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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17세기 조선 학자들의 尊王論과 老少分岐 -1683년 종묘 논쟁을 중심으로-/우경섭.인하대

[국문초록]

1683년 종묘 전례를 둘러싼 논쟁은 존왕론과 행왕론의 대립이라는 사상적 구도 속에서 전개되었다.

효종의 북벌과 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존왕론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종묘 전례에 반영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의도는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중화문명의 정통을 밝히고 그 계승자로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는 주나라 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정통성의 천명을 핵심으로 삼았던 공자의 󰡔춘추󰡕적 세계관의 토대에 서 있었다. 반면 위화도 회군의 존왕론적 의미를 부정하며 송시열의 종묘 논의에 반대했던 박세채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강조했다. 이는 주실의 정통성에 대한 별다른 언급없이 제후들에게 인의 의 정치를 행하여 왕 노릇 할 것을 유세했던 전국시대 맹자의 불존주론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왕론의 단초는 ‘실심․심공’을 내세우며 송시열의 북벌론과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했던 윤선거․윤증 부자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이때의 종묘 논쟁과 뒤이은 노소분기는 17세기 후반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주도 자로 부상하던 정세 속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관한 상이 한 세계관이 빚어낸 결과였다.

중화가 사라지고 명나라의 부활이 난망해진 상황 속에서, 조 선은 유교적 담론의 범주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중화질 서의 회복을 염원했던 공자와 왕도정치의 내실을 주장했던 맹자의 상이한 문제의식은 17세 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했다.

[주제어] 尊王論, 行王論, 宋時烈, 朴世采, 老少分岐, 宗廟, 孝宗, 太祖, 威化島回軍

1. 머리말

서인 내부에서 노론과 소론의 분립이 가시화되던 무렵인 1683년(숙종 9) 7월, 윤증은 두 정파 간 갈등의 근원은 ‘오직 묘의(廟議)와 광남부원군(光南府院君) 문 제’라 단언했다.1) 묘의란 태조에게 시호(諡號)를 올리고 효종을 세실(世室)로 삼는 종묘 전례를 둘러싼 논란이었고, 광남부원군 문제란 경신환국과 임술고변을 전후 하여 기찰(譏察)이라는 비법적 방법을 사용한 김익훈(金益勳) 등 훈척의 정당성 여 부를 놓고 벌어진 갈등이었다. 필자는 종묘와 훈척 이 두 가지 원인을 지목한 윤증 의 말이, 송시열과 윤증의 개인적 혐원에 주목해 온 통설과 비교하여, 노소분기의 정치사상사적 의미를 간파한 탁견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훈척 문제에 관한 두 세력의 상이한 인식이 춘추시대 관중 (管仲)에 대한 평가와 결부되어 전개되었던 정황을 살펴본 바 있다. 관중에 대한 공자의 이중적 인식, 즉 왕패론(王覇論)의 관점에서 관중을 패도라 비판하지만 화 이론(華夷論)과 존주론(尊周論)의 관점에서 ‘일광천하(一匡天下)’의 공로를 허여했 던 유학사상 내부의 담론적 모순이 1680년대 조선에서 재현되었고, 결국 송시열의 화이론적 관중 인식이 존왕론(尊王論)으로, 윤증․박세채의 왕패론적 관중 인식이 무실론(務實論)으로 귀결되어 노소분기의 사상적 연원을 이루었음을 설명하였다.2)

1) 󰡔明齋遺稿󰡕 卷14, 答羅顯道-(癸亥)七月二十日 , “近來爭端, 只是廟議異同及光南一事耳. 在朝諸 公, 主光南於中, 而尤翁大論, 執廟議於外.”

2) 우경섭, 17세기 조선 학자들의 尊王論과 노소분기(Ⅰ)-管仲에 대한 인식과 勳戚 문제를 중심으로- , 󰡔東國史學󰡕 50, 東國史學會, 2011

이 글은 노소분기의 원인으로 훈척 문제를 다루었던 앞 논문의 속편으로, 윤증 이 지목했던 종묘 관련 논쟁의 유학사적 의의를 재검토하려는 것이다. 1683년 2월 21일 효종을 세실로 삼을 것을 청한 송시열의 상소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윤증의 말 그대로 경신환국 직후 조정의 안팎에서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같 은 해 6월 12일 숙종이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의 시호를 올림으로써 넉 달 간 지속된 논쟁이 일단락되었는데, 그 사이 벌어진 논쟁의 구체적 내용 및 그 결과 서인이 노․소로 분립하였던 경위는 이전 연구들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이다.3) 그 핵심을 요약하자면, 송시열이 제기한 효종 세실 문제는 예송에서 짊어지게 된 불충(不忠)의 혐의를 벗기 위한 방편이었고, 태조 시호 문제는 비현실적 북벌론 과 자파 세력 유지를 위한 명분 쌓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4)

3) 1683년의 종묘 논쟁과 노소분기의 관계 및 그에 관한 연구의 흐름에 관해서는 다음 연구들을 참조. 이은순, 󰡔朝鮮後期黨爭史硏究󰡕, 일조각, 1988, 3~15쪽; 이희환, 󰡔朝鮮後期黨爭硏究󰡕, 국학자료원, 1995, 48~52쪽; 강신엽, 󰡔朝鮮後期 少論 硏究󰡕, 봉명, 2001, 45~58쪽.

4) 이은순, 위의 책 13쪽.

더구나 그가 갑작 스레 조정에 올라와 종묘 논쟁을 야기한 것은 기찰 문제로 궁지에 몰린 스승 김장 생의 손자 김익훈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으며, 이에 실망한 서인 내부의 젊은 사류들 이 소론으로 결집했다고 설명된다. 당시 사료들을 검토해보면, 선행 연구들에서 언급한 위와 같은 정황을 전면적으 로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정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갈등이 왜 하필 종묘를 둘러싸고서 벌어졌는가 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즉 태조 시호와 효종 세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노소분기라는 조선후기 정치사의 중차대한 사건으로 귀결되었는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의 기본 성격을 당쟁적 사건, 즉 당파 이익을 획득․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과 괴리된 명분 다툼으로만 파악하는 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란 앞으로도 불가능 하리라 여겨진다.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683년 넉 달 간 진행된 논쟁의 경과를 보 다 장기적이고 이론적인 안목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 안목이라는 점에 서는, 최근 조선후기 종묘 전례의 정비라는 흐름 속에서 이때의 논쟁을 살핀 연구가 주목된다.5)

즉 예학의 시대라 칭해질 만했던 현종 연간부터 의리론을 기준삼아 국초 이래 궐전(闕典)들에 대한 보완 작업이 진행되어 온 흐름 가운데 이 논쟁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또한 논쟁의 주도자 송시열 개인으로 보더라도, 그의 유언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태조 시호와 효종 세실 문제는 현종대 신덕왕후 부묘와 더불어 필생의 과업으로 자임되는 것이었다.6)

5)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6)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6월 12일(계미).

이러한 사안을 단순히 임술 고변 직후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술수 정도로 파악하는 시각은 당쟁이라 는 현상에 가려 당대인들의 고민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 것이라 비판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논쟁을 발의한 송시열은 물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숙종, 그리고 그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던 박세채 등의 입장 차이 및 그로 인한 갈등이 권력투쟁 의 과정으로만 이해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또한 조선시대 정치사를 이해하는 유용 한 도식이었던 왕권과 신권의 구도로서도 이때의 논쟁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신권 을 중시했다는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왜 왕실 정통성의 강화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제기했을까?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씌워진 불충의 혐의를 씻고 자파의 권 력을 유지하려는 방편이었다 하더라도, 왜 그것이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종묘 문 제를 주제로 삼아 표출되었는지 설명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상의 두 가지 의문을 염두에 두고서, 17세기 중반 조선왕조의 국가이 념으로 정립되어 가던 중화주의의 맥락, 특히 존왕론이라는 유교 담론의 심화 과정 속에서 1683년 종묘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특히 중화주의 에 관한 현실적 고민이 담겨진 경학적 근거로서, 중국 송나라 때 제기된 ‘맹자는 주나라를 존숭하지 않았다’는 이른바 맹자불존주론(孟子不尊周論)의 문제의식을 원용하여 송시열과 박세채의 대립에 내재한 이론적 차별성 및 그 결과로서 빚어진 노소분기의 정치사상사적 의의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2. 天子와 王道: 孟子不尊周論의 현실적 의미

맹자불존주론은 왕도정치의 주체에 관한 공자와 맹자의 상이한 언설에서 비롯된 논란이었다.

주지하듯이, 주나라의 명맥이 미약하나마 이어지던 춘추시대의 공자는 주실(周室)의 정통성을 전제로 천자와 제후의 엄격한 분별을 중시했던 존주론을 견 지했다. 반면 인의(仁義)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제후들에게 왕도를 행하기를 권유 했던 전국시대 맹자의 주장은 주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렸다는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맹자󰡕 첫머리에 보이는 양혜왕 및 제선왕의 대화에서, 인의의 정치를 행한다면 (주나라를 대신해) 천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 으리라 말했던 부분이 맹자불존주론의 쟁점이었다. 꿈속에서도 주실의 회복을 염원했던 공자와 달리, 제후들에게 왕이 되기를 유세 했던 맹자의 태도는 송대에 이르러 그의 언설을 의심하거나 비난하는 이른바 의맹 론(疑孟論) 혹은 비맹론(非孟論)을 불러일으켰다.

정자와 주자가 󰡔맹자󰡕를 사서(四 書)의 하나로 표장하기 이전, 공자의 후계자로서 맹자의 지위를 설정했던 한유(韓 愈)의 도통설(道統說)을 부정하는 비맹(非孟)의 사조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맹자 비 판의 연원은 순자(荀子)의 비십이자(非十二子) 와 왕충(王充)의 자맹(刺孟) , 풍 휴(馮休)의 산맹(刪孟) 까지 소급되지만, 북송대에 이르러 이구(李覯: 1009~1059) 의 상어(常語) ,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의맹(疑孟) , 소식(蘇軾: 1037~1101) 의 원맹(原孟) , 조설지(晁說之: 1059~1129)의 저맹(詆孟) , 정후(鄭厚: 1100~1161) 의 예포절충(藝圃折衷) 같은 비맹론의 대표 저작들이 출현했다.7)

7) 󰡔星湖全集󰡕 卷49, 孟子疾書序 “歷考百氏之書, 此篇多不爲人所尊尙. 非之有荀卿, 刺之有王充, 刪 之有馮休, 疑之有司馬光, 與之辨有蘇軾, 至如李泰伯之常語, 鄭厚叔之折衷, 譏訶詬詈, 何可勝言?” 송대 비맹 사조의 전반적인 흐름 및 맹자불존주론에 관한 논쟁의 양상에 관해서는 黃俊杰, 󰡔中國孟 學詮釋史論󰡕,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4, 111~165쪽; 王其俊 主編, 󰡔中國孟學史󰡕, 山東敎育出版 社, 2012, 425~442쪽 참조.

