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은 ‘민중 메시아’와 현대철학의 메시아론 사이 대화를 목적으 로 한다.
‘민중 메시아’를 둘러싼 논쟁은 민중신학이 태동할때부터 현재 까지 중요한 쟁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본고에서 ‘민중 메시아’를 둘러싼 주례사적 비평은 삼가고 그동안 진행되었던 ‘민중 메시아’를 둘러싼 쟁점 과 한계를 언급한 후에, 현대 급진철학자들이 구사하는 메시아담론과 ‘민 중 메시아’간 상보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메시아주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역에서 고통 과 부조리 가운데 있는 현실의 세계 속으로 도래하는 구세주에 대한 열 망이었다.
메시아가 이제 곧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다는 믿음은 현재의 고난을 견딜수 있게 하는 동기이자 환난 가운데서 미래를 희망케하는 종 교적 비젼이었다.
하지만 교회 역사에서 나타났던 메시아주의 현상은 아 름답지만은 않았다.
권력에 의한 타자를 향한 배제와 혐오의 도구로 메 시아주의가 동원되었던 시절도 있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한 비 판은 심심치 않게 있어왔다.
본고에서 다루게 될 인물들과 사상들은 기 존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과연 이 시대에 ‘메시 아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이들에게 실마리를 제공하 리라 본다.
이러한 취지하에 본론의 전반부는 불트만의 실존주의 성서해석과 케 리그마 신학을 넘어가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선사 한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은 ‘민중 메시아’로 마무리 된다.
논문의 후반 부는 발터 벤야민과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을 다 룬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기독교적 메시아주의를 비판하면서 대안적 메 시아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민중메시아와 어떻게 공명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 본고가 관심하는 바이다.
Ⅱ.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를 둘러싼 논란과 쟁점
이 장에서는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을 논한다.
우선 안병무 사상 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던 하이데거-불트만으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적 성서해석이 안병무의 사건론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밝힐 것이다.
‘민 중 메시아론’에 대한 이해를 사건론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회적이고 단선적인 사건 이해가 아니라 통전적이고 관계론적인 사건 이해가 민중사건, 더 나아가 ‘민중 메시아’ 속에 있기 때문이다. 70 神學思想 212집 · 2026 봄
1. 안병무, 불트만을 넘어서
김진호는 안병무 신학의 시대구분을 도모하면서 크게 민중신학 이전 과 이후로 나누고 그것을 실존주의에서 민중신학으로의 전환이라 명하였 다.1)
여기서 말하는 실존주의는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약학을 말하는 것 이다.
안병무는 하이델베르크 유학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불트만의 방법론을 거의 정확하게 배웠고, 실존주의까지 포함해서 그의 사고의 배후까지도, 그의 모든 것을 마스터했다고 생각합니다.”2)
주지하다시피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의 신학사상 에 있어 실존이라는 개념을 해석학적 틀로 사용하였다.
신앙은 역사적 지평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층위에서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성서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느냐 안 하느냐?”3)가 불트만에게 있어 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2천년 전 성서 텍스트가 쓰여지던 당시의 물음보다는 오늘 현재 성서 텍스트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트만에게 있어 ‘신을 말한다’함은 실존적 인 상황에서 내가 만난 신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실존 적 결단이 불트만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그래서 “신학은 인 간학이 되는 것이다.”4)
1) Jin-Ho Kim, “The Hermeneutics of Ahn Byung Mu: Focusing on the Concepts of Discovery of Intenrnality and Otherness of Minjung” in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 Edited by Yung Suk Kim and Jin-Ho Kim, (Oregon: Pickwick Publication, 2013), 13.
2)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22.
3)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54.
4) Ibid., 54.
하지만 그 순간 안병무는 불트만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불트만 이 말하는 실존의 의미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절대 무’처럼 새로운 해석 의 보편성 내지 척도가 되었다. 하이데거가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과한 후에 얻은 깨달음은 여타의 해석과 기준에 대한 무차별성과 무감각을 초래하였다.
그 깨달음이 토네이도가 되어 그 안으로 모든 것들을 수렴시 켜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였고,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불트만이 말하는 실존의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 자기 자신에게로만 몰입 하여 주관적 자기 체험에 갇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존의 역사 철학적, 사회참여적 의미가 증발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불트만의 해석 학은 세계와 역사의 상실을 초래하고 말았다고 안병무는 비판한다.5)
안병무는 불트만의 실존주의 해석학의 영향은 받았지만 ‘역사적 예 수’에 대한 끈은 놓치않았다: “학문적인 면에서는 역시 불트만이 결정적 이었어요. 나 역시 공관복음서를 공부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역사적 예 수’에 대해서만은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6)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오늘 성서를 읽는 독자의 실존적 결단이 과거의 성서 텍스트보다 우위에 있었던 반면, 안병무는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지 않았던 불트만의 성서해 석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역사적 예 수를 문제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가현설을 극복할 수 있단 말인 가? 역사적 예수를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관념밖에 없지 않은가?”7)
5) “불트만은 비정치적이죠. 그는 예수를 정치적으로 보지를 못해요. 예수의 십자가사건은 정치적 사 건으로 내 눈에는 분명히 보였고, 그런 시각이 나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에도 일관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23.
6) Ibid., 21-22.
7) Ibid., 22.
안병무는 불트만이 실존을 자기이해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과정에 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희생시켰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 탐구에 안병무는 매진했고 그 과정에서 민중을 발견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어떻게 안병무가 실존에서 민중으로 그의 신학적 화두를 옮겨 갔는지 추적하면서 민중신학의 중핵으로 점점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2. 케리그마 신앙에서 민중사건으로
예수가 우리와 함께 구체적 시간과 공간을 살다가 우리와 함께 죽었 고 우리와 함께 부활했다는, 그리고 부활한 예수가 세상 끝날 때까지 우 리와 함께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1970~1980년대 한국의 시대상 황속에서 안병무에 의해 민중신학이라는 동시대성의 언어로 번역되었 다. 안병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해석학적 틀이 실존에서 민중으로 바뀐 것은 그의 회고에 의하면 전태일 사건 이후다.8)
안병무는 전태일을 발화점으로 하여 오늘의 민중사건에서 성서의 민중이야기를 바라보았 고, 성서의 민중사건에서 오늘의 민중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성서의 내용 과 현실의 민중사건이 합류하는 해석학적 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 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 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그런데 물을 때에는 언제나 어떤 관심이나 전제를 갖고 묻는다. 관심이나 전제 없는 성서 해석은 없다.9)
민중사건을 성서해석의 전제로 받아들이며 안병무는 “태초에 케리그 마가 아니라, 오직 예수 사건만이 존재했다”10)고 말한다.
8)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257.
9) 안병무, “왜 성서를 사회학적으로 물어야 하나,” 안병무 편, 『사회학적 성서해석』(천안: 한국신학연 구소, 1983), 7.
10) Ahn Byung Mu, “The Transmitters of the Jesus-Event Tradition” in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 Edited by Yung Suk Kim and Jin-Ho Kim, (Oregon: Pickwick Publication, 2013), 29.
