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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피의 일요일’의 번역—제5공화국 시기 금지된 번역극의 정치적 상상력/이승희.성균관大

 

<차례>

1. 부재하는 현존의 상상력

2. 반려된 번역, 풍속에서 사상으로

3. ‘피의 일요일’의 기록

4. ‘자유도시’ 비/가시화의 패러독스

5. 사상검열의 역설

 

 

1. 부재하는 현존의 상상력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이 가져온 변화와 혁신에의 기대는 그해 하반기를 가득 채운다.

연극계 역시 ‘제작의 봄’이 도래하길 바라고 있었으니, 이 ‘봄’은 다름 아닌 검열제도의 폐지다.1)

사전・사후심의는 물론 공권력의 비공식적 개입을 통해 연극의 자율성을 최소화한 오랜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2)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적 기세는 이미 검열제도를 무력화하기 시작한다.

민정당이 ‘문화예술자율화대책’(1987.8.8)을 내놓은 상태에서,3) 지금껏 보수적이던 한국연극협회도 심포지엄 ≪표현의 자유, 그 이상과 한계≫를 개최하고(1987.8.24),4) 당시 대통령 후보 4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정부 차원의 예술 규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케 하는(1987.11)5) 등 검열제도 폐지를 기정사실화하는 데 힘을 보탠다.

 

    1) 「연극계에 ‘제작의 봄’ 도래 기대」, 매일경제, 1987.8.10., 9면.

    2) 몇 가지 예외가 있어 「공연법」은 그대로 두고 우선 시행령 개정을 통해 1989년 1월부 터 연극 대본의 사전심의가 철폐된다. 1996년 10월에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가 위헌으로 판결된다. 이는 「영화법 제12조 등에 대한 위헌제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법률 심판 결과로, 이후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제16조 제1항 등 위헌제청」 판결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3) ▲금지가요의 대폭 해제 ▲공연물 심의기준의 합리적 완화 ▲음반제작사 등록의 자율 화 ▲판금도서의 대폭해제 ▲출판사 등록제도의 개방 등. 「금지가요 천여 곡 재심사, 체제비판 판금서도 완화」, 동아일보, 1987.8.8., 7면.

    4) 「사전검열폐지 앞두고 연극협 심포지엄, “공연예술 민간서 사후심의해야”」, 동아일보, 1987.8.21., 6면. 5) 「연극협회 문화예술정책조사」, 매일경제, 1987.11.30., 9면.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공연금지 중인 희곡들이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 심의에 통과된 사실이다.

그해 9월만 해도 1975년 ‘공륜’ 심의에서 반려된 <오장군의 발톱>, 1984년 심의대본과는 다르게 공연했다는 이유로 ‘연우무대’가 6개월간 공연정지 처분을 받은 <나의 살던 고향은>, 1985년 초연 이후 공연이 사실상 금지된 <똥바다>—모두 심의를 받아 통과된다.

창작극뿐만이 아니다.

정치 소재의 번역극 이 속속들이 기획되는 가운데,6) 1966년 이후로 공연된 적이 없는 <더러운 손>, 1982년 심의에서 반려된 <자유도시>, 대학가에서 주로 공연되다가 1986년 심의에서 반려된 <정의의 사람들>이 10월 심의에서 통과된다.

제도는 그대로지만 심의 결과는 달라지는, 변화의 전조를 보여준다.

검열에 가두어진 작품이 이제라도 이름을 드러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시절의 부재를 그처럼 증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유명 작가나 제작진의 것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오장군의 발톱>처럼 검열 스캔들로 화제가 되지 않는 이상, 사전심의 단계에서 반려되거나 비공식적인 경로로 압력을 받아 자진취하한 사실이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공연되지 않은 텍스트는 세상에 없던 것이 되는 걸까.

기껏해야 연극사와는 무관한 기억일 따름일까.

관객과 만나 검증된 적도, 어떤 유의미한 동력을 생산한 적도 없으니 그 판단에도 일리 있다.

특히 브레히트처럼 연극인에게 영향을 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번역극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부재가 검열에 따른 결과일 때는 다른 판단이 필요하다.

검열은 텍스트의 불확정성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식론적 구성에도 개입한다.

텍스트가 법역(法域)에서 허용되는 서술가능성의 임계, 즉 문역(文域) 내에서만 가시화된다는 것은,7) 비가시화된 것이 그 텍스트의 구성적 외부로서 참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6) 「연극도 정치소재 열풍」, 경향신문, 1987.11.24., 6면.

    7) 한기형, 「‘법역’과 ‘문역’-제국 내부의 표현력 차이와 출판시장」, 민족문학사연구 44, 민족문학사학회, 2010, 316면.

 

검열이 엄폐한 것은 후일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부재하는 현존’이다.

연극사 연구는 바로 그때의 그 현존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 ‘공륜’의 심의 절차를 따르기로 한 이상 어떤 공연자도 반려를 각오하고 심의신청서를 접수하지 않는다.

심의에 통과해 무사히 공연이 치러질 수 있도록 자기검열의 과정을 거친다.

극작가들이 검열을 우회하는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검열제도의 지분이 없지는 않다.

이미 출판된 텍스트를 전혀 가공하지 않은 채 심의대본으로 제출하는 경우도 그 권위에 기대는 나름의 방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려될 것은 반려된다.

‘반려’는 그런 점에서 여타 심의 결정보다 무거운 것이다.8)

   

    8) ‘공륜’ 회칙에 의하면 심의 결정 등급은 통과・수정통과・개작・반려 등 4가지인데, 그 초기에는 조건부통과와 전면개작이 추가되어 있다. 이외 개제・자진취하가 있는데 개 제는 대부분 수정통과나 조건부통과에 포함되고 자진취하는 드물게 발견된다. 세분화 된 등급은 점차 다시 4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부분을 잘라내고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위험한’ 수준을 나타낸다.

이때 위험한 정도는 동등하지 않다.

반려 기준의 출처가 텍스트인지 사람인지 또는 시의에 좌우되는 정책적 판단인지 그 여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연구의 관심은 그 위험한 정도가 가장 큰 경우에 있다.

그 대상은 필시 검열 권력의 불안을 야기하는 무엇일 테지만, 이것은 때로 가시화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모종의 변화를 함축하는 징후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번역극은 어떻게 해서 위험해지는가.

일반적으로 희곡과 연극 사이에 그 등가성은 보장되지 않으며 연극(공연)은 늘 희곡(문학)을 ‘번역’ 한다.

2차원의 시간예술에서 3차원의 시공간예술로의 이동이다.

이 트랜스미디어적 상황에는 ‘번역’ 주체의 내외적 조건과 같은 요인이 더해지고, 다른 언어로의 전이가 수반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일찍이 일반명사가 된 번역극은 트랜스미디어적 조건에 언어의 변화가 일어난 경우다.

내셔널한 경계를 초월하거나 넘나들거나 통하는, 트랜스내셔널리티가 번역극에서는 예사로운 일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흔히 내셔널리티를 초월한 보편성의 세계로 번역된다.

이를 두고 내셔널리티를 질문하지는 않는다.

서구중심주의에 근거한 정전 효과라는 혐의가 없진 않지만, 어쨌든 이 초월성은 검열 권력을 자극하지 않는다.

반면 원본이 한국 현지의 사정과 무관하게 생산된 것이고 이를 충실히 번역해도, 트랜스내셔널한 무언가가 지금-이곳의 내셔널한 상황을 떠올리도록 할 때 그 번역극은 위험해진다.

즉 위험한 트랜스내셔널리티이란 내셔널리티의 보존을 조건으로 한다.

이 글에서 다룰 <자유도시>가 그렇다.

<도시의 자유>를 번역한 이 심의대본은 북아일랜드의 내셔널한 역사가 1982년 시점 한국의 내셔널한 상황에 삼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가능성은 검열 권력이 절대 허용하지 않을 임계를 건드린다. 사전심의 단계에서 잠재적 위험성은 ‘발견’되고, 심의 결정은 반려로 내려진다.

반려 처분에 선전 효과가 있다면, 이 사실은 검열 스캔들로 공개될 수 있다.

검열 스캔들 대부분은 국가가 폭로자가 되어 당사자 및 텍스트에 일정한 평판을 부여해 공중에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는 선전 형식이자 정치적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9)

 

      9) 검열 스캔들의 이론적 이해는 이승희, 「제3공화국의 ‘공연법’과 연극 검열」, 한국극예 술연구 75, 한국극예술학회, 2022, 115-117면 참조. 해당 인용부분은 116면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해당 텍스트가 전연 무가치하거나 혹은 그 반대일 때다.

제5공화국 시기 사상검열로 반려 처분을 받은 번역극이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극단 ‘에저또’의 <자유도시>(1982)와 <정의의 사람들>(1986), 극단 ‘프라이에 뷔네’의 <1793 년 7월 14일>(1984)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공개를 통한 정치적 효과보다 담론 확산이 더 우려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거의 완벽하게 엄폐된 부재가 이 시기만의 현상은 아니다. 다만, 이전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

위험한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이 검열권력과 번역주체의 양방향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적 계기는 제5 공화국의 매우 극적인 전사(前史)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유신체제의 말기적 문화현상으로서 검열체제 효과가 번역극 만개로 드러난 1970년대 중후반이며, 다른 하나는 박정희 시대가 돌연 끝나면서 민주화의 기대를 짧게나마 품었던 ‘서울의 봄’이다.

그리고 두 전사와 제5공화국 출범 사이에 5.18이 놓인다.

이 폭력적인 전환의 거대한 파장이 여러 매개 변수와 엮이면서 1987년 6월에 잇닿아 있음은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과연 그런 시야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사상검열로 반려된 번역극은, ‘공륜’ 심의에 걸러진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사전심의 단계에서 ‘발견’된 모종의 변화는 번역 주체의 것이기도 하다.

공연 레퍼토리로 삼은 선택에서부터, 트랜스미디어적 순간에 중지당한 번역일지라도 심의대본에 남아 있는 자기검열의 흔적은 매우 유력한 증거이며, 1987년 6월 이후에야 시도된 부재의 증명도 하나의 참조점이 된다.

국가검열의 본질이 정권의 정당성을 불안케 하는 요인의 엄폐 및 제거에 있다면, 반려된 번역극은 그 불안을 자극하면서 저항의 서사를 엮을 만한 조각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조각의 역사는 다름 아닌 검열 권력의 불안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요컨대 이 연구는 제5공화국 시기 ‘공륜’에 의해 사상검열로 반려 처분을 받은 번역극을 대상으로 그 부재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번역극 검열의 추이를 통해10) 제5공화국 시기의 번역극을 맥락화하고, 가장 문제적인 <자유도시>를 중심으로 검열 권력과 번역 주체가 서로 교차하는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을 그려보고자 한다.

 

    10) 심의에 저촉된 1970년대 번역극은 정현경이 소개한 바 있다. (정현경, 「1970년대 연 극검열 양상 연구」,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2015.) 한편, 번역극 추이에 관해서는 다음 을 참조할 수 있다. 정병희, 「한국의 번역극 공연」, 연극평론 4, 한국연극평론가협 회, 1971년 봄; 신현숙 외, 한국에서의 서양 연극, 도서출판 소화, 1999; 홍창수, 「 1970년대 번역희곡과 번역극의 수용 양상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20, 한국극예술학 회, 2004; 조만수, 「프랑스어권 희곡의 한국무대에서의 수용」, 비교한국학 26(2), 국 제비교한국학회, 2018. 

 

2. 반려된 번역, 풍속에서 사상으로

 

번역극 공연이 활황이던 1970년대 후반, 연극계는 “번역극에 신들린 집단”이란 세평을 듣는다.11)

     

     11) 이근삼, 「번역극 공연의 문제점」, 한국연극, 1978.9., 17면.

 

동인제 극단 출현 즈음부터 셈하면 연극계는 20 여 년 계속해서 번역극 시대인데, 그즈음 더 유난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연극계 규모가 제법 커지니 그렇게 보일 만도 하다.

상업주의 시비 자체가 양적 팽창의 증거려니와, 1970년대 초와 말의 여러 수치를 비교해도 그 성장세는 뚜렷하다.12)

번역극의 호황은 그 덕분이지만 거기에는 번역극이 기여한 바도 있다.

<에쿠우스>(1975)를 시작으로 전에 없는 장기흥행 성공 사례가 번역극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번역극 우세 현상에는 다양한 수준의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다. 출판・공연・비평 등지에서의 번역 주체의 조건과 동기 여하에 따라 경우의 수는 많아지고, 여기에 정치・경제・인구의 조건까지 얽혀 있다.

세부 요인을 통합해서 설명하기는 까다롭지만, 시기에 따른 간단한 추이는 관측된다.

