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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한유(韓愈) 배불론의 재해석 /송승훈.성균관大

Ⅰ. 서론

Ⅱ. 배불론의 전개

    1. 배불론의 배경

    2. 배불론의 과정

    3. 배불론의 한계

Ⅲ. 결론

 

 

I. 서론

 

본 논문은 한유(韓愈, 768∼824)의 배불론(排佛論)을 재해석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그가 배불론을 제기했던 등장 배경과 한계에초점을 맞추고자 한다.1)

 

    1) 한유의 사상에 대한 연구논문으로는, 고팔미(2008), 「韓愈 시와 불교와의관계」, 중국학 31, 대한중국학회; 김경순(2013), 「韓愈의 哲學과 北宋學의相關性에 관한 硏究」, 동서철학연구 67, 한국동서철학회; 김기영(1999), 「한유의 불교 배척과 여말선초의 배불론」, 倫理硏究 42, 한국국민윤리학회; 박문현(2014), 「思想: 韩愈与郑道传的排佛论」, 퇴계학논총 23, 퇴계학부산연구원; 안찬순(2016), 「韓愈에 대한 평가를 통해 보이는 朱熹의 문학관 및 그 의의 - 朱子語類에서의 평가를 중심으로 -」, 한중언어문화연구 42, 한국중국언어문화연구회; 염호택(2009), 「唐代 韓愈의 道·佛排斥과儒學思想에 관한 考察」, 동서철학연구 54, 한국동서철학회; 李揆一(2005), 「韓愈의 天人觀과 詩風」, 동북아문화연구 8, 동북아시아문화학회; 이석주(2011), 「漢儒와 정이의 反經論」, 韓國思想과 文化 58, 한국사상문화학회; 이원석(2010), 「한유의 성삼품설 연구」, 大同哲學 53, 대동철학회. 등이 있다. 이들 논문에서는 한유의 사상과 그 배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본 논문에서는 고팔미(2008), 김경순(2013)의 연구논문에 나타난 한유의시론과 불교관을 참조하고, 염호택(2009)이 연구논문에서 논술한 구당서, 신당서의 내용을 일부 참조하여, 한유의 배불론의 배경과 아울러 그의의와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그는 당대에 활동했던 문장가로서 당송팔대가의 첫 번째 인물이다.

그에 대한 선행연구는 문장가로서의 시학과 시론이 많이 보이며, 유불도에 대한 그의 사상이 보이기도 한다.

그는 대종(代宗)・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憲宗)・목종(穆宗) 시대에 활동했으며, 그가 살던 시기에는 불교와 도교가 사상을 지배해왔다.

그는 유학의 정통성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그 방법에는배불론과 도통론이 있다.

그 무렵은 불교 이외에 삼이교(三夷敎)라고 하는 네스토리우스교(景敎)・마니교(摩尼敎)・조로아스터교(拜火敎)가 대중들에게 파고들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불교 비판이 심했던 이유는 다른 외래사상에 비하여 국가에 미치는 그 파급력이컸기 때문이다.

수당시대를 지나면서 불교는 학문적 체계는 물론수행방식에서도 발전을 이뤄냈다.

한 사상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당대 초기에는 불교와 도교의 문화・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였으며, 중당 이후에는안사의 난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면서, 유학의 근간마저위기를 맞은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한유는 고문운동(古文運動)2)의 전개와 시대정신을 반영한 문장가로서는 높이 평가할만한 인물이다.

 

    2) 고문운동은 한유, 유종원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영향을 준 인물은 양숙(753∼793)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진무(2015), 312 참조.

 

하지만 배불론 전개에는 분명히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유교를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불교를 비판했지만, 그 내용에는 불교에 대한 사상적 비판과 유불간의 사상적 쟁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불교가 대중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편중하고 있다.

그는 유학자로도알려졌지만, 경전의 자구를 분석하는 학자라기보다는 비평가에가까워 보인다.

학문적 연구 없이 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없으며, 유교에 대한 체계적 이해 없이 유교의 부흥을 추구하는 것은 선언에 불과하다.

이 내용은 그가 배불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보이며 그의 문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반향을일으켰지만, 이미 불교가 사상과 문화로 민중에게 전파된 상황에서배불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배불전개에는 한계가 드러나 당대에 그의 사상을 국가나 대중을 상대로 전개하는 것은 어려웠으리라 생각된다. 유학이 생명력을 잃었을 때, 그가 배불과 도통을 통하여 유학을 부흥시키고자 했던정신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의 배불론 전개에는 그 한계를 지니고있다.

 

Ⅱ. 배불론의 전개

 

1. 배불의 배경

 

한유는 「평회서비(平淮西碑)」에서 “당은 천명을 계승하여 만방을 신하로 삼는다”3)라고 했다.

이 문장은 화이관을 나타내는 말로서, 그는 당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불교가 이미 교종과 선종에서 사상・문화적으로 활약하고 있던 시기이다.

이미 당은 개창과 함께 불교와 도교가 성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유학은 사상적 효용성을 발휘하지못하게 된다.

신당서에는 “진나라로부터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도교와 불교가 나타나서 성인의 도는 허리띠와 같이 간신히 이어졌다”4)라는 기록이 있다.

 

    3) 韓愈, 「平淮西碑」, “唐承天命 遂臣萬邦.” 한유 시문의 한문본은 馬其昶 校注(1982)에서 「논불골표」, 「송왕수재서」, 「여맹상서서」, 「원도」, 「조주자사사상표」, 「평회서비」를, 王雲五 主編(1968)에서 「송영사」를 참조한다.

    4) 新唐書 권176 「韓愈傳」, “自晉汔隋, 老佛顯行, 聖道不斷如帶.” 

 

한유는 이 시대에 고문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유학을 존숭하여 불교와 도교보다 그 우위에 세우려는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상고주의에 가깝다.

한유는 그의 문장에서도 기존의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과는 차이를 보인다.

사륙변려문은 네자, 여섯 자의 대구로 된 시로서 수사적으로 유미적 감흥을 주는데, 이러한 시적인 형식주의는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그 문장안에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한유는 형식이 자유롭고 내용을충족하는 고문(古文)으로 바꿔서 문장을 지었다.

그의 복고풍의 문장은 “문장에 도를 싣는다(文以載道)”라는 방식이며, 그 도란 유학의 가르침이다.

불교는 전한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에 의해 실크로드가 개척된 이후에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으로유입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에, 공식적 기록으로는 후한 명제(明帝,  재위 A.D. 57∼75) 시기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는 전래 과정에서 그 나라의 문화와 사유에 맞춰져 전개되는데, 이것이바로 위진 현학의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하는 격의불교이다.

불교는 발전할수록 그에 따른 비판도 동반되는데, 불교가 유학자로부터 비판받았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윤리적문제이다.

승려는 출가하여 가정을 이룰 수 없으며, 삭발 문화는효(孝)와도 상반된다.

  둘째는 사상적 문제이다.