이는 불트만이 그의 『신약성서신학』 서문에서 밝힌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대상일 수 없고 그 전제’11)일 뿐이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강조점이 있는 케리그마 이전에 예수의 수난 사실 과 부활사건 자체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사건에서 케리그마로 이행 하는 것이 맞는 순서다. 안병무는 케리그마의 존재를 인정하나 그것은 후기에 속하는 것이고, 신약은 케리그마로 일관되어있지 않고, 케리그마 와 사건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있다고 보았다.12)
안병무는 케리그마를 교회 권력의 산물로 파악한다.
초대교회의 발 전과정에서 예수 사건에 대한 탈역사화. 탈정치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케리그마라는 것이다.13)
11) 루돌프 불트만/허혁 옮김, 『신약성서신학』(서울: 성광문화사, 1976), 1.
12) Ahn Byung Mu, “The Transmitters of the Jesus-Event Tradition” in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 Edited by Yung Suk Kim and Jin-Ho Kim, (Oregon: Pickwick Publication, 2013), 30.
13) Ibid., 47.
후에 케리그마는 예수를 경배와 예배의 대상으 로 격상시켰고, 급기야 예수는 ‘참 하나님 참 인간이었다’라는 초대교회 의 신앙고백을 낳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구원의 주체와 객체가 이분법적 으로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
예수는 신앙과 경배의 대상일 뿐이지, 이 땅 을 살아가는 민중들과 상호 교섭하고 연대하는 예수일 수 없다.
이러한 케리그마 중심의 교회가 궁극적으로 개인구원 일변도의 신앙을 낳은 것 이다.
안병무의 사건의 신학은 케리그마 신학에 대한 반동이다.
그는 사건 을 주관주의적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차원에 위치시킴 으로써 케리그마 일변도의 신학에 균열을 가했다. 물론, 안병무의 사건 의 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불트만으로 상징되는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2천 년전 팔레스틴 땅을 살다간 역사적 예수 사건과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초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사건, 그 리고 2026년 지금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을 연 결하는 개념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사건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역사를 초월하는 만남일지는 몰라도 역사적이지는 않다.
관계적 유비의 차원일지는 몰라도 진정 지금 의 역사와는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안병무는 실존 이라는 말 대신 ‘현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고,14) 오늘의 사건이 벌어 지는 구체적인 공간인 ‘현장’을 강조했다.15)
안병무가 말한 ‘현존’과 ‘현장’ 은 서남동이 말했던 ‘두 이야기의 합류’16)와 연관된다.
14) “불트만의 ‘실존’이 시간/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와의 만남의 사건에 강조점을 둔 개념이라면, 안병 무의 ‘현존’은 불트만의 실존 개념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확장/재해석하려는 함의를 갖는다.” 송기득, ‘철학적 실존과 성서적 현존’, 『현존』 10-11 (1970, 4-5), 김진호 편, 『예수 르네상스』(한국 신학연구소, 1996), 261에서 재인용.
15) “예수의 말보다는 ‘배고픈 민중의 현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중심에 놓아요. … 서구 신학자들처럼 민중의 배고픈 현장을 쑥 빼어버리고 예수의 말만을 중시하는 것과 사건을 먼저, 중심에 두는 나 의 방법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지요.”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31.
1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동연, 2018), 56-63.
이천 년전 예수 사 건과 오늘의 민중 사건이 만나 해석학적인 순환을 통해 지평융합의 발생 하는 곳이 민중의 현장이고 현존하는 메시아 사건이다.
지금까지 본고는 안병무의 사건론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요 약하면 이렇다.
사건은 그 전까지의 지식이나 관습과는 다른 어떤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 니라 철저히 당대의 다양성들, 즉 시대의 아픔과 고민으로부터 기인하는 사건이다.
안병무는 이러한 사건의 관계성과 역사성을 토대로 그리스도 사건과 민중 사건을 연결시켰고, 이 둘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민중은 자 기초월적 모습으로 나갔으며 그것은 ‘민중 메시아론’으로 만개하였다.
3.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
‘민중 메시아’는 서구 메시아론 시선에 보면 파격 그 자체라 할 수 있 다.
성육신한 예수가 일으킨 그리스도 구원역사를 유일회적 사건으로 고 백하는 케리그마 위에 교회의 2천 년 역사가 유지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민중 메시아’는 예수에게서 달성된 유일회적인 그리 스도 사건을 예수 한 개인의 서사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당시 예수와 만 나고 함께 더불어 동행하고 행동했던 민중(오클로스)까지를 함께 끌어들 여 민중사건으로 그리스도 사건을 해석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 메시아’는 민중사건을 2천년 전에 발 생했던 유일회적인 이벤트로 국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로 이어져 고 통과 저항의 한 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민중의 함성으로 이어져 살아있는 메시아 사건이 된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메시아론에 익숙했던 전통 신 학은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메시아라는 말이 인간 에게는 붙일 수 없는 신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젓 이 ‘민중 메시아’라는 말을 쓰는 안병무를 향해 민중신학에 대해 애정어 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몰트만조차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17)
안병무는 몰트만이 말한 “하느님을 모르면 사람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면 하느님을 모른다”를 인용하면서 같은 논리로 그를 향해 “민중을 모르면 예수를 모 르고 예수를 모르면 민중을 모른다”고 반박한다.18)
17) Jürgen Moltmann, “Minjung Theology for the Ruling Classes,” in his book, Expreriences in Theology: Ways and Forms of Christian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249-267.
18)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33.
몰트만의 ‘민중 메시아’에 대한 비판의 쟁점은 “예수가 민중”이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민중이 예수”라는 발언은 용납 못하겠다는 것 이다.
어찌보면 기존 신학의 문법에서 볼 때 당연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 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의 최대 관심사는 ‘인간의 구원은 어디서 부터 기인하는가?’였다.
우리가 신학을 고백과 증언의 언어라고 할 때,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계시와 신비에 대한 고백이고 증언일 것이다.
성 령의 임재(계시)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우리에게 새로 운 삶을 보장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는 주님 이고, 우리는 철저한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는 이러한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다면 민중은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
안병무의 답은 이렇다:
“민중은 민중사건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19)
이 말이 전통적인 주객 도식에 익숙했던 서구 신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구원의 객체인 민중은 없다.
민중이 구원의 주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민 중사건을 통해서다.
민중사건을 통해 민중의 메시아성이 확보된다는 말 은 구원을 개인의 차원이 아닌 집단적 차원으로, 개인의 고난을 공동체 의 고난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악’은 안병무에게 있어 개 인의 실존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구조적 차원으로 해석된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대전제로 하였다는 것은 곧 사탄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탄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탄 의 실체, 그것은 구조악입니다.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 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조악에 의해 속박당하고 그로 인 해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지요.20)
구체적으로 안병무가 말하는 구조악의 핵심은 공(公)의 사유화(私有 化)이다.
公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고 질서이다.
하늘과 땅, 부와 권 력 이 모두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누구에 의해 사유화 되어서는 안 된다.