1960년대의 번역 동기는 비교적 소박하다.

한국현대연극 구축을 위한 동시대 외국연극의 참조—세대교체와 함께 진행된 이 현상의 배경에는 사실상 해방 8년의 연극 냉전 과정에서 그야말로 초토화되다시피한 연극계의 빈곤이 있다.13)

 

    12) 「격동의 70년대 그 결산⑨ : 문화계(하)」, 경향신문, 1979.12.26., 5면. 이 기사에 의하면 20여 개 극단의 연 40회 공연이 50여 개 극단의 연 2백 회 공연으로, 관객은 연 2만여 명에서 50만 명으로, 명동예술극장 정도뿐이던 공연장이 그새 10여 개로 늘 어났다. 이 추세는 ‘예륜’ 및 ‘공륜’에 접수된 심의대본 일련번호와 공연윤리 통계표 를 참조해도 비슷하다.      13) 전후 연극계의 과소화(過⼩化)에는 직접적인 원인 두 가지가 있다. 연극인 월북으로 인 한 좌파연극(인)의 비가시화와 신파-연극의 소멸이다. 전자는 「연극/인의 월북」(대동 문화연구 88, 대동문화연구원, 2014.)에서, 후자는 「‘신파-연극’의 소멸로 본 문화변 동」(상허학보 56, 상허학회, 2019.)에서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극에 신들린’ 1970년대 후반은 동인제 극단이 두루 출현하던 그때와는 다르다.

십수 년을 거치면서 연극계 규모는 커지고 번역 사정도 복잡해진다.

1970년대를 검토한 홍창수는 여러 조건을 고려하면서도 종합적으로는 번역극의 문화적 수요에 좀 더 무게를 둔다.

이에 따르면 당시 번역극의 호황은 “연극을 포함한 문화 수요의 팽창” 에 따른 것이고, 그것은 “군사독재의 산업화”라는 특성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14)

   

      14) 홍창수, 앞의 글, 91면.

 

다만, 여기서 환기될 사실은 번역극의 수요와 창작극의 빈곤이 짝패라는 점이다.

창작극의 빈곤은 번역극 선택의 다양한 동기에도 불구 하고 정치적 환경과 맞물린 제도적 조건을 공통의 출처로 갖는 충분조건이다. 그중 창작에 직접 결부된 제한이 바로 검열이다. 창작에 가해지는 압력이 커질수록 이미 검증된 완제품의 선택은 차선이 된다. 번역극의 이국성이 일종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번역극 우위의 시대는 냉전체제 구축 과정에서 과소화(過小化)된 연극계의 세대교체로 시작하여 점차 가중되는 검열의 압력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다. 검열이 강화된 긴급조치 시기에 번역극 공연이 매우 활성화된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검열이 자심해진 만큼 번역극도 ‘공륜’ 심의에 저촉되는 일이 잦아진다. 번역극의 반려 건수는 사전심의 부활(1963) 이후 내내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1975~1979년 사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표 참조). 이는 부적절하거나 위험한 연극의 출현 또는 공연 시장의 활성화에 따른 산술적 증가가 아니다. 긴급조치 제9호의 발동(1975.5.13)과 그에 따른 문공부의 공연활동 정화방안의 발표(1975.6.5) 그리고 「공연법」 개정(1975.12.31)을 통한 ‘공륜’의 설치(1976.5) 등 박정희 정부가 행한 일련의 조치에 따른 결과다. 상당수가 이미 과거에 심의를 거쳐 공연한 적이 있음에도 반려되었고,15) 그중 수정을 거쳐 재차 심의를 신청해 통과한 사례도 있으니,16) 이 일관성 없는 심의 결과는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검열 기준의 신축성에서 비롯한다.

   

    15) <오며 가며><스닉키 핏치의 부활><미시시피 씨의 결혼><느릅나무 밑의 욕망><우리는 뉴해이븐을 폭격했다><전쟁터(싸움터)의 산책><검찰관>

   16) <웃음 넘치는 교수대><뜨거운 조식도 먹자구!><한 번, 두 번, 세 번, 그래서 스물다섯 번>

 

검열 기준은 어디까지나 이를 행사하는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표】 사전심의 ‘반려’ 번역극 목록, 1963-1989 : 생략 (첨부논문 파알 참조)

 

풍속검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종류의 검열은 정치권력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손쉽게 꺼내드는 프로파간다로서 피검열자의 검열의식을 자극하면서 광범위한 동의를 받는 경향이 있다.

이는 풍속의 차이가 두드러진 번역극에서 현저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느릅나무 밑의 욕망>(1976・1978)은 극단 ‘신협’이 1955년 공연 이래 자주 무대화한 연극이지만, 긴급조치 시기에는 근친상간 또는 음란・패륜・외설을 이유로 금지된다.

외래어・비속어로 인한 수정통과 결정이 단기간 급증하다가 이내 사라진 것도 정부 당국이 추진하던 국어순화운동에 보조를 맞춘 결과다.

풍속상의 이유로 반려된 희곡이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부분 통과되는 것도 풍속검열의 정치적 탄력성을 드러내는 증거다.

사상검열은 그에 비해 완고한 편이지만 이 시기에는 치안상의 이유, 즉 국가・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현시점”에서 불가하다는 시의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식민지시기에 초연되어 1970년대 중반까지 공연된 <검찰 관>(1978), 역시 공연된 적이 있지만 반전(反戰) 요소가 반려 사유가 된 <우리는 뉴해이븐을 폭격했다>(1977)와 <전쟁터의 산책>(1977)이 그런 예다.

이를 제외하면—역시 이미 두 차례나 공연된—<미시시피 씨의 결혼>(1976)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등장인물의 “국제 공산당의 과격한 언행”,17) “국가이익에 현저하게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려된다.18)

냉전체제의 양극화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양비론적 시각을 심각하게 본 것인데, 이전에 심의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주제가 멜로드라마 전략에 감추어진 덕분인지 모른다.19)

이처럼 번역극 검열이 긴급조치 시기에 잠시 비등하지만, 창작극에 가해진 압력에 비하자면 사안 정도가 그리 심각해 보이진 않는다.

번역 주체의 동기가 여하하든 검열자의 시선에서 번역극은 <에쿠우스> 공연중지 사건에 드러난 수준에 맞춰져 있다.20)

    

     17) 「6월 무대공연물 심의통계표」, 공연윤리 1, 1976.9., 9면.

     18) 「상상력에 제동도 걸고 윤리관과 국가이익옹호」, 공연윤리 5, 1977.1., 2면.

     19) 이를테면 1974년 공연 보도자료는 이 연극을 이렇게 소개한다—“순간만을 사랑하는 여인을 중심으로 갖가지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사나이들이 벌이는 갈등이 대담하고 기발한 무대기법을 통해 묘사된다.”(「서울대 상대 연극회 <미시시피의 결혼>」, 동아일 보, 1974.12.21., 5면) 대본의 사전심의가 철폐된 시점인 1989년 극단 ‘맥토’의 공연 에서도 그와 비슷한 해석을 내놓는다. “엄격한 도덕주의자인 검사 미시시피와 사랑과 욕망에 불타는 아나스타샤와의 운명적 사랑을 다루고 있다.”(「연극계」, 동아일보, 1989.12.13., 8면.)

       20) 극단 ‘실험극장’은 1975년 9월 5일부터 <에쿠우스>를 성황리에 공연하던 중 서울시로 부터 공연 중단 통고를 받는다(1975.11.21). 사유는 연장공연허가 신청을 하지 않은 채 무단 공연을 했다는 것인데, 직후 종로세무소가 극단의 예매권 처리장부를 압수한 사실 그리고 극단 측이 이듬해 3월 30일 공연을 재개할 때 풍속상 심의에 저촉될 만한 부분을 대폭 수정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긴급조치 발동 이후 연극계에 대한 본보기성 단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실험극장 <에쿠스> 개운찮은 공 연중단」, 경향신문, 1975.11.24., 5면; 「극계에 파문 던진 <에쿠우스> 공연중지」,  동아일보, 1975.11.25., 5면; 「실험극장의 <에쿠우스> 월말부터 다시 공연」, 동아일 보, 1976.3.22., 5면; 유인화, 「실험극장, <에쿠우스>로 재기 “승부수”」, 경향신문, 1997.2.26., 15면.

 

한편으로는 이국풍조를 허용하면서 한국현실에의 근접성을 차단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기강과 윤리’ 의 보전을 명분으로 퇴폐풍속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사실상 번역극이 사상검열에 저촉될 확률은 높지 않다.

세계-전시장(展示場)에 구비된 다양하고 풍부한 외국연극 중에서—풍속상의 차이가 문제될지언정—금지목록을 피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과거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적이 있고 내용이 공산주의와 무관하지만, 작가가 단지 공산권에 생존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반려된 <뇌우>(1972)의 사례도 큰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창작극에 가한 검열의 압력이란 결과적으로 번역극의 한국 버전을 만들어내려는 통제 기술처럼 보인다. 이상일은 1979년 또는 1970년대를 “적막한 불모”의 시기로, 대학 민속극이 가장 두드러진 감시의 표적이 된 “연극 부재의 시대”로, 치열한 사회비판과 역사의식이 얼버무려질 수밖에 없던 “가난한 시대”로 묘사한다.

“경색한 정치풍토와 강화된 검열제도 아래 제대로 된 예술활동이 나올 리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시대”에도 싹은 틔운다.

번역극은 “창작극의 중요한 타자”로서 창작극이 “통제사회의 사전검열이 억압하는 무의식의 상처를 감내”하고 “새롭고도 이질적인 혼란을 체험하면서 동시대의 세계 연극과 교류”하도록 작용했을 테지만,22) 번역극을 단지 창작극의 타자로만 읽을 이유는 없다.

 

    21) 이상일, 「`79문화회고(5) : 연극」, 동아일보, 1979.12.25., 5면.

    22) 홍창수, 앞의 글, 93면. 서양의 부조리극이 한국에서 전유되는 사례가 그 증거일 것이 다. 이승희, 「냉전기 한국 부조리극의 검열 패러디」, 대동문화연구 120, 대동문화연 구원, 2022.

 

세계성과 보편성의 구현일 수도, 엘리트 연극인과 관객의 문화자본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도, 번역 무대를 창구로 동시대의 세계를 엿보고자 하는 열망일 수도 있다.

물론 다소 무정견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레퍼토리 선택에서 모종의 변화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번역극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는 현상 그 자체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읽어낼 수는 있다.

일정한 문화적 수요를 얼마간 충족시키는 다른 한편으로 긴급조치 시기는 강화된 검열 환경에서 비롯된 한계를 절감하는 시간인바, 이 충족과 결핍의 모순이 다음 시대의 번역극이 새로운 수행적 가능성을 배태하는 동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런 점에서 공교로운 것이다.

긴급조치 시기와 유신체제의 중단을 가져온 박정희의 사망은 두 변수를 초래한다.

하나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며, 다른 하나는 또 다른 군사독재의 시작이다.

먼저,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간 “빈사의 연극계”에 출혈을 요구해온 여러 제도적 문제가 노출되고,23) 그중 창작과 결부된 검열제도가 지목된다.

젊은 연극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협회의 혁신이 촉구되는 가운데,24) 새롭게 구성된 임원진은 「헌법」 개정을 앞둔 시점에서 영화인협회와 함께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독소 조항의 삭제를 건의하고 자율을 보장하는 「공연법」 개정을 촉구한다.25)

한국연극의 ‘불모와 부재와 가난’ 으로 탄식하던 평론가는 수개월 후 “민주개혁으로 향한 정치문화의 활성화”가 몰고 올 변화에 기대를 품는다.

문예진흥책은 ‘주고 길들이기’에서 ‘주고 키우기’로 들어서고 ‘공륜’ 심의도 완화되었다고 보는, 낙관적인 상황 인식을 드러내면서 전에 없이 의욕적인 창작극 공연에 고무된다.26)

 

    23) 소극장 폐쇄의 압력, 지원액 분배를 둘러싼 권위주의, 지원액 3배나 되는 문예진흥기 금 갹출 등. 「격동의 70년대 그 결산⑨ : 문화계(하)—연극」, 경향신문, 1979.12.2 6., 5면.

    24) 「연극계도 정풍운동」, 동아일보, 1980.1.18., 5면; 「기지개 켜는 80년대 무대」, 경 향신문, 1980.1.25., 5면; 「연극계에 체질 개선 바람, 정관 개정…협회 활성화를」,  조선일보, 1980.1.27., 5면.

