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의 작품에 나타난 식민지 ‘대구’의 공간표상-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나의 원향』을중심으로 - /박승주.영남대

1. 들어가며

본 연구는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 1927∼2022)의『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나의 원향』(이하,『경주』)1)에서 식민지 근대도시 ‘대구’가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목표이다.

1) 본고의『경주』한글 인용문은 필자가 번역한 한국어판『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소리: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일본인의 수기』(2020, 글항아리)를 참고로 하고 있다.

종래의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연구는 건축학 분야의 도시 경관연구나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근대도시, 그 중에서도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재조일본인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재조일본인 2세 작가들의 작품 분석도 잇따르고 있지만, 대부분이 작가들의 조선체험이나 식민지주의에 대한 인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본 연구에서 다루는 모리사키 가즈에 연구도 종래에는 그녀의 식민지 체험의 실상이나 식민지주의, 전후의 사상사적 궤적, 여성, 노동, 포스트콜로니얼 등을 주제로 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모리사키 연구에서는 다뤄진 적이 없는 식민지근대도시의 공간표상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특히, 그녀의 자전적인 삶을 그린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대구’라는 근대도시가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2. 모리사키 문학과 연구동향

모리사키 가즈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재조일본인 2세로서 패전 이후에는 일본의 규슈 지역 탄광촌에서 생활하며 활동한 작가이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난 모리사키는 “자신의 원형은 조선이 만들었다” 말할 만큼 성장기의 대부분(17년)을 조선에 보냈다.

교사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대구-경주-김천으로 이동하며 생활한그녀는 조선을 자신의 원향이라 여겼지만, 전후 실향민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나의 생활이 그대로 침략이었다” 는 깨달음과 함께 평생 ‘식민 2세2)’로서 조선에 대한 원죄의식을 가진 채 살았다.

2) 松井理恵는 모리사키 가즈에게 있어 ‘식민2세’라는 자칭은 『경주』의 집필을 전후로 해서 사용된 용어로서 그 이전에는 ‘식민지의 일본계(日系) 2세’나 ‘식민자2세’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植民地朝鮮とは何か:森崎和江『慶州は母の呼び声』をテキストとして" 理論と動態 11 (2018): 93 참조.

그러한 그녀의 원죄의식은 그녀의 사상적 근간이자문학적 자양분이 되어 그녀의 글쓰기를 추동해 왔다.

1950년 마루야마 유타가(丸山豊)가 주재하는 시 잡지 『모음(母音)』의 동인으로작가생활을 시작한 모리사키는 시 이외에도 에세이, 산문, 라디오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의 집필활동을 이어왔다.

그녀가 주로 다룬주제는 일본의 탄광사와 노동문제를 비롯해 식민지, 여성, 천황제, 내셔널리즘, 환경, 생명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그 근원에는 ‘식민 2세’라는 그녀의 원죄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의도하지 않게 가해자의 삶을 산 그녀는전후 식민 2세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듯 언제나 사회적 약자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일본의 식민지주의와 그것과 연동되는주제들에 천착해 왔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암흑-여자 광부에게전해들은 이야기』(1961), 『비소유의 소유』(1963), 『제3의 성』(1965), 『투쟁과 에로스』(1963), 『이족(異族)의 원기(原基)』(1971), 『나락의 신들』(1974), 『가라유키상』(1976) 등이 있다.

여자 광부와 여성의 성(性)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눈에 띄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성에 주목하고 있어모리사키는 일본의 선구적인 페미니스트로도 알려져 있다.

한편, 조선에 대한 원죄의식이 강했던 그녀는 조선과 한국에 관한 책도 많이 집필했다.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경주』를 비롯해 『메아리치는 산하 속으로-한국 기행 85년 봄』, 『두 가지언어, 두 가지 마음-어느 식민지 일본인 2세의 패전 후』(1995), 『사랑하는 건 기다리는 거야-21세기에 보내는 메시지』(1999),『풀밭 위의 무도(舞蹈)-일본과 조선반도 사이에 살며』(2007)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리사키의 문학세계는 일본의 문단 내에서는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어 오랫동안 문학적인 평가보다는 여성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자주 다뤄져 왔다.

그런데 2,000년에 들어와서는 재조일본인이 연구 주제로 관심을 끌면서 모리사키에 대한 재평가도이루어져 그녀의 대표작들을 엮은 전집이 제작되는 등, 국내외에서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국내 학자들의 연구 동향을 보면, 송혜경(2018)이 식민지기 재조일본인 2세로서 그녀의 조선체험과 식민지주의를 검토한 후, 재조일본인 2세의 보편적인 인식으로 수렴되지 않는 모리사키 만의 사상적 특수성에 대해 고찰했고, 신승모(2019)는 식민자 여성으로서의 식민지 체험과 기억 및 시(詩) 작품과 전후 활동을 토대로 그녀의 정체성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대해 고찰했다.