안병무는 이런 취지에서 에덴동산의 타락설화와 카인 의 범죄를 公을 사유화한 대표적인 예로 지목하였다.21)
19)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25.
20)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99-200.
21) Ibid., 202-203.
그러므로 안병무 가 생각하는 구원은 명확하다.
사유화된 公을 다시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일부 계층과 집단에게 사유화된 公을공동체 전체로 환원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결국, 민중의 메시아성이란 자기의 고난을 집단적 고난으로, 개인적 죄악을 사회적 죄악으로 인식하는 것인데, 이것은 公의 사유화를 공의 공유화(共有化)로 전환시키는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획득된다. 안병무는 이를 “화산맥”의 비유로 설명하면서 이 과정을 통해 민중은 메시아적 자 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사건이 “화산맥처럼 역사의 흐름 에 따라 지속적으로 내려오면서 계속 분출하고 있다”22)는 통찰은 ‘민중 메시아’의 동시대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스도 사건은 2천년 전에 한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출애굽에서도 일어났고 고대 이스라엘 부족동맹에서 도 일어났고 …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23)
민중메시아의 화산맥 비유를 김희헌은 민중신학 안에 내재된 관계론 적이고 유기체적인 세계관과 연결시킨다.24)
22) Ibid., 59.
23) Ibid., 59.
24) 김희헌, 『민중신학과 범재신론: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서울: 너의 오월, 2014), 62-75.
이는 마치 여러 조각의 헝겊 을 대어 만든 보자기인 조각보와 같다.
수많은 조각들이 우발적으로 불 규칙적으로 이어지면서 조각보가 만들어지듯, 역사의 현장에서 등장했 던 민중해방의 사건들이 화산맥처럼 이어지면서 메시아 사건이 된다.
어 느 천재적 작가의 단 한번의 필력으로 완성되는 작품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의 해방서사들이 모아져서 ‘민중 메시아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민중 메시아’를 둘러싼 내용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논란과 의문점이 많은 ‘민중 메시아’인 것은 분명하지만 서구 기독교가 만든 메 시아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민중신학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서구 근 대성에 대한 비판을 도모했던 진보적 현대철학자들이 공히 한목소리로 메시아주의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내었다.
다음 장에 소개하는 발터 벤 야민, 에마뉘엘 레비나스, 자크 데리다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Ⅲ. 현대 급진철학자들의 메시아론
1.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좌파 철학자들이 유물론적인 시각에서 신학 을 새롭게 바라보는 저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25)
25) 다음의 책들을 참조하라: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그린비, 2007), 『신앙과 지식』(아카 넷, 2016);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새물결, 2008), 『윤리학』(동문선, 2001); 야곱 타우베스 『바울 의 정치신학』(그린비, 2012); 조르조 아감벤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 『호모 사케르』(새물 결, 2008);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시차적 관점』(마티,2009),『믿음에 대하 여』(동문선, 2003), 『예수는 괴물이다』(마티, 2013); 테드 제닝스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 한다』(그린비, 2014), 『무법적 정의: 바울의 메시아 정치』(길, 2018);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 다』(모멘토, 2010)
그들은 로마에 맞서 제국의 보편성을 넘어섰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자본’이라는 새 로운 제국에 맞설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려고 했다.
비록 로마제국의 멸 망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로마의 질서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기독교 신앙이 제국 내부에 균열을 만들어냈다는 해석은 가능하 다.
그렇다면 그 균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만약 기독교가 제국 내부를 흔드는 하나의 요소였다면, 그것을 현재로 소환해 자본주의 체제 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자원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21세 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박함 속에서 유물론자 들이 기독교 전통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공 통적으로 발터 벤야민에서 논의를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역 사철학테제」에 나오는 메시아론을 중심으로 벤야민의 사유 안에 깃든 신 학적 함의에 대해 논한다.
1) 변증법에 대한 재고(再考)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1940)는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사유 하려는 이들에게 출발점과 같은 글로 평가된다.
그는 이 글에서 신학과 역사적 유물론의 결합을 체스 자동인형의 비유로 설명한다.
겉으로는 터 키풍 인형(역사적 유물론)이 승리를 거두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난쟁이 곱 추(신학)가 이를 조종한다는 설정이다.26)
벤야민은 이를 통해 신학에 의 해 견인되는 역사적 유물론을 상상하며, 전통적 혁명 서사나 메시아적 영웅상과 달리 ‘숨은 신’의 역할을 강조한다.
발터 벤야민의 사유는 변증법에 대한 재검토라는 점에서 논란을 불 러일으켰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에서 절대정신에 이르 기까지 정신이 세계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전개해 가는 과정을 변증법적 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관념론적 변증법을 물질적 토대에 기초한 역사 발전 법칙으로 전환하여, 각 시대의 생산력 과 생산양식의 상호관계를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변증 법적 유물론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역사를 진보와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하며, 과거–현재–미래가 필연적으로 이어진 다고 보았다.27)
그러나 벤야민은 연속적이고 직선적으로 흐른다고 여겨지는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을 비판하며, 이를 중단시키는 개념으로 ‘정지상태의 변 증법’28)을 제시한다.
마치 여호수아가 야훼의 힘을 빌어 태양을 정지시키 고 달을 정지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진다는 승자들의 역사관을 해체하고, 현재를 단순한 매개나 공백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순간으로 재정의 하면서 ‘현재 시간(Jetztzeit)’ 29)이라 명명하였다.
26) 발터 벤야민/반성환 편역,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중 「역사철학테제」(서울: 민음사, 2005), 343.
27) Ibid., 345.
28) Ibid., 354.
29) Ibid., 353.
그 시간은 역사적 흐름이 멈추는 순간인데, 바 로 그 정지의 찰나에 메시아적인 것이 도래한다.
이 ‘현재 시간’ 속에는 연속적 시간의 틈을 깨뜨리는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30)이 박혀 있으 며, 그것이 기존 역사 이해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도한다.
30) Ibid., 355.
부연하면, 발터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나 목 적론적 진보의 완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아는 ‘현재 시간 (Jetztzeit)’이라는 단절의 순간에 돌연히 출현하며, 그 순간을 중심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이 새롭게 의미화된다.
따라서 그의 메시아 개념은 역사가 일관된 목적을 향해 진보해 왔다는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반역인 셈이다. 벤야민은 기존 변증법에 대한 재고의 시간을 보내고 메시아주의 를 비평의 제단 위로 올려놓는다.
이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이라는 개 념으로 등장하였는데, 다음 절에 가서 본격적으로 벤야민의 메시아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
벤야민에 따르면 구원은 미래의 특정 시점에서 도래하는 사건이 아 니라, 현재 속에서 작동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서 비롯된다. 이 힘은 과거의 어떤 사건도 완전히 소멸되거나 패배로 방치하지 않으며, 억압받 은 자들의 기억과 좌절된 역사까지도 구원의 대상으로 붙든다.31)
벤야민 은 이를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을 향한 도약”32)이라고 표현하면서, 선형 적 발전이 아닌 비연속적 각성과 도약의 역사 이해를 제시하였다.
31) Ibid., 344
32) Ibid., 353.
