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서론
2. NATO의 탄생과 6 25전쟁 발발 이후 대응
3. 그리스, 터키의 NATO 가입문제와 6 25전쟁
4. NATO 확대의 과정
5. 결론
초 록
본 연구는 6·25전쟁이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이후 NATO)의 확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 이었으며, 특히 그리스와 터키를 중심으로 NATO의 확대가 이루어 진 과정을 연구한다.
NATO는 1949년 4월 4일 소련의 팽창을 저지 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NATO는 소련에 대하 여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에 따라 동맹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의 연구들 중에서는 6·25전쟁과 NATO의 관계 를 직접적으로 제기한 연구가 드물었다.
일부분 연관성이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당시 NATO의 인식변화의 배경으로서만 언급하였다.
따라 서 본 연구는 NATO의 창설부터 6·25전쟁 이후 NATO의 위협인식 과 변화, 그리고 그리스와 터키의 6·25전쟁 참전 이후 NATO의 확 대까지의 과정을 분석한다. 이를 위해 당시 NATO의 전략문서와 이 후 분석된 2차 사료들을 중점적으로 활용한다.
NATO는 6·25전쟁을 계기로 동맹의 확대를 고려하면서 중동과 지중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보다 더 동쪽으로의 확대를 위해 그리스와 터키의 회원국 가입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리스와 터키는 NATO에 가입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서 6·25전쟁에 참전 하였고, 결론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NATO회원국들은 1952년에 두 국가가 가입하는데 동의함으로써 동맹의 1차 확대가 이루어지게 되 었다.
6·25전쟁으로 인한 NATO의 확대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 진행 중 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약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NATO동맹의 확대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주제어 : 6·25전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그리스, 터키, 동맹
1. 서 론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이후 NATO)는 소련의 팽창과 유럽에서의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의 부활을 금지하고,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장려하기 위해 1949년 4월 4일 미국, 캐나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군사 방위조직이다.
창설당시 가입국은 12개국으로 각 국의 안보와 정치적 의도, 국제정세에 있어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가입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강력한 동맹이 탄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에 의한 전쟁 이 발생하자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이후 UN)에서는 이를 UN헌장 위반이자 UN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 미국 주도하 에 안보리의 소집이 이루어졌고 곧이어 UN회원국의 한국으로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비록 당시 북한의 남침이 곧 소련의 승인을 받은 침략이라는 것이 표면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전쟁의 발발은 소련이 단순한 정치적 전복수단 이외에 군사적 침략을 감행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강화시켰다.1)
이는 소련에 대 한 NATO의 인식을 변화시켰고 역설적으로 NATO를 강화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6·25전쟁은 NATO를 변화시켰다.
NATO는 소련의 팽창 위협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 고 또한 가능한 더 동쪽으로 NATO회원국을 방위해야 할 필요 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곧 NATO의 회원국 확대로 논의가 이어졌다.
동쪽으로 회원국을 확대함으로써 기존의 NATO회원국에게 는 일종의 추가적인 방어막이 형성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 국은 동지중해와 중동지역을 보다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바라보 게 되었다.2)
NATO회원국 확대의 대상은 그리스와 터키였다.
그리스와 터 키는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당시 공산화된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 둘러싸여 공산화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따라 서 이 두 국가도 NATO에 가입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두 국가는 NATO의 창설단계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의된 회원국의 조건인 지리·전략·정치적 측면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3)
그리스와 터키는 서유럽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창설당시 NATO조약 5조, 집단방위의 조건에 따라 두 국가를 가입시키는 데는 큰 부담이 있었다.
6·25전쟁의 발발은 그리스와 터키에게 NATO가입의 가능성 을 제공했다.
미국과 서유럽은 전쟁이 발발하자 두 국가를 새로 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리스와 터키는 6·25전쟁에 자 유진영으로 참전함으로써 서방국가들과의 이념적 동질성을 가지 고 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는 추후 NATO가입의 발판으로서 작용했다.
금까지 6·25전쟁이 NATO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드 물었다.
NATO는 6·25전쟁이 발발했던 당시인 1950년 6월에 는 설립 된지 약 1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특히 전쟁에 참전한 대부분의 유럽 및 서양 국가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NATO의 회 원국이었으나 UN의 소속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6·25전쟁에서 NATO에 관한 연구는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선행연구를 검토함에 있어
첫째, 국제체제 및 국제정치에 6·25전쟁이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둘째, 6·25전 쟁 참전국에 대한 연구,
셋째, 냉전기 NATO에 관한 연구를 중 점적으로 검토했다.
국제체제 및 국제정치에 6·25전쟁이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 로, 먼저 김학준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4)에서 미 국과 소련 중국, 일본에 대해서 국내외 정치적 영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영향력과 서양 동맹의 강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내용을 간략히 다루고 있으나 NATO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백종천은 <한국전쟁사 제 6권 한국전쟁의 영향>5)에서 6·25전쟁이 당 시 미국과 NATO로 하여금 어떠한 인식변화를 가져왔고, 그 인 식변화를 토대로 NATO의 군비증강을 초래했다는 내용을 간략 히 다루고 있으나 집적적인 NATO 확대의 계기는 언급하지 않 았다.
6·25전쟁 참전국에 대한 연구로 먼저 국방군사연구소의 <UN군지원사>6)는 각 참전국들의 참전 경위와 육·해·공군의 활동, 주요 작전, 참전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참전 경위와 참전 결과로는 피해현황 등 정량적인 수치를 위주로 제 시하고 있어, 각 국가가 참전하게 된 정치적 의도와 NATO의 시선으로는 각 국가를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또한 김진우는 “6·25전쟁기 터키군 참전에 관한 연구 - 참전 동기와 군우리 전투를 중심으로”7)를 통해 터키가 NATO에 가입하기 위해 참전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오로지 터키의 관점에 서만 참전경위를 설명하고 있고 반대로 NATO의 관점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았다.
