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유식비량의 주장명제에 대한 입장 차이
Ⅲ. 유식비량의 이유명제에 대한 입장 차이
Ⅳ. 결론
요 약 문
중국 유식법상종(唯識法相宗)의 실질적 개조이며 현장(玄奘)의 제자 규기는, 현장의 유식비량(唯識比量)을 유식법상종의 호교(護敎)를 위한 중요한 전거로 삼고자 하여, 그 자신의 논리학 저서인 『인명입정리론 소』(因明入正理論疏)에서 자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이 현장의 유식비량 을 둘러싸고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불교계에서는 활발한 논쟁이 전개된다.
이에 논문은 현장의 유식비량을 둘러싼 규기의 입론과 원효 의 대론을 중심으로 디그나가의 논리학이 어떻게 동아시아에서 적용되 고 변용되어 가는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디그나가의 인명학은 중국과 한국의 사상가들에 의해 학습되면서 디그나가의 인명의 규칙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피력하고 또한 대론자들은 디그나가의 인명의 규칙을 토대로 상대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는 수단 내지 도구로 잘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 권은 언어와 사유분별에 대한 강력한 불신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더 이상 디그나가의 인명학이 체계적으로 연구되 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한다.
주제어 유식비량, 부정인, 상위결정인, 한정사, 인명, 공부정인, 유법차별상위인
Ⅰ. 서론
인도의 논리학은 디그나가(Dignāga, 陳那, 480-540) 이전(古)과 이후(新)로 나눌 수 있다.1)
1) 三枝充悳 편(1996), 187.
이전을 오래된 논리학(古因明)이라 하며, 이후를 새로운 논리학(新因明)이라 부른다.
논리학이란 추론인(推論 因)을 근거로 추론과(推論果)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론 인의 정사(正似)에 따라 그 추론식의 성격이 좌우된다.
우선 디그나가는 오래된 논리학에서 사용해 왔던 오단논법(五支作 法) 즉 주장명제(宗)ㆍ이유명제(因)ㆍ유례명제(喩)ㆍ종합명제(合)ㆍ결 론명제(結)에서 종합명제와 결론명제를 생략하여 삼단논법(三支作法) 즉 주장명제ㆍ이유명제ㆍ유례명제를 사용했다는 것이 고신(古新)의 첫 번째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디그나가는 바른 추론인(正因)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 건 즉 인(因)의 삼상(三相)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추론인의 세 가지 조건이란 첫째 추론인이 주장명제의 주제에 소속된 성질이어야 한다 는 변시종법성(遍是宗法性, 주제소속성), 둘째 추론인이 주장명제의 주제와 동질적인 경우에만 존재해야 한다는 동품정유성(同品定有性, 긍정 변충), 셋째 추론인이 주장명제의 주제와 이질적인 경우에는 결 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품변무성(異品遍無性, 부정 변충)이다.
삼단논법 가운데 추론인이 갖추어야 할 제1조건을 갖추지 않을 경우 불성인(不成因)이 되며, 제2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을 경우 불공부정인 (不共不定因)이 되며, 제3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을 경우 공부정인(共不 定因)이 되며, 제2조건과 제3조건 둘 다를 어길 경우 상위인(相違因) 이 된다.
이들 모두는 바른 추론인의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이 비 추론인(似因)의 자격을 갖는 것들이다.
이 추론인의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추론인의 정사(正似)를 판별하는 것이 고신(古新)의 두 번 째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디그나가는 이들 추론인 가운데 제1조건을 갖추지 않은 불성의 추론인(不成因)을 제외하고, 제1조건을 갖춘 추론인 가운데 어떤 것이 바른 추론인(正因)인지, 사이비추론인(似因)인지를 판별하 는 방법으로 구구인(九句因)을 제시한다.
이것은 추론인이 유례와 어 떤 관계를 갖는가에 따라 정과 사를 구별하는 것이다.
즉 추론인이 동품과 이품에 모두 존재하는 경우 즉 동품유(同品有)와 이품유(異品 有)일 경우에는 공부정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1구가 되며, 동품 에는 존재하고 이품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 즉 동품유와 이품무일 경우에는 정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2구가 되며, 동품에는 존재 하고 이품의 일부에는 존재하거나 일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 즉 동품유와 이품구(異品俱)일 경우에는 공부정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3구가 되며, 동품에는 존재하지 않고 이품에는 존재하는 경우 즉 동품무와 이품유일 경우에는 상위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4구가 되며, 동품과 이품에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경우 즉 동품무와 이품무인 경우에는 불공부정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5가 되며, 동품에는 존재하지 않고 이품의 일부에는 존재하거나 일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 즉 동품무와 이품구일 경우 상위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6 구가 되며, 동품의 일부에는 존재하고 일부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품에는 존재하는 경우 즉 동품구와 이품유인 경우 공부정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7구가 되며, 동품의 일부에는 존재하고 일부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품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 즉 동품구와 이품무 인 경우 정인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8구가 되며, 동품의 일부에 존 재하고 일부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이품의 일부에 존재하 고 일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 동품구와 이품구일 경우 공부정인 이 되어 구구인 가운데 제9구가 된다.
정리하면 구구인 가운데 제2구ㆍ제8은 정인, 제4구ㆍ제6구는 상위인, 제1구ㆍ제3구ㆍ제7구ㆍ제9 구는 공부정인, 제5구는 불공부정인이다.
이 구구인을 통해 추론인의 정사를 판별하는 것이 논리학의 고신(古新)의 세 번째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어가 실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긍정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는 타자의 부정을 통하여 대상을 지시하는 부정적 기능을 가진 것 즉 언어의 본질을 ‘타자의 부정’으로 보는 아포하(apoha) 이론이 논리학의 고신(古新) 을 가르는 마지막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기준을 근거로 디그나가는 토론의 과정에서 세 개 의 명제로 구성되어 있는 삼단논법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만 대 론자를 설득시킬 수 있다고 본다.
즉 주장명제에서 잘못된 주장(似宗) 을 내세우는 오류와 이유명제에서 잘못된 이유[似因]를 제시하는 오 류 및 유례명제에서 잘못된 유례[似喩]를 드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
2) 김성철(2003), 78.
디그나가와 그의 후계자에 의하여 정리된 오류에는 사종(似宗)으로 현량상위(現量相違)ㆍ비량상위(比量相違)ㆍ자교상위(自 敎相違)ㆍ세간상위(世間相違)ㆍ자어상위(自語相違)ㆍ능별불극성(能別不 極成)ㆍ소별불극성(所別不極成)ㆍ구불극성(俱不極成)ㆍ상불극성(相不極 成)의 9종을 제시하고, 사인(似因)으로 양구불성(兩俱不成)ㆍ수일불성 (隨一不成)ㆍ유예불성(猶豫不成)ㆍ소의불성(所依不成)의 4종의 불성인 과 공부정(共不定)ㆍ불공부정(不共不定)ㆍ동품일분전이품편전(同品一 分轉異品遍轉)ㆍ이품일분전동품편전(異品一分轉同品遍轉)ㆍ구품일분전 (俱品一分轉)ㆍ상위결정(相違決定)의 6종의 부정인 및 법자상상위인 (法自相相違因)ㆍ법차별상위인(法差別相違因)ㆍ유법자상상위인(有法自 相相違因)ㆍ유법차별상위인(有法差別相違因)의 4종의 상위인 도합 14 종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사유(似喩)로 능립불성(能立不成)ㆍ소립법 불성(所立法不成)ㆍ구불성(俱不成)ㆍ무합(無合)ㆍ도합(倒合)의 5종의 사동법유(似同法喩)와 소립불견(所立不遣)ㆍ능립불견(能立不遣)ㆍ구불 견(俱不遣)ㆍ불리(不離)ㆍ도리(倒離)의 5종으로 구성되는 사이법유(似 異法喩), 이렇게 전체 33개의 오류(三十三過)3)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삼장법사 현장(玄奘, 602-664)은 인도 유학에서 당대 최고 의 학자인 승군(勝軍) 밑에서 유식(唯識)과 인명(因明)을 배웠다고 한 다.