발터 벤야민의 ‘희미한 메시아적 힘’은 기존의 법·전통·윤리를 거스 르는 예외적 시간과 공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 양자 모두에 게 낯선 개념인데, 좌파에게는 반동처럼, 정통 주의자들에게는 이단처럼 보일 수 있다.
벤야민은 기존과는 다른 좌파, 다른 신자, 다른 주체를 상정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 약하고 잉여적인 존재에 위치하 고 있는 자들이다.
‘희미한 메시아적 힘’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 자크 데리다의 ‘유령’, 그리고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과 조우하면서 그 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결국 벤야민은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을 통해 관습적 신앙과 공동체 의 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혁명을 위한 기존과는 다른 가능성을 모 색하였다.
벤야민의 역사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역사를 맹목적 발전의 연속으로 보는 관점을 수정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혁명을 세계사의 기관 차에 비유했지만, 벤야민은 일방적 진보에 대한 신화적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은 완결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도 달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지향하는 점근선과 같다.
그 선은 역사의 각 고 비마다 점처럼 존재했던 민중들의 순간들을 이어 주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벤야민의 메시아론이 민중메시아의 화산맥론과 만 날 수 있다고 본다.
민중사건이 역사를 관통하면서 체제의 부조리에 맞 서 면면히 우발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역사의 물꼬 를 바뀌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기에는 성공한 민중봉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패한 민중사건들이다.
민중사건의 동시대성은 과거의 민중 봉기의 기억과 흔적을 넘어오는 용암의 분출로 비유할 수 있겠다.
그 진 앙은 미래에서 도래하는 메시아적 대망이 아니라, 과거에 아득하게 존재 했던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으로 부터다.
슬라보예 지젝의 아래 문구는 의도치는 않았지만 벤야민의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이 함의하는 바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주 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전개되는 운명에 내맡겨진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자각과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개척해 나간다 는 무거운 책임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결합된 것”이다.33)
33) 슬라보예 지젝/이현우 외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서울: 난장이, 2011), 197.
지젝은 벤야민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유물론적 전통이 지녀야 할 태 도를 ‘겸손한 자각’과 ‘무거운 책임’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우주적 차원에서 보자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예기치 않게 전개되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향해서 는 묵묵히 견디고 대면해야 할 책임을 지녔다. 지젝의 입장은 역사 발전 을 필연적 진보의 과정으로 간주했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이자,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방향 제시로 읽힌다.
그것은 거대한 역사 기획에 대한 반란이며, 벤야민이 말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지시하는 효과와도 맞닿아 있다.
지금까지 현재 좌파 사상가들이 많이 기대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사 유 중에서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 대해 살펴보았다.
베냐민은 기존의 메 시아주의와는 다른 시각으로 역사와 사건을 바라보기에 후학들에게 미치 는 영향력이 크다.
이어서 만나게 될 사상가는 타자성의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이다.
2. 레비나스의 메시아론
현대의 타자론을 언급하는데 있어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이 에마뉘엘 레비나스이다. 동일자 중심의 주체철학이 타자를 향한 배제와 폭력을 가 능하게 했다고 레비나스는 의심한다. 서양 관념론의 종교적 버전이 기독 교이고, 메시아주의는 그 종교의 중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전 이해가 레비나스의 메시아주의 비판에는 깔려있다. 레비나스의 메시아 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 서문에서 언급하는 종말론에 대한 비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연장선에서 레비나 스의 메시아론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83 이상철 | 사물·생명·민중과 동시대성의 사유 - ‘민중 메시아’와 현대철학의 메시아론 사이 공명(共鳴) 1) 종말에 관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오늘의 상황을 폐함으로써 역사를 새로 시작한다 는 종말론적 비젼은 현실을 초월하고 세상과는 이질적인 절대자가 우리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 론은 물리적이고도 선형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끝에 위치하는 카이로 스적인 신적 시간의 도래를 의미했다. 그것은 역사 바깥의 차원에서 역 사 안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역사 과정을 단 순히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개입이며, 현실 의 통상적 원리를 뛰어넘어 이루어지는 신적 역사 참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종말론은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것과 는 다르다.
레비나스는 본인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 서문에서 종말론 에 대한 색다른 의견을 피력한다.
그는 기존의 종말론에 대해 “전쟁의 존 재론”34) 혹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예견이자 명백함 없는, 신앙에 종속된 계시의 산물”35)이라 비판한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종말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종말론은 목적론적 체계를 전체성에 도입하지 않는다. 종말론은 역 사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데서 성립하지 않는다. 종말론은 전체성 너 머에서 또는 역사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종말론은 전체성을 둘러 싸고 있을 법한 공허와 관계하지 않는다. … 종말론은 언제나 전체성 에 외재적인 잉여와 맺는 관계다.36)
34) 에마뉘엘 레비나스/김도형외 옮김, 『전체성과 무한』(서울: 그린비, 2018), 9.
35) Ibid.
36) Ibid., 10.
종래의 종말론이 세상 밖에서 역사 안으로 개입하는 사건이고, 역사를 초월하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신의 현현(顯現)을 다루었다면, 레비나스 는 민망할 정도로 종말론에 대해 인색하다.
그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 해봤는데 레비나스는 근대성의 목적론적 체계와 진보적 사관에 대해 회 의적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가 보기에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거슬러 올 라가면 근대의 발전사관과 만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역 사의 끝에서 이루어진다는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비젼과 상관이 없는 종 말론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본인의 종말론을 “언제나 전체성에 외재적인 잉여와 맺 는 관계”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절대정신이 자기를 전개해 가다가 마지 막 목표점에 도달한다는 낙관적이고도 진보적인 헤겔류의 역사철학에 동 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을 전체화의 수순이라고 비난하면서 레비 나스는 전체성의 체계 안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혹은 그 바 깥에 자리한 어떤 것, 곧 ‘잉여’에 주목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의 소 지가 있다.
이 ‘전체성에 외재한 잉여’를 마치 우리의 현실과 무관한 저편 의 세계, 초월적이고 피안적인 영역에 속한 무엇으로 이해하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잉여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낯선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를 정치-사회적으로 전환 하면 공동체 안의 법과 제도에서 제외된 잉여들이다.
그들을 레비나스는 타자라고 부른다.
타자란 동일성의 원칙에서 제외된 존재들이다.
수미일관한 목적과 전체주의적 기획에 의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세계가 정상적 이지 않고 원활하게 작동되고 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사회적 지표가 타자 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종말론은 헤겔식의 변증법과는 다르 게 절대정신으로 향해가는 이성의, 이성에 의해 덧칠되는 환상에 더 이 상 속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이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적인 것들에 관심하면서 그것들로 인해 기존의 역사진행은 단절되고 굴절되리라 믿는다. 이런 이유로 그의 종말론은 하나의 ‘잉여’, 곧 우리가 외면해온 타자 를 다시 응시하게 만드는 해석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체성의 논리를 거슬러 타자성에 근거한 새로운 삶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메시아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2) 고통의 메시아론
레비나스에 의하면 메시아는 고통과 결부된다.:
“우리는 메시아가 고통받는 유일한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감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 모든 사람은 메시아입니다.”37)
메시아가 고통받는 사람 이라는 레비나스의 발언은 누가복음 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새롭게 해석한 민중신학자 서남동의 메시아론을 떠올리게 한다.
