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요한계시록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책임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은 옛 하늘과 옛 땅을 대신할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말하기 때문이 다(21:1).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묵시록(ἀποκάλυψις)이자(1:1) 예언(προ φητεία)의 말씀이다(1:3).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묵시적 성격 과 예언적 성격을 모두 띤다고 볼 수 있다.1)
“예언적 종말론”은 하나님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행동함으로써 인 간 역사의 원래 상태를 회복하시리라 기대하는 낙관적인 관점이다.2)
“묵시적 종말론”은 하나님이 격변을 일으키며 인간 세상에 개입하여 역사를 끝내시고, 그 후에 에덴동산의 상태가 복원되는 세상이 회복 되리라고 기대한다.3)
예언은 미래가 현재에서 발생한다고 보지만, 묵시적 종말론은 미래가 현재에 침입한다고 본다.4)
1) 요한계시록은 또한 편지 장르에 속하기도 한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잘 드러난다.
2) David E. Aune, Apocalypticism, Prophecy and Magic in Early Christianity: Collected Essays, WUNT 199 (Tübingen: Mohr Siebeck, 2006), 4-5.
3) Aune, Apocalypticism, Prophecy and Magic, 5.
4) Aune, Apocalypticism, Prophecy and Magic, 5.
묵시록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종말론에 더 가깝다.
콜린스(J. J. Collins)의 묵시록 정의에 따르면, 묵시록이 드러내 는 초월적 실제의 두 축은 시간적인 종말론적 구원과 공간적인 초자연 적 세상이다.5)
요한계시록에서 종말론적 구원그리고 심판은 초자 연적 재앙을 수반하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구 원을 실현하거나 방해하는 초자연적 존재들의 역할도 두드러진다.
반면 회개를 촉구하는 묵시록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면, 요한계시록 은 예언적 종말론의 성격도 띤다.
요한계시록은 타협하는 독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러한 회개의 메시지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두 드러진다(2:5, 16, 22; 3:3, 19).6)
회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 루어질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 전에 인간의 현재 삶을 변화시키려 한 다는 점에서 예언적 종말론에 가깝다.
이것은 저자가 요한계시록이 예언의 말씀임을 거듭 밝히는(1:3; 22:7, 10, 18, 19) 이유이기도 하다.
예언자(prophet)가 설교자로서 미래에 비추어 현재를 보고, 예고자 (foreteller)로서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본다면,7) 예언자 요한은 예고자로서 현재의 삶에 비추어 미래의 심판을 내다볼 뿐만 아니라, 설교자 로서 미래의 심판에 비추어 현재의 회개를 요구한다.
5) J. Collins의 묵시록 정의를 참조하라. “‘Apocalypse’ is a genre of revelatory literature with a narrative framework, in which a revelation is mediated by an otherworldly being to a human recipient, disclosing a transcendent reality which is both temporal, insofar as it envisages eschatological salvation, and spatial, insofar as it involves another, supernatural world” (John J. Collins, “Introduction: Towards the Morphology of a Genre,” Semeia 14 [1979], 9).
6) 물론 요한계시록의 일차적 기능은 고난받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이다. D. Hellholm은 묵시록 장르에 대한 콜린스의 정의를 보충하기 위하 여, “신적 권위를 통해 권면 그리고(혹은) 위로를 할 목적으로 위기에 처한 집단을 위한 것(intended for a group in crisis with the purpose of exhortation and/or consolation by means of divine authority)”이라는 묵시록의 기능을 제시한다(David Hellholm, “The Problem of Apocalyptic Genre and the Apocalypse of John,” Semeia 36 [1986], 27).
7) Alfred Edersheim, Prophecy and History in Relation to the Messiah: The Barburton Lectures for 1880-1884 (Eugene: Wipf & Stock, 2005), 127.
본 연구에서는 요한계시록이 타협하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악한 불 신자들에게도 회개를 요청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계시록의 이 원론은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을 엄격하게 구분 하고, 그 경계선은 고정된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면, “불의를 행하 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 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 개역개정)라는 구절은 회개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듯하다.
브라운 (Schuyler Brown)은 마지막 날에 고난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최후의 회 개가 주어진다는 생각은 9:20과 16:11 같은 구절들과 상반된다고 믿는 데,8) 이 구절들에서 고난은 단지 불신자들의 죄를 굳히고 하나님을 향한 신성모독을 강화하며, 다가올 시련으로 인해 의로운 자들과 불 의한 자들의 경계는 더 분명해질 뿐이라는 것이다(22:11).9)
8)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 에게 절하고”(9:20, 개역개정).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 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6:11, 개역개정).
9) Schuyler Brown, “‘The Hour of Trial’ (Rev 3:10),”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85/3 (1966), 311.
과연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종말론은 악인들의 회개 가능성을 배제 하는가?
본 연구의 목적은 악인들, 특히 땅에 거하는 자들(οἱ κατοικοῦν- 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평가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 큼 비관적이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의 핵심 주장은 요한계 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불신자들을 가리킬 때가 많음에도, 회 개의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포함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땅에 거하는 자들처럼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땅의 왕들과 만국의 회개 가능성을 짚어볼 것이다.
3장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살펴본 후에, 4장에서는 땅에 거하는 자들의 중립적 이미지를 논한다.
3:10의 땅에 거하는 자들이 의인들을 포함함을 보이 고, 13:8과 17:8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부정적 이미지가 땅에 거하는 자들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관계절 과 선행사의 관계가 중의적일 수 있음에 주목한다.
5장에서는 11:13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를 언급하거나 암시할 가능성을 살펴본다.
6 장에서는 “땅에 거하는 자들”과 비슷한 표현인 “땅에 거주하는 자들” 의 회개 가능성을 말하는 14:6이 본 연구의 주장을 강화함을 보일 것 이다.
