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인간 이해와 종교 이해는 서로 얽혀 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가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결정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계몽주의 이후 근대 세계는 신과 인간의 전통적인 관계 이해를 벗어나 자율적 인간 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칸트는 그 대표적인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종교론이라 불리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에서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종교를 바라보는 틀을 제시 했고, 그 핵심에는 도덕이 있다.
1) Rel., 6:29. 본문에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종교론’으로, 각주에서는 약칭 (Rel.)과 학술 원판 전집의 ‘권수:쪽수’로 표기한다. 참고한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임마누엘 칸트/백종현 옮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서울: 아카넷, 2015); Immanuel Kant, Religion with the Boundaries of Mere Reason, trans. Allen Wood and George di Giovann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도덕을 통해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이 같은 기획에서 초월적 은총과 같은 신비적 요소들은 종교의 본질에서 주변부로 옮겨진다.
그러나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자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종교를 이성과 도덕 이상의 것 또는 그 이전의 것을 말할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면, 인간과 종교에 대한 칸트와는 다른 방식의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철학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그는 칸트의 종교론의 기본적인 구도에 동의하지만, 근본악과 희 망이라는 핵심 개념을 해석학적 관점으로 수정하여 이성과 도덕이라는 자율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칸트의 종교론을 확장시킨다.
칸트는 선험적 으로 도덕 법칙을 지닌 인간이 악을 준칙으로 택하는 것을 근본악의 불가 해성으로 본다.
선을 행하는 인간의 역량은 근본악의 불가해성 앞에서 무능력해진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선에의 소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금 도덕 법칙을 제일 준칙으로 택하게 만들 고, 인간은 그 법칙으로 말미암은 의무로 인해 근본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실천적 희망을 갖게 된다.
리쾨르는 근본악에 의해 무너진 선의 역량을 희망이 복원시키는 이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도덕 법칙과 의무 의 차원에서 그보다 앞서 있는 실존의 차원으로 옮긴다.
이것은 칸트의 근본악과 희망을 더 철저하게 사유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리쾨르 는 종교적 상징과 텍스트의 실제적인 힘을 강조하고, 종교적 희망이 지닌 타자성에 주목한다.
본 논문은 칸트의 종교론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근본악과 희망을 도덕 차원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 바라본 리쾨르에 주목하면 서, 인식론적 인간 이해에서 해석학적 인간 이해로의 전환이 자율에 갇힌 이성 종교를 넘어서는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칸트와 리쾨르를 비교한 연구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 둘의 종교 이해를 비교 연구한 사례는 드물다.2)
2) 다음을 참고. Brian Gregor, Ricoeur’s Hermeneutics of Religion: Rebirth of the Capab le Self (Lanham: Rowman & Littlefield, 2018), 79-96; Myung Su Yang, “La représentation religieuse chez Kant et la philosophie kérygmatique de la religion de Ricœur,” Études Ricœuriennes / Ricoeur Studies 3 (2012. 2); Rebecca K. Huskey, Paul Ricoeur on Hope: Expecting the Good (NewYork: Peter Lang, 2009), 23-26; Pamela Sue Anderson, Ricoeur and Kant: Philosophy of the Will (Atlanta: Scholars, 1993), 59-114.
특히 리쾨르가 칸트와는 다른 인간 이해를 토대로 종교 이해를 어떻게 확장하는지, 근대 인식론에서 현대의 해석학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두 학자의 인간 이해와 종교 이해의 상관관계를 추적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 로 II장에서는 칸트가 종교론에서 근본악과 희망을 인간의 도덕적 자율 성 안에 위치시키면서 이성 종교를 어떻게 논했는지 분석할 것이다.
III장 에서는 리쾨르가 칸트의 근본악을 실존적 차원에서 재정의하는 것을 다룬 후, 성서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그가 말하는 희망이 어떻게 구현되는 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성 에 열려 있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 이해가 지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II. 칸트의 이성 종교: 자율로 바라보는 근본악과 희망
칸트는 종교론에서 이성의 눈으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논하고자 한다.
이 같은 기획은 그의 이전 저서인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 판의 기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영혼불멸, 자유, 신 개념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성 이념으로 규정하고, 이론 이성이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이성의 한계를 지정했다.
한편 실천 이성비판에서는 한계로 지정했던 순수 이성의 영역을 요청(Postulat) 을 통해 도덕적 실천을 위한 보증으로 되찾아 온다.
종교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종교를 이성의 테두리 안으로 한정하고 도덕으로 종교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종교론이 지닌 독특성은 앞선 두 저작에서는 논하 지 않은 근본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인간 본성에 있는 악의 경향성을 더 깊이 분석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인간은 근본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을 행할 역량이 있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그 과정을 이끄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따라서 칸트의 종교론의 핵심에는 인간의 선의 역량을 무능력 하게 만드는 근본악과 이를 극복하게 하는 희망 개념이 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종교론에서 근본악과 희망 개념을 살펴보자.
1. 근본악
칸트는 악으로의 성벽(propensity)을 허약성(frailty), 불순성(im- purity), 악의성(depravity)이라는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 허약성은 도덕 법칙을 준칙으로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선의 동기가 경향성에 비해 약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한다는 로마서 7장의 바울의 탄식에 서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불순성은 동기들의 뒤섞임이다.
선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 동기가 온전히 도덕 법칙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법칙이 의무라는 이유로 인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혼합 되어 있다.
셋째, 악의성은 도덕 법칙이 아닌 다른 것을 준칙으로 채택하 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이것을 부패성이라 명한다.
이것은 또한 전도성 (perversity)이기도 한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도덕 법칙의 동기와 다른 동기 간의 우선순위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인간이 악하다 는 것은 바로 이 악의성을 가리킨다.3)
그렇다면 악한 준칙을 채택하는 인간의 이 같은 성벽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칸트는 악의 근거를 인간의 자유와 연결한다.