일반적으로 사 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메시아이고, 강도 만난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서남동은 이 구도 를 전복시킨다.
필자는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하는 자는 ‘강도만난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 그사람의 신음소리가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게 대한 그리스도의 부름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대한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다.38)
37) Emmanuel Levinas, Difficult Freedom, Trans. Sean Hand (Maryland: 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90), 89. 38)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개정증보판〉』(서울: 동연, 2018), 141.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서남동도 구원자는 도와주는 자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양자 공히 기존의 메시아론과는 상반되 는 견해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메시아는 고난 받는 자가 되 는 것이고, 그 안에 내포된 함의는 무엇인가?
교회와 성도는 사마리아인 이 되기 전에, 먼저 강도 만난 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위에서 아래로 오지 않기 때문이고, 메시아는 역사 밖의 절대자가 아니 라 역사 속 고난의 현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모든 사람이 메시아”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초월적 능력으로 세상의 악과 불의를 단번에 제거하는 영웅적 존재로 이해하는 관점과 거리를 둔다. 여기서 메시아란 특별한 초인이 아니라, 자신의 고 통을 감수할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윤리적 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 각자가 메시아의 위치, 곧 고난당하는 타자의 자리에 거하라,는 요청으로 읽혀야 한다.
억압과 폭 력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아픔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자리, 바로 그곳이 메시아의 자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도래는 어떤 종말론적 역사 완성의 순간에 성취 되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메시아적 주체가 되어 타자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책임 있게 응답하는 바로 그 순간에 실현된 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타자와의 마 주침 속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을 열어젖히는 이가 곧 메시아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주의는 역사를 멈추게 하는 어떤 존재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다. 메시아는 나로 하여금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게 하고, 그 것이 나의 보편적 책임임을 인식하게 한다.”39)
결론적으로 레비나스의 메시아론 우리들에게 타자로의 전회를 요청 한다.
그가 말하는 “메시아적 평화적 종말론”40)은 마지막 날 하늘 문이 열리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과업이 아니다.
39) Emmanuel Levinas, Difficult Freedom, Trans. Sean Hand (Maryland: 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90), 90. 40)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9.
지금 여기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가 민중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화해와 일치를 도모할 때 평화는 이루 어진다.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은 강렬한 말로 본인의 메시아론을 갈무리 한다.:
“메시아니즘은 존재의 절정이며, ‘자기 존재를 지속·보존하려는 존재방식’을 뒤집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전도는 바로 나에게서 시작된 다.”41)
지금까지 살펴본 레비나스의 종말론과 메시아론은 서구의 ‘존재신-론’을 넘어서고자 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후속 과 제를 남겼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메시아는 무한의 영역에 위치하기에 우 리와의 만남은 요원해 보인다.
신이 무한의 영역에 존재하다면 신은 어 떻게 나와, 그리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은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환언하면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그의 종 말론과 메시아론의 실천철학이자 대리보충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42)
이제 남은 현대철학의 메시아론은 데리다의 몫이다.
흔히 해체의 철 학자로 알려진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로 전개된 서구 형이상학을 다시 읽 으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텍스트 안의 숨겨진 뜻을 채굴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데리다의 실험과 성과를 해체주의라고 부른다.43)
41)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a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60.
42) 논문의 범위를 레비나스의 메시아론에 한정하였기에 본고에서는 그의 윤리학을 다루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과 관련된 사항은 필자의 아래 연구물을 참조하라: “레비나스의 신담 론과 이타성의 윤리학” (「신학사상」 207, 2024.12.31.), 167-196; “생물학의 이타성을 넘어가는 약 함의 윤리: 에마누엘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신학사상」 204, 2024.3.30.), 177-210; “본회퍼와 레 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신학연구」 66, 2015.6.30.), 59-87.
43) 본 논문에서는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개론적 설명은 생략하고 그의 메시아론으로 바로 넘어간 다.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필자의 졸저 『죽은 신의 인문학』(돌베개, 2018) 중에 서 데리다를 다루는 3장 “환대의 윤리”(93-125)를 참조하라.
다 음 절에서 해체론에 입각해서 전개되는 데리다의 메시아론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다.
3. 데리다의 메시아론
데리다의 메시아론을 대변하는 어록이 바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 아적인 것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이다.
데리다 사상의 후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에서 처음 등장한 이 후 ‘메시아적인 것’은 데리다의 종교론과 실천철학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다.
1) 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인가?
1990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 전 세계 진보진영은 혼란과 절망을 겪었 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크 데리다 역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1992)을 출간하며 신자유주의를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자 “최후의 정부 형태”로 규정하고, 사 실상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44)
이는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를 이 론적으로 확정하는 주장처럼 받아들여졌다.
후쿠야마에 대한 비판적 응 답으로 데리다는 1년 뒤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했다.
그는 후쿠야마 의 낙관적 종언론에 맞서, 마르크스의 사유가 여전히 현재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비판적 힘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 저작을 계기로 데리다의 사유는 초기 해체 중심의 이론 작업에서 정치·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후기 사유로 전환되었다고 평가된다.45)
44) 프랜시스 후쿠야마/이상훈 옮김, 『역사의 종말』(서울: 한마음사, 1997), 7
45) 1967년에 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 2006), 『그라마톨로지』(민음사, 2010 개정판), 『글 쓰기와 차이』(동문선, 2001)를 발표하면서 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후 1972년에 『산종 Dissemination』, 『철학의 가장자리 Margins of Philosophy』, 『입장들 Positions』(솔출판사, 1992) 를 출판하면서 본인의 해체주의에 대한 이론적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데리다 후기 사상은 다음 을 참조하라.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2004); 『환대에 관하여』(필로소픽, 2023); 『불량배들: 이성 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휴머니스트, 2003).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자크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본격적으 로 논하기에 앞서, 자본주의 ― 특히 21세기 제국적 질서로 기능하는 신 자유주의 자본 ― 을 비판하기 위해 ‘유령론’(hauntology)을 먼저 소개한 다:
“유령론의 효과는 실제적인 현존과 그 타자 사이의 이러한 대립, 더 나아가 이러한 변증법을 의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지 아마도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46)
데리다는 유령론을 통해 헤겔류의 역사철학이 신자유 주의 전개과정에서 자본의 최종 승리라는 서사로 환원되는 것을 경계하 였다.
후쿠야마에 맞서는 전술로 유령론을 제시한 뒤, 데리다는 ‘메시아주 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소환한다.
데리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보편성을 아브라함 식의 메시아주의라 지적하면서 그에 반하는 ‘역사의 환원 불가능한 운동’으로서 ‘메시아적인 것’을 말하고자 했다.47)
46) 자크 데리다/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서울: 그린비, 2014), 92.
