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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배신인가, 덫에 걸려 넘어진 것인가?-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막 14:27-31, 66-72)다시 읽기/이서영.한신大

Ⅰ. 서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 못지않게 마가복음에서 가 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14:66-72에서 갑자기 예수의 배신자 로 전락하는 베드로일 것이다.

마가복음 서두부터 예수가 잡히는 겟세마 네까지 베드로의 행적을 따라온 독자에게 베드로의 배신은 충격이다.

비 록 안식일 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였 지만, “나를 따라오라”(1:17)라는 예수의 부름에 모든 삶의 관계와 생산 기반을 버리고 따라온(10:28)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사건은 베드로 자신에게도 예상 못 한 충격(14:72)이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독자들에게 베드로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을 준다.

예수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였고 갈등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예수 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마가복음의 유일한 인물(8:29)이었고, 변화산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하는 하늘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9:7).

대제사장이 예수를 심문하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예수를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였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 다’(14:31)라고 장담하며 수제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했던 베드로 가 배신했으니 독자들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고 베드로를 멀리하겠다 다짐할 수 있지만,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과 베드로를 갈릴리에서 다시 만 날 것(14:28; 16:7)을 암시하고 있으므로 독자는 베드로와 단절하지 못한 다.

더욱이 3:14은 부활 이후 교회의 전승(고전 15:6-8; 갈 1:18; 2:8-9)을 따라 마가복음도 베드로를 포함한 열두제자가 가진 교회 지도력을 인정 하여 그들을 “사도”로 언급하고 있다.1)

 

     1)  마가복음에서 열두제자를 사도라 부르는 곳은 3:14과 6:30이다. 특히 3:14의 주요 사본(א B Θ f13 syhmg co)은 “οὓς καὶ ἀποστόλους ὠνόμασεν”(사도라 불리는)을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사본은 열 두제자를 사도(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로 칭하는 누가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Bruce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hellschaft, 1994), 69. 사도는 초기 교회의 용어로서, 본문비평의 이러한 판단은 열두제자의 사도직을 강조하는 초기교회의 영향이 필사자에게 전달되었음을 방증한다. H. D. Betz, “Apostle,” The Anchor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2), 1:309–11; 로버트 굴리히/김철 옮김, 『마가복음 1-8:26』, WBC 34상 (서울: 솔로몬, 2001), 284. 초기교회 사 도에 대하여 다음을 참조. 이상목, “초기 교회의 사도: 형성기 기독교의 다양한 사도/사도직 이해 에 관한 역사적 논의,” 「신학사상」 173 (2016), 37-71.

 

부활 이후 마가복음은 예수를 부 인한 베드로와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며 그들의 권위를 변호하고 있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도록 독자를 설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배신한 베드로를 통하여 독자는 제자 교육에 실패한 예수를 상상할 수 있다.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첫 과제였 던 제자 만들기(1:16-20)가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제자들의 도망, 베드로의 부인과 혼자 버려진 예수를 통하여 독자 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위기를 직감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신뢰 성이 무너질 위기 앞에서 마가는 베드로의 기억(14:72)을 이용하여 제자 들의 흩어짐과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로 독자는 예수의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 수의 성공적인 예언 성취를 목격하고 예수를 더 신뢰하게 된다.

반대로, 많은 마가복음의 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는 독자 로부터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고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가 된다.

이처럼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 속 마가복음의 화자는 베드로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데 실패하고 배신한 베드로 는 본받을 수 없고 비난받을 만한 인물이지만, 화자는 독자들이 베드로 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의 울음으로 베드로를 향한 독 자들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베드로에 대한 화자의 이중적 태도 앞에, 본질적으로 마가복음이 가진 부인한 베드로에 대한 관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의 배신을 비난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하는 것인가?

베드로의 배신은 예수의 예언 성취만을 강조하는 마가복음의 문학장치인가?

마가공동체는 베드로와 같은 부인과 배신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 는가?

필자는 위 질문의 답을 예수가 베드로의 배신을 예언하는 중에 언급 한 σκανδαλίζω(스칸달리조, 넘어지게 만들다, 14:27, 29)2)에서 찾는다.

 

     2)  σκανδαλίζω(막 4:17; 6:3; 9:42-47; 14:27-29)의 문자적 의미는 ‘넘어지게 만들다, 죄를 짓게 하다, 죄를 유발하다, 충격을 주다, 모욕감을 주다’ 등이 있다. BDAG, s.v “σκανδαλίζω.” 

 

마가 는 σκανδαλίζω의 수동태를 이용하여 폭압적 권력에 무너지는 갈릴리와 유대의 피지배민(4:17; 9:42-47)의 상황을 설명한다.

환란과 핍박은 이들 의 삶을 넘어뜨릴 뿐 아니라, 자기 삶을 위하여 타인의 삶을 회피, 부인, 배신, 위협하도록 내몬다.

즉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을 자발적이고 능동 적인 선택과 행동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권력과 지배계급에 의해 내몰려진 수동적인 배신, 덫에 걸린 부인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이 사실이라면, 내몰려진 배신과 부인 그리고 이로 인하여 발 생하는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공격과 피해가 마가공동체에 혼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피해와 가해가 혼란하게 엮인 상황은 마가공동체가 풀어 야 하는 신학적 목회적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배신한 베드로를 향한 마가복음 화자의 이중적 태도에서 필자는 피해와 가해가 혼합된 마 가공동체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이에 대한 마가의 신학적 답을 찾고자 한다.

 

Ⅱ.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마가의 저항’ 혹은 ‘제자들의 몰이해’

 

마가복음 서사는 마태, 누가와 비교해 제자들의 실패를 더욱 강조하 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테오도르 위든(Theodre J. Weeden)과 베르너 켈버 (Werner H. Kelber)는 반(反)베드로·반(反)제자적 성격을 지닌 마가 이야기가 베드로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갈 1:18, 2:8-9)를 비판하는 논쟁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규명하였다.

위든에 따 르면,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의 정체성을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거부”한 사건으로, 이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총체적 실패를 드러낸다.3)

마가는 실 패한 제자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배신한 베드로와 예수의 화해 장면 을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긍정하는 초기교회의 주장에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4)

위든의 논지를 이어 켈버도 마가복음을 예수와 열두제자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과 분열의 서사로 규정한다.5)

 

    3)  Theodore J. Weeden, Mark: Tradition in Conflict (Philadelphia: Fortress, 1971), 38.

    4)  Ibid., 162.

    5)  베르너 켈버/서중석 옮김, 『마가의 예수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8), 123.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통해 대제 사장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긍정(막 14:62)한 예수와 베드로를 의도적으로 대조한다.

그 결과, 고난받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베드로는 예수와 화해할 수 없는 반대편에 서게 되고, 마가는 이를 통해 베드 로와 제자들의 실패를 날카롭게 고발한다.

