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많은 제자들이 따랐던 공자(孔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온고지신(溫 故知新) 해야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1) 주자의 해석 에 의하면, 여기서 지신(知新)이란 옛 배움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에 그치 지 않고, 예전에 들은 것을 늘 익혀서 그때마다 새롭게 터득할 수 있다면 그 응용이 무궁하다는 의미이다.2)
1) 엄귀덕, 홍순효, 중국사가낳은보석같은고사성어300 (서울:다락원,2005),108.
2) 박성규 논어집주 (서울:소나무,2011),79.반면왕양명은좀 더 실천적인지행합일(知行合一)의 맥락에서 온고지신을 옛 가르침을 체득하면서도 새 시대의 필요에 맞는 지혜를 실천적으로 배우는 확장된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긴장은 서구 신학의 전통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학문함이 그저 암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는 데 그치 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라는 지평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가 르침이다.
지난 2025년에는 교회의 역사상 첫 에큐메니컬 공의회였던 니 케아 공의회의 1,70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순간들마다 교회의 오래된 가르침들을 되돌아 보는 이유 역시 그것들을 단순히 반복(溫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 들을 통해 이 시대에 적실성 있는 새로운 통찰을 비춰줄 수 있는 지신(知 新)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개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항상 개혁되 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secundum verbum Dei)는 문구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가 이 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 내어,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신학의 사명을 천명하는 것이다.3)
이전 시 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발생 하는 훨씬 더 방대하고 암울한 위기들4)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21세기에 1,700년 전 니케아 신경의 가르침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것의 의미 자체를 배우는 것을 넘어서, 그 당시 니케아 교부들의 분투가 오늘날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여러 지신(知新)들을 찾아내기 위함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3)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Baker Books, 1983), 21-22. 여기서 에릭슨은 신학이 현대적(Contemporary) 작업이라고 규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 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신학을 ‘고어로 만드는 위험’(the peril of archaizing ourselves) 역시 경계하면서 그는 신학의 현대화는 오늘날의 새로운 사상들을 수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메 시지가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는 질문과 도전들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밝힌다.
4)필자의 논지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위기들의 목록을 간단하게 제시하는 것이 도 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 생물의 다양성 감소 및 자원 고갈, 펜데믹 의 경험과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위험, 세계 보건 인프라의 불균형, 핵무기 확산 및 신냉전 구도, 지역 분쟁의 장기화와 외교적 혼란들,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돌파하리라는 두려움과 생명 윤리에 관 한 다양한 문제들, 사이버 보안의 이슈들, 사회적 양극화 심화와 전쟁, 기후, 빈곤으로 인한 대량 이 주와 난민 문제들, 디지털 시대의 정신 건강 관련 이슈들, 가짜 뉴스와 극단적 혐오주의들의 문제들 로 인한 총체적 혼란에 빠져 있다. 이에 더해 이 시대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어떠한가? 저출산 과 인구 고령화로 인한 지속적인 신자의 감소와 더욱 급격한 위기의 예측, 세상의 소금인 교회가 맛 을 잃고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사태들, 우리의 복음이 구멍난 복음이라는 수많은 경고들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시대 한국 교회에는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부인하기가 어려울 것 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700년 전 니케아의 가르침을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 온고(溫古)가 반드시 지신(知新)으로 이어져야 함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오늘날 정말 시급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 역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되어야 함을 인정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혁의 단초가 우리 외부의 새로운 사상으로 부터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의 전통 내부에서 찾아져야 한다 는 점이다.