그에 의하면, 감성에서 기인한 것과 그로 인한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은 결코 악의 뿌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무관한 자연적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에게 도덕적 악이란 도덕 법칙이 아닌 것을 준칙으로 삼는 것이고, 이것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 가운데 이루어지기에 책임은 온전히 인간에게 귀속된다.4)
3) Rel., 6:32.
4) Ibid., 6:31.
한편 악은 인간 이성 자체가 부패해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이 도덕 법칙을 적극적으로 부정했다는 뜻인데, 칸트가 보기에 이성 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의 권위를 말살하고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5)
그렇기에 악으로의 성벽의 근거는 자유로운 선택과 도덕 법칙 사이에서 일어난다.6)
이 같은 악으로의 성벽, 곧 준칙의 전도성이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칸트는 바로 이것을 근본악이라 부른다. 근본악은 모든 준칙의 근거를 부패시키는 것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끊어낼 수 없는 자연 본성적 성벽이지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다.7)
이 같은 역설이 칸트의 근본악의 특성이다.
근본악의 역설적 성격은 그것의 불가해성(inexplicability)에 주목 하게 한다. 이것은 특히 근본악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도드라진다.
칸트는 시간적 근원으로는 근본악의 시초를 고찰할 수 없다고 본다.
도덕 적인 악이 세계 속 하나의 사건처럼 앞선 원인의 결과로 파악된다면, 그것은 자유롭게 행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 다.8)
5) Ibid., 6:35.
6) Ibid., 6:35.
7) Ibid., 6:37.
8) Ibid., 6:40.
따라서 근본악의 근원은 이성적 근원으로 고찰해야 한다. 칸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각의 악한 행위는 그 이성 근원을 찾아보면 마치 인간이 무죄의 상 태에서 직접 그에 빠진 것처럼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전의 처신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끼친 자연 원인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간에, 어쨌든 그의 행위는 자유롭고, 이 원인 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규정 받지 않으며, 그러므로 언제나 그의 의사의 근원적 사용으로 판정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9)
물론 악한 행위의 전후에는 다양한 맥락과 원인들이 있고, 그 사이에 인간은 끼어들어가 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시점에서는 자유로운 선택 으로 마치 처음 죄를 짓는 것처럼 준칙의 전도를 선택한다. 이것은 전적으 로 자유에 의한 것이고, 그렇기에 철저하게 인간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그러나 이 같은 근본악의 이성적 근원이 자유와 책임으로 전부 해명되지 는 않는다. 악한 성벽에서 기인한 악행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그 악한 준칙을 채택하게 만든 또 다른 악의 근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0)
칸트는 도덕 법칙이 인간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지킬 자유가 있다는 것에서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선의 소질을 말한다.11)
9) Ibid., 6:41.
10) Ibid., 6:43.
11) Ibid., 6:43.
하지 만 이 같은 선의 소질을 근원적으로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악이 인간에게 최초로 발생하게 된 경위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악의 불가해성을 본다. 칸트는 이 같은 불가해한 상황 을 성서 속에서 발견한다.
성서는 세계의 시작에서 악을 논하고는 있지 만, 그 기원을 인간 안에 두지 않고 뱀이라는 유혹자를 설정한다.
악이 유혹자를 통해 왔다는 것은 악의 시초에 놓인 불가해성을 보여준다.
2. 희망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칸트가 바로 이 지점, 곧 악의 불가해성을 논하는 곳에서 최초로 희망을 논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은 단지 유혹에 의해 악에 빠진 것으로, 그러므로 근 거에서(즉, 선으로의 최초의 소질까지에서)부터 부패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혹하는 영, 다시 말해 육의 유혹이 그의 죄를 완화시키는 것 으로 볼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개선 능력이 있 는 것으로 표상된다.
그래서 부패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직 도 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는 그가 벗어나 있는 선으로의 복 귀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다.12)
분명히 최초의 악행은 인간이 자유롭게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동시 에 그것은 뱀이라는 유혹자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이 같은 근본악의 근원에서 발견하는 불가해성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악을 행했음에도 불 구하고 그 근원적인 선의 소질까지 부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 다.13)
12) Ibid., 6:44.
13) Ibid., 6:44.
따라서 악은 근본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심정에는 더 근원적인 선의 소질이 남아 있고, 이것이 바로 선으로 복귀할 수 있는 희망이 된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선의 소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곧 선하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선해지는 것은 “선의 소질이 함유하고 있는 동기들 을 그의 준칙 안에 채용하느냐 않느냐”14)에 달려 있다.
즉, 칸트에게 희망 은 근원적 선의 소질을 지닌 것 자체가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실제로 선을 선택하는 의지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선의 소질에서 비롯된 “준칙들의 신성성(holiness)”15)을 채용하는 것을 인간 마음씨 안의 혁명이라 명한다.16)
이것은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기질의 변화를 통해 오는 것으로서, 성서가 말하는 새사람이 되는 것이며 거듭남, 새창조, 회심이다.
이와 같이 칸트는 단번의 회심을 통해 사유 방식에 일어나는 혁명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쁜 것에 서 좋은 것으로 끊임없이 전진하는”17) 좁은 길을 가는 연속적인 행위 속에서 선한 인간이 된다. 물론 근본악에 의해 무능력해진 선을 행하는 역량의 복원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적으로든 직접적인 의식을 통해서든, 이 변화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준칙의 주관적 제일 근거를 인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8)
그럼에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변화로 인도하는, 근본적으로 개선된 마음씨에 의해 그에게 제시되는 길에 자기의 힘을 사용해서 이를 것을 희망할 수 있어야 한다.”19)
14) Ibid., 6:44.
15) Ibid., 6:46.
16) Ibid., 6:47.
17) Ibid., 6:48.
18) Ibid., 6:51.
19) Ibid., 6:51.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희망의 가장 중요 한 점이 드러난다.
바로 희망의 동력이 ‘자기의 힘’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자기의 힘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실천적 역량이다.
