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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화엄의 ‘전체’와 ‘개별자’에 대한 개념과 사사무애법계관의 발전/박수현.서울大

Ⅰ. 서론

Ⅱ. 화엄에서의 개별자와 전체의 문제

Ⅲ. 이법계와 이사무애볍계,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 요약문

Ⅳ. 사사무애법계, 개별자들의 상호투영

Ⅴ. 사사무애법계에 대한 오해와 이사무애법계로의 전락

Ⅵ. 결론

 

 

 

I. 서론

본 논문에서는 화엄 논사들이 화엄경의 상입상즉의 관점을 ‘개별자들의 상호침투’로 해석한 철학적 이유와 그런 지적 탐색의 최종 결론인 사사무애법 계관을 분석한다.

여기서 ‘최종 결론’이라고 한 것은 화엄불교가 여기에 이르러 서야 일원적인 기체(基體)에 대한 가정 없이도 개별자들의 상즉상입을 완전하 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자들의 상호작용만으로 현상을 설 명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은 십현문 등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화엄불교의 일관 된 목표의식이었다.

이런 의도는 지엄(智儼, 602-668)이 화엄불교를 입교분종한 이후는 물론이고,1) 화엄불교의 전신인 지론종 남도파의 논사들이 화엄경에 주목한 시점까지 올라간다.2)

 

     1) 華嚴經傳記 (T2070, 51:163c178). 불교학연구 제86호 60 

     2) 속고승전에 의하면 남도파인 영변(靈辨, 477-522)은 화엄경 강설로 명성이 있었고(續高僧傳 (T2060, 50:518c24-27), “沙門靈辯。即幹之猶子也。少小鞠育誨以義方。携在道位還通大典。今住勝光 寺。衆議業行擢知綱任。揚導華嚴擅名帝里云”), 영유(靈裕, 518-605)는 혜휴(慧休, 548-?) 등에게 화엄 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續高僧傳 (T2060, 50:544b8-10), “聞靈裕法師震名西壤。行解所歸。現居鄴 下。命休從學。休天機秀擧惟道居心。乃背負華嚴遠遊京鄴”) 

 

그러나 화엄불교는 지론종과 섭론종에서 파생되었다는 구조적 한계로 인해, 처음에는 현상의 근본을 진여나 여래장과 같은 기 체를 설정하는 틀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에 이르 러 그런 의도에 부합하는 구조를 갖게 된다. 그는 화엄불교의 논리적 구조 중에 서 ‘개별자와 보편자의 원융’에 해당하는 관점들을 이사무애법계관으로, ‘개별 자와 개별자의 원융’을 표현한 관점들 사사무애법계관으로 정리하였다. 이로 써 이사무애의 보편자를 통해 개별자들의 자성(自性)을 극복한 후 사사무애를 통해 보편자에 대한 법집마저 극복하는 사종법계설이 완성된다.3)

여기서는 하 나의 개별자가 다른 모든 개별자들과 상입상즉하는 원리를 밝힐 뿐, 보편자로 서의 ‘전체’가 그 영역 안의 모든 개별자들과 상입상즉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 다. 이런 ‘전체’는 우파니샤드나 베단타의 브라흐만처럼 일원론적인 실체에 대 한 법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런 일원적인 기체에 대한 법집을 일으키는 자성을 가진 ‘전 체’를 ①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로 정의하고, 그 반대인 개별물에 대한 집 착을 일으키는 자성을 가진 개별자를 ② ‘개별자로서의 일(一)’로 정의한다. 사 사무애법계관은 ‘개별자로서의 일(一)’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물론 ‘확정 된 전체로서의 일(一)’이라는 일원적 본체에 대한 법집을 동시에 버리는 체계였 다. 여기서는 법집의 대상이 되는 자성을 가진 ‘전체’라는 개념을 가정하지 않 는다. (방편적으로 가설된 최소 단위인) 개별자가 상즉상입하는 대상은 보편으 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다른 개별자들’이다. 이것을 다수의 측면에서 말하면 ‘확정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다(多)’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사무애법계 관은 자성이 없는 개별자들, 즉 서로 무애한 사(事)들이 시간적·공간적 계기를 3) 여기에서의 보편 원리인 리(理)의 담지자는 교판에서의 종교(終敎)에 해당하는 진여나 여래장 등이 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개별자들의 근거가 되는 기체나 본체, 즉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나 베단 타의 브라흐만 같은 것도 논리적으로 포함한다. 화엄의 ‘전체’와 ‘개별자’에 대한 개념과 사사무애법계관의 발전 61 가지고 생멸과 변화를 지속하는 관계만을 관할 뿐이다. 그 관계는 ‘전체를 규정 하는 외곽선이 없는’ 그리고 ‘특정할 수 없는’ 대상들이 ‘인식에 나타났다가 사 라지는’ 막연한 경계이다.

 

II. 화엄에서의 개별자와 전체의 문제

 

1.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과 ‘개별자로서의 일(一)’

 

많은 경우 철학적인 사유에 있어서 일(一)은 ‘모든 것’의 근원인 단일한 실체, 혹은 ‘모든 것’을 통합한 ‘전체’의 실체를 뜻한다. 노장사상에서는 다양하게 분 열된 만물은 모두 동근(同根)에서 나왔으며, 다시 동근으로 회귀하여 도(道)와 합일한다. 플루티누스(Plotinos, 205-270)에 의하면 만물은 일자(一者)에서 유출 되었으며 일자로 다시 복귀함으로써 정화된다. 이것을 불교에 적용하기는 위 험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연기론에서 보면 모든 현상들이 자성(自性)을 버 리고 서로 연결되므로 연기된 현상의 총체를 ‘일’로 표현할 수는 있고, 현상들 의 허망분별을 극복하면 순일한 진여가 드러난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이러한 ‘총체로서의 일’은 ‘모든’ 현상으로서의 다(多)를 통괄하므로 확정적인 외곽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현상세계인 ‘확정된 전체로서의 다(多)’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나 불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런 다른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일’ 역시 하나의 자성을 가진 실체이며, 그것마저 극복해야 모든 실체에 대한 탐착을 버 릴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우파니샤드나 그 계승자인 베단타 등과 대립한 이유 이기도 하다. 비록 유일하게 참된 존재인 브라흐만에 대한 관조는 현상적인 개 별자들에게 부여된 허망분별된 자성(自性)을 부정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대신 그 유일자에 대한 법집을 일으켜 완전한 무장애의 단계로 나아 갈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총체로서의 ‘일’ 역시 자성이 없음을 설명할 수 있어 야 불교적으로 옳은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합성과 전체성을 부정한 불교학연구 제86호 62 다면 다시 다른 쪽 극단인 무질서한 다(多)로서의 현상세계에 매몰되어 버릴 것 이다. 결국 인간의 인식은 ① 총체로서의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에 대한 집 착과 ② 분열된 현상을 이루는 ‘개별자로서의 일’들에 대한 집착의 양변 중 한 변으로 떨어지게 된다. 화엄불교는 그 양변에 대한 대안으로서 ‘개별자’와 ‘전 체’의 모두 공함을 주장하며, 동시에 공한 개별자들의 연기적이며 규정할 수 없 는 상호침투를 관하는 사사무애법계관을 제시한다.

 

2. 닫힌 ‘확정된 전체’와 열린 ‘확정 불가능한 전체’의 두 시각

 

사사무애법계관은 ‘확정된 전체’를 가정하지 않는다. 인드라망의 구조에서 는 각각의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들을 상대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의 ‘배경’이 되는 ‘전체’로서의 ‘자성을 가진 인드라망’이 따로 설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확정된 전체’라는 것이 있다면, 그 ‘확정된’ 외곽선 안의 것들은 하나의 자성 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그 ‘확정된 전체’는 확정된 자성을 가진 일자가 된다. 이 런 구도라면 개별자들은 ‘바다라는 확정된 전체’ 중의 ‘일시적인 물방울’과 같 은 존재가 되며, 설령 개별자들의 상호투영을 말하더라도 결국은 ‘개별자들의 총체인 전체’인 바다와 ‘개별자’들인 물방울이 서로 투영하는 상태가 되며,4) 결국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과 개별자들이 서로 투영하는 것과 같아진다.