나아가 켈버는, 마가의 이러 한 비판이 부활후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베드로와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가족을 중심으로 교회 지도력을 형성하고 하나님 나라를 권력화한 예루살렘 공동체(행 1:24-26; 2:14)를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한다.6)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도 마가복음이 예수의 고난 앞 에서 실패한 제자들과 베드로를 강조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위드 와 켈버의 주장처럼 마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와 예수의 화해를 삭제하 고, 독자에게 베드로의 실패만을 기억하도록 했다는 해석은 과도하다고 비판한다.

만일 마가복음이 부활 후 ‘사람의 어부’로서 베드로와 제자들 이 수행할 긍정적인 역할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제 자들의 실패에 대한 “넋두리가 되고, 예수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포 사 역에 실패한 사람으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7)

그는 베드로의 부 인에 관한 예수의 예언과 그 실현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임을 긍정하며, 마가의 목적은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8)

 

    6)  켈버, 『마가의 예수 이야기』, 124-25. 킴 듀이(Kim E. Dewey)에 의하면, 베드로의 저주(14:71)는 배신과 실패의 상징으로 마가는 이를 통해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에 균열을 일으키고, 예루살렘 권 력을 비판한다. Kim E, Dewey, “Peter’s Curse and Cursed Peter (Mark 14:53-54, 66-72),” The Passion in Mark: Studies on Mark 14-16, ed. by Werner H. Kelber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96-114; 제자의 몰이해와 배신으로 이해하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교회의 갈등은 다음을 참 조, Joseph B. Tyson, “The Blindness of the Disciples in Mark,” JBL, 80/3 (1961); 261-268.

    7)  레이몬드 E. 브라운/류호성 · 홍승민 옮김, 『메시아 죽음 I』(서울: CLC, 2018), 119-120.

    8)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orwn)은 예언이 성취되었기에 전승이 가능했을 것이라 설명한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추정하며, 그럼에도 이야기의 생생함을 위하여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 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Ibid., 998-1000, 1004. 베드로의 부 인에 관한 역사성은 다음 자료를 참조. Vincent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Palgrave, 1966), 550; Herron Robert. W., Jr., Mark’s Account of Peter’s Denial of Jesus: a History of Its Interpretation (Lanham: University of Press of America, 1992). 

 

즉 브라운은 초기교회의 갈등에 대한 마가의 논쟁적 상황보다 베드로의 실패 서사가 가진 신학적 이고 목회적 의미와 기능에 집중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실패는 독자에게 베드로의 예언이 아닌 예수의 예언과 진실함이 실현되었음을 증언하는 것이고,9)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와 고난 을 받아들여야 함을 역설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제자들에 대한 이해는 제자들의 긍정 혹은 부정적 성격 으로 표출되는 문학적 기능과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특히 제자들의 몰이해와 베드로의 실패는 공동체의 가르침을 위한 문학적 수 단으로 설명된다.

잭 킹스베리(Jack D. Kingsbury)의 평가처럼, 마가복음 은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 ‘모순적이고, 본질을 곡해하고, 지각이 없고, 겁쟁이며, 믿음이 없고, 변절’한 제자들에 대한 풍부한 예를 가지고 있 다.10)

그러므로 마가는 제자들을 독자를 위한 모범보다,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독자가 가진 “약점과 실패를 살필 수 있는 거울”로 제시한다.11)

독자는 제자들의 실패와 베드로의 부인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발견하 고, 예수의 제자도 가르침을 자신들을 위한 교훈으로 듣게 된다

. 따라서 어네스트 베스트(Ernest Best)의 주장처럼, 제자들의 실패와 몰이해를 통 하여 마가는 독자에게 진정한 제자도가 무엇인지 가르친다고 할 수 있 다.12)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치고(14:50) 부인 한(14:66-72) 제자들과 베드로를 목격한 독자는 제자들의 실패에 거리를 두고 자신들이라면 어떻게 할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13)

 

     9)  Ibid., 978.

   10)  J. D. 킹스베리/김근수 옮김, 『마가의 세계』(서울: CLC, 2003), 142.

    11)  Alberto De Mingo, “But It Is Not So among You”: Ecoes of Power in Mark 10, 32-45, JNSPSup 249 (London: T&T Clark, 2003), 34. 12)  Ernest Best, Following Jesus: Discipleship in the Gospel of Mark, JSNTSup 4 (Sheffield: University of Sheffield, 1981), 12.

    13)  데이빗 로즈, 조안나 듀이, 도널드 미키/양재훈 옮김, 『이야기 마가: 복음서 내러티브 개론』(서울: 이레서원, 2003), 343.

 

그리고 베드 로의 실패에 대한 마가의 진술은 실패를 이미 경험한 독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70년 이후 배교의 위협에 노출된 마가공동체(13:9-13)는 ‘실패한 베드로와 부활한 예수의 갈릴리에서 만남이라는 약속’(14:28; 16;7) 을 통하여 실패한 그들에게 “회개와 두 번째 기회가 가능”하다는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14)

제자들의 부정적 성격에 비추어 독자를 향한 의미를 추출하는 해석 은, ‘마가복음이 제자들의 몰이해를 비판한다’라는 전제 위에서 가능하 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하에서 독법은 제자들을 통하여 독자가 자기 모 습을 반추할 수 있지만, 독자는 제자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고 제자들을 본질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몇몇 학자는 마가복음이 제자들을 비판하지만, 그들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로버트 테너힐 (Robert C. Tannehill)에 의하면, 독자는 마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예수 와 적대적인 제자들을 보겠지만, 그렇다고 마가는 제자들을 완전히 버리 지 않는다.

마가 13장은 예수 때문에 제자들과 독자들이 예수와 같은 고 난을 직면할 것(13:9)이라 예언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14장에서 베드로가 마주한 어려운 곤경을 동정하며 이해할 수 있다.15)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 은 독자의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지만,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의 약속(16:7)을 통하여 독자들은 제자들과 베드로의 열린 미래를 상상하며 “제자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 게 된다.16)

 

    14)  데이비드 갈란드/신유수 옮김, 『마가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484;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1005. 윌프리드 헤링턴(Wilfrid J. Harrington)에 의하면, 독자들은 부활 후 갈릴리에서 만나자 는 예수의 예언에서 제자들과 자신들의 실패를 극복하는 신실한 예수를 발견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 Wilfrid J. Harrington, Mark: Realistic Theologian: The Jesus of Mark (Dublin: Columbia Press, 1996), 15.

    15)  Robert C. Tannehill, “The Disciples in Mark: The Function of a Narrative Role,” JR 57 (1977), 402-403; Thomas E. Boomershine, “Peter’s Denial as Polemic or Confession: The Implications of Media Criticism for Biblical Hermeneutics,” Semia 39 (1987), 47-68.

    16)  Tannehill, “The Disciples in Mark,” 403-404.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실패에 관한 해 석은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하는 마가의 논박을 추론하는 관점에서, 제자 들의 몰이해에 대한 문학적 기능과 의미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변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가가 실패한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적대적 으로 이해되거나, 비판과 동정이 교차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실패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개인적 차원에서 제자들의 실패를 전제하고 있다.