이 힘은 마땅히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 법칙의 당위에서 오는데, 그것을 자신의 준칙 으로 자유롭게 선택하여 자신의 행실이 되는 지점에서만 선한 행위인지 아닌지 판정이 가능해진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칸트가 말하는 희망 은 선한 마음씨로의 전환이며, 그것은 선을 행하는 인간의 힘과 의지를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칸트가 말하는 종교적 희망은 철저하게 인간 안에 있는 선의 소질과 그것을 준칙으로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모름지기 종교에서 희망을 논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다한 한계 상황에 서, 인간 밖에서부터 오는 힘과 도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율을 강조 하는 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
칸트의 해결책은 제의를 바탕으로, 신의 은혜를 간구하는 종교와 선한 품행을 핵심으로 하는 도덕 적 종교의 희망을 구분하는 것이다.20)
20) Ibid., 6:51. 전자는 선한 인간이 되지 않아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더 나아가 신이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종교에서 인간은 선한 행위에는 전혀 신경 쓸 것이 없고 그저 신에게 간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 전력할 것을 가르친다.
이 두 가지 종교에서 희망은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
칸트가 주목하는 것은 후자이며, 거기서 희망은 조건 적이다.
즉, 보다 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각자는 자기의 힘이 미치는 한 최선을 다해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오직 인간은 그의 타 고난(선천적) 재능을 묻어두지 않을 때만, 그가 보다 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선으로의 근원적 소질을 이용했을 때만, 그의 능력 안에 는 없는 것이 보다 더 고위의 협력에 의하여 보충될 희망을 가질 수 있다.21)
칸트가 말하는 종교적 희망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확실히 주어진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선의 소질을 사용하여 선한 인간이 되도록 전력을 다해 전진해 나가는 자들만이 자신의 선을 행하는 역량이 한계에 도달한 그 지점에서 상위의 원조, 곧 신의 도움으로 보충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칸트는 그것 을 “원조를 받을 만한 품격(자격)”22)이라 말한다.
21) Ibid., 6:52.
22) Ibid., 6:52.
방점은 자신의 역량을 다 쏟아붓는다는 조건절에 있다. 칸트는 심지어 그 도움의 출처가 어디인 지 알 필요조차 없다고 말한다.
칸트에게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 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가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부분에 철저하게 한정 되어 있다
. 이 같은 칸트의 관점은 인간을 앎과 실천의 주체로 설정하고 주도권을 부여하고자 한 근대의 인식론을 반영한다.
선해야 한다는 우리 안의 명령을 듣고 도덕 법칙을 준칙으로 택하면,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비록 악의 성벽이 그 목적을 가로막고 훼방할지라도 우리의 역량의 범위 안에 있는 일이다.
그래서 칸트에게 선의 근원적 소질의 역량이 복원되는 것은 온전히 인간적인 힘에 달려 있다.
도움, 곧 은총은 자기에 게 소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이 무한한 도덕적 진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은총이 아니라 자율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칸트의 이러한 이성 종교 이해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 는 고귀한 주체를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희망의 힘과 그 범위를 과도하게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에게 근본악과 희망 사이의 운동은 오직 도덕적인 측면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의 도덕적 측면 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종교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 다.
인간 실존이 지니고 있는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 가 닿고, 존재론적인 변화를 일으킬 힘을 종교에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칸트의 이성 종교 이해가 불러일으킨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우리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 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III.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 이해: 존재 역량의 회복과 타자성의 희망23)
23) 이 장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조신준, “리쾨르의 ‘할 수 있는 인간(l’homme capable)’ 개념으로 본 자기 이해의 해석학적 탐구: 절대적 타자성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하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지 도교수: 김정형).
리쾨르는 칸트의 근본악과 희망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 나 근본악과 희망이 발생하는 장소를 재해석함으로써 보다 깊은 차원에 서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논하고자 한다.
리쾨르가 보기에 칸트가 표방한 이성 종교는 인간의 자율성에 치중한 나머지 종교를 도덕적 수행 능력 안에서만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 이해의 층위를 단순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의무주의와 주지주의에 갇히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이 같은 도덕 종교의 관점이 인간 실존과 종교의 역동적인 관계성을 제대로 담아낸 것인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리쾨르가 칸트의 근본악과 희망 개념을 어떻게 재해석하 는지 살펴보고, 이것을 바탕으로 칸트의 이성 종교가 직면한 한계를 극복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입증의 위기를 초래하는 근본악
먼저 리쾨르는 근본악이 미치는 층위를 칸트보다 더 심층에 두고자 한다.
칸트는 근본악의 불가해성이 인간의 도덕적 역량을 무능하게 만든 다고 주장했다.
칸트에게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도덕 법칙 을 준칙으로 선택하여 행동하는 지점에서 인간다움이 드러나기 때문에, 근본악은 바로 그 도덕적 실천의 역량을 무능하게 만드는 힘으로 규정된 다.
리쾨르는 칸트의 이 같은 접근을 수용하면서도 근본악이 미치는 힘의 범위를 칸트보다 훨씬 깊은 곳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리쾨르가 인간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도덕적 의무보다 앞서 있는 자기 이해(self-under standing)의 차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쾨르가 말하는 자기 이해란 무엇인가?
그는 이것을 입증 (attestation) 개념으로 설명한다.
입증은 자기(self)를 입증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라는 존재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리쾨르는 이 개념을 하이 데거에게서 빌려온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본래적 존재 가 능의 현존재적인 입증(Bezeugung)과 결단성”24)이라는 제목을 통해 본 래적 자기의 입증을 논한다.
하이데거에게 입증은 본래적인 자기로 존재할 수 있는지 여부와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보통 ‘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데, 상실된 자기를 되찾아 오는 것이 하이데거에게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를 입증하 는 것이다.25)
리쾨르는 실존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이 드러나는 방식이 입증이라 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가 이것을 인식이 아닌 존재로 풀면서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한다는 점을 경계한 다.26)
자기 이해에 존재론으로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안으로 곧장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다.