인간은 사후에 멸하지 않고 윤회하여 내세에도 또 다른 삶을 이어간다는 삼세인과사상이다.

  셋째는 사회적 비판이다.

승려는 경제활동 없이 생계를 해결하므로, 면세의 대상이 되어 국가재정에 무익하며, 불사(佛事) 로 인하여 국고가 낭비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경제와 관련된 문제로는 승려의 세금, 병역, 요역의 면제가 있었다.

그래서 당대에 국가재정을 기반으로 하는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한유가 관심을 가졌던 불교에 대한 비판은 사회 전반적 내용이 강하다.

전당문(全唐文)에는 불교를 배격하는 30여 편의 표(表)와소(疏)가 나온다.

이 ‘표’에는 당대에 불교가 유행하면서 황제와 권신들이 불교를 믿는 것에 반대하는 문장이 보인다.

이 사실을보면 당대에 불교가 흥성한 데에는 황제를 비롯한 상류층의 적극적지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5) 노장시(2013), 359. 

 

당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불교에대한 지원으로 불교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①구사종(俱舍宗, 비담종), ②지론종(地論宗), ③섭론종(攝論宗), ④성실종(成實宗), ⑤삼론종(三論宗), ⑥열반종(涅槃宗), ⑦계율종(戒律宗), ⑧천태종(天台宗), ⑨화엄종(華嚴宗), ⑩법상종(法相宗), ⑪진언종(眞言宗, 밀종), ⑫정토종(淨土宗), ⑬선종(禪宗) 등의 13종이 발달함으로써, 다양한 교학의 발전과 선종의 수행체계가 민중에게다가간다.

불교가 발전하는 만큼 유학적 관점에서 벽이단론(闢異端論)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사고의 근간에는 논어와 맹자가있다.

논어 「위정」에는 “이단을 전공하면 해롭다”6)라고 하며, 맹자 「등문공하」에는

“양씨[양주]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임금에대한 의리가 없는 것이며, 묵씨[묵적]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가장 사랑해야 하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라서,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은 바로 금수(禽獸)이다”7)라고 한다.

 

          6) 論語 「爲政」, “攻乎異端 斯害也已.”

          7) 孟子 「滕文公下」, “楊氏為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이러한 사고는 그의불교에 대한 관점에서도 확인된다.

 

2. 배불의 과정

 

1) 도통론 형성

 

한유는 도통을 근간으로 배불론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유학의도를 문장으로 전개했다.

그가 유학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은 그의생애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진래(陳來)는 한유의 업적을 다섯 가지로 전개한다.

  첫째는 도통을 선양했으며,

  둘째는 맹자를 존숭했으며,

  셋째는 불교를 배척했으며,

  넷째는 대학의 도리를 밝혀드높혔으며,

  다섯째는 성(性)과 정(情)의 바탕을 논했다.8)

물론, 이분류는 한유의 문장과 생애를 통해서 보면 적절하다고 할 수있다.

이 밖에도 한유는 불교와 더불어 도교를 비판했으며, 그의사상은 당시 사유층에 많은 반향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진래는한유의 배불론을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문화적인면이며,

  둘째는 경제적인 면이다.9)

 

    8) 陳來, 안재호 역(1997), 50-59.

    9) 위의 책, 53.

 

진래가 말하는 한유의 배불론적관점은 이미 불교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문제라는 점에서 한유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그의 배불론적 특징은 도통론을 중심으로 하며, 그가 배불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는 유학의 도라는 점에서 그 도가 불교・도교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유는 「원도(原道)」에서 유학의 도는 노자가말한 도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노자]가 말하는 바의 도(道)란 그가 도라고 한 것을 도라고한것으로, 내가 말하는 도는 아니며, 그가 말하는 덕(德)이란 그가 덕이라고 한 것을 덕이라고 한 것으로, 내가 말하는 덕은 아니다. 무릇내가 도와 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과 의를 합해서 말한 것으로 천하의공공의 말이지만, 노자가 말하는 도와 덕이란 인과 의를 제외하여말한 것이니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다.10)

 

이 글에서 보듯이, 한유는 고문운동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문체의 복고주의와 더불어 유교적 사회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그는 유학의 도에는 인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도는 성인의 도(道) 로서 노자의 도와는 달리 중정을 지키는 것으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해준 것이다.

논어 「요왈」에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제위를 선양했을 때 전해준 내용이 나온다.

요임금이 말했다.

 

“자, 그대 순이여, 하늘의 역수[천명]가 그대에게있으니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지켜야 한다. 사해가 곤궁하면 하늘이내리는 복록도 영원히 끊길 것이다.” 순임금도 우에게 이것으로 명을내렸다.11)

 

    10) 韓愈, 「原道」, “其所謂道 道其所道 非吾所謂道也 其所謂德 德其所德 非吾所謂德也. 凡吾所謂道德云者 合仁與義言之也 天下之公言也. 老子之所謂道德云者 去仁與義言之也 一人之私言也.”

    11) 論語 「堯曰」, “堯曰 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基中 四海困窮 天祿永終舜亦以命禹.” 

 

위에서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은 서경 「대우모」의 “진실로 그 중정을 지켜야 한다”에서 확인된다.

이내용은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오직 미약하니오직 정성으로 하나가 되어 진실로 그 중정을 지켜야 한다”12)에나오는 말이다.

요임금에게서 비롯되는 유가의 도통은 중정을지키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 도란 무슨 도인가? 이것은 내가 말하는 도이며 노자와 부처의도가 아니다. 요임금은 이것을 순임금에게 전했고, 순임금은 이것을우왕에게 전했고, 우왕은 이것을 탕왕에게 전했고, 탕왕은 문왕・무왕・주공에게 전했고, 문왕・무왕・주공은 공자에게 전했고, 공자는맹자에게 전했다. 맹자가 죽고서는 그것이 전해지지 않았다.13)

 

진래는 한유가 성인의 도를 전하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요・순・우처럼 직접 구두로 전해 주는 방법이고, 다른하나는 주공이 공자에게, 공자가 맹자에게 전했던 것처럼 정신적전승으로 설명한다.14)

 

    12) 尙書 「大禹謨」,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13) 韓愈, 「原道」, “斯道也 何道也 曰 斯吾所謂道也 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

    14) 陳來, 안재호 역, 앞의 책, 51. 

 

논자는 이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 두 가지를제시한다.

  첫째는 현세・선양적 계승이며,

  둘째는 격세・상고적계승이다.

현세・선양적 계승이란 요・순・우 사이에서 왕위와함께, 경세와 치세의 권한을 물러주는 방식으로, 이러한 계승은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서 직접 이뤄진다.

격세・상고적 계승이란 주공으로부터 공자에게, 공자로부터 맹자에게 도통이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옛 성군의 가르침으로부터 계보를 잇는데, 이러한 계승은 현세를 뛰어넘어 세대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두는방식이다.

맹자가 말했다.