티모시 위아르다(Timothy Wiarda)는 베 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실패를

“예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확신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에서 찾는다.17)

 

    17)  Timothy Wiarda, Peter in the Gospel: Pattern, Personality and Relationship, WUNT 2/127 (Tubingen: Mohr Siebeck, 2000), 80-81; 킹스베리(Jack D. Kingsbury)는,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는 베 드로의 장담을(14:29-31) 자기 기만적 행동으로 평가한다. 킹스베리, 『마가의 세계』, 143. 

 

예수를 향한 불완전한 신뢰, 과시 적 충성, 맹목적 헌신, 충동적 맹세와 행동 등 개인의 신앙과 덕목의 차 원에서 베드로의 실패에 접근한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개인의 책임을 면책할 수 없지만,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 출하고 있음에도 위아르다를 포함한 많은 주석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가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할 때 “너희 모두가 걸 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πάντες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 판테스 스칸달리스테세스테, 14:27)”라고 외부적 영향에 의한 실패를 암시하였음에도 대부분의 해석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부인과 실패로 그 의미를 제한 한다.

따라서 필자는 베드로의 실패를 예언한 예수의 단어 σκανδαλίζω의 의미를 다시 이해하고, 베드로의 부인에 담긴 제자와 마가공동체가 직면 한 억압적 상황을 재구성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베드로의 실패에 대 한 마가의 동정과 동감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근 거를 제시할 것이다. 

 

Ⅲ. 너희는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 14:27)

 

1. 예언

 

마가가 예수 이야기를 전개하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건과 인물을 이해하도록 독자를 이끄는 문학 장치 중 하나는 예언이다.

미래 사건을 암시하는 예언을 통하여 독자는 사건의 전개 방향을 예측하고, 예언을 성취한 인물을 신뢰하며, 예언이 제시하는 관점에서 서사의 의미를 파악 한다.

다시 말해, 문학 장치로써 예언과 성취는 이야기 전개 방향을 결정 하고, 독자에게 의미 파악을 위한 결정적인 시각을 부여한다.18)

마가복 음에서 예언과 성취의 구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예수의 수 난과 죽음이다.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수의 세 번 예언(8:31; 9:31; 10:33- 34)은 마가복음 후반부 이야기의 전개 방향을 암시하고, 독자에게 예수 의 정체성과 제자도(8:31-38; 10:44) 이해의 관점을 부여한다.

특히, 14-16장에서 펼쳐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세부적인 서사도 예 언과 성취 구조를 따라 전개된다.

14:18에서 예수는 자기를 팔아넘길 한 명의 제자를 예언한 후, 14:27-31에서 스가랴 13:7을 인용하여 모든 제 자가 예수를 버리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내다본다.

예수 의 예언은 14:43-44의 유다의 배신, 14:50-52의 제자들의 도망, 14:66-72의 베드로의 세 번 부인, 16:7에서 부활한 예수의 갈릴리행으 로 실현된다.19)

 

    18)  로즈, 『이야기 마가』, 161-162.

     19)  R. T. 프란스/이종만 외 옮김, 『마가복음』, NIGNT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9), 910. 

 

이러한 예언과 성취의 구조는, 독자가 예수의 수난과 죽 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수가 주도적으로 통제하며 하나님 의 뜻을 완성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예언을 따라 사건의 성취를 해석하는 구조는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 를 전승하고 기록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수는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14:30)이라 예고하였 다.

그러나 마가의 본문은 첫 번째 닭 울음을 생략하고 두 번째 닭 울음 (14:72)만을 보고한다.

이러한 기록은 베드로가 첫 번째 닭 울음에서 예 수의 예언을 기억하지 못한 것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첫 번째 닭 울음 의 가능성을 추론하게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틈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이문(A C D K Δ Θ Ψc 067)은 첫 번째 여종의 질문 후에(16:68)

“그리고 닭이 울었다”

라는 구절을 첨가한다.

흥미롭게도 어떤 사본들은 14:30과 14:72의 “두 번”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닭 울음만을 기술하 여 예언과 성취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꾀하고 있으며,20) 마가를 참고한 마태(26:34, 75)와 누가(22:34, 61) 역시 닭 울음의 숫자를 언급하지 않는 다.

 

    20)  마가복음 14:30의 א D W 579 사본과, 14:72의 א C*vid L 579 사본이 이에 해당한다. 닭 울음과 관 련된 해석은 다음을 참조. J. W. Wenhem., “How Many Cock-Crowing? The Problem of Harmonistic Text Variants,” NTS 25 (1978): 523-525: D. Brady, “The Alarm to Peter in Mark’s Gospel,” JSNT 4 (1979), 42-57; Max G. Mills, “Peter’s Denials: Part 1: Importance Background Considerations,” Journal of Dispensation Theology 17/51 (2013), 112-117; 이진경, “닭은 두 번 울지 않았다,” 『신약논단』 24/3 (2017), 519-552.

 

또한 눈에 띄는 점은 예언대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였을 때 마가 는 ‘예언을 기억’하는 베드로를 묘사하고, 예수의 예언 구절을 다시 언급 하여 ‘베드로의 부인’보다는 ‘예수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다. 요약하면 마가복음의 화자는 독자에게 예수가 예언한 범위 안에서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고, 예수의 예언 성 취를 중심으로 베드로의 부인을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 로의 부인 이야기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의 예언 서사 를 정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는 예수(14:27-31)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독립적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14:27에서 예수는 스가랴 13:7을 인 용하면서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지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는데,  베드로의 부인 예고는 이 예언이 구체화 된 것이다.

따라서 14:27의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스칸달리스테세스테, 너희는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단 어의 이해는 예수가 어떤 관점에서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실패를 예 언하는지 안내한다.

 

2. 걸려 넘어진 것인가, 버린 것인가?

 

제자들의 실패와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고로 이름 붙여지는 14:27-31은 예수의 예언과 베드로의 예언 반박을 중심으로 아래처럼 두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다.

 

A: 모든 제자의 걸려 넘어짐에 대한 예언과 베드로의 반박

 

14:27-28   예수의 예언1  모든 제자가 걸려 넘어질 것이다 부활 후 예수는 갈릴리로 갈 것이다.

14:29      베드로의 반박1 모두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B: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예언과 베드로의 반박

 

 14:30    예수의 예언2                    닭이 두 번 울기 전 베드로의 세 번 부인

 14:31 베드로/제자들의 반박2    (베드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인하지 않을 것

                                                    (제자들) 그렇게 말했다.

 

A 부분은 ‘걸려 넘어짐’에 관한 예수의 예언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박이 짝을 이루고, B 부분은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의 예언과 역 시 이에 대한 베드로/제자들의 반박이 짝을 이룬다.

