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는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과 부흥을 일구 었으나,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했던 국가적 과제는 사회 전반과 구성원들에게 성과 지향적인 ‘아비투스(habitus)’를 각인시키는 결과를 초 래하였다.
이에 따라 개인은 집단의 목적 달성에 이바지하는 기능적 존재 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 었다.
그 결과 존재 자체보다는 능력과 기여도에 따라 ‘계량화된 실존 (quantified existence)’으로 전락하는 실존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단순 히 숫자로 자신을 평가하는 수치화된 자기(quantified self)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마저 성과 수치로 치환되어 버린 깊은 존재론적 위기를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현대인들은 진정한 자기실현이 아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이른바 ‘존재 증명 사업’에 내몰리고 있다.
한병철 이 진단한 바와 같이,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의 개인은 외부의 명령에 억압당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자유롭게 실현하려는 능동적 주체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 유가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세우는 강박적 모순에 직면해 있다.1
이러한 모순에 갇힌 개인은 이상적 자기상의 실현을 목적으로 냉혹한 내적 시스템을 구축하며,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 분열적 삶을 살 아간다.
이는 호나이(Karen Horney)가 명명한, 실현 불가능한 완벽함을 추 구하는 ‘당위의 폭정(tyranny of shoulds)’이라는 강박적 심리로 전락하는 과정이다.2
신경과학적으로 이러한 상태는 뇌의 휴지기에 활성화되는 불이행방식망의 과활성화를 초래하며, 이는 과거 사건에 대한 후회와 미래 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을 반복적으로 반추하게 만든다.
여기에 뇌의 좌 반구 통역사가 개입하여 “너는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했으니 무가치한 존 재야.”라는 파괴적 서사를 덧씌움으로써 실존적 우울을 고착시킨다.3
1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2), 23-29.
2 김병석, 『카렌 호나이의 분석 정신』 (서울: 하나의학사, 2015), 35-39.
3 루이스 코졸리노, 『정신치료의 신경과학: 사회적 뇌의 치유』, 이영호·강철민 옮김 (서울: 학지사, 2018), 128-130; 마이클 가자니가, 『뇌로부터의 자유』, 박인균 옮김 (서울: 추수밭, 2012), 126-130.
이러 한 측면에서 우울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깊숙이 침투한 자기 가치감 의 붕괴와 존재 의미의 상실을 동반하는 실존적 위기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우울의 기저에 흐르는 신경과학적 기제와 정신역동적 구조를 규명하고, 이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인간관의 관점에 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성과 중심의 외적 압박과 자기 증명의 내적 강박에 신음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영혼돌봄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 연구의 범위는 성과 중심 사회에서 경험되는 ‘자기 존재 증명’이라 는 실존적 위기와 연관된 우울의 유형을 다룬다.
따라서 임상적으로 중증 주요우울장애나 양극성 장애와 같은 정신의학적 진단이 우선되는 경우는 본 연구의 직접적 대상에서 제외된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는 맥윌리엄스 (Nancy McWilliams)의 임상적 통찰을 신학적 자기 이해의 관점에서 재조명 하고, 뇌과학의 발견을 인간을 ‘몸과 영혼의 통전적 존재’로 이해하는 신학 적 인간론과 접목함으로써 심리학과 신학의 통합을 시도한다. 본 연구가 다루는 주제는 다음 네 영역의 선행 연구들과 연관된다.
첫 째, 성과사회론 영역에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현대인들의 자기 착취적 강박을 진단하였으나, 그 논의는 사회철학적 비평에 머물러 신경생물학적 기제와 신학적 인간관에 대한 통합적 응답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둘째, 우 울의 신경과학·정신역동 연구 영역에서 맥윌리엄스의 임상적 분류와 신경 학자들의 연구는 우울의 양상을 정교하게 규명해 왔으나, 사회구조적 압 박과 신학적 인간 이해를 이 분석에 통합하는 작업은 충분하지 않았다.
셋 째, 기독교 상담과 신학적 인간론 연구 영역에서 뇌과학적 자아와 신학적 자아의 통섭을 모색하는 선행 연구가 있었으나,4 자아 개념의 일반적 비교 에 머물러 ‘성과사회의 우울’이라는 구체적 임상 현상에 대한 적용은 후속 과제로 남아 있었다.
4 유경동, “뇌 과학에서의 자아와 신학적 자아 -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자아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기 독교신학논총」 100 (2016), 243-246.
넷째, 한국교회 현장 연구 영역에서 한국교회 문화가 성과사회의 우울을 어떻게 강화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아직 본격화 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이 네 영역의 한계를 종합적으로 극복 하기 위해, 신경과학·정신역동·성경적 인간관·한국 교회 현장이라는 네 지 평을 ‘하나님 형상과 존재론적 전향’이라는 통합 축 안에서 비판적으로 상 관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다학제간 통합은 뇌과학적 자아와 신학적 자아 의 통섭을 모색한 한국 신학계의 선행 연구를 계승하되, 자아 개념의 일반 적 비교를 넘어 ‘성과사회의 우울’이라는 구체적 임상 현상에 적용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방법론적으로 본 연구는 돈 브라우닝(Don S. Browning)이 제안한 ‘근 본적 실천신학(fundamental practical theology)’의 상관관계적 방법론을 적용한다.5
5 최민수, “목회 상담에 대한 실천신학적 접근: 돈 브라우닝의 근본적 실천신학을 중심으로,” 「목회와 상 담」 12 (2009), 160-161.
브라우닝의 방법론은 일반학문과 신학적 자원을 비판적 상관성 의 원리 안에서 양방향으로 대화시키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 로 환원하지 않도록 양자 모두의 수정 가능성을 열어 두는 ‘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 circle)’을 그 원리로 삼는다.
본 연구는 이 방법론을 다음의 절차로 적용한다.
첫째, 서술적 신학 단계에서는 한국의 성과 중심 조직문 화에 노출된 성인이 경험하는 우울의 양상을 신경과학과 정신역동의 언어 로 기술한다.
둘째, 역사신학 단계에서 하나님의 형상 교리와 은총의 선행 성을 비판적으로 조명할 신학적 자원으로 활용한다.
셋째, 체계적 신학 단 계에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상관시켜 ‘존재론적 전향(ontological reorienta tion)’이라는 통합 모델을 도출한다.
넷째, 전략적 실천신학 단계에서 이 모델을 기독교 상담의 임상 및 공동체적 실천으로 구체화한다.
문헌 고찰 은 2000년 이후 발표된 신경과학·정신역동·실천신학 분야의 국내외 주요 자료를 중심으로 하되, 본 주제와 직접 관련된 주요 사상가들의 고전적 문 헌은 시기적 제한을 두지 않고 포함하였다.
다만 본 연구는 학제 간 대화 를 통한 이론적 모델의 정식화와 신학적 성찰에 집중하므로, 실제 임상 사 례 연구나 양적 검증은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Ⅱ. 성과사회 우울의 신경과학과 정신역동적 이해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본 연구의 핵심 개념인 ‘계량화된 실존’을 정의 하고자 한다.
첫째, 본 연구에서 이 개념은 한병철의 성과사회론이 진단한 자기 착취적 주체의 강박을 신경과학적·신학적 지평에서 비판적으로 재해 석하여 재정의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성과 수 치로 치환되는 심층적인 존재론적 위기 양상을 ‘계량화된 실존’이라는 개념적 렌즈로 규명하고자 한다.
둘째, ‘존재론적 우울(ontological depression)’ 은 본 연구의 임상적·실존적 분석을 담는 작업 개념이다.
본 연구에서 이 개념은 일반적인 우울장애의 임상 범주를 가리키는 진단적 명칭이 아니 라, ‘계량화된 실존’의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발생하는 자기 가치감의 근원 적 붕괴와 존재 의미의 상실을 의미한다.6
6 본 연구의 ‘존재론적 우울’ 개념은 틸리히가 The Courage to Be (1952)에서 제시한 ‘존재론적 불안(on tological anxiety)’ 개념, 특히 죄책과 정죄(guilt and condemnation)로 인한 실존적 위기 담론에 기반을 둔다. 본 연구는 이러한 현상을 성과사회의 평가 논리라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자아가 자신을 정죄하 고 소진시키는 심리적 양상으로 재해석하여 하나의 작업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단순한 정서적 침체나 기 능 저하를 넘어, “나는 무엇을 해내야만 가치 있는가?”라는 조건적 자기 수용의 논리 아래에서 자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정죄하게 되는 실존적 위기의 징후이다.
따라서 본 연구가 다루는 우울은 임상적 진단 분류의 차 원을 넘어, 성과사회의 구조적 압박 아래에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상실해 가는 실존적·신학적 차원의 우울을 가리킨다.
이 두 개념은 본 연구의 두 분석 축을 이룬다.
