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상사 연구
Ⅱ. 의상의 생애와 신앙
Ⅲ. 의상의 화엄사상 요약문
Ⅳ. 의상 사상의 계승
Ⅴ. 법성게(法性偈)와 조선시대 불교
Ⅵ. 의상 연구의 지향
I. 사상사 연구
사상사 연구는 사상 자체의 체계적인 분석과 사상가가 당대에 미친 사회적 영향력을 두루 살펴야 하는 연구 분야이다.
한 사상가가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 계를 형성하고 이를 사회에 펼침으로써 유의미한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을 때, 이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상가 중에서도 불교 승려는 원칙적으로 사회 운영과 거리를 두고 수행에 집중하므로 사상과 그 사회적 의 의를 연계시켜 살피는 것이 매우 힘들다.
따라서 불교사상사 연구에서 해결해 야 할 주요 과제는 사상의 사회적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이다.
의상(義相, 625~702)은 신라 화엄사상을 정립한 불교 사상가이며, 미타신앙 과 관음신앙을 선도한 종교 지도자이다.
의상은 평생 출가자 본연의 철저한 생활 태도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실천 수행의 구도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당 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과 신앙이 추앙되고 계승된 독특한 위 상을 갖는 인물이다.
의상이 시대와 교감하며 삶을 펼치고 사상을 수립하며 신앙을 실천한 자취를 추적할 때 그의 사상이 갖는 사상적 의의를 드러낼 수 있다.
의상의 사상 연구는 신라불교에서 적절한 연구 대상이다.
의상이 활동한 시 대는 삼국의 통합이 진행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사 상적으로도 유식과 화엄 밀교 등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고 일반인들에게 신앙 이 퍼져 나가던 때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의상의 사상과 그 사회적 의의에 대한 연구 성과가 적지 않게 나왔지만 그 관점은 매우 다양하다.1)
1) 의상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한 주요 글은 정병삼 2023, 석길암 2013, 최연식 2002 등이 있다.
그것은 우선 적으로 전기(傳記)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그의 삶과 지향을 추적하는데 어려움 이 많은 데 기인한다.
또 동일한 자료를 분석하지만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 한 결과가 도출되기도 한다.
의상에 대해 제시된 관점들은 주제도 다양하고 내용도 많은 편이다.
생애 에서는 출신(出身) 문제-성씨와 신분-, 수학 과정, 중국 유학 초기의 행적, 귀국 후의 활동, 부석사 창건을 둘러싼 논의들, 활동 지역의 문제, 제자들의 활동 등 여러 주제들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사상에서는 저서 일승법계도(一乘法 界圖)의 저술과 해석 및 여타 저술의 문제, 연기(緣起)사상과 성기(性起)사상, 실천론, 당시의 사상사적 위상,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등 일련의 발원문류의 글을 둘러싼 진찬 여부와 그 성격의 문제 등 역시 수많은 논점이 있다.
사회적 의의에 대해서는 미타와 관음 신앙의 문제, 화엄사상의 사회적 의의와 관련한 전제왕권 이념설의 논란, 국가적 활동과 그 사회적 의의 등에 대해 논의가 다양하다.
이에 더해 한국불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의상 사상의 계승 문제가 있다.
의상 연구는 동시대는 물론 이후에 미친 영향 또한 많은 논의 대상이 된다.
이런 의상 연구 논점들에 대한 연구 상황과 전망을 살 펴보고자 한다.
II. 의상의 생애와 신앙
의상의 전기 자료는 이 시기 승려의 자료로서는 적지 않은 편이지만, 이들 자 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생애는 그다지 많지 않아 생애 전반에 대한 해석 은 여전히 논란이 많다.
전기 자료는 전반적인 생애를 기록한 승전 자료와 여러 가지 단편 자료가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의상전교(義湘傳敎)」조와 송 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이 기본 자료이다.
「의상전교」조는 출가와 입당, 귀국, 부석사 창건 등 간략한 연대 기록이 한 부류를 이루고, 입당 내력과 지엄 문하의 수업, 귀국 동기, 법장이 의상에게 보 낸 서신, 전교십찰과 십대덕, 황복사에서의 이적 등 다른 한 부류를 이루어 여러 자료를 모아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다룬 구성이다.
나머지는 최치원의 본전(本 傳)에 있다고 미룬 데서 보듯이 「의상전교」조는 최치원이 지은 「부석존자전」 을 토대로 여러 내용을 엮은 것이다.
「의상전」은 성씨와 출신지, 원효와의 입당 기도 사실과 등주에서의 선묘와의 인연, 지엄 문하에서의 수학, 귀국시와 전법 사찰 창건시의 선묘 인연, 국왕과의 관련, 제자, 의상의 수행 경향 등으로 엮었 다.
특히 원효의 무덤 속의 깨달음 설화와 선묘와 관련된 세 토막의 긴 설화 등 다수의 설화 분량이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많다.
이 두 대표 전기 자료는 의상의 생애 전반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관심사를 알려줄 뿐이다.
「의상전교」조에서 인용했듯이 본래 의상 전기의 주 대본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으로 생각된다.
이 「부 석존자전」은 이후 주요 전거로 활용되어, 이후 작성된 전기는 이를 축약한 것 이 주종을 이룬다.
「부석존자전」과 짝을 이루는 「부석본비(浮石本碑)」 또한 전 모는 알 수 없고, 중요 연대에 대한 짤막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의상 생애에서 출가 연대와 지역, 초기의 수학 등 입당 이전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입당 지역도 양주(揚州)와 등주(登州)로 나뉘며, 입당 후의 행적도 소상하지는 않다.
귀국과 연관된 사정도 설화화된 전승이 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의상이 당에 가서 수학했던 장안 종남산(終南山) 일대는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토대로 작용했다는 데서 주목해야 한다.
의상이 머문 시기의 종 남산은 보경(普敬)의 실천을 역설하며 기층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삼계교(三階敎), 체계적인 교학을 펼쳤던 지론(地論), 그리고 정토종 계율종 초기 의 선종과 화엄 등 새로운 불교가 다채롭게 일어나던 수행과 사상 연마의 요처 였다. 그러나 의상 생애에서 가장 큰 난점은 귀국 후의 행적이다.