현장은 자신의 사상적 근저인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일 뿐’ 이라는 유식의 교의를 삼단논법으로 제시한다.
이것을 유식비량(唯識 比量)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다.
<유식비량 추론식1>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명제]: 입론자 자신(대승)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 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 포함되는 것이지 만, 안근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식과 같다.4)
사실 이 유식비량을 현장이 직접 주장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 다.5)
3) 샹카라스와민, 『인명입정리론』. 김성철(2003), 80.
4) 김성철(2003), “眞故 極成色不離於眼識, 自許 初三攝眼所不攝故, 猶如眼識.”
5) 師茂樹(2015), 72. “만약 유식비량의 성립을 둘러싼 전승이 현장 사후의 무엇인가의 의도에 의해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인정된다면, 그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간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인도의 어떤 역사적 지역적으로 한정된 맥락 속에서 현장이 유식비량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 맥락을 충분히 검토해야만 유식비량의 의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어떤 의도가 선행하며, 그것을 근거로 유식비 량과 그 전승이 당시에 있었음직한 정보를 조합시킴으로써 구축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면, 유식비량을 ‘인용’하는 텍스트의 의도가 중요하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번 기술한 바와 같이 유식비량의 전승은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소』의 기술이 근거가 된다.” 현장 이 직접 유식비량을 언급했다는 전거는 없고, 다만 현장의 제자이자 중국 법상종의 개 조인 규기의 저서에 유식비량이 보인다는 점을 유의하고서 유식비량을 둘러싼 논쟁을 읽어야 한다.
다만 중국 유식법상종의 실질적 개조이며 현장의 제자 규기는, 이 유식비량을 유식법상종의 호교(護敎, 여기서의 敎는 唯識佛敎)를 위한 중요한 전거로 삼고자 하여, 그 자신의 논리학 저서인 『인명입 정리론소』(因明入正理論疏)에서 자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이 현장의 유식비량을 둘러싸고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불교계에서는 활발 한 논쟁이 전개된다.
이에 본 논문은 현장의 유식비량을 둘러싼 규기 의 입론과 원효의 대론을 중심으로 디그나가의 논리학이 어떻게 동 아시아에서 적용되고 변용되어 가는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Ⅱ. 유식비량의 주장명제에 대한 입장 차이
1. 규기의 입장
이 유식비량의 추론식은 완벽한 것 같았지만, 건봉년(666-667) 순 경(順憬)이 유(裕)라는 인물을 통해 유식비량에 대한 상위결정의 추론 식이 규기에게 전달된다.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소』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그런데 신라의 순경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의 명성은 당나라뿐 만 아니라 주변 이웃나라에도 알려져 있었다.
또한 그의 학문은 대 승과 소승 양 방면에 걸쳐 있었다.
행동으로는 [불제자] 카샤파(迦 葉)를 존숭하여 언제나 두타행을 행하였다.
또한 마음으로는 [불제 자]인 박구라(薄俱)와 같이 되려고 노력하였으며 항상 욕심을 적게 하고자[少欲] 힘썼다.
학문을 중국에서 쌓고, 지혜를 신라에 전했다.
세간적인 명성도 불도의 수행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였으며, 출 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까지도 [법사를] 공경 합장했다고 한다.
그의 모국 신라에서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해외에서도 특별한 존재 로서 일컬어졌다.
[이 법사가] 이 [현장의 유식비량의] 추론식에 대 해 모순의 확정(상위결정의 추론식)을 작성하여 건봉년(666-667)에 스승(현장)의 해석을 구하기 위해 보내졌다.
[다음과 같은 추론식이다.]
<상위결정 추론식2>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반드시 안식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유명제] 왜냐하면 입론자(소승)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 되는 것이지만 안식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근과 같다.6)
6) 窺基, 『因明入正理論疏』(T44, 116a), “然有新羅順憬法師者, 聲振唐蕃, 學苞大小, 業崇迦 葉, 每稟行於杜多, 心務薄俱, 恒馳誡於小欲, 旣而蘊藝西夏, 傳照東夷, 名道日新, 緇素欽挹, 雖彼龍象不少, 海外時稱獨步, 於此比量作決定相違, 乾封之歲, 寄請師釋云, 眞故 極成色定 離於眼識, 自許 初三攝眼識所不攝故, 猶如眼根.”
이 <상위결정의 추론식2>는 정확히 현장의 유식비량에 대한 상위 결정의 추론식이다.
위의 규기의 언급을 볼 때 <상위결정의 추론식 2>는 순경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여러 문헌들에 따르면 원 효(元曉, 617-686)가 작성한 것이라 여겨진다.
현장의 <유식비량 추론식1>은 ‘오직 식만이 존재할 뿐 외계대상은 있을 수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논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추론식의 주장의 주제는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이 며 이 색의 존재방식은 ‘안식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 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면 원효가 구성한 <상위결정의 추론식2>는 식뿐만 아니라 외계대상도 존재한다는 유식유경(唯識有境)을 논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추론식의 주장의 주제도 마찬가지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이며 이 색의 존재방식은 ‘안식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대승 유 식의 주장이라면 후자는 소승이나 일반세간 상식인 외계실재론의 주 장이라 할 수 있다. 두 추론식의 추론인이 각기 바른 추론인(정인)이 며, 이것을 근거로 구성된 추론식도 타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디그나 가의 인명학에 의하면 각기 다른 두 추론인이 서로 상반 모순되는 결론을 도출할 때 이 두 추론인은 상위결정인이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문제는 완전무결하여 어떠한 반론도 제기될 수 없을 것 같 은 현장의 유식비량이 원효에 의해 상위결정 추론인의 오류를 범하 게 되었던 것이다.
상위결정 추론인의 오류란 두 추론인이 서로 모순 되는 주장을 성립시킬 때, 그 두 추론인은 상위결정의 추론인의 오류 를 범하게 되어, 이러한 사이비 추론인에 의해 구성된 유식비량은 당 연히 부당한 추론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무경의 주장은 무너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규기는 현장의 제자로서 현장의 역경 사업에 참여하여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번역한다.
그는 『성유식론』을 근간으로 중국 유식 법상 종을 체계화했다.
그런데 원효의 <상위결정의 추론식2>는 중국 유식 법상종의 근간을 허무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규기는 『인명입정리론소』에서 이 <상위결정의 추론식2>에 대응하고 현장의 유식비량의 주장명제를 옹호하기 위해, 현장이 유식비량에서 ‘진고(眞 故)’ 즉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라고 한 한정사(簡別語)에 주목한다.
[주장(宗) 중의] 주어(有法)에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眞故)라고 한정한 것은 [이 추론식이] 세속을 초월한 진리(勝義)의 입장에 입각 해 있으며, 세속의 입장에는 서 있지 않다는 것을 표명한 것으로, 학자가 아닌 세간 사람들의 상식(非學世間)과의 모순을 범하지 않게하는 것이다.