지신(知新)은 온고(溫故)로부터 나옴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동 시에 그러한 개혁은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했던 그 시대의 문제들에 분연히 항거했던 것처럼,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항거하기 위한 준거점이자 원동력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니케아 신학의 수호자로 여겨지는 아타나시 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의 신학과 니케아 신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로 여겨지는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개념과의 내적 상 관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양자는 자연스럽게 동일시되어 왔지만,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호모우시오스’가 처음부터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초기 저술이라고 볼 수 있는 「이교도 반박」(Contra gentes)이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De incarna tione Verbi)에는 ‘호 모우시오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으며, 나중에 아리우스(Arius)를 반 박하는 글에서도 이 용어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글을 쓴다. 잘 알려진 대 로 이 용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강력한 요구로 삽입되었으며, 그 출처 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Ossius von Cordoba)를 통해 전달된 서방의 문 헌들인 것으로 여겨진다.5)
5) Jaroslav J.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202.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가 작성된 이후 350년 까지도 아타나시우스는 ‘호모우시오스’를 사용해서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6)
그렇기 때문에 니케아 신경과 관련해서 아타나시우스와 ‘호모우시오스’ 개념이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내적 상관성 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7)
6) 염창선,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 신조(325): 신학적 교회정치사적 입장 변화 연구” 「한국교회사학 회지」 16 (2005), 85-112. 330년대에 벌어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앙퀴라의 마르켈루스 사 이에 벌어진 논쟁에서도 ‘호모우시오스’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염창선은 이것을 교회 정치사적 상황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하는데,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망 전까지는 니케아파 와 아리우스파 누구도 니케아 신조의 타당성을 문제 삼거나, ‘호모우시오스’를 쟁점으로 삼을 수 없 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망 이후, 니케아파에 호의적이었던 서방의 콘스탄스 황제와 반 니케아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 사이의 긴장 관계가 생겼다. ‘호모우시오 스’라는 용어가 ‘사모사타의 바울’의 냄새를 풍긴다는 의심이 만연했던 동방의 반니케아적인 풍토에 서 아타나시우스가 ‘호모우시오스’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350/51년경 저술한 「니케아 교회회의의 교령」(De decretis Nicaenae synodi)부터 시작해서 362 년 저술한 「안디옥인들에게 보내는 편지」(Tomus ad Antiochenos)에 이르기까지 ‘니케아 신조의 충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신학함에 있어서 모든 내용 이 언제나 동일하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나 표현의 방식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쁘게 보면 교회 외부의 정치적 요인이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것이 라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신학이 그 시대에 들려주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요 통찰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7) 한국에서 이 개념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는 김용준, “아타나시우스의 ‘호모우시아’ 개념에 관한 연 구: 그의 책 「아리우스 반박」을 중심으로,”「개혁논총」 72 (2025), 51-79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 체적 구원론적 ‘데오포이에시스’에 대한 연구,”「성경과 신학」 107 (2023), 105-127가 있는데, 여기 서 김용준은 아타나시우스에게 ‘호모우시오스’는 가변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아닌 로고스가 ‘영원 한 출생’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조주’이시라는 의미임을 섬세하게 밝혀낸다. 필자는 이러한 통찰에 도움을 입었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구 원론 전체의 맥락에서 ‘호모우시오스’가 가질 수 있는 내적 상관성에 대한 것이다. 니케아 신조와 관 련된 조금 더 이전의 연구로는 김영한, “신앙고백서의 현재적 의의와 적용: 개혁교회의 관점에서,”「 조직신학 연구」 25 (2016), 118-150와 김은수, “‘공교회의 고전적 정통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과 발 전 역사에 대한 연구,”「조직신학연구」 27 (2017), 308-345가 있지만 이 논문들은 ‘호모우시아’에 대 한 집중적 논의는 아니고, 보다 큰 시야에서 공의회의 의의들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니케아 신조와 관련해서 ‘호모우시 오스’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하지 말고 신조 전체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 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을 좀 더 세밀히 고찰해 보면,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이 그의 구원론 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진 보를 이루어온 발전들이 많은 경우 우연(accident)에서 비롯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우스 자신도 몰랐던 그의 구원론의 핵심이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에 담겨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더 열렬한 니케아 신조의 지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되짚어 보면서 연구자는, 우리 안에 이미 존재했지만, 그 중요성과 강조점을 놓치고 있었던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여 온고지신을 통해 항상 개혁되는 복음주의 신학에 이바 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먼저 2장에서는 니케아 공의회의 과정을 통해 제시된 아리 우스의 기독론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반론을 쟁점 중심 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3장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 의 아타나시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구원론을 개관하면서 거기서 명시적으 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타나시우스가 ‘호모우시오스’를 구원론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이 러한 시대적 조감이 현대 복음주의 신학에 줄 수 있는 새로운 통찰들에 대 해 간략하게 제언해 보고자 한다.
Ⅱ. 니케아 신조에서 ‘호모우시오스’의 의미
1. 아리우스의 기독론
아리우스 사상의 기본 전제는 “모든 실재의 원천인 기원이 없는 하나 님(ἀγέννητος ἀρχή)의 절대적인 유일무이성과 초월성에 대한 단언”8)이 다.
8)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5th ed. (London: Contunuum, 2012), 227.
그는 홀로 영원하시고, 홀로 발생되지 않으셨으며(ἀγένητον), 홀로 시작이 없으신(ἄναρχον) 한 분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은 유일무이하고 초 월적이며 나뉠 수 없기 때문에 공유되거나 교류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 냐하면 자신의 본질을 다른 존재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뉠 수 있고(διαίρετος), 변화에 종속된다는(τρεπτός)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 다.
하나님은 정의상 한 분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불합리하며 아리우 스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 는 네 가지 명제들이 있다.
첫째, 성자는 성부가 자신의 솜씨를 통해서 무로부터 만들어 낸 피조 물, 즉 ‘크티스마’(κτίσμα) 또는 ‘포이에마’(ποίημα)임에 틀림없다.
아리 우스는 성자는 물론 완전한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들과는 비교될 수 없 지만, 성자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차적인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성부의 뜻에 의해 존재케 된 피조물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말한다.
