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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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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운요함(雲揚艦)의 조선 연안 정탐 활동과 신문보도 /박한민.동북아역사재단 Ⅰ. 머리말 Ⅱ. 운요함의 동해안 정탐 활동과 조선 지방민의 대응 Ⅲ. 3일에 걸친 강화도 일대 공격과 나가사키 복귀에 대한 일본신 문의 신속한 동향 보도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875년 9월 20일 이양선에서 내린 보트를 타고 강화도 부근에 접 근한 무리가 있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보트는 염하(鹽河)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 정부는 강화도 연안에 “해문(海門)을 방수(防守)하므로 타국의 선박은 근신하고 지나가지 말라”는 비석을 세우고 해안경계를 강화한 상황이 었다.1) ​ 1) 지금도 초지진 등에 비석이 남아 있다. 석비에 새긴 원문은 “海門防守他國船愼 勿過”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포대 근처까지 접근해 오는 선 박을 내버려 둘 수 없..
임진왜란 시기 조명 관계와 명일 교섭-나이토 조안의 조선 경유를 중심으로-/이정일. 동북아역사재단 [국문요약] 본 논문은 1593년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재개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하인 나이토 조안이 북경행 사절의 명분으로 조선을 왕래한 약 2년 6개월 간 조선 조정의 대응 및 조선과 명의 갈등 양상을 살펴본다. 조선 조정은 조안의 자국 왕래를 기존의 개별적으로 가동된 조 명 관계ㆍ조일 관계ㆍ명일 관계가 유기적으로 결부된 새로운 국제적 현상의 전개일 수 있다 는 점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먼저, 조안이 1593년 6월말 부산에서 북상하자 전쟁 발발 직 후 일본과의 대화 시도에서 체득한 절대 불신을 토대로 조안의 자국 경유 북경행 그리고 더 나아가 진행 중인 교섭 자체가 일본군의 기만술임을 명군에 알리며 그의 한성 진입을 반대했 다. 동시에 이전의 명일 간 공식 교류지 寧波를 통하지 않고 조선 ..
동학농민혁명기 재조선일본인(在朝日本人)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박맹수.원광대 1. 머리말 2. 在朝日本人 增加推移와 그 背景 3. 在朝日本人의 戰爭協力 實態와 그 性格 4. 스파이활동 事例分析 5. 맺음말 ​1. 머리말 894년 봄부터 이듬 해 봄까지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이하, 농민혁명)의 실패 요인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실패 요인 가운데서도 근대식 무기와 전술을 앞세운 일본군이 농민군 진압에 직접 가담한 것, 그리고 근대식 무기와 전술을 앞세운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이하, 농민군) 진압이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치밀한 군사 외교적 전략 아래 실행되었기 때문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일본군에 의한 농민군 진압 실상은 오랜 기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韓日 양국 연구자에 의해 그 실상이 밝혀지고 있는 중 이다.1) 그런데,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 과정..
중국인들의 한국전쟁, 『항미원조』(백지운, 창비, 2023) 서평 /한담.전남대 I. 머리말 II.중국인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III. 맺음말​​ I.머리말 2020년 항미원조 참전 70주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즉 항미원조전쟁 기억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최근 격화된 중미 패권갈등 속에 ‘대미항전(對美抗 戰)’이 강조되면서 그간 공공연한 금기처럼 여겨졌던 항미원조 기억이 해금되고 대대적인 문화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전쟁의 주적이었던 ‘미군’을 전면에 등장시킨 항미원조 영화와 드라마는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바야흐로 항 미원조전쟁 기억은 중국 대중을 ‘저항적 내셔널리즘’으로 단합시키는 문화정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냉전 시기와 다름없는 중국의 전쟁관과 이에 입각하여 제작된 영상물 은 한국의 언론 매체를 통해 속속 보도되면서, 최근 악화된 한국사회의 반..
간토(關東)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식민지 조선 당국의 대응/최은진.국사편찬위원회 I.머리말 II.조선총독부의 동향 파악과 태세 III.경찰과 법원의 정보 보고와 대응 IV. 맺음말​I.머리말​ 2023년은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1 와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100주년 이 되는 해이다. ​ 1 이 글에서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용어를 통일했다. 한국에서는 ‘관동대지 진’이란 표현이 더 익숙하나 일본에서는 ‘간토대진재’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데, 정 확히 대지진과 그로 인한 재해를 포괄하기 위해 ‘진재’ 개념을 쓰고 지명의 현지 발 음을 살려 ‘간토대진재’로 명명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진상 규명은 철저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 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도 없었다. 1923년 9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중심으로 간 토지역에 진도 7...
태평양전쟁 시기 중국국민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1944년 미국 부통령 訪中 前後 임시정부의 對美 접근 시도와 국민정부의 대응 - /배경한.신라대 Ⅰ. 머리말 Ⅱ. 월리스 부통령의 訪中과 중미관계 Ⅲ. 임시정부의 월리스 면담 시도와 비 망록 전달 Ⅳ. 국민정부의 대응: 九個準繩의 철폐 와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완화”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919년 4월 上海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인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으로 그 활동의 막을 내릴 때까지 거의 전 적으로 중국 국민당정부(국민정부)의 지원에 의존하여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임시정부와 중국 간의 관계를 다루는 그간의 많은 연구들에서 국민정부 의 “협력과 지원”을 강조해왔다. 물론 국민정부의 협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임시정부의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에서 본다면 “협력과 지원”은 엄연한 사실이 며 20세기 한중관계의 역사 가운데에서 가장 우호..
고구려인가 기자조선인가: 몽골제국에서 고려 역사상의 경합/정동훈(鄭東勳).서울교육대 문제의 소재 1. 관계 초기의 인식: 고려=고구려 2. 관방의 ‘교정된’ 인식: 고구려 대신 기자조선 3. 재야의 여전한 인식: 고려=고구려 4. 절반의 성공: 고구려에 앞서 기자조선 맺음말 ​​ 문제의 소재 1259년 겨울, 30년 항쟁 끝에 자신을 찾아온 고려의 태자, 즉 훗날의 원 종(元宗)을 만난 자리에서 쿠빌라이는 고려를 일컬어 “당(唐) 태종(太宗)이 친정(親征)하고서도 복속시키지 못한” 나라라고 하였다.1)​ 1) 고려사 권25, 元宗 원년(1260) 3월. “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즉 고려의 역사 에 관해 고구려를 언급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이 발언을 두고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쿠빌라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이 해했다.” 실제 668년에 멸..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과 극동 한인정책/李良熙.충남대 1. 머리말 2.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과 4월참변 1) 러시아혁명 직후의 시베리아 ‘出兵’ 2) 극동지역 한인과 4월참변 3. 일본군의 극동 한인정책 1) 시베리아 침략 초기 2) 4월참변 이후 4. 맺음말 ​■ 요약 1918년 4월 5일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상 륙시켰다. 8월 미국의 러시아 내 체코군 철수를 위한 공동 ‘출병’ 요청은 일제가 시베리아를 침략하는 데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에 일제는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만주 일대를 점령해 갔다. 일제의 극동지역 한인 정책은 일본 자국민보호라는 미명 아래 한인의 러시아 및 중국으로의 귀화여부 를 무시하고 이루어졌다. 이 정책은 회유와 단속으로 구분되었다. 회유는 일본 의 발전된 모습을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