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문제의 지평
Ⅱ. 논궤의 지각·추리 논의
Ⅲ. 구사론의 지각·추리 논의
Ⅳ. 구사론의 성취자의 전승 논의
Ⅴ. 결어
Ⅰ. 문제의 지평
⏉논궤(論軌, Vādavidhi)⏊ 1)에 나타난 지각(pratyakṣa) 및 추 리(anumāna)의 정의가 ⏉아비달마구사론⏊(이하 ⏉구사론⏊)에서 지각 및 추리가 실제로 작동되는 양상과 불일치한다는 점을 본 고에서 정치하게 밝히고자 한다.
일찍이 프라우발너는 불교 내 외의 문건들로부터 ⏉논궤⏊ 등의 단편을 수집하며, 인의 3상 규 정2)이라든가 3지작법 창안 등 오랫동안 디그나가에게 귀속됐던 논리학적 성취가 사실 ‘바수반두’에 의해 선취되었다는 점을 밝 힌 바 있다. 3)
그러나 카츠라 쇼류가 잘 지적했듯 정작 바수반두 의 주저로 꼽히는 ⏉구사론⏊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3지냐 보다 오래된 형태의 5지냐는 차치하고서, 애초에 논증식을 활용하려 는 시도 자체가 발견되지 않는다. 4)
1) 해당 문건의 문헌 재구성 및 원어 명칭의 문제에 대해서는 Tucci(1929), Frauwallner(1957) 참조. (강성용(2003) 464에서 재인용) ⏉논식(論式, Vādavidhāna)⏊의 경우처럼 ⏉논궤⏊ 역시 공식적으로 한역(漢譯)이 된 적은 없다. 그렇기에 강성용은 Vādavidhi로 추정되는 산스크리트 원어를 그대 로 사용한다. 그러나 해당 문건은 동아시아 인명(因明) 전통에서 하나의 상식처 럼 취급된다. 본고에서는 이 2가지 경향성에 유의한 채 후자, 즉 동아시아 전통 의 명명법을 따른다. 유사한 방침으로는 김성철(2017) 참조.
2) 인(因, hetu), 즉 적법한 추론근거의 고유한 특징에 대한 최신의 논의는 손영산 (2022) 참조.
3) Frauwallner(1957) 참조. 해당 논점들에 대한 유익한 요약이자 논평은 Eltschinger(2014) 154-158 참조
. 4) 桂紹隆 外(2012) 14.
이 지점에서 카츠라 쇼류는 한 발을 더 내딛는다. 즉, 논증식 활용 여부 때문에 ⏉구사론⏊의 저자가 ⏉논궤⏊ 등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수반두는 추리에 의한 논증을 하나하나 논증식으로서 형식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
혹은 추리에 의한 논 증과 형식적인 토론·문답에 있어서의 논증의 본질적인 동일성 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양자를 총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적 논리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디그나가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AKBh에 전혀 논증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AKBh의 작자인 바수반두가 과연 ⏉論軌⏊·⏉論式⏊·⏉論心 ⏊ 등의 일련의 문답법·대론술에 관한 책의 저자와 동일한지 아 닌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5)
5) 桂紹隆(2002) 265-266. 유사한 내용이 같은 책 272-273에서도 발견된다. 해 당 인용문은 익명의 심사자께서 직접 한국어 번역까지 제공해 주시면서 친절히 알려주신 것이다. 깊은 존경과 더불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논궤⏊와 ⏉구사론⏊의 불일치는 보다 근본적이고 따라 서 심각한 지점에까지 퍼져있는 것 같다. 본고는 이 간극을 집 중적으로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카츠라 쇼루가 예고했던바 ⏉논궤⏊의 저자 귀속 문 제와 직결된다.
주지하다시피, 디그나가는 ⏉논궤⏊의 저자가 바 수반두일 리가 없거나 최소한 그의 핵심적 저작으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다소 혼란한 심경을 내비친 바 있다.
[앞서 행한 나 자신의 규정] 직후에 남들이 내놓은 지각[의 규 정]이 검토된다. ⏉논궤⏊는 스승의 것이 아니거나 중요치 않다고 확정[할 수 있다]. 다른 식으로 [특정] 부분들이 언급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는 검토한다. 실로 ⏉논궤⏊는 스승 바수반두의 것이 아니다. 혹은 스승의 것 이라도 저 [⏉논궤⏊]에 대해 중요치 않다고 확정[할 수 있다]. (혹은, 스승 [본인]조차도 저 [⏉논궤⏊]에 대해 중요치 않다고 확정[했을 것이다].) 어째서냐? 다른 식으로 [특정] 부분들이.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역시 바른 인식수단 등에 대 해 얼마간 검토해야 할 것이다. 6)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의 주석가 지넨드라붓 디는 ⏉논궤⏊에 초보적 오류가 보이기에 당대 세간에 떠돌던 바 수반두 저자설을 한낱 낭설로 단정하며, 설사 그의 저서라 하더 라도 미숙하던 시절의 졸작이라고 평가를 남기고 있다. 7)
이처럼 지넨드라붓디가 ⏉집량론⏊의 원래 구도를 유지하는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인명(因明) 전통에서는 후자의 해석, 즉 ⏉논궤⏊가 바수반두의 졸작이라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8)
이러한 상황에 서 실제 내용에서조차 ⏉논궤⏊와 ⏉구사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 가 규명된다면, ⏉논궤⏊의 실제 저자가 바수반두가 아니라고 보 는 편이 최선의 합리적인 결론일 수 있다. 나아가 해당 문제의 향방은 프라우발너가 일찍이 제기한바 이 른바 ‘바수반두2인설’을 둘러싼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시 킬 수도 있다. 9)
6) Steinkellner(2005) 5,16-20: tadanantaraṃ parapraṇītaṃ pratyakṣam parīkṣyate. na vādavidhir ācāryasyāsāro veti niścayaḥ | anyathāvayavaproktes tena asmābhiḥ parīkṣyate || 13 || na hi vādavidhir ācāryavasubandhor athavā+ +ācāryasya tatrāsāraniścayaḥ. katham. anyathāvayavaprokteḥ. tenāsmābhir api pramāṇādiṣu kiñcit parīkṣaṇīyam.