강문희(2020)는 1968년 모리사키 가즈에의 한국방문의 계기3)가 된 그녀의 부친 모리사키 구라지(森崎庫次)에 대한 한국자료를 활용하여, 모리사키와 그녀가 만난 한국인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에 대해 연구를 했고, 정호석(2021)은 모리사키의 조선/한국에 대한 사유는 1968년에 모리사키가 한국을 방문하여 만난 어릴적 유모4)와의 재회를 통해 본격화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그녀의 여행기라는 서사구조와 문체의 특징을 다루었다.

3) 모리사키는 경주중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경주중고등학교 개교30주년 기념식에 초대받았다. 패전 이후 그녀의 첫 한국방문이었다.

4) 모리사키의 작품에서는 조선에서 생활할 때 교류한 여성들을 ‘오모니’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특히 어린 시절 대구에서 생활할 때 자신의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며 돌봐주던 조선인 언니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1968년 첫 한국방문 때 그녀와 재회를 했는데, 정호석은 그녀를 모리사키가 말하는 ‘오모니’의표상으로 보고 있다.

오미정(2021)은 1968년 전후의 한일 양국의 상황과 부친이 초대교장으로 있었던 경주중학교 한국동창회 자료를 조사하여 모리사키의 식민지 경험에 대한기술과 대조 고찰하는 방식으로 모리사키의 한국방문이 그녀의 사상사적 궤적에 어떠한 문제로 연속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이처럼 선행연구의 대부분은 모리사키의 식민지 체험과 1968년에있었던 그녀의 한국방문이 그녀의 사상사적 궤적에 끼친 영향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에서는 그녀의 식민지체험을 다루면서도 조선체험의 원풍경이라 할 수 있는 ‘대구’의 공간표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선행연구와는 조금 관점을 달리 해서 모리사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그녀 자신의 “원형”을 만든 곳이기도 한 대구를 어떻게 표상하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3. 근대도시 대구의 도시경관과 모리사키의 기억

2020년 필자는 사회학 연구자인 마쓰이 리에와 공역으로 『경주』를 출판사 글항아리를 통해 출간했다.

이후 이 번역서에 대해 다양한 서평이 나왔는데, 그 중 국제생활연구소의 최영호가 쓴 서평(2021)에 눈길이 갔다. 최영호는 이 서평에서 『경주』를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의 자서전과 같은 소설5)”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필자는 우선 이 작품이 소설로 평가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싶다.

5) "〈서평〉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글항아리, 2020년." 한일민족문제학회 40 (2021): 310.

이 작품은 형식상 일견 소설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회고록으로 봐야 한다는 점을 우선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모리사키가 “식민지 체험을 적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되돌릴수 없는 역사의 일회성이 마음에 걸려 후세를 위한 증언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가급적 신변 자료만을, 그것도 당시에 한정하여, 다시 읽으며 썼다6)” 언급하고 있듯이 그녀는 회고록이라 해도 사료를 기반으로 하는 글쓰기를 주로 했다.

6) 森崎和江コレクション1産土, 藤原書店 (2008): 52.

또한 이 작품에서는『마이니치신문』지방판에 기고한 ‘나의 원향’이라는 글을 후기로대신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인데, 원체험인 조선-예전의 식민지 조선-을 직접 거론하기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그리고 그것은 원체험 그 자체를거론한다기보다도, 필터를 끼운 사진처럼, 패전을 계기로 내 마음이되돌아본 식민지 조선이었다.” (p.283)라고 적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모리사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함과 동시에 전후 그녀가 조사해온 책 위의 역사를 통해 알아낸 사실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식민지 체험을 묘사하고 있는데, 『경주』는 제목과는 달리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의 절반 이상을그녀가 나고 자란 도시인 ‘대구’를 묘사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특히1, 2장은 경주로 이사 가기 전의 대구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 있어어린 가즈에의 시선을 통해 식민지 시기 대구의 도시경관과 일본인들의 미시적인 일상사, 그리고 조선인과 일본인 이외에도 다양한국적의 사람들이 혼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3.1 ‘다이큐’라고 불린 도시

모리사키 가즈에는 『경주』의 서문에서 ‘대구’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私は植民地であった頃の朝鮮慶尚北道大邱 たいきゅう府三笠町で生まれた。(中略)わたしが生まれた大邱は今日の韓国の、慶尚北道大邱 テ-グ 市である。町名の三笠町というのは植民者である日本人が名付けたのだと思う。旧市街の中の日本人住宅の一角であり、わたしはここに産院を開いていた日本人医師の産室で助産婦によってとりあげられた。三笠町という町名が生まれ、消え去っ たように、他民族を侵しつつ暮らした日本人町は、いや、わたしの過ぎし日の町は今は地上にない。

나는 식민지 시절 조선 경상북도 大邱 たいきゅう부 삼립정(미카사마치)에서태어났다. (중략) 내가 태어난 대구는 오늘날의 한국 경상북도大邱 テ-グ 시다. 동네 이름인 삼립정은 일본인이 지었을 것이다. 구시가지안의 일본인 주택지의 일각으로, 여기에 산과의원을 차렸던 일본인의사의 산실에서 조산사가 나를 받았다. 삼립정이라는 동네이름이생겼다가 사라진 것처럼 타민족을 침범하며 살았던 일본인 동네는, 아니, 지난날의 나의 동네는 지금은 지상에 없다.7) pp.22-23