NATO와 6·25전쟁에 대한 연구로 이수형은 <북대서양조약기 구(NATO) 이론·역사·쟁점>8)에서 그리스와 터키가 1952년 NATO에 가입하면서 NATO가 확대되었던 근거를 당시 냉전의 격화와 그에 따른 대서양동맹의 조직화로 인식하였으며 지정학 적·전략적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NATO와 6·25전쟁의 직접적인 연관성과 6·25전쟁에 참전한 그리스와 터키의 NATO가입에 대한 각 국가별 의도는 다루지 않았다.
선행연구 검토결과, 지금까지는 6·25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 한 UN과 주요 강대국을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6·25전쟁과 NATO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제 기한 연구는 드물었으며, 일부분 연관성이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NATO의 인식변화의 배경으로서만 언급하였다.
이는 6·25전쟁이 한반도에만 국한된 전쟁이 아님을 감안할 때, 당시 국제사회와 NATO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다소 부족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는 NATO의 6·25전쟁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NATO 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으며, 특히 그리스와 터키를 중심으로 NATO의 확대가 이루어진 과정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를 통해 당시 국제사회의 위협인식과 대응을 이해하고, 최근 지 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NATO의 위협인식과 확대를 이해하는데 그 배경으로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문헌 분석의 방법을 사용한다.
1차 사료로는 NATO창설 당시 최초의 전략개념인 “The Strategic Concept for the Defense of the North Atlantic Area(DC 6/1)”9)를 통해 첫 번째 전략으로 볼 수 있는 ‘전진방위전략(the strategy of forward defense)’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위협의 인식에 대한 NATO의 전략을 확인한다.
2차 사료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이론·역사·쟁점>,<한국전쟁사 제6권 한국전쟁의 영 향>,<UN군지원사>“6·25전쟁기 터키군 참전에 관한 연구 - 참전 동기와 군우리 전투를 중심으로”, “NATO and the Korean War”, “Greece, Turkey, and N.A.T.O.”, “NATO Enlargement During the Cold War”를 통해 6·25전쟁이 국 제사회에 미친 영향과 6·25전쟁 참전국, NATO에 대해 확인한 다.
연구의 시간적 범위로는 6·25전쟁기간 NATO의 1차 확대 기인 그리스와 터키가 가입한 1952년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NATO의 설립이 진행된 1949년,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의 상황도 간략히 살펴본다.
대상 국가는 그리스와 터키로 한정한다.
2. NATO의 탄생과 6‧25전쟁 발발 이후 대응
가. NATO의 탄생과 위협인식
NATO는 1949년 4월 4일, 소련의 팽창과 유럽에서의 민족주 의적 군국주의의 부활을 금지하고,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장려 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등장했고 유럽에서의 문제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동유럽을 시작으로 팽창하고자 했고, 미국은 이를 저지 하기 위한 견제에 나섰다. 소련의 폴란드 점령과 1945년 초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통제는 미국뿐만 아니라 서유럽 국가들에게 특히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는 자연스럽게 동맹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 1948년 7월 6일에 ‘안보에 관한 워싱턴 회담’ (Washington Exploratory Talks on Security)이 개최되었다.
회담결과, 1948년 12월 24 일에 북대서양 조약을 위한 최종적인 초안이 마련되어 궁극적으 로 1949년 4월 4일에 워싱턴 회담에서 북대서양 조약이 체결되 었다.10)
워싱턴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회원국 자격 문제였다.
회원국 자격 문제는 워싱턴 회담에 참여한 국가들 간에 상이한 전략적 관점과 입장, 그리고 우선순위를 반영한 것으로 협상 과 정에서 가장 어려운 쟁점 중의 하나였다.11)
미국은 공산주의 확 산을 우려하여 서유럽에 정치·경제적 안정성을,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균형을 위한 틀 마련을 원했다.
반면, 프랑 스와 베네룩스(Benelux)12) 3국은 자신들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군사적 위협에 더 민감했다.13)
이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회담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은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공 약이 시급한 요구사항이라는 점에 동의했다.14)
1948년 7월에 개 최된 워싱턴 임시회담은 9월에 들어와 그간의 합의 내용을 정리 한 ‘워싱턴 보고서’(Washington Paper)를 만들어냈다.
동보고서에서는 북대서양 조약은 세 가지 층의 회원 자격을 가져야 한다 고 권고했다.
이는 보렌이 묘사한 ‘핵심’(the hard core), ‘징검 다리’(the stepping stones), 그리고 ‘외부’(the goats) 층의 개 념이었다.15)
이탈리아의 경우 ‘외부’(the goats)층 국가들 중 유 일하게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강력한 지 지와 이탈리아가 외교정책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했기 때문이었 다.16)
이탈리아의 가입은 추후 그리스와 터키 가입에 중요한 함 의를 가지게 되었다.17)
미국은 서유럽의 경제적 위기를 소련이 팽창을 위해 악용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6·25전쟁 직전까지 NATO 회원 국가 들의 당면 목표는 국내 경제회복과 개발이었다.18)
당시 소련의 동유럽에서의 영향력 확대는 서유럽 국가들에 있어서 큰 위협이 었고 NATO 창설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자국의 안전보장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붕괴된 경제를 회복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따라 조지 케난(George Kennan)이 제시한 이른바 ‘봉쇄 정책(Containment Policy)’의 일환으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과 ‘마샬 플랜 (Marshall Plan)’이 실행되었다.