7) Steinkellner&Krasser&Lasic(2005) 86 및 Hattori(1968) 114-115 참조
8) 이를테면 문궤(文軌)는 ‘⏉논궤⏊가 바수반두의 저작이 아니거나 혹은 미숙한 시 절에 지은 것’이라는 디그나가의 말을 옮기면서도 슬쩍 ‘⏉논식⏊은 성숙한 이후 지은 것’이라는 진술을 부가함으로써 ⏉논궤⏊가 바수반두의 졸작이라는 것이 디 그나가의 진의인 것 같은 반사적 효과를 주고 있다. Hattori(1968) 114-115 참 조. 이러한 해석적 편향은 제법 유구한 것으로 보인다. 박대용(2024) 196-198 참조. 한편 문궤에 대한 포괄적 연구는 오진영(2022) 참조.
9) 해당 담론에 대한 말쑥한 정리로 이종철(2003), Franco(2017) 참조. 최근의 진 전된 논의로는 이규완(2022) 참조.
기존의 논의는 ⏉구사론⏊, ⏉유식이십론⏊, ⏉유식 삼십송⏊ 등을 저작한 바수반두(통칭 ‘the Kośakāra’)가 ⏉십지경 론⏊이나 ⏉대승장엄경론⏊, ⏉중변분별론⏊의 주석 부분 등을 저술 한 바수반두(통칭 ‘the Bhāṣyakāra’)와 동일 인물인지, 그리고 이를 어떤 기준에서 판정할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논궤⏊ 등 바수반두에게 귀속되는 인식·논리학적 저작들 은 해당 논의에서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궤⏊의 규정과 ⏉구사론⏊의 사용이 심각하게 불일치하는 것 같다는 필자의 추정이 옳다 판명난다면, 이제껏 바수반두에게 귀속되어 온 문헌군은 새로이 두 그룹으로 분화되 거나 심지어 세 그룹 이상으로까지 나누어져야 할 것이다. Ⅱ. ⏉논궤⏊의 지각·추리 논의 프라우발너가 ⏉집량론⏊, ⏉냐야바릇띠까(Nyāyavārttika)⏊ 등에 서 회수한 ⏉논궤⏊의 단편들 중에서 다음 2가지 개념 규정이 확 인된다. 10)
단편1: 지각은 그 대상으로부터 [발생한] 인식이다. (tato ’rthād vijñānaṃ pratyakṣam |)
단편2: 추리는 [추리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과] 분리불가능한 대상을 그 [분리불가능성11)]을 아는 자가 보는 것이다. (nāntarīyakārthadarśanaṃ tadvido ’numānam |) 12)
10) Frauwallner(1957) 105 참조. (강성용(2003) 465에서 재인용)
11) 필자는 단편2의 추리 정의에 등장하는 tat가 추리의 근거와 결론 사이에 성립 하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리킨다고 이해했다. 이를테면 연기(추리의 근거)를 관 측하고서 이 연기와 (비록 일방향적이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불(추리의 결 론)의 존재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추리라는 생각이, 다소 조악한 형태로, 저 ⏉ 논궤⏊에서 개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tat가 지시하는 것과 관련해 문법적, 철학적 논점이 여럿 도사리고 있으리라 추측되나 과문하여 잘 알지 못하겠다.
12) 원문은 Frauwallner(1933) 303 참조.
이하에서 지각과 추리의 규정 각각을 검토하기에 앞서 다음 2 가지 사항에 먼저 주목해보고 싶다.
하나는 이 ⏉논궤⏊ 단편들에 성취자의 전승(āptāgama) 13)이라는 제3의 항목이 누락되어 있 다는 점이다.
디그나가 이전의 불교철학 전통에서 지각과 추리 외에 성취자의 전승 또한 엄연한 바른 인식수단으로 인정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누락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물론 우리에게 주 어진 것이 다른 문헌들에서 회수된 단편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궤⏊ 자체에서 성취자의 전승 항목이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 면 단지 우리가 접근하는 단편들 리스트에서만 빠진 것인지를 확정할 수가 없다. 14)
13) ‘성취자’로 옮긴 āpta는 남들보다 먼저 진리에 도달하였기에 믿고 의지할만한 (trustworthy) 자를 뜻한다. 이를 표현하는 최선의 문자적 번역은 ⏉맹자⏊에서 유 래한 ‘선지자(先知者)’ 혹은 ‘선각자(先覺者)’ 정도겠지만, 이 단어들은 이미 기 독교적인 색채가 짙어져 버렸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인지 āptāgama를 그냥 ‘전 승’으로 옮기는 시도 또한 왕왕 발견된다. 필자는 ‘성취자’가 그나마 차선이라 판 단하여 택하였다.
14) 바로 이런 점에서 바수반두가 디그나가에 앞서 성취자의 전승을 배제하고 지 각과 추리 2가지만을 바른 인식수단의 구성요소로 삼았다는 프라우발너의 주장 이 성급한 것이라는 엘칭어의 진단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엘칭어 자신 도 정작 ⏉논궤⏊의 저자 귀속성 문제 자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 하다. Eltschinger(2010) 48-49 79번 각주 참조. 남아있는 단편들만 가지고 추정하는 것이기에 여전히 조심스러우나 필자는 애 초에 ⏉논궤⏊ 자체에 성취자의 전승 항목이 없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프라우발너 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논궤⏊의 저자를 ⏉구사론⏊의 저자와 동일인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디그나가의 선취로 바수반두를 놓는 프라우발너의 입장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여기서 지각과 추리가 대조적으로 정의된다는 점 이다.
즉, 지각은 지각하고자 하는 대상에서 직접 발원하는 것인 반면에 추리는 추리하고자 하는 대상을, 당연하게도, 직접 인식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추리는 여하간 ‘보는 것(darśana)’ 이다. 추리를 통해 알고자 하는 대상과 결부된 다른 대상을 보 는 것이지만 말이다.
추리가 결국 ‘보는 것’이라는 이 언사는 다 소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15) , 지각이 직접적인 것에 반해 추리과 는 간접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적인 기대는 크게 위협받지 않는 것 같다.
