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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가라시마 다케시의 중국 현대문학 연구와 조선/윤대석.서울대

1. 가라시마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

일제 강점 시기 조선 문인과 조선 문단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재조 일본인을 말하라면 단연코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를 들 것이다. 그는 임종국의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 1966)1)에서 마흔 번에 가깝게 언급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 이 책에 대한 인용은 2013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된 교주본 증보판(이건제교주)에 의거한다.

조선문인협회가 1939년 10월 발족될 때부터 결성준비위원간사로서 그 설립에 관여했고, 그것이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로 확대·편될 때 가라시마는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화부의 문화위원으로서 조선의 문학과 연극·영화를 총괄하는 예술부문 연락계를 맡기도 하고 1942년부터는 조선연극문화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조선 문화정책의 정점에 야나베 에이사부로(矢鍋永三郞)라는 도쿄제대 법과 출신의관료가 있었다면, 문인보국회 회장이자 총력연맹 문화부장인 야나베 밑에서 민간 전문가로서 문화 정책의 입안과 실행에 수완을 발휘한 자가 바로 도쿄제대 지나문학과 출신으로 경성제대 지나어문학 전공 교수로 있던 가라시마였던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라시마는 단지 일제 말기 문화계의 실력자로만 기억되지는않는다.

그보다 더욱 그의 이름을 한국인에게 각인시킨 것은 그가 1943년 6월부터 연희전문(1944년 5월부터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병 동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자살특공대 가미가제로 상징되는 광적인 전쟁열을 부추겼으며 그것에 대해 조금의 반성도 없었다는 점은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한일협정 체결(1965.5)을 앞두고 나온 다음과 같은 가라시마에 대한 평가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신도효”라면 “아 그 자!”하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는 일제가 전쟁 말기에 연전(延專)을 접수했을 때 교장이라고 앉아서 학병을 강요한 사이비 학자였다.

신도에 대해선 오늘까지 평이 매우좋지 않다.

일인 교수 중에도 양심파가 많았다고 일인 교수를 변호하는 인사들도 신도만은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고 그를 비난하고 있다.2)

 

    2) 여적 , 경향신문, 1964.9.23.

위의 칼럼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가라시마일 뿐만 아니라 조선학도병의 최후 (文藝春秋, 1964.10)를 쓴 전후의 가라시마이기도 했다.

가미가제 특공대로 자살특공을 감행하여 전사한 연희전문 졸업생 김상필(창씨명 結成尙弼)3)을 추모하는 이 글은 김상필이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위해 전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러기에 추모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 속에 감춰진 모순이나 고민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 대한 추모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했던 당시의 감각을, “지금 펜을 쥐고 이 추도문을 쓰고 있으니 펜대를 쥔 손가락의 감촉은 그 날 경성역두에서 그들을 보낼 때  흔들었던 히노마루를 매단 대나무 깃대의 감촉으로 살아온다.”4)

 

     3) 가미가제 작전에 임했을 김상필의 고민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살펴본 것으로는 길윤형이 쓴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서해문집, 2012)가 있다. 길윤형은 “대장부 일검을 취하면 태산이 흐늘이련이/이 몸 임을 위하여 바치오니 깊은 맘 비할 곳 없노라.”(211면)라는 김상필의 유서가 조선어로 쓰였다는 이유로 이 ‘임’을 조국 조선으로 해석하고 일본에 대한 충성이 조선을 위하는 일이라는, 일제 말기의 굴절된 신념을 여기서 읽고 있다.

      4) 辛島驍, 朝鮮學徒兵の最後, 文藝春秋, 1964.10, 272면.

 

처럼 고스란히 소생시키고 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가라시마의 무감각함이, 일본에서 잡지가 발매됨과 거의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이 한국에서 나오게 된 이유였을 터이다.

이러한 “악질 중의 악질”이라는 평가는 가라시마의 당대의 글을 읽어보아도 그리 편협한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다음은 일제 말기의 한 강연회에서 있었던 그의 발언이다.

 우리들 형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의식하는것은, 문화면에 관여하고 있는 누구라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신국 일본의 지상명령이다. 이것을 잊고 있는 자는 신칙(神勅)의 배반자이다. 오늘날에 여전히 싸우고 있음을 잊고 있는 자는 호의적으로 말해 무의식적 이적행위자이다. 더욱이 주저하고 회의하거나 혹은 등을 돌리는 자는 배덕자이며 증오해도 좋을 적국인이다.

우리 주위에 무의식적 이적행위자는 없는가. 같은 얼굴색과 같은 복장,같은 말을 하는 적국인은 없는가. 나아가 자기 자신 어느 샌가 적국인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우리들은 엄격하게 우리들 주위를 비판하고 자기 자신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5)

‘배반자’, ‘이적행위자’, ‘배덕자’, ‘적국인’이라는 가라시마의 말에 전율했을 조선 지식인들이 그를 ‘악질 중의 악질’이라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보인다.

이러한 말들은 가라시마가 문화인이기보다 배반자와 이적 행위자를 적발하는 사상과 문화의 검열자였음을 보여준다. 총독부와 군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조선 지식인을 전쟁 협력의 길로 동원하는 식민지 문화 권력의 한 모습을 가라시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라시마의 이미지는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서, 나아가 1940년대 초반기 문학에 대한 연구 혹은 재조 일본인 문학 연구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불가능하게 했다.

문학자라기보다 정치적 책략가에 가깝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나 문학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문학 연구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그가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였고, 또 루쉰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현대문학 연구에서 가라시마는 대개 루쉰과의 관련 하에서 다루어졌다.6)

     

    5) 辛島驍, 決戰期の朝鮮文化運動, 綠旗, 1943.3, 21면.