또한 [이 추론식이] 대승의 뛰어난 진리의 입장에 입 각해 있으며, 소승의 입장에는 서 있지 않다는 것을 표명한 것으로, [소승의 경전인] 『아함경』등에서 색은 인식작용(識)을 벗어나서 존재 한다[고 설하는] 것과의 오류도 범하지 않게 되며, 소승 학자의 상 식(小乘學者世間)과의 모순이라는 오류도 범하지 않게 된다.7)
사실 상식적으로는 눈이 나에게 있고 눈의 대상인 색깔과 모양이 있는 물체는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아함경』 에서 ‘색은 식을 벗어나서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만약 유 식비량을 주장할 때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眞故)라는 한정사를 부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세간 상식과 소승의 학자들의 상식과 모 순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자명하다.8)
7) 窺基, 『因明入正理論疏』(T44, 115c), “有法言眞, 明依勝義, 不依世俗, 故無爲於非學世間, 又顯依大乘殊勝義立, 非依小乘, 亦無爲於阿含等敎色離於識有, 亦無爲於小乘學者世間之失.”
8) 이태승(2012), 「玄奘의 唯識比量 論難에 대한 中觀학적 고찰」, 234-235, “이렇게 추론 식에서 한정사를 붙여 추론식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사상가는 인도불교 중관학파의 한 사람인 청변에서 유래한다. 현장은 이러한 청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청변 은『근본중송』제1장의 제1게송인 ‘존재하는 것들은 어디에서나 어떤 것이나 스스로로부 터, 다른 것으로부터, 그 둘의 양자로부터, 원인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존재하는 일은 결코 없다.’와 관련하여 그 주석에서 이들 내용을 다음과 같은 논리식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주장> 승의에 있어 내입처(內入處)는 스스로로부터 생기는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유> 현재 존재하고 있는 까닭에. <실례> 예를 들면 정신원리와 같 이. <주장> 승의에 있어 내입처는 다른 연들로부터 생기는 일은 없다. <이유> 타자인 까닭에. <실례> 예를 들면 병과 같이. 이와 같이 청변은 논리식을 사용해 근본중송의 전체 내용들을 주석하고 있지만, 이 청변의 논리식은 현장의 유식비량과 상당히 유사 하다. 현장의 유식비량과 비교하면 유식비량에 나타나는 ‘자허(自許)’라는 말은 나타나 지 않지만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라는 한정어나 실례로서 이품의 예가 나타나지 않 는 것은 동일하다. 따라서 이러한 청변의 논리식에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즉 ⑴ 주장명제에 ‘승의에 있어서’라는 한정어가 붙는 것 ⑵ 부정판단은 오직 비정립적 부 정(非定立的否定)이라고 규정되는 것 ⑶ 유례에 이류례(異類例, 異品)가 존재하지 않는 것 등의 특징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승의에 있어서’란 한정어를 붙이는 것은 청변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논증의 주장이 세속적인 논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논리식 또는 논증 그 자체가 언설의 나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세속적인 언설의 서술이 아니라 승의적인 달리 말하 면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보다 깊은 정신단계의 표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것 은 청변의 이제설에 대한 해석에서 승의의 경계를 ‘승의 그 자체’와 ‘승의에 수순하는 것’의 둘로 나누고 있고, ‘승의에 수순하는 것’의 내용으로 반야지혜(般若智慧)의 경계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은 유식 비량에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라는 한정사를 붙여 이러한 논란 에서 벗어났다고 규기는 보고 있다. 그런데 일본근대불교철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나카무라 하지 메(中村元)는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라는 한정사의 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 추론식에서는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승의의 진리의 입장에 서 본다면)라는 한정사(간별사)가 첨부되기 때문에 그 입언은 세간 일반 사람들의 소신과는 반하지만, 세간 상위의 오류(세간 일반 사 람들이 인정하는 바와 모순 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는다고 자은 규 기는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 입론은 감각적 지식을 벗어난 승의의 진리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설득시킬만한 효력 은 없다.
즉 인명에서 설하는 타비량(他比量)으로서는 무의미하다.9)
9) 中村元(1958), 7.
이러한 나카무라의 주장에 대해 “그렇지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이라는 설명에서는, ‘소승’의 교의뿐만 아니라 ‘소승’과 는 공유되지 않는 일부 ‘대승’의 교의도 배제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나카무라의 비판은 재고가 필요하다.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眞故) 도 또한 단지 ‘비학세간’과 ‘소승학자 세간’의 고유의 교의를 배제하 기 위한 한정사(簡別語)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는 시게키의 언급은 나카무라의 본의를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카 무라는, 가령 자기의 인식을 위한 추론 즉 자비량(自比量)이라면 한정 사의 역할은 자어상위(自語相違)나 자교상위(自敎相違)의 오류를 범하 지 않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타 비량의 추론식이라면, 그 한정사는 자기와 타자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유식비량에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라는 한정사는 세간의 상식과 소승이 전제하는 외계실재론을 배제하는 역할만을 한다.
한편 소승의 <상위결정의 추론식2>에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라는 한정사는 유식무경의 유심론을 배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 렇게 되면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라는 한정사가 부가된 그 어떠 한 추론식도 상대를 설득시킬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신은 존재한다.’ 라는 주장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대립할 때, 아무리 승의나 세속이라고 하는 한정사를 붙인다고 하더라도, 한 쪽은 신이 존재한다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고, 또 한 쪽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입장을 견지할 때,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은 전혀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문법형식에 기반하고 있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유식비량의 주장명제에는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 는’ 즉 극성(極成)이라는 한정사가 있다.
규기는 현장이 주장명제의 주어인 색에 대해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이라는 한정 사를 부가한 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주장(宗) 중의]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極成)이라는 말은 [대승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소승에서 말해지는 [열반 이전의] 최후의 일생을 보내는 보살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뇌로 오염된 색 이나 모든 부처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뇌로 오염된 색을 배제한다.
만약 [이 한정사 없이 추론식을] 세워서 유식이라고 주장한다면 ‘[주 장(宗)의] 주어(所別)가 부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인정되지 않는 다.’(一分自所別不極成)라는 오류나 부분적으로 [자기의] 교의와 모순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한편 대승에서 인정하는] 시방세계의 부 처의 [신체를 구성하는] 색이나 혹은 부처의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색은 상대에게는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이 한정사 없이 추론식을] 세워서 유식이라고 주장한다면, ‘[주장(宗)의] 주어(所別)가 부분적으 로 상대에게 인정되지 않는다.’(他一分所別不極成)라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뒤에서 기술하는 바와 같이] 이 2종[의 색]에 관해서는 추론인에서도 ‘[자기 혹은 상대의] 한 쪽이 부분적으로 승인하지 않 는다.’(隨一一分所依不極成)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그래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들]이라고 기술하여 이들의 [오류를] 배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2종의 색 이외의 자신과 상대 공 히 인정하는 색에 관해서 유식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10)
10) 窺基, 『因明入正理論疏』(T44, 115c), “極成之言, 簡諸小乘後身菩薩染汚諸色, 一切佛身有 漏諸色, 若立爲唯識, 便有一分所別不成, 亦有一分違宗之失, 十方佛色及佛無漏色, 他不許 有, 立爲唯識, 有他一分所別不成. 其此二, 因皆有一一分所依不成, 說極成言爲簡於此, 立 二所余共許諸色爲唯識故.”
규기의 해설에 의하면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이라 는 한정사 ‘극성’은 주장명제의 주어인 색을 한정한다.