   25) 「공연법 등 검토할 ⼩연구위 구성」, 경향신문, 1980.2.15., 5면; 「대중문화 푸대접 심하다, 예총, 세미나 마련 등 ‘자구책’ 부심」, 조선일보, 1980.3.9., 5면; 「평가교수 단의 문화정책 종합분석을 알아본다」, 경향신문, 1980.3.10., 5면; 「연극계 법적 권 리 찾기 운동」, 동아일보, 1980.3.11., 5면.

   26) 이상일, 「긍정적인 序章—봄시즌 무대를 보고」, 동아일보, 1980.4.10., 5면.

 

브레히트의 <제쭈안의 선인>이 ‘공륜’ 심의에 부쳐질 수 있었던 것(1980.2.4)도 그런 정치적 기세 덕분이다. 지금껏 금지되어온 공산권 작가의 작품이 이제는 공연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우리극장’(‘프라이에 뷔네’의 개명)이 시도해본 듯하다. 2개월여 지나서야 반려 결정을 통보받긴 하지만, 당시 심의처리기간이 기본기일 7일과 연장기일 5일로 12일이 상한선인 데 비추어27) 이 심의 기간은 이례적이다.

‘공륜’에서도 ‘서울의 봄’ 을 얼마간 관망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해 6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심의 결과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브레히트 연극이 불가하다는 것은 널려 알려진 사실인데 이를 역으로 이용하고 독일문화원의 이름을 빌리는 약은 수단을 썼다고 ‘공륜’ 측은 비판한다.28)

이미 ‘서울의 봄’이 끝난 직후였다. 연극계가 바라던 변화와 혁신의 기회도 다시 봉쇄된다.

검열의 강화는 정해진 수순이다.

문공부는 공연물 심의강화 방침을 세우고, 그에 따라 ‘공륜’은 「공연물 심의강화 장기계획」을 수립해 당국의 재가를 받아 공식 발표한다(1980.8.11).

관계자 계도를 위한 공연윤리심의편람도 배포한다.

다음은 무대공연물의 ‘세부실천방향’이다.29)

 

      27) 「심의작품처리규정」(1977.11.1) 제5조(「새 규정 해설」, 공연윤리 15, 1977.11., 3 면). 그러나 대체로 1주일 이내에 심의가 완료된다.

      28) 「심의물 해설」, 공연윤리 47, 1980.7., 8면.

      29) 「공연물정화 장기계획 수립—문화공보부의 심의강화 방침에 따라」, 공연윤리 48, 1980.8., 1면. 여기에 ‘공연물 심의강화 장기계획’ 전문이 실려 있다. 인용된 원문자 일련번호는 설명을 위해 임의로 붙인 것임을 밝힌다

 

 ① 외국저명작가의 작품을 빙자하여 국가체제 또는 사회붕괴를 조장하려는 의도의 작품(연극)

 ② 사회주의체제를 긍정적으로 다룬 작품(연극)

 ③ 공산권 작가의 작품(연극)

 ④ 실험성・전위성을 빙자하여 사회의 병적인 요소만을 들추어내고 타락을 미화하거나 그 생활을 정당화한 작품(연극・가극・전위무용극 등)

  ⑤ 장발・퇴폐 등 청소년이 쉽게 모방할 수 있는 내용의 작품(연극・쇼・외국인 공연 등)

  ⑥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 허용할 수 없는 외국의 생활양식의 내용(번역극 또는 외국인 공연물)

  ⑦ 반공 또는 새마을운동을 빙자한 저질작품(악극・전시물 등)

  ⑧ 금지곡의 공연행위(유흥업소 공연물) 

 

이 ‘세부실천방향’은 ‘공륜’이 그간의 심의 분석에서 자주 거론하던 핵심을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8가지로 간추린 세목의 상당 부분이 번역극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①과 ③과 ⑥은 명백히 번역극을 가리키며,

 ②는 창작극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니 실질적으로는 번역극에 해당한다.

 ④와 ⑤는 두루 해당하는 규제 사항으로서 번역극이 종종 수정・개작 지시를 받는 사유다. 결국, 번역극 홍수에 쓸려올지 모르는 퇴폐 풍조와 불온 사상을 경계한다는 것인데, 실험을 명분 삼아 또는 저명한 작가의 권위에 기대어 점점 과감해지는 표현에서 이전과는 다른 기운을 느꼈다는 징후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륜’의 번역극 심의는 느슨해 보인다.

브레히트 연극 2편 그리고 <저녁 노을에 학이 사라지다>를 오로지 “용공 적대 작가의 작품” 30)이라는 이유로 금지한 건수를 포함해도, 1980~1987년 사이 8편만이 사전심의에서 반려된다.

 

      30) 이념과 무관한 내용의 이 작품은 1974년에 공연된 적이 있지만, ‘공륜’은 작가 기노시 다 준지(⽊下順⼆)가 “일본의 공산주의에 가담한 인사”이자 “한일국교 정상화를 반대하 는 문인”이라는 점을 들어 이 각본을 반려한다. 유걸호, 「9월의 분야별 심의물 분석」, 공연윤리 50, 1980.10., 8면.

 

  첫째, 이 결과는 규제(개작・반려) 처분이 창작극에서 증가하는 반면 번역극에서는 감소하는 추세를 나타낸다.

1979년부터 그 조짐이 없지 않았으나 1980년대에 들어 그 현상은 현저해진다.

  둘째, 번역극 심의에서 상당하던 풍속검열 규제 건수의 감소를 나타낸다.

이는 번역극이 ‘순화’된 것이 아니라 규제 기준이 낮아진 결과다. 과거에 풍속상의 이유로 반려된 것도 더 이상 제한받지 않게 된 것이다.

반려작 8편 중 풍속검열에 저촉된 경우도 2편에 불과하다. 전두환 정권의 풍속검열의 사용법은 확실히 박정희 시대의 것과는 정반대다.

그러면 사상검열 저촉 건수의 상대적 우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상검열의 항상성을 고려한다면 그 자체로 유의미한 수치는 아니다.

해방 이후 사상검열은 냉전적 질서의 형성 및 유지를 근간으로 하여 국가안보 의 명분 안에서 작동해왔다.

월북 예술인 또는 공산권 작가의 작품을 금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찍부터 그와 관련된 기준을 보강해왔는데, 그 핵심은 공연물이든 그에 관계된 예술인이든 사상의 ‘성분’을 가려내 공산주의・사회주의 등의 파장을 차단하는 것이다.31)

 

    31) 이승희, 「「공연법」에 이르는 길」, 민족문학사연구 58, 민족문학사학회, 2015, 345-352면.

 

반공물조차 종종 심의에 저촉되는 이유는 공산주의 비판을 위해 이 사상을 노출해야 하는 딜레마 때문이다.

더 광범위하게는 지극히 ‘사실적인’ 재현으로 현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후 시의적 판단에 따라 금지된 반전 사상은 냉전적 질서와 국가 안보를 정권의 토대로 삼는 정치권력 입장에서 매우 부적절한 것이 된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그러한 사상검열이 누적되어 왔고, 제5공화국 출범 직전에도 ‘공륜’의 「공연물 심의강화 장기계획」을 통해 ‘밖으로부터’ 흘러오는 번역극의 불온한 사상을 경계한 바 있다.

군사정권이 또 들어선 마당에 번역극에서 그에 저촉되는 사례가 많아진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 아닌가.

번역극 반려 건수도 많지 않고, 냉전적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정도의 비가시화는 새롭지 않다.

작가의 사상 성분에 따른 3건의 반려 처분도 ‘서울의 봄’의 기운을 봉쇄하는 항상적 조치로 보이니, 사상검열이 부조된 현상은 풍속검열 감소로 인해 발생한 감각적 효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뿐인가.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가장 잘 물려받은 권력으로서 사상검열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번역극에 대한 검열권력의 표적은 그 심의가 유신시대와는 사뭇 다른 정치적 내용을 가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3. ‘피의 일요일’의 기록

 

극단 ‘에저또’의 <자유도시>(1982)와 <정의의 사람들>(1986), 극단 ‘프라이에 뷔네’의 <1793년 7월 14일>(1984)—세 편이 대중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매우 진지한 데다가 카타르시스 같은 감정적 만족감도 없고, 오히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심리적 긴장 속에서 이념과 윤리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며(<정의의 사람들>), 탈중심화된 장면 구성으로 쟁점과 주제를 관객 스스로 발견하라고 재촉한다(<자유도시><1793년 7월 14일>).

그러나 강도 높은 정치적 긴장이 감돌던 제5공화국 시절임을 감안하면 그런 요인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세 편은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곳의 역사, 그것도 변혁의 역사와 관계된 순간을 불러내 정치 담론이 지하화(地下化)된 이곳의 현실과 교섭한다.

<자유도시>는 1972년 북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을, <1793년 7월 14일>은 프랑스 대혁명을, <정의의 사람들>은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을 가져온다.

5공 정권하에서 ‘민권운동’・‘혁명’・‘테러’와 같은 이런 대담한 정치 담론은—그 역사들을 모욕할 의도가 아니라면—만에 하나 번역극만이 “외국저명작가의 작품을 빙자하여” 제기할 수 있다.

인용된 역사적 사실은 창작극이 시도하기 어려운 정치적 상상력의 배경으로서 트랜스내셔널한 사건으로 경험될 수 있다. 번역을 통해 트랜스내셔널 역사로의 전유를 꾀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와 해석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문화적 힘에서 나온다.

권력은 이를 심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드시 제거・비가시화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번역극에 대한 반려 결정은 그 두 갈래의 힘이 부딪친 결과이며, 이 전선(戰線)에 바로 ‘피의 일요일’이 있다.

전적으로 우연이겠지만 ‘피의 일요일’은 북아일랜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전에 러시아에서 이미 제1차 혁명의 도화선이 된 ‘피의 일요일’(1905.1.22)이 있었으니 <정의의 사람들>의 작중 상황은 그 직후의 역사 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훨씬 오래전 일이니 이를 따질 수 없지만, 학살의 그날이 일요일에 일어난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우연이다.

게다가 1980년 광주학살도 5월 18일 일요일에 시작되었으니, 각각이 서로 다른 동기에서 기획되었을지라도, 검열의 결과는 이것들을 연결하도록 만든다.

그 변혁의 순간에 빚어진 폭력과 혼란이 ‘피’로 엮이는바, 반려 결정은 이러한 번역이 또 다른 ‘피의 일요일’(5.18)에 닿을 수 있음을 우려하는 자백이 된다.

‘서울의 봄’을 끝낸, 광주학살은 전두환 정권에는 원초적인 약점이며, 여기서 파생된 정치적 상상력은 나변(那邊)의 사건을 한국 현실에 맥락화하도록 한다.

5.18이 없었더라면 과연 이 번역극들은 반려되었을 것인가.

이런 점에서 <자유도시>는 특별하다.

북아일랜드의 한 역사적 사건을 그저 심상하게 볼 수 없도록 하고, 그런 만큼 검열 당국의 심의 결과도 가장 원색적이기 때문이다.

1982년 극단 ‘에저또’는 북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의 <도시의 자유>(The Freedom Of The City, 1973)를 <자유도시>라는 이름으로 ‘공륜’에 심의 신청한다(1982.11.15).32) 그러나 일주일 만에 반려된다.

그 사유는 “준법정신의 모독, 반국가・대중선동 및 군중학살 등의 내용이 묘사된 것”으로 ‘공륜’의 「윤리규정」 제2장 제5・6・7항에 저촉된다는 것이다.33)

「윤리규정」의 해당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5. 준법정신과 법정의 존엄성을 해하고 법의 집행자를 무력, 무능하게 묘사한 내용 및 표현.

  6. 반국가적 행동을 묘사하여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는 내용 및 표현.

  7. 폭력 또는 군중학살을 묘사하여 공안을 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및 표현.34)

 

    32) 이 글에서 원작은 <도시의 자유>, 심의대본은 <자유도시>로 구분해 표기함을 밝혀둔 다.

    33) 「심의해설」, 공연윤리 76, 1982.12., 8면.

    34) 「윤리규정」, 공연윤리 1, 1976.9., 2면.

 

그때까지 번역극 심의 내용 중에서 이처럼 강도 높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만약 어쩌다가 우연히 또는 실수로 <자유도시>가 심의에 통과해 공연되었더라면, 이 연극은 공연중지되고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인 방태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 정부가 벌인 일련의 검열 스캔들과 매우 닮은 케이스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처럼 재판은 무혐의로 종결되겠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것이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 차이다.