두 개의 예언은 분리 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예언’과 ‘예언에 대한 반박’이라는 공통 형식 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B의 예언은 ‘넘어질 것’(A) 이라는 예언을 부정하 는 베드로에게 반응하는 예수의 추가 예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 가 ‘걸려 넘어질 것’이라 예언하였을 때 베드로는 14:29에서 1인칭 대명 사 ἐγώ(에고, 나)를 이용하여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οὐκ ἐγώ, 우크 에고)”

라고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14:30에서 2인칭 대명사 σοι(소이, 너에게)와 σὺ(수, 너)를 동시에 언급하며 ‘너는’ 걸려 넘어져 예수를 부인할 것이라 강하게 예고한다.21)

따라서 베드로의 부인은 제자들이 걸려 넘어질 것이 라는 예언의 구체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부인에 대 한 해석을 위하여 마가의 예수가 수동태로 언급한 ‘걸려 넘어짐 (σκανδαλισθήσονται, 스칸달리스테손타이)’ 의미와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는 상 황은 어떠한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걸려 넘어짐의 헬라어 원형 σκανδαλίζω (스칸달리조)는 크게 두 가지 의 사전적 의미가 있다.

  첫째, 누군가를 넘어뜨려 실족, 실패, 몰락의 상 태에 빠지게 하는 ‘실족하게 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몰락하게 하다, 죄에 빠지게 하다’(to cause to be brought to a downfall, to cause to sin, 마 5:29; 막 9:42; 고전 8:13)의 의미이다.

   둘째, 행동으로 상대에게 충격, 놀 람, 동요를 일으키는 의미의 ‘충격을 주다, 경악하게 하다(to shock through word or action, 요 6:61)’이다.22)

특히, σκανδαλίζω의 명사형 σκάνδαλον (스 칸달론)이 덫(롬 11:9), 걸림돌(마 18:7; 롬 16:17; 계 2:14), 거리낌(고전 1:23; 갈 5:11)23)인 것을 고려할 때, σκανδαλίζω는 ‘누군가에게 고의적으로 덫을 놓고 공격하여 몰락하게 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24)

 

     21)  존 R. 도나휴 · 다니엘 J. 해링턴/조장윤 옮김, 『마르코복음서』, Sacra Pagina 2 (대전: 대전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016), 611.

    22)  BDAG, s.v. “σκανδαλίζω.”

    23)  BDAG, s.v. “σκάνδαλον.” 구약과 신약에서 σκάνδαλον은 믿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주로 사용되 고, σκανδαλίζω는 넘어지게 하는 행위를, σκανδαλίζομαι는 실제 추락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TDNT, 7:339-358, s.v. “σκάνδαλον, σκανδαλίζω.”

    24)  도나휴, 『마르코복음서』, 609. 

 

그러므로 σκανδαλίζω의 미래수동태인 σκανδαλισθήσονται는 ‘모든 제자들이 미래에 누군가의 공격이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상태를 예고한 것이다.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을 예언한 후, 예수는 스가랴 13:7을 인용하여 예언의 경전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는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이, 위협과 공격에 노출되어 해를 당하는 상황과 관련 있다는 것 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는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 질 것이다”

라고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한다.

사실 마가복음의 예수가 인 용한 스가랴 13:7의 문맥적 상황은 칠십인역(LXX)이나 마소라 본문과 다 르다.

이들의 독법은 다음과 같다.

“칼아 깨어 일어나서, 내 목자를 쳐라. 나와 사이가 가까운 사람을 쳐라.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칠십인 역이나 마소라 본문은 하 나님의 명령을 받은 칼이 불충한 목자들과 양 떼를 심판하기 위하여 치 는 상황을 묘사한다.

그러나 마가의 인용문은 목자를 치는 주체를 하나 님으로 바꾸어서, 유대 권력의 폭력적인 공격으로 발생하는 예수의 고난 과 죽음을 하나님 계획으로 이해한다.25)

그리고 폭력으로 예수를 잃게 되는 제자들은 양 떼로 상징되고, 목자이신 예수의 돌봄을 받지 못하여 ‘흩어지게 될 것’인데,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하에 있다는 것을 ‘흩뿌리 다, 쫓아버리다’를 뜻하는 διασκορπίζω (디아스코리피조)의 미래수동태 διασκορπισθήσονται (디아스코르피스테손타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로 예고된 다.26)

 

     25)  Ibid., 610.

     26)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240. 조엘 마커스(Joel Marcus)에 의하면, 예수가 스가랴를 기억하여 예 언할 수도 있지만, 마가 공동체가 그의 죽음과 고난 이해를 위하여 스가랴를 기독교적으로 성찰 하고 편집한 것일 수 있다. 조엘 마커스/장성민 옮김, 『마가복음 II』,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6), 1660.

 

즉, 예수가 예언한 제자들의 ‘걸려 넘어짐’(σκανδαλισθήσονται)의 미래 수동의 상황은 스가랴의 ‘흩어지게 되는’(διασκορπισθήσονται) 미래 수동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은 제자들의 자발적 행동이 아닌, 외부의 공격으로 그들이 버림과 도망의 상황에 타율적으로 놓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하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부활 후 예수가 그들과 다시 만나기 위하여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는 예언(막 14:28; 16:7)은 억압적이고 타율적인 상황 아래에서 부인하고 도망칠 수 있는 제자들을 오히려 이해하고 동정하는 예수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타율적 의미의 ‘걸려 넘어짐’에 대한 마가의 이해는 베드로의 부인과 유다의 배신 행위를 마가가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지 엿보게 한 다.

14:18에서 예수는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의 행위를 예언할 때 “팔아넘 길 것이다(παραδώσει, 파라도세이)”라는 미래능동태로 표현한다.

그리고 마 가는 유다의 배신이 타율적인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나 변명 을 전혀 기술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 면 좋았을 것이다’(14:21)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예수의 평가를 통하 여 마가는 유다의 배신에 어떤 동정도 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 예고(14:30-31)는 조금 다르다.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언 도 능동의 의미에서 “부인할 것이다(ἀπαρνήσῃ, 아파르네세, 14:30)”의 미래 중간태로 표시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 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의 예언적 전제를 통하여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이 타율적 상황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자신 이 실패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적극적으로 두 번이나 반박(14:29, 31) 하는 것으로, 마가는 유다처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행위가 아닌 우발적 상황에서 베드로가 걸려 넘어져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변 증한다.

마가는 분명히 베드로의 부인을 적어도 유다의 적극적인 배신과 다 르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14:27의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 (너희는 넘어지게 될 것이다)에 대한 몇몇 성서번역은 이러한 마가의 시각을 반영하 고 있지 않다.

아래 이에 대한 성서번역을 소개한다.

 

개역개정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새번역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새한글성경

그대들 모두가 걸려 넘어질 겁니다

 

NKJV

All of you will be made to stumble because of Me this night

 

RSV

You will all fall away

 

NRSV

You will all become deserters

 

위 번역을 보면, 14:27의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는 의미적으로 크게 두 가 지로 번역된다.

   첫째, ‘걸려 넘어질 것이다’ (새번역, 새한글, NKJV. RSV).

