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
민중예술논쟁은 1910년대를 대표하는 논쟁으로 일본 지식인들의 민중론에 큰 영향 을 주었다. 선행연구에서는 처음으로 논쟁을 제기한 혼마 히사오를 간과해 왔으나 본 연구는 혼마의 주장에 주목해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우선 혼마는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했던 톨스토이주의에 대항하여 “민중예술” 과 “일반적 예술”을 분리시켰다. 이로써 혼마는 민중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는데 성 공한다. 게다가 혼마는 교육을 받지 못 하는 이들의 “민중예술”을 “고등문예”와 동등하 게 취급한다. 이처럼 혁신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혼마가 예술에 내재하는 가치보다는 예술이 주는 쾌락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혼마가 이런 주장을 펼친 사상 적 배경을 조사해보면 윌리엄 모리스로부터 혼마가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혼마는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을 수용하여 민중이 즐기는 문화와 예술을 있는 그대로 긍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혼마의 민중예술론에 오스기 사카에가 반발한 이유도 쉽게 이해된다. 오스기는 로맹 롤랑을 번역하며 신흥계급에 의해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오스기는 민중이 즐기던 기존의 예술을 부정하게 된 다. 혼마와는 달리 오스기는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현실의 민중을 도외시했던 것이다.
Key Words: 민중윌리엄 모리스예술 (popular arts), 민중 (people), 혼마 히사오 (Honma Hisao),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오스기 사카에 (Osugi Sakae)
Ⅰ. 머리말
1910년대 일본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민중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중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그런 민중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민중에 관한 담론을 활발히 발표하게 된다.
그 가운데 민중에 관한 의견이 크게 충돌하여 논쟁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1916년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민중예술논쟁 이었다. 민중예술논쟁은 혼마 히사오 (本間久雄, 1886-1981년)의 민중예술의 의의 및가치 1)에서 촉발되어수많은지식인이참가하는 형태로 발전한, 1910년 대를 대표하는 대논쟁이었다.
이 민중예술논쟁에서는 민중을 정의하는 문제 에서부터 새로운 민중의 출현을 바라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제들이 다루어졌으며 그 논의는 후대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렇게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격론을 주고받은 민중예술논쟁은 민중 에 관한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 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예술논쟁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면 1910년대는 물 론 그 이후의 근대 일본 사상에서 민중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심도 깊게 이 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는 민중예술논쟁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 도 그 전체상을 드러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민중예술론을 처음으로 제창한 혼마보다 혼마에 반발한 가토 가즈오(加藤一夫, 1887-1951년) 와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1885-1923년)와 같은 지식인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 고 그들의 입장에서 민중예술논쟁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토 가즈오 와 오스기 사카에에 중점을 둔 선행연구에서는 톨스토이와 로맹 롤랑의 민중 론이나 후대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관련지어 민중예술논쟁의 성격을 규정하 는데 그치고만다.
그러나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혼마의 사상을 재조명하면 민중예술의 새로운 면모를 밝히고 민중예술에 관한 사상적 지형도를 다시 그릴 수 있다.
본 연구 에서는 혼마의 민중예술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그 사상적 배경을 조사해 서 민중예술논쟁의 범위와 지평을 확장하고자 한다.
1) 本間久雄 民衆芸術の意義及び価値 , 早稲田文学, 1916.8. 본 연구에서는 초출이 아닌 本間久雄
近代文学之研究, 北文館, 1917.에 실린 판본을 이용했다
Ⅱ. “일반적 예술”과 “민중예술”을 구분한 혼마 히사오의 업적
우선 본 논문에서 논의하는 민중예술논쟁에 대한 선행연구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스기 사카에가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서 “혼마군이 일본의 민중예술론의 최초의 제창자였다.”2)라고 단언했듯이 혼마 히사오의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에서부터 민중예술논쟁이 시작된 사실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선행연구에서는 최초로 민중예술론을 제기한 혼마보다 그를 비판한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쟁사를 정리해 왔다. 예를 들어, 민중예술논쟁이 갖는 중요성을 전후에 처음으로 논의한 세누마 시게키(瀬沼茂樹)에 따르면 민중예술논쟁은 후대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런 의미에서 혼마의 논적인 가토 가즈오와 오스기 사카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3) 또한 박양신도 일본의 민중예술론을 분석하면서
2) 大杉栄 新し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302.
3) 瀬沼茂樹 民衆芸術論 前後 , 文学第18巻第7号, 1950.7.에 따르면 “민중예술론에 관해서는 오스기
사카에가 로맹 롤랑의 민중극론을 일반화하며 평민 노동자를 위한 예술의 기초를 지어 (프롤레타리아
문학와 같은-인용자) 제4계급의 문학으로의 길 을 열었고, 가토 가즈오의 민중예술론은 말하자면 그 중간
단계에서 톨스토이의 사 상과 같은 인간주의를 적용시켜 오히려 그 이론을 애매하게 한 단점이 있음을
명백 히 밝히려 했다.”(瀬沼茂樹 民衆芸術論 前後 , 現代日本文學大系96 文藝評論集, 筑摩書房,
1973, p.170.)라 하였다.
“민중예술론은 혼마의 제기보다는 그후 오스기 사카에, 카토 가즈오가 새 로운 문제를 더해감으로써 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4)고 말하며 특히 오스기에 이르러 민중예술이 “사회 운동으로의 지향성이 뚜렷해졌다”5)고 주 장한다.6)
이렇듯 선행연구에서는 민중예술논쟁이 가토 가즈오와 오스기 사카 에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발전하는 양상에 집중하며 혼마는 이러한 논쟁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가토 가즈오나 오스기 사카에 보다는 혼마의 민중예 술론에 집중하여 민중예술론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910년대에 민중예술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이유는 수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 일으킬 만큼 혼마의 사상이 참신하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중예 술논쟁을 촉발한 혼마의 사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가토 가즈오나 오스 기 사카에와 같은 후대의 담론만을 분석하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가토 가즈오나 오스기 사카에 못지않게 혼마 히사오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혼마는 1909년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윌리엄 모리스, 오스카 와일드, 엘렌 케 이 등을 일본에 소개한 영문학자로 활약하였다.