검열 당국이 <자유도시>를 프로파간다의 재료로 쓰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인데 여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심의대본에 심의위원의 수기(手記)로 작성된 메모에 따르면,35) 「윤리규정」에 근거해

 “1. 민간인에 대한 무장 군경의 발포,

   2. (영국) 정부에 대한 자주적 비판 등 선동적인 대사,

   3. 판사・경찰 등을 무능 무기력하게 묘사”를 심의 저촉 사유로 꼽지만, 반려 결정의 ‘본의’는 <자유도시>에 “광주 소요 사태를 연상시킬 우려가 있는 요소”가 있어서다(그림1).36)

 

      (그림1) : 생략 (첨부 논문파일참조)

 

        35) 이 메모는 겉표지와 속표지 사이의 공지에 쓰여 있다. 심의대본이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던 당시(2015) 이를 찍어둔 것인데, 더 나은 그림자료를 위해 아르코예술 기록원의 디지털원문을 열람하니 이 메모가 빠져 있었다. 의도적인지 실수인지 모르겠 으나 이 누락은 당시의 심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을 훼손한 일이다. 한 편, 당시 무대공연물 심의위원은 다음과 같다. 李重漢(유임), 梁惠淑(유임), 李盤(유임), 韓相喆(신임, 성심여대 교수, 연극평론), 禹吉命(신임, KBS사회교육 전문위원). 제6기 심의위원으로 재임 기간은 1982.3-1983.2이다. 「82년도 분야별 심의위원 위촉」, 공 연윤리 67, 1982.3., 1면.

      36) 이 내용이 심의의견서에도 적시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공연윤리 심 의 내용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심의 준거 중 「윤리규정」 제1장 제7조도 빠져 있 다. 해당 조문은 다음과 같다—“제7조 국제친선을 해칠 요소를 배제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도록 계도한다.”

 

이는 공개되지 않은 이면이다.

정말 <자유도시>는 위험한가.

이 메모에 등장한 “북아일랜드의 군중 시위 사태”란 바로 1972년 1월 30 일 북아일랜드의 데리시(市)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을 가리킨다.

존 레논・폴 매카트니 등이 사건 직후에 이를 노래로 발표했으며 U2의 (1983)가 노래로서는 가장 유명하다.

영화에서는 IRA 등으로 참조되다가 그 사건을 정면에서 다룬 폴 그린그레스 감독의 (2002)에 와서 ‘피의 일요일’이 널리 알려졌다.

연극으로는 <도시의 자유>(전 2막)가 처음인 듯싶다.

사건이 일어나고 1년 후 더블린의 애비극장(1973.2.20)에서 초연되었고, 1주일 후 런던의 로얄 코트 극장(1973.2.27)에서도 공연이 올라갔다.37)

브라이언 프리엘(Brian Friel, 1929-2015)은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평생 아일랜드에 관통하는 여러 분쟁과 쟁점을 소설과 극작으로 표현해낸 민족주의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연극은 그리 간단치 않은 풍부한 깊이와 결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탈식민주의, 역사의 재구성, 포스트모던적 역사관, 불확정적 정체성, 기억의 허구성, 언어와 의사소통의 문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식민주의의 외상 등 연구 주제의 다채로움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38)

 

      37) Brian Friel, “The Freedom of the City”, Brian Friel: Collected Plays–Volume 2, London: Faber, 2016, pp. 12-13.            38) 이미향, 「프리엘 극에서 식민화의 외상과 그 연극적 치유」,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2-3면. 각주 2번에 해당 연구 목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미향의 학위논문은 바 로 외상 이론에 근거해 그의 연극을 분석한 것이다. 한국 영문학자들의 <도시의 자유> 연구는 2001년 이해영의 연구에서 시작되는데, 그리 많은 편은 아니며 번역을 포함한 한국과의 연관성에 주목한 연구는 없다. 이해영, 「Brian Friel의 The Freedom of the City—역사 다시 쓰기」, 현대영미드라마 14(1), 한국현대영미드라마학회, 2001; 김인표, 「브라이언 프리엘의 The Freedom of the City : 지배층의 폭력과 서민의 삶 」, 현대영미드라마 19(3), 한국현대영미드라마학회, 2006; 정윤길, 「<도시의 자 유>(The Freedom of the City)를 통해 본 프리엘의 포스트모던적 역사관」, 인문과 학연구 31,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1; 이미향, 「도시의 자유(The Freedom of the City)에 나타난 외상 연구」, 영미어문학 102, 한국영미어문학회, 2012; 심미 현, 「<도시의 자유>에 나타난 권력담론과 그 희생자들」, 인문학논총 34, 경성대 인 문과학연구소, 2014.

 

<도시의 자유> 역시 ‘피의 일요일’을 둘러싼 다각의 시선을 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것이다.

이 학살은 북아일랜드는 물론 영국에서조차 분노를 일으키고 대법원장 위저리 경의 주재로 조사가 시작되지만, 결국 사건은 조작・은폐되고 영국군은 면죄부를 받는다(위저리 보고서, 1972.4.10). 곧 영국은 무력으로 데리시의 보그사이드 게토를 점령한다.

브라이언 프리엘은 초연 시에 이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인하면서 “빈곤에 대한 연구”라고 말했지만,41) 1980년대에 들어와 <도시의 자유>가 바로 ‘피의 일요일’에 관한, “폭력에 관한 극”이라고 고백한다.

바로 그날의 행진에 참여한 당사자로서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경험”과 이 사건이 완전히 은폐되는 “충격”이, <도시의 자유>를 나오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42)

사실, 앞서 소개했듯이 사건 직후 북아일랜드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영국 본토에서도 런던・맨체스터・리버풀 등 주요 도시에서 분노에 찬 시위대의 항의가 번져갔으나 정부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고,43) IRA의 보복 공격도 시작해 급기야 ‘피의 금요일’(1972.7.21)이 발생한다.44)

 

      41) Evan Boland, “In Interview with Evan Boland(1973)”, Brian Friel: Essays, Diaries, Interviews: 1964-1999, Ed. Christopher Murray. London, New York: Faber and Faber, 1999. pp. 57-58. (김인표, 「브라이언 프리엘의 The Freedom of the City : 지배층의 폭력과 서민의 삶」, 현대영미드라마 19(3), 한국현대영미드 라마학회, 2006.12, 92-93면에서 재인용)

   42) Fintan O'Tool, “The Man from God Knows Where(1982)”, Brian Friel in Con versation, Ed. Paul Delaney, Ann Arbor: U of Michigan P, 2000, pp. 172-17 3; Finnegan, Laurence. “In Interview with Laurence Finnegan(1986)”, Brian F riel: Essays, Diaries, Interviews 1964-1999, Ed. Christopher Murray. Lond on: Faber, 1991, p. 125. (이미향, 「도시의 자유(The Freedom of the City)에 나타난 외상 연구」, 영미어문학 102, 한국영미어문학회, 2012.3, 163-164면에서 재인용.)

     43) 김성열(특파원), 「북아일랜드 ‘피의 일요일’, 영국으로 ⾶⽕」, 동아일보, 1972.2.9., 3면. 예를 들어 ‘피의 일요일’ 이후 첫 일요일에 3천 명이 13개의 관을 메고 다우닝가 히스 수상 관저로 돌진해 들어가려다가 105명의 순경이 부상을 입고 120명의 청년들 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44) 「7명 폭발사, 북아일랜드 게릴라 英空挺隊에 보복」, 조선일보, 1972.2.23., 3면; 「벨 파스트 완전 마비, 북아일런드 악화」, 경향신문, 1972.7.22., 3면. ‘피의 금요일’은 IRA가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의 여러 곳에서 테러를 감행해 13명이 사망하고 120 여 명이 부상한 사건을 일컫는다.

 

이렇게 날로 악화되는 상황인데도 1주일 간격으로 다른 연출가와 캐스트로 더블린과 런던에서 공연할 수 있었으니, <도시의 자유>와 ‘피의 일요일’의 연관성을 부인한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닌 듯하다.

‘빈곤’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고, 연극 자체에서 자기검열한 흔적도 없다.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경험” 그리고 이 사건이 완전히 은폐되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침착하기만 하다.

프리엘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집중한다. 연극은 1970년 2월 10일 데리시 민권대회 중 길드홀에 흘러들어간 세 인물이 영국 군대의 발포로 사망한 사건을 묘사한다.

작중 시간은 ‘피의 일요일’이 일어나기 2년 전이고 사망자도 셋이지만, 누가 봐도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릴리・스키너, 시위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모인 이들은 공교롭게도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이자 빈민이다.

연극은 이들이 이미 주검이 된 상황에서 시작하지만, 단순한 역전적 구성은 아니다.

무대에는 두 개의 시간이 겹친 채 짧은 장면의 교체가 연속해서 진행된다.

하나는 세 인물이 총에 맞아 사망한 직후부터 판사의 최종 결론이 내려지기까지다.

이 시간의 주축은 판사의 사건 조사 과정이다.

군, 경찰, 관계 전문가 등 참고인을 불러 세 인물에게 무장 폭도라는 거짓 혐의를 씌운다.

다른 한편 신부(priest)는 처음엔 세 인물이 무장하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그 죽음을 애통해하지만, 정작 위령 미사에서는 공산주의자・혁명주의자가 일으킨 불장난의 희생자라고 하면서 태도 변화를 보인다.

이들의 공간은 앞쪽 돌출무대, 측면, 무대 위쪽의 흉벽이다.

다른 하나는 마이클・릴리・스키너가 길드홀 응접실에 들어오는 데서부터 시작해 이들이 사살되기까지다.

이 시간의 주축은 길드홀 응접실의 세 인물이다.

마이클은 줄곧 민권운동에 참여해왔지만 체제에 대한 기대를 가지며 중산층이 되길 바라는 실직자이며, 릴리는 극한의 빈곤 속에서도 가장 노릇을 못하는 남편과 11명 자녀를 부양하는 따뜻한 마음씨의 여인이고, 스키너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상황 판단이 빠르지만 냉소적이어서 방어적인 경박 함을 보여주는 귀족 출신의 부랑자다.

그러나 이들은 민권대회에 참여한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로서 예외 없이 빈곤하다.

이 밖에 길드홀 바깥의 상황이 동시 진행된다.

무대 밖에서는 민권대회 집회와 군대의 무력 진압 소리가 들리는 한편, 무대 위에서는 육군장교・RTÉ(아일랜드 방송국) 해설자・민요시인(balladeer)과 친구들 등이 등장한다.

방송국 해설자는 50명가량의 무장시민이 길드홀을 점거 중이라는 미확인 보도를 내보내고, 이어 등장한 민요시인의 노래에서 그 숫자는 100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군이 파악한 숫자는 40명으로 줄어드나 이 역시 많기는 마찬가지다.

무성한 소문이 만들어지는 길드홀 바깥의 기류는 결국 영국 군대가 강경진압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두 시간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

하나는 ‘빈곤’에 관한 학술적 담론을 다섯 차례 전하는 미국의 사회학자 더즈 박사이며, 다른 하나는 극 후반부에 사자(死者)로 등장한 세 인물이다.

더즈 박사는—극중 사건과 무관한 학술 담론의 전달자로서—전 세계적인 빈곤문화의 유전(遺傳)을 역설한다.

작가가 이 인물에게 부여한 일정한 기능은 탐구해볼 만한데, 결과적으로는 무대 위의 세 인물을 그 증거로 삼는, 불편부당한 듯이 지배 언어를 생산하는 이데올로기를 나타낸다.

사자(死者)는 판사가 중간 조사 결과를 보고한 직후(2막)에 등장한다.

판사의 잠정적 결론에 따르면, 이들의 ‘길드홀 점거’는 법과 질서의 합법 세력에 도전하기 위해 신중하게 도모된 선동 행위다. 이에 반박이라도 하듯이 이어서 세 인물이 주검이 되어 등장한다.

개막 시의 위치에서 이들은 생전에 길드홀에서는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는 차분한 어조와 정돈된 언어로 그들이 사살되던 순간을 전한다.

마이클은 자신이 사살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이 ‘터무니없는 오해’에 절망하고, 릴리는 43년 인생을 사기당해온 원인이 단 한 번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채 살아온 데 있음을 비로소 깨닫고 후회한다.

이들과 달리 자신이 시장의 응접실에 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대가를 치러야 함을 알았다고 말하는 스키너는, 자 신들을 진지하게 대한 적이 없는 저들의 방식을 ‘방어적인 경박함’으로 흉내냈으며 그래서 죽었다고 이해한다.

세 사람 모두 각자 위치에서 ‘발견’하고 ‘성찰’한다.

물론 이들의 독백은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유언으로, 죽음의 순간에 그들 머릿속에 스쳐갔을 찰나의 생각을 작가가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추측건대 이 연극은 데리 또는 더블린 또는 런던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했을 듯하다.

이 연극이 공연되었을 때 영국 언론에서 그 “정치적 내용” 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45) 당연하다.

  

     45) 김인표, 앞의 글, 91-92면. 그러나 출처가 없어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먼저 발포하기는커녕 무장하지 않은 이들의 죽음에, 영국의 책임이 명백함을 보여주는 무대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영국인에게는 IRA 공격으로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의식이 있지 않은가.