이 번역은 헬라어 본문의 사전적 문법적 의미를 잘 살려 제자의 넘어짐 이 그들의 의지와 별개로 벌어진 상황임을 보여준다.

  둘째, ‘버릴 것이다’(개역개정, NRSV)로 번역된다.

앞서 살펴보았지 만, 위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버리다”는 없다.

그럼에도 ‘버리다’로 번역 되는 이유는 14:30에서 예수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고, 14:50, 66-72에서 베드로가 도망하고 부인하였기에 이러한 서사적 결과가 역 으로 14:27의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 번역에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27)

 

    27)  이러한 번역 시각은 NKJV에서도 보이는데, NKJV는 A C2 K N W f 1, 13등 사본에 첨가된 “오늘 밤 나 때문에”라는 문구를 14:27에 첨가한다. 사실 “오늘 밤, 나를”의 단어는 14:30에서 예수가 베 드로의 부인을 예고할 때 등장한다. 즉 “오늘 밤 나 때문에”라는 문구를 첨가한 사본들과 NKJV 는 이후에 벌어진 베드로 부인 예고(14:30)와 부인 사건(14:66-72)의 관점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 다(14:27)’의 앞선 예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아 가 NRSV는 제자들을 ‘탈주병, 도망자, 유기자(deserter)’로 규정한다.

그 러나 “버리다”의 의미를 중심으로 번역할 때, 14:27의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 에 담긴 제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피동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 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제자들의 주체적 결정인 것처럼 해석된다.

앞서 논하였지만, 예수의 예언은 수난 서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관점을 제시한 다.

그러나, ‘버리다’를 중심으로 번역하면 벌어진 수난 사건을 역으로 수 난 예언에 적용하여 해석하는 꼴이 된다.

이는 마가의 서사의 방향과 해 석 의도를 거스를 수 있고, 수난 예언과 수난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가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라’ 예언한 의도 를 따라 성서를 번역하고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제 자들의 실패와 베드로 부인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통하여 마가는 예수를 적극적으로 버린 유다를 비판하는 시각으로 제자와 베드로를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따를 때 그들이 걸려 넘어질 상황과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 행동을 변증하며, 그들 역시 예수를 죽인 지배 권력의 강 요와 강압 아래 있음을 이해한다.

 

Ⅲ. 베드로의 예수 부인(14:66-72)

 

1. 걸려 넘어진 베드로

 

켈버는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통하여 마가가 베드로에 대한 기대 를 완전히 접었고 독자들을 베드로와 단절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 마스 부머샤인(Thomas E. Boomershine)은 1세기 공동체의 독법인 “구두 낭독”(oral recitation)의 관점으로 마가복음을 읽을 경우, 마가복음은 베 드로를 조롱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적 내 적 시각”(sympathetic inside view)을 제공한다고 반박한다.28)

 

    28)  Boomershine, “Peter’s Denial as Polemic or Confession,” 57, 59. 구두낭독(oral recitation)은 1세 기 공동체가 성서를 읽는 방식을 지칭한다. 1세기의 성서 읽기는 개인적이고 침묵 가운데 진행되 지 않았다. 성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동체와 함께 읽고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성서해석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목표와 의미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술 환 경에서 마가복음의 베드로는 청중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읽혔고 들려졌다는 것이 다.

 

마가는 예수 를 따르는 베드로의 여러 실수를 숨기지 않지만, 실수하는 베드로의 내 적 생각과 감정을 독자에게 드러내어 그를 향한 이해와 공감을 유도한 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있는 예수를 보고 허둥댈 때 마가는 “그들이 겁에 질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 다”(9:6)라고 그의 내적 상태를 독자에게 대변한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 에서 잠을 자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하여 마가는 서사적 논평(narrative comment) ― “그들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말 로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14:40) ― 을 더하여 그들의 외적 피곤함과 내 적 당혹감을 설명하고, 독자들이 그들의 감정과 생각에 접근하도록 돕는 다.29)

마찬가지로,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마가는 예수의 예언처럼 베드로가 어떻게 걸려 넘어져 예수를 부인하게 되고, 그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주어(14:72) 독자의 동정과 이해를 불러 일으킨다.

사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될 때 도망친 모든 제자(14:50-51)와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14:66-72)는 이후 마가복음에 더는 등장하지 않는 다.

그들은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처럼(4:16-17) 환란과 핍박 앞에서 넘 어진 실패한 제자로 평가받을 만하다.30)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을 단순히 무력한 패배자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체포 에 맞서 칼을 들고 저항하였다(14:47).

그리고 ‘모두가 걸려 넘어져도 자 신은 그렇지 않겠다’(14:29)라고 장담한 베드로는 예수의 재판이 벌어지 는 대제사장의 뜰에 홀로 따라 들어갔다(14:54).

비록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가는 베드로에게서 그가 가진 두려움과 생존의 본능을 확인할 수 있 지만, 마가는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려는 베드로의 담대한 성격도 분명히 보여준다.31)

 

     29)  Ibid., 57-58.

     30)  로즈, 『이야기 마가』, 340-341.

     31)  Adela Yarbro Collins, Mark: a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701. 

 

따라서 예수가 재판받는 공회에 침투하는 베 드로는 아직 예수를 버리지 않았고, 적어도 버릴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마가는 예수를 따르는 것 때문에 유대 권력의 덫에 걸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빠진 베드로를 증언한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로 들어간 후, 마가의 내러티브는 예수의 재 판 장면(14:55-65)으로 전환되고, 이후 베드로가 심문받고 예수를 부인하 는(14:66-72)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건 구성은 마가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유대 권력으로부터 심판받는 예수를 통하여 같은 권력 아래 심판받는 베드로의 재판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한다.

다시 말 해, 대제사장의 안 뜰 아래에서 벌어지는 베드로의 재판은 위쪽에서 진 행되는 예수 재판의 축소판으로, 대제사장의 종들이 대제사장의 심판 기 준을 따라 베드로를 심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신성모독의 죄로 사형에 처해 진다면(14:64), 예수를 따르는 베드로 역시 심문 결과에 따 라 같은 위협에 처할 수 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벌어지는 베드로에 대한 심문 강도는 갈수록 높 아진다.

먼저 여종이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인 가?”(14:67) 묻는다.

   두 번째, 같은 여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 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하나”(14:69)라고 단정하며 고발한다.

마지 막으로 곁에 있던 다수가 “당신은 갈릴리 사람이어서 분명히 그들 중 하 나라고”(14:70) 확신에 차서 베드로를 몰아붙인다.

심문은 사적 질문에서 공적 확신과 고발로, 사적 관계에서 집단적 연관성을 따져 묻는 방식으 로 강화되고, 나사렛과 갈릴리에 대한 지역적 경멸이 더해진 혐오의 재 판으로 변한다.32)

 

    32)  마커스, 『마가복음 II』, 1762: 도나휴, 『마르코복음서』, 650. 

