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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언어와 자아 : 용수와 로티/김귀옥.전남大

  I. 들어가며

II. 이제(二諦)와 공(空)

III. 연기적 자아와 우연적 자아 요약문

IV. 의미의 지반으로서의 몸

V. 나가며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언어의 본성을 ‘공성’으로 재해석한 용수의 중관불교 시각에 따 라 자아 개념을 재탐색하는 데 있다. 용수 시대나 그 후의 철학자들은 언어가 실재를 지 칭한다는 믿음을 통해 상주불변하는 자아를 상정하고 그것의 실체성을 주장한다. 하지 만 용수에 따르면 언어는 삶을 위한 도구일 뿐, 그것 자체로 실체성이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아가 실체성을 가진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먼저 용수는 우리의 모든 경험이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적・개념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언어는 인간의 경험이 발생하는 과정 속에서 지속되기 도 하고 수정되기도 하며 사라지거나 새롭게 바뀔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분석 을 통해 자아 개념을 재구성하는 용수의 입장은 미국 철학자 로티의 시각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로티는 인간이란 언어적 표현으로서의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지적하면서, 자아에 대해 우리가 다양한 은유들을 수용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신념과 욕구의 그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필자는 인간의 경험의 조건을 언어적으로 해명한 다는 점에서 용수와 로티는 양립 가능한 시각이라고 본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가 형성되는 방식이나 원리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점에 있어서 용수와 로티는 서로 다른 입 장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티는 언어적 의미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 하지만, 용수는 ‘연기설’에 의존하여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자아에 대한 용수의 견해 또한 연기설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기설 자체에 관한 다 양한 해석들 속에서 자아에 대한 용수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 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모든 경험의 근거를 몸과 그 활동에서 찾는 ‘체험주의’가 제안하 는 ‘과정적 자아’ 개념이 용수의 시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제안한다.

주제어 공성, 우연성, 중관불교, 체험주의, 과정적 자아, 연기적 자아

 

I. 들어가며

 

불교는 인간의 사유와 언어 자체의 본성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이 겪는 ‘고 통’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교는 오 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전승되어 오면서 많은 해석과 변형의 반복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붓다의 진의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공성’(空性)으로 붓다의 시각을 받아들인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 경)의 중관불교(中觀佛敎)가 우리의 존재 조건을 실제적으로 보여 주 는 여러 입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그런데 해체적 사고를 특징으로 갖는 공사상은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가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언어 자 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으로 오해를 받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 문제는 용수가 ‘이제’(二諦) 개념을 상론하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 와 구조를 환기시키려 했다는 점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인간 이 언어적・개념적 구성물이라는 용수의 관점에 기초하여 다음으로 자아(自 我) 개념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용수의 공사상의 핵심은 붓다의 ‘연기설’(緣起說, Pratitya-Samutpada)1)에 기 반을 둔 자아와 세계의 ‘자성’(自性, svabhāva), 즉 ‘실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2)

용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실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우 리의 언어적 표현으로 인해 자아와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용수는 이 생각이 우리에게 집착과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자 괴로움의 근원이라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언어의 한계에 속한다는 존재 조건을 깨닫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3)

이러한 관점에서 용수는 만일 자 아가 실체를 갖는다면 자아를 구성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 로서의 오온(五蘊) 역시 실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용수에 따 르면 오온은 단지 생멸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실체성을 가 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의 국면들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 다. 나아가 그 수단은 우리가 처한 목적과 상황에 맞게 적절히 바뀌게 된다.4)

용수는 이러한 자아의 조건을 ‘무아’(無我) 개념으로 보여 준다. 즉 무아 개념 은 자아의 존재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 하는 개념인 것이다.

다음으로 용수는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붓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체성이 없으면서도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연기적 자아’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5)

 

    1) 초기불교의 십이연기설에서는 윤회하는 자아[我]에 대한 연기적 조망을 제시했고, 중관학에서는 우리의 사유를 구성하는 갖가지 개념[法]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모두 연기한 것임을 가르친 다. 불교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자아에 실체가 없다’는 아공(我空)을 설하는 것이 초기불전의 연기 설이라면, ‘갖가지 개념에 실체가 없다’는 법공(法空)을 설하는 것이 대승 중관학의 연기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기란 의존성을 의미한다. 연기하는 존재가 시간적으로 선후관계에 있는 것이라면 십이연기설에서와 같이 불가역적인 한방향의 의존관계로 표현되고, 시간적으로 공존관계에 있 는 것이라면 중관학에서와 같이 가역적인 쌍방향의 의존관계로 표현될 뿐이다. 초기불전의 연기 와 중관학의 연기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르지 않다. 본질이란 시간과 공간 이전의 의존성이다. 김성 철, 중관사상(서울: 민족사, 2008), p.106 참조.

     2) 베스터호프(J. Westerhoff)는 용수의 중론을 현대철학적 언어로 재해석하며, 중관사상의 연기설 을 ‘모든 자성(自性)은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Jan Westerhoff, Nāgārjuna’s Madhyamaka: A Philosophical Introdu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p.219-220 참조.

     3) 금강대불교문화연구소 편, 불교의 이해(서울: 무수, 2005), pp.128-131.

     4) 김성철, 앞의 책, pp.145-146.

     5)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중관과 유식, 김수아 역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6), pp.37-38. 언어와 자아 : 용수와 로티 201 

 

이 때 연기적 자아란 자아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고 정되거나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나 삶의 패턴에 따라 새롭게 전개되고 유지되는 결과들을 받아들이는 연속적인 자아를 뜻한다.6)

필자는 이와 같은 자아 개념에 대한 용수의 입장이 미국 철학자 로티(R. rorty) 의 시각에서도 상당 부분 유사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아에 영향 을 미치는 언어의 형성 방식이나 원리를 설명하는 지점에 있어서 용수와 로티 는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로티는 언어적 의미 가 만들어지는 조건에 대해 전적으로 우연적이라고 말하지만, 용수는 그에 대 해 환경적・문화적 지반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용수가 의존 하고 있는 근거는 붓다의 연기설이다. 그것은 다시 자아에 대한 용수의 시각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 근거가 된다. 하지만 붓다의 연기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적 의미의 형성 조건, 나아가 자아에 관한 용수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과정적 자아’(self in process)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용수의 자아 개념과 그에 대한 근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7)

 

    6)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초기불교윤리에의 한 접근(서울: 불교시대사, 2002), p.147.