그들은 맹자의 독창적 학설 가운데 육경 및 공자의 언설과 상위한 부분들을 집 중적으로 거론하며, 심성론을 포함한 다양한 맥락에서 맹자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 런데 그 핵심은 주실의 존재를 무시하고 제후들에게 왕 노릇 할 것을 권유함으로 써, 결과적으로 공자의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저버리고 찬탈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후기의 학자 윤기(尹愭)가 요약한 정후의 주장을 살펴보자. 맹자는 현인이 아니다. 주나라의 땅을 딛고 주나라의 곡식을 먹으면서도 주나라를 마 음에 두지 않았으니, 공자를 배우고서도 그를 배반한 것이다. 당시에 (주나라를 도왔던) 제환공과 진문공의 거조를 따를 자가 있었더라도, 주나라의 문왕․무왕․성왕․강왕의 업적을 어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맹자는 한갓 말재주로 (제후들에게) 영합하기 를 구하고 이록(利祿)만 도모하였다. 오늘은 양혜왕에게 유세하고 내일은 제선왕에게 유 세하여 모두 (새 왕조를 개창한) 탕왕과 무왕의 행위를 하도록 함정에 빠뜨렸으니, 맹가는 잔인한 사람이요 말로만 떠드는 자이다.8) 군신의리의 엄정함보다 인의의 정치를 강조했던 맹자의 주장은 찬탈과 반역을 합리화 하는 좋은 핑계거리일 뿐이라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은 비맹론자 대부분이 공유했던 바였는데, 본고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불존주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비판 한 이구의 상어 에 우선 주목해 보고자 한다. 이구의 인식에 따르면, 맹자는 누구 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군신 간의 엄격한 분별을 요체로 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린 자로서, 그가 말하는 인의란 결국 손무(孫武)․오기(吳起)의 지혜 나 소진(蘇秦)․장의(張儀)의 사술(詐術)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9) 더구나 맹자 당시까지도 주실의 명맥이 이어지던 사실에 주목하여, 주나라 현왕 (顯王)에게 걸(桀)․주(紂)와 같은 특별한 악행이 있지 않았는데도 제후들에게 주 실을 도우라 조언하는 대신 왕이 될 것을 권유했던 맹자의 주장은 󰡔춘추󰡕를 통해 공자가 설파했던 존주의리를 배신한 행위였다는 것이다.10)

8) 󰡔無名子集󰡕 文稿 冊13, 峽裏閒話 “宋莆田鄭厚曰, 孟子非賢人也. 履周之地, 食周之粟, 常有無周之 心, 學仲尼而反之. 使當時有能倡威․文之擧者, 文․武․成․康之業, 庸可幾乎? 而軻徒以口舌求合, 自謀利祿, 今日說梁惠, 明日說齊宣, 皆陷之使爲湯․武之爲, 軻忍人也, 辯士也.”

9) 󰡔晦庵集󰡕 卷73, 讀余隱之尊孟辨 李公常語 上 (1) “彼孟子者, 名學孔子, 而實偝之者也. …… 孔子 之道, 君君臣臣也, 孟子之道, 人皆可以爲君也. …… 孫․吳之智, 蘇․張之詐, 孟子之仁義, 其原不 同, 其所以亂天下一也.”

10) 󰡔晦庵集󰡕 卷73, 讀余隱之尊孟辨 李公常語 上 (2) 孟子當周顯王時, 其後尙且百병?而秦幷之, 嗚 呼, 孟子忍人也, 其視周室如無有也. (5) “夫周顯王未聞有惡行, 特微弱爾. 非紂也而齊梁不事之, 非桀也而孟子不就之. 嗚呼, 孟子之欲爲佐命, 何其躁也?”

요컨대, 만약 맹자가 제후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권하되 왕 노릇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제기한 인의의 진정성을 인정하겠지만, 인의를 행하여 왕 노릇 하라고 권유했던 대목은 결 국 인의를 가장해 왕위를 도모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11)

아! 지금 학자들이 (맹자의 학설에) 부화뇌동함이 심하다. 맹자가 옳고 육경은 그르다 여기며, 왕도를 좋아한 나머지 천자를 잊는구나.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천하에 󰡔맹자󰡕가 없어도 괜찮지만 육경이 없어서는 안되며, 왕도가 없어도 괜찮지만 천자가 없어서는 안된 다. 그런 까닭에 상어 를 지어 군신의 의리를 바로잡고, 공자의 가르침을 밝히며, 후세의 환란을 막고자 할 따름이다.12)

11) 󰡔晦庵集󰡕 卷73, 讀余隱之尊孟辨 李公常語 下 (17) “常語曰, 學者又謂孟子權以誘諸侯, 使進於仁 義, 仁義達則尊君親親, 周室自復矣. 應之曰, 言仁義以不言王道, 彼說之而行仁義, 固知尊周矣. 言仁 義可以王, 彼說之則假仁義以圖王, 唯恐行之之晩也, 尙何周室之顧哉?

12) 󰡔晦庵集󰡕 卷73, 讀余隱之尊孟辨 李公常語 下 (17) “嗚呼! 今之學者雷同甚矣, 是孟子而非六經, 樂王道而忘天子. 吾以爲天下無孟子可也, 不可無六經, 無王道可也, 不可無天子. 故作常語, 以正君臣 之義, 以明孔子之道, 以防亂患於後世爾.”

위의 인용문 중 특히 왕도와 천자를 대비시켜 말한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구가 언급한 왕도란 왕도정치의 실질적 내용 즉 맹자가 말한 바 패도의 무력․사 술과 구별되는 인의의 정치라 이해된다.

그리고 왕도와 대비되는 천자란 왕도정치 의 주체 내지 형식, 즉 천명을 받은 왕실(주나라) 및 그로부터 전해지는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구의 견해는 맹자의 종지를 다소 왜곡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맹자는 도탄 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실질적 방편으로 인의의 정치를 강조했을 뿐, 주나 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공자와 맹자 두 사람 의 견해 차이를 살펴보자면, 춘추시대의 공자에게 왕도정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주나라였다. 그리고 제후들이 주나라 천자를 보위하고 그 법도를 준수한다면 유학 의 이상정치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나라의 회복이 난망해진 시절의 맹자는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정통의 문제에 공자만큼의 관심과 기대를 갖지 않았기에, 정치의 요체를 물어오는 제후들에게 직접 왕 노릇을 권유했던 것 이다.

북송대 형성된 맹자 비판의 흐름에 본격적인 반박을 제시한 사람으로는 주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여윤문(余允文: 1110~1174)을 꼽을 수 있다. 그

는 사마 광․이구․정후의 견해를 축조 비판한 존맹변(尊孟辨) 을 남겼는데, 주자는 여윤 문의 이 글을 수정․보완한 독여은지존맹변(讀余隱之尊孟辨) 을 통해 맹자를 옹 호했다.13)

그리고 󰡔맹자󰡕를 사서 중 하나로 표장하여 자신의 사상체계 가운데 핵 심으로 삼았으니, 주자의 이러한 태도는 비맹론자들이 문제삼았던 구절에 대한 󰡔맹 자집주󰡕의 주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자 때에는 주실이 비록 미약했지만 천하가 여전히 주나라 를 받드는 것이 의리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춘추󰡕는 존주를 근본으로 삼았다. 맹자 때에 이르러 7국이 쟁웅하니, 천하는 주나라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백성들은 극심한 도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제후가 왕도를 행할 수 있다면 왕이 될 만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맹자께서 제나라와 양나라의 군주에게 (왕 노릇 하라고) 권하신 이유이다. 왜냐하면 왕이란 천하의 의로운 군주[義主]이기 때문이다. 성현(공자와 맹자)이 또한 어 떤 마음이었겠는가? 천명이 바뀌었는지 바뀌지 않았는지 살필 뿐이다.14)

13) 󰡔晦庵集󰡕 卷73에 수록되어 있는 주자의 讀余隱之尊孟辨 은 溫公疑孟 上․下 12조, 李公常語 上․下, 17조, 鄭公藝圃折衷 10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 의 글을 참조할 것. 安炳周, 朱子의 尊孟辨 의 意味-<讀余隱之尊孟辨>을 중심으로- , 󰡔儒敎思 想硏究󰡕 1, 韓國儒敎學會, 1986; 孫正民, 宋代 󰡔孟子󰡕 論辨 硏究 ,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2014.

14) 󰡔孟子集註󰡕 梁惠王上 제3장 “(程子曰) 孔子之時, 周室雖微, 天下猶知尊周之爲義, 故春秋以尊周 爲本. 至孟子時, 七國爭雄, 天下不復知有周, 而生民之塗炭已極. 當是時, 諸侯能行王道, 則可以王矣. 此孟子所以勸齊梁之君也. 蓋王者, 天下之義主也. 聖賢亦何心哉?視天命之改與未改耳.”

공자는 주나라를 받들었고 맹자는 주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이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베옷을 입는 것과 같이 시기에 따른 적절함이 달랐을 뿐이다. …… 만약 공자와 맹자가 입장을 바꿨더라도 그리 했을 것이니, 시기에 따른 적절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두 가지를 병행하더라도 서로 의리에 어긋나지 않는다.15)

주자는 주나라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상이한 태도를 시대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 으로 이해했다.