『경주』의 서문은 모리사키가 1968년 7월『아시아여성교류사연구』(3호)에 「나의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의 일부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나의 얼굴」에서는 “나는 조선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에서 태어났다8)”라고 표현한 문장을 『경주』에서는 “나는 식민지였던 시절의 조선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에서 태어났다”라고 기술하여 이 작품이 식민지 시기의 대구를 묘사하고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7) 이 인용문의 일본어 원문은 1984년 발표 당시의 일본어 표기 방식을 확인하기위해 신쵸샤(新潮社)판『경주』를 참고로 했다.

8) 森崎和江コレクションー精神史の旅1産土, 藤原書店 (2008): 77.

또 ‘삼립정(三笠町)’은 “구시가지 안의 일본인 주택지"로 동명도 일본인이 지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자신의원향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있는데, “삼립정이라는 동네이름이 생겼다가 사라진 것처럼” 자신을 비롯한 일본인이 “타민족을 침범하며 살았던 일본인 동네는”, “지금은 지상에 없다”라는 표현을 통해식민 2세라는 자기정체성과 원죄의식, 실향민이라는 자각을 드러냄과 동시에 해방 후 식민자들이 사라진 도시 대구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구를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

모리사키의 이러한의도된 글쓰기는 단순히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여 그 시절을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땅을 빼앗고 지명까지 빼앗아 성립된 일본인의 삶을 직시9)”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원향인〈조선 경상북도 대구부〉에는 대구(大邱)라는 한자 위에 히라가나로 ‘다이큐’라는 음독표기를 달고, 〈오늘날의 한국 경상북도 대구시〉에는 대구라는 한자에 가타가나로 ‘대구’라는 음독표기를 달고 있는 점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고안된 표기방식이라 할 수있다.

실제로 식민지 시기 대구는 일본인들에게 ‘다이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04년에서 1910년 무렵의 대구를 기록한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 1879-1931)의『대구물어(大邱物語)』10)를 보면, 모리사키가 대구를 ‘다이큐’라고 표기한 배경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9) 한국어판『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글항아리, (2020): 16. 이하 본문 인용은 페이지 숫자만 기재한다.

10)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는 오이타현 오이타시 출신으로 1907년 5월 대구로 건너와 무역과 담배 제조업을 하다가 점차 대구지역 신문 발행에 관여한 인물이다. 1907년『大邱日日新聞』후원을 시작으로 1909년『大邱新聞』사장과 1913년부터 사망 당시까지『朝鮮民報』의 사장을 역임했다. 『대구물어』는 사망 전해인 1930년에 집필한 책이다.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읽고 한국어로는 ‘대구’라고 하는데 어느새 일본인들 사이에서 ‘다이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한국인들도 그것을 따라서 ‘다이코’라고 부르기도 했다. 1905년 1월 1일, 철도회사에서 ‘다이큐たいきう’라고 역명을 적은 푯말을 세웠으나 우리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다이코’라고 발음했다. 그러다가 점점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대구를 ‘다이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다이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서 좀처럼 통일되지 않았다. 원래 ‘다이큐’ 라는 정확한 발음이 있는데 구태여 잘못된 발음인 ‘다이코’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며 서로 경계하여 ‘다이큐’라는 정확한 발음으로 통일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11)

11) 영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근대사료번역팀.『대구물어』 영남대학교 출판부 (2022): 52. 12) 森崎和江.「海峡を越えて」『月刊 機』205,藤原書店 (2009): 14-15. 26

『대구물어(大邱物語)』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식민지시기의 일본인들은 모리사키의 기억처럼 대구를 한국어 발음이 아닌 일본식 발음으로 불렀다.

모리사키는 이러한 식민지주의의 침략성을 지명이나 동명에서부터 구체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어린시절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모리사키는『森崎和江コレッション:精神史の旅 1-5』(藤原書店,2008-2009)가 완간되었을 때, 그녀 스스로 이를 “식민 2세의 비뚤어진 원죄의식을 정정하고자 고뇌하면서 살아온 나의 족적”12)이라고 밝힌 바 있다.

12) 森崎和江.「海峡を越えて」『月刊 機』205,藤原書店 (2009): 14-15.

그녀의 정신사 여행에서 ‘대구’는 조선에 대한 기억의 원점이자 식민 2세로서의 자신의정체성을 확인하는 여정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3.2 ‘신시가지’라 불린 일본인 거주 지역

모리사키의 조선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고향인대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경주』에서는 소학교 5년 무렵 경주로 이사 가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과 경주소학교 졸업 후 1940 년에 다시 대구고등여학교로 진학하여 하숙생활을 하던 시절의 대구풍경이 주로 묘사되고 있다.

