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이야기

知訥 頓悟漸修論의 本旨 -返照의 중요성을 중심으로/남영근.서울大

 Ⅰ. 문제제기

 Ⅱ. 解悟漸修의 趣旨

 Ⅲ. 自性門定慧와 隨相門定慧

 Ⅳ. 看話徑截門의 返照 修行

 Ⅴ. 결론

 

요약문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한 기존 연구는 성철(性徹)의영향으로 교학(敎學)과 관련 있는 해오(解悟)를 선문(禪門)의 깨달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관해 주로 논쟁하였다.

지눌 사상에서 해오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그가 해오점수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증오(證悟)라는 궁극적 경지이고, 증오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返照) 수행의 중요성이다.

돈오점수론의 목표는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라는 증오의 경지에 있으며,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의 반복을 통해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에 이르는 과정은 점수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반조의 공덕을 쌓아 해오에서 증오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눌이 말년에 제시한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은 해오점수라는 그의 기존 입장과 모순되는 것으로이해되지만, 간화경절문의 화두참구(話頭參究) 역시 증오-자성문정혜라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 수행의 맥락에 있으며, 기존 돈오점수론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

즉 지눌의 돈오점수론은 증오-자성문정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 수행으로 일관되며, 이것이 ‘밖에서 찾지 말라’는 지눌의 본지(本旨)이다

 

주제어 : 지눌(知訥), 돈오점수(頓悟漸修), 반조(返照), 선정(禪定), 지혜(智慧)

 

I. 문제제기

 

주지하듯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서 논쟁적 부분은점수가 필요한 돈오인 해오에 관한 것이다.

성철(性撤, 1912-1993) 스님은 원돈신해(圓頓信解)의 해오가 선종의 견성(見性)과 다르기때문에 해오에 불과한 지눌의 돈오는 선문(禪門)의 올바른 길이아니라고 비판했다.

돈점 논쟁에서 쟁점은 자연스럽게 해오에대한 인정 여부가 되었다.

성철의 견해를 수용하는 관점에서는 지눌의 신해는 해오로서 교종의 돈오라고 주장했다.1)

반면 해오의 가치를 인정하는 입장도 있다.

심재룡은 해오가뒤따르는 선 수행을 위한 지적(知的) 기초라고 이해한다.2)

김호성은한 발 나아가 증오(證悟)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십신위(十信位) 의 해오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므로 해오만으로도 온전한 깨달음이라고 주장한다.3)

박성배는 성철이 말하는 돈오돈수 역시 해오에 해당하는 자각 없이는 불가능하며, 성철의 돈오돈수와 지눌의돈오점수의 유사성을 강조한다.4)

길희성은 해오가 여실언교(如實言敎)를 통한 이지적 가르침과반조(返照)의 노력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반조라는 선(禪)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언어적 사유에 의한 교학적 깨달음을 중심으로 지눌을 이해한다는 점에서성철과 공통적이다.5)

     

   1) 목정배(1990), 468-491; 윤원철(1994), 37-41.

   2) 심재룡(1992), 143-146.

   3) 김호성(1992), 226.

   4) 박성배(1990), 520-523.

   5) 길희성(2015), 153-164

 

그 결과 길희성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기존의 지눌 사상과 모순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언어적 사유를 강조하던 지눌이 이를 초월한 간화경절문을 강조하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6)

이러한 국내 주요 연구들의 서로 다른주장들은 돈오점수론의 중심을 교학과 관련된 해오로 파악한다는점에서 성철의 틀을 벗어나고 있지 않다.

반면 박태원은 지눌의 돈오가 화엄적 해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돈오 개념을 이해·관점·견해 범주의 통째적전의(傳衣, āśraya-parāvṛtti)인 혜학(慧學)적 돈오와 마음 범주의통째적 전의인 정학(定學)적 돈오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원돈신해문은 혜학적 돈오에, 반조를 통한 돈오와 간화경절문은 정학적 돈오에 해당한다.

선종은 혜학보다 정학을 중시하며 지눌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는 지눌의 돈오를 혜학적 돈오인해오로만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7)

   

   6) 길희성(2015), 117-118.

   7) 박태원(2012), 9-50.

 

필자의 문제의식은 해오 중심의 지눌 이해를 벗어나 지눌 사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지눌이 해오를 강조했음에도, 해오의 지적 이해 측면이 어디까지나 근기에 따른 방편(upāya)이라는 점을 밝히고, 해오점수의 취지가 증오를 위한 반조 수행에 대한 강조임을 밝힌다.

그리고 수행론의 실질적인 내용인 이문정혜(二門定慧)의 내용을 구체적으로살펴보면서,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가 돈오돈수적 증오의 근기이며,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는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 수행으로서 해오 이후 점수의 구체적 방법이라는 사실을 구명한다.

마지막으로 지눌의 기존 입장인 돈오점수론과 다르다고 평가되는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 역시 증오에 이르기 위한 반조 수행이라는점에서 지눌의 기존 관점과 일치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러한논의를 통해 지눌 돈오점수론의 본지(本旨)는 증오라는 목적을 위한반조 수행으로 일관된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Ⅱ. 解悟漸修의 趣旨

 

성철은 지눌의 돈오점수론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성품 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을 규봉 스님은돈오라 했다.

그러나 견성(見性)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보조스님의 가장큰 과오는 규봉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담하게도 이것을견성이라 했다는 점이다.

번뇌망상이 있더라도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다. 예를 들면 거울에 먼지가 가득 앉아 있으면 밝은 빛이 드러나진않지만 거울의 밝은 성품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해오(解悟)는먼지가 가득 앉았지만 거울 자체의 밝은 성품만은 차이가 없다는 것을알았다는 것이다.

허나 이를 견성이라 할 수는 없다.

선문에서는 먼지를 닦아내 거울의 밝은 빛이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두루 비추는것을 두고 견성이라 했다.

그러니 해오의 견성이야 닦음이 필요하겠지만선문의 견성, 즉 증오는 다시 닦음이 필요하지 않다.8)

그의 핵심 논점은 점수가 필요한 해오를 선종의 돈오, 즉 견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눌이 규봉종밀(圭峰宗密)의영향으로 이단설인 해오점수를 신봉하다가, 말년에 간화선(看話禪)을 접하면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길로 선회했다고 이해한다.

지눌의 사상이 이단인지에 대해서는 찬반이 갈리지만, 일반적으로그의 돈오론은 이렇게 해오 중심으로 이해된다.

修心訣에서는해오점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理는 갑자기 깨닫는 것이니 깨달음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事는 갑자기 제거되지 않고 점차적으로 없어진다.9)

 

      8) 퇴옹성철(2017), 273.

      9) 修心訣(B, 33), “理卽頓悟, 乘悟併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누구에게나 스스로가 본래 부처라는 이치는 언제나 완벽하게갖추어져 있기에 이치에 대한 깨달음은 전체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진다. 반면 현상의 차원에서 중생과 부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중생에서 부처로 점차 변화해 나간다.