15)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보는 것’이라는 표현을 모종의 비유적 언사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추리로 보는 것은 지각으로 보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추리를 어쨌든 ‘보는 것’으로 규정하는 이 이해방식은 다소 특이하며 따 라서 별도의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발상 자체는 ⏉해심밀경⏊ 「여래 성소작사품」에서 *upapattisādhanayukti의 다섯 가지 청정한 특성 중 두 번째 항 목과 유관해 보인다. 서정주(2019) 24-39 참조. 16) 권오민에 따르면 이점에 있어 슈릴라따가 디그나가의 선취자이다. 권오민 (2010) 참조.
이제 본격적으로 저 두 개념을 검토해보자.
우선 ⏉논궤⏊에 나 타난 지각의 정의는 매우 단순한 외양을 지닌다.
해당 정의의 유개념은 ‘인식(vijñāna)’이고 종차는 ‘문제의 대상에서 기인함’ 단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이 정의는 지각이 지각 아닌 것과 어 떠한 차이를 가지는지를 단순히 보여주기만 하는 기술적 (descriptive)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보다는 유사지각과 구분되 는 지각 나름의 규정적(prescriptive) 요건이 담겨져 있는 것으 로 보인다. 지각이 지각의 대상에서 직접 발원한다는 설정은 그 렇지 않은 경우, 이를테면 신기루처럼 객관적으로 주어진 대상 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유사지각의 경우를 개념 차원에서 배제하 기 때문이다.
⏉논궤⏊에서 지각 규정은 추리와 대조될 뿐만 아니 라 유사지각과도 구분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각이 해당 대상으로부터 직접 온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인식대상(ālambana)의 역할을
1)인식상의 이 미지의 원본에 해당하고
2)해당 인식의 산출에 인과적으로 기여 하는 것으로
선명히 구분하는 디그나가의 프레임16)에 이미 갇 혀버린 우리들로서는 ⏉논궤⏊의 정의가 미흡하게 느껴질 수도 있 다.
여기에 바수반두 때까지 뜨겁게 논의되던 극미 관련 담론까 지 고려하자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것이다. 17)
⏉집량론⏊에서 이 뤄지는 디그나가의 비판적 검토는 실로 저 2가지 참조점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채 이뤄지고 있다. 18)
그러나 ⏉논궤⏊의 원 래 의도에 집중하자면 후대의 도식은 잠시 괄호를 치는 편도 괜 찮을 것이다.
관련해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논궤⏊의 정의가 일견 감각적 인 식을 모델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각적 인식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단 ‘그 대상으로부터 [발생 한](tato ’rthād)’이란 언명은 분명 감각 경험을 상정할 때 매우 잘 이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실로 파란색에 대한 나의 감각 경험은 모종의 파란 대상에서 오는 것 같다.
그러나 비감각적 지각이라는 것이 만약 있을 수 있다면, ⏉논궤⏊에서 그리는 지각 의 외연을 미리 나서서 좁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논궤 ⏊의 비판자 디그나가 스스로가 비감각적 지각의 존재를 인정했 고19) 그에 앞서 상가바드라 또한 그러했다. 20)
어찌 되었든 ⏉집 량론⏊에서 명시적으로 비판되는 다른 학파들의 지각 규정에는 모두 감각기관이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유독 ⏉논궤⏊의 경 우는 그렇지가 않다. 21)
17) 특히 아비달마의 극미 담론과 연계해 ⏉집량론⏊ 해당 대목을 독해한 사례로는 Chu(2006) 참조.
18) Steinkellner(2005) 5-7 참조.
19) Steinkellner(2005) 3 참조.
20) 상가바드라에 따르면, 지각은 1)감각기관에 의존적인 것, 2)수용적인 것, 3)판 단적인 것 이렇게 3가지 종류로 구분된다.(現量有三。依根。領納。覺了現量。) T1562_374c02-375a04 참조. 상가바드라의 이 독특한 지각 분류 및 그 철학적 함축에 대해서는 별도의 공간에서 상론하도록 하겠다.
21) Steinkellner(2005) 7, 9, 14, 19 참조.
혹자는 디그나가의 ⏉논궤⏊ 비판이 감각적 인식의 경우를 일반 적인 것인양 상정한다는 점을 들어 ⏉논궤⏊의 지각 규정 자체도 감각적 인식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저 [인식대상을 인식이 띠고 있는 모습인지 아니면 그 발생원 인인지 판별하는 논의]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냐면, 만약 저 [대상]들에 대해 그 모습대로 현현하는 것으로서 인식이 발생 한다면, 그처럼 인식대상이 [극미들이] 적집된 것이기 때문에 5가지 인식 집합의 인식대상은 단지 세속적 존재(saṃvṛtisat) 일 뿐이다. … 5가지 인식의 대상영역은 그것의 공통적 성격 (sāmānyarūpa)에 의해 표명되는 것이 자체적 성격(svarūpa)에 의해 표명되는 것이 아니다. 색(rūpa) 등이라는 공통적 성격에 의해 표명해야 한다. 따라서 5가지 인식의 대상영역은 [통상적 인 관행처럼 ‘색’ 등이라고] 표명될 수 없다. 이상이 ⏉논궤⏊의 [설명에 대한 검토이다]. 22)
여기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5가지 인식’은 색·성·향·미· 촉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디그나가 가 보기에 ⏉논궤⏊의 지각 규정은 감각적 인식을 모델로 하고 있 는 셈이다.