이 것은 이사무애법계이지 사사무애법계가 아니며, 우파니샤드나 베단타적인 브 라흐만이 현상의 개별자들과 관계 맺는 법이지 불교적인 연기가 아니다.

이와 같이 ‘전체’라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와 같이 되 며, 그 ‘하나 됨’ 안에서는 그 불변성과 단일성으로 인해 불교적인 연기가 성립 하지 않는다.5)

 

     4) 즉 아무리 물방울과 물방울의 관계를 말하더라도 결국은 바다와 물방울의 관계일 뿐이다. 이것은 구슬과 구슬의 관계 이외의 것을 가정하지 않는 인드라망의 구조와 같지 않다.

     5) 변화와 의존은 다수의 개별자들을 가정하는 것이다. 만약 존재가 유일한 하나 뿐이라면 파르메니 데스와 제논의 예에서와 같이 변화와 운동은 물론이고 생성과 소멸도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사사무애법계관에서는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와 그것을 관통 하는 자성을 가진 보편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확정된 전체’ 대신 ‘확정 불가능한 전체’를 말한다. 여기서 하나의 개별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 른 개별자들을 상대할 뿐 ‘확정된 전체’인 일자를 마주하지 않으며 ‘확정된 전 체’ 속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지도 않는다. 개별적인 인식주체 역시 자성을 가진 일자로서의 전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안에서의 다른 개별자들을 상대한다.6) 이것은 전체에 일자로서의 자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동시 에 세계의 한계를 무한이나 유한으로 결정지을 수 없다는 붓다의 무기(無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7) 화엄불교의 근원이 되는 지론종 남도파 역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의 입장인 진여를 모든 현상의 근거로서 상정하였다. 지론종 남도파인 정영사 혜 원(淨影寺 慧遠, 468-537) 역시 진성연기(眞性緣起)의 입장에서 ‘갠지즈강과 같 은 많은 공덕을 가진 여래장성’에서 모든 연기가 이루어진다고 말하였다.8) 이 것은 하나의 순수한 기체가 다른 모든 것들을 함유하고 있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지엄의 이후 입교분종한 화엄불교는 화엄경에서 말한 ‘하나의 개 별자 안에 다른 모든 개별자들이 투영되는 법계관을 말한다. 즉 “하나하나의 털 구멍 가운데에 무량한 여러 불찰(佛刹)이 있다”9)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반대로 ‘모든 불찰을 포함하는 그 털구멍’도 다른 털구멍 안의 무량한 불찰 중의 하나 이다. 모든 털구멍 각각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 어떤 털구멍에서 본 세계도 다른 모든 것의 기체(基體)가 되는 ‘절대적인 경계’나 ‘확정된 전체’로 6) 마찬가지로 화엄불교에서는 개별자인 ‘일’ 역시 자성이 없으므로 실체가 아니라고 본다. ‘개별자 로서의 일’은 자성을 가진 존재로 정의되므로 서로 상호침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별자 역시 유위 법이므로 다시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에서는 ‘전체’가 없듯이 ‘개별자’ 도 없다. 다만 크고 작은 집합들인 사(事)들의 상호 포함관계만이 있을 뿐이며, 그런 관계들은 사와 사들이 상호 투영하는 사사무애법계로 설명된다. 7) 14무기의 각 항목들은 현상계를 공간적·시간적으로 한정짓는 문제와 관련된다. 인식대상으로서의 세계에는 ‘전체’라는 것이 없다. 그 대신 자신의 인식에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사(事)는 계속 새로워 진다. 전체라는 것은 항상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 의해 그때그때 마다 다르게 결정되므로 총량 을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호작용을 넘어선 극한까지 미리 결정하려는 것을 붓다가 무기(無己)로 보 아 금기시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8) 9) 大乘義章 (T1851, 44:483a26-28): “眞者所謂如來藏性。恒沙佛法。同體縁集。不離不脱不斷不異。此 之眞性縁起。集成生死涅槃” 大方廣佛華嚴經 卷9 「初發心菩薩功徳品」 (T0278, 9:456b11), “一一毛孔中 無量諸佛刹” 불교학연구 제86호 64 여겨질 수 없다. 여기서는 이런 상호 포함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기체로 서의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이 없이도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들을 설명할 수 있 는 체계이다.10)

 

  10) 하나의 털구멍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전체집합이며, 동시에 다른 털구멍이라는 집합에 포 함되는 원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중 어떠한 것도 독립된 자성을 가진 실체나 기체(基體)가 아 니다. 이것은 ‘모든 불찰을 가진 전체집합으로서의 일자’가 다른 하나의 털구멍과 관계를 맺는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엄에서는 ‘전체’라는 정해진 경계가 가정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화엄의 진리는 바로 이사무애나 종교(終敎)의 진리에 불과하게 되고 비판불교의 표적이 될 것이다.

 

지엄과 법장(法藏: 643-712)은 이러한 체계의 가능성을 십현문 등을 통하여 실험해 나갔으나 아직은 금사자장이나 화엄오교장의 구십현 문처럼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취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징관에 이르러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정립함에 따라서 ‘개별자로서의 일’만으 로 불교적인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완비하게 된다.

 

3. 사종법계설의 열린 구조

 

이렇게 사사무애법계관은 ‘개별자로서의 일’들의 상호침투 내지는 ‘개별자 로서의 일’과 ‘확정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다(多)’의 상호침투로 설명할 수 있 다.11)

이런 열린 법계관은 이전 동아시아 불교의 진여나 여래장을 근원으로 하 는 일원론적인 관점을 비판하면서 발전하였다. 화엄의 교판에서는 이런 ‘확정 된 전체로서의 일’에 근거한 관점을 종교(終敎)라고 규정하였다. 법장은 현상 전체를 한정된 외곽선 안에 몰아놓고 그것을 보편적인 일자로 보려는 종교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중생계는 돌아다닌다고 그 끝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12)

 

     11) 사사무애법계의 ‘전체’가 이런 ‘미확정된 전체’라면, 베단타나 화엄교판에서의 종교(終敎) 등에서 말하는 ‘전체’는 ‘확정된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즉 화엄불교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베단타 등에 대 한 비판과 같은 맥락이다.

     12) 華嚴一乘敎義分齊章 (T1866, 45:487b08-09), “非以不盡不名遊行。非以遊行令其得際” 

 

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화엄불교는 개방적인 진리관을 갖는데, 이것은 현대 물리학의 개방성과 유사하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것은 낡은 헛간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빌딩을 세우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새롭고 더 넓은 시야를 얻게 될 때에, 우리의 출발점과 그 풍 요로운 환경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연관성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러 나 우리가 시작한 지점은 여전히 존재하며 눈에 보인다. 다만 그것이 전 보다 작아 보이고 우리들의 모험스러운 오름길에서 장애물을 극복하여 얻은 넓은 시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따름이다.13)

‘확정된 전체’가 없으므로 인식주체는 계속해서 기존의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접하게 되며, 전 순간에 파악했던 전체의 일관성을 다음 순간에 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순간 파악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에 근거해 도 출된 보편 진리에 머물려는 것이 자성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14)

 

    13) Einstein, Albert and Infled, Leopold 1938, 159.

    14) 이것은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와 유사한 상황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어떠한 관점에서 만 든 진리 체계라도 방편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 그리고 각각의 방편들 간의 조화와 원융 이다.