주실에 의한 유교적 이상정치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었던 공자의 춘추시대적 천하관을 존왕론(尊王論)으로, 주실이 몰락하여 유교적 이상정치의 주 체가 사라졌던 맹자의 전국시대적 천하관을 행왕론(行王論)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 리고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갈옷을 입으며[冬裘夏葛], 배고프면 음식 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飢食渴飮)]과 같다’는 비유를 들어 두 견해 모두 의 시의적절한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그

런데 주나라에 대한 공․맹의 상이한 태도는 존숭의 대상으로서 주나라를 어 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앞서 “왕도가 없어도 괜 찮지만 천자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했던 이구의 도식을 빌어 말하자면, 공자는 이 상정치의 형식적 주체로서 주나라 천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 무라 여겼던 반면, 맹자는 이상정치의 실질적 내용 즉 백성을 위한 인의의 정치를 현실 속에 실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주자는 위 의 첫 번째 인용문 중 ‘천명을 받은 의주(義主)’를 상정함으로써 정통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왕도가 있은 연후에 천자의 자리가 정해진다.

천자는 있지 만 왕도가 없음이 걸주의 포악한 정치가 세상을 해쳤던 이유이다.’라고 말하여 맹 자의 왕도정치론이 지닌 문제의식에 대한 적극적 동의를 드러내었던 것이다.16)

조선의 학자들 역시 주자의 이같은 해석에 대체로 공감했다.17)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맹자불존주론에 대한 주자의 견해를 재확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 였다.

15) 󰡔晦庵集󰡕 卷73, 讀余隱之尊孟辨 李公常語 上 (6) “孔子尊周,孟子不尊周, 如冬裘夏葛飢食渴飮, 時措之宜異爾. …… 孔孟易地則皆然, 得時措之宜, 則竝行而不相悖義也”

16) 󰡔晦庵集󰡕 卷73, 讀余隱之尊孟辨 李公常語 下 (17) “李氏難學者, 謂孟子以勸誘諸侯之說. 孟子本 無此意, 是李氏設問之過, 當略明辨之.天下可無孟子, 不可無六經, 可無王道, 不可無天子, 隱之之辨 已得之. 愚又謂, 有孟子以後六經之用明, 有王道以後天子之位定. 有六經而無孟子, 則楊墨之仁義所 以流也. 有天子而無王道, 則桀紂之殘賊所以禍也.

17) 조선 사상계에서 맹자의 불존주론과 행왕론이 전개되었던 양상은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이미 검토 된 바 있다. 함영대, 󰡔성호학파의 맹자학󰡕, 태학사, 2011, 257~286쪽 참조.

주자의 독여은지존맹변 은 맹자의 마음을 밝히고 세 사람(사마광․이구․정후)의 의 혹을 풀이한 것이니, 진실로 더 보탤 바를 남기지 않았다.

세 사람의 뜻은 대체로 공자께 서 󰡔춘추󰡕를 지어 주실을 높이셨는데 맹자는 제나라와 양나라에 왕도를 행하기를 권유하 였으니, 그 일이 󰡔춘추󰡕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맹자가 제후들에게 천자의 일을 행하라 권유함이 주실의 정통성을 빼앗아 천자의 지위를 대신하려는 의도라 의심하며, 심지어 ‘맹자가 천명을 도우려 함이 어찌 그리 조급한가?’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 뜻이 비록 군신의 분별을 엄히 하여 만세의 대책을 세우는데 있었지만, 맹자를 이해하지 못함이 또한 심하다.18)

류성룡의 제자 이민성(李民宬: 1570~1629) 역시 맹자불존주론 을 통해 ‘맹자 는 존주의 실체[尊周之實]를 주장하였는데, 인의가 그 실체의 근본’이라 파악했 다.19)

18) 󰡔西厓別集󰡕 卷4, 讀余隱之尊孟辨 “讀余隱之尊孟辨, 所以發明孟子之心而開三子之惑者, 固已不遺 餘力. 三子之意, 蓋以孔子作春秋尊周室, 而孟子勸齊梁行王道, 其事與春秋異, 疑孟子勸諸侯行天子 事, 奪周室而代其位. 至曰, 孟子之欲爲佐命, 何其躁也? 其意雖主於嚴君臣之分, 立萬世大防, 而其不 知孟子亦甚矣.”

19) 󰡔敬亭集󰡕 卷13, 孟子不尊周論 “昔司馬溫公疑孟子不尊周. 余曰, 孟子之辨, 尊周之實也. 尊周之實, 由仁義而明之也. …… 不先其實, 而徒嘵嘵於諸侯曰, 我尊周, 孟子不爲也.”

이는 공자의 존주론을 형식과 내용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고, 주나라로부 터 전해지는 왕도정치의 내실이란 곧 인의의 정치라 해석했던 주자의 견해와 상통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경서 해석의 차원에서 운위되었던 맹자불존주론은 1644년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조선 지식인 들에게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혹자들은 공자의 춘추일통론(春秋一統論)을 기준 삼아 주나라로부터 명나라를 거쳐 전해지는 정통의 계보를 중시하며, 명 멸망 이후 중화문명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이른바 조선중화주의 (朝鮮中華主義)의 세계관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반면 혹자들은 맹자의 입장과 같이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정통의 계보에 집착하기보다 중화문명의 실질인 인의의 정 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이 존주의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맞닥뜨린 시세를 공자의 존왕론으로 이해해야 할지 맹자의 행왕론으로 이해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공자적 입장은 명나라로부터 이어지는 중화문화의 계승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정통론의 강화로 나 타날 것이고, 맹자적 입장은 민생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왕도론의 강화 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사유의 차이가 송대와 같이 존맹․비맹의 학술 논쟁으로 전화되지는 않았지만, 노소분기 당시 종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송시열과 박세 채의 대립 속에서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3. 1683년(숙종 9) 종묘 논쟁의 추이

1) 宋時烈의 尊王과 효종․태조 추숭론

1683년(숙종 9) 2월 송시열의 상소에서 시작된 종묘 논쟁의 주제는 다음 두 가 지였다.

(1) 효종의 북벌론이 남한산성의 치욕 및 명나라를 위한 복수의 차원이 아 니라 춘추대의에 근거한 중화질서 수호의 의미를 지녔음을 밝히고, 그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효종의 신위를 4대가 지나도 조천(祧遷)하지 않는 세실로 정하며,

(2) 태조의 위회도 회군 역시 조선왕조 개창의 의미를 넘어 춘추대의를 실현한 사건으 로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소의정륜(昭義正倫)' 4자의 시호를 더해 올리자는 것이었다.

효종 세실 논의는 2월 21일부터 3월 4일까지 보름 남짓, 태조 휘호 논의는 3월 19일부터 6월 12일까지 약 3개월 간 지속되었다.20)

20)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2월 21일(계사); 숙종 9년 3월 4일(병오); 숙종 9년 6월 12일(계미); 󰡔宋子大全󰡕 卷18, 請釐正宗廟徽號箚-癸亥三月十九日 .

그리 길지 않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논쟁이 노소분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첫 번째 이유는 조선왕조에 서 종묘가 지닌 유교적 상징성 때문, 즉 ‘왕조(국가)란 무엇이며, 그 정체성은 무엇 인가?’라는 근원적 문제의식이 종묘 전례에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개창 이후 종묘와 관련해서는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 그런데 숙종

9년에 벌어진 이때의 논쟁은 예전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종묘 전례 논의는 선왕의 장례 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만 2년의 국상 기간 중 선 왕의 공적을 함축하는 시호의 문구를 정하고, 선왕의 위패를 종묘 정전에 부묘(祔 廟)함에 따라 친진(親盡)에 해당하는 위패를 세실로 삼을지 여부를 논의함이 상례 였다.

그런데 숙종 2년 선왕 현종의 국상 절차를 마친 뒤 7년이나 지난 뒤에 이르 러 세실과 시호 문제가 제기되었음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더구나 숙종의 조부인 효 종은 아직 친진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세실 여부를 논하기에 이른 감이 있었고, 300 년 전의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는 것 또한 다소 뜬금없는 일이었다.21)

21) 이현진, 앞의 책, 223~262쪽.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선왕의 공덕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종묘 전례에 어떻게 반영할지에 국한되었던 이전 사례와 달리, 왕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문제의 식 아래 종묘 전례의 개정 여부가 논점이 되었던 점이 이 논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시도의 연원은 1669년(현종 10)의 태조비 신덕왕후의 부묘와 1681년 (숙종 7)의 공정왕(정종)의 묘호 추상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 종묘에 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신덕왕후와 정종의 의리론적 위상이 250여 년 만에 회복되었지만, 아직까지 개별 인물의 정통성에 대한 재평가에 그쳤을 뿐이다.

그런 데 숙종 9년에는 논쟁의 문제의식이 훨씬 확대되어 조선왕조의 중화주의적 정체성 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들이 종묘 전례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7세기 중반이라는 시점에 종묘와 관련된 중대한 논쟁들이 연이어 벌어졌을까? 예전에는 이같은 현상을 당쟁의 틀 속에서 해석해 왔다.

당파 간의 권력투쟁이 왕실까지 비화된 결과, 이때와 같은 공허한 예설 논쟁이 발생했다 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이는 전통적 중화질서의 붕괴에 따른 조선왕조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함이 보다 타당 하리라 생각된다.

이 시기는 1637년 남한산성의 항복과 1644년 명나라 멸망으로 인해 조선 지식 인들이 공유하던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붕괴되던 때였다.

그리고 1662년 중국 남부 에서 명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던 남명왕조가 멸망하고 뒤이어 삼번의 난(1673~ 1681)을 진압한 청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명의 부활과 중화질서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어 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한 것은 필연의 형세였다.

지난 200여 년간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 속에 서 조선의 위상에 대한 고민이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를 대신 하여 중화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게 된 조선 지식인들은 왕조의 중화주의적 정체 성을 재확립하는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선도한 사람이 송 시열이었는데, 이 무렵 그가 강조했던 춘추일통론의 의미는 제자들 간의 다음 대화 를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윤봉구: 청음(김상헌), 신독재(김집), 동춘(송준길) 선생은 모두 명나라를 위한 복수를 대의로 삼은 반면, 우옹(송시열)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여 춘추대의를 첫 번째 의리로 삼고 명나라를 위한 복수를 두 번째 의리라 여겼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권상하: 노선생(송시열)의 뜻이 정말 그러하였다.22)

22) 󰡔宋子大全󰡕 附錄 卷19, 記述雜錄-尹鳳九 “鳳九曰, 聞淸愼春諸先生, 皆以大明復讎爲大義, 而尤翁 則又加一節, 以爲春秋大義, 夷狄而不得入於中國, 禽獸而不得倫於人類, 爲第一義, 爲明復讎, 爲第二 義, 然否? 曰, 老先生之意正如是矣.”