다시 말해 언어학이나 의미론과 같은 인식적인 부분이 이해의 존재론 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 점이 리쾨르의 자기 입증이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입증과 구별되는 점이다.
그렇다면 리쾨르가 말하는 입증을 통한 자기 이해는 무엇을 말하는 가?
리쾨르는 이것을 데카르트의 고양된 자아와 니체의 자아 해체 사이에 서 찾는다.
데카르트적 자아는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고 직접적인 확실성 을 갖는 고양된 코기토이지만, 니체는 그 확실성의 기반이 되는 자아가 허상임을 폭로한다.
그에게 자아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기에 부서진 코기토이다.27)
24) 마르틴 하이데거/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서울: 까치, 1998), 357-401, §54-60. 번역본에는 ‘증명’으로 번역했으나, 본 논문에서는 리쾨르의 개념과 연관성을 위해 ‘입증’으로 수정하였다.
25) 하이데거는 그 방법을 ‘양심의 부름’, ‘탓이 있음’, ‘결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앞의 책, 357-401.
26) 폴 리쾨르/양명수 옮김, 해석의 갈등 (파주: 한길사, 2001), 33.
27) Paul Ricoeur, Oneself as Another, trans. Kathleen Blame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21.
리쾨르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확고부동한 인식론적 자아를 허물어뜨리면서도 허상으로서의 자아에 맞서 자기(self)라는 것의 존재, 곧 있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것을 위한 리쾨르의 전략은 입증을 인식론적 확실성이 아닌 믿음 과 신뢰로 제시하는 것이다.28)
그러나 믿음과 신뢰라고 해서 입증이 인식 론적 지위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입증은 ‘~라고 생각한다’(I be lieve-that)로 표현되는 의견적인 믿음과는 달리 ‘나는 ~을 믿는다’(I be lieve-in)라는 형태로 드러난다.29)
이는 증언(testimony)이 증언하는 이 의 말에 믿음을 두는 것과 유사한 신뢰의 형태다.
물론 이 같은 형태의 자기 입증은 인식론적으로 허약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누구?”라는 인식 론적 질문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확신과 신뢰의 형태로 입증 된다는 그 자기(self)는 대체 ‘누구’인가?”라고 묻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답하게 되는데, 그 답변을 구성하는 담론, 문법 체계, 일상 언어 자체가 그것을 다의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 취약성이 의혹(suspicion)을 낳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의혹 앞에서 증언과 유사한 입증의 인식론적 지위가 드러난다.
리쾨르의 말을 빌리면,
“‘거짓’ 증언 없이는 ‘참된’ 증언도 없다. 더 신뢰할 만한 증언밖에는 거짓 증언에 대항할 것은 없으며, 더 믿을 만한 입증 외에는 의혹에 대항할 만한 것이 없다.”30)
28) Ibid.
29) Ibid.
30) Ibid., 22.
즉, 의혹에 대항하는 길은 더 믿을 만한 입증에 의지하 는 길뿐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리쾨르는 인식론적이고 실체적인 자기 (self) 증명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해석학적인 자기 입증을 제시한다.
이 믿음, 곧 입증의 구체적 형태는 자신의 행위 역량(capability), 즉 ‘할 수 있음’에 대한 신뢰다. 리쾨르는 이것을 말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 자신을 내러티브의 한 인물로 인식하는 능력, 혐의 제기에 “내가 여기 있다”(Me voici)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제시한다.
입증은 바로 이것 에 대한 ‘할 수 있음’을 신뢰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행동하고 고통 받는 자기 자신 됨에 대한 확신”31)이다.
이것은 외부의 인식론적이고 객관적인 보증에 대하여는 자신을 입증하는 믿음인 동시에 어떠한 의혹 보다 더 큰 신뢰인 것이다.32) 이제 리쾨르가 말하는 근본악과 자기 이해의 관계를 정리해 보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 입증의 핵심은 자기의 ‘할 수 있음’을 신뢰하 는 것이다.
그런데 리쾨르가 보기에 근본악이 지닌 불가해성은 바로 이 신뢰를 무너뜨린다.
칸트가 근본악의 불가해성이 도덕적 행위의 귀책성 (imputability)33)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면, 리쾨르는 그것이 자기 의 존재 역량에 대한 신뢰의 뿌리를 흔든다고 본다.
31) Ibid., 22.
32) Ibid., 23.
33) 이 단어는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성질을 뜻하는 것으로 ‘귀책성’이라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리쾨르는 칸트의 종교론을 해석함에 있어서 역량(capability) 개념을 중시하며 자기 이해를 존재 역량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귀속 혹은 전가를 뜻하는 ‘imputation’과 ‘-ability’의 형태로 역량의 형태를 지닌 ‘imputability’를 구 분하여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imputability는 자연스럽게 ‘capability’와 연관되어 칸트의 도덕 역량 개념을 존재 역량으로 확장하는 근거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Paul Ricoeur, “The Addressee of Religion: The Capable Human Being,” in Philosophical Anthrophology, eds. Johann Michel and Jérôme Porée, trans. David Pellauer (Malden: Polity Press, 2016), 271.
자기 스스로를 ‘할 수 있는 존재’로 믿는다는 양심의 증언은 악의 기원을 알 수 없다는 고백 앞에서 무능력해진다.34)
근본악과 더불어 우리의 행동 역량의 진실성과 존재론적 구성 요소 를 긍정하게 하는 입증은 결함을 드러내게 된다. 악의 근본성은 귀책 성(imputability)과 입증 모두를 동시에 심연에 빠트린다.35)
그 불가해성을 인정하면서, 근본악이 우리가 입증이라 부른 양심의 증언을 벗어나 있음을 고백한다. 악의 기원의 불가해성은 입증에 있 어 하나의 위기를 구성한다.36)
34) Ibid., 286.