    7) 마크 존슨, 도덕적 상상력: 체험주의 윤리학의 새로운 도전, 노양진 역 (파주: 서광사, 2008), pp.304-308. 

 

왜냐하면 체험주의의 과정적 자아 개념은 붓다의 연기설과 양립 가능하면서도, 변화하는 자아의 본성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필자는 자아 개념에 관해 로티의 철학보다 용수 의 철학이 더욱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해명을 제공한다는 점을 제안할 것이다.

 

II. 이제(二諦)와 공(空)

 

붓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나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 믿음을 기반으로 사용되는 언어적 표현 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러나 붓다에 따르면 세계에 실체성을 갖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는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8)

따라서 붓다는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생각의 오류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 로 인해 야기되는 집착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9)

붓다는 이런 관점에서 언어의 본성을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붓다가 말하는 무명은 실체론적인 모순된 생각을 말한다. 실체론은 언어를 진실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린다’는 말에서, ‘비’에 상응 하는 실체가 있다는 것인데, ‘비’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 그 현상을 지칭하 는 언어일 뿐, ‘비’라는 실체가 ‘내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리는 일’을 ‘비’로 명사화하면 ‘비’라는 존재가 있게 되는데, 언어는 그 언어에 상응 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으로 본다. 즉 언어적 인 개념을 사용할 때마다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통찰해야 한다. 이렇게 통찰하면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무아이고 공임을 알게 된다.10)

용수 역시 중론을 통해서 언어에 기반을 두는 우리의 사유를 문제 삼고 있 으며, 그 문제의 핵심을 실체론적 언어 사용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스트렝(F. Streng)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대의 언어 분석과 유사한 방법으로 나가르주나는 모든 단어들이 언어 체계 밖에 있는 어떤 사물을 언급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는 주장을 부정 한다. 그는 서술문 속에 있는 단어들, 즉 주부와 술부, 혹은 ‘행위 하는 사 람’ ‘행위’ ‘행위의 대상’ 사이의 관계는 오직 실용적인 가치만을 가지며, 존재론적인 상태를 지시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11)

 

   8) 조애너 메이시(Joanna Macy), 불교와 일반 시스템 이론, 이중표 역 (서울: 불교시대사, 2004), p.87.

   9) 붓다는 “내가 가르치는 것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소멸[苦滅]이다”라고 설했다. 따라서 괴로움 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이해가 곧 불교에 대한 이해 이자 불교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대불교문화연구소 편, 앞의 책 (서울: 무우수, 2005), p.45 참조.

   10) 이중표 역해,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서울: 민족사, 2016), pp.62-72.

   11) 프레드릭 스트렝(Streng, Frederick J), 용수의 공사상 연구, 남수영 역 (서울: 시공사, 1999), p.182. 

 

그런데 붓다 입멸 후에 연기설을 더욱 더 실체론적으로 해석하여 붓다의 의 도를 왜곡하는 시각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관점에서 용수는 중론을 통해 연기의 개념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즉 용수는 붓다의 핵심적 가르 침을 ‘공’(空) 개념 중심으로 집약하여, ‘팔불’(八不)을 말한다.12)

팔불(八不)의 핵심은 자아든 세계든 모든 것은 연기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 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다. 여덟 개의 부정, 즉 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유도 무도 아니며,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두 개의 모순 개념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 의해 형용되고 있는 연기가 실은 공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용수는 한쪽을 선택하고 한쪽을 배제하는 판단은 늘 오류라고 지적 한다. ‘있음’을 배제하고 ‘없음’을 지지한다고 하면 사실 자신을 부정하게 되 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에 기대고서야 ‘없음’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사건 이나 사태의 본질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13)

 

     12) 龍樹菩薩, 중론 中論: Madhyamaka-Śāstra , 김성철 역 (서울: 경서원, 2012), p.25: ‘不生亦不滅 不常亦 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새롭게]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 으며, [어디선가]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 어 온갖 희론을 잘 鎭滅시키도다. 내가 [이제]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 이하 이 책의 인용은 장과 절의 번호를 본문에 표시한다.

    13) 붓다는 초기경전인 니까야에서 언어의 책임 있는 사용의 중요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언어를 올 바르게 이해하고, 주의 깊게 사용하고, 올바른 태도로 취급하지 않으면, 언어는 개인이나 사회 모 두에게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즉 불교에서 이상적인 사람은 언어를 절제하고 사회의 유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를 언어의 중도적 사용이라고 말한다. 윤희조, 불교의 언어관 (서울: 씨‧아이‧알, 2012), p.35. 

 

모든 것에 실체나 본 질이 없고, 원인·조건에 의존하여 생한 것이 공의(空義)이며, 사물의 공성이 모 든 세간의 언어나 관행을, 실체로서가 아니라 임시적인 현상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공의 효용·공의 작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용수는 우리의 언어의 두 가 지 측면인 ‘세속제’(世俗諦, samvrtisatva)와 ‘제일의제’(第一義諦, paramarthasatya)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언어의 공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제(二諦) 개념은 두 가지 진리가 각자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진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 제일의제이다. 그러한 ‘공’에 의해서만 모든 세 간의 언어・관행이 임시적인 것으로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세속제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진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이제(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로써,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로써, 부처님들 의 교법은 이제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승의(勝 義)로서의 진리이다. 만일 사람이 이제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불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 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심원(深遠)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중 론24, 8-9.) 제일의는 ‘분별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 참된 가르침’이며 이는 ‘분별적 사고 를 해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일의의 가르침은 언어를 통해서 전달 가능한 것이 된다. 예를 들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말하며 시간 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르침은 제일의제의 가르침이고, 수행자는 오후에 식사 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시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르침은 세속제의 가르 침이다.14)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말 자체에 중요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어 로는 안 되는 것, 즉 제일의제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붓 다가 설법한다는 것은 언어와 동시에 제일의에 의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 부처님들의 교법은 이제에 의거한다‘고 하는 것이다.

제일의는 그 자신이 진 리이므로 제(satya, 諦)라고 불리고, 가르침으로서의 말, 즉 세속제는 이 제일의 제를 표현하고 있으므로 제(諦)라고 불린다.