671년(또는 670 년)에 귀국해서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기까지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674 년 황복사에서의 강의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의상이 표훈과 진정 등 십여 명 의 제자들에게 황복사에서 법계도인을 가르치는데, 제자들의 해석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조직화된 교학 전수 체계를 전했다는 자료가 있다.2)
이 황복사는 의 상이 출가한 절이고, 사람들과 탑돌이를 하는데 허공으로 석 자나 떠올라 돌았 다는 설화를 남긴 절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논점은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비정하는 낙산사 창건 문제와 676년에 창건한 부석사의 규모에 대한 논의이다. 이는 의상의 관음신 앙과 미타신앙과 연계된 문제이므로 의상 사상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논점이 된다.
그 이후 생애 후반에 대해서도 문무왕과 연관된 단편 적인 사례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부석사의 운영과 관련하여 많은 추정 논의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생애와 관련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볼 수 있다.3)
2) 法界圖記叢髓錄(H6, 775b-776a).
3) 정병삼 1998, 84-85.
<표 1> 의상 생애 비교표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의상의 관음신앙은 그가 관음굴에서 관음 진신을 친견하고 창건했다는 낙산 사 설화와 그때 관음 친견을 발원하며 지었다는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 願文)」이 근거 자료이다.
그런데 이 발원문은 의상의 진찬이 아니며,4) 1344년에 간행한 체원의 저술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를 통해 알려 진 글이다.
이 책은 이후 여러 차례 인행되고 널리 전승되어 의상 관음신앙을 알 려주는 자료로 인식되었다.5)
낙산관음의 개창을 전하는 삼국유사 「낙산이대성」조의 기사는 범일(梵日) 을 위주로 작성한 것이었고, 그 의도는 이미 설정된 낙산 관음진신 설화에 범일 이 정취(正趣)보살 설화를 첨가하기 위해서였다.6)
4) 木村淸孝 1988, 731-749.
5) 정병삼 2010. 白花道場發願文略解(H0096)는 체원이 1334년에 해인사에서 간행하여 현재 9종의 판 본이 전한다.
6) 三國遺事 塔像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정취보살은 관음을 전제로 하므로 범일의 전승은 낙산 진신을 의상이 창설한 것으로 여긴 자료로 보아야 한다. 범일은 당에 유학하여 선을 수학하고 항주 명주 일대에서 당시 성행했던 관음신앙을 접했는데, 귀국 후 명주(溟州) 일대에 선종 굴산문을 개창하였다. 범일이 낙산에 정취보살상을 안치한 것은 낙산의 관음신앙을 확고히 함과 아 울러 명주지역 불교계 전반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7)
「백화도량발원문」을 의상에게 가탁하여 낙산 관음신앙이 의상으로부터 연유 한다고 전승한 것은 불연국토설을 이어받아 관음의 진신상주처를 정립하려는 이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의상의 미타신앙은 부석사 가람구조와 연관되어 논의된다.
그런데 부석사 가람의 초기 구조와 구상에 대한 관점이 다양하다.
일찍이 부석사의 석단이 대 체로 신라 창건 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9단에 9품의 극락왕생신앙을 재현 하여 정토의 개념을 나타냈다고 보았다.8)
이보다는 의상보다 후대에 현재 규모 를 이루었다는 견해가 많다.
7세기 창건 당시에는 소규모였다가 9세기를 전후 하여 무량수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가람의 기본 배치가 완성되었다거나,9) 11 세기 원융국사의 중창으로 보기도 한다.10)
부석사 구상의 핵심은 무량수전이다.
그 내부에 서쪽에 아미타불 1구만을 봉 안하여 미타신앙을 연상하게 한 것이 초창의 가람 구도로 볼 수 있는지가 관건 이다.
현존하는 무량수전이 1376년에 재건된 것이지만 통일신라기의 건축 기 법과 양식이 담겨 있다고 보기도 하고,11) 아미타불상이 후대의 손상에도 원형 의 근본적 변형이 없다고 보기도 한다.12)
이와 관련하여 아미타불상의 대좌와 무량수전 전돌에서 초창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주목된다.13)
7) 박미선 2010, 206-227.
8) 韓國佛敎硏究院 1976, 56-57; 김봉렬 1988, 76-78.
9) 김보현 외 1995, 9-71; 오세덕 2013, 231-241.
10) 홍병화 2011, 233-239.
11) 金東賢 1977, 29-32.
12) 黃壽永 1977, 9.
13) 이주민 2014, 455-473.
이 관점은 아미타불상의 대의와 수인 표현이 7세기의 양식이며, 와적(瓦積)기단의 대좌는 7세기 능지탑 기단에서 보이는 형식이고, 안쪽 바닥의 녹유전(綠釉塼)은 황룡사 사천왕사 등 왕실사원 수준의 사원에서만 출토되는데, 무량수전 녹유전은 사천왕사 양식보다 선행한다고 파악한다.
무량수전의 구조와 관련하여 결응의 인식도 중요하다.
원융국사 결응(決凝, 964~1053)의 비문은 무량수전 안에 아미타불상만을 독존으로 봉안한 구조가 의상이 스승 지엄의 뜻을 따른 창건 당시부터의 전승임을 강조했다.
이는 고려 전기 부석사에서 의상의 무량수전 창건과 미타신앙을 강조했고 이를 의상의 스승 지엄의 신앙 경향을 이끌어 명확히 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엄은 왕생하는 실천법[往生驗生法]에서 왕생법으로 도량에 미타상을 봉안하고 아미 타불을 염하며, 염불하고 독송하여 왕생하는 것을 제시했다.14)
14) 智儼,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 卷4 壽命品內明往生義(T1870, 45:576c). 지엄은 도량을 만들고 미타상 을 세우고 아미타불을 염하는 도량문, 염불하고 예배하고 참회하고 독송하여 왕생하는 삼칠일법 등을 제시했다.
아미타불상을 도량에 안치하고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도량법의 내용은 부석사 무량수 전의 구도와 부합된다.
의상이 화엄을 펴기 위한 근본도량으로 부석사를 세우 면서 도량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지엄의 정토신앙을 가람 경영의 준거 가 삼았을 가능성이 주목된다.
III. 의상의 화엄사상
의상 사상의 핵심은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있다.