    6) 루쉰과 관련하여 가라시마를 다룬 논문으로는, 김시준, 노신이 만난 한국인 , 중국현대문학, 1997.12 ; 김시준, 신언준의 ‘노신방문기’에 관하여 , 중국현대문학,2002.6 ; 홍석표, 노신의 식민지 조선 인식에 관한 연구 , 중국어문학지, 2008 ;

홍석표, 루쉰과 신언준 그리고 카라시마 타케시 , 중국문학 제69집, 2011.11 ; 백지운, 한국의 1세대 중국문학연구의 두 얼굴 , 대동문화연구 제68호, 2009 ; 金世中, 朝鮮半島における‘魯迅’の受容, 新潟産業大學人文學部紀要, 2000 ; 井上泰

山, 増田渉と辛島驍, 関西大東西学術研究所紀要, 2012.4 등이 있다.

 

대개의 논문은 한국의 루쉰 연구 혹은 중문학 연구에서 가라시마를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는 반면, 홍석표(2011)의 연구는 가라시마의 루쉰론을 조금 자세히 그리고 실증적으로 다루고 있다.

가라시마가 루쉰과 중국근대문학의 현황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공감을 표했으나 1930년대 후반에는 피압박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루쉰의 정신을 저버렸다는 것으로 이를 요약할 수 있다.

루쉰에의 공감과 일제 말기의 ‘악질적’ 행위는 낙차가 너무 커서 ‘전향’이라는 말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일 전쟁 이전의 가라시마와 그 이후의 가라시마가 명확한 단절을 보이고 있으며, 그 원인이나 계기는 설명되지 않는다.천진의 논문7)은 시야를 넓혀서 일본의 ‘지나학’, 나아가 경성제국대학의 ‘식민지 지나학’의 틀 안에서, 그리고 다케우치 요시미와의 비교를 통해 가라시마를 바라봄으로써 가라시마에 대한 단절적 인식을 극복하려 했다.

이 논문은 다케우치의 눈으로 가라시마를 바라보는데, 객관적·학문적 태도 하에서 고전 지나를 바라보던 기존의 ‘지나학’에 파열을 일으키는 것에서 그 둘은 시대정신을 공유하지만, 가라시마는 문학을 절대화함으로써 ‘지나’라는 현실(타자성)을 외면하고, 반대로 다케우치는 태도로서의 문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지나’의 타자성(현실)을 자기 부정의 계기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낡은 지나학을 벗어나기 위한 카라시마의 현대 지나문학이 문학의 경험을 통해 지나라는 현실과의 대면을 벗어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행보이다.

지나학의 명예로운 고립을 벗어나지만 지나를 지워가는 카라시마의 문학의 논리는 초기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 안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문학의 논리가 39년 “신동아건설의 이상에 즉한 문학”으로 전환될 때, 여기서“지나”는 대동아의 문학 건설 아래 통합을 기다려야만 하는 대상이며 “문학”은 이 통합을 촉진하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30년 현대 지나와의 긴장을 놓아버린 카라시마의 지나문학 논리는 39년 무렵 대동아 신질서의 국민문학의 논리로 쉽게 전환된다.8)

  

     7) 천진, 식민지 조선의 지나문학과의 운명 , 중국현대문학연구 제54호, 2010.

     8) 위의 논문, 331~332면.

 

가라시마론이라기보다 오히려 다케우치론이라고 할 만한 이 논문은 다케우치와 가라시마가 만나는 부분(지나학의 갱신)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분석을내놓고 있지만, 그 둘이 갈라지는 지점에 대해서는 다소 설명이 부족하다.

에서 보겠지만 다케우치를 둘러싼 중국문학연구회 그룹은 가라시마에 대해 처음부터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반감이 이 논문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지나학’이라는 학제나 다케우치를 통해서는 보이지않는 가라시마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가라시마가 놓인 장소, 즉 식민지라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재조 일본인의 가능성과 한계 속에 가라시마를 놓을 때 그의 변화가 가진 의미가 드러날 수 있다.

그는 전후(戰後) 루쉰에 대한 글에서 “루쉰은 전 중국 피압박 대중의, 아니 세계 인류의 고뇌를, 그 가느다란 목덜미, 야윈 어깨에 짊어졌다고 생각된다.”9)

 

라고 하고, 루쉰으로부터 멀어진 계기를 “그러한 일보다도 안전의 조선 민족문제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10) 것에서 찾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조선에 대한 관심이 중국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어나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9) 辛島驍, 魯迅追憶, 桃源, 1949.6, 15면.

    10) 위의 글, 13면.

 

이 글은 이 점에 착목하여 가라시마의 문학과 사상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그의 문학과 사상이 전개된 식민지라는 구체적 장소를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2. 가라시마에 대한 세 편의 소설

가라시마에 대해 당대인의 감각을 잘 드러내주는 세 편의 소설이 있다.

소설들은 모두 일제 말기의 가라시마를 다루고 있는데, 일본인 측에서는 다나카 히데미쓰(田中英光)의 취한 배(醉いどれ船) (1948)와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살모사의 마지막(蝮のすえ) (1947)이 있고, 조선인 측에서는 김사량의 천마 (1940)가 있다. 다나카 히데미쓰와 김사량의 소설이 일종의 모델 소설이라면, 다케다 다이준의 소설은 허구에 입각하고 있지만, 주인공 이름을가라시마 다케시라고 하여 그에 대한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소설은 모두 전후에 쓰인 것이고 김사량의 소설은 해방 전에 쓰인 것이라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가라시마가 악역을 담당하고 있이며 군국주의의 화신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다나카의 소설 취한 배 에 등장하는 가라시마(唐島) 박사는 “경성제대 문학부 주임교수였던 가라시마 다케시를 모델로 하고”11) 있다.

 

    11)川村湊, <酔いどれ船>の青春, インパクト出版会, 2000, 27면.