47) Ibid., 322-323.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완결된 종말론이나 구원 서사가 아니라, 역사를 승리의 무용담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반동적 태도가 되는 셈이다.
또한 그것은 자본의 보편성을 절대화하는 시대에 맞서, 아직 오지 않은 정의와 타자의 자리를 비워두는 환대의 방식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메시아주의가 이미 제도화되고 확정된 교리, 이념, 그리고 현실의 법과 질서를 가리킨다면, ‘메시아적인 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빈공간과도 같다.
그것은 이미 실현된 약속이 아니라, 여전히 도래를 기 다리는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매일의 시간은 하나의 파 국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 된다.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위협적 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체제의 안정성을 흔들고, 기득권을 영속화하려 는 논리를 중단시키는 상상력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 는 것의 가능성을 끈질기게 사유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인 것’은 언제 나 불온한 정치적 구호로 기능한다.
지금까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살 폈다.
필자에게 있어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을 읽는 독법은 두 가지이 다. 하나는 윤리적 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읽기다.
후자는 구체적 으로 환대와 관련된 내용이 될 것이고, 전자는 종교적 보편성에 대한 데 리다의 비판적 시선이다.
우선 ‘메시아적인 것’에 관한 종교적 읽기를 먼 저 시도한 후에 윤리적 부분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2) ‘메시아적인 것’에 관한 종교적 읽기
‘메시아적인 것’을 종교적 서사로 읽어내려는 노력은 그의 논문 「신앙 과 지식」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데리다의 종 교이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신앙은 언제나 종교와 동일시되어 온 것도 아니며,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될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점은, 신앙은 신학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48)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 는 흔히 생각하는 인과응보나 교환의 논리에 기초한 종교적 삶의 원리를 넘어선다. 데리다의 사상을 이어받아 신학화하는 존 카푸토는 이러한 종 교관을 “종교 없는 종교”49)라고 표현하였다.
데리다는 특정한 교리나 제 도적 관습에 예속된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신비 속으로 스며들어 ‘메시 아적인 것’에 대한 사유를 심화시키며, 기존 종교 담론과는 결이 다른 새 로운 형태의 종교성을 제시고자 하였다.
데리다는 기존의 메시아주의에 입각한 제도 종교를 비판하면서 “메 시아적 차원은 어떤 특정한 메시아주의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어떠한 규 정된 계시도 따르지 않고, 그 자체로 어느 아브라함계 종교에도 고유하 게 속하지 않는다”50)고 말한다.
48)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Gil Anidjar, (New York: Routledge, 2002), 48.
49) 존 D. 카푸토/최생열 옮김, 『종교에 대하여』(서울: 동문선, 2003), 160-171.
50)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56.
아브라함을 믿음의 기원으로 삼는 종교 들이 지녀온 신앙적 확신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 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동해 왔다. 오늘날 중동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의 가자지구 군사행동 역시 그 배경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메시아주의적 열광과 배타적 구원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 을 끌어들인 것이다. 여러분이 메시아적 구조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자마자 여러분은 보 편성을 환원시키고 있는 셈이며, 이는 중대한 정치적 결과를 낳게 된 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 가지 전통 중한 전통을 신임하고, 선 택받은 국민 및 어떤 주어져 있는 근본주의를 신임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나는, 매우 미묘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메시아적인 것과 메시아주의 사이의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51)
51) 자크 데리다/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서울: 그린비, 2014), 388.
이렇듯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전통적 메시아주의가 전제해온 종교적 보편성과 거리를 둔다. 교리적 메시아주의가 현재를 수단화하면 서 메시아의 도래를 하나의 종교적 기획이나 제도화된 실천으로 환원한 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은 그러한 프로그램에 포획되지 않는다.
메시아주의와 달리 ‘메시아적인 것’은 역사 속에 발 딛고 있으면 서도 역사 이후를 사유한다. 그러나 그것을 역사 안에서 실현 가능한 어 떤 구체적 내용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자리, 비어있는 기표로 남겨둔다.
이 대목에서 민중메시아를 말하지만 민중에 대해 개념화하지 않으려 했던 안병무의 발언과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이 공명한다.
저는 민중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요. … 민중을 설 명하면 개념이 되고 개념이 일단 성립하면 그 개념은 실체와 유리된 것이 되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살아 있는 개념은 실체와 유리된 것이 되어 버려요. … 그래서 나는 끝끝내 민중을 개념화하지 않겠다는 겁니다.52)
52)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27.
안병무는 ‘민중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항상 주저했다.
민 중을 향해 가능성이고 역사의 주체라 말하는 안병무이지만 그에게 있어 민중은 실체화 될 수 없는 대상이고, 열린 해석의 공간이며, 앞으로 걸어 갈 오래된 새길이다.
민중은 텅 비어있는 중심이고 중심을 허락지 않는 기표이다.
민중이 무엇인가로 채워지고 누군가에게 전유되는 순간 민중 은 그 폭발력과 상상력을 상실하고 만다고 안병무는 판단하였던 것이다.
나는 안병무의 민중론이 데리다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소 환하고자 했던 이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3) 환대의 윤리: ‘메시아적인 것의 윤리학’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메시아적인 것’의 윤리학‘은 구체적으로 환 대를 지칭하는데 이는 다소 모호하게 비칠 수 있는 ‘메시아적인 것’을 향 한 실천철학적 제안이다.
데리다의 아래 발언은 ‘메시아적인 것의 윤리 학’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메시아적인 것’은 미래에 대한 열림, 혹은 정의의 도래로서 타자의 도래에 대한 열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의 지평도 없고 예언 적 선취(預取)도 없다. 타자의 도래는 어떠한 기대도 그것을 미리 알 아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만, 오직 단독적인 사건으로서 출현할 수 있 다. 왜냐하면 타자와 죽음은 어느 순간이든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우 리에게 들이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53)
53)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56.
위의 글에는 중요한 윤리적 개념들이 등장하는데, 열림, 정의, 타자, 도래, 사건 같은 용어들이 그것이다.
후에 데리다는 한 인터뷰에서 이 모 든 개념어들을 조합해 환대와 연결짓는다.
장래란 타자가 도착하게 되어 있는 열림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 은 결국 타자나 타자성이라는 가치이기 때문이죠. 근본적으로 이것 이 제가 메시아적인 것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타자가 도래할 수 있 다. 타자가 도래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미리 기획해 둘 수 없다. 하지만 만약 타자가 온다면 올 수 있게끔 자리를 비워두겠다. 이것이 환대의 윤리입니다.54)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어구가 지닌 생경함과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면모를 살펴보면 타자를 향한 극진한 관심과 배려, 환대였음이 밝혀졌다.
‘메시아적인 것’은 대타자의 목소리에 의해 가려지고 잊혀지고 지워지는 목소리의 행방을 찾는 몸부림이다.
데리다는 환대를 본인 특유 의 용어인 해체와도 연결시킨다:
환대(hospitality)는 집-안에-있음(at-home)에 대한 해체이다.