4) 박양신 다이쇼 시기 일본, 식민지 조선의 민중예술론; 로맹 롤랑의 “제국” 횡단 , 한림일본학 22권
, 2013.5, p.39.
5) 박양신, 위의 논문, p.41.
6) 박양신 외에도 모리야마 시게오는 혼마 히사오로 인해 민중예술논쟁이 촉발은 되었 지만 오스기
사카에의 사상이야말로 1910년대 민중예술론의 “진정한 모태”였다고 주장 하였다.
(森山重雄 民衆芸術論 , 日本文学第12巻第7号, 1963, p.567, 참조)
또 김문 봉도 “민중예술론의 대두와 활발한 논의는 이후 노동문학, 제4계급의 문학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일본문학의 진보적 경향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등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라고
민중예술논쟁을 역사적으로 위치 지으며 제4계급문학을 개척한 오스기 사카에의 공적을 강조했다
(김문봉 민중예술론고 , 일어일문학 10권, 1998.8, p.244, 참조).
특히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 치 를 발표한 이후에 잡지 와세다 분가쿠(早稲田文学)의 편집인으로서7) 오 랜 기간에 걸쳐 번역과 평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사회 다방면에 영향력을 발 휘했다.
따라서 혼마의 사상을 경시했던 선행연구와 달리 본 연구는 혼마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 이제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민중예술논쟁의 새로운 가 능성을 타진해보려 한다.
그렇다면 먼저 혼마의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의 혁신성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의 사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민중예술”과 “일반적 예술” 을 분리시킨 것에 있었다.
혼마에 따르면 “민중예술”은 톨스토이가 말하는 “진 정한 예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상하귀천의 모든 계급과 관 련 없이 누구에게나 이해되고 감상되어야 하는 종류의 것”, 즉, “일반적 예술” 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 했지만 이와 달리 “민중예술”에는 특별히 “민중을 위한 예술”이란 조건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 혼마의 생각이다.
여기서 혼마가 말하는 “민중”이란 “상류계급과 귀족계급을 제외한 중류계급이하 노동계급 모 두를 포함하는 일반민중, 일반평민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에 그 런 “민중”을 위한 예술은 “일반적 예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다 시 말해 톨스토이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을 추구한데 반해 혼마 는 특수한 계층만이 향유하는 예술에 주안점을 두었다.
톨스토이의 예술론에 따르면 “상하귀천의 모든 계급”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예술은 당연히 존재하 며 그런 예술 작품만이 “진정한 예술”의 자격을 지닌다. 거기에 반해 혼마는 “상류계급과 귀족계급”과 “중류계급이하 노동계급”이 선호하는 예술이 다르며 이들 사이에 공통분모는 없다고 역설한 것이다
7) 1891년 창간한 문예잡지 와세다 분가쿠(早稲田文学)는 서구의 최신이론을 소개하 는 한편, 수많은
자연주의 문학자, 프롤레타리아 문학자, 진보적 성향의 작가들을 배출하며 일본 근대 문학을 이끌어왔다
. 일시 휴간한 잡지를 평론가 시마무라 호게 쓰(島村抱月)가 1906년에 복간하게 되는데
(이를 제2차 시기라 부르는데 1927년까지 263권을 출판하게 된다), 시마무라 호게쓰가 죽은 후,
1918년에 와세다 분가쿠의 편집주임을 맡은 이가 혼마 히사오이다.
당시 와세다 분가쿠의 명성을 고려한다면 지식인 사회에 대한 혼마 히사오의 영향력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27년에 와세다 분가쿠가 휴간한 뒤에는 혼마 히사오는 와세다 대학 교수로 부 임하여 후학들을 양성한다.
여기에서 고려해야할 사실은 당시 일본에서 톨스토이의 예술론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8) 1890년대 말부터 일본에 소개된 톨스 토이는 시라카바파 예술가들의 활약으로 1910년대가 되면 서양을 대표하는 대문호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설파한 톨스토이의 예술 론도 1906년에 번역되어 지식인들의 애독서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한 톨스 토이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하나로 가토 가즈오라는 문학자도 있었다.
그는 혼마의 민중예술론이 발표되자 톨스토이의 예술론에 근거해서 혼마를 반박하기 시작했다.
가토의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9)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전문 예술 가가 아닌 노동자가 주도하는 예술의 출현을 예언했으나, 이때 톨스토이가 말 하는 노동자란 황폐한 정신세계를 지닌 보통의 노동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 의 인민”을 의미했다. 따라서 혼마가 “민중이란 말할 것도 없이 평민(平民)을 의미한다.
즉, 상류계급과 귀족계급을 제외한 중류계급 이하 노동계급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민중, 일반평민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정의한 것에 반해 가토는 다음과 같이 “민중”을 정의하고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민중이란 곧바로 평민 혹은 노동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한 민중이 되기 위해선 진실로 인간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상류계급자도 지식계급자도 진실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현재 생활 의 불합리를 깨닫고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할 때, 또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생활 혁명을 일으킬 때 그는 귀족도 아니고 부호도 아니고 민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10)
8) 당시 일본에서 톨스토이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선 柳富子 トルス トイと日本, 早稲田
大学, 1998.와 이예안 홍명희의 “예술”, 개념과 운동의 지반-일 본 경유 톨스토이의 비판적 수용- ,
개념과 소통 12권, 2013.12.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9) 加藤一夫 民衆は何処に在りや , 新潮, 1917.1.
10) 加藤一夫 民衆は何処に在りや , 民衆芸術論, 洛陽堂, 1919, p.9.