35) Ibid., 280.
36) Ibid., 286.
이처럼 리쾨르에게 근본악은 도덕 법칙을 수행하는 역량만이 아니 라 자기 존재를 입증하는 역량까지 심연에 빠뜨린다.
이것은 칸트의 근본 악을 더 철저히 사유함으로써 인간됨을 의무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발견 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 같은 리쾨르의 기획을 통해 우리는, 무능력해진 인간의 역량에 종교적 희망이 영향을 미치는 지점은 칸트가 생각한 도덕 적 영역보다 더 깊은 인간의 자기 이해의 층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 존재 역량의 회복으로서의 희망
리쾨르는 종교적 희망을 도덕적 의무를 이행한 자격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무 이전의 차원에서 인간 존재 역량의 회복과 연결시킨다.
칸트 는 근본악에 주목하면서도 선에의 소질이 그것보다 더 근원적임을 주장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선을 행하는 인간의 역량을 복원할 희망의 근거라 보았다.
칸트에게 선은 도덕 법칙을 행하는 것이며, 선을 행할 역량을 회복하는 것도 도덕 법칙을 다시 제일 준칙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해야 한다는 명령이 근원적으로 우리 안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악의 성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리쾨르는 선의 소질이 더 근원적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역량을 회복할 수 있다는 칸트의 논리 구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놓여 있는 칸트의 사유, 곧 악은 오롯이 인간의 책임이며 역량의 회복도 도덕 법칙을 자율적으로 선택함 에 있다는 생각이 도덕주의와 주의주의로 향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 같은 논리에서는 인간과 종교 사이의 논의가 의무의 윤리에 갇혀서 풍부해질 수 없는 까닭이다.37)
37) 양명수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합리적 반성을 넘어 죄의 비극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도덕주의로 인간을 정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악의 문제 는 모두 인간의 책임이라는 도덕주의에는 교만이 숨겨져 있다. 리쾨르의 해석학 은 상징 해석학이고 신화의 풍부함을 살려서 근대의 주체를 수정하고자 한다. 신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 종교가 윤리로 환원되는 것을 막는다. 주의주의적 해석 을 넘어, 인간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의지적 차원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양명수,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2017), 142.
리쾨르는 칸트의 윤리와는 다른 방식의 윤리가 세워져야 종교와 믿음의 관계를 제대로 논할 수 있다고본다.
그것은 윤리를 의무 이전의 실존적 지평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다. 그것은 “도덕 신을 부수고, 말씀으로 탈윤리를 세우는 윤리”38)이다.
리쾨르는 그 같은 새로운 윤리를 “존재하고자 하는(the desire to be) 욕 망” 또는 “존재하려는 노력(the effort to exist)의 윤리”라 부른다.39)
칸트 가 도덕 법칙에서 선을 찾았다면, 리쾨르에게 선의 소질은 도덕 법칙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리쾨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통해 이러한 전환을 가져오 고자 한다. 스피노자의 윤리는 당위와 연결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사람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행복과 자유의 상태로 가 는 과정 전체를 윤리라고 일컬었다.
그런 과정은 형식적인 의무 원리 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목적과 가치를 직관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코나투스, 곧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노력은 우리 자신을 존재 의 유한한 존재 방식인 실존 안에 두는 것이다.40)
38) 리쾨르, 해석의 갈등, 497.
39) 앞의 책, 497.
40) 앞의 책, 497.
스피노자는 실체, 곧 신을 단일하고 영원하며 무한한 것으로 상정하 고, 개체는 그 실체의 한 양태로 본다. 그렇기에 스피노자에게는 개별 대상인 자신이나 주변 사물을 더 잘 이해할수록 그 배후의 전체 질서가 되는 실체, 곧 신을 더 온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가 윤리와 대조하여 도덕이라 부르는 당위와 의무는 오히려 원리와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이처럼 이성적 이해를 통해 개체가 자신의 내재적 역량과 활동 능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의 핵심이 다. 따라서 리쾨르가 의무 이전의 지평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윤리는 “존 재하기를 긍정하는 힘”41)이다.
그 노력과 욕망이 실존을 지속하게 만든 다. 인간의 자기 이해는 그 같은 실존의 지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 고 선에의 소질로 인해 회복되는 인간의 역량도 도덕 법칙을 중심으로 한 의무 차원이 아니라 존재 욕망과 노력이라는 실존 차원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리쾨르는 의무 이전의 지평에 해당하는 실존 차원에서 희망을 어떻게 재정의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리쾨르가 칸트의 ‘요청된 자유’를 어떻게 재해석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실천 이성비판에서 덕과 행복의 조화를 말하는 최고선 개념을 제시한 후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 ‘영혼불멸’, ‘신의 현존’, ‘자유’라는 세 가지 개념을 요청(Postulat)한다.
이 세 가지는 이론이성에서 선험적 환상으로 규정된 것들로서 규제적 역할에 머물렀으나, 실천이성의 요청과 연관되면서 실천적 실재성을 획득한다. 리쾨르는 자유가 세 가지 요청의 핵심이라 말하는데, 그것은 이 자유가 희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42)
41) 앞의 책, 497.
42) 이와는 달리 영혼불멸과 신의 현존을 중심으로 칸트의 이성 종교에서의 희망을 분석한 글은 다음을 참고. 정제기, “칸트의 도덕신학에서 도덕적 희망의 의미” 「한국조직신학논총」 79 (2025. 6): 249-277.
실천이성 의 변증론에서 자유는 예지계의 법칙이 도덕 법칙으로 드러나기 위한 조건으로 요청된다. 이것은 주체가 스스로 도덕 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다.43)
리쾨르는 이 요청된 자유는 실제적인 효력이 있는 자유이며, ‘할 수 있는’ 자유이고, 선한 의지가 될 수 있는 자유, 따라서 칸트의 말처럼 “객관적 실재성”44)을 지닌다고 말한다.