둘 째, 피조물인 성자는 시작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성자는 다른 모든 것들 및 시간 자체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시간 이전에 출생하였지만, 성자 가 출생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 성자는 성부와 친 교를 가지거나 성부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성자는 하나님 의 말씀이자 지혜이지만,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말씀과 지혜는 아 니라는 것이다.
성자는 순수한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말 씀과 지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을 지닐 뿐이다.
마지막으로 성 자는 변화될 수 있으며 심지어 범죄할 수도 있다.9)
이러한 아리우스의 가 르침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사악한 주장이라며 분개한다.10)
9)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227-231.
10) Athanasius,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s. Henry Wace and Philip Schaff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07). Ⅰ.
2, 아타나시우스의 반론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J. N. D. Kelly)는 아리우스에 대한 아타나시우 스의 반론을 세 가지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첫째, 아리우스는 삼위 하나님 이 영원하지 않다고 전제하고 사실상 다신론을 재도입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훼손했다.
둘째, 성부의 이름과 아울러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교회의 확고한 예전적인 관습들과 성자에게 기도를 올리는 관습을 무너뜨렸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 속이라는 기독교의 사상을 훼손한 것이다.11)
아타나시우스가 보기에 말씀이 아버지와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아니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가 지키기 원 하는 기독교의 유일신관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교도의 다신 론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12)
또한 이 세상은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직 접적인 만남이 불가능하여 말씀이라는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하나님과 말씀 사이에 그리고 말씀과 세상 사이에 또 다른 수많은 중간적 존재가 필요하게 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13)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이교도들이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을 섬기는 것 과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비난 했다.14)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아리우스의 기독론이 기독교의 예배를 훼손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말씀이 가 변적이고 임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무신론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다.15)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말씀에 관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이 론이 구원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16)
왜냐하면 아타나시우스의 구 원관 안에서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피조 세계를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하나님이어야만 한다.17)
11)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233.
12)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Ⅱ. 23; Ⅲ. 8; Ⅲ. 15-16.
13)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Ⅱ. 26.
14) Athanasius, “Against the Heathen,”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s. Henry Wace and Philip Schaff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07). 47.
15)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Ⅰ. 35.
16)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Ⅱ. 14.
17)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Ⅱ. 70.
그는 말씀이 스스로 본질적인 하나님, 성부의 참된 형상이 아니었다면, 말씀은 결코 우리를 신화 (神化)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18)
아리우스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창조에 관한 선험적인 개념들로부터 출발했던 합리주의자였다면, 아타나 시우스는 철학적 사변보다는 구속에 관한 확신에 서 있던 독실한 신자이 며 목회자였다.19)
그러한 확신으로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가 성부의 영원한 자녀이며,20) 동시에 하나님이 그의 말씀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은 빛이 비추기를 그친다거나 강의 근원이 흐르기를 멈춘다고 말하는 것 과 같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21)
성자의 출생은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의미 가 아니라, 아버지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하고 그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 이다.22)
성자의 출생은 분명히 성부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본성 자체 속에 내재해 있는 영원한 과정을 하나의 특정한 의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23)
또한 인간 존재들도 ‘호모우시오이’(ὁμοο ύσιοι)로 묘사될 수 있지만, 인간이 공유하는 본성은 필연적으로 개체들 에게 나누어져 분배되는 반면에 신적인 본성은 나뉘어지지 않는다.24)
그 러므로 성자는 아들이기 때문에 성부와 다르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성부와 동일하다.25)
18) Athanasius, “Councils of Ariminum and Seleucia.” 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s. Henry Wace and Philip Schaff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07). 51. 여기서 신화가 아타나시우스가 의미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19)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243.
20)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Ⅲ. 66.
21)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Ⅱ. 32.
22)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Ⅰ. 26-28; Ⅱ. 59f.
23)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Ⅲ. 59.
24) Athanasius, “Defence of the Nicene Council”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 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s. Henry Wace and Philip Schaff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07). 11.
25)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Ⅲ. 4.
일반적으로 이러한 아리우스의 기독론과 그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반박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쟁점만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물론 아타나시우스가 사용한 ‘호모우시오스’의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26)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가 당면했던 문제는 아리우스의 이단적인 주장에 대항하여 성자가 성부와 더불어 완전한 신성과 동등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지는 문제, 즉 성부와 성자가 어떻게 동일본질을 이루는지 설명하는 것은 이 시대에는 아직 본격적인 과제가 아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당면했던 과제와 제시했 던 해법은 그들의 것과는 달랐다. 이와 같이 교회는 모든 교리를 언제나 동일한 강도와 균일한 관심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각 시대는 그 시대 에 필요한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타나시우스가 수많은 위기들과 다섯 번 이상의 유배 를 당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이 중요할 수밖 에 없는 이유를 살펴볼 차례이다.
아타나시우스가 ‘호모우시오스’를 강조 했던 것은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명백하게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이 유였다.