 

이법계나 이 사무애법계와 같이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이 담지한 리(理)로는 개방적인 세 계를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에서는 불변하는 ‘확정된 전체’를 바탕으로 도출한 획일적인 원리인 리(理)가 폐기되면서 개방성이 강조되는 것 이다. 그러나 이런 사사무애법계관의 무주처적 관점은 지속적으로 주장되지도 못 했다.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은 홍주종(洪州宗)의 평상심시도와 대립하면 서 중생의 본성을 불변하는 본체인 ‘청정본각의 공적심(空寂心)’으로 정의하는 데, 이에 따라서 그의 진리관도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을 근거한 것으로 되며, 이는 훗날 성리학적 리(理)의 선구가 된다. 이것은 사사무애법계관을 종교(終 敎)의 진리관이나 이사무애법계관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화엄불교는 지론종 남도파 이후 올바른 상입상즉의 구도를 찾아 상승하다가 사사무애법계관에서 잠시 정점을 찍고 다시 하강하는 체계일 수도 있다. 자성에 집착하지 않는 무주 처의 입장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

 

III. 이법계와 이사무애볍계,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

 

1.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과 ‘확정된 전체’로서의 다(多)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많은 경우 개별자의 통합으로서의 보편자를 상정한 다. 진리와 합치된 상태를 ‘일’로 표현하고 그 반대의 혼돈상태를 다(多)로 표현 한다.

여기서 ‘일’은 보편성·진리성·통일성 등을 ‘다’는 허망함·비진리성 등을 의미한다. 또한 ‘일’은 ‘통합된 전체’ 혹은 ‘일관된 원리’를 의미하므로 일자(一 者)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다’를 말하는 것이나, 그 통일성과 단 일성 때문에 ‘일’로 불린다. 반면 ‘다’라고만 할 때는 무질서·분열·환상으로서 의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기체 혹은 보편자를 중심으로 질서 잡힌 것을 일자로 말하고, 그런 일자를 진리로 하여 무질서한 현상을 하나의 질서로 꿰뚫는 것을 철학적 작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① 논어 「위정편」에는 군주의 덕치를 ‘북극성이 그 자리에서 모든 별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하였고,

② 노자에서 ‘하늘은 ‘일’을 얻어 맑다’ 등으로 표현한 것처럼,15) ‘일’이 ‘다’ 의 상태에 개입하는 원리나 본질로 보았다.

 

    15) 老子 39. “昔之得一者:天得一以清;地得一以寧;神得一以靈;谷得一以盈;萬物得一以生”

 

③ 또한 노자는 도(道)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16) 모든 것은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17)

 

     16) 老子 42.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17) 老子 40. ‘反者道之動’ 

 

④ 장자 「지북유편」 에서도 궁극의 도(道)를 ‘주(周)·편(遍)·함(咸)으로 표현되는 단일함’으로 보았 다.18)

 

    18) 莊子 「知北遊」 6. “周遍咸三者 異名同實 其指一也” 

 

③ 장횡거(張橫渠, 1020-1077)의 기일원론(氣一元論)에서는 단일한 태허 (太虛)와 다양한 기(氣)의 이합취산을 동시에 말하는 것 같이, ‘일’을 ‘다’의 변화 와 활동의 중심으로 보았다.19)

 

    19) 正蒙 「太和」, “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而爲萬物, 萬物不能不散而爲太虛” 

 

그는 서명에서 ‘온 세계가 단일한 기(氣)로 이 루어졌으나 그 가운데 귀천(貴賤)과 근원(近遠)의 다양함이 있다’라고 했는데,

⑤ 주희(朱熹, 1130-1200)는 그것을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정의내린다.20)

 

    20) 朱子全書 「西銘解」, “程子以爲明理一而分殊, 可謂一言以蔽之矣. 盖以乾爲父, 以坤爲母, 有生之類, 無物 不然所謂理一也”

 

⑥ ‘상키야(Sāṃkhya)에서는 일’이 ‘다’를 유출하는 일원적인 실체인 반면 ‘다’는 파 생물에 불과하다.

⑦ 플루티누스는 ‘일’은 ‘다’를 유출하는 근원이지만 ‘다’ 역 시 저열한 형태로 공존한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모두 ’일‘이라는 ‘하나의 중심’ 과 ‘단일한 조화원리’를 가진 ‘전체 세계’를 설명한다. 또한 일자만이 존재하고 다자는 허상이나 비존재 등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⑧ 베단타(Vedanta)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실체인 ‘일’일 뿐이며 ‘다’는 다만 존재한 적이 없는 환상일 뿐 이라 하였다.21)

 

    21) S.C.Chatterjee와 D.M.Datta, 김형준 역 1999, 356-363. S.C.Chatterjee와 D.M.Datta에 의하면 베단타 에서의 궁극적 존재인 브라흐만은 모든 대상의 단순한 총체가 아니므로 범신론보다는 만유재신론 으로 보아야 할 것이지만, 세상의 존재들은 노끈을 뱀으로 착각했을 때의 뱀의 존재처럼 단순한 가 현(假現)일 뿐이므로 실제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브라흐만일 뿐이다

 

⑨ 파르메니데스가 ‘분할할 수 없는 유일하게 참된 실체’를 상 정하고 그것을 ‘일자(一者)’로 본 것은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의 정의에 가장 부합한다. 그것은 유일한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으며,22) ‘사고 와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고를 통하여 확정된 일자의 부분이 없는 전체 영역을 한순간에 모두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23)

 

  22) 버트런드 러셀, 최민홍 역 1991, 96-97.

  23) 요하네스 휠쉬베르거, 강성위 역 1999, 40. 

 

⑩ 플라톤(Platōn, BC427~BC347)의 ‘선(善)의 이데아’ 역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이다.24)

비록 버트런드 러셀이 이것이 일체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The Good’라고 는 할 수 있으나 ‘The All’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25) 결국 일체도 이 일 자를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일자는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26)

 

    24) 요하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역 1983, 136-145. 요하네스 힐쉬베르거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가 흣날 일자(一者)로 불렸다고 한다. 그가 선의 이데아를 ‘실체이며 사물 자체’, ‘어느 것에도 의존하 지 않는 것’, ‘존재의 근거’라고 한 것은 베단타의 브라흐만과 유사하며, 그것을 ‘절대자요,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자’라고 한 것은 상키야의 푸루샤에 유사하며, ‘나누어져서 개별자에게 내려간다’ 고 한 부분은 성리학의 리(理)와 유사하다.

    25) 버트런드 러셀, 최민홍 역 1991, 417.

    26) 요하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역 1983.. 387.요하네스 힐쉬베르거는 ‘일자는 만물이다’와 ‘일자는 만물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만물이 아니다’라는 두 입장에 대하여 ‘일자로부 터의 유출은 내속(內屬)과 내재(內在)’이기 때문에 전자가 옳다고 한다. 

 

이런 관점들은 서로의 상위점에도 불구하고 모두 유일한 실체인 ‘일’과 그 외 곽선 안에 존재하는 ‘다’를 설명하므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에 대한 관점이 다. 여기서는 ‘일’이 모든 것을 드러내므로 은현(隱顯)과 주반(主伴)이 있을 수 없다.27)

화엄불교에서는 불교의 진실한 존재에 대한 개념인 여래장·불성·진여 등을 모두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로 보고 그것을 보는 관법을 이법계와 이사 무애법계로 설명했다.