여기서 “진정한 민중”이란 “진실로 인간을 자각”한 “진정한 인간”이며 가토 는 그런 “민중”의 예로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로맹 롤랑을 들고 있다. 이렇듯 가토는 지극히 이상적인 민중론을 전개하며 “일반민중”이 아니라 “진 정한 민중”을 전경화하고 있다.11) 또한 가토는 “민중예술을 위해서”12)에서 인 간성을 스스로 깨달은 “신흥민중”이 만든 “진정한 예술”이야말로 “민중예술”이 라 단언한다. 이런 가토의 민중예술론에 접한 혼마는 인간성을 자각하고 그 본질을 탐구 하는 건 “진정한 예술가”의 임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민중예술”의 과제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혼마의 “민중예술의 문제”13)에 따르면 가토는 “예술”과 “민중예술”을 구분 짓지 않는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민중예술”의 대상은 전 인류가 아니라 “민중”에 제한되어 있다. 그러기에 “진정한 민중”이 되지 못 하는 노동자도 “민중”에 속하듯이 “진정한 예술”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문화도 “민중예술”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민중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평민계급, 노동자 계급”이 만들고 향유한다는 점에 있으며 그 외의 인간성 이나 예술성과 같은 가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거듭해서 혼마는 “민중예술은 절대로 톨스토이류의 일반적 예술이 아니다”14)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선행연구에서는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인생을 위한 예술론” 이라 부르고 1910, 20년대 문학을 주도하는 사상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과도하 게 강조해왔다. 그렇기에 민중예술논쟁에 관해서도 가토와 같은 톨스토이주 의자들의 입장에 입각해서 담론을 정리할 뿐, 혼마 주장의 새로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를 풍미했던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그와 다른 예술론을 천명했기에 혼마의 주장이 참신했다는 점은 강조 할 필요가 있다.
다음 장에서는 혼마의 혁신성에 관해 다른 시각에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11) 세누마 시게키는 이를 두고 가토는 실제 민중이 아니라 “이데아로서의 민중”을 염두 에 두고 논지를
전개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해선 瀬沼茂樹, 前掲書, p.167.을 참조 할 것.
12) 加藤一夫 民衆芸術の為に , 時事新報, 1917.7. 본 연구에서는 초출이 아닌 加藤一夫 民衆芸術論,
洛陽堂, 1919.에 실린 판본을 이용했다.
13) 本間久雄 民衆芸術の問題 , 早稲田文学, 1917.8. 14) 本間久雄 民衆芸術の問題 , 生活の芸術化,
三徳社, 1920, p.101.
Ⅲ. 쾌락을 강조하는 혼마의 민중예술론
혼마가 톨스토이의 일원론적인 일반 예술론을 부정하고 “상류계급과 귀족 계급”의 예술과 “민중예술”을 나눴을 때 그 기준은 단지 정치경제적인 것에 있 지 않았다.
혼마는 “그 예술(민중예술- 인용자)이란 <고등문예 (리버럴 아트)> 와는 달리 노동자들도 잘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통속적이고 보편적 이고 비전문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여 “민중예술”과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고등문예 (리버럴 아트)”를 거론하고 있다.
혼마의 말에서 추론하 자면 “민중예술”과 다른 “고등문예”는 “고답적이고 특수하며 전문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가치들은 정치·경제적인 지위 보다는 교육 수준이나 문 화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정치·경제적인 위치와 무관하게 교육 수준이 높 고 문화적인 우월감을 지닌 이들이 선호하는 예술이 “고등문예”라 한다면 교 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화가 “민중예술”이라는 것이다.
혼마의 급진성은 교육을 받지 못 하는 이들의 “민중예술”을 “고등문예”와 동등 하게 취급하는 것에 있었다.
혼마는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의 결론 부분 에서 “고등문예”와 “민중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민중 예술은 위에서 논했듯이 소위 고등문예 및 전문적인 예비지식을 지니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고급예술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지금 여기서 그 양자의 가치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통속적이며 비전문적이 라는 이유로 소위 민중 예술 자체의 가치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15)
15) 本間久雄 民衆芸術の意義及び価値 , 近代文学之研究, 北文館, 1917, p.260.
위에서 혼마가 “고급예술”이란 용어를 쓴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일본에서 “예술”이란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예 안에 따르면 오늘날 일본에서 사용되는 예술 개념은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과 정에서 탄생했으며 이는 학교 제도의 설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16)
16) 이예안, 앞의 논문, p.7. 이와 같은 내용은 磯田光一 訳語 文学 の誕生-西と東の交 点 , 鹿鳴館の系譜
, 講談社, 1991.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860년대만 해도 ‘기술’과 ‘기능’을 의미하는 단어였던 “芸術”은 일본 정부가 미 술학교(東京美術学校)를 설립하고 도쿄 제국대학에 미학(美学) 강좌를 신설하 게 되면서 점차 아름다움에 관한 용어로 의미가 변모한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왜 혼마가 “예술”이라는 용어 대신 “전문적인 예비지식 을 지니지 않으면 이해 못하는 고급예술”이라는 말을 썼는지 납득이 간다.
당 시 예술은 엘리트 학교 교육 제도를 통해서 그 의미가 규정되고 있었는데 그 개념을 사용하는 지식인들에게는 이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그래서 혼마는 “예술”이라는 용어 앞에 굳이 “고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그 특수성을 환기시 키고 예술 영역 안에 “민중예술”이 들어설 여지를 마련했다.