‘계량화된 실존’이 성과 사회의 구조적 조건을 가리킨다면, ‘존재론적 우울’은 그 조건이 인간 실존 에 체화된 결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연구의 핵심 논증은 ‘계량화된 실 존이 존재론적 우울을 산출한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어지는 Ⅱ장부터 Ⅴ장까지의 논의는 이 명제의 신경과학적·정신역동적·신학적 양 상과 그에 대한 통합적 치유의 비전을 유기적으로 다룬다.
1. 신경과학적 분석: ‘계량화된 실존’이 뇌에 남기는 상처
1) HPA 축과 코르티솔의 만성적 과잉
타락 이후 인간은 ‘가시와 엉겅퀴(창 3:18)’로 상징되는 위협이 도사리 는 세상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하는 실존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 한 불안한 세계 속에서 인간의 생존과 안전을 책임지는 최고의 신체 기관 이 바로 약 860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 뇌이다.
뇌는 외부의 위협이나 위험을 감지하면 즉각적으로 생존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 반응의 핵심 경 로가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hypothalamic-pituitary-adrenal, HPA) 축 이다.
모든 외부 자극은 먼저 시상을 거치게 되는데, 시상이 위협 신호를 감지하여 이를 시상하부로 전달하면 뇌는 즉각적으로 HPA 축을 가동한 다.
시상하부가 부신피질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CRH)을 분비하면, 이는 뇌하수체를 자극하여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를 혈류로 방출하게 한 다.7
그 결과 부신 피질에서 분비된 코르티솔은 혈당을 높이고 면역 반응 을 조절하며, 신체를 즉각적인 위기 대응 상태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일련 의 과정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기제로서, 인간이 타락한 환경 속에서 삶을 유지하며 번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물학적 차원의 은총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과 중심 사회에서 입시, 취업, 직장 내 인사 고과와 같은 일 련의 과업과 평가 요소들이 연속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스트레스원으로 작 용할 때, 뇌는 이를 단순한 압박을 넘어선 생존 위협으로 간주한다.
여기 서 주목할 점은 인간에게 평가받는 상황이 단순한 사회적 사건을 넘어 존 재 가치가 위협받는 불안한 경험으로 지각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질 적으로 자기 능력과 성취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확인받고자 하기에, 반복 되는 평가 상황을 능력의 측정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판단 받는 장으로 경 험한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의 지속적인 분비를 유도하여 알로 스타틱부하(allostatic load)를 통해 복합적인 신경생물학적 손상을 초래한 다.8
만성적 코르티솔의 분비는 전전두엽 피질의 신경세포 수상돌기 위축 을 유발하여 구조적·기능적 약화를 초래하며, 이는 주체의 실존적 통제력 상실로 이어진다.9
전전두엽의 기능 약화는 감정의 중추인 편도체를 적절 7 마리 T. 바니치 외, 『인지 신경과학』, 제3판, 김명선 외 옮김 (서울: 박학사, 2014), 384. 8 Bruce S. McEwen, “Stress, Adaptation, and Disease: Allostasis and Allostatic Load,”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840 (1998), 37-40. 알로스타틱 부하(allostatic load)는 만성적 스트레 스에 의한 신체와 뇌의 누적된 생리적 ‘마모(wear and tear)’ 현상을 말한다. 9 Bruce S. McEwen, “Physiology and Neurobiology of Stress and Adaptation: Central Role of the Brain,” Physiological Reviews 87-3 (2007), 887. 479 현상규 | 성과사회의 존재론적 우울에 대한 기독교 상담학적 함의 히 제어하는 하향식 조절 능력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 개인은 사소 한 자극에도 감정이 과도하게 증폭되어,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스스로 통 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그 개인은 외부 현실뿐만 아 니라 자기 내면조차 더 이상 안전 기지로 경험하지 못하는 심리적 불안 상 태에 놓이게 된다.
2) 해마 위축과 맥락화 능력의 붕괴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정체성의 근간이자 미래를 예측·설 계하는 인지적 원천이다.
이와 직결된 뇌의 부위가 바로 해마인데, 기억의 공고화와 경험의 맥락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성인의 뇌에서 신 경생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나는 몇 안 되는 뇌 영역 중 하나로 주목받 아 왔다.
하지만 해마는 만성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 가장 먼저 구조 적·기능적 손상을 입는 취약한 기관이기도 하다.
신경과학자 맥이웬(Bruce McEwen)의 연구는 해마 손상과 우울의 연결고리를 규명하였으며, 만성적 인 스트레스로 인한 코르티솔의 과다 분비는 해마의 수상돌기 위축과 신 경생성 억제를 통해 부피 감소를 초래한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실제로 만성 우울증 환자들의 뇌 영상에서도 일관되게 보고되고 있다.10
해마 손상이 어떻게 우울과 연관되는지는 두 가지 상호작용적 축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해마는 과거 경험을 현재와 구별하여 맥락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11
10.Ibid., 873-891.
11.Howard Eichenbaum, “Hippocampus: Cognitive Processes and Neural Representations that Under lie Declarative Memory,” Neuron 44-1 (2004), 109-120.
만약 해마의 기능이 저하되면 과거의 부정적 기억들은 시간적 맥락을 잃은 채 여과 없이 현재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게 된다.
그 결과 통합되지 못한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PTSD의 침투 기 억처럼 의식의 전면을 장악하며, 현재 상황에 투사되어 일반화된 무망감 을 고착화시킨다.12
이는 단순한 인지 왜곡을 넘어, 경험을 시간적·공간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신경생물학적 기능의 손상으로 이어진다.
둘째, 해마는 스트레스 반응이 종료되면 HPA 축을 다시 정상적인 평 형 상태로 되돌리는 음성 피드백 조절자(negative feedback regulator)로 작 동한다.
즉, 해마는 혈중 코르티솔 수치를 감지하여 시상하부에 ‘이제 위 협이 사라졌으니 긴급 방어 체계의 가동을 멈추라.’라는 억제 신호를 보내 스트레스 반응을 종료시키는 제동 장치 역할을 한다.13
하지만 해마가 손상 되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뇌는 실제 위협이 사라졌음에도 불 구하고 비상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결국 ‘코르티솔 과잉 → 해마 손상 → 피드백 실패 → 추가적 코르티솔 증가’라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진다.14
12.Ibid., 112-115.
13.Bruce S. McEwen, “Physiology and Neurobiology of Stress and Adaptation,” 874-875.
14 Ibid., 880-882.
15 Vinod Menon, “Large-scale Brain Networks and Psychopathology: A Unifying Triple Network Model,”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15-10 (2011), 483-506.
이 러한 악순환은 개인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의지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 는 무력감을 강화하며, 이에 따라 우울이라는 주관적 정서 경험은 더 고통 스럽게 느껴지고 감당하기 힘든 실존적 무게로 다가온다.
3) 불이행방식망의 기능 이상: 반추의 악순환
우울은 단일 뇌 영역의 결함이 아니라 신경망 간 연결성의 문제이며, 그 핵심에는 불이행방식망(DMN)이 있다.
본래 DMN은 외부의 과업을 수 행하지 않는 휴지기에 활성화되어, 내면을 성찰하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 드는 자기 참조적 인지를 담당한다.
건강한 뇌는 외부 과제를 수행할 때는 DMN의 활동을 억제하고 중앙집행망(central executive network, CEN)을 활 성화시키는 역상관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한다.15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DMN의 비정상적 활성화를 초래하며, 이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과도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반추 현상을 심화시켜 우울 증상을 발현시킨다.16
첫째, 성과사회에 익숙한 뇌가 존 재 증명 과업에서 실패를 지각하게 되면, 이때 주체는 DMN을 과도하게 활성화시켜 부정적인 사건에 매몰되어 자신을 반추의 악순환에 빠뜨린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라는 존재론적 자기 비하는 DMN에 지속 적인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반추의 회로를 더욱 고착시킨다.17
결 과적으로 뇌는 CEN의 활동에는 무감각해진 채, 오로지 내부의 고통스러 운 자아에만 집중한다.
이는 종교개혁가 루터가 진단한 죄의 본질, 즉 자 기 자신에게 고착된 자아(incurvatus in se)의 신경학적 발현이라 할 수 있 다.
둘째, 해소되지 않은 스트레스는 DMN과 변연계의 감정 회로를 비정 상적으로 결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과활성화된 DMN이 편도체와 기능적 연결성이 강화되면, 비판적인 사고가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 과 결합하여 내면세계를 지배하게 된다.18
이 과정에서 건강한 자아 성찰의 기능은 마비되고, 생각은 불안과 공포라는 감정적 색채로 물든다. 그 결과 ‘계량화된 실존’의 논리에 의해 자기 존재감에 상처가 난 개인은 현재 상황 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능력을 상실한 채,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 했다.”라는 파괴적인 결론에 함몰된다.