윗글에 언급된 명나라를 위한 복수와 춘추대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춘추대의는 무엇보다 한 왕조만을 대상으로 한 구체적인 선악시비의 가치평가를 넘어서, 주나 라로부터 전해지는 유교적 정통성의 계보를 설정하려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 의 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전 시기의 ‘재조지은(再造之恩)’과 같이 일회적 사건에 대 한 평가를 넘어서, 보다 추상적인 유교문명의 계보를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구별 되는 것이다.

송시열의 이같은 사상적 구도는 경신환국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인 1681년 (숙종 7) 정월의 진수당주차(進修堂奏箚) 부터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훗날 정조가 주자의 수공전주차(垂拱殿奏箚) 에 비견한 이 글은 태조와 효종의 공업을 재평가하며 조선왕조의 정통성에 관한 계보를 처음 제시했다는 점에서 송시열의 춘추일통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23)

조선사의 흐름을 예의(禮義)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진수당주차 를 통 해, 송시열은 부자․군신의 의리와 화이분별의 의리가 유교 정치의 핵심 가치임을 전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적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군신․화이의 의리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했던 실례들을 열거했는데, 그 중심에 태조와 효종이 있었다.

이 글에 따르면, 유교국가 조선이 지닌 예의의 전통은 은나라에 대한 군신의리 를 고수하며 조선으로 건너온 기자(箕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전통 덕분에 고 려가 비록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적의 풍속에 동화되지 않았고, 고려 말 도 학의 창시자인 정몽주에 이르러 반원친명(反元親明)의 외교 노선을 정립할 수 있었 다. 태조가 새 왕조를 개창하며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의리를 표방한 것도 예의의 가치를 국가적 차원에서 체현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란의 곤욕을 치르면 서도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선조와 인조를 거쳐, 역대 임금들이 견지 해 온 의리론의 전통이 조선왕조의 정체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존왕론적 계보 를 제시하였다.24)

더구나 명나라 멸망 이후에도 복수설치(復讎雪恥)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던 효 종이야말로 조선왕조의 정체성인 예의의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될 수 있었 다. 효종의 ‘북벌’이란 단순히 남한산성의 치욕 또는 명나라 멸망에 대한 복수의 차원을 넘어서, 유학의 보편 원리이자 조선의 역사적 정체성인 예의의 가치를 실현 하고, 주자학의 핵심 명제인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欲)’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여정이었다는 것이다.25)

23) 󰡔弘齋全書󰡕 卷9, 兩賢傳心錄序 “書旣成, 予讀而曰, 有是哉, 兩賢心法之無不同也. 如讀己丑封事, 則知先正之受心法於戊申封事也. 如讀垂拱奏箚, 則知朱子之授心法於進修奏箚也.”

24) 󰡔宋子大全󰡕 卷16, 進修堂奏箚-辛酉正月三日 “惟我東方, 自箕子以來, 已爲禮義之邦, 而至於勝國, 胡風猶未盡變矣. 至我太祖高皇帝, 初定天下, 文忠公鄭夢周, 首建大義, 辨夷夏陰陽之分, 背胡元而事 眞主. 至於我太祖大王開國, 高皇帝視同內服, 恩禮周渥, 我太祖大王忠貞恪勤, 如子事父. 至於壬辰之 變, 受報酬勤, 宗社亡而復存, 生民死而復生, 環東土數千里, 一草一木, 何莫非帝德之所濡哉. 是故, 我宣祖大王, 益罄忠誠, 手寫再造藩邦四大字, 以寓睿志矣. 不幸丙丁之變, 國勢萎弱, 將相駑劣, 至有 三田之擧, 可勝痛哉. 然而仁祖大王, 誠意冞篤, 每於皇朝慶節, 獨詣後園, 痛泣拜跪, 二三大臣, 亦密 伸私義, 以受皇朝嘉獎, 宗社之至今扶持者, 實賴於斯矣.”

25) 송시열의 사상 속에서 ‘存天理 去人欲’이 지닌 화이론적 의미에 관해서는 우경섭, 宋時烈의 華夷 論과 朝鮮中華主義의 성립 , 󰡔震檀學報󰡕 101, 震檀學會, 2006, 270~272쪽 참조.

당시 효종의 뜻이 어찌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큰 화를 불러오려는 것이었겠습 니까? …… ‘이것(복수설치)과 학문의 방법은 다르지 않다.

성급히 이루려 하지 말고 게을 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 뜻을 강고히 세우고 이 마음을 청명케 하는 방도는 모두 학문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불편할 때에도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주공․공자․정자․주자의 글을 강론하시고, 이를 통해 요순의 가르침인 정일(精一)의 연원에 소급하셨습니다. 효종의 원대한 뜻과 견지한 요체가 바로 이것이었 습니다.26)

요컨대, 송시열은 진수당주차 를 통해 조선왕조가 지닌 예의의 전통을 강조하 는 가운데, 태조의 왕조 개창과 효종의 복수설치론이 도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우선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동아시아 유교문명 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설정함으로써 춘추대일통의 문제의식을 제기함과 동시에, 주공․공자․주자의 도학적 계승자로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계보화 하려는 시도 였다. 즉 조선이 요순을 거쳐 주나라로부터 전래하는 유교문명의 정통성을 담지하 고 있다는 조선중화주의의 문제의식을 도통의 차원만이 아닌 종통의 차원에서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왕실이 주나라의 정통적 계승자로 설정될 수 있다면, 조선왕실에 대한 보위가 곧 중화문명의 수호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고, 따라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밝히는 작업은 존왕론의 맥락 속에서 중화주의적 역사성을 지니게 되었 다. 그리고 중화문명의 요체인 도학과 의리의 정통성이 조선왕조에 있음을 천명하 려는 노력이 1681년(숙종 7)의 문묘 개혁과 1683년의 종묘 논쟁으로 구체화 되었 던 것이다.27)

26) 󰡔宋子大全󰡕 卷16, 進修堂奏箚-辛酉正月三日 “當日聖意豈欲不量時勢, 輕挑大禍哉? …… 又曰, 此與學問之道無異, 徐徐乎無欲速也, 汲汲乎不敢惰也. 又嘗曰, 此志强立, 此心淸明, 都在於學問. 以 故雖聖躬違豫之時, 猶日御筵席, 講論周孔程朱書, 以溯乎堯舜精一之淵源, 此孝廟所以志之大而操之 要者也.”

27) 1681년(숙종 7) 송시열의 문묘 개혁론에 관해서는 우경섭, 宋時烈의 道統論과 文廟釐正 논의 , 󰡔韓國文化 37,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6 참조

송시열은 1683년 2월 21일 효종을 세실로 삼을 것을 청하는 상소를 통해, 요순 과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중화문화의 정수가 기자의 동래(東來) 이후 조선으로 건 너온 연원을 설명하였다. 그

리고 효종의 복수설치론 역시 '인의로써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아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라 규정한 뒤, 효종이 아니었다면 요․순․탕․무․주공․공자․정자․주자로 계승되는 오륜의 가르침이 모두 사라 졌을 것이라 말하여,28)

효종의 복수설치론이 지닌 춘추일통론적 의미를 재설정하 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옛날 공자가 󰡔춘추󰡕를 지어 공언(空言)으로써 왕법을 전했지만, 맹자는 그 공로를 홍수 를 다스렸던 우임금, 이적을 정벌한 무왕, 맹수를 쫓아버린 주공과 같은 반열에 놓고서 일치(一治)의 시대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는 난신적자를 두렵게 한 것과 더불어 주실을 존중하고 이적을 배척한 공자의 공로가 결코 세 성인[禹․武王․周公]의 사업보다 못하 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효종대왕은 덕을 논하자면 더 할 말이 없고 공을 헤아리면 인의의 도리를 세우셨 으니, 이로 인해 천리가 밝아지고 인심이 바르게 되었으며, 천서(天敍)가 바로잡히고 오전 (五典)이 돈독하게 되었습니다. 그 절실하고 분명함이 천지에 가득한 공로가 어찌 󰡔춘추󰡕 보다 아래에 있겠습니까? 마땅히 추숭하고 존중하여 미덕을 드러내고, 종묘 의절을 융숭 하게 하여 백세불천의 세실로 삼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한 세대의 이목을 바로잡는다면, 인의와 천리가 밝혀지고 천리와 인심이 바로잡혀 결국에는 예의가 돈독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먼 훗날 후대의 성왕이 나타나 일시에 뜻과 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음 (陰)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양(陽)이 분명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29)

28) 󰡔宋子大全󰡕 卷17, 請以孝宗大王廟爲世室疏-癸亥二月二十一日 “適値國運中否, 遭値丙丁之變, 天 地飜覆, 義理晦塞, 人道同於禽獸, 環東土數千里, 淪胥以鋪, 而將莫之救也. 洪惟我孝宗大王, 以上聖 之資, 當九五之運, 規模廣大, 謨猷宏遠, 蓋不但謹守邦域, 蓋嘗曰, 予固以仁義之道, 明天理正人心, 以勑我五典, 而成敗禍福, 非予所能逆覩, 此志卓然, 正如靑天白日. …… 然其所以如此者, 不過曰以 仁義之道, 明天理正人心, 以惇天敍之五典而已. …… 嗚呼, 自堯舜而湯武, 自湯武而周孔, 以至於程 朱, 其所以立大訓垂萬世者, 如微我孝宗大王, 則皆歸無用之虛設矣. 至今東土之人, 皆知君臣父子夫 婦兄弟師友之道者, 伊誰之功哉?”

29) 󰡔宋子大全󰡕 卷17, 請以孝宗大王廟爲世室疏-癸亥二月二十一日 “昔孔子作春秋, 以空言垂王法, 而 孟子乃列其功於禹之抑洪水, 武王之兼夷狄, 周公之驅猛獸, 而以當一治之數者, 誠以其懼亂臣賊子, 尊周室攘夷狄之功, 不下於三聖之施諸行事也. 今我孝宗大王, 論其德, 則旣無間然, 而擧其功, 則其所 以立仁義之道, 使天理明而人心正, 天敍勑而五典惇, 則其深切著明範圍天地者, 豈下於春秋哉? 是宜 追崇尊尙, 形容德美, 加隆廟儀, 以爲百世不遷之宗, 以新一代之耳目, 使仁義常行, 而天理常明人心常 正, 終至於五典常惇, 則其在後聖, 雖未保遽成志事, 亦可使重陰之底, 陽德昭著, 終必有七日之復矣.”