우선 만약 이 한정사 없이 추론식이 구성된다면, 대승 측이 인정하지 않는 소승 측 의 열반 이전의 최후의 일생을 보내는 보살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뇌 로 오염된 색인 소승후신보살염오제색(小乘後身菩薩染汚諸色)과 부처 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뇌로 오염된 색인 일체불신유루제색(一切佛身 有漏諸色)은 배제 부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식 측 ‘자신 의 주장명제의 주어가 부분적으로 자신에게 인정되지 않는다.’(一分自 所別北極成)는 오류와 ‘부분적으로 자기의 교의와 모순 한다.’(一分違 宗)는 2종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다음으로 만약 이 한정사 없이 추 론식이 구성된다면, 대승 측은 인정하지만 소승 측에서 인정하지 않 는 시방세계의 부처의 신체를 구성하는 색인 타방불색(他方佛色)과 부처의 번뇌로 오염되지 않는 색인 불무루색(佛無漏色)은 ‘주장의 주 어가 부분적으로 상대에게 인정되지 않는다.’(他一分所別不極成)는 오 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상의 3종의 오류는 잘못된 주장명제 즉 사 종(似宗)의 오류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대승과 소승이 인정하는 2종 의 색에 대해 이유명제 차원에서도 ‘입론자와 대론자 중 한 쪽이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隨一一分所依不極成)는 오류를 범하게 된 다.
이 1종은 사인(似因)의 오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4종의 오류를 배제 부정하기 위해 ‘입론자와 대 론자 양측이 모두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 ‘극성’을 부가했다는 것이 규기의 주장이다.
요컨대 ‘극성’이라는 한정사로 인해 3종의 사종(似 宗)의 오류와 1종의 사인(似因)의 오류를 배제 부정되는 것이다.
시게키는 이 규기의 해설에 대해서
“두 개의 사항을 논의로부터 배제한 다. 하나는 부처가 되기 직전의 보살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뇌로 오염 된 색(小乘後身菩薩染汚諸色)과 부처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뇌로 오염 된 색(一切佛身有漏諸色)이라는 특정의 2종의 색 등의 소승 고유의 교의이다.
또 하나는 아미타불과 같은 타방불의 신체를 구성하는 번 뇌로 오염되지 않은 색이 있다고 하는, 소승이 인정하지 않는 대승고 유의 교의이다.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이들 색으로 한정된 논의를 하 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후반의 오류에 관한 기술에서 추측되는 것처 럼 이들 색은 대승과 소승 각각의 고유의 교의를 대표로 제시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이와 같은 설명의 형식은 유례[喩依] 에 의해서 일반적인 법칙[喩體]을 대표하게 하는 인명의 작법에 친숙 해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생각된다.”11)
11) 師茂樹(2015), 75.
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 ‘극성’이라는 한정사에 의해 이들 2종의 색 이외의 대승 유식과 외계 실재를 표방하는 소승 측 모두 인정하는 색에 관 해서 ‘식의 현현일 뿐’이라는 유식의 주장은 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2. 원효의 입장
원효는 주장명제에서 언급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眞故)’와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極成)’이라는 두 한정사에 대해 직 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효는 결정적으로 현장의 유식 비량이 상위결정의 추론인의 오류를 범하는 부당한 추론식임을 주장 한다.
그는 외계실재론의 관점에 서 있는 소승의 입장에서 제기할 수 있는 추론식을 제시한다.
<상위결정 추론식2>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眞故),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極成) 색은 반드시 안식을 벗어나 존재하 는 것이다.
[이유명제] 왜냐하면 입론자(소승) 자신이 인정하는(自許)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근과 같다12).
12) 김성철(2003), “眞故 極成色定離於眼識, 自許初三攝眼識所不攝故, 猶如眼根.”
이 추론식은 앞서 제시한 현장의 <유식비량의 추론식1>을 상위결 정의 추론인의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위결정의 추 론인이란 무엇인가?
디그나가의 주저『프라마나삼웃차야』 타인을 위 한 추론(他比量)에서 상위결정의 예를 제시한다. 서로 허용할 수 없는 [결과를 확립하는] 두 개의 추론인이 있다는 의심을 낳기 때문이다.
이미 기술한 조건(추론인이 동품의 전부에 존재하거나 또는 일부에만 존재하고, 이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로 허용할 수 없는 [결과를 확립하는] 두 개[의 추론인]이 하나의 추론과에 관하여 의심을 낳게 한다는 것 은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들어진 것’과 ‘들리는 것’이라는 두 개의 추론인에 의해서 소리(음성)에 관해서 그것이 상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상한 것인가에 대해서 의심을 낳는 경우 이다.13)
13) 北川守則(1965), 193-194.
여기서 ‘만들어진 것’과 ‘들리는 것’이라는 두 개의 추론인이 추론 주제인 소리(음성)에 대해서 상위결정을 초래한다는 디그나가의 언급 을 근거로 상위결정의 추론인에 의거한 추론식을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추론식3>
[주장명제]: 소리는 무상한 것이다.
[이유명제]: 소리는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무릇 만들어진 것은 무상한 것이다. 항아리와 같다. 무릇 상주하는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허공과 같다.
<추론식4>
[주장명제]: 소리는 상주하는 것이다.
[이유명제]: 소리는 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무릇 들리는 것은 상주하는 것이다. 소리의 보편과 같다. 무릇 무상한 것은 들리는 것이 아니다. 항아리와 같다.
여기서 <추론식3>과 <추론식4>의 각각의 추론인 즉 ‘만들어진 것’ 과 ‘들리는 것’은 추론인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바른 추론인 (正因)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른 두 개의 추론인으로부터 서로 모순되 고 양립할 수 없는 결론(주장)을 도출해 내는 이 추론인을 디그나가 는 ‘추론대상을 확립할 수 없는 불확정의 부정 추론인’(不定因)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만들어진 것’과 ‘들리는 것’이라는 각각의 바른 추론인에 의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추론대상 즉 ‘무상’ 과 ‘상주’를 도출해 내기 때문에 이 두 추론인은 상위결정의 추론인 이라 할 수 있다. 주석자들에 의하면 <추론식3>은 바이세시카학파의 추론이며, <추론식4>는 미망사학파의 추론이다.14)
14) 권서용(2023), 46.
이에 준해 보면 <유식비량의 추론식1>의 추론인 즉 ‘왜냐하면 입 론자 자신이 인정하는(自許)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 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안근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 이다.’와 <상위결정의 추론식2>의 추론인 즉 ‘왜냐하면 입론자 자신 이 인정하는(自許)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 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는 추 론인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바른 추론인이지만, 그 추론인을 근거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 하는 색은 안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와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결정코 안식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다.’가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결론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 (안근ㆍ색경ㆍ안식)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안근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닌 것’과 ‘입론자(소승) 자신이 인정하는(自許) [18계의 범주 가운 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는 두 추론은 바른 추론인(正因)에 근거한 추론 의 귀결들이 모순되는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에 진나는 이 추론인을 정인(正因)이 아니라 부정인(不定因)의 하위범주인 상위결정인(相違決 定因)이라 규정했다.