그러나 디그나가의 저 비판은 좀 더 제한된 범위에 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문제가 되는 지각이 감각적 지각일 경 우에 ⏉논궤⏊의 규정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목만 가지고 ⏉논궤⏊에서 정의되고 있는 지각이 외연상 감각적 지각에 한정되어 있다는 주장의 증거로 삼는 것은 비약이 심하다 할 수 있다. 23)
22) Steinkellner(2005) 6-7: tataḥ kim iti cet | yadi yathābhāsaṃ teṣu jñānam utpadyate | tathā sañcitālambanatvāt pañcānāṃ vijñānakāyānāṃ saṃvṛtisad evālambanam iti | … pañcānāṃ vijñānānāṃ viṣayas tatsāmānyarūpeṇa vyapadiśyate | na tu svarūpeṇa vyapadiśyate | sāmānyarūpeṇa rūpāditvena vyapadiśyeta | tasmāt pañcānāṃ vijñānānāṃ viṣayo na śakyo vyapadeṣṭum iti vādavidheḥ |
23) 심지어 디그나가의 저 비판들이 바수반두 혹은 ⏉논궤⏊의 저자에게 유효할지조 차 의문이다.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세속적 존재가 되는 게 어떤 의미에서 유효 한 타격이 되는 것인지 그 자체로는 불분명하다. 나아가 ‘색’ 등의 명명 문제는 디그나가 본인이 재정의한 자상(svalakṣaṇa)(=자체적 성격 svarūpa) 및 공상 (sāmānyalakṣaṇa)(=공통적 성격 sāmānyarūpa)의 대별에 근거한 것이므로 일종 의 선결문제 미해결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의 한계 문제에 대한 바수반두의 절충적 입장에 대해서는 박창환(2010) 참조. 한편 디그 나가에 의한 자상 및 공상의 재정의에 대해서는 Katsura(2011), 이길산(2015) 참조
⏉논궤⏊의 지각 정의에서 주목할 점이 2가지가 추가로 남겨져 있다.
우선 지각이 대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과 ‘내 사랑 그대여’라 용례에서처럼 ‘사랑’이라 는 표현은 작용과 대상 모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지각의 경우 도 마찬가지여서, 슈미트하우젠이 지적했듯, 지각은 작용적 측 면 말고 지각의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이해된다. 24)
그러 나 여기 ⏉논궤⏊에서는 문제의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 내지 수단 에 한정되는 것 같다.
다음으로 ‘그 대상으로부터 [발생한]’이라 는 언명이 시간적 추이를 꼭 전제하지 않기에 문제의 인식대상 이 인식 자체와 동시적일 수 있다.
따라서 ⏉논궤⏊의 정의는 대 상의 존재가 그 대상을 인지하는 지각보다 한 찰나 이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소위 ‘경량부적 인식 모델’만이 아니라 양자가 동시적으로 주어졌다고 보는 ‘설일체유부적 인식 모델’에도 적 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25)
24) Schmithausen(1972) 참조.
25) 따라서 ⏉논궤⏊의 지각 정의가 외계실재론을 상정하기에, 저자가 바수반두 본인 이 맞다면, 그가 유가행파로 전향하기 이전에 해당 문건을 작성했어야 한다는 발 상은 성급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Chu(2006) 참조
지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추리 역시 규정적 면모를 내보인 다.
⏉논궤⏊의 규정에 따르면, 추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추리의 근거와 추리의 결과 사이에 성립하는 모종의 필연적 관계가 요 청되고 나아가 추리의 당사자가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 다.
이와 같은 설정은 이를테면 혈액형별 성격 유형 운운하는 것처럼 잘못된 연관관계에 근거한 잘못된 추리나 혹은 적법한
과정 내지 절차 없이 짐작해 적당히 때려 맞추는 것과 같은 유 사추리의 경우를 개념 차원에서 차단하는 효과를 준다. 이렇듯, 추리 역시 지각과 대조되어 정의될 뿐만이 아니라 유사추리와의 대별점 또한 드러내는 방식으로 규정되는 것 같다.
지각의 종차가 단지 ‘그 대상으로부터 [발생한]’이란 단일한 항목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추리의 종차는 ‘분리불가능성의 성 립’ 및 ‘해당 분리불가능성의 인지’라는 2가지 차원으로 구성되 어 있기 때문에 경우의 수가 다소 복잡해진다.
관련해 한 가지 특히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인식·논리학 전통에서 애용되는 불 과 연기의 경우를 보자.
이 사례에서 연기의 존재는 불의 존재 를 함축한다.
그리고 양자의 수반 관계를 가설적이나마 아는 자 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앞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보 고서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의 존재를 추리하는 것은 매 우 만족스럽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추리의 대상이 본성상 감각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아뜨만의 존재를 추리하 고자 하는 경우 추리의 근거 x와 아뜨만의 존재 사이의 분리불 가능성은 본성상 도무지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논궤⏊의 정식 화에 따를 경우 아뜨만의 존재 증명 같은 것은 기껏해야 유사추 리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인도철학사라는 일반적인 지평에서 볼 때 아뜨만의 존재 증명 이 유사추리로 분류되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여하간 실체적 자아가 없다는 철학적 무아론을 견고하게 고수하는 불교도로서는 아뜨만의 존재 증명이 유사추리로 분류 되는 것 자체는 내심 반길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러 한 ⏉논궤⏊식의 추리 이해에 일관되게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 다.
저 추리 모델을 받아들이자면, 12처 내지 18계의 핵심 구성 요소들인 감각능력(indriya, 根) 전반이 의문에 부쳐지기 때문이 다.
왜냐하면 감각능력은 정의상 감각될 수 없고, 또 ⏉논궤⏊의 규정에 따라 감각 가능한 것들만 추리될 수 있다면, 감각능력은 지각과 추리라는 바른 인식수단의 범위 너머에 있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Ⅲ. ⏉구사론⏊의 지각·추리 논의
이상에서 살펴본 ⏉논궤⏊의 지각 및 추리의 정의는 같은 저자 에게 귀속된다는 ⏉구사론⏊ 「업품」의 다음 용례와 정확히 일치하 는 것 같지는 않다.
[소위 견·문·각·지에서] 또 무엇이 보여진 것(dṛṣṭa)이고 또 무 엇이 [들려진 것(śruta)·생각된 것(mata)·]인식된 것(vijñāta) 인가? 먼저 어떤 이들은 말한다
. 5가지 감각기관들을 통해 지 각된 것(pratyakṣa)이 ‘보여진 것’이다.
남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āgamita)이 ‘들려진 것’이다. 도리(yukti)에 따른 추리에 따 라 [옳게] 여긴 것(rucita)이 ‘생각된 것’이다.