결론적으로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 플랜은 성공적이었으며,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서유럽 국 가들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 소련의 팽창을 막을 수 있는 원동력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이때까지 직접적인 군사적 동원이 없이 서유럽을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목 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NATO회원국에 있어서 소 련에 대한 위협인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이 예상보 다 빨리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소련이 주도권을 잡 고 서유럽을 위협할 수 있는 더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19)
당시 통합군사지휘구조를 갖추지 못한 NATO 는 군사기획 과정을 관장하는 미국·영국·프랑스로 대표되는 상임그룹을 통해 전반적인 전략개념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결과 1949년 12월 1일에 NATO의 첫 번째 전략개념이라 할 수 있는 ‘북대서양지역의 방위를 위한 전략 개념(The Strategic Concept for the Defense of the North Atlantic Area, DC 6/1)’이 탄생했다.20)
그러나 NATO의 첫 번째 전략개념은 유사시 핵무 기 사용을 암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 적인 전략지침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에 1950년 3월 28 일에 ‘북대서양지역기획을 위한 전략지침(Strategic Guidance for North Atlantic Regional Planning, MC 14)’을 공식적으 로 승인하였고, 1950년 4월 1일에 ‘NATO 중기계획(NATO Medium Term Plan, DC 13)’을 마련했다.21)
이때까지 NATO 의 주된 목적은 직접적인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거나 좌절시키는 것보다 소련의 위협을 미국의 핵무기와 연계시킴으로써 대응한 다는 데 있었다.
미국의 핵 보장(Atomic Assurance)이 동맹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6·25전쟁 이전 NATO에 대한 미국의 공약 은 제한적이었으며 상징적 의미가 더 강했다.22)
나. 6 25전쟁 발발 이후 NATO의 인식과 대응
6·25전쟁이 발발하자 NATO 회원국은 소련이 단순한 정치적 전복수단 이외에 군사적 침략을 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강 화시켰다.
이는 NATO의 군비 증강을 초래했다.23)
그동안 소련 의 팽창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대응을 전제하지 않았던 서유 럽에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만 했다.
6·25전쟁 직전까지 NATO 회원 국가들의 당면 목표는 국내 경제회복과 개발이었 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소련의 위협을 억지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NATO의 군사력 확충 과정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1955년까지 36개 사단 규모의 군대 확보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1950년 봄 12개 사단을 채우지 못한 것이 실정이었다.24)
즉각적 인 군비증강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1952년을 목표 해 로 설정하고 전면적인 재군비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결과 미국 의 국방비가 3년 사이에 4배로 증가하였다.25)
총 인력은 145만 명에서 35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50년에 서유럽에 12만 명 이 상의 미군이 주둔했으며, 이 숫자는 1954년에는 거의 40만 명으 로 증가했다.26)
영국도 이에 동조, 국방비가 국민소득의 12%에 이르도록 결정하였다.
프랑스도 국방예산을 30% 증가시켰으며 3년 이내에 15개 사단을 증설할 것을 계획하였다.27)
유럽 국가 들의 방위목표는 경제개발·부흥에서 군사력확충으로 변화했다.
당시 유럽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미국의 대유럽 원조의 우선순위가 경제에서 군사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28)
6·25전쟁으로 인해 NATO는 보다 더 ‘군사기구화’ 되었다.
6·25전쟁의 발발로 NATO는 소련에 비해 수적 열세에 있는 재 래식 전력의 증강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1949년부터 1952년 에 걸친 NATO 전략개념은 유사시 핵무기 사용을 암시하고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재래식 전력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NATO는 1950년 9월 뉴욕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NAC, 이후 NAC)에서 통합군사지휘구조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이를 계기로 NATO의 군사제도화는 탄력을 받게 되어 1951년 4월 ‘유럽연합군’(Allied Command Europe, ACE)이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NATO는 통합군사지휘구조를 갖추는 동시에 1952년 2월의 리스본 회담에서 사무총장직과 국제 참모진을 창설하였다.
결과적으로 NATO는 리스본 회담을 통해 정치구조와 군사구조를 갖춘 상설기구로 재탄생하게 되었다.29)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과 6·25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동 지중해와 중동지역을 보다 더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 었다.
그 과정에서 동맹의 군사전략인 ‘전진방위전략’(the strategy of forward defense)의 개념이 등장했다.30) 1950년 9월 뉴욕 에서 개최된 NAC에서는 최초로 전진방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졌다.
전진방위의 핵심원칙은 가능한 한 더 동쪽으로 NATO회원 국가들을 방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와 터 키는 서유럽으로부터는 동쪽, 소련으로부터는 남쪽을 책임지는 것으로 중요성이 보다 증대되었다.31)
특히 터키의 경우 미국의 항공 전문가들이 가입을 강력히 지지했다.
서유럽에 대한 소련 의 공격이 발생했을 때, 터키가 대서양 동맹의 일부가 되면 미 국 폭격기가 터키의 기지에서 트란스-코카서스32) 유전지대 (Trans-Caucasian oil fields), 우랄산맥의 산업시설 그리고 러 시아의 공급 노선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3)
NATO의 전진방위전략의 채택은 필연적으로 그리스와 터키의 신규 회원국 가입이라는 NATO 확대 문제를 야기했다.34)
NATO의 ‘전략개념’과 ‘전략지침’도 6·25전쟁의 발발 이후 변 화했다.
