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 (1257) 썸네일형 리스트형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에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릴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다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일찍이 나는/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詩) 해설, 문태준 시인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 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 그녀 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 의 살의(殺意)였다. 가장 최승자답다는 이 충격적인 일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감자꽃/박노해 박노해의 ‘감자꽃’ 감자꽃 피는 6월 무성한 감자밭 가에 앉아 깜박 졸았다 6월 한낮의 어지러운 꿈 감자꽃이 피면 감자알이 굵어진다 하얀 꽃 피면 하얀 감자로 자주 꽃 피면 자주 감자로 꽃과 뿌리가 일체인 정직한 순종의 꽃 햇살 뜨거우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알이 굵어지고 무성한 감자밭 가에 앉아 나는 6월의 순박한 꿈과 정직한 뿌리를 그리워한다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10-16 삶의 찬가/롱펠로 https://youtu.be/-DO8JBV-DEo 라일락 그늘 아래서/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읽지 못한 마지막 그/한 줄 -오세영 ‘라일락 그늘 아래서’ 봄볕 /주응규 봄 강에 가랑가랑 부서지는 꽃바람이 어느 꽃나무를 하느작하느작 흔드는 봄날 첫 꽃물들인 매무새 고와라 그대 웃음 띤 청아한 모습이 햇살에 초록이 피어나네 봄볕에 흐르는 꽃향기 스미면 남몰래 눅잦히던 가슴은 볼그레 봄물이 올라 수줍게 꽃망울을 터트리네 옛 추억을 살몃살몃 들춰내는 봄 어느 봄날에 흘리던 그대 가엾은 눈물 눈물 닦으리. 기다린다는 것/이정하 ♣ 기다린다는 것 ♣ - 글 이정하 기약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쓸쓸하고 허탈한 마음을 아는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막연히 기다리는 일 밖에 없을 때 그 누군가가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을 아는가.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그 자리에 멈추고 귀를 곤두세우는 그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아는가. 끝내 그가 오지 않았을 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가슴은 속절 없이 무너지는 것인지, 온다는 기별이 없었는데도 다음에는 꼭 올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아는가. 그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에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그를 위해 마음 한 구석을 비워두는 일. 비워둔 자리만큼 고여드는 슬픔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여 .. 나무들의 약속 /김명수 ♣ 나무들의 약속 ♣ - 글 김명수 숲 속 나무들의 봄날 약속은 다같이 초록 잎을 피워내는 것 숲 속 나무들의 여름 약속은 다같이 우쭐우쭐 키가 크는 것 숲 속 나무들의 가을 약속은 다같이 곱게 곱게 단풍 드는 것 숲 속 나무들의 겨울 약속은 다같이 눈보라를 견뎌내는 것 이전 1 ··· 4 5 6 7 8 9 10 ··· 158 다음