이 저술은 화엄의 일 승 법계연기를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화엄일승법계도의 명칭이 가장 포괄적이라 할 수 있지만 본 이름은 일승법계도였다.15)
15) 의상은 일승법계도의 첫머리에 “一乘法界圖 合詩一印”이라고 밝혔고(法界圖記叢髓錄 H0107, 6:771a), 끝부분에서도 “一乘法界圖 合詩一印 依華嚴經及十地論 表圓敎宗要”라 하여 一乘法界圖가 해석과 圖印을 합쳐 부르는 명칭임을 명기하였다.
의상은 일승 법계연기의 핵심을 언어의 절제 아래 210자의 「법계도시(法界 圖詩)」로 엮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법계도인(法界圖印)」을 만들어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일승법계도로 정리하였다.
의상은 세친의 십지경론을 분 석한 지엄의 견해를 따르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사유를 진전시켜 자신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을 확립하였다.
일승법계도는 화엄 법계연기설의 핵심인 상입상즉(相入相卽)의 연기법을 체계화한 것으로서, 자리행과 이타행 그리고 수행문으로 구성된 강한 실천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의상은 일체의 연(緣)으로 이루어진 법은 하나의 법도 법으로써 정해진 자성 (自性)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인 중도(中道)의 뜻이라고 하였다.
의상은 증분 (證分)과 교분(敎分)의 두 법은 현상적으로는 양 극단에 떨어져 있지만 도리로 써 말하면 두 법이 본래부터 중도이므로 하나의 분별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의상의 중도는 모든 상대법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상호 융합하는 일승의 세계이다.
의상이 제시하는 중도는 삼승이 가진 양변의 입장을 버리고 일승의 중도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 그 자체가 그대로 중도임을 인식시키는 것 이다.16)
의상은 연기(緣起)란 부처가 중생을 거두어들일 때 도리에 계합하고 사상(事 象)을 버리도록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상은 ‘하나 가운데 여럿[一中多]’과 ‘여럿 가운데 하나[多中一]’의 상입과, ‘하나가 곧 여럿[一卽多]’과 ‘여럿이 곧 하나[多 卽一]’의 상즉을 구조화하여, 상입상즉을 법계연기설의 기본 개념으로 제시하 였다.
의상은 이 연기법을 관찰하기 위해서 수십전법(數十錢法)을 깨달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이를 중문(中門)과 즉문(卽門)의 이중구조의 오고감[來去]의 뜻으로 설명하고 모든 존재의 분리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파악하도록 했다.
의상의 수십전설은 지엄의 견해를 계승 발전시켜 체제를 갖추어 놓은 것으로 서, 이를 토대로 지엄 찬술로 가탁된 일승십현문이 생겨나고, 법장이 교분 기에서 이를 계승하여 상입상즉설이 법계연기설의 기본 개념으로 전개된다.
화엄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비유인 수십전법의 전개에 의상이 일정하게 기여한 것이다.17)
16) 佐藤厚 1999, 368; 사토 아츠시 2002, 59.
17) 정병삼 2023, 244-249.
의상은 일체의 연으로 이루어진 법은 모두 육상(六相)을 이루지 않음이 없다고 하며, 연기의 무분별한 이치를 드러내기 위한 육상에 의해 일즉일체(一卽一 切)의 도리에 이른다고 하였다.
의상은 육상설을 중도의와 연계시켜 법계연기 설의 중심 내용으로 설명했다.
의상은 또 일승의 교의를 수현기의 설을 빌어 십현문(十玄門)으로 제시하였다.
법장은 십현연기 무애법의 비유로서 수십전 법을 들고 법문으로 십현문을 들었는데, 그 설명 끝에 자세한 것은 경・론・소・ 초・공목・문답에 풀이된 것과 같다고 일승법계도와 똑같이 표현하였다.
또 의상이 삼승 이외에 일승이 있음을 경전 근거로 내세운 구절을 법장은 취지와 예문 모두 그대로 이끌어 썼다.
법장의 십현설 체계 완성에 의상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의상은 이치[理]와 현상[事]의 근본적인 일체성의 깨달음을 토대로 한 이이 상즉설(理理相卽說)을 주장했다.
의상은 일승에서는 이사상즉 사사상즉과 함께 이이상즉도 가능하다고 하여, 별교일승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교설로 이이상즉 을 말하였다.
의상은 지론의 관점을 일부 수용하여 이이상즉을 설하고 동시에 사사상즉을 설하며, 나아가 이와 사의 무분별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와 사를 동 시에 중시하는 사상으로 나아갔다.18)
의상은 성기(性起)를 강조했다.
지엄은 성기를 법계연기의 극치로 파악했는 데, 의상은 법계연기를 기본틀로 삼고 그중에서도 순정한 성기적인 경지를 강 조했다. 의상은 깨달음의 체득과 진실성의 구현이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성기 사상을 전개하였다.19)
움직이지 않는 내 몸[不動吾身]을 법신이라고 하여 지엄 의 성기관을 수용하면서, 연에 의거한 수행을 통해 본래의 진실성에 계합한다 고 본 것이다.
성기에 대한 논의가 풍부한 화엄경문답은 연기를 성기에 들어 가기 위한 방편으로 보고, 성기를 조건에 의해 ‘일어나지 않은 것[不起]’으로 정 의하여 연기와 구분하면서도, 또한 성기와 연기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관점을 보였다.20)
18) 김천학 2015, 74-76.
19) 朴太源 1996, 21-23.
20) 고승학 2013, 127-133.
한편으로 화엄경문답은 성기는 본래 갖추어진 본성이고 연기는 성기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성기와 연기의 관계를 병렬적으로 보면서도, 부처는 이 둘에 대해서 끝까지 우열을 결정짓지 않고 둘을 이해하고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21)
이처럼 연기와 성기는 화엄 전통 내에서 결코 단일 한 의미로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은 164항목의 문답으로 화엄경의 주요 사상을 상세하게 풀이한 책이다.22)
그간 법장의 저술로 알려졌는데 의상의 강의를 제 자 지통이 필록한 추동기(錐洞記)의 이본임이 밝혀졌다.23)
화엄경문답은 일승법계도 이후의 의상의 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24)
또 도 신장(道身章)도 의상 강의의 필록본으로 전승되었다.
화엄경문답과 도신 장은 의상과 문도들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그들 간의 사상 차이를 밝혀야 하는 과제도 던져주고 있다.