한편 이 같은 요청된 자유는 어딘가에 속하고 참여하는 자유이기도 하다. 리쾨르는 이것을 도덕형이상학 정초의 세 번째 정언명령인 전체 성의 원리, 곧 목적의 나라와 연결한다.
요청된 자유를 통해 도덕 법칙을 행하는 이성적 존재자들은 필연적으로 보편성과 인격성의 원리를 따르 기 때문에, 사적 목적이 제거되고 오직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목적 전체, 즉 목적의 나라”45)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43) KpV., 5:132. 본 논문에서 실천이성비판은 약칭(KpV.)과 학술 원판 전집의 ‘권 수:쪽수’로 표기한다. 참고한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임마누엘 칸트/김석수 ․ 김종 국 옮김, 도덕형이상학 정초 / 실천이성비판 (파주: 한길사, 2019).
44) KpV., 5:132.
45) GMS., 4:433. 본 논문에서 도덕형이상학 정초는 약칭(GMS.)과 학술 원판 전집의 ‘권수:쪽수’로 표기한다. 참고한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 / 실천이성비판.
따라서 요청된 자유는 한 사람이 실제적으로 도덕 법칙의 원인이 되어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인 동시에 목적의 나라라는 자유들의 체계에 속하는 것이다.
리쾨르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의 역량이 우리의 의지와 같아지는 것, 이 지극한 서원에 맞 게 존재하는 것, 그것은 오직 요청될 수 있을 뿐이다. 요청된 자유는 결국 여러 자유 사이에서 자유로서 존재하는 자유를 가리킨다. 나는 이 요청된 자유가 바로 희망에 따른 자유라고 생각한다.46)
여기서 리쾨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한 ‘요청된 자유’의 의미에서 벗어난다.
“자유들 사이에서 자유로서 존재하는 자유”는 더 이상 실천이성의 틀 안에 머물지 않는다.
리쾨르에게 이것은 실천적 명제 를 넘어서서 존재 방식 또는 존재 양태를 뜻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리쾨르는 칸트가 실천이성의 요청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이미 거하는 더 높고 불변하는 질서 속에서 “우리의 현존을 지속하라고”47) 특정 지침들을 지시한다는 대목을 자기 존재의 차원까지 확장된 것으로 읽는다.
이 같은 전환이 가능한 이유는 리쾨르가 요청된 자유를 앞서 다룬 입증 개념과 연결하기 때문이다.
입증이 ‘할 수 있음’에 대한 신뢰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라면, 요청된 자유, 곧 희망에 따른 자유는 도덕적 요청을 넘어서서 ‘할 수 있는 인간’(capable human being)이라는 인간 존재의 양태가 된다.48)
46) 리쾨르, 해석의 갈등, 464. 번역을 일부분 수정하였음.
47) KpV., 5:108.
48) 여기서 존재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와 현실태의 존재 론을 말한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역동적 존재론을 차용하여 서양 철학 의 오랜 전통인 존재를 실체적 ․ 고정적으로 보는 사조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 난 존재를 해체하는 사조 사이를 매개하고자 한다. 리쾨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재해석하는 것은 다음을 참고. Ricoeur, Oneself as Another, 304.
칸트의 희망이 도덕적 의무를 다한 자격으로 기대하는 것이라면, 리쾨르의 희망은 손상된 인간의 존재 역량을 회복하 는 것, 곧 자기 이해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
종교는 인간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비의지까지 포함한 인간 실존을 재생시킨다.49)
그런 의미에서 리쾨르는 근본악으로 인해 자기 입증(self-attestation)이 무능력해지고 난 후 그 입증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 말한다.50)
49) 브라이언 그레고르(Brian Gregor)는 리쾨르의 종교론은 종교 해석학이며, 그것은 종교가 인간의 능동적 핵심인 역량을 해방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기’(capable self)의 재탄생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 말한다. Gregor, Ricoeur’s Hermeneutics of Religion, 24-25.
50) Ricoeur, “The Addressee of Religion,” 286.
3. 텍스트를 매개로 한 희망의 구현
마지막으로 칸트를 재해석하면서 리쾨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희 망은 성서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주체의 독백적인 자율성을 넘어서서 타자성에 자신을 개방하고 시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기 존재를 변혁함에 있다.
칸트와 리쾨르의 희망의 차이는 단지 그 희망이 작동하는 지평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원적인 차이는 타자성에 대한 이해에 있다.
리쾨르 가 근본악과 희망을 칸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논할 수 있었던 것은 타자성에 대한 해석학적 개방성 때문이다.
리쾨르는 칸트의 종교론에 “종교적 상상력”51)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칸트가 종교적 상징이 지닌 힘을 종교의 핵심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칸트는 종교론 제2 논고에서 신에게 흡족한 인간성 이념으로서의 그리스도 표상을 논한다.
그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도덕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52)
그런데 리쾨르는 칸트가 종교론에서 교회의 권위적 인 면모를 비판하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타자성을 간과했다고 평가한다. 칸트는 그리스도 표상이 인간 이성의 핵심에 원형으로 존재한다고 했지 만, 리쾨르는 이 표상의 실질적인 효력이 타자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반박 한다.53)
그리스도 표상이 담지하고 있는 수동성과 타자성이야말로 단순 한 도덕적 개선과 종교적 희망을 구분해 주는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상징은 도덕적 실천의 모델을 넘어 우리의 상상력을 매개로 코나 투스 차원의 존재 양태에 “실제적인 효력”54)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리쾨르가 칸트의 종교론의 근간에 있는 자율을 비판하는 근거다. 물론 칸트도 종교론에서 외부의 원조로서의 타자성을 언급하기 는 한다. 그러나 그 핵심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의 역량 바깥에서 오는 무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율의 연장선에 있다. 리쾨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가 주체의 의지가 해방되는 과정에 담긴 역설적인 성격 에 주목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55)
51) Paul Ricoeur, Figuring the Sacred: Religion, Narrative, and Imagination, ed. Mark I. Wallace, trans. David Pellauer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87.
