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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분황 원효의 중도일심과 퇴옹 성철의 중도무심 ― 붓다·원효·성철의 연속과 불연속 ― /고영섭.동국大

- 목 차 -

Ⅰ. 풀어내는 말

Ⅱ. 고타마 붓다의 깨침 _ 중도연기

   1. 초전법륜과 중도 즉 팔정도

   2. 사성제와 삼전십이행상

Ⅲ. 분황 원효의 깨침 _ 중도일심

   1. 중도와 일심 _ 일중도관과 중도제일의제관

   2. 제일중도지와 중도일미

   3. 중도법과 중도일실

   4. 중도정혜명

   5. 무이중도와 삼공 _ 속제중도와 진제 중도와 비진비속무변무중지중도

Ⅳ. 퇴옹 성철의 깨침 _ 중도무심

  1. 중도와 무심 _ 오매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2. 가무심과 진무심

   3. 쌍비쌍역과 쌍차쌍조

   4. 실제중도와 쌍민쌍존

   5. 차조동시 진공묘유

Ⅴ. 원효와 성철의 중도 이해

   1. 원효의 중도일심

   2. 성철의 중도무심

 Ⅵ. 매듭짓는 말 

 

국문요약

이 논문은 붓다(기원전 624~544)의 ‘중도연기’를 이어 철학하고 사상했 던 분황 원효(617~686)의 ‘중도일심’과 퇴옹 성철(1912~1993)의 ‘중도무 심’ 개념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중도’를 깨쳐 각자(覺者)가 되었고 ‘연기’를 발견해 견자(見者)가 되었 다.

이 때문에 고타마 붓다의 깨침은 ‘중도연기’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의 중도는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본래마음’(일심지원)이며, 연 기는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존재원리’이다.

분황 원효는 중도 개념을 풀어내면서 일중도관, 중도제일의제, 중도 제일의제관, 중도일미, 무이중도, 중도법, 중도일실, 중도정혜명 등 다 양한 용어를 제시하고 있다.

원효는 ‘진금을 녹여서 장엄구를 만들고’ (속제, 진제), ‘장엄구를 녹여서 금단지를 만들며’(속제중도), 이제를 녹 여 일법계/일심을 나타낸(진제중도) 일련의 비유를 통해 속제(소집상), 진제(시각의 원성실성), 속제중도(의타상), 진제중도(본각의 원성실성)를 아우르면서 비진비속무변무중지중도 즉 무이중도를 제시하고 있다.

원 효가 보여주는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인 일심(지원)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반야 중관의 이제설과 유가 유식의 삼성설의 무이적 통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섭은 일법계 즉 일심(지원)을 나타낸 것이며 이 일심(지원)은 중도와 아울러 ‘중도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퇴옹 성철은 󰡔열반경󰡕의 쌍비쌍역을 근거로 하여 유무의 양변을 넘 어서는 중도의 원리인 쌍차쌍조의 시원을 밝히고 있다.

쌍비(非有非無) 는 양변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고 쌍역(亦有亦無)은 양변을 모두 긍정하 는 것이다.

쌍차는 양변을 막는다는 것이니 양변을 떠나는 것이다.

쌍 조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이니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다.

성철은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에서 보면 일체의 차별 망견이 스 스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의 중 도원리에서 보게 되어 일체의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양변을 버리는 쌍차와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는 쌍조를 넘어 차조 동시의 진공묘유가 된다고 하였다.

성철은 무심을 가짜 무심과 진짜 무심으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창안한 독자적인 용어이다.

이 용 어는 의식 속에 아직 티끌이 남아있는 무심(無心)과 제8식의 삼세상까 지 넘어선 구경무심(究竟無心)을 거론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그는 중 도와 무심의 통섭인 ‘중도무심’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철학사상을 구성 하였다.

원효와 성철은 중도의 연속성을 표방하면서도 각기 일심과 무심의 기호를 통해 불연속의 층위를 개척해 감으로써 저마다의 독자성을 보 여주었다.

만일 붓다의 중도사상을 원효와 성철이 계승하기만 했다면 이들을 철학자이자 사상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원효와 성철은 붓다를 계승하면서도 각기 일심과 무심을 통해 철학하고 사상함으로 써 붓다의 중도연기를 이어 중도일심과 중도무심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교사상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주제어 : 고타마 붓다, 중도연기, 분황 원효, 중도일심, 퇴옹 성철, 중도무심, 무이중도, 쌍차쌍조  

 

 

Ⅰ. 풀어내는 말

고타마 싯다르타(기원전 624~544)는 어떻게 붓다가 되었을까?

그는 ‘중 도’를 깨쳐 각자(覺者)가 되었고 ‘연기’를 발견해 견자(見者)가 되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깨침은 ‘중도연기’라고 할 수 있다.

중도는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본래마음’이며, 연기는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존 재원리’이다. 1)

처음에 싯다르타는 이 세상의 창조주인 브라흐만의 전변 설에 입각해 정신적 수양을 강조하는 바라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였다.

이어서 그는 허공 중에 독립해 상주하는 원자 요소들의 적취설에 입각해 육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고행주의를 부정 하였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의 무소유처정과 웃타카 라마뿟따의 비상 비비상처정에 순식간에 도달한 뒤 이들 요가 수행자들의 후계자 제안을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보리수 아래 앉아 색계의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을 거쳐 무색계의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를 넘어 중도를 깨치고 연기를 발견했다.

싯다르타는 밤의 초야(初夜)에 도달한 첫 번째 앎에서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 했다.

그는 밤의 중야(中夜)에 도달한 두 번째 앎에서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 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밤의 후 야(後夜)에 도달한 세 번째 앎에서는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고 나서 감 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의한 번뇌[欲愛, kāmataņnhā], 존재에 의한 번뇌 [有愛, bhataņhā], 무명에 의한 번뇌[無明愛, avijjtaņhā]에서 마음이 해탈되 었으며,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다. 2)

 

       1) 중도와 연기는 等價의 의미가 있지만 계위로 구분한다면 상위개념은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중도의 이론적 체계는 12연기이며, 중도의 실천적인 수행은 8정도로 이루 어져 있다. 중도에도 이론(원리)적 측면인 유무중도가 있고 실천(수행)적 측면인 고 락중도가 있다.

       2) Pps.II. 285. 전재성, 역, 위의 책, p.439의 주석 645) 참조.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스스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으며,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알았다’ 3)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 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 (明智)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광명(光明)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하 지만 ‘나의 안에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고 고백하고 있다.

이어서 싯다르타는 대화가 끝나면 언제나 항상 닦기 이전과 같은 ‘삼매의 인상’으로서 사념처 즉 네 가지 새김[念]의 토대가 되는 ‘공(空)의 경지의 성취(空果等持, suňňstaphalasamāpatti)를 닦는다고 언표하였다4)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싯다르타는 출가 이후 알라라 깔라 마와 웃따까 라마뿟따를 통해 고행 수행을 거치고 이어 선정 수행을 통 해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을 거치고 다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를 거쳐 중도와 연기 즉 팔정도와 십이연기를 깨달았다.

󰡔초전법륜경󰡕은 붓다가 중도 즉 팔정도와 사성제 즉 십이연기에 대해 설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5)

이처럼 붓다가 된 그는 욕락과 고행의 두 변을 버리고 중도를 바르게 깨쳤다. 6)

 

     3) 󰡔잡아함경󰡕(󰡔대정장󰡕 제2책). 한역에서는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 受後有.”로 적고 있다.

     4) Pps.II. 285. 전재성, 역, 위의 책, p.439의 주석 645) 참조. 譯者는 싯다르타는 몸의 수행을 관찰하는 것은 위빠싸나로, 마음의 수행을 멈추는 것은 사마타로 주석하고 있다. 이것을 身受心法의 四念處를 적용하면 몸의 수행은 위빠싸나로, 마음의 수행 은 사마타로 보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受는 身의 염처에, 法은 心의 염처에 속하는 지 혹은 속하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다.

     5) 高榮燮, 「깨침 혹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불교철학󰡕 제4집, 동국대학교 세계불교 학연구소, 2019; 고영섭, 󰡔붓다와 원효의 철학󰡕(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6) 󰡔初轉法輪經󰡕. 

 

욕락과 고행의 두 변을 버린 중도는 팔정도로 표현된다.

그리고 팔정도는 사성제의 도성제로 설명된다.

현존 하는 최고의 경전인 󰡔숫타니파타󰡕 「피안도품」에 중도는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않고 그 가운데[中]도 집착하지 않는다” 7)고 적혀있다.

 

    7) 󰡔숫타니파타󰡕 「彼岸道品」. 

 

이 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이 ‘양 극단’과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임을 분명 히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분황 원효(617~686)와 퇴옹 성철(1912~1993)이 천 삼백 여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고타마 붓다의 중도연기의 가르침을 어 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전개했는지 그리고 이들 사이에 어떠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붓다의 ‘중도연기’를 잇는 원효의 ‘중도일심’(中道一心)과 성철의 ‘중도무심’(中道無心) 사이의 연속성 의 측면에서는 이들 사이의 상통성이, 불연속의 측면에서는 이들 사이의 독자성이 드러날 것이다.

 

Ⅱ. 고타마 붓다의 깨침_ 중도연기

 

중도는 고락(苦樂), 자작타작(自作他作), 단상(斷常), 일이(一異), 유무 (有無)의 상대8)에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의 다른 표현이다.

 

  8) 이중표, 「아함의 중도체계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1; 󰡔아함의 중도 체계󰡕(서울: 불광출판사, 1991); 󰡔붓다의 철학󰡕(서울: 불광출판사, 2018). 여기서 저 자는 중도를 고락(苦樂), 자작타작(自作他作), 단상(斷常), 일이(一異), 유무(有無)의 다섯 가지 범주로 다루고 있다. 중도는 크게 실천적 중도인 고락중도와 사상적 중도 인 유무중도로 나눠볼 수 있지만 중도의 범주를 하위로 더 확장해 볼 수도 있다.

 

중 도는 크게 실천적 중도인 고락중도와 사상적 중도인 유무중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도는 고락, (자작타작, 단상, 일이), 유무의 범주에 대한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이며, 연기는 존재자의 고락, (자 작타작, 단상, 일이), 유무의 범주에 대한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존재원 리’가 된다.

용수의 󰡔중론󰡕에서 인용하는 유일한 경전인 󰡔가전연경󰡕에는 비유비무, 역유역무 등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으로서 유무 중도가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가전연경󰡕에서는 비유비무의 중도를 통해 존재의 원리를 설 명한다.

또 ‘중도실상’이라는 표현으로 존재의 원리를 일컫는다.

이 경전 에 의하면 중도와 연기는 등가(等價)의 개념을 지닌다.

중도는 사상적 측 면에서 유무중도를 통해, 실천적 측면에서 고락중도를 통해 존재의 원리 를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락, (자작타작, 단상, 일이), 유무의 범주에 치우침이 없는 본래마음인 중도9)와 고락, (자작타작, 단상, 일이), 유무의 범주에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존재원리인 연기는 붓다의 가르침을 대 변하는 개념이다.

 

    9) 龍樹, 󰡔中論󰡕(󰡔대정장󰡕 제30책). 여기서 용수는 중도를 一異, 生滅, 來去, 常斷의 4쌍의 8不 中道로 풀어내고 있다. 

 

중도의 실천적인 수행은 8정도로 이루어져 있고, 중도의 이론적인 체 계는 12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붓다의 사상은 ‘중도연기’ 로 표현되며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라고 할 수 있다.

 

1. 초전법륜과 중도

 

즉 팔정도 붓다의 깨침 과정과 내용은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어 바라나시 근처의 이시파타나의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린 경전’인 󰡔초전법륜경󰡕에 자세히 설해져 있다.

여기서 그는 최초의 가르침 으로 중도 즉 팔정도를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 바라나시 근처의 이시 빠타나의 사슴동산에 계셨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의지해서 안 되는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 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 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괴롭 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으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은 것으로서,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八正道)로 정견(正見), 정사유(正 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 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 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인가? 태 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약하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가 괴 로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 諦]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거움과 탐욕이 함 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 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인가?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 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인가? 그것은 팔정도이니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 정진, 정념, 정정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라 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 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바르게 잘 이해되 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 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완전하고 바르게 이해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 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 諦]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 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져 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 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이미 버 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 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마땅히 실 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 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이미 실현 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 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러 운 진리[道聖諦]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 리를 마땅히 닦아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 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런 진리 를 이미 철저하게 닦았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 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내가 만약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으로 열두 가지 형태’ [三轉十二行相]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 로 알고, 보는 것이 완전하고 청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천인과 마라와 범 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왕과 사람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왕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견줄 수 없 고,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부처의 위없는 깨달음을 이해하고, 성취하고, 실현하였음을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으로 열두 가지 형태’[三轉 十二行相]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 고, 보는 것이 완전하고 청정하게 되었을 때, 나는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왕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지견(智見)이 일어났다. ‘내 마음의 해탈은 확고부동하 며,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자, 다섯 비구는 기쁨에 차서 매우 흡족 해 하며 세존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법이 설해지고 있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사라진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10) …… (이하 생략) ……

 

     10) 󰡔초전법륜경󰡕(Dhammacakkapavattana sutta); 마하시 아가 마하 빤디따, 󰡔초전법륜 경󰡕, 김한상 역(서울: 행복한 숲, 2011), pp.17~25.

 

붓다의 깨침에 대해 적고 있는 󰡔초전법륜경󰡕에서 싯다르타 즉 붓다는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 각적 욕망에 대한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라는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은 중 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 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며, 이 중도가 바로 팔정도이고 사성제임을 분명 히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중도의 실천적인 수행은 8정도로, 중도의 이론 적인 체계는 12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싯다르타는 중도를 통해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 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고 하 였다.

즉 그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법안’󰡈 ‘지 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겨나 붓다로 탈바꿈하였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붓다는 실천적인 수행방법으로서 8정도, 이론적인 사상체 계로서 12연기를 들고 있다.