먼저 전략개념의 변화로, 1949년 12월에 발표한 첫 번 째 전략개념인 ‘북대서양지역의 방위를 위한 전략 개념’(DC 6/1) 에서 “NATO의 주요 기능은 침략을 억제하는 것이며, NATO군 은 이 주요 기능이 실패하고 공격이 발생할 경우에만 개입될 것”이라고 명시했다.35)
6·25전쟁의 발발로 1952년 12월 두 번 째 전략개념인 ‘북대서양지역의 방위를 위한 전략 개념’(The Strategic Concept for the Defense of the North Atlantic Area, MC 3/5)의 작성이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앞서 언급한 ‘전진방위’로서 그리스와 터키가 NATO회원국에 가입함으로써 NATO가 보다 더 동쪽으로 진출 및 방위해야 함을 언급했다.
즉 ‘침략의 억제’에서 ‘전진방위’로 NATO의 대응이 능동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전략지침은 더욱 확고하며 강경한 대응을 하는 것으로 변화 했다.
1950년에 작성된 ‘북대서양지역기획을 위한 전략지침’(MC14)과 ‘NATO 중기계획’(DC 13)의 핵심 내용은 “전쟁이 발생할 경우 성 공적인 방어를 보장하기 위해 소련을 설득하는 것”36)이었다.
6·25전쟁의 발발 이후 1952년 12월에는 ‘북대서양지역기획을 위한 전략지침(MC 14)’과 ‘NATO 중기계획(DC 13)’이 ‘Strategic Guidance(MC 14/1)’으로 통합되었다.
여기서 전략지침은 “NATO 지역의 방어와 소련 및 위성국이 전쟁을 전개하는 의지와 능력 을 파괴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보장하는 것”임을 명시했다.
또 한 ‘모든 종류의 무기(all types of weapons)’를 사용할 것임을 밝혔다.37)
즉 전략지침이 ‘설득하는 것’에서 ‘소련 및 위성국의 의지와 능력을 파괴’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무기를 사 용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그리스, 터키의 NATO 가입문제와 6‧25전쟁
가. 그리스와 터키의 NATO 가입의 필요성 인식
1950년 9월 NATO에서 ‘전진방위’개념을 채택함으로써 그리스 와 터키를 회원국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두 국가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NATO에 가입하기를 희망했다.
두 국가의 정치적·지정학적 배경은 달랐으나, 2차 세계대전 이 후 급변하는 국제 상황에서 자국의 안전을 위해 회원국의 집단 방위를 보장하는 NATO에 가입해야 하는 필요성은 동일했다.
1) 그리스의 NATO가입 배경
그리스 내전은 1944년부터 1949년 사이에 일어난 두 번의 내 전이다.
내전은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그 리스 정부군과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공산당의 민주군 사이에서 치러졌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의 패망이 짙어진 1944년 5월에 영국과 소련은 전후 발칸반도 분할에 관한 논의 끝에 그리스는 영국,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영향권 아래 둔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1944년 8월에 소련 군사고문단은 그리 스 공산당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선(Ethnikó Apeleftherotikó Métopo, EAM, 이후 EAM)으로 파견되어 영국 당국에 협조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EAM은 소련 군사고문단을 무시하고 1944년 12월에 아테네에서 대규모 시위를 시작으로 그리스 정부 군을 밀어내고 시가지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에 영국은 이탈리 아에 주둔하던 제 4인도 보병사단을 전개하여 EAM을 몰아내며 제 1차 내전이 종료하게 되었다.
1946년 3월 소련이 발칸반도와 흑해 연안으로 영향력을 확대 하고 소련과 서방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될 징후가 보이자 그리스 공산당은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을 다시금 결정했다.
이는 공산진영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당시 그 리스의 경제는 인플레이션(Inflation)으로 공산세력의 확대에 좋 은 환경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47년 2월 영국은 더 이상 그리스를 지원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리는 외교문서를 미국으로 보냈다.
미국은 즉각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그리스에 대한 원조를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군사고문단의 역할로 그리스 정부군의 규모와 능력이 발전하여 1949년 10월 그리스 내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내전의 결과로 그리스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다.
1947년 이전에 그리스는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 았다.
트루먼 독트린과 그에 따른 미국의 내전의 개입, 유럽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에 그리스가 포함되 면서 미국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리스 사안에 대한 미국의 영 향력이 극대화되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그리스의 국가 의 사 결정에 대한 미국의 깊은 개입이 드러났다.
미국의 개입이 있 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의 내부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그 리스 스스로 대응하기에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리 스의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을 국가의 자원을 착취하 는 무관심한 인물로 여겼다.
따라서 1947년부터 1952년까지 미 국 관료들은 그리스 정부부처에 자리를 잡았고 미국의 동의 없이 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미국의 개입은 그리스 구식 정치 체제의 결함을 들어내고 현대화와 개혁의 기회를 제공했다.38)
내전 이후 그리스는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과 제휴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39)
동일한 기간, 마샬 플랜으로 경제적 지원을 받은 서유럽과 트루먼 독트린으로 경제적·군사적 지원 을 받은 그리스는 미국이라는 동일한 배경을 갖게 되었다.
게다 가 서유럽과 그리스는 공산주의라는 동일한 적을 두고 있었으 며, 그리스는 공산세력이 주도한 두 번의 내전을 통해 아래에서 부터 ‘반공주의’가 자리 잡았다.
즉, 그리스 내전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스스로 자립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역설적으로 그리스가 서방 동맹국의 일원으로 나아가 는데 도움을 주었다.40)
내전의 영향과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한 위협으로 그리스는 NATO의 가입을 원했다.
내전 당시 그리스의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했던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등의 공산국가들은 그리스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여전히 위협이 되었다.
