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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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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이성복​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 이성복​ ​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산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시집. 남해 금산 1986 문학과지성사
다알리아/정지용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다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다알리아 시악시야. 네 살빛도 익을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 순하여다오 암사슴처럼 뛰어다녀 보아라 물오리 떠돌아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 나온 다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나오는 다알리아 ” -정지용(1902년 오늘 태어남) ‘다알리아’
진주 / 정연복 진주 / 정연복 영롱한 빛깔의 진주 하나가 생겨나기까지 조개는 긴긴 세월 묵묵히 고통을 참아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랜 시련과 슬픔의 날을 통과하며 힘겨운 그대여 그래도 끝내 절망하지 말라. 지금 너의 마음과 영혼을 몹시도 괴롭히는 그것 이윽고 빛나는 기쁨과 행복의 진주로 맺히리니.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에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릴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다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일찍이 나는/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詩) 해설, 문태준 시인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 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 그녀 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 의 살의(殺意)였다. 가장 최승자답다는 이 충격적인 일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감자꽃/박노해 박노해의 ‘감자꽃’ 감자꽃 피는 6월 무성한 감자밭 가에 앉아 깜박 졸았다 6월 한낮의 어지러운 꿈 감자꽃이 피면 감자알이 굵어진다 하얀 꽃 피면 하얀 감자로 자주 꽃 피면 자주 감자로 꽃과 뿌리가 일체인 정직한 순종의 꽃 햇살 뜨거우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알이 굵어지고 무성한 감자밭 가에 앉아 나는 6월의 순박한 꿈과 정직한 뿌리를 그리워한다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10-16
삶의 찬가/롱펠로 https://youtu.be/-DO8JBV-DEo
라일락 그늘 아래서/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읽지 못한 마지막 그/한 줄 -오세영 ‘라일락 그늘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