7장에서는 요한계시록 14장의 곡식 추수와 포도 추수 묘사가 땅 에 거하는 자들의 심판뿐만 아니라 구원을 상징함을 보임으로써, 본 논문의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8장에서는 악인들의 회개 가능성에 담긴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II. 땅의 왕들과 만국의 회개 가능성
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 2-3장의 메시지에서 회개의 메시지는 두드 러진다.
그리스도는 첫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에 회개를 요구한다 (2:5). 그리스도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상 죽은 사데 교회에 도 회개를 요구한다(3:3).
그리스도가 토하여 버리기 직전인(3:16) 라오 디게아 교회도 여전히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교회이고 아직 회개할 기 회가 있다(3:19).
심지어 그리스도는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 당의 가 르침을 붙잡고 있는 자들에게도 회개를 요구한다(2:15-16).
두아디라 교회에서 거짓 선지자 이세벨과 간음하는 자들뿐 아니라(2:22), 이세 벨에게조차 회개할 시간(혹은 기회)이 주어졌다는(2:20-21)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저자가 예언의 말씀으로 천명한 요한계시록에서 회개를 염두에 둔 예언의 메시지를 찾는 시도는 정당하다.
문제는 요한계시록 4장 이후로 악인들의 회개 가능성이 언급되거 나 암시되는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요한계시록 21장 에서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는 땅의 왕들(οἱ βασιλεῖς τῆς γῆς)과 만국 (τὰ ἔθνη)의 회개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왕들과 만국의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으로 묘사될 때가 많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들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 을 통해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국이 새 예루살렘의 빛으로 다니며, 땅의 왕들이 자신들의 영광 을 그 성으로 가지고 들어가리라고 말하는 21:24, 그리고 사람들이 만 국의 영광과 명예를 새 예루살렘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리라고 말하는 21:26만큼 요한계시록에서 놀라운 구절도 드물다.
이 구절들이 놀라운 이유는 첫째로, 만국과 땅의 왕들은 앞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었 기 때문이다.
바벨론 성이 심판받아 세 조각으로 나뉠 때, 만국의 성 들도 무너진다(16:19).
만국은 바벨론의 복술에 미혹된다(18:23). 그리 스도는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친다(19:15).
사탄이 무저 갱에 천 년 동안 갇힘으로 더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는(20:3) 말은 그 전에 만국을 미혹하였음을 전제한다. 땅의 왕들은 여섯째 인 재앙 의 대상이며(6:15), 음녀 곧 바벨론과 음행하고 사치한다(17:2; 18:3, 9). 땅의 왕들은 음녀의 지배를 받고(17:18), 그리스도에게 맞서 전쟁을 일 으킨다(19:19).
만국과 왕들의 구원이 놀라운 둘째 이유는 요한계시록에서 악인들 이 회개를 거부하였다는 진술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나팔 재 앙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9:20-21).
넷째 대접과 다섯째 대접 재앙으로 고통받은 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한 다(16:9, 11).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만국과 왕들의 회개 가능성을 암시하거나 언 급하는 구절들에 주목한다.
만국(πάντα τὰ ἔθνη)이 와서 주 앞에 경배 하리라고 말하는 15:4은 만국의 회개 가능성을 함의한다.
또한, 천사 가 요한에게 많은 백성과 나라들(ἔθνη)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ἐπί)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10:11은 만국과 왕들의 회개 가능성 을 암시한다. 10:11의 ἐπί는 두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만국에 “관한” 긍정의 메시지로서, 증언에 관해 교회에 말하고 회개의 필요성에 관 해 만국에 말한다.10)
동시에 그것은 만국에 “불리한” 메시지로서, 하 나님에게로 돌이키기를 계속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 다.11)
10) Grant R. Osborne, Revelation: Verse by Verse (Bellingham: Lexham Press, 2016), 203.
11) Osborne, Revelation: Verse by Verse, 203.
이처럼 나라들과 왕들에게 선포되는 예언에는 회개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한마디로, 땅의 왕들과 만국의 회개 가능성을 암시하는 15:4과 10:11은 21:24과 26에 묘사된 그들의 반전을 예시한다.
III. 땅에 거하는 자들의 부정적 이미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회개의 대상보다는 심판의 대상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래드(George Ladd)는 3:10의 “땅에 거하는 자들”이 요한계시록에서 항상 비기독교 세상을 가리킨다고 본 다(6:10; 8:13; 11:10; 13:8, 14; 17:8).12)
땅에 거하는 자들(17:2)은 믿지 않 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요한의 관용구라는 것이다.13)
12) George Eldon Ladd,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72), 62.
13) Ladd,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222.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 역시 “땅에 거하는 자들”이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 어라고 본다.14)
오스본(Grant R. Osborne)은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 하는 자들”이 항상 불신자들, 짐승을 숭배하고 따를 뿐만 아니라 신자 들을 박해하는 하나님의 적들을 가리킨다고 본다.15)
커켄달(Michael Kuykendall)에 따르면, “땅에 거하는 자들”은 모든 불신자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신자들을 박해하고, 짐승을 숭배하며, 영원히 멸망할 때까 지 큰 음녀를 따르는 자들이다.16)
본 연구에서는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이미지가 그렇 게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이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땅에 거하는 자 들”은 불신자들을 가리킬 때가 많지만, 신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세상 사람을 가리킬 때도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이 표현에 관한 브라운의 분석을 소개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안할 것이다.
브라운에 따르면, “땅에 거하는 자들(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 은17) 3:10을 제외하면 요한계시록에 일곱 번 나오는데(6:10; 8:13; 11:10; 13:8, 14a, 14b; 17:8), 그 의미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18)
14) Thomas R. Schreiner, Revelation,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23), 193.
15) Grant R. Osborne, Revelation,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193.
16) Michael Kuykendall, Lions, Locusts, and the Lamb: Interpreting Key Images in the Book of Revelation (Eugene: Wipf & Stock, 2019), 184.