그 결과 중도는 팔정도이자 십이연기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2. 사성제와 삼전십이행상

 

붓다는 󰡔중아함경󰡕 「전유경」11)에서 말룽꺄뿟다(蔓童子)의 열 가지 질 문에 대해 침묵[十無記]함으로써 무기의 참다운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 다.

 

  11) 󰡔中阿含經󰡕 권60, 「箭喩經」(󰡔대정장󰡕 제1책, pp.804상~805하). 

 

만동자는 네 가지 범주로 열 가지로 질문한다.

 1) 세계의 시간적 한계 에 관한 질문 _

   ① 세간은 영원한가? (世有常),

   ② 세간은 영원하지 않은 가? (世無有常),

2) 세계의 공간적 한계에 대한 질문 _

  ③ 세간은 끝이 있 는가? (世有底)

  ④ 세간은 끝이 없는가? (世無底)

3) 생명과 육신의 동이에 관한 질문 _

   ⑤ 목숨이 곧 몸인가? (命卽是身)

   ⑥ 목숨과 몸은 다른가? (命 異身異)

 4) 여래의 사후에 관한 질문 _

   ⑦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如來終)

   ⑧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如來不終)

   ⑨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 이 없기도 한가? (如來終不終)

   ⑩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 도 않은가? (如來亦非終亦非不終) 이러한 열 가지 질문에 대해 세존은 세 차례나 침묵을 한 뒤 입을 열고 있다.

 

“나는 (만동자의) 질문에 대해 한결같이[一向] 답변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나는 한결같이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뜻에 상응[義相應]하지 않 고, 법에 상응[法相應]하지 않고, 범행의 근본[梵行本]이 아니고, 지혜로  나아가[趣智]지 않으며, 깨침에도 나아가[趣覺]지 않고, 열반에로 나아가 지[趣涅槃]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질문에 한결같이 답변하지 않 는다[無記]”고 설한다. 그런 뒤에 붓다는 “나는 말할 것은 말했고 말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않았다”고 답변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은 희론(戱論) 즉 우 리의 현실적 괴로움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이므로 여기 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지만 ‘말할 것’으로 괴로움[苦], 괴로움의 일어남 [苦習], 괴로움의 소멸[苦滅],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苦滅道迹]의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를 제시한다. 사성제는 ‘도의에 상응하고’[義相應], ‘정법에 상응하고’[法相應], ‘범행 의 근본이고’[梵行本], ‘지혜로 나아가며’[趣智], ‘정각에 나아가고’[趣覺], ‘열반에 나아간다’[趣涅槃]고 말한다. 12)

 

이처럼 사성제는 수행의 여섯 가 지 기반이자 목표에 잘 부합하고 있다.

수행의 여섯 가지 기반은 앞의 세 상응과 뒤의 세 취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뒤에 붓다는 사성제의 각 성제를 세 가지 양상으로 살폈다. 13)

 

   12) 󰡔中阿含經󰡕 권60, 「箭喩經」(󰡔대정장󰡕 제1책, p.804중). “我不一向說此, 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 此非義相應, 非法相應, 非梵行本, 非趣智, 非趣覺, 非聚涅槃. 是故, 我不一向說此也, …(중략)… 我一向說此, 以何等故, 我一向說此, 此義相應, 法相應, 梵行本, 趣智, 趣覺, 趣涅槃. 是故, 我一向說此也”

   13) 이것은 四聖諦를 세 가지 양상[三轉]으로 실천하는 ‘三轉十二行相’이다. ‘三轉’ 즉 ‘시전’(示轉) → ‘권전’(勸轉) → ‘증전’(證轉)의 세 가지 양상은 ‘이것이 고-집-멸-도 사성제임을 나타내 보이고’[視轉], ‘괴로움을 알고-괴로움의 원인을 끊고-괴로움 을 소멸시키고-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을 닦아야 한다-고 권하고’[勸轉], ‘스스 로 고-집-멸-도 사성제를 증득하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이 고-집-멸-도 사성제를 깨닫도록 밝혀주는’[證轉] 실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 三轉은 사성제 ‘고-집-멸-도는 성스러운 진리다’[示轉] → ‘이 ~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버려져야 한다/ 이 ~는 이미 완전히 실현되어야 한다/마땅히 닦아야 한다’[勸轉] → ‘이 ~는 완전하고 바르게 잘 이해했다/버려졌다/ 이 ~는 이미 완전히 실현되었다/철저하게 닦았다’[證轉], 이렇게 세 가지 양상으로 전환시켜 열 두 가지 실천행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 결과 사성제의 이치를 깨우치고 배운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라한 의 경지를 체득하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초기불교의 이러 한 삼전십이행상은 부파불교에서 ‘四諦十六行相’으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먼저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다’[苦聖諦],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 리는 이미 완전하고 바르게 이해했다’.

이어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 남의 성스러운 진리다’[集聖諦] ⟶ ‘이 ~는 바르게 잘 버려져야 한다’ ⟶ ‘이 ~는 이미 버려졌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다’[滅聖 諦] ⟶ ‘이 ~는 마땅히 실현되어야 한다’ ⟶ ‘이 ~는 이미 완전히 실현되었 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다’[道 聖諦] ⟶ ‘이 ~는 마땅히 닦아야 한다’ ⟶ ‘이 ~는 이미 철저하게 닦았다’고 섬세하게 관찰했다.

‘열 두 가지 형태’는 고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 ⟶ 집성제의 세 가지 양상 ⟶ 멸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 ⟶ 도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을 아 우른 열 두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

싯다르타는 각 성제를 세 가지 양상의 단계로 살펴 모두 열 두 가지 형태를 조망했다.

이처럼 싯다르타는 각 성제에 대한 세 가지 양상을 살펴서 네 가지 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고’ ⟶ ‘보는 것이 완전하고 청정하게 되었을 때’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왕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포하였다.

 

“그 리고 나에게 ‘지견’(智見)이 생겨났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지견’ 즉 지 혜로운 안목은 “내 마음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며,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 어남이며,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는 것이다. 14)

 

  14) 󰡔雜阿含經󰡕 권15, 382경(󰡔대정장󰡕 제2책), 󰡔아함경󰡕에 근거하여 뒷날 체계화된 교학 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통찰로부터 고성제 (즉 一切皆苦)를 알아야 할 것[當 解]을 알아야 하고, 십이연기의 順觀을 통해 고집성제(즉 諸法無我)를 끊어야 할 것[當斷]을 알아야 하고, 십이연기의 逆觀을 통해 고집멸성제(諸法無我)를 깨쳐야 할 것[當證]을 알아야 하고, 팔정도의 통찰로부터 고집멸도성제(즉 涅槃寂靜)를 닦 아야 할 것[當修]을 알아야 할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한 인간의 일생을 밝혀주는 십이연기는 ‘무명’으로부터 ‘노사’가 생기 는 고통의 발생과정인 유전연기와 ‘노사’로부터 ‘무명’을 벗어남으로써 ‘명 지’를 얻을 수 있는 고통의 소멸과정인 환멸연기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15)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 생을 인연하여 노사 및 순전하고 커 다란 괴로움의 덩어리의 집기[純大苦聚集]와 순전하고 커다란 괴로움의 덩어리의 소멸[純大苦聚滅]이 있다.” 16)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 다.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중생을 위하 여 분별 연설하리라.” 17)

중도 즉 사성제를 설하는 「초전법륜경」과 「전유경」 그리고 연기와 십 이연기를 설하는 「연기법경」과 「십이인연경」 등은 중도와 연기가 무엇인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8)

 

  15) 󰡔雜阿含經󰡕 권12, 299경 「緣起法經」(󰡔대정장󰡕 제2책, p.85중).

  16) 󰡔雜阿含經󰡕 권15, 369경 「十二因緣經」(󰡔대정장󰡕 제2책, p.101중).

  17) 󰡔雜阿含經󰡕 권12, 299경 「緣起法經」(󰡔대정장󰡕 제2책, p.85중).

  18) 붓다의 중도 즉 사성제를 설하는 「초전법륜경」과 「전유경」 그리고 연기와 십이연기를 설하는 「연기법경」과 「십이인연경」 등은 중도와 연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만일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며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19)

󰡔잡아함경󰡕 「상적유경」에서는 ‘연기’와 ‘법’ 즉 ‘진리’의 관계를 동일시 하고 있다.

그리고 중도와 연기는 실천과 이론인 상호존중행과 상호의존 성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20)

붓다는 깨침을 얻고 난 뒤에 사르나트 즉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다.

여기서 그는 중도의 가르침을 설하 였다.

 

부처님께서 다시 고하여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극단이 있으니 응 당 가까이 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면서도 허물이 없다고 말 함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몸체를 괴롭혀 수도도의 자취를 없앰이다. 이 두 변을 버려야 곧 중도를 얻느니라. 21)

 

  19) 󰡔中阿含經󰡕 권7, 「象跡喩經」(󰡔대정장󰡕 제1책), p.467상).

  20) 高榮燮, 「깨침 혹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불교철학󰡕 제4집,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 연구소, 2019.4; 고영섭, 󰡔붓다와 원효의 철학󰡕(서울: 동국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21) 󰡔五分律󰡕(󰡔대정장󰡕 제22책, p.104중). “佛復告曰, 世有二邊, 不應親近, 一者, 貪著愛 欲, 說欲無過, 二者, 邪見苦形, 無有道迹. 捨此二邊, 便得中道.”

 

중도는 애욕을 탐하는 허물이 없고,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수도의 자취가 없앰이 없는 본래마음(一心之源)이다.

애욕과 고행의 두 변을 버 리고 본래마음인 일심지원(球心)과 우주적 마음[一心]인 일심(遠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때에 세존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 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凡 夫)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 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 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애욕과 고행의 두 변 을 버린 것이다. 도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22)

 

󰡔율부󰡕에서 중도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과 스스로 번뇌 하고 고뇌하는 일의 두 극단을 버린 본래마음[一心之源]이며 붓다는 바로 이것을 깨쳤음을 알 수 있다.

 

“비구여, 출가자는 두 극단을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 즐겨 애욕을 익 히거나 혹은 스스로 고행하는 것이다. 현인과 성인의 법이 아니며 심신 을 피로하게 하여 능히 행할 바가 아니다. 비구여, 이 두 극단을 제외하 고 나서 다시 중도가 있느니라.” 23)

 

    22) 󰡔律部󰡕 권3(󰡔남전대장경󰡕, p.18).

    23) 󰡔四分律󰡕(󰡔대정장󰡕 제22책, p.788상). “比丘出家者, 不得親近二邊, 樂習愛欲, 或自 苦行. 非賢聖法, 勞疲形神, 不能油所辦. 比丘, 除此二邊已, 更有中道.”

 

󰡔사분율󰡕에서도 중도는 애욕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난 본래마음임을 알 수 있다.

본래마음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일심인 우주적 마음의 근 원에 자리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설한 중도는 일심(지원)과 다 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중도와 일심(지원)이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원효는 붓다의 중도를 일심(지원)으로 수렴하여 중도 일심의 지평을 열었다.

그것은 두 극단에 치우침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 음(일심지원)의 다른 표현이었다.

따라서 사념처정 제4선의 끝에 성취되는 무상정(無想定)과 비상비비 상처정 이후에 도달하는 멸진정(滅盡定)은 분별이 사라진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윤회를 벗어나 도달하는 경계가 멸진정 이후의 불계 즉 부처의 세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 분황 원효의 깨침_ 중도일심

 

원효 사상의 핵심은 대개 일심, 화쟁, 무애, 부주열반, 무이중도 등의 기호로 이해되어 왔다.

최근에는 ‘통섭’ 개념을 원효 철학의 핵심으로 보 려고도 한다. 24)

논자는 원효 철학의 핵어는 일심(一心)이지만25) 일심(지 원)이 붓다의 중도 개념을 달리 표현했다는 점에서 원효 사상의 핵심 개 념을 ‘중도일심’(中道一心)으로 파악해 보려 한다.

원효는 자신의 저술에서 붓다의 ‘중도연기’를 다양하게 변주해 사용하 고 있다.

그는 경전을 풀이하며 일심(지원)을 자신의 철학적 기반으로 사 용하였다.

그런데 그의 일심(지원)은 양 극단의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일심지원)이며 이 본래마음은 중도의 다른 표현이었다.

따라서 원효 철학의 핵어는 ‘중도일심’으로 볼 수 있다.

원효는 7세기 중엽에 신라에서 성립된 󰡔금강삼매경󰡕에 대해 그의 대표 저작으로 평가받는 󰡔금강삼매경론󰡕26)을 펴냈다.

 

     24) 박태원, 󰡔원효의 통섭철학: 치유철학으로서의 독법󰡕(서울: 세광출판사, 2021).

     25) 高榮燮, 「분황 원효의 일심사상과 인공지능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문학 사학 철학󰡕 제74호, 대발해동양학한국학연구원 한국불교사연구소, 2023.9.

     26) 高榮燮, 「분황 원효 󰡔금강삼매경론󰡕의 주요 내용과 특징」, 󰡔불교철학󰡕 제7집,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2020.10. 논자는 신라 왕실의 요청에 의해 󰡔금강삼매경󰡕 이 편찬하는 과정에 혜공-대안-원효 등이 주역으로 참여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는 그가 󰡔경󰡕을 풀어낸 󰡔론󰡕에 담긴 중도 개념의 사용과 변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효는 중도 개념을 풀어내면서 일중도관, 중도제일의제, 중도제일의제 관, 중도일미, 무이중도, 중도법, 중도일실, 중도정혜명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 중도와 일심 _ 일중도관과 중도제일의제관

 

원효는 중도의 개념을 변주하여 ‘일중도관’(一中道觀) 27)과 ‘중도제일의 제관’(中道第一義諦觀)을 사용하고 있다.

 

  27) 元曉 󰡔대승기신론소󰡕(󰡔한불전󰡕 제1책, p.622하). “言一法者, 離有無邊, 一中道觀, 以 此能離心我執故.” 