가르침을 단순히 언어만 가진 것 으로 이해하여 언어 가운데 제일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모른다면, 이는 가르 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15)

 

     14) 김성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서울: 불교시대사, 2006), pp.196-197.

     15)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 대승불교의 사상, 박태원 역 (서울: 민족사, 1989), pp.95-96. 

 

언어 체계에 의지하지 않으면 표현될 수 없는 제일의란 우리의 몸을 통해 지 각되는 세계가 ‘조건에 의해 발생’(conditioned genesis)하는 연기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공하다’[空]는 말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緣起]이기에 ‘이분법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극단적 사유가 미치지 못한다는 점’[中道] 을 의미한다.16)

용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은 연기(緣起)를 공성 (空性)이라고 설한다. 그것은[空性]은 의존된 가명(假名)이며 그것은 실로 중도 (中道)이다.”(중론24, 18.)

 

다시 말해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비어 있고, 비 어 있으므로 무(無)가 아닌 공(空)이라고 하였다. 공은 언어로 분별하는 우리의 사고체계를 해체하도록 한다. 해체하여 또 다른 어떤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여 세계에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실체론적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세속제는 인간의 분별적 사고방식, 즉 언어체계 속에 맞게 베풀어진 가르침이다. 언어와 분별로 이루어진 불교의 가르침은 마치 뗏 목과 같은 것이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경고하고 논증하기 위해 공의 가르침이 나타났다. 공의 가르침 역시 언어와 분별에 의해 나타난 것이기 때문 에 또 다른 뗏목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용수는 이제가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모 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이제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로서 인간 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용수는 언어의 실제적인 조건과 근원적인 성격을 제시함으로써 언어의 실체성과 형이상학적 사변을 모두 거 부한다.17)

 

     16) 김성철, 앞의 책, p.203 참조.

     17) 카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 공의 논리: 중관사상, 정호영 역 (서울: 민족사, 1989), pp.118-121. 

 

그런데 여기서 ‘비어 있음’을 주장하는 용수의 철학적 특성 때문에 모든 의미가 성립할 수 없다는 언어적 허무주의의 의혹이 제기된다. 용수는 이 문제를 회쟁론을 통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철학은 모든 것이 실제로 공하다 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재론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적 수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용수는 우리에게 언어의 한 계를 보여 주면서 그것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언어는 삶을 위한 도 구일 뿐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용수의 의도가 바로 ‘여실 지견’(如實知見)의 의미이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용수의 시각이 언어적 허무 주의를 옹호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메(J. May)에 의하면 “용수와 그의 주석가들은 세계와 사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아니 라 진술(言語)에 대해서이다. 용수가 논리적인 이유에서든지 사실적인 이유에 서든지 언어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지라도 그것은 존재가 파괴되어 야 할 것이 아니라 단지 ‘잘못’ 세워진 인간의 견해가 없어져야 할 것”18)일 뿐 이다.

그래서 언어의 일상적 효용을 넘어 언어에 대응하는 본체가 있으며, 이 현실의 바깥에 언어가 의미하는 본질의 세계가 있다는 형이상학적 사변의 세 계는 모두 허구인 것이다.19)

한편 미국의 현대철학자인 로티 역시 언어에 대해 용수와 매우 유사한 입장 을 드러낸다. 로티는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주장해왔던 인간에게 불변하는 본 성이 있다는 관점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로티에 의하면 인간은 오랜 진화 의 결과 살아남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며 지식 역시 인간이 불확실하고 우연 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도구라고 본다. 언어 역시 같은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언어의 우연성’은 반본질주의를 포함한다.

로티의 주장 에 의하면 언어의 바깥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사물들이 없으며, 사물에 대 한 서술은 언제나 개방적인 것이므로 ‘내재적 성질’들에 관한 주장들도 개방 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본질’이라는 개념도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 로티에게 있어 언어란 역사적문화적 우연성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 일 련의 습관적인 사용의 결과이다.20)

또 근대 인식론의 문제인 인간이 가진 의식 이나 언어의 명제적인 내용이 저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내의 사실이나 사태에 대응한다는 관점이다.21)

로티는 언어가 세계나 실재와 ‘대치’(confrontation)의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언어가 세계를 표상한다는 생각, 혹은 언어가 세계와 우리 사이에 놓인 거울 같은 매개물이라는 생각을 전면적 으로 부정하고 있다.22)

 

   18) 쟈끄 메(Jacques MAY), 중관학 연구, 김형희 역 (서울: 경서원 2006), p.508.

   19) 카지야마 유이치, 앞의 책, pp.122-123.. 20) 김동식,로티의 신실용주의(서울: 철학과 현실사,1996), p.202.

   21) 김용준 외 4인,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서울: 아카넷, 2014), pp.121-123.

   22) 리처드 로티(R. Rorty),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박지수 옮김 (서울: 까치, 1998), p.17. 

 

이 주장의 핵심 논거나 이유는 언어의 불투명성과 해석의 편재성을 말한다.

즉 그는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으며 언어 와 상응 관계에 놓여 있는 실재나 자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23)

“세계는 대안적인 메타포(metaphor)들을 선택할 어떠한 규준도 제시해 주지 않으며, 우 리는 언어를 넘어선 이른바 ‘사실’이란 것과 언어나 메타포들을 비교하는 것 이 아니다. 다만 언어나 메타포들끼리 서로 비교할 수 있을 뿐”24)이라고 주장 한다.

즉 로티는 언어가 표상이라는 관념을 버리고 언어에 대한 철저한 비트겐 슈타인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곧 세계를 탈신격화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 다.25)

진리는 문자의 속성이며 문장은 어휘에 의존하고, 다시 어휘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 역시 결국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언어의 우연성을 통해서 로티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26).

 

    23) 조현아, 「로티 철학의 이해와 그 상대주의적 함축에 관하여」, 국민윤리연구제52호 (서울: 한국 윤리학회, 2003), p.69.

    24) 리처드 로티, 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 김동식 역 (서울: 민음사, 1996), p.58.