즉 이런 ‘일’은 개별자들인 ‘다’에 드리운 허망분별을 제 거하는 방편이지만 역시 법집의 대상이므로 극복해야 한다. 사사무애법계는 ‘다’를 구성하는 사(事)들이 이런 폭압적인 일원론적에서 벗어서 자유롭게 은 (隱)과 현(顯), 그리고 주(主)와 반(伴)을 오가면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멸 하는 무자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2. 닫힌 ‘확정된 전체’와 열린 ‘확정 불가능한 전체’

 

이법계와 이사무애법계에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사법계 전체를 ‘확정된 전 체’로서의 가정하고, 그 전체를 지배하는 리(理)를 상정한다. 그러나 종국에서 는 이런 리의 개념을 폐기하고 현상과 현상의 관계로서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사무애법계가 주장된다. 여기서는 ‘확정된 전체’ 대신 ‘확정 불가능한 전체’ 의 끊임없는 생멸과 변화만이 있다. 그럼으로써 리(理)가 일으킬 수 있는 법집 마저 부정하여 무주처적인 해탈에 이른다. 화엄불교에서 ‘확정된 전체’를 부정 하는 것은 ‘전체’라는 개념이 불성립하기 때문이다.28) ‘전체’라는 것을 설정하 는 순간 그것은 ‘전체’라는 이름을 가진 ‘부분’이 되므로 더 넓은 전체를 요구한 다. 브룩 지포린은 천태불교의 공(空)을 ‘X가 그밖에 있는 not-X에 의존하는 것’ 으로 정의하며 ‘우주 전체’ 역시 ‘우주 전체’의 밖의 것을 요구하므로 ‘우주 전 체’는 불성립한다고 말한다.29)

 

   27) 여기서의 은현과 주반은 개별자들이 서로 중심되는 위치를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바다와 같이) 항존하는 진실한 존재를 배경으로 삼아 (물방울 같은) 현상들이 생멸하는 것은 진정한 화엄의 은현 과 주반이라고 할 수 없다.

   28) 러셀의 ‘이발사의 패러독스’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을 포함한 집합이라는 것은 논리상 있을 수 없 다. 또한 ‘전체’라는 개념을 설정하는 순간 그것은 ‘전체’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부분이 되므로 그 것을 포함하는 더 큰 ‘전체’가 필요하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화엄의 다(多)는 이런 논리로 전체라고 불릴 수 있는 외곽선을 가지지 않는다.

    29) 브룩 지포린, 정천구 역 2025, 85. 

 

화엄불교에서도 일진법계(一眞法界) 등의 용어를 사용하므로 그 역시 ‘확정 된 전체’로서의 ‘일’에 기반한 관념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화엄의 법계 는 연기된 현상의 일부인 사(事) 위에 서 있는 인식 주체에게 드러난 일군의 현 상들을 말할 뿐이다.30) 청량징관은 대화엄경략책에서 법계를 설명하며 “사 (事)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계(界)는 분한의 의미이니 사에 따라서 분별하는 까 닭이다.”라고 하였다.31)32)

즉 인식주체에 의해 관찰되는 일군의 현상이 있고 그 것이 일관된 법칙의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때 그것을 법계라고 한다.33)

따라 서 인식주체가 처한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법계의 외연’과 그 법계를 일관하는 ‘그 법계만의 법칙’ 역시 변하여 결과적으로 다양한 법계들이 있게 된다.

규봉 은 주화엄법계관문에서 사법계는 “지혜로서 관하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사종법계에서 제외한다고 했는데,34) 이것은 법계라는 것 자체가 여러 관점에 따른 여러 법계로 구성되어 있고, 인식 주관의 판단에 따라 생략할 수 있는 법계 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30) 카마타 시게오, 1965, 543. 카마타 시게오도 가마타 시게오도 대화엄경략책의 계(界)의 의미를 분 석하면서 ‘사(事)에 의해 계를 설명하고, 사에 의해 분별한다“고 하여, ’사‘가 하나의 법계의 중심이 됨을 말하였다.

    31) 大華嚴經略策 (T1737, 36:707c10-11): “約事説界即分義。隨事分別故”

    32) 이것은 사법계에 대한 설명이지만, 법계 자체가 여러 법계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근거로 보 기에 충분하다. 다만 사법계는 이런 여러 법계들이 서로 충돌하지만, 사사무애법계는 서로 원융한 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33) 박수현 2021, 149.

    34) 註華嚴法界觀門 (T1884, 45:684c4-6), “除事法界也。事不獨立故法界宗中無孤單法故。若獨觀之。即 事情計之境。非觀智之境故” 

 

즉 이것은 일수사견(一水四見)의 설명과 같이 다중의 법 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계는 ‘전체’라는 외각선을 가진 단 일한 것이 아니다.

다만 법계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은 것을 법계원융으로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성 속에서의 조화라는 의미에서 일진법계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3. 종교(終敎)의 닫힌 ‘확정된 전체’에 대한 비판

 

화엄의 5교판에서의 시교(始敎)와 종교(終敎)의 입장이 바로 ‘분열된 개별자 로서의 다(多)’의 입장과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에 대한 입장인 것이다. 법장은 화엄오교장에서 현상을 다만 복합적인 성질의 ‘다’로 보는 입장을 시교(始 敎)로 보고,35) 현상을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로 보는 입장을 종교(終敎)로 본 다. 전자는 통일성이 없는 다수의 종자를 가진 알라야식 위주의 법상유식이 며,36) 후자는 단일한 진여를 기반으로 하는 여래장 사상이다.

법장은 이것을 전 제로 시교와 종교에 대하여 종성론(種性論)에 기반을 둔 비판을 가한다. 법장은 시교를 ‘유위이며 무상한 법 중에 종성(種性)을 세우므로 오성(五性) 중 무종성 의 중생이 있게 된다’고 하였으며,37) 전일(全一)한 진여 위주의 관점을 종교(終 敎)로 보아 ‘진여 가운데 성품을 세우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게 된 다’고 하였다.38)

이것은 다(多)의 입장인 시교보다 일(一)의 입장인 종교의 관점 을 높게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은 ‘전체’를 확정 지으려는 입장일 뿐이다.

종교 역시 ‘전 체’의 딜레마를 가진 이상 논리상의 모순을 가지게 된다. 법장은 종교의 입장을 설명하며 ‘중생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에는 그 한계가 있다’39)고 말한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된 후에 마지막 남은 중생은 다른 중생을 교화하는 공덕을 쌓을 수 없으므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체’에 한계를 정한 이 상 종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자신의 전제조건을 어기게 된다.40)

법 장은 ‘중생계는 돌아다닌다고 그 끝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41) 라고 하여, ‘확 정된 전체’를 전제로 중생계를 파악하려는 것은 오류임을 지적한다.42)

 

    35) 시교의 개별자들은 다만 많은 것들이 모여 있을 뿐 상호투영하지는 않는다.

    36) 이것은 유식불교를 아비달마 불교와 같이 염오법과 청정법이 섞여 있는 자성을 가진 개별자들로만 보는 관점으로 파악한 것이다.

     37) 華嚴一乘敎義分齊章 (T1866, 45:485c06-08), “約始教。即就有爲無常法中立種性故。即不能遍一切有 情。故五種性中即有一分無性衆生”

    38) 華嚴一乘敎義分齊章 (T1866, 45:485b25-27), “約終教。即就眞如性中。立種性故。則遍一切衆 生。皆 悉有性故”          39) 華嚴一乘敎義分齊章 (T1866, 45:487a05), “衆生雖多亦有終盡”

    40) 華嚴一乘敎義分齊章 (T1866, 45:487a05-06), “若如是者。最後成佛即無所化。所化無故利他行闕。利 他行闕成佛不應道理”

    41) 華嚴一乘敎義分齊章 (T1866, 45:487b08-09), “非以不盡不名遊行。非以遊行令其得際”

    42) 법장은 중생계가 부증불감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종교와 같이 부처와 중생의 총량이 정해졌다는 것을 전제로 ‘부처가 늘어가면서 중생이 줄어드는 일’ 따위는 없다는 뜻으로, 종교의 ‘확정된 전체’ 에 대한 비판이다.법장이 그의 5교판에서 종교를 3단계로 보아 5단계인 원교보다 낮추어 본 것은 일원적인 진여의 개념에 천착하여 이런 부증불감한 법계의 실상에 미흡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전체와 부분’만이 아닌 ‘불변과 변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생 계와 마찬가지로 사법계도 ‘전체’라는 이름으로 고정할 수 없는, 다양한 조건들 에 의해서 계속 변화하는 곳이다.