물론 니케아 공의회와 그 전후의 여정들이 황제의 정치적 편향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에 큐메니컬 공의회의 신조로 반영되었다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신앙의 두 기둥’ 위에 서서 더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통적인 신학을 견지했 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두 기둥’은 ‘유일신론’과 ‘구원론’ 이었는데,27) 이 중에서도 특히 구원론의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26) 김용준은 “아타나시우스의 ‘호모우시아’ 개념에 관한 연구”에서 호모우시아의 의미를 첫째, 영원 한 출생으로서의 아들. 둘째, 창조주로서의 아들이라고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이 당시 ‘호모우시오스’의 개념은 니케아 교부들에게도 명료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된 쟁점들은 다음을 참고.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255-258. 여기서 그러한 쟁점들을 모두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논지를 벗어나는 일이다.
27)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tht. 이형기, 차종순 역. 기독교 사상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346-347.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28)
28)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in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s. Henry Wace and Philip Schaff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07). 54.
Ⅲ.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
1.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창조론과 인 간론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에서 창조와 타락은 구원과 내 적 일관성을 이루어 상응하기 때문이다.29)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를 보면, 아타나시우스 스스로가 말씀이 인간이 되신 것과 인간의 기원이 밀 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30)
아타나시우스의 인간론에서 가장 주목 해야 할 점은 바로 유한한 피조물의 가변성(mutability)에 대한 그의 강조 이다.
인간은 무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시 무로 돌아가려 는 경향이 있다.31)
이것은 타락 전의 아담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 선천적인 한계이다.
즉, 아타나시우스의 인간론에서 인류는 죄와 무관한 차원에서 이미 곤경에 처한 존재로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복(至福)을 위협 하는 것은 단지 죄 많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가변 적 본성이다.32)
29) Khaled Anatolios, Athanasius: The Coherence of his Thought (London: Routledge, 1998), 31-39.
30)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4-5.
31) Athanasius, Against the Heathen, 41.
32) Anatolios, Athanasius, 40-43.
하지만 이것은 창조의 불완전함이나 선하지 않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완성의 잠재력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33)
이렇게 죄책으로서의 죽음과 구별되는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본성적 죽음을 제시한 아타나시우스는 가변적 존재로서 인류의 이러한 선천적 결함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상쇄된다고 보았다.34)
오직 스스로 존재하고 불변하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존재’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소멸(무 로 돌아감)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데,35)
본질상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곤경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새겨주신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신 분의 이성적 능력을 나누어 주신 것으로,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의 형상 과 말씀의 형상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이미 우리는 그의 구 원론 안에서 ‘호모우시오스’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전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적 공리는, 불변자를 관조 하는 것이 가변자를 불변자로 만든다는 개념이다.
인간은 본래 무에서 창 조되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지녔지만, 하나님이 또한 인간 을 그분의 형상을 지닌 자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계속 깊이 묵상함으 로써 그 형상을 보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은 힘을 잃고, 썩지 않는 상태에 머물 수 있게 된다.36)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썩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말씀과의 연합에 따른 은혜로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이것은 인간이 창조될 때 지녔던 무죄함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37)
33) Peter Leithart, Athanasiu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1), 97.
34)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3.
35) Athanasius, Against the Heathen, 41.
36)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4.
37)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5.
2. 타락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렸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 지식과 함께 하는 존재도 잃어버렸 다.38)
즉 영혼의 신에 대한 망각이 인류의 파멸을 초래한 것이다.39)
그렇게 신을 망각한 인간은 신이 아닌 것들을 추구하고 숭배하며 악(비존재로 향 하는 경향)의 고통 가운데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40)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돌아선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지 못한 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신성한 말씀(로고스)에의 끊임없는 참여 를 통해 인간의 삶이 불멸하도록 설계하신 하나님의 계획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41)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 교부 중에는 다소 독특하게 죄를 사건이라기 보다는 상태로 강조하는 어거스틴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42)
38)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4; Against the Heathen. 2-3; 7. 아타나시우스는 죄의 원인을 두 가지로 보는데, 그것은 악마의 시기(질투)와 영혼의 하나님으로부터의 고의적 돌아섬이 다. Against the Heathen. 41에서 아타나시우스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인용하면서 선은 신의 본성 그 자체이며, 시기심은 선의 정반대라고 설명한다.
39) Athanasius, Against the Heathen, 7-8. 40) Athanasius, Against the Heathen, 23.
41) Thomas G. Weinandy, Athanasius: A Theological Introduction (Aldershot: Ashgate, 2007), 28-30.
42) Gerald Hiestand, “Not ‘just forgiven’: how Athanasius overcomes the under-realised eschaltology of evangelicalism,” Evangelical Quarterly 84.1(Jan. 2012), 47-66.
즉 어거스 틴과 같이 아타나시우스도 죄의 영향을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제럴드 하이스탠드(Gerald Hiestnad)는 아타나시우스의 죄 이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죄는 잘못된 방향의 예배이다. 아타나 시우스에게 죄란 신성을 관조함으로부터 돌아섬이며, 무한자가 아닌 유 한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는 우 상숭배는 죄의 매우 실제적인 형태인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자신이 예배 하는 것을 닮아간다는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적 공리 때문에 매우 중요한 요점이다.