셋째,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돌출망(salience network, SN)의 기능을 교 란시켜 외부 자극과 내면 사고 간의 주의 전환을 저해하며, 이는 SN의 스 위치 역할 상실로 이어진다.19
16 J. Paul Hamilton, Madison Farmer, Phoebe Fogelman, and Ian H. Gotlib, “Depressive Rumination, the Default-Mode Network, and the Dark Matter of Clinical Neuroscience,” Biological Psychiatry 78-4 (2015), 226-228. 17. Ibid., 224-230.
18. Ibid.
19 .Menon, “Large-scale Brain Networks and Psychopathology,” 487-490.
인간은 부정적 사건의 원인을 초기에는 타인 이나 환경 등 외적 요인에서 찾으려 하지만,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결국 화 살을 돌려 자신의 결함에서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결국 고통의 원인을 자기의 결함이나 부족함으로 돌리게 된 개인은 외부 세계로부터 관심을 거두게 된다.
이때 SN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DMN의 과활성화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파괴적인 반추 속에 매몰된다.
이러한 내 적 상태에서 주체는 하나님의 은총이나 타자의 사랑이라는 외부의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자아와 연결된 내부 신호에만 매몰된 다.
이와 같은 네트워크의 불균형은 주체를 관계적·존재론적 고립으로 몰 아넣는 신경학적 핵심 기전이 된다.
4) 신경전달물질 시스템의 조절 실패: 세로토닌을 중심으로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 지속되면 신 경전달물질 시스템에도 연쇄적 손상이 일어난다.
고전적 모노아민 가설이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도파민의 결핍을 우울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해 왔다면, 오늘날에는 이를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의 복합적 상호작용 실패로 이해한다.
특히 만성 스트레스는 세로토닌 수용체 감수성을 저하시켜 사 회적 안정감과 소속감을 약화시킨다.20
20 McEwen, “Physiology and Neurobiology of Stress and Adaptation,” 882-884; Carmine M. Pariante and Stafford L. Lightman, “The HPA Axis in Major Depression: Classical Theories and New Devel opments,” Trends in Neurosciences 31-9 (2008), 464-468. 맥이웬은 이러한 만성 스트레스 노출이 세 로토닌 5-HT1A 수용체의 발현을 억제하여 뇌의 정서 조절 가소성을 저하시키는 구체적인 기전을 입 증하고, 파리안테와 라이트먼은 우울증에서 HPA 축의 피드백 메커니즘이 무너지는 과정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세로토닌 시스템의 기능 저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우울과 연결된다.
첫째, 세로토닌은 기분 조절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안정감과 소속감에 관 여하는 신경전달물질로서, 우리가 집단 내에서 느끼는 안전감과 자아 존 중감의 지표가 된다.
하지만 성과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 명해야만 하는 환경 속에 반복적으로 부정적 평가에 노출될 경우, 뇌는 세 로토닌 분비를 만성적으로 억제함으로써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 정 서 상태를 초래한다.
둘째, 정상적으로 분비된 세로토닌은 부정적 경험에 매몰되어 반추하는 일을 방지하는 생화학적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하지 만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그 기능이 저하되면 기분 침체뿐만 아 니라, ‘나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라는 부정적 도식이 활성화되어 우울을 강화한다.21
지금까지 살펴본 신경과학적 기전들은 성과사회의 평가 압박이 HPA 축 과활성화 → 해마 위축과 전전두엽 기능 저하 → 신경전달물질 조절 실 패의 연쇄로 인간의 생물학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DMN 불균형이 자기 성찰 능력마저 마비시킬 때, 우울은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인지적 무능력 상태로 고착된다.22
그러나 이 고통은 생물학적 차원에 머무 르지 않고, 성과와 효율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개인이 가치 창출의 실패 를 지각할 때 마주하는 존재론적 허무, 곧 ‘실존적 의미’를 띠게 된다.
따라 서 영혼 돌봄으로서의 기독교 상담은 대화 치료(talking cure)를 넘어 영성 과 신체를 아우르는 전인적 접근으로 나가야 한다.23
21 Hamilton et al., “Depressive Rumination, the Default-Mode Network, and the Dark Matter of Clinical Neuroscience,” 228-229.
22 Menon, “Large-scale Brain Networks and Psychopathology,” 492-495.
23 현상규, “기독교상담을 위한 신경과학의 실천적 함의,” 「신학과 실천」 77 (2021), 398-402.
2. 우울에 대한 정신역동적 이해
정신분석학 내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추동이론, 대상관계 이론, 자기심리학 등은 우울의 발생 과정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 왔 다.
본 연구에서 맥윌리엄스의 모델을 선택한 이유는 이처럼 방대하고 복 잡한 이론들을 성격 구조라는 틀 안에서 통합적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이 다.
그녀의 모델은 우울의 역동을 ‘자기 비난적’ 내사형 우울과 ‘관계 갈망 적’ 의존형 우울을 구분하여 설명함으로써, 이후 논의될 기독교의 율법주 의 왜곡과 관계적 존재론의 결핍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가교를 제공한 다.
1) 내사형 우울
맥윌리엄스가 정의한 내사형 우울(introjective depression)의 핵심은 아 동기 양육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판적 대상의 메시지를 내사하여 자신 의 일부로 삼는 내면화 과정에 있다.24
발달 단계의 아동은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전적으로 양육자에게 의존해야 하기에, 외부에서 유입되는 비판적 메시지에 저항하기보다 이를 숙명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기전은 페어베언(Ronald D. Fairbairn)이 제시한 ‘도덕적 방어(moral de fense)’ 개념으로 더욱 선명해진다.
도덕적 방어란, 아동이 양육자를 ‘나쁜 대상(bad object)’으로 인식함으로써 초래하게 될 세계의 붕괴 — 양육자 없 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원초적 공포 — 를 견디기보다, 자신을 ‘나쁜 존 재’로 받아들임으로써 양육자의 선함을 보존하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이 다.
이를 통해 “부모는 선하지만 내가 나쁘다.”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유기 불안을 해소하고, 동시에 자신이 바뀌면 부모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상의 통제력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욕구를 실현하게 된다.25
이렇게 내면화된 대상은 현실적으로 도달 불가능한 기준, ‘이상화된 자기(idealized self)’를 형성한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가혹한 자존감 체계(pride system)를 구축하고,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당 위의 폭정’ — 이상화된 자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적 명령 — 에 의해 자존감 회복을 위해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26
24 Nancy McWilliams, Psychoanalytic Diagnosis: Understanding Personality Structure in the Clinical Process, 2nd ed. (New York, NY: Guilford Press, 2011), 236-238.
25 Ronald D. Fairbairn, Psychoanalytic Studies of the Personality (London: Routledge, 1952), 65-70. 26 Karen Horney, Neurosis and Human Growth: The Struggle Toward Self-Realization (New York, NY: W. W. Norton, 1950), 64-85.
결과적으로 이상화된 자기라는 허구적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적 자기를 향해 끊임없는 혐오와 비난의 공격을 쏟아부으며,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울은 표면적 기분 저하에 머물지 않고, 자아가 자 신의 존재 가치를 근본적으로 깎아내리는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정죄’의 특성을 가진다.
내사형 우울이 비판적 내면 대상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 다면, 의존형 우울은 외부 대상의 상실 자체가 자아 붕괴의 촉발제가 된다 는 점에서 고통의 방향이 다르다.27
2) 의존형 우울
내사형 우울이 내사된 대상이 만들어 낸 이상화된 자기에 의해 자기 공격으로 발생한 것이라면, 의존형 우울(anaclitic depression)은 중요한 대 상의 사랑과 인정을 상실할 것에 대한 근원적 공포에서 기인한다.
이 유형 의 우울을 경험하는 사람은 대상의 부재나 대상의 상실이 곧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불안을 느껴, 이를 해소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 해 타인의 정서적 반응에 자신의 가치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양상을 보인 다.28
이들에게 관계의 부재는 고독의 차원을 넘어, 존재감을 지탱하는 토대 가 붕괴되는 실존적 재난으로 경험된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의 ‘나약함의 절망’ — 타자에게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하나님 앞에 선 고유 한 자기이기를 포기하는 — 은 바로 이 역동과 구조적으로 상응한다.
관계 라는 세속적 대상에 존재의 근거를 둔 자는, 그 관계가 흔들릴 때 자기 존 재 자체가 위협받는 절망에 빠진다.29
28 Ibid.
29 쇠렌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박병덕 옮김 (서울: 육문사, 2015), 122-142 참조
애착 이론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의존형 우울의 뿌리는 유아의 생존과 안정에 필요한 애착 욕구를 제공하지 못한 관계적 경험의 부재나 실패에 있다.
유아는 양육자와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내적작동모델(internal working model, IWM)을 형성하며, 이는 성인기 성격 발달의 핵심 축인 관계성(relatedness)의 토대가 된다.