17) 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의 개역개정 번역은 일관성이 없다. 개역개정에서 는 “땅에 거하는 자들”(6:10; 13:14), “땅에 사는 자들”(8:13; 11:10; 17:8), “이 땅에 사는 자들”(13:8)로 다르게 번역하였다.
18) Brown, “Hour of Trial,” 309.
(1) 6: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박해자들이고, 순교자들은 이들에 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주님께) 외친다.
(2) 8:13에서, 독수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세 번의 마지막 나팔 소리로 인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를 세 번 선언한다.
(3) 11: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두 증인의 순교를 즐거워한다.
(4) 13:8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경배한다.
(5) 13:14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땅에서 나온 짐승에게 미혹되어 바다에서 나온 첫 번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19)
(6) 17:8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주홍색 짐승을 보며 놀란다. 첫째로, 브라운의 목록 외에, “땅에 거하는 자들”과 매우 비슷한 표 현들이 있다. 이것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과 같은 의미를 띠므로, 이 논의에서 제외할 이유가 없다.
(7) 13:12에서, 땅에서 나온 짐승은 땅에 거하는 자들(τοὺς ἐν αὐτῇ [γῇ] κατοικοῦντας)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한다.
(8) 17:2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τὴν γῆν)은 음녀의 음 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둘째로, 브라운의 목록에 대한 그의 설명은 보완의 여지가 있다. 브 라운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교회를 박해하 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들, 황제 숭배자들로서 경멸적인 의 미로 사용되고, 따라서 3:10에서도 “땅에 거하는 자들”은 기독교 공동 체의 적들이다.20) 브라운은 3: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을 가리킬 수 없다고 본다.21)
19) 13:14a와 13:14b에 “땅에 거하는 자들”이 두 번 나오지만(“땅에서 나온 짐승은 …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고,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 우상을 만들라고 말한 다”), 의미상 연결되므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20) Brown, “Hour of Trial,” 309.
21) Brown, “Hour of Trial,” 309-310.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순교자들의 기도(6:10), 땅에 거 하는 자들에게 선포되는 세 번의 “화”(8:13), 두 증인의 죽음을 기뻐하 는 땅에 거하는 자들(11:10), 땅에 거하는 자들이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게 속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장면(13:14) 등 은 브라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13:12의 땅에 거 하는 자들은 짐승을 경배하고, 17:2의 땅에 거하는 자들은 음녀와 음행 에 동참하므로, 이 두 구절에서도 땅에 거하는 자들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러나 13:8과 17:8에 대한 브라운의 해석은 논란의 여지 가 있고, 그만큼 3:10에 대한 브라운의 해석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IV. 땅에 거하는 자들의 중립적 이미지
1. 의인들을 포함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3:10)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3:10이 다.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 켰으니,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상에 닥칠 시험의 시간 으로부터 나도 너를 지켜주겠다”라고 약속한다.22)
NIV 성서신학 연 구 성서(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에서는 3:10의 땅에 거하는 자들이 짐승을 숭배하고 신자들을 박해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 땅한 불신자들이라고(6:10; 13:8) 설명한다.23)
22) ὅτι ἐτήρησας τὸν λόγον τῆς ὑπομονῆς μου, κἀγώ σε τηρήσω ἐκ τῆς ὥρας τοῦ πειρασμοῦ τῆς μελλούσης ἔρχεσθαι ἐπὶ τῆς οἰκουμένης ὅλης πειράσαι τοὺς κατοι κοῦντας ἐπὶ τῆς γῆς(계 3:10, GNT5).
23) D. A. Carson, ed.,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2018), 2286.
마운스(Robert H. Mounce) 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사용될 때 항상 교회의 적들을 가리키고, 3:10에서 시련의 시간은 비기독교 세상 전체 를 향한다고 주장한다.24)
아우니(David E. Aune)는 요한계시록에서 “땅 에 거하는 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비기독교인들이라는 부정 적인 의미로 항상 사용된다고 보고, 3:10의 πειράσαι τοὺς κατοικοῦντας ἐπὶ τῆς γῆς를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히기 위하여”로 번역한다.25)
3:10을 로마 제국의 배경에서 이해하는 블라운트(Brian K. Blount)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와 신자들 을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본다.26)
쾨스터(Craig R. Koester)는 요한계시 록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대적자들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고 보면서도,27) 요한계시록에서 πειράζω는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됨됨 이를 드러내므로(2:2, 10), 3:10의 시험(시련)은 신자들과 불신자들 모 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28)
24) Robert H. Mounce, The Book of Revelatio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97), 103.
25) David E. Aune, Revelation 1-5, Word Biblical Commentary 52 (Dallas: Word Books, 1997), 240.
26) Brian K. Blount, Revelatio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77.
27) Koester는 Bauckham의 책을 인용한다. Richard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Studies on the Book of Revelation (Edinburgh: T&T Clark, 1993), 239-41.
28) Craig R. Koester, Revelation: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or Yale Bible 38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4), 326.
그러나 필자는 3: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이미지가 그렇게 비관 적이지 않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시험이 온 세상에 임하 는 이상, 땅에 거하는 자들 모두에게 미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온 세상에 닥칠 시험(πειρασμοῦ)의 시간”에 사용된 πειρασμός는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려고(πειράσαι)”에 쓰인 동사 πειράζω에서 파생 한 명사이다. 뒤의 부정사구는 앞의 명사구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온 세상”과 “땅에 거하는 자들”은 사실상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마디로, 3: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온 세상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전체 집합 이다.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되지 않는 이상,29) 세상에 남아 있는 성 도들도 땅에 거하는 자들에 속한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 들지 않았다면, 이 종말 론적 시험과 무관하였을 것이고, 그들을 지켜주겠다는 그리스도의 약 속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쾨스터의 주장대로, 3:10의 시험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모두 임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쾨스터의 주 장과 달리, 3:10의 땅에 거하는 자들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망라하는 중립적인 의미를 띤다.