여기서 이치에 대한 돈오가해오를 의미한다.

지눌은 해오를 ‘이치’에 대한 이해와 믿음으로본다. 지눌은 勸修定慧結社文에서 해오점수에 관한 종밀의 비유적 설명을 인용한다.

얼어붙은 못이 전부 물인 줄을 (단박) 알지만, 햇빛을 (점차) 받아야 녹고, 범부가 바로 진임을 (단박) 깨달았더라도 법의 힘을 빌어 (점차) 닦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전답에 물을대거나 물건을 씻기도 하고, 망상이 없어지면 마음이 영통하여 비로소신통광명의 작용을 내는 것이니, 마음을 닦는 것 이외에 따로 수행하는 길이 없다.10)

종밀에 따르면 얼음이 녹기 전에도 본래 물이듯이, 깨달음은현실적인 성불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인식하는[識] 깨달음이다.

이것이 해오이다.

그리고 점수는 얼음이 녹아서 물이되듯이 현실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해오가 본래 모습[體]에대한 이해라면, 점수는 실제 작용[用]이다.

종밀의 해오 개념은 이통현(李通玄)으로부터 영향받은 신해(信解) 개념과 상통한다.

지눌은 “신(信)이 극에 달하면 자연스럽게해(解)가 열린다.”11)고 말한다.

 

    10) 勸修定慧結社文(B, 11), “識氷池而全水, 藉陽氣而鎔銷, 悟凡夫而卽眞, 資法力而修習. 氷銷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始發通光之應, 修心之外, 無別行門.”

     11) 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40), “信若極, 則自然有開解矣.”

 

이처럼 신해는 믿음을 통해 해오하는 것이다.

그는 이통현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華嚴論節要에기록하고 있다.

 

만약 십신(十信)의 단계에 있는 어떤 사람이 그의 몸이 부처의 몸과 다를 바가 없으며, 원인이 결과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는 신해(信解)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12)

 

圓頓成佛論에도 이통현의 유사한 언급이 들어있다.

 

믿음의 원인(信因)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계합하되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는 것을 믿는 마음이어야 비로소 신심(信心)이라할 수 있다.13)

 

십신(十信)은 華嚴經의 보살 수행 52단계 중 자신이 부처라는사실을 처음으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는 10가지 단계다.

이통현은이에 대해 스스로가 부처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는 것을 믿는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믿음은 실제로 성불(成佛)했다는 믿음이아니다.

종밀의 비유대로, 얼음이 아직 물이 되지 않았지만 본래물이라는 점에 대한 믿음이다.

이처럼 지눌 사상 내에서 이통현의신해는 종밀의 해오와 상통한다.

해오가 신해와 상통한다는 사실은 해오가 불완전한 돈오임을의미한다.

신해는 분명히 수행의 가장 첫 단계인 십신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성철이 지눌을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방만한 수행풍조가 해오에 기원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점은 지눌 역시 해오의 불완전성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해오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게 해오는 어디까지나 근기(根機)를 고려한 방편(upāya)이다.14)

 

   12) 華嚴論節要(B, 231), “體齊諸佛十信之中, 若不信自身與佛身, 因果無二者, 不成信解.”

   13) 圓頓成佛論(B, 86), “信因中, 契諸佛果德, 分毫不謬, 方名信心.”

   14) 증오를 강조하는 성철의 돈오돈수론이 방만한 수행풍토에 대한 문제 의식에 기반한 반면, 수행자들의 근기에 대해서 섬세하게 고려하는 지눌의 돈오점수론은 불교를 대중화하고자 했던 그의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그의 사상은 결사운동(結社運動)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지눌의 수선사(修禪社) 결사운동은 중앙 귀족불교를 배격하고 모든 계층에게 결사 참여의 문을 열었다는 특징이 있다. 수선사 결사운동은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선사상을 답습하지 않고 이타행의 실천을 표방하고 정토신앙도 수용하는 등 대중적 기치 아래 전개됨에 따라 독서층과지방의 향리층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정병삼(2020), 350 참고. 지눌은 이 결사운동을 이끄는 대중 교육자로서 위인문(爲人門)의 입장에서 그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선문에도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이나 모자라는 근기를 위해 흐름을따르는 허망과 더러움 속에서도 성품이 깨끗한 묘한 마음이 있다고가리켜 보여, 그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였다.

믿어들어간 뒤에 그 이해와 분별을 잊어야 비로소 몸소 증득하였다 할수있다.15)

여기서 말하는 “쉽게 알고 믿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해오이고, 지눌은 그것이 낮은 근기나 초심자를 위한 방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실질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해오 이후방편을 잊음으로써 증득하는 것, 즉 성철이 말한 더 닦을 것이 없는증오이다.

그런데 성철의 지적 중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지눌이 해오를 견성과 동일시 했다는 점이다.

 

범부가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자성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을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한다.16)

 

    15) 圓頓成佛論(B, 80), “禪門, 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16) 修心訣(B, 34),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지눌은 마음의 빛을 내면으로 돌이키는 반조(返照)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본다[見自本性]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종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그런데 지눌은 바로 이어서 반조를 통한 견성 이후에도 점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버릇은 갑자기 없애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 을 이루게 되니, 이것을 점수라 한다. 17)

얼음이 아직 물이 되지 않았다는 것과 아기가 아직 어른이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 습기(習氣)가 남아있는 해오에 관한 은유이다.

지눌은 반조를 통한 견성 역시 해오로 본 것이다.

여기서해오에 대한 성철의 비판에 근본적으로 논의를 요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눌의 해오는 지적 이해 뿐만 아니라, 마음의빛을 돌이켜 자성을 비추어보는 반조와 이를 통한 직지인심(直指人心)을 분명히 포함한다.

성철은 지눌의 해오를 지적 이해로만이해하여 점수가 필요한 알음알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지만, 문제점은 오히려 지눌이 반조라는 선종적 돈오를 통한 견성 이후에도점수가 필요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범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도(五道)를 유전하면서 나고 죽음에 나라는 관념에 굳게 집착하여 망상과 뒤바뀜과무명의 종자와 익힌 버릇이 오랫동안 한데 어울려 그 성품을 이루었다.

이번 생에 이르러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문득깨닫더라도, 그 오랜 버릇을 갑자기 끊어버리기가 어렵다.18)

 

    17) 修心訣(B, 34),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難卒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故, 云漸修也.”

   18) 修心訣(B, 37), “凡夫無始廣大劫來至于今日, 流轉五道, 生來死去, 堅執我相, 妄想顚倒, 無明種習, 久與成性. 雖到今生, 頓悟自性, 本來空寂, 與佛無殊, 而此舊習, 卒難除斷.