 

이 소설은 최재서의 모델인 최건영과 가라시마 박사가 대동아문학자 대회를 둘러싸고 벌이는 스파이전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재는 추리소설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서 당대의 사실과 부합한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그러나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사용한 인물 묘사는 박진감에 넘치고 있는데, 세부적인 사실은 반드시 신뢰할 필요가 없지만, 해당 인물에 대한 이미지만은 당대인의 시각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조선 문단을 주도하고 있는 세 명 가운데 하나로 가라시마를 들며 이 소설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카모토 씨, 가라시마 박사를 알지? 그 사람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예의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마키아벨리스트거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짓도 태연히 할 사람이야. (중략)

가라시마 교수는 아무것도 안 믿어.

오로지 자신의 권력만 탐할 뿐이지.”

박사는 도쿄제국대학 국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대로 내려오는 일본 국문학의 문벌로서 유명한 은사인 하야시 박사의 딸과 결혼하여, 이곳 대학의 조교수로 부임했고, 순식간에 교수, 박사, 대학 문학부장, 그리고 본부 촉탁, 군 보도부 고문, 머지않아 조선의 신문이나 잡지를 한손에 거머쥐고 조종할 존재가 되었으며, 또 한 쪽 편에서는 부단히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대학 시절 옛 친구인 중국 요인에게 화평권고를 한 적도 있었고, 군의 특사로서 중국의 모 기점으로 가서, 어떤요인과 회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평소에는 아랫사람, 특히 여자에게 자상한 인물이었지만, 어쩐지 그 자상함 속에는 변태성욕자 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나는 조선의 방방곡곡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 있다.

조선을 위해서 이 한 몸을 희생할 각오로, 이런 시골 대학에서 기꺼이 일하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 앞에서 떠드는 박사의 입버릇이지만,……12)국문과가 아니라 지나문학과이며 박사 학위는 1946년에 받았고, 문학부장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은사이자 중국문학 연구의 권위인 시오노야 온(鹽谷溫)의 딸과 결혼하고 1928년 도쿄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경성제대 강사로 부임, 34년 조교수, 39년 교수가 되었으며, 총독부시학위원, 지도자 연성소 강사 등 총독부 및 군의 촉탁으로 있은 것 등은 가라시마의 행적과 일치한다.

 

    12) 다나카 히데미쓰, 유은경 역, 취한 배, 소화, 1999, 201~209면

 

고무회사 경성지점에 오랫동안 근무하며 조선문인협회에도 관여한 바가 있으며, 전후(해방후)에는 공산당원이 되었다가 당을 탈퇴하고 1949년 다자이 오사무의 묘 앞에서 자결한 다나카 히데미쓰의 자괴감과 자기 합리화에 따른 왜곡이 있겠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사실의 측면에서나 감각의 측면에서 의외로 가라시마의 모습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의 가라시마의 연설은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 중경 측에 있는 중국 작가, 시인 제군과 일찍이 친하게 함께 차를 마시고 또 술을 마시고, 그리고 문학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 적이있습니다. 나 개인도 지금 중경 측에 있는 작가 제군과는 일찍이는 친한 친구였습니다. 일본에는 현재 중경 작가 제군과 나 이상으로 친교가 있는 분이 다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본 문학자가 라디오를 통해 옛 우정을 이야기하고 오늘날의 동아 문학자가 향해야 할 진정한 길을 말한다면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까 생각합니다.13)

 

    13)辛島驍, 文學的望鄕心, 京城日報. 1942.11.14.

 

라디오에서 화평을 권고하는 가라시마의 모습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위의 연설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악한,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가라시마에 대한 묘사는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 교키치(亨吉)의 방황과 대비된다.

이 지점에서 “가라시마 다케시와 쓰다 가타시를 악마 비슷한 악한으로 설정하고 그 아래에서 역사 ‘일제의 주구’로 일한 다나카 히데미쓰 본인을 ‘소극적인 가해자’, 혹은 한발 나아가 일종의 ‘피해자’로 내세우려는 저의가”14) 읽힌다.

 

    14)川村湊, 앞의 책, 29면.

 

이러한 가라시마의 이미지를 변주하여 보여준 소설은 다케다 다이준의 살모사의 마지막 이다.

이 소설에서 한자까지 일치하는 가라시마 다케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나는 군 선전부에서 유명한, 그 가라시마라는 남자를 물론 알고 있었다.얼굴도 본 적이 있었다. 하얗고 약간 살찐 훌륭한 남자였다. 호걸과 신사를 교묘하게 섞어놓았다. 항상 좋은 취향의 넥타이를 매고, 상질(上質)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인간답지 않은 자신에 찬 태도는 그래도 좋았다. 상대의 사상이건 신경이건 전부 꿰뚫어보는 듯한 문화인 흉내를 나는 혐오했다. 권력이란 것이 이런 남자의 모습으로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재미적고 어둡게 생각되었다. 그 유들유들한 변설과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으면 침을 뱉어도 더러운 것이 뒷맛으로 남았다.15)

 

    15)武田泰淳, 蝮のすえ, 蝮のすえ, 愛のかたち, 講談社文藝文庫, 1992, 62~63면.

종전 직후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가라시마는 사회적인 힘과 육체적인 힘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군 선전부에서 중국인은 물론 같은 일본인 마저 권력으로 억누른 가라시마는 부하의 아내를 겁탈하고, 부하가 그 때문에큰 병이 들어 누워있어도 그녀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과잉 성욕자이다.

이러한 가라시마의 이미지는 다나카의 변태 성욕자라는 평가와 연동되어 권력/성욕이라는 이미지를 재생산하는데 주인공 스기(杉)는 그녀를 동정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가라시마를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다.

이러한 살해 행위에 대해 일본문학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전전, 전중, 전후라는 긴 시간을 어쩔 수 없이 억압을 받아 자신의 태도를 본의 아니게 변전시켜 가는 시간을 보낼 수 없었던 ‘나’에게 가라시마 살해의 실행은 말하자면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가라시마 살해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나’가 “제로가 되지 않는” 것, 곧 자기인식의 절대조건으로 파악되어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최대지고의 목적인 행위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16)

 

      16)松本陽子, 武田泰淳‘蝮のすえ’論, 論潮, 2008.6, 14면.