바꿔 말하자면, 혼마는 당시 통용되는 예술이란 엘리트 지식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급예 술”에 불과하며 그런 “고급예술”에 포함되지 않는 “민중예술”도 하나의 예술로 서 인정할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처럼 혼마가 “민중예술”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는 첫째, 혼마와 같은 지식 인이 인정하면 안 될 정도로 민중이 즐기는 예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혼 마는 “민중예술”의 예로서 활동사진이나 아마추어 연극, 연중행사 등을 들고 있으나 당시 서민과 노동자들이 실제로 그와 같은 문화를 즐기고 있었기에 혼 마도 여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혼마의 민중예술론이 나타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혼마가 작품에 내재 하는 가치보다 작품을 통해 얻는 효용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서민 과 노동자들의 문화가 발전한다고 해도 그것을 예술로서 인정하기란 쉽지 않 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야스나리 사다오(安成貞雄, 1885-1924년)의 “당신은 귀 족인가 평민인가-혼마 히사오에게 묻는다”17)는 “야외극장, 활동사진, 비전문 가 연극, 연중행사”을 예술이라 부르는 것에 강한 위화감을 보이며 이와 같은 문화대신 훌륭한 “고등예술”을 민중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7) 安成貞雄 君は貴族か平民か―本間久雄君に問う , 読売新聞, 1916.8. 본 연구에서는 초출이 아닌 日本
プロレタリア文学評論集第1巻 前期プロレタリア文学評論集, 新日 本出版社, 1990.에 실린 판본을
이용했다.
Ⅳ. 혼마의 민중예술론에 끼친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
이 장에서는 혼마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혼마의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가 엘렌 케이(Ellen Karolina Sofia Key, 1849-1926년)와로맹롤랑(Romain Rolland, 1866-1944년)을빈번히인용한 것에서 당시 혼마가 엘렌 케이와 로맹 롤랑을 참조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혼마가 제대로 엘렌 케이와 로맹 롤랑을 이해하지 못 했다는 비 판은 논쟁 당시부터 제기되었으며18) 선행연구도 이를 실증하고 있다.
예를 들 어, 소다 히데히코 (曽田秀彦)는 “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의 배경에는 로맹 롤랑은 물론 본질적인 면에서 엘렌 케이의 영향도 보기보다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19)고 하였다.
소다에 따르면 혼마는 엘렌 케이나 로맹 롤랑 대신 쓰보 우치 쇼요(坪内逍遥)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그의 민중예술론도 사실상 쓰보우 치의 연극운동인 국민극론(国民劇論)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혼마는 연극에 구애받지 않고 일반적인 예술에 관한 이론을 전 개하고 있었으며 그 영향력도 비단 연극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혼마의 민중예술론에 영향을 끼친 사상이 있다면 이는 소요의 연극론보다 폭 넓고 체계적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민중예술론을 발표한 1910년대 후반의 혼마의 저술을 살펴보면 혼 마가 로맹 롤랑이나 엘렌 케이가 아니라 다른 예술가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 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시인이자 공예가, 사회주의자인 윌리엄 모리 스 (William Morris, 1834-1896년)로 당시 혼마는 윌리엄 모리스를 일본에 소개 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1910, 20년대에 혼마는 모리스의 연구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20)
일본에 모리스가 수용된 경위를 조사한 1934년의 도미다 후미오(富田文雄)의 글에 따르면 당시 모리스의 문학을 분석한 서적이 열권 있 는데 그 중 세 권이 혼마 히사오의 저작이었다.21)
이는 모리스의 문학을 논한 혼마의 연구서만을 열거한 것으로 그 외에 혼마가 모리스의 예술에 관해 저술 한 서적을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22)
18) 오스기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서 엘렌 케이와 로맹 롤랑을 직접 인 용하며 혼마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19) 曽田秀彦 ゆがんだ鏡-本間久雄の 民衆芸術論 , 大正演劇研究 第5号, 1994.10, p.69.
20) 혼마의 업적을 빼놓고 1910, 20년대에 일본에서 모리스가 수용되는 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혼마와 모리스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으로는 川端康雄 大 槻憲二とモリス誕生百年祭 ,
アーツ·アンド·クラフツと日本, 思文閣出版, 2004.와 平田耀子 ウィリアム·モリスと本間久雄 ,
人文研紀要第66号, 中央大学人文科学研 究所, 2009. 등이 있다.
21) 富田文雄 文献より見たる日本に於けるモリス , モリス記念論集, 川瀬日進堂書店/ 西澤書店, 1934,
pp.194-195. 이 논문에서 언급되는 혼마의 저작은 ウイリアム·モリ スの民衆芸術論 라는 장이 있는
現代の思潮及文学, 大同館, 1920.과 近世英文学 上の二つの快楽主義 에서 모리스를 언급한 近代芸術
論序説, 文省堂, 1925.과 第十二章英国唯美派(一)英国唯美派の経路―ペイタアとモリス 라는 문장을
실은 欧州近代文芸思潮概論, 早稲田大学出版部, 1927.이다.
22) 예를 들어 혼마는 잡지 와세다 분가쿠에 실었던 모리스의 비평문을 모아 本間久 雄 生活の芸術化,
東京堂, 1925.를 출판한다. 이 책에서는 모리스의 초상화를 머리 말에 실으며 生活の芸術化 과 美感の
頽廃 , ウィリアム·モリスの生涯 라는 세 장 에서 모리스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렇듯 1910, 20년대에 모리스를 열심히 분석하며 그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있었기에 혼마의 민중예술론에도 모리스의 영향이 선명히 드러난다.
먼저 혼 마 자신이 1971년에 과거의 민중예술논쟁을 회고하며 “민중예술”이라는 명칭 은 모리스의 “the art of the people”에서 파생되었다고 밝히고 있다.23)
또한 1917년에 출간한 근대문학의 연구24)에서는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의 바로 다음에 윌리엄 모리스를 논한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25)를 게 재하고 있다.
이 문장은 후에 윌리엄 모리스의 민중예술론(ウイリアム·モオ リスの民衆芸術論) 으로 개명되어 혼마의 현대의 사조와 문학26)에 다시 실 리는데 여기서도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의 직후에 위치하고 있다.
민중예 술논쟁을 불러온 문장 바로 다음에 모리스의 예술론을 배치시키고 이를 민중 예술론이라 이름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혼마와 모리스의 민중예술론은 상통하고 있다.
23) 本間久雄 民衆芸術論争 のころ , 日本近代文学 第14号, 1971.5. 참조.
24) 本間久雄 近代文学之研究, 北文館, 1917.