위의 글 중 ‘난신적자를 두렵게 한 것과 주실을 존중하고 이적을 배척한 것’이라 는 표현은 공자의 󰡔춘추󰡕 저술을 가리키는데, 송시열이 보기에 효종의 공업은 공자 의 󰡔춘추󰡕 편찬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효종의 이같은 대의를 조선왕조의 사상적 지향으로 삼는다면, 언젠가 양기가 소생할 때 조선이 간직한 중화문화가 세상에 부 활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숙종에게 역설하였다.

결국 송시열은 이단과 이적을 물리쳐 중화문화의 정통을 수호했다는 춘추일통론 의 관점에서 효종을 평가하며, 효종을 ‘춘추대의의 담지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 가 세상을 떠나기 전 숙종대 출사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던 것은 송시열의 정치사상 가운데 효종 추 숭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고 있다.30)

그리고 효종 세실 논의가 마무리 되어갈 무렵인 1683년 3월부터 송시열은 태조 시호에 관한 세 차례의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31)

3월 19일 첫 번째 상소에서는 종 묘에 모셔진 역대 국왕과 왕비의 휘호 중 잘못된 부분들의 개정을 청하는 가운데, 태조 휘호의 글자 수가 세조와 선조보다 적음을 지적하며 휘호 추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32)

이로부터 휘호 자수에 관한 분분한 논란이 시작되었는데, 송시열은 다시 3월 25일의 희정당주차(熙政堂奏箚) 를 통해 ‘종주지의(從周之義)’를 거론하 며 명나라의 사례를 참고로 제시했다. 그리고 태조의 휘호 ‘지인계운(至仁啓運), 성 문신무(聖文神武)’ 8자 중 시호에 해당하는 글자 수가 관례(8자)보다 부족한 4자에 불과할 뿐 아니라,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창업수통(創業垂統)한 공훈을 드러 내기에 미진하다는 이유를 들어 ‘소의정륜(昭義正倫)’ 4자를 더할 것을 건의하였 다.33)

30) 󰡔宋子大全󰡕 卷151, 告皇考睡翁先生皇妣貞敬夫人郭氏墓文 "其後一出, 專爲尊周大義孝廟世室, 以 明大卞也. 自是之後, 鑴之餘孼, 日夜窺伺, 復成今日之禍."

31) 태조 시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 과정은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김호, 1683년(숙종 9) ‘太祖’의 諡號 加上 과정 연구 , 󰡔畿甸文化硏究󰡕 32, 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 2005; 이현진, 앞의 책 250~262쪽 참조.

32) 󰡔宋子大全󰡕 卷18, 請釐正宗廟徽號箚-癸亥三月十九日 .

33) 󰡔宋子大全󰡕 卷18, 熙政堂奏箚二 .

뒤이어 4월에는 위화도 회군의 존왕론적 의의를 언급하며 시호 추상의 필연성을 다시 부연한 다음의 상소를 올렸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공자보다 더한 성인은 없었고, 공자의 공로 중에는 󰡔춘추󰡕보다 큰 것이 없으며, 󰡔춘추󰡕의 의리 중에는 존왕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 󰡔춘추󰡕의 빛나는 수십 가지 의리 가운데 존왕의 의리가 가장 위대한데, (공자) 이전의 성인들도 (존왕의 의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천리가 밝아지고 인심이 바로잡혀 난신적자가 두려 워하게 되었으니, 공자의 공로가 위대한 까닭은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태조대왕께 서는 하늘이 낸 성지(聖智)를 지니고 예철(睿哲)을 떨치셨으니, 폭정을 인정으로 대신해 야 할 때를 맞아 춘추대의를 내세우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명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하 여 왕업을 이룸이 손바닥 뒤집듯 병을 세우듯 쉬웠습니다. …… 선조대왕께서는 임진년의 망극한 변란을 당했을 때 유신 정경세의 건의에 따라 경연에서 󰡔춘추󰡕를 강론하여 복수대 의를 밝히셨으니, 이는 일의 순서를 잘 알았다 할 수 있습니다. …… 아! 이 존왕의 의리야 말로 이른바 하늘과 땅의 법칙이라 하니,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아! 인조께서 매년 황제의 탄신일이 돌아오면 후원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은 무슨 의리 입니까? 효종 역시 어묵동정(語黙動靜)의 하나하나가 춘추대의와 관련되지 않음이 없었 으니, 태조의 뜻과 사업을 계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34)

34) 󰡔宋子大全󰡕 卷18, 請追上徽號於太廟疏-癸亥四月 “伏以自生民以來, 未有聖於夫子, 夫子之功, 未 有大於春秋, 而春秋之義, 未有大於尊王也.…… 春秋之義炳然數十, 而尊王之義最大, 過此以往, 則聖 人或未之知也, 是以天理明人心正, 而亂臣賊子懼, 孔子之功所以爲大者, 其不信然矣乎? 恭惟我太祖 大王, 天錫聖智, (缺落) 發睿哲, 當其代暴以仁之際, 所秉者春秋大義也. 是以應天順人, 王業之成, 猶 反手焉, 如建瓴然. …… 嗚呼, 惟此尊王之義, 誠所謂天之經地之緯, 不可一日而無者也. …… 昔我宣 祖大王, 遭壬辰罔極之變, 用儒臣鄭經世之議, 講春秋於法筵, 以明復讎大義, 可謂知急先務矣. …… 嗚呼, 我仁祖大王每於後園, 涕泣嵩呼於聖節者, 何義耶? 至於孝宗大王, 則一語一黙一動一靜, 無非 此事也, 此豈非繼述我太祖大王之志事也耶?

송시열은 동아시아 사회가 전란에 휩싸일 때마다 태조․선조․인조․효종 등 역대 국왕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존왕의 의리를 지켜왔던 역사적 전통을 서술 하며, 이러한 면모가 바로 태조 이래 확립된 조선왕조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같은 전통은 명나라에 대한 정벌을 거부했던 태조의 위화도 회군으로부 터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회군의 의미를 단순히 새 왕조 개창이 아니라 ‘의리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잡은’ 춘추대일통의 실현으로서 재평가 하려던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이때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태조 시호의 문제는 보통 때였다면 어찌 급선무로 여겼겠는가? 다만 오늘날 존주의 의리가 사라져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그처럼 서둘렀던 것이다.35)

요컨대, 송시열은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중화주의의 맥락 속에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의도 아래 태조의 위화도 회군에 ‘인륜의 회복’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존왕론의 수호가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체성임과 동 시에 향후에도 견지해야 할 국가 이념임을 밝히려는 작업이었다. 아울러 존왕의 이 념을 계승한 조선왕조가 이적과 이단으로부터 중화문명을 보위해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천명한 것이기도 하였다.

2) 朴世采의 行王과 不尊周論

󰡔춘추󰡕 존왕론의 문제의식 아래 제기되었던 숙종 9년 송시열의 효종․태조 추숭 론은 중화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선왕에 대한 추숭을 내세우며 종묘 전례와 결부되어 제출되었 기에,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혹은 불충의 혐의를 각오하지 않는 한 이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따라서 경신환국으로 축출된 남인 들조차 송시열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효

종 세실론이 제기된 직후, ‘발란반정(撥亂反正)’의 공로를 들어 인조 역시 세실로 삼기를 청했던 김덕원 (金德遠)의 경우가 그러하였다.36)

35) 󰡔寒水齋集󰡕 卷21, 楚山語錄 “太祖追諡, 若在常時, 吾豈必以此爲先? 只以今日尊周之義晦塞, 幾乎 無人知此, 故吾於此惓惓矣.” 최근의 몇몇 연구들을 살펴보더라도, 처음에는 단지 글자 수 문제에서 시작된 송시열의 태조 추숭론이 박세채의 비판에 대한 명분을 얻기 위해 위화도 회군 문제까지 확대되었다고 설명되는데, 이는 진수당주차 이래 일관된 송시열의 중화주의적 문제의식을 간과 하여 본말을 전도한 인식이라 생각된다.

36)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3월 4일(병오).

그러나 송시열의 주장이 당시 지식인들의 전면적인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박세채를 중심으로 한 서인 내부의 소장층에서 이견이 제기되어 결국 노소분기로 귀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들이 송시열의 의견에 반대한 논점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 이는 개인적 혐원의 차원에 지나지 않던 노소 간 갈등의 단초가 조정까 지 비화된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구체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

훗날 소론에 의해 편찬된 󰡔숙종실록보궐정오󰡕의 사론은 당시 송시열의 거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유자(儒者)로 자임하던 송시열이 80세에 조정에 나아가, 꾸며낸 말은 척신을 두둔하고 선비를 억누르는 것이었으며, 늘어놓은 일은 화려한 문장을 과시하며 종묘에 아첨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잘못된 전례를 구구하게 떠벌리며 종주(從周)의 의리라 주장하니, 한․당을 비판하고 삼대를 회고하며 요순의 일이 아니면 아뢰지 않는다는 자가 과연 그와 같을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효종 세실론이 정말 효종의 (북벌) 의지와 사업을 재조명하 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갑인예송(1674) 이전이 아니라 (효종의 정통성 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참소를 입어 거의 죽었다 살아 돌아온 이후에 있었음이 의심스럽 다 한다.

