’과의 연속 가운데서‘예수의 이름’의 유일성이
확보될 때,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에서‘예수의 이름’이 수용될 수 있
다. 이런 면에서 이름 연구는 전통적인 이론에 무난하게 편승하고 있다
고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유일성이 침해받고 있는‘현대신학’의 정황에
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로 인해‘신앙의 그리스도’에 타박
상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회복시키고 삼위일체론의
제2격을 개정하고 하나님의 현재화를 부각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포괄적인 파급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는 구약성서의 야훼의
이름과 신약성서의 예수의 이름 간의 단절과 연속 문제에 관심을 두었
지만, 이제부터는‘예수의 이름’이 등장하는 신약성서의 본문 해석, 특
히 전치사구적 이름- 표현 방법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런 바탕 위에 조직신학적인 작업, 실천신학적인 움직임 등 신
학 제반 영역의 연구가 이어지면 좋을 듯하다.
주제어
하나님(야훼)의 이름, 예수의 이름, 신앙의 그리스도, 룩- 슈레더, 전치사
구적 이름- 표현 방법
Name of God(Jehova), Name of Jesus, Faithful Christ, Ruck-
Schröder, Die Präpositionalen o[noma-Wendungen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39
접 수 일2013년 6월 13일
심사(수정)일 2013년 8월 20일
게재 확정일 2013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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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41
국문 초록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과 현재화에 대한 연구
이 글은 구약성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의 이름
과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다룬다. 구약성서의 성
취가 신약성서라는 고전적인 전제 위에서, 이 두 이름 사이에 단절이
있는지, 연속이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선, 성서에 나타나는 하
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곳은
출애굽기 3장에서‘에흐예 아셰르 에흐예’이다. 이 본문은 바로‘에흐
예’에 이어‘야훼’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명기하고, 그 후로 줄곧 구약
성서에서는 사성문자로 하나님을 표기한다. 이 이름은 칠십인역에서
‘키리오스(주)’로 표기되고, 신약성서에서는‘예수’를‘주’로 받고 있다.
이렇게‘주’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연결하는 키워드로 연구되어 왔
지만‘예수의 이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에
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잇는 키워드로‘하나님의 이름(야훼의 이
름)’과‘예수의 이름’을 다룬다. 특히 독일 베를린대학교에서 이 주제로
신약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룩- 슈레더의 연구는 이 글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선 유일성이라는 관점에서 두 이름을 비교
하고, 그다음에 현재화라는 관점에서 두 이름을 비교한다. 이런 비교 과
24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정에서 기독론의 문제도 다루고 삼위일체론의 문제도 다룬다. 결국 두
이름 사이에 유일성이 확보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현재화에 대한
견해는 이 글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이름으로’
라는 전치사구는 어떤 것의 현재화를 드러낼 때 사용한 초대교회의 신
학적인 주장으로 보았다.
강응섭, 룩- 슈레더에 따른‘예수의 이름’에 재현된 삼위일체… 현재화에 대한 연구 243
Une étude sur l’unité-la présentation de Dieu
trinitaire représentées dans ‘le nom de Jésus’
selon Ruck-Schröder
Kang, Eung-Seob
Professor
Yaeil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Cet article se développe sur le Jésusonoma en tant que le sujet de
la Théologie contemporaine. Dans l’article précédant(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29, 2011.Jun.), j’ai traité le signe
Jésusonoma. La christologie contemporaine est à la tension dure des
relations entre la christologie deductive(Logos →Sarx) et la
christologie inductive(Sarx→Pneuma ou Anthropos→Theos) de sorte
que le deuxième personne de la trinité est blessé. on ne peut pas non
plus décrire la christologie et la trinité. Donc on cherche un autre
signe pour les remplacer. Cette étude vise à chercher un mot nouvel
dans la Bible qui indique le deuxième personne de la trinité et la
trinité soi même. Mon étude précédante selon les deux questions a été
proposé. Les deux questions sont 1. Quel est le but de rechercher
Jésusonoma, dans la situation de deux pôle entre le Jésus historique et
le Christ en foi. Quelle est sa position dans la christologie? 2. Le
Jésusonoma ou L’onoma que les évangîles et les êpîtres se présentent,
quelles sont son identité dans la trinité et sa signification théologique?
La première partie ébauche la situation de la théologie contem-
24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poraine, la deuxième partie développe le Jésusonoma dans la
catégorie de la christologie. Ruck-Schröder commente presque tous
les Jésusonomas dans le Nouveau Testament de sort qu’elle nous
presente le sens du Jésusonoma. En effet, dans cette étude, on
considère le Jésusonoma en tant que l’unification de la christologie,
l’unité de Dieu et la présentation de D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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