 

위쪽 재판에서 고립된 예수가 유대 권력에 의하여 죽 음으로 몰린 것처럼, 아래 뜰에서 베드로도 강한 심문으로 점점 고립된 다. 결국 대제사장 세력의 강한 심문과 압력 속에서 베드로는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강화되는 심문으로 베드로의 대답은 점차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을 단순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내적 모호함과 흔들림을 함께 드러내어, 그의 부인이 강압과 위협 속에 진행되었음을 알게 한다.

첫 번째 심문에서 베드로는 여종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 다”(14:68)

라고 답한다.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베 드로의 혼란한 상태를 반영하지만,33) 그가 질문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이러한 애매함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가능성뿐 아니라 예수와의 관계를 내적으로 긍정하는 기류도 보여준다.

즉 그의 대답은 아 직 예수를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하고 싶지 않은 그의 상태를 대변한다.

이는 베드로가 첫 번째 대답 후 안 뜰 아래쪽(κάτω ἐν τῇ αὐλη, 카토 엔 테 아 우레, 14:66)에서 집의 출입구(τὸ προαύλιον, 토 프로아우리온, 14:68)로 자리를 옮기는 장면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강화되는 심문으로 안전하 지 않은 안 뜰에 머무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예수의 재판이 벌어지고 있 는 대제사장의 집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마음 내키지 않기 때문에 출입 구에 머무른 것이다.34)

출입구로 밀려난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를 따르고 자 하는 그의 결심이 심문의 덫에 걸려 곧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화자가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을 독자에게 알린 후(14:70), 베드로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14:71)라고 예수와의 관계 를 부정한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대제사장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그의 출신을 문제 삼고, 예수를 따른 그의 과거 행적을 압박 하여 캐물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제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강한 심문 앞에 베드로는 저주와 맹세까지 동원하여 “이 사람을 알 지 못한다”라고 세 번째로 부인한다.35)

 

     33)  브라운은 베드로의 첫 번째 대답 중 “… 하지 않고 … 하지 않는다(… οὔτε … οὔτε)”는 비문법적 표현으로, 이는 베드로의 복잡미묘한 상태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964-965. 존 R. 도나휴(John R. Donahue)는, 베드로의 혼란함을 표현하는 첫 번째 대답은 직접적 인 부인과 거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도나휴, 『마르코복음서』, 645.

     34)  마커스, 『마가복음 II』, 1761. R. T. 프란스(R. T. France)는 이러한 움직임을 ‘여전히 자신은 예수 와 함께 할 수 있다’ 자신하는 베드로의 허풍으로 읽는다. 프란스, 『마가복음』, 980.

     35)  아델라 Y. 콜린스(Adela Yarbro Collins)는 저주의 대상이 베드로 자신이라고 설명한다. Collins, Mark, 708. 프란스는 그 대상이 예수라고 주장하며, 이는 1세기 기독교인 박해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프란스, 『마가복음』, 982. 마가는 저주의 대상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았기 때 문에 그 대상이 예수인지 베드로 자신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필자는 저주의 대상에 베드로를 심문하는 사람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변호를 위하여 그들의 주장 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안 뜰 위에서 재판받는 예수를 사실상 분명히 부인하였다.

이로써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처럼 완전히 걸려 넘어졌고, 예수를 부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가는 베드로의 마지막 부인에서도 그의 내적 갈등을 함께 보여준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할 때 그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이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가 예수의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 하여 부정한다면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무리에게 자신의 의사를 더 확실 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름이 아닌 “이 사람” 이라 부르는 것으로 아직도 그가 예수를 부인하는 것에 갈등하고 있고, 예수와 단절하려는 의사가 없음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묘사는 베드로를 향한 독자의 비판을 모호하게 하고, 독자가 베드로를 떠나지 않도록 붙 잡는 기능을 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을 자발적이 고 적극적인 배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제사장의 정치 종교적 권력 아래 있는 하수인들의 압박과 심문으로 발생한 ‘걸려 넘어진 부인’ 으로 이해한다.

 

2. 베드로의 기억과 눈물

 

베드로의 부인을 ‘걸려 넘어진 실패’로 이해하는 마가는 베드로에게 적대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언행의 모호함을 서사적 전략으로 활용하여, 독자가 베드로의 불투명한 언어와 행동 이면 에 잠재된 내적 동기와 감정에 주목하도록 유인한다.36)

 

    36)  마커스는 ‘모호함’을 내러티브 간극으로 만들어지는 “전략적인 불투명성”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서사 기술은 독자들이 인물에 심리적으로 깊게 연루되게 한다. 마커스, 『마가복음 II』, 1760.

 

그리하여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평가를 유보하게 만들고, 비록 베드로를 긍정할 수 없지만, 예수를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한 외부환경과 그의 내적 갈등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베드로를 향한 부정적 태도를 유보한 마가는 이 이야기의 결말 (14:72)에서, 부머샤인이 언급한 베드로의 “공감적 내적 시각”을 두 가지 로 드러내어 독자가 베드로를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첫째,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의 예언을 증 명, 증언하는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세 번째 부인이 끝나자 예수가 예언 한 두 번째 닭울음이 들리면서 베드로의 기억은 예수가 그에게 한 예언 을 소환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 다”(14:30, 72).

 

베드로의 기억이 지향하는 내러티브의 목적은 분명하다.

베드로도 예수의 예언에 맞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 절대로 예 수를 부인하지 않겠다’(14:31)라고 자신만의 예언을 하였는데, 닭울음과 함께 소환되는 베드로의 기억은 예수의 예언은 옳았고 베드로의 예언은 틀렸음을 증명한다.37)

특히 부인 이야기의 결말에서 마가가 14:30의 예 언을 거의 정확하기 다시 인용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의 예언 성취’ 를 증명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흥미로운 점은, 예언을 기억하는 순간 베드로의 성격이 순식간에 예 수를 배신한 제자에서, 예언 성취를 증명하고 증언하는 제자로 전환된다 는 것이다.

14:27과 30절의 예수의 예언과 14:72의 예언의 성취는 베드 로의 증명과 증언을 통하여 연결되고 입증된다.

마가는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의 증언을 입증하는 중대한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나아 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과 성취 또한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 명하고 증언하는 중대한 역할이 추가된다.

사실, 이 사건 이후 베드로는 더 이상 마가 이야기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14:28의 또 다른 예언 ― “너희보다 먼저 갈릴로 갈 것이다” ― 이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증언하는 역할을 16:7에서 다시 부여받는다.

즉, 마가의 베드로는 예수 37)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978. 215 이서영 | 배신인가, 덫에 걸려 넘어진 것인가? -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막 14:27-31, 66-72) 다시 읽기 의 예언과 성취를 증언하고 증명하는 역할을 계속 이어간다. 그러므로 독자는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를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증명과 증 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4:72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듣는 독자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다”(14:28)라는 예수의 예언이 성 취되길 기대하게 된다. 마가복음 14:54-72의 샌드위치 구조는 베드로의 시각을 통해 예수 의 재판과 베드로 자신의 심문과 부인 이야기를 전달한다.