(북)아일랜드에서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사건을 날조한 ‘위저리 보고서’를 피고로 삼아 피해자 원고의 거증책임을 다한 연극이지만, 이 무대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는 차갑게 식은 까닭이다.

아니, 오히려 비판적 거리두기라 해야 맞다.

민권운동과 IRA 노선을 드러낼 전형적인 인물도 없고, 민요시인 노래가 기껏 두 편 있으나 세 인물을 ‘영국의 압제에 항거하고 아일랜드의 통일과 해방을 위해 피 흘린 영웅’으로 칭송하니, 조사위원회 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대 위의 진실’과 불일치한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누구에게는 무장한 테러리스트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IRA의 난동 때문에 희생된 사람이 되며, 또 누군가에게는 북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기꺼이 싸운 투사가 된다.

작가는 그 어느 곳에도 마이클과 릴리와 스키너를 두지 않는다.

영국의 공식 문서와 그에 동조하는 종교계의 해석 그리고 이와 상반된 아일랜드 민족주의 측의 해석, 이 양극(兩極)의 담론과 일치하지 않는 존재의 드러냄을 통해 연극은 그러한 해석을 무력화한다.

길드홀 응접실의 그들은 아일랜드계 가톨릭교 도라는 점 외에 공통점이 거의 없지만, 연극은 다양한 동기에서 정치적 행위—이를테면 민권대회 참여—를 하지만 좀처럼 재현되지 않는 서발턴의 형상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마이클은—호미 바바나 스피박 식 정의로 말하자면—민권운동 초기부터 행진에 참여해왔으면서도 영국의 지배체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양가적 정치행위자’다.

릴리는 “식민 가부장세계에서 제국의 압제자와 피식민 남성의 핍박으로부터 권리를 박탈당한 채 다중으로 억압받고 희생을 강요”당하여 자신의 “삶의 경험을 제대로 인식할 수도, 말할 수도” 없지만,46) 다운증후군 아들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기꺼이 행진한다.

스키너는 지금 일어나는 사태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는 정치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으나 냉소적이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지만 행진 대열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길드홀 응접실에 머무는 동안, 조각난 채로 불분명하게 전달되는 그들의 언어와 유희는, 죽어서야 비로소 정제된 언어로 번역된다. 요컨대, <도시의 자유>는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가’뿐만 아니라 ‘그들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판사의 조사 과정과 그 결과를 통해 “다양한 국가장치와 권력담론”의 결탁을 전시함으로써47)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고, 더욱이 길드홀인지도 모른 채 그들이 총과 탱크와 세슘 가스를 피해 그곳에 흘러들어온 경위가,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가 처한 위협임은 분명하다.

   

    46) 심미현, 「<도시의 자유>에 나타난 권력담론과 그 희생자들」, 인문학논총 34, 경성대 인문과학연구소, 2014, 174면.

    47) 위의 글 참조.

 

그들은 ‘피의 일요일’의 당사자로서 진실의 은폐에 침묵을 강요당한 존재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 대표성은 민요시인이 읊는 것과 같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신화화와는 거리를 둔다.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릴리의 이웃, 번쩍거리는 요란한 옷을 입고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라고 부르는 미니 맥래플린이 등장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세 인물은 양 극단의 지배담론에 속하지 않으나 이들 삶의 조건은—더즈 박사가 환기 했듯이—“뉴욕, 런던, 파리, 더블린 등 사실상 서구 전역의 게토”(p. 19)48) 주민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에 비견할 만한 조건에 있는 존재들을 대표한다. 이것이 <도시의 자유>를 내셔널한 경계를 넘도록 만드는 원천이 아니었을까.

동시에 이 연극은 이들의 삶이, 일상이, 목소리가 살해되고 은폐되는 사건이 역사로 쓰일 수 있느냐고 묻는 듯하다.

마지막 장면은 그 대답이다.

15초 동안 작열하던 자동소총 소리가 멈춘 후, 스포트라이트로 비춰진 세 인물은 “머리를 손에 얹고, 앞을 노려본다.”(p. 87) 사자(死者)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이 엔딩은 전적으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그러나 그 노려보는 시선은 한국에 도달하지 못한다.

 

4. ‘자유도시’ 비/가시화의 패러독스

 

<도시의 자유>를 <자유도시>라는 제목으로 ‘공륜’에 심의 신청을 한 때가 1982년 11월이다.

한국에서 북아일랜드 기사는 민권운동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부터 눈에 띄지만, 심의 신청 시점까지 보도 건수가 급증한 때는 두 번이다.

1972년 ‘피의 일요일’을 전후로 한 시기, 그리고 1981년 5 월 IRA 죄수를 정치범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며 옥중에서 단식투쟁하던 IRA 출신 영국 국회의원 로버트 샌즈가 사망하던 때다.

로버트 샌즈는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순교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 5월만 해도 3명의 ‘순교자’가 나왔다.49)

 

     48) Brian Friel, “The Freedom of the City”, Brian Friel: Collected Plays–Volume 2, London: Faber, 2016, p. 19. 이하 <도시의 자유> 인용시에 쪽수는 괄호 안에 넣 는다. 이때 쪽수 표시 p(pp)임을 일러둔다.

     49) 「가톨릭청년신도 9일째 폭동, 북아일랜드 신・구교 종교분쟁 재연 위험」, 경향신문, 1981.4.24., 4면; 「단식투쟁일지」, 경향신문, 1981.5.6., 4면; 김윤곤(외신부 차장), 「네 번째 순교자」, 조선일보, 1981.5.23., 3면.

 

이전과 달리 비중 있게 북아일랜드의 위태로운 상황이 전해졌고 이듬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1982.3.18)도 있었으니, 극단 ‘에저또’가 한국에 출판된 적도 소개된 적도 없는 <도시의 자유>를 선택한 것은 다소 공교로운 일이다.

이 희곡의 역자는 ‘유혜련(柳惠蓮)’인데, 1987년 동일한 심의대본인데도 역자는 ‘최영애(崔永愛)’로 고쳐졌고, 공연(1987.11.25~12.1) 팸플릿에는 ‘방태수’로 쓰여 있다(그림2).

이는 <자유도시>의 역자가 방태수이거나 최소한 번역에 그가 깊이 간여했음을 말해준다.

앞서 일러두었듯 <자유도시>의 반려 사유는 “준법정신의 모독, 반국가・대중선동 및 군중학살 등의 내용”을 묘사한 점이다.

현재 아르코예술기록원 소장의 심의대본에는 심의위원의 별다른 검열 흔적이 없다.

대신, 심의기준에 저촉될 만한 대사에 줄을 긋고 ‘방태수’ 도장을 찍어 대본을 정리한 자기검열 흔적이 있다(그림3).

 

   (그림2)/(그림3)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공륜’이 사전에 비공식적으 로 수정 요구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만약 그 흔적이 요구 사항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면 적어도 수정통과쯤은 나와야 한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자유도시>는 전면개작도 불가능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사전 조율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극단 측은 검열 당국이 규제하는 표현을 성의껏 걸러내고, 맨 앞에 Sunday Telegraph에 실린 프랭크 마르크스의 글(초연 정보와 간단한 개요) 그리고 Financial Times에 실린 게리 오코너의 작가에 대한 고평50)을 첨부하는 등 영국의 권위 있는 (주간)신문에 기대어 보지만, 결국 심의 통과를 위한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50) “브라이언 프리엘은 현 사태가 발생된 이후로 가장 뛰어난 북에이레 극작가라고 믿는 다.이런 주제가 빠지기 쉬운 선전성이나 단순성을 웃도는 예술성을 지닌다.”

 

다만, 심의대본상에 나타난 자기검열의 흔적을 참고해 <자유도시>의 문제성을 읽을 필요는 있다.

검열당국의 반려 사유와 극단 측의 자기검열 내용이 일치하는 건 아니다.

자기검열은 그에 선행하는 ‘공륜’의 심의기준에 의거하므로, 피검열자가 고려한 범위는 심의 이후의 반려 사유보다 넓을 수 있다.

먼저, 반려 사유 중 “준법정신의 모독”에 상응하는 내용은 ‘인권’(이 번역에 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대회 그리고 세 인물의 공공기관(길드홀) 무단 침입과 점거다.

그중 무대에서는 ‘소리’로만 들리는 인권대회가 정부 당국이 금하는 불법 집회인지 아닌지 텍스트상에서 드러난 바 없고, 시위 군중 중 누군가가 무장하고 먼저 도발한 정보도 없다.

그렇다면 검열 당국이 말하는 그 ‘모독’은 공공기관(길드홀)에 무단 침입-점거를 한 세 인물의 행위로 제한된다.

물론 검열 당국이 인권대회를 텍스트의 실제와는 무관하게 불법 집회라고 간주해, 두 가지 모두 심의에 저촉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한편, 피검열자 입장에서 그 두 가지는 <도시의 자유> 핵심 전제이므로 이를 제거하면 연극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대신, 집회 성격을 가급적 노출하지 않거나 약화시킨다.

“인권 행진”을 “행진”으로(16면)51)으로 만들고, 공연상에서는 관객에게 닿을 소리가 아닌 ‘삽입지 시문’에서 “인권대회 현장”(8면)을 삭제하거나 “인권 시위”를 “군중”으로(19 면), “강제 해산”을 “해산”으로(19면) 수정한다.

‘인권’을 덜어냄으로써 집회의 정치성을 옅게 만든 것이다.

반려 사유 “반국가・대중선동”도 애매한 수준이다. 길드홀 응접실의 세 인물이 그런 발화를 한 적이 없으니, 그 해당 내용은 온전히 무대 바깥에서 벌어지는 인권대회 그 자체이거나 거기에서 들리는 ‘소리’가 된다.

작중 상황의 핵심 전제가 변경될 수 없으니 인권대회 성격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 소리 자체가 “반국가・대중선동”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길드홀 광장으로부터 한 여인이 연설한다, 그러나 확성기 잡음 때문에 내용은 알 수 없다, “어쨌든 박수와 환호성에 중단되곤 하는 격렬한52) 연설이다.”(8면)

 

     51) 심의대본의 대사 및 지문 인용시 그 쪽수는 괄호 안에 표시한다.

     52) 심의대본의 삭제 및 수정 대목은 글자체를 달리해 굵게 강조한다.

 

극단 측의 자기검열도 “격렬한”을 삭제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을 정도다.

분명한 언어로 연설이 들리는 대목은 이뿐이다—“여인 : 자기 자리를 지킵시다! 서시오! 용기를 가지시오! 이곳은 당신들의 땅입니다! 이곳은 당신들의 땅입니다!”(9면)

이 대사를 전후로 하여 영국 군대의 끔찍한 진압 작전이 개시됨을 알려주는 삽입지시문이 나오지만, 이를 대부분 삭제해서 대사의 전후 맥락이 그나마 휘발된다.

“반국가・대중선동”은 어디에도 없다. 즉 ‘공륜’의 반려 사유에 따르면, 길드홀에 우연히 흘러들어간 것이 의도적인 점거 행위가 되어야 하고, 인권대회는 반국가적 행위와 함께 대중선동을 하는 불법 집회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만한 증거가 텍스트상에서는 매우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심의 결정은 이 연극이 애초에 통과될 수 없다는 또 다른 사유 때문이다.

“군중학살”의 정황이다. 「 윤리규정」 제2장 제7항에 의하면 엄밀히 말해서 ‘폭력’과 ‘군중학살’로 나뉜다. 상당부분이 자기검열로 삭제된 상태지만, 이것이 더 도드라져 보여 오히려 반려 증거를 풍부하게 만든다.

무대에서 이를 보여주지 않지만, 소리’는 군중의 해산을 넘어 학살에 이르는 수준이다.

 

(가까와 오는 탱크의 포효에 돌연 모든 소리가 잠겨 버리고, 온 극장에 가득한 탱크 소리로 귀가 멍멍해진다. 소리, 멈춘다. 5초 동안의 침묵. 그후 여인이 사람들에게 연설한다.) 여인 : 자기 자리를 지킵시다! 서시오! 용기를 가지시오! 이곳은 당신들의 땅입니다! 이곳은 당신들의 땅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총소리에 잠기고— 고무총과 세슘가스— 장내는 금방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공포, 비명, 고함. 탱크와 물대포의 빙빙 도는 엔진이 달아나는 무리들을 뒤쫓는다. 연달아 고무총과 꽝 터지는 가스산탄. 소리, 서서히 뒷면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에 따라, 더즈는 아까처럼 조용히 말을 계속한다.) —<자유도시>, 제1막, 9~10면. (강조-자기검열: 삭제)

 

귀가 멍멍해지는 탱크의 굉음, 고무총과 인체에 매우 유해한 세슘 가스, 물대포, 가스 산탄이 터지는 소리 그리고 더즈 박사의 대사가 끝나고 나서 “총이 난사된다.”(10면)

사실, 무대 바깥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 중 객석에서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집회 해산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들을 수 없는 무력 진압의 소리, 무엇보다 이에 반응하는 군중 소리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세 인물을 제외한 사망자가 더 나왔다는 보고는 없지만, 이를 믿기 힘든 수준이다.