이에 1950년 5월 처음으로 NATO 회원국으로 가입 신청을 했지만 당 시 이탈리아만이 이를 지원했으며 결론적으로는 NATO에 가입 할 수 없었다.41)
그리스가 NATO에 가입하고자 했던 이유는 명 확했다.
국내·외 공산주의자들을 억제하고 서양 국가들과의 관 계를 ‘제도화’하고자 했다.42)
즉,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2) 터키의 NATO가입 배경
터키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다.
터키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함께 동맹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뼈아픈 패배를 하게 되었다.
이에 터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 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튜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국내의 평화, 세계의 평화(Yurtta Sulh, Cihanda Sulh)’ 구호 를 바탕으로 신생 국가로서 국가안정을 도모하고, 어떠한 국제 문제에도 개입하지 않는 중립외교의 노선을 유지했다.
이러한 터키의 중립외교는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도 연합국과 추축 국의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었다.43)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소련은 터키를 위협하기 시작했 다.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1936년에 맺은 몽트뢰조 약(Montreux Convention)의 수정을 요구하며 터키의 주권을 위협하고 지중해로 팽창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또한 3월에는 터 키와 소련이 1925년에 맺은 ‘우호 및 불가침 조약(Treaty of Friendship and Non - Aggression)’의 폐기를 요구하며 터키 국경의 재설정과 소련의 군사기지 설치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소련의 행동은 터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터키의 ‘중립주의’ 외교노선에 변화를 불러왔다.44)
영국과 미국은 소련의 팽창의도가 분명해지자 행동으로 나섰 다.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터키, 프랑스가 맺은 3 자 동맹(Trilateral Declaration of Guarantee)의 집단방위를 통해 터키가 소련에 공격당할 경우 도와줄 것임을 명확히 했으 며, 미국은 1946년 4월 5일 전함 미주리호(USS Missouri)를 수도인 이스탄불에 보냄으로써 터키를 지지했다.
그러나 소련은 영국과 미국의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터키에 더 많은 압력 을 가했다.
이에 소련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미국은 투르 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터키에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시작했 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터키는 현대화된 군을 보유할 수 있 었으며,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을 더욱 공식화 할 수 있었다.45)
터키는 가중되는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NATO에 가입하기를 희망했다.
소련에 대한 두려움과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으로 터키의 외교정책은 보다 서구 지향적으로 변 화하면서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NATO의 가입을 모색하게 되었 다.46)
터키는 그리스와 함께 1950년 5월에 NATO 회원국으로 가입신청을 했지만 이탈리아만 이를 동의했다.
유럽 국가들이 터키의 가입을 반대한 이유는
첫째, 터키가 NATO에 가입할 경 우 소련을 자극하여 유럽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
둘째, 회원국이 증가함에 따라 군사원조를 받는 것이 상대적으로 줄어 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50년 5월 당선된 민주당 의 멘데레스 총리(Adnan Menderes)와 바야르(Celal Bayar) 대 통령은 국가 최우선 과제를 NATO의 가입으로 선정하고 정책을 추진했다.47)
나. 6·25전쟁의 발발과 NATO가입을 위한 그리스, 터키의 참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와 터키는 적극적으로 참전을 결 정했다.
머나먼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두 국가에 직접적인 참전 의 계기를 제공하지는 않았으나, 가시화된 소련의 위협을 저지 하고 NATO가입을 위한 기존 회원국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서방국가와의 정치적 동질성을 얻는 것이 중요했다.
즉 두 국가의 참전은 NATO가입을 위한 정치적 목적 이 있었다.
1) 그리스의 6·25전쟁 참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는 참전을 결정했다.
비록 참전 당시 미국의 영향력이 강했고 미국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결정 도 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전쟁의 참전에는 그리스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그리스는 NATO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 해, 즉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서방국가와의 정치·이념적 동질성 을 증명하는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안보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수 행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그리스는 한반도에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전장에서 믿을 수 있는 성과를 내고자 했다.48)
그리스는 당시 UN회원국의 자격으로서 1950년 11월 25일에 공군을, 1950년 12월 9일에는 지상군을 보냈고 1951년 1월 27 일부터는 전투에 참가했다.
참전 규모는 지상군 보병 1개 대대 (1,263명), 공군 수송기 1개 편대였다.
초기 그리스 한국 원정군 (Greek Expeditionary Force in Korea)은 1개 여단 규모의 병 력을 파견하고자 했으나,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등 상 황이 호전되자 규모를 축소하였다.
그리스군의 스파르타 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공군 제 13수송 편대는 미 제5 공군에 배속되었다. 1951년 1월에는 ‘UN군 사령부 그리스군 연락 장교단’이 지휘부 역할을 수행하며 지속적으로 전투를 이어나갔다. 결론적으로 그리스군은 혁혁한 공을 세우며 서방국가들로부터 자질을 인정받았다.
특히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그리스 대대 의 이천 부근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은 UN군의 귀감이 되었고, 외신들도 이들의 활약상을 타진했다.49)
이로써 그리스의 6·25전쟁 참전은 NATO 가입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며, 공산세력과 내전을 겪은 그리스가 자유진영에서 싸움으로써 서방국가와의 이념적 동질성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2) 터키의 6·25전쟁 참전
6·25전쟁이 발발하자 터키는 적극적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터키의 참전은 NATO가입을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터키정부는 1950년 7월 18일, 이스탄불에서 내 각회의를 통해 한국으로의 병력 파병을 결정했으며, 7월 25일, 의회의 동의절차를 생략하고 약 4,500명의 여단급 부대를 파병 할 것을 발표했다.