이러한 디그나가의 상위결정이라는 논리적 무기 를 가지고 원효는 각기 다른 철학적 세계관과 문법체계를 근거로 한 추론들은 상위결정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를 근거로 어떠한 주의 주장이든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그르다거 나 절대적으로 부당하다거나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도구로써 상위결정인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원효가 말하고 자 했던 것은 서로의 차이와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 즉 화 쟁(和諍)적 태도를 통해 대화와 소통을 지향하고자 했던 것이다.15)
15) 박태원(2019), 23. 이러한 화쟁적 태도를 주제로 한 원효의 텍스트가 바로 『십문화 쟁론』이다. 이것에 대해 박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문화쟁론』을 ‘열 가지 주 제에 관한 쟁론을 화쟁하는 이론’이 아니라, ‘관점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의 열 가지 연 기적 인과계열에 관한 화쟁이론’ 혹은 ‘관점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의 열 가지 연기적 인과계열로써 화쟁하는 이론’으로 읽는다면, 『십문화쟁론』이라는 저술의 성격과 내용 은 기존의 통념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 된다. 『십문화쟁론』은 ‘불교사상의 열 가지 주 제에 관한 쟁론들을 화쟁하고 있는 논서’라기보다는, ‘상이한 관점들을 각기 성립시키 는 열 가지 견해 계열의 의미 맥락을 식별하여 불교사상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들의 불화와 충돌을 치유하는 논서’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의 화쟁은 다양한 해석학 적 관점들의 불화와 충돌을 치유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Ⅲ. 유식비량의 이유명제에 대한 입장 차이
1. 규기의 입장
사이비 추론인(似因)에 의해 구성된 추론식이 자기를 위한 추론인 자비량(自比量)이라면 인식주체 자신만의 잘못된 인식을 가질 뿐이지 만, 추론식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추론인 타비량(他比量)이라면 타 인을 설득할 수 없게 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잘못된 추론식 이 되려면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세 개의 명제 중 적어도 하나 이상 의 오류를 범할 때이다. 현장의 제자 규기는 주장명제의 타당성을 강 화하기 위한 ‘진고’와 ‘극성’이라는 한정사는, 세간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이라는 ‘세간 상위의 오류’를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자기주장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자교상위의 오류’를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아울러 이유명제에 대해서도 현장이 부가한 한정사에 대해 현장 자신의 유식비량이 유법차별상위에 의한 다른 학파의 공격을 ‘자허’라는 한정사를 통해서 거꾸로 부정인의 오류를 범하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유명제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규기 는 이유명제에 ‘자허’라는 한정사가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그렇다면 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를 기술하 는가?
그것은 주어의 함의와 모순 하는 오류(유법차별상위과)를 방 지하기 위해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고 기술하는 것이다.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18계의 범주들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눈에는 포함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인정되지 않고 입론자 자 신만이 인정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이라는 것이 주 장의 주어의 언사(유법자상)이며, ‘안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주장의 술어의 언사(법자상)이다.
[아뢰야식이 변 화하여 생긴 본질의 색과 같이] 반드시 안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색 혹은 안식을 전혀 벗어난 것이 아닌 색이라는 것이 주장의 주어 의 함의(유법차별)이다.
이 추론식을 세운 자(현장)의 함의는 안식을 벗어나지 않는 색이지만, 외부의 사람(소승)은 [‘입론자(소승)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를 포함하지 않는 추론인을 사용하여]
[주장명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식을 벗어 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명제] 왜냐하면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 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눈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식과 같다.라는 경우에 [현장의] 함의와 모순 하는 듯한 추론식을 작성해 버 린다.
이와 같은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 라는 한정사를 기술하는 것이다.16)
16) 窺基, 『因明入正理論疏』(T44, 115c-116a), “若爾, 何須自許言耶, 爲遮有法差別相違過, 故言自許, 非顯極成色, 初三所攝, 眼所不攝, 他所不成, 唯自所許, 謂眞故極成色是有法自 相, 不離於眼識是法自相, 定離眼識色, 非定離眼識色, 是有法差別, 立者意許是不離眼識色, 外人遂作差別相違言 極成之色非是不離眼識色, 初三攝眼所不攝故, 猶如眼識, 爲遮此過, 故 言自許.”
규기는 여기서 ‘자허’라는 한정사의 기능이 두 가지로 작용한다고 한다.
하나는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는, 주어의 함의 와 모순 하는 오류(유법차별상위과)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또 하나는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가 곧바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18계의 범주들 가운데 처음 세 개 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지만, 눈에는 포함되지 않는 다.’라는 이유명제가 상대에게는 인정되지 않고 입론자 자신만이 인 정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규기의 해설 에서 ‘자허’라는 한정사가 유법차별상위과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명은, 논리적으로 인정해 줄 수는 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 신만이 인정한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냥 수사 (rhetoric)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자허’라는 표현 그 자체는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자의 대론을 배제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가령 신은 존재한다고 주장할 때, 이유로서 ‘내가 인정하는 한(自許)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 문’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만약 신의 속성으로서 전지전능 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면, 이 ‘자허’라는 한정사는 오로지 자기 의 신념체계만을 강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카무라는 다음과 같이 규기의 해명을 반박한다. “또한 추론인 즉 이유명제는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것’(共許 極成)이 아니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만이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명제를 이유 [내지 근거]로서 제시하는 것은 논증으로서 무의미한 것이다.
즉 자신만이 이해하기 위한 추론(自比量)과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논증(他比量)과의 구별을 현장 삼장은 충분히 이해해 지 못했던 것이다.”17)
17) 中村元(1958), 7. 18) 師樹茂(2015), 89.
나카무라는 시종일관 현장의 유식비량에서 사 용되는 한정사는 자비량을 위한 것이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타비 량으로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의 규기의 해설 에 의하면 여기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고 말한 것은 다른 학파와 공유할 수 없는 자기 학파 독자의 교의 중에서 추론을 전개 하는 것이 아니라 유식파인 현장이 함의하는 것이 가능한 [아뢰야 식이 변화하여 생긴 본질의 색과 같이] 반드시 눈의 인식작용(眼識) 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색과 같은 유식학파 고유의 교의를 배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즉 앞에서 본 극성색의 ‘극성’과 마찬가지의 의미 로 ‘자허’를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 는 것은 주장(宗) 중에서 기술되는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 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眞故極成)이라는 한정사의 환언인 것이다.”18)라는 시게키의 언급은 규기의 해명을 그대로 옹호한 것 이라 할 수 있지만, 나카무라의 언급을 결코 반박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만약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를 삭제하고 현장의 유식비량을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추론식5>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명제]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 식)에는 포함되지만, 안근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 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식과 같다.19)
마찬가지로 소승 측에서도 유법차별상위인의 오류를 범하는 다음 과 같은 추론식을 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추론식6>
[주장명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식을 벗어 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유명제]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 안식)에는 포함되지만, 안근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식과 같다.20)
19) 김성철(2003), “眞故 極成色不離於眼識, 初三攝眼所不攝故, 猶如眼識.”
20) 김성철(2003), “極成之色非是不離眼識色, 初三攝眼所不攝故, 猶如眼識.”
이 <추론식6>은 소승의 입장에서 보면 추론인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바른 추론식이다.
따라서 <추론식 6>과 <추론식5>는 동일한 추론인에 의해 모순되는 결론을 귀결하기 때문에 유법차별상위인에 기인한 오류를 범하는 추론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규기는 이 <추론식6>의 이유명제에 ‘입론자 자신이 인 정하는’이라는 한정사를 부가하지 않으면, 이 추론식은 공부정(共不 定)의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규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식과 같이 [18계의 범 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 포함되지만, 눈 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식을 벗어나지 않고서 존재하 는 색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측이 인정하 는 [아미타여래와 같은] 다른 세계의 부처(타방불)의 [신체를 구성하 는] 색과 같이,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의 세 개의 범주(안근ㆍ 색경ㆍ안식)에 포함되지만 눈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 식을 벗어나지 않고서 존재하는 색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가 된다.