병사들의 무장(武裝)을 비가시화하는 자기검열(5면)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음을 어떻게 믿겠는가. 사실, 이 연극은 일상적인 국가폭력을 암시한다. 국가기관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진상조사가 조작으로 점철될 수 있고, 이에 협조적인 공적 담론은 이를 사실로 인증한다.

길드홀의 마이클・릴리・스키너는 마치 고립된 섬과 같다.

일상적인 폭력은 릴리의 대사에서도 ‘흘려진다.’

쉽케이(Shipquay) 거리에서 경찰이 젊은 애를 피가 솟을 정도로 몽둥이질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고(13~14면), 위층에서 사는 미니 맥래플린도 지난주 다리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16면).

한편 폭력 장면은 주로 세슘 가스와 물대포를 흠씬 맞은 세 인물이 길드홀 응접실에 나타나기 직전과 직후에 집중되어 있지만, “군중학살”은 이 연극의 핵심적인 질문과 연관된다.

세 인물이 무기를 소지하고 먼저 발포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물론 이는 극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알 수 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판사 : 요약해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2월 10일 런던데리에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행진과 집회의 무언의 시위가 존중됐더라면, 강단의 연사가 군중을 그처럼 자극하여 치안당국과 시위자 간의 충돌을 필연적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2. 치안당국의 무절제한 행동과 체포군의 보복적 행동의 고발은 증거 불충분입니다.

  3. 먼저 총세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병사들이 발사를 개시한 이유가 없습니다.

  4. 본인은 죽은 세 사람이 길드홀에서 나타날 때 무장을 했으며 적어도 두 사람은—헤가티와 도허티 여인—총기를 사용했다는 목격자와 여러 분야의 기술 전문가들의 증언을 채택해야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생포가 불가능했던 겁니다. 이 조사단의 서류는 이제 관계 기관에 넘기는 바입니다. (세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빼고는 이제 전 무대가 어둡다. 사이. 15초 동안 자동 소총[음]이 작열한다. 정지. 세 사람, 아까처럼, 머리를 손에 얹고, 앞을 노려본다. 어둠.) —<자유도시>, 제2막, 91~92면. (강조-자기검열: 삭제 및 수정)

 

‘공륜’의 반려 사유는 텍스트를 초과한다.

“준법정신의 모독”과 “반국가・대중선동”의 근거는 불충분하다.

피검열자가 자체적으로 수정한 심의대본이니 더욱 그렇다. 만약에 심의대본상에 기록된 「윤리규정」 제1장 제7조, 즉 “국제친선을 해칠 요소를 배제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도록 계도한다.”가 반려 사유라면 좀 더 그럴 듯할 것이다.

그러나 피검열자의 자기검열에서 매우 뚜렷하게 의식된 “군중학살”의 정황은, 이 텍스트가 그냥 타국의 역사 또는 허구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정치적 감각을 드러낸다.

이는 심의대본상에 적시되었듯 ‘광주’에까지 닿은 검열자의 감각이기도 하다. 피검열자와 검열자가 공유하는 어떤 ‘우려’가 「윤리규정」 또는 각본 심사기준의 문자에 고착된 것이 아닌 이상, ‘피의 일요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피의 일요일’은 북아일랜드의 1972년과 한국의 1980년을 잇는 유사경험임이 분명하다.

아일랜드와 한국이 닮았다는 관념은 예전에도 있었다.

식민지시기 “문화적으로 열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국가로부터 식민지화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분투해온 아일랜드”의 참조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보는 데 있었다.53)

 

    53) 이승희, 「조선문학의 내셔널리티와 아일랜드」, 민족문학사연구 28, 민족문학사학회, 2005, 71면.

 

조선의 아일랜드 참조는 식민지-제국의 관계라는 범주에서 작동한 것이다.

1972년 또는 1980년은 그때와 다르다.

아일랜드와 한국은 독립해 국가체제를 완성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가 살아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북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은 아일랜드 문제가 해소된 게 아니라 게토화되었을 따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의 시작이며, 한국의 ‘피의 일요일’ 은 독립과 동시에 편입된 냉전체제가 군사독재의 알리바이이자 재생산 기제임을 명백히 확인한 사건이다.

정치과정은 다르지만, ‘피의 일요일’은 식민지-제국의 전지구화 현상을 전사로 하여 사실상 국가폭력의 문제를 점화한다. 북아일랜드에서는 IRA가 항전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오고, 한국은 군부의 폭력이 데리시의 피해규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한 도시를 초토화시킨다.

국가폭력의 야만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응전해야 하나.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도시의 자유>에서 <자유도시>로의 번역은 연극의 국적 이동이 아니라 데리와 광주를 잇는 트랜스내셔널한 실천이 되기 때문이다.54)

 

    54) 더즈 박사의 강연은 ‘빈곤’이 어느 지역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환기한다 (p. 19, p. 80).

 

번역자가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위저리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은폐되고 조작된다.

다만, 이 번역을, 여러 이유로 ‘광주’를 재현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선택한 보상 또는 대체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이 결핍은 이 연극의 제목이 왜 ‘The Freedom of the City’인지, 번역자는 왜 ‘자유도시’로 번역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나온다.

생각해 보면 마이클과 릴리와 스키너를 둘러싼 억압적인 공적 세계의 벨트는 제도화된 국가의 추상성을 뚜렷이 드러내지만, 작가는 그 추상성을 대표하는 “통합당(unionist) 지배의 상징”(p.27) 길드홀에 세 인물을 놓아두고 이들의 일상을 열어 보인다.

특히 릴리가 묘사하는 자신의 생활 세계는 계속해서 틈을 만들어내고, 길드홀에 들어선 순간 ‘끝’을 보아버린 것 같은 스키너의 ‘저들’ 흉내내기는 ‘도시의 자유’를 불러낸다.

스키너는 시장의 옷을 입고 릴리에게 ‘the freedom of city’ 즉 ‘명예시민권’ 수여식을 거행한다.

여기서 이 연극의 제목이 왜 ‘the freedom of city’인지가 드러난다.

 

SKINNER : Mayor’s robes, alderman’s robes, councillor’s robes. Put them on and I’ll give you both the freedom of the city.

LILY : Skinner, you’re an eejit!

SKINNER : The ceremony begins in five minutes. The world’s press and television are already gathering outside. ‘Social upheaval in Derry. Three gutties become freemen.’ Apoogies, Mr Hegarty! ‘Two gutties.’ What happened to the Orphans’ Orchestra? (…) 

SKINNER : Lily, this day I confer on you the freedom of the City of Derry. God bless you, my child. And now, Mr Hegarty, I think we’ll make you a life peer. Arise Lord Michael—of Gas. — The Freedom of the City, Act 1, pp. 48-49.

 

이들의 행진은 민권(civil rights)을 요구하는 정치적 실천이지만, 국가폭력은 또다시 이를 좌절시킨다.

길드홀에서의 명예시민권 수여식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스키너가 마련한 자기 위로다.

비록 “일시적인 유희”라 할지라도,55) 제국과 잉글랜드계 개신교가 지배하는 이 도시에서 이들은 시민권이 거부된 이방인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55) 한국 연구자에 의한 <도시의 자유> 연구 중에서 스키너가 주도한 이 의식이 ‘명예시민 권’ 수여식임을 지적한 것은 심미현의 연구가 유일하다. 그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명예시민권’ 수여식을 모방한 이들의 역할놀이야말로 위반적인 행위를 통 해 북아일랜드 사회의 공적인 질서, 이데올로기, 관행을 전복시킨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바흐친의 ‘카니발’이다. (…) 이들의 “명예시민권”은 길드홀 안에서 그저 시간을 때우 기 위한 무저항의 일시적인 유희의 시간동안에만 유효하다는 사실은 그들의 현실의 초라함을 더욱 강조할 뿐이다.” 심미현, 앞의 글, 174면.

 

길드홀을 나서기 직전, 저명인사의 방명록에, 스키너는 자신의 이름 옆에 “Freeman of the city”(p. 83)라고 쓴다.

그리고 잠시 후 길드홀을 나선 순간, 이들은 사살된다.

이렇게 보자면 ‘자유도시’라는 제명은 ‘the freedom of the city’에서 ‘명예시민권’의 의미를 제거한 결과다.

앞서 인용한 원문 중 스키너가 시장이 되어 명예시민권을 수여하는 장면에서, 역자는 “우리의 도시를 세웁시다.”(44면), “나는 오늘 당신에게 데리시의 자유를 수여합니다.”(45면)로 번역한다.

넓은 의미에서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 번역은 시민권이 거부된 이방인의 또렷한 상징성 그리고 게토화된 도시의 횡단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자유도시’라는 번역은 게토의 역설적인 의미, 즉 해방구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Social upheaval”을 “소요 사태”로 격하하는 자기검열 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데리시의 소요 사태”는 “세 명의 떠돌이, 자유민이 되다.”(44면)라는 비전을 성취하고 더 나아가—심의위원이 적시한—“광주 소요 사태”에 도달하도록 한다.

이는 <도시의 자유>를 데리에서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도시”에 위치시키려 한 작가의 뜻이56) <자유도시>에 와서 맺힌 것이기도 하다.

‘민권(civil rights)’을 ‘인권(人權)’으로 번역한 것은 그런 점에서 다분히 의도적이다.

일반적으로 민권이 참정권을 중심으로 국민국가 구성원에게 부여된 권리를 의미한다면, 인권은 국가와 실정법 이전에 모든 개인이 인간으로서 타고난 권리를 의미한다.

물론 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현실적 장치가 국가라는 점에서 이 역시 국가적 구성물이기는 하다.57)

그러나 국가를 초월하는 가치의 중요성이 증대될 때마다 인권의 보편성이 확장되어온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도시>의 역자가 ‘민권’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굳이 ‘인권’으로 교체한 맥락도 바로 그쯤에 있다.

이 번역은 국가폭력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 권리와 의무에 긴박된 민권 개념으로 감당하기 힘든 정세”에서 “1970년대 인권 개념은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정치 기표”로서 “모든 사회적 갈등과 적대, 억압과 착취, 불합리와 부조리에 항거하는 보편적 저항의 언어”가 된다.58)

 

      56) William Jent, “Supranational Civics: Poverty and the Politics of Represen tation in Brian Friel’s The Freedom of the City”, Modern Drama 37(4), T 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4, p. 579. (심미현, 앞의 글, 162면에 서 재인용.) 원문은 다음과 같다. “So it seems clear that Friel intends to locate the play not in Derry as such but in every city where the poor struggle for political and economic freedom.

      57) 이상 민권과 인권의 개념적 이해는 황병주, 「해방 이후 민권과 인권의 정치적 상상력」, 역사비평 146, 역사문제연구소, 2024년 봄, 60-62면 참조.

      58) 위의 글, 88-89면과 93면

 

이런 상황에서 국가폭력이 극에 달한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경험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자유도시>의 번역이 그와 같았을 것인가. 

<자유도시>는 데리의 ‘피의 일요일’을 광주의 ‘피의 일요일’로, 북아일랜드의 민권운동을 한국의 인권운동으로 전유한다. 오역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해도 ‘자유도시’는 게토화된 해방구 광주를, ‘인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의 실천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왜 그들이 저항하고 또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극단 ‘에저또’가 <자유도시>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검열 당국이 이를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5. 사상검열의 역설

 

<도시의 자유>에서 <자유도시>로의 번역 그리고 그 검열의 결과는 지극히 1980년대적이다.

긴급조치 시기에 심의를 받았다면—판사・군・경에 대한 부정적 묘사 때문에—이 역시 통과되지 않았겠지만, 1982년 시점의 반려 처분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동기에서 이뤄진 것이다.

즉 전두환 정권의 탄생이 1980년 5월 광주학살이라는 원죄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의 은폐다.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을, 1973년 브라이언 프리엘이 1970년 길드홀의 사건으로 극화했다면, 이를 한국으로 가져온 1982년 극단 ‘에저또’의 <자유도시>는 광주의 ‘피의 일요일’에 가닿는다.

저 멀리 북아일랜드의 내셔널한 역사가 위험한 이유는 번역 주체도 검열 권력도 이미 알고 있다.