 

성철은 견성이 궁극적 경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지눌을 비판하지만 지눌은 견성 이후에도, 윤회를 거치며 쌓인 습기가 여전하다고 본다. 성철은 최후의 깨달음만을 견성이라고 말하지만, 지눌은 견성을 수행 과정 중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견성을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지눌과 성철이 견성 개념에 대한 관점 자체에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눌은 견성을 가능하게했던 반조의 반복을 통해 견성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석 16에 해당하는 인용문에서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차츰익혀 공(功)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최초의 반조를 통해 자성을 본경험을 오랫동안 반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반조지공(返照之功)이라고 표현한다.

 

만약 몸소 반조의 공이 없고 다만 고개만 끄덕이면서, ‘현재 지금의아는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내 말의)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 응당 알아야 하니, 내가 말하는 마음을깨달은 사람은 단지 언설로 의심을 제거할 뿐만이 아니라, 직접 이 공적영지라는 말을 붙들어 반조의 공이 있고, 이 반조의 공으로 인해 생각을 떠나 마음의 본래 모습을 얻은 사람이다19)

 

    19) 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11), “若無親切返照之功, 徒自默頭道, 現今了了能知, 是佛心者, 甚非得意者也. … 當知吾所謂悟心之士者, 非但言說除疑, 直是將空寂靈知之言, 有返照之功, 因返照功, 得離念心體者也.”

 

  지눌은 최초의 반조를 통한 견성 체험은 영속적일 수 없다고본다.

그는 반조의 공, 즉, 반조 수행을 지속적으로 누적시키는노력을 강조한다.

최초의 견성은 반조의 공덕(功德)이 부족하여, 여전히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해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습기가 여전하다.

이런 점에서 성철은 지눌이 대담하게 해오와 견성을동일시 했다고 말하지만, 지눌이 말하는 해오로서의 견성은 그에게 수행 과정 중 시작 단계에 불과하며, 반조의 반복을 통해 계속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최초의 견성 체험을 가능하게 한 반조수행을 지속적으로 누적해서 견성이 확고해지는 것이 지눌이 목표로 삼는 지점이다.

해오 이후 점진적인 닦음, 즉 점수의 의미가여기에 있다. 반조를 통해 최초로 깨닫고, 그 깨달음이 확실하게들어앉게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반조 수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오점수의 실질적 내용은 지속적으로 반조하여증오해야 한다는 것이다.20)

 

    20)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해오 이후 점수 과정을 통해 점수가 필요 없는 구경위(究竟位)이라는 증오의 경계에 이르는 지눌의 돈오점수론과 화엄 사상의 관계에 관한 일반론에 기초한다. 반면 정희경은 이러한 기존 견해와 달리 지눌이 십주초(十住初)를 증오로 설정하고, 증오 이후에도 보살의 수행도인 오위(五位)의 점수 과정을 거쳐야 구경위에 이르게 된다고언급한 점을 지적한다. 정희경(2013), 126-127. 이는 지눌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이타행(利他行)를 점수의 과정에 포함시킨 것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지눌은 불성을 밝힌 이후 나와 다른 사람이 차별이없어진 경지를 보살행을 통해서 구현해야만 적정(寂靜)에 빠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39), “明見佛性, 則但生佛平等, 彼我無差, 若不發悲願, 恐滯寂靜.”). 적정에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발휘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오위의 보살도는 내적으로 불성을 완전히 깨달은 자가 보살도를 통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대응되는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닦는 자성문정혜에 해당된다고 해석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지눌은 증오의 경지 이후에도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선행(善行)을 점진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증오 이후 점수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오 이후 점수가 해애(解礙)를제거하는 노력의 과정이라면, 증오 이후의 보살행은 온전히 깨달은 불성을 보살로서 실현하는 단계라는 차이가 있다.

 

지눌의 수행론에서 해오의 지적 이해측면은 물론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지만, 해오점수의 취지는 지적이해를 기반으로 반조를 통해 최초로 견성하고, 그 경험에 의지하여반조를 반복함으로써 해오의 교학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Ⅲ. 自性門定慧와 隨相門定慧

 

지눌이 말한 깨닫고 나서 닦는 두 가지 방법, 자성문정혜와수상문정혜 중 자성문정혜에 대한 설명은 그가 분명히 해오가 아닌증오를 목표로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성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돈문(頓門)에서 노력함이 없는노력으로 두 가지 고요함을 함께 활용하고 자성을 스스로 닦아 스스로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깨치기 전 점문(漸門)의 낮은 근기(根機)가 다스리는 공부이고,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는 수행자이다.

이 두 문의 수행은 돈과점이 각기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21)

 

    21) 修心訣(B, 41), “則修自性定慧者, 此是頓門, 用無功之功, 並運雙寂, 自修自性, 自成佛道者也. 修隨相門定慧者, 此是未悟前, 漸門劣機, 用對治之功, 心心斷或. 取靜爲行者, 而此二門所行, 頓漸各異, 不可叅亂也.”

 

지눌은 자성문정혜와 수상문정혜를 근기에 따른 돈문과 점문의방법으로 대조한다.

자성문정혜에서 자성(自性)은 공적영지심이며, 공적과 영지는 각각 선정(禪定, dhyāna)과 지혜(智慧, prajñā)에대응된다.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자성문정혜는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이라는 자성(自性)에 대한 깨달음, 즉 견성의 결과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일시적인 견성이 아니라, 확고한 견성이다.

고요한 선정의 상태에서 현상을 올바르게 관(觀)하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발휘된다.

그러므로 현상을 대할 때 언제나 아무런 번뇌가없다.

이것이 六祖壇經에서 말한 선정과 지혜가 다르지 않은증오의 경지이다.

자성문정혜는 사실상 돈오돈수(頓悟頓修)와 유사하다.

통달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다는 뜻은 힘씀과 작용에 떨어지지 않고 원래 저절로 무위이므로 따로 특별한 때가없는 것을 말한다.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도 그러하고, 옷 입고밥먹을 때도 그러하며, 대소변을 볼 때도 그러하고, 남과 만나 이야기할때도 그러하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항상 그러하여 마치 빈 배가 물결을 타고높았다 낮았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기슭을 돌 때 굽었다 곧았다 하는것과 같다.22)

오늘도 유유자적, 내일도 유유자적하면서 온갖 인연을 따라도 아무장애가 없다.

악을 끊거나 선을 닦지도 않으며, 순진하고 거짓이 없어보고 들음이 예사로와 한 티끌도 맞서는 것이 없다.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노력도 필요없고, 한 생각도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힘을 빌릴 것도 없다.23)

지눌은 자성문정혜를 위와 같이 ‘통달한 사람의 경지’라고 말한다.

자성문정혜는 해오와 달리 깨달음이 완벽하기 때문에, 언제나번뇌 없이 자유로운 상태이다.

이처럼 그는 분명히 자성문정혜개념을 통해 해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적인 증오의 경지를 인정했다.