52) Rel., 6:62.
53) Ricoeur, Figuring the Sacred, 87.
54) Ibid., 88.
55) Ricoeur, “The Addressee of Religion,” 284.
타자성의 원조와 자기성의 찬동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역설적으로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유의 힘과 의지의 힘만으로는 근본악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극심한 타자성의 순간에도 자기의 찬동하는 힘은 남아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것을 인식했음에도 자율로 방향을 틀었지만,
리쾨르는 자기성 과 타자성의 역설을 종교적 희망의 본질적 구조로 본다.
이처럼 리쾨르는 종교적 상징의 힘과 그것을 매개로 한 타자성 모두 를 보전하고자 한다.
리쾨르가 말한 종교적 희망은 이 양극의 운동 속에서 근본악을 통해 무능해진 인간의 존재 역량을 회복시킨다.
그렇다면 이 회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것을 우리는 ‘텍스트의 사물(thing)’ 또는 ‘텍스트의 세계’라는 개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리쾨르는 이 개념에서 일반 해석학과 성서 해석학의 관계가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한 다.
즉, 성서라는 특수한 종교적 텍스트의 해석학이 일반 해석학의 범주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주도권이 독자가 아닌 텍스트 에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의 사물은 성서의 독자가 자신의 실존적 상황으 로 텍스트를 환원하여 성급하게 흡수하는 것을 막아준다.
해석학의 최우선적 과제는 독자에게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 라 성서 텍스트의 ‘사물’인 존재의 세계가 열리게 하는 것이다.
성서 언어가 말하는 새로운 세계, 새언약, 하나님 나라, 거듭남과 같은 세 계에 대한 제안은 감정, 기질, 믿음, 불신앙 너머에 위치한다.
이러한 것들은 확실히 우리를 향해 텍스트 앞에서 열리는 세계들이지만, 텍 스트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텍스트에 의해 투사된 새로운 존재의 ‘객관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56)
56) Paul Ricoeur, From Text to Action: Essays in Hermeneutics II, Trans. Kathleen Blamey and John B. Thompson (London: Athlone Press, 1991), 95-96.
텍스트의 사물은 독자가 저자의 심리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것을 중단하고 텍스트가 말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장치다. 텍스트의 사 물, 곧 텍스트의 세계는 원저자의 심리적 의도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 곧 담론의 형식과 구조를 매개로 하여 드러나는 성서의 세계를 뜻한다.57)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이기에 다층적인 의미 구조를 지닌다. 창조를 말하기에 우주적이며, 백성이 있기에 공동체적이 다.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한 민족을 중심으로 펼쳐지기에 역사 문화 적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말하기에 인격적이기도 하 다.58) 이처럼 종교적 텍스트의 시학적 차원을 통해 열리게 되는 새로운 자기 이해의 가능성이 바로 종교가 ‘할 수 있는 인간’의 실존을 변혁시키 고 존재 역량을 회복시키는 동력이다. 이 같은 자기 이해의 가능성은 종교 텍스트, 곧 성서를 통해서 고유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서 일상 적 현실 안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현실이다. 리쾨르는 이것을 가능성의 현실이라 부른다.59) 신학적인 언어로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라는 의미다. 말하 자면 이 말은 우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불러낸다. 그 가능성은 우 리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이 나라의 바로 그 의미에서 기인하는 것이 다.60) 57) Ibid., 96. 58) Ibid. 59) Ibid., 96-97. 60) Ibid., 97. 조신준 | 이성 종교를 넘어서 341 성서를 통한 이 같은 자기 이해의 고유한 가능성은 현재 우리 논의에 서 매우 중요하다.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자기 긍정이 근본악을 통해 왜곡되고 무능력해졌을 때,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바로 성서 텍스트 의 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나의 통제를 벗어난 텍스트의 세계로부터 오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 사건’과 연결된 담론이 기 때문에 성서의 고유한 담론이 된다.61)
이처럼 성서의 고유한 세계가 펼쳐내는 존재의 힘 그리고 그것을 통해 경험하는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 성이 발견되는 이것이 바로 리쾨르가 말하는 희망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도덕적 의무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칸트의 인간 이해로는 이 희망이 일으 키는 변화를 담아낼 수 없다. 칸트의 자율적 주체는 고결하지만 “독백 적”(monological)62)이다.
한편 리쾨르는 성서 해석의 시학적 차원을 논하면서 상상력의 매개 를 통해 텍스트의 사물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적극적인 차원 을 말한다.63)
앞에서 리쾨르가 칸트의 “적극적인 것으로 간주된(요청된) 자유”64)를 존재 양태로 재해석한 것을 여기에도 접목시킬 수 있다.
61) Ibid., 97.
62) Ricoeur, “The Addressee of Religion,” 272.
63) Ricoeur, From Text to Action, 152.
64) KpV., 5:132.
이것 은 가다머가 말한 ‘놀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심각한 태도 안에 갇혀 있던 시야를 놀이가 해방시키듯이, 새로운 가능성을 해방시켜 현실의 시야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주체의 엄격한 도덕적 관점이 제한하고 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변형의 가능성이 일어난다.65)
이것은 시학 적 상상력이 이성과 의지보다 앞서는 존재 욕망, 존재 노력과 관련되어 있음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상상적 변용, 놀이, 변형 등의 표현들은 모두 어떤 근본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곧, 이 같은 새로운 존재가 내 안에서 최초로 형성되는 곳 은 다름 아닌 상상력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여기서 의지가 아니라 상 상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에 의 해 포착되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힘이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 는 힘에 선행하기 때문이다.66)
텍스트의 사물에 응답하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서 텍스트를 매개로 변화되는 실존을 말할 때 리쾨르는 의지를 그 동력으로 삼지 않는다.