해체 (deconstruction)는 타자에 대한 환대, 자기 자신과는 다른 타자, ‘자 기의 타자’(its other)와도 다른 타자, 그 어떤 ‘자기의 타자’의 범주를 넘어서는 타자에 대한 환대이다.55)
54) 자크 데리다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김민호 옮김, 『비밀의 취향』(서울: 이학사, 2022), 164.
55)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364.
‘해체가 범주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환대’라는 데리다의 발언은 미래 를 향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많은 이들에게 깨달음을 선사 한다.
여기서의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타자이고, 결정불가능하고 환원불가능하며 비대칭적인 존재 혹은 대상 일반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와 연관하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뉴인터내셔널’이라는 표 현을 쓴 바 있다.
그들은 “당과 조국, 국민 공동체 없이, 공동 시민권 없 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인 소속없는”56)이들이다.
56)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173.
뉴인터내셔널은 과거 마르크스가 말했던 인터내셔널, 곧 무산계급의 연대를 오늘의 맥락에서 다시 사유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은 더 이상 특정한 당, 민족, 국민국가, 시민권, 혹은 계급적 동일성에 기 초한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제도적 소속이나 공식적 정체성 없 이 존재하는 이들, 경계 바깥에 놓인 사람들의 느슨하고도 비가시적인 연대를 가리킨다. 뉴인터내셔널은 데리다가 말하는 타자들, 타자들의 타 자들, 그리고 제도적 질서의 바깥에 위치한 존재들을 포함한다.
이들을 묶어 주는 것은 법적 계약이나 동일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고통과 희망, 그리고 어떤 친화성에 근거한 연대의 감각이다.
그 밑바탕에 흐르는 정 동이 바로 환대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타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 두 는 열린 책임의 형식과 관계한다.
결국 타자에 대한 환대는 지금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상징적 질서를 뒤흔들고, 스스로 보편적이라고 여겨온 체계 안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바로 그 균열의 틈새로 하나의 사건이 도래하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보고, 이전과는 다른 지평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 끈다.
이런 맥락에서 ‘메시아적인 것’을 사유하는 한 방식으로서의 환대 는 단순한 도덕적 태도가 아니라, 변혁을 겨냥한 정치적 전략이자 급진 적 윤리적 상상력이며, 동시에 새로운 신학을 향해 나아가는 대담한 모 험과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Ⅳ. 나가는 글
본 논문을 통해 연구자는 민중신학의 논란거리라 할 수 있는 ‘민중 메시아’를 현대철학의 메시아론과의 대화 속에서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먼저 기독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가 지녔던 양면성을 짚었다.
메 시아 신앙은 고난받는 현실 속에서 미래의 구원을 희망하게 하는 종교적 비전이었지만, 동시에 배타적 구원관과 결합될 때 전쟁과 폭력, 타자 배 제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민중 메시아’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하였다.
본고는 ‘민중 메시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논의의 지형을 그린 후에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담론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민중 메시아’와 조우 가능한 지점들을 밝히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은 ‘민중 메시아’의 동시대 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 과정에서 현대 사상가들의 사유가 민중 메시아의 문제의식과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 었다.
메시아의 도래와 구원이 막연한 미래가 아닌 실패한 우리의 과거 로부터 유래하지 않는가를 묻는 벤야민의 통찰은 민중메시아의 화산맥론 과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메시아의 출현을 타자의, 타자에 의한 고통의 현상학과 결부시키고 있는 레비나스의 메시아론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전복적으로 읽으면서 강도만난 사람을 메시아라고 했던 서남동의 메시아론과 겹쳐 보였다.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을 말하며 반신학의 기치를 들었던 데리다의 관점은 민중을 규정된 개념이 아닌 텅 빈 기표로 남기려 했던 안병무의 민중론과 닮아있다.
이렇듯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론은 도그마나 종교적 프로그램을 전 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도래 가능성에 자신을 열 어두는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민중 메시아가 보인 태도와 유사하다. ‘민 중 메시아’는 사건과 대상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재구성이었다.
결국 ‘민중 메시아’는 특정 집단을 영웅화하는 메시아주의가 아니라, 동시대의 억압 구조 속에서 정의를 요청하 는 사건적 주체성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논문을 통해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도 남겼다. 기초작업으로서 민 중신학 내에서 벌어진 민중메시아를 둘러싼 변증의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다.
민중메시아를 비판하는 그룹(임태수)57), 민중메시아와 전통신학 간 화해를 도모하는 경우(권진관, 박재순)58), 민중메시아를 유물론적 시선에 서 독해하려 노력(강원돈, 박성준)59), 민중메시아를 관계론적 형이상학적 체계 안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경향(김희헌)60), 민중메시아를 텅빈 기표로 남기고 비평적 공간을 담보하려는 그룹(김진호, 최형묵, 이상철)61) 등으로 민중메시아를 향한 시선은 교차한다.
57) 임태수, “민중은 메시아인가? - 안병무의 민중메시아론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81 (1993), 56- 78.
58) 권진관, 『예수, 민중의 상징·민중, 예수의 상징』(서울: 동연, 2009); 박재순, 『민중신학에서 씨알사 상으로』(서울: 한울, 2013).
59) 강원돈, 『物의 신학』(서울: 한울, 1992); 박성준, “한국 기독교의 변혁과 기독교 운동의 과제,” 『전 환』(서울: 사계절, 1997)
60) 김희헌, 『민중신학과 범재신론: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서울: 너의 오월, 2014)
61) 김진호 외 편저, 『21세기 민중신학』(서울: 삼인, 2013); 김진호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 시 본다』(서울: 삼인, 2006); 최형묵, 『민중신학 개념지도』(서울: 동연, 2023); 이상철, 『종교적인 것의 귀환』(서울: 울력, 2025).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 다. 다른 남겨진 과제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대화와 관련된 사항이다. 본고에서 살펴본 벤야민, 레비나스, 데리다는 공히 유대계 사상가들이 다.
유대교가 구원과정에서 인간의 몫과 역할보다는 신의 초월적. 수직 적 개입에 방점이 있다면,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역할이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다.
역사의 한 가운데서 민중이 메시아적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강한 믿음에 휩싸인다는 점에서 민중메시아는 기독교의 전통 안 에 있다.
바로 그 점이 유대교를 근간으로 하는 사상가들의 메시아론과 기독교적 배경 위에 서 있는 민중메시아 사이 차이점 일텐데, 이런 이유 로 양 종교간 비교종교학적인 연구는 물론이고, 종교철학 분야로 까지확장해 통섭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종합하면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 담론을 경유해 새롭게 읽는 ‘민중 메시아’는 신의 음성을 피동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민중 메시아’는 우리 를 지배하는 상징계 속 쾌락의 법칙과 교회의 도그마가 강제하는 환상을 횡단한다.
그리하여 현실 속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타자들의 고통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세계는 각각이 지닌 창조의 고유성이 파 괴되어 존재의 존재다움이 부정되는 세상이다. 성과 계급과 인종과 종교적 차이가 더 이상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 어서는 안되고, 비인간 존재들이 더 이상 인간의 야만에 의해 사려져서 는 안된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민중신학은 희망 과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포스트휴머니즘과 AI 시대가 선전하는 싸이렌 의 음성에 취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인간적인 것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자들을 위한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신학 일 것이다.