의지각 (manaḥpratyakṣa)의 수습으로 세워진, 내적으로 경험될 것 (pratyātmavedya)이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5가지 대상 영역들이 각각 ‘보여진다’ 혹은 ‘들려진다·생각된다·인식된다’라 고 간주되고서 언설된다. 26)
26) Pradhan(1967) 246: kiṃ punar dṛṣṭam | kiṃ ca yāvad vijñātam | kecit tāvad āhuḥ | yat pañcabhir indriyaiḥ pratyakṣaṃ tad dṛṣṭam | yat parata āgamitaṃ tac śrutam | yad yuktyanumānato rucitaṃ tan matam | yan manaḥpratyakṣabhāvanādhiṣṭhitaṃ pratyātmavedyaṃ tad vijñātam iti | ete ca pañca viṣayāḥ pratyekaṃ dṛṣṭā iti vā kṛtvā vyavahriyante, śrutā matā vijñātā iti vā | 쁘라단은 밑줄 친 부분을 bhāvena로 읽지만 舟橋一哉(1987) 356 5번 각주에 따라 교정함.
여기서는 지각이, 감각적인 것이든 비감각적인 것이든 간에, 대상에 근거한다는 점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한편 추리는 분리불가능성에 근거하는 대신 다소 막연히 도리(yukti) 27)에 입각한 것으로 그려진다.
나아가 양자의 대상이 5가지 대상영역 으로 한정된 점 역시 특징적이다. 물론 이러한 불일치는 사소한 것 혹은 해명될 수 있는 것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차이점이 ⏉구사론⏊ 「파아품」의 도입부에 서 발견된다. 28)
27) 해당 용어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Eltschinger(2014) 193 이하 참조.
28) 주지하다시피 ⏉구사론⏊의 대미를 장식하는 「파아품」이 ‘게송 집필 단계’에는 없었으나 ‘주석 집필 단계’에 부과되었을 가능성이 일찍이 체르바스키가 제기한 이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종철(2003) 284 이하 참조. 익명의 심사자께서 이상의 사정이 본고의 논지 전개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과 관련해 별도의 해명을 요청해 주셨다. 본고에서 집중하고 있는 지각·추리·성취자의 전승 등 바른 인식 수단에 한정하자면, 「파아품」 이전의 ⏉구사론⏊과 「파아품」 사이에 유의미한 단 절이 관측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자 모두를 아울러 ‘⏉구사론⏊’이라는 단일한 타 이틀 아래에 취읍하더라도 당장의 논의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보인다.
‘단지 [오]온의 상속(santāna)에 대해 ‘아뜨만’이라는 표현 (abhidhāna)이 쓰이는 것이지 다른 표현대상(abhidheya)에 대 해서는 아니다’라는 이것이 또 어떻게 알려지는가? 지각과 추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법들이 존재할 경우 장애 가 없으면 그것들에 대한 지각(pratyakṣa), 곧 인식(upalabdhi) 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가지 대상영역들 및 의(manas) 에 대해 [지각이 있다]. 그리고 [어떤 법들이 존재할 경우 그 것들에 대한] 추리가 있다.
예컨대 5가지 감각능력들에 대해 [추리가 있다].
이와 관련해 다음이 추리이다.
하나의 원인이 있더라도 다른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음이 경험되고(dṛṣṭa), 나아가 [다른 원인도] 있으면 [결과도] 있음[이 경험되니], 이 를테면 싹의 경우와 같다. 그래서 대상영역이 나타나 있는 상 태(ābhāsaprāpta) 29)이고 또 주의력(manaskāra)이 원인[으로 가능할] 경우, 맹인·농인들에게 대상영역의 파악이 없음이 경 험되고 또 맹인·농인이 아닌 자들에게 [대상영역의 파악이] 있 음이 [경험된다]. 따라서 여기서도 별도의 원인이 [맹인·농인 들에게는] 없다는 것 및 [나머지에게는] 있다는 것이 해명된 다.
그리고 그 [대상영역의 파악]의 별도의 원인이 감각능력이 라는 것이 그 추리이다. 그리고 아뜨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지각이나 추리가] 없다. 따라서 아뜨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30)
29) 켈너·테이버는 해당 표현을 ‘조명빛 아래에 놓인(paced in the light)’으로 이해 한다. Kellner&Taber(2014) 720 참조. 이는 색깔 등을 인지하는 데에 대상 외에도 적절한 조명, 시각기관, 주의력이 요 구된다는 아비달마 일반의 이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ābhāsa를 ‘빛’으로 이 해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물론 ⏉구사론⏊ 「파아품」 내에서도 발견된다. Lee(2005) 9: evan tarhi rūpam apy ālokacakṣurm{ā}naskārebhyo (’)nyan na vaktavyaṃ | (만약 그러하다면, 색 역시 조명, 눈, 주의력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켈너·테이버의 해석은 동일한 조건이 농인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을 간과하 였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문제의 ābhāsa를 보다 추상적인 의미의 ‘나타남’으로 이해했다. 이는 야쇼미뜨라의 주석 및 이종철의 번역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Wogihara(1936) 698: vidyamāna eva saṃmukhīprāpte viṣaye rūpādike manaskāre ca tajje kāraṇe (실재하는 색 등의 대상영역이 현전한 상태이고 주의력 이 그것의 발생에 대한 원인일 경우) 이종철(2015) 376 참조.
30) Lee(2005) 4: katham punar idaṃ gamyate | skandhasantāna evedam ātmābhidhānam varttate nānyasminn abhidheya iti <|> pratyakṣānumānābhāvāt | ye hi dharmmāḥ santi | teṣāṃ pratyakṣam upalabdhir bhavaty asaty antarāye | tadyathā ṣaṇṇām viṣayā{nā}ṇāṃ manasaś ca | anumānaṃ ca | ta{tha}dyathā pañcānām indriyāṇāṃ | tatredam anumānaṃ | sati {sa}kāraṇe kāraṇāntarasyābhāve kāryasyābhāvo dṛṣṭo bhāve ca punar bhāvas tadyathāṃkurasya | saty eva cābhāsaprāpte viṣaye manaskāre ca kāraṇe viṣayagrahaṇasyābhāvo dṛṣṭaḥ punaś ca bhāvo (’ )ndhabadhirādīnām andhābadhirādīnāṃ ca | atas tatrāpi karaṇāntarasyābhāvo bhāvaś ca niścīyate | yac ca tatkāraṇāntaram tad indriyam ity etad anumānaṃ | na caivam ātmano (’)stīti {|} nāsty ātmā | 해당 대목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이길산(2022) 29-31을 참조하였다
여기서도 ‘지각’이라는 표현으로 대상적 측면이 아니라 작용적 측면이 지칭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감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 는다.