특히 양육자의 민감 27 Vittorio Lingiardi et al., “The Contribution of Sidney Blatt’s Two-polarities Model to the Psychody namic Diagnostic Manual,” Research in Psychotherapy: Psychopathology, Process and Outcome 20-1 (2017), 13-15. 이 연구는 Sidney Blatt의 모델을 바탕으로 우울의 두 기제를 설명한다. 타인과의 관계 상실과 유기 불안이 핵심인 ‘의존적’ 역동과 달리, ‘내사형’ 역동은 자기 가치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자 기 정의의 실패에서 비롯된 실존적 고통임을 논증하고 있다. . 486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41집 한 반응성과 정서 조율은 외부 대상의 부재 상황에서도 그 대상을 내면에 서 소환하여 자신을 안정시키는 대상 항상성(object constancy)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조건적인 반응이 지속될 경우, 개 인은 타인과의 연결 없이는 자아를 지탱할 수 없는 취약성을 지니게 되며, 이는 성인기 의존형 우울의 핵심 기전이 된다.30
IWM은 하나의 인지 도식 이 아니라, 양육자와의 관계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 재인가’와 ‘타인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해 학습하게 된 정서와 기억의 총체로서, 대인관계의 기초가 된다.
결과적으로 불안정 애착의 IWM을 가진 개인은 관계의 상실이나 단절을 곧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너 지는 불안 신호로 경험하며, 자신의 안정과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전적 으로 의존하는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이들의 우울은 슬픔이라기보다, 내 면화된 안전 기지가 붕괴될 때 찾아오는 실존적 공포에 가깝다.31
자기심리학의 관점은 의존형 우울의 역동을 더욱 정밀하게 해명해 준 다.
코헛(Heinz Kohut)은 유아의 건강한 자기 발달을 위해 양육자의 자기 대상(selfobject) 기능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유아의 자기애적 욕 구를 정확히 읽고 되돌려주는 거울 자기대상 경험은 아이에게 자신의 내 면 상태가 실재하고 가치 있음을 확인해 주며, 이는 응집된 자기(cohesive self)를 형성하는 핵심 토대가 된다.32
30 Lingiardi et al., “The Contribution of Sidney Blatt’s Two-polarities Model,” 13-14.
31 Ibid., 14-15.
32 Heinz Kohut, The Analysis of the Self: A Systematic Approach to the Psychoanalytic Treatment of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s (New York, NY: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115-120.
그러나 거울 자기대상 경험이 반복적 으로 좌절될 경우, 아이는 자신의 내면 경험이 타인에 의해 수용될 수 없 다는 무의식적 결론에 이르게 되며, 이러한 자기 응집성의 취약함을 메우 기 위해 외부 대상으로부터의 반응과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심 리적 역동이 현대사회에서 의존형 우울을 겪는 사람들이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타인의 인정은 단순한 사회적 보상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해 주는 자기애적 자원(narcissistic supplies)으로 기능한다.33
33 Heinz Kohut, The Restoration of the Self (New York, NY: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7), 184 186.
이 두 이론의 관점을 종합하면, 의존형 우울을 경험하는 개인의 내면 에는 두 가지 상호 강화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불 안정한 내적작동모델로 인해 외부 대상 없이는 스스로를 안정시킬 수 없 다는 근원적 무력감이며, 다른 하나는 응집성의 결여로 인해 내면의 공허 감을 외부의 인정으로 채우려는 자기애적 갈망이다.
이 두 구조가 맞물릴 때, 개인은 타인으로부터의 승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면서도, 역설적 으로 그 관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중 구 속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결국 의존형 우울은 병리적 의존성의 문제가 아 니라,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 관계의 상실 앞에서 겪는 실존적 위기의 심리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정신역동적 이해는 자연스럽게 신학적 인간 이해와 접점을 이루게 된다. 특히 내사형 우울이 제기하는 율법주의적 자기 의의 문제와 의존형 우울이 노출하는 관계적 결핍의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 교리와 은 총의 선행성에 의해 조명될 때 비로소 그 존재론적 깊이를 온전히 드러낸 다.
지금까지 Ⅱ장은 성과사회의 우울이 신경생물학적·정신역동적 차원에 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규명하였다.
신경과학적으로는 HPA 축의 과활성화와 DMN의 조절 실패가 우울을 생물학적 실재로 고착시키며, 정신역동 적으로는 내사형 우울의 ‘당위의 폭정’과 의존형 우울의 ‘관계적 결핍’이 자아의 응집성을 무너뜨리는 기제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두 차원의 분석 은 우울의 임상적 양상을 기술할 뿐, 그 존재론적 의미와 회복의 방향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Ⅲ장에서는 이 임상적 양상이 기독교 신학의 인간 이해와 비판적으로 상관될 때 어떤 존재론적 깊이를 획득하 며 전향되는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Ⅲ. Imago Dei와 존재론적 가치
본 장은 앞에서 다룬 우울에 대한 신경과학적·심리학적 질문들에 대하 여 기독교 인간론의 언어로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우울의 두 유형이 각각 ‘자기 의의 율법주의’와 ‘관계적 결핍’이라는 신학적 왜곡과 어떻게 상응하는지 밝히고, ‘하나님의 형상’ 교리가 계량화된 실존의 논리 에 대해 제기하는 존재론적 반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형상과 계량화된 실존
하나님의 형상 교리는 인간의 가치가 능력이나 생산성에 의해 측정될 수 없음을 선언한다(창 1:26-28).
이 본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 조되었음을 반복하여 강조함으로써, 이 가치가 인간의 행위 이전인 존재 자체에 선행적(선험적)으로 부여된 것임을 천명한다.
역사적으로 Imago Dei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집약된다.
첫째, 구조적 해석인 데, 어거스틴(Augustinus)과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전통에서 발전 한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의 상위 능력인 ‘기억, 지성, 의지’의 삼중 구조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이 형상을 심각하게 오염시켰으나 그 본질적 구조 자체는 상실되지 않았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가치와 회복이 주체의 도덕적 성취나 자율적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만 가능함을 역설했다.34
34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심리 구조(기억·지성·의지)에 관한 인간론적 분석은 김명혁, “어거스틴의 인 간관(Imago Dei를 중심으로),” 「신학지남」 47-2 (1980), 119-122 참조; 그의 인간학이 펠라기우스주의 의 공로주의에 맞서 선행적 은총론으로 귀결되는 역동은 김영도, “기독교적 인간론: 어거스틴의 펠라 기우스주의 논쟁을 중심으로,” 「신학과 목회」 20 (2003), 129-134의 논증에 기초함.
둘째, 기능적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을 존재의 내 적 속성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역할과 사명에서 찾는다.
이러한 관점은 폰 라드(Gerhard von Rad)와 웨스터만(Claus Westermann)에 의해 대표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창세기 1장 28절의 “다스리라”는 명령에 근거 하여 인간을 창조 세계를 돌보고 관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규정한다.35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소유한 어떤 능력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대 신하여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책임적 사명으로 이해된다.
셋째, 관계적 해석은 바르트의 신학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바 르트(Karl Barth)는 인간을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 로 이해하였다.
그는 인간 존재를 정지된 실체나 독립적인 자아로 파악하 기보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 성을 발견하며, 타인과의 상호적 만남 속에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존재 이다.
특히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 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인간 존재 의 관계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독립적 실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이해되는 존재이며,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관 계성 안에서 이해하려는 현대 신학의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다.36
35 허호익, “하나님의 형상론 연구: 하나님의 형상의 삼중적 삼중 관계와 천지인의 조화,” 「한국기독교신 학논총」 24 (2002), 278-281. 이 연구는 고대 근동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지배의 유비’로 파악하며, 인간의 내적 성품보다 은총으로 부여받은 청지기적 책임 과 과제의 측면을 강조한다.
36 이재현, “다시 연결시켜 보는 칼 바르트 신학과 심리학,” 「장신논단」 45-4 (2013), 308-309. 저자는 바 르트의 인간론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강조하며, 이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설명한다고 분석한다. 또한 이승규, “칼 바르트의 새 인간(Der neue Mensch)과 살아있 는 인간(Der lebendige Mensch) 연구: 에이전시 신학적 관점에서,” 「선교와 신학」 62 (2024), 317-319. 바르트는 인간을 “주객의 상호 관계성”과 “상호 연결”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이 세 가지 해석은 저마다 강조점을 달리하지만, 어느 것도 ‘능력에 따 른 가치의 차등적 분배’를 함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궤를 같 이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한 개인의 성취나 자격에 따른 결과가 아니 라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창조의 선물’이다.
이러한 선언은 인간의 존재 가치를 오직 숫자와 효율성으로 환원하려는 현대 성과사회의 메커니즘에 대한 강력한 신학적 반론으로 확정된다.