멘데레스 총리는 한국으로의 파병이 NATO 가입의 중요한 교량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직접적으 로 파병의 의도를 언급했다.50)
터키는 6·25전쟁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파병 규모는 보병 1개 대대로서 4,500명 규모의 병력이었다.
1950년 11월 12일부터는 전투에 참가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성과를 보였다.
특히, 1951년 1월 김량장과 151 고지 전투에서 백병전으로 목표지점을 탈환하고 중공군을 격퇴 하였다.
이로 인해 ‘용감한 터키군’의 진면목을 전 세계에 과시 했다.
참전국들은 ‘인류 역사상 길이 빛날 터키군의 전공’이라고 극찬했다.51)
결론적으로 터키의 6·25전쟁 파병은 서방국가들에게 정치적 동질성을 갖는 ‘안보 파트너’로서의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NATO에 가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52)
실제로, 6·25전쟁 참 전 이후 미국은 터키의 NATO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주 터키 미국대사였던 맥기(George McGhee)는 터키의 6·25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터키가 NATO의 정회원국이 될 것임을 밝혔다.53)
4. NATO 확대의 과정
가. 그리스와 터키의 준 회원국으로의 가입
그리스와 터키의 NATO 가입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트루먼 독트린을 시작으로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가 소련의 영향 력에서 벗어나 서방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할 책임을 갖게 되었 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맡았던 국제적 역할을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이 이양받게 되었고, 이는 곧 미국이 주도권 을 갖게 된 것을 의미했다.
또한 미국은 NATO의 핵심국가로서 창설 이전부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유럽에 시행했던 각종 정책들은 미국이 비단 그리스와 터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그리 스와 터키의 NATO가입은 미국의 의지가 강했으며 이는 곧 소 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은 1950년 4월 NSC-68에서 소련의 팽창을 차단해야 하 며 이는 핵심지역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에서도 이루어져야 함을 언급했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주변 지역에 대한 우려가 중 요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트루먼은 ‘소련이 이란을 침 략하고 중동의 석유에 접근하며, 페르시아만과 동지중해 중앙의 해로와 항구를 찾으려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 을 보호해야 했다.
동맹은 가능한 한 넓고 견고해야 했기 때문 에 그리스와 터키가 1950년 초에 미국에게 중요해졌다.
또한 6·25전쟁의 발발은 미국에게 군사적이고 전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54)
1949년부터 1951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의 동지중해 및 중 동 정책의 양상이 명확해졌다.
미국의 봉쇄 정책의 목표는 소련 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고 특정 핵심지역의 ‘정치적 충성 (political allegiance)’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동지중해와 중동에 서는 이 목표가 더불어 전시에는 전략적으로 협력하고, 평시에 는 서양 기업이 석유 자원을 개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특정 핵심 국가들을 미국 주도권의 품에 끌어들이는 목표와 점차 결합되고 있었다.
미국의 브로일러(BROILER)와 하프문(HALFMOON) 전쟁계획은 모두 소련과의 전쟁에서 중동 기지의 사용을 포함 하고 있었다.
레플러(Melvyn Leffler)는 ‘외교는 전략 계획의 부속물 (handmaiden of strategic planning)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55)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와 터키의 NATO 가입에 대한 문제가 부상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의 시행부터 소련으로부터의 그 리스와 터키에 대한 안전보장을 전제하고 있었으며, 앞서 언급 한 전략적 이유에서 동맹의 가입을 고려했다.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에 대한 생각은 워싱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합참은 당시에 그리스와 터키의 완전한 회원국으로의 가입은 시기상 조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합참은 NATO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제도화가 아직 초창기 단계에 있을 때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이 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1950년 여름부터 합참과 국 무부는 이 문제를 연구하였고 그리스와 터키의 NATO의 가입은 현재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NATO의 군사 계획에 연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합의에 도달했다.56)
즉, 그리스와 터키를 NATO의 준회원의 자격으로서 참여시키는 데는 동의한 것이다.
그리스와 터키의 준회원으로의 가입은 세 가지의 이점이 있었 다.
첫째, 그리스와 터키는 실제로 완전한 회원이 아닌 준회원이 기 때문에 가입에 대한 비준절차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둘째, 새로운 협약 체결의 필요성을 우회할 수 있었다.
셋째, 준회원의 자격으로 군사 계획의 조정만이 필요했으며 NATO의 지휘체계 의 수정이 필요하지 않았다.57)
이러한 이점은 그리스와 터키가 비록 NATO의 정식 회원은 되지 못하지만 준회원으로서 NATO 의 군사계획에는 연계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며, 기존 NATO 의 회원국에게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제안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준회원으로의 가입은 NAC의 승인이 필요했 다.
이 안건은 1950년 9월에 영국-프랑스-미국의 외교장관 회 의와 NATO의 부총리회의에서 검토되었다.
외교장관들은 이 안 건을 ‘가장 좋은 선택지(the least bad choice)’로 승인하였고, 이로써 유럽의 주요 국가와 스탠딩 그룹(Standing Group)58)의 지원을 확보했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캐나다는 이 안건으로 인해 NATO가 ‘밀접하게 연관된 공동체(closely knit community)’에서 단지 ‘광범위한 반소련 동맹(widespread anti-Soviet alliance)’ 으로 약화될 것을 우려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거부하기를 원하지 는 않았다.
이에 따라 정치적·군사적 지원이 확보되어 NAC는 이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1950년 9월에 그리스와 터키는 NATO 의 준회원 국가가 될 수 있었다.59)
동시에 1950년 9월의 NAC 에서는 2장에서 언급한 전진방위전략이 논의되었으며 채택되었 고 그에 따라 그리스와 터키의 NATO가입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나. 그리스와 터키의 NATO가입과 NATO의 확대
터키는 NATO의 준회원으로서의 가입을 만족하지 않았다.