만약 [이 추론식의] 추론인에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 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 추론식과 같이] 다른 세계의 부처의 색 을 가지고 와서 불확정으로 할 수가 없다. 이 [다른 세계의 부처의 신체를 구성하는 색이라는] 말에는 한쪽이 [인정하지 않는 추론인] 이라는 오류(수일불성)를 범하기 때문에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 이라는 한정사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대가 세운 추론식에는 이 미 이와 같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세운 추론식을] 불확정(부 정)으로 하는 것에 성공할 수 없다.
대개 상대의 오류를 지적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세운 추론식]에는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성공하는 추론식에는 반드시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추론인 의] 앞에 있는 어떤 주장(소립)에 주장의 주어의 함의와의 모순(유 법차별상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추론인에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 하는’이라고 기술하는 것이다.21)
21) 窺基, 『因明入正理論疏』(T44, 116a), “與彼比量作不定言 極成之色, 爲如眼識, 初三所攝 眼所不攝故, 非不離眼識色, 爲如自許他方佛等色, 初三所攝眼所不攝故, 是不離眼識色, 若 因不言自許, 卽不得而他方佛色而爲不定, 此言便有隨一過故, 汝立比量, 旣有此過, 非眞不 定, 凡顯他過, 必自無過, 成眞能立必無似故, 明前所立無有有法差別相違, 故言自許.”
대승 논사 규기의 입장에서 보면 <추론식6>은 ‘입론자 자신이 인 정하는’이라는 한정사를 붙이지 않는다면, 그 추론인이 소승의 색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승의 색에 소속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품유와 이품유인 공부정인(共不定因)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추론식6>의 추론인이 추론인이 갖추어야할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제2조건 즉 동품정유성을 충족시키는지를 보자.
‘안식을 벗어나 있지 않은 색’이 아닌 것(同品) 가운데 우리 측 (大乘)에서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 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면서 안근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안식이다. 따라서 동품유이다. 그리고 ‘안식을 벗어나 있지 않은 색’(이품) 가운데 우리 측(大乘)에서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근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 이 있는가? 있다. 다른 세계의 부처의 색(타방불의 색)이다.
따라서 이품유이다.22)
22) 김성철(2003), 142.
그러므로 이 추론식은 ‘입론자(小乘) 자신이 인정하는’ 이라는 한정사를 붙이지 않는다면, 대론자가 인정하는 색을 포함하기 때문에 부정의 오류를 범하게 되어 대승의 유식비량을 논박하기 위 해 내세운 추론식이 오히려 부당한 추론식이 되어 논박의 수단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자허’라는 단서를 소승 측에서 붙이지 않는 다면, 대승 측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역으로 ‘자 허’라는 단서를 대승 측에서 붙이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소승 측의 공격도 막아낼 수 없는 노릇이다.
2. 원효의 입장
현장의 또는 현장의 후계자들이 전했다고 여겨지는 유식비량에 대 해 원효는 외계 실재론에 입각한 결정상위를 추론인을 근거로 한 추 론식을 제시하여 현장의 유식비량을 상위결정의 추론인에 근거한 부 당한 추론식이라고 비판한다.23)
23) 장민석(2008), 118-119. “현장이 제시한 전제들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어반복이 아닌 유의미한 결론이 나왔다.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트릭 의 핵심은 색경을 실례(유의)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진나 인명학의 규칙을 이용하는 것이다.그 규칙을 이용한 덕분에 ‘{안근, 색경, 안식} = {안근, 색경, 안식} ’라는 잘못 된 공식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듯 진나 인명학의 특징 ⑵는 종의 술어의 진리집합의 원소가 단 3개인 경우 유식비량과 같은 궤변을 만들어 낸다.
현장은 이러한 진나 인명학의 논증체계 상의 헛점을 이용하여 교묘한 논증식을 고안했다. 실로 훌륭한 재능이다. 하지만 논리의 대칭성을 이용하여 현장의 궤변을 동일한 구조의 궤 변으로 이율배반을 이끌어낸 원효는 실로 불세출의 천재라 할 만하다. 결국 원효는 현장의 유식비량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계실재론에 입각한 소승의 <상위결정 추론식2>에 대해 대승 측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식으로 반 박할 수가 있다.
<추론식7>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식에서 벗어난 색이 아니어야 한다.
[이유명제] 입론자(대승)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 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 포함되면서 안식 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근과 같다.24)
24) 김성철(2003), “極成之色, 應非離識之色, 自許初三攝眼識不攝故, 猶如眼根.”
<추론식7>은 소승 측의 <상위결정의 추론식2>를 상위인, 특히 유 법차별상위인의 오류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 추론식에서 ‘안식을 벗 어난 색’과 ‘안식을 벗어나지 않은 색’은 유법차별이다. 여기서 입론 자(대승측)는 ‘안식을 벗어나지 않은 색’을 전제하고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는 포함되면서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는 다.’는 추론인을 기술하고 있지만, 반면 소승 측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런 추론인은 ‘안식을 벗어난 색’을 전제하고 추론하는 추론인이다.
원효는 이 지점에서 대승의 <추론식7>이 부정인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소승의 <추론식2>에 대한 논박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한다. 원 효는 말한다. [동품유] 여기서 말하는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근’과 같이,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식에서 벗어난 색이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품유] ‘우리 종파에서 말하는 석가보살의 실다운 불선의 색과 같 이,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식에서 벗어난 색인가?25)
그런데 <추론식7>은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석가보살의 불선색은 식에서 벗어난 색이지만, 소승의 입장에서 보면 ‘입론자(소승)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최초의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 식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추론인을 충족시킨다.
이 석가보살의 불선 색의 존재로 말미암아 <추론식7>은 공부정인의 오류에 빠진다고 원 효는 보았던 것이다.
또한 원효는 대승 측뿐만 아니라 소승 측의 <상위결정 추론식2>에 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 ‘자허’를 제거할 경우 부 정인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만일 [소승 측에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를 사용 하지 않고 부정인의 오류에 빠지게 한다면, 대론자(대승 측)에서도 역시 나를 위해 부정인의 오류를 작성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 다.
[동품유] 여기서 말하는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안근과 같이,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 되면서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벗어난 것인가, 아 니면 [이품유] 우리 종파(대승)에서 말하는 다른 세계의 부처의 색 과 같이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 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벗어난 것이 아닌 것인가?26)
25) 김성철(2003), “此極成色, 謂如眼根, 自許初三攝眼識不攝故, 非離識之色耶, 爲如我宗, 釋 迦菩薩, 實不善色, 自許初三攝, 眼識不攝故, 是離識之色耶.”
26) 김성철(2003), “若不須自許, 作不定過者, 他亦爲我作不定過, 爲此極成色, 爲如眼根, 初三 所攝眼識不攝故, 是離眼識耶, 爲如我宗他方佛色, 初三所攝眼識不攝故, 非離眼識耶.”
만약 소승 측에서 ‘입론자(소승)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 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대승 측에서 인정하는 타방불의 색이 이품 에 존재하여 이 추론식도 동품유와 이품유가 되어 공부정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허’라는 한정사에 대해 어떤 입장 을 견지한다고 하더라도 자비량의 영역에서만 인정될 뿐, 타비량에서 는 반드시 타자를 설득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원효는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승 측에서도 공부정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상위결정 추론식2>에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이라는 한정사 ‘자허’를 ‘입론 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인 ‘극성’이라는 한정사로 바꾸어서 오류를 면하고자 한다면, 대승 측에서의 반론이 예상된다. 먼저 ‘자 허’를 ‘극성’으로 바꾼 상위결정의 추론식은 다음과 같다. <추론식8>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결정코 안식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유명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 운데] 처음 세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식에는 포함되 지 않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근과 같다. 다음은 이 추론식에 대해 대승 측의 반론의 추론식이다.