가라시마라고 하는 자에게 군국주의의 모든 악을 뒤집어씌우고 그를 살해함으로써만 전후를 의미의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일본 지식인의 특징을이 소설만큼 잘 드러낸 것은 없다.

이는 다나카 히데미쓰가 가라시마 박사를 악한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피해자’로 설정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라 할 터인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실제로 다케다 다이준은 가라시마 다케시의 도쿄제대 지나문학과 5년 후배였다는 점이다.

다케다 다이준은 알려진 바와 같이 1934년 졸업과 더불어 다케우치 요시미와 함께 중국문학연구회를 만든 사람이다.

다케다가 선배인 가라시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문학연구회의 멤버들이 가라시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케우치의 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다나카 히데미쓰의 <취한 배>. 조선을 그리고 있고 가라시마(辛島)가 가라시마(唐島) 박사로 등장하여 악랄하게 폭로되어 있는 점이 재미있었다.(1948.11.19.)

시오노 씨의 사위 K씨는 당시 경성대학 교수였다.그리고 외견상 급진파였다.유시마세이도(湯島聖堂)에 있는 ‘사문회’라는 한학 계통의 교화단체 기관지에 중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소개를 적어 물의를 일으킨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 K씨를 시오노 씨는 물론 자기 후임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그 점에서 우리들 이단도 이용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K씨의 래디컬리즘을 신용하지 않았다.물론 당시는 아직 전쟁 중의 국책문학에의 편승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962.6.9.)17)

 

      17)竹內好, 竹內好全集(16), 筑摩書房, 1981, 242~243면.

 

여기서 ‘우리들’은 중국문학연구회 멤버를 가리키는데, 위의 두 인용문에서는 다케우치와 다케다를 포함한 중국문학연구회 멤버들이 가라시마 다케시가 보여준 좌익적 성향을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고, 그것이 국책문학에 대한 편승으로 증명되었으며, 그러한 가라시마의 자기기만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통쾌함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전공의 선배로서 자신들보다 먼저 중국현대문학에 눈을 돌렸고, 또 자신과 마찬가지로 루쉰에게 주목했던 가라시마의 허위가 폭로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다케우치의 심정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기에 여기서는 다케다를 비롯한 중국문학연구회 멤버들이 가라시마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에서 그치기로 하는데, 중요한 것은 다케다나 다나카 모두 가라시마를 일반적인 국가권력의 화신으로 그렸고 식민자로서 형상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것은 김사량의 가라시마 묘사와 갈라진다.

일본인의 소설이 가라시마를 군부의 앞잡이로서 조선과 중국에서 활약한 일반적인 권력의 현현으로 그렸다면 김사량의 천마 는 가라시마를 식민자의 한 형태로 보았다.

원래 그는 대학 법과를 졸업하는 것과 함께 조선 구석에 와서 바로 교수가 되었는데 요즘에는 예술 분야 모임에까지 활개를 치고 나가는 등 내지인 현룡이라고 할 법한 존재였다.

돈벌이를 하려는 근성으로 조선에 건너온 일부 학자들의 통폐와 마찬가지로 그도 또한 입으로는 내선동인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은 선택 받은 자로서 민족적으로 생활적으로도 남보다 갑절 낫다는 우월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만 한 가지 예술 분야 회합 등에 나가서는 자신이 조선 문인들처럼 예술적인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그 반동으로 그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히 조선 문인들을 업신여기려고 작정을 하고, 내지에서 누군가 예술가라도 오기만 하면 현룡에게 뒤지지 않을 열정으로 수업마저 쉬고 외출해서,정규 봉급 외의 돈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술을 먹여 가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서 조선인 험담을 학문적인 말로 늘어놓으며,읽지도 않았으면서 입버릇처럼 흠 저것을 보고 안심했다 하며 투덜댔다.18)

 

      18) 김사량, 천마 , 김재용 · 곽형덕 편역, 김사량, 작품과 연구2, 역락, 2009, 47~48면.

스스로 일본인이 되고자 했지만, 식민자의 시선 아래에서 조선의 정체성을 부여받은 현룡이 정신분열을 일으키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식민자의 양가적인 태도이다.19)

 

     19) 윤대석, 경성의 공간분할과 정신 분열 , 식민지 문학을 읽다, 소명, 2013, 161~

164면.

 

조선인에게는 민족적 우월감을 토대로 군림하려 들며, 내지 일본인에게는 조선에 대한 대표성을 주장하는 재조 일본인의 한 전형이 가라시마라는 인물로 드러난 것이다.

김사량이 포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재조 일본인이 처한 식민지라는 장소였다.

재조 일본인은 조선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독특한 정체성이 생겨난다.

그러한 정체성은 내지 일본인에게는 조선적 특성을, 조선인에게는 일본적 특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다케우치가 말했던, 일본 아시아주의가 가진 이중구조,즉 서구에게는 아시아적 원리를, 아시아에게는 서구적 원리를 내세우는 모순된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라시마가 놓인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었고,그가 조선 문화에 깊이 개입하면 할수록 이러한 모순은 심화된다.

이것은 가라시마의 변화를 설명하는 한 시각이 될 수 있다.

3.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

가라시마는 1903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슈유칸(修猷館) 중학교, 야마구치 (山口) 고등학교를 거쳐 1928년 도쿄제대 지나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명말, 청초의 문인인 김성탄에 관한 것이었고 같은 해 경성제대 강사로 부임한다.20)

1928년도에 그가 맡은 강의는 지나희곡, 지나소설(지나문학강독)이었다.

