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들어가며
Ⅱ. 독점자본 해체와 노동 해방을 위한 대안, 사회주의
Ⅲ. 반자본·반문명적 태도와 지향, 생태사상
Ⅳ. 자본주의의 비윤리성 및 폭력성에 대한 대응, 공동체 의식
Ⅴ. 나오며
<국문초록>
각 시집별로 형상화의 방식이나 대응 방식에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노해는 발표한 전(全) 시집을 통해 ‘반자본주의’를 일관되게 표방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와 논리에 저항하고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 즉 ‘사회주의’, ‘생태사상’, 반전(反戰) 활동을 비롯한 ‘공동체 의식’ 등을 그 대안으로 채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및 논리 에 의해 착취 혹은 희생당하는 노동자, 자연, 사회적 약자, 미래를 위한 도덕적 통제나 사회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본 연구는 제1 시집인 노동의 새벽부터, 제5 시집인 너의 하늘을 보아까지 를 관통하고 있는 박노해 시의 항상, 즉 ‘반자본주의’적 태도와 지향 그리고 그 변모 양상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제어 박노해, 항상과 변모,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생태사상, 공동체 의식
Ⅰ. 들어가며
박노해는 제1 시집 노동의 새벽(풀빛, 1984), 제2 시집 참된 시작(창작과 비평사, 1993), 제3 시집 겨울이 꽃핀다(해냄, 1999), 제4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 제5 시집인 너의 하늘을 보아(느린걸음, 2022) 등 총 다섯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아울러, 수필과 시를 함께 엮어 명상 집 형태로 사람만이 희망이다(해냄, 1997)와 오늘은 다르게(해냄, 1999) 등 도 엮어낸 바 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자연 살 림, 반전(反戰)·평화, 또 미래를 위한 목소리까지 담아내고 있으니 분명 그의 시 는 크게 변모한 셈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시는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한결같음도 지니고 있 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변했다, 혹은 변하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것 은 모두 성급하다.
박노해와 관련된 그간의 연구들은 대부분 ‘노동자 시인’이라 는 신분에 집중하며 그 특수성을 제1 시집 혹은 제2 시집과 밀착시켜 논의1)하거 나, 그의 시적 ‘변화’에만 초점2)을 맞췄던 것이 사실이다.
1) 신경득, 「멍에 메운 소들의 노래」, 비평문학 10, 1996, 이재복, 「몸과 노동의 언어-박노해론」, 현대시학 384, 2001, 정유화, 「노동의 새벽에 내재화된 노동의 기호론적 의미」, 우리문학연구 44, 2014, 허요한, 「1980년대 전위적 노동자 시인의 한 형상, 박노해」, 비교어문연구 54, 2020. 등이 이러한 연구에 해당한다.
2) 박노해의 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한 선행연구들에는 이성우, 「1990년대 한국 현대시 에 나타난 이념의 아노미와 전환기적 모색-박노해와 황지우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3, 2004, 류찬열, 「긴 노동의 밤, 먼 노동의 새벽-박노해론」, 어문논집 32, 2004, 김희진, 「박노해 시의 변모양상 연구」, 인문학연구 48, 2014. 등이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제2 시집, 혹은 제3 시집까지를 대상으로 박노해 시의 변화 양상에 대해 서술한 후 그 이유와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다만, 김희진의 논문은 제4 시집까지를 대상으로 박노해 시의 변모 양상을 살펴보면서 각 시집별 의의 및 한계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있다.
또한 각 시집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적 대상이나 내용들의 간극 때문인지 전체를 통시적으로 톺아보며 그 시적 일관성에 대해 논의3)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아울러, 제5 시집까지를 논 의의 범위로 설정한 연구도 아직까지는 없다. 박노해는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눈과 내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눈”4)은 모두 틀렸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변해서는 안 될 것을 지켜가기 위한 바른 변화”5)라고 항변한다.
그가 말한 ‘변 해서는 안 될 것’들 중 하나이자, 핵심적인 가치는 “돈보다 사람을 우선하고 사 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것”6)이다. 시적 대상이나 내용의 변화 및 간극에도 불구 하고 이는 박노해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한결같음이자, 그의 윤리의식의 근원7)이 기도 하다.
3) 그동안 출간된 박노해의 시집 전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며, 그 시적 일관성에 대해 고찰한 선행연구 에는 최명국, 「박노해 시의 항상성, 이원화된 세계인식」, 비평문학 50, 2013, 최명국, 「박노해 시의 윤리의식과 동양적 사유」, 국어문학 78, 2021. 등이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들 이외에도 노동문학의 큰 틀 안에서 박노해 시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거나 재해석 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한 연구들(김나현, 「노동시의 상상과 에크프라시스-1980년대 노동시 재독을 위한 시론」,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 2019, 맹문재, 「노동시에 나타난 근로기준법 인식 고찰」,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 2019. 등), 그리고 그의 시집들 속에 형상화된 ‘여성상’(구명숙, 「박노해 시에 나타난 여성상 연구」, 여성문학연구 12, 2004.) 혹은 ‘종교성’(정경은, 「민중시인의 종교성 고찰-박노해의 시를 중심으로」, 장신논단 47(2), 2015.) 등에 대해 고찰한 연구들도 있다.