 

“요순임금으로부터 탕왕까지 오백여 년인데, 우와고요 같은 이들은 [요순의 도를] 보면서 그것을 알았고 탕왕은 [요순의 도를] 들어서 그것을 알았다. 탕왕으로부터 문왕까지는 오백여년인데, 이윤과 래주는 보면서 그것을 알았으며, 문왕은 들어서 그것을 알았다. 문왕으로부터 공자까지 오백여 년인데, 태공망과 산의생은보면서 그것을 알았다. 공자는 [문왕의 도를] 들어서 그것을 알았다. 공자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니 성인이 가신지 이처럼 그리멀지 않고, 성인이 살던 곳에서의 가까움이 이와 같다. 그러나 [공자의도를 이을 사람이] 없으며 또한 [공자의 도를 이을 사람이] 없을 뿐이다.”15)

 

맹자는 유학(儒學)의 도(道)가 “요임금 → 순임금 → 우왕 →탕왕 → 문왕 → 공자”로 이어졌으며, 공자 이후에는 그 도(道)가끊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도통을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그 도를계승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문장에서는 자신이 도통을잇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오백 년이면 반드시 왕이 될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이 있는 자가 있다. 주나라 이래로 칠백여년인데 그 숫자로서는 지났으며 그때로서는 그것을 살피면 가능하다. 대저 하늘은 아직 천하를 태평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만약 천하를 평안하게 다스리고자 하면 지금의 세상에서 그 누가 나를 버리겠는가? 내가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16)

 

한유는 맹자 이후의 도통을 설명하면서, “맹자의 스승은 자사이며 자사의 학문은 모두 증자에게서 나왔다”17)라고 했으며, 이고(李翶, 772~841)는 공자 이후에 성인의 도가 전해지는 도통을“안자 → 증자 → 자사 → 맹자”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18)

 

    15) 孟子 「盡心下」, “孟子曰 由堯舜至於湯 五百有餘歲 若禹皐陶則見而知之 若湯則聞而知之 由湯至於文王 五百有餘歲 若伊尹萊朱則見而知之 若文王則聞而知之 由文王至於孔子 五百有餘歲 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 若孔子則聞而知之 由孔子而來至於今 百有餘歲 去聖人之世 若此其未遠也 近聖人之居 若此其甚也 然而無有乎爾則亦無有乎爾.”

   16) 孟子 「公孫丑下」, “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 由周而來 七百有餘歲矣 以其數則過矣 以其時考之則可矣 夫天未欲平治天下也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其誰也 吾何為不豫哉.”

    17) 韓愈, 「送王秀才序」, “孟軻師子思 子思之學 蓋出於曾子.” 

    18) 李翶, 復性書, “昔者聖人以之傳于顔子 顔子得之拳拳不失不遠 而復其心三月不違仁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其所以未到於聖人者 一息耳 非力不能也 短命而死故也 其餘升堂者 益皆傳也 一氣之所養 一雨之所膏 而得之者 各有淺深不必均也 子路之死也 石乞壺黶 以戈擊之斷纓 子路曰 君子死 冠不免 結纓而死 由也 非好勇而無懼也 其心寂然不動故也 曾子之死也 曰吾何求哉 吾得正而斃焉斯已矣 此正性命之言也 子思 仲尼之孫 得其祖之道述中庸四十七篇以傳于孟軻.”

 

하지만 송대에 이르러서는 도통을 잇는 성현에 대해서는 이견이 보일정도로 정확하지 않다.

도통은 학문 또는 사상의 근본을 의미하기에 유학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그 정립이 필요하다.

 

주공이 죽으니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고, 맹자가 죽으니 성인의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백세에 선한정치가 없었고, [성인의] 학문이 전하지 않으니, 천세에 참다운 유학자가 없었다. 선한 정치가 없어도 선비는 오히려 선한 정치의 도리를밝혀서 남에게 사숙하여 후세에 전했다. 참다운 선비가 없으면 천하가어두워져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여, 사람의 욕심이 방자해져 하늘의이치가 사라진다.19)

 

유가의 도통론이 선종(禪宗)의 전등설의 영향으로 생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유가의 도통론은 동한시대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유가에서 자생한 관념이다.20)

    

   19) 朱熹, 孟子集註 「盡心章句下」, “周公歿 聖人之道不行 孟軻死 聖人之學不傳 道不行 百世無善治 學不傳 千載無眞儒 無善治 士猶得以明夫善治之道 以淑諸人 以傳諸後 無眞儒 則天下貿貿焉莫知所之 人欲肆而天理滅矣.”

   20) 김정기(2012), 369-370. 

 

이미 유학의 도통은 불교 이전에도 성인과 학자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유학의도통론에 체계를 잡게 된 계기는 선종 전등설의 영향이 있었을것이다.

선종의 법맥은 역대법보기, 전법보기, 조계대사전, 조당집, 경덕전등록 등에서 알 수 있다.

한유가 그 저서에서 조사들의 계보를 보았거나 그 계통을 들은 바가 있었는지는 확인이 어렵지만, 그는 도통의 체계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시대적사명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유가 말하는 도는 유학의 도이며, 그 도가 정통을 가지기 위해서는 상승(相承) 관계의 연속성이필요하다.

즉 도통은 현세 계승이 되어야 한다.

만약 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유학은 선진시대에 이미 맥이 끊긴 것을 의미하므로유학의 도통은 설 자리가 사라진다.

그래서 한유가 활동하던 시기에 유학에 대한 사상적・역사적 명분은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내세운 도통론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더라도, 불교가 성행하는 시기에 유학의 불씨를 살릴 수 있게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통론은 불교와 도교 세력에게 유학의 정통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유학을 부활시킬 수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2) 사상적 관점

 

한유는 「논불골표(論佛骨表)」에서 사회적 관점으로 불교를 비판하면서, 불교문화에 대한 사상적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들고있다. 원화(元和) 14년(819년), 헌종이 봉상(鳳翔)의 법문사(法門寺)에있는 부처의 사리를 궁으로 들여오고자 했다.

이에 형부시랑(刑部侍郎) 한유는 표문으로 헌종에게 상소한다.