그는 1930년 조교수로 임명되는데, 그 이후 지나근대문학개설(1931년), 중국신문학운동의 회고(1933년)와 같은 과목이 개설된다.21)

이에 대해 김태준은

“지나문학과를 선택하고 그 강좌를 담임한 G박사라고 하는 칠십 노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다시 시경 당송시문 등을 배워보았으나 별로 신기한 것도 없고 헤매는 때에 새로 마요(馬堯)라는 젊은 선생이 오고”라고 하여 “중국문학 연구의 사명은 건설 도상에 있는 신문학의 수입, 소개, 번역이 아니면 안 된다”22)

 

라고 하는 자신의 신념에 가라시마가 영향을 끼쳤음을 고백하고 있다.

천진이 말한 바와 같이 한학이나 지나학이 아니라 현대의 중국문학 연구라는 점에서 다케우치와 공통점이 발견된다.

또한 그 사상적 거점이 루쉰이라는 점에서도 둘은 일치한다.

가라시마는 1926년 8월, 1929년 9월, 1933년 1월 세 번 루쉰을 방문한다.

진23)은 1934년 강좌 담임이 되기 전에 중국에 재외연구자로 파견되었으리라고 추측하지만, 루쉰을 방문한 시기가 항상 방학이고 또 경성제국대학 학보에 재외연구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또 여러 정황을 미루어 짐작하면 재외연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라시마가 현대중국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특히 상해)에 여러 번 다녀왔으며 중국 문학자와의 교류도 빈번했던 것은 그의 글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전문성은 그에게 조선 최고의 ‘현대 중국’, 특히 ‘남중국 전문가’라는 호칭을 가져다주었는데24), 이러한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관심은 기존 지나학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20) 가라시마의 연보는 아들인 가라시마 노보루(辛島昇)가 작성한 辛島驍略年譜·寫眞他(자가판, 1983)에 의거했다.

   21) 박광현, 경성제국대학 안의 ‘동양사학’ , 한국사상과 문화 제31집, 2005.

   22) 김태준, 외국문학전공의 변 , 동아일보, 1939.11.10.

    23) 천진, 앞의 논문, 325면.

    24) “가라시마 씨는 경성제대에서 지나 근대문학을 담당하고 계시고 상하이 방면에 오래 있어서 중지에서 남지에 걸쳐 상당히 연구를 했으며 특히 인테리 계급의 지나인에 대한 지식은 아마 경성에서는 가라시마 이외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支那事變を語る座談會, 朝鮮及滿洲, 1937.11, 32면).

그러나 거꾸로도 생각할 수 있다.중국 현대에 대한 관심이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한학과 지나학에 대한 반성을 가져다준 것이기도 했고 그 계기가 루쉰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라시마의 사상적 거점은 루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상하이에 살며 지금은 골동품 등을 모으며 꽤 부유한 생활을하고 있는 한 일본인이 있습니다.

그는, 아니 이 존경할 만한 노신사는 “한학의 소양이 얼마나 지나에 사는 자에게 필요하며 또한 씨 자신의 체험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던가.”에 대해 나를 위해 특히 그것을 강조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지나는 적어도 ‘지금 상하이의 지나’는 이말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겠습니까?25)

현대 중국에 대한 강조는 가라시마의 여러 글에서 확인된다.

“연작(燕雀)이 어찌 대붕(大鵬)의 뜻을 알리.”를 되뇌는 노한학자의 가르침으로는 “밭에 선소작인의 모습이 학생들의 눈에 떠오르지 않는다.”

라는 비판이나

“서양부인의구두 소리. 땀에 젖은 남자가 미는 등사판의 롤러 소리. 어디에 ‘지나’가 있을까.”26)

      

   25)辛島驍, 滬遊心影, 刀江刊報 , 1929.10.

   26)か・ら・し・ま, 斷夢, 朝鮮及滿洲, 1933.1, 60면.

 

라는 말이나, 다음과 같은 글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나는 쓰는 김에 앞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바란다. 군들이야말로 지금까지의 형태에 사로잡히지 않고 척척 새로운 길을 열어 갈 것을. 지나에 머물지않고 문학이라는 ‘자(字)’ 쪽으로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그리고 또한자기들의 생활을 깊이 파내려가 자기들 주위의 생활을 예리하게 고찰하고거기에 하나의 확고한 것을 건설하고 그리하여 그것으로서 지나의 낡은 것을 보아 가도록. 모두 자기와 자기 주위와 현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지나의 것을 읽는 것이다. 지나의 먼 낡고 어두운 세계에 혼을 빼앗기고 말아 그속에서 무대 뒤 대기실에서나 할 법한 논의만을 가지고 싸우며 자기가 살아가는 넓고 큰 현실 세계에는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않고 게다가 자신의 개인 생활은 완전히 관습에 맡겨두고 마는 그런 낡은 형태는 군들이여 개에게나 주어버려라.27)

지나 연구란 삶에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삶이라고 하는 자신의 지반에서 출발하는 것이 학문이라는 의식을 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현대 중국을 하나의 타자성으로 사고하는, 그러니까 자신을 구성하고 바꾸는 계기로 사고할 가능성은 생기지 않는다.

“자기 주위의 생활을 예리하게 고찰하고 거기에 하나의 확고한 것을 건설하고 그리하여”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철저하게 주체의 입장에서 타자를 사고하는 것이다.

가라시마에게 중국은 처음부터 주체의 바깥에 위치한 타자였고 관찰의 대상이었다.그러한 관찰의 렌즈가 바로 문학이었던 것이다.28)

렌즈 가운데에서도 가장 예리한 렌즈가 문학이었다.

다음에 늘어놓는 몇 편의 소설 개관은 마치 현대지나라는 한 사람의 인간이 우리들 앞에 때에 따라 촬영해놓은 아마추어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중략)

그들 사진은 현대지나의 전생활을 비춘 것은아니다.

어떤 특수한 부분의 촬영이고 카메라를 가진 사람의 예술적 입장도일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넓고 큰 전체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감상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찌그러진 렌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29)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이나 희곡 등을 통해 극히 미세한 곳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30)

   27)辛島驍, 支那の新しい文芸に就て, 朝鮮及滿洲, 1930.2, 69면.