<추론식9 >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식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명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 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경ㆍ안식)에는 포함되 면서,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근과 같다.
<추론식9>가 <추론식8>을 논란한다면 스스로는 타당한 추론식이 어야 한다. 즉 추론인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식에 서 벗어난 색이 아닌 것 중에 양측 모두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 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제2조건인 동품정유성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안근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품유이다.
한편 식에서 벗어난 색 가운데 입론자 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안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제3조 건인 이품정유성을 충족시키는 것이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
따라서 이품무이다.27)
27) 김성철(2003), 155.
그러므로 이 추론식은 정당한 추론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추론식에 의해 앞의 소승의 추론식이 유법차별상위 의 오류를 범한다는 반론은 타당하다.
따라서 소승에서도 ‘저허’ 대신 에 ‘극성’이라는 한정사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의 타당 성을 타인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없음을 원효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현장의 유식비량은 눈은 색을, 귀는 소리를, 혀는 맛 등을 감각하는 하나의 감각은 하나의 대상에만 작용한다는 것에 입각한 주장이지만, ‘수행이 깊은 보살은 오근을 호용하여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눈으로 듣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맛보기도 하는 것이 가능하 다.’는 오근실호용(五根實互用)을 주장하는 대승의 또 다른 주장에 대 해서는 소승의 위의 추론식은 부정인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다음 과 같이 말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미진한 점이 있다.
[원효는『판비량론』에서 소승 측에서 작성한 결정상위의 오류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 이 말한다.]
만약 [제8지 이상의 보살의 경우에는] 다섯의 감각기관 (오근)이 서로[의 기능]를 사용할 수 있다는 교의를 전제로 한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식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추론식10>
[주장명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색은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안 식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유명제] 입론자 자신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 이다.
[유례명제] 가령 안근과 같다.
만일 이와 같은 식으로 [오근실호용종의 유식비량을] 비판한다고 해 도 이 추론식에는 [추론인이] 불확정(不定)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대승의 교의에서는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안식은 결 코 [그 기반이 되는] 눈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유례명제의] 눈은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눈의 인식작용을 벗어 나서 존재하는’ 것의] 공통의 동품이 되며 ‘[눈의] 인식작용에는 포 함되지 않는다.’고 하는 추론인은 이것[눈]에 대해서 확실히 꼭 들어 맞는 것이다. [역으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안식’ 은 그 이품이 되며, 그것은 확실히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불확정 의 오류(不定)는 범하지 않으면서 [오근실호용종의 유식비량을] 반론 하는 추론식이 될 수 있다.28)
28) 김성철(2003), “此通未盡, 若對五根實互用宗, 卽應立言 眞故極成色離極成案識, 自許初三 攝眼識不攝故, 猶如眼根, 若作是難 亦離不定, 以大乘宗極成眼識必不緣眼, 故此眼根爲共同 品, 識不攝因於此定有, 極成眼識爲其異品, 於彼遍無, 故非不定, 能作敵量.”
원효가 소승의 입장에서 오근실호용종의 유식비량에 대해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개량된 <추론식10>에서 만약,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안식’에서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이라 는 한정사를 가지고 안식을 한정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공부정 인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안식에서 벗어난 것(동품) 중에 입론자 자신(소승)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안근이 존재 하기 때문에 동품유이다. 한편 안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품) 중 에 우리 측(소승)에서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의 세 개 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이 근과 비른 그리고 설근 등을 통한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품유가 된다.29)
따라서 동품유와 이품유가 되어 이 추론식은 공부정인의 오 류에 기반 한 부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는 개량된 추론식을 제시했던 것이다. 개량된 추론식 즉 주장명제의 술어에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이라는 한정사를 부가한다면 이러한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다.
즉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안식’에서 벗어난 것(동 품) 중에 입론자 자신(소승)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 면, 안근이 존재하기 때문에 동품유이다.
한편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 안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품) 중에 입론자 자신 (소승)이 인정하는 [18계의 범주 가운데] 처음 세 개의 범주(안근ㆍ색 경ㆍ안식)에 포함되지만, 안식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품무이다.30)
29) 김성철(2003), 160.
30) 김성철(2003), 164.
따라서 동품유 와 이품무가 되어 이 추론식은 바른 추론인이며 이것에 기반 한 소 승의 추론식 또한 타당한 추론식이 되는 것이다.
Ⅳ. 결론
현장은 자신의 유식비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眞故), ‘입론자와 대론자 양측 모두 인정하는’(極成), ‘입론 자 자신이 인정하는’(自許)이라는 한정사를 부가함으로써 자신의 추 론식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이 디어는 자립중관학파의 대성자인 청변의『중론』의 주석이나『장진비 량』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사실 용수의『중론』은 현량이나 비량 혹은 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오류를 범하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미 간 것은 가지 않는다. 아직 가지 않은 것은 가지 않는다. 현재 가고 있는 중인 것도 가지 않는다.”31)와 같은 운동부정이나, “생주멸이 성 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위가 없기 때문에 어 떻게 무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 다. 앞서 말한 생주멸은 그 모습이 역시 이와 같다.”32)와 같은 유위 법의 부정이나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보는 작 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주체도 논파된다.”33)와 같은 감각기관의 부정 등이다.
31) 『중론』 「관거래품」,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32) 『중론』 「관삼상품」,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如幻亦如夢, 如 乾闥(達)婆城.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33) 『중론』 「관육정품」,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이러한 주장은 세간의 상식적 주장과는 완전히 배치되 는 것이다.
그래서 청변은 여기에 ‘진성(眞性)’이라는 한정사를 부가한 다.
이것은 ‘진리에 있어서는’이라는 의미로 ‘승의의 차원에 의거할 때’를 의미하는 진고(眞故)와 같은 뜻이다.
이렇게 한정사가 부가될 때는 자종(自宗)이나 자비량(自比量)의 타당성을 담보하는 것일 수는 있으나, 타종(他宗)이나 타비량(他比量)에서는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한정사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이나 입론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타자의 주장이나 입론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장과 규기의 입장에서 ‘일체는 오직 식의 현현에 지나지 않을 뿐, 외계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무경의 주장을 디그나 가의 삼지작법으로 구성하여 다른 학파나 입장을 설득하려고 하였으 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종(似宗)과 사인(似因)의 오류를 범하는 부당한 추론식으로 귀결된다.
원효는 유식비량을 소승의 관점에서 상 위결정의 추론식을 제시한 것은 소승의 추론식을 옹호하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다. 만약 현장과 같이 ‘진고’나 ‘극성’ 그리고 ‘자허’라는 한정사를 통해 자신의 추론식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해도, 오히려 그러한 한정사를 사용하는 반대 측의 주장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없 다는 점을 피력하려고 했던 것이다.
원효는 디그나가가 말하는 언어의 본질은 ‘타자의 부정’임을 직감 했다.