   25)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표상주의적인 언어관과 반표상주의적인 언어관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철학자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부정하고 있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은 전통적인 반본 질주의 철학의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배우고 있는 것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저한 반본질주의적인 언어관이다. 특히 언어게임 이론은 언어의 의미가 지시 대상에 의해서 고정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유선, Richard Rorty (서울: 이룸, 2003), p.153.

    26) 이유선, 앞의 책, p.157.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어떤 것을 초월하는 진리를 담아 내는 장소가 될 수 없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표상하지 않는다. 따 라서 언어는 우연적이라는 것이 로티의 생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이 두 철학자의 시각 즉 언어에 있어서 보편적 토대 나 형이상학적 시각을 지양한다는 점을 받아들여 언어가 상대적이고 가변적 이라는 주장에 따라 이전의 철학적 개념들을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바로 언어로 표현되고 설명되어야 할 ‘자아’의 문제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연기설을 재해석하여 ‘공’으로 주장한 용수의 자아개념을 살펴보고, 다 음으로 자아를 우연성으로 설명한 로티의 입장을 비교・분석하여 두 철학자의 입장 차이를 탐색할 것이다.

 

III. 연기적 자아와 우연적 자아

 

용수의 연기적 자아는 상주불변하는 자아(Atman)가 있다고 주장하는‘우파 니샤드’(Upanishad) 학파의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개념이다.

우파니샤드 의 자아 개념은 브라만(Brahman)과 함께 인도 형이상학 철학에서 핵심을 이루 는 개념이다. 브라만은 원래 기도나 주문을 뜻했고 나중에는 세계 창조의 원리 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변한다. 원래는 ‘입김’, ‘호흡’을 뜻했던 아트만은 ‘본질’ 이나 ‘본래의 자아’를 뜻하게 되면서 자아의 가장 깊은 핵심이나 영혼으로 표 현된다. 하나의 참된 본질이 세계에서 발견되면 브라만이라고 불리고 개별 존 재에서 인식되면 아트만, 즉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다.2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아가 실재한다는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붓다는 인간의 경험의 본성에 주목 하여 오온(五蘊)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여기서 오온은 ‘색’(rũpa, 色) ‘감 각’[vedāna, 受] ‘생각’[sāňňa, 想] ‘성향’[saṁkhāra, 行]‘ 식’(viňňāna, 識)으로 경험 의 여러 국면들을 가리킨다.28)

붓다 입멸 후 부파불교 중 한 학파인 아비달마 불교29)는 자아를 존재의 요소들로 분석함으로써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27) 한스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박민수 역 (서울: 이룸, 2008), pp.56-59.

     28) 임승택, 「불교에서 몸이란 무엇인가?: 초기불교와 체험주의의 비교를 중심으로」, 불교평론제 57호 (서울: 불교평론사, 2014), p.45.

    29) 설일체유부로 대표되는 아비달마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한 아함경에 대한 학습과 연구로 다량의 논서를 남겼다. 이들에 의하면 세계의 일체, 존재, 현상은 무수한 법의 인연에 따라 임시적 으로 구성된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존재의 기본 요소로서 유위의 다르마[法]는 찰나적이며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실유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법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서 그 자 체로 변화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약칭하여 ‘유부’라고 부른다. 카지야마 유이치, 앞의 책, p.41. 

 

하지만 이 때 사용되는 개념 정의와 분석이 언어의 의미론적 관계를 전 제하기 때문에 존재의 요소를 실체화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용수는 유부들이 주장하는 실체론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만일 자아(아뜨만)가 오온(五蘊)이라면 자아는 생멸(生滅)하게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온과 다르면 (자아는) 오음의 상(相)(을 띄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나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므로 무아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중론18, 1-2.) 위의 인용에서 용수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붓다의 ‘무아론’(無我論)이다.30)

나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뿐인데 이 가운데 불변의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십 년 전의 나와 동일한 나, 오 년 전의 나와 동일 한 나, 어제의 나와 동일한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31)

 

    30) 윤희조, 앞의 책, p. 47.

    31) 김성철, 앞의 책, p.149. 

 

‘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매순간 변화하고 업을 지으며 그 업을 받은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 반적으로 우리는 자아를 규정할 때 그것을 우리의 육체와 동일시하거나 우리 의 욕구, 성격, 생각, 가치, 희망 등을 통제하는 의식적인 주체가 존재한다고 여 긴다.

그러나 붓다에 따르면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몸, 느낌, 생각, 성향, 의식은 우리의 관념이나 경험의 덩어리일 뿐, 실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붓다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1) 몸은 자아가 아니며,

   2) 자아는 몸을 갖는 것도 아니 며,

   3) 몸은 자아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고

   4) 자아는 몸속에 있는 것도 아 니라고 말한다. 붓다는 인간의 의식이나 몸, 이 어느 것에도 우리가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실체적 자아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 다. 그에 의하면 흔히 우리가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들―육체적인 것이든 정 신적인 것이든―은 조건적으로 일어나 변화하다가 사라지는 무실체적인 것 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무아란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 존재하면서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는 실제적 조건을 밝히는 것이다.

이중표 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무아를 설명한다. 무아는 술어적(術語的) 의미를 지닌다.

‘오온(五蘊)은 무아(無我)이다.’

‘육입처(六入處)는 무아이다.’와 같은 명제에서 드러나듯이, 무아는 우리 가 자기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자기 존재가 아님을 의미할 때 술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32)

이중표에 의하면 인간은 삶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과정적 존재라는 것이며, 이러한 존재에 멈춤이란 없다. 무아의 존재는 연기적 자아를 말한다. 연기를 다르게 표현하면 상호의존성이다.33)

즉 연기란 모든 존재가 의존적, 가변적, 관계적 존재임을 말함으로써,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고 자아를 해체하여 보게 한다. 연기한 것은 무상(無常)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공이고, 공이기 때문에 무 아이다.34)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生)한 존재를 나는 무(無)라고 말한다. 또 가명(假 名)이라고도 하고 또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연기인 것 그것을 우 리들은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이며 그것(=공성) 은 실로 중도(中道)이다(중론, 24, 18).

여기서 말하는 ‘공성‘은 ‘비어 있음’을 말하며, 자아를 해체하여 보며, 무수 한 조건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상호의존적 존재를 함축하는 말이다.