실제로 지눌은 돈오돈수의 근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문에는 그 문이 많으나, 요약하면 돈오와점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가장 으뜸 가는 근기의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에의지해 닦아 차츰 익혀왔으므로, 이번 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깨달아단박 마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의지할길이다.24)

 

   22) 修心訣(B, 39-40), “達人分上, 定慧等持之義 不落功用, 元自無爲, 更無特地時節. 見色聞聲時, 但伊麽, 著衣喫飯時, 但伊麽, 屙屎送尿時, 但伊麽, 對人接話時, 但伊麽, 乃至行住坐臥或語或默或喜或怒, 一切時中, 一一如是, 似虛舟駕浪, 隨高隨下, 如流水轉山, 遇曲遇直.”

   23) 修心訣(B, 33), “今日騰騰任運, 明日任運騰騰, 隨順衆緣, 無障無礙. 於善於惡, 不斷不修, 質直無僞, 視聽尋常, 則絶一塵而作對.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24) 修心訣(B, 40), “夫入道多門以要言之, 不出頓悟漸修兩門耳, 雖曰頓悟頓修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已是 多生依悟而修, 漸熏而來 至於今生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後修之機也則而此.

 

지눌은 분명히 돈오돈수를 인정하면서 높은 근기에 해당한다고말한다. 그런데 돈오돈수 역시 여러 생에 걸쳐서 해오점수했던과정에 따른 결과이기에 이 또한 돈오점수에 해당된다. 여러 생의윤회에 걸쳐서 해오 이후 점수해 온 사람이 현생에 높은 근기를가진다고 본 것이다.25)

높은 근기의 자성문정혜는 여러 생의 관점에서 보면 돈오점수이지만 현생의 차원에서는 돈오돈수의 의미를가진다.26)

 

      25) 이런 점에서 지눌의 수행론은 모두 돈오점수로 포괄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간화경절문 또한 이런 넓은 의미에서 결국 돈오점수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상세히 논한다.

     26) 물론 지눌이 자성문정혜와 돈오돈수를 동일시하는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성문정혜가 수상문정혜와 마찬가지로 돈오 이후의 점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사실상 깨달음 이후 더 닦을것이 없이 그 깨달음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눌이 돈오돈수의 근기를 인정했다는 사실, 자성문정혜라는 더 닦을 것 없는 경지가 오랜 생에 걸쳐 닦아온 결과이기에 돈오점수에 해당된다고 보았던점을 종합했을 때, 자성문정혜는 현생의 관점에서 사실상 돈오돈수적 경지에 해당된다고 해석 가능하다.

 

돈오점수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해오가 아니라 바로 이 확고한깨달음인 증오-자성문정혜의 경지에 있다.

다만 지눌은 대다수의평범한 근기를 가진 사람에게 현상 자체가 불성의 현현이 되는궁극적 경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고본다.

지눌이 인용하고 있는 종밀의 홍주종(洪州宗)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종밀은 마음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북종(北宗)의점수론, 마음의 본체를 공무(空無)일 뿐이라고 보는 우두종(牛頭宗) 의 허무주의적 담론, 그리고 선악과 무관하게 현상 자체를 모두불성의 작용으로 보는 홍주종을 모두 비판한다.

그리고 본체와 작용간의 균형을 강조한 하택종(荷澤宗)의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 개념을 표준으로 삼는다. 지눌의 심성론은 이러한 종밀의 입장을계승한다.

그는 홍주종에 대한 종밀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홍주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손가락을 퉁기고 눈을 깜박이는 등의 모든 행동이 다 불성의 전체 작용으로서 작용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전체가 탐욕과 분노와우치(愚癡)로서 선악(善惡)을 짓고 고락(苦樂)의 갚음을 받는 것도 다불성이니, 마치 밀가루로 갖가지 음식을 만들 때 그 음식이 모두 밀가루인 것과 같다.”27)

 

지눌은 이러한 홍주종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홍주는 항상 말하기를 “탐진(貪嗔)과 자선(慈善)이 다 불성(佛性)이라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물의젖는 성질이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만 보고 건너는 배와 뒤집어진 배의그 장점과 단점이 아주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홍주종은돈오문에는 가깝기는 하나 적실하지 못하고 점수문에는 완전히 어긋난다.28)

 

    27) 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05), “洪州意者, 起心動念, 彈指動目, 所作所爲, 皆是佛性, 全體之用, 更無別用. 全體貪嗔癡, 造善造惡, 受苦受樂, 皆是佛性. 如麪作種種飯食, 一一皆麪.”

    28) 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07), “洪州常云, 貪嗔慈善, 皆是佛性, 有何別者? 如人但觀, 濕性始終無異, 不知濟舟覆舟, 功過懸殊. 故彼宗, 於頓悟門, 雖近而未的. 於漸修門, 而全乖.”

 

물의 젖는 성질[體]이 동일하다고 해도, 물결[用]에 따라 물위에 있는 배가 물을 건널 수도 있고 엎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은누구나 본래 부처이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모든 현상이 불성의 작용이라는 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홍주종의 입장은 누구나 구유한 불성에 대한 돈오만을 설명할 뿐현실에서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점수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와같이 홍주종의 견해는 불성(佛性)에만 안주한 채 현실적인 닦음을게을리하여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홍주종 비판에는 근기에 대한 고려가 들어있다.

홍주종의입장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무에게나가능하지 않은 이상적인 경지이기에 누구에게나 적용되기 어렵다.

즉 지눌이 홍주종을 비판한 이유는 평범한 수행자들에게 점수가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만일 타고난 근기가 우수하다면 홍주종에서 말하듯이 마음의 발출이 그대로 부처의 작용이겠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점수해야 한다.

자성문정혜와 같은 특별한 근기의 경우에 홍주종의 관점이 인정된다. 증오 이후 자성문정혜가 사실상 돈오돈수의 경지라면, 깨달음이후에도 남아있는 습기를 닦는 과정은 수상문정혜에 해당한다.

즉 해오점수에서 점수는 수상문정혜를 가리킨다.

앞서 지눌이 자성문정혜를 돈문, 수상문정혜를 점문으로 나눈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점문’은 습기를 점차 닦는 것을 말한다.

 

먼저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번뇌가 심히 중하고 익힌 버릇이 굳고무거워 대상과 마주칠 때마다 생각생각 감정을 일으키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마다 대상을 만든다. 혼침과 산란에 부추김을 당해 고요함과앎이 한결같지 않은 어두운 이는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빌어 대치하기를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29)

 

   29) 修心訣(B, 42), “雖先頓悟, 煩惱濃厚, 習氣堅重, 對境而念念生情, 遇緣而心心作對. 被他昏亂, 使殺昧却, 寂知常然者, 卽借隨相門定慧, 不忘對治, 均調昏亂, 以入無爲.