   28) 이런 점으로 보면 다케우치의 ‘태도로서의 문학’과는 대비된다는 것은 명확하다(천진, 앞의 논문, 330~332면). 그러나 문학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곧바로 국책문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29)辛島驍, 現代支那社會の一面, 朝鮮及滿洲, 1935.11, 48면.

   30) 支那事變を語る座談會, 朝鮮及滿洲, 1937.11

1930년대 가라시마가 발표한 글의 상당수는 중국 현대 소설을 요약한 것이다.

그것도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요약한 것을 토대로 중국 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물론 누가 요약한 것인지는 밝히고 있다).

김태준이 “양백화, 최창규, 정래동, 마요 제씨와 함께 손을 붙잡고 한사람이 한 작가의 것을 하나씩 하나씩담당해서 번역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31)

라고 했듯이 ‘지나소설강독’은 강의일 뿐만 아니라, 가라시마의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있다.

이것은 현대 중국의 현실을 포착하는 작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시마의 눈에 포착된 중국의 현실은 어떠했던가.

“북평인 측에서 보면 과학을 사역하는 것은 인간을 사역하는 것보다도 싫은 일”이고, “북평인의 마음에도 먼지가 쌓여 있”지만, 그러니까 낡아 보이는 지나이지만, 현대적 삶의 맹아가 문학 속에서는 보인다는 것, 그러니까 “수조로부터 바가지로 물을 뿌리는 저 무서운 유한적으로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수없이 반복되어 끊임없이 계속되어 가면 언젠가는 먼지를 가라앉힐 수 있지 않을까”32)

은 “불행한 그들이 키득키득 웃고 있는 동안 천하는 태평했던 것이다.

키득키득 웃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져서 그 가운데 누군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무언가 외치면 ‘혁명’이 생”33)( 북경관극기 , 1932)긴다는 것이다.

그러한 중국의 가능성이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라는 현대적 삶, 그러니까 주위 의 현실이라는 렌즈를 통해서였다.

이는 일본에서 프로 문학이 최고조에 달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루쉰이여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벌써 당신의 세계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았는가.

공을기나 아큐의 시대는 지나가려 한다.

錢杏邨따위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당신은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큐의 시 대는 죽었다.

   31) 김태준, 앞의 글.

   32)辛島驍, 北平印象記, 朝鮮及滿洲, 1933.6.

   33)辛島驍, 北京觀劇記, 朝鮮及滿洲, 1932.5.

따라서 루쉰의 시대도, 라고 한 그 말은 錢杏邨한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의 다음 시대가 마침내 오려는 시대가 당신을 향해 내린 선고일 터이다.(중략)

또한 가까운 성방오와 공저로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으로라는 새 책을냈다.

점점 첨예화하려는 현대 지나의 문예는 앞으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리드되어 갈 것이 아닌가.34)

 

    34)辛島驍, 支那の新しい文芸に就て, 朝鮮及滿洲, 1930.1, 71면.

 

현대 중국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렌즈는, 그러니까 가능성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일본이나 구주라는 보편성에 근거를 둘 때만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중국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낳는 것은 그 자체가 현실이기 때문에 긍정해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스승이라 일컫는 루쉰의 시대가 갔다고 과감하게 선언했지만, 일본의 길과 구주의 길, 그리고 중국의 길이 엇갈릴 때 그러한 렌즈는 흔들린다.소설과 희곡 읽기를 통한 중국 사회 읽기는 1939년 도쿄제대에 제출된 박사논문 현대 지나의 문학 으로 정리되었다.

그것이 학위논문으로 통과된 것은 1946년이었고 단행본으로 발간되는 것은 1983년 아들 가라시마 노보루에의해서였다.

그러나 이 박사논문과 별개로 1939년에 발표된 현대 지나의 문학 이라는 논문은 박사논문과 논조가 조금 다르다.

1939년도에 학위논문으로 제출된 논문은 전후에 통과된 박사논문보다 이 논문과 더욱 가깝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다.

이 두 논문에서 모두 가라시마는 현대 중국문학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런 말은 지금 어떤 일부 사람들에게 혹은 듣기 싫은 말일지 모르지만,그것이 듣기 좋은지 싫은지 관계없이, 신해혁명 이후의 현대 지나의 문학이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지나해방의 길이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그리고 또한 그것은 오로지 문학만이 걸어온 길이 아니라 지나의 정치 자체가 원망하고 스스로 걸어온 고난의 길이었다. (중략)

그런데 구지나로부터 근대지나로의 해방이 현대 지나문학이 스스로 부담한 임무였다고 한다면 그 문학상의 표현은 어떠한가.

나는 그것을 세 각도,방향으로 요약해서 말하고 싶다.

 첫째는 반봉건적 방향,

 둘째는 반군벌의 방향,

 셋째는 반제국주의의 방향.

이 세 방향은 소위 현대 지나가 그 해방을 위해 싸워온 세 전장이고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현대 지나 문학의 가장 현저한 세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35)

 

    35)辛島驍, 現代支那の文學, 亞細亞問題講座(11), 1939, 167~172면.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문학이 외국 문학의 모방 추수라고 하지만 “모방하는 데에는 모방할 만큼의 필요가 있었”고 일본이나 소련의 문학의 영향하에 창작된 문학이 애독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지나 측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라는 인식에서 보듯이 중국 사회의 현실과 중국인의 욕망 읽기로서의 소설 읽기라는 면은 1930년대 후반까지 견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30년대 초반과는 조금 다르다.

중국 근대문학의 길이 중국 해방의 길이었고 그 과제가 반봉건, 반군벌, 반제국주의라면 우리의 관심은 가라시마가 과연 반제국주의를 어떻게 보았는가에 놓여 있게 된다.