붓다는 이 것을 통해 우리에게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연속 되어 있는 경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주장한다.35)

 

     32) 오온은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을 말하며, 이는 중생들이 자신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 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여기서 색은 육체, 수 상 행 식은 감정 내지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육입 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眼,耳,鼻,舌,身,意]과 감각대상을 가리킨다. 이중표, 아함의 중도체계 (서울: 불광출판사, 2012), p.166. 참조.

    33) 조애너 메에시, 앞의 책, p.87.

   34) 이중표, 「공의 의미」 범한철학제114집 (광주: 범한철학회, 1996), p.166.

   35) 루퍼트 게틴, 「무아: 개인의 연속성과 연기설」, 조인숙 역, 문학 사학 철학제35호 (서울: 한국불 교사연구소, 2013), p.230. 

 

이러한 맥락에서 무아는 자아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정적이고 객관적인 자아 대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는 이것을‘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有業報而 無作者]는 말로 설명한다.36)

업을 짓는 자는 있지만, 업을 짓고 있는 자의 몸[五蘊]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변화를 거듭하는 것을 ‘어떤 것’이라 지칭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 세계는 이를 표현하고 지칭하여 언어화해야 소통 가능한 것이 된다. 즉 우리가 스스로 자아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적 산물’로서의 ‘업’인 것이다. 나아가 그 경험적 산물은 인간과 자연,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등과 같이 이원 적으로 분리된 층위에서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연속적인 관계 에서 출발하여, 우리에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에 의해 가능해지 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기적 자아란 무수한 조건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상호의존적 존재를 함축하는 것으로, 우리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만 들어가는 자신을 순간순간 자각하는 상태를 일컫는다.37)

이런 관점에서 용수의 자아는 붓다의 무아를 받아들여 연기적 자아를 암시 하는데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때의 자아는 언어의 한계 속에 갇혀 있게 된다.

반야경에서는 이와 같은 자아의 조건을 ‘아공법공’(我空法空)으로 표현한다.38)

 

     36) 잡아함경권13 335경, 大正新修大藏經2. p.92 c.

     37) 바렐라는 ‘불교를 통한 인지과학과 인간경험의 대화’를 시도한다. 특히 중관불교의 ‘공’사상에 의 거한 ‘세계는 실체성을 결여한 텽 빈 현상’으로 보는 비실체성의 깨달음을 통해서, 허무주의보다 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모델을 찾는 것으로서, 불교와 인지과학의 발전적 대화를 시도한다. 이런 시도를 통해서 비관적 허무주의의 나락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앞으로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긍정적 신호이며, 이 논문에서는 짧게 인용하고, 연구과제로 남긴다. 프 란시스코 바렐라 외, 몸의 인지과학, 석봉래 역 (파주: 김영사, 2014) pp.360-362, pp.410-415.

    38) 반야경은 초기 대승경전으로 ‘공성’을 특히 강조한 경전이다. ‘모든 것은 공이다’라는 말은 반 야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며, 이 반야경 사상을 계승한 용수는 ‘모든 것은 실체로서 있다’는 것을 부정의 논법으로 ‘공’을 논증한다. 앞에서 지칭한 ‘유부’들은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말하 며, 이 점이 용수의 아공법공과 달라지는 지점이다. 카지야마 유이치, 앞의 책, pp.129-131. 

 

즉 용수가 주장하는 무 아설의 요체는 자아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본성 에 의해 왜곡된 실체적 자아의 상을 깨뜨리는 데 있다. 메는 이 점을 다음과 같 이 해석하고 있다. “세계는 한 언어로서 그것은 어떤 것을 ‘명명’(命名)하고 어 떤 것으로 보내며 어떤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실체적인 존재로서 구성되기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불가능성이 세계를 한 은유로 만들기도 하는데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세계는 어떠한 경우에 도 은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39)

자아도 세계도 실체가 없는 연기의 과정 속에 있고, 따라서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어서 이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은유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의미를 만들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언어라는 은유 적 방편이 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용수의 연기적 자아는 로티의 자아 개념과 상당 부분 유사하게 보 인다. 로티가 생각하는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언어의 의미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다. 따라서 언어는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표상하지 않는 우연적인 것이다. 언어가 우연적인 역사적 산물이듯이, 그런 언어로 서술될 수밖에 없는 ‘자아’ 역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티에게 자아란 고정되거나 완성되어 있 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의 서술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40)

진리가 저 바깥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문장들이 없는 곳에는 진리 가 없다고 말하며, 문장들은 인간 언어의 구성 요소들이고, 인간의 언어 는 인간의 창안이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리는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장들 이 저 바깥에 [인간의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41)

따라서 우연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아란 신념과 욕구의 그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서술하는 은유들의 구성물이기 때문에 자아를 확대하는 일은 새로운 은유의 창안으로 가능하다42).

 

     39) 쟈끄 메, 앞의 책, p.549.

     40) 리처드 로티, 앞의 책, p.32.

     41) 리처드 로티, 앞의 책, p.32.

     42) 리처드 로티, 앞의 책, pp.40-41. 

 

인간이란 보편적인 본질을 특권적 으로 부여받은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인 것들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이다. 피안의 가치를 좇는 일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며 자신의 운명적인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만드는 일 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이다. 로티는 자신과 세계를 기술하는 고리타분하 고 정당화된 기존의 서술들을 낡은 은유라고 말하고 낡고 성가신 것을 뒤엎고 새로운 은유가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은유를 창안한다는 것은 낡은 용어를 참신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로티는 그것을 ‘재서술’ (re-description)이라고 말한다43).

재서술은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고 기존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활동 자체가 이미 자아를 확대하는 일이다. 김동식은 로티의 자아관이 인생 전 체에 걸쳐 마치 연작시를 써가는 과정과 같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시적 자아’ 라고 부른다.44)

 

    43) 리처드 로티, 앞의 책, p.52.

    44) 김동식은 이 책에서 로티의 자아관을 ‘시적 자아관’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홀리스(Martin Hollis) 의 논문 제목에서 시사 받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동식, 로티의 신실용주의(서울: 철학과현 실사, 1996), p.68. 참조.