고기(古記)류의 전적에 도 의상과 표훈, 진정, 지통, 상원 등 의상의 제자, 신림, 법융과 진수, 대운, 질응, 범체, 윤현 등 의상계 화엄학승들의 견해를 전하는 부분이 적지 않아 비교 고찰 해야 한다.25)
의상의 실천론은 견문(見聞)에서 증입(證入)으로의 진입, 그리고 그 성과인 단혹(斷惑)이 중심을 이룬다. 의상은 수도의 구경인 성불에 대해서 예로부터 부 처를 이루었다[舊來成佛]고 하였다.
그는 삼세가 일념이기 때문에 내가 현재 예 경하는 부처가 나의 미래불[自體佛]이 된다고 인식하고, 자신을 예경하고 수행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자체는 의상이 지론과 지엄의 사상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전개한 것이다.
‘지금의 나의 몸[今吾身, 現在吾身]’, ‘오늘의 다섯 자 몸[今日五尺身]’은 모두 현재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관할 것을 요구한다.26)
21) 요시즈 요시히데 2012, 167-180
22) 163문답, 165문답으로도 헤아리지만, 중복 문항을 제외하면 164문항이다.
23) 石井公成 1996, 36-44.
24) 張珍寧 2010, 214-215.
25) 佐藤厚 2012, 66-80.
26) 김천학 2013, 178-189.
의상 의 문도들은 다른 경전들의 가르침은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고 화엄경만이 진리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를 토대로 의상계 후학들은 근기가 아주 낮은 수행자는 삼승의 수행을 완성 하여 삼승의 부처가 된 후에 비로소 일승의 가르침으로 들어간다는 삼승극과 회심설(三乘極果廻心說)을 특징적인 교설로 전승하였다.27)
의상은 일승법계도의 근본사상이 해인삼매(海印三昧)를 따라 나타남을 전 제하여 해인삼매를 중시하였다.
의상은 부처가 삼매에 드는 것이 법의 본성을 증득하여 근원까지 청정하고 분명하여 삼종 세간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관점은 그의 법손들에게 계승되어 신라 화엄사상의 특징이 되었다.
의상의 문손들은 오중해인설(五重海印說)을 크게 중시하며 이에 대한 교리 해 석을 거듭 심화하여 증층적인 교리체계를 형성했다.28)
의상 교판론의 중심은 일승과 삼승이다. 그는 일승과 삼승은 상즉하지 않으 면서 분리되지도 않고, 동일하지 않으면서 다르지도 않은 것으로서, 다만 중생 을 이익되게 하도록 서로 도와 이루어야 하는 관계로 파악하였다.
의상의 일승 삼승론은 연기론의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화엄을 중심으로 불교의 모든 이론을 통섭해 보려는 것이었고, 그 중심에 별교일승 화엄의 선양 이 있었다.29)
의상의 활동이 신라 중대 사회에서 갖는 위상과 의의 또한 많은 논점의 대상 이다.
의상은 독자적인 화엄사상을 정립하여 신라 화엄 곧 한국 화엄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런 의상의 화엄사상이 중앙 왕권과 밀착되어 신라 중대 왕실의 전제주의 성립에 유용한 것이었다고 보는 관점이 제시되었다.30)
반면 의상은 왕실과 귀족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변방의 불 교인으로 지냈고, 8세기 중엽 이후 표훈과 신림 등의 활동으로 왕실과 귀족들 의 후원하에 화엄학은 중앙의 불교계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 다.31)
27) 최연식 2011, 344-351.
28) 全海住 1993, 150-151; 金天鶴 2005, 242-244.
29) 全海住 1993, 127.
30) 李基白 1972, 210-214; 金杜珍 1995,
31) 최연식 2019, 273-279.
화엄사상은 궁극적으로 현실을 절대 긍정하여 결국 국가권력을 정당화 하고 종교적 기능과 의례를 통해 국가권력에 영합하는 성격을 가지며, 이는 동 아시아불교에 공통적으로 드러난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32)
단편적인 자료에 보이는 의상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당시 사회상과 연관시켜 그가 지향한 사회 가 어떤 방향이었는지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바르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의상 화엄사상은 지엄의 사상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사유를 진전시켜 형성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화엄 외에 지론 선 등 다양한 계통의 사상적 영향이 담겨 있 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법성(法性)이며 자신이 곧 구래불(舊來佛)임을 자각하고 중도를 실천하는 수행을 강조하였다.33)
의상 문하에서 멀리서 다른 부처를 구 하지 않는다는 수행을 실천한 것이 초기 선종에서 강조하는 것과 같다는 데서 선종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34)
의상이 관법 수행을 장려하고 이를 실천한 제자 에게 선 수행의 인가를 연상시키는 징표를 주는 것이나 선 수행의 지사문의(指 事問議)와 유사하게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하며 설명하는 것은 의상과 그 문하 의 선적인 경향성을 보여준다.35)
이는 의상이 강조한 수십전법과 같은 사상적 체계와도 연관성을 갖는다. 의상과 그의 문도들은 연기법을 파악하는 것을 구 체적인 수행으로 실천하려는 특색을 보였던 것이다.
의상은 일승법계도로 신라 화엄의 토대를 확실히 세웠고 문도들이 대를 이어 전승하여 각자의 사상 체계를 형성했다.
일승법계도는 법장이 화엄사 상을 체계화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원효 또한 의상의 수십전법을 수 용하기도 하였다.36)
32) 조명제 2016, 64.
33) 장진영 2014, 172-182.
34) 石井公成 2012, 31-34.
35) 석길암 2010, 107-113.
36) 정병삼 1998, 176-178.
이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동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사상가들 에게 일정한 영향을 줄 만큼 선도적인 것이었고, 의상이 당대 화엄사상가로서 명확한 위상을 가짐을 말한다.
의상의 사상사적 위상과 관련하여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현수서간(賢首書簡)」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장은 695년 경 승전 을 통해 탐현기(探玄記) , 일승교분기(一乘敎分記) 등 자신의 주요 저서를 보 내 의상에게 살펴보아 줄 것을 요청했고, 의상은 교분기를 진정과 지통 등 제 자들에게 검토하도록 했고, 그 차례를 수정하여 학습하기도 했다.37)
이는 법장 이 의상의 교학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원효가 신라불교 사상계에 미친 영향은 크다.