 

이 개념은 앞 시대의 천태 지의 (天台智顗, 538~597)가 󰡔보살영락본업경󰡕에 나오는 ‘중도제일의제’란 개념 을 원용하여 거론한 적이 있다.

여기서 일법(一法)은 동일법(同一法) 즉 ‘하나의 현상’ 내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주석서인 󰡔대승기신론소󰡕에서 뿐만 아니라 󰡔금강삼매경󰡕의 주석서인 󰡔금강삼매경론󰡕에서도 방편관과 정관의 대비 속에서 중도관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금강삼매경󰡕의 “저와 같이 심(心)과 아(我)를 떠나게 된 것은/ 일법(一法)으로 이루어진 것이네/ 모든 같고 다른 행위가/ 다 본각의 이익을 얻게 하여/ 두 가지 상과 견해를 끊게 하네”의 게송에 대해 이렇게 풀고 있다.

앞의 다섯 구절은 ‘무상의 관을 널리 설명한 것에 읊은 것’이고, 뒤의 두 게송 반은 ‘일각의 뜻을 널리 해석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원효는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과 아를 떠나게 하여’라는 구절에 대해 방편관(方便觀)으로 풀고, 이후의 구절에 대해서는 정관(正觀)으로 풀고 있다.

아래는 「무상법품」에 나오는 무이중도의 부분이다.

1) ‘하나의 현상’[一法]28)이라고 말한 것은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난 ‘하나의 중도에 대한 이해’[一中道觀]이니, 이것으 로써 마음[心]과 자아[我]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29)

 

    28) 박태원, 앞의 책. 여기서 저자는 ‘一法’을 ‘하나의 현상’으로, ‘一實’을 ‘하나의 사실’로 풀고 있다. 여기서 논자는 상호 토론을 위해 그의 제안을 부분적으로 원용했으며 나머지 개념들도 필요에 따라 원용할 것이다.

    29)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622하). “言一法者, 離有無邊, 一中道觀, 以此能 離心我執故.” 

 

원효는 십지 이전의 십주 십행 십회향의 지전(地前)보살의 행을 방편 관으로, 지상(地上)보살의 행을 정관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정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지 이상의 보살행을 중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중도관으로 풀고 있다.

여기서 원효는 ‘일중도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일중도관’은 마음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중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천태 지의는 󰡔보살영락본업경󰡕에 나오는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 란 개념에 의거해 일체의 존재에 대해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 의 세 가지 관법을 세웠다.

먼저 생사가 공함을 관찰하고, 이어 열반이 공함을 관찰하여 사혹(思惑)과 진사혹(塵沙惑)이 다 없어지면 마음에 치 우친 집착이 없어지므로 쌍차(雙遮)의 방편이 된다.

이렇게 순서대로 공 관과 가관을 써서 진제와 속제를 관찰하므로 쌍조(雙照)의 방편이 된다.

원효는 생사의 공함과 열반의 공함을 관찰하여 쌍차의 방편을 원용하고 공관과 가관을 써서 진제와 속제를 관찰하여 쌍조의 방편으로 쓰고 있다.

이처럼 원효는 천태가 사용한 중도제일의제관을 줄여서 ‘일중도관’으로 쓰고 있다.

아래 부분은 경전에서 대력보살이 “무엇을 간직하는 작용이라고 하 며, 무엇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입니까?”에 대해 부처님이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닌 것을 간직하는 작용이라고 하며, ‘안으로 수행함’과 ‘밖으로 수 행함’에 나오고 들어감이 다르지 않고 하나의 상에 머물지 아니하여 마음 에 얻고 잃는 것이 없어서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경지에 마음을 깨끗 이 하여 흘러들어가는 것을 관찰한다고 한 것이다”고 한 것에 대한 해석 이다.

 2) ‘안으로 수행함’[內行] 이하는 보살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 로 관행의 모습을 밝힌 것이다.

‘안으로 수행함’은 관행으로 들어가 분별 의 동요를 그쳐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행위이고, ‘밖으로 수행함’[外行]은 관행에서 나와 중생을 교화하는 행위이다.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사실 그 대로와 만나는 지평인 중도(中道)를 잃지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不 二]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본업경󰡕에서 수행으로 성취한 모든 것을 중 생들에게 돌리는 행위의 열 가지 단계[十(廻)向]를 설명하는 가운데 “열 번째는 자유자재한 지혜로써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른바 중도 의 궁극적인 관점[中道第一義諦觀]으로 지혜가 중도(中道)에 자리 잡아 모 든 현상이 둘이 없음을 관찰하여 깨닫는 것이다.

그 지혜가 점점 더 성인 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相似] 제일의제의 관행[第一義諦 觀]이라고 부르지만 아직 참된 중도로서의 궁극적 관점에 대한 이해[中 道第一義諦]는 아니다”고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모 습에 머무르지 않는다’[不住一相]라는 것은 속제적 관점과 진제적 관점으 로 이해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얻거나 잃은 것이 없다’[心無得失]라는 것 은 모든 것을 평등한 관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방편관 에 의지하여 열 가지 본격적인 수행경지의 첫 번째 경지의 현상이 흐르는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경지에 온전해진 마음 으로 흘러 들어간다’[一不一地, 淨心流入]라고 하였다.

저 󰡔본업경󰡕에서

“세 가지 관행[三觀]이라는 것은, 임시로 이루어진 것으로부터 공에 들어 가는 것[從假名入空]을 두 가지 관행[二諦觀]이라 부르고, 다시 공으로부 터 임시로 이루어진 것[從空入假名]으로 들어감을 평등한 관행[平等觀]이 라고 부르니, 이 두 가지 관행은 수단과 방법이 되는 수행이다. 이 두 가지 관행은 방편도이고, 이 두 가지 이해인 이제관과 평등관으로 인해 중도의 궁극적인 관점에 대한 이해[中道第一義諦觀]로 들어가게 된다. 두 가지 관점을 양쪽 다 이해하여 마음마다 적멸하여 열 가지 본격적인 수 행경지[十地]의 첫 번째 경지[初地]의 현상이 흐르는 물로 들어간다”

라고 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과 같다.

생각건대, 이 가운데 두 가지 관점 으로 이해함[二諦觀]이라는 것은 속제를 버리고 진제를 관찰하는 것이니 바로 본연의 온전한 지혜를 얻는 수단과 방법[正體智之方便]이다. 또 모 든 것을 평등하게 이해함[平等觀]이라는 것은 진제를 융합해 속제를 이 해하는 것이니 바로 근본적인 지혜에 의지하여 대상에 대해 뒤이어 얻어 지는 지혜를 얻는 수단과 방법[後得智之方便]이다.

세속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여 얻었거나 잃었다는 생각을 붙들지 않고, 옳다고 함도 없고 그르다고 함도 없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30)

 

    30)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p.646중~647상).

 

‘중’은 ‘중정’(中正)의 뜻으로 두 변의 상대를 끊어 없앤다는 의미이다.

일념(一念)의 마음을 관찰하여 공(空)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면서 공에 나아가고 가에 나아가는 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일념 가운데에서 보기 때문에 일중(一中)이 일체중(一切中)이 되므로 공(空)이나 가(假)가 중(中) 이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은 공·가·중 삼관이 모두 상대를 끊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면 공(空) 밖에 다른 법이 없고, ‘가’(假)라고 하면 가(假) 밖 에 다른 법이 없으며, ‘중’이라고 하면 중(中) 밖에 다른 법이 없으니 세 가지는 모두 곧 원만한 중[圓中]이기에 중관이라고 한다.

중도의 불성을 나타내어 중도를 보기에 하나의 중도관(一中道觀)이라 하고, 중제(中諦)의 이치를 관찰하여 무명의 번뇌를 끊기에 중도제일의제 관(中道第一義諦觀)이라 한다.

공관(空觀)에도 집착하지 않고, 가관(假觀) 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공(空)과 가(假)가 원융한 대비의 보살행이 일중도 관이다.

이 관법을 닦으면 삼혹 가운데에서 무명혹을 끊고, 삼지 가운데 에서 일체종지를 얻게 되며, 그 수행의 계위는 별교의 초지에 해당하게 된다.

원효는 있는 것[有]과 없는 것[無]의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난 하나의 중도관[一中道觀]으로서 일법 즉 동일한 현상을 제시하면서 마음과 자아 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중도제일 의제관은 ‘일중도관’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치우침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인 일심(지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도와 일심의 통섭인 ‘중도일심’의 개념이 시설된다.

 

2. 제일중도지와 중도일미

 

이어 원효는 󰡔본업경󰡕의 십행(十行)을 설명하는 대목을 원용하여 보 살의 삼보를 해명하면서 중도를 ‘제일중도지’(第一中道智)와 ‘중도일미’(中 道一味)라는 표현으로 변주해 쓰고 있다.

아래는 󰡔금강삼매경󰡕에서 대력 보살이 “세 가지를 간직하고[存三] 하나를 지켜[守一] 여래선에 들어간다 [入如來禪]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라는 「입실제품」의 질문에 대 해 대답하면서 나온 무이중도의 부분이다.

 

1)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방편을 널리 설명한 것으로 세 가지의 문답이 있다.

이 첫째 문답에서는 숫자를 매겨 총괄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

‘일 심의 여여함을 지킨다’[守一心如]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심법 (一心法)에 두 가지 교문이 있는데 지금은 먼저 그 심진여문을 지키는 것 이니, 무명(無明)의 큰 용과 같은 세력을 조복하려는 것이다. 무명이 일심 의 여여함을 곧바로 미혹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지킨다’[守]는 것은 선정에 들어갈 때는 일심의 여여한 경지[一如之境]를 고요히 지키 고, 선정에서 나와 있을 때는 일미의 마음[一味之心]을 잃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하나를 지킨다’[守一]고 한 것이다.

 

이를테면 󰡔본업경󰡕에서 이 타적 수행의 열 가지[十行]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열 번째는 자유자재로 큰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이니 이른바 보살 의 세 가지 보배[三寶]이다. 보살이 그 때에 제일중도의 지혜[第一中道 智]를 깨달음이라는 보배로 삼고, 모든 것에는 생겨나거나 움직이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침이라는 보배로 삼으며, 언제나 여섯 가지의 미혹세계 [六道]를 다니면서 여섯 가지 미혹세계[六道]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과 화 합하는 것이 승보가 되니, 모든 중생들을 전변시켜 부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31)

 

     31)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645하). 

 

여기서 ‘제일중도지’ 즉 제일중도의 지혜에서 ‘제일’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을 가리킨다.

‘중도’는 두 변의 극단과 사집(邪執)을 떠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의 도 혹은 관점 또는 방법이다.

또 ‘지’ 즉 지혜는 옳음과 그름[是非]과 바름과 삿됨[正邪]을 단정하여 취사하는 것이며, 일체의 사물에 대한 도리이다.

원효는 이러한 ‘제일중도지’의 개 념과 함께 ‘중도일미’의 개념을 원용하고 있다.

 

2) 생각건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중도의 일미[中道一味]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이 관행이 하나를 지키는 작용[守一之用]이니, 이러한 관행 은 수행의 열 가지 단계의 경지에 있다.

나머지는 뒤에 나올 것이니 여기 에서 거론하지 않겠다. 32)

 

    32)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645하).

 

󰡔금강삼매경󰡕에서

“‘세 가지를 간직한다는 것’[存三者]는 허공해탈과 금강해탈과 반야해탈의 세 가지 해탈을 간직하는 것이고, ‘수일’(守一)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 것”

이라고 하였다.

또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 은 마음의 여여함을 이치대로 관찰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 면 곧 실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관(理觀) 즉 실상 을 관찰하는 행법에 대해 설하고 있다.

중도일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시에 중도를 잃지 않는 동일의 의미[同一味]를 일컫는다.

선정에 들어있을 때는 ‘일심의 여여한 경지’를 고요히 지키고, 선정에 나와 있을 때는 ‘일미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처럼 관행이 하나를 지키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이 관행은 십행의 계 위에 있다고 해명한다.

그런 뒤에 원효는 ‘제일중도지’를 ‘중도일미’의 의 미와 상통시키고 있다.

 

3. 중도법과 중도일실

 

아래는 「여래장품」에 보이는 ‘중도법’(中道法)과 ‘중도일실’(中道一實) 의 개념이다.

중도는 일이, 상단, 래거, 생멸이라는 극단의 과실에서 벗어 나 불일불이, 불상부단, 불래불거, 불생불멸을 통해 무소득의 지혜를 열 어준다.

일심의 법을 두 가지 견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중도의 법은 있음과 없음의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에 상응하는 것 이다.

이것은 [8행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다섯 부분 가운데] 세 번째인 범행장자 (梵行長者) 스스로 진술한 것이다.

‘일심의 법은 두 가지 견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知法非二見]는 것은, ‘중도의 법’[中 道法]은 있음과 없음의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니, 곧 두 번째 해가 없다고 하는 전도된 생각을 벗어난 것이다.

‘또한 가운데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는다’[亦不依中住]고 한 것은 비록 두 변을 벗어났 으나 중도의 동일한 사실[中道一實]을 간직하여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니, 곧 첫 번째는 바퀴모양의 형태[毛輪]나 물로 보는 허망함을 벗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저 있음과 없음의 과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부처님 께서 가르치신 머무름이 없다는 뜻을 이해하였으니,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부터 취한다’[故從無住取]고 하였다. 33)

일심(지원)의 법과 중도의 법은 두 가지 견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중도와 일심(지원)의 등가적 의미를 시사받는다. 중 도는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넘어선다는 의미이자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 이 없는 본래마음이다.

여기서 중도일심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대승 이전 불교에서 붓다의 중도는 외도와 범부들의 고행(苦行)과 낙 행(樂行)을 떠난 실천적 중도인 고락중도와 (자작타작, 일이), 유무, 상단의 두 변을 떠난[非有非無, 非常非斷] 사상적 중도인 유무중도로 나눠볼 수 있다. 34)

 

     33)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p.664상).