3: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신실한 빌라델비 아 성도들을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2. 13:8의 중의성
브라운은 13:8과 17:8에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 는 설명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한다고 주장한 다.30) 즉, 땅에 거하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라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땅에 거하는 자들의 운명은 분명하 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못에 던져지고(20:15),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므로 (21:27), 땅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불못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 은 관계절과 선행사의 관계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해석이다. 본 연구에서 중요한 점은 13:8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 이다. 13:8의 그리스어 원문(GNT5)과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29) 원문에 없는 면하게 한다는 의미를 첨가한 개역개정의 번역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는 문법적 번역보다 신학적 번역에 가깝다.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한철흠, “요한계시록 3:10의 한글 번역에 대한 제언: Τηρήσω ἐκ를 중심으로,” 성경원문연구 48 (2021), 176-95. 30) Brown, “Hour of Trial,” 309. 한철흠_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회개할 가능성❙123 GNT5 πάντες 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 οὗ οὐ γέγραπται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ἐν τῷ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τοῦ ἀρνίου 새번역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 어린 양의 생명책에 …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공동개정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 어린 양의 생명책에 …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자들은 모두 새한글 땅 위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이 모두 … 자기들의 이름이 … 어린 양의 생명책에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개역개정 어린 양의 생명책에 …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 들은 다 원문의 축자적 번역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땅에 거하는 자들 모두”이다. 여기에서 선행사인 “땅에 거하는 자들 (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과 관계절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의 이 름이 적히지 않은(οὗ οὐ γέγραπται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ἐν τῷ βιβλίῳ τῆς ζωῆς τοῦ ἀρνίου)”의 관계는 중의적이다. 새번역의 번역대로,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 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도 있다. 또한 공동개정의 번역대 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 은 자들이 있다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 와 있는 자들도 있다. 이 두 번역에 따르면,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전체 집합 중에,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자들의 부분집합이 있고, 생명 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자들의 부분집합이 있다. 그러나 새한글의 번역에 따르면, 땅에 거하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전체 집합은 바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집합 하나로 구성된 다. 반면에 개역개정 번역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생명책에 이름 124❙신약논단 제33권 제1호∙2026년 봄 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이 땅에 사는 자들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이 땅에 사는 자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
3. 17:8의 중의성
우리말 성경 번역들이 보여주듯이, 17:8의 해석도 둘로 나뉜다.
17:8 의 그리스어 원문(GNT5)과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GNT5
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 ὧν οὐ γέγραπται τὸ ὄνομα ἐπὶ τὸ βιβλίον τῆς ζωῆς
새번역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공동개정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새한글 땅 위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은 … 그들의 이름이 … 생명책에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말입니다
개역개정
땅에 사는 자들로서 …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원문의 축자적 번역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적히지 않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17:8에서도 선행사 “땅에 거하는 자들”(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과 관계절 “생명책에 그 이름이 적히지 않은”(ὧν οὐ γέγραπται τὸ ὄνομα ἐπὶ τὸ βιβλίον τῆς ζωῆς)의 관계는 중의적이다.
새번역의 번역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공동개정의 번역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 역시 땅 위에 사 는 사람들 중에서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혀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전체 집합은 생명책에 이 름이 적힌 자들과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자들의 두 부분집합 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새한글의 번역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로 해석한다. 이 번역이 맞는다면, 땅에 거하는 자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들은 없다. 반면에 개역개정의 번역 “땅에 사는 자들로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중의적이 다. 이 표현은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땅에 사는 자들 전부를 가리킬 수도 있고, 땅에 사는 자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 일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요약하면, 13:8과 17:8의 다양한 번역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과 이들 을 설명하는 관계절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함을 보여준 다. 새한글의 번역이 맞는다면, 땅에 거하는 자들 모두 불못에 들어 가지만, 새번역과 공동개정의 번역이 맞는다면, 땅에 거하는 자 들 가운데 불못에 들어가는 자들도 있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 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새번역과 공동개정의 번역이 문법적으로 가능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4. 선행사와 관계절의 관계
13:8과 17:8의 우리말 번역들이 보여주듯이, 관계절은 선행사의 전 체 집합을 수식할 수도 있고, 부분집합을 수식할 수도 있다.
전자는 관계절이 선행사 전체를 설명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관계절이 선행사 의 일부를 설명하여 그 범위를 한정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다른 구절 들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9:20은 “보지도, 듣지도, 걷 지도 못하는, 금들과 은들과 구리들과 돌들과 나무들로 만든 우상들” (τὰ εἴδωλα τὰ χρυσᾶ καὶ τὰ ἀργυρᾶ καὶ τὰ χαλκᾶ καὶ τὰ λίθινα καὶ τὰ ξύλινα, ἃ οὔτε βλέπειν δύνανται οὔτε ἀκούειν οὔτε περιπατεῖν)을 언급한 다.
여기에서 관계절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는”은 선행사 “금들 과 은들과 구리들과 돌들과 나무들로 만든 우상들” 전체를 설명한다. 보거나, 듣거나, 걸을 수 있는 우상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마가복음의 감람산 강화에서 주께서 그날들을 줄이지 않으 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지만, “그가 고르신 선택받은 자들 을”(τοὺς ἐκλεκτοὺς οὓς ἐξελέξατο) 위하여 그날들을 줄이셨다고 말한다 (막 13:20).
여기에서 관계절 “그가 고르신”은 선행사 “선택받은 자들” 의 의미를 설명할 뿐, 그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
주가 고르지 않은 선택받은 자들은 있을 수 없으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 전체를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들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 병들을”(τοὺς ἄρτους τῆς προθέσεως … οὓς οὐκ ἔξεστιν φαγεῖν εἰ μὴ μόνους τοὺς ἱερεῖς) 먹고, 자기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도 주었다(눅 6:4).