특히 인간 내면의 조건이나 외적 역할을 넘어 관계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는 성경적 형상론은, 성과 중심 의 인과 논리에 사로잡혀 실존적 우울을 겪는 현대인들을 치유하는 결정 적인 신학적 토대로 기능한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나 성취가 아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실현된다는 통찰은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신학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는 인간의 종됨이 인간을 비하하 는 창조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존귀하게 하는 창조”임을 강조하며 성과 중심의 전도된 논리를 역전시킨다.37
틸리히(Paul Tillich) 또한 비존재의 위 협 앞에서도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의 근거를, 하나님에 의해 수용되 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존재의 용기는 수용 불가능 함에도 수용된 자신을 수용하는 용기”라고 단언하는데,38 이는 바울과 루 터의 칭의 교리를 실존적 언어로 재해석한 것이다.
37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 김균진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260. 몰트만은 인간의 종됨이 인간을 천하게 하는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존귀하게 하는 창조”임을 강조하며, 인간의 가치가 자기 능력이나 성취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실현됨을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38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52), 163-166. 틸리히의 ‘존 재의 용기’ 개념을 한국 신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로 임형모, “폴 틸리히의 존재신학에서 유한 성과 용기의 문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0 (2012), 218-219를 참조하라. 임형모는 틸리히의 존재론 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역동적인 자기 긍정”인 존재의 용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정리한다.
이러한 은총의 선행성 과 관계성은 현대인의 병리적 우울을 해체하는 대안이 된다.
즉, 완벽주의 에 시달리는 내사형 우울의 ‘조건적 자기 수용’을 타파하는 동시에, 타인의 인정에 목매는 의존형 우울의 외재적 가치를 근원적으로 전복하는 것이 다.
이 복음의 선포는 존재의 근거를 유한한 성취 밖으로, 곧 인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시는 하나님 안으로 옮기는 ‘존재론적 전향’이 일어나는 기 폭제가 된다.
이와 더불어 우울의 심연에서 이 실존적 복음을 대면하는 영 적·관계적 경험은, 이후에 제안할 통합적 치유 방향의 가장 견고한 존재론 적 근거가 된다.
2. 존재론적 전향: 율법주의와 관계적 결핍
1) 내사형 우울과 자기 의의 율법주의
내사형 우울의 핵심은 내면에 자리 잡은 가혹한 초자아가 주체의 결함 을 비난하며 심리적 형벌의 상태에 가두는 데 있다.
이러한 역동은 하나님 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는 ‘자기 의의 율법(works-righteousness)’과 구조적 유비를 이룬다.
키에르 케고르가 명명한 ‘반항적 절망’은 하나님이 정의하는 자기를 거부하고 스 스로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되려는 자아의 오만한 자기주장이다.39
이러한 자 기주장의 절망은 곧 내사형 우울의 율법주의적 구조가 실제 삶에서 구체 화된 양상이다.
이처럼 가혹한 자기 증명에 함몰되는 현대인의 우울은 결 국 ‘은총에 의한 수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실존적 절망의 이면을 보여준 다.
이때 가혹한 초자아는 ‘율법주의적 하나님 표상’의 심리적 대리물로 군 림한다.
리주토(Ana-Maria Rizzuto)의 연구에 따르면, 하나님 표상은 아동 기 양육자 경험을 통해 형성된 심리내적 구성물이며, 자기 표상 및 부모 표상의 변화와 보조를 맞추어 지속적으로 변형된다.40
39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54-168을 참조.
40 애너-마리아 리주토, 『살아있는 신의 탄생』, 이재훈 외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0), 367 368.
비판적인 양육자와 의 반복된 경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지적 개념과 ‘정죄하는 하나님’이 라는 내면적 표상 사이의 실존적 분열을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내사형 우 울의 주체는 인지적으로는 은총을 고백할지라도, 정서적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하는 내면의 폭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2) 의존형 우울과 관계적 결핍: 창조 질서에 반하는 고립
의존형 우울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관계적 존재(homo relationalis) 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각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며 서로를 통해 존재하는 상호내주(perichoresis)의 존재론적 공동성을 가르친 다.41
이러한 삼위일체적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이해에 결정적 함의를 가진다.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존재 방식은 인간 이 본질적으로 “인격적 사귐의 관계성”을 추구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42
따라서 관계의 상실과 고립이 단순한 심리적 어려움이 아니 라, 이 창조적 본성에 반하는 존재론적 고통임을 드러낸다.
이와 궤를 같 이하여,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유비’로 해 석하며, 인간이 ‘서로를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였다.43
41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 211-212.
42 신옥수, 『몰트만 신학 새롭게 읽기』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 210-212.
43 디트리히 본회퍼, 『창조와 타락: 창세기 1-3장에 대한 신학적 해석』, 강성영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2010), 85-87.
이러한 관점에서 의존형 우울의 갈망은 억압이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 간 타자라는 유한한 대상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인 안전 기지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임재’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할 창조적 본성으로 승화되어야 한 다.
지금까지 Ⅲ장은 ‘Imago Dei’ 교리와 은총의 선행성에 비추어, 내사형 우울과 의존형 우울이 각각 ‘자기 의의 율법주의’와 ‘관계적 결핍’이라는 신 학적 왜곡과 구조적 유비를 이룸을 논증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된 인간의 존재 가치는 성취가 아닌 은총에 의해 선행적으로 부여되며, 따 라서 우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은 존재의 근거를 ‘성과의 자아’에서 ‘은총의 자아’로 이전시키는 ‘존재론적 전향’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신학적 통찰 이 실존적 현실로 체득되기 위해서는, 타락 이후 인간의 보편적 조건인 ‘타 자 지향적 평가 중독’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Solitude Coram Deo)’으로 나아가는 영성적 여정이 요청된다.
이어지는 Ⅳ장에서는 이 여정의 신학적 지평과 영성적 실천을 논의하고자 한다.
Ⅳ. 통합적 치유의 방향: 존재 증명 중독에서 ‘코람 데오’로
1. 타자 지향적 평가: 타락 이후의 보편적 불안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일치된 관계, 곧 ‘코람 데오’의 자리를 떠나 는 순간, 이 본래적 존엄은 심각하게 왜곡된다.
본회퍼에 따르면, 타락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은혜로운 한계 내에 머물기를 거부하 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려는 ‘Sicut Deus (하나님과 같이 됨)’ 의 왜곡된 열망에 있으며, 이로부터 근원적 분열과 수치가 인간 실존의 기 본 양상으로 자리 잡는다.44
이 시점부터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에 안전하게 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자 율적 존재라는 무거운 과업을 짊어지게 된다.
창세기 3장에 묘사된 아담 의 수치와 고단한 노동은 이러한 실존적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45
44 앞의 책, 141-145, 154-159.
45 창세기 3:8-10, 17-19 참조. 특히 10절(“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과 19절(“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상실과 자기 노력을 통한 생존이라는 타락 이후의 실존적 조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 히 타락한 인간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린 행위는 단순히 도덕적 인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자아를 감추고 보호하려는 자 기 정당화의 시도이다.
즉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가 타자에게 노출되었으 나 그 어디에서도 긍정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존재론적 공포이다.
이처럼 존재 증명에 내몰린 삶은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타자 의 평가에 집착하는 심리적 양상으로 고착되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지 못할 수 있다는 근원적인 존재론적 불안은, 타인 의 인정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내맡기는 ‘이상화된 자기’를 형성하게 한다.
인간은 이 가공의 거짓 자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박적인 자기증 명 과업을 반복하며, 이 시도가 실패할 때 사회적 철수로 도피한다.
존슨 (Eric L. Johnson)은 이러한 현대적 은닉의 양상을 타락 이후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곧 이상화된 자기와 현실 사이에 발생한 간극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 간극이 클수록 인간은 더 큰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시달리 며, 이를 회피하기 위해 거짓 자아를 더욱 정교하게 구축하는 악순환에 빠 진다.46
46 Eric L. Johnson, Foundations for Soul Care: A Christian Psychology Proposal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7), 469-470.
이러한 분석은 성과사회의 우울이 단지 개인의 심리적 결함이 아니 라, 타락 이후 인류가 보편적으로 짊어진 존재론적 조건의 시대적 발현임 을 드러낸다.
2. ‘홀로 있는 능력’과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
위니캇(Donald Winnicott)이 제안한 ‘홀로 있는 능력(capacity to be alone)’ 은 역설적으로 건강한 타자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그에게 ‘홀로 있음’이란 단순히 외적 대상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돌봄의 경험이 내 면화됨으로써 외부 대상이 직접적으로 함께 하지 않더라도 심리적 안정이 유지되는 발달적 성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와의 정서적 조율을 통해 내면에 안전 기지를 구축하게 되 면, 인간은 비로소 외부 대상에 즉각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을 안정 시킬 수 있다.47
47 도널드 위니캇, 『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 이재훈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0), 39-46.