25) 本間久雄 芸術の生活化·生活の芸術化 , 新小説 第22巻第6号, 1917.5. 본 연구에서 는 초출이 아닌
本間久雄 近代文学之研究, 北文館, 1917.에 실린 판본을 이용했다. 26) 本間久雄 現代の思潮と文学,
大同館書店, 1920
그러면 이러한 혼마의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의 내용에 대해 알 아보도록 하자. 민중예술논쟁이 한창이던 1917년에 발표된 이 문장은 당시 문 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27)
이 글은 “민중 생활과 예술의 관계를 고찰했다는 점에서 모리스는 근대의 어떤 사회주의자보다도, 아니 민중예술론의 주창자 로 일컬어지는 로맹 롤랑이나 엘렌 케이보다도 더욱 철저했던 것 같다.”28)로 시작하며 로맹 롤랑이나 엘렌 케이보다 모리스의 민중예술론에 주목해야 하 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문장의 대부분을 모리스의 강연집 내용29)과 여기 에 대한 혼마의 감상을 서술한 것으로 구성했다.
이러한 글을 작성한 이유를 짐작해보면 혼마는 민중예술논쟁이 격화되면서 로맹 롤랑이나 엘렌 케이를 주로 인용한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치 만으로는 자신의 주장이 제대로 전달 되지 않는다고 여긴 듯이 보인다.
그러기에 자신이 전공하는 모리스를 전면에 내세워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를 작성하고 민중예술의 의의 및 가 치 를 보충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혼마의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쾌락(快 楽)”과 “행복(幸福)”으로 예술은 이것을 제공할 때만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혼 마에 따르면 모리스는 “자유로운 국민에게는 즐거움이 되고 학대받는 국민에 게는 위안”을 주는 작품이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모리스의 생각을 적용 하면 이제까지 눈여겨보지 않던 일용품도 새롭게 예술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리스는 민가와 마을 교회와 같은 건축물이나 일상 생활에 쓰이는 공예품에 주목하며 이들이 보여주는 미학을 설파했다.
모리스에 따르면 건축물과 공예품이 훌륭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를 사 용하는 소비자만이 아니라 이를 만드는 제작자에게도 “행복”과 “쾌락”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27) 예를 들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의 내용에 반발하며
친구(松岡譲)에게 보내는 1917년 5월 7일자 편지에 “혼마 히사오의 글을 읽고 비관했다.
저렇게 되면 구제할 수가 없다.
구제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딱해서 어쩔 도리가 없다.”( 芥川龍之介全集 第18巻, 岩波書店, 1997,
p.110.)라며 심한 불쾌감을 드러내다.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혼마의 글은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28) 本間久雄 芸術の生活化·生活の芸術化 , 近代文学之研究, 北文館, 1917, pp.263-264.
29) 혼마는 주로 모리스의 Hopes and fears for Art 와 Art, its Producers라는 강연집에 기 초해서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을 썼다고 글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모리스가 말하는 제작자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라던가 특별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를 지칭하지 않는다.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일용품도 훌륭 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듯이 생필품을 만들면서도 노동의 쾌락을 느낄 수 있 다면 그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모리스는 일용품들을 생산하 는 보통 노동자들을 어느 예술가 못지않게 높이 평가했다.
혼마는 모리스가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들(極めて普通なる平凡人)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을 대 서특필하며 바로 여기에 모리스의 예술론의 핵심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혼마의 모리스 비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그것들(건축물이나 공예품 - 인용자)은 단지 보통의 직인들이 매일 평범 하게 노동을 하여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할 점 은 그들이 매일 노동하면서도 그 가운데 쾌락을 느낀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 면 그들은 쾌락을 느끼면서 매일 노동한 것이다.
즉, 모리스는 오늘날 우리 가 경이롭다고 인정하는 훌륭한 건축이나 공예미술품을 옛날의 장인들이 남 긴 것을 보고 옛 장인들이 노동의 쾌락을 느꼈기에 다시 말해 장인들이 노동을 예술화하였기에 이러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말하려고 했 다.30)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에서 혼마는 “진실한 예술이란 노동 중에 느끼는 쾌락을 표현한 것이다.”31)라는 모리스의 말을 인용하며 평범한 이들이 쾌락을 만끽하며 만든 물품들은 하나같이 경이로운 예술작품이 된다고 주장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렇듯 작품에 내재한 가치가 아니라 작품의 효 용에 따라 예술성을 물으면 보통 노동자와 엘리트를 우열관계로 차별 지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30) 本間久雄, 上掲書, p.268.
31) 本間久雄, 上掲書, p.271. 이는 1883년에 William Morris가 강연한 “Art under Plutocracy” 의 구절
인 “ART IS MAN’S EXPRESSION OF HIS JOY IN LABOUR.”(William Morris, Architecture,
Industry and Wealth, London, New York: Longmans, Green, and co., 1902, p.175)를 번역한
문장으로 추정된다. 혼마는 다른 글에서도 이 문장을 빈번히 인용 하고 있다.
예술의 생활화·생활의 예술화 뿐만 아니라 다른 문장에서도 혼마는 모리 스의 사상을 “사회학적 쾌락주의”32)라 부르며 유독 쾌락에 관한 모리스의 글 들을 빈번히 인용하고 있다.
이는 혼마가 모리스를 사상적 토대로 삼아 엘리 트들의 예술 개념을 반박하고 보통 노동자에게 적합한 민중예술론을 전개하 려 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혼마는 쾌락과 예술을 연결 짓는 모리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엘리트가 아닌 보통사람이 주역이 되는 예술 개념 을 제시한 것이다.
Ⅴ. 오스기 사카에의 신흥계급과 혼마의 민중 개념의 차이
이러한 혼마의 민중예술론을 반박하면서 오스기 사카에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33), 정의를 구하는 마음 34), 민중예술의 기교 35)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민중예술론을 피력하게 된다.