의지를 통해 변화를 결단하기 이전에 상상력을 통하여 존재 하고자 하는 욕망의 지평에 어떤 힘이 작용한다.
도덕적 실천을 결정하여 선택하기 이전에 텍스트를 매개로 상상력의 차원에서 어떤 ‘불러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이것은 의지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기성 질서 와 고착된 세계를 재형성하게 하는 “해방의 상징들”67)이 존재 욕망과 존재 노력 차원에 주어진다.
65) Ricoeur, From Text to Action, 152.
66) Ibid.
67) Ibid.
그러나 이렇게 주어지는 타자성은 어디까지 나 나의 사유라는 주관성 속에서, 나의 찬동을 통해 일어난다.
그렇기에 해방의 타자성과 응답의 자기성이 역설적으로 공존한다. 이렇듯 무능력해진 입증의 자리에서 상징이 희망의 언어를 제공하 고,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타자성이 존재 역량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리쾨르의 종교적 희망을 구성한다. 이것이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 이해가 칸트의 이성 종교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IV. 나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근본악과 희망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칸트의 이성 종교와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 이해를 살펴보았다.
칸트는 근본악 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인간 존재의 깊은 죄성을 철학적으로 고발했으며, 희망을 통해 선의 역량이 복원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제시했다.
이 과정 에서 그는 악의 책임을 철저하게 인간의 자유에 귀속시켰으며, 선을 행하 는 역량의 회복 역시 자율적 의지 안에서 찾았다. 그것은 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 위치시키려는 근대적 기획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종교철학을 바탕으로 이 같은 이성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리쾨르는 칸트의 기획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인간과 종교 사이의 관계적 역동성을 축소시킨다고 보았다.
리쾨르에게 근본악은 도덕적 역량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입증하는 역량, 곧 ‘할 수 있음’에 대한 신뢰 자체를 심연에 빠트리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악이 깊어질수록 희망도 더 깊어진다.
희망은 주체의 독백적인 결단이 아니라 텍스트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손상된 입증이라는 존재 역량을 회복시키는 힘이다.
성서 텍스트가 열어 주는 새로운 존재 가능성이 시학적 상상력을 통해 존재 욕망과 존재 노력의 지평에 닿을 때, 실존에 변화가 일어난다.
해방의 타자성과 응답의 자기성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이 지점이 칸트의 이성 종교가 도달하지 못한 곳이며, 여기서 리쾨르는 인간과 종교에 대한 인식 론적 이해를 넘어 해석학적 이해로 나아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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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본 논문은 칸트의 종교론에 제시된 근본악과 희망 개념을 리쾨르의 해 석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근대적 이성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실존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종교철학적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칸트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근본악의 불가해성으로 인해 선 을 행하는 역량이 무능력에 빠지지만, 더 근원적인 선에의 소질에 근거 한 희망을 통해 그것이 복원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 종 교적 이해는 인간을 의무 차원에 한정함으로써 종교적 텍스트와 상징이 실존에 미치는 힘을 충분히 담지는 못한다. 리쾨르는 칸트의 논리 구조 를 수용하면서도 근본악이 영향을 끼치는 장소를 자기 이해, 곧 입증의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입증은 자신의 ‘할 수 있음’, 곧 역량에 대한 신뢰 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인데, 리쾨르에게는 근본악의 불가해성이 이 신뢰 자체를 심연에 빠트린다. 리쾨르는 이 입증의 위기 이후 그 자리 를 이어받는 것이 희망이라 말하는데, 그 희망은 손상된 존재 역량이 종 교적 상징과 텍스트를 통해 회복되는 것이다. 그는 칸트의 철학에 종교 적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 자기성의 찬동과 타자성의 원조가 상호작용하는 것이 종교적 희망의 본질적 구조라 말한다. 그리고 이 지 점에서 리쾨르는 인간과 종교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를 넘어 해석학적 이해로 나아간다.
주제어 ‖ 근본악, 희망, 입증, 역량, 할 수 있는 인간
Abstract
Beyond Rational Religion: Focusing on Ricoeur’s Reinterpretation of Kant’s Radical Evil and Hope
Jo, Shin-June(Ph.D. Researcher Institute of Christianity and Korean Culture Seoul, Korea )
This paper proposes a religious philosophical model for the relation ship between human existence and religion by reinterpreting the con cepts of radical evil and hope in Kant’s “Religion with the Boundaries of Mere Reason” through Paul Ricoeur’s hermeneutical perspective. This study aims to overcome the limitations of modern rational religion. According to Kant, while the human capacity to do good falls into a state of impotence due to the inexplicability of radical evil, it can be restored though hope grounded in a more fundamental predisposition to the good. However, this rational religious understanding remains limited to the dimension of moral duty, failing to fully account for the transformative power that religious texts and symbols exert on hu man existence. While adopting Kant’s logical structure, Ricoeur ex 조신준 | 이성 종교를 넘어서 349 pands the locus of radical evil’s influence to the dimension of self un derstanding, specifically, “attestation.” Attestation is the confirmation of one’s own existence as a trust in one’s “capability.” For Ricoeur, the inex plicability of radical evil plunges this very trust into an abyss. Ricoeur posits that hope succeeds this crisis of attestation; it is through religious symbols and texts that the damaged capacity for existence is restored. Criticizing Kant’s philosophy for its lack of religious imagination, Ricoeur argues that the essential structure of religious hope lies in the interaction between the approbation of selfhood and the aid of alterity. At this point, Ricoeur moves beyond an epistemological un derstanding of humanity and religion toward a hermenetical one.
Keywords ‖ Radical Evil, Hope, Attestation, Capability, Capable Human Being ∙
투고접수일: 2026년 05월 08일 ∙ 심사(수정)일: 2026년 05월 15일 ∙ 게재확정일: 2026년 05월 31일
한국조직신학논총 제83집 (2026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