 

신 아무개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해보니, 불교란 이적의 법일 뿐입니다. 후한 이후에 중국에 유입되었으며 상고시대에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옛날 황제(黃帝)께서는 재위 100년에 [수명이] 110세였으며, 소호(少昊)께서는 재위 80년에 [수명이] 100세였으며, 전욱(顓頊)께서는재위 79년에 [수명이] 98세였으며, 제곡(帝嚳)께서는 재위 70년에 [수명이] 105세였으며, 요임금께서는 재위 98년 [수명이] 118세였으며, 순임금과 우왕께서는 모두 [수명이] 100세였습니다. 이때에는 천하가태평하며 백성은 안락하고 장수했지만 중국에 불교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은나라의 탕왕 역시 [수명이] 100세였으며 탕왕의 후손태무께서는 재위 75년, 무정께서는 재위 59년이었으며, 역사책에는 그수명이 다한 연도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나이를 헤아려보면 모두역시 100세보다 적지 않았습니다. 주나라 문왕께서는 [수명이] 97세였으며, 무왕께서는 [수명이] 93세였으며, 목왕께서는 재위 100년이었습니다. 이때에는 불법 역시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불교를 섬겨서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명제 때에, 비로소 불법이 있었는데 명제의 재위는 겨우 18년일 뿐이었으며, 그 후에는 혼란과 멸망이서로 계속되어 국운이 길지 못했습니다. 송(宋)・제(齊)・양(梁)・진( 陳)・원위(元魏) 이후에는 점차 불교를 받드는 것이 점점 경건했지만, 그 [재위] 연대는 더욱 짧아졌습니다. 오직 양무제만은 재위가 48년이었는데, 전후로 세 번이나 몸을 바쳐 불도가 되어 종묘의 제사에 [살아 있는 동물을] 희생물로 쓰지 않고, 낮에 하루에 한 끼만 식사하고채소와 과일을 취했지만, 그 후에는 마침내 후경(侯景)에게 몰려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고 나라 역시 멸망했습니다. 불교를 신봉하고복을 구했지만 도리어 화를 당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면 불교는 받드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역시 알 수 있습니다.21)

 

    21) 韓愈, 「論佛骨表」, “臣某言 伏以佛者 夷狄之一法耳. 自後漢時流入中國 上古未嘗有也. 昔者黃帝 在位百年 年百一十歲 少昊在位八十年 年百歲 顓頊在位七十九年 年九十八歲 帝嚳在位七十年 年百五歲 帝堯在位九十八年 年百一十八歲 帝舜及禹 年皆百歲. 此時天下太平 百姓安樂壽考 然而中國未有佛也. 其後殷湯亦年百歲 湯孫太戊在位七十五年 武丁在位五十九年 書史不言其年壽所極 推其年數 蓋亦俱不減百歲. 周文王年九十七歲 武王年九十三歲 穆王在位百年. 此時佛法亦未入中國 非因事佛而致然也. 漢明帝時 始有佛法 明在位纔十八年耳. 其後亂亡相繼 運祚不長. 宋齊梁陳元魏已下 事佛漸謹 年代尤促. 惟梁武帝在位四十八年 前後三度捨身施佛 宗廟之祭 不用牲牢 晝日一食 止於菜果其後竟爲侯景所逼 餓死臺城 國亦尋滅. 事佛求福 乃更得禍 由此觀之 佛不足事 亦可知矣.” 

 

그에 따르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를 후한 명제 때라고서술한다.

중국은 황제에서 소호, 전욱, 제곡, 요순, 우왕에 이르기까지 천하가 태평하며 임금은 장수했으며 백성은 안락했다.

은나라의 탕왕, 태무, 무정, 그리고 주나라의 문왕, 무왕, 목왕은 100세정도의 장수를 한 왕이지만 불교를 믿어서 천수를 누린 것이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불교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유입 전후로나누어 말한다.

불교가 유입되면서 나라의 운명이 쇠퇴했으며, 불교를 섬기고 복을 구한다고 해도 몸을 해친다고 설명한다.

한유가 이 표문을 쓴 무렵에는 황제에서 백성까지도 부처의 사리를 신봉하고 복을 구하는 의식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한유는「 논불골표」를 통하여 헌종 또한 불교를 숭상해서 단명할 것이라는경고를 보냈는데, 헌종은 불교를 수용한 군왕들이 요절했다는그의 문장을 보면서 분개했다.

헌종은 한유를 처형하려고 했으나신하들이 그 처분을 만류하여 그를 조주사마(潮州司馬)로 좌천시켰다.

황제[헌종]가 말했다.

 

“한유가 나에게 불교를 지나치게 믿는다고말했으면 수용했을 것이요, 동한에서 불교를 받은 후에 천자들 모두요절했다고 하니, 어찌 망령된 말이 아니겠는가? 한유는 신하로서 그렇게 망령되게 굴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22)

 

한유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주자사사상표(潮州刺史謝上表)」 를 쓰면서 헌종에게 해명하는 글을 올린다.

 

신이 미치고 망령되고 도리에 어긋나고 어리석어 예절과 법도를몰라서 표를 올려 불골의 일을 말씀드린 것이 불경스러웠습니다.23)

 

    22) 新唐書 권176 「韓愈傳」, “帝曰: 「愈言我奉佛太過, 猶可容; 至謂東漢奉佛以後, 天子咸夭促, 言何乖刺邪? 愈, 人臣, 狂妄敢爾, 固不可赦.」”

   23) 韓愈, 「潮州刺史謝上表」, “臣以狂妄戇愚 不識禮度 上表陳佛骨事 言涉不敬.” 

 

그는 유배 기간에 그곳에서 승려 대전(大顚)과 교유하니,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부처를 신봉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하지만한유는 자신이 불교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서신으로 밝힌다.

맹간은 한유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언급하자 한유가 이를반박하고 불교를 비판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 서신은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로 불리는 편지이다.

그 내용은 한유의 불교관이 단지 철학적 사유체계를 지닌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한유가 근래에 불교를 약간 신봉한다고 전했으니, 이는 전하는 자의 망언입니다. 조주(潮州)에있을 때, 어떤 노승의 법명이 대전(大顚)이었는데 자못 총명하여 불교의도리를 알았습니다. 먼 곳에 같이 말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산사에서 성 주변에 이르게 하여 수십일을 머물렀습니다. 진실로 몸을 벗어나서 이치로서 스스로를 이겨서 사물에 심란하지 않았습니다. 함께이야기하면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컨대 자신의 마음속에 막히고얽매임이 없어서 [그를] 얻기 어렵다고 여겼으며 함께 왕래했습니다. 그후에 해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그거처에 나아갔습니다. 원주로 올 때, 의복을 주고 작별을 했으니 바로사람의 정이지, 그 불법을 숭상하고 신봉하여 복전의 이익을 구하려는것은 아닙니다.24)

 

한유는 노승과 대화를 나누며 유배지에서 교류는 했어도 불교인이 된 것이 아님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승려들과의 교분에대하여 민감한 태도를 보인다.

그가 불교인이 되었다는 세간에 알려진 말은 풍문에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때까지 추구해왔던 배불사상은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그는 불교 비판으로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사람으로서, 그의 배불은 당시의 사상계보다는 후대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고팔미는 한유가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한유는 배불론을전개했지만 그의 시문에는 많은 승려들과 교류한 내용이 보인다.

그 시문에는 원혜(元惠), 문창(文暢), 징관(澄觀), 계영(誡盈), 광선(廣宣), 고한(高閑), 대전(大顚), 영종(令縱), 무본(無本), 문약(文約), 영사(靈師), 영사(穎師), 수선사(秀禪師) 등의 인물이 있다.25)

 

    24) 韓愈, 「與孟尙書書」, “來示云 有人傳愈近少信奉釋氏 此傳之者妄也. 潮州時有一老僧 號大顛 頗聰明 識道理. 遠地無可與語者 故自山召至州郭 留十數日實能外形骸 以理自勝 不為事物侵亂. 與之語 雖不盡解 要自胸中無滯礙. 以為難得 因與來往. 及祭神至海上 遂造其廬. 及來袁州 留衣服為別 乃人之情 非崇信其法 求福田利益也.”