그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전술했듯이 선행연구에서는 민중예술논쟁에서 오스기가 수행한 역할을 강조 하고 있기에 이 장에서는 오스기의 민중예술론을 분석하고 그것이 혼마의 사 상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논술하려 한다. 오스기는 혼마의 민중예술론을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의 논점을 명확히 드 러냈지만 이 둘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도 있다. 민중예술의 기교 에서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온순함의 미덕을 존경하지만 노예적 상 황에 놓여 있을 때의 참을성은 오히려 비도덕적이라 생각한다.”36) 고 말한 바 와 같이 오스기는 당시 유행했던 톨스토이 사상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32) 本間久雄 文學論攷, 東京堂書店, 1931, p.78.
33) 大杉栄 新し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早稲田文学, 1917.10. 본 연구에서는 大杉栄 正義を求める心
: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에 게재된 판본을 이용했다.
34) 大杉栄 正義を求める心 , 1918.1. 35) 大杉栄 民衆芸術の技巧 , 1918.7.
35) 大杉栄 民衆芸術の技巧 , 1918.7.
36) 大杉栄 民衆芸術の技巧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329
또한 오스기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아름다 움으로 느껴지는 것도 민중에게는 추함이 될 수 있”으며 “현재 일반적으로 통 용되는 예술적 교양을 널리 보급하면 예술의 선(善) 혹은 민중의 선(善)에 이 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오만한 낙천주의라 할 수 있다”37)고 했다.
다 시 말해, 오스기는 “선택된 사람들” 혹은 “예술적 교양”과 차별되는 민중의 독 특한 미의식과 문화를 인정하고 옹호했던 것이다.
이는 혼마가 일원론적인 톨 스토이 예술론을 비판하고 민중만의 예술과 문화를 긍정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게다가 오스기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서 혼마가 “People”을 “민중”이라 처음 번역하고 민중예술논쟁도 제기했다며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 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기는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울분이 혼마의 논의에는 결여되어 있어 애매하고 미지근하다고 비판한다.38)
다시 말해, 혼마 에게는 현실을 전복하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이 때 오스기의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이 강조하는 감정은 “증오”와 “반항”이었다. 오스기의 글에 나타나는 “증오란 생활본능(生活本能)의 하나의 양식이다. 생명에 대한 위험을 느끼는 것이다.”39)라던가 “노동자가 갖고 있는 강렬한 생활본능과 반항본능(反抗本能)”40)이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오 스기에게 “증오”와 “반항”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위협받고 억압된 민중은 지배층보다 강렬한 “증오”와 “반항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37) 大杉栄 新し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p.310-311.
이는 ロメン·ロオラン(著), 大杉栄(訳) 民衆芸術論, アルス, 1921, p.6.의 내용과 일치하여 오스기가
로맹 롤랑의 글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8) 大杉栄 新し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299.
39) 大杉栄 正義を求める心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320. 40) 大杉栄 民衆芸術
の技巧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329.
오스기에 따르면 민중의 본능이 분출할 때 “증오미(憎悪美)”와 “반항미(反抗美)”와 같은 아름다움도 탄생하는데 민중예술은 이를 토대로 하고 있다.
오스기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서 “증오미”와 “반항미”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예술론은 명백한 민중예술론이었다.
내가 요구하는 예술은 로맹 롤랑 이 말하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이었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이 예술론에 반대한 것은 민중예술론을 최초로 제창한 혼마 히사오 본인이었 다.
혼마 히사오군은 증오에는 미가 없다고 했다, 반항에는 미가 없다고 했 다.41) 전술했듯이 혼마는 다수가 즐기는 예술을 “민중예술”이라 지칭하고 “쾌락” 이나 “위안”, “행복” 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 혼마에 대해, “증오”와 “반항”의 아름다움을 제창한 오스기는 당연히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스기의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 따르면 지금의 민중이 즐기는 멜로드라 마는 “민중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최면제”나 “마취제”와 같은 것으로42) 마땅히 부정해야할 대상이다.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쾌락”을 강조하며 위안과 오락을 긍정했던 혼마의 생각과 같지 않다.
혼마와 오스기의 차이는 민중예술의 주역을 다르게 상정한 것에서도 나타 난다.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혼마는 민중예술을 향유하거나 창조하는 이로 보통사람을 내세운다.
혼마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즐 기는 예술이 곧 민중예술이었다.
거기에 반해 오스기가 거론한 대상은 “신흥계급(新勃興階級)”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 따르면 새롭게 부상할 신흥계급이 장래에 만들 예술이 바로 민중예술이었다
41) 大杉栄 新し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p.300-301.
42) 이는 ロメン·ロオラン(著), 大杉栄(訳) 民衆芸術論, アルス, 1921, p.107.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쓴
것이다. 오스기는 정의를 구하는 마음 에서도 똑같이 로맹 롤랑을 인용하며 멜로드라마는 최면제이며
마취제라고 비판하고 있다. 大杉栄 正義を求め る心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319.
를 참조할 것.
이 신흥계급이 란 기존의 억압적 체계를 전복시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주체이며 그렇게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수 있기에 그들은 민중예술의 주역도 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로맹 롤랑의 민중극론(Le théâtre du peuple, 1903년)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오스기는 이 책을 1917년에 민중예술론(民衆芸術論)이라 번역하며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혼마가 모리스의 사상을 “민중예술 론”이라 부른 것을 상기해보면 혼마와 오스기의 차이는 각각의 사상적 배경이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스기의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 로운 예술 에서도 롤랑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 중에서도 오스기가 인용 한 롤랑의 다음 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흥계급은 자신만의 예술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사상과 감정을 밝히지 않으려 해도 밝힐 수밖에 없는, 그 젊고 발랄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또 늙고 기울어진 구 사회에 대항해 전투 기관이 되는 새로운 예술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러한 예술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있는 예술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43) 위의 인용문에서 오스기는 롤랑의 입을 빌려 민중예술이란 과거의 지배계 급과 단절된 예술이라 확언하고 있다.