4)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해냄, 1999, 142면.
5) 위의 책, 116면.
6) 위의 책, 163면.
7) 이에 대해서는 최명국, 「박노해 시의 윤리의식과 동양적 사유」, 국어문학 78, 2021, 305~328면 을 통해 이미 논의한 바 있다.
더불어 그가 전 시집을 통해 일괄되게 ‘반(反)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환언하자면, 반자본주의는 낙차 큰 시적 변모와 시적 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유적으로 제1 시집에서부터 제5 시집까지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그의 태도와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제1 시집에서부터 제5 시집까지를 관통하고 있는 박노해의 반자본주의적 태 도와 지향, 그리고 이에 대한 형상화 과정 등에 대해 살펴보고 논의하는 것은 선 행 연구들과 차별된다는 점에서 우선 의미가 있다.
아울러, 현대 사회의 주요 화두이자 인류의 성찰적 행위의 하나로 전개되고 있는 반자본주의와 그 대안에 대 해서도 모색해 볼 수 있다.
즉, ‘반자본주의와 그와 관련된 활동들은 무엇에 반대 한다는 점에서는 명확하나 그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덜 명확’8) 한 것이 사실이다.
8) 크리스 하먼·존 리즈, 저항의 세계화, 정영욱 역, 북막스, 2002, 163면.
그런데 박노해는 그 대안에 대해 문학적으로든, 행동으로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다.
현장 출신 노동자 시인으로 시작해 8여 년간의 수감 생활을 거쳐 자연인으로, 다시 ‘반전·평화·나눔’ 등을 기치로 한 시민사회단체 ‘나눔 문화’를 공동 설립하 고 그 기치를 실천하는 운동가로 활동하는 동안, 또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 아가는 삶의 공동체를 꿈꾸는 동안 박노해의 시는 분명 변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모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적 태도와 지향만큼은 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항 상으로 유지되고 있다.
다만 각 시집별로 시적 형상화의 방법이나 대응의 결이 다소 다르므로 항상과 변모, 모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에서는 제1 시집에 서부터 제5 시집까지를 관통하고 있는 박노해의 시적 지향 및 태도의 일관성과 함께, 각 시집별로 형상화의 과정이나 대응 방식의 차이 등에 대해서도 통시적으 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각 시집별로 당대 사회·문화·역사적 상황을 고려하고 분석하는 활동을 병행함으로써 반자본주의적 태도와 지향의 전개양상은 물론이 고 그 이유나 목적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Ⅱ. 독점자본 해체와 노동 해방을 위한 대안, 사회주의
주지하다시피,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을 구매하여 임금보다 많은 가치 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지불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이윤을 창출’9)하고자 한다.
그 런데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식 자본주의”10)는 독재 권력과 결탁한 독점자본에 의해 주도되다 보니, 기형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9) 고봉준, 자본의 역습-경제학적 상상과 비판, 소소의 책, 2022, 44면.
10) 김덕한, 자본주의 4.0 로드맵, 메디치, 2012, 90면.
즉, 산업화 시기 독점자본은 국가 권력을 통해 “수출주도형, 노동집약형 중화학 공업화 추진의 바탕이 되는 저임금·저곡가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11)
그 결과 노동자들은 ‘세계 최장 시간 동안 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생계비에 훨씬 미치지 못 하는 저임금을 받으며,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노동 현장에서 각종 산업재해’12)를 감당해야만 했다.
당대 노동자들이 처한 이러한 현실이 노동의 새벽에 고스란 히 활자화되어 있다.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가리봉 시장」)13), 또 기계에 찍혀 “손목 이 날아”(「손무덤」)가도록 일하고, 거기에 잔업까지 해도 넋을 잃을 지경인 “임 금동결 정책”(「모를 이야기」)으로 인해 “멍에 쓴 짐승”(「어쩌면」)처럼 살아야 했 던 것이 당시 노동자들의 실상이었다.
11)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새길아카데미, 2012, 202면.
12) 위의 책, 223면.
13) 박노해,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43면. 이하에서 인용하는 시의 출처 또한 같으며, 이하에서는 제목만을 병기하고 개별 각주는 생략함.
반면에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풀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버”린(「지문을 부른다」) 노동자들 과 달리 당시 독점자본들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여 부를 축적하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불평등이 가능했던 이유는 독재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독점자본이 터무 니없는 임금동결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음의 「어쩌면」을 통 해 이러한 독점자본에 대한 박노해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저들은,/ 알 빼 먹는 저들은/ 어쩌면 날강도인지도 몰라/ 인간을 기계로/ 소모품 으로/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점잖고 합법적인 날강도인지도 몰라// 저 자상한 미소도/ 세련된 아름다움과 교양도/ 부유하고 찬란한 광휘도/ 어쩌면 우리 것인지 도 몰라/ 우리들의 피눈물과 절망과 고통 위에서/ 우리들의 웃음과 아름다움과 빛을 / 송두리째 빨아먹는/ 어쩌면 저들은 흡혈귀인지도 몰라 - 「어쩌면」 부분
위의 시에서 ‘저들은’ ‘우리 것’이어야 하는 많은 것들을 ‘흡혈귀’처럼 ‘빨아먹’ 어 ‘우리들’을 ‘피눈물’ 흘리며 ‘절망과 고통’스럽게 한다.