 

위 인용문에서 제시된 상황은 앞서 논했던 해오 이후 점수의필요성을 설명하는 구절과 거의 같다.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번뇌가 여전한 해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선정과 지혜의 차원에서이는 선정과 지혜가 구분되지 않아 선후가 없는 자성문정혜의 경지와 대비된다. 여전한 번뇌를 닦기 위해 번뇌가 생겼을 때 선정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空寂], 그 고요함을 바탕으로 현상을올바르게 관한다[靈知]. 이렇게 자성의 공적과 영지, 선정과 지혜에순서가 있다.

그래서 지눌은 수상문정혜를 선정과 지혜를 번갈아닦는 ‘대치(對治)’ 공부라고 말한다.

 

먼저 고요함[寂]으로 흩어지려는 생각을 다스리고 그 다음 또랑또랑함[惺]으로써 흐리멍텅함을 다스린다 하여, 앞과 뒤에 대치하여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고요함에 들어가는 이는 점문(漸門)에 속하는 낮은 근기의 소행이다. 또랑또랑함과 고요함을 고루 가진다고 하지만, 고요함만을 취한 수행이 될 뿐이니, 어찌 할 일을 마친 사람의본래 고요함과 본래 앎을 떠나지 않는 자유자재로 겸해 닦는 것이 되겠는가.30)

 

지눌은 수상문정혜를 북점종(北漸宗)의 열등한 수행법이라고평가한다. 선정과 지혜에 관한 남돈종(南頓宗)과 북점종의 이러한차이는육조단경에서 혜능이 남돈종의 자성삼학(自性三學)과 북점종의 수상삼학(隨相三學)을 각각 높은 근기와 낮은 근기로 구분한것에 근거한다.31)

그런데 문제는 종밀과 지눌이 북점종의 수행방법을 극력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를계승한 종밀과 지눌은 북점종의 수행법이 마음에 본래 번뇌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하여 억지로 번뇌를 닦아내는 근본적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눌은 수상문정혜를 방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에 의해 잠시 익힌 버릇을 억제하더라도 심성이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점문의낮은 근기의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32)

 

    30) 修心訣(B, 39), “若言先以寂寂, 治於緣慮, 後以惺惺, 治於昏住, 先後對治, 均調昏亂, 以入於靜者, 是爲漸門劣機所行也. 雖云惺寂等持, 未免取靜爲行, 則豈爲了事人, 不離本寂本知, 任運雙修者也.”

   31) 사실 六祖壇經을 통해 잘 알려진 ‘북종의 점진주의에 대한 남종의 돈오주의의 우수성’이라는 전통적 해석에는 사실과 다른 전설적 측면이 있다. 존 매크래, 김종명 역(2018), 38-41, 441-465. 그러나 지눌과 관련해서 중요한 점은 그의 사상과 수행론의 중심에 북종의 점진주의를 비판하는 혜능의 돈오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32) 修心訣(B, 42), “雖借對治功夫, 暫調習氣, 以先頓悟, 心性本淨, 煩惱本空故, 卽不落漸門劣機.” 

 

깨달은 다음에 닦는 문에서 겸하여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를 함께논한 것은 점문의 근기가 행할 바를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방편을 취하여 길을 빌리고 숙박을 의탁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이돈문에도 근기가 뛰어난 이가 있고 낮은 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예로써 그 가는 길을 똑바로 판단할 수는 없다. 33)

 

      33) 修心訣(B, 41), “悟後修門中, 兼論隨相門對治者, 非全取漸機所行也, 取其方便, 假道托宿而已. 何故於此頓門, 亦有機勝者, 亦有機劣者, 不可一例, 判其行李也.”

 

지눌은 먼저 깨달았기 때문에[以先頓悟], 점문의 낮은 근기에떨어지지 않는다고 해명한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분명 해오이다.

여전히 습기(習氣)가 남아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즉 수상문정혜가 열등한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수용될 수 있는 이유는 견성의경험 이후에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과 지혜가 구분되지않는 자성을 보았던 견성을 바탕으로, 그 견성이 확고해지기 위하여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를 억누르기만 하는 북점종의무의미한 수행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눌이 말하는 수상문정혜는 선정과 지혜를 대치함에도불구하고, 선정과 지혜의 즉체즉용(卽體卽用)을 유도하여 공적영지한 자성의 본 모습을 깨닫기 위한 반조 수행법이다.

앞서 해오점수에서 점수는 해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반조의 누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점수의 구체적 내용이 바로 습기가여전한 수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수상문정혜이다.

즉 수상문정혜는해오 이후 자성문정혜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의 누적이다.

아직깨닫지 못한 제자에 대한 지눌의 지도 장면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 그대가 지금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답: 네 듣습니다.

문: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는지. 답: 이 속에 이르러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문: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관세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문: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기를 이 속에 이르러서는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얻을 수 없다면 그때는 허공이 아니겠는가?

답: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문: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실체인가?

답: 모양이 없으므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문: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말라.34)

 

    34) 修心訣(B, 36), “汝還聞, 鴉嗚鵲噪之聲麽? 曰, 聞. 曰, 汝返聞汝聞性, 還有許多聲麽. 曰, 到這裏, 一切聲, 一切分別, 俱不可得. 曰, 奇哉奇哉! 此是觀音入理之門. 我更問儞. 儞道, 到這裏, 一切聲一切分別, 揔不可得, 旣不可得, 當伊麽時, 莫是虛空麽? 曰, 元來不空, 明明不昧. 曰, 作麽生是不空之體? 曰, 亦無相貌, 言之不可及. 曰, 此是諸佛諸祖壽命, 更莫疑也.

 

위 대화에서 지눌이 지도하고 있는 내용은 어지러운 마음을고요하게 만들고, 고요함이 지나치게 깊어지면 다시 밝음으로 균형을 맞추는 대치, 즉 수상문정혜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상문정혜가바로 반조이다.

바깥으로만 향하여 번뇌를 일으키던 의식을 그근원인 고요한 마음으로 돌이키고 고요한 마음으로 세계를 관하여자성을 보게 되는 견성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점수의 과정은 일시적인 견성으로 해오 상태에 있는중생이, 반조를 통해 공적영지한 자성을 반복적으로 봄[見性]으로써, 철저한 견성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방법이 수상문정혜이다.

수상문정혜는 마음의 빛을 자성으로 돌이키는 견성의 경험이고, 지눌이 해오 이후 꾸준한 반조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 경험이 누적되어 진정한 견성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지눌은 수상문정혜의 반복을 통해 자성문정혜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깨친 사람의 경지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의혹이 없어 더럽히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저절로 천진한 묘성이 계합하여 고요하고 또랑또랑해서, 생각마다온갖 대상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되 자성을떠나지 않는다.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위 없는 보리를 성취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도 없다.35)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무기(無己)를 다스려, 움직이고 고요한 자취가 없어지고 대치하는 공부를 마치면, 어떤 대상을 대하더라도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인연을 만나도 마음마다도에 계합하여 걸림없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비로소 일 없는사람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불성을 분명하게 본[明見] 사람이라 할 수 있다.36)

 

      35) 修心訣(B, 42), “悟人分上, 雖有對治方便, 念念無疑, 不落汚染. 日久月深, 自然契合, 天眞妙性, 任運寂知, 念念攀緣一切境, 心心永斷諸煩惱, 不離自性. 定慧等持, 成就無上菩提, 與前機勝者, 更無差別.”