우선 오스기는 민중예술을 수식하는 형 용사로서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하며 민중예술의 본질은 “새로움” 에 있다고 강조한다. 제목에도 “새로운”이란 형용사를 사용한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민중예술론을 총괄한 민중예술의 기 교 에서도 오스기는 “민중예술이란 이러한 평민노동자의 예술이다.
이 평민 노동자가 창조하려 하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이다. 이러한 평민노동자는 과거의 사회 및 그 모든 소산물과 절연하여 새로운 출발점 밑에서 새로 운 생명을 창조하고 있다.(밑줄은 인용자)”44) 라고 말한다.
43) 大杉栄 新し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p.305-306
44) 大杉栄 民衆芸術の技巧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p.331-332.
이렇듯 오스기는 과거의 모든 문화와 절연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통해 민중예술의 새로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오스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민중이 즐기고 있는 예술 은 진정한 민중예술이 아니다.
민중예술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에 이제부터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45) 위와 같은 오스기의 주장은 뒷날 프롤레타리아 문학자 히라바야시 하쓰노 스케 (平林初之輔, 1892-1931년)의 민중예술론으로 계승된다. 히라바야시의 민중예술의 이론과 실제 46)에 따르면 과거 민중이 애호했던 고단(講談)과 라 쿠고(落語), 나니와부시(浪花節)는 모두 구시대의 산물로 과거에 민중을 압박 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민중이 오늘날 즐기는 예술인 만담(寄 席)이나 활동사진은 “부르주아의 선전 도구”이며 대부분의 활극, 탐정물, 사회 극도 모두 “재산권의 신성함, 부르주아의 우월함이라는 사상을 민중의 머리에 주입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민중예술은 이런 과거와 현재의 예술을 모두 파기했을 때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히라바야시에 따르면 민중예술은 다음 과 같은 과정을 거친 후에야 탄생할 수 있다. 우리의 선조가 남긴 가치 있는 예술도 포함해서 모두 파괴의 용광로에 던 져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무산 민중의 힘에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구 사회는 그 일체의 부속물과 함께 민중을 압박했다.
그것이 무너질 때도 일체의 부속물과 함께 무너지지 않으면 안 된다. 47)
45) 예를 들어 오스기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에서 “과거의 예술은 이미 4분 의 3이상 죽어 있다.
과거의 예술은 생(生)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때때로 생을 해칠 염려가 있다.
건전한 생의 필수 조건은 생이 새롭게 되는 것에 걸맞게 끊임없이 새롭게 되는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에
있다.”(大杉栄 新しき世界の 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p.309-
310.)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ロメン·ロオラン(著), 大杉栄(訳) 民衆芸術論, アルス, 1921, p.4. 의 내용과 일치한다.
46) 平林初之輔 民衆芸術の理論と実際 , 新潮, 1921.8. 본 연구에서는 平林初之輔 無 産階級の文化, 早稲田
泰文社, 1923.에 실린 판본을 이용했다
47) 平林初之輔 民衆芸術の理論と実際 , 無産階級の文化, 早稲田泰文社, 1923, p.37.
위와 같이 히라바야시는 새로운 민중예술을 위해서 과거의 문화를 모두 폐 기시켜야 한다는 과격함을 보이는데 이는 오스기의 주장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스기처럼 히라바야시는 현재 민중이 즐기는 오락과 문화를 부 정하고 새로운 민중예술을 이제부터 구축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히라바야시 는 민중예술의 이론과 실제 에서 오스기가 번역한 로맹 롤랑을 자주 언급하 여 오스기와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오스기의 새 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이 그랬던 것처럼 히라바야시는 다음의 로맹 롤랑의 글을 인용하며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다. 여러분은 민중예술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민중을 갖는 것에서 시작 하자. 민중예술을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민중을. 가차 없는 노 동과 가난함에 유린당하지 않는 여유가 있는 민중을. 모든 미신과 우파 혹은 좌파의 광신에 현혹되지 않는 민중을. 스스로의 주인이며 바로 지금 일어나 는 투쟁의 승리자인 민중을. 파우스트는 말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고.48) 이렇듯 로맹 롤랑에서 시작되어 오스기를 거쳐 히라바야시로 이어지는 사 상적 계보에서 논의하고 있는 대상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미래의 민중이다.
지금은 부재한 민중이 장래에 “신흥계급”으로 대두했을 때 민중예술도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스기와 히라바야시는 현재의 민중이 즐기는 오락이나 문화를 부정하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예술”만을 민중예술로 인정 했다.
민중에게는 전통적인 오락을 즐기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면모가 있지만 오스기와 히라바야시는 이를 경시하고 현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 에만 주목했다. 요컨대 그들은 현재의 민중을 그대로 긍정하기보다 미래에 나 타난다고 하는 이상적인 민중에 맞춰 자신들의 민중예술론을 전개한 것이다.
48) ロメン·ロオラン(著), 大杉栄(訳) 民衆芸術論, アルス, 1921, p.162.에 보이는 이 글은 大杉栄 新し
き世界の為の新しき芸術 , 正義を求める心: 大杉栄論集, アルス, 1921, p.315.와 平林初之輔,
前掲書, pp.22-23.에서 인용되고 있다.
물론 “반항”과 “증오”를 중시하는 오스기와 히라바야시의 민중예술론은 보 편적인 인류애를 설파한 톨스토이의 예술론과는 내용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 다.
그러나 이상적인 민중과 현실 속의 민중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가토 가즈오의 민중예술론과 별 다를 바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가토가 민중의 예로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로맹 롤랑을 거론했다면 오스기와 히라 바야시는 저항적이고 진취적인 신흥계급을 진정한 민중으로서 언급하는 정도 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가토나 오스기, 히라바야시 모두 자신들의 조건에 걸맞지 않은 민중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거기에 반해 혼마는 실제로 민중이 즐기는 문화를 논의하고 일상생활을 살 아가는 평범한 민중에 초점을 맞췄다. 체제를 전복시키거나 개혁적이고 새로 운 문화가 아니더라도 혼마는 민중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라면 모두 민중예술 로 긍정했다.