     34) 성철은 붓다의 중도를 고락중도와 유무중도로 구분한다. 그는 거문고 비유에서 거문고 줄의 적정함이 고락중도이고, 존재와 실상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유무중도이 며 이것을 雙遮雙照라고 했다.  

 

삼론종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불상부단(不常不斷), 불거불래(不去不來), 불일불이(不一不異)의 팔불(八不)에 의해 나타나는 불가득 (不可得)의 법을 중도라고 했다.

법상종에서는 유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 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중도라고 하였다. 천태종에서 는 제법의 실상을 중도라고 하고, 화엄종에서는 법계를 중도라고 하였 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다양한 개념으로 변주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중도정혜명

 

아래는 「여래장품」에 보이는 중도정혜명(中道正慧命)의 개념이다. 원 효는 유와 무의 변견을 떠나서 중도의 바른 혜명을 얻는다고 보았다.

그 는 경전에서 “이 때에 대중이 이러한 뜻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모두 정명 (正命)을 얻어 여래와 여래의 바다에 들어갔다”는 부분에 대해 아래와 같 이 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세 번째 대중이 이익을 얻는 것이다.

‘정명을 얻는다’[得正命] 고 한 것은 있음과 없음의 가생이를 떠나서 중도의 바른 혜명을 얻은 것 [中道正慧命]이다. ‘여래에 들어간다’[入如來]고 한 것은 이미 여래지의 분한에 들어간 것이다.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간다’[入如來藏海]고 한 것 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가는 것이다. 35)

 

    35)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p.666하).

 

혜명은 법신이 지혜를 생명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여래지는 가장 수승한 무상의 지견을 가리키며 부처만이 가지는 지혜이며 일체종지 에 해당한다. 혜명은 방일하지 않음에 의하여 정법에서 물러나지 않고 바른 지혜를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원효 또한 대중이 이익을 얻는 것은 중도의 바른 혜명을 얻는 것이며, 여래에 들어가는 것은 여래지의 분한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리고 여래장 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가는 것이다고 보 았다.

아래는 「입실제품」에 나오는 무이중도의 부분이다.

 

5. 무이중도와 삼공 _ 속제중도와 진제중도와 비진비속무변무중지중도

 

원효는 그의 대표작인 󰡔금강삼매경론󰡕에서 중도를 ‘무이중도’의 개념 으로 풀어내고 있다.

무이중도의 개념은 「무상법품」(1회)과 「여래장품」(2 회)에서 보인다.

그는 「무상법품」의 방편관(方便觀) 설명(1회) 36), 「여래장 품」의 무이중도와 이제(二諦) 설명(2회) 37) 과정에서 모두 3차례를 언급하 고 있다.

 

    36) 元曉, 󰡔金剛三昧經論󰡕(󰡔대정장󰡕 제34책, 965중).

    37) 元曉, 󰡔金剛三昧經論󰡕(󰡔대정장󰡕 제34책, 999상); 元曉, 󰡔金剛三昧經論󰡕(󰡔대정장󰡕 제 34책, 999상). 

 

「입실제품」에서는 속제중도와 진제중도를 아우르는 비진비속무 변무중지중도의 개념을 통해 무이중도의 사상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는 「무상법품」에 나오는 무이중도 부분이다.

 

1) 이 아래부터는 바로 널리 설명하는 것이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 다.

먼저는 무상관(無相觀)을 밝혀서 상이 없는 이익[無相利]을 널리 설명 하였고, 뒤에는 일각의 마음[一覺心]을 나타내어 앞서의 일각의 뜻[一覺 義]을 널리 나타내었다.

무상관 중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관행의 상을 바로 설명하였고[直說觀行之相], 둘째는 왕복하여 모든 의심과 난점 을 풀었다[往復決諸疑難]. 처음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방편관 (方便觀)이고, 뒤에는 정관(正觀)을 밝혔다. 방편관 중에 네 구절이 있으 니, 처음의 한 구절은 교화하는 사람[能化]을 나타내었고, 나중의 한 구 절은 교화의 큼[化大]을 찬탄하였고, 중간의 두 구절은 관행의 상[觀相] 을 바로 밝혔다. ‘환화의 상에 대하여 마음을 내지 않는다’[無生於化]는 것은 처음 관을 닦을 때에 모든 유의 상을 깨뜨려서 환화의 상에 대하여 그 마음을 내는 것을 없앴기 때문이다. ‘환화의 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도 마음을 내지 않는다’[不生無化]는 것은 이미 환화의 상을 깨뜨리고 나 서 그 다음에 그 공의 상마저 버려서 환화의 상이 없는 공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중생이 본래 마음은 상을 떠난 것임을 모르고 온갖 상을 두루 취하여 생각을 움직이고 마음을 내기 때 문에 먼저 모든 상을 깨뜨려 상을 취하는 마음을 없애며, 비록 다시 환화 의 유의 상을 깨뜨렸더라도 오히려 환화가 없는 공성을 취하니, 공성을 취하기 때문에 공에 대해서 마음을 내므로 또한 환화가 없는 공성마저 버리는 것이다. 이 때에 공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여 ‘둘이 없는 중도’[無二中道]를 깨닫게 되어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제법의 실상과 똑같 아지니, 이와 같이 교화하기 때문에 그 교화가 큰 것이다. 38)

 

     38)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611중; 󰡔대정장󰡕 제34책, 965중11-15). “雖復已破 幻化有相。而猶取其無化空性。取空性故於空生心。所以亦遣無化空性。于時不生 取空之心不得已會無二中道。同佛所入諸法實相。如是化故其化大焉.” 원효는 방편 관을 십지 이전의 수행관으로, 정관을 십지 이상의 수행관으로 해명하고 있다. (2023.10.31) 

 

원효는 「무상법품」에서 무상관을 방편관과 정관으로 해명하고 있다. 방편관은 수단이 되는 관행이고 정관은 진실 그대로의 관행이다. 십지 이전의 수행인 방편관에 의해 생멸문에 들어가게 되며, 십지 이상의 수행인 정관 즉 참된 관행인 진관(眞觀)에 의해 진여문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이는 공성과 가유만을 배워서 중관과 유식에만 집착한다.

하지 만 공성에 머문 이는 공성이라는 새로운 유에 집착하고, 가유에 머문 이 는 공성을 소홀히 하여 넘어간다.

이 때문에 원효는 공성과 가유에서 벗 어나고 하나[一]와 두나[二]에서 벗어난 무이 중도의 길을 제시한다.

원효는 이러한 중도의 변주를 통섭하면서 ‘환화의 상에 대해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과 ‘환화의 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 는다’는 것에 대해 방편관으로서 ‘둘이 없는 중도’로 풀어내고 있다.

다음 은 「여래장품」에 나오는 무이중도의 부분이다.

 

2) 이것은 [8행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다섯 부분 가운데] 두 번째인 모든 그릇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릇된 견해는 비록 많지만 크게 그릇 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매우 심오한 교법에 의하여 말 그대로 뜻을 취하고는 스스로 궁극적 경지라고 여기니 교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둘이 아니라는 말씀을 듣고서 이것은 하나로서 동일한 사실[一實]이고 동일한 마음[一 心]이라고 생각하여 이로 말미암아 이 도리를 비방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어있음[空]과 있음[有] 두 가지 교문에 대해 말 씀하신 것을 듣고서 두 가지 법[二法]이 있고 동일한 사실[一實]은 없다 고 헤아려서 이로 말미암아 둘이 없는 중도[無二中道]를 비방하는 것이 다. 이 두 가지 그릇된 견해는 약을 먹다가 병이 난 것이니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제 저 과실을 드러내니, 이 두 게송 중에서 차례로 나타 내었다. 처음에 ‘만일 법은 하나만 있다고 말한다면’[若說法有一]이라고 말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동일한 사실[一實]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생각한 대로 동일한 현상[一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바퀴모양의 형체와 같다’[是相如毛輪]고 한 것은 저가 생각한 동일한 현상[一法]의 모습이 마치 눈병 든 자가 보는 모륜(毛輪)과 같 기 때문이다. ‘마치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如燄水迷倒]고 한 것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여겨 달려가 구 하는 것과 같으니, 다만 착각하는 것이다. 일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다. ‘모두 허망한 것이다’[爲諸虛妄故]고 한 것은 목마른 사슴이 물이라고 보고, 눈병 든 사람이 모륜이라고 보는 것처럼, 학자가 하나라 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모든 생각이 다 허망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없다 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만일 법이 없는 것이라고 본다면’[若見於法無]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제는 있고 일심의 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 법이 허공과 같다’[是法同於空]고 한 것은 저가 일심은 공허한 이치와 같 고 공허한 이치 이외에 본래 동일한 사실[一實]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마치 맹인이 해가 없다고 하는 전도된 견해와 같다’[如盲無日倒]고 한 것은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가난한 거지가 본래 햇빛을 본 적 이 없어서 눈이 있는 사람이 그를 위하여 해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어도 눈먼 사람은 없다고 하여 해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고 같으니, 다만 전도 된 것이다. 저가 생각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니, 저가 본래 오직 있음과 없음만을 배우고 둘이 없는 중도[無二中道]에 대해 들은 적이 없어서 비 록 설명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믿고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를 중도에 비유한 까닭은, 해는 원만하고 큰 광명이 있어서 오직 눈 먼 자를 제외하고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도 또한 그러하여 완전하고 크나큰 빛이 있어서 오직 눈먼 사람을 제외하고는 보 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도 또한 그러하여 두루 원만하고 결함이 없어서 본각과 시각의 큰 광명의 비춤이 있어서 믿지 않는 사람 을 제외하고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그 법이 거북 털과 같다’ [說法如龜毛]고 한 것은, 저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일심의 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다만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 마치 거북 털과 같다고 하니, 맹 인이 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9)

 

원효는 「여래장품」에서 무이 중도와 이제의 도리를 설명하면서 무이 중도의 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그릇된 이해가 매우 많지만 그릇된 이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부처님의 깊은 가르침을 듣고 문자 그대 로를 뜻이라고 착각하여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이들 은 교화하기 어렵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문이 없 다[動靜無二]는 가르침을 듣고 ‘곧 그것은 하나다, 동일한 사실이며 동일 한 마음이다’고 생각하여 이제의 도리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어있음과 있음의 두 문이 있다[空有二門]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 고 ‘두 가지 현상[二法]이 있고 동일한 사실[一實]이 없다’고 생각하여 무 이의 중도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40)고 보았다.

그는 본래 오직 공성과 가유만을 배우고 일찍이 무이 중도에 대해 들은 적이 없어서 비록 설명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믿고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41)

 

       39)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pp.663중~664상).

       40) 元曉, 󰡔金剛三昧經論󰡕(󰡔대정장󰡕 제34책, 999상).

       41) 元曉, 󰡔金剛三昧經論󰡕(󰡔대정장󰡕 제34책, 999상). 

 

전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둘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하나의 사실 과 하나의 마음이라 여기고 이제의 도리를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 관(正觀)을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후자는 공성과 가유의 두 개의 교 문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하나의 진실함이 아닌 두 가지 법이 있다고 여 겨 무이의 중도를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방편관(方便觀)을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여래장품」의 두 곳에서 ‘동정불이 편위시일’하여 이제 도리를 비방하는 것과 ‘공유이문 개유이법’하여 무이 중도를 비방하는 것 을 대비하면서 무이 중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둘이 아 니라고 설한 것을 듣고 이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사실과 동일한 마음이 있다고 단정하여 이제의 도리를 비방하거나, 둘에 대해 설한 것을 듣고 둘이 있고 하나는 없다고 단정하여 무이의 중도를 비방하는 것을 경계하 며 이러한 치우친 견해를 넘어서도록 이끌고 있다.

진여는 공성이니 성품이 공하므로 생긴 지혜의 불길이 모든 번뇌를 불태워 없애고 평등 평등하니, 등각 삼지(三地)와 묘각 삼신(三身)이 구식 (九識) 중에 달빛[皎然]처럼 밝고 맑아서 아무 그림자가 없다. 42)

여기서 평등 평등은 평등에도 평등함을 의미하니 평등에도 평등하다 는 것은 진제중도의 평등과 속제중도의 평등을 의미하며, 두 중도가 평등 하므로 둘이 아닌 무이를 가리킨다. 평등에도 평등하다는 것은 상이 사 라져 피차가 없는 평등을 일컬으며 둘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상행중도 의 중도는 진제중도이고 상행은 실천행으로 속제중도를 뜻하므로 평등 평등은 무이 중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43)

 

     42) 大安 편집, 󰡔金剛三昧經󰡕(󰡔대정장󰡕 제9책, 371중).

     43) 김영미, 「󰡔금강삼매경론󰡕의 無二中道 사상 연구」,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0집, 동아 시아불교문화학회, p.125. 

 

아래 부분은 「입실제품」에 나오는 무이 중도 부분이다.

원효는 󰡔금강 삼매경론󰡕의 「입실제품」에서 속제, 진제, 속제중도, 진제중도, 비진비속 (非眞非俗) 무변무중(無邊無中)을 무이 중도(無二中道)의 뜻이라고 하였다.

원효의 깨침의 경지로 표현된 무이 중도는 진여의 근본 체상인 진제중도 와 진여를 근본으로 한 작용인 속제중도를 아우른다.

그리고 진제중도는 진제를, 속제중도는 속제를 아우른다.

 

3) 이 하나의 질문과 대답은 세 가지 공[三空]을 밝힌 것이다.

‘공상도 공하다’[空相亦空]는 것에서 ‘공상’이란 것은 바로 속제(俗諦)를 버려서 진 제(眞諦)를 드러내는 평등한 모습[遣俗顯眞]이고, ‘또한 공하다’[亦空]라는 것은 바로 진제를 융합해 속제를 삼은 것으로 공공(空空)의 뜻이니, 마치 진금을 녹여서 장엄구(莊嚴具)를 만드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열반경󰡕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을 공공(空空)이라 하고, 옳 은 것이기도 하고 그른 것이기도 한 것을 공공(空空)이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것은 속제의 있음과 없음, 옳음과 그름이라는 차별의 모 습이 바로 공공(空空)의 뜻임을 밝힌 것이다.