‘6가지 대상영역들’ 중 마지막 범주 ‘법(dharma)’은 비감 각적인 것들이 주를 이루고 또 ‘의(manas)’ 역시 표준적 이해에 따라 전찰나의 인식(vijñāna)으로 이해되는 한 단적으로 비감각 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심소들 역시 저 법의 범주에 포 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논의의 구도 안에 들어올 수 있다. 31)
31) 그러나 ⏉논궤⏊의 구도에서는, 적어도 주어진 단편들만 가지고서는, 심소의 인 식 문제를 합리적으로 배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 편 ⏉논궤⏊의 지각 정의의 특징인 대상의 인과적 기여는 앞서 「 업품」의 용례보다 강조되어 있다.
바로 여기 「파아품」의 용례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바로 추리 (anumāna)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논궤⏊의 추 리 정의 “[추리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과] 분리불가능한 대상을 그 [분리불가능성]을 아는 자가 보는 것”에 따를 경우, 문제의 분리불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고 따라서 ‘아뜨만의 추리’ 든 ‘감각능력의 추리’든 모두 어불성설이라는 점을 보였다.
이에 반해 여기 「파아품」에서 추리는 마치 이 문제를 응답하려는 듯 제시되고 있다.
즉, ‘주어진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 는 원인을 소거적인 방식으로 확정하는 것’이 추리라고 제시되 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궤⏊에서 정의된’ 추리는 프라우발 너의 지적처럼 디그나가의 선취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파아 품」에서 사용되고 있는’ 추리는, 현대논리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오히려 최선의 설명(best explanation) 내지 귀추(abducti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논궤⏊에서는 추리의 대상이 원칙적으로 지각의 대상이 될 수 도 있는 것이었지만, ⏉구사론⏊ 「파아품」에서 추리의 대상은 본 성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름 최선의 추정을 해낸 결과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아니 바로 이점 때문에, 새로 운 추리 시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원 칙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실제로 통상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5가지 감각적 능력을 ⏉유식이십론⏊에서는 비물질적인 종 자(bīja)로 재규정해 버린다. 32)
32) Silk(2018) 67 이하 참조.
물론 이 경우에도 모종의 원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파아품」의 요구 자체는 여전 히 지켜진 셈이다.
그러나 추리의 결과는 엄연히 다르고, 그런 한에서 추리 자체의 성격이 ⏉논궤⏊에서와 판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논궤⏊의 추리는 ‘정의상’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 자체 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Ⅳ. ⏉구사론⏊의 성취자의 전승 논의
⏉구사론⏊의 지각·추리 이해에는 회의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추리가 건전성은 고사하고 타 당성조차 보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3)
한편 지각으로 판정되 리라 생각되는 사안들이 사실 추리로 결정되어야 한다면 문제의 어둠이 더욱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 추리가 관 장해야 하는 영역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어지기 때 문이다.
실제로 바수반두는 ⏉구사론⏊에서 지각을 통해 소멸의 원인을 특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원인이 있는지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하고, ⏉유식이십론⏊에서는 인식 외부의 존재를 판정 하는 문제에 지각이 껴들 여지가 없다고 전제한다. 34)
33) 일반적으로 ‘논증의 타당성’이란 전제들이 참이라고 가정할 경우 결론의 참이 논리적으로 보장되는 것이고 ‘논증의 건전성’이란 상기 타당성 조건에 더해 전제 들이 실제로 참인 경우를 의미한다.
34) 통상 지각을 통해 판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던 영역들이 실상 (그나마) 추 리로 접근 가능하리다는 바수반두의 어두운 전망 내지 진단에 대해서는 이길산 (2024) 47-50 참조.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둘 경우 바수반두의 다음 발언은 으레 있을 법한 촌평이라고 간주해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심·심소들의 차이는 실로 미세하다. [저 심·심소들이] 흐름 속 에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 [차이]가 판별되기 어려운데 하물며 찰나적일 때랴? 물질적이긴 해도 다양한 맛을 지닌 모종의 약 초들의 경우에는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하여 맛의 차이가 확정 되기 어려운데 하물며 비물질적인 법들을 인식(buddhi)를 통해 포착하는 것이랴? 35)
찰나적으로 파악될 수 있고 또 물질적인 감각기관과 비교된다 는 점에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심·심소들의 차이를 알아내는 일 은 아무래도 비감각적인 지각이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심·심소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주로 내면적 집중 및 성찰을 통 해 해탈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는 불교 전통에서 기본적인 출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 출발점조차 엄밀히 말해 지각을 통해 확보될 수 없다는 것이다. 36)
그래서 야쇼미뜨라는 “따라서 성취자(āpta)에 의해 교설되었 기(upadiṣṭa)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이 저 [심·심소]들에 대해 이 해되어야 한다는 의도” 37)라고 주석을 덧붙인 것 같다.
35) Pradhan(1967) 54-55: sūkṣmo hi cittacaittānāṃ viśeṣaḥ | sa eva duḥparicchedaḥ pravāheṣv api tāvat kiṃ punaḥ kṣaṇeṣu | rūpiṇīnām api tāvad oṣadhīnāṃ bahurasānāṃ kāsaṃ cid indriyagrāhyā rasaviśeṣā duravadhārā bhavanti kiṃ punar ye dharmā arūpiṇo buddhigrāhyāḥ | 해당 대목에 대해 대체로 동일하나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평가로는 김성 철(2019) 63-67 참조.
36) 이에 반해 상가바드라는 비교적 긍정적인 전망을 한다. 그의 경우 추리가 주도 적인 역할을 하리라 보인다. T1562_390b20-21: 心所相用。極難辯析。唯審叡 覺。能分別知。(심소의 특징·작용은 변별·분석하기가 매우 어려워 오직 예리한 (*vicakṣaṇa) 인식(*buddhi)을 통해서만 분별적으로 알 수 있다.)