둘째, 죄는 법적 저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죄로 인한 존재 론적 부패는 신적 금지에서 미리 예고된 진노가 실제로 드러나는 방식이 라고 여긴다.43)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점은 아타나시우스가 죄를 주 로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44)
아타나시우스에게 죄로 인한 타락은 인류 안에 있는 말씀의 형상이 타락하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비존재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회개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회개는 타락과 가변성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 를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45)
43) Gerald Hiestand, “Not ‘just forgiven,’” 52-53. 여기서 중요한 쟁점은 아타나시우스가 속죄의 필요성을 거룩하고 불변하는 명령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사실에 서 찾는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죄에 대한 신적 저주(죽음)는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성 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고 여긴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죄인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 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저주의 필연성이 하나님의 ‘거짓말 하실 수 없음’에서 온다고 보았 다.
하나님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죽음은 반드시 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 타나시우스와 개혁주의의 차이와 후대에 논의된 하나님의 ‘두 권능’에 대한 구분을 일견할 수 있지 만 이에 대한 논의는 본 연구의 범위가 아니다.
44)여기서 시급히 말해져야 하는 요점은,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본질적으로부패했다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여기서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부패했다는 칼빈의 입장 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것이 인간의 존재론적 부패를 향한 잠재적 경향을 현실화한 것이라고 본다.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11.
45)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7. 172 조직신학연구 제52권 (2026년)
이와 같이 아타나시우스의 사유에 법정적 요소가 결여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구원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은 바 로 존재론적인 타락이다. 그리고 그의 구원론에서 말씀의 성육신과 십자 가 그리고 부활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타락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3. 성육신, 십자가 그리고 부활
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은 인류 안에 담긴 말씀의 형상이 훼손되는 것 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중심성으로의 돌아섬은 비존재로의 전락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죄론에 상응하여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 역시 강력하게 존재론적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하나님이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취소하 셔서 인간이 범죄하고도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고 말한다. 하지만 마귀가 인간에게 저지른 속임수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 신 특별한 피조물이 무로 돌아간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에 어울리 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한계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6)
신성에 대한 관상이 가변적인 것을 불변하는 것으로 만든다는 공리에 따라,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이 인간 안에 있는 자신의 형상을 새롭게 하 여 인간이 다시 한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셨다고 말한다.47)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창조, 율법, 선지자)들로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인간은 그러한 빛을 사용할 수 없음을 계속해서 증명해 왔 다. 또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없다.
여 기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구원이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 상으로 재창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스스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성부와 말씀의 동일본질이 전제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재창조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사망과 부패를 제거하셔야 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염두에 두고 제정되었다고 말한다.48)
물론 그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오감으 로 인지할 수 있는 일들만 생각하는 수준으로 전락한 인간의 사고력을 위 해 공생애를 사시고 표적들을 보여주셨다.49)
46)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6.
47)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13.
48)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20.
49)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16.
그렇게 그분은 여러 행위들 로 자신의 신성을 입증하신 뒤에 이제 모두를 대신해 자신의 성전을 죽음 에 내어 주심으로써 모두를 위한 희생제사를 드리셨으니, 이는 인간이 죽 음을 상대로 모든 계산을 마치고 최초의 범죄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50) 그분은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사람을 멸망시키는 율법을 폐하셨다.51)
주님의 몸에서 율법의 힘이 다 소진되어서, 더 이상 그분의 친구들인 인류를 구속할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52)
이렇게 아타나 시우스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의미는 법적인 만족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 것은 더 깊은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첫 단계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궁 극적인 목적은 바로 부패를 멈추는 것이다.53)
그러므로 그는 부활이 십자 가의 열매라고 말한다.54)
아타나시우스에게 영적 부활은 단순히 구원의 혜택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어 부 활이라는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55)
그러므로 아타나시우스는 복음 의 진리성을 자신 있게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다양한 존재론적 갱신들의 모습들을 제시하고,56) 특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자들의 용기를 그러한 존재론적 갱신의 절정으로 제시한다.57)
50)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20. 여기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이 칼빈의 구 원론과 상응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51)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10.
52)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8.
53)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9.
54)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56.
55) Weinandy, Athanasius. 42-44.
56)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30.
57) Athanasius, Incarnation of the Word. 27.
이렇게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에서 해결되어야 할 인류의 곤경은 죄 책으로서의 죽음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부패가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극 복되도록 디자인되었던 첫 창조의 파괴였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수 그리 스도를 인류의 구원자로 선언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임과 동시에 만물을 재창조하실 하나님(요1:1)이 심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재창조)의 증거들은 바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존재론적 갱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타나시 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자 진정한 존재를 지닌 하나 님이심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것이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로 잘 표현 됨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Ⅳ. 아나타시우스와 호모우시오스
니케아 신조의 수호자라 불리는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에 있어서 창조 로부터 시작해서 타락에 이르는 구도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부활에 이르는 구도가 아름다운 대칭성과 일관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살펴보았 다.