장소적으로는 어린 가즈에가 부모님과 집 주변을 산책을 하거나 그녀가 다닌 봉산정소학교를 등·하교하면서 목격하는 주변 풍경,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대구역 주변 번화가로 외출했을 때의 기억 등을 통해 당시의 대구 시가지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모리사키의 가족이 대구에서 주로 생활한 지역은 그녀가 태어난 곳인 삼립정과 그녀 스스로 자신의 “기억이 시작되는 곳”라고 표현한 대봉정 일대이다.

대봉정은 대구의 남쪽지역으로 보병 80연대와 대구중학교가 있는 주변 일대이다.

4, 5살 먹은 어린 가즈에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주변 일대를 산책하거나 누군가에게 업혀 길가에서 파는 군고구마를 얻어먹었던 기억이있는 곳으로 이 지역에는 아버지의 근무지인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와 그녀의 가족이 살았던 집이 위치한 장교관사가 있었다.

장교관사는 육군 보병 80연대 소속 장교들을 위해 마련된 곳으로, 『경주』에서는 모리사키의 집을 비롯한 민가 3채도 그 주변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삼립정과 마찬가지로 대봉정 일대도 식민지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새로 개척된 일본인 거주지인 것이다.

대구는읍성이 해체(1906년-1907년)되기 전까지는 읍성 안의 관아지역을비롯하여 남문지역과 서문시장이 있는 서문 밖이 시가지의 중심이었다.

『대구부사(大邱府史)』나 『대구물어』와 같은 지역사 자료를 살펴보면 대구에 일본인 이주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무렵으로, 경부선 철도 속성공사가 계기가 되었다.

1906년 대구정거장(대구역)이 가설되자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대구거류민단을 조직하여 그 주변일대를 점유하기 시작했고, 1910 년 병합이후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면서부터는 대구역을 중심으로한 그 주변 일대가 더욱 개발되어 갔다.

이렇게 일본인 거주지역이점차 범위를 확장해감에 따라 조선인 거주 지역은 서서히 도시의주변부로 내몰리게 되어 대구읍성 남서쪽 지역은 조선인 거주 지역, 일본인들이 토지를 점유한 대구역을 위시한 읍성 북동쪽 지역은 근대화된 시설이 들어선 신시가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모리사키는 일본인들이 식민지 영토인 대구를 점유해가는 방식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경주』에서는 병합을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식민지 대구로 이주해 오게 된배경과 이주 이후 그들이 식민지의 도시공간을 어떻게 점유하며 생활했는지도 다음과 같이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구는 그 무렵부터 3대 시장 중 하나로, 경성·평양과 함께 상업의중심지였다. 일본인도 틀림없이 모이기 쉬웠을 것이다. 시내는 큰장이 서는데 서문시장이라고 했다. 조선 인삼을 비롯한 약초시장은 전통이 오래됐는데, 청나라와 에도시대의 일본과도 쓰시마번을 거쳐 교역을 했다. 식민지시대에도 서문시장은 북적거렸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시장에서는 장사를 하지 않고, 시가지를만들었는데, 순식간에 성벽도 철거되어 신시가지가 펼쳐졌다. 신사도 세워졌다. 절도 생겼다. 제80보병연대, 헌병대가 설치되었다. 도청 외에 인접한 달성군의 군청도 설치됐다. 지방법원, 복심법원이재판을 관장하고 경찰서가 설치되고 상공회의소, 미곡거래소, 원잠종제조소, 제사공장, 잠업감독소 등이 속속 생겼다. pp.46-48

상기 인용문의 내용은 전후 모리사키 자신이 책 위의 역사를 통해 사후적으로 확인한 내용으로 추정되는데, 신시가지에 대한 내용은『대구부사』를 비롯한 식민지 시기 대구에서 생활한 재조일본인들의 기록13)이나 모리사키 가즈에와 비슷한 시기에 대구에 살았던 스기야마 토미(杉山とみ)의 구술14)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바이다. 15)

13) 三輪如鐵『朝鮮大邱一班』(1911), 河井朝雄『大邱物語』(1930) 등

14) 21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한국민중구술열전 47 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 눈빛출판사 (2011).

15) 1904년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이후 대구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당시 관찰사인 박중양을 부추겨 대구읍성을 파괴하고 대구역 주변을 중심으로 신시가지를개발하여 자신들의 거주 공간을 확장해 갔다. 달성공원에는 대구신사가 세워졌고, 원정(元町)이라 불린 지금의 북성로 일대에는 동본원사와 서본원사와 같은일본 사찰도 들어왔다. 대봉정 일대에는 보병 제 80연대가 들어왔고, 삼립정 일대에는 지방법원과 복심법원 및 조선총독부 관할 자혜병원(도립병원)등이 들어서며 고급관료들이 생활하는 관청가를 형성해 갔다.