    25) 고팔미(2008), 318. 5

 

한유는 조주에서 만난 대전 이외에도 많은 승려와의 교류가 있었다.

한유는 불교인들과 교류하고 불교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은있더라도 그가 불교인이 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유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그가 사회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약했던 까닭에 그에 대하여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송대에이르러 유학이 황금시대를 맞게 되면서 불교에 대하여 배타적인추세가 점차로 무르익게 되었을 때, 유학자들의 배불의식은 모두 한유의 논지를 기초로 전개되었다.

불교도를 비롯하여 불교에마음을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배불론적 논지를 반박하게되었다.

이와 같이 당대에 형성되었던 배불론이 송대가 되어서야그에 대한 반박론이 나온 이유는 한유의 배불론이 송대가 되어서야비로소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6)

 

  26) 久保田量遠, 최준식 역(1990), 167-168. 한

 

한유가 송대에 이르러, 유학자와 불교인에게 다양한 영향을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반향은 배불과 호불에 집중된다.

그는 신유학자들에게 복고정신을 통하여 유학의 방향을 설정했으며, 송대이학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다.

그는 황실과 귀족이 지원하는국가 차원의 불교 행사에 「논불골표」를 써서 비판적 견지를 내세웠지만 좌천하게 된다.

그가 문장 속에 합리적 관점에서 배불론을전개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다양한 계층이 불교를 호의적으로수용한 상황에서, 그의 배불적 사고는 힘을 싣지 못했다.

이는 그의배불론에 대한 반박과 함께 호불적 사회의 고착화를 의미한다.

 

3) 경제적 관점

 

경제적 문제는 불교가 중국에 도입되어 발전하는 과정에서지적받은 내용이다.

조정은 조세를 걷어들어서 국가를 경영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근대 이전에 등장했던 국가는 농업 중심의 산업구조였기 때문에 노동력 확보는중요한 일이었다.

한유는 「원도」에서 백성을 기존의 네 부류에서 새로운 부류를 등장시켜 설명하고 있다.

 

옛날에 백성은 네 부류였으며, 오늘날 백성은 여섯이 되었다. 옛날의 가르침은 하나에 처했는데 지금의 가르침은 세 부류에 처한다. 농사짓는 집은 한 곳인데 곡식을 먹는 집은 여섯이며, 제조하는 집은 한 곳인데 그릇을 사용하는 집은 여섯이며, 장사하는 집은 한 곳인데 그것에 의지하는 집은 여섯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하지 않을 것이며또한 도둑질하지 않겠는가?27)

 

네 부류의 백성은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며, 지금의 백성은 불교와 도교에 종사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여섯 부류를의미한다. 불법이 중국에 들어와서 근래에 육백 년이 되었네. 백성들은 부역을 기피하고 선비들은 그윽한 선에 빠졌다네. 관리들은 그것을 제재하지 않고 분분하게 그것을 당연하게 듣고 있네. 밭 갈고 뽕을 기르는데날마다 일꾼을 잃고 조정과 관서에는 그때마다 현사가 없네.28)

 

    27) 韓愈, 「原道」, “古之爲民者四 今之爲民者六. 古之敎者處其一 今之敎者處其三. 農之家一 而食粟之家六 工之家一 而用器之家六 賈之家一 而資焉之家六. 奈之何民不窮且盜也.”

    28) 韓愈, 「送靈師」, “佛法入中國 爾來六百年. 齊民逃賦役 高士著幽禪. 官吏不之制 紛紛聽其然. 耕桑日失隸 朝署時遺賢.” 

 

한유는 이 시에서,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파생되는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구당서에는 당대에는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에 대한 비판도 나타난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경제적 관점에서 이뤄지는데, 덕종 재위 시기에 팽언(彭偃)은 경제적 관점에서 불교와 도교의 폐단을 설명한다.

 

신이 듣기로, 하늘이 모든 백성[烝人]을 내면 반드시 장차 직업이있게 하였으며, 놀고 먹는 짓은 왕(王)의 제도로 금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재주 있는 이는 작록을 받고, 불초한 이는 세금을 내는데, 이는 옛날의 변치 않는 법도입니다. 지금 천하의 승려와 도사는 경작하지않고 먹으며 베를 짜지 않고 옷을 입으며, 널리 위태롭고 험한 말을하여 우매한 백성을 미혹에 빠지게 합니다. 승려 한 사람의 입고 먹는것을 일 년으로 계산하면 약 삼만이 넘고 다섯 장정이 소출해도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승려 한 사람을 들어 천하를 계산하면 그 비용을알 수 있습니다.29)

 

이와 같은 내용은 무측천(武則天) 시대에 활약했던 적인걸(狄仁傑)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가람은 그 규모가 궁궐을 능가하여 호사스럽고 장엄함이지극하며, 그림의 색채는 공교함으로 다했습니다. 보주는 장식으로 소모되어 뛰어난 자재는 그 화려함으로 다했습니다.30)

 

위의 내용은 승려와 도사들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점과 사찰의 규모가 궁궐을 능가한 점을 지적하여 유학적 가치에서 벗어난일상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불교와 도교가 국가 경제를위협에 빠지게 하는 내용으로 한유는 「원도」에서 그 해결 방법을제시한다.

 

[불교와 도교를] 막지 않으면 [옛 성왕의 도는] 유행하지 않고, [그들을] 저지하지 않으면 [유가의 도는]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승려와 도사]을 일반인으로 만들고, 그 책들을 불사르고, 그 거처[사찰과 도관]를 민가로 만들고, 선왕의 도를 밝혀 그들을 인도하며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장애인, 병든 자를 봉양하면, 그 또한대체로 괜찮을 것이다.31)

 

   29) 舊唐書 권127 「彭偃傳」, “臣聞天生烝人, 必將有職, 遊行浮食, 王制所禁。故有才者受爵禄, 不肖者出租征, 此古之常道也。今天下僧道, 不耕而食, 不織而衣, 廣作危言險語, 以惑愚者。一僧衣食, 歲計約三萬有餘, 五丁所出, 不能致此。舉一僧以計天下, 其費可知.”

  30) 舊唐書 권89 「狄仁傑傳」, “今之伽藍, 制過宮闕, 窮奢極壯, 畫繢盡工, 寶珠殫於綴飾, 瓌材竭於輪奐.”

  31) 韓愈, 「原道」, “不塞不流 不止不行. 人其人 火其書 廬其居 明先王之道以道之 鰥寡孤獨廢疾者 有養也 其亦庶乎其可也.” 

 

이 내용은 그의 사후에 일어난 무종(武宗) 회창 5년(845)에 일어난 폐불의 필요성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중국불교 역사상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회창폐불(會昌廢佛)이다.