이러한 구원론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구원론적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견지했다는 것은 널리 인식되어 왔지만, 그의 구원론의 전체적인 구도를 보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래서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호모우시오스’의 관점에서 아타나시우스 의 구원론을 온고(溫故)하며 우리가 지신(知新)해야 할 간단한 쟁점들을 제언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 온고(溫故)의 관점에서: 호모우시오스의 의미
아타나시우스의 관점에서 창조된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하거나 영원 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무로부터 창조되었기에 무로 돌아갈 가능성 을 담지하고 있는 가변자이다.
하지만 타락 이전에 이것은 잠재태로서 인 간을 하나님의 형상(말씀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처 음부터 상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하 나님을 관조함으로부터 자기 중심성으로 돌아섬으로써, 인간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인간은 존재론적 타락에 빠지게 되었다.
그 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ὁμοούσιος)이신 말씀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인간이 다시 한번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죽음 선언이 만족되면서도 율법 의 권능이 파하여지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그 어 떤 인간이나 천사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그 자체(ὁμοούσιος)이신 말 씀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 사역이었다.
이러한 고찰에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구원이 재창조이며,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분만 구원자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 점에서 우리가 동방 교회의 신격화(deification) 개념을 그대로 수용해야 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최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칼 빈의 사유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단초 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 다.
그것은 이 시대에 복음과 신학이 칭의와 성화의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문제제기(protest)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의의 전가에 따른 이신칭의와 실체적이나 물질적 연합이 아닌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연합을 믿는다.58)
그러나 칼빈의 구원론은 이보다 더 깊지 않은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상호 교환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 과의 연합’으로 본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59)
58) 문병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기독교 강요」에 개진된 칼빈의 이해의 고유성,” 「개혁논총」 39 (2016), 27-56.
59) 최성렬, “칼빈 신학 다시 읽기를 위한 제언으로서의 존 칼빈의 신학구조에 관한 고찰: 「기독교 강 요」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을 중심으로,” 「개혁논총」 70 (2024), 211-250.
또한 칼빈의 죽임과 살림의 신학(mortificaiton and vivification)이 아타나 시우스의 존재론적 부패와 갱신에 대한 강조와 결합될 수 있지 않을까?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행위를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신율법주의 를 분명하게 반대하면서도 법정적 칭의를 넘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 해 발생하는 존재론적 변화를 강조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60)
통전 적인 구원론의 관점에서 법정적 칭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믿음 의 도약을 이루는 것이 이 시대 복음주의의 사명인 것은 아닐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다루었던 삼위일체라는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어거스틴의 재치 있는 표현과도 같이 그것을 이해하려는 자는 분명 지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직사각형이 라는 2차원 도형으로 뫼비우스의 띠(Mobius strip)를 만들기 위해서는 3차 원으로 도약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원통이라는 3차원의 도형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겨지는 클라인의 병(Klein’s Bottle)61)을 3차원에서 그려 내려면 병의 어느 한 지점이 관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4차원에서는 그 렇지가 않다.
60) 류길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에 나타난 믿음과 행위의 관계: 구속사적 관점에 집중하여,” 「한국개혁신학」 86 (2025), 42-80.
61) 독일의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이 만든 초입방체. 원통형의 도형을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 가지 방식으로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도록 만든 것. 그러므로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다(동일하다).
비슷한 이유로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에는 역설적인 모습 으로 현시될 수밖에 없어서, 인간의 차원에서는 초월적인 삼위일체를 온 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그려내야만 할 것이다.
다만 우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 다는 겸손을 가지고서 말이다.
아리우스파에 맞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논의했던 니케아 공의회가 그 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해야 했던 때에는, 논리적으로 당연히 따라와야 했 던 하나님의 단일성의 구성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 하고 그 시대의 과업은 완성된 것이었다.
이후에 네오 아리안주의에 맞서 “한 본질, 세 위격”이라는 세련된 정식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게 되 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비는 온전히 이해된 것이 아니었다.
칼빈 역시 자신의 시대에 반대해야 했던 시대적 문제에 항거(protest)하며 칭의 의 법정적 성격을 강하게 확언했지만, 그의 신학(구원론)은 칭의보다 훨 씬 넓고 깊지 않은가?
어느 한 인간이 자신의 하나님 이해가 고정 불변함을 주장한다는 것은 3차원에서 클라인의 병을 온전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오류일 것이다.
칼빈 선생도 그런 오류를 범하려고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타나시우스가 시작했던 동일본질에 대 한 교회의 확고한 선언을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더 자세하게 완성해 냈던 것처럼,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시작된 빛나는 신앙의 유산을 이 시 대에 더 자세하게 완성해 낼 이 시대의 개혁자들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권면하지 않을까.