평등한 공에 대해서도 공하 다고 하는 것은 속제의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러한 차별을 공공(空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공도 공하다’[空空亦空]는 것에서 ‘공 공’(空空)이라는 것은 바로 속제의 차별이고, ‘역공’(亦空)이라는 것은 다시 속제의 차별을 녹여서 진제의 평등으로 만드는 것이니, 마치 장엄구를 녹여서 다시 금단지[金甁]를 만드는 것과 같다.

세 가지 공의 세 번째에 서 ‘소공도 공하다’[所空亦空]라는 것은, 처음 공 가운데에서 공이 드러낸 속제(俗諦)와 두 번째 공 가운데에서 공이 나타낸 진제(眞諦)의 두 가지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또한 공하다’[亦空]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속제와 진 제를 융합해 일법계를 나타낸 것이니, 일법계(一法界)라는 것은 이른바 일심(一心)이다.

그런데 처음 공의 문에서 내버린 속제[所遣俗者]는 변계 소집상이고, 둘째 공의 문에서 융합한 속제[所融俗者]는 의타기상이니, 속제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所遣]과 융합하는 것[所 融]은 같은 것이 아니다.

또 처음 문 안에서 속제를 버려서 드러낸 진제 [遣俗所顯之眞]와 둘째 문 안에서 속제를 융합해 드러낸 진제[融俗所顯之 眞]는, 이 두 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없으니, 진제는 오직 한 가지로서 원성실성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해 드러낸 것은 오직 하나 이다.

  세 번째의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또 이 세 가지 공에서 첫 번째의 공은 속제중도(俗諦中 道)를 드러내었고, 두 번째의 공은 진제중도(眞諦中道)를 드러내었으며, 세 번째의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가생이[邊]도 없고 가운데 [中]도 없는 중도[非眞非俗無邊無中之中道]의 뜻을 드러내었다.

‘이와 같 은 공들’[如是等空]이라고 말한 것은 세 가지 공[三空]을 모두 거론한 것 인데, 속제의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진제의 모습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속제와 진제의 둘이 없는 모습에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모습에 머무르지 않는다’[不住三相]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아니하 여 궁극적으로 진실을 나타내기 때문에 ‘진실이 없지 않다’[不無眞實]고 하였다.

비록 진실이 없지 않지만,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이 끊어졌다고 하였고, 길이 끊어졌다는 말 또한 붙일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不可思議] 고 하였다. 44)

 

    44)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제1책, 639하~640상).

 

이처럼 원효는 「입실제품」에서 자신의 중도관의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금강삼매경󰡕에서 세 가지 공[三空]을 밝히는 대목에서 ‘공상 도 공하다’[空相亦空], ‘공공도 공이다’[空空亦空], ‘소공도 공이다’[所空亦 空]을 제시하면서 속제, 진제, 속제중도, 진제중도, 비진비속무변무중의 중도를 전개하고 있다.

원효는 ‘진금을 녹여서 장엄구를 만들고’(속제, 진제), ‘장엄구를 녹여서 금단지를 만들며’(속제중도), 이제를 녹여 일법계/일심을 나타내는(진제중 도) 일련의 비유를 통해 속제(소집상), 진제(시각의 원성실성), 속제중도(의 타상), 진제중도(본각의 원성실성)를 아우르면서 비진비속무변무중지중도 즉 무이 중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원효는 ‘중도실상’(中道實相, 󰡔중변분별론소󰡕), ‘중도지의’(中道 之義, 󰡔열반종요󰡕), ‘중도무상’(中道無相, 󰡔본업경소󰡕)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 고 있다.

여기서 그는 유무의 중도, 비유비무의 중도, 공과 불공을 모두 보는 중도, 비진비속의 중도로 풀어내고 있다.

원효가 보여주는 중도는 양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 인 일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반야 중관의 이제설과 유가 유식의 삼성설의 무이적 통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섭은 일법계 즉 일심을 나타낸 것이며 이 일심을 중도와 아울러서 ‘중도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붓다의 중도연기를 이은 원효의 중도일심에 대응하는 성철의 중도무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Ⅳ. 퇴옹 성철의 깨침_ 중도무심

 

퇴옹 성철(1912~1993)은 1965년 김용사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법회 법문에서 중도사상을 설한 이래, 그는 1967년 해인사 방장에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면서 중도사상을 구체화시켜 자신의 강론 저술인 󰡔백일법 문󰡕에 담아내었다.

여기에서 성철은 2가지 비판을 통해 중도사상을 확고 하게 세우고 있다.

성철은 먼저 일본학계의 대승비불설 비판을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등의 연구에 힘입어 󰡔율장󰡕 속의 ‘중도대선언’을 근거로 재비판하고 있다.

이어 그는 8종의 대승사상을 모두 용수의 󰡔중론󰡕에서 유일하게 인용한 「가전연경」45)의 중도설에 입각해 일이관지로 풀어내어 중국 교판가들의 교판을 비판함으로써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모두 살려내고 있다. 46)

 

     45) 「迦旃延經」 301, 󰡔잡아함경󰡕 제1권(󰡔대정장󰡕 제2책).

     46) 성철(1912~1993)은 자신의 강론이나 법문에서 元曉를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義湘에 대해서는 인용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를 겹쳐 살았던 萬海(1879~1944)에 대 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洪應明의 󰡔채근담󰡕을 정선한 만해의 󰡔정선강의 채근담󰡕(1917)을 새롭게 펴낸 󰡔채근담강의󰡕는 접한 것 같다. 그는 출가 이전에 이 책에서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我有一卷經]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不因紙墨成]. 펼쳐 여니 한자 글자도 없으나[展開無一字]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常放大光明]”는 구절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 덕상을 지녔다’는 글자 없는 경, 말 하자면 ‘자아경’, 즉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에서 호기심이 일어나 발심하였다.

 

그러면 붓다의 ‘중도연기’와 원효의 ‘중도일심’을 잇는 성철의 ‘중도무 심’의 기호로 그의 중도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중도와 무심 _ 오매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용수(龍樹, 150?~250?)는 󰡔중론󰡕의 귀경게에서 중도의 의미를 여덟 개 념의 부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능히 이 인연을 설해서 모든 희론을 멸하니 모든 설법자 중에서 제일이신 부처님 께 머리 숙여 예배하나이다. 47)

 

   47) 龍樹, 󰡔中論󰡕(󰡔대정장󰡕 제30책, p.1중).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 亦不去,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용수는 붓다의 중도 개념을 계승하여 생멸(生滅), 상단(常斷), 일이(一 異), 래거(來去) 여덟 개념의 부정을 통해 양 극단에 치우침 없는 중도를 천명하고 있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곧 무(無/空)라고 하고 또한 가명(假 名)이라고 하며 중도(中道)의 뜻이라고 한다. 48)

 

용수는 팔불의 중도를 공·가·중의 세 글자로 더욱 간결하게 요약하 였다.

여기서 ‘무’(無)는 격의(格義)불교시대의 번역이지만 ‘공’(空)의 의미 를 지니고 있다.

이 게송은 ‘제’(諦)가 세 개인 게송이어서 ‘삼제게’(三諦偈) 혹은 ‘시’(是)가 세 개인 게송이어서 ‘삼시게’(三是偈)라고 한다.

이 게송은 이후 중국에서 성립된 삼론종과 천태종과 화엄종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붓다의 중도를 이은 용수의 중도는 고구려의 승랑에 의해 불생불멸 (不生不滅)의 세제중도, 비불생(非不生) 비불멸(非不滅)의 진제중도, ‘비생 멸(非生滅) 비불생멸(非不生滅)’의 이제합명중도설로 제창되고 있다.

신라 의 원효는 이를 더 정교하게 가공하여 속제, 진제, 속제중도, 진제중도, 비진비속무변무중의 중도로 제창되고 있다.

성철은 평소 ‘중도’와 ‘무심’을 강조함으로써 ‘중도무심’의 개념을 입론 하고 있다.

그는 무심을 가짜 무심과 진짜 무심으로 구분하였는데 이것 은 그가 창안한 독자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성철의 시도는 의식 속에 아 직 티끌이 남아있는 무심(無心)과 제8식의 삼세상까지 넘어선 구경무심 (究竟無心)을 거론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중도와 무심의 통섭인 ‘중도무심’ 49)의 개념이 시설된다.

 

   48) 龍樹, 󰡔中論󰡕(󰡔대정장󰡕 제30책, p.33중).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 是中道義.”

 

그는 오매일여와 몽중일여와 숙면일여에 대해 법문해 오면서 무심을 ‘가짜 무심’과 ‘진짜 무심’으로 구분해 왔다. 그는 대혜(宗杲, 1089~1163)가 체험한 오매일여는 몽중일여로 아직 제6식의 영역에 있고, 이를 넘어 제8 아뢰야식의 영역에 들어가야 진정한 오매일여인 숙면일여가 된다50)고 하 였다.

또 숙면일여조차 가짜와 진짜로 나누어 6추를 소멸하였지만 아직 아 뢰야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가짜 무심[假無心]이다. 이 차원을 넘 어 아뢰야식의 미세분별까지 멸진해야 진짜 무심[眞無心]이다. 51)

이것은 󰡔대승기신론󰡕의 구상(九相) 즉 삼세(三細) 육추상(六麤相) 중 6추상은 멸 했지만 아직 삼세상은 멸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무심은 분별이 없는 무분별심의 다른 표현이다.

보조 지눌(1158~1210)은 이러한 무심 즉 무분별심을 ‘진심’(眞心)이라고 했다.

성철은 평소에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 으로써 선과 교를 하나로 꿰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52) 고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49) 강경구, 󰡔성철선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정본 선문정로󰡕(서울: 장경각, 2022), pp.956~ 957. 퇴옹 성철의 대표작인 󰡔선문정로󰡕의 돈오돈수설의 핵심을 윤원철은 ‘견성즉불’, ‘무심무념’, ‘3관돌파’, ‘사중득활’, ‘공안참구’에 있다고 보았다. 신규탁은 성철의 또 다른 대표작인 󰡔본지풍광󰡕을 근거로 임제선풍을 잇는 성철선의 특징을 (1) 옛 조사 들의 언구를 의심하여 실답게 참구하여 확철대오할 것을 강조, (2) 남의 언구에 매 이지 않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중시, (3) 무심사상의 선양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면 서 신규탁은 ‘임제선’의 경우는 무심보다는 ‘돈오’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고, ‘성철 선’의 경우는 ‘돈오무심사상’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무심사상’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고 말하면서 성철선의 특징을 한 마디로 돈오무심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강경구는 성철선의 성격을 ‘돈오원각론’, ‘실참실오론’, ‘구경무심론’으로 구분하고 있 다 성철이 강조하는 중도와 무심이 통섭될 수 있는 근거도 이러한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50) 退翁 性徹, 󰡔백일법문󰡕(서울: 장경각, 2014), p.189.

    51) 退翁 性徹, 위의 책, p.35. 

 

그는 중도사상으로 불교의 핵심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또 성철은 평소에

“나는 󰡔선문정로󰡕와 󰡔본지풍광󰡕, 이 두 권의 책으 로 부처님께 밥값 했다. 이 두 책을 제대로 터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 면 나를 바로 아는 사람일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들 두 책과 󰡔백일법문󰡕에서 ‘견성’과 ‘성불’을 동일시하면서 ‘견성즉불’(見性卽 佛) 53)과 ‘무념무심’(無念無心) 54) 그리고 ‘보임무심’(保任無心) 55)을 강조하였 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붓다의 ‘중도연기’와 원효의 ‘중도일심’과 관련 해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중도무심’(中道無心)의 기호로 명명해 볼 수 있 을 것이다.

성철은 󰡔육조단경󰡕의 ‘무라는 것’[無者]에 대해 풀이하면서 무심과 무 념을 달리 해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무심(無心)을 ‘마음이 없다’, 또 무념(無念)을 ‘생각이 없다’고 해석하였는데 ‘없다’고만 하면 그것은 단견 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없는[無] 마음이요 없는[無] 생각입니다. 일체 진 로가 없고 두 가지 상이 없는 생각[念]이니 이 념은 진여의 작용이 됩니 다. 즉 무념이라는 것은 양변이 떨어진 진여의 념이니, 이것이 실지로 쌍 차쌍조한 중도정각입니다. 그러니 무념이 즉 중도이고 중도가 곧 무념이 며, 진여가 즉 무념이며 무념이 즉 진여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무란 생멸 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쌍차가 되고 념이란 쌍조가 되어 항사묘용(恒事 妙用)인 진여대용(眞如大用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 56)이라고 강조하였다.

 

    52) 退翁 性徹, 앞의 책, pp.371~372.

    53) 退翁 性徹, 󰡔禪門正路󰡕 제1장 「견성즉불」(서울: 평화당, 1982; 장경각, 1992); 강경 구, 󰡔성철선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정독 선문정로󰡕(서울: 장경각, 2022).

    54) 退翁 性徹, 󰡔백일법문󰡕 제8장 「선종사상」(서울: 장경각, 2007, 제11쇄), p.255.

    55) 退翁 性徹, 󰡔선문정로󰡕 제11장 「보임무심」(서울: 장경각, 1992.

    56) 退翁 性徹, 󰡔백일법문󰡕 제8장 「선종사상」(서울: 장경각, 2007, 제11쇄), p.255. 

 

성철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쌍차와 쌍조는 󰡔반야경󰡕과 󰡔중론󰡕 등의 반야경론에서 주로 등장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선법의 교학적 토대인 삼 론학에서는 이 용어를 자주 원용하고 있다.

여기서 생멸(生滅), 상단(常 斷), 일이(一異), 래거(來去) 등 상반된 여덟 개의 개념을 모두 부정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 來不去)는 쌍차(雙遮)의 문구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불생불멸, 불상부 단, 불일불이, 불래불거 등 상반된 여덟 개의 개념을 모두 긍정하는 생멸, 상단, 일이, 래거는 쌍조(雙照)의 문구라고 할 수 있다.