예수의 재판 은 14:54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의 재판을 지켜보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뜰로 들어갔을 것이다.

마가는 베드로의 목적을 명시하지 않지만, 마태 26:58은 베드로가 “결말 을 보려고” 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마가는 예수 재판 과정(막 14:55-65) 에서 벌어지는 예수의 혐의, 거짓 증언, 심문, 예수의 답변, 폭력 등을 진 술한다.

이어서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여기에서 베드로는 이 사건의 주체이자, 사건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목소리의 중심 이 된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은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에서 이러한 베드로의 관점과 목소리가 보이고 들리는 것은, 마가복음이 제자 들, 특히 “베드로의 개인 회상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승하였기 때문이라 고 설명한다.38)

이런 점에서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관점을 전달하는 이야 기가 많다(8:27-33; 9:5-6; 14:27-31; 14:54, 66-72).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이야기 역시 베드로의 자기 묘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 라 주장한다.39)

 

    38)  리처드 보컴/박규태 옮김, 『예수와 그 목격자들: 목격자들의 증언인 복음서』(서울: 새물결플러스, 2006), 280-285.      39)  Ibid., 296-296. 브라운도 이 이야기가 베드로의 직접 전승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브라 운, 『메시아 죽음 I』, 990-993. 이와 관련된 논쟁은 Craig L. Blomberg, Jesus and the Godspels: An Introduction and Survey (Nashville: Apollos, 1997), 124; Pheme Perkins, Peter: Apostle for the Whole Church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53. 

 

본 글에서 이에 대한 논쟁을 다루지는 않겠으나, 중요한 점은 마가가 유대 권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를 부정적으 로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증언하는 신뢰 있는 인물로 기억하고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마가는 14:72c에서 갑작스러운 베드로의 통곡을 보여주어 예 수의 제자로서 그의 내적 변화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앞서 보았던 예수 의 예언을 기억하고, 성취를 증명, 증언하는 베드로의 성격은 그가 다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한다.

그럼 에도 마가는 “베드로가 엎드리어 울었다”(ἐπιβαλὼν ἔκλαιεν, 에피발론 에크라 이엔)고 그의 감정을 독자에게 노출한다.

예수 예언을 증명하는 베드로가 예수의 신적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낸다면, 눈물은 그의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내적 변화의 가능성을 위하여 마가는 그의 울음을 크게 묘 사한다.

먼저 ‘울었다’의 동사 κλαίω (클라이오)는 격정적이고 비통한 울음 으로, 5:38에서 회당장 딸이 죽었을 때 사용된다.40)

베드로는 예수를 부 인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충격을 비통한 심정으로 통곡하는 것이다.

이 러한 충격의 크기를 더 강조하기 위하여 마가는 분사 형태로 ‘던지다’ (ἐπιβάλλω, 에피발로)를 첨가한다.

그런데 무엇을 던졌는지 목적어가 빠져 있어 다양한 논쟁이 있지만, 필자는 ‘베드로가 자기 몸을 던져 우는’ 것으 로 해석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현재 대제사장의 집 출입구(14:68)에 있으 므로, 자기 몸을 집 밖으로 던져 엎드리어 울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41)

마가의 이러한 묘사는 베드로의 동선이 대제사장의 안 뜰(14:66)에서 출 입구(14:48)로 이동하고, 마지막에 대제사장의 집 밖으로 몸을 던져 (14:72) 대제사장의 영역에서 나오는 것을 보여준다.42)

 

   40)  BDAG, s.v. “κλαίω”; 도나휴, 『마르코복음서』, 647;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980.

   41)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980-981을 참고.

  42)  마커스, 『마가복음 II』, 1757. 

 

독자는 이 그림에 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유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 수를 지키지 못하고 부인하였지만, 결국 그 올무에서 벗어나는 베드로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비통한 울음은 그가 앞서 ‘예수를 모른다’라고 부인한 그의 언어를 뒤집는 속내라 할 수 있다.

마가는 그의 울음 으로 베드로가 걸려 넘어진 상태에서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을 드러내어 독자가 베드로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더불어 마가는 베드로의 엎드려 우는 통곡에서 그의 변화 가능성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베드로의 ‘도덕적 상처’를 분석한 워렌 카터(Warren Carter)의 주장을 참고할 수 있다.43)

카터는 예 수를 부인하기 전 베드로를 ‘강한 신념으로 자신의 옳음을 확신하며, 인 간적 취약함에 흔들리지 않는” 성격으로 설명한다.44)

예를 들어, 갈릴리 바다 위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취약함을 지적하였지만, 베드로는 자기 취 약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를 부인한 순간 베드로의 신념과 도덕적 기준은 무너졌고, 이러한 자신에게 큰 상처와 충격을 받은 베드 로는 예수를 부인한 자신의 취약함을 마주하며 통곡한 것이다.45)

 

    43)  Warren Carter, “Peter and Judas: Moral Injury and Repair,” Exploring Moral Injury in Sacred Tests, ed. by McDonald Joseph (London: Jessica Kingsley Publishers, 2017), 151-168. 워렌 카터 (Warren Carter)는 베드로의 도덕적 상처를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4)  Ibid., 157.

   45)  Ibid., 161. 

 

곧, 이 전에 볼 수 없었던 그의 깊은 눈물의 반응은 그가 모른 척 지나쳐 온 취 약한 자아를 마음으로부터 인식하며 마주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여주어, 부활 후 예수와 함께 베드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투 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전과 다른 감정의 반응을 목격한 독자는 그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예수의 예언 성취를 증명하는 베드로를 목격한 독자는, 그가 걸려 넘어진 배신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 라 그것에서 빠져나와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마지막 예언 성취 ― 갈 릴리에서 만남(16:7) ― 를 증명하는 베드로를 기대할 것이다. 

 

Ⅳ. 결론: 걸려 넘어진 자들의 공동체

 

마가는 베드로를 반대하거나 저주하는 관점에서 베드로의 부인 이야 기를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가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권력에 의하여 넘어지는 베드로를 동정하며, 그의 겉으로 드러난 언행과 내면의 진심이 다를 수 있음을 다양한 문학 장치를 이용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 마가는 베드로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공동체가 베드로와 거리 를 두기보다, 그의 생각과 감정을 공감하고, 나아가 베드로의 상황 속에 서 자신의 처지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브라운은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이야기가 기원후 60년대 중반 로 마에 있었던 교회의 박해와 배교 상황 속에서 공동체를 권면하는 데 유 용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클레멘트 1세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를 인용하여, 베드로가 죽었을 네로의 핍박 기간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다 른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46)

이러한 배경에서 베 드로의 위기는 마가 공동체가 직면한 배교와 배신의 위기를 반영하고, 베드로에 대한 동정적 서술은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공동체적 격려로 기능했을 것이다.47)

 

   46)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1005.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네 로는 자기-인식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였다. 그때 그들의 정보에 의해서 다른 수많은 이 들이 단죄되었다.” Tacitus, Ann., 15.46.