여기에 서도 관계절 “제사장들 외에는 먹을 수 없는”은 선행사 “진설병들”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그 성격을 설명할 뿐이다.
열두 덩어리의 진설 병 중에 제사장 외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은 없으므로, 이 구절에 서 “진설병들”은 다윗이 성전에 들어갔을 당시의 진설병 모두를 가리 킨다.
반면에, 관계절은 선행사 전체를 설명하지 않고, 일부만을 설명함 으로써 그 범위를 제한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천사는 요한에게 “네 가 본, 음녀가 앉아 있는, 물들은”(τὰ ὕδατα ἃ εἶδες οὗ ἡ πόρνη κάθηται) 백성들과 무리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이라고 말한다(17:15).
이 구절을 읽는 1세기 독자들은 당시 지중해 세계를 다스린 로마를 떠올렸을 것 이다.
여기에서 선행사 “물들”은 세상의 모든 물이 아니라, 관계절 “요한이 본, 음녀가 앉아 있는”이 수식하는 특정한 수역을 가리킨다.
예수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배들이”(αἱ κοιλίαι αἳ οὐκ ἐγέννησαν) 복이 있다고 말할 날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눅 23:29).31)
관계절 “아이 를 낳아 본 적이 없는”은 선행사 “(여성의) 배들” 전체를 설명하지 않 고, 그중 일부를 설명한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있는 배들도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선행사 “배들”은 여성들의 배 전체를 가리키지 않고, 그중 출산의 경험이 없는 배들만을 가리킨다.
관계절과 호환해 사용할 수 있는 한정적 분사 역시 수식하는 명사 를 총칭하지 않을 수 있다.
요한복음 8:31에서 예수는 “그(예수)를 믿 은 유대인들을”(τοὺς πεπιστευκότας αὐτῷ Ἰουδαίους) 향해 너희가 내 말 에 거하면 참으로 나의 제자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리스어 τοὺς πε πιστευκότας αὐτῷ Ἰουδαίους는 τοὺς Ἰουδαίους οἳ (ἐ)πεπιστεύκεισαν32) αὐτῷ 로 대체될 수 있다.33)
따라서 영어 번역은 관계절을 사용한다(예,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NIV와 ESV).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전체가 아님이 분명하다.
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많았지만(요 12:11), 요한복음 어디에도 유대인들이 전부 예수를 믿었다는 언급이나 암시는 없기 때문이다.34)
31) 원문에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는 배들” 앞뒤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αἱ στεῖραι)과 “젖을 준 적이 없는 가슴들”(μαστοὶ οἳ οὐκ ἔθρεψαν)도 언급되지만, “땅 에 거하는 자들”의 그리스어와 달리, 관계절이 없거나, 선행사에 정관사가 없어 논의에서 제외한다.
32) 행 14:23에서 과거완료 ἐπεπιστεύκεισαν 대신에 πεπιστεύκεισαν이 쓰인다.
33) 신약성서에서 명사를 수식하는 한정적 용법의 분사 및 이와 동등한 관계절은 평행 적으로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요 14:24의 τοῦ πέμψαντός με (πατρός) 대신에 관계 절 ὃς ἔπεμψέν με가 사용될 수도 있었다(Chrys C. Caragounis, The Development of Greek and the New Testament: Morphology, Syntax, Phonology, and Textual Trans- mission, WUNT 167 [Tübingen: Mohr Siebeck, 2004], 175). 명사가 분사와 관계절 의 수식을 동시에 받는 경우도 있다(예, 눅 20:46-47).
34)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적대하였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 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고(요 7:32, 새번역),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 지 죽이려고 모의한다(요 12:10).
따라서 8:31 에서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은 유대 백성 전체 중에서 예수를 믿은 일 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3:8과 17:8처럼, 표현만 보아서는 관계절과 선행사의 관계를 알기 힘든 구절도 있다.
예수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며 가식 으로 길게 기도하는 율법학자들을”(τῶν γραμματέων … οἳ κατεσθίουσιν τὰς οἰκίας τῶν χηρῶν καὶ προφάσει μακρὰ προσεύχονται) 조심하라고 경 고한다(눅 20:46-47).
여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 학자를 가리킬 수도 있고, 그중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율법학자들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의 평가에 달렸다.
누가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거의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한 곳 에서는 다소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부활에 관한 예수의 말을 들은 율 법학자들 가운데 몇 명은 “선생님, 말씀 잘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눅 20:39).35)
35) 마가복음에서 한 율법학자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칭찬을 듣는다(막 12:34).
이처럼 관계절은 선행사 명사의 전체 집합 혹은 부분집합에 대한 설명일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이다.
왜냐하면 13:8과 17:8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정체는 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3:8과 17:8은 땅에 거하는 자들 전체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 일부를 가리킬 수 있고, 따라서 땅에 거하 는 자들 가운데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들도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다.
그리고 이 가능성의 판단은 다른 구절들에서 찾아야 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 가능성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면, 땅에 거하는 자 들 전체가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35) 마가복음에서 한 율법학자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칭찬을 듣는다(막 12:34).
V.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 가능성(11:13)
요한계시록 11:13은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를 언급하거나, 적어도 암시한다. 두 증인이 하늘로 올라가자 큰 지진이 나서 칠천 명은 죽고 성 십 분의 일은 무너지는데, 남은 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하늘의 하 나님께 영광을 돌렸다(ἔμφοβοι ἐγένοντο καὶ ἔδωκαν δόξαν τῷ θεῷ τοῦ οὐρανοῦ, 11:13).
이들은 11:10의 땅에 거하는 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 들이다.