성철은 선의 교학적 토대인 이들 삼론학의 쌍차와 쌍조 개념을 원용 하여 자신의 살림살이를 구축하고 있다.

즉 쌍차와 같이 무(無), 불(不), 비(非) 등의 부정어를 수반하는 표현을 중도라고 부른다.

비유비무와 같 이 유와 무의 이변 모두를 부정하는 쌍차의 표현도 중도이지만, 비유, 무 생, 부단 등과 같이 어느 한 쪽만 부정하는 표현도 중도라고 부른다. 57)

 

     57) 김성철, 󰡔승랑,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서울: 지식산업사, 2010). 

 

이처럼 중도란 ‘없다’[無], ‘않다’[不], ‘아니다’[非]와 같은 ‘부정’이고, 유와 무의 이변 모두를 부정하는 ‘비판’이고, 어느 한 쪽만 부정하는 표현인 ‘반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교단 정화(淨化)를 보았 고 선종 사상을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철의 중도를 원효의 중도에 견주어 보면 유(有, 속제)와 무 (無, 진제), 비유비무(雙遮, 속제중도)와 역유역무(雙照, 진제중도)를 넘어선 차조동시(비진비속)이자 진공묘유(무변무중)의 중도라고 할 수 있다.

 

2. 가무심과 진무심

 

성철은 무심을 가무심과 진무심으로 구분하고 의식 속에 아직 티끌이남아있는 무심(無心)을 넘어 제8식의 삼세상까지 넘어선 구경무심(究竟無 心)을 거론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쌍차와 쌍조를 넘어 차조동시와 진공묘유로 중도의 의미를 재천명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해된다.

 

‘정혜(正慧)로써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 이 세간은 무 (無)가 아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집’(集)은 사성제의 집제(集諦)를 말 합니다. 연기법의 순관(順觀)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내용을 ‘집’이라고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일어나 생겨난다는 말입 니다. 누구든지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생겨나기 때문 에 세간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여실히 세간 의 집(集)을 관한다’[正觀生]라고 합니다. 생기하는 법을 바로 보면 없다 는 견해가 설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없음이 아닌 것’[非無]입니다. 없다는 견해는 틀렸다는 말입니다. 또 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세간의 없어짐을 보면 결국 있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실히 세간의 멸을 관한다’[正觀滅]고 합니다. 없어짐을 바로 보면 있음이 아닌 것[非有]이 어서 있다는 견해는 틀린 것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없어지 는 것을 보고 무견을 가지고, 또 모든 것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유견을 가집니다. 유견에서 볼 때는 무견이 틀렸고, 무견에서 볼 때는 유견이 틀 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유견과 무견의 변견에 집착 하는가? 그것은 이리저리 생각하는 사량분별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것을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량분별에 의지해서 있는 것에 집착하고 없는 것에 집착하면 모든 것에 집착하고 맙니다. 여기에 사로잡히기 때 문에 변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이 변견의 원인 이 됩니다. 세상에 변견이 생기는 것은 사량분별과 집착 때문이므로 부 처님 제자라면 집착심을 버리고 모든 사물에 주착(住著)하지 않아야 합 니다. 나[我]라는 아견(我見)을 고집하는 사량분별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분별심을 떠나서 보면 세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즉, 불생불멸입니다. 고통이 생기면 생긴다고 보고 고통 이 없어지면 없어진다고 그대로 봅니다. 이것은 그저 생멸을 본다는 것 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때의 생멸은 변견의 생멸이 아니기 때문입니 다. 세간에서는 분별심으로 생멸을 보지만 여기에서는 집착하는 분별심 을 떠나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분별심에서 보는 불생불멸의 생멸입 니다. 58)

 

     58) 退翁 性徹, 󰡔백일법문󰡕(서울: 장경각, 2014), pp.153~154. 

 

여기서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한다[正觀生]와 ‘여실히 세간의 멸 을 관한다’[正觀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철은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 심을 넘어 바른 지혜[正慧]로 ‘바로 보면’[正觀] 있음과 없음의 치우친 견 해[邊見]를 넘어설 수 있다고 하였다.

그가 무심과 무념을 ‘마음이 없다’ 거나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이 푸는 것이 아니라 ‘없는 마음’과 ‘없는 생 각’으로 푸는 것은 ‘유’의 상대로서의 ‘무’라는 사량분별을 넘어서기 위해 서이다.

성철은 마음이나 생각을 부정하는 ‘무’를 ‘없음’이란 명사로 푸는 것이 아니라 ‘없는’이란 형용사로 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있음’과 ‘없 음’이라는 상대가 끊어진 상위의 ‘무’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분별심 을 떠나서 보면 세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불생불 멸이라고 역설한다.

그 결과 성철은 무분별심에서 보는 불생불멸의 생멸 을 강조해 간다.

 

 ① ‘모든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집착하지도 않으면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쌍차(雙遮)입니다.

 ②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니 생멸을 바로 보는 대긍정 즉 쌍조(雙照)가 됩니다.

 ③ 머물 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므로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면 곧 진공(眞空)입니다.

여기에서 묘유(妙有)가 생깁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 하면 생한다고 보고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변견의 생멸이 아니라 묘유(妙有)의 생멸이고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의 생 멸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광명(光明)한 것이니, 쌍차한 쌍조입니다.

차원 이 다른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 에도 의지하지 않고 조사에도 의지하지 않아서 오직 무주심(無住心), 즉 구경의 반야심만 남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정견(正見)이 나옵니 다. 의지함이 없으니 완전한 진공(眞空)이고, 의지함이 없는 반야가 생겼 으니 진정한 지혜가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정견이라고 합니다. 정견의 내용 역시 모든 집착심을 버리고 생멸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한 쌍조, 즉 진공묘유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59)

 

     59) 退翁 性徹, 󰡔백일법문󰡕, p.154.

 

성철은 ‘유’[속제]와 ‘무’[진제]를 부정하는 ‘쌍차’(속제중도)와 ‘유’[속제] 와 ‘무[진제]를 긍정하는 ‘쌍조’(진제중도)를 각기 설한 뒤에 다시 이들을 아우르며 나아가 ‘쌍차한 쌍조’를 차조동시이자 진공묘유로 보고 있다.

 

양변을 떠난 것이 중도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는데, 그러나 양변을 다시 쌍조하여 양변이 살아난 것을 지금 학자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연구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의 서적을 봐도 양변을 떠난 쌍차는 잘 드러나 있지만 쌍조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밀의(密 意)로써 은밀히 말했다고 하면서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실은 비밀한 뜻으로써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정하신 후에 다시 분명하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한다고 보 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바로 보는 이것이 정견이다’라고 긍정하면 서 화반탁출(和盤托出)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부처님이 다시 또 뒤집어 서 이야기합니다.

 ① 모든 것은 있다는 견해, 즉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변견은 한 가지 극단이고   ② 모든 것은 없다는 견해, 즉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어떤 실체가 없어서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세상 사람들의 변견은 또 다른 극단이라 고 하면서 다시 변견의 근본인 유와 무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 은 어떻게 하시는가?

 ③ 부처님은 존재에 영원성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양극단의 변견을 떠나서 중도에 대해 설법합니다. 이것이 비유비무 (非有非無)이고 역유역무(亦有亦無)인데, 역유역무가 바로 역생역멸(亦生 亦滅)입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났습니다. 앞 문장에서 ‘마음의 의처 (依處)에 집착하거나 계사(計使)되어서 아(我)라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집 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이 양극단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 것이 진공이고 쌍차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가 생기면 생한다고 보고, 고 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는 것’이 묘유이고 쌍조입니다. 이것을 비유비무이 면서 역유역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역유역무를 역생역멸이라고도 합 니다. 60)

 

    60) 退翁 性徹, 󰡔백일법문󰡕, pp.154~155. 

 

성철의 이러한 인식은 원효의 속제(소집상), 진제(시각의 원성실성), 속 제중도(의타상), 진제중도(본각의 원성실성), 비진비속무변무중의 중도 다 섯 겹으로 전개되는 무이 중도와 상통하는 대목이다.

성철은 양변인 유 견과 무견을 넘어서서 비유비무와 역유역무의 중도를 제시하면서 역유역 무가 곧 역생역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쌍차한 쌍조로서 진공의 묘유를 역설하고 있다.

 

부처님은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십이연기를 끌어다 증명하고 있습 니다. 이것을 증명중도(證明中道)라고 합니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방식은 생(生)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생(亦生)이고 역유(亦有)입니다. 또 십이연기를 다 말하고 난 뒤에 ‘전 (全) 고온(苦蘊)의 집(集)’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집제를 바로 보는 사람 은 무견(無見)이 없다고 했으므로 비무(非無)를 말한 것입니다. 집(集)을 바로 보는 사람은 무견이 없다 했으니 비무이고, 생(生)을 바로 보는 사람 은 역생이니 무견이 없습니다. 역생이 곧 비무이고 비무가 곧 역생입니 다. 역생이 곧 역유이니 비무가 내용적으로 역유가 되며, 생을 바로 보는 것이 곧 집을 바로 보는 것인데 그것이 비무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한 가지 말이 두 가지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멸을 바로 보는 사람은 유견(有見)이 없다 했으니, 이것이 비유(非有)입니다. 멸을 바로 보는 것이 비유(非有)인 동시에 멸을 바로 보는 것이, 역멸(亦滅)입 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연기의 역관(逆觀)과 순관(順觀)을 모두 들어서 중 도라고 했습니다. 연기의 내용이 비유비무(非有非無)이면서 또 역유역무 (亦有亦無)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 번 설명을 들어봐야 알 수 있지 당장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61)

 

성철은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것을 증명중도라고 하였다.

그는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순관이므로 ‘역생’이고 ‘역유’이며 ‘비무’인 반면, 멸성제는 십이연기의 역관이므로 ‘역멸’이고 ‘역 무’이며 ‘비유’이다.

그러면서 성철은 「가전연경」을 근거로 십이연기의 역관과 순관 모두를 들어 중도라고 하므로 연기의 내용은 비유비무이면서 역유역무62)라고 해명하고 있다.

 

     61) 退翁 性徹, 󰡔백일법문󰡕, pp.156~157.

    62) 󰡔雜阿含經󰡕 「迦旃延經」(󰡔대정장󰡕 제2책). 63) 退翁 性徹, 󰡔백일법문󰡕(2014), pp.157~158. 

 

흔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를 시간적으로 생사윤회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데, 생사윤회하는 과정으로 보는 연기관은 후대의 한 가지 해석 은 될 수 있을지언정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의 참뜻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해석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란, 연기가 곧 중도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연기를 삼세이중인과(三世二重因果)로 이해하면서 생사윤회 하는 시작적인 해석에만 중점을 두고,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바르 게 해석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남전이나 북전이나 부처님은 중도 를 설하고 난 뒤에는 증명중도(證明中道)로서 반드시 연기를 들고 있습니 다. 어째서 연기를 증거로 삼았는가는 좀 깊은 이야기여서 이해하기 어 렵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사람들도 이것이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 이미 말했지만 연기를 순관에서 보면 생을 바로 본다는 뜻인데 생(生)을 바로 본다는 것은 무견이 없다[非無]는 말이 되고, 또 연멸(緣滅)을 한다는 것 은 멸(滅)을 바로 본다는 말인데, 멸을 바로 보면 유견이 없습니다[非有]. 그래서 이것이 비유비무이면서 역유역무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가 아 니겠습니까? 연기는 쌍차쌍조의 근본원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아야 연기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삼세양중인과설로 연기 를 해석하면 연기를 근본적으로 잘못 보는 것입니다. 63)

 

성철은 시간적으로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삼세이중인과설을 부정하고 붓다는 중도를 설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증명중도(證明中道)로서 연기를  들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순관에서는 생을 바로 보기에 무견이 없고[非 無], 역관에서는 멸을 바로 보기에 유견이 없다[非有]고 하였다.

그래서 성철은 중도를 비유비무이면서 역유역무이다고 하였다. 연기는 쌍차쌍조 의 근본원리로 보아야 연기를 바로 본다고 역설하였다.

 

3. 쌍비쌍역과 쌍차쌍조

 

성철은 󰡔열반경󰡕의 쌍비쌍역을 근거로 유무의 양변을 넘어서는 중도 원리인 쌍차쌍조의 시원을 밝히고 있다.

쌍비는 양변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고 쌍역은 양변을 모두 긍정하는 것이다.

쌍차는 양변을 막는다는 것이니 양변을 떠나는 것이다.

쌍조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이니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다. 하늘과 구름으로 비유하면 쌍차는 양변을 완전히 떠났기에 하늘에 구 름이 걷혔다는 말이다.

이와 달리 쌍조는 양변이 서로 융합하는 것이니 해가 드러나 비치는 것이다.

쌍차는 양변을 막는다는 것이니 이것은 양 변을 떠나는 것이다.

쌍조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이니 이것은 양변이 완 전히 융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망견을 다 버리고 나면 자연히 쌍 조의 바른 이치가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바른 이치가 드러나 면 양변의 일체 망견을 버리지 않을래야 버리지 않을 수 없다64)고 보았 다.

 

     64) 退翁 性徹, 󰡔백일법문󰡕(2007), p.77. 

 

중도는 양변과 같은 모든 변견을 버리는 것이다.

성철은 계속해서 중도원리를 쌍비쌍역, 쌍민쌍존, 쌍차쌍조로 설명 한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한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기 때문에 중도라고 한다. 65)

천태 지의는 󰡔보살영락본업경󰡕을 원용하여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 쌍차쌍조를 그대로 말하였다.

이후 천태종은 두 변을 다 가리고[雙遮二 邊] 두 법을 다 비친다[雙照二諦]라고 하였다.

지의는 “원교란 이 중도를 나타내니 양변을 막는다.” 66)고 하였고,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 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양변을 다 비춘다.” 67)고 하였다.