한편, 모리사키는 초기 일본인 이주자의 대부분이 상업에 의존하고 있어서 대구가 조선에서도 이름 있는 서문시장, 약령시 등이 있는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이주하기에 쉬웠을 것이라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경주』에서는 1905년 후쿠오카 일일신문(福岡日日新聞)의 정도잡신(征途雜信)란에 게재된 ‘전도유망한 대구’ 라는 기사를 소개하며 일본이 병합 이전부터 이미 자국민들을 대구를 비롯한 조선 각지에 이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음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났을 무렵인 1930년대에는 이미 대구에서 생활하던 대부분의 일본인 식민자들이 근대화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은 합방 후 20년이 가까웠다. 도시는 정돈되고주택지도 한적하여 아이들이 급격한 변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 하에 놓여 있었다. 사과 과수원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공원은 잔디가 덮여 있었고, 아이들은 운동장과 수영장에서 놀았다. 골프장도 있고, 수도, 전기, 전화 등으로 근대화된 생활을 대부분의 일본인이 누리고 있었다. (pp.47-48)

이에 여기서는 모리사키가 『경주』에서 언급하는 일본인 거주지역에 대한 가시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에 발행된 지도를 통해 어린 가즈에의 행동반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927년생인 모리사키는 자신의 기억의 시작을 4, 5살 무렵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경주로 이사 가기 전까지의 대구풍경은 대략 1930년 전후를 배경으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슷한 시기인 1935년에 대구부가발행한 대구부 전도를 참고하고자 한다.

그림1. 1935년 대구부 전도16)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16)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신택리지” 도서출판 북랜드 (2007), 수록,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그림1의 대구부 전도를 보면 당시의 대구부의 규모를 유추해 볼수 있는데 모리사키가 태어난 동네인 삼립정(1)은 그녀가 다닌 봉산정소학교(2)와 인접해 있던 지역으로 주변에는 대구형무소(3)와도립병원(5), 법원 관사(4) 등이 위치해 있다.

대구형무소는 어린 가즈에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본 조선인 죄수들이 수감되어 있던곳이고, 대봉정은 대구부의 남쪽지역으로 모리사키의 아버지가 근무한 대구고등보통학교(13)와 일본군 보병 80년대(16), 인접한 대구중학교(15)가 있던 곳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그녀의 집이 있었던 장교 관사(9)와 가즈에가 어린 동생들과 함께 뛰놀던 대봉배수지(14), 그녀가 하굣길에 친구들과 함께 견학 간 가다쿠라제사공장(8), 대구부내 소학교 스케치 대회가 열렸던 월견산(7)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모리사키가『경주』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요 장소들을 살펴보면 1935년 대구부 전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형지물과 거의 흡사한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림2.는 1924년 대구교통지도인데 대구정거장(대구역) 앞쪽 십자도로 바깥부분의 화살표로 표기된 동서남북도로가 대구읍성이 있었던 자리이다.

대구역을 중심으로 하여 이읍성이 있던 지역을 일본인들이 점차 점유해 가면서 그 주변 일대가 신시가지가 되었고,『경주』에서 묘사되는 버스가 다니는 길은대구역에서 보병 제80연대 앞으로 뻗어있는 길로 추정된다.

그림2. 1924년 대구교통지도17)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17) 위와 동일.

한편, 『경주』에서는 당시 대구가 “80연대가 있는 고장, 사과 과수원이 있는 고장”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는데, 80연대로 표상되는 군사도시로서의 이미지와 사과의 고장이라는 도시적인 특징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대구라는 도시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대구의 시가지 남쪽이 일본인들의 주거지역으로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1916년 4월 보병 제80연대와 같은 군사시설이 들어옴으로써 군인 가족들이 대구로 이주해 왔고 그에 따른 주거공간과 학교 등이 이 일대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모리사키가기억하는 육군관사 주변과 대구중학교, 봉산정소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소위 지배층 자제가 많이 통학하는 대구 봉산정공립심상소학교는 대구 구시가지와 그 남쪽에 생긴 주택지역의 접점 부근에세워져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 말한 지역은 모두 봉산정소학교 이남의 신개척지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일대는 일본인 거주 지역 중에서도 소위 지배층이 많이 거주했던 곳으로 보인다.

주로 “군인, 관리, 사법관계자, 의사, 상점 사장(p.86)”등이 그들이다.

제3소학교로 불렸던 봉산정소학교는 “제1·2소학교 아이들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월급쟁이 가정이 중심인지라 미곡상이나 금융업 등에서는 보이는 분방함도 없다”(p.90)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 거주지역도 지역별로 직업군이 달랐음을 엿볼 수 있다.18)