      36) 修心訣(B, 42), “以定治乎亂想 以慧治乎無記 動靜相亡 對治功終 則對境而念念歸宗 遇緣而心心契道 任運雙修 方爲無事人 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 明見佛性者也”

 

자성문정혜와 달리 대다수에게 적용되는 점수는 수상문정혜이며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돈오점수, 즉 해오점수를 가리킨다. 자성문정혜에 단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해오라는 방편 없이곧바로 완벽하게 견성해야 하는데 이는 높은 근기에 한정된다.

따라서 지눌은 낮은 수준의 견성인 해오 이후 수상문정혜를 점진적으로 닦아, 결국 자성문정혜로 발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해오이후 꾸준하고 점진적인 수상문정혜의 반조를 통해 자성문정혜의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은 해오 시의 견성과는 다르게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 자성문정혜의 경지는 불성을 ‘명견(明見)’했다고 표현한다.

확고한 견성이라는 의미이다. 

 

Ⅳ. 看話徑截門과 返照 修行

 

지눌은 만년에 大慧普覺禪師書語錄을 열람하며,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떠나서 참구(參究)하면안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 일임을 알것이다.”37)

라는 구절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것이이른바 지눌 사상의 삼문(三門)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간화경절문이다.

간화선(看話禪)과 지눌의 기존 이론인 돈오점수론과의 일치여부는 논쟁 주제가 되어 왔다.

성철은 지눌이 간화선을 접하면서 기존 관점을 반성하고 돈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사상적인 변화를모색했다고 본다.38)

성철과 같은 관점에서, 일각에서는 지눌이 말년에 설파한 간화경절문이 그의 기본 관점인 돈오점수론과 모순된다고 이해한다.39)

 

     37) 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B, 420), “禪不在靜處, 亦不在鬧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處, 然, 第一不得捨却, 靜處鬧處, 日用應緣處, 思量分別. 忽然眼開, 方知皆是屋裡事.”

     38) 퇴옹성철(2017), 300-301. 지눌 사상은 기본적으로 종파의 구분을 초월하여 각각의 장점을 수용하고자 하는 특징을 가진다. 혜능의 정혜(定慧), 신회의 지(知) 개념, 종밀의 선교통합과 돈오점수, 이통현의 독창적 화엄해석과 법장 비판, 대혜종고(大慧宗杲)의 간화선, 심지어는 정토 신앙까지 융합된 것이 지눌 사상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통시적 완성의 과정으로 지눌 사상을 해석하는 방식은 논의를 요한다.

    39) 대표적으로 길희성(2015), 207-223 참고. 그는 지눌이 언어적, 지적 이해에 기반한 깨달음을 강조하다가, 만년에 그것을 초월한 간화경절문을 내세우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성철의 지눌 이해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돈오점수가 해오 이후의 점수로서 언어와 이론을 중시하는 반면, 간화경절문은 언어적 방편 없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곧바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화경절문이 실제로 지눌의 기존 관점과 대비되는것인지에 관해서는 상세한 논의를 요한다.

앞서 밝혔듯이 지눌은증오의 경지인 자성문정혜와 돈오돈수의 근기를 인정하였다. 그리고돈오돈수 또한 돈오점수에 포함된다고 말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 경절(徑截)한다는 것 역시 지눌에게는돈오점수가 된다. 간화경절이란 간화선을 통해 곧바로 자성문정혜, 증오의 경지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지눌은 곧바로 자성문정혜가 될 수 있는 돈오돈수의 경지 역시 돈오점수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평가와 달리 지눌 스스로는 돈오돈수를자신의 철학과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간화경절문 역시마찬가지이다. 앞선 논의에 따르면, 반조를 통해 일시적으로 견성하는 것이 해오이고, 반조를 통한 견성 과정을 반복하여 확고하게견성하는 것이 점수이다. 높은 근기의 돈오돈수는 이러한 과정을여러 생을 통해 거쳐온 수행자가 단번에 확고하게 견성하는 것이고, 이러한 돈오돈수의 방법으로 간화선이 쓰일 뿐이다. 이렇게보면, 간화선 수행을 통한 돈오돈수는 여러 생을 걸쳐 반조의공을 쌓는 점수를 통해 높은 근기를 가지게 된 수행자가 반조를통해 단번에 증오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눌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 반조를 통한 증오이다. 지눌이소개하고 있는 간화경절문의 내용인 화두참구법(話頭參究法)을살펴보면 이 점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어떤 중이 조주 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 “없다.” 고 대답하였다. 그 “없다.”는 한 글자는 바로저많은 나쁜 지해와 나쁜 깨달음을 부수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로 알려고 하지 말고, 어떤 도리로도 알려고 하지 말며, 뜻의근본을 향해 생각하거나 헤아리지도 말고·······다만 모든 시간 동안무엇을 하던 항상 잡고, 항상 들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라는 문제를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공부하여야 한다.40)

 

아무 마음도 쓰지 않으므로, 마음이 갈 곳이 없을 때에도 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거기야말로 참으로 좋은 경지이니, 늙은 쥐가 갑자기 소뿔에 들어가 문득 더 이상 나아갈 곳이 끊어졌음을보는 것과 같다.41)

지눌은 화두를 통해 ‘의단(疑團)’을 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있다’, ‘없다’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의식을 언어적분별 세계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화두의 답을 찾으려고 의심하는것이 아니라, 의심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반조는 ‘들리거나 보이는 것’에서 ‘듣고 보고 있는 자성’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간화선의 깨달음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화두에서 제시하는 문제의 답에 대해 외부 세계에 대한 분별 논리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의심 자체로 의식을전환하는 반조를 통해 견성하는 것이다.

참구의 절정을 묘사하고있는 늙은 쥐에 대한 예시는 화두참구라는 반조를 통해 견성한결과, 언어로 표현할 모든 방도가 끊어진 경계를 가리킨다.

지눌은 진심(眞心)의 본체인 공적영지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묘한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상대적인 것과 끊어져있고, 일체의 상을 떠났으므로, 性을 밝게 알아 증득한 이가 아니면그이치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42)

 

    40) 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63),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此一字子,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不得作有無會,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但向十二時中, 四威儀內, 時時提撕, 時時擧覺, 狗子還有佛性也無云無, 不離日用, 試如此做工夫”

   41) 看話決疑論(B, 97), “直須無所用心, 心無所之時, 莫怕落空. 這裏却是好處, 驀然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42) 眞心直說(B, 53), “妙體不動, 絶諸對待, 離一切相, 非達性契證者, 莫測其理也.”