37) Wogihara(1936) 128: tasmād āptopadiṣṭā iti kṛtvā tathaiva te pratipattavyā ity abhiprāyaḥ
야쇼미뜨 라에 따르면, 심·심소들의 차이를 확정지어 주는 것은 지각이 아 니라 성취자의 교설(āptopadeśa), 즉 전승이다. 문제는 이 유형 의 바른 인식수단 역시 생각하는 것보다 까다롭다는 데에 있다.
⏉논궤⏊의 경우 이 3번째 유형의 바른 인식수단에 대해 현재 알 려진 바가 전혀 없는 것과 달리38) ⏉구사론⏊에서는 제법 상세하 고 또 메타적인 논의를 선보이고 있다.
38) 본고 14번 각주 참조.
이 역시 「파아품」에서 발견된다.
[바수반두:]
확실히 저들은 이와 같은 텍스트(grantha)를 바른 인식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독자부:]
그것이 우리들의 경전모음(nikāya)에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수반두:]
그러면 그들의 경전모음만이 바른 인식수단인가 아니면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이 [바른 인식수단]인가? 만약 [그들의] 경전모음만이 바른 인식수단이라면 그 경우 그 들에게 붓다는 스승이 아니고 또 그들은 불제자가 아닌 것이 다. 만약 붓다의 말씀이 바른 인식수단이라면, 이 텍스트는 왜 바른 인식수단이 아닌가?
[독자부:]
그것이 붓다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기(kila) 때문이 다.
[바수반두:]
이유가 무엇인가?
[독자부:]
우리들의 경전모음에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수반두:] 그
것은 부당한(anyāya) 처사이다.
[독자부:]
여기에 무슨 부당함이 있는가?
[바수반두:]
실로 어떤 텍스트가 [너희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경전모음들에서 암송되고 또 [다른] 경전 혹은 법성(dharmatā) 과 반대되지 않는데, 우리들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붓다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폭거일 뿐이다. 39
여기서 공격대상이 되고 있는 독자부가 저 가상의 대화에 나 타난 외골수 같은 입장을 실제로 견지했었는지 여부는 자료 부 족으로 인해 현재로서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그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바수반두 자신의 생각이다. 특정 집단 내에서만 전승 되는 경전모음(nikāya)이 아니라 붓다의 말씀 자체가 바른 인식 수단, 아마도 이 맥락에서는, 성취자의 전승(āptāgama)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말이 붓다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기준이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특정 집단에 한정되지 않은 다 수의 경전모음에 누차 등장하며, 다른 경전 그리고 특히 자체의 법성, 즉 진리성과 모순되지 않으면 붓다의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40)
39) Lee(2005) 13: na vai ta evaṃgranthaṃ pramāṇaṃ kurvvanti | kiṃ kāraṇaṃ | nāsmākaṃm ayaṃ nikāye paṭhyata iti | kiṃ punas teṣā[ṃ] nikāya eva pramāṇam āhosvid buddhavacanaṃ | yadi nikāya eva pramāṇaṃ na tarhi teṣāṃ buddhaḥ śāstā | na ca te śākyaputrīyā bhavanti | atha buddhavacanaṃ pramāṇaṃ | ayaṃ granthaḥ kasmān na pramāṇaṃ | na hi kilaitat buddhavacanam iti | kiṃ kāraṇaṃ | nāsmākaṃ {ayaṃ} nikāye paṭhyata iti | ayam anyāyo varttate <|> ko (’)trānyāyaḥ | yo hi granthaḥ | sarvveṣu nikāyāntareṣv āmnāyate | na ca sūtraṃ dharmmatāṃ vā bādhate | so (’)smābhir apāṭhān na buddhavacanam iti {|} vacanaṃ kevalaṃ sāhasamātraṃ | (편역자 이종철은 밑줄 친 부분의 evaṃ과 granthaṃ을 별개의 단어로 간주하나, 하 나의 복합어로 간주하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
40) 이 주제에 대한 개괄과 함께 슈릴라따의 독자적 입장을 재구성한 연구로는 권 오민(2012) 제11장 참조.
그렇다면 관건은 모순의 존재를 감지하고 감지된 모순을 적절 한 해석적 장치를 통해 처리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마도 추리가 주도적이면서 불가결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 다.
따라서 성취자의 전승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추리 의존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존성은 이미 ⏉아비달마집론⏊ 단계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지각은 [각 감각기관에 대응하여] 각각이고 실재하고 선명하고 오류가 없는 대상이다. … 추리는 지각 이외의 것들에 대한 믿 음이다. … 성취자의 전승은 저 양자와 어긋나지 않는 교설이 다. 41)
41) Tatia(1976) 152-153: pratyakṣaṃ svasatprakāśābhrānto ’rthaḥ … anumānaṃ pratyakṣaśiṣṭasaṃpratyayaḥ … āptāgamas tadubhayāviruddhopadeśaḥ | 지각의 정의에 대해서는 특히 Schmithausen(1972) 161 참조.
다소 복잡한 설명 내지 해명이 필요해 보이는 지각·추리의 정 의와 달리, 성취자의 전승은 간단하게,
즉 ‘단지 지각·추리에 부 합해야 한다’ 정도로 정의된다.
이 명쾌한 구도를 바수반두에게 곧바로 적용해도 좋다면, 바른 인식수단에 관련한 그의 입장은 (아마도 악성)순환에 떨어질 것이다.
Ⅴ. 결어
이상을 통해 지각·추리에 대한 ⏉논궤⏊의 정의와 ⏉구사론⏊에 나타난 실제 용례 사이의 간극을 밝혔다.
차이점은 크게 다음 3 가지로 다시 요약될 수 있다.
(1) ⏉논궤⏊에서와 달리 ⏉구사론⏊ 의 구도에서는 지각의 역할이 크게 위축된다.