중국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주로 일본을 향했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논의하기 전에 우선 ‘반군벌’의 항목을 보면 30년대 초반에 프로문학의 길이 중국의 나아갈 길이라고 본 것에 반해 여기서는 국민당이나 공산당을 모두 반군벌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가라시마도

“일본이 끊임없이 지나 작가의 반제작품의 제재가 된 것은 애석하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상해 서안사건을 거쳐 국공 합작이 개시되면 인민전선파의 작가도 민족주의파의 작가도 모두 반제 국방문학에 결속하여 여기서 일본은 반제문학의 유일의 대상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1933년 상해사변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상해의 연극단체가 연합하여 마련한 동북난민 구제를 위한 자선 공연도 루쉰의 권유로 망설임 속에서 관람한36) 가라시마의 실감이었을 터이다.

     36)辛島驍, 魯迅追憶, 14면.

1930년대 후반의 가라시마의 변모는 문학=‘나’의 자리에서 문학=‘일본인’의 자리로 옮겨간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일단 현실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확실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37)라는 것도 언제든지 시국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지식이 된다.

나에 대해서도 이쪽이 지나인적인 생각방식을 충분히 받아들여 그들이 들어서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표현에 의해 이쪽의 의견을 양해시켜 가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략)

결국 지나 및 지나인이라는 상대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일단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근본문제입니다.

모든 일에서 일단 대상을 정확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보고 그 곳에서 사물을 리얼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절대로 필요합니다.38)

    37)辛島驍, 現代支那の文學, 196면.

    38) 支那事變を語る座談會, 1937.12, 54면.

     

이에 따라 현대 중국을 보면 항일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은 인텔리의 기반인 농촌문제이며 농촌 경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공자교 따위를 부르짖는다고 해결될 문제(영웅주의 및 유교의 회복이 현대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이나바의 견해에 대한 반론)가 아니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반제, 반봉건, 반군벌이라는 중국 해방의 방향을 일본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중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자세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에 반해 조선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변모한다.

4. 재조 일본인이라는 장

193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가라시마는 중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듯이 조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했다.

앞에서 살펴본 중국 인식에 대한 태도가 그대로 조선 인식의 태도로 고스란히 전환되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역사의 조선, 골동의 조선을, 조용히 애완하는 사람은 많아도 현실의 조선, 청년의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비교적 적은 것을 생각한다.39)

“경성에 사는 내지인 가운데에는 석양의 성벽에서 시취를 느끼고 출토된 고도기에 깊은 애착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네온 아래 현대조선의 생활고를 절실히 느끼는 사람은 얼마만큼 있을 것인가.”(같은 글)

 

라는 한탄과 더불어 가라시마가 몰두했던 것은 조선 연극 관람이었다.

193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가라시마의 조선 언급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지나와 조선의 신극과 내지인으로서 이라는 글과 앞에서 언급한 문아의 도 에서 그가 조선 연극을 즐겨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연극을 중국에서의 그것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조선 사회의 국외자가 아니라 거기서 조선 원주민과 더불어 살아야 할 재조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고향을 떠나 멀리 이 땅에 살며 더위와 추위와 싸우고 전염병과 싸우고 풍속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상당한 역시 무언가 생활적 감개, 사색, 혹은 신앙이란 것이 자연히 생겨날 터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 내지인 자신이 지금까지 느긋하게 자신들의 생활을 파내려가 돌아보거나 그 진실된 마음을 문학 위에 표현하려고 바란 적은 없었던 것이다. (중략)

자신들의 생활은 혹은 주위 생활을 응시하고 그것을 문학, 특히 소설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노력한 자는 거의 없었다.40

    

    39)からしま, 文雅の徒, 朝鮮及滿洲, 1934.4, 135면.

    40)辛島驍, 內地人として, モダン日本, 1939.11, 170~171면.

 

이러한 재조 일본인 의식은 내지 일본인과의 차별 의식과 조선 원주민과의차별 의식 모두로부터 생겨난다.

1930년대 후반 만주사변과 내선일체로 인해 일본인에게 조선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지만, 그렇기 때문에 많은 문인들이 조선을 방문하지만, 그들이 보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조선인의 삶과 문학이었다는 것이다.

 

“그 관심이 항상 조선인측의 문제이고 동향이었지 이곳에 이미 오래전부터 함께 살고 있는 내지인에 대한 생활적인 사상적인 주의가 너무나도적었음을 우리는 한탄한다.”

 

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1939년도의 반도문학을 개관하면서 일본인 측에 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진단과 통한다.

이쿠나 센류를 창작하는 수많은 단체들이 조선에 있었음에도 삶=문학=근대문학이라는 등식에 근거했던 가라시마에게 재조 일본인 자신의 삶을 표현한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때 조선이라는 지역성이란 일본인을 재조 일본인으로 만드는 타자성을의미할 터이다.

그것은 자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삶과의 접촉도 의미한다.

그 자신은 조선어도 모르면서 조선의 연극을 보러 갔다가 형사로 오인된 경험도 있을 만큼 그러한 타자의 만남을 갈구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국외자로서 조선을 관찰할 때에는 스스로 ‘내지인’으로서 일본 내의 ‘내지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실제로 실현시킨 내선일체로 가능해진 공통의 장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정작 타자와의 만남은 가라시마를 오히려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라시마는 조선을 새로운 가치의 담지자로 놓은 신지방주의론을 주장한 최재서와 각종 좌담회에서 부딪치며 불쾌감을 표현했다.41)

 

      41) 이에 대해서는 윤대석, 1940년대 ‘국민문학’ 연구 ,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참조.

 

이는 가라시마가 공공연하게 최재서가 주간하는 국민문학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나,조선문인협회 간사이자 조선문인보국회 이사장인 가라시마의 글이 국민문학에 겨우 한 편, 그것도 문인협회의 조직 개편을 설명하는 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또 다나카 히데미쓰의 취한 배에서 중국 작가의 편지를 둘러싼 최재서와 가라시마의 추리소설적인 암투로 드러난다.