이들은 11:10에서 두 증인의 죽음을 기뻐한 자들이고, 12절에 서는 두 증인의 원수들로 묘사된 자들이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두려 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진정한 회개를 의미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비슷한 표현이 사용된 16장을 고려하면 진정한 회개를 의미 할 가능성도 있다.
16:9에는 “회개하다”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라는 표현이 같이 나온다.
넷째 대접 재앙으로 화상을 입은 자들은 하 나님께 영광 돌림과 관련하여 회개하지 않았다(οὐ μετενόησαν δοῦναι αὐτῷ δόξαν, 16:9).
부정사 δοῦναι는 목적 혹은 결과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이 구절의 축자적 번역은 “그들은 그(하나님)에게 영광 을 돌리기 위하여 회개하지 않았다” 혹은 “그들은 회개하고 그(하나 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이다.
NASB 성경은 목적으로 번역하 였고(they did not repent so as to give Him glory),
ESV 성경은 결과로 번역하였다(They did not repent and give him glory).
우리말 번역
“회개 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개역개정),
“회개하 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새번역),
“자기들 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하느님을 찬양하기는커녕”(공동개정)
등은 두 동작을 대등한 관계로 이해한다.
16:9을 어떻게 번역하든, 이 구절 은 회개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11:13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는 표현은 진정한 회 개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11:13의 “두려움에 휩싸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와 거의 같은 표현이 14:7에 나온다.
천사가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Φοβήθητε τὸν θεὸν καὶ δότε αὐτῷ δόξαν)이다(14:7).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림은 단순한 두려움의 표시일 리 없다.
이 표현은 같 은 구절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을 “경배하 라”라는 표현과 평행을 이루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집행하실 심판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므 로, 이것은 심판을 준비하는 진정한 회개를 의미한다.
14:7에서 “하나 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가 진정한 회개를 의미하는 이상, 11:13에서 “두려움에 휩싸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역시 진정한 회개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11:13은 땅에 거하 는 자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11:10에 사용된 “땅에 거하는 자들”의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는 다소 상쇄된다.
VI. 땅에 거주하는 자들의 회개 가능성(14:6)
“땅에 거하는 자들”(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ἐπὶ τῆς γῆς)과 비슷한 표현인 “땅에 거주하는 자들”(οἱ καθήμενοι ἐπὶ τῆς γῆς)이 요한계시록에서 다 소 긍정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땅에 거주하는 자 들”(개역개정) 곧 모든 나라와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 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 게 영광을 돌리라고 선포한다(14:6-7).
앞서 살펴본 대로, 이것은 단순 한 두려움의 표시가 아니라, 심판을 준비하는 진정한 회개를 가리킨다.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전할 회개의 복음이 있다는 말은 그들의 회개 가능성그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을 전제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브라운은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같은 개념의 내용이지만 경멸적인 뉘앙스가 없는 표현이 필요할 때 동사를 바꾸어 τοὺς καθημένους ἐπὶ τῆς γῆς가 된다고(14:6) 주장한다.36)
이 구절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A])에는 κατοικοῦντας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두 표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필사자가 동화시킨 결과라는 것이다.37)
36) Brown, “Hour of Trial,” 309 각주 7번.
37) Brown, “Hour of Trial,” 309 각주 7번.
그러나 본 논문의 주장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항상 악인들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면, 브라운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앞서 살펴 본 대로,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단독 명사구로 다섯 번 사용되는데, 그중 네 번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지만(6:10; 8:13; 11:10; 13:14), 한 번은 의인들을 포함하는 세상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 며 중립적으로 사용되기에 경멸적인 뉘앙스가 없다(3:10).
또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부정적 내용을 담은 관계절의 수식을 받을 때 부정적 인 뉘앙스를 띠는데(13:8; 17:8), 이는 역으로 이 표현 자체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없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처럼 “땅에 거하는 자들” 자체에 경멸적인 뉘앙스가 없다면, 이 명사구는 비슷한 표현인 “땅에 거주하는 자들”의 의미나 뉘앙스에 영 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회개할 가 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14:6)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 다.
요한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구원받지 못할 세상 사람들을 가리킬 때가 많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포 함하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반면에 요한은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아 직 남아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두 표현 자체에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문맥에 따라 함축적 의미가 달라질 뿐이다.
VII. 곡식 추수와 포도 추수(14:14-20)
요한계시록 14장에 묘사된 곡식 추수와 포도 추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땅의 곡식이 익어 수확할 때 가 되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이는 낫을 땅에 휘두르고, 땅(의 곡식) 이 수확된다(14:15-16).
또한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 둔다(14:19).
여기에 “땅에 거하는 자들” 혹은 그와 비슷한 표현은 쓰 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의 구원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의 심판을 말하는 요한계시록에서, 땅의 곡식과 땅의 포도는 땅 의 소산물이 아니라, 땅에 사는 사람들을 상징하고, 추수는 그들이 받 을 종말론적 구원 혹은 심판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포도 추수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심판을 의미함도 확실하다.
천사는 거둔 포도를 하나 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기 때문이다(14:19). 반면에 곡식 추수의 성격은 본문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곡 식 추수는 구원 혹은 심판 혹은 구원과 심판을 모두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곡식 추수는 요엘 3:13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곡식 추수가 악인들의 심판을 상징함은 본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 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개역개정).
그러 나 그러한 설명이나 암시가 없는 요한계시록 14장에서 곡식 추수가 심판을 상징할 가능성은 작다.
게다가 심판의 언어가 없는 곡식 추수 와 심판의 언어로 묘사된 포도 추수가 모두 악인들의 심판을 상징한 다고 보기는 힘들다.
신약성서에서 추수가 가라지는 불사르고 곡식은 모으는 두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지만(마 13:30), 추수는 흔히 하 나님의 백성을 모음을 상징한다(마 9:36-38; 눅 10:1-2; 요 4:35-36).38)
또 한 곡식 추수를 통해 구원과 심판을 모두 말한 후에, 바로 이어서 포 도 추수를 통해 심판을 따로 다시 말했을 가능성은 작다.39)
38) 한철흠, 주제로 읽는 요한계시록: 순교와 타협 사이에서 (서울: 영성, 2020), 162.