그러나 위니캇이 발달심리학의 차원에서 그려낸 이 ‘홀로 있음’의 능력은 신학적으로 더 깊은 차원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그 궁극적 의미에 도달한다. 성과사회에 살아가는 현대인이 참 자기를 회복하려면 그 어떤 인간적 안전 기지로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심층에서 ‘참된 타자’ 이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
위니캇의 ‘홀로 있는 능력’이 단지 유아기의 발달적 성취로 멈추지 않 고 성인기 내내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 능력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관계 적·영적 자원이 요청된다.
위니캇에게 홀로 있는 능력은 정서적 안정의 차원을 넘어, 외부의 요구나 평가에 반응하기를 멈춘 자리에서 자기만의 고 유한 충동과 표현이 솟아오르는 창조성의 원천이 된다.
즉 안전한 현존 안 에서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타자의 시선에 맞추어진 거짓 자기(false self)가 아니라 참 자기(true self)의 창조적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 다.
위니캇 자신은 이 자원을 신학적으로 규명하지 않았으나, 기독교 상담 의 관점에서 볼 때 홀로 있는 능력이 실존의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 록 지탱하는 궁극적인 힘은 ‘하나님의 항구적 임재’에 대한 신뢰이다.
인간 양육자가 제공한 안전 기지의 경험은 유한한 시간 안에서 형성되며, 양육 자의 부재나 이별로 쉽게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발 견되는 안전 기지는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며, 그 어떤 외적 상실에도 불구 하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영원한 자기대상’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기독 교 상담은 인간적 관계의 결핍을 임시방편으로 보완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모든 실존적 단절을 넘어서는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안전 기지로서 하나님을 내면화하는 작업을 핵심 과제로 삼는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성과의 논리에 의해 굳어진 ‘거짓 자기’를 내려놓고, 은총 안에서 비로소 ‘참 자기’를 발견하는 존재론적 전향의 시작 점이 된다.
이와 같은 신학적·관계적 지평 위에서 내담자는 ‘하나님 앞에 서의 고독’의 장으로 초대될 수 있다.
머튼(Thomas Merton)에게 있어 고독 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려던 ‘거짓 자기’를 벗어버리는 실 존적 탈피의 현장이다.
위니캇의 ‘홀로 있는 능력’이 내면화된 대상의 현존 을 전제로 하듯이, 머튼이 말하는 영성적 고독인 관상(contemplation) 역시 인간 존재의 근원 속에 이미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친교(commu nion)의 장이다.
이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려는 나르시시즘적 환 상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주어지는 ‘참 자기’를 수용하 는 안식과 회복의 시간이다.48
48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York: New Directions, 1961), 7-13.
이러한 관상 전통은 키팅(Thomas Keating)에 의해 현대적 실천 기법으로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이다.
관상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영성적 상태라면, 향심기도는 그 상태로 나아가도록 고안된 구조화된 방법론으로서, 키팅의 작업을 재해석한 부조(Cynthia Bourgeault)는 이를 ‘신적 치료(divine therapy)’ 의 임상적 경로로 제시한다.
부조에 따르면, 신적 치료란 향심기도를 통해 무의식에 저장된 정서적 상처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치유하는 영적 여정 이며, 이를 통해 내담자는 거짓 자기의 방어기제를 해제하고 존재의 근원 인 하나님 안에서 참 자기의 실재를 경험하게 된다.49
49 신시아 부조, 『마음의 길: 향심기도와 깨어나기』, 김지호 옮김 (경기도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17), 145-151.
지금까지 Ⅳ장은 타락 이후 인간의 ‘타자 지향적 평가 중독’으로부터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으로 나아가는 통합적 치유의 방향을 위니캇의 ‘홀 로 있는 능력’과 기독교 영성의 관상 전통을 통해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러한 신학적·영성적 방향이 실제 기독교 상담의 임상 현장에서 어떻게 구 체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논의를 요한다.
이어지는 Ⅴ장에서 는 이 통합적 치유의 비전을 기독교 상담의 구체적인 임상 실천 지침으로 구체화하고자 한다.
Ⅴ. 기독교 상담의 실천적 함의
Ⅳ장에서 제시한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이라는 영성적 치유의 방향 은, 이제 내담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통합된 임상 현장에서 구체적인 실 천 지침으로 번역될 것을 요청한다.
성과 중심 사회의 우울에 대한 치유는 ‘마음과 몸을 지닌 영혼(embodied soul)’인 인간의 전인성을 고려한 다차원 적 접근을 요구한다.50
50 Johnson, Foundations for Soul Care, 375-376. 존슨은 인간을 구성하는 신체·심리·영성의 각 층위가 ‘상호의존(interdependence)’ 관계 안에서 작동함을 논증하며, 한 차원의 회복이 다른 차원의 회복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첫째, 신경생물학적 지평에서의 회복 가능성은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는 뇌의 본래적 특성에 근거한다. 앞서 Ⅱ장 에서 살펴본 신경생물학적 손상들 — HPA 축의 과활성화, 해마의 위축, DMN의 조절 실패 — 은 고정불변의 상태가 아니라, 적절한 관계적 경험 과 영성적 실천을 통해 교정될 수 있는 가변적 회복력을 내포한다.
성인기 의 뇌 역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신경 연결망을 재구성할 수 있으며,51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단지 생물학적 결정론의 굴레에 묶어두지 않으시고, 회복과 재창조의 가능성 안에서 빚으셨다는 창조 질서의 신비를 신경생물 학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상담은 안정화에 더하여, 안전 한 치료적 관계를 통한 신경가소성의 회복을 핵심적인 목표로 삼는다.52
둘 째, 정신역동적 지평에서는 치료적 관계를 통해 가혹한 초자아를 교정하 고, 율법적 하나님 표상을 사랑과 수용의 표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셋 째, 신학적·영적 지평에서는 내담자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존재 가치 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 훈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존적으 로 수용하는 과정이 요청된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의 핵심은 치료적 관계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다.
안전한 관계가 확보될 때 내담자의 자율신경계가 안정되는데, 최근의 다미주신경이론(polyvagal theory)은 이 과정을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한 다.53
51 가자니가, 『뇌로부터의 자유』, 220-235.
52 현상규, “기독교상담을 위한 신경과학의 실천적 함의,” 388-393을 참조.
53 하주안·장은호·김미나, “실존적 불안의 신체화와 목회상담: 다미주신경이론을 중심으로,” 「한국기독 교신학논총」 140 (2026), 520-521.
이 이론에 따르면 상담자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과 따뜻한 표정, 안정 된 자세와 같은 안전 신호는 사회적 참여 체계를 담당하는 배 쪽 미주신경 을 활성화시켜 교감신경의 과활성화를 완화하며, 이렇게 형성된 생리적 안정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호흡·음성·표정이 서로 조율되는 상호조 절(co-regulation)의 토대가 되어 우울한 내담자가 흔히 경험하는 관계적 단절을 회복시키는 통로가 된다.
이 토대 위에서 심리적 성찰과 영적 수용 이 가능해진다.
결국 심리학과 신학은 우울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기위해 서로의 언어로 상응하는 회복의 방향을 가리키는 보완적 동반자이 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본 장에서는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모색해 보 고자 한다.
1. 통합적 사례 개념화: 신경-심리-영성의 삼차원 진단
기독교 상담의 첫 과제는 내담자의 고통을 신경생물학·정신역동·영성 의 세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A씨는 외국계 제약회사의 상위 영업 실적을 유지해 온 직장인이었으나, 차기 팀장 승진에서 탈락한 이후 급격한 무력감과 자기 비난에 빠져 상담실을 찾았다.54
54 본 사례는 임상 현장에서 빈번하게 관찰되는 전형적 양상들을 종합하여 연구 목적으로 구성한 가상 사례이다. 따라서 특정 실존 인물의 임상 기록이나 개인정보를 지칭하지 않으며, 기관생명윤리위원 회(IRB) 심의 승인이나 연구 동의서 취득 절차가 적용되지 않음을 밝힌다.
그녀는 “실력 이 없어서 진급도 못 하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며 잠 못 이루는 강박 적 반추를 호소했다.
신경생물학적 차원에서 그녀의 뇌는 만성 실적 압박 으로 HPA 축이 상시 가동되는 비상 상태에 있었으며, 승진 탈락이라는 사 회적 통증이 DMN을 과활성화시켜 ‘반추의 지옥’을 형성했다.
정신역동적 차원에서는 어린 시절 성적에 대해서만 조건적 애정을 보였던 부모의 목 소리가 ‘가혹한 초자아’로 내면화되어, 페어베언이 말한 도덕적 방어를 통 해 “내가 더 완벽해지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이상화된 자기를 구축했고, 승진 탈락은 ‘당위의 폭정’이 무너지는 존재론적 파국이 되었다.55
55 Horney, Neurosis and Human Growth, 21-24. 호나이는 개인이 부모의 인정 결핍으로 인한 ‘근원적 불안(basic anxiety)’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 자기(real self)’를 부정하고, 완벽함이라는 허 구적 우월성을 갖춘 ‘이상화된 자기(idealized self)’를 구축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설명한다.