심의대본에 노출된 자기검열의 내용은 ‘공륜’의 공식적인 반려 사유—“준법정신의 모독, 반국가・대중선동 및 군중학살 등”이 묘사된 것—와 상통한다.

이는 번역 주체가 심의 내용을 예측했다는 뜻이지만, 자기검열이 오히려 반려 근거가 될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수정되거나 삭제된 것을 심의 저촉 사유로 삼는 것 자체는 부당하지만, 그런 자기검열의 수고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그것 은 “광주 소요 사태를 연상시킬 우려”가 있는 학살의 정황이다.

이는 연극의 핵심 질문으로서 이를 제거해서는 연극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엄폐 대상이 된다.

<자유도시>의 검열은 ‘서울의 봄’을 끝낸 광주학살이 전두환 정권에는 원초적 약점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자유도시>는 비록 부재하는 현존이 되지만, 이 존재는 그 폭력적인 전환이 불러온 거대한 파장이 동심원을 이루면서 형성하던 사상적 내용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데리의 ‘피의 일요일’을 광주의 ‘피의 일요일’로 전유하는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은, 사실상 국가폭력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한다.

그 현장에는 학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삶도 존재한다.

데리에서는 민권운동이,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이 국가폭력에도 꺾이지 않는 변혁의 역사를 써 나갈 것임을 상상하도록 한다.

‘도시의 자유’를 ‘자유도시’로, ‘민권’을 ‘인권’으로 번역한 데서, 게토화된 해방구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시민의 실천이야말로 부재하는 현존임을 역설하는지 모른다.

검열권력은 정권의 정당성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을 제거하려 하지만, 변혁의 역사는 정치담론이 지하화된 한국의 현실과 교섭하면서 저항의 서사를 엮을 만한 조각들을 생성한다.

또 다른 반려된 번역극 <1793년 7월 14일>과 <정의의 사람들>이 그 증거다.59)

1984년, 극단 ‘프라이에 뷔네(freie Bühne)’60)는 <1793년 7월 14일>(김종일 역)의 심의신청서를 ‘공륜’에 접수한다(1984.4.4).

  

      59) 이 두 편은 <자유도시>와의 관계에서 논할 만한 연속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또 다른 부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더 진전된 논의를 필요로 한다.이 연구는 부득이 거기 까지는 나아기지 못했다.지면의 한계도 있거니와 문제의식을 좀 더 달리하여 살필 필 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필요한 부분만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60) ‘프라이에 뷔네 freie Bühne’는 원래 1889년 프랑스의 자유극장에 자극을 받아 창단 된 연극 단체 이름이다. 한국에서 이 극단은 1967년 12월 박종서 교수를 중심으로 당 시 독문과 학생들이 모여 결성한 독일연극 공연단체로서 이듬해 봄 하우프트만의 <해 뜨기 전>으로 창립공연을 가졌다. (김창화, 「제5장 독일연극」, 신현숙 외, 한국에서의 서양 연극, 도서출판 소화, 1999, 382면 각주 58번.) 이후로도 독일문화원의 후원 아 래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79년 한국연극협회 준회원이던 극단의 이름을 ‘우리 극장’으로 바꾸고 정회원으로 활동한다(「<포포 왕자와…>, 우리극장, 14-20일」, 동아 일보, 1979.6.12., 5면). 그러나 이후 ‘우리극장’과 별도로 ‘프라이에 뷔네’가 활동을 재개한다. <1793년 7월 14일>은 두 단체로 나뉜 이후의 ‘프라이에 뷔네’가 기획한 것 이다.

 

총 33개 장으로 구성된 심의대본은 일명 <마라/사드>(1964)61)로 불리는 페터 바이스(Peter Ulrich Weiss)의 작품이다.

주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수준에서 이해된다—“혁명을 주축으로 하면서 ‘정치적 사유의 인간’ ‘폭력주의자’ ‘맑스의 원형’ 으로서의 민중과학자 마라와, ‘극단적 개인주의자’ ‘중도파’ ‘프로이트의 원형’으로서의 귀족 문인 사드 후작과의 대립과 토론을 축으로 삼는 이 작품에는 비유가 흘러넘치는 쉬르레알리즘적인 색채와 사회비판과 개혁의지가 담긴 하드 보일드한 힘이 교차되고 있다.”62)

<마라/사드>의 “일차적인 공격목표는, 위선적인 태도로 인간애와 도덕을 강조하는 나폴레옹 사회 또는 이로 대변되는 시민사회의 폭력”이며, 이에 맞서는 마라/사드의 서로 다른 폭력을 등장시켜 “자아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능성을 모색한다.”63)

 

    61) 원제는 <사드 후작의 연출로 샤랑통 정신병원 환자들이 공연한 장 폴 마라의 추적과 살해>.(Die Verfolgung und Ermordung Jean Paul Marats dargestellt durch die Schauspielergruppe des Hospizes zu Charenton unter Anleitung des Herrn de Sade)

    62) 이상일, 「작가 소개 : 페터 바이스의 <마라와 사드>의 세계」, P. Weiss, 이상일 옮김, 마라와 사드, 성균관대 출판부, 1999, 91면.

    63) 정항균,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에 나타난 폭력담론」, 독일어문화권연구 23, 서 울대 독일어문화권연구소, 2014, 177-178면.

 

간단히 말하면 프랑스 대혁명의 대의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마라 그리고 이를 격렬하게 회의하면서 개인의 쾌락을 주장하는 사드 간의 철학적 논쟁이다.

얼핏 보면 작가의 제3의 관점을 논할 수 있는 설정이고 그래서 이후 작가가 사회주의로 선회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미 <마라/ 사드>에는 그러한 경향성이 깃들어 있다.

사드보다는 마라 측 인물들의 장면이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관점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연극이 시간의 변증법 구조를 띤다는 데 있다.

마라 최후의 날은 1793년 7월 13일이고 이로부터 15년 후 샤랑통 정신병원에서 사드 연출의 공연은 1808년이다.

단순한 극중극이라기보다 그 두 개의 시간에 이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간을 겹쳐야 비로소 연극이 완성된다.64)

말하자면 1964년 서베를린 시립 실러극장에서의 초연은 1793-1808-1964년의 변증법에서 마지막 퍼즐이 된다.

‘과연 당신은 두 개의 시간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묻는다.

만약 공연이 성사되었다면 ‘1964년’ 대신 ‘1984년’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공연예고 기사는 나갔지만65)—심의대본은 반려된다(1984.4.13).

반려 사유는 다음과 같다—“역사적 사실을 가상무대를 통해 극화한 내용으로 경향적 작가의 주관적이고 과격한 해석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등의 사유로 결정케 되었다.”66)

 

      64) <마라/사드>의 복잡한 시공간적 변이 양상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김겸섭, 「페터 바이스와 소수적 연극-마라/사드를 중심으로」,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21, 한 국브레히트학회, 2009, 124-127면.

     65) 「공연」, 조선일보, 1984.4.13., 6면. 심의 신청은 ‘프라이에 뷔네’가 했지만, 기사에 따르면 이 공연은 극단 ‘뿌리’와의 합동 공연이다.

     66) 「심의해설」, 공연윤리 93, 1984.5., 8면.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사회주의에 경사된 작가, 다른 하나는 주제다.

이 판단이 아예 틀리지는 않지만, 원작과 번역본 간에 거리가 상당하다.

일단, <1793년 7월 14일>은 <마라/사드>의 축약본쯤 된다.

각 장면은 짧아지고 그러다 보니 빈번한 장면 교체로 맥락은 취약해진다.

부수적인 것을 생략하거나 장광설을 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검열로 삭제된 것이 많다.

주제의 주축임에도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된 묘사는 될수록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인권’ ‘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단어는 삭제되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되고, 가장 과격한 언동을 하며 마라를 옹호하는 인물 자크 루 신부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혁명적 에너지는 현저히 약화된 채 마라만이 거의 유일하게 순화된 혁명의 기운을 전달한다.

<마라/사드>의 번역은 매우 초라하다.

이는 전적으로 검열당국을 의식한 자기검열의 결과다. 심의에 저촉될 만한 어휘와 장면을 솎아내면서 전 체적으로 혁명의 기운은 순화되고 마라와 사드의 철학적 쟁점은 둔화된다.

이러한 번역이면 심의에 통과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극단 ‘뿌리’와 합동공연을 추진했을 테지만, 개막 당일 반려 통보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관계를 접어두면 <마라/사드>를 번역하고자 한 ‘프라이에 뷔네’ 의 시도는 전두환 정권의 폭력과 유화국면에서 성장을 거듭하던 민주화운동의 성장세를 반영한다.

자기검열에도 불구하고 사드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의 소실점이 ‘혁명’과 그 대의의 정당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은 제목에도 암시되어 있다.

‘마라/사드’의 논쟁이 아닌, 그리고 마라 최후의 날(1793.7.13)도 아닌, 마라가 프랑스 국민에게 연설할 그날, 즉 ‘1793년 7월 14일’을 공연 제목으로 삼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7월 14 일은 바로 바스티유가 함락된 혁명의 날이기도 하다.

한편, <정의의 사람들>은 앞서 두 작품과는 경우가 다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정의의 사람들>(Les Justes, 1949)은 이미 1955년에 번역 출판되기 시작해67) 여러 번역본이 나온 상태였고, 1964년 프랑스 혁명기념일(7.14)을 맞이해 한불문화협회가 주최한 행사로서 원어(불어)로 공연된 적이 있다.68)

 

      67) 알베에르 카뮤, 방곤 옮김, 정의의 사람들, 우생출판사, 1955. 1957년 카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관련 기사에서 <정의> 또는 <정의의 인간들>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방곤 번역의 <정의의 사람들>이 대표 제목이 된다.

     68) 「연극과 美展 등 행사, 佛혁명기념일 맞아」, 조선일보, 1964.7.12., 5면; 「파리와 서 울을 잇는 정신의 가교」, 조선일보, 1964.7.15., 5면.

번역극으로 공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건국대(1975・1978), 전남대(1978・1986), 서울대(1979・1981), 동국대(1986) 등 주로 대학가에서 관심을 가진다.69)

 

      69) 건대극장 30년사 기념자료집 2, 건대극장30년사 편찬준비위원회, 1993; 신현숙, 「 프랑스 연극」, 신현숙 외, 앞의 책, 1999; 서울대연극50년사, 서울대 연극 50년사 출판위원회, 1999; 김선출(기자), 「정사 5.18」, 광주매일신문, 2003.11.25.

 

이 밖에 공연단체가 확인되지 않는 두 건이 있다.

1977년 12월 ‘공륜’ 심의에서 무수정통과된 적이 있으나 공연이 성사된 기록이 없고, 1980년 7월에도 ‘공륜’에 심의신청이 접수되나 16일 후 자진취하한 기록이 있다.

후자는 심의 소요기간을 고려할 때 검 열 당국이 종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 연극 공연의 증가 추세는 뚜렷하지만,70)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의 명망에도 불구하고 카뮈의 비중은 높지 않으며,71) 연극계가 선뜻 <정의의 사람들>을 공연하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공연 ‘시장’에서는 외면하는 가운데 1970년대 중반 이후 대학 연극반이 이 연극에 관심을 가진 점은 그런 점에서 특별하다.72)

이는 <정의의 사람들>의 가치가 시대의 대의와 명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작중 사건은 1905년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 직후에 벌어지며 이 역시 ‘혁명’과 연결되어 있다.

작가가 밝혔듯이 이 희곡은 1905년 사회주의 혁명당 소속 테러리스트들이 러시아 황제의 숙부인 세르게이 대공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73)

총 4막으로 구성된 줄거리는 카뮈가 참조한 보리스 사핀코프(Boris Savinkov)의 한 테러리스트의 회고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74)

 

      70) 해방 이후 4.19까지 21편에 불과하다가, 1960년대는 32편, 1970년대에는 132편으로 급증한다. 1980-1987년에는 90편, 신현숙, 앞의 글 참조.

      71) 신현숙, 앞의 글, 282-293면.

      72) 대학극도 ‘공륜’ 심의를 받기는 마찬가지인데, 지금으로서는 그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 우나 변칙적인 방법으로 공연한 사례로 추정된다.

      73) 알베르 카뮈, 「<정의의 사람들>에 부친 서평 의뢰문과 소개의 말」(1949), 김화영 옮김, 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책세상, 2007, 283면.

      74) 유기환, 「정의의 배반성-정의의 사람들」, 상명대학교 논문집 17, 상명여자사범대 학, 1986.1., 339면. 스테판을 제외한 인물 모두 이 보리스 사핀코프의 회고록에 나오 는 실존 인물이다.

 

연극의 핵심 질문은 장 폴 마라의 괴로움을 떠올리게 하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다—과연 정의와 혁명은 살인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가?