또, ‘인간’답게 살 권리 를 ‘합법적’으로 강탈해 우리를 ‘기계’로, 또 ‘소모품’이나 ‘상품’으로 만들어버리 는 ‘날강도’ 같은 짓을 자행하기도 한다.
기계처럼, 또 양계장의 닭처럼 일했으나, 제 몫을 ‘송두리째’ 착취당한 우리들과 점잔을 빼나 날강도나 흡혈귀에 지나 지 않는 저들의 정체는 너무도 분명하다.
즉, 독재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합법적 으로 임금동결을 무자비하게 지속한 독점자본이 ‘저들’이라면, 그로 인해 가족들 과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는/ 평온한 저녁’(「평온한 저녁을 위하여」)조차 가질 수 없었던 ‘우리들’은 바로 당대의 노동자들을 의미한다.
이처럼 경제발전제일이라는 구호와 명분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독 재 정권과 그에 편승한 독점자본들로 인해 70~80년대 당시 노동자들의 삶은 그 야말로 열악하고 처참했다.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을 통해 독점자본 세력에 대 해 비판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이유는 “엄혹한 독재정권시절, ‘짐승의 시간’을 ‘인 간의 시간’으로 되살리기 위해”14)서였다.
14)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앞의 책, 145면.
즉, 저임금·장시간 노동은 물론이고 신 체의 훼손까지 감당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그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짐승 같은 독재정권과 그에 편승한 독점자본 에 의해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당대 노동자들의 삶을 인간답게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당대 노동자들은 생산의 주체이자, 이른바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산업의 역군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 생한 이익과 분배에서는 언제나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제미랄”(「진짜 노동자」) 상황 때문에, 결국 박노해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어쩔 수 없지」), 또 “떳떳한 노동자의 자존”(「밥을 찾아서」)을 위해 결국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는 노동의 새벽에서부터 이익 창출을 위해서라 면 노동자를 수단화하고 그들의 목숨까지도 담보로 삼는 독점자본, 또 그 비호 세력들을 적대시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그는 독점자본과 그 비호 세력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노동자계 급의 연대를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이념적인 방법론으로 선택하 기도 했다.
그로 인해 제2 시집인 참된 시작 3·4부에 수록되어 있는 일명 ‘시사 시’들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포섭된 반자본주의적 성향이 교조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제값 받고 노동력을 팔고자 싸우는/ 이 개같은 자본주의적 상거래는/ 더이상 도저 히 인정할 수 없다/ 성스러운 인간노동을 상품화시키고/ 인간의 살과 피와 신경을/ 사랑과 감성과 인간의 생명력을/ 송두리째 빨아가고 소진시키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는/ 이 살 떨리는 자본주의― - 「오 인간의 존엄성이여!」 부분15)
인용한 시에서 ‘성스러운 인간’의 ‘살과 피와 신경’을, 또 ‘사랑과 감성과 생명 력’을 ‘송두리째 빨아가고 소진시키는’ 것도 모자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도 ‘말살하는’, ‘근본적’ 원인으로 ‘자본주의’가 지목되고 있다.
‘인간의 존재를 상품관계에 투영시켜 인간의 영혼, 즉 존엄까지도 말살’16)하려 하는 극악한 상황 에 대해 시인은 ‘개 같은’이라는 비속어까지 써가며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 다른 시편들을 통해서는 “결단코 한 하늘 아래에 함께 살 수 없”(「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다며 “가라 자본가세상, 쟁취하자 노 동해방”(「저 아이가」)을 외치기도 한다.
즉, “공고한 자본가 세상을 모래성처럼 무너”(「무너진 탑」)뜨려야 한다는 투쟁적이고 선동적인 목적의식을 여러 편의 시 사시들 속에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는 지난 시집에서 독점자본과 그에 결탁한 세력들에 국한되었던, 그 래서 소박하고 국지적이었던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제2 시집 ‘시사시’에 이르러 박노해의 인식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적 대감으로 확대되고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가 자본주의 대안으로 섭렵한 사회주의를 전략적으로 채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사회주의를 선택 한 이유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사회주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대안적 믿음 때문이었다.
당시 그에게 사회주의는 “마약 같은 강렬한 믿음, 불변의 진리”17)였 기에 이러한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5) 박노해, 참된 시작, 창작과 비평사, 1993, 130~131면. 이하에서 인용하는 시의 출처 또한 같으 며, 이하에서는 제목만을 병기하고 개별 각주는 생략함.
16) 전병권, 자본주의, 어떻게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나, 푸른 역사, 2011, 135면.
17)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앞의 책, 77면.
즉,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존권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까지도 말살하며 독점자본이 이윤 추구에 몰두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마련해 준 자본주의 체제와 논리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게 된 것은 당시 박노 해에게 있어서는 당위적이었다.
Ⅲ. 반자본·반문명적 태도와 지향, 생태사상
박노해의 제2 시집인 참된 시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록된 순서 와 달리 3·4부의 시들이 1·2부의 시들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창작된 것들이다.