법장이 갖는 동아시아 불교계 에서의 위상은 매우 높으며, 그가 신라 교학의 활성화에 미친 영향 또한 크다. 의상은 원효와 교류하고 법장의 예우를 받고 교류하며 그 사상을 제자들과 공 유했다. 원효나 법장의 화엄사상 정립은 신라 불교계에 화엄사상에 대한 관심 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신라 화엄의 정초자인 의상의 위상도 그 리 낮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 화엄은 화엄경 중심주의에 경도되어 기신론 사상을 배척 하는 등 폐쇄적인 교학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평가된다.38)
의상계 화엄에서는 다른 경전들과 달리 화엄경은 하나의 내용이 다른 모든 내용을 이야기하는 의의를 가지므로 화엄경만 연구하는 것으로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의상계가 다른 경전들을 비판하거나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의 문손으로 화엄을 정립시킨 주역인 신림(神琳) 이 법장의 교분기를 대대적으로 강의하고 기신론 사상에 대해서도 논의를 전개하여 중국 화엄의 새로운 변화를 주시한 일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39)
37) 均如 釋華嚴敎分記圓通鈔(H0059, 4:245a). 신라 전승본은 草本, 법장의 원본은 鍊本으로 구분했다.
38) 佐藤厚 2000, 66-77.
39) 정병삼 2023, 389-391.
의상 이 실천을 중시함으로써, 그의 법손들이 다른 경전들에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교학사상 전개를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았던 점은 신라 화엄사상의 한계로 파 악해야 할 것이다.
IV. 의상 사상의 계승
제자들은 의상과 문답을 통해 일승법계도 사상을 이해하고 혹은 저마다의 강의안을 책으로 엮기도 했다.
제자들의 대표로서 십대제자를 꼽는데, 이들은 표훈(表訓)・진정(眞定)・지통(智通)・도신(道身)・상원(相元)・양원(良圓)・오진(悟 眞)・진장(眞藏)・도융(道融)・능인(能仁) 등이다.40)
주요 제자는 「법장화상전」과 송고승전, 삼국유사 등 전승마다 다르다.
초기 제자들의 면모는 의상과 직 제자들의 수학 분위기를 전하는 고기 등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으며, 여기서 는 제자상의 변화 또한 추적할 수 있다.
의상의 계승을 전하는 다른 표현으로 전교십찰(傳敎十刹)이 있는데, 성립 시 기는 9세기 말 경으로 추정된다.
이또한 「법장화상전」과 삼국유사가 다른데, 부석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는 공통된다.
전교십찰은 화엄교학의 확산과 신라 불교계의 변화와 아울러 고려하는 거시적 관점으로 파악할 때 그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일승법계도에 대해 주석서를 지어 자신의 이해를 드러내는 방식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의상의 손제자 신림(神琳)의 제자들인 법융(法融) 진수(眞秀) 대운(大雲) 3인은 일승법계도의 해석서인 법계도기(法界圖記)를 각각 저술 했고, 이들을 묶어 고려 후기에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을 간행했 다.
균여(均如, 923~973)는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를 지어 이 흐 름을 계승했는데, 균여의 주석서는 고려 내내 필사 전승되다 고려 후기 대장경 조판 시에 법계도기총수록과 함께 개판하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并入私記) 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서 일승법계도를 인용하였다.
지눌은 「법계 도시」의 증분과 연기분, 연기와 성기가 별개가 아니라 모두 성기로 이해하였 고, 이런 지눌의 인식은 성기사상에 바탕을 둔 선교일치설로 이어졌다.41)
40) 정병삼 2012, 136-142.
41) 全海住 1993, 249-254.
일승법계도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통되었다.
송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는 일심사상을 근본으로 선교일치를 지향하며 종경록(宗鏡錄)에서 의상을 수록하였다.42)
연수는 의상이 화엄경의 요점이 일념(一念)에 있다고 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다라니법이라고 했음을 인용 하였다.
이러한 연수의 인용은 의상의 화엄사상이 중국에 어느 정도 알려졌음 을 확인해 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일본 화엄종의 주류와 달리 법화경을 화엄경에 도 저히 미치지 못하는 경전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나라 시대 일본 화엄종에서 비 판받았다.43)
그러나 신라불교의 영향이 크게 줄어들고 중국교학에 관심이 커 진 헤이안 시대에 의상계 화엄사상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44) 일승법계도 는 일본에서 30종의 목록에 수록되었고, 13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작성한 9종 의 사본이 남아 있어 꾸준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계도시」는 일본에서 의식에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 쇼묘지(稱名寺)에 전하는 13~14세 기의 사본 「화엄원융찬(華嚴圓融讚)」 5종은 「법계도시」 곁에 연음표를 붙여, 의 례에 음악으로 사용했음을 확인해 준다.45)
이런 일본의 동향과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 고려말에 「법계도시」만을 따로 전승하는 전통이 성행한 점이다.
그 한 예가 금강반야바라밀경 4경합부 사경(寫經)(1388년)에 합철된 「일승법계도」라는 제목의 「법계도시」 사경이다.46)
42) 延壽 宗鏡錄(T2016, 48:952a).
43) 김천학 2012, 82.
44) 최연식 2003, 26-37.
45) 佐藤厚 2017, 111-112.
46) 문상련 2017, 75-78. 1617년에 조성한 갑사 소조보살상 복장 발견 1388년 제작 백지묵서 절첩본 사 경. 금강반야바라밀경 아미타경 화엄경보현행원품 법화경보문품과 「일승법계도」와 「표 훈대덕발원문」을 합쳐 사경한 것이다.
이 사경은 고려말에 「법계도시」가 독립된 형태로 유통되고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이미 의천이 간행한 원종문류에서도 「법계도인」만을 수록했으므로 그 경향은 더 일찍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법계도시」 사경은 14세기 말에 고려 불교계에 화엄교학과는 다른 의상 계 승 흐름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고려말 불교계는 공덕신앙이 널리 유행 하고 기층민의 신앙심을 고취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전을 사경하며 그 공덕으로 현세와 내세의 안락을 빌었다.