   43) 이런 관점에서 김성철은 간화선이 중도 불성의 구현을 위한 딜레마와 중화 작용이라고 말한다.조주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는 물음에 없다고대답한 것은 유(有)의 극단을 무(無)로 중화시킴으로써 ‘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중도의 불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공적영지심의 궁극적 의미 또한 비유비무의 중도이며, 지눌 또한 간화선을 통한 양극단의 중화작용으로 중도의 자성을 깨닫고자 한 것이다. 김성철(2012), 264-267.

 

‘있다’, ‘없다’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위의 언급처럼 공적영지심이 그러한 상대적인 분별을 떠난 마음임을 의미한다.43)

 

것이 바로 공한 마음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로서 지눌이 이상적 경지로 제시한 자성문정혜에 대한 표현이다. 이와 같이 간화경절문의 화두 수행법은 수행 내용상의 어려움으로인해, 높은 근기에 배치된 방법일 뿐 궁극적으로 분별 의식을자성으로 돌이키는 반조를 통해 증오, 자성문정혜에 이르는 것을말한다.44)

원교와 돈교의 신해문으로써 말하면 이 열 가지 지해(知解)의 병도또 진성(眞性)의 연기이므로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길이 있어, 듣고 알고 생각하기 때문에초심의 학자들도 믿고 받들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경절문으로써말한다면 몸소 깨닫고 은밀히 계합하는 데 있어서는 말하거나 생각할수 있는 길이 없어 듣고 알고 생각하기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법계의 걸림 없는 연기의 이치라 하더라도 도리어 말로 이해하는장애가 될 것이다.

만일 훌륭한 근기와 큰 지혜가 아니면 어찌 그것을밝힐 수 있겠는가?45)

   

    44) 박태원 또한 지눌의 돈오론은 지눌이 강조하는 정학(定學)적 돈오는 반조의 방법이며, 이는 화두참구의 간화선에도 그대로 계승되는 것이라고지적한다. 박태원(2012), 136-144.

    45) 看話決疑論(B, 92), “又若約圓頓信解門, 則此十種知解之病, 亦爲眞性緣起, 無可取捨. 然以有語路義路, 聞解思想故, 初心學者, 亦可信受奉持. 若約徑截門, 則當於親證密契, 無有語路義路, 未容聞解思想故, 雖法界無碍緣起之理, 翻成說解之碍. 若非上根大智, 焉能明得?

 

지눌은 간화경절문이 원돈신해라는 방편과 대비되는 공부임을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간화경절문이 지눌의 기존 수행론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의 해오점수론도 반조를 통해원돈신해의 지적 방편에서 벗어날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간화경절문은 “훌륭한 근기”를 가진 수행자를 위한 것이므로지적인 방편이 선행될 필요가 없을 뿐이다.

기존의 해오점수론은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반조를 통해 견성하고, 그 견성이 아직확고하지 않아 여전히 해오 상태에 머물러 있기에 지속적인 반조를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지눌이 말하듯이 “초심의 학자” 즉, 평범한근기에 해당된다.

즉 기존 해오점수론과 간화경절문의 내용은반조를 통해 증오한다는 핵심 내용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리고 근기의 차이 역시 지눌이 자성문정혜와 수상문정혜를 근기의 차이로구분했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눌이 간화선을 활용한 주된 의도가 반조를 통한 견성에 있기때문에, 간화선은 돈오돈수적인 맥락에서도 활용되고, 해오 이후점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더 닦을 것 없는 증오는 반조 수행의결과이고, 또한 점수의 과정 자체가 반조 수행의 반복 과정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오 이후 점수의 과정에서 간화선을 통한반조의 반복이 증오에 도달하기 위한 점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46)

먼저 여실한 지해(知解)로 자심의 진실과 허망과 생사를 가려서본말을 환히 가리어 결정한다. 그 다음에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 말(화두)로 세밀하고 자세히 참구하여 몸을 빼낼 곳을 얻으면, 이른바네모퉁이로 땅에 꼭 붙어 있는 것처럼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으니 생으로 나오든 죽음으로 들어가든 큰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된다.47)

 

    46) 이런 맥락에서 강건기는 지눌이 간화경절문을 돈오점수의 체계 속에 포괄하고 있다고 보며, 경절문을 해오 이후 점수의 일종으로 파악한다. 강건기(2001), 143.

    47) 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B, 165) “先以如實知解, 決擇自心眞妄生死, 本末了然. 次以斬釘截鐵之言, 密密地字細叅詳, 而有出身之處, 則可謂四稜着地, 掀揦不動, 出生入死, 得大自在者也.

 

지눌은 간화경절문을 해오 이후 점수의 맥락에서 설명하고있다.

“여실한 지해”로 결정한다는 것은 해오를 말하고, 그 이후에화두참구를 통해 “몸을 빼내는 것”이 의미상 점수가 된다.

해오이후에 화두를 통해 반조함으로써 해오가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완전한 견성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 점에 대해 버스웰(R. Buswell)은 지눌이 임제종(臨濟宗)의 표준적인 방식과 달리, 간화선을 돈오점수적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경절문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분석한다.48)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간화선의 두 가지 활용 방식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첫째, 간화선은 높은 근기의 수행자에게 곧장 증오하는 반조 수행이 되고49), 해오 단계에 머물러 있는평범한 다수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분별적 습기를 제거하는 점수로기능한다.

일반적으로 간화경절문에 대한 논의는 간화경절문이기존의 돈오점수에 해당하는 것인지, 이와 별개로 설정된 돈오돈수인지에 관한 판별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지눌 사상에서 간화경절문의 의의는 그것이 본래 지눌이 강조했던 반조 수행이라는사실에 있다.50)

 

    48) Buswell(2013), 176-185. 버스웰에 따르면 지눌은 기존의 돈오점수론과 간화선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한다. 그는 지눌이 간화선의 고유한 성격을 인정하여 경절문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그것을 돈오점수의 틀 내에서 소화하고자 한다고 이해한다.