39) 한철흠, 순교와 타협 사이에서, 162. 134❙신약논단 제33권 제1호∙2026년 봄
따라서 땅 의 곡식 추수와 땅의 포도 추수는 각각 땅에 사는 사람들의 구원과 심판을 상징할 가능성이 제일 크다.
이 해석은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구원받을 자들과 심판받을 자들을 망라한다는 본 논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의 운명은 학자들의 주 장대로 전적으로 비관적이지는 않다.
VIII. 악인들의 회개 가능성에 담긴 함의
본 연구에서는 만국과 땅의 왕들뿐만 아니라, 땅에 거(주)하는 자들 의 회개 가능성에 대한 암시 혹은 언급들이 요한계시록에 있음을 보 였다.
이 결론이 암시하는 바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땅에 거하는 자 들은 학자들이 전제하듯이 그렇게 구제 불능의 악인들이 아닐 수 있 다. 물론 이들은 많은 구절에서 악의 세력에 편승하거나 미혹되지만, 본 연구에서 강조한 대로, 그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이 끝까지 남아 있 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요한계시록에 있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보편구원론을 견지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에서 보편구원론을 암시하는 구절을 찾는 이들이 있다. 해링턴(Wilfrid J. Harrington)은 요한계시록에 제한적 구원을 말하는 구절들(14:9-10; 20:11-15)과 보편적(universal) 구원을 말하는 구절들(1:7; 5:13; 14:6-7; 21: 24-27)이 공존한다고 본다.40)
보링(M. Eugene Boring) 역시 보편적 구원 을 말하는 구절들(1:7; 4:3; 5:13; 15:4; 21:5; 21:22-22:3)과 제한적 구원을 말하는 구절들(14:9-10; 20:11-15)이 모두 있다고 주장한다.41)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본 논문이 강조하는바 악인들의 회개를 언급 하거나 암시하는 구절들의 의의를 약화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악인들 의 구원이 회개를 전제함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은 회개를 끝까지 거부하는 악인들의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보편구원론은 성서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각할 수 있 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또 다른 특성인 정의를 설명하지 못하고, 특 히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는 정의의 신학에 부합하지 않는다.
요한계시 록의 텍스트는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의 운명 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이들과 들어가지 못 하는 이들을 엄격하게 가른다(21:8, 27, 22:15).42)
40) Wilfrid J. Harrington, Revelation, Sacra Pagina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08), 231.
41) M. Eugene Boring, Revelation,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227.
42)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 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개역개정). “무엇이든지 속 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1:27, 개역개정). “개들과 점술 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 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22:15, 개역개정).
새 예루살렘을 문자 그대로 모든 이에게 약속된 종착역으로 해석하면, 순교를 복으로 선 포하는(14:13)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그만큼 희석된다. 요한계시록의 내용 일부를 제외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에서 제외될 것이라는(22:19) 준엄한 경고는 독자들에게 구원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셋째로, 악인들의 회개 가능성은 회개를 거부한 악인들이 받을 심 판의 정의로움과 준엄함을 격상한다.
회개의 기회가 끝까지 주어지고 악인들 일부가 회개하는 이상, 종말론적 심판은 회개를 끝까지 거부 한 자들에게 그만큼 더 혹독하게 실현되는 정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회개의 가능성과 상관없이 정의의 신학을 견지 한다.
요한계시록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설교로 가득하므로, 11:13은 만국의 회개가 아니라 두려움을 나타낼 뿐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는 기독교의 증언과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 만국이 회심할 것을 요한계시록이 희망한다고 우리가 인정할 때만, 요한계시록이 분노의 신학이 아니라 정의의 신 학을 옹호함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43)
그러나 요한계 시록이 악인들의 회심을 기대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분노의 신학을 지지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악인들이 받는 심판은 짐 승을 따르며 의인들을 박해한 결과이므로, 이미 정의의 실현에 해당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흘린 피를 갚기 위해 음녀를 심판하 신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듯이(19:2), 성도들을 박해한 악인들 이 받는 심판(예, 6:10) 역시 참되고 정의롭다.44)
43)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Invitation to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Apocalypse with Complete Text from The Jerusalem Bible (Garden City: Image Books, 1981), 119.
44) 요한계시록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보인다고 보기도 힘들다. 복수의 언어처 럼 들릴 수 있는 순교자들의 탄원조차 분노보다는 정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6:10에서 순교자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 기도는 사적 복수(revenge)의 개념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복수(avenge)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점은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부르 는 호칭에 나타난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개역개정) 라고 부른다. 이 호칭은 의인의 피를 흘린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부합함을 암시한다. 순교자들의 피를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갚아주는 심판이 거룩한 이유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성도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공의와 연관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어지 시기 때문이다(사 5:16). 따라서 신원은 정의의 실현이자 거룩의 발현이다.
다만 악인들의 회개 가능성으로 인해, 회개를 끝까지 거부한 악인들이 받을 심판의 정의 로움은 더 도드라진다.
IX. 결론
본 연구에서는 만국 및 땅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땅에 거하는 자들 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제 불능이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만국과 땅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부정적으로 묘 사될 때가 많지만, 그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 니다.
6:10; 8:13; 11:10; 13:14 등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심판받아 마 땅한 악인들로 등장하지만, 본 논문이 보여주듯이 3:10에서 땅에 거하 는 자들은 의인들을 포함한다.
또한 13:8과 17:8은 악인들을 포함하되 악인들에게 국한되지 않는 더 많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있을 가능성 을 암시한다. 13:8과 17:8에서 관계절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은 선행사 “땅에 거하는 자들”의 전체 집합이 아니라, 부분집합에 대 한 설명이라는 해석은 본 논문의 주된 주장이다.