의상이 낙산에 관 음도량을 열어 기원했다는 「백화도량발원문」이 사람들에게 널리 환영받았고, 이런 배경에서 게송 「법계도시」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는 의상이 이 시기에 미타성자로 주목되고 사상과 신앙의 실천에 뛰어났던 수 행자로 꼽힌 결과로 추정된다.47)
이는 「법계도시」 외에 여러 발원문류의 글이 의상 찬술로 전승되는 현상도 가져왔다.48)
47) 無寄 釋迦如來行蹟頌(H0093, 6:537c).
48) 정병삼 2023, 208-209.
V. 법성게(法性偈)와 조선시대 불교
「법계도시」만의 전승 경향은 조선시대에 더욱 일반화되었다.
김시습(金時 習, 1435~1493)은 「법계도시」를 간략하게 해석한 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 法界圖註幷序)를 썼다.49)
김시습은 의상이 법계도에서 시종일관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상에서 실상을 철견하는 법성원융의 의미이며, 개개 중생의 신심 이 곧 법신불인 법성성기의 뜻이라고 해석하였다.50)
조선 후기 도봉유문(道峰 有聞, ?~1800)은 대방광불화엄경의상법사법성게과주(大方廣佛華嚴經義湘法師 法性偈科註)를 지었다.51)
유문은 「법계도시」를 ‘법성게’로 지칭하고, 이는 법 계가 바로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자기법성의 성기 세계임을 노래한 것으로 실천수행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의상의 화엄을 높이 평가했다.52)
49) 金時習 大華嚴法界圖註幷序(H0124, 7:301c-307a).
50) 全海住 1993, 210-216.
51) 有聞 大方廣佛華嚴經義湘法師法性偈科註(H0229, 10:386c).
52) 全海住 1993, 222-223.
이때 「법계도 시」는 연담유일(蓮潭有一) 등 당시 강학계의 중심인물도 관심을 가졌던 교계의 주목 대상이었다.
진허팔관(振虛捌關)은 조선 후기의 수학 경향을 제시한 삼문 직지(三門直指) (1784년)에 도인 형태의 「법계도송(法界圖頌)」을 수록하였다.53)
그러나 설잠과 유문의 해석은 신라와 고려의 화엄사상 전통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며, 특히 「법계도시」가 관심의 대상이 된 점이 주목된다.
이런 흐름과 같은 선상에서 의상의 「법계도시」가 ‘법성게(法性偈)’라는 표현 으로 불교 의식에서 널리 지송되었다.
여러 의식집은 비슷한 내용을 다른 이름 으로 수차 간행했는데, 그중 여러 책에 법성게를 수록했다.
일찍이 청문(請文) (1529)에 ‘법계도’라는 이름으로 「법계도시」를 수록했다.54)
‘법성게’를 처음 명 시한 것은 지선(智禪)의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 (1661)으로, 의식 중에 ‘법성 게를 외우며 절반을 따라 돈다(咏法性偈, 半繞匝)’라고 하였다.55)
여기서 소대(燒 臺)에 이르기까지 「법성게」를 외우며 염불한다고 기록한 것은 현대의 의식 절 차와 같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가장 왕성하게 간행했던 의식집인 제반문 (諸般文)에는 「법계도시」와 「법계도인」을 여러 차례 수록했다.
1670년 갑사 간행본은 ‘법계도’라는 이름으로 「법계도시」와 「법계도인」을, 1694년 금산사 간행본은 이름 표기 없이 「법계도인」을 인쇄 수록하고 신중작법절차(神衆作法 節次)에 “대중이 시식단에 돌아올 때 어산이 법성게를 외운다(大衆, 還向施食壇 時, 魚山唱法性偈.)”라고 주기(註記)하였다.56)
1769년 봉정사 간행본은 여러 차례 ‘법성게’를 의식에 사용함을 명기하였는데, 소대에 이르기까지 독송함을 기록 하였다.57) 청문에 수록된 부분도 대체로 같은 용도를 기록하고 있다.58)
53) 捌關 三門直指(H0220, 10::158a).
54) 請文 https://kabc.dongguk.edu/viewer/view?dataId=ABC_NC_02096.
55) 智禪 五種梵音集 卷上 中禮作法 懺悔偈(H0294, 12:166c).
56) 諸般文 https://kabc.dongguk.edu/viewer/view?dataId=ABC_NC_04198; 諸般文 https://kabc.dongguk. edu/viewer/view?dataId=ABC_NC_05890. 주기 연대는 미상. 제반문의 법성게 수록은 판본에 따 라 다르다.
57) 諸般文 https://kabc.dongguk.edu/viewer/view?dataId=ABC_NC_02683.
58) 請文 https://kabc.dongguk.edu/viewer/view?dataId=ABC_NC_04193.
이 사 이에 지환(智還)이 간행한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 音刪補集) (1709)에는 ‘법성게’ 표현이 10회나 등장하는데, 의식에서 「법성게」를 외우며 두루 돌아 소대에 이른다고 그 용도를 명확히 기록했다.59)
「법계도시」가 「법성게」로 의식집에 수록될 때 그 용도는 독송과 따라 돌며 외우는 것이었다.
「법성게」가 의식집에 수용된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게송이 라는 형태와 독송에 적절한 분량 등을 그 이유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게송 중에 「법성게」가 채택된 것은, 설잠이 주석을 베풀었듯이 교학의 핵심이 자 선적인 해석이 가능한 「법성게」의 특성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 히 팔관의 삼문직지에 교학 곧 원돈문에 원돈성불론과 함께 「법계도인」 을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수록함으로써 이후 불교계에 「법성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유문이 법성게과주 를 저술한 것이 「법성게」의 사상적 핵심인 법성을 실천 수행의 관점에서 파악 하려 한 것과도 상통한다.
이들을 이어 1827년에 긍선(亘璇)이 제반 의식문을 정리하여 간행한 작법 귀감(作法龜鑑)에 대중이 함께 「법성게」를 독송하며 따라 돈다는 내용을 수 록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승하여 근대 의식의 표준이 된 석문의범(釋文儀範) (1935)에서 여러 의식에서 「법성게」를 독송함을 열거하고 도인을 수록하였 다.60)
이런 과정을 거쳐 의식에서 「법성게」를 독송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 지게 된 것이다.