 

    65) 󰡔涅槃經󰡕(󰡔대정장󰡕 제12책). ‘雙非雙亦’.

    66) 天台 智者. “圓敎者, 此顯中道, 遮於二邊.”

    67) 天台 智者, “心旣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

 

이러한 쌍차쌍조의 개념은 화엄종의 청량 징관이 즐겨 사용하였다.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쌍차와 쌍조라는 개념 이외에도 이제관, 평 등관, 중도제일의제관이라는 세 가지 관법으로 일체 수행상의 견지를 망 라하기도 하였다.

‘가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從假入空]을 이제관, ‘공에 서 가로 들어가는 것’[從空入假]을 평등관이라고 하고 이 두 가지 관법을 방편도라고 했다.

그리고 이 두 공관으로 인해 중도제일의제관을 얻어 이제를 쌍조하여 마음 마음이 적멸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4. 실제중도와 쌍민쌍존

 

의상은 󰡔화엄경󰡕(60권)의 요지를 210자로 압축한 「법성게」에서 실제 중도를 제시하였다. 실제(實際)는 중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구경에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는 부처 라 하네. 68) 

 

   68) 浮石 義湘, “窮坐實際中道相, 舊來不動名爲佛.” 

 

의상은 「법성게」의 마지막 구절에서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 불’이라고 하였다.

그의 실제중도관에서 볼 때 실제중도상은 부동불이다. 즉 중도를 성취한 사람이 부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상의 실제중도와 달리 현수 법장(643~712)은 지의의 쌍차쌍조를 피해 쌍민쌍존으로 즐겨 썼다.

 

쌍민은 쌍차의 다른 표현으로 모두를 버림, 쌍존은 쌍조의 다른 표 현으로 모두를 비춤을 뜻한다. 비춤에 나아가 가리고, 막음에 나아가 비추어, 양변을 다 비추고 양변을 다 막아서, 온전히 밝혀 하나로 꿰면, 이것이 화엄 종취에 들어맞게 된다. 69)

 

     69) 淸涼 澄觀. “卽照而遮, 卽遮而照, 雙照雙遮, 圓明一貫, 契斯宗趣.” 

 

법장은 화엄종의 종취를 ‘즉조이차’와 ‘즉차이조’를 넘어 ‘쌍차쌍조’하 여 ‘원명일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차조에 자재해야 화엄의 종취 인 중도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쌍민(雙泯)은 양쪽이 다 없어졌다는 말이고, 쌍존(雙存)은 양쪽이 다 있다는 듯입니다. 쌍민쌍존도 쌍차쌍조도 같은 말입니다.

양쪽이 완전히 없어지면 양쪽이 완전히 드러나는데, 드러나면 생멸하는 양변이 완전히 없어져 불생불멸의 절대적인 양변이 성립됩니다. 즉, 전체가 부정이 되면 결국 전체가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쌍존이나 쌍조는 두 개가 그대로 드 러나는 것입니다. 드러나면 쌍존은 보통 생멸 변견의 쌍존과는 다릅니다. 생멸의 쌍존은 서로 통하지 못하고 상극 그대로입니다. 있는 것은 그대 로 있고, 없는 것은 그대로 없습니다. 불은 영원히 불이고 물은 영원히 물입니다. 그러나 쌍민하는 쌍존이나 쌍차하는 쌍조는 양쪽이 완전히 드 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통하는 쌍존이어서 두 개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융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멸 변견의 쌍존은 유는 유 이고 무는 무라고 고집해서 서로 통하지 못하지만, 쌍차한 중도의 쌍조는 유가 곧 무이고 무가 곧 유이며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이어서 완전히 서로 상통합니다. 결국 쌍조라 하는 것은 원융무애한 것을 말합니다. 모 든 것이 다 융합됩니다. 그러면 물질적으로도 물을 불로도 쓸 수 있고 불을 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서로 상극된 자기의 변견을 고집하면 서로 안 통 합니다. 언제든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중도 입장 에서 보면 서로 시비를 다 버립니다. 서로 시비를 버리면 완전히 한 덩어 리가 됩니다. 한 덩어리가 되면서 서로 융통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상극 모순과 투쟁은 영원히 없어져 버리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가 실현됩 니다. 영원한 평화라는 것은 싸움을 그친 데서 나오는데, 싸움을 그치려 면 양변을 떠난 중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중도를 실천하지 못하면 싸움 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화쟁(和諍)이라고도 합니다. 싸움 을 그치고 화합이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중’(中)이라는 말도 화합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그것도 중도를 내포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중도는 쌍차쌍 조하고 쌍민쌍존해서 원융무애하게 서로 화합합니다. 이것은 깊고 깊어 서 평생 듣는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깨쳐야 압니다. 중도는 선·교를 통 해서 일관된 최고 원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평생 동안 설법하신 것도 모두 일관되게 중도에 의지하였습니다. 70)

 

     70) 退翁 性徹, 󰡔백일법문󰡕(2014), pp.111~112.

 

중도는 ‘민’(泯)과 ‘존’(存), ‘차’(遮)와 ‘조’(照) 등으로 양변을 여의는 것 인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다.

성철은 쌍민하는 쌍존, 쌍차 하는 쌍조, 쌍차하는 중도의 쌍조로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를 중도사상으로 보고 있 다.

그는 그래서 이 모순 상극인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걸림 없는 자유의 세계, 해탈·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원통자재한 중도에 입각해야 한 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성철은 양변을 떠나 가운데[中]에도 머물지 않는 중도사상 만이 오직 참다운 극락세계를 이 현실에 실현케 할 수 있을 것71)으로 보 았다.

 

    71) 退翁 性徹, 󰡔백일법문󰡕(2004), p.76.

 

이처럼 그는 붓다가 평생을 일관되게 중도를 설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또한 중도를 강조하고 있다.

 

5. 차조동시 진공묘유

 

성철은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에서 보면 일체의 차별 망 견이 스스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 의 중도원리에서 보게 되어 일체의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고 하였 다.

그는 양변을 버리는 쌍차와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는 쌍조를 넘어 차 조동시의 진공묘유가 된다고 하였다.

성철은 현수 법장의 󰡔화엄오교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

“정념(情 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를 버리니 정념이 스스 로 없어진다” 72)

 

     72) 賢首 法藏, 󰡔화엄오교장󰡕(󰡔대정장󰡕 제35책). “反情 理自願, 據顯理 情自亡.” 

 

는 구절을 원용하며 쌍민과 쌍존 즉 쌍차와 쌍조를 풀어 내고 있다.

그는 정념(情念)을 버리는 것은 ‘차’(遮) 즉 막는다, 버린다는 것이며, 정리를 따르는 것은 ‘표’(表) 즉 드러난다, 융합한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화엄종에서 ‘차’와 ‘표’를 가지고 중도를 표현하듯 ‘차’는 쌍차를, ‘표’는 쌍조를 말한다.

성철은 중도원리를 쌍비쌍역, 쌍민쌍존, 쌍차쌍조로 설명하여도 이해 하기 곤란하다면, 이를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라고 하였다.

그 는 진공이란 쌍차, 쌍민, 쌍비이니, 이 진공이란 유에 상대적인 공이 아닌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이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 공(斷滅空)에 떨어지면 공에 떨어진 외도[落空外道]가 되고마니 그것도 변견이다.

그러한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가 된다고 하였다. 묘유란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 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묘유가 성립된다며 이것이 쌍조, 쌍존, 쌍역이다73)고 하였다.

성철은 대부정하여 대긍정이 된다 하니 그 긍정을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묘한 있음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 고 마구니와 부처가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며 묘유가 쌍 조이니 진공 묘유를 바로 알 것 같으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雙融]하여 진공하면 묘유요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으며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이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고 한다.

쌍차가 즉 쌍조요 쌍조가 즉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이다.

이렇게 중도에 대한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꼭 같 은 것이다74)고 하였다.

 

    73) 退翁 性徹, 󰡔백일법문󰡕(2004), p.79.

    74) 退翁 性徹, 󰡔백일법문󰡕(2004), p.80. 

 

이처럼 성철은 쌍차쌍조하고 차조동시하는 이 중도 원리는 어느 종교 나 어느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입장이라고 보았다.

이 렇게 보면 그는 쌍비쌍역, 쌍차쌍조, 쌍민쌍존, 차조동시, 진공묘유를 통 해 붓다의 중도연기와 원효의 중도일심을 이어 자신의 중도무심을 펼쳐 갔음을 알 수 있다. 

 

Ⅴ. 원효와 성철의 중도관

 

1. 원효의 중도일심

 

원효는 붓다의 중도연기를 계승하여 중도일심 개념으로 자신의 철학 을 보여주었다.

신라 성립의 󰡔금강삼매경󰡕은 반야 중관의 이제설과 유가 유식의 삼성설을 일미적으로 통섭하여 일미관행과 십중법문(十重法門)의 구도 아래 일심과 본각, 시각과 본각이 둘이 아닌 일각이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효는 대승 선관을 담고 있는 이 경전이 중관의 이제 설과 유식의 삼성설이 어떻게 접목되는지 잘 보여주는 경전으로 파악하 였다. 75)

그리하여 그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중관의 이제설과 유식의 삼 성설의 통섭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붓다가 대력보살에게 삼공(三空)을 밝히는 대목에 대해 원효는 ‘공상 도 공한 것’[空相亦空]이며(진짜금을 버려 장엄구를 만드는 것), ‘공공도 공한 것’[空空亦空]이며(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단지를 만드는 것), ‘소공도 공한 것’[所空亦空]이다(이제를 녹여 일법계/일심을 나타낸 것)고 하였다.

이 ‘삼공 이제’를 원효의 삶에 배대하면 그는 속제 가운데에서 진제를 깨쳐 다시 속제로 돌아왔고, 다시 돌아온 속제중도의 삶을 또다시 진제중도의 삶으 로 이끌어나갔다.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귀일심원’은 진제중도에 상응하 고, ‘요익중생’은 속제중도에 상응한다.

그리고 그는 무이 중도의 삶을 제 시하여 붓다의 삶을 사는 길을 열어 보였다. 76)

 

     75) 高榮燮, 「분황 원효 󰡔금강삼매경론󰡕의 주요 내용과 특징」, 󰡔불교철학󰡕 제7집, 동국 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2020.10.        76) 高榮燮, 위의 글, 위의 책, 2020. 

 

원효는 처음 공의 문 안에서 버린 ‘속제’의 소집상(所執相, 변계소집성) 과 두 번째 공 가운데에서 녹인 ‘속제’인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성), 처음 문 안에서 속제를 버려 나타난 진제(遣俗所顯之眞, 속제중도)와 두 번째 공 가운데에서 속제를 녹여 나타난 진제(融俗所顯之眞, 진제중도)를 오직 하 나이자 둘이 없는 원성실성(唯一無二, 圓成實性)이라 하였다. 그리고 세 번 째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77) 무 이 중도의 삶으로 보았다.

이것을 도표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三空二諦 俗諦(遣俗諦) 眞諦(融俗諦, 空相) (소집상) (시각의 원성실성) 1. 空相亦空: 진짜금을 버려 장엄구를 만드는 것 俗諦中道(遣俗所顯之眞) (의타상) 2. 空空亦空: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단지를 만드는 것 眞諦中道(融俗所顯之眞) (본각의 원성실성) 3. 所空亦空: 이제를 녹여 일법계/일심을 나타낸 것 無二中道(非眞非俗無邊無中) 이처럼 원효는 ‘속제’(변계소집성)와 ‘진제’(空相, 시각의 원성실성)의 이 제 구도에 다시 ‘속제중도’(空相亦空, 의타기성)와 ‘진제중도’(空空亦空, 본각 의 원성실성)를 시설하고 여기서 다시 나아가 비진비속무변무중(所空亦空, 非眞非俗無邊無中)의 중도의인 ‘무이 중도’로 나아가는 과정을 열어보였 다. 그가 속제의 소집상과 진제의 (시각의) 원성실성, 속제중도의 의타기 성, 진제중도의 (본각의) 원성실성, 속제중도와 진제중도가 둘이 아닌 비 진비속 무변무중의 무이 중도를 배대하고 있는 점78)은 주목되고 있다. 79)

 

   77) 元曉, 󰡔金剛三昧經論󰡕(󰡔한불전󰡕 제1책, 639하~640상).

   78) 元曉, 󰡔金剛三昧經論󰡕 권중(󰡔대정장󰡕 제34책, p.983하).

   79) 김영미, 「원효 󰡔금강삼매경론󰡕의 무이중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논문, 2017, pp.270~ 234 274 참조.  

 

여기서 무이는 속제(변계소집성)와 진제(시각의 원성실성), 속제중도(의 타기성)와 진제중도(본각의 원성실성)를 아우르는 비진비속무변무중의 중 도를 가리킨다.

속제는 속제를 버리고 진제를 드러내는 견속현진(遣俗顯 眞)으로, 진제는 진제를 융합해 속제중도를 만드는 융진위속(融眞爲俗)으 로, 속제중도(依他起性)는 진속이제를 뛰어넘은 평등한 초지 이상의 경지 에서 진제중도를 만들며, 진제중도(본각의 圓成實性)는 속제중도를 융합하 여 진제중도로 만드는 융속위진(融俗爲眞)으로 나아가 무이 중도를 실현 한다.

이처럼 원효는 ‘견’(遣)을 써서 버리고 ‘현’(顯)을 써서 드러내 ‘견’과 ‘현’에서 자유로운 무이 중도를 드러낸다. 80)

 

     80) 高榮燮, 「분황 원효와 인각 일연의 화엄학과 선학 이해」, 󰡔불교철학󰡕 제12집, 동국 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2023.4.

 

붓다의 ‘쾌락 탐닉의 길과 고행의 길’, 양변을 넘어서는 중도연기를 원효는 양 극단을 넘어서는 중도와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인 일심을 결합하여 ‘중도일심’의 개념으로 입론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이 어 성철 또한 유와 무의 양 극단을 넘어서는 중도와 가무심이 아닌 진 무심인 구경무심을 결합하여 ‘중도무심’의 개념으로 자신의 사상을 입론 하였다.