(2) ⏉논궤⏊에서 보장되었던 추리의 타당성이 ⏉구사론⏊에서는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3) ⏉구사론⏊에 있어 추리와 성취자의 전승은 순환관계 에 놓인다. (반면에 ⏉논궤⏊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한 인간의 지적 성장이라든가 학파소속성의 변화 따위의 서사로는 잘 소명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 논궤⏊의 저자를 ⏉구사론⏊의 저자(the Kośakāra) 42)와 다른 인물 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나아가 장르의 성격차로 볼 때 ⏉논 궤⏊의 저자가 ⏉십지경론⏊ 등의 저자(the Bhāṣyakāra)와 동일인 물로 간주하는 것은 더욱 난망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최소 2인 의 바수반두를, 반세기 전 프라우발너가 시도했던 것과는 또 다 른 방식으로, 조우하게 되는 것 같다. 43)
42) 해당 저자의 작품으로 이견 없이 인정되는 것들로는 ⏉구사론⏊, ⏉석궤론⏊, ⏉성 업론⏊, ⏉연기경석⏊, ⏉오온론⏊, ⏉유식이십론⏊, ⏉유식삼십송⏊이 있다. 이종철 (2003) 참조.
43) 본고에서 우선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논궤⏊ 등 논리학적 저작의 저자 바수 반두와 ⏉구사론⏊ 등의 저자 바수반두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버전의 바수반두2인설이다. 그러나 본고의 제안이 프라우발너가 기존에 제시했던 바수 반두2인설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철학적 날카로움을 자랑하는 ⏉구사 론⏊ 등의 저자 바수반두, 다소 덤덤한 ⏉십지경론⏊ 등의 저자 바수반두, 나아가 ⏉ 논궤⏊ 등의 저자 바수반두 이렇게 3인 혹은 그 이상의 바수반두를 상정하는 가 능성 또한 열려 있다
본고는 ⏉논궤⏊와 ⏉구사론⏊에 집중해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리 고 그런 한에서 당연히 시론적인 성격을 면치 못한다.
해당 논 점에 대한 결정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바른 인식수단 담론 이 배태되고 해당 담론에 불교도들이 연루되기 시작한 때를 시 발점으로 하여 불교 내적·외적 논의와 지적 교류를 전부 시야에 담아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거인적인 작업을 도대체 어떤 개인 이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솔직히 잘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참고문헌
1. 약호 및 원전류
AKBh Abhidharmakośabhāṣya,Pradhan,Prachandra,Abhidharmakośabhāṣya of Vasubandhu, Patna: K.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67. T1562 ⏉阿毘達磨順正理論⏊
2. 단행본 및 논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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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문
프라우발너에 따르면, 인의 3상 규정이라든가 3지작법 창안 등 오랫동안 디그나가에게 귀속됐던 논리학적 성취가 사실은 ⏉논궤⏊ 등 바수반두의 논리학적 저작들에 의해 선취되었다. 그러나 카츠 라 쇼류가 밝혔듯, 정작 바수반두는 ⏉아비달마구사론⏊에서 3지작 법이든 5지작법이든 논증식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편 디그나 가 또한 ⏉논궤⏊가 바수반두에게 귀속된다는 점을 의심스러워하였 다. 이런 맥락에서 ⏉논궤⏊와 ⏉아비달마구사론⏊의 개념적 차이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특히 추리 개념이 극적으로 다르다. ⏉논궤⏊ 에서 추리는 ‘[추리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과] 분리불가능한 대상 을 그 [분리불가능성]을 아는 자가 보는 것’으로 정의된다. 반면 에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추리는 최선의 설명(best explanation) 내지 귀추(abduction)에 가깝다. 종합적으 로 볼 때, 두 문헌에 나타난 개념적 차이는 다시 다음 3가지로 요 약된다. (1) ⏉논궤⏊에서와 달리 ⏉아비달마구사론⏊의 구도에서는 지각의 역할이 크게 위축된다. (2) ⏉논궤⏊에서 보장되었던 추리의 타당성이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3) ⏉아비달마구사론⏊에 있어 추리와 성취자의 전승은 순환관계에 놓 이는 반면에 ⏉논궤⏊에서는 해당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한 인간의 지적 성장이라든가 학파소속성의 변화 따위의 서사로는 잘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논궤⏊의 저자를 ⏉아비달마 구사론⏊의 저자와 별개의 인물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주제어(7개) 바수반두, 프라우발너, 쁘라마나(바른 인식수단), 논궤, 아비달마 구사론, 지각, 추리
Abstract
Vasubandhu on Pramāṇa Focusing on the difference between Vādavidhi and Abhidharmakośabhāṣya
Lee, Gilsan (Assistant Professor Kyungnam University )
Frauwallner suggests that achievements like the introduction of the doctrine of the three characteristics of a valid logical reason (trairūpya) and the reduction of the five-part inferential syllogism to a three-part one, traditionally attributed to Dignāga, were actually anticipated by Vasubandhu.
However, as noted by Katsura Shoryu, Vasubandhu does not employ either the three-part syllogism or the five-part one in his Abhidharmakośabhāṣya. Moreover, Dignāga himself was skeptical about attributing the Vādavidhi to Vasubandhu and did not readily accept it. In this context, it’s worth looking at the conceptual differences between the Vādavidhi and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particularly in their treatment of inference.
In the Vādavidhi, inference is defined as "seeing the inseparable object by someone who knows its inseparability [from the object to be inferred]." On the other hand, the inference in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is closer to the best explanation or abduction. In general, the conceptual disparities between them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Unlike in the Vādavidhi, the role of perception in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issignificantly diminished;
(2) The validity of inference, which is guaranteed in the Vādavidhi is not assured in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3) In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the relationship between inference and scripture (āptāgama) is cyclical, whereas this cannot be verified in the Vādavidhi.
These differences cannot be adequately explained by the intellectual growth of a single individual or shifts in scholastic affiliation. Therefore, it is more plausible to consider the author of the Vādavidhi as a different figure from the Kośakāra, not to mention the Bhāṣyakāra.
Keywords Vasubandhu, Frauwallner, pramāṇa (means of valid cognition), Vādavidhi, Abhidharmakośabhāṣya , perception (pratyakṣa), inference (anumāna)
논문투고일: 2024. 7. 10. 심사완료일: 2024. 8. 13. 게재확정일: 0000. 0. 00.
한국불교학 제11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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