그 래서 3·4부에 수록되어 있는 시사시들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적극 포섭된 노동운 동가로서의 선동적인 목소리가 주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그가 사회주의 이념 을 섭렵하고 이에 포섭된 이후 그의 시는 한때 교조적으로, 또 선동적인 형태로 까지 굴절되기에 이른다. 한때 그의 시가 ‘아지프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즉 ‘사노맹 사건’으로 수감된 상태에서 맞이하게 된 사회주의 붕괴로 인해 그는 동시집 1·2 부 시기에 이르러 스스로 다음과 같이 패배를 인정하게 된다.
동시에 참된 시작 을 위한 성찰과 함께 변화를 계획하고 실천하기에 이른다.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치욕의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회색벽에/ 무겁게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흘러/ 그 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 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부분
위의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에서 시인은 ‘스스로 치욕의 삭발을 하’ 고, ‘사흘 밤낮’ 동안 ‘신열’을 ‘토해내’며 ‘지나온 날’에 대해 ‘무겁’게 성찰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몹시 아프’게 성찰하게 된 이유는 바로 1991년 현실화된 사 회주의 붕괴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 철썩 같이 믿었던 사 회주의 붕괴로 인해 인용한 시의 표현처럼 박노해는 ‘무너졌’고, 또 그로 인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칠 줄 모르고 깊어가는 상처’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슬픔에 함몰되진 않는다.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몸앓이를 하듯 무너지고 패배한 자신을 ‘묻’고 ‘암장’한 후, “긴 호흡 강한 걸음으 로 새로운 창조의 뿌리 키워나가”(「징역에서들 보면」)기 위한 참된 시작을 결심 하게 된다.
그 결과 이념적인, 또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와 목적이 탈각된 형태의 반자본주의적 태도로 전향을 하게 된다.
즉, “눈부시게 고도 성장을 하면 할수록 / 자신이 딛고 선 발밑을 무섭게 허물어”18)뜨리는 자본주의의 맹목과 위험성에 대해 생태적 인식을 바탕으로 견제 및 대응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때 사회주의를 그 대안으로 설정하기는 했으나, 박노해의 반자본주의적 태 도는 편협한 이념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지향이나 가치와는 거리가 있다.
특히 그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여러 편의 시를 통해 이미 자신이 신봉했던 사회주의 의 이념적, 이데올로기적 패배를 시인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진과 실천을 다 짐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참된 시작 1·2부 이후, 그의 반자본주의적 태도와 지 향은 방향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속 화된 사회주의 몰락과 그로 인한 사회운동세력의 약화로 인해 현실 참여 계열의 문학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거나 지향점이 필요했다.
그때 문학 전면에 부상하 기 시작한 것이 생명주의’19), 곧 생태사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문학은 현실 참여 문학의 계승이자, 몰락한 사회주의 대안 으로 채택된 반자본주의적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박노해 또한 제3 시집인 겨울 이 꽃핀다를 통해 왜곡된 자본주의적 가치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가 치와 방법으로 ‘생태사상’을 채택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가치나 세력들에 의 해 훼손되거나 평가 절하되었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친화적 인식을 바탕으로 물 질문명의 폐해에 대해 고발하고 비판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사방이 시멘트로 범 벅된 찜통 같은 좁은 독방에 갇혀 “살아 숨쉬는 모든 것”(「한여름밤의 꿈」)20)들 을 갈구하며 문학적으로도 생태적 전향21)을 한 셈이다.
18) 위의 책, 291면.
19) 김해옥, 생태문학론, 새미, 2005, 92면.
20) 박노해, 겨울이 꽃핀다, 해냄, 1999, 147면. 이하에서 인용하는 시의 출처 또한 같으며, 이하에 서는 제목만을 병기하고 개별 각주는 생략함.
21) 그의 생태적 전향의 이유와 지향성에 대해서는 최명국, 「박노해 시의 생태적 전환의 이유와 지향 성-겨울이 꽃핀다를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79, 2019, 227~243면을 통해 이미 논의 한 바 있다.
인류가 생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유는 산업화와 도시화 같은 자본주의 작 동원리를 가동하면서부터이다.
박노해는 생태적 전향 이후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질서가 작동하고 있는 문명적 공간, 즉 도시에 대한 염증과 피로감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무서운 악마” (「무서운 고백」)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더 크게 더 많이 쓰” 고 남들보다 “더 빨리 앞서가기 위해”(「시대의 속삭임」) 처절한 경쟁을 하며, “지 구를 깨어 담고/ 미래를 팔아 담”(「지금 우리는 사막으로 간다」)는 “욕망의 질 주”(「내 노동이 무섭다」)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하듯 섬뜩하게, 이 러한 욕망의 질주를 멈춰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이 오면/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를 증오하리라/ 그들이 유산으로 남겨준 것은 / 콘크리트로 막아 죽인 갯벌과 강물과/ 쓰레기 더미로 썩어가는 바다와 들녘과/ 노 후한 원자력과 핵폐기물 덩어리뿐// 그날이 오면/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저주하리라 / 농부와 토종 종자와 우애의 공동체를 다 망치고/ 깨끗한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토 록 고갈시키고/ 막대한 빚더미만 떠넘긴 어른들을/ 더이상 남겨둔 미래도 없이/ 삭 막한 도시와 번쩍이는 기계더미와/ 역습하는 기후와 복수하는 대지만을 남겨준/ 어 른들을 증오하며 공격하리라// 그날이 오면/ 그날이 다가오면 - 「그날이 오면」부분22)
22)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206~207면. 이하에서 인용하는 시의 출처 또한 같으며, 이하에서는 제목만을 병기하고 개별 각주는 생략함.