그 동안 NATO에 가입하고자 했던 터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 이었다.
당시 바야르 터키 대통령은 “터키 전체의 외교정책 방향 이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재고해야 할 수도 있다”고 언 급했으며, 이는 터키가 다시 중립주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60)
미국은 당시 소련이 ‘최대한 많은 비공산 국가들을 중립정책을 추진하도록 강제하고, 그들의 자원을 서방 강대국들로부터 차단하려는’ 불변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 했다.61)
따라서 미국은 터키가 중립주의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미국 국무부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여겼다.62)
한편, 그리스와 터키는 1950년 11월에 UN회원국의 자격으로 서 6·25전쟁에 참전했다.
비록 UN군이 38선을 통과하여 북진하는 등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참전했지만, 이들의 참전은 앞서 언급한대로 서방국가들에게 있어서 이념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함께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 었다.
그 이면에는 NATO의 핵심축이자, 그리스와 터키의 NATO가입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기존 회원국들의 고집을 꺾 을 수 있는 외교력을 가진 미국의 힘이 강했다.63)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를 NATO에 정식으로 가입시켜야 한다 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야르 터키 대통령의 언급과 동시에 미국 의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은 정보평가 보고서에서 “소련의 무력 공격의 발생 시, 터키군의 투입 또는 터키의 기지 제공은 미국의 확고한 무장 지원 보장에 따라 달라 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51년 3월부터 5월 까지 외교부(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DFA), 합동참 모본부(Joint Chiefs Staff, JCS),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으며, 5월 초에는 그리스 와 터키를 정식으로 NATO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했다.64)
다만, 이는 미국 내부의 결정이었으며 동맹국들을 설득해야 했다.
NATO의 회원국들은 그리스와 터키가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 하는 것을 반대했다. 기존의 NATO회원국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와 터키에게 NATO의 조약의 5조, 즉 ‘집단방위’를 적용하는 것은 NATO의 방어계획이 중동과 지중해까지 확대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전략적이며 실용적인 문제였다.
둘째, NATO는 전략적 논의뿐만 아니라 정치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것이었다.
터키와 그리스가 NATO에 가입한다면 현재 동맹의 성격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덴마크, 노르웨 이, 네덜란드에서 강하게 제기되었다.65)
동맹의 내부에서 스탠딩 그룹(Standing Group)의 의견은 매 우 강력했다.
특히 미국 다음으로 영향력이 강했던 영국의 입장 에 따라 캐나다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태도는 변할 수 있었 다.
이때 영국은 이미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에 대한 군사적 영 향을 조사했다.
영국 총참모들에 의한 보고서에는 중동과 지중 해의 방어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터키의 능력과 같은 군사적 이점이 단점을 상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리스와 터키가 NATO회원국들과 정치적 연관이 없으며, 단순 히 반소련 동맹으로의 변화를 우려하여 명확한 지지를 표명할 수 없었다.
다만, 영국은 미국이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을 강력히 요구한다면, 영국 또한 이를 지지할 것임을 밝혔다.
이 시점에서 다른 회원국들은 영국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66)
1951년 6월부터는 대부분의 토론이 그리스와 터키가 어떻게 동맹에 가입될지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데 집중되었다.
영국은 신 속하게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는 여전히 반대했으나, 이들 국가 중 어느 한 국가도 다수의 지지가 있을 경우에는 거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 다.
따라서 NATO의 과제는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을 의심하는 국가들을 안심시켜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이에 영 국은 그리스와 터키를 서방 방어와 더 밀접하게 관련시켜야 한다 는 보고서67)를 제출했고 그 결과 국가들 간의 타협으로 이어졌다.
주요 내용은 그리스와 터키가 유럽의 전쟁에 대해 NATO 회 원국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68) 당시 소련의 군사력에 비해 NATO회원국들은 재래식 전력을 포함한 군사력이 약했다.
때문에 그리스와 터키가 NATO에 가 입할 경우, 소련을 자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내재했던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입장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미국의 강력한 의지 와 지원을 필요로 했다.
미국 또한 소련의 성장하는 위협에 대 항하기 위해 동맹을 강화하고, 전통적인 억제력을 확립할 필요 가 있었다.69)
따라서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 고 반드시 그리스와 터키를 NATO에 가입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의 NATO가입을 강력히 지지하기 시작 했다.
7월 이후 지휘체계에 관한 논의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 고, 여전히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에 대한 각 국가의 입장은 좁 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다 른 국가들은 영국의 지도에 따르거나 다수결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는 그리스와 터키의 정 회원 자격을 지지하였으며, 이것에 대해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심각한 반대는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은 중동 방위에 대한 어떤 구속적인 조건도 없이 그리스와 터키의 완전한 회원 자격 을 획득했다.70)
미국의 강력한 지지는 중동과 지중해에서 미국 의 전략적 이익을 달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함이었다.
1951년 10월 17일에 그리스와 터키의 NATO 가입에 관한 북 대서양 조약 의정서가 런던에서 체결되었다. 이후 1952년 2월 18일에 리스본에서 그리스와 터키의 NATO 가입이 이루어졌다.
NATO는 1949년 4월에 창설된 이래로 약 3년 만에 회원국이 추가되며 확대되었다. NATO의 확대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강했 다.