 

즉 인간은 보편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영원불 변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로티의 자아란 우리의 유한한 삶의 의미를 스스로를 독창적으로 서술해 가는 시인이다.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대담한 시인의 갈망이란 결국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무의식적 갈망의 특별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로티는 비록 주변적 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용어로 은유적 재서술을 통해 자아를 끊임없이 재창작 할 것을 제안한다. 로티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보편적인 도 덕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인간존재의 모형은 없다. 로티는 우리가 서툴더라 도 자신의 어휘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서술하면서 시인과 같은 삶을 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로티의 자아가 연기적 자아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로티의 자아가 의존하고 있는 언어적 우연 성 개념에서 발생한다.

로티는 우리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메타포들 과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그것들의 우열을 서로 가릴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 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라고 말한다.45)

다시 말해서 로티에게 언어적 의미는 아 무런 제약 없이 떠도는 시간과 기회의 산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김동식은 로 티의 언어관이 ‘근거 없는 수사학’(undergrounded rhetoric)으로 전락할 것을 우 려한다.46)

또한 노양진은 “포괄적인 우연성 논제는 필연이나 절대에 대한 거 부라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경험 영역 안에서의 의미 있는 차이들을 해명하 는 데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47)고 비판한다.

필자 역시 언어적 의미가 전적 으로 우연하게 만들어진다는 로티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 면 용수의 관점에서 언어의 의미에 대한 관습적 합의는 우리의 ‘몸’이 속해있 는 역사적・문화적・환경적 조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 문에 완전히 우연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48)

 

    45) 김동식, 「로티와 언어 세계의 우연성」철학과 현실31집 (서울: 철학과현실사, 1996), pp.71-83.

   46) 김동식, 앞의 책, p.477.

   47) 노양진, 나쁜 것의 윤리학: 몸의 철학과 도덕의 갈래(파주: 서광사, 2015), p.249.

   48) 프란시스코 바렐라 외, 앞의 책, pp.362-365.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 는 용수의 견해가 로티보다 더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해명을 제공한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용수는 자신의 입장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구 체적이고 명확한 해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필자는 용수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근거를 체험주의가 제안하는 ‘과정적 자아’(self in process)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 제안은 시간적·문화적으로 그 리고 자료와 방법 등에서 서로 거리가 있는 사상체계이지만 언어와 자아에 대 한 유용하고도 상호보완적인 해명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IV. 의미의 지반으로서의 몸

 

무아설의 근간을 이루는 연기의 원리는 초월적이거나 선험적인 개념이 아 니라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근원적 존 재 조건이다.49)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은 붓다가 인간의 원초적인 지각 활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존한다.

즉 불교는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 험적 조건으로서의 ‘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극단적으 로 무아를 주장하는 일부 시각에서는 우리가 유기체로서 존재하며 행위한다 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지만, 그것은 붓다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50)를 닦기를 권고하면 서 우리의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49) 안옥선, 앞의 책, pp. 148-149.

    50) 사념처는 몸(身, kāya)으로부터 시작하여 느낌(受, vedanā), 마음(心, citta), 법(法, dhamma)의 영역으 로 넘어가는 일련의 지속적인 관찰(隨觀, anupassin)을 내용으로 한다. 각묵 스님,초기불교의 이해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12), pp.278-279 참조. 

 

사념처의 실천이 몸에 대한 관찰 로부터 시작된다는 가르침은 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이 수행을 통해서 마 침내 사성제(四聖諦)라는 ‘고귀한 진리’를 실현하여 궁극의 완성에 이르게 된 다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의 변화과정을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으로 ‘있는 그대로’ 보게 하며[如實知見], 이것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 과정 을 해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수는 붓다의 이런 가르침을 중론을 통해서 밝 힌다.

 

붓다는 몸과 정신의 두 영역을 엄격히 구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층 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윤회가 열반과 구별되는 점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열반이 윤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 어떤 것도 없다(중론, 25, 19-20). 열반은 세간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절대적이고 어떤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인 간의 삶에 있어서 탐욕[貪], 증오[嗔], 혼미[痴] 같은 어떤 얽매임이 없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가 가르친 연기법을 적용하게 되면, 무(無)라고 말하면 그 것은 곧 어떤 사물의 무이다. 무는 유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 자면 무는 유에 의해서 시설(施設)되어 있고, 유는 무에 의해서 시설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와 유는 상관개념이기 때문에, 열반이 유가 아니라면, 당연 히 무로도 존재할 수 없다. 즉 서로 의존해서 일어난 여러 사물이 공인 것을 알 지 못하고, 그에 집착하여 생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윤회라고 부르고, 공의 실 상을 깨닫고 일체의 집착을 끊어서 윤회의 상태를 벗어난 것을 열반이라고 부 른다는 것이다.51)

월칭에 의하면, 윤회란 사람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이고, 해 탈이란 사람이 자유롭게 된 상태라고 한다.52)

그러므로 윤회와 열반은 서로 다 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윤회와 열반에 대한 의미를 다루 는 것은 이 논문의 흐름에서 다루기에 큰 주제이고 또 다소 벗어난 점이 있으 므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열반이라는 경지가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무명의 상태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윤회도 실재하는 것이라 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영역을 구분하는 문제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경험적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몸과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 고로 머물게 될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무’ 또는 ‘유’에 대한 집착과 번뇌를 가져다 줄 뿐이다.

한편 바렐라(F. Varela)는 “우리의 행동과 경험이 벌어지는 포괄적 단위로서 몸(색ㆍ수・상・행・식)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 포괄적 단위로서의 몸이란 인지 과 정(언어화)이 일어나는 장소인 유기체의 구조와 마음이라고 하는 살아있는 경 험의 구조가 될 것”이라고 해명한다.53)

이러한 관점에서 노양진은 “나는 ‘몸으 로서의 나’이며, 그것은 우리의 모든 담론이 출발하는 점이며, 동시에 모든 담 론을 의미화해 주는 궁극적 의미지반”54)이라고 말한다.

 

    51)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용수의 중관사상, 남수영 옮김 (서울: 여래, 2014), p.262-267.

    52) 나카무라 하지메, 앞의 책, p.276에서 재인용.

    53) 바렐라는 용수의 연기 이론을 ‘여러 방식으로 발생하는 조건들에 의존함’ 또는 ‘상호의존적 발생’ 으로 말하며 인지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프란시스코 바 렐라 외, 앞의 책, pp.12-25. 참조.