인용한 「그날이 오면」은 심훈의 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꼭 오기를 갈망하며 목 숨 걸고 부르짖었던 희망찬 ‘그날’과 박노해가 말하는 ‘그날’은 분명 다르다.
후자가 말하는 그날은 결코 와서는 안 되는 그런 날이다.
만약 와서는 안 되는 그날이 오면,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나이든 사람들 이 물질적 욕망에 사로 잡혀 젊은 사람들의 삶터를 철저하게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시인의 표현처럼 ‘유산으로 남겨’줘야 했던 ‘깨끗’한 자연과 ‘우애’로운 ‘공동체’는 망치고, ‘쓰레기’ 같은 문명의 ‘폐기물 덩어리’를 ‘막대한 빚더미로 떠넘긴 어른들’ 을 훗날 젊은 사람들이 증오하며 ‘공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복수’가 아닐까. 문명적 인프라가 무분별하게 구축된 도시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편리와 물질적 풍요를 대여 혹은 판매하는 방식으 로 제공한다.
즉, 철저하게 상거래적 질서가 작동되는 공간이다.
그렇다 보니 물질 적 재화의 소유 정도에 따라 삶의 조건이나 인간관계가 결정되기도 한다.
박노해 는 이러한 도시를 “비용 대비 수익과 효율과 경쟁력의 외침만 날카로운”(「너와집 한 채」) 곳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다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 대신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만 커”졌다고 하면서, 그들이 더 많은 능력을 사기 위해 돈벌이에 몰두한 나머지 결국 “자연과 약자에게 난폭해지고” (「누구의 죄인가」) 그것도 모자라 ‘미래’까지도 망치고 말았다고 차갑게 진단한다.
“자본이 자본을 낳는 자기 복제성, 자본이 있는 곳으로 또 다시 자본이 모이는 근친상간의 속성을 지닌 자본주의”23)적 공간이자, ‘상대적 빈곤자의 희생을 기반 으로 물질적 혹은 정신적 풍요를 만들’24)어 내는 위태로운 공간이기도 한 도시는 기형적이고 패륜적이어서 건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23) 김덕한, 앞의 책, 109면.
24) 전병권, 앞의 책, 66면.
다음의 「뉴타운 비가」를 통해서도 도시가 왜 건강하지 못한 공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건넛마을이 재개발되어 뉴타운이 들어서면서/ 하루아침에 사람들 생활이 편리해 졌다/ 대형마트에서 신선하고 값싼 쇼핑을 하고/ 스타벅스에서 원두커피를 골라 마 시고/ 아이들은 수준 높은 학원 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 편해지고 빨라지고 세련되어지자/ 내 삶은 그만큼 초라하고 우울해졌다// 하루아 침에 마을 야산 산책길을 잃었고/ 밤하늘에 빛나던 별들이 강제이주당했고/ 그녀와 산책하다 키스를 하던/ 사과나무 길까지 CCTV가 설치되어/ 내 사랑은 불륜처럼 찍 히게 되었다// …(중략)… // 우리 동네 단골집들이 사라지자/ 소소한 일상을 이야 기하고 근심걱정을 나누고/ 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안부를 물어주던/ 인정 어린 미소 들이 뿔뿔이 사라졌다/ 갑자기 일이 생기고 아플 때 서로 기대던/ 친밀한 인간관계 들이 사라졌고/ 하루아침에 내 삶의 뿌리가 끊어져 나갔다// ‘경축 재개발’ 펼침막 이 골목마다 나부끼고/ 뉴타운 개발로 불도저가 으르렁거리면서/ 하루아침에 풀꽃 같은 웃음꽃이 철거당하고/ 하루아침에 생활 속의 민주주의가 쪼그라들고/ 하루아 침에 우애어린 삶들이 살해되어 나갔다 - 「뉴타운 비가」 부분
위의 시에서 ‘건넛마을’의 ‘재개발’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대형마트’와 ‘스 타벅스’, 그리고 ‘수준 높은 학원’이라는 ‘값싼’ ‘편리’를 제공받게 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즉 ‘뉴타운이 들어서’자 ‘하루아침’에 소중하고 가치 있는 많은 것들 이 ‘철거’당하고, 또 ‘살해’되고 만다.
‘산책길’과 ‘밤하늘에 빛나던 별들’뿐만 아 니라 ‘웃음꽃’ 피우며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근심걱정을 나누’던, 그래서 ‘아플 때 서로 기대’며 함께하던 단골집들까지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 아가던 이웃들을 ‘뿔뿔이 사라’지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애어린 삶’을 ‘멸종’ 시켜버린, ‘으르렁거리’는 ‘재개발’로 인해 ‘삶의 뿌리가 끊어져’ 시인은 황망해 하고 있다.