18) 식민지시기 대구에서 제1·2소학교라고 불린 일본인 소학교는 각각 구 읍성 안쪽지역인 동성정과 본정에 위치해 있었다. 동성정은 대구역 앞쪽에서 구 대구읍성의 동문이 있던 주변일대를 말하고, 본정은 경상감영에서 서문 방향으로 향하는주변 일대를 말한다. 1906년 대구정거장이 생긴 이후 이 주변 일대에는 철도관사를 비롯해,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 식당, 미곡상, 은행 등과 같은 상업시설이많이 들어섰다. 그래서 제1·2소학교는 이들 상인이나 금융업을 하는 일본인의 자녀가 많이 다녔다. 대구신사가 있는 달성공원은 제2소학교라 불린 본정소학교가위치상 가장 가까웠고, 그 다음은 동성정에 있던 제1소학교가 모리사키가 다닌봉상정소학교(제3소학교)보다 가까웠다. 모리사키가 태어난 삼립정과 대봉정 일대는 대구역 주변 일대보다는 늦게 개발된 지역으로 복심법원, 지방법원, 형무소, 도립병원, 사범학교, 대구상업학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가다쿠라제사공장, 보병 80연대 등이 위치해 있어 관료나 의사, 군인, 교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모리사키가 기억하는 보병 제80연대와 대구중학교 부지는 해방 이후 미군부대(캠프 헨리)가 들어와 지금도 군사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또 봉산정소학교와 대구사범학교 등은 지금도 여전히 학교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으며 사과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도1990년대 초반까지 여전히 이어져온 대구의 도시 이미지라는 점은주지의 사실이다.

3.3 ‘혼종성’과 ‘이질성’을 발견하는 도시

모리사키는 『경주』에서 자신의 원향인 ‘대구’를 일본인 식민자들의 ‘일상화된 침략’을 표상하는 공간이자 식민지 도시 특유의 ‘혼종성’ 과 ‘이질성’을 발견(p.285)하는 공간으로도 묘사하고 있다.

모리사키는 당시 대구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이외에도, 중국인과 서양인, 러시아인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식민 2세인 자신에게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일상적으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꽃이 여러 종류 같이 피듯 자연스러운 일(p.42)”처럼 받아들여졌다고 고백한다.

당시 대구의 시가지 구조는 1904년 경부선 철도공사 이후 조성된 대구역 일대의 신시가지 및 남쪽 일대의 일본인 거주지역과 구시가지인 약령시와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대구읍성 밖 조선인 거주지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도시의 이중구조 안에서 다국적사람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모습과 이중 언어, 부영버스가 다니는도로와 골목길 풍경, 근대식 교육을 하는 학교와 군대, 달성공원과 대구신사, 가다쿠라 제사공장, 향교, 사과과수원 등과 같은 대구의 주요 장소는 식민지 도시 특유의 이질성과 혼종성을 표상하는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어린 가즈에가 ‘네야’라고 부르며 따랐던 조선인 가정부 언니를 통해 경험한 널뛰기와 조선의 전통 혼례, 무당집, 그리고 문둥이가 사람을 낚아채 간다는 보리밭, 부모님과 산책하며 목격한 신천 너머 조선인 마을에서 쾌지나칭칭나네의 가락에 맞춰 춤추는 조선인들의 모습 등은 모리사키에게 있어 고향의원풍경으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나의 원형은 조선이 만들었다. 조선의 마음, 조선의 풍물과 풍습, 조선의 자연이”(p.19),

“나는 조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애였다. 같은 자연조건에 둘러싸여 그것을 함께 받아들이며 자연의 미묘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을 키웠다”(p.284)

와 같은 표현에서 나오는 조선은 어쩌면 대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경주』후기에 나오는 “나라는 어린아이의 마음에 비친 조선은 오모니의 세계였을 것이다.

개인의 가정이라는 것은 넓은 세상속에 피는 꽃과 같은 것으로 세상은 하늘과 나무와 바람 외에 많은조선인이 살며 일본인과 뒤섞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느꼈던 나는 늘 생면부지의 오모니들이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 정도로 조선 어머니들의 정감은 아주 자연스럽게대지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던 오모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돈을 손에 쥐어주려고 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아직 젊던 어머니의 기모노 옷소매에 숨곤 했다” (p.284)

라는 기억도 대부분 어린 시절 대구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성장해 감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이질감과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나의 생활과 조선 사람들의 생활은무서우리만치 차이가 있었다. 생활뿐만 아니다. 말이나 생활습관, 정치적 입장이나 민족의식 등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리가 있었다”(p.284)

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생활과 조선인들의 생활에 대한 이질감이다.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어린 가즈에가 방과 후 친구들과 견학을 간 가다쿠라 제사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또래의 조선인 여자아이를 목격한 후에 느꼈던 감정의 동요가 그것이다.

그 날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모두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 어린 가즈에는 자신의 일상이 조선인의 그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지에서전학 온 학우의 부모님이 가다쿠라제사 공장에서 근무한다는 얘기를 듣고 경계하는 마음으로 내지의 어른들의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은 보리피리의 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사후적인 깨달음이지만, 조선인 아이들과 달리 자신이 쌀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 것은 농사와 같은 땀 흘리는 노동은 모두 조선인의 몫이었고 일본인은 그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일상적으로 남을 ‘침범’하며 살았던 식민 2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차 상기하고 있다.