따라서 인식주체는 계속해서 새로운 경계를 접하게 되며, 법장은 이것을 ‘중생계는 돌아다닌다고 그 끝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비판은 그가 종교의 진여를 파르메니데스의 불변 하는 ‘일자’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화엄불교는 현상세계를 ‘확정 불 가능한 열린 전체’로 보았으며, 그것을 부분적이지만 질서가 있는 다양한 법계 들이 시공간적으로 변화하면서 무한히 열려 있는 곳으로 보았다.

이런 종교(終 敎)에 대한 교판적인 비판으로 인해 화엄불교는 위계의 체계라는 비판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진리에 대한 억견을 일으키는 자성을 가진 ‘확정된 전 체’로서의 ‘일’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하려는 것뿐이다.

 

IV. 사사무애법계, 개별자들의 상호투영

 

1. 개별자와 ‘확정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다(多)

 

화엄불교의 ‘일’은 많은 경우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이 아닌 ‘개별자로서의 일’이다.

‘다’의 경우는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로는 포섭될 수 없는 ‘확정 불 가능한 전체’로서의 ‘다’가 되는데, 이는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모호하고 다양한 현상들의 덩어리를 말한다.

‘개별자로서의 일’ 역시 이런 덩어리와 하나가 됨으 로써 허망분별된 자성을 버리고 다른 개별자들과 조화를 이룬다. 화엄에서 일 즉다(一卽多)는 하나의 개별자가 경계를 알 수 없는 끊임없는 생멸의 세계로서 상입상즉하는 모습이며, ‘다즉일(多卽一)’은 개별자들이 다양한 현상들의 상호 연결된 생멸의 과정이 하나의 개별자에 반영되는 모습이다.

개별자들은 공하 므로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들과 연기적으로 연결된다. 이런 관점은 화엄경 의 “하나하나의 털구멍 가운데에 무량한 여러 불찰이 있다”43)는 언급과 관련되 며, 그것을 화엄일승십현문에서는 일즉다다즉일(一即多多即一)로 표현하였 으며,44) 기타 여러 논서에서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으로 이런 ‘일’과 ‘다’의 관계를 설명했다.45)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에서 ‘하나의 미세한 티끌 이 시방을 포함한다’고 하였다.46)

 

    43) 大方廣佛華嚴經 卷9 「初發心菩薩功徳品」 (T0278, 9:456b11), “一一毛孔中 無量諸佛刹”

   44) 華嚴一乘十玄門 (T1868, 45:514b17-20), “一者一中多多中一... 二者一即多多即一”

   45) 華嚴一乘十玄門 (T1868, 45:515b24);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 (T1732, 32:015b14); 華嚴 一乘教義分齊章 (T1866, 45:505a17); 華嚴經探玄記 (T1733, 35:123a29);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 鈔 (T1736, 36:009b15-16).

    46) 華嚴一乘法界圖 (T1887A, 45:711a10-23), “一微塵中含十方” 

 

화엄불교에서 ‘다’를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않은 것은 ‘전체’에 실체론적 본질을 상정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인식주체에게 인식된 세상은 다만 연기적으로 생멸하는 사(事)들만이 있는 곳이다. 만약 세상 전체를 규정하는 “연기하지 않는 단일한 기반”이 있다면 그것은 브라흐만과 같 은 기체(基體)가 될 것이다.

그런 기체는 무기(無記)의 대상이 되며, 그 기체가 담 지한 진리는 법집(法執)의 대상이 된다.

 

2. 사사무애법계관의 완성

 

사사무애법계에서 하나의 ‘사(事)’에 반영되는 ‘모든 사’는 ‘확정된 전체’가 아니며 인식주관이 설정한 범위에 내에서 은현과 주반을 반복하며 변화하는 역동적인 경계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의 성립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법장도 일자로서의 전체가 개별자에 반영된다는 설명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관 점은 특히 금사자장에 나타난다.47)

 

     47) 金師子章은 정원(淨源)의 金師子章雲間類解와 승천(承遷)의 華嚴經金師子章註의 일부로서만 전해진다. 

 

사자의 상(相)은 허망하므로 오직 진실한 것은 금뿐임을 말한다. 환영으 로 된 색의 상은 이미 허망하므로 오직 진실한 것은 사자의 상에 있지 아니하고 금은 본체는 무(無)가 아니다.

색의 상은 인연을 따르므로 유(有) 가 아니다.48)

그러나 법장의 전체적인 구도는 사사무애적인 입장을 지향해갔다.49)

법장이 화엄오교장의 고(古) 십현문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화엄경 탐현기의 신(新) 십현문에서는 폐기한 것은 이런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을 극복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화엄이 자신의 근원이었던 섭론종과 지론종 남도 파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는 이것을 여래장과 자성청 정심을 진실법계(眞實法界)로 보았던 정영사 혜원(淨影寺 慧遠, 523-592)의 입장 이나 대승기신론적인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그럼으로써 법장이 ‘현상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나 ‘현상의 개물(個 物)을 넘어서는 진리’를 제거하고, 온전히 사(事) 위주의 법계론을 추구하였으 며, 그 입장은 징관으로 계승되었다고 한다.50)

결과적으로 화엄은 어떠한 기체 (基體)에도 근거를 두지 않은 현상과 현상, 사(事)와 사, 개별자와 개별자의 관계 만으로 이루어진 사사무애법계를 확립하였다.

만약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인 여래장이나 자성청정심이 화엄법계의 근 거라고 한다면 화엄은 종교(終敎)가 되어 버린다.

화엄은 섭론종을 근거로 현장 의 법상유식을 넘어서려 했으나,51) 다시금 섭론종마저 넘어섬으로써 어떠한 기 체(基體)에도 근거를 두지 않는 사사무애의 무장애 법계를 확립하였다.

 

     48) 金師子章雲間類解 (T1880:45, 663c20-25). “謂師子相虚唯是眞金 幻色之相既虚。眞空之性唯實諸師子 不有金體不無 色相從縁而非有”

    49) 법장이 탐현기에서 사사무애적 관점을 나타냈으면서도 그보다 후기의 저술인 금사자장에서 이사무애를 말한 것은 ‘화엄의 관점이 사사무애를 향해 진화했다’는 본 논문에 대한 반대 증거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금사자장은 측천무후를 위한 대기설법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사사 무애로의 진화는 항상 일방향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진퇴를 통해 완성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50) 鎌田茂雄 1965, 550-555.

   51)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은 지론종 남도파의 혜광(慧光, 468~537)의 법맥에 속하는 지정(智正, 559~639)을 스승으로 하였지만, 동시에 북지섭론의 창시자 담천(曇遷, 542~607)의 제자인 법상(常 法, 567~645)에게 섭론종의 사상을 배웠다. 그는 담천의 亡是非論 연구하였으며, 그 전문을 자신 의 저작인 孔目章에 그대로 싣고 있다. 華嚴經内章門等雜孔目章 (T1870, 45:580c-581b19). 그러 므로 화엄의 사상은 일정 부분 진심(眞心)을 삼계의 근원으로 보는 섭론종에 빚을 지고 있다. 

 

법장은  주반(主伴)의 원리로써 고정된 중심이 없이도 사(事)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체계를 만든다. 그 지혜를 취하여 하나를 들어 머리로 삼으면 나머지들은 반(半)이 된다. 그 머리를 든다는 것은 곧 중심에 해당하니 나머지 것들은 그 권속이 되 어 에워싼다.