    49) 이는 지눌과 성철의 공통점이다. 다만 지눌은 간화선을 통한 돈오돈수역시 근본적으로 돈오점수라고 본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성철이 강조하는 화두선을 통한 돈오돈수 역시 지눌의 해오점수와 근본적으로 다른것인지에 관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박성배(1990)가 말하듯이 성철이말하는 돈오돈수 역시 해오에 해당하는 자각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예컨대 법문을 통해 얻은 불성과 간화선에 대한 지식을 기초로 수행자가 화두참구를 통해 견성한다면 이는 해오 이후 점수를 통한 증오이다. 성철이 강조하는 삼관(三關)을 돌파하는 지속적인 화두 수행은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눌이 해오를 견성이라고 했다는 점 외에 지눌과 성철의 차이는근본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성철의 지눌 비판은 해오에 관한 잘못된 이해로 방만해진 수행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50) 이에 관해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에서 정식화 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간화선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미혹한 채 깨달음을 기다리는 장미대오(將迷待悟)의 태도라는 점에서 간화선을 자성에 대한 반조 수행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는 심사 의견이 있었다.본 논문의 논의에 따르면 간화선의 반조 수행은 물론 자성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지만, 그실질적인 내용은 화두에 대해 분별 논리를 통해 답을 찾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님의 지적처럼 간화선을 자성에 대한 반조와 동일시 하는 것에 관한 추가적인논거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분량 상 더 상세하게 논하지 못한 이부분에 관해서는 추후 연구에서 독립적인 주제로 다루고자 한다.

 

Ⅴ. 결론

 

이 글에서는 지눌의 돈오점수론의 본지(本旨)가 무엇인지 구명하고자 하였다.

본론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결론으로요약될 수 있다.

   첫째, 지눌의 해오점수론의 취지는 증오라는 궁극적 경지에도달하기 위해 반조의 공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반조를통한 최초의 견성은 습기를 전부 제거하지 못한 일시적 견성으로, 여전히 지적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해오의 수준이라고 파악한다. 그리고 최초의 견성이 확고해지기 위해 그것의 계기가 되었던반조 수행을 오랫동안 지속할 것을 강조한다.

  둘째, 돈오점수론의 목표는 자성문정혜라는 증오의 경지에있으며, 수상문정혜의 반복을 통해 자성문정혜에 이르는 과정은점수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반조의 공덕을 쌓아 해오에서 증오로나아가는 것이다.

지눌은 평범한 근기나 초심자들이 해오 단계의견성 이후에 선정과 지혜를 대치하는 반조를 통해 선정과 지혜가구분되지 않는 증오-자성문정혜의 경지로 상승하는 수행법을제시한다.

이 또한 지눌 돈오점수론의 중심 내용이 증오를 위한반조 수행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지눌이 말년에 제시한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은 해오점수라는 그의 기존 입장과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간화경절문의 화두참구(話頭參究) 역시 증오-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라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 수행의 맥락에 있으며, 기존돈오점수론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

즉 지눌의 돈오점수론은 증오자성문정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반조 수행으로 일관되며, 이것이 ‘밖에서 찾지 말라’는 지눌의 본지(本旨)이다.

 

약호 및 참고문헌

B: 普照全書

看話決疑論 勸修定慧結社文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 修心訣 圓頓成佛論 眞心直說 華嚴論節要 강건기(1999), 「修心訣의 體系와 思想」, 보조사상, 12, 보조사상연구원,. 강건기(2001), 목우자 지눌 연구, 서울: 부처님세상. 길희성(2015), 知訥의 禪思想, 서울: 소나무. 김방룡(2005), 「간화선과 화엄, 회통인가 단절인가-보조 지눌과 퇴옹성철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 11, 불교학연구회. 김성철(2012), 「선(禪)과 반야중관과의 관계」, 불교학연구, 32, 불교학연구회. 목정배(1990), 「선문정로의 근본사상」, 보조사상, 4, 보조사상연구원. 박성배(1990), 「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보조사상, 4, 보조사상연구원. 박성배(2009), 한국사상과 불교, 서울: 혜안. 박성배 외(1992), 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서울: 민족사. 박태원(2012), 「돈오(頓悟)의 두 유형과 반조(返照) 그리고 돈점 논쟁」, 철학연구, 46,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박태원(2012), 「돈점논쟁의 쟁점과 과제」, 불교학연구, 32, 불교학연구회. 박태원(2017), 돈점(頓漸) 진리담론 - 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 서울: 세창출판사, 2017. 보조국사 열반 800주년 기념사업회(2011), 보조국사의 생애와 사상, 서울: 불일출판사. 심재룡(2004), 지눌연구-보조선과 한국불교,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심재룡(2006),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윤원철(1994), 「선문정로의 수증론」, 백련불교논집, 4, 성철사상연구원. 이덕진 外(2002), 한국의 사상가 10人-지눌, 서울: 예문서원. 이효걸(1995),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서울: 예문서원. 인 경(2005), 「간화선과 돈점 문제」, 보조사상, 23, 보조사상연구원. 임승택(2011), 「돈오점수와 초기불교의 수행」, 인도철학, 인도철학회. 임승택(2012),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돈과점」, 불교학연구, 32, 불교학연구회. 정희경(2013), 「보조지눌의 선교일치에 관한 재고찰」, 보조사상, 39, 보조사상연구원. 존 매크래, 김종명 역(2018),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 서울: 민족사. 퇴옹성철(2017), 성철스님 평석 - 禪門正路, 합천: 장경각. Buswell, R.E.(2013), “Pojo Chinul and the Sudden-Gradual Issue: Kanhwa Son and Korean Buddhist Soteriology”, 불교학보, 66,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Yampolsky, P.B.(1967), The Platform Sutra of the Sixth Patriarch: The Text of the Tunhuang Manuscript with Translation, Introduction, and Note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Abstract

The Main idea of Chinul[知訥]’s Theory of Sudden Awakening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頓悟漸修] -Focusing on the Importance of Reflective Observation[返照]-

Nam, Young Geun (Seoul National Univ.)

Existing research on Chinul's theory of ‘sudden awakening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頓悟漸修]]’ mainly debated whether the enlightenment based on understanding, Jie-Wu[解悟] could be recognized as the Zen thought under the influence of Seongcheol[性徹]. Although Jie-Wu is an important concept in his thoughts, what he wants to emphasize through the ‘Jie-Wu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解悟漸修]’ is rather the ultimate enlightenment, Zheng-Wu [證悟], and the importance of practicing reflective observation, fanzao [返照] to reach the ultimate enlightenment. His theory on samādhi[禪定] and prajñā[智慧] is a process of reaching Zheng-Wu from Jie-Wu by accumulating fanzhao cultivation. The Ganhwa[看話] practice proposed by Chinul in his later years is understood to contradict to his existing theory, but this is also the result of understanding his thoughts centered on Jie-Wu. The key-concepts(話頭) of the Ganhwa practice is also in the context of the practice of fanzhao to reach the ultimate state of samādhi and prajñā[自性門定慧], and it is not different from the purpose of his existing theory. In other words, Chinul's theory of ‘sudden awakening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 is consistent with the practice of fanzhao to achieve Zheng-Wu, which is the main idea of his thought. 'Don't look for outside

 

 

투고일 2024. 07. 07 | 심사기간 2024. 07. 22 - 08. 05 | 게재확정 2024. 08. 09

佛敎硏究제61집

KCI_FI003112427 (1).pdf
6.50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