신학적· 영성적 차원에서 그녀에게 하나님은 ‘실적을 감시하는 무서운 감독관’이었 으며, 자신의 승진 탈락을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망각한 채 영적 분열을 겪고 있었다.
2. 상담자의 임상적 위치: 은총을 매개하는 자기대상
기독교 상담에서 치료적 관계는 단순한 정서적 유대를 넘어, 하나님의 치유적 임재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 상 담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수용을 대리하며 내담자의 파편화된 자기를 변형시키는 ‘자기-변형적 타자(self-transforming other)’로서 기능해야 한 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불쾌한 정동에 압도될 때조차 희망과 안전의 일관 된 분위기를 제공함으로써, 내담자가 이전에 결핍된 관계에서는 누리지 못한 긍정적인 새로운 경험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관계적 토대 위 에서 내담자는 과거의 오래된 자기를 탈피하여 ‘새로운 자기와 새로운 타 자’의 구성을 이루게 된다.56
내사형 내담자를 위한 상담자의 역할은 가혹 한 초자아에 시달리는 내담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대변하는 ‘자비로운 증 인’이 되어야 한다.
이는 위니캇의 ‘안아주는 환경’을 구현하는 것이자, 로 저스가 강조한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임상적 실천이다.
베너(David Benner)에 따르면, 이러한 영혼 돌봄은 단순히 분석적인 기술을 넘어서는 것으로,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신의 비밀을 안 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57
따라서 상담자 가 비판 없이 함께 머물 때, 내담자의 내사된 비판적 부모상이 예측하는 정죄 반응은 빗나가게 되며, 이는 판단하는 하나님 표상을 긍휼의 아버지 로 재구성하는 심리내적 토대가 된다.
반면 관계적 결핍이 핵심인 의존형 내담자를 위해 상담자는 정서적 피난처인 ‘안전 기지’가 되어 주어야 한다.
이는 코헛의 ‘거울 자기대상’ 기능과 맥을 같이 하며, 내담자가 파편화된 자기에서 ‘응집된 자기’로 나아가도록 돕는다.58
56 Morton Shane, Estelle Shane, and Mary Gales, Intimate Attachments: Toward a New Self Psycholo gy (New York: Guilford Press, 1997), 5-8.
57 데이비드 베너, 『영혼 돌봄의 이해』, 전요섭, 김찬규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231-232.
58 Kohut, The Restoration of the Self, 84-98.
기독 상담자는 정서적 가 용성을 유지하되, 내담자가 궁극적 안전 기지인 하나님께 정착하도록 돕는 한시적 매개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처럼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자신 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도울 때, 내담자는 변화와 회복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내담자의 내적 구조를 변형시키는 궁극적인 기제는 해석을 통한 명제 적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체화된 정서적 경험에 있다.
즉, 상 담자와의 새로운 정서적 조율은 내담자가 과거의 부적응적 관계 패턴을 재학습하고 심리 구조를 재편하는 결정적 토대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두 인격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이 연결되고 상호 공명하는 과 정에서 발생한다.
이는 단지 심리적 차원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뇌의 서 로 다른 영역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신경생물학적 변화를 동반한다.59
결 국 상담자와 내담자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과 공감은, 신경학적 차원에서 고착되어 있던 DMN의 병리적 네트워크를 해체 및 교정하고 자아의 통합 적 회복을 이끌어내는 치유의 출발점이 된다.60
59 다니엘 시겔, 『대인관계 신경생물학 가이드북』, 이영호·강철민 옮김 (서울: 학지사, 2016), 252-255; David J. Wallin, Attachment in Psychotherapy (New York: Guilford Press, 2007), 125-126.
60 현상규, “기독교상담을 위한 신경과학의 실천적 함의,” 390-395.
이러한 변화의 토대 구축은 내담자가 수치심과 말하지 못한 상한 마음을 치료적 관계 속에서 자연스 럽게 드러내는 안전 기지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고통이 있는 그대 로 목격되고 수용되는 관계 경험을 통해, 내담자는 뇌의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여 기능적 전체를 이루는 신경학적 통합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위 축되고 초라한 자아로 구성된 부적응적 서사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안정을 확보하고 유연한 적응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3. 당위의 폭정 해체와 존재론적 전향
이제 상담자는 내담자를 우울의 고리에 매몰되게 하는 ‘당위의 폭정’에 대한 해체 작업을 수행한다. 호나이가 제창한 ‘당위의 폭정’은 율법주의적 자기 의와 구조적 유비를 이루기 때문에, 상담에서는 이를 은총의 논리로 대체하는 ‘존재론적 전향’을 지향한다.61
예를 들어 A씨의 “성과를 내야 인 정받는다”는 신념을 “이미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존재로서의 응답”으로 재 구조화한다.
이는 성취가 존재를 결정하는 인과율을 깨고, 은혜가 행위의 동기가 되는 복음적 질서를 체득하게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내담자는 이 러한 과정이 관점의 전환이라는 단순한 인지 재구조화를 넘어, 고통스러 운 감정 한가운데서 ‘수용할 수 없는 자신을 수용하는 용기’를 체득해야 한 다.62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기 비난에 빠질 때 잠시 멈추게 하고, 그 고통 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수용을 전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돕는다.
이러한 ‘머무 름’은 신경학적으로 편도체 활성화를 완화한다.
제닝스(Timothy R. Jennings) 가 보고하듯이, 사랑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대상피질 (ACC)이 발달하고 스트레스 호르몬과 심박수가 낮아진다.63
61 Horney, Neurosis and Human Growth, 64-85.
62 임경수, 『폴 틸리히의 인간이해와 기독교상담신학』 (서울: 학지사, 2018), 256-258.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를 “용납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납된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용기”라고 정의하며, 이 것이 행위가 아닌 ‘원형적인 신뢰성(primordial trust)’에 근거한 은혜의 경험임을 강조한다.
63 신경과학적 측면에 대해서는 티머시 R. 제닝스,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윤종석 옮김 (서울: 도서출 판 CUP, 2015), 69. 제닝스는 사랑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대상피질(ACC)이 더 발달하고, 스트레스 호르몬·혈압·심박수가 낮아지며 조기 사망 위험까지 감소한다고 보고한다.
이처럼 존재의 토대를 외적 성취 너머로 옮겨놓는 ‘실존적 전향’은, 본 연구가 성과사회의 우울에 대한 대안으로 도출한 핵심 신학적 명제이다.
이러한 신경학적 변 화는 단순히 심리적 안정에 머물지 않고, 내담자를 성과 중심의 자기 이해 에서 은혜 중심의 존재 이해로 전환시키는 실존적 사건이다.
4. 신경-영성적 개입: 관상기도와 이야기 치료
기독교 상담은 내담자의 영적 차원에 대한 개입을 심리적 작업과 연결 하여 수행해야 한다.
우울 상태의 뇌는 DMN의 과활성화로 인한 강박적 반추에 갇혀 있다.
기독교 상담은 이 고착된 회로를 끊기 위해 관상기도를 제안한다.
머튼에 따르면 관상은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거 짓 자기’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 는 ‘참 자기’로 나아가는 영적 각성의 과정이다.64
관상은 외부로부터 관심 을 거두고 내면의 소음을 잠재우며, 인간 정신 깊숙이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영적 고독의 시간이다.
이러한 관계적 고독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대면하며 내면의 참 자기를 만나는 경험은, 이른바 ‘좌반 구 통역사’의 자기 파괴적 서사를 중단시키는 신경-영성적 전환을 수반한 다.65
실제로 A씨의 사례와 같은 한국 성과사회에서 두드러진 우울의 전형 에 대해, 이후주는 이야기 치료의 재저작 대화(re-authoring conversations) 기법을 통해 내담자의 우울한 지배적 서사를 복음적 대안 서사로 전환하 는 것이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효과가 있음을 실증한 바 있다.66
이는 기독 교 상담이 내담자의 인지적 변화를 넘어 전인격적인 서사적 회복을 이끌 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은총의 매개자로서의 상담자는 임상 현장이 상호주관적 만남의 장이 기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내담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자기 인식이 필수적이다.
특히 상담자는 스스로 ‘구원자 환상’에 빠져 내담 자를 다시 자기 증명의 영역으로 밀어 넣지 않는지 하나님의 앞에 선 ‘단독 자’로서 자신을 부단히 점검해야 한다.
베너가 강조하듯이, 영혼을 돌보는 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학교에 있는 학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67
64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24-26.
65 가자니가, 『뇌로부터의 자유』, 126-138을 참조.
66 이후주,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치료의 재저작 대화 단일사례연구: 기독교 상담적 접근,” 「신학과 실 천」 76 (2021), 425-456.
67 베너, 『영혼 돌봄의 이해』, 231.