위에서 말한 교의(敎義) 등과 같이 모두 이와 같이 자재하게 이루어질 뿐이며, 또한 앞에서 말한 상입상즉이 이와 같이 자재한 것이 다.

모두 이와 같이 온갖 일체법을 거두어들이고 무궁한 법계가 모두 인 드라망을 이루는 것이다.52) ‘머리가 되는 하나의 사(事)’는 법계의 중심인 주(主)가 되는 하나의 개별자를 말한다.

이때에 나머지 ‘사’들은 ‘미확정된 전체’로서의 ‘다’인 반(伴)이 된다. 그리고 이런 주반 관계는 계속 다른 ‘사’를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인식에 포착된 모든 ‘사’는 다른 ‘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있게 되며, 그 관계 속 에서는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은 없지만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53)

그러나 이사무애법계가 다만 부정되기만 하는 경계는 아니다.

그것은 개별 자인 사법계의 ‘사’에 드리워진 허망분별을 제거하고 사사무애법계로 가기 위 한 통로이며, 사사무애법계가 개별자에 대한 집착으로 다시 사법계로 전락하 는 것을 막기 위한 견제 장치이다. 이것을 징관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事)의 입장이라면 서로 장애가 되어 즉입(即入)할 수 없고, 오직 이(理)의 입장이라면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어서 즉입할 수 없다. 지금은 이와 사가 융통하여 무애를 갖추었다.54)

 

   52) 華嚴一乘教義分齊章 (T1866, 45:506b05-10), “隨其智取。擧一爲首餘則爲伴。據其首者即當中。餘者 即眷屬圍繞。如上教義等。並悉如是自在成耳。及前相即相入自在等。皆悉如是攝一切法無窮法界並悉 因陀羅成也”

   53) 이런 사(事) 하나하나는 화엄경의 ‘털구멍’과 같다. 주(主)가 되었을 때는 모든 불찰을 포함하는 털구멍이 되고, 반(伴)이 되었을 때는 다른 털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또한 이것은 법계원융에 대한 설명도 된다. 하나의 사(事)를 중심으로 한 법계와 다른 사를 중심으로 한 법계가 원융되고, 결국 끝 없는 원융의 관계만이 있게 된다. 

  54) 大方廣佛華嚴經疏 (T1735, 35:517a18-19), “謂若唯約事則互相礙不可即入。若唯約理則唯一味。無可 即入。今則理事融通具斯無礙”

 

이와 같이 사종법계설은 이사무애와 사사무애가 서로 융통하면서 보완과 긴 장의 관계를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사사무애를 드러내는 구조이다.55)

 

   55) 사사무애는 ‘이사무애를 부정’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사무애에서 상승’하면서 얻어 지는 것이다. 즉 사사무애가 최종 목표이지만 그 자체는 실체가 없는 무주처의 경지이며. 이사무애 는 거기에 도달한 후에 버려야 할 뗏목이다.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방편임을 잘 나타내주는 구도이다. 

 

3. 메타시각으로서의 사사무애법계관

 

사사무애법계는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이 담지한 ‘최종적인 진리’가 아니 다. 그것은 일종의 ‘메타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타니 타다시(谷貞志)는 붓다가 범동경에서 62견을 비판한 것을 적시하면서 ‘붓다의 깨달음은 메타차원의 인식이며, 그것을 63번째 견해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56)

크리스 거 드문센은 비트겐슈타인과 불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무언가가 존재한다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고 말하는 것 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무언가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일차원적 체계에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표현이 메타 체계에 속한다면 그 표현 은 대응하는 존재 혹은 비존재를 논함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공」은 존재도 아니요 비존재도 아니다. 「공」만이 그러하지도 않다.57)

 

    56) 타니 타다시, 권서용 역 2008, 49-50.

    57) 크리스 거드문센, 윤홍철 역 1991, 96-97. 

 

우리가 ‘모든 것을 공(空)하다’고 할 때에는 자연히 ‘공은 공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에 대한 대답은 ‘공은 공하지 않다’는 것이거나, ‘공을 부정 하는 공공(空空)’을 설정하여 무한소급의 오류를 일으키는 부조리한 것이 된다. 이것은 공을 방편이 아닌 실체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패착이다. 사사무애법계 역시 공과 마찬가지이다.

사종법계설에서는 이사무애법계가 리(理)라는 방편 을 통하여 개별자들을 조화시킨 후, 사사무애법계에서 그 방편인 리를 스스로 분해시켜서 완전히 개별자들의 조화상태만 남긴다. 메타 시각 그 자체는 방편 에 불과하다. 만약 사사무애법계가 방편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라면, 그것은 바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자가 되며, 그 즉시 법집을 일으켜서 이사무애법계로 전락하게 된다. 사사무애법계관을 예로 들면서 화엄이 궁극적 으로 유일한 절대 진리를 추구한다고 오해하는 것은 이런 자기 분해 기능을 이 해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58)

다른 진리 체계가 스스로 최고의 진리를 적시한 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화엄의 체계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도 부정하고 넘어 갈 수 있는 효율적인 불교의 방편 체계라고 할 수 있다.59)

 

     58) 흔히 진리를 ‘언어도단’이라고 하나, 그것이 ‘최고의 진리라는 실체는 없다’는 뜻인지 ‘말로도 표현 불가능한 진실한 실체로서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사종법계설에서는 설 령 사사무애법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체화하는 순간 곧 이사무애로 전락한다는 구조를 통해서 진리 체계 자체를 실체화하지 않는다.

     59) 여기서의 메타시각은 어떠한 계(界)가 주어졌을 때 그 계에 속하는 문제들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보면서 해결하기 위해 가설된 방편을 말한다. 진속이제설과 사종법계설 등의 모든 불교의 진리 체 계는 ‘궁극적 진리’이자 ‘완전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런 방편의 체계이기도 하다.

 

V. 사사무애법계에 대한 오해와 이사무애법계로의 전락

 

1. 사사무애법계와 이사무애법계를 혼동한 사례

 

사사무애법계의 대상인 ‘전체’는 ‘확정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다’이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사(事)에 모든 ‘우주 전체’가 투영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확정된 전체’로서 ‘일’이 모든 개별자에 투영되는 것이므로 이사무애법계와 차이가 없 게 된다. 징관은 이런 이사무애를 사사무애로 혼동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경계 한다.

이 게송은 일(一)과 다(多)의 평등성을 밝힌다. 말하자면 다(多)를 일(一) 로 말미암에 일어남으로 이해하고, 일은 다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하 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을 모아 평등함으로 귀일시키는 것이니 이사무애이지 사사무애가 아니다. 마땅히 이 글을 깊이 생각하여 오해하지 말아 야 한다.60)61)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에서 모든 ‘다’들이 일어나고 다시 그곳으로 귀일하 는 것은 이사무애이지 사사무애가 아니다. 징관은 사사무애가 ‘이’와 ‘사’의 수 직적 무애가 아니고 ‘사’와 ‘사’의 수평적 무애임을 말한다.62)

그럼에도 “이데아 가 없으면 마음이 지향할 곳이 없어진다”는 플라톤의 말처럼 인간의 사유는 어 떤 기체(基體)의 존재에 기대려고 하기에, 많은 이들은 화엄 역시 그런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을 바탕으로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들의 의견은 대부 분 사사무애와 이사무애로 혼동하는 것이다. 민윤영은 대부분의 사사무애에 대한 설명은 실제로는 이사무애에 대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화엄의 사사무애 법계는 실제적으로 이사무애일 뿐이라고 했다.63)

이것은 이사무애법계가 ‘확 정된 전체’로서의 ‘일’의 리(理)가 주체가 되어 다(多)인 현상들과 관계 맺는 수 직적인 무애임은 알지만, 사사무애법계가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 없이 다(多) 들 사이만의 수평적인 무애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회경은 화엄을 스피노 자의 범신론에 비교하면서 스피노자의 신즉자연(神卽自然)을 화엄의 일즉다다 즉일과 유사한 관점으로 설명했다.