현대에도 재를 마친 후 소대에 이를 때까지 참가자들이 「법성 게」를 외우며 인도승을 따라 움직이는데, 이는 오종범음집에서 시작하여 석문의범에서 정착된 것이 보편화되어 현대에 이르는 유래를 보여준다.
이들 의식집 기록은 1529년과 1670년 간행에는 ‘법계도’를 사용했고, 1709년 과 1769년 간행에는 ‘법성게’를 사용했다.
팔관은 1769년 삼문직지에서 ‘사 법계도송’이라는 이름으로 수록했다.
‘법성게’를 명기한 1769년 봉정사본 제 반문을 간행할 때는 법성게과주를 지은 유문이 활동하고 있던 때였다.
현척 은 법성게과주의 서문에서 재를 설행할 때 법주가 요령을 흔들며 법성게를 독송한다고 하였다.61)
59) 智還 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H0227)에는 卷上에 4회, 卷中에 4회, 卷下에 2회 수록.
60) 安震湖 釋文儀範(法輪社, 1935)에는 十王疏 獻坐安位 등 10여 곳에 법성게를 수록하였다.
61) 賢陟, 「法性偈序」(H0229, 10:386c).
이를 통해 「법계도시」를 「법성게」라고 부르게 된 것은 설잠이 대화엄법계 도주를 쓴 1476년 이후 오종범음집을 간행한 1661년 무렵부터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670년 갑사 간행본 제반문은 아직 ‘법계도’라고 수 록하여, 제반 의식집에는 1700년 무렵부터 ‘법성게’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문직지(1769)에서는 ‘사법계도송’으로 수록했다.
의상의 「법성게」는 설잠과 유문을 통해 한편으로 교선(敎禪)을 아우르는 사상적 계승이 이루어지 면서, 한편으로는 그 사상성과 관련 없이 의식에서 지송되는 의례적 성격을 갖 게 되었다.62)
62) 정병삼 2023, 456-460.
VI. 의상 연구의 지향
의상의 화엄사상은 사상적으로 신라는 물론 고려 후기까지 그에 대한 주석 서가 간행되며 꾸준히 계승되어 한국 화엄사상의 중심을 차지하여 한국 불교 사상의 큰 유산으로 자리잡았다.
고려말부터 따로 유행된 「법계도시」는 조선 시대에 설잠이나 유문의 해석이 나올 정도로 관심을 받았고, 17세기부터는 「법 성게」라는 이름으로 의식집에 수록되어 독송되면서 널리 전승되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동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원효와 법장에게 영향을 미치는 교학 수준을 보였다.
그 사상이 신라와 고려와 조선까지 통시대적으로 계승되고 추 앙된 경우는 한국불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의식에서도 여전히 「법성게」는 지송되고 있으며, 그 연원은 의상이 제시했던 체계적인 사 상과 신앙 그리고 철저한 수행인의 자세에 있다.
의상이 이끌었던 투철한 실천 적 지향은, 시대와 사회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사상과 신앙과 실천이 한 데 어우러져 바람직한 종교적 결과를 기대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루어진다.
사회 의 품을 떠나 홀로 살 수 있는 개인을 생각하기 어렵고, 개인의 삶의 구체적인 면모를 도외시한 사회상도 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불교사상가는 깨달음을 향 한 이치 탐구와 그 실천을 위해 매진하는 개인이지만 그의 삶은 이웃이 모인 사 회와 유리되어 영위될 수 없다. 불교사상사 연구는 사상가의 사상을 우선적으 로 정치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의 지향을 명확하게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 시에 그가 당시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고 그들을 위해 노력했는지 알기 위해 삶 의 궤적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를 검토할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는 점이다.
신라 통일기의 새로운 시대를 살았던 의상은 다행히 몇몇 사회적 의식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를 남겨 좋은 분석 대상이 된다.
또 이후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화엄사상의 정초를 세워 사상적 지향도 추적할 수 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 을 파악하려는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의상의 사상은 앞으로 훨씬 체계적인 사상 분석과 삶의 지향을 기대 해야 한다.
7세기 중반의 신라 사회에서 그가 제시한 사상이 얼마만큼 사회적 공명을 얻었는지, 이를 위해 의상과 그의 제자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어떤 활 동을 펼쳤는지 구명해야 한다.
의상의 사상이 동시대의 다른 사상과 어떤 연관 성을 가졌는지, 동아시아 불교에서 지향했던 의식과 동이점은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의상은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에서까지 사상의 선도자이자 돈 독한 신앙의 구현자로서 추앙되고 때로는 의식에서 환영받는 게송의 지은이로 서 계승됨으로써 한국 불교에서 보기 드문 분석 대상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의상은 한국 불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동시대적(同時代的)이고 통시대적(通 時代的)인 특성을 갖는 인물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63)
63) 정병삼 2023, 15.
의상 연구는 마치 한국불교사 연구의 축소판과 같이 관점도 여러 갈래이고 연구 경향도 다양하다.
의상의 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의상이 7세기 신라 사회에 서 펼치고자 했던 사상과 신앙 그리고 이들이 신라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에 대 한 명확한 파악이 연구 풍토 근저에 자리잡아야 한다. 새로운 관점을 정립하고 그를 뒷받침할 자료를 정확하게 해석하여 제시하는 노력은 다른 모든 연구와 마찬가지로 사상사 연구에 필수적이다.
한국불교사에서 특유의 위상을 갖는 의상 연구는 앞으로 엄정한 자료 비판을 거친 창의적인 분석을 통해 의상이 의 도했던 그의 사유와 삶, 그리고 그 사회적 의의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 으로 기대한다.