‘민중 메시아’는 이런 민중신학이 전하는 메시지의 고갱이였 고, 동시대의 사유와 대화(결)하면서 민중신학으로 하여금 새로운 선언과 행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미래에도 유효하다.
참고문헌
강원돈. 『物의 신학』. 서울: 한울, 1992. 김진호 외 편저. 『21세기 민중신학』. 서울: 삼인, 2013. 김진호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서울: 삼인, 2006. 김진호 편. 『예수 르네상스』. 천안: 한국신학연구소,1996. 권진관. 『예수, 민중의 상징·민중, 예수의 상징』. 서울: 동연, 2009. 김희헌. 『민중신학과 범재신론: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서울: 너의 오월, 2014. 데리다, 자크 & 페라리스, 마우리치오/김민호 옮김. 『비밀의 취향』. 서울: 이학사, 2022. 데리다, 자크/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서울: 그린비, 2014. 레비나스, 에마뉘엘/문성원 외 옮김. 『전체성과 무한』. 서울: 그린비, 2018. 박재순. 『민중신학에서 씨알사상으로』. 서울: 한울, 2013. 벤야민, 발터/반성환 편역.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서울: 민음사, 2005. 불트만, 루돌프/허혁 옮김. 『신약성서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7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동연, 2018.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1. 안병무 편. 『사회학적 성서해석』.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3. 이상인. 『진리와 논박』. 서울: 도서출판 길, 2011. 이상철. 『종교적인 것의 귀환』. 서울: 울력, 2025. 이상철. “레비나스의 신담론과 이타성의 윤리학.” 「신학사상」 207 (2024/겨울), 167-196. 임태수. “민중은 메시아인가?-안병무의 민중메시아론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81 (1993). 56-78. 지젝, 슬라보예/이현우 외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 서울: 난장이, 2011. 최형묵. 『민중신학 개념지도』. 서울: 동연, 2023. 카푸토, 존 D./최생열 옮김. 『종교에 대하여』. 서울: 동문선, 2003. 후쿠야마, 프랜시스/이상훈 옮김. 『역사의 종말』. 서울: 한마음사, 1997. Derrida, Jacques. Acts of Relogion. New York: Routledge, 2002. Levinas, Emmanuel. Difficult Freedom. Trans. Sean Hand. Maryland: The Johns Hopkings Univ Press, 1990. Levinas, Emmanuel.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a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Moltmann, Jürgen. Expreriences in Theology: Ways and Forms of Christian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Yung Suk, Kim & Jin Ho, Kim. Eds.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 Oregon: Pickwick Publication, 2013.
한글초록
본고는 민중신학의 쟁점 가운데 하나인 ‘민중 메시아’ 개념을 현대철 학의 메시아론과의 대화를 통해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취지하 에 논문의 전반부는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을 논한다. 우선 안병무 사 상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던 하이데거-불트만으로 이어지는 실존주의 적 성서해석이 안병무의 사건론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밝힐 것이다.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이해를 사건론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 다. 일회적이고 단선적인 사건 이해가 아니라 통전적이고 관계론적인 사 건 이해가 민중사건, 더 나아가 ‘민중 메시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논문의 후반부는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론이 펼쳐진다. 이를 위해 논문은 발터 벤야민,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 적 사유를 참조한다. 벤야민에게 있어 메시아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으 로 작동하고, 레비나스에게서 메시아는 초월적 영웅이 아니라 타자의 고 통에 응답하고 책임지는 주체의 이름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 역시 특정한 종교적 도그마나 목적론적 종말론과 구별된다. 그것은 이미 규정된 메시아주의가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타자를 향해 열 려 있는 구조, 예기치 않은 정의의 사건을 기다리는 태도이다. 본고는 이러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민중 메시아를 재구성한다. 민중 은 구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주체이며, 메시아 성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특권이 아니라 고난의 역사 속에서 책임적으 로 행위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따라서 민중 메시아는 정치적·사회 적 해방을 향한 실천적 개념이며, 배제와 폭력을 반복하는 종교적 메시 아주의를 넘어서는 비판적 대안이 된다. 결론적으로 논문은 민중 메시아 를 초월적 구원자의 신화로 이해하지 않고, 타자에 대한 환대와 책임의 윤리 속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오늘의 역사 현실 속에서 변혁을 가 능하게 하는 실천적 신학의 지평을 제시한다.
주제어 민중 메시아,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타자의 윤리, 환대의 윤리
Abstract
Things, Life, Minjung, and the Concept of Contemporaneity — A Resonance between the ‘Minjung Messiah’ and Messianic Thought in Contemporary Philosophy
Sang Cheol Lee (Adjunct Professor, Christian Ethics Hanshin University)
This article attempts to reinterpret the concept of the “Minjung Messiah,” one of the contested themes in Minjung theology, through dialogue with contemporary philosophical theories of the messianic. In light of this purpose, the first half of the paper discusses Ahn Byung-mu’s “Minjung Messiah theory.” It will first clarify how the existentialist biblical interpretation that runs from Martin Heidegger to Rudolf Bultmann—which provided a decisive impetus for Ahn’s thought—developed into Ahn’s own event-centered theology. The reason for beginning an understanding of the “Minjung Messiah” with the theory of the event is clear: what is at stake is not a one-time, linear conception of an event, but an integral and relational understanding of eventfulness that is embedded in the minjung event and, further, in the figure of the “Minjung Messiah.” The latter half of the paper turns to the messianic thought of contemporary philosophers. To this end, it engages the reflections of Walter Benjamin, Emmanuel Levinas, and Jacques Derrida. For Benjamin, the Messiah operates as a “weak messianic power.” In Levinas, the Messiah is not a transcendent hero who redeems the world from injustice and evil, but the name for a subject who responds to and takes responsibility for the suffering of the other. Derrida’s notion of “the messianic” is likewise distinguished from any specific religious dogma or teleological eschatology. It does not refer to an already determined messianism, but to a structure open to the yet-to-come other—a stance that awaits the unforeseeable event of justice. This paper reconstructs the concept of the Minjung Messiah through these philosophical discussions. The minjung are both the objects of salvation and, at the same time, subjects who respond to the suffering of others. Messianicity is not the privilege of a particular individual or group; rather, it is open to all who act responsibly within histories marked by suffering. Accordingly, the Minjung Messiah is a practical concept oriented toward political and social liberation, and it becomes a critical alternative that moves beyond religious messianism which repeatedly reproduces exclusion and violence. In conclusion, this study does not understand the Minjung Messiah as a myth of a transcendent saviour. Instead, it reinterprets the concept within an ethics of hospitality and responsibility toward the other, thereby presenting a horizon of practical theology that makes transformation possible within today’s historical reality.
Keyword :Minjung Messiah, Weak Messianic Power,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The Ethics of the Other, The Ethics of Hospitality
논문접수일: 2026년 2월 26일 논문수정일: 3월 20일 논문게재확정일: 2026년 3월 20일 98
神學思想 212집 · 2026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