11:13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를 언급하거나 암시한다는 사실 그리고 14:6이 땅에 거주 하는 자들의 회개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사실 역시 본 논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끝으로 땅에 사는 자들의 구원과 심판을 모두 상징하 는 요한계시록 14장의 곡식 추수와 포도 추수는 본 논문의 설득력을 높인다.
이처럼 땅의 왕들과 만국의 회개 가능성뿐만 아니라, 땅에 거(주)하 는 자들의 회개 가능성을 고려하면, 만국과 땅의 왕들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구절들(21:24, 26)은 그리 놀랍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 록에서 만국과 땅의 왕들 및 땅에 거하는 자들의 이미지가 대부분 부 정적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은 (회개한) 만국의 구원을 말하지만, 그들이 앞서 악의 세력과 결탁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새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다소 다르게 묘 사되어도 그리 놀랍지 않다.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 님의 얼굴을 보지만(22:3-4), 만국은 새 예루살렘의 빛 가운데로 다니 기 위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21:24-26).45)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 은 짐작건대 생명나무의 열매를 누리지만, 만국은 치료를 위해 생명 나무의 잎사귀를 이용할 수 있다(22:2).46)
45) Chul Heum Han, “God’s Peoples in the New Jerusalem: Revelation 21:3 Reconsidered,” Korea Presbyterian Journal of Theology 50/4 (2018), 10.
46) Han, “God’s Peoples,” 10.
굳이 생명나무의 열매 대신 에 잎사귀들이 만국을 위한다고 말한 이유는, 그리고 그 잎사귀들이 만국의 치료를 위한다고 명시한 이유는 아마도 회개한 만국이지만 그 들이 이전에 보여준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일차적으로 고난에 처한 신실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는 책이지만, 본 연구는 요한계시록이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와 회개의 이차적 메시지에 주목하였다. 본 논문은 땅에 거하는 자들의 회개 가능성을 부각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두 가지 사 실이 있다.
첫째, 10:11; 11:13; 14:6; 15:4 등은 악인들의 회개를 언급하 거나 회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악인들이 회 개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하는 구절들(2:21; 9:20-21; 16:9, 11)에 비해 그 의미는 다소 불분명하다.
둘째, 땅에 거하는 자들이 늘 구제 불능 의 불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다. 이 두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 악인들이 그만 큼 완고하고 회개의 가능성이 작음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요한계시록 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이미지가 주로 부정적이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음을 본 연구에서는 강조하였다.
그렇 다면 불의하고 더러운 자들과 의롭고 거룩한 자들을 양분하는 듯한 (22:11) 요한계시록 이원론의 경계는 어느 정도 유동적일 가능성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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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거의 모든 학자는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 짐승 을 따르는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고 본다. 이처럼 땅에 거하는 자들을 모두 불신자들로 보는 일치된 해석에 맞서, 본 연구에서는 그들의 이미지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님을 주장한다. 비록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그들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포함하여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 특별히 주목 하는 것은 예수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시간으 로부터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3:10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가리킬 가능성이다. 시험은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므로, 여기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학자들이 전제하는 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불신자들만을 가리킨다면, 신실한 그리스 도인들빌라델비아 그리스도인들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이든은 전 세계에 미치는 시 험에 영향받지 않으므로,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예수의 약속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13:8과 17:8에서 선행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수식하는 관계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이 땅에 거하는 자들 전체를 설명하지 않고, 땅에 거하는 자들 일부, 곧 그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만을 가리킬 수 있음을 주장한 112❙신약논단 제33권 제1호∙2026년 봄 다. 그렇다면 저자는 구원받을 수 있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렇 게 해석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의 미래는 전적으로 비관적인 것이 아니 라, 종말론적 구원과 종말론적 심판 사이에비록 종말론적 심판에 가깝기는 하지만 위치하게 된다.
주제어 요한계시록, 땅에 거하는 자들, 계 3:10, 계 13:8, 계 17:8
Abstract
The Possibility That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May Repent in Revelation
Han, Chul Heum (Korea Baptist Theological University/Seminary, Assistant Professor)
Most, if not all, scholars agree that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are depicted very negatively throughout the Book of Revelation as the persecutors of the church, the followers of the beast, the opponents of God, and so on. Over against this consensus reading that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are all un- believers, this study suggests that their image is not completely negative in the sense that the noun phrase may refer to all earth-dwells, including believers as well as unbelievers, although they are more often than not portrayed in negative terms in Revelation. This study pays special attention to the possibility that John has all earth-dwellers in mind in Rev 3:10, which states that Jesus will keep the Philadelphian Christians from the hour of trial that will come on the whole world to test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here may well be all earth-dwellers, including believers and unbelievers, insofar as the trial affects the whole world. Besides, if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refers to the unbelievers only, as scholars assume, then Jesus’ promise to protect the faithful Christians whether they are the Philadelphian Christians or all Christians hardly makes sense to them, since they are not affected by the worldwide trial. Moreover, this study argues that the relative clause “whose names have not been written in the book of life” in Rev 13:8 and 17:8 may modify the antecedent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by narrowing its reference to the unbelieving earth-dwellers, in which case the author is aware of the other group of earth-dwellers who can be saved, rather than describing all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in which case no earth-dweller will be saved. Thus read, the future of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in Revelation is not exclusively pessimistic but stands somewhere between eschatological salvation and eschatological condemnation, although the scales are tilted toward the latter.
Keywords Revelation, inhabitants of the earth, Rev 3:10, Rev 13:8, Rev 17:8
투고일: 2026. 02. 20. 최종심사일: 2026. 03. 06. 게재확정일: 2026. 03. 07
신약논단 제33권 제1호(2026년 봄)/11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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