이처럼 모리사키에게 있어 대구는 자신의원형을 만들고 자신의 기본적인 미감을 길러준 장소이면서도 조선인의 삶과 자신의 삶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이질감을 처음으로 자각시킨 곳이다.

또 대구는 모리사키에게 자신을 키워준 ‘오모니의 세계’인 동시에자신에게 성적인 모욕을 주는 조선인 사내아이들이 살았던 고장이다.

『경주』의 서장에서 자신의 원형을 만든 조선과 조선인과의 관계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대응도식” 만으로는 다 설명할수 없다는 점을 언급한 것처럼 모리사키 자신은 식민 2세로서 타민족에 대한 ‘침범’과 ‘연대’19)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한편으로 그녀자신도 피해자였다는 인식도 나타내고 있다.

첫째로는 조선인 사내아이들에게서 느낀 성적인 모욕이다.

모리사키는 그것을 “강간의시선”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러한 강간의 시선은 경주에서는 느끼지않았음을 고백하며 상인의 도시인 대구와는 달리 경주는 양반의 도시로서의 기품을 가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두 번째는 봉산정소학교시절, 모리사키 아버지의 ‘자유방임’의 가정교육 방침을 전해들은 여교사의 노골적인 이지메의 기억이다.

같은 일본인들끼리도 길항하는 모습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러한 동족간의 길항관계로 인한 피해자로서의 기억이 전후 그녀가 피식민자나 가라유키상20)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삶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자세를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19) 松井理恵."植民地朝鮮とは何か:森崎和江『慶州は母の呼び声』をテキストとして" 理論と 動態 11 (2018): 94-95.

20) 19세기 후반 해외로 나가 매춘활동을 한 여성을 말한다. 규슈지역인 시마바라와아마쿠사의 가난한 농어촌 출신여성들이 많았다. 모리사키는 「‘가라유키상’-어느 가라유키상의 생애」(다니가와 겐이치(谷川健一)『다큐멘터리 일본인 5 기민(棄民)』수록)라는 에세이를 비롯하여 자료조사에만 4, 5년이 걸렸다고 하는논픽션 소설『가라유키상』(1976)를 발표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졸고「문옥주 증언 서사에 등장하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일고찰」(『문화융합 시대의지역사회: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의 증언과 지역』문화와 융합총서 09, 한국문화사, 2023)참조 바람.

이러한 식민지 체험에 있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인식은 모리사키 문학에 나타난 독특한 시각이라 할 수 있는데 마쓰이 리에는 이를 페미니즘 연구에서주로 언급되는 교차성(intersectionalty)개념을 통해 분석한 바 있다.21)

21) 松井理恵. "方法としての「朝鮮」:森崎和江におけるインターセクショナリティ" 部落解放研究:広島部落解放研究所27号 (2020): 93-115.

모리사키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자연이나 풍토적인 환경에는익숙했지만 성장해 가면서 주변 조선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점차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내면적으로는 이방인으로서의 불안감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 자신은 식민 2세로서 제국의 신민이었지만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타인을 압박할 수 있는 처지는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식민지를 다룬여타의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특유의 시각이다.

인간의 사유방식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귀중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리사키 가즈에 특유의 사유방식은 독자들에게도 식민지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는 동시에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작가와의 공감대를 확대시켜주는 측면도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이 갖는 가장 큰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근대도시 대구는 1904년 경부선 철도공사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새로운 시가지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대구역을 비롯한 주변도로의 폭이나 가옥, 주요 관공서, 도시의 경관 등은현재도 옛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경주』에 등장하는주요 거점 장소를『대구부사』나 『대구물어』와 같은 식민지 시기 재조일본인의 기록이나 스기야마 토미의 구술자료, 당시에 출판된지도 등과 비교해 보면, 도시공간에 대한 모리사키의 기억은 지역사 자료로서 거의 손색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경주』를 문학작품으로서만 평가하기 보다는 향토사 자료로서의 읽기도 가능한 작품으로 텍스트의 기능을 확장해 가고 싶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리사키는 식민지 대구는 다이큐로, 전후의 대구는 한국발음 그대로 표기하며 식민 2세로서 생활한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자 했다.

본고에서는 모리사키 자신과 그 가족의 서사를 통해 대구역을 비롯한 삼립정과 그 인접지역인 대봉정이 신시가지로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는 점과 구 시가지인 조선인 거주지역은 신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점차 주변화되어 전근대적인 공간으로 풍경화되어 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봉정 일대는 보병 80연대와 사과 과수원, 가다구라제사공장 등이 위치하고 있어 대구의 현재적 도시 이미지 형성에 많은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 함께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은 일본인 식민자들의 ‘일상화된 침략’ 을 표상하는 공간이자 모리사키 자신에게는 식민지의 혼종성과 이질성을 발견하는 공간이었다는 점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리사키에게 ‘대구’는 조선에 대한 기억의 원점으로서 식민 2세로서의 ‘비뚤어진 원죄의식을 잠재우기 위한’ 정신사 여행의 출발점인 동시에 자신의 기본적인 미감을 길러준 ‘오모니’들의 세계이며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기억도 동시에 상기시키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모리사키가 대구가 아닌 경주를 원향이라 칭하는 것도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이 그의 원향의식에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후속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 참고문헌 ▶