일단 ‘일’을 ‘개별자로서의 일’이 아닌 일원 론적인 신을 본 것부터 부적절하다. 이런 설명에서는 개별자인 ‘사’들이 단지 신의 양태에 불과하게 된다.64)

 

     60)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T1736:36, 224c02-06), “此偈了一多平等. 謂解多由一起. 解一由多生 ... 此 會差別歸平等性. 理事無礙非事事無礙. 應審思其文. 勿謬解也”

     61) 이것은 징관의 정법사혜원(靜法寺慧苑, 67-743)에 대한 비판이다. 혜원이 비록 사사무애라는 용어 를 처음 사용한 인물임에도 징관이 그를 비판한 것은 그가 사사무애의 개념을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하고 이사무애의 개념과 혼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카니시 토시히데(中西俊英)도 그의 논문 「唐代佛敎における「事」的思惟の變遷」에서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나카니시 토시히데 2010, 64. 참 조). 징관은 사사무애가 법장에 의해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므로, 이런 혜원의 관점을 사사무애 개 념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아 비판한 것이다.

     62) 이런 징관의 사사무애적 관점에 따른다면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에서의 일(一)과 다(多)는 ‘개별자’와 ‘다른 개별자들’이지 ‘개별자와 ‘일원적인 전체’가 아니다.

     63) 민윤영 2007, 247. 민윤영은 화엄불교의 교학이라는 것이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대승종교의 이사무 애일 뿐이며 수행론적인 측면에서는 돈교의 입장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64) 성회경 2009, 159-160.  

 

스티븐 오딘은 화엄의 법계를 ‘보편적 상호 인과관계의 모체(matrix)’로 보고 그것을 화이트헤드의 ‘연장적 연속체(continuum) 에 비교하며’ 이 ‘연속체는 각 현실적 존재자 속에 현재하고 각 현실적 존재는 그 연속체에 침투해 있다’라고 했다.65)

또한 신 역시 이런 상호연속성 속에서 창 조적 활동을 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적인 존재인데, 이것은 다만 초월적인 일자가 현상과 시간 속으로 들어왔을 뿐 여전히 일자를 중심으로 한 관점이 다.66)

또한 마츠모토 시로는 사사무애가 일종의 ‘dhātu-vāda’로서 플라톤의 철 학처럼 ‘시간이 없는 세계’의 근거를 다루고 있으며,67)68) ‘법계(dharma-dhātu)가 제법의 기체이자, 단수인 일원(一元)’이라고 했다.69)

그의 비판은 그의 시대에 횡행했던 잘못 이해된 이사무애 위주의 화엄에 대한 비판에 불과하다.70)

 

    65) 스티브 오딘, 안형관 역 1999, 161-162.

    66) 화이트헤드는 현존하는 존재들이 현실적 존재(acutual entity) 혹은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의 생성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들은 합성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영원한 객 체(eternal object)로 과거의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신은 이 가능태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의 영역을 파악하여 새로 생성하는 현실적 존재들에게 주체적 지향을 제공하며 이러한 과정들은 끊임없이 계 속된다. 이런 체계에서 신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67) 마츠모토 시로, 혜원 역 1994, 95.

    68) 박홍규 1995, 147. 박홍규는 그의 유고집에서 진실한 형상은 그 속에서 운동을 뺄 때에 얻어진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연속성과 물질성이 빠지고 완전한 추상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69) 마츠모토 시로, 혜원 역 1994, 104.

    70) 사사무애가 이사무애를 넘어서는 논리구조는 오히려 마츠모토 시로의 비판불교의 구조와 유사하 지만,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엄을 비판했다.

    71) 버트런드 러셀, 최민홍 역 1991, 202.

 

불교 적인 무주처의 경지는 이해되기 힘들었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 역시 이런 오 해에 근거한 비판을 피하기 힘들었다.

 

2. 장횡거의 기일원론, ‘확정된 전체’와 이사무애법계

 

버트런드 러셀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가 없으면 마음이 지향할 곳이 없어진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형이상학은 어떤 근본적인 실체 를 지향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했다.71)

인간의 본능은 실체를 요구 하므로 사사무애의 관점은 유지되기 힘들었다. 종밀이 홍주종(洪州宗)의 평상 심시도(平常心是道)가 인욕에 떨어진 것이라 비판하면서 ‘공적(空寂)한 진심(眞 心)’인 불성과 여래장의 경지를 강조하는데,72) 이것은 화엄의 관점을 이사무애 법계로 전락시킨 것이며, 송대의 신유학에 이어진다.73)

주희가 말한 “허령불매 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74) 심(心)의 체(體)는 종밀이 말한 “공 적지심은 영지불매하다”는75)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76)

이런 모든 이치를 갖춘 심은 모든 이치를 갖춘 ‘확정적 전체로서의 일’인 성리학의 리(理)와 바로 이어진다.77)

장횡거는 기일원론은 주장하며, 사법계를 대체한 일원론적인 기의 총합체, 그 안에서 분수리에 따른 위계질서, 전체의 원리에 의해서 완벽히 통제되는 부 분들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의 입장이다.

비록 장횡거 가 기일원론을 주장했지만 이 기(氣)로 이루어진 세상은 엄정한 성리학적 리(理) 의 지배를 받는다. 신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개별자’로서의 ‘일’이 감히 ‘전 체’의 원리를 전부 가질 수는 없다.

장횡거가 보는 ‘전체’는 단일한 기(氣)로 이 루어진 연결된 세계이므로 현상 속의 개별자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들이지만, 그것들은 태허(太虛)라는 일원적인 존재에 의해 지워진 위계질서에 의해 지배 받는다.78)

 

     72) 禪源諸詮集都序 (T2015, 48:404b27-c03), “此教説一切衆生皆有空寂眞心。無始本來性自清淨不因斷惑 成淨... 明明不昧了了常知... 盡未來際常住不滅。名爲佛性。亦名如來藏。亦名心地”

     73) 종밀이 사용한 ‘마니주와 마니주의 빛’ 비유는 대승기신론의 ‘바다와 파도’의 비유와 일치한다. 이것은 종밀의 사상이 화엄의 본래 입장에서 보면 종교(終敎)로 전락한 것이다.

     74) 朱子語類 「性理西」, “心之體虛靈不昧, 具衆理而應萬事”

     75) 禪源諸詮集都序 (T2015, 48:402c28-29), “空寂之心靈知不昧”

     76) 신규탁은 이런 종밀의 ‘청정하고 본각한 진심(眞心)’은 실재하는 근원에 해당하므로 불교의 연기설 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신규탁 1995, 3. 참조)

     77) 성리학의 심(心)은 마치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통하는 것과 파르메니데스에서 ‘사 고’가 일자와 통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리(理)와 통한다. 아라키 겐고는 이선기후(理先氣後)한 주희 의 리(理)는 종밀이 말한 ‘의세(義勢)의 선후에 해당하며, 이것은 ’만리(萬里)를 갖추고 있는 미발(未 發)의 도(道)‘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아라키 겐고, 김경호 역 2000. 326 참조) 이 역시 종밀의 공적지 심과 통한다.