“한 문명의 위기와 몰락은 재생산 구조의 위기가 발생할 때, 즉 문명이 더 이 상 삶의 재생산을 만들 수 없을 때 일어난다.”25)
25) 위의 책, 171면.
그런데 자본주의 물질문명은 재개발과 같은 재활용의 방법으로 공간의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하나, 그로 인한 결과는 인용한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파괴 적이다.
‘재개발’은 공간을 변형, 즉 수직화하여 효율성을 제고하는, 그래서 편리 를 도모하는 한편 이윤을 창출하거나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재활용 방식 이다.
그런데 이러한 재활용의 과정이나, 또는 그 결과로 인해 ‘하루아침’에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된다.
삶의 조건이나 방식이 ‘편해지고 빨라지고 세련되어지’는 긍정적 효과를 분명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기존 공간과 그 속 에 살고 있던 사람들, 특히 상대적 약자의 삶을 ‘강제’로 ‘철거’한 결과로 얻어진 다는 점에서 가히 폭력적이다.
박노해는 이처럼 여러 시편들을 통해 자본주의 물 질문명 공간인 도시의 파괴성에 대해 고발하고 비판하는 방법으로 반자본·반문 명적 생태사상을 표출하고 있다.
Ⅳ. 자본주의의 비윤리성 및 폭력성에 대한 대응, 공동체 의식
박노해의 반자본·반문명적인 태도와 지향은 비단 우리 사회의 문제적 상황에 만 국한되지 않고, 1998년 특별사면 이후 제3 세계나 분쟁 지역으로까지 확산하게 된다.
물질적 이윤 창출이라는 자본주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 상이나 전쟁과 같은 온갖 비윤리적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세력에 대해 그는 문학적으로 저항하는 한편, 반전운동가로서 현장에서 맨몸으로 맞서는 것도 마 다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저주 받은 축복”인 “검은 석유”(「검은 석유」)를 탈 취하기 위한 부자나라들의 “총을 든 비즈니스”(「도시에 사는 사람」)라고 정의한 다.
“피 묻은 파병국가의 풍요를 딛고 선 부자나라/ 국익 앞에 인간성을 팔아버 린 불안한 미래의 나라”(「갈 수 없는 나라」), 즉 대한민국의 일원이라는 죄책감에 그는 이러한 폭력적인 비즈니스 행위에 맞서기 위해 전쟁터로 날아가 반전·평화 운동을 전개했는데, 다음에서 인용한 시에는 그 경험이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하늘에 연이 날리듯/ 무인폭격기가 뜬다// 폭음이 울리고/ 정적// 귀청이 나간 듯/ 적요// 허공에 튕겨나가 떨어진 몸에/ 하르르 잿빛 가루가 내려앉는다// 무감 각한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본다/ 눈부신 햇살/ 나는 살 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휘청 쓰러진다 다시 일어난다/ 폐허의 지옥도를 비틀 비틀 걷는다// 신음 소리 비명 소리 통곡 소리/ 한순간 고아가 된 소녀들의 흐느낌 소리/ 무너진 집 벽돌에 깔린 사르비아꽃/ 그 곁에 작은 미이라 같은 아이의 몸// 거대한 무덤이 된 마을 골목길을 외발의 아이들이 목발을 짚고 걷는다 - 「삶이 뭐라고 생각하니」 부분26)
26)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2022, 115~116면. 이하에서 인용하는 시의 출처 또한 같으며, 이하에서는 제목만을 병기하고 개별 각주는 생략함.
인용한 「삶이 뭐라고 생각하니」는 전쟁터의 상황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밖에서 바라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희생자들 바로 곁 생존자로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 표현을 최대한 절제한 채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참혹하 다. ‘무인폭격기’를 조작한 누군가의 정밀한 손놀림으로 인해, ‘한순간’ ‘거대한 무덤이 된 마을’. ‘폐허의 지옥도’ 같은 그곳에 가득한 ‘신음 소리 비명 소리 통곡 소리’와 ‘고아가 된 소녀들의 흐느낌 소리’는 아비규환 그 자체이다.
그런데 ‘외 발의 아이들이 목발을 짚고 걷는다’는 표현을 통해 이러한 폭격이 이번 한번뿐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과 앞으로도 이러한 행위가 반복될 수도 있다는 것 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반전·평화 운동을 몸소 실천하면서도 “시를 쓰는 것 말고는/ 다른 무기가 없” 어(「나의 독자는 삼백 명이다」) 그는 전쟁의 실상과 그 참혹함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그가 이러한 반전활동들을 통해 계속해서 고발하고자 하는 “거대한 구조악”(「무장봉기」)은 바로 이윤 추구에 몰두한 나머지 미래 세대 인 ‘아이들’의 생명까지도 ‘무감각’하게 저당 잡는 자본의 폭력성이다.
역사적으 로 ‘전쟁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건설에 직접적으로 관여’27)했을 뿐만 아니라, 자 본주의 경제 체제의 정체(停滯)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이를 극복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의 발발은 자본의 이해 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28)
즉, ‘전쟁은 파괴와 복구라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과잉 생산을 해소’29)하는 한편, “불황을 극복하는 자본 축적의 수단”30)으로 적 극 활용되어 왔다.