태조 추숭의 경우, 명분은 비록 대의에 있었지만 실제 의도는 대개 효종 세실론 에 감춰진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내세운 대의라는 것이 적절치 않음은 바로 박세채가 비판한 바와 같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이 종묘에 관련된지라 사람들이 감히 옳은 말을 하지 못했다. 고명하신 임금 또한 애초에는 자못 신중하셨지만, 송시열이 첫째 둘째 차자 를 통해 물러난다는 말로 임금을 협박하고, 결국 세 번째 차자에서 힘주어 말하며 독촉해 성사시키고 말았으니, 그 거조가 거의 제 정신을 잃은 듯하였다.37) 윗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숙종대 제기된 송시열의 효종․태조 추숭론은

37) 󰡔숙종실록보궐정오󰡕 권14, 숙종 9년 6월 12일(계미) “宋時烈以儒者自命, 而八十造朝, 所噓噏在張 戚里抑士論, 所鋪張在崇靡文媚宗廟. 區區以皇朝謬典, 爲從周之義, 陋漢唐回三古, 而非堯舜不陳者, 乃如此乎? 議者謂, 孝廟世室, 固出於闡揚志事, 而猶疑其不在甲寅以前, 而在於以貶薄被讒誣, 萬死 歸來之後也. 若太祖追隆, 其所托雖在大義, 而實欲圖, 蓋孝廟世室之微跡, 況所謂大義者, 不當提起, 實有如朴世采之論者耶? 然事關宗廟, 人不敢正言, 而聖學高明, 初頗持重, 時烈一箚再箚, 以退要君, 終至三箚力言, 督成乃已, 其擧措殆若喪失常性.”

김익훈 등 서인 척신세력을 비호하고 예송으로 인한 불충 내지 역모의 혐의를 씻기 위 한 의도에서 출발했으며, 특히 시호 추상의 명분으로 내세운 위화도 회군 재평가는 정신나간 짓이었다는 것이다.

󰡔숙종실록보궐정오󰡕의 위와 같은 평가는 우선 경종대 신임사화로 대표되는 노소 간의 극렬한 갈등을 경과한 직후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 정치성을 감안할 필요 가 있다.

또한 위와 같은 인식이 송시열의 주장에 반대하던 사람들의 대체적인 정서 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적 논의를 단지 권력욕의 소산으로만 간주한다 면 그 속에 내재된 이념적 지향은 공허한 명분으로만 치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논쟁의 정치사상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송시열의 문제 제기에 대해 가장 정제된 반론을 제시했던 박세채의 주장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는 송 시열의 세 번째 상소 직후인 4월 10일 경연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는데, 이때 그의 논점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글자 수의 문제로, 송시열은 태조의 휘호 8자를 존호 4자와 시호 4자로 구분했지만, 8자 모두를 시호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위화도 회군에 대한 이견이었다. 위화도 회군에 대해 송시열은 “이 일이 태조의 공덕 중 가장 큰 것으로, 성삼문은 ‘압록 강의 회군은 그 대의가 해와 별보다 밝다.’고 하였으며, 문정공 김상헌 또한 상소 가운데 (회군을) 찬미한 말이 있다.

지금 시호를 의논하면서 이러한 의리를 덧붙여 넣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제왕의 시호는 개국창업(開國 創業)과 수덕수성(修德守成)의 실상에 따라 정해야 한다. 회군의 경우는 잠저(潛邸) 때의 일이므로 성삼문․김상헌과 같이 따로 찬미하여 기리는 것이 옳을 듯하며, 시호에 포함시 킴이 어떠한지 잘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송시열은 또 “(󰡔서경󰡕에서) 요임금의 덕을 흠명문사(欽明文思)라 칭송하고, 순임금의 덕을 준철문명(濬哲文明)이라 칭송했다. 즉위 이전의 일이라고 (시호에 포함시킴이) 불가 함을 잘 모르겠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덕은 타고날 뿐이니, 그처럼 (칭송)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사업에는 감추어야 할 것과 드러내어야 할 것, 앞의 일과 뒤의 일의 분별이 있다.”라고 합니다. 대개 상세하고 신중하지 않아 일을 해치는 경우는 있어도, 상세하고 신중하여 일을 해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일이 그러한데, 하물며 이처럼 시호를 논하는 큰일은 어떠하겠습니까?38)

태조 시호 추상의 명분을 위화도 회군에서 찾으려는 송시열의 주장에 박세채가 반발했던 까닭은 회군이 태조가 즉위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즉 창 업 이후의 공적을 드러내는 시호에 잠저 때의 일이 포함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는 데, 송시열 연보에 보이는 다음의 이야기는 박세채의 문제의식을 좀더 분명하게 보 여주고 있다. 태조의 회군은 대의에 가탁하여 화가위국(化家爲國)의 공업을 이룬 것이지 존주의 성 의로만 일으킨 일은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신하된 자들이 이를 감히 꼭 집어 비판할 수 없더라도, 이를 과시하며 드러낼 필요는 없다.39)

38) 󰡔승정원일기󰡕, 숙종 9년 4월 10일 “至於威化回軍之義, 宋時烈則以爲, 此事固是太祖功德之大者, 成 三問嘗曰, 鴨綠回軍, 大義昭於日星, 文正公臣金尙憲, 亦有疏中贊美之語, 今此議諡, 不可不添入其義 云. 然而議者或謂, 帝王之諡, 必當以開國創業, 修德守成之實爲之, 至如回軍一節, 自是潛邸時事, 別 爲頌美, 如成三問金尙憲之語, 可矣. 若添入尊諡之中, 未知其何如, 而宋時烈又謂, 如稱堯之德曰欽明 文思, 稱舜之德曰濬哲文明, 雖少時事, 未知其不可也. 議者又謂, 德則所性而已, 固當如此, 事業則自 宜微顯前後之分云. 大槪不爲詳愼而害於事者有之, 未有詳愼而反害於事者, 凡事尙然, 況此議諡之大 事乎?”

39) 󰡔宋子大全󰡕 附錄 卷9, 年譜 崇禎五十六年三月庚午 “至於應行節目, 待秋擧行. 於是朴和叔獨以爲, 太祖回軍之事, 假借大義, 以濟其化家爲國之業, 而未必出於尊周之誠, 今日臣子雖不敢指議, 亦不必 表章. 年少之論, 靡然歸之.”

사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 곧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었고, 명 나라에 대한 사대의 의리 또한 회군의 네 가지 명분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 서 박세채의 비판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 무왕이 실제 새 왕조 를 개창하기 훨씬 이전부터 주나라 창업의 필연성을 서술하는 유학의 개국 관념에 따르면, 송시열의 주장이 전혀 허무맹랑한 궤변은 아니었다.

또한 존왕론의 관점에 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파악하려 할 때, 위화도 회군만큼 적절한 사건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박세채의 주장은 단순히 조선왕조 개창의 역사적 사실 관계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종묘 전례를 통해 조선왕조의 존왕론적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한 송 시열의 세계관 내지 시세 인식에 동의할 수 없음을 표명한 것이었다.

박세채는 존주 또는 존왕의 이념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남 긴 방대한 저술들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재조(再造)의 은혜와 복수의 의리를 말한 적은 있지만,40)

주나라로부터 시작되어 명나라로 이어지는 중화문명의 정통에 대 한 뚜렷한 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임금을 받든다’는 ‘존주(尊主)’와 더불어 ‘백성을 보호한다’는 ‘비민(庇民)’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함이 주목된다.41)

존주비 민(尊主庇民)의 관념은 앞서 살펴본 전국시대 맹자 행왕론의 문제의식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실제로 박세채는 맹자불존주론과 관련된 언급을 여러 차례 남겼다. 그러한 흔적은 우선 ‘공자는 존왕에 힘쓰고 맹자는 백성 구제에 뜻을 두었던 차 이가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천명에 따른 참된 유학자’라고 읊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42)

이는 맹자불존주론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부연한 것에 불과하지만,43)

맹 자불존주론에 대한 관심이 별로 보이지 않던 당시의 사상적 풍토 속에서 종묘 논쟁 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40) 󰡔南溪集󰡕 卷21, 答李幼能-(丁未)六月二十八日 “皇朝於我, 外定君臣之義, 內有父子之恩. 壬辰再 造, 誠海東萬世之所不可忘者, 然自南漢以後, 一向爲強暴所制, 殆淪於禽獸之域者, 今垂三十年矣.”

41) 󰡔南溪集󰡕 卷6, 辭承政院同副承旨疏-五月九日 ; 卷10, 赴召到中路辭召命疏-正月二十四日 ; 卷 22, 答金相國-正月十九日 ; 卷77, 議政府左議政原平府院君元公墓誌銘-丙辰六月二十七日 ; 卷 81, 成均生員贈吏曹參議魯西先生尹公行狀-癸丑三月 .

42) 󰡔南溪集󰡕 卷1, 次子晉丈後寄韻 “仲尼力尊王, 子輿志救民, 所視在天命, 俱爲儒者眞. 奈何遭世故, 復異前人身, 春秋有筆法, 肯數末俗嗔.”

43) 앞의 각주 14) 참조.

특히 박세채가 이지렴(李之濂: 1628~1691)과 주고받은 편지들 속에서 맹자불존 주론과 관련된 논란을 확인할 수 있다. 이지렴은 김집․송시열․윤선거에게 종유 하고 박세채․윤증 등과 교유한 사실을 보면 대체로 서인에 속했지만, 서인의 정론 및 사유방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했던 독특한 인물이었던 듯하 다. 박세채와 이지렴은 1666년(현종 7)부터 1668년(현종 9) 무렵까지 편지를 왕래 하며, 이적의 치하에서 왕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중층적 문제에 직면한 시대 상황 속에서 올바른 출처(出處)의 도리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1666년 말 세자 책봉을 얼마 앞둔 시기에, 두 사람은 세자익위사의 관직에 함께 임명되었다.

박세채는 사어(司禦), 이지렴은 부솔(副率)의 직함을 제수받았는데, 박 세채는 출사를 거부했지만 이지렴은 사은숙배한 뒤 책봉례에 참석했다.

이때 박세채가 출사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기해예송 이후 남인 주도의 정국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생각된다. 아울러 청나라의 압박에 제대로 대처 하지 못하던 현종의 조정에 참여할 뜻도 없었던 듯하다.44)

이에 이지렴은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당시의 은자(隱者)들을 비판하며 “출사 를 거부함은 의리가 없는 것이다. 장유(長幼)의 질서도 폐할 수 없는데, 군신의 의 리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일신을 깨끗이 하려 대륜(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군자의 출사는 의리를 실천함이니,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다.”라고 한 󰡔논어󰡕의 구절을 토대로 박세채를 비판했다.45)

특히 서울의 세록지신(世祿之臣) 출신인 박세채가 출사를 거부함은 군신의 의리를 부정하고 임금의 명을 욕보이는 행동이라 지목하기도 하였다.46)

이지렴의 의도는 병자호란 패전과 명나라 멸망 이후 출사를 저어하던 세간의 분 위기 속에서, 조선의 조정에 출사함이 이적인 청을 섬기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 아 래 존주대의의 실천을 위한 출사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이었다.47)

44) 1664년(현종 5) 청나라 사신 접견을 거부한 金萬均과 공무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徐必遠 사이 에서 이미 이적 치하의 출처에 관한 논쟁이 전개된 바 있었다. 鄭萬祚, 朝鮮 顯宗朝의 私義․公義 論爭 , 󰡔韓國學論叢󰡕 14,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91, 65~89쪽.