이때는 대대적으로 불교가 박해받던 시기지만 당시불교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실행했다고 할 수있다.

그 당시에 폐불이 일어난 배경에는 사원의 방만함으로 인한 경제문제가 있었다.

한유는 불교와 도교의 문제를 그 방대함과 부패를 지적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내용은 유학자가 아니더라도 국가경영을 하는 위정자에게는 심각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3. 배불론의 한계

 

1) 현실성 부족

 

한유가 불교를 비판하면서 지적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적 문제는 불교 전래 이후부터 당대까지 제기되어왔다.

그가 당대에 이처럼 문장으로 옮기게 된 것은 이미 그 문제들로 말미암아심각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남북조시대에 일어났던불교의 문제는 분열된 나라에서 나타난 반면에, 당대(唐代)의배불론은 통일된 나라에서 일어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만큼배불에 대한 접근성이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사회적혼란은 시대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10 년(751년), 당의 군대는 탈라스전투에서 사라센 군대에게 대패하여 중앙아시아 국가는 아라비아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당은중앙 군대의 힘이 부족해지면서 절도사의 병력에 의존하게 되어절도사의 위상은 높아지게 된다.

이런 국내외 정세에서 일어난 것이안사의 난이다.

이 난을 평정한 변방의 번진(藩鎭)이 내지로 확대하면서 그 세력이 할거하여 국정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리고 환관이 군사와 경제권을 장악하여 대종, 덕종 시기에 중앙정부의 위상은 실추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유가 유학의 가치를 드높이고 불교를 비판하려는 태도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당시 국가의문제는 불교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국가경영을 효율적으로 해내지 못한 중앙정부의 무력한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유의 생애로 살펴보면, 그는 안사의 난(755~763)과 황소의난(875~884) 사이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안사의 난 이후에 사회적 폐해가 생겨난 시기에 태어났다.

그 무렵, 당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중앙정부는 지방 절도사들에게 군대보유와 조세권을 허용할 정도로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미 번진을 지휘하는 절도사들의 지위는 사실상 독자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불교 때문에 국가가 쇠퇴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당시 사회상에서 벗어나 있다.

당대에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배불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교의 종교적 영향력에 문제가 있었더라도 불교 비판에는 한계를 보인다.

사실 유학이부흥하려면 황제는 물론 귀족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그 필요성을인식해야 하는데,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불교・도교에 비하여유학적 가치와 문화에 관심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한유는 배불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종교・사상적 비판이 아닌 불교와 도교가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현상에만 치중한다.

대중들은 사유계층이아닌 까닭에 사상에 담긴 “문장에 도를 싣는다(文以載道)”라는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2) 불교사상 결여

 

신당서 「한유편」에서는, “그래서 한유는 유학의 근본을 깊이탐구하여 탁월하게 수립하여 일가를 이뤘다고 말한다.

그 「원도」, 「원성」, 「사설」 등의 수십 편 모두는 심오하며 넓었다”32)라고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한유가 문장력과 유학에 대한 조예가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부정적 평가도 보인다. 노사광(勞思光)은 ‘한유 자신이 이론 건립에 있어서 뛰어나지 못했으며, 경적(經籍)의 훈고(訓詁)에도 정밀하지 못하여 사상계에영향을 끼칠 만한 이론을 세우지 못했다’33), ‘한유 자신은 문인으로서, 그의 이론을 문장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맹자를 존경했어도 맹자의 학설을 이해하지 못했고, 불교를 반대했어도 불교의 교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사상적 발전에 있어서 실제적 공헌은 없다’34)고 설명한다.

상반대정(常盤大定)은 ‘그의 사상은 후세의유학자에게도 변호 받지 못할 정도로 천박했지만, 유교를 위한결연한 태도는 매우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35)고 평가한다.

사실 한유가 배불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받더라도, 학문적 견해에 대해서는 후세에 인정받지 못했다.

주희는 한유의 사상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대체로 한공의 학문은 「원도」에 보인다. 비록 대용의 유행을 안것은 있지만 본연의 전체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 것이 있음이 의심된다. 또한 일용의 사이에서 역시 존양성찰하는 몸에서 체득하는 것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비록 자임한 것이 이루지 못하며 삼가지못하여 평생 마음 깊은 곳에 힘을 썼지만 결국 언어와 문자에서 떠나지않았다.36)

 

    32) 新唐書 권176 「韓愈傳」, “故愈深探本元, 卓然樹立, 成一家言。其原道, 原性, 師說等數十篇, 皆奧衍閎深.”

    33) 勞思光, 정인재 역(1987), 27; 염호택(2009), 92; 김경순(2013), 247.

    34) 위의 책, 31.

    35) 常盤大定(1966), 13.

    36) 朱熹, 韓文考異 권5, “蓋韓公之學, 見於原道者, 雖有以識夫大用之流行, 而於本能之全體, 則疑其有所未睹。且於日用之間, 亦未見其有以存養省察而體之於身也。是以雖其所以自任者, 不為不重, 而其平生用心深處終不離乎文字言語之上.” 常盤大定(1966), 123-124 재인용. 

 

위의 문장은 한유가 불교에 대한 사상적 한계가 있음을 평가한 내용이다.

사실 한유가 불교를 문화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에서비판했어도 사상적 관점에서 강하게 비판한 내용은 그의 작품에서보여지지 않는다.

그가 숭유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하더라도 유학의 문제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유학 의식에는 북송 시대에 활약했던 도학자들처럼 불교에 대한철학적 사유는 보이지 않는다.

당송 이후에도 유학자들이 불교에대해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승려와 불교인 사이에 사상적 논쟁으로 사상계에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중국에서 유학이 불교를 비판한 사례는 홍명집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시기에도 불교비판은 그 사상적 비판만큼이나 문화・사회적 요소가 강하다는사실을 알게 된다.

한유는 그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화엄종의 청량 징관(淸凉澄觀, 738∼839)37),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종의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덕산 선감(德山宣鑑, 782∼865),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를 비롯한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와의 사상적 논쟁은물론, 그들과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7) 한유가 교류했던 승려 가운데 징관이 있는데, 그가 화엄종의 청량국사(淸凉國師) 징관(澄觀)인지 동명이인인지에 대한 연구로는 노재성(1995) 의 「唐 中葉의 四人의 澄觀」이 있다. 그가 청량 징관과 사상적 교류를 했더라도, 그의 시문 「송승징관(送僧澄觀)」에서는 저자의 불교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한유와 이들 사이에는지리적 한계가 있어서 조우(遭遇)하지 못했더라도 다른 승려나학자와의 사상교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문인으로서의 그의 영향력으로 본다면, 불교학자들과의 사상교류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교류한 승려로는 유배 중에 만났거나 시문에 등장하는 인물정도로만 확인될 뿐이다.

한유는 불교에 대한 사상적 뒷받침이 없었으며 불교계에서는그러한 한유의 비판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불교계에서는 여러 유학자의 불교 비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필요는 없었다.