그로 인한 이산(離散)과 살상 등으로 공동체가 해체되는 비극 적 경험을 해야 했던 것은 언제나 약소국의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박노해는 곁에 서 그들과 기꺼이 생사를 함께하고자 하는 연대의 모습을 보였는데, 이러한 연대 는 곧 공동체 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할 때 박노해 의 반전 활동은 결국 공동체 의식에 기반한 반자본주의적 분투라는 등식이 성립 된다.
박노해는 특별 사면 당시 ‘출옥인사’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미래 진보 의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31)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27)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2019, 28면.
28) 이갑영, 자본주의에 유죄를 선고한다, 박종철출판사, 2007, 34면.
29) 위의 책, 49면.
30) 위의 책, 66면.
31)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앞의 책, 118면.
그가 ‘생명·평화·나눔’을 기 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하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선언 이후부터 세계 각지 분쟁지역으로 날아가 반전·평화 나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후 “은수자(隱修者)”(「말라주는 나무에」-한자는 인용자 가 병기함)적 삶의 행보를 계속하던 그는 12년 만인 지난 2022년 5월, 제5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펴냈다.
그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짤막한 시집 소개란에 기록되어 있는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강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또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히 불공정 거래”(「다 큰 어른이」)까지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논리와 삶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삶의 혁명”(「나무들이 걸어간다」)이 필요하다 고 역설한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숫자로 헤아릴 수 없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다 공짜다」)을 되살리기 위해 “인간은/ 어떤 최악의 순간에도/ 서로 만나고 모이고 말하고 손잡고/ 안아주고 나누며 걸어가 야”(「감염(感染)된 사랑」) 한다고.
즉, 공동체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 는 다음의 「성장하기 위해서는」을 통해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젊음을 빨아먹어야 한다//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농촌과 지방을 빨아먹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 연을 빨아먹어야 한다// 성장은 무언가를 잡아먹고 자란다/ 내 삶을 잡아먹는 성장, 조심하라// 성장할 때가 있고/ 성숙할 때가 있다// 지금, 성장보다 성숙이다/ 이제, 성숙이 성장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문
위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성장’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빨아 먹’는 착취나 ‘잡아먹’는 살생과 같은 폭력적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 즉, 파괴적 이고 폭력적인 과정이므로 그만큼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그렇지를 못했다.
시인은 우리 사회가 압축성장만을 계속해 왔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조심스럽 지 못했던 성장은 그만 멈추고, ‘성숙’을 위한 성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 다.
‘지금’, ‘이제’라는 현재형 시간 표현을 반복하며 당장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 는 이유는 성숙이 그만큼 시급한 당면 과제이자 미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가 올바른 성장의 방식으로 성숙을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 본주의 질서 체제 내에서 “‘압축 성장’만 해오다 목이 부러지”32)는 기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 “더불어 사는 이웃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나 하나뿐’인 사람을 나쁜 사람”33)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던 그에게는 성숙이 사 회적 약자와 자연, 그리고 미래를 위해 마땅히 필요한 ‘도덕적 통제나 사회적 안 전장치’34)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돈보다 삶의 질과 행복감을 높 여가며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리는 삶, 인류 가족 모두와의 관계 속에서 ‘고르게 부자인 삶’을 넘어서서 ‘고르게 덜 벌어 쓰는 삶’을 위해 이웃들과 함께 사랑과 나눔과 희망의 공동체를 이루어가”35)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 때문이다.
박노해가 말하는 ‘공동체’는 다양한 ‘연(緣)’에 의해 결성된 끈끈한 친교적 모 임이나 그룹도, 또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통제하는 폭력적 인 전체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공동체(community)는 그 어원인 라틴어 ‘코무니 타스(communitas)’, 바로 그것이다. 즉, “어떤 의무사항이나 빚을 공통의 요소 로 지녔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36)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공동체 의식은 결국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과 “생태적 맹점”37)을 내포하고 있는 개발이나 성장으로 인해 훼손된 자연에 대한 부채의식 혹은 윤리의식과 다르지 않다.
32) 위의 책, 52면.
33) 위의 책, 29면.
34) 위의 책, 52면.
35) 위의 책, 118면.
36)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코무니타스, 윤병언 역, 크리티카, 2022, 16면.
37) 필립 맥마이클, 거대한 역설, 조효제 역, 교양인, 2013, 43면.
Ⅴ. 나오며
지금까지 제1 시집 노동의 새벽부터, 제5 시집인 너의 하늘을 보아까지를 관통하고 있는 박노해 시의 항상성으로서의 반자본주의와 그 대안의 변모 과정, 즉 사회주의, 생태사상, 반전 활동을 비롯한 공동체 의식 등으로 전개된 양상에 대해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가 독점자본 해체와 노동 해방을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했고, 생태사상에 바탕한 반자본·반문명적 태도와 지 향을 보였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의 비윤리성 및 폭력성에 성숙하게 대응하기 위해 공동체 의식을 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全) 시집을 통해 박노해는 일관되게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첨언하자 면, 그의 이러한 반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물질적으로 팽창하는 자본주의의 폭력 성, 특히 사회적 약자 혹은 상대적 빈곤자에게 더 가혹한 비윤리성과 파괴적인 속성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가 반자본주의적 인식과 사유 에 기초해 여러 시편들을 통해 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더 나아가 이를 실 천하는 행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바로 자본주의 질 서 체제에 대한 도덕적 통제나 사회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뚜렷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안으로 채택한 사회주의, 생태사상, 반전 활동 을 비롯한 공동체 의식 등은 자본주의 체제와 논리로 인해 발생한 문제적 상황들 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문학적 방법론이자 실천적 분투인 셈이다.