  47)  브라운, 『메시아 죽음 I』, 1005. 219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며 필자는 여기에 마가 공동체의 구체적 상황 을 조금 더 추정해 보고자 한다.

만약 배교와 배신의 위기가 공동체를 강 타하였다면, 그 안에는 배신한 ‘가해자’와 배신을 당한 ‘피해자’가 동시에 존재했을 것이다.

베드로처럼 배신하고 밀고한 이들과 예수와 같이 배신 당한 이들이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가는 이와 비 슷한 상황을 13:12-13에서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음에 넘겨주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혐오 받는” 현실로 묘사한 다.

마가복음 13장에서 볼 수 있는 거대권력의 억압과 폭력의 디스토피 아적 상황과 트라우마의 환경이 지속될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은 많은 역사적 사례가 증명한다.48)

폭력이 폭력을, 배신 이 배신을 낳는 악순환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로, 가해자는 다시 피해 자로 전환되곤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의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묻 는 것은 거대 악의 구조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왜곡할 수 있다. 따라서 모 든 것을 관장하며 때로는 통치를 위하여 억압, 폭력, 배신, 복수의 구조 를 활용하는 거대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이 필요하다.49)

 

    48)  이에 대하여 다음 참조, 박두환, “마가복음 13과 하나님의 종말적 적대자,” 「신학사상」 123 (2003), 177-202. 마가복음의 트라우마 상황은 다음을 참조, 이서영, “여인들의 두려움에 관한 증 언-트라우마 이론으로 본 마가복음 16장 1-8절,” 「신학사상」 193 (2021), 15-59.

   49)  박명림, “인간비극과 인간이해 - 용서와 정의의 공전을 통한 통합치유를 향하여,” 『트라우마와 사 회치유』, 전우택, 박명림 편 (고양: 역사비평사, 2024), 318-321.

 

이와 같은 억압 구조에서 발생하는 공동체 내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마가공동체 안에 일어난 것 같다.

이는 앞서 살펴본 σκανδαλίζω (스칸달리조, 걸려 넘어지게 하다, 몰락하게 하다)를 능동형으로 사 용하는 9:42-50의 예수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작은 자 하 나라도 죄를 짓게 하는 누구라도”(ὃς ἂν σκανδαλίσῃ, 호스 안 스칸달리세) 목에 큰 멧돌을 달아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손, 발, 눈이 작은 자를 걸려 넘어뜨린다면 찍어 버리라 명령한다.

이는 종교 적, 정치적 권력에 아래 신음하는 작은 자들을 넘어뜨리고 몰락하게 하 는 가해행위를 예수는 철저히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베드 로와 제자들처럼(14:27) 권력에 의하여 걸려 넘어지는 사람을 품고 이해 하는 예수의 뜻을 방증한다.

따라서 마가는 권력에 의하여 ‘걸려 넘어져’ 공동체와 이웃과 가족을 향하여 해를 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그들을 연민과 이 해의 눈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작은 자들을 ‘걸어 넘어뜨리는’ 유대와 로마의 거대 악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이유로 마가는 걸려 넘어지는 작은 자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해, 동감 그리고 위로 의 서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는 공동체가 서로를 향한 연민과 이해 태도 를 유지하고, 복수를 복수로 갚지 않으며, 서로를 걸어 넘어뜨리기보다 는 “서로가 화목할 것”(9:40)과 “누군가를 향하여 적대시하였다면 용서할 것”(11:25)을 권면한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배신한 베드로를 향한 마가복 음의 이해와 관용의 태도는 공동체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을 차단하고, 예수와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이룰 화해의 공동체를 향한 신학 적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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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마가복음 14:27-31과 14:66-72의 베드로 예수 부인 이 야기를 서사비평적으로 분석하여, 마가가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저주하 지 않고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를 위 하여 14:27-31에서 사용된 σκανδαλίζω의 수동태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베드로와 제자들의 배신 행위가 개인적 능동적 의지에 의한 사건이 아님 을 논증한다.

이어 14:66-72에서는 베드로의 예수 부인 언행에서 드러 나는 내적 모호성과 갈등을 탐구하여, 그의 내면적 상태를 조명한다.

연구결과, 마가는 베드로의 부인을 연민과 이해의 시선으로 해석하며, 독 자가 그의 내적 갈등과 취약성을 공감하도록 이끈다.

또한 이 서사는 박 해와 배교의 위기를 겪던 마가 공동체의 현실, 공동체 내 가해-피해의 복잡한 관계, 디스토피아적 폭력 구조를 반영하며, 권력에 의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회복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걸려 넘어짐(9:42-50, 14:27-31, 14:66-72)과 관련된 예수의 가르침을 통 해, 마가는 공동체가 복수를 끊고 화해를 실천하도록 촉구한다.

마가의 베드로 서술은 공동체 내 상호 가해를 예방하고, 부활 이후 갈릴리에서 이루어질 화해 공동체를 향한 신학적 지향점을 드러낸다.

주제어 베드로의 부인, σκανδαλίζω, 걸려 넘어짐, 예언과 성취, 연민

 

Abstract

Betrayal or Stumbling into a Trap? — A Re-reading of Peter’s Denial Narrative (Mark 14:27-31, 66-72)

Seo-Young Lee( Assistant Professor, New Testament Studies Hanshin University)

This study conducts a narrative-critical analysis of Peter’s denial of Jesus in Mark 14:27-31 and 14:66-72, demonstrating that Mark does not condemn or curse Peter, but rather portrays him as one who “stumbles.” By analyzing the passive form of σκανδαλίζω in 14:27-31, the study argues that the betrayal of Jesus by Peter and the disciples is not an act arising from personal, active volition. In 14:66-72, the study examines the internal ambiguity and conflict revealed in Peter’s words and actions, shedding light on his inner state. The findings suggest that Mark interprets Peter’s denial with a perspective of compassion and understanding, guiding the reader to empathize with his inner conflict and vulnerability. Furthermore, the narrative reflects the realities of the Markan community experiencing persecution and the crisis of apostasy, the complex dynamics of perpetrators and victims within the community, and the dystopian structures of violence, while offering the possibility of restoration and reconciliation for those who inevitably stumble under oppressive power. Ultimately, through Jesus’ teachings related to causing others to stumble (9:42- 50; 14:27-31; 14:66-72), Mark urges the community to cease cycles of revenge and to practice reconciliation. Mark’s portrayal of Peter thus prevents mutual harm within the community and points toward the theological vision of a reconciled community in Galilee following the resurrection.

 

 Keyword Peter’s denial, σκανδαλίζω, stumbling, prophecy and fulfillment, compassion

 

논문접수일: 2025년 11월 30일    논문수정일: 2025년 12월 20일    논문게재확정일: 2025년 12월 20일 221 

神學思想 211집 · 2025 겨울

배신인가, 덫에 걸려 넘어진 것인가_ -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막 14_27-31, 66-72)다시 읽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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