2. 지신(知新)의 관점에서: 호모우시오스의 함의에 관한 제언
마지막으로 필자는 호모우시오스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 는 것에 관한 작은 제언을 하나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와 칼빈 모두에게 빚진 것으로,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견해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본성의 형식적 구조로 이해하거나 창조주와의 특별한 관계 혹은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로 파악 하는 주요한 두 축이 있다.
이 중 개신교 정통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관계적 이해가 주를 이루었는데 여기서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해 가 아담의 타락 이후 그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황에 제한되 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우리가 클라인의 병과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 상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본성에 작용하는 물질적이거나 실체적인 요 소가 아니면서도 단순히 영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보다 실제적인 연합으 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연구자는 이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로 다른 존재들이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연합/공동체’로 정의해보고자 한다. 이것 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위격들께서 온전하게 하나를 이루는 삼위일체와 같이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좀 더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하나님과 자아와 타자라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온전하게 하나를 이루는 연합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공동체적인 존재로 지으셨음을 성 경은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이후의 차원에 서는 공동체로서만 경험되거나 사유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존재를 실제로 볼 수도 없고, 제대로 사유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 그것은 ‘상호내주’(περιχώρησις)로서 이루 어지는 연합이었다(요 17:4-5;21-22).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곧 남자와 여자로 만 드신 것(창 1:26)인데, 그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창 2:24)이라고 말씀하 시고, 사도 바울은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된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엡 5:31-32).
무엇이 그렇게도 큰 비 밀인가?
연구자는 이 비밀이 타락 이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 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제안하고자 한다.62)
62)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시라는 말씀도 새로운 빛을 얻게 된다.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존재, 즉 영이자 무한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육체를 가지고 유한한 존재이며 피조물인 인간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신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은 정확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 가 그리스도의 몸(엡1:23)이라는 말씀 역시 새로운 빛을 얻게 되는데, 몸은 이제 더이상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타락 이후의 세계에서 그것을 가장 근접하게 보여주는 유비 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속과 영화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 속사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으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구원론이 아타나시우스의 그것을 물려 받아 새롭게 하는 사유로 여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펼치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잘 알려진 대로, 삼 위일체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적어주셨다 면,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그 용어는 금세 파기되었을 것이다. 하 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풍부한 근거들을 마련해 두셨고, 그것들 을 통해 교회에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삼백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큰 비밀인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대칭 구조가 나타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금 지 명령 직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음을 가르쳐 주 신다(창2:18).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인간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돕는 배필을 지으시기 전에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타락 이전이 고 바벨 이전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담이 단순히 기표를 발화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소설가가 작품세계를 창조하는 것 에서 희미하게 볼 수 있듯이, 하나님과 아담이 한 몸과도 같이 실제적으 로 창조 사역을 완성해 갔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여자를 만드시는데, 아담은 그를 보자마자 “너 는 나다!”라고 외친다(창 2:23).
그리고 나서 성경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만 이해되기 어려운 가르침을 주신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말씀은 떠남(다 름)과 연합함(하나됨)이 공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둘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 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자 정확히 이에 대칭되는 현상들이 발생한다.
하나 님과 인간의 연합이 깨어져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으셔야 했으며, 여자를 보며 “너는 나!”라고 외쳤던 남자는 이제 여자를 삼인칭으로 호칭한다(창 3:12).
여기서 더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거나 관련 성경 구절에 관한 모든 주 석적 논의 사항을 다루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개론적으로 제언하는 데 만 족하고자 한다.63)
63) 이러한 관점은 이미 삼위일체론 영역에서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진 부분이지만, 본 논문의 독특한 논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상적인 개념보다 훨씬 더 실재적이고 신비한 관계로 보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다르지만, 삼위께서 누리셨던 실제적인 교제(περιχώρησις) 를 누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함의는 교회론과 종말론에 영 향을 미치며, 특히 전도와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 모든 성경의 가르침 들을 타락 이후의 관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너머의 차원으로 가 져가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맞이하 여 우리가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을 배경으로 온고(溫故)하여 본 호모우 시오스(ὁμοούσιος)의 함의(知新)이기 때문이다.
동일본질이란 타락 이 후의 인간 이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차원의 영역이 되어 버렸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은 신 비롭고 온전한 연합을 이루도록 지어졌었음을 성경이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이 가르쳐 주시는 지신(知新)이 무궁하기 때문에, 이 시대 복음주의 에 다시 한번 새로운 복음의 능력을 일깨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 대된다.
Ⅴ. 나가는 말
아타나시우스는 칼빈과 같이 조직적이고 정밀한 신학자였다기보다는 수많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뚝심 있게 견지했던 목회자 라고 평가하는 것이 어울려 보인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가 이 시대에 칼빈 의 신학을 새롭게 살피는 사유의 단초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 까?