혹자의 표현처럼 ‘문학사적으로나 사회사적으로 박노해와 같은 존재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38)
38) 도정일,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부침」, 사람만이 희망이다, 해냄, 1997, 303면.
그만큼 그는 독특한 이력과 행보를 보여 왔다. 그런 데 이러한 이력이나 행보를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범위를 한정하여 검토하거 나, 제한적인 의미만 부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독재 정권과 이에 편승한 자본가들에게 저항했던 현장 노동자 시인에서, ‘사노맹’의 맹원을 자처하 며 선동적인 노동운동가로, 또 정치·이념적인 이유로 사형을 구형 받은 후 감형 된 무기수로, 다시 특별사면된 이후의 반전·평화 운동가가 되기까지 일련의 과정 은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와 급변했던 세계정서 속에서, 또 그로 인해 체현된 것 들이기 때문이다.
박노해에 대한 연구는 그런 의미에서 70-80년대 우리 문단의 중심축이었던 참여 문학의 계보나 흐름은 물론이고, 새로운 문학적 대안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기회이자 과정이 될 수 있다.
실제 그의 시집들은 시기적으로 7·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시집별로 당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나름의 문학적 사명을 담당하거나 실천하고자 고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박노 해 시의 전개양상 혹은 시세계는 문학이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공리주의 적 인식이 상실 내지는 해체되고 있는 문단의 현실적 상황에 대해 성찰하고, 더 나아가 유의미한 대안을 마련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기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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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고봉준, 자본의 역습-경제학적 상상과 비판, 소소의 책, 2022. 김덕한, 자본주의 4.0 로드맵, 메디치, 2012. 김해옥, 생태문학론, 새미, 2005.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새길아카데미, 2012. 이갑영, 자본주의에 유죄를 선고한다, 박종철출판사, 2007. 전병권, 자본주의, 어떻게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나, 푸른 역사, 2011.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코무니타스, 윤병언 역, 크리티카, 2022. 베르너 좀바르트, 전쟁과 자본주의,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2019. 크리스 하먼·존 리즈, 저항의 세계화, 정영욱 역, 북막스, 2002. 필립 맥마이클, 거대한 역설, 조효제 역, 교양인, 2013.
3. 논문 및 평론
구명숙, 「박노해 시에 나타난 여성상 연구」, 여성문학연구 12, 2004. 김나현, 「노동시의 상상과 에크프라시스-1980년대 노동시 재독을 위한 시론」, 한국문학 이론과 비평 85, 2019. 김희진, 「박노해 시의 변모양상 연구」, 인문학연구 48, 2014. 도정일,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부침」, 사람만이 희망 이다, 해냄, 1997. 류찬열, 「긴 노동의 밤, 먼 노동의 새벽-박노해론」, 어문논집 32, 2004. 맹문재, 「노동시에 나타난 근로기준법 인식 고찰」,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 2019. 신경득, 「멍에 메운 소들의 노래」, 비평문학 10, 1996. 이성우, 「1990년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이념의 아노미와 전환기적 모색-박노해와 황지 우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3, 2004. 이재복, 「몸과 노동의 언어-박노해론」, 현대시학 384, 2001. 정경은, 「민중시인의 종교성 고찰-박노해의 시를 중심으로」, 장신논단 47(2), 2015. 정유화, 「노동의 새벽에 내재화된 노동의 기호론적 의미」, 우리문학연구 44, 2014. 최명국, 「박노해 시의 항상성, 이원화된 세계인식」, 비평문학 50, 2013. , 「박노해 시의 윤리의식과 동양적 사유」, 국어문학 78, 2021. 허요한, 「1980년대 전위적 노동자 시인의 한 형상, 박노해」, 비교어문연구 54, 2020.
<Abstract>
Transformation and Permanence in Park No-hae’s Poetry -Focused on ‘anti-capitalism’-
Choi, Myeong-guk
Although each collection of poetry shows a difference in the way of figuration or response, Park No-hae consistently advocates 'anti-capitalism' through all the poetry collections he has published. While resisting and criticizing the capitalist system and logic, he adopted methodologies that can overcome them, namely 'socialism', 'ecological thought', and 'community consciousness' including anti-war activities, as alternatives for his own reasons. It is because of the judgment that moral control or social safety devices are needed for workers, nature,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and the future that are exploited or sacrificed by the capitalist system and logic.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attitude and orientation of permanence, that is, 'anti-capitalist' and aspect of transformation in Park No-hae's poetry immanent from the 1st collection of poems Dawn of Labor to the 5th collection of poems Look at Your Sky. Key words Park No-hae, Transformation and Permanence, anti-capitalism, socialism, ecological thought, community spirit
2024년 1월 2일에 접수 2024년 2월 7일 심사 완료 2024년 2월 7일에 게재 확정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102집(28권 1호),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2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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