45) 󰡔論語集註󰡕 微子 제7장: “子路曰, 不仕無義,長幼之節, 不可廢也,君臣之義,如之何其廢之? 欲 潔其身而亂大倫,君子之仕也,行其義也,道之不行,已知之矣.”

46) 󰡔恥菴集󰡕 卷8, 行狀 “丙午. 肅宗大王在東宮, 以明春將行冊禮, 命選宮僚, 以儒林之望. 先生與玄石 諸賢與其選, 除副率, 同選諸公皆不應命. 先生曰, 不仕無義, 况以世祿之臣, 身居輦轂之下, 坐辱寵命 乎? 遂出謝恩, 因參冊禮, 直宿三日而遞.”

47) 󰡔南溪集󰡕 卷27, 答李養而 “蓋高明之意, 必欲分仕我國與事虜爲二段, 乃若瞽見, 非徒可以仕今日, 亦有事彼之理, 但在聖賢學者分數不同, 自當隨時處中云爾.”

이에 대해 박세 채는 자신의 선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존주의 의리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했으니, 제가 출사하지 않음을 놓고서 군신의 의리를 저버렸다고 의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경권(經權)을 막론하고 조정에 나아 가 큰일을 이룰 수 있다면 사군성물(事君成物)의 상도(常道)와 존주복수(尊周復讎)의 대 의(大義)를 일거양득 할 수 있으니, 어찌 좀스럽게 자수(自守)하는 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 니까? 그러나 재주와 덕행이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다면, 앞으로는 주제를 모른다는 혐의 를 받고 뒤로는 실신(失身)했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니, 오히려 제 분수를 헤아려 은거 의 도리를 살핌만 못할 것입니다.48)

48) 󰡔南溪集󰡕 卷21, 答李養而-別紙-(戊申)十二月十三日 “尊周之義, 爲隨世久而遂變, 其視不仕而疑 於廢倫者, 不已甚歟? 無論經權, 卽出而能了大事, 卽於事君成物之常道, 尊周復讎之大義, 一擧而兩 得, 豈區區自守者所可比論哉? 然或才德終不足以遂其志, 則前有不量之嫌, 後有失身之咎, 反不如彼 之度分善道, 審於自處之道也.”

박세채는 존주대의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의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려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대의의 실천이라는 원대하고 모호한 목표보 다는 학문에 힘쓰며 민생을 돌보는 소소하지만 구체적 사업을 자임하려 했던 것으 로 여겨진다.

이러한 견지에서 맹자불존주의 논리를 차용하여, 자신에게 대의의 실 천을 강요하던 이지렴을 반박했다.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벼슬한 경우에 대해, 주자는 천명을 따라 존주하지 않았 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인정을 행하여 백성을 구제한다면 천하 제후들이 모두 왕 노릇 을 할 수 있으니, (맹자의 출사는) 단순히 참왕(僭王)과 찬역(篡逆)의 차이를 두고 그 경중 을 헤아려 나아갔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현의 출처는 각기 시의(時義)에 따랐으니, 출사의 여부와 기간은 각기 다름이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중화의 시대에 행해진 것이며, 또한 스스로 도를 밝히고 백성을 구제하기에 충분한 인의를 갖추었기에 가서는 안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스스로 헤아리기에 재주와 덕행이 이적을 물리치고 중국을 높이기 에 충분하다면 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서도 궁극적인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이는 그저 임금의 예우를 어지럽히는데 불과합니다. 더 나아가 몸소 오랑캐의 땅에 폐백 을 받들어 가는데 이른다면, 장차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예기󰡕에 이르기를 제후 에게 출사한 자는 천자에게 배신(陪臣)이라 칭한다 하였으니, 저는 공․맹․정․주가 이 문제에 대해 기꺼이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는 마음을 가졌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비로 세상에 태어나 학문이 부족하다면 비록 요순의 시대라도 도를 행하겠다는 귀한 뜻을 자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학문이 충분하다면 비록 이적의 나라에 가더라도 그들을 중화로 변화시키려는 뜻을 행할 수 있으니, 이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로써 기준을 삼아 더욱 고민하고 처신한다면 아마 정도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49)

출처의 선택은 자신의 역량과 시의(時宜)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 박세채의 기 본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설사 출사의 목적이 존주대의의 실천이 라는 지고의 가치에 있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학문과 능력이 부족하다면 출사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청나라에 사대하는 조선 조정에 서는 것은 이적의 조정에 서는 것과 다름없다는 논리를 덧붙이며,50)

주나라의 몰락 이후 천명에 따 라 불존주한 맹자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존주대의가 반드시 출사해야 할 명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맹자불존주론을 끌어다 존주대의를 상대화시킨 박세채가 왕도의 실현을 시대적 과제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태조 시호 논의가 한창이던 1683년 5월 1일의 경연에서 󰡔심경󰡕을 진강하며, 유교적 이상정치의 요체로서 왕도의 실천 [行王道]을 강조했다.51)

또한 비슷한 시기에 시무 12조를 열거한 장문의 상소를 지었는데,52)

그 중 첫 번째 조목이 왕도를 살피고[審王道] 대의를 밝히는[明大義] 큰 뜻을 분발하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맹자󰡕의 왕도정치론과 󰡔예기󰡕의 복수론 을 부연한 것이었으나, 핵심은 “내수외양의 실(實)을 다하지 못하면 춘추의 의리에 거듭 어긋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있었다. 그는 계속 존주의 의리를 거론했지만, 정작 중시했던 바는 존주의 ‘실(實)’로서 왕도정치의 구현이지 주나라로부터 전해 지는 중화문명의 정통성은 아니었다.

49) 󰡔南溪集󰡕 卷27, 答李養而-丙午三月九日 “若孟子之仕齊梁, 先儒以爲從天命而不尊周, 其意以爲行 仁政而救民, 則天下諸侯皆可爲王, 非但以僭王與篡逆有異, 量其輕重而仕之也. 大抵聖賢出處, 各從 時義, 行止久速, 自有不同, 然固皆行乎中國之世, 而又身有仁義, 足以明斯道濟斯民, 故無所往而不可 矣. 今日則異於是, 其人才德, 自量足以攘夷狄尊中國, 則固可以出, 如其不然而要歸, 不過徒縻禮遇, 或至躬奉玉帛於辮髮之域, 則不審將何以處之也. 禮仕於諸侯者, 稱之天子曰陪臣, 某不識孔孟程朱於 此乎其肯抑首降心爲之否也. 蓋士生一世, 學苟不足, 雖堯舜之時, 不可以任行道之貴, 學苟有餘, 雖夷 狄之國, 亦可以行變夏之志, 此乃通行古今最緊要處. 以此爲准, 而更加商量以處之, 庶乎不失其正矣.”

50) 앞의 각주 48) 참조.

51) 󰡔南溪集󰡕 卷18, 筵中講啓-五月一日晝講 “要之人主必須有天德於身, 行王道於國家, 然後可謂得聖 王之學, 而其發於爲治者, 亦當自然爲聖王之政矣. 夫如是, 則其工夫效驗眞所謂聖人之能事也.”

52) 이때의 상소는 당시 조정의 격렬한 논의로 인해 올리지 못했다가 1688년에 가서야 올렸다고 한다. 󰡔숙종실록󰡕 권19, 숙종 14년 6월 14일(을묘); 󰡔南溪集󰡕 卷12, 陳時務萬言疏-癸亥五月-戊辰六月 十三日追呈 .

존왕의 이념에 대한 무관심 내지 거부감은 박세채와 더불어 소론의 영수로 떠오 르던 윤증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20년 정도 뒤의 일이지만, 숙종이 대보단을 건립 하여 존왕의 이데올로기를 국가 이념으로 표장하고자 할 때, 윤증은 반대하지 않았 을 뿐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제단 건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심(實心)과 실공(實功)의 어려움을 지적하며, 헛된 명분으로 공연히 현실의 화란 을 자초할까 걱정하였음은 윤증의 문제의식 또한 존왕보다 왕도의 실천에 있었음 을 보여준다.53)

박세채는 이지렴과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답답한 심경을 윤증에게 토로하며 조 언을 구했다. 54)

53) 󰡔明齋遺稿󰡕 卷29, 與子行敎-晦日 “今日神宗皇帝立廟事, 是大段義理所在, 而昨來時不及一番講 討, 臨歸悤悤, 遂不能言, 可歎. 此事不可煩諸筆舌, 而恐汝全無思量, 或失於與人酬酢之際, 故略及之. 蓋今年是皇朝淪沒之歲, 甲子已一周矣, 聖念及此, 可感神祗. 且神宗罔極之恩, 東土之萬世難忘者也. 今日朝宗之義無地可見, 則立廟崇報, 自是人心之所同然, 而天理之不容已者, 夫孰有異議於此事乎? 然此事則非難, 而所患者, 實心之難充, 而實功之難辨耳. 無此實心實功, 則虛聲實禍, 非小事也. 昨於 答拙書中, 只言上一節, 而不及下一節者, 恐拙之或示外人也. 不知者見之, 則必以爲立異也. 汝亦默而 識之, 此紙則卽裂去之可也. 且與人酬酢之際, 勿費辭說, 只聽之而已, 不可贊也, 亦不可難也. 華陽洞 事, 亦勿是非可也. 意雖在他, 而事則義擧, 且有可據之故事, 不可議也.”