박승주·마쓰이 리에.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서울: 글항아리 (2020): 1-295. 송혜경. "식민지기 재조일본인 2세 여성의 조선체험과 식민지주의: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를 중심으로." 日本思想 35 (2018): 233-255. 신승모. "식민자 2세 여성의 문학과 정신사: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79 (2019): 125-143.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신택리지” 도서출판 북랜드 (2007). 영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근대사료번역팀. 대구물어. 영남대학교 출판부 (2022): 52. 21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한국민중구술열전 47 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 눈빛출판사 (2011): 1-320. 정호석. " ‘오모니’를 만나는 여행: 모리사키 가즈에의 여행기 읽기." 인문논총 78.3 (2021): 283-321. 최범순 옮김. 조선대구일반, 영남대학교 인문학 육성총서 14, 영남대학교출판부(2016): 1-323. 최영호. "〈서평〉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글항아리, 2020년." 한일민족문제학회 40 (2021): 309-331. 松井理恵. "植民地朝鮮とは何か:森崎和江『慶州は母の呼び声』をテキストとして" 理論と動態 11 (2018): 91-111. ________. "方法としての「朝鮮」:森崎和江におけるインターセクショナリティ" 部落解放研究: 広島部落解放研究所紀要27 (2020): 93-115. 森崎和江. 慶州は母の呼び声:わが原郷、新潮社 (1984): 1-226. ________. "海峡を越えて" 月刊 機. 205,藤原書店 (2009): 14-15. ________. "わたしのかお"森崎和江コレクションー精神史の旅1産土. 藤原書店 (2008): 77-88.

< 要 旨 >

本稿は、森崎和江の『慶州は母の呼び声:わが原郷』(以下、『慶州』)における植民 地近代都市「大邱」がどのように表象されか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慶州』の中で描かれて いる大邱の主要場所は日本人居住地域として植民地時期に新市街地として造成されたところで ある。『大邱府史』や『大邱物語』のような植民地時代の在朝日本人の記録や杉山とみの 口述資料、当時出版された地図などと比べてみると、都市空間に対する森崎の記憶は地域史 の資料としても遜色がないように見える。したがって、大邱の都市史的な観点から見ると『慶 州』は大邱の近代的都市景観の形成過程だけでなく、在朝日本人のミクロな日常事を同時に 窺うことができる貴重な資料だと思える。したがって、この作品を「文学作品」としての評価だけ ではなく、記憶の歴史として大邱地域の郷土史の資料としての読みも出来る作品として、テキスト の機能を拡張していきたい。 一方、森崎は植民地時期の大邱と戦後の大邱をそれぞれ「たいきゅう」と「テグ」というル ビをつけて表記している。それは植民地大邱が日本人植民者たちの「日常化した侵略」を表 象する装置として作用している。また大邱は植民地の混種性と異質性を発見する空間として森崎 自身にとっては朝鮮に対する記憶の原点であり、植民二世としての「ねじられた原罪意識を葬る ための」精神史の旅の出発点であると言えよう。そして、本稿では森崎にとって大邱は彼女自 身の基本的な美感を育ててくれた「オモニ」たちの世界であるとともに、加害者でありながら被害 者としての記憶も同時に思い起こさせるところであったことも確認できた。

< Abstract >

The study aim was to examine the representation of Daegu as a modern colonial city in Kazue Morisaki’s ”Gyeongju is the Sound of My Mother: My Home” (hereafter, “Gyeongju”).

The depiction of Daegu in ”Gyeongju” focuses primarily on Japanese residential areas establish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A comparison of Morisaki’s memories of urban spaces with colonial-era Japanese records and maps published at the time provides evidence that these recollections served as valuable resources for understanding both the formation of Daegu’s modern urban landscape and the daily lives of its residents. Thus, beyond merely appreciating this work as a literary piece, we intend to extend its function as a text that offers insight into the local history of the Daegu area as a history of memory. Morisaki describes colonial Daegu in ”Gyeongju“ as a space representing the “normalized invasion” by Japanese colonizers. Daegu is portrayed as a space in which the hybridity and heterogeneity of a colony can be discovered. For Morisaki, it is the origin of her memories of, the starting point of her psychological journey to confront the “distorted original guilt” from being a second-generation colonialist, the world of “ ” that nurtured her fundamental sense of aesthetics, and a reminder of her dual role as both perpetrator and victim.

주제어:모리사키 가즈에(Morisaaki kazue), 재조일본인(Japanese lived in Chosen), 식민 2세(Second Generation of Japanese Colonizer), 대구(Daegu), 공간표상(Spatial Representation)

논문접수일 : 2024. 01. 29 논문심사일 : 2024. 03. 03 게재확정일 : 2024. 03. 05

日本語文學 第100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