한쪽에는 바로 자기 자신을 대가로 바치면서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정의의 사람들’ 칼리아예프와 도라를, 다른 한쪽에는 그와 상반된 관점을 가진 스테판을 놓아두어 윤리적 쟁점을 유발한다. 작가는 전자에게는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후자에게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경고한다.

작가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은 (…) 자기 자신을 그 대가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75)

 

정의의 실행에 따른 윤리적 질문이 대학가에서 제기된 점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마라/사드>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범박한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의 성장에 따른 동기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1980년대 들어와 5월 광주학살의 책임을 미국에 묻는 일련의 사건이 <정의의 사람들>을 좀 더 특별하게 읽게 하는 배경이 된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1980.12.9.) 을 시작으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3.18.),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1985.5.23.-26.) 등 청년들의 결행은 마치 ‘정의로운 사람들’의 그것처럼 보인다.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학생들의 백주 테러행위”는 1905년 ‘피의 일요일’의 계기로 점화한 러시아 혁명과 비교되고, 이들은 실정법 위반에 따른 처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확신범’으로 분류된다.76)

사실 이쯤 되면 정의는 국가와 법질서를 초월하는 정언명령이 된다.

<정의의 사람들>은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를 위한 윤리적 질문이자 해답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정의’는 전두환이 일찍부터 프로파간다로 내세운 ‘정의사회구현’77)과 그가 창당한 ‘민주정의당’(1981.1.15.)으로 오염된 상투어를 재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6년, 극단 ‘에저또’가 심의를 신청했을 때(1986.9.29.) ‘정의’에 담긴 정치적 긴장은 시의적이긴 했으나, 검열당국 입장에서는 더더욱 통과시킬 수 없는 불온이 된다.

심의신청 불과 2개월 전 출판된 설영환의 번역본78) 을 심의대본으로 제출하는데, 심의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1986.10.2).

 

     75) 알베르 카뮈, 앞의 글, 285면.

    76) 김충식(기자), 「미문화원 방화사건 충격의 삼각파문」, 동아일보, 1982.4.6., 3면.

    77) 「민주・복지・정의사회구현, 전두환 상위장 80년대 과제 밝혀」, 조선일보, 1980.8. 12., 1면. 전두환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이던 1980년 8월 11일 언론매체와 의 특별회견 자리에서 처음 공표한 듯하다.

    78) 알베르 까뮈, 설영환 옮김, 정의의 사람들, 지문사, 1986.

 

심의의견서가 없고 공연윤리에도 이에 관한 해설이 없으니 반려 사유를 알기는 어렵다.

물론 예상되는 이유는 대략 이럴 것이다.

“준법정신의 모독”・“반국가적 행동”・“폭력” 등을 묘사해 치안을 어지럽힐 우려가 있다는 것—<자유도시>의 반려 사유와 같지 않았을까.

미문화원을 방화하거나 점거한 사건을 겪은 검열 권력이 이를 공연하도록 허가할 리 만무하다.

요컨대 제5공화국 시기 반려된 번역극 편수는 적지만 그 성격은 매우 뚜렷하다

풍속에는 관대하나 사상에는 매우 뚜렷한 동기가 작동하는바, 그 출처는 다름 아닌 전두환 정권의 원죄인 광주학살이다.

<자유도시>의 검열은 이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후 <1793년 7월 14일>과 <정의의 사람들>은 그 폭력적인 전환이 초래한 변혁의 사상과 실천을 나타내는 반향으로서 이 역시 엄폐 대상이 된다.

그 상상력은 사실상 공인(公認)된 무대에서, 특히 창작극에서는 드러내놓고 발화할 수 없는 정치 담론으로 시대정신과 호흡하고자 한 것이다.79)

 

       79) ‘공인’된 번역극 <기국서의 햄릿> 연작과의 비교는 그런 점에서 검열과 재현의 관계에 시사점을 줄 것이다. 김옥란은 <기국서의 햄릿>이 5.18을 대입한 과감한 실험과 정치 의식을 보여준 문제작이라고 평가한다. (「5.18 서사로서의 <햄릿>과 기국서의 연극사 적 위치」, 한국극예술연구 34, 한국극예술학회, 2011) 공연 의도에 관해서는 인정할 만한 여러 방증이 있지만, 그 연작이 ‘공륜’으로부터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은 까닭은 고려되지 않는다. 김옥란이 참고한 1984년 심의대본 외에, 1981년과 1982년 심의대 본(기존 출판물)을 추가하고 공연 각각이 다른 판본일 가능성과 심의 시점까지를 고려 해 ‘공인’의 임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피해자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갈구하던 자유・인권・혁명・정의는 곧 독재정권에 대항하던 주체들의 핵심어가 아니던가.

세 편에 대한 반려가 사상검열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만, 반려된 번역극을 통해 읽어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사상검열은 부재하는 현존의 또 다른 가치를 잠식한다.

그 주요 주제인 자유・인권・혁명・정의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일정한 의미 사슬을 이루는 이 이념적 가치들은, 그간 군사정권이 점유해온 지배의 언어를 다시 질문하고 재정의할 뿐만 아니라, 저항하되 성찰적인 주체의 발견을 도모한다.

<자유도시>는 거대담론 틈바구니에 있는 하위주체의 실제를 부조(浮彫) 하고, <1793년 7월 14일>은 마라와 사드의 논쟁을 통해 혁명의 정당성을 심문하며, <정의의 사람들>은 정의 실현에 따르는 주체의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숨막히는 정치의 시대에 가장 긴요한 질문이지만 이를 건너뛰기도 쉬울 그때에, 예술은 바로 그 공간을 열어놓을 수 있다. 검열권력이 차단한 것은 이 가능성이다.

사상검열은 사상의 공론화를 폐쇄하여 시간의 변증법적 가능성을 봉쇄한다.

물론 그 봉인은 영원하지 않다.

민주화를 향한 갈망에서 배태된 정치적 상상력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공인된 무대에 복원된다.

비록 그때 그 시절의 부재를 증명하는 추억이 되어 그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80) 이제 번역극을 경유하지 않고도 정치 담론의 공론화가 가능해졌으니 그리 아쉬울 일은 아니다.

 

    80) 김방옥은 <자유도시><당나귀 그림자><당통의 죽음>에 대해 “원작도 좋고 공연의 수준 도 괜찮았”지만 “이상하게도 관객석은 썰렁”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정치적 열기가 뜨 거운 시기였고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 이후 첫 선거 전후였으니 이런 현상은 당연하지 만, 그게 아니더라도 과거에 번역극에 건 기대는 소멸된 듯이 보인다. 이제 그 역할은 창작극이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극 공연에 관한 담론도 사실상 탈정치화된 비 평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북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을, 김문환은 ‘1970년’의 실화 라고, 김방옥은 ‘1973년 런던 시위 때’의 실화라고 기록한다. 그만큼 무관심했다는 뜻 이다. 구히서, 「극단 에저또 ‘자유도시’」. 주간한국, 1987.12.13(구히서, 연극읽기 2, 도서출판 메타, 1999, 278-280쪽에서 재인용); 김문환, 「정치극의 현실증언」, 한 국연극, 1988.1, 76~79면; 김방옥, 「‘정치연극’ 열기 제대로 하고 있나」, 스포츠서 울, 1987.12.21(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 8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Ⅲ), 1993, 123~ 124면에서 재인용).

 

<자유도시>를 비롯한 반려된 번역극의 가치는—사상검열의 봉쇄에도 불구하고—독재정권에 응전하는 이념적 가치를 보존한 데 있으며, 이 현존이 바로 1987년 6월을 있게 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기 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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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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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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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번역극 검열은 긴급조치 시기에 잠시 비등하지만, 창작극에 가해진 압력에 비하자면 정도 가 심각한 편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국풍조를 허용하면서 한국현실에의 근접성을 차단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기강과 윤리의 보전을 명분으로 퇴폐풍속의 굴레를 씌우는 데 맞춰진다. 사실상 번역극이 사상검열에 저촉될 확률은 높지 않다.

양상이 달라진 것은 제5공화국에 들어 서면서다. 풍속에는 관대하나 사상에는 매우 뚜렷한 동기가 작동한다.

사상검열로 반려된 세 편은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곳의 역사, 그것도 변혁의 역사와 관계된 순간을 불러내 정치 담론 이 지하화된 이곳의 현실과 교섭한다.

<자유도시>는 1972년 북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을, <1793년 7월 14일>은 프랑스 대혁명을, <정의의 사람들>은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을 가져온 다.

반려의 출처가 되는 원초적 장면은 전두환 정권의 원죄인 광주학살이다. <자유도시>는 이 를 매우 투명하게 드러낸다.

번역주체는 데리의 ‘피의 일요일’을 광주의 ‘피의 일요일’로, 북아 일랜드의 민권운동을 한국의 인권운동으로 전유하며, 검열권력은 이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이 광주학살에 가닿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후 다른 두 편도 그 폭력적인 전환이 초래한 변혁의 사상과 실천을 나타내는 반향으로서 엄폐의 대상이 된다.

비록 부재하는 현존이지만, 그 상상 력은 사실상 공인(公認)된 무대에서, 특히 창작극에서는 드러내놓고 발화할 수 없는 정치 담론 으로 시대정신과 호흡하고자 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상검열이 이 번역극들의 또 다른 가치를 잠식했음도 분명하다.

그 주제인 자유・인권・혁명・정의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이 이념적 가치들은, 그간 군사정권이 점유해온 지배의 언어를 다시 질문하고 재정의할 뿐만 아 니라, 저항하되 성찰적인 주체의 발견을 도모한다. 숨막히는 정치의 시대에 긴요한 질문이지 만 이를 건너뛰기도 쉬울 그때에, 예술은 바로 그 공간을 열어놓을 수 있다.

검열권력이 차단 한 것은 이 가능성이다.

사상검열은 사상의 공론화를 폐쇄하여 시간의 변증법적 가능성을 봉 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은 독재정권에 응전하는 이념적 가 치를 보존한 역사라는 점에서 복원될 필요가 있다.

 

주제어: 1793년 7월 14일, 검열, 광주학살, 번역극, 자유도시, 정의의 사람들, 제5공화국, 피의 일 요일

 

 

Abstract

Translation of ‘Bloody Sunday’ ―Political Imagination of Translated Plays Banned During the Fifth Republic Lee Seunghee Although censorship of translated plays is briefly strengthened during the time of emergency measures, the degree is not very serious compared to the pressure exerted on creative plays at the time. On the one hand, it is focused on blocking the proximity to Korean reality while allowing a foreign trend, and on the other hand, putting a bridle in the decadent wind in the name of preserving social discipline and ethics. In fact, there is not a high probability that a translation play will violate ideological censorship. The change in this pattern came as we entered the Fifth Republic. Generous to customs, but very clear motives work for ideas. The three plays rejected by ideological censorship call out a moment related to the history far from Korea, especially the history of revolution, and connect with the reality of this place where political discourse is underground. Free City brings Northern Ireland's ‘Bloody Sunday’ in 1972, July 14, 1793 brings the French Revolution, and People of Justice brings Russia’s 1905 revolution. The original scene, which is the source of the rejection, is the Gwangju massacre, the original sin of the Chun Doo-hwan administration. Free City reveals this very transparently. The translator appropriates Derry’s ‘Blood Sunday’ as Gwangju’s ‘Blood Sunday’ and Northern Ireland’s civil rights movement as South Korea’s human rights movement, and the censorship power notices that this transnational imagination is reaching the Gwangju Massacre. Since then, the other two are also subject to concealment as echoes representing the ideas and practices of the transformation caused by the violence. Although it is an absent existence, its imagination is actually intended to breathe with the spirit of the times as a political discourse that cannot be openly uttered on a official approved stage, especially in creative plays. However, it is also clear that ideological censorship has eroded another value of these translated plays. Its themes, ‘freedom’, ‘human rights’, ‘revolution’, and ‘justice’, are not political slogans. These ideological values not only question and redefine the language of domination that has been occupied by the military regime, but also seek the discovery of a resistant but reflective subject. It’s an important question in an era of suffocating politics, but when it’s easy to skip it, art can leave that very space open. It is this possibility that censorship powers have blocked. Ideological censorship closes the public debate of thought, blocking the dialectical possibility of time. Nevertheless, the dangerous transnational imagination needs to be restored in that it is a history of preserving ideological values in response to dictatorships.

 

Key words: 5.18, Bloody Sunday, censorship, Free City, July 14, 1793, People of Justice, rejection, the Fifth Republic, the Gwangju Massacre, translated play

 

 

접 수 일: 2024년 11월 17일 심사기간: 2024년 11월 18일~2024년 12월 1일 게재결정: 2024년 12월 2일

 한국극예술연구 제83집 

KCI_FI00315323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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