54) 󰡔南溪集󰡕 卷28, 答尹子仁 “承答養而辭意未幾, 而此友又以長幅至, 如采拙陋誠難爲當, 渠欲使之轉 徹座下, 茲用附呈. 蓋蕭曹一款, 栗谷雖有云云, 實爲當朝救弊之言, 吾輩今日何可借此說自處乎? 不 羞汚君, 其意似與斥和者不同, 幸兄更詳之. 至於君臣之義, 豈敢引而不發? 向來除官, 此友見勉以此, 采對以尊周有大之意, 渠又以爲不可以彼而廢此, 若力量不足以出當大事, 則只當謝恩如聽松所處, 以 行其義, 此說頗有理. 厥後又爲經權之說曰, 今之仕者經也, 不仕者權也, 權非聖人不可易言. 又曰, 如 欲如此, 必盡廢它倫, 遁世離群, 然後可以無憾. 又曰, 苟非義理十分窮處如湯武之時, 不可廢君臣之大 義, 一以不仕無義, 君臣之義烏可廢, 欲潔其身而亂大倫等語爲主, 其說極可驚怪, 而尤惑人志.”

따라서 윤증 역시 논쟁의 경과를 잘 알고 있었고, 대체로 박세채의 출처관에 공감하며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출처에 관한 이론적 원칙을 주로 언급했던 박세채와 비교하여, 윤증은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적 사안들을 거론 했다. 출처에 관한 설을 보내주시니, 저같이 고루한 자도 두 분 존형께서 주고받은 정밀한 의리에 대한 은미한 말씀을 듣게 되어 다행입니다. …… 무릇 성현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겼지만 왕척직심(枉尺直尋)하거나 포호빙하(暴虎馮河)하지 않으셨습 니다. …… 만약 “비록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배척하여 우리 동방을 오랑캐의 지경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 공적만은 위대하다”라고 말한다면, 왕척(枉尺)․계공(計功)의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하루라도 원한과 치욕을 씻을 수 있다면, 군자는 그 의리를 행할 뿐이다”라는 것 또한 헛된 말일 뿐 실질이 없는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 치욕을 씻고 의리를 행함이 온당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저 하루의 계책을 행하고 그저 의리를 행한다는 말만을 내세움이 실심과 실공의 도리에 방해 가 된다는 것입니다.55)

위 인용문의 키워드는 ‘왕척직심’과 ‘포호빙하’라는 고사이다. 왕척직심은 본래 ‘작은 일을 희생하여 큰 일을 이룬다’는 의미인데, 맹자는 이 말을 ‘부정한 방법으 로 말을 몰아 짐승을 잡는 짓’이라 해석하였다.56)

윤증은 이 말을 통해 비법적 수 단(패도)을 통해서는 결코 목적(왕도)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밝히고, 부도덕한 권력 에 참여하여 사업을 도모하려는 지식인들의 자기합리화를 비판한 것이다.57)

그리고 포호빙하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몸으로 큰 물을 건너려 하는 무모한 용기’를 의미하는데, 이 두 고사는 윤선거가 송시열의 북벌론과 존주대의의 허구성 과 무모함을 비판한 기유의서(己酉擬書)에서도 발견된다.58)

요컨대, 이지렴이 제기한 1666년의 출처 논쟁 무렵부터 박세채와 윤증은 이미 송시열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1669년의 기유의 서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송시열을 비판했는데, 그 논지는 ‘헛된 명분에 집착하다 가 청의 보복과 같은 현실의 재앙을 불러올 것[虛聲實禍]’이라는 말이었다.59)

55) 󰡔明齋遺稿󰡕 卷10, 與朴和叔 “出處說, 伏蒙投示, 使固陋者, 亦得以預聞兩兄精義之微言, 幸甚. …… 夫聖賢之於斯民, 雖若疾痛之在己, 未嘗枉尺而直尋也, 未嘗暴虎而馮河也. …… 如管仲之稱仁, 只因其見成事業而稱其功, 豈以管仲之功爲至善也. 如成敗利鈍, 不可逆覩云者, 只言鞠躬盡瘁死而後 已之意耳, 豈以爲不成不利而爲之也. …… 今曰雖不能尊中國攘夷秋, 使吾東免於夷秋, 其功亦已偉矣 云, 則不免有枉尺計功之病矣. 今曰, 一日而雪此讎恥, 君子只當行其義也云, 則又不免有空言無實之 病矣. - 非以雪恥行義, 爲未安也. 只以只爲一日之計, 只爲行義之聲而已, 則爲有欠於實心實功底道 理矣.”

56) 󰡔孟子集註󰡕 滕文公下 제1장 주자주 참조.

57) 이때의 논쟁에서 윤증은 주로 管仲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송시열의 존왕론적 시세 인식을 비판하 며 왕도정치의 실질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는 우경섭, 앞의 논문(2011) 참조.

58) 󰡔魯西遺稿󰡕 別集, 擬答宋英甫-己酉 “雖與文王之事昆夷, 義有不同, 若論其世, 則正相類矣. 創業 垂統, 已在先王, 而繼志述事, 實在聖上. 句踐詐矣, 延廣狂矣, 仁法文王之政, 義講春秋之策, 由是而 可興周道於東方矣. - 昔者不揆僭妄, 敢以營言易之義奉戒, 先虛聲之失而未蒙印可矣. 小事亦不可以 虛聲僥倖於實功, 況此莫大之事業乎? 暴虎憑河者, 不可與之成事, 大言迎合者, 不可託以心腹.”

59) 󰡔明齋遺稿󰡕 卷15, 答羅顯道-(甲申)三月五日 “來敎所謂虛聲實禍者, 昔先人之所嘗切戒於懷川者也. 懷川請黜元儒許衡於文廟也, 先人以謂當先爲修攘之實事, 不當以此等虛名爲先也, 具在長書矣. 今日此事, 有大於彼, 若果爲之, 其爲憂虞之端, 誠有不可勝言者.”

그들 에게도 병자호란의 패전과 명나라의 멸망은 통분할 만한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중화문명의 정통성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존왕의 이념을 구현하려던 송시열의 견해 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실심과 실공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왕도의 실천 즉 행 왕의 이념을 내세웠다.60)

이러한 차별성은 사상적 차이로 잠재되어 있다가 숙종 9년 송시열이 종묘 전례를 통해 존왕론적 세계관을 국가 이념으로 확립하고자 하 는 시점에서 현실 정치의 문제로 표면화 되었고, 그것이 결국 노소분기로 귀결되었 던 것이다.

60) 박세채와 윤증의 행왕론은 당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확립되어 가던 존왕론에 대한 반대의 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으나, 아직까지 행왕론적 대안을 구체화 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다. 행왕론에 기반하여 왕조 재건을 위한 정치론을 체계화 하는 작업은 정약용에 이르러 수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행왕론에 관해서는 이봉규, 경학적 맥락에서 본 다산 의 정치론 , 󰡔다산 정약용 연구󰡕, 사람의 무늬, 2012 참조.

4. 맺음말

1683년 종묘 전례를 둘러싼 논쟁은 존왕론과 행왕론의 대립이라는 사상사적 구 도 속에서 전개되었다.

효종의 북벌과 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존왕론의 관점에서 재 평가하고 그 의미를 종묘 전례에 반영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의도는 주나라로부 터 전해지는 중화문명의 정통을 밝히고 그 계승자로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설정 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는 주나라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정통성의 천명 을 핵심으로 삼았던 공자의 󰡔춘추󰡕적 세계관의 토대에 서 있었다.

반면 위화도 회군의 존왕론적 의미를 부정하며 송시열의 종묘 논의에 반대했던 박세채는 그 대안으로 왕도정치의 실현을 강조했다.

이는 주실의 정통성에 대한 별 다른 언급없이 제후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행하여 왕 노릇 할 것을 유세했던 전국시 대 맹자의 불존주론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왕론의 단초는 ‘실심․실공’을 내세우며 송시열의 북벌론과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했던 윤선거․윤증 부자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61)

이때의 종묘 논쟁과 뒤이은 노소분기는 17세기 후반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주 도자로 부상하던 정세 속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에 관한 상이한 세계관이 빚어낸 결과였다.

중화가 사라지고 명나라의 부활이 난 망해진 상황 속에서, 조선은 유교적 담론의 범주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 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중화질서의 회복을 염원했던 공자와 왕도정치의 내실 을 주장했던 맹자의 상이한 문제의식은 17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했다.

1683년 종묘 전례를 둘러싼 논쟁은 6월 12일 숙종의 결정으로 마무리 되었다.

효종 세실 논의는 커다란 반대 없이 곧 성사되었고, 태조 휘호 논의는 ‘소의정륜’ 대신 ‘정의광덕(正義光德)’ 4자의 시호를 추상하는 것으로 보합되었다. 그러나 시 호와 함께 종묘에 올려진 옥책(玉冊)의 내용을 살펴보면, 숙종은 사실상 송시열의 존왕론을 추인했음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의 의기(義旗)는 󰡔춘추󰡕의 성필(聖筆)에 부합하고, 동토(東土)의 백성을 구하시 어 오랑캐 됨을 면하게 하셨도다. 천자를 보위하는 조정이며 영원히 충성하는 나라가 되니, 풍성(風聲)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고 예교(禮敎)가 온 나라에 크게 행해지는구나.62)

61) 필자는 ‘실심․실공’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삼아 윤증의 학문을 ‘실학’으로 규정해 온 기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념과 민생’, ‘도덕과 현실’의 대립 구도를 구축하고 그 가운데 ‘민생’ 과 ‘현실’을 구호로 내세우는 부류들이 오히려 ‘실학’적이지 않은 현재의 경험 때문이다.

62)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6월 12일(계미). “第念鴨江之義旗, 允符麟經之聖筆, 拯東土之民物, 免 爲被髮之戎. 拱北極之朝廷, 永作執玉之國, 風聲著聞於天下, 禮敎興行於域中.”

그러나 송시열과 숙종이 설정한 존왕의 개념 및 주체가 같지 않았기에, 존왕론 을 둘러싼 국왕과 노론 사이의 논쟁이 뒤를 잇게 되었다. 1704년(숙종 30) 노론과 숙종이 경쟁적으로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따로 세운 것이나, 1745년 (영조 21) 󰡔어제상훈(御製常訓)󰡕 중 존주와 존왕의 개념 차이를 놓고서 전개된 논 쟁, 1749년(영조 25) 대보단을 증수하며 명 태조를 추향하는 문제로 벌어진 갈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왕조의 주체와 기능이 무엇인지에 관한 근원적 고민을 담고 있기에, 향후 좀더 상세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