불교가 회창폐불 이후에 교종이 몰락하는 계기가되었더라도, 선종은 오히려 송대 사대부에게 사상과 수행체계로서영향을 주었다. 불교는 수당시대에 경전 번역으로 교학적 체계를이뤘으며, 당송시대에는 선종이 정착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유학이나 황로학과의 사상적 유사성에 의지할 필요는 없었다.

그이유는 불교가 배불적 분위기에서도 문화와 신앙 체계를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선언적 의미

 

한유의 유학 부흥은 이고(李翺, 774∼836)에게 이어져서 북송의유학자들에게 이어지는데, 전목(錢穆)은 송대 유학의 시작을 당대의 한유라고 말한다.38)

 

      38) 錢穆(2011), 1; 염호택(2009), 91; 김경순(2013), 265.

 

유학적 도통에서 살펴보면, 요・순・우・탕・문・무는 군왕이었으며, 공자・맹자는 평민 출신의 학자였으며, 한유와 이고는 학자이면서 관료였다.

이처럼 유학적 도통은 신분의 변화를 보인다.

당송에서 전개되는 도통은 유명한 문장가와학자에게만 전승되었으며, 세상으로부터 공인되지 않은 선언에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도통론으로 보기에는 합리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선종에서 불조(佛祖)의 관계를 보더라도 법맥의 계승자는 스승과 제자라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관계이며 선승과 수행자[구도자]라는 신분이다.

그리고 선종의 법맥은 승려와 승려로 전승되지만, 한유가 말하는 도통은 맹자 이후로 약 1000년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생긴다.

동시대에 살지 않았던 성군과 성인을 존경하고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란 전통을 잇는 것이지 도통을 잇는다고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상고주의, 복고주의의 선언이다.

물론, 도통의 선언적 의미에도 그 사상적 뿌리를 찾으려는 한유의 노력은 후세의 유학자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주었다.

이것은도통 전개의 정통성에 결함이 보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도통을 세움으로써 유학이 생명력을 잃었을 때마다, 그 시대에 맞는 사상의재편을 가능하게 했다. 한 사상의 맥이 끊기더라도, 그 근원을설정하면 사상을 부흥하는 데 있어서 방향이 설정되기 때문에 도통을 밝히는 것은 의미 있는 활약이다.

그의 도통론이 선언적 의미가 있더라도, 도통을 설정하고 그것을 따르면 사상체계는 다양하고 새로운 물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한유의 배불은 유학적 관점에 제한되고 있다.

유학자들이 배불을 전개했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그들의 배불을 지지하지않았다는 한계를 보인다.

불교에서는 선종의 법맥이 석가모니불로부터 시작하여 2대 마하가섭, 3대 아난으로부터 28대 달마까지이어지며, 달마가 중국에 이르러서 선종의 초조가 되어 그 전법을잇는다.

이들이 전개하는 사제(師弟) 사이의 전통은 명확하게그들이 활동했던 시기에 맞춰져 있다.

즉 현세적 계승이 가능하다.

논어와 『상서에 나오는 도통은 윤집기중, 윤집궐중이다.

논어에서 요순우 사이에 나타난 도통의 중심에는 중(中)이 있다.

한유는 「원도」에서 도와 도통론은 말하는데, 그 중심에는 도(道) 가 있다.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 행하면서 이치에 맞는 것을의라고 한다.

인의에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도라고 하며, 자신에게 충족하여 외부에 기대지 않는 것을 덕이라 한다.39)

 

  39) 韓愈, 「原道」, “博愛之謂仁 行而宜之之謂義 由是而之焉之謂道 足乎己 無待於外之謂德.” 

 

한유가 말하는 도의 실체는 인의로서 유학의 도를 말하며, 불교와 도교에서 말하는 도가 아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도통이란바로 인의를 잇는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란 무슨 도인가?

이것은 내가 말하는 도이며 노자와 부처의 도가 아니다.

요임금은 이것을 순임금에게 전했고, 순임금은 이것을 우왕에게 전했고, 우왕은 이것을 탕왕에게 전했고, 탕왕은 문왕・무왕・주공에게 전했고, 문왕・무왕・주공은 공자에게 전했고, 공자는 맹자에게 전했다.

맹자가 죽고서는 그것이 전해지지 않았다.40)

한유는 도통을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맹자”로설정하며, 성인의 도가 맹자에서 끊겼기 때문에 도통을 시작해야한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도통론은 도의 계승에서 비약을보인다.

요임금・순임금・우왕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승계하고있으며, 탕왕과 문왕 사이에는 시대의 차이가 있어도 군왕에서 군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도통에는 도의 흐름이 있는데 끊어진시대를 거쳤다면 도통의 의미는 사라진다.

한유의 관점에서 인의를 잇는 것이 도통이라면, 도통이 끊긴 시대에는 인의가 없었다는것인가!

이 도통론은 송대에 와서도 그 흐름이 일관성 없이 전개된다.

석개(石介)는 “하늘로부터 맹가・순경・양웅・왕통・한유가 공자의도를 다시 받았다”41)라고 설명한다.

남송의 주희는 요임금 이전에 복희, 신농, 황제를 천명의 계승을 도통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것이 복희, 신농, 황제, 요, 순이 하늘을 계승하여 표준을 세우고, 사도의 직분과 전악의 벼슬을 시설한 까닭이다.42)

 

   40) 韓愈, 「原道」, “斯道也 何道也 曰 斯吾所謂道也 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

   41) 石介, 石徂徠集 「上張兵部書」, “天受之孟軻, 苟卿, 揚雄, 王通, 韓愈. 孔子之道復.”

   42) 朱熹, 大學集註 「大學章句序」, “伏羲 神農 黃帝 堯 舜 所以繼天立極 而司徒之職 典樂之官所由設也.”

 

이 내용에서 주희는 요임금, 순임금 앞에 복희, 신농, 황제를 하늘의 도를 계승한 인물로 서술한다.

그는 「중용장구서」에서 군왕뿐만이 아니라 신하도 도통의 전승자로 설명하고 있다.

이때부터 이후로, 성인(聖人)과 성인(聖人)이 서로 계승(繼承)하니, 성탕(成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같은 임금과, 고요(皐陶), 이윤(伊尹), 부열(傅說), 주공(周公), 소공(召公) 같은 신하(臣下)들이, 모두 이로써 도통(道統)의 전승을 이었다.43)

 

   43) 朱熹, 中庸集註 「中庸章句序」, “自是以來 聖聖相承 若成湯文武之爲君 皐陶伊傅周召之爲臣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 

 

위의 내용에서는 성군을 보필했던 신하도 도통을 전승하는관계로 설정한다.

한유는 도통론으로 유학의 부흥을 이루고자 했지만, 유가의 도통은 송대에서 학자들마다 차별성을 보인다.

후대(後代)의 사람은 선대(先代)의 사람으로부터 도통을 잇는다.

선대의 인물은 물러준 바가 없으며, 그런 사실도 공표한 적도 없다면도의 정통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그 도통은 직계가 아닌 방계가될 수 있는 여지도 남기고 있다.