미국이 동맹 내 주요 주체였기 때문이며 미국의 정책은 빠 르게 NATO의 정책에 반영되었다. 미국의 주변 지역에 대한 우 려의 증대, 군사적 안보의 강조, 중립주의에 대한 불신은 곧 그 리스와 터키를 NATO에 가입하도록 만들었다.71)
NATO의 확대에는 근본적으로 소련의 위협이 있었지만, 6·25전쟁이라는 촉진제가 더욱 불을 지폈다. 또한 NATO의 첫 번째 확대의 과정은 NATO의 성격을 보다 더 군사기구화 될 수 있도록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25전쟁으로 인해 소련 이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그로인해 그리스와 터키를 가입시키는 과정에서도 군사안보 분야의 중점적인 논의 가 이루어졌다.
결론적으로 6·25전쟁은 NATO 확대의 시발점 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동시에 NATO로 하여금 강력한 군사력 을 갖추게 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5. 결 론
본 논문에서는 6·25전쟁이 NATO의 확대에 미친 영향에 대 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6·25전쟁과 NATO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드물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NATO는 1949년 4월 4일에 창설되었으며 창설 이후 약 1년 만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NATO의 회원국이자 참전국들은 NATO연합군의 이름 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UN연합군의 이름으로 참 전하였고, 때문에 비교적 그 연관성이 적었다고 간주되었다.
그 러나 그 이면에는 6·25전쟁이 NATO에 상당히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결국 동맹의 확대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6·25전쟁이 NATO에 어떠한 영 향을 미쳤는지 분석하며, 그리스와 터키가 가입함으로써 어떻게 확대가 이루어졌는지 그 배경과 과정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NATO는 소련이 군사적으로 침략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위협의 인식을 하 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NATO는 군비를 확대하게 되었고 즉각 군사력을 증강했으며, 동맹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군사기구화’되었다.
또한 NATO의 전략과 전략지침이 보다 능동 적이며 공세적으로 발전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NATO는 보다 더 동쪽으로 동맹을 방어하는 ‘전진방위전략’을 채택하게 됨으로써 지중해와 중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스와 터키는 NATO에 가입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 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면서 미국 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자 그리스와 터키는 소련의 위협에 대 응하기 위해 NATO에 가입하기를 희망했다.
그리스는 2번의 내 전을 통해 반공의식과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 었고, 터키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소련의 팽창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고 서방국가와 동맹을 체결하기를 원했다.
6·25전쟁의 참전은 그들이 서방국 가와 정치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발판이 되었으 며, 그들이 NATO에 가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NATO는 그리스와 터키를 가입시키는 논의 에 이르렀다.
당시 NATO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매우 강했다.
미 국은 자국의 전략적 이익과 NATO동맹의 방위를 위해 그리스와 터키를 가입시키고자 했으나 시기상조라는 판단에 먼저 준회원 국으로 가입시킴으로써 그들을 군사적 계획에 참여시키기로 합 의했다.
이후 미국은 소련에 대한 위협과 터키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정식으로 그리스와 터키를 NATO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하 고 동맹국들을 설득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강력한 지지로 스 탠딩 그룹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그리스와 터키의 가입에 합의했 고 1952년 2월 18일에 그리스와 터키가 정식으로 가입하면서 NATO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6·25전쟁이 NATO의 확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NATO동맹국과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상당 히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위협의 인식을 시작으로 동맹이 어떻 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동맹의 확대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동맹의 성격과 전략적 이익 그리고 각 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야 하며 무엇보다도 동맹 의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6·25전쟁으로 인해 NATO는 실질적 인 위협을 인식했으며 그로인해 발전했다.
이번 연구를 통해 NATO동맹의 1차 확대가 어떠한 계기로 이 루어졌는지, 또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는지 확인하였다.
2023년 현재 기준으로 NATO 동맹은 31개국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한 NATO의 확대를 알아보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약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동맹의 확대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끝으로 본 논문을 통해 6·25전쟁의 참전국들의 헌신이 퇴색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그리스와 터키는 NATO에 가입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와 각 국의 이익, 그리고 소련의 팽창에 대응 하기 위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도움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본 논문으로 인해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마치 계산된 이익만을 위 해 참전했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실추되지 않기를 바란다.
주1)-71)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Abstract)
The Korean War and its Impact on NATO Expansion, Focusing on Greece and Turkey
Jeong, Ki-Hyuk
This study examines the impact of the Korean War on the expansion of the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and the process of NATO expansion, especially in Greece and Turkey. NATO was founded on April 4, 1949 to stop Soviet expansion.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NATO felt a real threat to the Soviet Union and needed to strengthen its alliance accordingly. Among the existing studies, there were rare studies directly rais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orean War and NATO. It was mentioned as part of the relationship, but only mentioned as the background of the recognition change. Therefore, this study analyzes the process from the creation of NATO to the perception and change of NATO's threats after the Korean War, and the expansion of NATO after Greece and Turkey's participation in the Korean War. To this end, NATO's strategic documents at the time and secondary sources analyzed later are mainly used. In the wake of the Korean War, NATO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the Middle East and the Mediterranean Sea as it considered the expansion of the alliance, and considered the membership of Greece and Turkey for further eastward expansion. Greece and Turkey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with political intentions to join NATO, and in conclusion, NATO member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agreed to join in 1952, resulting in the first expansion of the alliance. It is hoped that studying NATO's expansion due to the Korean War will help us understand the ongoing Ukraine-Russia war and thereby study the expansion of the NATO alliance, which remains strong even about 70 years later.
Keywords : Korean War,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 Greece, Turkey, Allianc
(원고투고일 : 2023. 7. 3, 심사수정일 : 2023. 8. 14, 게재확정일 : 2023. 8. 29.)
軍史 第128號(202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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