 

2. 성철의 중도무심

 

성철의 중도무심 개념은 󰡔본지풍광󰡕81)의 ‘덕산탁발’(德山托鉢) 법문의 첫 번째 항목에 나타난 그의 총평적 안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81) 退翁 性徹, 󰡔本地風光󰡕(평화당, 1982.12); 󰡔本地風光·說話: 무엇이 너의 본래면목 이냐󰡕(1997.10.20 초판; 2020.6,20 개정판 1쇄)는 ‘덕산탁발’의 제1칙부터 ‘양기려자’ 의 제91칙까지 되어 있으며, 落穗法語로 9편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여기서 중도를 개진하고 있지만 중도가 존재자의 치우침 없는 본래마음인 일 심(지원)이며 그 일심(지원)은 가무심이 아닌 진무심 즉 구경무심이라는 점에서 중도와 무심의 통섭인 중도무심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지풍광󰡕이 집성하고 있는 성철의 상당법문은 일정한 구성 양식을 보여주는데 대략 여섯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1. 선문의 주요 공안을 주제로 삼아 그 공안에 대한 성철의 총평적 안목을 드러낸다.

2. 공안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성철의 안목을 덧붙인다.

3. 해당 공안의 관문을 열거하면서 그 공안의 가치를 평가한다.

4. 해당 공안에 대한 역 대 선종 종사들의 안목을 소개하면서 중간 중간 성철 자신의 평가를 간 략히 덧붙인다.

5. 해당 공안과 이에 대한 역대 종사들의 안목에 대한 성철 자신의 평을 붙이면서 마무리 한다.

 

필자가 임의로 나누어 본 여섯 항목 가운데 법문에 따라서는 생략된 항목들도 있고 항목의 순서가 바뀌 는 경우도 있다. 82)

 

    82) 박태원, 앞의 책, pp.569~570.

 

박태원의 여섯 가지 구성 양식으로 구분해 보면 아래 와 같다.

법상(法床)에 올라 주장자를 잡고 한참 묵묵한 후에 말씀하셨다.

 ① 이렇고 이러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해와 달이 캄캄하도다.

 ②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 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며 가을 국화 누렇 도다.

 ③ 기왓장 부스러기마다 광명이 나고 진금(眞金)이 문득 빛을 잃으 니, 누른 머리 부처는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고 푸른 눈 달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④ 이 도리를 알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 며, 이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삼두육비(三頭六臂)이니 어떠한가?

 ⑤ 붉은 노 을은 푸른 바다를 뚫고 눈부신 해는 수미산을 도는도다.

 ⑥ 여기에서 정 문(頂門)의 정안(正眼)을 갖추면 대장부의 할 일을 마쳤으니 문득 부처와 조사의 전기대용(全機大用)을 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시 둘째 번 바가 지의 더러운 물을 그대들의 머리 위에 뿌리리라. 83)

 

      83) 退翁 性徹, 󰡔본지풍광󰡕(2004), pp.11~12.

 

성철의 상당법문을 그의 중도관에 입각해 여섯 가지 구성 양식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① 부정(속제) _ 쌍비/쌍차/쌍민/비유비무 ... 이렇고 이러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해와 달이 캄캄하 도다.

 ② 긍정(진제) _ 쌍역/쌍조/쌍존/역유역무 ...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으니 까마귀 날고 토끼 달리며 가을 국화 누렇도다.

 ③ 부정종합(속제중도) _ 쌍비/쌍차/쌍민/비유비무 ... 기왓장 부스러기마다 광명이 나고 진금이 문득 빛을 잃으니, 누른 머리 부처는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고 푸른 눈 달마는 가만히 고개 를 끄덕인다.

  ④ 긍정종합(진제중도) _ 쌍역/쌍조/쌍존/역유역무/진공묘유 ... 이 도리를 알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며, 이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삼두육비(三頭六臂84))이니 어떠한가?

 

   84) 八明王 중 不動明王과 愛染明王의 모습을 가리킨다. 이들은 기괴한 형상과 성난 얼굴로 악마를 항목받고 국토와 백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⑤ 여실/정견(비진비속) ...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뚫고 눈 부신 해는 수미산을 도는도다.

   ⑥ 마무리(무변무중) ... 여기에서 정문(頂門)의 정안(正眼)을 갖추면 대장부의 할 일을 마 쳤으니 문득 부처와 조사의 전기대용(全機大用)을 보겠지만, 그렇 지 못하면 다시 둘째 번 바가지의 더러운 물을 그대들의 머리 위 에 뿌리리라.

 

위에 보이는 성철의 중도관을 원효의 중도관에 대응시켜 보면

 ① 부 정(속제) _ 쌍비/쌍차/쌍민/비유비무

 ② 긍정(진제) _ 쌍역/쌍조/쌍존/역유 역무

 ③ 부정종합(속제중도) _ 쌍비/쌍차/쌍민/비유비무

 ④ 긍정종합(진제 중도) _ 쌍역/쌍조/쌍존/역유역무/진공묘유

 ⑤ 여실/정견(비진비속)

 ⑥ 마 무리(무변무중)가 될 것이다.

여기서 ⑤ 여실/정견(비진비속)과 ⑥ 마무리 (무변무중)는 무이 중도로 종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철의 중도관을 원효의 중도관에 즉자적으로 대응시키기는 쉽지 않 다.

하지만 붓다의 욕망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연기를 이은 원효 의 중도일심에 견주어 보면 성철의 중도무심도 유무의 양극단을 떠난 중 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붓다의 중도와 연 기가 상통하고 원효의 중도와 일심이 상통하고 성철의 중도와 무심이 상 통하듯이 붓다의 중도연기와 원효의 중도일심과 성철의 중도무심도 상통 하고 있다.

원효와 성철은 중도의 연속성을 표방하면서도 각기 일심과 무심의 기 호를 통해 불연속의 층위를 개척해 감으로써 저마다의 독자성을 보여주 었다.

만일 붓다의 중도사상을 원효와 성철이 계승하기만 했다면 이들을 철학자이자 사상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원효와 성철은 붓다를 계승하면서도 각기 일심과 무심을 통해 철학하고 사상함으로써 붓다의 중도연기를 이어 중도일심과 중도무심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었다. 그리 하여 이들은 불교사상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Ⅵ. 매듭짓는 말

 

지금까지 분황 원효(617~686)와 퇴옹 성철(1912~1993)이 천 삼백 여년 의 간극을 뛰어넘어 고타마 붓다(기원전 624~544)의 중도연기의 가르침을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전개했는지 그리고 이들 사이에 어떠한 연속성 과 불연속성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중도’를 깨쳐 각자(覺者)가 되었고 ‘연기’를 발견해 견자(見者)가 되었다.

이 때문 에 고타마 붓다의 깨침은 ‘중도연기’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중도는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본래마음’(일심지원)이며, 연기는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존재원리’이다.

분황 원효는 중도 개념을 풀어내면서 일중도관, 중도제일의제, 중도 제일의제관, 중도일미, 무이중도, 중도법, 중도일실, 중도정혜명 등 다양 한 용어를 제시하고 있다.

원효는 ‘진금을 녹여서 장엄구를 만들고’(속제, 진제), ‘장엄구를 녹여서 금단지를 만들며’(속제중도), 이제를 녹여 일법계/ 일심을 나타낸(진제중도) 일련의 비유를 통해 속제(소집상), 진제(시각의 원 성실성), 속제중도(의타상), 진제중도(본각의 원성실성)를 아우르면서 비진 비속무변무중지중도 즉 무이중도를 제시하고 있다.

원효가 보여주는 중 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존재자의 본래마음인 일심(지원)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반야 중관의 이제설과 유가 유식의 삼성설의 무이적 통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섭은 일법계 즉 일심(지원)을 나타낸 것이며 이 일심(지원)은 중도와 아울러 ‘중도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퇴옹 성철은 󰡔열반경󰡕의 쌍비쌍역을 근거로 하여 유무의 양변을 넘어 서는 중도의 원리인 쌍차쌍조의 시원을 밝히고 있다.

쌍비(비유비무)는 양 변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고 쌍역(역유역무)은 양변을 모두 긍정하는 것이 다.

쌍차는 양변을 막는다는 것이니 양변을 떠나는 것이다.

쌍조는 양변 을 비춘다는 것이니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다.

성철은 중도의 근 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에서 보면 일체의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 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의 중도원리에서 보 게 되어 일체의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양변을 버 리는 쌍차와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는 쌍조를 넘어 차조동시의 진공묘유 가 된다고 하였다.

성철은 무심을 가짜 무심과 진짜 무심으로 구분하였 는데 이것은 그가 창안한 독자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는 의식 속에 아직 티끌이 남아있는 무심(無心)과 제8식의 삼세상까지 넘어선 구경무심(究竟 無心)을 거론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그는 중도와 무심의 통섭인 ‘중도 무심’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철학사상을 구성하였다.

원효와 성철은 중도의 연속성을 표방하면서도 각기 일심과 무심의 기 호를 통해 불연속의 층위를 개척해 감으로써 저마다의 독자성을 보여주 었다.

만일 붓다의 중도사상을 원효와 성철이 계승하기만 했다면 이들을 철학자이자 사상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원효와 성철은 붓다를 계승하면서도 각기 일심과 무심을 통해 철학하고 사상함으로써 붓다의 중도연기를 이어 중도일심과 중도무심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었다.

그리 하여 이들은 불교사상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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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Bunhwang Wonhyo's Middle-Way One Mind and Toeong Seongcheol's Middle-Way No-Mind — Buddha · Wonhyo · Seongcheol’s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

Ko, Young-seop / Prof, dept of Buddhist studies, Dongguk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Bunhwang Wonhyo’s (芬皇元曉, 617–686) “middle-way one mind” thought and Toeong Seongcheol’s (退翁性徹, 1912– 1993) “middle-way no-mind” thought, which draws from Buddha’s (624–544 BC) “middle-way dependent origination.” This article examines the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among these three ideas. Gotama Siddharta became an enlightened person (覺者, awakened one) by realizing the middle way and a seer (見者) of truth by discovering the dependent origination. For this reason, Gotama Buddha’s enlightenment can be called a middle-way dependent origination. Buddha’s middle way is the unbiased fundamental mind (One Mind) of all beings, and the dependent origination is the unbiased principle of all beings. Bunhwang Wonhyo utilizes various terms while explaining the concept of the middle way, such as “contemplation of one middle way,” “middle-way ultimate truth,” “contemplation of the middle-way ultimate truth,” “the middle-way single taste,” “the non-dual middle-way,” “the  principle of the middle way,” “the middle-way one truth,” and “middle-way samādhi-prajñā.” Wonhyo explains both the conventional truth aspect of “making accessories by melting gold” and the conventional-truth middle-way aspect of “making a pot of gold by melting accessories.” He then explains the aspect of the ultimate truth middle-way, which dissolves the two truths aforementioned, and represents the one-dharma realm/one mind. Next, he explains conventional truth, ultimate truth, conventional truth middle-way, and ultimate truth middle-way through a series of metaphors. As a result, he presents the middle-way wisdom of neither ultimate nor conventional, neither edge nor center, in other words, a non-dual middle way. The middle way shown by Wonhyo was another expression of the one mind, the fundamental mind of an entity that is not biased toward either extreme. This can be said to be a non-dual harmonization of the two-truth system of the Madhyamaka school and the three-nature system of the Yogâcāra school. This harmonization represents the one-dharma realm or the one mind, which can also be called the middle-way one mind along with middle way. Toeong Seongcheol reveals the origin of the idea of “blocking both and illuminating both (雙遮雙照)” which is the middle-way principle that goes beyond both sides of presence and absence, based on the idea of “denying both and recognizing both (雙非雙亦)” in the Nirvana Sutra. The idea of “denying both (雙非)” means denying both existence and non-existence (非有非無). The idea of “affirming both (雙亦)” means affirming both existence and non-existence (亦有亦無), that is, recognizing both sides. Blocking both sides (雙遮, Ssangcha) means leaving both sides of denying both and affirming both. Illuminating both sides (雙照, Ssangjo)  means recognizing both sides of denying both and affirming both and fusing them into one. Seongcheol said that, if all things are viewed through the right principle,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middle-way, all discrimination and false views disappear by themselves. In such a case, all discrimination and ignorance will disappear by itself as it is seen in the middle-way principle of illuminating both sides that fuse into one. He asserted that in that case, it goes beyond the two ideas of blocking both sides and fusing both sides into one and becomes the state where “true emptiness is marvelous existence (眞空妙有),” the state of blocking and illuminating at one time (遮照同時). Seongcheol divided the no-mind (無心) into fake no-mind (假無心) and real no-mind (眞無心), which are unique terms he created. Fake no-mind (假無心) refers to the state of mind in which defilements still remain in consciousness, and the real no-mind (眞無心) refers to ultimate no-mind (究竟無心), which completely transcends even the three subtle defilements of the eight type of consciousness. He structured his philosophical thoughts around the concept of the “middle-way no-mind,” which is the conciliation of the middle-way and the no-mind. Wonhyo and Seongcheol advocated the middle-way continuity, but each showed their own uniqueness by pioneering a layer of discontinuity through the terms “one mind” and “no-mind.” If Wonhyo and Seongcheol had only inherited Buddha's middle-way thought, they could not be called philosophers and thinkers. While Wonhyo and Seongcheol inherited Buddha, they pioneered their own ideas through the one-mind and no-mind, respectively, and were able to open the world of the “middle-way one mind” and “middle-way no-mind” following Buddha's “middle-way

 

원고접수: 2023-10-02 심사완료: 2023-10-18 게재확정: 2023-10-2

 불교철학제13집(2023.10.31)

 

분황 원효의 중도일심과 퇴옹 성철의 중도무심 ― 붓다·원효·성철의 연속과 불연속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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