교회의 역사상 첫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수호자로 여겨지는 아타나시 우스와 암울했던 중세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 개혁 신학을 시작했던 칼빈 의 사유를 연결시켜 21세기의 시대적 질문에 답해보는 것은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오묘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뫼비우스의 띠는 한 점에서 시작하여 띠의 중심선을 따라 가면 자신의 반대면을 지나 본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온다.
한 면과 반대면이 동일한 면 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띠의 가운데를 따라 자르면 띠가 둘로 나누 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네 번 꼬인 하나의 띠가 된다.
또 띠의 폭을 삼등 분 하는 평행한 두 줄로 띠를 자르면 이 때에는 두 개의 띠로 분리되는데, 하나는 동일한 길이의 뫼비우스의 띠가 되고, 다른 하나는 두 배로 긴,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또 서로 반대방향으로 꼬아서 만든 뫼비우스의 띠를 두 개 붙인 후, 그 중심선을 따라 자르면 서로 결합된 두 개의 하트가 된다. 신학의 역사가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불변하는 진리를 견지하기 위해 앞으로 곧게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리는 인간의 이성보다 더 높은 차원이라는 의미로 무한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가 예측하지 못 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불변하는 진리 위에 서서 꿋꿋이 앞으로 전진하되, 어느새 내가 서 있던 곳의 반대면에 도달하거나 혹여 또 다른 띠 위에 서게 되더라도 두려워하 거나 흔들리지 말고 곧게 진리를 추구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이러 한 모습이 뜻하지 않게 호모우시오스라는 새로움을 만났지만, 그것이 사 실은 내 안에 품고 있던 진리였다는 것을 발견하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니케아 신조를 수호해 내었던 아타나시우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인정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동방 교 회의 신학적 경향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는 것과 종교 개혁 신학이 서방 교회의 신학을 개혁하며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복음주의 신학과 니케아 신조는 뫼비우스의 두 면이자 한 면을 이룰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재창조라는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동일한 차원 에서는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을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 본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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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논문은 ‘니케아의 수호자’라 불리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의 신학과 니케아 신조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 개념 간의 내적 상관성을 고찰해 보고자 하 는 연구이다. 일반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 신조에서 유사본질파나 상이본질파들과의 치열한 대립 과정에서 여러 번의 귀향과 정치적 박해 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론의 관점에서 동일본질(ὁμοούσιος)을 견 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구원론이 동방 교회의 신화 (deification)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으로 인하여 그 것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본 연구는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이교도 반박」(Contra gentes)과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De incarnatione Verbi) 등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에 있어서 구원론의 구조를 고찰하고, 그러한 구원론 안에서 동일본질이 어떠한 의미와 함의들을 갖 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에서 발견된 동일본질의 함의를 통해 큰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는 21세기의 한국 교회에 새로운 통 찰을 줄 수 있는 구원론적 사유의 단초를 제언하고자 한다. 그 단초란 동 일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로서,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정통 신학의 구원론에 니케 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 개념을 신중하게 적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연구자는 구멍난 복음을 기우고, 시대를 새롭게 할 복 음의 능력이 한국 교회에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제어: 아타나시우스, 니케아 공의회, 동일본질, 호모우시오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Abstract
Reconsidering Homoousios(ὁμοούσιος) in Athanasius’s Soteriology: Meaning and Theological Implication
HyunWoo Cho (Assistant Professor, Korea Baptist Theological University Seminary, Systematic Theology)
This study seeks to examine the intrinsic correlation between the theology of Athanasius of Alexandria(296-373) and the concept of homoousios(ὁμοούσιος), which may rightly be called the core of the Nicene Creed. It is widely recognized that, despite repeated exiles and political persecutions incurred througout his life, Athanasius steadfastly maintained the confession of consubstantiality(ὁμοούσι ος) from the vantage point of soteriology. Yet, because of a unease with the way his soteriology issues into the Eastern Church’s notion of deification(theosis), the precise structure and content of that soteriology have not received proper attention. Focusing primarily on the Contra Gentes and De Incarnatione Verbi, this article reconsiders the soteriological architecture operative in Athanasius’s theology and, within that architecture, probes the meaning and implications of consubstantiality. On the basis of the implications thus uncovered, the study further proposes the lineaments of a soteriological reflection capable of offering fresh insight to the Korean church of the twenty-first century in its present moment of acute crisis. This point of departure represents a re-envisioning of the ‘Imago Trinitatis’ from a fresh perspective on consubstantiality. Specifically, it attempts a cautious application of the Nicene homoousios to the soteriological tenets of orthodox theology, characterized by its strict bifurcation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Through this inquiry, I sincerely hopes that God will mend the torn gospel and renew the Korean Church in our time.
[Key words: Athanasius, Council of Nicaea, Consubstantiality, Homoousios, Trinity, Image of God]
논문 투고일: 2026.02.24. 수정 투고일: 2026.04.05. 게재 확정일: 2026.04.06.
조직신학연구 제52권 (202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