컵이라는 말이 컵이 아닌 것이 아닌 것을 지시한다는 것과, ‘컵 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주어인 ‘컵’도 컵이 아닌 것이 아닌 것 을 지시하며, 술어인 ‘있다’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닌 것을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주관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관념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떠 한 말이든 어떠한 주장이든 나아가 어떠한 추론이든 보편적 진리를 담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원효는 보았던 것이다.34)
34) 원효는 불교철학에만 천착한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유가의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노 자 『도덕경』 그리고 장주의 『장자』사상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금강삼매경론』을 주 석할 때 그 서문에는 장자의 사상과 개념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논리에 대한 원효의 입장은 아래의 장자의 입장에 연원한다. 원효는 인간의 언어를 통한 논쟁은 결코 생산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만 각각의 논쟁을 화쟁하는데 깊은 관 심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모든 주장과 이유로 구성되는 추론식은 반드시 상위결정이 오류를 필연적으로 범하기 마련이다. 다음의 장자의 언급은 토론에 대한 원효의 입장 을 잘 대변한다고 보여 진다. “나와 그대가 변론을 했다고 합시다. 그대가 나를 이기 고 내가 그대를 이기지 못했다면, 그대는 옳고 나는 그른 것이오? 내가 당신을 이기 고 그대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옳고 그대는 그른 것이오? 한 사람이 옳으면 반드시 한 사람은 그른 것이오? 둘 다 옳은 것이오? 둘 다 그른 것이오? 사실은 나와 그대는 서로 알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남들도 반드시 그 불확실성을 승계할 것 이오. 만약 당신에게 동조하는 사람에게 판정토록 시키면 이미 당신에게 동조했으니 어찌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겠소? 만약 나에게 동조하는 사람에게 판정토록 시키면 이미 내게 동조했으니 어찌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겠소? 만약 나와 당신에게 동조하 지 않는 사람에게 판정토록 시키면 이미 나와 당신에게 동조하지 않으니 어찌 공정 하게 판정할 수 있겠소? 만약 나와 당신에게 동조하는 사람에게 판정토록 시키면 이 미 나와 당신에게 동조했으니 어찌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겠소? 그런 즉 나도 당신 도 남들도 모두 서로 알 수 없으니, 시비판정을 기대할 수 있겠소? 목소리의 조화인 언어를 믿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과 같소. 자연의 분계에 화합하고 혼돈의 무극을 따르는 것이 생을 다하는 방법일 것이오. 무엇을 자연의 분계에 화합한다고 말하는 것이오? 옳음은 옳음이 아니요, 그러함은 그러함이 아니라고 말하겠소. 옳음이 과연 옳음이라고 한다면 옳음은 옳지 않음과 다를 것이오. 그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없소. 세월을 잊고 의리를 잊고 경계가 없는 데로 나아가시오. 그래서 경계가 없는 경지에 머무르시오.”(『장자』, 「제물론」).
결론적으로 말하면 디그나가의 인명학은 중국과 한국의 사상가들 에 의해 학습되면서 디그나가의 인명의 규칙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피력하고 또한 대론자들은 디그나가의 인명의 규칙을 토대로 상대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는 수단 내지 도구로 잘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권은 득의망상(得意忘象), 득상망언 (得象忘言) 즉 ‘뜻을 얻었으면 상을 잊고, 상을 얻었으면 언어를 잊어 라’, ‘달을 보았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잊어라(見月忘指).’는 언 어와 사유에 대한 강력한 불신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더 이상 디그나가의 인명학이 깊게 연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참고문헌
1. 약호 및 원전류
T 『大正新修大藏經』 『因明入正理論』 卷1(『大正藏』32) 『因明入正理論疏』 卷上(『大正藏』44)
2. 단행본 및 논문류
권서용(2018), 「원효의 불확정[不定] 원리와 법칭의 선험적 원리에 관한 연구」, 동아시아 불교문화학회. (2023), 「상위결정에 관하여」,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김상일(2003),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 서울: 지식산업사. 김성철(2003),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박태원(2019), 『원효의 십문화쟁론』, 서울: 세창. 신현숙(1996), 『원효의 인식과 논리』. 서울: 민족사. 원의범(1984), 「判比量論의 因明論理的 分析」, 『佛敎學報』 제21집,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이영무(1973), 「元曉大師 著 『判比量論』에 대한 考察」, 『건국대학교학술지』제15집, 건국 대학교출판부. 장민석(2008), 「현장의 유식비량에 대한 원효의 반론의 논리적 타당성 검토― 원효의 『판비량론』을 중심으로 ―」, 『철학논구』 제36집. 전치수(1989), 「디그나가의 인식론과 논리학」, 『인도불교의 인식과 논리』. 서울: 민족사. 桂紹隆(1984), 「デイグナーガの認識論と論理學」, 『講座大乘佛敎9-認識論と論理學』, 東京: 春秋社. 武邑尙邦(1988), 『佛敎論理學の硏究 -知識の確實性の論究』, 京都: 百華苑. 北川守則(1965), 『印度古典論理學の硏究』, 東京: 鈴木學術財團. 師茂樹(2015), 『論理と歷史』, 나카니샤출판. 三枝充悳, 심봉섭 역, (1996), 「중기대승불교의 논리학」, 『인식론ㆍ논리학』, 서울: 불교시대사 上田 昇(2001, 『ディグナ-ガ, 論理學とアポ-ハ論-比較論理學的硏究』, 東京: 山喜房佛書林. 小野基(2010), 「相違決定(viruddhāvyabhicārin)をめぐって」, 『インド論理學硏究』, 1. 東京: 山喜房佛書林. 神田喜一朗 編(1967), 『判比量論』, 東京: 便利堂. 李泰昇(2012), 「玄奘의 唯識比量 論難에 대한 中觀학적 고찰」, 인도철학회. 中村元(1958), 『因明入正理論疏』(국역일체경화한찬수부), 논소부23, 대동출판사.
Abstract
Dignāga’s Transformation of Cognitive Logic into East Asian Buddhist logic - Focusing on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 Inference that it is Yusigbilyang(唯識比量) of Xianzang(玄奘) -
Kwon, Seoyong (Full time Researcher The Institute of Korean National Culture Pusan National University)
Kyu-ki(窺基), disciple of the Xianzang, substantial renovation of Yusigbeobsangjong(唯識法相宗) explained in detail in his own logic book Inmyeong-ibjeonglilonso(『因明入正理論疏』), in order to use Yusigbilyang(唯識比量) as an important basis for propagating Yusigbeobsangjong(唯識法相宗). There is an active debate in the Buddhist community in China, Korea, and Japan over Yusigbilyang (唯識比量). Therefore, the thesis aims to explore how Dignāga’s logic is applied and transformed in East Asia, focusing on Kyu-ki’s claims and Wonhyo’s counterarguments surrounding Xianzang(玄奘)’s Yusigbilyang(唯識比量). In conclusion, it can be confirmed that Dignāga’s Logics expresses its assertions with Dignāga’s rules of Logic as it is learned by Chinese and Korean thinkers, and that the opponents use it well as a means or tool to point out errors in the other’s arguments based on Dignāga’s rules of Logic. However, East Asian civilizations have a strong distrust of language and reasoning. For this reason, it seems that Dignāga’s Logics was no longer systematically studied in East Asian Buddhism.
Keywords Inference of Yusig(唯識比量), Indeterminate logical reason(不定因), Logical reason that leads antinomy(相違決定因), determiner(限定詞), Logic(因明), Logical reason that can not be fixed in common(共不定因), Logical reason who proves the opposite of the inscription of the subject of a proposition(有法差別相違因)
논문투고일: 2024. 7. 24. 심사완료일: 2024. 8. 10. 게재확정일: 2024. 8. 2
한국불교학 제111집(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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