도의 계승이 적통과 정통이 되려면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서 이어질 때 가능하다.

한가문의 계보는 부모가 자식에게 전수되듯이 한 사상의 계보는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질 때 가능하다.

한유의 배불론은 그 의의의 중요성만큼이나 한계를 지니는데, 이 문제는 그 이후의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상승이란 현세를살아가는 성인과 성인,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전승되는 과정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격세・상고적 계승은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는 많은 문제를 수반한다.

한 시대에 계승되지 않는 전승은비약적이고 정통성을 얻기 어려운데, 도통의 관계가 연속성을지니기 위해서는 현세・선양적 관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유학이발달하는 데 있어서, 단지 선언이나 불연속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의도통이 연속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때, 그 사상은 다음 세대에도 전승되어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Ⅳ. 결론

 

한유는 당송팔대가의 첫 번째 인물로서, 안사의 난(755~763)과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난 사이에 활동했다.

그가 살던 시기는 불교・도교가 사상과 문화를 지배했다.

그는 유학의 정통성을회복하고자 했으며, 그 방법으로는 배불론과 도통론이 있다.

불교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종교가 된 이유는 그만큼 왕에서 서민에이르기까지 교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유의 배불론・도통론 전개와 그의 사상적 한계를 전개하고자 했다.

그는불교의 제반적 문제를 비판했으며 그 해결책을 유학의 부흥으로보았다.

그의 문장에는 불교에 대한 사상적 비판과 유불간의 사상적 쟁점은 보이지 않으며, 대중들에게 미치는 불교의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치우치고 있다.

이 부분은 안사의 난 이후에 혼란한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면을 보인다.

그는 사회 문제를 중앙정부가 국가를 경영하는 지배력이 약화된 것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오히려 당의 권위를 약화시켰던 황제와 관리, 절도사를 비판하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한유는 오히려 이들이 유학적 윤리에 반(反)하는 행동을 했기에 이들의 배유적(排儒的)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 유학적 대의명분에 더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배불론과 더불어 도통론으로 유학의 부흥을 추구했다.

유학이 생명력을 잃었을 때, 그가 도통을 통하여 유학의 부흥을하려고 했던 정신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의 도통론에는 연속성의부재가 보인다.

불교는 중국에 들어가면서 그 문화와 사상에 대하여 조화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성장한다.

불교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그 사상을비판하는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이는 불교에 대한 배불과 호불이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에 대하여 호의적 태도와그  교의와 의식의 저변확대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면서 그에 따른배불도 동반하게 된다.

불교・유교・도교 삼교의 교섭사에서 살펴보면, 불교 비판이 확대될수록 호교적 분위기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이러한 자리에서 갈등과 화합을 하면서 중국 내에서발전했다.

삼교 사이에는 변증법적 대안으로 유불도 교섭을 넘어 유불도 회통이 등장하게 된다.

불교는 유학・도교 사상에서 이해될 수 있게끔 해야 했으며 유학은 불교와 도교 사상을 수용하면서 그 시대에 맞는 사상으로 전개해야 했다.

이것은 불교라는 테제(these, 正)에 유학・도교라는 안티테제(anti-these, 反)를 거쳐서 신테제(syn-these, 合)로, 유학이라는 테제에 불교・도교라는안티테제에 대한 신테제로 전개된 것을 의미한다.

한유는 도통론을 통하여 유학의 부흥을 추구했다.

유학은 서한시대에 동중서의 건의로 국교가 되었으며, 한 시대를 지배했던사상이었다.

그러한 유학이 불교와 도교에 의하여 사상, 신앙, 문화에서 퇴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황제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다.

그원인이 불교와 도교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것은 그 내용 면에서비약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가 배불과 도통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접근으로서의 배불과 상고주의・복고주의적 도통이 후세에 송명이학이라는 유학의 부활을 이루게 한 점은 학문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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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한유(韓愈, 768∼824)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당대(唐代)에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한 문장가이다. 그는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던시대에 유학을 부흥시키고자 했는데,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배불론과 도통론이다. 그가 살던 시기는 불교・도교의 황금기였는데, 그만큼 사회적 문제도 발생한다. 사찰이 방대해지면서, 국가재정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국가는 노동력과 재정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른다. 이러한시대상에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유교를 부흥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한유는 배불론으로 유학 중흥의 중요성을 전개하고도통론으로 유교의 정통성을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도통론은 요・순・우, 문・무・주공의 현세・선양적 계승도 있지만, 우왕이 탕왕에게, 주공이 공자에게 도통을 계승하는 격세・상고적 계승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도통론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학자들마다 도통에 있는 인물에 대하여 이견을 보인다. 그는 불교에 대한 사상적 이해가 부족한 인물로평가받고 있으며, 그가 전개한 불교 비판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야기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그의 불교 비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윤리・역사 등에서 반론했지만 그가 도통을 중심으로 전개한 유학의 부흥은 선언적 의미가 강하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한계를보인다. 한유는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사이에 살았던 인물로서, 당대에나타난 국가적 문제들은 불교에 한정될 수 없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는불교・도교 이외에 안사의 난 이후의 사회적 혼란에도 원인이 있었는데, 불교에만 치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제어 : 불교, 유학, 한유, 배불론, 도통론

 

Abstract

A Reinterpretation on Han Yu’s an Opposition to Buddhism

Song, Seung Hoon (Sungkyunkwan Univ.)

Han Yu(韓愈) is a writer who caused the ancient writing movement as one of the eight writer of Tangsong. He tried to revive Confucianism by giving a presentation the way on the sentence in the days when Buddhism and Taoism were prevalent. So he was evaluated as a person who revived Neo-Confucianism and suggested the direction in which study abroad should proceed. In his time, Buddhism and Taoism had a golden age, but social problems also appeared. In particular, economic problems have affected national finances, temples have become more splendid than palaces, and the state has been unable to secure labor and finances. Han Yu explains the importance of Confucianism in the form of a sentence and explains the legitimacy of Confucianism. In fact, there was also a situation of the times that Buddhism's damage should be eliminated at the national level. The Tang Dynasty was already experiencing turbulence both inside and outside the country. However, there is a limit to his theory of Buddhism, and his criticism of Buddhism is an extension of the problem raised by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His criticism of Buddhism has been refuted in politics, economy, society, culture, ethics, and history, but his criticism of Buddhism and revival of Confucianism have a strong declarative meaning and show limitations in approaching social problems. The Tang Dynasty was already experiencing turbulence both inside and outside the country. Han Yu  was a person who lived between An Lushan’s Rebellion and Huangchao’s rebellion, and the problems that appeared at that time cannot be limited to Buddhism.

 

Key words : Buddhism, Confucianism, Han Yu, Buddhist criticism, the lineage of Tao

 

투고일 2024. 07. 14 | 심사기간 2024. 07. 27 - 08. 08 | 게재확정 2024. 08.

불교연구 제61집(2024) 

KCI_FI0031124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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