따라서 상담자는 내 담자의 율법적 하나님 표상이나 우울 구조를 파악하여, 내담자에게 과도 한 수행을 강요하거나 인정을 갈구하는 역전이를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이는 상담자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먼저 정화될 때, 내담자의 비밀을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는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베너의 원리와도 맥을 같이 한다.68
68 앞의 책, 232.
이러한 맥락에서 정기적인 슈퍼비 전과 영적 지도는 상담자가 ‘은총을 매개하는 자기대상’으로 기능하기 위 한 필수 자원이다.
상담자가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누리며 사랑의 학 생으로서 머물 때, 비로소 내담자에게 그 실존적 자유를 매개하는 참된 통 로가 될 수 있다.
5. 한국교회 문화의 비판적 성찰과 실천적 적용
본 연구가 제안한 기독교 상담의 실천적 함의는 한국교회 문화의 특수 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는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일부 역기능적 문화 양상—권위주의적 위계 구조, 직분 경쟁, 가시적 지표 중심 의 신앙 평가, 그리고 열심을 영성의 척도로 삼는 집단주의적 순응 압력— 은 성과사회의 메커니즘과 구조적으로 유비를 이루며, 오히려 내사형·의 존형 우울의 역동을 심화시키는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사형 우울을 겪는 신자는 ‘더 열심히 헌신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압박을 가혹한 초자아의 연장선에서 내면화하고, 의존형 우울을 겪는 신자는 교회 내 인 정과 직분에 존재 가치의 주도권을 양도함으로써 더 깊은 관계 의존의 악 순환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기독교 상담자는 단지 개인의 심리내적 역동 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내담자가 속한 공동체의 문화적 토양이 현대인 의 존재론적 우울 경험에 이바지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가 치유 자원으로 제시한 관상기도, 코람 데오 훈 련, 상담자의 자기대상 기능은 한국교회 현장의 구체적 임상 프로그램으 로 구체화될 때 그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8–12주 단위 의 ‘존재론적 전향 그룹’을 조직하여 관상기도와 자기 성찰을 결합한 워크 북 기반의 영성 훈련을 체계화하거나, 목회자 및 평신도 사역자를 위한 맞춤형 슈퍼비전 모형을 개발함으로써 교회 내 돌봄 주체들이 ‘구원자 환상’ 에서 벗어나 ‘은총의 매개자’로 기능하도록 돕는 구체적인 실천적 개입이 강력히 요청된다.
Ⅵ. 나가며
본 연구는 성과사회의 우울 경험을 신경과학·정신역동·실천신학의 통 합적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성과를 통한 자기 증명에 내몰린 현대인은 ‘당 위의 폭정’ 아래 ‘계량화된 실존’의 위기에 직면하며, 이는 신경생물학적 차원에서 DMN 과활성화와 ‘거짓 자기’의 고착으로 발현된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기독교 상담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을 넘어 근본적인 ‘존재론적 전 향’을 핵심 치유 기전으로 제시한다.
첫째, 자기 증명을 위해 구축된 거짓 자기와 그 파괴적 서사의 해체, 그리고 은총의 수용이다.
기독교 상담은 관상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좌반구 통역사의 서사 를 중단시킨다.
좌반구 통역사가 주도하는 언어적 합리화가 멈춘 정적 속 에서 내담자는 성과에 근거한 조건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수용 아래 있는 ‘참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뇌과학적으로 DMN 의 하향 조절과 주의 집중 네트워크의 재활성화를 동반하는 실질적인 신 경-영성적 변화의 과정이다.
둘째, 코람 데오를 통한 실존적 자유의 회복이다. 이는 내담자가 타인 의 평가와 사회적 기대를 의식하는 수평적 시선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수직적 시선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위니캇이 강조 한 ‘홀로 있는 능력’은 기독교 상담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친밀감 을 누리는 ‘영적 고독’으로 승화된다.
이 고독은 단순히 타자와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존재의 근원이 신 하나님이 제공하는 평안과 자유가 존재하는 ‘관계적 고독’의 장이다.
셋 째, 상담자는 은총을 매개하는 한시적 자기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단순히 상담 기법의 숙련을 넘어, 상담자 자신이 먼저 코람 데오의 자리에 서 ‘구원자 환상’과 율법적 하나님 표상을 통찰하고 재구성한 사람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할 때라야 기독상담실은 내담자가 조건 없는 수용을 전인 격적으로 체험하는 은총의 임상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상담은 ‘계량화된 실존’을 하나님의 형상과 은총의 실재로 대체하는 대화 치료를 수행한다.
관상기도를 통한 DMN 조절, 코 람 데오의 영적 고독, 상담자의 은총 매개는 우울한 영혼을 성취 중심에서 존재 중심으로 전향시키는 삼차원적 치유의 길이다.
이 치료의 여정은 하 나님의 현존 안에서 진정한 안식과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 인과 상호주관적 관계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데 있다.
성과가 존 재 가치를 규정하는 세속의 논리를 거슬러, 하나님의 은총이 존재 가치를 창조한다는 복음의 진리가 상호주관적 만남의 장인 상담실에 경험될 때, 존재 증명 과업에 내몰린 현대인은 비로소 계량화된 수치에서 벗어나 ‘하 나님의 형상’이라는 고유한 실존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본 연구는 학제 간 대화를 통한 이론적 모델 제안에 집중한 만큼, 다 음과 같은 한계와 후속 연구 과제를 지닌다.
첫째, 본 연구가 제안한 ‘신 경-심리-영성 통합 모델’은 임상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이론적 구성이므 로, 앞서 제안한 실천적 개입의 효과를 양적·질적으로 평가하는 후속 연구 가 필요하다.
둘째, 본 연구는 한국의 성과 중심 조직문화에 노출된 성인 을 일차적 연구 대상으로 삼았기에, 청소년·노년층 혹은 특수 직업군(성직 자, 의료인 등)에 대한 적용은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긴다.
셋째, 본 연구는 주로 개신교적 맥락을 전제하고 있어 가톨릭 및 동방 정교회의 관상 전통 과의 충분한 대화에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향후 교파 간 영성 자원의 비 교 연구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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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성과 중심 논리가 현대인의 우울 경 험에 초래하는 존재론적 위기를, 신경과학·정신역동·실천신학의 통합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기독교 상담학적 대안을 제시한다. 성과사회의 개인은 외부의 강제가 아닌 자기 자신의 당위적 명령에 의해 끊임없이 존재 가치 를 증명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며, 그 결과 존재의 고유성이 성과 수치로 환원되는 ‘계량화된 실존(quantified existence)’의 위기에 직면한다. 이에 본 연구는 첫째, 만성적 평가 스트레스가 HPA 축 과활성화, 해마 위축, 불이행방식망 조절 실패로 이어지는 신경생물학적 연쇄 손상을 규명한다. 둘째, 맥윌리엄스의 모델을 통해 우울을 내사형과 의존형으로 분석한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교리에 근거하여 인간의 가치가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에 의해 부여됨을 논증함으로써 양 유형의 우 울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통합적 치유로 은총을 매개하는 자기대상으 로서의 상담자, 관상기도,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Solitude Coram Deo)’을 제안하며, 기독교 상담을 성과 논리에서 은총 논리로의 존재론적 전향의 실천으로 자리매김한다.
주제어 성과사회, 계량화된 실존, 존재론적 우울, 하나님의 형상, 코람 데오
Abstract
Christian Counseling Implications for the Ontological Depression of the Achievement Society
Sangkyu Hyun(Ph.D, Associate Professor, Department of Counseling Baekseok University)
This study investigates, from an integrative perspective combining neuroscience, psychodynamic theory, and practical theology, how the performance-oriented logic dominating Korean society produces an ontological crisis manifested as contemporary depression, and proposes a Christian counseling alternative grounded in the doctrine of the Imago Dei. Drawing on Byung-Chul Han’s diagnosis of the “achievement society,” it contends that the modern subject, driven not by external authority but by self-imposed imperatives, becomes ensnared in compulsive self-justification, reducing human worth to a “quantified existence.” The study advances three arguments. First, chronic evaluative stress hyperactivates the HPA axis, causing hippocampal atrophy, DMN dysregulation, and serotonergic impairment. Second, drawing on the Blatt–McWilliams model, depression is analyzed through the dual axes of introjective (“tyranny of shoulds”) and anaclitic (failure of secure attachment) dynamics. Third, the Imago Dei doctrine offers a theological counter-logic: human worth is conferred preveniently by God’s love, reinterpreting introjective depression as works-righteousness and anaclitic depression as relational deprivation. It proposes integrative healing through three avenues: the counselor as a selfobject mediating grace, contemplative prayer, and Solitude Coram Deo, positioning Christian counseling as a praxis of ontological reorientation from performance to grace.
Keywords Achievement Society, Quantified Existence, Ontological Depression, Imago Dei, Solitude Coram Deo
접수일: 2026년 05월 09일, 심사완료일: 2026년 06월 08일, 게재확정일: 2026년 06월 13일 507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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