    54) 노양진, 몸이 철학을 말하다: 인지적 전환과 체험주의의 물음(파주: 서광사, 2013), p.245. 

 

이들의 논변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몸과 언어로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여기 에 근거하여 우리의 몸이 어떻게 의미의 지반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존슨에 따르면 의미는 유기체로서의 사람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 되는 것으로서 ‘신체화된 의미’(embodied meaning)다.55)

또한 존슨은 자신이 말하는 신체화된 의미가 듀이(J. Dewey)의 ‘연속성의 원리’(principle of continuity) 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연속성의 원리는 이 세계에 어떤 형태의 ‘단절’은 없다 는 것이며, 따라서 자아든 세계든 모든 것은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세계 안에서 환경과 타인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신 체화된 유기체’로서, ‘신체화된 마음’은 마음의 작용이 우리의 신체적 요소에 근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요소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56)

이러 한 관점에서 존슨은 의미의 근원으로서 초월적 영혼이나 자아를 거부하며, 의 미작용이 우리의 뇌, 몸, 환경, 사회적 상호작용, 기관, 관행의 본질에 의해 나 타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의미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첫째로 우 리의 감각 운동 경험, 정서, 세계와의 본능적 연결에 기초하며, 두 번째로 추상 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감각운동 과정을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상적 능력 에 기초한다.57)

이러한 해명을 통해 존슨이 보여 주려 하는 것은 우리가 의미 를 만들고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몸이라는 경험적 사실이다. 나아가 이 주장을 토대로 존슨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인 ‘과정적 자아’를 제시한다.

우리는 과정의 존재, 즉 그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와 묶여 있으며, 역사적 우연성들의 영향을 받으며 진화하는 자아다.

나는 과정적 자아 (self-in-process), 즉 스스로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지도 않으며, 또 한 그것에 완전히 매몰되지도 않는, 그렇지만 시간 속에서 전개되면서 경험을 통해 드러나고, 경험에 의해 변형되는 자아 개념을 옹호하려고 한다.58)

 

   55) M. 존슨, 몸의 의미: 인간 이해의 미학, 김동환・최영호 역 (서울: 동문선, 2012), p.42.

   56) M. 존슨, 도덕적 상상력, pp.277-308.

   57) M. 존슨, 앞의 책, pp.45-46.

   58) M. 존슨, 앞의 책, p.278.

 

존슨이 말하는 과정적 자아란 “지속적으로 그 정체성을 탐색하며(즉 목표, 행위, 느낌, 분위기, 태도 경험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또 동시에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상상적 이상들에 부합하게 자신을 형 성하려고 하는 자아”59)다.

다시 말해서 자아는 두뇌와 몸, 세계의 지속적인 상 호작용 과정에서 생겨나지만 근세가 가정했던 몸/마음 분리도, 실체로서의 자 아는 없다.

자아는 몸의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서사적 이해를 통해 구성된다.

또 자아는 물리적 유기체로서 생물학적 구조뿐 만 아니라 목표나 대인관계, 문화적 전통, 제도적 믿음, 역사적 맥락에 의해 정 의되는 것이다.

나아가 존슨은 자아의 정체성이 항상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과 정의 연속체를 의미한다고 덧붙이며, 우리는 이 과정 속에서 정합적인 경험을 갖기 위해 우리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조직화하고 재조직화한다고 말한다.

존 슨은 이와 같은 인간의 능력을 ‘상상적 종합 활동’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삶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인 리쾨르(P. Ricoeur)의 ‘서사’(narrative) 개념 을 인용한다.60)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적 원천들 에 근거한 우리의 경험이 서사적으로 구성되고 구조화되는 방식을 의미한 다.61)

 

     59) M. 존슨, 앞의 책, p 308.

     60) M. 존슨, 앞의 책, pp.312-315.

     61) 존슨은 상상적 원천을 영상도식(image schema), 범주의 원형이론(prototype theory), 의미론적 프레 임, 개념적 은유(conceptual theory of metaphor)와 환유(metonymy)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 존슨에 따르면 이러한 상상적 기제들은 우리 자신의 이해에 대한 많은 부분을 구성하는 것들로서,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 안에 존재하고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M. 존 슨, 앞의 책, p.313. 참조. 

 

이것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와 타인, 나와 세계, 물질현상 등을 구분하 지만, 이러한 것들은 명사적(名詞的) 존재들이 아니라 동사적(動詞的)으로 변 화해 가는 과정에 있으며, 이 변화는 그 자체로 그 다음의 변화에 원인이면서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서사적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자아든 세계든 모든 것은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언어적으로 불연 속적 사물이나 사건으로 표현할 뿐이다.

일상적으로 “나는 ~ 이다” “나는 ~ 한다” “나는 ~을 갖고 있다” 등과 같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자아는 모든 성질이나 행동, 관계성 등과 같은 것을 표상하 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자아는 그 자체로 고립적이거나 확정적 인 실체가 아니다. ‘자아’는 지속적으로 연기하는 세계의 또 다른 국면일 뿐이 다. 용수는 붓다의 연기를 공으로 재해석하여 독립적인 ‘나’ ‘나의 것’ ‘나의 생 각’ 같은 실체적 사고는 인간 삶의 괴로움을 부르는 집착의 뿌리가 된다고 가 르친다. 즉 존슨이 말하는 ‘과정적 자아’나 용수가 밝힌 ‘공’은 인간의 경험적 내용을 언어화하여, 존재 자체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언어화 하여 살아가는 이 세계를 참된 실재라고 믿는 오류는 범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붓다와 용수는 언어에 오염된 모든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부르며 이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은 언어적 세계를 여실지견하도 록 하는 가르침이며, 언어로 구성되는 ‘자아’ 역시 ‘공’의 관점에서 연기적 자 아로 깨닫게 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용수의 ‘공’을 체험주의 시각에서 본 노 양진에 따르면 “자아는 몸의 지속적인 활동에 통해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서사적 이해를 통해 구성된다.”62)고 말하며 이 이론은 “우리 자신의 근원 적 조건을 조망하게 해 주는 메타적 시각”63)이라는 점에서 체험주의와 중관불 교의 유사성을 말한다.

 

     62) M. 존슨, 앞의 책, p.244.