    78) 正蒙 「乾稱」,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吾其體, 天地之帥吾其性. 民吾同胞, 物 吾與也” 

 

신유학자가 리(理)라는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을 다시 세운 것은 ‘무부무군(無父無君)’한 불교를 극복하고 유교적인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무부무군은 맹자 「등문공하」에서 양주(楊朱)의 위아(爲我)와 묵적(墨翟)의 겸애(兼愛)를 비판하는 설로 처음 나오지만,79) 성리학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말로 도 사용된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그런 맥락에서 ‘불교가 고상하고 미 묘한 경지까지 언급함으로써 무부무군으로 미혹함이 양주와 묵적보다 더 심하 다’고 하였다.80)

이것이 불교의 출가주의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불교가 현상 세계를 지배하는 리(理)를 부정하는 것 역시 비판한 것이다.

그들은 사(事)를 기 (氣)로 대체함으로써 현상세계에 대한 입장을 유교적인 유기체적 관점으로 바 꾸었고, 그 위에 다시 리(理)를 세워서 군(君)과 부(父)를 세웠다.

이것은 실질적 인 이사무애법계의 재건립이며, 그 단초는 화엄종 내부의 종밀에게서 시작되 었다.81)

 

    79) 孟子 「滕文公下」, “楊氏為我, 是無君也;墨氏兼愛, 是無父也。無父無君, 是禽獸也”

    80) 三峯集 「闢異端之辨」, “墨氏兼愛。疑於仁。楊氏爲我。疑於義。其害至於無父無君。此孟子所以闢之 之力也。若佛氏則其言高妙。出入性命道德之中。其惑人之甚。又非楊墨之比也”。

    81) 그런 의미에서 북송오자가 주장한 기(氣)과 그 활동에 관련되 역(易)의 사상은 사종법계설의 자기 진화의 결과로 나온 진화형 혹은 퇴화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무주처의 경지는 이해되기 힘들었기 때문에 화엄의 조사 역 시 그런 함정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VI. 결론

 

본 논문은 불교의 진리관을 방편적인 것으로 정의 내리고,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다른 진리관과의 차이점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런 절대 진리의 관 점은 필연적으로 일원적인 원리와 그 담지자인 ‘확정된 전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런 전제를 부정하는 사사무애법계관이 불교적인 무주처·무장애의 입장에 잘 부합함과 초기불교의 연기관이나 14무기에 대한 관점과도 훌륭하게 조화될 수 있음도 설명하였다.

그러나 절대적인 자성을 가 진 진리에 천착하려는 인간의 근본 무명은 사사무애법계에도 예외 없이 적용 되어 그것을 배타적인 절대 진리를 나타내는 경계로 오해되었다.

이런 오해는 화엄불교 내부와 외부에서 모두 일어났으며, 내부에서는 화엄불교의 정체성을 흔드는 오류를 만들어 결국 화엄종의 좌초를 가져왔고, 외부에서는 현재까지 도 화엄불교를 배타적인 위계적 체계로 오해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 해 역시 어떠한 방편 체계도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는 무주처의 진리를 더욱더 확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사무애법계관이 제법 실상에 대한 정확한 서술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절대진리화 하지 않 도록 스스로 자기 분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불교의 방편 체계임 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화엄경이 주는 영감이 지론종이라는 다소 어울 리지 않는 배경에서 시작하여 환경이 주는 제약을 극복하며 발전한 뒤에 단 한 번의 정점을 찍고 다시 하강한 것이 사사무애법계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비 록 이것을 기준으로 화엄불교 전체를 평가함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는 있으나, 화엄불교가 현재도 진행되는 살아있는 체계라면 이러한 일관성에 대한 탐구는 필요하다.

또한 화엄불교 자체가 그런 탐구 속에서 발전한 사상적 체계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 REFERENCES

 

◆ 약호 및 일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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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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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화엄불교는 개별자들에 부여된 자성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그런 개별자들을 초월 하는 보편자에 대한 자성 마저 부정하여 완전한 무집착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 했으며, 그러한 철학적 탐구는 사사무애법계관을 완성시켰다.

여기서는 개별자에 대 한 집착의 대상을 ‘개별자로서의 일(一)’로 표현하고, 보편자에 대한 집착의 대상을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一)’로 표현한다.

많은 경우 철학적인 사유에서는 일(一)이라 는 용어는 개별자의 통합으로서의 보편자를 상징한다.

또한 ‘일’은 ‘다’를 관통하는 보편성·진리성·통일성을 상징한다.

이 경우 ‘일’은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로서, 어떠 한 현상적인 개별자도 그것을 빠져날 수 없는 ‘전체의 진리’의 담지자이다.

그러므로 그 ‘일’은 초월적인 유일한 실체이며, 인식주체가 현상적인 ‘다’를 지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관통하는 ‘일’을 보는 것은 진리와의 합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초 월적인 유일한 실체와의 합일은 개별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해주지만, 그와 동시에 인식주체를 법집(法執)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고립된 개별자에 대한 집착을 버린 후 초월적 실체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야 무장애에 이른다.

사사무애법계관은 ‘개별자’ 로서의 ‘일’들에 드리운 허망분별을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이 담지하는 리(理)로써 극복한 후, 그 ‘리’에 드리운 법집마저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개별자’로서의 사(事)들이 상호투영하는 현실을 여실지견한다.

화엄불교는 지론종 남도파와 섭론종에 그 뿌 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기간 동안 그들 역시 ‘확정된 전체로서의 일’로서의 진여와 여래장을 기반으로 한 체계를 가졌었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 화엄불교는 개 별자들의 상호작용만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사사무애법계관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러나 이런 무장애의 경계는 이해되기 쉬운 것이 아니어서, 이 체계는 지속적으로 화 엄종의 내부와 외부에서 오해를 일으켰다.

 

주제어 화엄(華嚴),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상입(相入), 상즉(相卽), 사종법계(四種法界), 이 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

 

 

Abstract

The Concept of the ‘whole’ and ‘individual’ in Huayan(華嚴) and the Development of the Non-obstruction between Phenomena and Phenomena(事事無礙)

PARK, Su-Hyun (Senior Researcher Institude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Huayan Buddhism sought to reach the point of complete non-attachment by denying not only the individual’s intrinsic nature but also the intrinsic nature of the universal that transcends such individuals, and such philosophical inquiry completed the view of ‘Non-obstruction between phenomena and phenomena(事事 無礙)’. Here, what causes attachment with individuals is expressed as ‘one as an individual’, and what causes attachment of the universal is expressed as ‘One as a confirmed whole’. In philosophical thinking, the term ‘one’ often presupposes a universal as an integration of individuals. In addition, ‘one’ symbolizes universality, truth, and unity that penetrates ‘many’. In this case, ‘one’ is ‘one’ as a ‘determined whole’, and is the bearer of the ‘truth of the whole’ from which no phenomenal individual can escape. Therefore, ‘one’ is the only transcendent entity, and the subject of perception perceives the phenomenal ‘many’ while at the same time seeing the ‘one’ that penetrates them is considered to be a union with the truth. However, this unity with the only transcendent entity allows us to abandon our attachment with individuals, but at the same time, it leads the subject of perception to become attach with the only entity. Therefore, after we abandon our attach with isolated individuals, we must abandon our attach with transcendent reality to lead to 86 불교학연구 제86호 perfect freedom. ‘Non-obstruction between phenomena and phenomena’ is revealed by overcoming ‘the false discrimination(虛妄分別)’ upon the ‘ones’ as ‘individuals’ with the principle contained in the ‘One’ as a ‘confirmed whole’, and then by overcoming even the obsession with truth upon that ‘principle’ and finally by clearly seeing the reality in which phenomena(事) as ‘individuals’ are mutually projected.

 

Keywords Huayan(華嚴), One is many, the many are One(一卽多多卽一), Mutual entry(相入), Mutual identification(相卽), Non-obstruction between principle and phenomena(理事無礙), Non- obstruction between phenomena and phenomena(事事無礙)

 

 

2026년 02월 04일 투고 2026년 03월 14일 심사완료 2026년 03월 23일 게재확정

불교학연구(Kore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제86호(2026.3) pp. 5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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