참고 문헌 REFERENCES
◆ 약호 및 일차 문헌
Abbreviations and Primary Sources 均如, 釋華嚴敎分記圓通鈔(H0059) 均如, 一乘法界圖圓通記(H0055) 金時習, 大華嚴法界圖註幷序(H0124) 無寄, 釋迦如來行蹟頌(H0093) 安震湖, 釋文儀範, 서울:法輪社, 1935 延壽, 宗鏡錄(T2016) 有聞, 大方廣佛華嚴經義湘法師法性偈科註(H0229) 一然, 三國遺事, 塔像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智禪, 五種梵音集(H0294) 智儼,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T1870) 智還, 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H0227) 捌關, 三門直指(H0220) 法界圖記叢髓錄(H0107) 諸般文, https://kabc.dongguk.edu/viewer/view?dataId=ABC_NC_04198; ABC_NC_05890; ABC_NC_02683 請文, https://kabc.dongguk.edu/viewer/view?dataId=ABC_NC_04193; ABC_NC_02096 賢陟, 「法性偈序」(H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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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의상(義相, 625~702)은 신라 화엄사상을 정립한 불교 사상가이며, 미타신앙과 관음 신앙을 선도한 종교 지도자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사상적으로 신라는 물론 고려 후 기까지 그에 대한 주석서가 간행되며 꾸준히 계승되어 한국 화엄사상의 중심을 차지 해 왔으며, 나아가 한국 불교사상의 큰 유산으로 자리잡았다. 고려말부터 따로 유행 된 「법계도시」는 조선시대에 설잠이나 유문의 해석이 나올 정도로 관심을 받았고, 17 세기부터는 「법성게(法性偈)」라는 이름으로 의식집에 수록되어 독송되면서 널리 전 승되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동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원효와 법장에게 영향을 미칠만큼 높은 교학 수준을 보였다. 또한 그 사상이 신라와 고려와 조선까지 통시대 적으로 계승되고 추앙된 경우는 한국불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의식에서도 여전히 「법성게」는 지송되고 있으며, 그 연원은 의상이 제시했던 체계적 인 사상과 신앙 그리고 철저한 수행인의 자세에 있다. 의상의 사상에는 화엄을 비롯하여 지론 선 등 다양한 계통의 사상적 영향이 담겨 있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법성이며 자신이 곧 구래불임을 자각하는 관법과 중도를 실천하는 수행을 강조하였다. 의상과 제자들이 실천한 수행은 선 수행을 연상하는, 의상 연구와 한국불교사 515 516 불교학연구 제86호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선적인 경향성을 보여준다. 의상의 사상적 위상은 그가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드물게 동시대적인 특성과 통시 대적인 특성을 함께 갖춘 인물이라는데 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동시대의 주요한 성 과로서 원효나 법장과 이를 공유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고, 일승법계도는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그에 대한 해석서가 나와 의상의 사상이 한국 불교 에 미친 영향을 입증한다. 의상은 사상을 철저히 구현한 수행자의 표상으로서 오랫동 안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더해 의상은 현대 의식에서도 「법성게」를 통해 사람 들 곁에 친근하게 자리잡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의상은 한국불교사에서 독 자적인 의의를 갖는 불교사상가로서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앞으로의 의상 연구는 7세기 중반의 신라 사회에서 그가 제시한 사상이 얼마만큼 사회적 공명을 얻었는지, 이를 위해 의상과 그의 제자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 구명해야 한다. 의상의 사상이 동시대의 다른 사상과 어떤 연관성을 가졌는지, 동아시아 불교에서 지향했던 의식과 동이점은 무엇인지도 체계적으로 살 펴보아야 한다. 의상 연구는 마치 한국불교사 연구의 축소판과 같이 관점도 여러 갈 래이고 연구 경향도 다양하다. 의상의 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사회에서 펼치고자 했던 사상과 신앙 그리고 이들이 가졌던 사회적 의의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 가 연구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주제어 의상(625-702), 신라 화엄사상, 법성게, 일승법계도, 관음신앙, 미타신앙
Abstract
The Study of Uisang and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JUNG, Byung-Sam (Professor Emeritus Sookmyung Women’s University )
Uisang (625-702) was a Buddhist monk philosopher who established the Silla Hwaeom thought and a religious leader who led Amitaand Avalokitesvara beliefs. Uisang’s Hwaeom thought was passed down continuously not only in Silla but also in Goryeo Dynasty. It has been continuously inherited to occupy the center of Korean Hwaeom thought, and has further established itself as a great legacy of Korean Buddhist thought. Uisang’s wrote Beopseongge (Gatha on the Dharma nature), which has been popular since the end of Goryeo, received so much attention that it was interpreted during the Joseon Dynasty, as Seoljam and Yumun. And from the 17th century, it was widely transmitted as it was included in the Buddhist rituals. The Hwaeom thought of Uisang showed a high level of thought that influenced Wonhyo and Fazang, representative thinkers of the that times. In addition, it is difficult to find an example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that the ideology was inherited and revered in a synonymous way to Silla, Goryeo, and Joseon. Even in today’s Buddhist rituals, Beopseongge is still being transmitted, and its origin lies in the systematic ideology, faith, and thorough attitude of practitioner suggested by Uisang. The thoughts of Uisang adopted various ideological influences such as Chinese Huayen and Dilunzong. Uisang emphasized his disciples that they must meditate themselves are just as Guraebul(the buddhas from times long past). And he thaught his disciples to practice the Middle Way. The practices of Uisang and his disciples showed a very unique tendency at the times, reminiscent of Zen practice. The ideological and historical significance of Uisang lies in the fact that he is a person who has both contemporary and long time characteristics, which are very rare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Uisang’s Hwaeom thought was a major achievement of his period, and he shared it with Wonhyo and Fazang, and exchanged influences with each other. Uisang’s main writing Ilseungbeopgyedo published interpretations of it in the Silla, as well as in the Goryeo and Joseon, proving the influence of Uisang’s thought on Korean Buddhism. Uisang has long been an object of reverence as a representation of a practitioner who thoroughly embodied the thought. In addition, Uisang has become the only person who has become familiar with people through Beopseongge in modern Korean Buddhism. In this way, Uisang has a special status as a Buddhist philosopher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Future research of Uisang’s thought should find out how much social resonance his thoughts gained in the 7th century Silla society, and what activities Uisang and his disciples carried out in that time and space. It is also necessary to systematically examine how Uisang’s thoughts are related to other contemporary ideas and what are the differences of them at East Asian Buddhism. The study of Uisang has several perspectives and various research trends, just like a miniature version of the study of Korean Buddhist history. For the proper evaluation of Uisang, a detailed exploration of the ideas and beliefs, he wanted to carry out in the society he lived in and their social significance should be the basis of the study.
Keywords Uisang (625-702), Silla Hwaeom thought, Beopseongge, Ilseungbeopgyedo, Avalokitesvara belief, Amita belief
불교학연구(Kore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제86호(2026.3) pp. 51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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