    63) M. 존슨, 앞의 책, p.244.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노양진의 시각에 동의하며 존슨의 과정적 자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붓다가 말하는 연기적 자아의 개념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와 같은 접근은 무아에 대한 해석이 허무주의적 귀결 로 가지 않도록 하며, 우리 자신의 존재 조건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데 도움 을 준다고 본다.

과정적 자아는 단순히 몸으로 이루어진 원초적인 물리적 유기 체가 아니며, 또 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지만 몸 안에 갇힌, 형이상학적으 로 구분되는 영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물리적·문화적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복합적이고 자기 변형적인 생물학적 유기체다.

비록 대부분의 상호 작용이 자기의식 층위 아래에서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물리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불변하는 정체성을 가진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경험한 다.64)

 

     64) M. 존슨, 앞의 책, pp.328-330. 

 

필자는 체험주의의 ‘언어를 통한 철학적 탐구’가 근대 서양철학의 주류적 시각이 가정했던 몸/마음 분리, 실체로서의 자아 모두를 부정함으로서, 확정 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는 없다고 밝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논거를 배경 으로 필자는 존슨이 말하는 ‘과정적 자아’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즉 ‘연기적 자아’와 양립 가능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용수의 시각을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V. 나가며

 

불교는 붓다의 문제의식, 즉 인간의 괴로움의 근원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 다.

불교의 철학적 뿌리에는 언어적 표현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으로서 ‘무명’ 이 있으며, 붓다는 이것이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붓다는 무 명을 해소하기 위한 시각으로 ‘연기설’을 주장하는데, 용수는 이러한 붓다의 철학을 ‘공’으로 재해석 해낸다.

그러나 우리의 사유를 해체하여 메타적 시각 을 제안하는 용수의 철학적 성격 때문에 그의 철학은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용수의 철학에 더욱 쉽게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로티의 언어관을 비교하고 체험 주의의 과정적 자아 개념을 검토했다.

용수의 주장에 의하면 연기설이 실체론 적으로 해석되는 그 배경에 있는 것이 언어사용의 문제이고 이 문제를 극복하 기 위해 ‘이제’를 말한다.

이제는 진리자체인 제일의제와 이를 언어적으로 표 현하기 위한 세속제를 말하며 이는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모습임 을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언어는 삶을 위한 하나의 도구이므로 언어가 가진 한계를 ‘여실지견’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문제의식과 같은 지점에 있는 철학 자로서 로티의 언어관을 살펴보았다. 로티에 의하면 언어는 세계를 표상하는 실체가 아니라 때에 맞게 사용하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언어의 의미는 우연 히 결정되는 메타포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용수와 로티의 언어관에 따 라 자아 개념 역시 재탐색하였다.

그 결과 필자는 용수의 자아 개념과 로티의 자아 개념이 인간을 언어적 조건 에 갇힌 존재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러 나 필자는 로티가 지나치게 우연성을 강조한 나머지 언어적 의미가 형성되는 조건의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즉 자아의 내용 에 해당하는 참신한 은유들―언어적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지반 또는 조건을 전적으로 우연성에 맡기기 때문에 몸이 속한 역사적・문화적・환경적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그 의미가 형성되는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다고 본다. 반면 용수는 의미가 인간과 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만들어 진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연속적 경험이 가능한 인간의 몸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적 의미의 지반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언어적 의미의 지반은 이제인 제일의제와 세속제로서의 연기적 자아를 제시하여 실체로서 의 자아는 부정하지만,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자아 의 ‘공성’을 말한다. 용수는 언어에 오염된 모든 것을 무명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언 어적으로 표현되고 설명되어야 할 ‘자아’ 역시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 근원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언어로 구성된 ‘자아’ 역시 ‘공’의 관점에서 연기 적 자아로 보라는 것이다. 연기적 자아는 무수한 조건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상 호의존적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자아’는 지속적으로 연기하 는 세계의 또 다른 국면일 뿐이다.

이 시각은 체험주의가 말하는 ‘자아’가 몸의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으로 구성된다는 ‘과정적 자아’의 관점과 동등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관점을 현대적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체험주의’  의 ‘과정적 자아’ 개념이 ‘공’으로서의 연기적 자아를 말하는 용수의 시각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용수의 철학을 극단적 허무주의로 귀결시키지 않으면서 현대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붓다가 주장했듯이 우리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도록 돕는 유용한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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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호 및 원전자료 ∙ 雜阿含經, 大正藏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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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anguage and Self : Nāgārjuna and Rorty

Kim, Kwie Ok (Ph.D Candidat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investigate the concept of self according to Nāgārjuna’s perspective of Madhyamaka which reinterprets the nature of language as ‘emptiness’. In Nāgārjuna time many people, laymen and philosophers as well, believed that language represents a substance. Based on that belief, they insisted that self represents an unchangeable reality. But according to Nāgārjuna, language is a tool for living, and it does not represent any essence. From this point of view, the claim that self is must be reconsidered. First, Nāgārjuna argues that humans are linguistic and conceptual constructs because our experience is possible through language. Furthermore, language can persist, be modified, disappear, or change in the course of human experience. Thus, Nāgārjuna’s view of self is similar to that of Rorty. Rorty argues that humans are destined to use metaphors as linguistic expressions and that we are the net of beliefs and desires that are created by metaphors about ourselves. Therefore, Nāgārjuna’s and Rorty’s views of self are compatible with each other in the way of explaining the conditions of human experience in terms of language. However, Nāgārjuna and Rorty differ from each other concerning the problem of providing a basis for the way or principle in which the meaning of language is formed. Rorty argues that the formation of verbal meaning is the matter of mere contingency, while Nāgārjuna depends on Buddha’s “Pratitya-Samutpada”. However, since there are many ways of interpreting Pratitya-Samutpada, it remains somewhat difficult to define what Nāgārjuna meant by it. In this context, I suggest that the experientialist account of the nature and structure of “the embodied experience,” along with its conception of ‘self in process’ offers a significant clue to explicating Nāgārjuna’s view of self in more concrete terms. Keywords Emptiness, Contingency, Madhymakārikā, Experientialism, Self in process, Dependent co-arising self

 

2019년 08월 09일 투고 2019년 09월 22일 심사완료 2019년 09월 23일 게재확정

불교학연구 제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