이러한 점은 개인적인 대립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결국 가라시마에게 지역성이란 타자성을 거세한 지역성임을 잘 드러내 준다.스스로를 재조 일본인으로 규정짓고 내지의 일본인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는오히려 조선에 대한 대표성을 둘러싸고 조선 원주민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지 일본인에 대해서는 조선성을, 또한 조선 원주민에게는 일본성을 내세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구도는 앞에서 말했듯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아시아주의의 이중적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시아에 대한 애정이 아시아의 침략으로 전환되듯이, 조선에 대한 사랑이 조선에 대한 억압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다케우치가 현대 일본 모순에 대해 갈파했던 것의 사례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자신의 5년 선배인 가라시마가 체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케우치와 가라시마의 차이는 문학에 대한 태도의 차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놓인 장소의 차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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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355면.

홍석표, 노신의 식민지 조선 인식에 관한 연구 , 중국어문학지, 2008, 143~174면.

______, 루쉰과 신언준 그리고 카라시마 타케시 , 중국문학 제69집, 2011.11,

133~155면.

3. 국외 논문 및 단행본

井上泰山, 増田渉と辛島驍, 関西大東西学術研究所紀要, 2012.4, 21~46면.

辛島昇, 辛島驍略年譜·寫眞他, 자가판, 1983.

川村湊, <酔いどれ船>の青春, インパクト出版会, 2000.

金世中, 朝鮮半島における‘魯迅’の受容, 新潟産業大學人文學部紀要, 2000, 57~

74면.

竹內好, 竹內好全集(16), 筑摩書房, 1981.

武田泰淳, 蝮のすえ, 愛のかたち, 講談社文藝文庫, 1992.

田中英光, 유은경 역, 취한 배, 소화, 1999.

松本陽子, 武田泰淳‘蝮のすえ’論, 論潮,2008.6, 3~16면.

•국문초록

이 논문은 식민지 시기 한국 문단과 깊은 관련을 지녔던 가라시마 다케시의 문학 연구와 사상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재조 일본인의 특성으로 논의하고자 했다.

그동안 가라시마 다케시는 한국 사회에서 일제 말기의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를 문화의 측면에서 대표하는 악인으로 형상화되었고 일본인의 전후 소설에서도 그는 군국주의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이는 해방 이후 각각의 시점에서 군국주의와 식민지 통치가 가진 폭압성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지우고자 하는 시도였지만, 그의 식민주의가 내포한 구조적 모순성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러나 김사량의 천마 에서는 재조 일본인의 양가성으로 가라시마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문학 연구와 사상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시각을 제공한다.

가라시마 다케시는 경성제국대학 지나어문학 전공 교수로서 중국 연구의 권위자였다.

그의 문학과 사상이 가진 독특성은 중국 및 조선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천착함으로써 그 타자성을 포착하려는 데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중국문학연구회에 앞서, 한학과 지나학을 비판하며 루쉰을 비롯한 중국 현대문학 연구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중국과 조선의 현실을 포착하는 데 사용한 렌즈는 소설과 연극이었는데, 그는 아카데미의 연구자로서 중국 현대소설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중국과 조선의 연극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중국 연극과 소설에 대한 체험을 통해 중국인이 가진 반제국주의적·반일본적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라시마는 중일 전쟁 이후 중국 전문가로서 조선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타자성을 포착하는 시각을 잃어버린다.

재조 일본인 의식이 그것인데, 이는 내지 일본인 및 조선 본토인과의 차별에 근거하여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인과의 관계에서는 일본을, 내지 일본인과의 관계에서는 조선을 대표/재현하는 특권적 위치에 자신을 놓음으로써 조선이라는 타자의 타자성을 거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식민지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가진 이중구조를 실현하는 존재가 재조 일본인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제어:가라시마 다케시, 재조 일본인, 중국 현대문학 연구, 타자성, 아시아주

•Abstract

Colonial Chosun and Karashima Takeshi’s Study on Chinese Modern LiteratureYun, Dae—seok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tries to investigate the Literary studies and thought of KarashimaTakeshi(辛島驍), who involved Korean literary circles in 1940’s, as the character of Japanese of Colonial Korea.Karashima was described as a scoundrel who on the aspect of culture represents oppressive colonial reign of 1940’s in Korea.Also in Japanese postwar novel he was described as the embodiment of militarism. This eval‎uation on Karashimashows the intention that Korean and Japanese tries to charge on him the responsibility of miserable reign, but can not reach to the structural paradox of colonialism.Karashima was a professor of Chinese literature and regarded as the highest authority of China in colonial Chosun.The uniqueness of his thought was originated in trying to catch the otherness of colony by focussing on the present,not past, of colonial societies.This is the reason that he could study on the Chinese modern literature criticising the old studies of Chinese before the society of Chinese literature study of Takeuchi Yoshimi(竹內好).His lens to catch the otherness was novel and play. He was the only academician who introduced the modern chinese literature.He also interested in Chinese and Korean play.In that he could catch the thought of anti—imperialism and anti—Japanese.He lost his lens to catch the otherness by participating in the colonial governance as the expert in China.But he got identity of Japanese of colonial Korea which could be characterized as the ambivalent position.Japanese of colonial Korea castrates the otherness by positioning themselves on difference from not only Korean but also Japanese of Japan.They stand on the identity of Japanese in the relation to Korean, and the that of Korean in the relation to Japanese ofJapan.

This was also the character of Japanese Orientalism(亞細亞主義) that Takeuchi asserted.

•Keywords:Karashima Takeshi(辛島驍), Japanese in colonial Korea, Chinese modern literature studies, the otherness,Japanese Orientalism

 

 

구보학보 13집

 2015년 11월 30일 접수  12월 20일심사료  2015년 12월 21일 게재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