따라서 혼마는 히라바야시가 부정했던 고단(講談)과 라쿠고(落 語), 만담(寄席)은 물론, 축제 때 쓰이는 장식 수레인 다시(山車), 곡예와 같은 길거리 구경꺼리인 미세모노 (見世物), 그리고 통속적인 유행가인 나가우타(長 唄)등도 모두 훌륭한 민중예술이라고 인정했다.49) 혼마는 “도쿠가와 시대 민 중예술의 발흥과 쇠퇴”에서 “도쿠가와 시대의 일반민중 사이에서 태어나 민중 에게 힘과 즐거움이 되며 또한 위로가 되는 예술형식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도쿠가와 시대의 민중예술이라 칭할 수 있다”50)고 했다.
이 글은 “민중에 의 해, 민중을 위해 만들어져 그 제작자에게도 그 사용자에게도 다 같이 행복이 되는 예술”51)이 민중예술이라는 윌리엄 모리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서 논의 를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모리스의 정의에 맞추어 혼마는 도쿠가와 시대의 전통문화와 오락을 새롭게 고찰하고 이를 민중예술로서 인정한 것이다. 여기 서도 혼마에 미친 모리스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49) 本間久雄 第四章 徳川時代における民衆芸術の勃興及び其の衰頽 , 現代の思潮と文学, 大同館書店,
1920, pp.53-54.
50) 本間久雄, 上掲書, p.54.
51) 本間久雄, 上掲書, p.53.
민중예술논쟁에 관한 선행연구에서는 로맹 롤랑에서 시작되어 오스기를 거 쳐 히라바야시에 이르는 사상적 계보만을 중시하고52)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에 민중예술논쟁이 촉발되었다는 논의에 머물고 있다. 다 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탄생하기 이전의 과도기적 형태로서 민중예술 논쟁의 담론들을 해석해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윌리엄 모리스와 혼마의 민중 예술론은 간과되었고 그 사상적 계보에 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혼마의 모리스 번역과 미야자와 겐지 (宮沢賢治, 1896-1933년)의 농민예술론(農民芸術論)의관계를모색하는 연구가 발표되고53)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년)의 민예운동(民芸運動)에 끼친 윌리엄 모 리스의 영향도 재조명되고 있다.54) 이런 학계의 동정을 고려해보면 민중예술 론에 관한 논의도 로맹 롤랑의 사상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는 틀을 벗어나 보다 폭넓게 이루어져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렇게 보았을 때 혼마의 민중예술론을 오늘날 재조명하는 의미는 깊다.
52) 대표적 연구로 森山重雄, 前掲書와 박양신, 앞의 논문 등이 있다.
53) 川端康雄 新しき村と羅須地人協会―武者小路実篤と宮沢賢治 , 芸術と福祉―アーティス トとしての
人間, 大阪大学出版部, 2009, pp.235-238. 54) 대표적 연구로 藤田治彦 アーツ·アンド·クラフツと
工芸の変貌: ウィリアム·モリス と柳宗悦をめぐって , 美學第54巻第1号, 2003.6. 등이 있다.
Ⅵ. 맺음말
혼마 히사오는 고급예술과 민중예술을 분리하여 민중예술만의 독자적인 영 역을 인정했다.
이는 지식인이 선호하기 쉬운 고급예술에서 벗어나 민중예술 만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당시의 지식인들의 예술관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 인다.
그리고 이런 특징 때문에 혼마의 주장은 지식인 사회에 큰 파장을 부르며 1910년대를 대표하는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렇듯 혼마가 파격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윌리엄 모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예술에 내재하는 가치보다 예술이 주는 쾌락에 주목했기 때문이 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혼마가 톨스토이주의자인 가토 가즈오나 로맹 롤랑을 번역한 오스기 사카에와 의견을 달리한 연유도 쉽게 이해된다.
선행연구에서는 혼마가 제기한 민중예술론이 가토와 오스기의 비판을 거쳐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지양되었다고 말하나 그 내용을 따져보면 가토나 오 스기와는 전혀 다른 사상적 계보위에 혼마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중예술논쟁에 참가한 혼마와 다른 지식인들이 보이는 차이는 결국 민중 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혹은 이상화시키는가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 혼마는 평범한 민중의 일상생활에 주목했고 그들이 즐기는 문화와 오락을 긍 정했다.
거기에 반해 가토는 “진실로 인간을 자각”한 “진정한 민중”을 모색했 고 오스기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신흥계급”이 미래에 만들 “새로운 예술”에 희망을 걸었다.
똑같이 민중이란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혼마가 일상을 영위하 는 보통사람을 상정하는데 반해 가토와 오스기는 자신들의 이념을 달성할 수 있는 이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기에 그들이 제기하는 민중예술의 정의와 외연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으며 고급문화와 전통문화에 대한 견해도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일본과 한국에서 혼마보다는 가토와 오스기와 같은 방식으로 민중예술을 정의한다는 점에 있다.
혼마는 무시한 채 가토와 오스기 의 관점에서 민중예술논쟁을 정리하는 선행연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민중을 <진정한 인간> 혹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 로 이상화하는 시각은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으며 그 이론적 근거를 민중예술논쟁에서 찾는 연구자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견해를 극복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민중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혼마의 민중예술론에서 시작되어 후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상적 계보를 발굴할 필 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그 첫 번째 시도로서 1910년대에 발표된 혼마의 글 들을 분석해봤다.
다음 연구에서는 혼마와 야나기 무네요시, 미야자와 겐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하며 민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상의 흐름을 새 롭게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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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第 三十四 号
논문접수일 : 2018년 04월 26일 심사개시일 : 2018년 05월 07일 심사완료일 : 2018년 06월 03일 게재결정일 : 2018년 06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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